데미안
지은이: 헤르만헤세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 이야기를 하자면, 훨씬 앞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할수만 있다면, 훨씬 더
이전으로 내 유년의 맨 처음까지, 또 아득한 나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
리라.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자기들이 하느님이라도 되듯 그 누군가의 인생사를 훤
히 내려다보고 파악하여, 하느님이 몸소 이야기하듯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이
어디서나 핵심을 집어내어 써낼 수 있는 양 굴곤 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작가
들도 그래서는 안 되듯이. 그리고 내게는 내 이야기가, 어떤 작가에게든 그의 이
야기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것은 한 인간의 이야기, 즉 그 어떤 가공의 인물, 있을 수 있는 인물, 이상적인
인물, 어떻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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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현실적이고 일회적인,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실
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혼미해
져 버렸다. 그 하나하나가 자연의 단 한번의 소중한 시도인 사람을 무더기로 쏘
아 죽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단 한번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
라면, 우리들 하나하나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도
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그러나 한 사
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
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
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
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
목할 만한 존재이다. 누구 속에서든 정신은 형상이 되고, 누구 속에서든 피조물
이 괴로워하고 있으며, 누구 속에서든 한 구세주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있다.
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
을 느끼기는 한다. 그리고 느끼는 만큼 수월하게 죽어간다. 나도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좀더 수월하게 죽게 될 것이다.
내 자신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는 감히 부를 수 없다. 나는 끊임없이 무
언가를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며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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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않는다. 내 피가 몸 속에서 소린고 있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
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들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
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
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
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
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채, 개구
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ㅇ,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은 경우도 이싸ㄷ. 그러나 무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
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
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p10
두 세계
내가 열 살이고 작은 도시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체험 하나로 내 이
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 시절로부터 짙은 향기가 밀려와, 속에서부터 아픔과 기분 좋은 전율로 마
음을 뒤흔든다. 어두운 골목들과 한한 집들, 탑들, 시계 치는 소리와 사람들 얼
굴, 편안함과 따뜻한 쾌적함으로 가득 찬 방들, 비밀과 무시무시한 유령의 공포
로 가득 찬 방들. 따듯하고 비좁은 방의 냄새, 토끼와 하녀들의 냄새, 가정 처방
약 냄새와 마른 과일 향기가 난다. 그곳에서는 두 세계가 뒤섞었다. 밤과 낮이
두 극으로부터 나왔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 세계는 협소해서 사실 그 안에는 내 부모님
밖에 없었다. 그 세계는 나도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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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고 있었다. 그 세계의 이름은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그 세계의 이름은 사
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였다. 그 세계에 속하는 것은 온화한 광채, 맑음과 ㄲ
ㅒ끗함이었다. 그 곳에는 부드럽고 다정한 이야기들, 깨끗이 닦은 손, 청결한 옷,
좋은 관습이 깃들여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침에 찬송가가 불려져싸ㄷ. 그곳에는
성탄절 잔치가 있었다. 곧바로 미래로 이어지는 곧은 선과 길이 그 세계 속에
있었다. 의무와 책임, 양심의 가책과 고해, 용서와 선한 원칙들, 사랑과 존경, 성
경 말씀과 지혜가 있었다. 인생이 말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정돈되어 있으려면
그 세계를 향해 있어야만 했다.
반면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냄새도 달랐고, 말도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 이야기들과 스캔
들이 있었다. 무시무시하고, 유혹하는, 무섭고 수수께끼 같은 물건들,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암소와 쓰러진 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었다. 아름답고도 무시무시한, 거칠고도 잔인한
그 모든 일들이 사방에, 바로 옆 골목, 바로 옆집에서 있었고 경찰 끄나풀들과
부랑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정뱅이들은 아내를 패고, 저녁 때면 젊은 여자
들의 무리가 뒤엉켜 공장에서 꾸역꾸역 나왔다. 늙은 여자들은 누군가에게 요술
을 걸거나 병이 나도록 할 수 있었다. 숲에는 도둑떼가 살고 있었다. 방화자들은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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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는 경관에게 잡혔다. 어디서나,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던 우리 집안에서만 빼
고는 어디서나 이 격렬한 두번째 세계가 솟아나오고 향기를 뿜었다. 그리고 그
것은 아주 좋았다. 여기 우리 집에 평화와 질서, 안식이 존재한다는 것, 의무와
거리낌없는 양심, 용서와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은 경이로웠다. 그리고 그 모든
다른 것들, 소란하고 요란한 것, 음침하고 폭력적인 것이 존재하며 그래도 그런
것들로부터 한 걸음이면 어머니한테로 피신할 수 있다는 것도 경이로웠다.
그리고 가장 기이했던 것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
는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었는지! 예를 들면 우리 집 하녀 리나는, 저녁 기도 때
거실 출입문 옆에 앉아, 씻은 두 손을 매끈하게 펴진 앞치마 위에 올려놓고, 밝
은 목소리로 함께 노래 부르는데, 그럴 때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들, 밝
음과 올바름에 속했다. 그후 곧바로 부엌에서 혹은 장작을 쌓아둔 광에서 내게
머리 없는 난쟁이들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푸줏한의 작은 가게에서 이웃 아낙네
들과 싸움을 벌일 때 그녀는 딴사람이었다. 다른 세계에 속했다. 비밀에 에워싸
여 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랬다. 나 자신이 가장 심하게 그랬다. 물론, 나는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했다. 나는 내 부모님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내가 눈과 귀
를 향하는 곳 어디에나 다른 것이 있었다. 나는 다른 것들 속에서도 살고 있었
다. 비록 그것이 내게는 자주 낯설고 무시무시했고, 그곳에서는 규칙적으로 야심
의 가책과 불안을 얻을지라도. 심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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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내가 가장 살고 싶어한 곳은 금지된 세계 안이었다. 그리고 밝음 속으
로의 귀환은 ^36^그것이 제아무리 필연적이고 제아무리 선하더라도^36^덜 아름
다운 거쇼, 보다 지루한 것, 보다 황량한 것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인생에서
의 내 목표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처럼 되는 것, 그렇게 밝고 맑게, 그렇게 뛰어
나고 단정하게 되는 것임을 나도 때로는 알았다. 그러나 거기까지 이르는 길은
멀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학교에서 배겨내야 하고 대학 공부를 해야 하고 온
갖 시험들을 치러야 했다. 그 길은 자꾸자꾸 또 하나의 어두운 세계 옆을 지나
거나 그 세계를 꿰뚫으며 이어져서 그 세계에 머무르고 그 안으로 가라앉아버리
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된 탕아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
런 이야기들을 나는 열정을 가지고 읽었다. 그런 이야기들에서는 아버지에게로
그리고 선함에로의 귀환은 언제나 구원이며 위대한 것으로 되어 잇었다. 어디까
지나, 그것만이 올바른 것, 선하고 소망할 만한 것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럼에도
악당들과 탕아들이 나오는 대목이 훨씬 더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고백을 해
도 된다면, 탕아가 참회를 하고 다시 받아들여지는 것이 어떤 때는그야말로 유
감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
가닥 예감이자 가능성으로, 감정이 밑바닥에 막연히 자리잡고 있었다. 악마를 상
상하면, 저 아래 길거리에 있는 모습으로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변장을 했
거나,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냈거나 가설시장ㅇ 혹은 술집에 있는 모습으로. 그
러나 결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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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는 모습으로 떠올릴 수는 없었다.
내 누이들도 똑같이 밝은 세계에 속했다. 그들은 내 눈에 본질적으로 아버지
어머니와 더 가까운 듯 보였다. 그들은 나보다 선했고, 도덕적이었고, 결함이 없
었다. 그들에게도 부족한 점과 나쁜 습관이 있었지만 그런 점들은 내 보기에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나와는 달랐다. 악과의 접촉이 자주 그토록 힘들고, 고통
스럽던, 어두운 세계에 훨씬 더 가까이 있던 나와는 같지 않았다. 누이들은 부모
님처럼 아낌받고 존중받아 마땅했다. 누이들과 다투었어도, 나중에 자신의 양심
앞에서 보면 늘 내 자신이 나쁜사람, 용서를 빌어야 할 원흉이었다. 누이들을 모
욕하는 것, 그것은 부모님을, 선함과 계율을 모욕하는 일이었다. 누이들보다는
오히려 가장 타락한 부랑아 쪽과 나눌수 있는 비밀들이 있엇다. 세상은 밝고, 양
심은 거리낌없는 기분 좋은 날이면, 그때는 누이들과 노는 것, 선하고 얌전하게
그들과 함께 하며 착하고 고귀한 겉모습의 자신을 보는 일이 유쾌했다. 천사라
면, 분명 그래야 했으리라! 천시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알았던 최고의 것이었다.
천사라는 것을 우리는 감미롭고 경이롭게 생각했다. 크리스마스나 행복처럼 밝
은 음향과 향기에 에워싸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시간들과 나날들은 오, 얼마
나 드문가? 놀이를 하며 우리에게 허용된 악의 없는 좋은 노리을 하며 나는 자
주 열정과 격함에 사로잡혔고 그것이 누이들에게는 너무 심하게 느껴져, 다툼과
불행으로 이어졌다. 그 다음에 화가 치밀면 나는 끔찍해져서 닥치는 대로 이런
저런 말과 행동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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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그것이 타락임을 그런 일들을 행하고 말하는 동안에 이미 스스로 뜨겁게
느꼍다. 그 다음에는 어둡고 격앙된 후회와 회한의 시간이 왔다. 그 다음에는 용
서를 비는 고통스러운 순간이 오고, 그 다음에야 몇 시간 혹은 몇 순간동안 다
시 한 줄기 광명의 빛줄기, 분열 없는 한 가닥 고요하고 고마운 행복이 되돌아
오는 것이었다.
나는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시장의 아들과 수석 삼림관의 아들이 우리 반에
있어 이따금씩 우리 집에 왔ㄷ. 난폭한 사내아이들이었어도 허용된 선한 세계에
속한 애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느 때 우리가 경멸하던 이웃 아이
들, 공립학교 학생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로 나는 내 이
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어느 수업 없는 오후^36^열번째 생일이 갓 지났을 때였다^36^ 나는 두 친구와
함께 집 근처를 이리저리 돌아다닉 있었다. 그때 커다란 아이가 왔다. 열세 살쯤
된 억센 사내아이, 공립학교 학생으로, 재단사의 아들이었다. 그애 아버지는 술
꾼이었으며 온 가족이 악명이 나 있었다. 프란츠 크로머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우리는 다리 옆에서 강가로 내려갔고, 첫 교각 밑에서 세상으
로부터 몸을 숨겼다. 아치형의 교각과 천천히 흐르는 강물 사이 좁은 강변은 온
통 쓰레기, 사금파리, 잡동사니 천지로, 녹슨 철사 줄이며 다른 쓰레기 뭉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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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이따금씩 쓸 만한 것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프란츠크로머의 지휘에 따
라 그 구간을 샅샅이 뒤져 우리가 찾아낸 것을 그애에게 보여야 했다. 그러면
그애는 그것을 자기 호주머니에 집어넣든지, 물에 더ㄴ져버렸다. 그애는 우리들
에게, 그 가운데 혹시 납, 구리 혹은 주석으로 된 것이 있는지 잘 살피도록 시키
고는 그런 건 모두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다. 뿔로 된 낡은 빗도 호주머니에 넣
었다. 그애와 어울려 있자니 몹시 마음이 조였다. 아버지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이런 만남을 금하시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프란츠에 대한 무서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애가 나를 받아들여 나를 다른 애들과 똑같이 취급한다는
것은 기뻤다. 그애는 명령했고, 우리는 복종했다. 그러는 것이, 처음 그애와 함께
있었건만, 마치 오래 해오던 일처럼 여겨졌다.
마침내 우리는 땅바닥에 앉았고, 프란츠는 강물에다 침을 뱉었다. 그애는 어른
처럼 보였다. 앳새로 침을 탁 뱉는데 어디든 원하는 곳을 맡췄다. 그가 애기를
시작했다. 그러자 소년들은 학생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영웅적 행동과
나쁜 짓거리들을 자랑삼아 떠벌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바
로 나의 말없음이 시선을 끌어 크로머의 노여움을 사게 도지 않을까 두려웠다.
두 친구는 처음부터 나와는 거리를 두었고 크로머편이라고 공언한 터라 나는 그
들 속의 이방인이어서, 내 옷차림이며 태도가 그애들에게 거슬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라틴어 학교 학생이며 좋은 집안 자식인 나를 크로머가 좋아할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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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엇다. 그리고 다른 두 아이는, 여차하면 내가 골탕을 먹어도 모르는 척 내버
려둘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두려운 나머지 마침내 나도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호아당무계한 도둑
이야기를 꾸며냈는데, 나를 그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모퉁이 물방앗간집 과수원
에서, 하고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 날 밤에 친구 하나와 커다란 자루 하
나 가득 사과를 훔쳤는데, 그냥 보통 사과가 아니라 전부 라이네테와 골트파르
메네, 즉 최고의 품종이었다고 했다. 순간의 위험을 피하여 나는 이 이야기로 도
피해 들어간 것이었다. 이야기를 꾸며내 들려주는 것은 나에게는 흔히 있는 일
이었던 것이다. 금방 말이 막혀 더 고약한 일에 말려드는 사태만은 벌어지지 않
도록, 나는 온갖 기교를 동원하여 이야기를 불려나갔다. 둘 중 하나가 나무에 올
라가서 사과를 밑으로 던지는 동안 다른 하나는 계속 망을 보아야 했다고 나는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자루가 어찌나 무거웠는지 마침내 ㅇ했는데,ㅂ 반 시간 뒤
에 다시 가서 그것도 마저 가져왔다고.
이야기를 다 했을 때, 나는 조금 박수를 기대했다. 마지막에는 열이 올랐다.
이야기를 꾸며내는 데에 스스로 도취되었던 것이다. 작은 두 아이는 심드렁하니
말이 없었다. 그러나 크로머는 반쯤 뜬 실눈으로 나를 쏘아보며 위협하는 목소
리로 물었다. 「그 애기 진짜야?」
「그럼」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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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진짜로 있엇던 일이야」 속으로는 겁이 나 숨이 막히는 것 같은데도
나는 고집스럽게 단언했다.
「맹세할 수 있어?」
나는 몹시 놀랐지만, 즉시 그렇다고 했다.
「그럼 말해, 하느님을 걸고 목숨을 걸고 맹세한다고!」
나는 말했다. 「하느님을 걸고 목숨을 걸고 맹세해」
「그러셔」 하더니만 그애는 몸을 돌려버렸다.
그걸로 잘 끝났다고 나는 생각했고, 그애가 곧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로
접어들자 기뻤다. 우리가 다리 위에 왔을 때, 나는 수줍게 이제 집으로 가야 한
다고 말했다.
「집에 가는 게 뭐 그리 급하냐」 프란츠가 웃엇다. 「우린 가는 길이 같잖아
」
어슬렁어슬렁 그애는 계속 걸어갔고, 나는 감히 딴데로 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애는 정말로 우리 집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 왔을 때, 우리 집 현관
문과 묵직한 구리 문 손잡이, 어머니 방의 커튼이 보였을 때 나는 깊이 숨을 내
쉬었다. 오 집으로 돌아왔구나! 오 축복받은, 선한 귀환, 집으로, 밝음 속으로, 평
화 속으로 귀환!
내가 얼른 문을 열고 살짝 빠져 들어가 등뒤로 문을 닫으려는 참에 프란츠 크
로머가 함께 밀고 들어서는 것이었다. 마당 쪽에서만 빛이 들어오는 서늘하고
침침한, 타일 깔린 복도에서 그애가 내 곁에 서서 내 팔을 붙들고 나직이 말했
다. 「그렇게 바쁘게 굴지 말아, 너!」
놀라서 나는 그애를 응시했다. 내 팔을 움켜쥔 그애의 손은 무쇠처럼 단단했
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그애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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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무슨 속셈을 가졌는지, 혹시 나를 괴롭히겠다는 것인지. 지금 내가 소리를
지른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요란하게 소리를 지른다면, 누군가가 위에서 제
때 나를 구하러 내려올 것인가? 그러나 나는 포기했다. 내가 물었다.
「워야? 어쩌겠다는 거야?」
「별 거 아니야, 너한테 그냥 뭘 좀 물어봐야겠어. 다른 사람들은 들을 필요
없고」
「그래? 좋아. 날더러 무얼 더 이야기하라는 거야? 나는 올라가야 해, 알잖아
」
「너도 알겠지」 프란츠가 나직이 말했다. 「모퉁이 물방아곁 과수원이 누구
네 것인지?」
「아니, 난 몰라, 물방앗간 주인 거겠지 뭐」
프란츠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나를 자기한테로 바싹 끌어당겼다. 이제
나는 바로 코앞에서 그애의 얼굴을 보아야만 했다. 그애의 두 눈은 사악했다. 그
애는 음흉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그 얼굴에는 잔인함과 기운이 넘쳤다.
「그렇다면, 애야, 그 과수원이 누구네 것인지는 내가 말해 주지. 난 그 집 사
과가 도둑맞았다는 걸 벌써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주인이 누가 과일을 훔쳐
갔는지 말해 주는 사람한테는 이 마르크를 주겠다고 말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
」
「맙소사!」 나는 소리쳤다. 「그래도 네가 그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하진 않겠
지?」
그애의 명예심에 호소한다는 것이 소용없는 일임을 나는 느꼈다. 그애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 배신 따위는 그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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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는 범죄가 아니었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은 우
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는 정확하게 느꼈다.
「무슨 말을 하진 아ㅎ겠지?」 크로머가 웃엇다. 「이봐 친구, 내가 직접 이
마르크 동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화폐 위조범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난
가난한 놈이야. 너처럼 부자 아버지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 이 마르크를 벌 수
있다면 벌어야지. 어쩌면 주인은 더 줄지도 모르지」
그러더니 갑자기 나를 다시 놓았다. 우리 집 현관마루에는 이제 더 이상 평화
와 안전의 냄새가 나지 않앗다. 세계가 내 주위에서 무너졌다. 그애가 떠들고 다
니겠지, 내가 죄를 지었다고. 그 말을 아버지한테도 하겠지, 어쩌면 경찰까지 오
겠지. 모든 혼돈의 공포가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모든 흉측하고 위험한 것이 일
제히 나에게 맞서고 있었다. 내가 훔치지 않았다는 것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
다. 나는 맹세까지 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하느님 맙소사!
눈물이 핑 돌았다. 매수를 해서 나를 구해야겠다고 느꼍다. 절망하여 모든 호
주머니를 뒤졌다. 사과도, 주머니칼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내 시계 생
각이 났다. 그것은 낡은 은시계였는데 가지는 않았다.<그냥 그렇게> 차고 다니
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물려주신 시계였다. 얼른 그걸 꺼냈다. 나는 말했다.
「크로머, 들어봐. 내 이름을 말해서는 안 돼. 그건 너한테도 안 좋을 거야. 내
시계를 줄게, 자 봐. 미안하지만 다른 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nb
sp;너 가져도 돼.
이거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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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내부장치도 좋아, 조금 고장나기는 했지만, 고치면 돼」
그애는 미소를 띠고 그 시계를 자기의 커다란 손 안에 넣었다. 그 손을 보며
나는 그것이 얼마나 우악스러우며 나에 대한 깊은 적개심으로 차 있는가를 느꼈
다. 그것이 내 삶과 평화를 움켜잡으려 뻗쳐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거 은이야」 나는 수줍게 말했다.
「네 고물 은시계 따위는 관심 없어!」 그는 깊은 경멸을 띠고 말했다. 「너나
고쳐 써」
「하지만 프란츠」 나는 그가 휙 가버리지 않알까 하는 두려움에 떨며 외쳤
다. 「잠깐만 기다려! 이 시계 가져! 정말 은이야, 진짜란 말이야. 그리고 난 다
른 건 아무것도 없어」
그애는 싸늘한 경멸을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알긴 아는구나. 내가 누구한테 갈 건지. 그 말을 경찰한테 할 수도
있어. 순경 아저씰 내가 잘 아니까 말이야」
그애는 가려고 몸을 돌렸다. 나는 그애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애가 그렇게 떠나면 일어나게 될 그 모든 것을 겪느니 차라리 죽
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흥분으로 목이 쉬어 내가 애걸했다.
「프란츠, 멍청한 짓 하지 마! 분명 그냥 재미로 그래보는 거지?」
「그렇고 말고, 재미로 그래보는 거지. 하지만 네가 치를 값은 비쌀 수도 있지
」
「말 좀 해줘, 프란츠,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뭐든 하
@p22
겠어!」
그는 반쯤 내리깐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다시 웃었다.
「그렇게 멍청하게 굴지 마!」 그는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너도 나처럼
훤히 알잖아. 난 이 마르크를 벌수 있어. 그리고 난 그런 돈울 내던져버릴 수 있
는 부자가 아니고 말이야. 그건 너도 알지. 그런데 넌 부자야. 시계도 있잖아. 넌
나한테 이 마르크를 주기만 하면 돼. 그럼 끝이지」
나는 그 논리를 이해했다. 그러나 이 마르크라니! 이 마르크란 나한테는 심 마
르크, 백 마르크, 천 마르크나 마찬가지로 도달할 수 없는 큰 돈이었다. 나는 돈
이 없었다. 어머니 곁에 놓아둔 저금통이 있었다. 거기에는 아저씨가 오신다든지
그럴 때 받은 몇 개의 십 페니히 혹은 오 페니히 짜리 동전이 들어 있엇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나이에는 아직 용돈은 받지 않았던 것이다.
「난 아무것도 없어」 내가 슬프게 말했다. 「난 돈이 없어. 그러나 그 밖에는
네게 뭐든 다 주겠어. 내게는 인디언 책이 있고, 병정들이 잇고, 나침반도 하나
있어. 그걸 가져다주겠어」
크로머는 다만 뻔뻔하고 심술궂게 입을 움칫하며 바닥에 침을 탁 뱉었을 뿐이
었다.
「헛소리 집어치워!」 그가 명령하듯 말했다. 「네 고물 잡동사니들은 너나 가
지고 있어. 나침반이라고! 날 더 이상 화나게 하지 말아. 잘 들어. 돈을 가져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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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난 돈이 없는 걸, 나는 돈을 받아본 적이 없어. 어떻게 할 길이 없
어!」
「내일 나한테 이 마르크를 가져오는 거야. 학교가 끝난 뒤 저 아래 시장에서
기다릴게. 그럼 끝이야. 만약 네가 돈을 안 가져오면, 알지!」
「알겠어, 하지만 대체 어디서 돈을 가져오란 말이야? 하느님 압소사, 난 돈이
없는데」
「너네 집에는 돈이 충분히 있잖아. 가져오고 안 가져오고는 네 일이지. 그럼
내일 학교 끝나고다. 말해 두ㅈ만, 만약 안 가져오면.....」 그애는 무서운 눈길로
내 눈을 쏘아보고, 또다시 침을 뱉고는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나는 계단을 올라갈 수가 없었다. 나의 이생이 산산이 부수어져 있었다. 달아
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거나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러면 어떨
지는 똑똑하게 더오르지 않았다. 어둠 속 계단 매ㄴ 아리칸에 앉았다. 한껏 웅크
리고 앉아 불행에 몸을 내맡겼다. 장작을 가지러 광주리를 들고 내려오던 리나
가 내가 울고 잇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리나에게, 위에 가서는 아무 말도 말라고 부탁하고 올라갔다. 유리문 곁
의 옷걸이에는 아버지의 모자가 걸려 있었다. 어머니의 양산도 걸려 있었다. 이
모든 물건으로부터 왈칵 고향과 애정이 나에게로 밀려왔다. 나의 마음은 뭉클하
게 그것들을 반겼다. 애원하며 감사하며, 탕아가 옛 고향의 방을 보고 냄새 맡으
며 그러듯이. 그러나 그 모든것은 이제 내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아버지
와 어머니의 ㅏㅂㄺ은 세계였으며 나는 깊이 죄 지은 채 낯선 홍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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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겨 있었다. 모험과 죄악에 얽혀들어, 적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위험, 불안,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자와 양산, 오래된 질 좋은 사암 바닥, 마루 장식장
윙 걸린 커다란 그림, 그리고 그 안쪽 거실에서부터 들려오는 누나의 목소리, 그
모든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사랑스럽고 다정하고 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위로가 아니었으며 확실한 자산도 아니었다. 온통 비난이었다. 그 모든 것
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고 나는 그러한 명랑함과 고요함에 끼어들 수가 없었
다. 나는 내 구두에다 더러움을 뭍혀왔다. 발깔개에 문질러 닦아낼 수 없는 더러
움이었다. 고향의 세계는 알지 못하는 그림자를 나는 끌고 왔던 것이다. 이제까
지 얼마나 많은 비밀과 두려움을 가졌던가.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내가 오늘 이
공간으로 끌고 온 것에 비하면 놀이이고 장난이었다. 운명이 뒤쫓아오고 있었다.
어머니가 알아서는 안 되는 손들이, 그 앞에서는 어머니도 나를 보호할 수 없는
손들이 나에게로 뻗쳐오고 있었다. 이제 내 범행이 절도였든 거짓말이었든(나는
하느님과 목숨을 걸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나의
죄악은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었다. 나의 죄악은 내가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
다는 사실 자체였다. 왜 나는 함께 갔던가? 왜 나는 일찍이 아버지 말에 귀기울
인 것보다 더 크로머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가? 왜 나는 저 도둑질 이야기를 지
어내고 영웅적 행위라도 되는 양 범행을 뽐냈을까? 이제 악마가 내 손을 잡았
다. 이제 적이 나를 뒤좇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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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 나는 더 이상 내일의 공포를 느낀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나의 길이
이제 점점 더 비탈로,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무서운 확신을 느꼈다.
나는 똑똑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나의 잘못에 이제 새로운 잘못들이 뒤이어질
게 틀림없다는 것, 누이들 곁에 내가 나타나고, 부모님께 인사하고 키스하는 것
이 거짓이라는 것, 나만이 아는 운명과 비밀 하나를 지니게 되리라는 것을.
아버지의 모자를 보자 한순간 신뢰와 희망이 내 마음속에서 번쩍 떠올랐다.
아버지께 모든 이야기를 하리라. 아버지의 판결과 아버지의 처벌을 바아들이고
아버지를 내 비밀의 공유자이자 구원자로 만들리라. 그것은 내가 자주 감내해
냈던 참회 하나에 불과하리라. 힘들고, 가혹한 시간, 힘들고 후회에 찬 용서를
구함에 불과하리라.
이런 생각은 얼마나 달콤하게 들렸던가? 얼마나 아름답게 유혹했던가! 그러나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내가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엇다. 내
가 지금 하나의 비밀을, 하나의 죄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나 혼자 스스로 삼
켜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바로 지금 갈림길에 서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이 시각부터는 영원히 나쁜 것에 소속되고, 나쁜 사람들과
비밀을 공유하고, 그들에게 종속되고, 그들에게 복종하고, 분명 그들 같은 사람
이 되리라. 잠시 어른 행세를, 영웅의 연기를 했었다. 이제 나는 그 결과를 감당
해야 했다.
내가 방으로 들어섰을 때, 아버지께서 내 젖은 구두만 보신 것이 나에게는 다
행이었다. 그것이 관심을 돌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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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는 더 나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셨다. 그 정도 비난은 견딜 만했다. 그
비난을 나는 남몰래 다른 것과 연관시켰다. 그 비난을 나는 남몰래 다른 것과
연관시켰다. 그때 마음속에서 이상하게도 새로운 느낌 하나가 불꽃처럼 번득였
다. 뽑히지 않는 미늘들이 가득 박힌 듯한 날카롭고 불길한 느낌이었다.
나는 내
가 아버지보다 우월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한순간, 아버지의 무지에 대해 약간의
경멸을 느꼈던 것이다. 젖은 장화에 대한 비난은 내게는 소소해 보였다. <아버
지가 아신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는데, 살인죄를 고백해야 되는 판에, 조그만
빵 하나를 훔친 죄로 심문을 받는 범죄자처럼 내 자신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
은 추악하고도 꺼림직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강렬했으며 깊은 매력을 지니고 있
었다. 그 느낌은 그 어떤 다른 생각보다도 더 단단하게 내 비밀과 죄에 나를 결
박하였다. 어쩌면 지금쯤 그 크로머 녀석은 벌써 경찰한테로 가서 내 이름을 댔
겠지. 천둥 번개가 이제 내 머리 위로 몰려오지.
여기까지 이야기한 이 모든 체험에서는 이 순간이 중요한 순간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내 유년 생활엘 떠받치고 있는, 그
리고 누구든 자신이 도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
다. 우리들 운명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은 아무도 보지 못한 이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칼자국과 균열은 다시 늘어난다. 그것들은 치료되고 잊혀지지
만 가장 비밀스러운 방 안에서 살아 있으며 계속 피흘린다.
그 새로운 느낌에 곧 나 자신이 무서워졌다. 나는 곧바
@p27
로 엎드려 아버지의 발에 키스라도 하여 사죄하고 싶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사죄할 수 없는 법. 어린 아이도 그쯤은 어떤 현자 못지않게 느
끼고 안다.
내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고 내일 일에 대해 이리저리 궁리해 볼 필요성
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 저녁 내내 나는 오로지 우리 거
실의 달라진 공기에 익숙해지느라 여념이 없었다. 벽시계와 테이블, 성경과 거
울, 벽에 붙은 책 선반과 그림들이, 말하자면 나에게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나
의 세게가, 행복하고 아름다운 나의 삶이 과거가 되며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나는 얼어붙는 가슴으로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빨아들이는
새 뿌리가 되어 바깥에, 어둠과 낯선 것에 닻을 내리고 붙박혀 있는 것을 감지
해야만 했다. 처음으로 나는 죽음을 맛보았다. 죽음은 쓴맛이었다. 왜냐하면 그
것은 탄생이니까, 두려운 새 삶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니까.
마침내 침대에 눕게 되었을 때 나는 기뻤다! 조금 전에 마지막 연옥의 불로서
저녁 기도가 내 몸을 휘감고 지나갔던 것이다. 거기다 노래까지 하나 불렀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의 하나였다. 아, 나는 함께 노래하지 못했다. 음 하나
하나가 나에게는 쓸개즙이자 독약이었던 것이다. 나는 함께 기도하지 않았다. 아
버지가 축복을 내리며 「저희 모두와 함께 하소서!」 하고 끝내실 때, 그때 내
몸을 스쳐간 경련이 나를 단번에 이 테두리에서 몰아냈다. 하느님의 은총이 식
구들 모두와 함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와 함께 있지는 않았다. 몹시 지쳐 떨
며 나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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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내가 누워 있었던 침대 속에서, 따뜻함과 안정감이 다정하게 나를 감
쌌을 때, 나의 마음은 다시 불안 속을 헤매었고, 지나간 일 주위를 불안하게 퍼
덕였다. 어머니는 ㄴ내게 늘 그러듯이 잘 자라는 말을 했다. 어머니 발소리의 여
운이 아직 방안에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들고 계신 촛불 빛이 아직 문 틈에서
빛나고 있었다. 지금, 지금 어머니가 다시 한 번 되돌아오시면^36^어머니는 느끼
신 것이다. 나에게 입맞춤을 하시며, 물으시겠지. 너그럽게 희망을 주시며 물으
시겠지. 그러면 나는 울겠지. 그러면 내 목에 걸린 돌덩이가 녹겠지. 그러면 나
는 어머니를 껴안고 어머니께 말하겠지. 그러면 만사는 해결인데, 그러면 구원인
데! 문 틈이 다시 어두워지고 나서도 또 한동안 나는 귀기울이며 생각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 꼭 일어나리라고.
그 다음 나는 당면 문제로 되돌아와 나의 적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는 실눈을 하고 있었고 입가에는 야비한 웃음이 감돌았다.
그리고 내가 그를 바라보며 피할 수 없는 일을 속으로 삼킴에 따라 그는 더 커
지고 더 추해졌다. 그의 사악한 눈은 악마처럼 번득였다. 그는 내가 잠들 때까지
바짝 내 곁에 있었다. 그러나 잠든 다음 그의 꿈을 꾸지는 않았다. 오늘에 대해
서도 꿈꾸지 않았다. 꿈에 보인 것은, 우리가, 부모님과 누이들과 내가 한 배를
타고 가는데 온통 휴일의 평화와 광채가 우리를 에워싸는 것이었다. 한밤중에
깨었는데, 그때까지도 그 행복의 뒷맛이 느껴졌고, 누이들의 힌 여름옷이 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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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에서 빛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모든 낙원으로부터 다시
현실 속으로 떨어져 들어갔고, 다시 나는 사악한 눈을 가진 적과 마주 서 있었
다.
아침에, 어머니가 급히 오셔서, 벌써 늦었다고 왜 아직도 잠자리에 누워 있느
냐고 소리치셨을 때, 나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가 어디 아프냐고 물으시
자 토하고 말았다.
토하고 나니까 좀 나았다. 나는 몸이 약간 아플 때 아침 내내 카밀레 찻잔을
곁에 놓고 누워, 옆방에서 어머니가 방을 치우는 소리, 리나가 바깥 복도에서 고
기 팔러 온 사람과 주고받는 말을 듣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학교에 가지 않는
오전은 무언가 마력적이고 동화적인 것이었다. 그럴 때 햇살은 방 안으로 어른
어른 장난치듯 비쳐들었는데 학교에서 초록 커튼을 따라 떨어졌던 그 햇살이 아
니었다. 그런데 그것까지도 오늘은 맛나지 않았으며 다른 음조를 띠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그러나 나는 이미 자주 그랬던 만큼 단지 조금 몸
이 아플 뿐이었고, 그 정도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 정도는 학교 가는 일
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기는 했지만, 결코, 열한시에 시장에서 나를 기다릴 크로
머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지는 못했다. 어머니의 다정함도 이번에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귀찮고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나는 곧 다시 잠든 척하며 곰곰이 생각했
다. 아무것도 소용 없었다. 열한시에는 시장에 가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열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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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했다. 그런 경우에는 대개, 다시 잠자리로 가거나 아니면 오후에 학교로
가야 했다. 나는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 계획을 하나 짜놓았던 것이다.
돈을 안 가지고 크로머한테로 갈 수는 없었다. 내 작은 저금통을 가져와야 했
다. 충분한 돈이 들어 있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그래
도 얼마는 되었다. 빈 손보다는 조금이라도 들고 가는 것이 나으며 적어도 크로
머를 달래기는 할 게 틀림없다고 직감으로 느꼈다.
양말바람으로 살금살금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 어머니 책상에서 내 저금통을
집어들었을 때는 깁ㄴ이 나빴다. 그러나 어제 일처럼 나쁘지는 않았다. 가슴이
뛰어 숨이 막혔다. 계단 아래에 와서야 비로소 저금통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
을 때도 여전히 가슴은 뛰고 있었다. 저금통을 깨뜨려 여는 것은 아주 쉬웠다.
얇은 양은 막대 ㅏ나만 두 동강 내면 되었다. 그러나 부서진 자리를 보니 마음
이 아팠다. 그것으로 나는 비로소 도둑질을 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다만 사
탕이나 과일 같은 주전부리에 입을 댔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비록 내 자신
의 돈이지만 훔친 것이었다. 나는 크로머와 그의 세계에 다시 한 발자국 더 다
가갔으며 이제부터는 일이 그렇게 시시각각 보기좋게 내리막으로 가리라는 것을
느꼈고, 거기에 저항했다. 그러나 악마가 데려간다 하더라도 이제 되돌아갈 길은
없었다. 나는 걱정스레 돈을 헤아렸다. 저금통 안에서는 그렇게 가득한 소리를
냈는데 손 안ㅇ 쥐고보니 비참하게도 얼마 안되는 액수였다. 육심오 페니히였다.
나는 저금통을 아래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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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밑에 감추고 돈은 손에 꼭 쥐고 집을 나섰다. 내가 이 문을 지났던 그
어느 때와도 다르게. 위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부르는 것만 같았다. 얼른
그 자리를 떠났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달라진 도시의 골목들을 지나, 본적 없는 구름 아래로,
나를 유심히 바로보는 집들을 지나 나에게 혐의를 두는 사람들을 지나쳐, 살짝
돌아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도중에 학교 급우 하나가 가축시장에서 일 달러를
주웠던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이루어
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도할 권리가 없었다. 설령
그럴 권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저금통이 다시 온전해지지는 않았으리라.
프란츠 크로머는 멀리서 나를 알아보았다. 그렇지만 아주 천천히 나에게 다가
왔고, 나를 눈여겨보지 않는 듯 굴었다. 가까이 왔을 때 그애는 자기를 따라오라
고 명령하는 눈짓을 하고는, 단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유유히 계속 갔다. 슈트
로 가세(Gasse, 골목)를 따라 내려가 좁은 판자 다리를 지나, 마침내 집들이 끝
나는 곳에서 공사중인 어느 건물 앞에 멈추었다. 그곳에서는 작업을 하지 않았
다. 벽들이 문도 창문도 없이 앙상하게 서 있었다. 크로머는 나를 돌아다보더니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뒤따라 들어갔다. 그애는 벽 뒤로 가더니 자기한테로 오
라는 눈짓을 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거 갖고 왔지?」 그애가 싸늘하게 물었다.
나는 주먹을 꼭 쥔 손을 주머니에서 빼서 그애의 펼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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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에 돈을 쏟아 놓았다. 그애가 헤아렸다. 마지막 오페이히짜리의 챙그랑
소리가 잦기도 전에 「육십오 페니히로군」하며 그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나는 수줍게 말했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야, 너무 적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이게 전부야. 더는 없어」
「네가 좀더 똑똑한 앤줄 알았는데」 그애는 거의 온화한 어조로 비난했다.
「명예를 아는 남자들 사이에는 질서가 있어야지. 난 정당하지 않은 건 아무것
도 가지지 않겠어, 그건 너도 알겠지. 네 쇠붙이들은 도로 가져가, 자! 딴데 가면
에누리 없이 몽땅 받을 수 있어」
「하지만 난 없어, 더는 없다구! 이건 내 저금을 통째로 가지고 온 거야」
「그거야 네 사정이지. 널 불행하게 만들 생각은 없어. 넌 나한테 아직 일 마
르크 삼십오 페니히 빚이 있어. 언제 내가 그걸 받지?」
「오, 반드시 줄게, 크로머! 지금은 모르지만^36^어쩌면 곧 더 생길 거야, 내일
아니면 모레. 내가 이 일을 우리 아버지한테 말할 수 없다는 건 이해하겠지」
「그건 나하고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너한테 손해 끼칠 생각 없다고 했잖아.
난 내 몫의 돈을 오늘 오전중에 가질 수도 있어, 너도 알겠지, 난 가난하거든.
너 ㄴ멋진 옷을 입고 있고, 나보다는 점심으로 뭔가 더 좋은 걸 먹겠지. 하지만
난 아무 말 않겠어. 조금 기다려주겠다는 거야. 모레 휘파람을 불지, 오후에. 그
땐
제대로 가져와야 해. 내 휘파람 소리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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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앞에서 휘파람을 불어보였다. 여러 번 들었던 소리였다. 나는 말했다.
「응, 알고 있어」
나를 남겨두고 그애는 갔다. 내가 자기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듯이. 그것은
우리들 사이의 거래였을 뿐, 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갑자기 다시 들린다면, 오늘일지라도 나는 놀라리라
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자주 그 소리를 들었으며 지금도 그 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 같다. 나를 예속시킨, 이제 나의 운명이 되어버린 이 휘파람 소리가 뚫고 들
어가지 않는 장소도, 놀이도, 일도, 생각도 없었다. 단풍이 곱던 어느 온화한 가
을날 나는 내가 아주 좋아한 우리 집 작은 화단에 있곤 했다. 특별한 충동이 나
로 하여금, 어린 시절의 소년들의 놀이를 다시 해보게 했다. 나는 얼마만큼은 나
보다 어린, 아직 선하고 자유롭고 죄없고 안정감 있는 소년의 역을 했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로, 늘 예상하고 있음에도 늘 놀라게 하는 크로머의 후파람 소리가
그 어딘가로부터 울려와, 줄을 탁 끊었고, 상상들을 짓부수었다. 그러면 나는 가
야 했다. 나쁘고 추한 곳들로 나의 고문자를 따라가야 했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아야 했고, 돈 때문에 경고를 받아야 했다. 그 모든 것이 불과 몇 주일 지
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여러 해처럼, 하나의 영원처럼 느껴졌
다. 내게 돈이 있는 적은 드물었다. 기껏해야 오 페니히짜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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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혹은 십 페니히 하나가 있었다. 리나가 장바구니를 놔두면 부엌 식탁에서
훔진 것이었다. 번번히 나는 크로머로부터 욕을 먹었다. 내게로 경멸이 퍼부어졌
다. 그를 기만하고 그의 당당한 권리를 유보하려 한 것이 나였고, 그의 몫을 가
로챈 것이 나였고, 그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 나였다. 괴로움이 그렇게 심장 가까
이로 치솟은 적은 살면서 거의 없었다. 더 큰 절망, 더 큰 예속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저금통은 장난감 돈으로 채워 다시 제자리에 놓아두었는데 아무도 그것에 대
하여 묻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이든 발각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자주 크
로머의 거친 휘파람 소리 이상으로 어머니를 무서워했다. 어머니께서 나직이 내
게로 다가서실 때면, 저금통에 대해서 물어보시기 위하여 오신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내가 여러 번 돈을 못 구한 채 내 악마에게 갔기 때문에, 그는 나를 다른 식
으로 괴롭히고 이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위해 일해야만 했다. 그애는 자기
아버지 심부름을 해야 했는데 그 심부름을 그애를 대신하여 내가 해야했다. 혹
은 그애는 나에게 무언가 힘든 것을 하도록 시켰다. 십 분 동안 외발뛰기를 하
게 한다든지 지나가는 사람 저고리에 종이 쪽지를 붙이게 한다든지. 여러 날 밤
꿈속에서도 이 괴로움은 계속되어 나는 악몽의 땀에 흠뻑 젖어 누워 있곤 했다.
한동안 아팠다. 자주 토했고, 쉽게 오한이 났으며, 밤에는 땀과 열에 젖어 누
워 있었다. 어머니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느끼셨는지 많은 관심을 보이셨
는데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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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괴롭혔다. 어머니의 관심에 신뢰로 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저녁에. 내가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때, 어머니가 초콜릿 하나를 가져
오셨다. 저녁에, 그날 하루를 착하게 보냈으면 잘 자라고 상으로 그런 위로의 주
전부리를 받곤 하던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는 일이었다. 이제 어머니가 거기 서
서 나에게 초콜릿 조각을 내밀고 계셨다. 나는 어찌나 괴로운지, 다만 고개를 가
로 저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물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
으셨다. 나는 간신히 「아니오! 아니오! 아무것도 먹지 않겠어요!」라고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어머니는 초콜릿을 침대머리 탁자에 놓고 가셨다. 다음날 어머니
께서 그일을 두고 캐물으려 하셨을 때 나는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
다. 한번은 의사를 데려오셨다. 의사는 나를 친찰하고 아침에 차가운 물로 몸을
씻도록 처방을 내렸다.
그 시절 내 상태는 일종의 착란이었다. 우리 집안의 정돈된 평화의 한가운데
서 나는 소심하게, 그리고 고통받으며 유령처럼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생
활에 관여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자신을 잊는 일은 드물었다. 자주 흥분하여
해명을 요구하시는 아버지에게는 마음을 닫고 냉정했다.
@p 36
카인
구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쪽에서 왔다.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의 삶
안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계속 작용하고 있다.
우리 라틴어 학교에는 그 얼마 전에 학생이 한 명 새로 들어왔다. 우리 도시
로 이사온 어는 유복한 미망인의 아들로, 옷소매에 검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
는 나보다 한 학년 높았으며 나이도 몇 살 더 들었지만, 곧 모든 학생들처럼 나
도 그를 주목했다. 이 이상한 학생은 보기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든 것 같았고, 그
누구에게도 소년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어른처럼, 아니 그냥 어른이라기보
다는 신사처럼 낯설고도 성숙하게 우리 유치한 소년들 사이를 오갔다. 인기 있
지는 않았다. 놀이에 끼지 않았고 싸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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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더더욱 끼지 않았다. 다만 선생님들에게 맞서는 그의 자신감 있고 단호
한 어조가 다른 학생들 마음에 들었다. 이름은 막스 데미안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간혹 그러듯. 무슨 이유에선가 매우 넓은 우리 교실에 또
한 반이 들어와 앉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데미안네 반이었다. 우리 어린 학생들
은 성경 이야기 시간이었고, 큰 학생들은 작문을 해야 했다. 우리들이 카인과 아
벨의 역사를 배우는 동안, 나는 독특하게 나를 매료시키는 데미안의 얼굴을 자
주 건너다보았다. 그 총명하고, 환하고, 엄청나게 단호한 얼굴이 작문 과제 위로
주의 깊고도 명민하게 숙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전혀 숙제를 하고 잇는
학생처럼 보이지않고, 자기 자신의 문제들에 전념하고 있는 연구자 같았다. 사실
호감이 가지는 않았다. 반대로 왠지 거부감을 주었다. 그는 나보다 우월하고 침
착했다. 그 본질에 있어서 너무나도 도전적일 만큼 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의 눈은 아이들이 결코 좋아하지 않는 어른이 표정을 띠고 있었는데, 약간 슬픈
냉소를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를 줄곧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호감을
주었던 것 같기도 하고 반감을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 번은 그가 내 쪽으로
눈길을 들었는데 나는 놀라서 얼른 눈길을 돌렸다. 지금 와서 그가 학생으로서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생가해 보면 나는 말할 수 있다. 그는 어느 점에서 다른
학생들과 달랐으며 전적으로 특별하고 개인적 특징이 뚜렸하게 나타나 있어 그
때문에 눈에 띄었다고. 동시에 그는 눈에 띄지 않으려고 온갖 노
@p 38
력을 했다. 몸가짐이 마치 농부들 가운데 있으면서 그들과 같아보이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 변장한 왕자님 같았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그가 내 뒤에서 왔다. 다른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
지고 나자. 나를 따라잡더니 인사를 했다. 이 인사도, 그가 학생다운 말투를 따
라했는데도, 무척 어른스럽고 공손했다.
「잠깐 같이 갈까?」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아첨을 받은 듯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가 어디 사는지 자세히 말해 주었다.
「아, 거기구나?」그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집은 내가 벌써 아는 걸. 현
관문 위에 붙여놓은 기묘한 것이 곧바로 내 관심을 끌더라」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나는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우리 집을 나보
다 더 잘 아는 것 같아 놀라울 뿐이었다. 아마도 대문 위 아치형의 돌림 띠를
마무리하는, 맨꼭대기에 박힌 돌로 된 일종의 문장(紋章)을 말한 것 같았는데,
그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편편해지고 페인트로 자주 덧칠된 것으로 우리나 우리
가문과는, 내가 아는 한에서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데」내가 수줍게 말했다. 「그건 새이거나 뭐
그 비슷한 거야, 분명 아주 오래되었어. 건물이 예전에 한때 수도원의 일부였대
」
「그럴 수도 있겠군」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잘봐! 그런 것들은 대부분
아주 재미있단다. 그건 매 암놈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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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계속 걸었다. 나는 몹시 당황해하고 있었다. 갑자기 데미안이 웃었다.
마치 뭔가 재미나는 것이 떠오르기라도 한 듯.
「그래, 내가 그때 너희 반에 있었지」그가 활기 있게 이야기 했다. 「이마에
표적을 단 카인의 아야기였지, 그렇지? 그 이야기 마음에 들었니?」
아니었다, 우리가 배워야 했던 것들 중 그 무엇도 내 마음에 드는 일은 드물
었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마치 어른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
았던 것이다. 그 이야기가 썩 마음에 든다고 나는 말했다.
데미안이 내 어깨를 툭툭 두르렸다.
「나한테는 그럴듯하게 꾸며댈 필요 없단다, 얘야. 하지만 그 이야기는 정말로
특이해. 그 이야기는 수업시간에 나오는 대부분의 다른 이야기들보다는 훨씬 특
이해. 선생님은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시지 않고, 그냥 신과 죄악에 대한
다들 아는 이야기 따위만 하셨어. 그렇지만 내 생각으로는 말이야」그가 말을
끊고, 미소를 띠더니 물었다. 「그런데 너 이런 거 관심 있니?」
「그래, 그러니까 내 생각으로는 말이야」그가 계속했다. 「카인에 관한 이야
기를 완전히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어. 우리가 배우는 대부분의 것들은 분명 완
전히 진실이고 올바른 것이지만, 그것들 모두를 선생님들이 보시는 것과는 다르
게 볼 수도 있어. 그러면 대체로 훨씬 나은 뜻을 갖게 되지. 예를 들면 카인이나
그의 이마에 찍힌 표적에, 우리가 설명 들은 대로 만족할 수는 없잖니. 너도 그
런 것 같지 않니? 어떤 사람이 싸우다가 자기 형제를 때려죽이는 일은 분명 일
어날 수 있어. 그리고 그 사람이 나중에는 더럭 겁이 나 굴복하게 된다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그러나 그의 비겁함에 대하여 일부러 훈장을 주어 표창하
였는데 그 훈장이 그를 보호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겁을 준다니, 그거 정말
이상하잖니」
「물론이야」내가 흥미있게 말했다. 그 일이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던 것이
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어떻게 다르게 설명하라는 거지?」
그는 내 어깨를 쳤다.
「아주 간단해! 맨 처음에 존재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낸 것, 그건 표적이야. 어
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얼굴에, 다른 사람들을 겁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
어. 사람들은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했어. 그가 그들을 압도했던 거야, 그와 그
의 자손들이. 어쩌면, 아니면 분명히, 그것은 편지에 찍히는 소인처럼 정말로 이
마에 찍힌 표적은 아니었을 거야. 사람 사는 데 그렇게 단순한 일은 드물어. 오
히려 그건 뭔가 거의 알아볼 수 없는 무시무시하 그 무엇이었을 거야. 그것은
오히려 시선에 담긴 비범한 정신과 담력이었을 거야. 그 남자에게는 힘이 있었
고 사람들은 그를 겁냈어. 그는〈표적〉하나를 가지고 있었어. 그리고 〈사람들
〉은 언제나 자기들한테 편하고 자기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원하지. 사람들은
카인의 자손들이 무서웠어. 그들은 〈표적〉하나를 기지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표적을, 그것의 원래 모습인 우월함에 대한 표창으로 설명하지 않
고, 반대로 설명한 거야. 사람들은 말했지, 이 표적을 가진 녀석들은 무시무시하
다고, 또 그들이 실제로 그렇기도 해어. 용기와 나름의 개성이 있는 사람들은 다
른 사람들한테 늘 몹시 무시무시하거든. 겁없고 무시무시한 족속 하나가 돌아다
닌다는 것은 몹시 불편한 일이었지. 그래서 이제 이 족속에게 별명 하나와 우화
하나를 덧붙여놓은 거야. 복수하려고, 견뎌낸 무서움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약
간 해롭지 않게 억제해 두기 위해서. 이해되니?」
「응. 그러니까 카인은 그럼 전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단 말인 거야? 성경에
있는 모든 이야기가 실제로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그렇게 오래된, 해묵은 이야기들은 늘 사실이
야. 그러나 언제나 사실대로 기록되어 있지도 않고, 언제나 사실대로 설명되지도
않지. 간단히 말해서, 내 생각은, 카인은 늠름한 젊은이였는데 그저 사람들이 그
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그에게 이 이야기를 매달아놓은 거라는 거지. 이야기는
그냥 하나의 소문이었어. 사람들이 온 사방에 떠들고 다니는 그런 무엇이었지.
그러나 카인과 그 자손들이 정말로 일종의 〈표적〉을 지녔고 대부분의 사람들
과는 달랐다는 것은 완전히 사실이야」야
나는 몹시 놀랐다.
「그렇다면, 동생을 쳐죽인 일도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나는
충격을 받아 물었다.
「아니지! 죽인 건 분명 사실이야. 강한 사람이 약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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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 하나를 쳐죽였어. 그것이 정말 자기 형제였는지 그거야 의심할 여지가 있
지. 정말 형제였는지 아니였는지는 중요하진 않아. 결국 모든 인간이 형제잖니.
그러니까 어떤 강한 사람이 어떤 약한 사람 하나를 때려죽인 거야. 어쩌면 그건
영웅적 행위였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 어쨌든 다른 약한 사람들
이 이제 잔뜩 겁이 난 거야. 그들은 몹시 탄식을 했지. 그런데<왜 너희들도 그
사람을 그냥 쳐죽이지 않는 거지>라고 누가 물으면 그들은 <우리가 겁쟁이이기
때문이죠>라고 말하지 않고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표적을 가지고 있거든요.
하느님이 그에게 그려주신 겁니다!>라고 말했지. 대략 그런 식으로 그 사기는
이루어졌을 게 틀림없어. 자야, 내가 널 오래 붙들고 있구나 그럼 안녕!」
그는 나를 내버려두고 알트 가세로 접어들었고, 혼자 남은 나는 그 어느 때보
다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그가 가버리자마자 내게는 그가 했던 모든 말이 터무
니없어 보였다! 카인이 고귀한 인간이고, 아벨이 비겁자라구! 카인의 표적이 표
창이라구! 그건 어처구니없는 얘기였다. 신성모독이고 극악무도였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디 가버리신거야?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던가, 아벨을
사랑하시지 않았던가?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리하여 나는 데미안이 나
를 놀렸으며 나늘 골탕먹일 속셈이었다고 추측했다. 실로 빌어먹게 영리한 녀석
이었다. 말은 잘도 추측했다. 실로 빌어먹게 영리한 녀석이었다. 말은 잘도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 아니다....
어쨌든 나는 아직 한 번도 그 어떤 성서 이야기나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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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대해 그렇게 많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래전부터 한 번도, 저녁
내내 여러 시간을, 프란츠 크로머를 그렇게 완전히 잊어버린 적은 없었다. 집에
서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통독했다. 성경에 써 있는 그 이야기는 짧고 분명했
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남모른는 특별한 풀이를 해본 다는 건 완전히 미친 짓
이었다. 데미안의 말대로 라면 사람을 쳐죽인 자도 스스로를 하느님이 사랑하시
는 사람이라고 선언할 수도 있었다! 아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데
미안이 그이야기를 하는 태도가 세련되었을 따름이었다. 마치 모든 것이 자명한
일이나 되듯 그렇게 쉽고 멋지게, 그리고 거기다 그런 눈으로 말하다니!
물론 나 자신도 아주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심지어 몹시 혼란에 빠져 있
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 밝고 깨끗한 세계에서 살아왔다. 나 자신이 일종의 아벨
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이토록 깊이 <다른> 것에 박혀 있었다. 이렇게 심하
게 떨어지고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이런 것에
그렇게 찬성할 수 없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 그때 마음
속에서 기억 하나가 번쩍 떠올라, 한순간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 비참한 이 상
황이 시직되었던 저 고약한 저녁, 그때 나는 한 순간 아버지와 아버지의 밝은
세계 그리고 지혜를 문득 꿰뚫어본 듯 경멸했다! 그렇다, 그때 나는 카인이었
고, 그의 표적을 달았던 나는 이 표적은 치욕이 아니라고, 이건 표창이라고 함부
로 상상했다. 악의와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내가 우리 아버지보다 더 높은 곳에,
선하고 경건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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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서 있다고.
내가 당시 이렇게 명확한 사고의 형태로 그 일을 체험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러나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다만 느낌들이 한 번 타오
른 것일 뿐이었다. 아픔을 주지만 그래도 나를 자랑으로 채웠던 기이한 움직임
들에 의하여 온갖 느낌드링 한꺼번에 타오른 것일 뿐이었다.
찬찬히 생각해 보면―얼마나 이상하게 데미안은 겁없는 사람들과 비겁한 사람
들에 대하여 이야기 했던가! 얼마나 기이하게 그는 카인의 이마에 찍힌 표적을
풀이했던가! 그때 그의 눈, 그 독특한 어른의 눈은 얼마나 놀랍게 빛을 뿜었던
가! 그리고 어렴풋하게 이런 생각이 나의 뇌리를 꿰뚫고 갔다. 그 자신이, 데미
안이 카인 같은 존제가 아닐까? 그 자신이 그와 비슷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왜 그는 카인을 옹호했을까? 왜 그의 눈에는 그런 힘이 있는 걸까? 왜 그는 그
렇게 <다른> 사람들, 겁 많은 사람들, 사실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경건한 사람
들에 대하여 비웃음을 띠고 말했던가?
이런 생각을 나는 끝없이 했다. 돌 하나가 우물 안에 던져졌고, 그 우물은 나
의 젊은 영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긴, 몹시 긴 시간 동안 카인, 쳐죽임, 표적은
바로 인식, 회의 , 비판에 이르려는 나의 시도들의 출발점이었다.
나는 다른 학생들도 데미안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카인 이야기
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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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는 다른 학생들에게도 흥미를 끌고 있는 듯했다. 적어도 <새로 온 애>
에 대한 소문들이 돌았다. 내가 다 알기만 했더라면, 어느 소문이든 풀이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내가 알았던 것은, 처음에 데미안의 어머니가 매우 부자라고
소문 났다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교회에 가지 않고 아들도 그렇다는 말들도 했
다. 어떤 사람은 데미안 모자가 유태인인 걸 안다고 주장했지만, 어쩌면 그들은
은밀한 회교도일 수도 있었다. 막스 데미안의 신체적 힘에 대해서도 더 동화 같
은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그에게 싸움을 걸고는 그가 거절하자 비겁자라고 욕하
는 그 반의 가장 힘센 학생에게 그가 무섭게 굴욕을 주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거기 있었던 아이들 말에 의하면 데미안이 그냥 한손으로 덜미를 잡아 꽉 눌렀
을 뿐인데 그애는 창백해졌고 나중에는 슬금슬금 달아났는데 여러 날 팔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어다. 어느 저녁에는 심지어, 그가 죽었다는 말까지 돌았다. 별별
이야기가 한동안 주장되고 믿어졌다. 모두가 자극적이고 놀라운 소문들이었다.
그 다음 한동안은 잠잠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소문들이 우리
학생들 사이에서 떠돌았다. 데미안이 여자애와 사귀고 있으며 이미 <알건 다 안
다>는 소문이었다.
그 사이 프란츠 크로머와의 일은 불가피한 길을 계속 가고 있었다. 나는 그로
부터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애가 드문드문 며칠간 나를 가만히 내버려둔다 해도
나는 그에게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내 꿈속에서 그애는 내 그림자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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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함께 살았다. 나의 환상은 그가 현실에서 나에게 저지르지 않은 것조차 꿈
속에서 자행하게 했다. 꿈속에서 나는 전적으로 그의 노예였다. 나는 현실에서보
다 더 많이 이 꿈들 속에서 살았다. 나는 본래 꿈을 많이 꾸는 편이었던 것이다.
이 그림자로 하여 나는 힘과 활기를 잃었다. 다른 꿈도 꾸었지만 크로머가 나를
학대하는 꿈, 나에게 침을 뱉고 나에게 올라타 무릎으로 짓누르는 꿈을 자주 꾸
었다. 그리고 더 고약한 것은, 심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나를 유혹하는 꿈이었다
―유혹했다기보다는 그의 막강한 영향력을 그냥 마구잡이로 행사하는 것이었다.
이 꿈들 중 가장 무서운 꿈, 내가 반은 미쳐서 깨어나는 꿈은 아버지를 습격하
여 살해하는 꿈이었다. 크로머가 칼를 갈아 내손에 쥐여주고, 우리는 어느 가로
수 길의 나무들 뒤에 서서 누군가를 노리고 있었다. 누구를 노리고 있는지 나는
몰랐다. 그러나 누군가가 오고 크로머가 내 팔을 누르면서 내가 찔러죽여야 하
는 것이 저 자라고 말했는데 그건 바로 우리 아버지였다. 그러다 잠이 깨었다.
이런 일들 때문에 나는 카인과 아벨 생각을 그때까지도 하고 있었다. 그러난
데미안 생각은 별로 더 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다시 가까이 온 것은 이상하
게도 또 어느 꿈속에서였다. 나는 또다시 내가 견뎌낸 학대와 폭력의 꿈을 꾸었
다. 그러나 내 몸을 타고 앉은 것이 이번에는 크로머대신 데미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새로웠고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내가 크로머에 의하여 고통
과 저항가운데서 겪은 모른 것, 그것을 나는 데미안에 의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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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그리고 기쁨과 무서움을 똑같이 포함한 감정으로 겪었다. 이 꿈을 나
는 두 차례 꾸었고 그 다음에는 데미안의 자리에 다시 크로머가 들어섰다.
이 꿈들에게 내가 체험한 것 그리고 현실에서 체험한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더 이상 정확하게 구분을 못한다. 어쨌든 크로머에 대한 나의 나쁜 관계는 나름
대로 진행되었고, 내가 작은 도둑질들을 해서 그애에게 빚진 돈을 마침내 다 갚
고 났을 때도 끝나지 않았다. 끝날 리 없었다. 그애는 내가 저지른 도둑질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늘 어디서 돈이 나오느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단단히 그애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빈번히 그애는 아버지에
게 다 말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그럴 때 나의 두려움은 내가 그 일을 처음
부터 스스로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데 대한 깊은 후회 못지 않게 컸다. 반면, 아
무리 비참했어도, 나는 다 뉘우치지는 않았다. 적어도 늘 다 뉘우치지는 않았고,
이따금씩은 모든 것이 이럴수 밖에 없다는 느낌도 들었다. 내 위에 어떤 숙명이
드리워져 있고 그것을 깨뜨리려는 시도는 소용없는 일 같았다.
우리 부모님도 이런 상황으로 적지 않게 괴로우셨을 것이다. 낯선 귀신이 들
려 내가 그토록 친밀했던 우리들의 공동체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 공동체를 향하여 마치 잃어버린 낙원을 향한 것 같은 격렬한 향수가 자주 엄
습했다. 특히 어머니는 나를 악동이라기보다는 환자 취급을 하셨다. 그러나 상황
이 진짜 어땠는지는 두 누이들의 태도에서 가장 잘 알 수 있었다. 매우 아끼면
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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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끝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던 그들의 태도 속에서, 내가 일종의 신들린 사
람이라는 것, 자신의 상태로 하여 비난당하기보다는 탄식을 받아야 할 사람, 그
러나 그 속에 바로 악이 둥지를 틀고 앉은 사람이라는 것이 똑똑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위하여, 여느 때와는 다르게 기도하는 것을 나는 느꼈고,
이런 기도가 부질없음도 느끼고 있었다. 안도에의 동경, 제대로 된 고해에의 욕
구를 나는 자주 타는 듯 느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 일을 다정하게
받아들이고 나를 몹시 아껴주며 실로 유감스러워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그 모든 것이 운명이었는데, 사람들은 일종의 궤도
이탈로나 보리라는 것을.
아직 열한 살도 안된 아이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사람들도
더러 있을 줄 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내 일을 이야기하지 않겠다. 인간을 보다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겠다. 자신의 감정들의 한 부분을 생각속에서 수정
하기를 익힌 어른은, 어린아이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생각을 잘못 측정하고, 이
런 체험들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그 당시처럼 깊게 체험했
으며 괴로워했던 때도 드물다 한 번은 비 오는 날이었는데, 나의 박해자로부터
성 앞 광장으로 나오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였다, 나는 광장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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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기다리며, 흠뻑 젖은 검은 나무들에서 떨어지는 축축한 마로니에 이파리를
두 발로 헤집고 있었다. 돈은 못 가지고 왔고, 크로머에게 뭐라고 줘야 하겠기에
케이크 두 조작을 가져와 들고 있는 참이었다.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그렇게 어
딘가 한구석에 서서 오래도록 그애를 기다리는 데 익숙해 있었다. 그리고 사람
이 어떻게 바꿀 도리가 없는 것은 하는 수 없이 접어두고 받아들이게 마련이듯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침내 크로머가 왔다. 그 날 그애는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애는 내 가슴팍
을 주먹으로 가볍게 몇 대 치고는 웃었고, 케이크를 받고, 심지어 축축한 담배
를, 내가 받지는 않았지만. 권하기까지 했다. 유별나게 친절했다.
「그래」그가 떠나면서 말했다. 「내가 잊지 않으려고 해두는 말인데 말이야,
다음번에는 누나를 데려와라, 큰누나쪽으로 말이야. 누나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전혀 이해를 못했고 대답도 못했다. 그냥 어리둥절해하며 그애를 물끄러
미 바라보았다.
「못 알아듣겠어? 네 누나를 데려오라구」
「알아들었어 크로머. 하지만 그건 안 돼. 그런 걸 내가 해서는 안 돼. 누나도
결코 나하고 오지 않을 거고」
나는 그것 역시 늘 그랬던 것처럼 다만 농간이고 구실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
고 판단했다. 그는 자주 그런식이었다. 무언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여 나를 놀
라게 하고, 나에게 굴욕을 주고 그 다음에는 서서히 자기
와 협상하게 했다. 그러면 나는 약간의 돈이나 다른 선물로 몸값을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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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나와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달랐다. 거부했는데도 그애는 거의 화난 기색도 없었다.
「글쎄」하고 그애는 얼버무렸다 「네가 잘 생각해 볼 테지. 너네 누나와 알
고 지내게 되었으면 한단 말이야. 한번쯤 알고 지내는 거야 되겠지. 그냥 누나와
같이 산보하러가. 그럼 내가 낄 테니까. 내일 휘파람으로 부를께. 그때 다시 한
번 거기에 대해 이야기 하자」
그애가 떠나고 나서 갑자기 그애가 원하는 것의 의미를 어럼풋이나마 개달았
다. 나는 아직 완전히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소년들과 소녀들이, 조금 나이가 들
면 그 어떤 비밀에 찬, 금지된 상스러운 일들을 함께 벌일 수 있다는 것을 소문
으로 알고 있었다. 이제 그러니까 아주 갑자기 일이 얼마나 엄청난지가 분명해
지는 것이었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이 즉시 확고해졌다. 그러
나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또 크로머가 어떻게 내게 복수할지, 기기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할 엄두조차 안 났다. 나에게는 새로운 고문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절망적으로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나는 텅 빈 광장을 건너갔다. 새로운
고통, 새로운 노예 상태였다! 그때 상쾌하고 낮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놀라 빨리 걷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내 뒤를 따라오더니 한 손이 뒤에서 부드럽
게 나를 잡았다.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잡힌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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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었구나?」나는 불안정하게 말했다. 「깜짝 놀랐어」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그때보다 더 어른스럽고 압도적이며 꿰뚫
어보는 사람의 시선인 적은 없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함께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그거 유감인데」그가 특유의 공손하면서도 아주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
하지만 들어봐, 누가 놀라게 한다고 그렇게 놀라서는 안 돼」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지 뭐」
「그런 것 같지. 하지만 알아둬. 너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어떤 사람 앞에
서 그렇게 두려워 떨면, 그 사람은 생각을 해보기 시작하는 거야. 이상하게 생각
이 되는 거야, 궁금해지지. 그 사람은 생각하게 돼, 네가 이상하게도 잘 놀란다
고. 그러고는 계속 생각하지. 사람이 저러는 건 바로 겁이 날 때인데라구. 겁쟁
이들은 언제나 불안하지. 하지만 내 생각으로 너는 원래 겁쟁이가 아니야. 아,
물론 영웅도 아니지. 지금 넌 뭔가 겁나는 일이 있어. 겁나는 사람도 있구. 그런
데 그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야. 그래, 사람을 무서워해서는 결코 안 될 거
야. 날 무서워하진 않지? 아니면 무섭니?」
「오 아니야, 전혀 안 무서워」
「그럴 테지. 하지만 네가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는 거지?」
「난 몰라.... 날 내버려둬, 나한테서 뭘 바라는 거야?」
그는 나와 나란히 걸었고―나는 더 빨리 걸었다, 도망칠 생각을 하며―곁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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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가정을 해봐」그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내가 널 좋게 생각하고 있
다는 것을 말야. 아무튼 나한테는 겁을 낼 필요가 없어. 너하고 실험을 한 번 해
보고 싶어, 재미있기도 하고 네가 거기서 꽤 쓸모 있는 걸 배울 수도 있어. 한
번 주의를 들어봐! 나는 이따금씩 독심술(讀心術)이라고 부르는 기술을 써보곤
해. 무슨 나쁜 마법이 거기 있는 건 아니야.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면 아주 이상
해 보이지. 그걸로 사람들을 아주 놀라게 할 수 있어. 자아, 우리 한번 시험해
보자. 그러니까 나는 너를 좋아해, 혹은 내가 너에게 관심이 있는데 이제 네 마
음속 모습이 어떤지를 밝혀내 보고 싶은 거야. 그러기 위해 나는 이미 시작했어.
내가 널 놀라게 했지. 넌 그러니까 잘 놀라는 거야. 즉 넌 두려운 일이나 사람이
있는 거야. 그게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 누군가에게 자기 자신을 지배할 힘을 내주었다는 것에서
비롯하는 거야. 예를 들면 뭔가 나쁜 일을 했어봐, 그리고 상대방이 그걸 알고.
그럴 때 그가 너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는 거야. 알아들었니? 이제 분명하지, 안
그래?」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언제나처럼 진지하고 영
리했다. 그러면서도 또 너그러웠지만, 온갖 정다움이 깃들여 있다기보다는, 오히
려 엄격했다. 정의나 혹은 뭔가 그 비슷한 것이 거기에는 있었다. 나는 내게 무
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는 마술사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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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했니?」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한테 말하는데 말이야, 이건 우스꽝스러워 보여, 독심술 말이야. 그러나
이건 아주 자연스럽게 되는 거야. 예를 들면 언젠가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들
려주었을 때 네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네게 꽤 정확하게 말해 줄 수
도 있어. 딴이야기지만 말이야. 네가 한 번쯤 내 꿈을 꾸었으리라고 생각해. 하
지만 그런 건 관두자! 넌 명석한 소년이야, 대부분의 아이들은 참 멍청하지! 나
는 때때로 내가 신뢰하는, 명석한 소년과는 어디서든 이야기를 즐겨하지. 괜찮겠
지?」
「그럼 괜찮고 말고. 다만 난 전혀 이해를 못하겠어」
「우리 한 번 즐거운 실험을 계속해 보자! 그러니까 우리는 찾아낸 거야. S라
는 소년이 잘 놀란다. 그애는 누군가를 무서워한다. 필시 그애와 이 상대방 사이
에는 몹시 불편한 비밀이 하나 있다. 대강 맞지?」
꿈속에서처럼 나는 그의 목소리에, 그의 영향력에 굴복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
는 내 자신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모든 것을 아는 목소리
는 아니었을까? 내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더 명확하게 아는 목소리가 아니
었을까?
데미안이 내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
「그럼 맞는 거지. 그럴 줄 알았어. 이제 딱 한가지 질문만 더 할게. 아까 저
기서 가버린 애 이름이 뭔지 너 아니?」
나는 흠칫했다. 건드려진 나의 비밀이 고통스럽게 내 속
@p 54
에서 다시 움츠러들었다.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누구? 다른 애는 없었어, 나뿐이었지」
그가 웃었다.
「그냥 말해」그가 웃었다. 「그애 이름이 뭐지?」
나는 조그맣게 말했다. 「저 프란츠 크로머 말이야?」
흡족해서 그가 내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브라보! 넌 똑똑한 녀석이로구나, 우린 친구가 되겠다. 그런데 네게 해줄 말
이 있어. 그 크로머는 말이야, 아니면 이름이 뭐든 간에, 나쁜 녀석이야. 그애 얼
굴에 자기는 악당이라고 씌어 있어! 넌 어떻게 생각하니?」
「응 그래」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애는 나빠, 사탄이야! 하지만 그애
가 아무것도 알아서는 안돼! 맙소사, 제발, 그애가 알아서는 안 돼! 그애를 알아?
그애가 형을 알아?」
「조용히 좀 해! 그애는 갔어. 그리고 날 몰라. 아직은 몰라. 하지만 그애에 대
해 알고 싶은 걸. 그애는 공립학교에 다니니?」
「응」
「몇 학년인데?」
「오학년. 하지만 그애한테 아무 말 하지 마! 제발, 제발 그애한테 아무 말 하
지 말아줘!」
「걱정 마, 너에겐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거야. 아마도 너 그 크로머에 대해 조
금 더 이야기를 들려줄 마음이 없겠지?」
「그럴 수 없어! 안돼, 나를 내버려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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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그가 말했다. 「안됐다. 우린 이 실험을 좀더 해볼 수도 있었을 텐
데. 하지만 널 괴롭히지는 않을게. 그애를 두려워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
은 너도 알지, 안그래? 그렇게 해서 두려움이 우리들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거야.
그런 건 떨쳐버려야만 해. 넌 그 두려움을 떨쳐버려야만 해, 네가 제대로 된 사
내 녀석이 되려면 말이야. 이해하겠니?」
「분명, 형이 전적으로 옳아.... 하지만 그렇게 안 되는 걸. 형은 몰라...」
「어떤 면에서는 내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안다는 걸 보았겠지. 너
그애에게 혹시 돈 빚진 거라도 있니?」
「그래, 그렇기도 해.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야. 난 말할 수 없어.
할수 없어!」
「네가 빚진 돈을 내가 갚아주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니? 내가 너한테 줄
수도 있는데」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부탁이야, 아무에게도 그 이야길 하지 말아줘!
한 마디도! 형은 날 불행하게 해!」
「날 믿어, 싱클레어. 넌 언젠가 너희들 사이의 비밀을 나에게 알려줄 거야」
「결코 그러지 않을 거야, 결코!」내가 격렬하게 소리쳤다.
「다 너 좋을 대로 해. 난 그냥, 어쩌면 네가 나중에 한 번 더 내게 말하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야. 자발적으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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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당연하지! 내가 그 크로머처럼 굴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오 아니야. 하지만 형은 거기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걸」
「전혀 모르지. 거기에 대해 곰곰히 생각할 뿐이지. 그리고 나는 결코 크로머
처럼 굴지는 않을 거야. 그건 믿어줘. 또 넌 나한테는 아무것도 빚진 게 없잖니
」
우리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점차 안정되었다. 그러나 데미안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점점 수수께끼 같아졌다.
「이젠 집에 가봐야겠다」라고 말하며 그가 빛 속에서 자기의 외투를 더 단단
히 여몄다. 「한 가지만은 다시 말해 주고 싶어. 우리가 벌써 이만큼 왔기 때문
에 말이야. 넌 그 녀석을 떨쳐야 할 것 같다! 달리 안 된다면 그애를 때려죽여!
만약 네가 그렇게 한다면 나도 좋겠어. 내가 널 돕기도 할 거구」
나는 새롭게 겁이 났다. 카인의 이야기가 갑자기 다시 떠올랐다. 무시무시해져
나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내주위에 무시무시한 일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럼 좋아」막스 데미안이 미소를 지었다. 「집으로나 가! 우린 벌서 그 일
을 하고 있어. 때려죽이는 것이 가장 간단한 일이겠지만 말이야. 그런 일들에서
는 가장 단순한 것이 늘 최선의 것이지. 크로머와 사귀는 건 좋지 않아」
나는 집으로 왔다. 일 년쯤 떠나 있었던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달라보였다. 나
와 크로머 사이에 미래 같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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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희망 같은 무엇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나
무섭도록 혼자 여러 주일 동안 내 비밀과 더불어 있었던가를 이제 비로소 알았
다. 부모님 앞에서 고해를 하는 것이 후련은 하겠지만 완전히 나를 구원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 그러나 이제 나는 고해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
낯선 사람한테나. 그리고 구원의 예감이 짙은 향기처럼 내게로 풍겨왔다.
그 후에도 오랫동안 내 두려움은 극복되지 않았다. 나의 적과 길고도 무서운
대결을 벌일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만큼, 모든 것이 그렇게 고요하
고 그렇게 완전히 비밀스럽고 조용히 흘러가는 것이 더 이상했다.
우리 집 앞에서 들리던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한 주일 동안. 나는 감히 그걸 믿을 수 없었다. 속으로 망을 보고 있었다.
그애가 갑자기, 전혀 예기치 않은 바로 그때 거기 서 있지 않을 까 하고. 그러나
그애는 나타나지 않았다. 계속 나타나지 않았다! 새로운 자유가 믿어지지 않았
다. 마침내 내가 프란츠 크로머와 마주치게 되었을 때까지도 나는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애는 바로 내 맞은편에서 자일러 가세를 내려오고 있었는데 나를 보
자 움칫하였다. 얼굴을 험하게 찌푸리더니 나를 피해 그냥 홱 돌아서는 것이었
다.
그건 나로서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내 적이 날를 피해 달아난 것이었다! 나의
사탄이 나를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기쁨과 놀람이 나의 전신을 관통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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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데미안이 다시 한번 나타났다.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내가 말했다.
「안녕, 싱클레어. 너 어떻게 지내는지 좀 들어보고 싶었다. 크로머가 이제는
널 가만히 두지, 안 그래」
「형이 그렇게 한 거야? 하지만 대체 어떻게? 대체 어떻게 했기에? 도저히 이
해할 수가 없어. 그애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아」
「그거 잘됐구나. 언젠가 다시 나타나기라도 하면, 안 그러겠지만, 그애야 뻔
뻔한 녀석이니까 말야, 그냥 그애한테, 데미안을 생각해 보라는 말만 해」
「그게 무슨 말이지? 그애랑 싸운 거야, 때려준 거야?」
「아니. 난 그런 짓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애하고도 그냥 이야기했어. 너하
고 이야기했듯이 말이야. 그러면서 너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 그애 자신한테
도 이로울 거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게 해주었지」
「 오, 형이 그애한테 돈을 준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런 방법이라면 네가 벌써 시험해 봤잖아」
나는 자꾸 캐물으려 했지만 그는 떠났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하여 전에 느꼈
던 느낌, 감사와 수줍음, 찬탄과 두려움, 헌신과 내면의 거부가 기이하게 뒤섞인
답답한 느낌으로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곧 그를 다시 보겠거니 했다. 그와 그 모든 것에 대하여, 또 카인의 일에 대해
서도 더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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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한다는 것은 결코 내가 믿는 미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린아이에
게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로 보였다. 그래서 내가 막스 데미안에게 전혀 감사
해하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도 별로 놀랍지 않다. 데미안이 나를 크로머의 손아
귀에서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병들고 상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도 나
는 확신한다. 당시에도 이 구원을 나는 내 짧은 인생의 가장 큰 경험으로 느꼈
다. 그러나 구원해 준 사람을, 그가 기적을 완수하자, 나는 곧 제쳐두었다.
감사해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말했듯, 내게는 이상하지 않았다. 내게 특이하
게 느껴진 것은 오로지 내가 보인 호기심의 결핍이었다. 나를 데미안과 접속하
게 했던 비밀들에 좀더 가까이 가지 않은 채 어떻게 단 하루라도 평온하게 살아
갈 수 있었을까? 카인에 대하여, 크로머에 대하여, 독심술에 댜하여 좀더 들으려
는 욕망을 나는 어떻게 억제할 수 있었을까?
거의 이해가 안 되지만 일이 실제로 그랬다. 내가 갑자기 악령이 씌운 그물로
부터 풀려났음을 나는 보았다. 다시 세계가 밝고 기쁘게 내 앞에 놓여 있는 것
을 보았다. 더이상 두려움의 발작과 목을 죄는 심장의 격한 고동에 시달리지 않
았다. 저주의 주문은 풀렸다. 나는 더 이상 괴롭힘당하는 저주받은 자가 아니었
다.
나는 다시 평소와 같은 학생이었다. 내 본성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균형과 안
정에 이르려 했다. 그렇게 본성은 무엇보다 그 많은 추하고 위협적인 것을 떨쳐
버리려고,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내
@p 60
죄와 불안의 긴 역사 전체가, 밖으로는 그 어떤 흉터도 인상도 남기지 않은
채 놀랍게도 빨리 내 기억에서 미끄러져 나갔다.
나의 조력자이자 구원자에 대해서도 똑같이 빨리 잊어버리려 했다는 것도 이
제는 이해하겠다. 내 손상당한 영혼의 모든 충동과 힘을 쏟아 나는 내게 내렸던
저주의 고해(苦海)로부터, 크로머에의 무서운 예속에서부터 도망쳐 돌아왔던 것
이다. 내가 일찍이 행복했고 만족했던 곳으로, 다시 열리는 잃어버렸던 낙원으
로, 아버지 어버니의 밝은 세계로, 누이들에게로, 정결함의 향기로, 아벨이 누렸
던 신의 호의로.
데미안과의 짧은 대화를 나누고 난 날, 내가 다시 얻은 자유를 완전히 확신하
고 이제는 제발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날로 나는 벌써 그토록 자주 그
리워하며 소망했던 것을 실행했다. 고해를 한 것이다. 어머니에게로 가서, 자물
쇠가 망가지고 돈 대산 장난감 돈으로 채워진 저금통을 보여드리고, 얼마나 오
랫동안 자신의 죄로 하여 사악한 자에 묶여 있었던가를 이야기해 드렸다. 어머
니는 다 이해하시지는 못했지만 저금통을 보고, 변한 나의 시선을 보고, 변한 나
의 목소리를 듣고, 내가 회복되었으며 내가 어머니에게 되돌아왔다는 것을 느끼
셨다.
그리고 이제 나는 벅찬 감정으로, 내가 다시 받아들여진 축제를, 탕아의 귀향
의식을 벌였다. 어머니는 나를 아버지께로 데려가셨고, 이야기는 되풀이되었으며
질문과 놀람의 탄성의 터져나왔고, 부모님 두 분은 내 머리를 쓰다듬
@p 61
으시며 긴 마음의 짓눌림을 떨치고 안도의 숨을 내쉬셨다.
모든 것이 근사했다. 모든 것이 이야기 속 같았다. 모든것이 놀랍도록 순조롭
게 풀렸다.
이제 나는 정말 열정적으로 이 안정 속으로 도피해 들어갔다. 다시 평화를 되
찾고 부모님의 신뢰를 되찾았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싫증나지 않았다. 나는 집
안의 모범 소년이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누이들과 놀았고, 기도 시간
에는 구원받은 개종자의 감정으로 좋아하는 옛 노래들을 함께 불렀다. 그런 일
은 춤심에서 우러났으며 어떤 거짓도 섞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걸로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내가 데미안을 잊은 이유가 진정으로 해명될 수 있다. 그에게 나는 고해를 했어
야 했다! 그랬었더라면 그 고해가 집에서처럼 화려하고 감동적이진 않았을테지
만 그 결과는 나에게 보다 유익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모든 뿌리를 뻗어 예전
의 낙원 같은 세계에 매달렸다. 집으로 돌아와 관대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데미안은 결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 맞질 않았다. 그도,
크로머와는 다르지만, 바로 또 하나의 유혹자였다. 그런 것이라면 이제는 영원토
록 조금도 더 알고 싶지 않은 또하나의 악하고 나쁜 세계와 나를 묶어주는 유혹
자였던 것이다. 지금, 바로 나 자신이 다시 하나의 아벨이 되고 난 지금, 아벨을
포기하고 카인을 찬양하는 일을 도울수도 없었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밖으로 드러난 상황은 그랬다. 그러나 내면적 관계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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랬다. 나는 크로머라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자신의
힘과 노력을 통해서 풀려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의 오솔길들을 똑바로 걸
으려고 했는데, 그 길들이 내게는 너무 미끄러웠던 것이다. 친절한 손 하나가 나
를 잡아 구해 낸 지금, 나는 눈길 한 번 팔지 않고 곧장 어머니의 품 속으로, 포
근히 에워싸인 경건한 유년의 아늑함 속으로 달려왔다. 나는 자신을 자신보다
더 어리게, 더 의존적으로, 더 어린애처럼 만들었다. 나는 크로머에 대한 예속
을 새로운 의존으로 대치해야만 했던 것이다. 혼자는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렇개 나는 눈먼 마음으로 아버지 어머니에의 의존, 그것이 유일한 것이 아님을
알아버린 <밝은 세계>에의 의존을 택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분
명 나는 데미안 편이 되어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그것이 당시에는 내게 그의 수상쩍은 생각에 대한 당연하 불신으
로 보였다. 사실 그것은 두려움 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데미안이 부모님보다
더 많은 것을, 훨씬 더 많은 것을, 나로부터 요구했을 테니까. 그는 충동과 경고
로, 조롱과 반어로 나를 보다 자립적으로 만들려고 했을 테니까. 아, 지금은 알
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인간에게 거슬리는 것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반 년쯤 뒤, 나는 그 유혹에 저항할 수 없어 한 번은 산책하는 길에
아버지께여쭈어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카인이 아벨보다 더 훌륭하다고 설명하
는데 그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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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아버지는 몹시 놀라시며 그것은 새로울 게 없는
견해라고 나에게 설명하셨다. 심지어 기독교 이전 시대에도 등장하였으며 사이
비 종파들에서 전수되었는데, 그 하나는 스스로를 <카인교도>라고 불렀다고. 그
러나 이 미친 학설은 물론 우리의 신앙을 깨뜨리려는 악마의 시험에 다름 아니
라고. 왜냐하면 카인이 옳고 아벨이 옳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 결과는 신이 오
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서의 신이 올바른 신, 유일신이 아니라 틀린
신이라는 것이다. 정말로 카인교도들은 비슷한 것을 가르치고 설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이교짓거리는 오래전에 인류로부터 사라졌다. 그래서 나의 하교친
구가 그것애 대해 무언가를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아버지께서는 진지하게 경고하셨다.
@p 64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내 어린 시절에 대하여, 아버지 어머니 곁에서 내가 누렸던 안정감에대하여,
어린아이가 사랑과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환한 환경 속에서 넉넉하게 즐기며 살
아가는 것에 대하여 아름답고 정답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나에게 흥미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에 이르기 위하여
내가 내디뎠던 걸음들뿐이다. 그 모든 아리따운 휴식의 지점들, 행복의 섬들과
낙원들의 마력을 나도 모르지 않지만, 그 모든 것들을 나는 먼 곳의 광채 속에
싸인 채로 두고자 한다. 그곳에 다시 한번 발 디딜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아직 내 소년 시절에 머무르는 동안, 더 할 이야기는 오
직, 어떤 새로운 것이 나에게로 닥
@p 65
쳤는지,무엇이 나를 앞으로 몰아갔는지, 나를 찢어내었는지, 그런 것에 대한
것뿐이다.
이런 충격들은 늘 <다른 세계>로부터 왔고 늘 두려움과 강압과 양심의 가책
을 수반하였다. 그것들은 늘 혁명적이었다. 내가 그안에 그대로 머물고 싶었던
평화를 위협했다.
허용된 밝은 세계에서는 숨기고 은폐해야 하는 하나의 원시적 충동이 내 자신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해야만 했던 시절이 왔다. 어떤 사람이나
그렇듯이, 천천히 눈뜨는 성(性)에 대한 감정이 나에게도 하나의 적이자 파괴자
로, 금기로, 유혹과 죄악으로 들이닥쳤다. 나의 호기심이 찾은 것, 꿈과 기쁨과
두려움이 내게 가져다 준 것, 사춘기의 큰 비밀, 그것은 내 유년의 평화에 감싸
인 행복감에는 맞지 않았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이제 더는 어
린아이가 아닌 아이의 이중생활을 영위했다. 내 의식은 집안의 허용된 세계속에
살았으며 어렴풋이 솟아오르는 새로운 세계는 부정했다. 그러난 동시에 나는 꿈,
충동, 은밀한 소망들 속에서 살았다. 그 위에서 저 의식적 삶이 만드는 다리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내 속에서 유년의 세계가 붕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부모들처럼 우리 부모님들도 말없이 덮어두며 눈뜨는 생며의 충동
을 모른 척하였다. 그들은 다만 다함없는 세심한 배려를 기울여, 현실을 부인하
며 점점 더 비현실적이고 위선적으로 되어가는 어린이의 세계 속에 좀 더 머무
르려는 나의 절망적인 시도들을 도와주었을 뿐이다. 부모라는 존재가 이 점에
서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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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으니 내 부모님을 비난하지는 않겠다. 자신을 다스리고, 나의 길을 찾아
내는 것은 내 자신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유복하게 키워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자신의 일을 잘 해내지 못했다.
누구나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인생의 분기
점이다. 자기 삶의 가장 혹심하게 주변 세계와 갈등에 빠지는 점, 앞을 향하는
길이 가장 혹독하게 투쟁으로 쟁취되어야 하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운명인 이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경험한다. 삶에서 오로지 한 번, 유년이 삭아가
며 서서히 와해될 때, 우리의 사랑을 얻었던 모든 것이 우리를 떠나가려고 하고
우리가 갑자기 고독과 우주의 치명적인 추위에 에워싸여 있음을 느낄 때 경험하
는 것이다.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이 절벽에 매달려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것에, 잃어버린 낙원의 꿈에, 모든 꿈 중에서 가장 나쁘고 가장 살
인적인 그 꿈에 한평생 고통스럽게 들러붙어 있다.
내 이야기로 되돌아아가 보자. 유년의 끝이 왔음을 내게 알리던 느낌들, 꿈의
영상들은 이야기 거리가 될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어두운 세계>,
<다른 세계>가 다시 거기 있었다는 것이다. 한때 프란츠 크로머였던 것이 이제
는 내 자신 속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다른 세계>가 바깥에서부터
도 나를 지배하는 힘을 다시 얻었다.
크로머 이야기가 있은 지 몇 년이 지나고였다. 내 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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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극적이고 죄에 찬 시절이 몹시도 멀리 있었고 짧은 악몽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때였다. 프란츠 크로머는 오래전부터 내 삶에서 사라져버려, 어쩌다 마
주치는 일이 있어도 내 쪽에서 거의 주의를 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내 비
극의 다른 중요한 등장인물, 막스 데미안은 그때까지도 아직 나의 주변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눈에 보이게, 그러나 영향을 미치지는
않으면서 오랫동안 멀리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던 그가 비로소 다시 서서
히 가까이 다가섰고, 다시 힘과 영향력을 발산했다.
그 시절의 데미안에 대하여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떠올려본다. 일년 남짓
그와 단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쪽에서 그를 피했고, 그는 결코
재촉하지 않았다. 언젠가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다음에는 이따금씩, 그의 다정함 속에 냉소와 묘한 비난의 섬세한 울림이 섞여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 상상이었을 수도 있다. 내가 그와 함께
겪은 사건이며 그가 그 당시 나에게 행사했던 기이한 영향력은 그나 나나 모두
잊은 듯 했다.
나는 그의 모습을 생각해 내려 한다. 그러니까 이제 그를 떠올려보니, 그럼에
도 그는 거기 있었고 내가 그의 존재에 주목했었음을 알겠다. 그가 학교에 가는
모습이 보인다. 혼자 아니면 키 큰 학생들 사이에 끼여 있는 모습이, 자신의 공
기에 에워싸여 자신의 법칙들 아래에 살면서 낯설게, 외롭고 고요하게, 그들 사
이에서 성좌처럼 거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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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와 친하지 않았
다. 오직 그의 어머니만 빼고는 . 그런데 어머니와도 그는 어린아이처럼이 아니
라 성인처럼 교류하는 듯 보였다. 선생님들은 그를 될 수 있는 대로 가만히 내
버려두었다. 그는 좋은 학생이었지만 누구의 마음에 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따
금 그가 어떤 말 한마디, 주석 하나, 혹은 어느 선생님에게 항변을 했다는 소문
을 들었다. 항변은 그 날카로운 도전에 있어서나 비꼼에 있어서나 더할 나위 없
는 것이었다.
두 눈을 감고, 떠올려본다. 그의 모습이 보인다. 그게 어디였던가? 그렇다, 이
제 다시 거기였다. 우리 집 앞 골목이었다. 거기서 하루는 그가 손에 수첩을 들
고 서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우리 집 현관문 위, 새가 있는 오래된
문장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창가에 서서,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그를 바라보았다. 문장을 향한 그의 주의력에 찬 서늘하고 환한 얼굴을 몹시 놀
라워 하며 바라보았다. 그것은 어른의 얼굴, 연구가 혹은 예술가의 얼굴, 뛰어나
고 의지로 가득 찼으며, 이상하게도 환하고 서늘한, 무얼 아는 두 눈을 지닌 얼
굴이었다.
또다시 그의 모습이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리에서였다. 학교에서 돌
아오는 길에 우리들 모두는 쓰러진 말 한 마리를 에워싸고 서 있었다. 말은 농
가에서 쓰는 수레 앞에서 그 끌채에 아직도 메인 채, 무언가를 찾는 듯 간신히
열린 콧구멍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어딘가의 상처에서 피흘리고 있었고, 말의 옆
구리께에서는 거리의 하얀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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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천천히 검붉게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메스꺼워서 그 광경에서 몸을
돌렸을 때 데미안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앞으로 밀고 나와 있지 않았다. 편안하
고 상당히 멋지게, 그에게 어울리듯이 멀찍이 뒤쪽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말
의 머리를 향해 있었고 다시금 그 깊고, 고요하고, 거의 광적이지만 격정적이지
는 않은 주의력을 띄고 있었다. 나는 오래 그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으며 비
록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매우 독특한 것을 그때 느꼈다. 나는 데미안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소년의 얼굴을 가지지 않고 어른의 얼굴을 가졌다는 것뿐
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보았다. 보았다고, 혹은 감지했다고 믿었다. 그것이 남
자의 얼굴만이 아니며 또 다른 무엇이라는 것을. 여자 얼굴도 조금 그 안에 들
어 있는 듯 했다.특히 그얼굴은 내게, 한순간, 남자답거나, 어린이답지 않고, 왠지
수천 살은 되게, 왠지 시간을 초원한 듯, 우리가 사는 것과는 다른 시대의 인장
이 찍힌 듯 보였다. 짐승들이 아니면 나무들, 아니면 별들이 그렇게 보일 수 있
었다. 지금 내가 성인이 되어 거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때는 알 수 없었고, 정
확하게 느끼지 못했다. 다만 뭔가 비슷한 것을 느꼈을 뿐이다. 어쩌면 그는 미남
이었을 것이고, 어쩌면 내 마음에 들었을 것이고, 어쩌면 내게 거슬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 또한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내가 보았던 것은 오직, 그가 우리들과
는 달랐다는 사실, 그는 한마리 짐승 같았다는 것, 아니면 유령, 아니면 어떤 형
상 같았다는 것이다. 그때 그의 모습이 어땠었는지 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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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지만, 그는 달랐다. 우리들 모두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달랐다.
더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만큼도 부분적으로는 나중의 인상들에서
재구성해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몇 년 더 나이가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마침내 다시 그와 더 가깝게 접
촉하게 되었다. 데미안은, 관습대로 교회에서 받는 견진성사를 그 또래들과 함께
받지 않았으며, 그것에 대해서도 소문들이 당장 꼬리를 물었다. 학교에서는 그가
사실은 유태인이라고, 아니, 이교도라고들 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그
어머니와 함께 어떤 종교도 갖지 않았거나 아니면 어떤 황당한 나쁜 소수 종파
소속이라고 생각했다. 그것과 연관해서, 그가 어머니와 애인처럼 살고 있다는 의
심도 받았던 것 같다. 추측건대 일은 이랬다. 그는 지금껏 아무런 신앙없이 키워
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점이 그의 장래에 대하여 불이익을 초래할 지도 모른
다는 우려를 낳았던 것 같다. 어쨌든 그의 어머니는, 또래보다 이 년 뒤늦게야
그를 견진성사에 참여시킬 결심을 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몇 달간 견진성사 수
업에 우리 반 친구로 있게 되었다.
한동안 나는 그와 완전히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에게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도 소문과 비밀에 에워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에게
거슬렸던 것은, 크로머 사건 이래 내 마음속에 남아있던 의무감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당시 나는 내 자신의 비밀들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견진성사 수
업과 성 문제에 결정적으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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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뜬 시기가 일치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로 하여 선의에도 불구하고 경건
한 가르침에 대해 관심 갖기가 힘든 상태였다. 신부님이 말씀하시는 일들은 나
로부터 멀리 떨어져 고요하고 성스러운 비현실 속에 놓여 있었다. 그것들은 대
단히 아름답고 가치 있을지언정 결코 현실성이 있거나 자극적이지 않았음에 반
해 성에 눈을 떠가는 일은 바로 목전의 현실이었고 극도로 자극적이었다.
이러한 상태가 나를 수업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그만큼 더
나의 관심은 막스 데미안에게 접근했다. 그 무엇인가가 우리들을 묶어주는 것
같았다. 이 끈을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하게 따라가야겠다. 생각해 낼 수 있
는 한에서, 그것은 어느 이른 아침 수업 시간에 시작되었는데 아직 교실에 등불
이 켜져 있을 때였다. 우리 종교 담당 선생님의 이야기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에 이르게 되었다. 신부님 이야기에 나는 거의 귀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때 신
부님이 목소리를 높여 강도 높게 카인의 표적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 나는 뭔가 와닿은 듯한, 혹은 경고를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
선을 드는데, 줄지어 놓인 앞쪽 책상으로부터 데미안의 얼굴이 나를 향하여 뒤
로 돌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조롱일 수도 진지함일 수도 있는 환하고, 무언가
말하는 듯한 눈으로. 그는 다만 한순간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는 한껏 긴장
하여 신부님의 말씀에 귀기울였다. 카인과 그 표적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 가지 깨달음이 감
@p 72
지되었다. 그것은 신부님이 가르치는 것과 같지 않다, 그건 달리 볼 수도 있
다, 그 점에 비판을 가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그 일 분간 데미안과 나 사이는 다시 결합되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영혼이
서로 소속되어 있다고 느끼자마자 그 느낌이 얼마나 마술처럼 공간으로도 옮겨
가는지 나는 보았다. 그가 직접 그렇게 일을 만들 수 있었는지 아니면 순수한
우연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확고하게 우연을 믿었다. 며칠 지나
지 않아 데미안이 갑자기 종교 시간에 자기 자리를 바꾸어 바로 내 앞에 앉았다
(넘치게 가득 찬 교실의 비참한 빈민들 냄새 한가운데서 그의 목덜미로부터 풍
겨오는 감미롭고 신선한 비누 냄새 맡기를 내가 얼마나 좋아했던가를 아직도 기
억하고 있다). 그러고는 다시 며칠 뒤 그가 다시 자리를 바꾸어 이제는 내 곁에
앉았는데, 겨울 내내 그리고 온 봄이 다 가도록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침 수업 시간들은 완전히 변했다. 이제는 졸립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그 시
간이 올 생각을 하면 미리부터 즐거웠다. 이따금씩 우리 둘은 집중하여 신부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묘한 이야기, 이상한 격언을 나에게 시사해 주는 데에는
내 짝의 눈길 하나면 충분하였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비판이나 회의를 일깨
우기 위하여 나를 경고하는 데에는 그의 다른 시선 하나, 아주 단호한 눈길 하
나면 충분했다.
자주 우리들은 나쁜 학생이었다. 수업을 전혀 듣지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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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데미안은 선생님들과 동급생에 대하여 늘 공손했으며 한 번도 남자 아이
들 특유의 멍청한 짓들을 저지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커다랗게 웃거나 떠드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한 번도 선생님의 비난이 자신에게로 돌려지지 않게 했다.
그러나 아주 나직하게, 그리고 소리 낮춘 귓속말들 보다는 오히려 신호와 시선
으로 그는, 나로 하여금 그가 나름으로 열중하는 일들에 관심을 갖게 할 줄 알
았다. 그 일들은 부분적으로는 묘한 성격의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내게, 학생들 중 누가 자기한테 관심이 있는지, 어떤 식으로
자기가 그들을 연구하고 있는지를 말해 주었다. 어떤 애들은 그가 아주 정확하
게 알고 있었다. 성경 구절의 독송이 시작되기 전에 그가 말했다. -“내가 너에
게 엄지손가락으로 신호를 해보이면, 그러면 저 애가 우리들 쪽을 돌아보거나
목덜미를 긁을거야”- 등등. 그러다 수업중에, 그때쯤은 좀전에 들은 그의 말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을 때 막스는 갑자기 눈에 뜨이는 태도로 내게 자기 엄지손
가락을 돌리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그가 가리킨 학생을 지켜보았다. 그가 가리
킨 아이가 번번히, 철사 줄에 매여 당겨지기라도 한 듯, 요구받은 몸짓을 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선생님한테도 그걸 한 번 시험해 보라고 나는 막스를 졸랐다.
그렇지만 그건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내가 수업에 들어가며 그에게,
오늘은 예습을 해오지 않아, 신부님이 나에게 아무것도 안 물으셨으면 정말 좋
겠다고 말했을 때, 그가 나를 도와 주었다. 신부님은 교리문답의 한 단락을 말하
게 할 학생을 찾고 있었는데,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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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떠돌던 시선이 죄의식에 찬 내 얼굴에 멈추었다. 신부님이 천천히 다가와,
나룰 향해 손가락을 뻗치고, 내 이름이 벌써 그 입술에 올려졌나 싶었을 때, 그
때 갑자기 신부님의 얼굴이 산만해지더니 혹은 불안정해지더니 옷깃을 당기며,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데미안에게로 가서 그에게 뭔가를 물으려
는 듯했다. 그러나 놀라 다시 그 자리를 떠나며 한동안 기침을 했고 그 다음에
는 다른 학생을 시켰다.
이 장난이 나를 몹시 흥겹게 하는 동안 내 친구가 나에게도 여러 번 똑같은
장난을 했다는 것을 나는 서서히 알아차리게 되었다. 내가 학교 길에서 갑자기,
데미안이 한 구간을 내 뒤에서 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몸을 돌리면, 바로 그가 거기 있곤 했다.
-“도대체 어떻게 형은 다른 사람이 형의 뜻대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
들 수 있는 거야?”-하고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는 침착하게 사실대로, 특유의 어른다운 태도로 선선히 알려주었다.
-“아니야”- 그가 말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신부님이 아무리 그렇다
고 말씀하셔도 자유 의지란 없어. 다른 사람 쪽에서 내가 원하는 생각을 할 수
도 없거니와 내 쪽에서 원하는 것을 그가 생각하게 만들수도 없어. 그러나 누군
가를 잘 관찰할 수는 있는 것 같아. 그가 다음 순간에 무얼 하게 될지 말이야.
그건 아주 간단해, 사람들이 그걸 모를 뿐이야. 물론 연습이 필요하지. 예를 들
면 나비 종류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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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어떤 나방들이 있는데, 암놈이 수놈보다 훨씬 수가 적어. 나비란 다른 모든
동물과 똑같아 번식해, 수컷이 암컷을 수태시키고, 그러면 암컷이 알을 낳지. 그
런데 연구자들이 자주 시험해 본 바로는, 이 나방들 중에 암컷이 하나 있으면
밤에 이 암컷에게로 수나방들이 날아오는데, 그것도 여러 시간 떨어진 곳에서
오는 거야, 여러 시간 떨어진 곳에서! 생각해 봐! 몇 킬로미터 밖에서 부터 이
수컷들은 그 지역에 있는 단 하나의 암컷을 감지하고 추적해 오는 거야! 그것을
설명하려고들 하지, 그러나 그건 어려워. 그건 일종의 후각이거나 아니면 그런
무엇일거야. 이를테면 좋은 사냥개가 눈에 뜨이지 않는 짐승 자취를 찾아 내어
따라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이해하겠지? 그건 그런 일들이야, 자연은 그런
일로 가득찼고, 아무도 그걸 밝힐 수 없어. 이런 말은 할 수 있겠지. 이 나방들
에게서 암컷이 수컷처럼 흔했더라면, 수컷들의 코는 그렇게 예민해지지 못했을
거라고 말야. 스컷들에게 그런 예민한 코가 있는 것은 다만, 스스로를 그렇게 조
련시켰기 때문인 거야. 어떤 짐승이나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주의력과 모든 의지
를 어떤 특정한 일로 향하게 하면, 그는 그것에 도달하기도 하지. 그게 전부야.
네가 알고 싶었던 일도 정확하게 그래. 어떤 사람을
충분히 자세히 바라봐. 그에 대해서 그 자신보다 네가 더 잘 알게 돼”-
하마터면 <독심술>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고 그로써 그렇게 오래전 일인
크로머와의 장면을 그에게 떠올리게 할뻔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우리 둘 사
이에 있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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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결코, 그나 나나, 몇 년전 그가 한 번 그토록
심각하게 내 인생에 개입했던 그 일을 아주 살짝 암시하는 일조차 없었다. 마치
그 전에는 우리들 사이에 아무일도 없었던 듯했다. 아니면 어느 쪽이나 상대방
은 그것을 잊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한 번 혹은 두 번, 심지어, 우리가
함께 길을 가다가 그 프란츠 크로머를 마주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눈길
한 번 주고받지 않았다. 그에 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하
지만 의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자유 의지란 없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다시, 오
직 자기 의지만 확고하게 그 무엇에 쏟으면 된다고 말했지, 그러면 자기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건 말이 맞지 않잖아! 내가 내 의지의 주인이 아니라면, 내
가 의지를 마음대로 이런 저런대로 향하게 할 수도 없는 것 아니야”-
그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건 내가 그를 기쁘게 할때 그가 언제나 하는 행
동이었다.
-“네가 그걸 묻다니 훌륭해!”- 하고 그가 웃으며 말했다. -“언제나 물어야
해, 언제나 의심해야 하구. 그러나 일은 아주 간단해. 예를 들면 그런 나방이 자
신의 뜻을 별이나 뭐 비슷한 곳까지 향하게 하려 했다면, 그건 이룰 수 없는 일
이겠지. 다만 나방은 그런 따위 시도는 안해. 나방은 자기에게 뜻과 가치가 있는
것,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 자기가 꼭 가져야만 하는 것, 그것만 찾는 거야. 그
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일도 이루어지는 거지. 그는 자기 외에
는 다른 동물은 갖지 못한 마법의 제6감을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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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거야! 우리 같은 사람은 동물보다는 활동의 여지가 더 많을 것이고, 관심
도 더 크겠지. 그러나 우리도 얼마만큼은 정말 좁은 테두리에 매여 있어서 그걸
벗어날 수 없어. 상상 같은 건 해볼 수 있지, 이런 저런 상상의 날개를 펼 수는
있겠지, 꼭 북극에 가고 싶다라든지, 혹은 그런 무엇을. 그러나 그걸 수행하거나
충분히 강하게 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소망이 내 자신의 마음속에 온전히
들어 있을 때, 정말로 내 본질이 완전히 그것으로 채워져 있을 때뿐이야. 그런
경우가 되기만 하면, 내면으로부터 너에게 명령되는 무엇인가를 네가 해보기만
하면, 그럴 때는 좋은 말에 마구를 매듯 네 온 의지를 팽팽히 펼 수 있어. 예를
들면 내가 지금, 우리 신부님이 장차 안경을 안쓰시도록 힘써 봐야겠다고 한다
면, 그건 안 될 일이야. 그건 그냥 장난이야. 그러나 내가, 그때 가을처럼, 저 앞
에 있는 내 의자에서 자리를 바꾸어야 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게 되면, 그럴
때는 아주 잘되지. 그때 알파벳순으로 보아 내 앞에 앉아야 되는데 지금껏 아파
서 등교하지 못해 자리가 없던 아이가 갑자기 나타났어. 그리고 누군가가 그에
게 자리를 만들어줘야 했고 물론 내가 그렇게 했지. 내 의지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즉시 기회를 포착한거지”-
-“그래”- 내가 말했다. -“그때 그 일도 아주 특이 했더랬어. 우리가 서로
관심을 가졌던 순간부터 형은 내 자리에 점점 더 가깝게 다가왔어. 그런데 그건
어떻게 된거지? 처음에 바로 내 옆에 앉지는 않았어. 몇 번 거기 내 앞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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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았었잖아, 안 그래? 어떻게 그렇게 되었지?”-
-“그건 그랬어. 처음 자리를 떠났으면 했을 때 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싶은
지 제대로 몰랐어. 내가 의식한 것은 멀리 뒤쪽에 앉고 싶다는 것뿐이었어. 너에
게로 가는 것이 내 뜻이었는데, 그게 그때만 해도 내 자신에게는 의식되지 않은
거야. 동시에 너의 의지가 나를 도와 함께 끌어준 거야. 그러다 내가 거기 네 앞
자리에 앉았을 때야 비로소 나는 내 소망의 절반이 이루어졌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지. 나는 알아차렸어. 내가 원래 원했던 거은 다름 아니라 네 옆에 앉는 것
이었음을 말이야”-
-“하지만 그때는 새로운 애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안 들어왔지. 하지만 그때는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을 해버렸어. 재빨리 네
옆에 앉아버린 거지. 나하고 자리를 바꾼 아이는 다만 조금 의아해하며 그러라
고 그랬어. 그리고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신부님이 한 번 알아차리기는 하셨
는데-아무튼 번번이, 신부님이 나하고 관계되실 때면 남모르게 무엇인가가 신부
님을 괴롭히는 거야. 내 이름이 데미안이고, 이름이 D자로 시작하는 내가 거기
아주 뒤 S자로 이름이 시작하는 아이들 가운데 앉아 있다는 것이 맞지 않는다는
걸 아시거든! 그러나 그 사실이 의식 속으로까지 뚫고 들어가지 않는 거야. 내
의지가 거기에 맞서기 때문이고 내가 거듭거듭 그 점에서 그 분께 장애가 되거
든. 거기 뭔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거듭 알아차리시기는 하지. 그래서 나를 보
고 연구하기 시작하시는 거야, 그 선하신 분이. 그러나 그때 내게는 단순한 방법
이 있지.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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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아주, 아주 똑바로 그 분 눈을 들여다보는 거야. 그러면 거의 모든 사람들
이 못 견디지. 다들 불안해져. 만약 네가 누군가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고
느닷없이 아주 힘을 주고 똑바로 그의 눈을 쏘아 보는데도 그가 전혀 불안해하
지 않거든 포기해! 그런 사람에게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 결코! 하지만 그
런 일은 아주 드물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렇게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는 사
람은 사실 단 한 명뿐이었어”-
-“그게 누군데?”- 내가 얼른 물었다.
약간 가느스름히 뜬 눈으로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생각에 잠기면 그런
눈이 되었다. 그러더니 그는 눈길을 딴데로 돌리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몹시 궁
금했지만, 그 질문을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때 그가 자기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와
몹시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았지만, 나에게는 한 번도 어머니 이야기를 하지 않았
고, 나를 한 번도 집으로 데리고 간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나는 잘 몰랐다.
그 당시 나도 이따금씩은 시험을 해보았다. 그와 똑같이 내 의지를 무엇인가
에, 내가 그것에 틀림없이 도달하도록 한데 모아보았다. 나에게는 충분히 절실해
보이는 소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의지는 모아지질 않았다. 데미안과 그
이야기를 해볼 용기는 못 내었다. 내가 소망하는 것을 그에게 고백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도 묻지
@p 80
않았다.
종교 문제에 있어 나의 신앙은 그 사이 많은 빈 틈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전적으로 데미안의 영향을 받은 나의 생각은, 완전한 불신을 굳이 내보이는 동
급생들의 생각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불신을 굳이 내보이는
학생들이 몇명 있었는데 그들이 이따금씩 흘리는 말은, 어떤 신을 믿는다는 건
우스꽝스럽고 인간으로서 품위없는 일이라느니, 삼위일체에 관한 이야기나 예수
의 동정녀 탄생과 같은 이야기들은 그저 웃기는 일이라느니, 오늘 날까지 그런
잡동사니를 가지고 다니는 행상이 있다는 것은 수치라느니 하는 것이었다. 나는
결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다. 때로 의심을 가지면서도, 내 유년의 모든 체험
에서 나는 우리 부모님이 사시는 것 같은 경건한 삶의 현실에 관해서 충분히 알
고 있었다. 경건한 삶이란 품위없는 것도 허위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
히려 종교적인 것에 대하여 나는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데미안은 나로 하여금, 성서 설화들과 교리들을 보다 자유롭게, 보
다 개인적으로, 보다 유희적으로, 보다 환상에 차서 바라보고 풀이해 내는 데 익
숙하게 해주었다. 적어도 나는 그가 나에게 친근하게 해준 풀이들을 늘 기꺼이
즐기며 따랐다. 물론 많은 것이 나에게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카인에 대한 일도
그랬다. 그리고 한 번은 견진성사 수업중에 그가 훨씬 더 대담한 견해 하나로
나를 놀라게 했다. 선생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대해 이야기를 막 끝낸 참이었다.
구세주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p 81
성서의 보고가 나에게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어린 소
년이었을 적 이따금씩 수난 금요일 같은 때, 우리 아버지가 예수 수난사를 낭독
하시고 나면 나는 열렬히 감동이 되어 이 비통하게 아름답고, 창백하고, 섬뜩하
지만 무시무시하게 생명력 있는 세계 속에서 살았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살았었다. 그리고 바하의 마태수난곡을 들을 때면 비밀에 가득
찬 이 세계가 지닌 음울하면서도 힘있는 열정의 광채가 온갖 신비로운 전율로
나를 뒤덮었다. 나는 오늘도 이 음악에서, 그리고 <비극적 행위>에서 모든 시의
그리고 모든 예술적 표현의 총괄 개념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 수업 시간의 끝에 데미안이 생각에 잠겨 나에게 말했다. -“저기엔
뭔가가 있어, 싱클레어, 내 마음에 안드는 무언가가. 이 이야기를 한 번 따라 읽
어봐.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 음미해 봐. 맥빠진 맛이 나는 무언가가 있어. 예수
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거기 언덕 위에 십자
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굉장하지! 하지만 우직한 도둑들에 대한 감상적인 선
교 전단용 이야기야! 도둑은 처음에 수치스러운 행위를 저지른 범죄자였어. 신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어. 그런데 이제 막판에 와서 마음이 누그러져 그런 개전
과 회개의 징징거리는 축제를 치르는 거야! 무덤에서 두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하는 그런 회개가 (너에게 묻겠는데)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그건 또 정말
엉터리 신부님의 설교일 뿐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야. 달착지근하고 부정직하고,
지극
@p 82
히 교화적인 배경에다 측은지심의 엿기름을 곁들인 거지. 만약 네가 오늘 그
도둑들 중 하나를 친구로 택해야 한다면, 혹은 둘 중 누구에게 더 신뢰를 줄 수
있겠는지 생각해야 한다면, 그건 아주 분명히 이 징징거리는 개종자 쪽은 아닐
거야. 다른 쪽이야. 회개하지 않은 그 도둑이야말로 사나이잖아, 개성이 있고 말
이야. 그는 개종 따위를 우습게 알았어. 그런 건 그의 처지에서는 그저 듣기 좋
은 말이겠지. 그는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갔어. 그리고 자신이 거기까지 가도록 도
와준 악마로부터 마지막 순간에 비겁하게 도망가지는 않았어. 그는 당당한 개성
을 가졌어. 성서이야기에서는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손해를 보지. 어쩌면
그도 카인의 후예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나는 몹시 당황했다. 이 십자가 수난 이야기는 내 자신이 내 집처럼 편안히
확신해도 된다고 믿었었는데 지금 비로소, 얼마나 개성 없이, 얼마나 상상력과
환상 없이 내가 그것들을 듣고 읽었었는지 알았다. 그럼에도 데미안의 새로운
생각은 내게 숙명적으로 들렸고 그 존속을 내가 고수해야 한다고 믿었던 내 안
의 개념들을 전복시키려 위협했다. 아니다. 그렇게 아무나, 지고(至高)의 성인(聖
人)까지도 마구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그 무엇인가를 말하기도 전에 그는 나의 저항을 즉시
알아차렸다.
-“나도 이미 알고 있어”- 그가 체념해서 말했다. -“그건 오래된 이야기지.
심각할 거 없어! 하지만 네게 뭔가를 말하고 싶었어. 여기에, 이 종교의 흠을 아
주 똑똑하게 볼 수
@p 83
있는 점 하나가 있는 거야. 중요한 건, 이 온전한 유일신, 오랜, 그리고 새로운
맹약의 신이 탁월한 분이기는 하지만 원래 그가 표상하는 그런 신은 아니라는
점이야. 그는 선, 고귀함, 아버지다움, 아름답고도 드높은 것, 감상적인 것이지.
옳아! 그러나 세계는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다른 건 죄다 그냥
악마한테로 미루어지는 거야. 세계의 이 다른 부분이 통째로, 이 절반이 통째로
숨겨지고 묵살되는 거야. 바로 사람들이 신을 모든 생명의 아버지라고 기리면서
도, 생명이 거기에 근거하는 성생활은 간단히 묵살되고 어쩌면 악마의 일이며
죄악이라고 선언하는 거야! 이런 신을 여호와라고 존경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하지 않아, 조금도 반대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존경하고 성스
럽게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분리시킨 이 공식적인 절반뿐만 아니
라 세계 전체를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신에 대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 예배도
가져야 해. 그게 올바른 일인 것 같아. 혹은 예배를 하나 더 만들어내야 할 것
같아. 악마도 그 안에 포함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세상 일들이 일어날 때 그
앞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되는 신을 위해서 말이야”-
그는 평소답지 않게, 거의 격해졌다. 그렇지만 그 뒤 곧 다시 미소를 띄었고
더 이상은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서는 이 말들이, 매순간 내 안에 지니고 다녔고, 가기에 대
해 누구에게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내 소년 시절 전체의 수수께끼에 적중하고
있었다. 데미안이 그때 신과 악마에 대하여, 신적이고 공식적인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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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살된 악마적 세계에 대해 말했던 것, 그것은 실로 바로 내 자신의 생각, 내
자신의 신화, 두 세계 혹은 세계의 두 절반―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에 관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나의 문제가 모든 인간의 문제, 모든 삶과 생각의 문제라는
통찰이 갑자기 신성한 그림자처럼 나를 뒤덮었다. 그리고 가장 나다운 개인적인
삶과 생각이 얼마나 깊이 거대한 사유의 영원한 흐름에 관여되어 있는가를 보고
갑자기 느끼게 되자 두려움과 경외심이 나를 압도했다. 그 통찰은 즐겁지 않았
다. 확인해 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었는도 왠지 즐겁지 않았다. 그 통찰은 가
혹했다. 맛이 떫었다. 그 안에는 일말의 책임의식이, 이제는 어린애일 수 없다는,
홀로 서 있다는 울림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생에서 처음으로 그토록 깊은 비밀을 드러내면서 나는 내 친구에게 아주
어린 시절부터 존속했던 <두 세계>에 대한 견해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즉
시, 그것을 통해 나의 가장 깊은 느낌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그를 옳다고 여긴
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무엇인가를 그렇게 남김없이 이용한다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그 여느 때 내게 보였던 것보다도 더욱 깊은 주의력으로
귀기울이며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내가 내 눈을 돌려야만 했다. 왜냐하
면 나는 그의 시선 속에서 다시 그 이상한, 동물적인 시간 초월성, 그 생각해 낼
수 없는 아득한 나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얘긴 우리 다음에 더 하자”-라고 그가 배려해 주듯 말했다. -“네가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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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한다는 걸 알았어. 하지만 그렇다면, 넌 네가 생각했던 것을 결코 그대로 완
전히 다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거야. 그런데 그건 좋지 않아. 생각
이란, 우리가 그걸 따라 그대로 사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어. 너의 <허용된 세
계>는 세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을 넌 알았어. 그리고 두번째 절반을 감추려
고 했어. 신부님들과 선생님들이 그렇듯이. 넌 그걸 감추지 목할거야! 누구도 안
돼, 한 번 생각하기를 시작하고 나면 말이야“-
그 말은 나에게 깊이 와닿았다.
-“하지만”-내가 소리치다시피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금지된 추한 일들
이 있어, 그건 형도 부인하지 못할거야! 그런 일들이 일단 금지되어 있으면 우리
는 그것을 포기해야만 해. 살인 그리고 별별 악덕들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날더러 가서 범죄자가 되라는 거야?”-
-“우리가 오늘 이 이야기를 다 끝낼 수는 없겠다”-막스가 나를 가라앉혔다.
-“널더러 누굴 쳐죽이라든지 소녀를 강간 살인하라는 게 분명 아니야, 아니지.
하지만 <허용되었다>, <금지되었다>라는 것이 사실 무엇인지 통찰할 수 있는
곳에 넌 아직 가보지 못했어. 비로소 하나의 진실을 느낀 것뿐이야. 다른 것이
또 올거야. 그것에 자신을 믿고 내 맡겨봐! 예를 들면, 넌 지금 일 년 전쯤부터,
네 속에서 다른 모든 충동보다 강한 하나의 충동을 느끼고 있을 거야. 그런데
그건 <금지된>것으로 간주되지. 그리스인들 그리고 다른 많은 민족들은 반대로
이 충동을 신성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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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고 큰 축제를 벌이며 그것을 기렸어. <금지되었다>는 것은 그러니까 영
원한 것이 아니야, 바뀔 수 있는 거야. 오늘도 누구든 어떤 여인과 함께 신부님
앞에서 결혼하고 나면, 동침해도 돼. 다른 민족들에게서는 달라, 오늘날도 말이
야. 그러니까 우리들 누구나 자기 스스로 찾아내야 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고 있는지―자기에게 금지되어 있는지. 금지된 것은 결코 할 수 없어. 금
지된 것을 하면 대단한 악당이 될 수 있지. 거꾸로, 악당이라야 금지된 일을 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야.―사실 그것은 그냥 편안함의 문제거든! 지나치게 편안해
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판결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금지된 것 속
으로 그냥 순응해 들어가지. 늘 그러게 마련이듯이 그런 사람은 살기가 쉬워. 다
른 사람들은 운명을 자기 속에서 스스로 느끼지. 그들에게는 어느 명예있는 남
자건 날마다 하는 일들이 금지되어 있어.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폄하되는 다른
일들은 허용되어 있어. 그러니 누구나 자기 자신 편에 서야 해”-
그는 갑자기, 그렇게 말을 많이 한 것을 후회한 듯, 말을 뚝 끊었다.
그가 어
떤 느낌이었는지그때 나는 느낌으로 벌써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편안하게 그리고 겉보기로 경솔하게 그가 떠오른 생각들을 말하곤 했어도, 그가
언젠가 말했듯, <오로지 말을 늘어놓기 위한>대화를 그는 결코 견디지 못했다.
그런데 나에게서는, 진정한 관심과 더불어 너무 많은 유희, 너무 많은 재치있는
수다에 대한 기쁨을 혹은 그 비슷한 무엇을, 간단히 말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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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진지함의 부족을 감지했던 것이다.
방금 내가 써놓은 마지막 말―<완벽한 진지함>―을 다시 읽어보니 갑자기 다
른 장면 하나가 다시 떠오른다. 내가 아직 절반은 어린아이이던 그 시절에 막스
데미안과 겪은 가장 강렬한 장면이다.
우리들의 견진성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종교 수업의 마지막 시간에 최후의 만
찬에 관하여 배우게 되었다. 신부님께는 그것이 중요했고, 그래서 더 신경을 쓰
셨으며, 이 시간에는 얼마만큼 축성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바로 마지막
교리 수업 몇 시간 동안에 나의 생각은 다른 것에 묶여버렸다. 그것도 내 친구
라는 인물에. 교회 공동체 안으로 장엄하게 받아들여지는 의미를 가지는 견진성
사가 닥쳐오는 것을 보면서 내게는 대략 반 년 간의 교리 수업의 가치가 우리들
이 교실에서 배운 것 가운데 있지 않고, 그보다는 데미안의 곁에 있고 그 영향
을 받은 것에 있다는 생각이 물리칠 수 없게 밀려오는 것이었다. 이제 내가 받
아들여질 준비가 된 것은 교회가 아니라,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어
떻게든 지상에 존재함에 틀림없는, 그리고 그 대표자이자 사신(使臣)이 내 친구
라고 느껴졌던,
사상과 개성의 종단(宗團)이었다.
나는 이 생각을 밀쳐놓으려 해봤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견진성사 잔치
를 어느 정도 품위 있게 경험하리라고 엄숙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품
위는 나의 새로운 생각들과는 별로 화합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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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나름의 생각이 있었고, 그 생각이 서서히
다가온 교회 축제에 대한 생각과 연결되어, 나는 이 잔치를 다른 사람들과는 다
르게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그 잔치가 데미안에게서 알게
된 사고의 세계로 받아들여짐을 뜻할 것이었다.
-“우리,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라고 그가 서먹할 만큼 진지하게 말했다.
-“똑똑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전혀 가치가 없어, 아무런 가치도 없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건 죄악이지. 자기 자신 안으로 완전히 기어들 수 있어야
해, 거북이처럼”-
그 직후 우리는 넓은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주목하려고
애썼고, 데미안은 그러는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그가 앉아 있는 내
옆쫏에서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이 왔다. 마치 자리가 보이지 않게 비어 버린 듯
일종의 공허 혹은 서늘함 혹은 그 비슷한 무엇이 느껴졌다. 그 느낌이 조여들기
시작했을 때 나는 옆쪽을 보았다.
거기 내 친구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여느 때처럼 꼿꼿하게 바른 태도로.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여느 때와는 아주 달랐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그에게서 나왔고 무엇인가가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그가 눈을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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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눈을 뜨고 있었다. 눈은 그러나 아무것도 바라
보지 않았다.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굳어져 있었고 내면을 향하여 혹은 아주
먼 곳을 향하여 있었다. 전혀 꼼짝달싹도 않고 그는 거기 앉아 있었다. 숨도 쉬
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의 입은 나무나 돌로 깎아놓은 것 같았다. 그의 얼
굴은 핏기가 없었고 돌처럼, 고르게 창백했다. 갈색 머리카락만 살아 있는 것 같
았다. 그의 두 손은 물건처럼 돌이나 열매들처럼 생명 없이 고요히, 창백하고 까
딱도 없이 그의 앞 긴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맥없이 늘어진 것은 아
니고 숨겨진 강한 삶을 에워싸고 있는 단단하고 훌륭한 껍질 같았다.
그 광경이 나를 떨게 했다. 그가 죽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크게 소리내어 말
할 뻔했다. 그러나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마법에 걸
린 시선을 그의 얼굴에서, 이 핏기 없고, 돌 같은 가면에서 떼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느꼈다. 저게 데미안이었다!고. 나와 함께 걷고 이야기했던 여느 때의 그는
다만 반쪽짜리 데미안 이었다. 이따금씩 한역할을 연기하는, 순응하는, 내키면
함께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진짜 데미안은 저런 모습이었다. 지금 이 사람 같
은, 저렇게 돌 같은, 태고처럼 늙은, 동물 같은, 돌 같은, 아름답고 찬, 죽었는데
남모르게 전대미문의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를
둘러싼 이 고요한 공허, 이 정기(精氣)와 별들의 공간, 이 고독한 죽음!
지금 그가 완전히 자신 속으로 들어가 버렸음을 나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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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로써 느꼈다. 나는 한 번도 저토록 고독해진 적은 없었다. 나는 그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나에게 그는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그가 세상의
가장 먼 섬에 있는 것보다 더 멀리 있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그 광경을 보지 못한 것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가
보아야만 했다. 모두가 전율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주의하지 않
았다. 그가 그림처럼, 우상처럼 빳빳하게 앉아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파
리 한 마리가 그의 이마에 내려앉아 천천히 코와 입술 위를 기어갔다. 그는 주
름살 하나 움칫하지 않았다.
어디에, 그는 지금 어디에 가 있단 말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그는 천국에 가 있는가, 지옥에 가 있는가. 그걸 그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수업 시간 끝에, 그가 다시 살아나 숨쉬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시선이 나의 시선과 맞닥뜨렸을 때 그는 전과 다름없었다. 그는 어디에서 왔을
까? 어디를 다녀왔을까? 그는 피곤해 보였다. 얼굴은 다시 혈색을 되찾았고, 두
손은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갈색 머리카락은 광채가 없었고 피곤해 보였다.
그 다음 며칠 동안 나는 내 침실에서 몇 번인가 새로운 연습에 몸을 내맡겼
다. 깎아지른 듯 몸을 곧추세우고 의자에 앉았다. 눈은 감지 않았다. 전혀 꼼짝
하지 않고 기다렸다. 얼마나 오래 내가 그것을 견뎌내며 그러면서 무엇을 느낄
것인지를. 그렇지만 나는 그저 피곤해지고 눈꺼풀에 심한 경련이 일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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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곧 견진 성사가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중요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
다.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유년은 나의 주변에서 폐허가 되었다. 부모님은 어
느 정도 당황하여 나를 바라보셨다. 누이들은 아주 낯설어졌다. 익숙한 느낌들과
기쁨들을 나에게서 각성이 일그러뜨리고 퇴색시켰다. 정원은 향기가 없었고 숲
은 마음을 끌지 못했다. 내 주위에서 세계는 낡은 물건들의 떨이판매처럼 서 있
었다. 맥없고 매력없이. 책들은 종이였고, 음악은 서걱임이었다. 그렇게 어느 가
을 나무 주위로 낙엽이 떨어진다.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비, 태양 혹은
서리가 나무를 흘러내린다. 그리고 나무속에서는 생명이 천천히 가장 좁은 곳,
가장 내면으로 되들어간다. 나무는 죽는 것은 아니다. 기다리는 것이다.
방학이 지나면 다른 학교로 가기로, 처음으로 집을 떠나기로 결정되었다. 이따
금씩 내게 어머니가 특별히 다정하게 대하시면서, 미리 작별을 하며, 나에게 사
랑, 향수 그리고 잊지 못할 것들을 마음속에 마력으로 심어주려 애쓰셨다. 데미
안은 여행을 떠났다. 나는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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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체
내 친구를 다시 만나지 못한 채, 방학이 끝날 무렵에 나는 성 00시로 갔다. 부
모님 두 분이 함께 오셔서 갖은 세심함을 있는 대로 기울여 나를 어느 김나지움
선생 댁인 소년 하숙집에 맡기셨다. 그때 나를 어떤 일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놓
았는지 아셨더라면 부모님은 놀라서 굳어졌을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내가 좋은 아들, 쓸모 있는 시민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나의
본성이 다른 길들로 밀려갈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부모님의 그늘, 정신의 그늘
속에서 행복하려 했던 나의 마지막 시도는 오래 걸렸고, 가끔 성공하는 듯도 했
지만 결국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견진성사를 마치고 나서 방학 동안에 내가 처음으로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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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게 되었던 묘한 공허와 고립감(후에 이런 감정을 어떻게 또 알게 되었던가,
이 공허, 이 엷은 공기를!)이 그렇게 빨리 지나가지 않았다. 고향과의 이별은 이
상하도록 쉽게 이루어졌다. 더 슬프지 않아 사실은 부끄러웠다. 누이들은 이유없
이 울었다. 나는 울 수 없었다. 내 자신에 대해서 놀랐다. 늘 감정이 풍부한 아
이였는데, 그리고 바탕에 있어서 꽤 선한 아이였는데 지금 나는 완전히 변해 버
렸다. 바깥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관심도 없이 행동했으며 여러 날을 자
신의 내면에 귀기울이고, 강물 소리를, 거기 내 마음속 지하에서 출렁이는, 금지
되어 있는 어두운 강물 소리를 듣는 데만 열중했다. 지난 반 년 동안에 나는 매
우 빨리 자랐다. 그리하여 키가 훌쩍 크고, 마르고 미완성인 채 세계를 들여다보
고 있었다. 소년의 사랑스러움은 내게서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들이 나를 별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나 자신도 느꼈으며 스스로도 자신을 결코 사랑하지 않
았다. 막스 데미안에 대한 커다란 그리움을 자주 느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를
미워도 했으며 몹쓸 병처럼 떠맡은 내 삶의 빈곤화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기도
하였다.
하숙집에서 나는 처음에는 사랑받지도 주목받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나를 놀리다가, 그 다음에는 나로부터 물러났으며 나에게서 음침하고 패기 없는
사람, 불쾌한 괴짜를 보았다. 그런 역할을 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어, 나는 그 역
을 더 과장했으며, 고독 속으로 칩거하였다. 남몰래 자주 비애와 절망의 좀먹히
는 발작에 짓눌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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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도 그 고독은 바깥에서 보면 지극히 남자답게 세상을 경멸하는 것처럼 견고
해 보였다. 학교에서는 새로운 비축없이 집에서 쌓았던 지식만 소모해 나갔다.
이 학급은 전에 다니던 학교에 비해 약간 진도가 뒤처져 있었고, 나는 내 또래
들을 다소 경멸적으로 어린아이들로 보는 습관을 길렀다.
한 해 남짓 그렇게 지나갔다. 방학이 되어 처음 집으로 다니러 왔을 때도 새
로울 게 없었다. 기꺼이 다시 떠났다.
십일월 초였다. 날씨가 어떻든 짧은 산책을 하며 생각에 잠기는 습관이 들었
다. 그런 산책길에 자주 희열 같은 것을 맛보았다. 우수와 세상에 대한 경멸과
자신에 대한 경멸로 가득 찬 희열이었다. 그렇게 나는 어느 저녁 축축하고, 안개
낀 어스름에 도시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거닐었다. 시립 공원의 넓은 가로수 길
이 완전히 버려진 채 나를 부르는 듯했다. 길에는 낙엽이 두껍게 쌓여 있었고,
나는 어두운 쾌락을 느끼며 낙엽들을 바로 헤집었다. 축축하고 쌉쌀한 냄새가
났다. 멀리 있는 나무들이 안개를 뚫고 유령처럼 커다랗고 희미하게 불쑥불쑥
나타났다.
가로수 길 끝에서 나는 어정쩡하게 멈추어 서, 검은 이파리 속을 응시하며 그
축축한 부패와 사멸의 향기를 탐닉하며 들이마셨다. 나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응
답하며 그 향기를 반겼던 것이다. 오, 삶의 맛은 얼마나 김빠졌던지!
곁길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깃 달린 외투를 입은 사람 하나가 다가왔다. 나는
가던 길을 그대로 가려고 했다. 그때 그가 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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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싱클레어!”
그가 따라왔다. 우리 하숙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학생, 알폰스 벡이었다. 나
는 그를 보는 것이 좋았고, 그에 대해 아무런 반감도 없었다. 그가 다른 모든 후
배들한테나 나한테나 늘 비꼬는 듯한 말투에 아저씨답게 군다는 것 외에는. 그
는 곰처럼 힘이 세다고 알려져 있었다. 우리 하숙집 주인도 꼼짝 못하게 제 손
안에 넣었다는 것이었다. 인문 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떠도는 많은 소문의 주
인공이었다.
“여기서 대체 무얼 하지?” 더 큰 사람들이 이따금씩 자기보다 어린 애들 중
하나에게로 다가올 때의 어투로 그가 붙임성 있게 물었다. “자아, 어디 내기해
볼까, 너 시를 지었지?”
“그런 생각 안했는데”나는 무뚝뚝하게 잘랐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곁에서 걸으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가 전혀
익숙지 않은 방식으로였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 싱클레어, 내가 이해를 못할까 하고 말이야. 사람이 이
렇게 안개 속을 걷는다면, 이렇게 가을 생각에 잠겨서 말이야, 그럼 뭐가 있는
거야. 그럴 때는 즐겨 시를 짓지. 난 벌써 알고 있어. 물론 죽어 가는 자연에 대
하여 그리고 자연과 닮은 잃어버린 청춘에 대하여 시를 짓지. 하인리히 하이네
를 봐”
“난 그렇게 감상적이지 않아”하고 내가 막았다.
“그럼 좋도록 하지! 그렇지만 이런 날씨에는 내 생각에는 말이야, 술 한 잔
아니면 그 비슷한 것이 있는 조용한 장소를 찾는게 낫겠어. 같이 가지 않겠어?
나는 지금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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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아주 외롭거든. 싫은 거야? 네가 굳이 모범생이록자 한다면, 이봐, 너를 유
혹할 마음은 없어.”
그 뒤 곧 우리는 어느 조그만 교외 술집에 앉아, 품질이 수상한 포도주를 마
시며 두꺼운 유리잔을 부딪쳤다.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건 뭔가 새로운 것이기는 했다. 나는 술에 익숙지 않은 터라, 곧 몹시 말이 많
아졌다. 내 속에서 창문 하나가 활짝 열린 듯했다. 세계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끔찍하게 오래 나는 영혼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가! 나는 상상의 날개를 펴기 시작했고, 그 한가운데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화젯거리로 내놓았다.
벡은 즐겁게 내 말에 귀기울였다. 마침내 누군가가 내 말에 귀기울이고, 그에
게 내가 무언가를 주는 것이었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를 굉장한 녀석이
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고 뭔가를 전하고 싶은 고이고 고인 욕
구를 실컷 쏟아내는 기쁨에, 인정을 받는다는 기쁨에, 연장자에게서 다소 인정받
는다는 기쁨에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가 나를 천재적인 멋들어진 녀석이라고
불렀을 때는 그 말이 감미로운 독주처럼 영혼 속으로 번졌다. 세계는 새로운 색
깔로 불타고 있었다. 생각들이 수백개의 철철 솟는 샘에서 나와 흘러갔다. 속에
서 정기와 주정의 뜨거움이 활활 타올랐다. 선생님들이며 친구들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했는데, 서로 근사하게 통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리스에 대해서 그리고
이교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벡은 나더러 사랑의 모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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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털어놓게 했다. 그런데 그 점에서는 내가 함께 이야기할 게 없었다. 경
험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야기를 들려줄 아무 경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
고 내가 마음속에서 느끼고,, 구성하고, 상상의 날개를 편 것, 그것은 불타듯 내
속에 들어앉아 있었다. 술로도 풀리지 않았으며 전달할 수 없었다. 여자에 대해
서 벡은 훨씬 더 아는게 많았다. 그리고 나는 열이 올라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
들에 귀기울였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나는 거기서 들었다. 결코 가능하다고 여기
지 않았던 것이 밋밋한 현실 속으로 들어왔고 자명해 보였다. 알폰스 벡은 아마
열여덟 살일텐데 벌써 경험이 많았다. 그 가운데는 소녀들과의 일이 이러저러하
다는 것도 있었다. 소녀들은 자기들에게 아첨하고 예절 바르게 구는 것만 바라
는데 그거야 실로 근사하지만, 진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큰 성공은
나이든 부인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문구점을 하는 야
겔트 부안, 그 부안히고는 이야기가 통하는 것 같으며 그 가계 계산대 뒤에서
벌써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는 책에서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완전히 매료되어 몽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튼, 나라면 야겔트 부인을 곧
바로 사랑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거기에는 내가 한 번 꿈꾸어 본 적도 없는 원천이, 적어도 좀더 나이든 사람들
에게는 솟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딘가 틀린 대목이 있기는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맛은 내가 생각했던 사랑의 맛보다는 보잘것없고 일상적이었다. 그러나 어
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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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그것은 현실이었다. 삶이고 모험이었다. 그것을 이미 경험했고, 그것을 당
연한 일로 보는 사람이 내 곁에 앉아 있었다.
우리들의 대화는 약간 수준 낮은 것이었고, 무엇인가가 빠져 있었다. 나는 이
제 더 이상 천재적인 작은 사나이가 아니었다. 아직 그저 어른의 말에 귀기울이
고 있는 소년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몇 달 동안의 나의 삶보다는 근사했고
낙원 같았다. 그 밖에도 술집에 앉아 있는 것부터 우리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까지 그 모든 것이 내가 비로소 서서히 느끼기 사작한 대로, 금지된 것이었다.
엄격하게 금지된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 가운데서 뜨거운 감정을 맛보고 혁
명적 파격을 맛보았다.
그날 저녁을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둘이, 느지막이 흐릿하게
타고 있는 가스등을 지나, 서늘하고 축축한 어둠 속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접어
들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취해 있었다. 근사하지는 않았다. 극도로 고통스러웠
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또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하나의 매력, 감미로움이 있었
다. 그것은 반란이며 비의였다. 삶이며 정신이었다. 나보고 머리 꼭대기에 피도
안 마른 초보라고 호되게 욕하면서도 벡은 나를 용감하게 떠맡았다. 나를, 절반
은 떠메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집에 와서는 열린 복도 창문으로 나를 살짝 집
어넣고 자기도 그렇게 숨어 들어왔다.
잠깐 죽은 듯 잠을 잔 후 나는 고통스럽게 깨어났다. 술이 깨고 보니, 멍한 고
통이 나를 엄습했다. 나는 침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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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 있었다. 낮에 입었던 셔츠를 아직도 입고 있고, 내 옷가지며 신발은 바닥
에 널려 있고 담배 냄새와 토사물 냄새가 났다. 두통과 메스꺼움과 심한 갈증
사이에서 내가 오래 직시하지 않았던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고향과 부모님 집,
아버지, 어머니, 누이들과 정원이 보였다. 조용하고 아늑한 내 침실이 보였다. 학
교와 시장 광장이 보였다. 데미안과 견진성사 수업 시간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환했다. 모든 것이 흐르는 광채로 에워싸여 있었다. 모든 것이 놀라웠
다. 신성하고 깨끗했다. 그리고 모든 것, 모든 것이 어제만 해도 몇 시간 전만
해도 나의 것이었고, 나를 기다렸는데 지금은, 지금 이 시각에는, 타락하고 저주
받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나를 밀쳐내고 있었
다. 구역질을 내며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가장 먼 유년의 황금빛 정원들까지 되
돌아가 부모님으로부터 경험한 모든 사랑스럽고 친근한 것, 어머니의 입맞춤 하
나하나, 성탄절 하나하나, 집에서의 경건하고 환한 일요일 아침 하나하나, 정원
의 꽃 하나하나, 이 모든 것이 황폐화되엇다. 모든 것을 내 자신의 두 발로 짓밟
아 버렸던 것이다! 지금 추적자가 와서 나를 묶어서 인간 폐물이며 신전 모독자
라고 교수대로 데리고 간다면, 나는 동의하고 기꺼이 따라갔으리라.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르고 합당한 처사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내면의 모습이 그랬던 것이다! 빙빙 돌며 세상을 경멸하던 나!
정신에 있어서 자부심이 충만했고 데미안과 생각을 함께 했던 나! 나의 모습이
그랬다, 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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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혀지고 구역질나고 비열한 인간 폐물이자 잡놈, 야비한 충동의 기습을 받
은 살벌한 야수였다! 모든 것이 정결함, 광채 그리고 우아한 사랑스러움인 저 정
원에서 온 내가, 바하의 음악과 아름다운 시를 사랑했던 내가! 아직도 속이 메스
껍고 격분한 내 귀에 자제력 없이 멍청하게 헉헉 터뜨려대는 취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게 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고통들을 겪는 것에는 상당한 쾌감이 있
었다. 그토록 오래 내가 맹목적이고 둔감하게 웅크리고 있었기에 그토록 오래
내 마음은 침묵하고 가난해져 구석에 앉아 있었기에 그리하여 이러한 자기 고
발, 이 전율, 이 모든 영혼의 불쾌한 감정도 환영받았던 것이다. 감정이 있었다!
불꽃이 솟았다. 그 속에서 심장이 경련하였다! 나는 비참의 한가운데서 해방이자
봄같은 그 무엇을 혼란스럽게 느꼈던 것이다.
밖에서 보면 그동안 나는 착실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처음으로 취한 것
이 곧 처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술집 출입이 잦았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그런데 가담하는 학생들 가운데 나는 제일 어린 축에 들었다. 그
러나 나는 더 이상 ‘끼워주는’어린애가 아니라 주모자요 스타였다. 유명한, 대
담무쌍한 술집 출입객이었다. 나는 다시 어두운 세계, 악마 소속이었고, 그 세계
에서 나는 명사였다.
그러면서도 기분은 참담했다. 나는 자신을 파괴해 가는 방탕 속에서 살아갔다.
학교에서는 지도자이자 굉장한 녀석으로, 대단히 과단성있고 위트 있는 녀석으
로 인정받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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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반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두려우멩 가득 찬 영혼이 불안으로 퍼덕이
고 있었다. 어는 일요일 오전에 어느 술집을 나오다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 눈물 흘렸던 일을 지금도 기억한다. 환하고 즐겁게, 갓 빗질
한 머리에 일요일 정장을 차려입은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보잘것 없는 술집의
더러운 테이블, 맥주가 쏟아져 고인 곳에서, 내가 전대미문의 냉소주의로 내 친
구들을 놀리고 놀라게 하는 동안에도, 실제로 나는 내가 냉소를 보내는 모든 것
에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마음속으로 울며 내 영혼 앞에서, 내 과거 앞에서,
우리 어머니 앞에서, 신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번도 내 동행자들과 하나가 되지 않았다는 것, 그들 가운데서 늘 외로
웠고 그래서 그렇게까지 괴로웠다는 것,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
는 술집의 영웅이었지만 아주 거친 것은 심정적으로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총기가 있었고 선생님들, 학교, 부모, 교회에 대해 나의 생각을 이야기할 때는
패기를 과시했다. 직접 하지는 못했지만 음담패설도 태연히 들었다. 그러나 내
패거리들이 여자들한테로 갈 때 함께 간 적은 없었다. 나는 혼자였고 사랑에 대
한 타는 그리움으로, 절망적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을 누가
들으면 나는 분명 후안무치한 향락자였을 텐데, 그 누구도 나만큼 쉽게 상처받
지 않앗고 그 누구도 나만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때 양가 소녀들이
귀엽고 깨끗하게, 환하고 우아하게 내 앞에서 걸어가는 것을 보아도 그들은 나
에게 놀라운,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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끗한 꿈이었다. 나보다 천 배는 더 선하고 너무 깨끗했다. 한동안 나는 야겔트
부인의 문구점에도 갈 수 없었다. 그 여자를 보고, 알폰스 벡이 그 여자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면 얼굴이 빨개졌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 새로운 친구들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외롭고 남과 다르다는 것을 알
면 알수록, 그만큼 더 나는 거기서 떨어져 나오지 못했다. 술 퍼마시고 허풍치는
것이 나에게 그때 즐거운 일이기나 했는지 그것도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 마시
는 일에도 결코, 번번이 고통스러운 결과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일종의 강압같았다. 나는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을 했다. 달리
나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오래 혼자 있는 것이 두려
웠다. 늘 거기로 마음이 기울었다고 느끼는, 그 많은 부드럽고, 부끄럽고, 은밀한
감정의 내습이 두려웠다. 그토록 자주 엄습하는 연연한 사랑의 생각이 두려웠다.
내게 가장 결핍된 한 가지, 그건 친구였다. 내가 바라보기를 아주 좋아하는 두
셋의 친구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착한 사람들에 속했고, 나의 악덕은 오
래전부터 이미 그 누구에게도 비밀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피했다. 모든 학우
들에게서 나는 두 발 밑의 땅이 흔들거리는, 희망 없이 노는 학생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나는 몇 차례 엄하게 벌을 받
았고, 최종적으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일만 남았는데 그건 내 쪽에서도 기다리는
것이었다. 내 자신도 알고 있었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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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벌써 오래전부터 더 이상 좋은 학생이 아니었다. 퇴학당하기까지 그리 오
래 걸리지 않으리라는 느낌으로 근근히 건들건들 헤쳐가고 있었다.
신이 우리를 외롭게 만들어 우리들 자신에게로 인도할 수 있는 길은 많이 있
다. 그런 길을 그때 신이 나와 함께 갔던 것이다. 악몽과도 같았다. 더러움과 끈
적거림 너머로, 깨진 맥주 잔과 독설로 지새운 밤 너머로 내 모습이 보였다. 내
가, 주문에 걸린 몽상가가, 추하고 더러운 길을 쉬지 않고 고통당하며 기어가는
모습이. 공주님을 찾아가는 길인데, 오물 웅덩이에, 악취와 쓰레기 가득한 뒷골
목에 박혀 있는 그런 꿈들이었다. 내 형편이 그랬다.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이런
식으로 나는, 외로워지도록, 그리고 무정하게 환히 웃는 문지기들이 지키고 있는
잠긴 낙원의 문 하나를 나와 유년 사리올 세우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시작
이었다. 나 자신에 대한 향수의 눈뜸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하숙집 주인의 편지로 경고를 받아 성 00시에 처음 나타나 느
닷없이 나를 마주했을 때만 해도, 나는 놀랐고 움칫했다. 저 겨울 끝무렵 아버지
가 두번째로 오셨을 때 나는 벌써 냉혹하고 무관심했다. 아버지께서 욕을 하시
다가 애원을 하시다가 어머니를 상기시키셨을 때도 모른 척했다. 아버지는 마지
막에는 몹시 격분하여, 내가 달리 안 된다면, 수모와 창피를 무릅쓰고 학교에서
나를 끌고 나와 감화원에 처넣겠다고 하셨다. 그러시라지! 그때 아버지가 떠나시
자 마음이 안됐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셨다. 나에게로 오는 어떤
길도 찾아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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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셨다. 그리고 어떤 때는 일이 그렇게 된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내가 무엇이 되건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특별하고 별로 곱지 못한 식으
로, 술집에 앉아 의기양양하게 굴면서 나는 세상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
다. 그것은 내 나름의 저항의 형식이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망가뜨렸고, 이따
금씩은 내 일을 대략 이렇게 보았다. 세상이 나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면, 나 같은 사람들에게 줄 좀더 나은 자리, 좀더 높은 과제를 갖고 있지 못하다
면, 이제 나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망가지는 거라고. 세상이 손해를 보겠지 뭐.
그 해의 성탄절 휴가는 즐겁지 않았다. 나를 다시 보았을 때 어머니는 놀라셨
다. 더 키가 컸고, 살은 늘어지고 눈 가장자리에 염증이 난 내 마른 얼굴은 잿빛
이고 황폐해 보였다. 콧수염이 돋기 시작한데다 얼마 전부터 쓴 안경이 나를 그
들에게 더욱 낯설어 보이게 만들었다. 누이들은 뒤로 물러나 킬킬거렸다. 모든
게 유쾌하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눈 아버지와의 대화가 씁쓸하였으며 유쾌하지
않았다. 몇몇 친척들의 반가워하는 인사도 유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성탄절 저
녁이 유쾌하지 않았다. 성탄절이란 내가 태어난 이래, 우리 집에서 가장 성대한
날이었다. 잔치 분위기, 사랑과 감사의 저녁, 부모님과 나 사이의 유대를 새롭게
하는 저녁이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이 다만 마음을 짓누르고 당황하게 만들 뿐
이었다. 여느 때처럼 우리 아버지는 벌판의 양치기에 관한 복음서를 읽으셨다.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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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곳에서 양떼를 지켰다.’ 여느 때처럼 누이들은 환히 웃으면서 그들의
선물을 늘어놓은 탁자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음성은 즐겁지 않았고,
얼굴은 늙고 짓눌려 보였으며, 어머니는 슬퍼하셨다. 그리고 나에게는 모든 것,
선물과 덕담, 복음서와 크리스마스 트리 그 모두가 거북하고 또 원하지 않은 것
이었다. 후추와 꿀이 든 랩 케이크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났고, 그보다 더 감미로
운 추억의 뭉게구름이 콸콸 흘러 나왔다. 전나무는 향기를 냈고 이제는 존재하
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저녁과 휴일의 나날이 어
서 끝나기만 바랐다.
온 겨울이 그렇게 갔다. 바로 얼마전에 나는 교무회로부터 심각한 경고를 받
았다. 퇴학의 위험이 임박해 있었다. 오래는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 좋으실
대로, 나야 별로 이의가 없었다.
막스 데미안에게는 특별한 유감이 있었다. 그를 그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성 00시에서의 학창시절 시초에 두 번 편지를 썼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방학 때도 찾아가지 않았다.
가을에 알폰소 벡과 만났던 그 공원에서 초봄에 있었던 일이다. 어떤 소녀가
내 눈에 뜨인 것은 가시나무 울타리가 막 초록이 되기 시작했을 때였다. 꺼림칙
한 생각과 근심으로 가득 찬 채 나는 혼자 산책하고 있었다. 건강이 나빠진 데
다 그 밖에도 지속적으로 돈에 쪼들렸기 때문이다. 학우에게 빚을 지고 있었는
데, 집으로부터 또 조금 받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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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면 필요 불가결한 지출을 꾸며내어야만 했는 데다가, 몇몇 가게에 담배값이
나 뭐 그 비슷한 물건들의 외상도 불어가고 있었다. 이 근심이 몹시 심각해지지
야 않겠지만. 머지않아 여기 있는 것도 끝이 나고 내가 물 속으로 들어가든지
교화 기관으로 보내지면, 이 몇 가지 소소한 일들도 결코 문제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내내 그런 아름답지 못한 일들과 똑바로 대면하며 살았고
그것들에 시달렸다.
그 봄날 공원에서 나의 시선을 몹시 끈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날씬했으며, 멋진 옷차림이었고 영리한 소년의 얼굴이었다. 첫눈에 곧바로
그녀는 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유형으로 나의 상상력을 바쁘게 했다.
그녀는 나보다 별로 나이가 더 들어 보이지 않았지만, 훨씬 성숙하고 고상하고
윤곽이 뚜렷하고, 벌써 완전히 숙녀였다. 그러면서도 내가 지독하게 좋아하던 오
만과 소년다움의 흔적이 얼굴에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마음을 빼앗긴 여성에게 접근하는 것에 성공한 적이 없었는데,
이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인상은 이전의 모든 여성들보다 더 깊었고,
이번에 빠진 사랑이 나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강력했다.
갑자기 다시 하나의 영상이 존경할, 드높은 영상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아, 그
런데 나의 내면에서는 그 어떤 욕구도, 그 어떤 충동도 외경과 숭배만큼 깊고
격렬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주었다. 단테는 읽지
않았지만 베아트리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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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 그림에서 봤는데, 그 복제품을 내가 간직하고 있었다. 그 그림은 영
국 라파엘 전파의 소녀상으로 팔다리가 몹시 길고 날씬하며 얼굴도 작고 길었으
며 두 손과 표정은 영혼이 깃들이 분위기로 표현되어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날
씬한 자태와 소년다움을 보여주고 있고 영혼이 깃들인 분위기를 얼굴에 조금 띠
고 있었어도 나의 아름다운 젊은 소녀는 그 소녀상과 아주 똑같지는 않았다.
베아트리체와 단 한마디도 말을 나눈 적은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당시 나에
게 지극히 깊은 영향을 주었다. 자신의 영상을 내 앞에 내세워 보여준 것이다.
나에게 성소를 열어 주었다. 나를 사원 안의 기도자로 만들었다. 그날로 나는 술
집 출입과 밤에 나돌아다니는 일로부터 멀어졌다. 나는 다시 혼자 있을 수 있었
다. 다시 즐겨 책을 읽었고, 즐겨 산책하였다.
나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충분한 조소를 받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숭배해야 했다. 다시 하나의 이상을 가진 것이었다. 삶은 다시 예감과
비밀에 찬 영롱한 여명이었다. 그 점이 나를 조소에 무관심하게 만들었다.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로 편안히 안착했다. 비록 오로지 존경하는 영상의 노예이자
봉사자가 되어서라도.
얼마만큼의 감동 없이는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없다. 나는 더없이 열렬한 노력
으로, 부서진 삶의 한 시기의 폐허들로부터 자신을 위하여 ‘환한 세계’하나를
지으려 다시 노력해 봤다. 다시 나는 내 속의 어둠과 악을 떨치고 완전히 빛 속
에, 신들 앞에 무릅 꿇고 그대로 머물려는 단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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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욕구 속에서 살았다. 하여튼 지금의 이 ‘환한 세계’는 어느 정도는 내
자신의 창조였다. 어머니에게로 그리고 책임없는 아늑함 속으로 다시 도망쳐 가
고 기어드는 것이 아니었다. 나 자신에 의하여 창안되고 요구된 새로운 예배, 책
임과 자기 기율이 있는 예배였다. 내가 시달렸으며 자꾸만 도피했던 성 문제는
이제 이 성스러운 불 속에서 정신과 기도로 승화되었다. 캄캄한 것은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어떤 추한 것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신음하며 지샌 밤들
도, 방종한 영상들 앞에서 뛰던 심장의 고동도, 금지된 문 앞에서의 도취도, 육
욕도. 그 모든 것 대신 베아트리체의 영상으로 나는 나의 제단을 세웠다. 그리고
자신을 그녀에게 바침으로써 자신을 정신에 그리고 신들에게 봉헌했다. 어두운
힘들에서 내가 뺏어낸 삶의 몫을 나는 환한 힘들에게 제물로 바쳤다. 나의 목표
는 쾌락이 아니라 정결함이었다.
행복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정신성이었다.
이 베아트리체 예배는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어제만 해도 조숙
한 냉소주의자였는데, 나는 지금 성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지닌 사원의 하인이었
다. 나는 내가 익숙했던 평범한 삶을 떨쳤을 쁜만 아니라, 모든 것을 바꾸려고
했다. 모든 것에 정결함, 고귀함, 품위를 부여하려 했다. 먹고 마시면서도 말을
하고 옷을 차려입으면서도 나는 그 생각을 했다. 냉수욕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심하게 자신을 다스려야 했다. 진지하고 품위 있게 처신했으며, 몸을
꼿꼿이했고, 나의 걸음걸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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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느리고 품위있게 했다. 구경꾼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내면에서 그것은 모두 예배였다.
이 모든 새로운 연습들 중 하나가 내게 중요해졌다. 거기에서 나의 새로운 신
념을 위한 표현을 찾아낸 것이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그 영국 베아트리체 상이 저 소녀와 충분히 닮지 않았다는 데서 시작된 일
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그녀를 그리고 싶었다. 아주 새로운 기쁨과 희망
을 가지고 나는 얼마 전부터 갖게 된 내 방에 아름다운 종이, 물감과 붓을 모아
들였고, 팔레트, 유리잔, 도자기 접시, 연필을 가지런히 해놓았다. 그 중에는 크롬
옥시드 그린이 있었다. 그 불타는 초록 물감이 처음 하얀 작은 접시에서 빛을
발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조심스럽게 시작했다. 얼굴을 그리는 것은 어려워, 우선 다른 걸로 시험해 보
았다. 장식품, 꽃 그리고 작은 상상의 풍경, 예배당 곁ㅇ에 선 나무 한 그루, 사
이프러스 나무들이 있는 로마의 다리를 그렸다. 때로는 이 장난 짓에 완전히 정
신없이 빠져들어, 크레파스를 선물받은 어린아이처럼 행복해했다. 마침내 나는
베아트리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나뭇잎 몇 개는 완전히 실패하여 버려버렸다. 때때로 거리에서 마주쳤던 그
소녀의 얼굴을 떠올려보려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잘되질 않았다. 마침내 나는
소녀를 그리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얼굴 하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환상에 따라,
시작만 해놓고는 붓 가는 대로, 물감과 붓에서 저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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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나오는 선에 따라 그렸다. 거기서 나온 것은 꿈꾸었던 얼굴이었다. 별로 불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즉시 시도를 계속했다. 새로운 종이 한 장
한 장이 그 무엇인가를 더 분명하게 말했다. 비록 결코 실물에 가깝지는 않아도
그 유형에는 가까워져 갔다.
나는 점점 더 몽환적인 붓놀림으로 대상이 없는, 장난 같은 더듬음에서, 무의
식에서 나오는 선을 긋고 면을 채우는데 익숙해져 갔다. 마침내 어느 날 거의
의식 없이 얼굴 하나를 완성했는데, 전에 그린 것들보다 더 강하게 나에게 말을
던져 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소녀의 얼굴은 아니었고, 결코 그럴 수도 없었
다. 무엇인가 다른 것, 무엇인가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가
치가 덜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녀의 얼굴이기보다는 오히려 청년의 머리처
럼 보였다. 머리카락은 나의 예쁜 소녀처럼 환한 금색이 아니고 불그스름한 기
운이 도는 갈색이었고, 턱은 강하고 윤곽이 뚜렷했으며, 입은 붉게 꽃피고 있었
다. 그 모든 것이 다소 뻣뻣하고 가면 같았지만, 인상적이고 신비스러운 생명으
로 가득 차 있었다.
완성된 그림 앞에 앉아 있자니, 기이한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내게 일종의 신
상 혹은 성인의 가면처럼 보였다. 절반은 남자고 절반은 여자, 나이가 없고, 의
지가 굳세면서도 몽상적이며, 굳어 있으면서도 남 모르게 생명력 있어 보였다.
이 얼굴은 나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그것은 나의 일부였다. 나에게
요구를 내세웠다.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누군가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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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그 초상이 한동안 나의 모든 생각을 따라다녔고 나의 삶을 함께 했
다. 나는 그것을 서랍에 감추어 두었다. 아무도 그것을 훔쳐보고 그걸로 나를 비
웃게 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혼자 내 작은 방 안에 있을 때면 곧바로,
나는 그 그림을 꺼내어 들여다보곤 했다. 저녁에는 마주 보이는 침대 위쪽 벽지
에 핀으로 붙여놓고, 잠들 때까지 바라보았으며 아침이면 나의 첫 눈길이 거기
로 갔다.
바로 그 시절에 나는 어린아이였을 때 늘 그랬듯이 다시 꿈을 많이 꾸기 시작
했다. 여러 해 동안 꿈을 꾸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 꿈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전혀 새로운 종류의 영상들, 그리고 자주 또 자주 그 초상이 꿈속에서 떠올랐다.
살아서 이야기하며, 친절하거나 혹은 적대적으로, 어떤 때는 얼굴을 찡그렸고 어
떤 때는 무한히 아름답고, 조화롭고, 고귀했다.
그리고 어느 아침, 그런 꿈들을 꾸다 깨어났을 때, 나는 갑자기 그 그림의 실
체를 알아보았다. 그 그림은 참으로 기막히도록 친숙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나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어머니처럼, 아득한 시절
부터 내내 나를 향해져 있었던 것 같았다. 가슴이 뛰며 나는 그림을 응시하였다.
숱 많은 갈색 머리카락을, 절반쯤 여자의 것인 입술을, 특별하게 밝은(저절로 그
렇게 말랐다)뚜렷한 이마를, 그리고 점점 더 분명하게 인식을, 재발견을, 앎을 느
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얼굴 앞에 서서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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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크게 뜬, 초록빛 도는 굳은 두 눈을 들여다보
았다. 그 오른쪽 눈이 다른 쪽보다 약간 더 높이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 오른쪽
눈이 찡긋했다. 가볍고 섬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찡긋했다. 그리고 이 찡긋거
림으로써 나는 그림을 알아보았다.
어떻게 내가 그걸 이렇게 늦게야 비로소 찾아낼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데
미안의 얼굴이었다.
후에 나는 이 그림을 내 기억 속에서 찾아낸 데미안의 진짜 표정과 자주 비교
했다. 비슷하기는 해도 똑같은 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데미안이었다.
언젠가 어느 초여름 저녁, 태양이 비스듬히 붉게, 서향인 내 창으로 비쳐들고
있었다. 방 안은 어스름해졌다. 그때, 베아트리체, 혹은 데미안의 초상을 창살이
교차하는 창문 가운데에 핀으로 꽂아놓고, 석양이 거기로 비쳐들면 어떤지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은 윤곽이 흐릿해 졌지만, 불그스름하게 테 둘린 눈,
환한 이마와 진홍의 입이 종이 면으로부터 튀어나와 속속들이 야성적으로 작열
하였다. 빛이 사라지고 나서도 오랫동안 나는 그것을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
런데 차츰차츰 이것은 베아트리체도 데미안도 아니며 나라는 느낌이 왔다. 그
그림은 나를 닮지 않았으며 그럴 리도 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삶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내면, 나의 운명 혹은 내 속에 내재하는 수호신이
었다. 만약 내가 언젠가 다시 한 친구를 찾아낸다면, 내 친구의 모습이 저러리
라. 언제 하나를 얻게 된다면 내 애인의 모습이 저러리라. 나의 삶
@p 113
이 저럴 것이며 나의 죽음이 저럴 것이다. 이것은 내 운명의 울림이자 리듬이
었다.
그 몇 주 동안 나는 책을 한 권 읽기 시작하였는데, 전에 읽은 모든 것보다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중에도 책을 그렇게 경험한 일은 드물었다. 어쩌면 니
체나 그랬을지. 그것은 노발리스의 책으로 편지와 잠언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
중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모든 것이 말할 수 없이 나를 매혹시켰고 긴
장시켰다. 잠언 하나가 아직도 생각난다. 그 잠언을 펜으로 초상화 밑에 적어놓
았다. ‘운명과 심성은 하나의 개념에 붙여진 두 개의 이름이다’ 그 말을 내가
그때 이해했던 것이다. 베아트리체라고 부른 소녀는 여전히 자주 마주쳤다. 이제
는 아무런 동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늘 한 가닥 부드러운 일치감, 한가닥
감정 넘치는 예감을 느꼈다. 넌 나와 연결되어 있어. 그러나 네가 아니고, 네 영
상만 말이야. 넌 내 운명의 일부거든.
막스 데미안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 다시 거세어졌다. 나는 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몇 해째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꼭 한 번 방학 때 그를
맞닥뜨렸다. 이 짧은 만남을 내 기록에서 일부러 빠뜨렸다는 것을 지금 알겠다.
그것이 부끄러움과 허영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도 알겠다. 만회해야겠다.
한 번은 방학중에, 권태롭고 늘 다소 피곤한 얼굴로, 즉 술집을 드나들던 시절
의 얼굴로 고향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산책용 지팡이를 빙빙 돌리며, 속물들의
변함없이 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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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경멸스러운 늙은 얼굴들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때 내 옛 친구가 마주
오는 것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움칫했다. 그리고 번개처럼 재빨리 나는 프
란츠 크로머를 생각했다. 데미안이 그 이야기를 정말로 잊어버렸기를! 그에 대해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은 무척 불쾌했다. 사실 정말이지 멍청한 어린애들 이야
기였다. 그래도 마음의 빚이 있기는 했다.
내가 그에게 인사하려는 것인지 아닌지, 데미안은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내가
될 수 있는 대로 태연하게 인사를 하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다시금 그
다운 악수였다! 그렇게 굳고, 따뜻하고 그러면서도 서늘하고, 남자다웠다!
그는 주의 깊게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너 컸구나, 싱클레어” 그 자
신은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다. 똑같이 나이 들고, 똑같이 어렸다. 언제나 그렇
듯이.
우리는 함께 어울려 산책을 하며 온통 소소한 일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했고,
그 당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언젠가 몇 번 편지를
썼는데 답장은 못 받았던 생각이 났다. 아, 그가 그것도 잊어버렸으면 좋을 텐
데, 그 멍청한, 멍청한 편지들을! 그는 거기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당시에는 베아트리체도, 초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내 황량한 시절
한가운데 있었다. 교외에서 나는 그에게 함께 술집에 가자고 했다. 그가 따라왔
다. 떠벌리면서 나는 술 한 병을 시키고, 따르고, 잔을 부딪치며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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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식 음주 관습들에 익숙하다는 것을 과시했다. 첫 잔을 단숨에 비우기도 했
다.
“술집에 많이 가는 구나?”그가 나에게 물었다.
“아, 그래”내가 굼뜨게 대답했다. “달리 무얼 하겠어? 그게 결국은 그래도
늘 제일 신나는 일이잖아.”
“그렇게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그것에도 아주 멋진 면이 있긴 해. 도취,
바커스적인 것! 하지만 내 보기에 그런 멋진 요소는 술집에 많이 앉아 있는 대
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아. 바로 술집 출입이야말로 뭔가 정
말 속물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래, 하룻밤, 불타는 횃불을 들고, 제대로 된
멋진 도취와 비틀거림으로! 그거야 좋지. 하지만 그렇게 홀짝홀짝 한 잔 또 한
잔을 마셔대는 것은 아마 진짜가 아닐걸? 이를테면 저녁이면 저녁마다 단골 술
집 식탁에 앉아 있는 파우스트를 상상할 수 있겠어?”
나는 마셨고 적의에 차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지만 누구나 파우스트 같은 사람은 아니지”하고 짧게 말했다.
그는 약간 어리둥절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웃었다. 예전의 신선함과 우월함을 보이며.
“자, 무엇 하러 그런 걸 가지고 너와 다투겠니? 아무튼 술꾼이나 방탕아의
삶은 아마도 나무랄 데 없는 시민의 삶보다 생기있겠지. 그런데, 언젠가 읽었는
데 말이야, 방탕아의 삶은 신비주의자를 위한 최고의 준비의 하나라는군. 예언자
가 된 성 아우구스틴 같은 그런 사람들이 늘 있
@p 116
기도 하고 말이야. 성 아우구스틴은 한 때 향락주의자이자 방탕아였지”
나는 미심쩍었으며 결코 그로부터 훈계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권태롭다
는 듯 말했다. “그래, 누구든 자기 취향에 따르겠지! 털어놓고 고백하면, 나는
예언자나 그런 무엇이 되는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어” 데미안이 가느스름하
게 뜬 눈으로 알겠다는 듯 나를 쏘아 보았다.
“이봐 싱클레어”그가 천천히 말했다. “너한테 유쾌하지 않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었어. 아무려나 어떤 목저긍로 네가 지금 네 잔을 마시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 둘 다 알 수 없어.
하지만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네안에 있는 것은 그걸
벌써 알고 있어.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
는 것 말이야. 미안하지만 난 집에 가봐야겠다.”
우리는 짧은 작별을 했다. 나는 몹시 기분이 언짢은 채 그대로 앉아 내 잔을
다 비웠다. 술집을 나설 대 데미안이 벌써 계산을 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이 나
를 더욱 화나게 했다.
내 생각은 다시 이 작은 사건에 머물렀다. 내 생각은 데미안으로 가득 찼다.
그가 저 교외 술집에서 한 말들이, 기이하게도 신선하게 고스란히 다시 내 기억
속에 떠올랐다.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아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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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 걸려 있는 이제는 완전히 빛이 사라진 그림을 쳐다보았다. 빛이 사라
졌는데도 나는 보았다. 두 눈은 아직도 활활 타고 있었다. 그것은 데미안의 시선
이었다. 혹은 내 속에 있는 사람, 모든 것을 아는 그 사람이었다.
데미안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는 연락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건, 아마도 지금은 어딘가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것, 그의 김나지움 시절이 끝나고 나서 그 어머니가 우리 도시를 떠났다
는 것 뿐이었다.
크로머와의 이야기로 돌아가기까지 나는 내 마음속에서 막스 데미안에 대한
모든 추억을 찾았다. 얼마나 많은 것이 그때 다시 울리기 시작했는지. 그가 언젠
가 나에게 해준 말이나 그 밖의 모든 것이 오늘까지도 의미가 있었고, 당면 문
제였으며, 나에게 관계되었다! 그다지 즐겁지 않았던 우리들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가 방탕자와 성인에 대하여 말한 것도 갑자기 내 영혼 앞에 환하게 떠올랐다.
나에게도 꼭 그렇게 된 것이었을까? 나는 취기와 더러움 속에서, 마비와 상실
속에서 산 것이 아닐까. 마침내 새로운 인생의 충동으로써 바로 반대의 것이, 정
결함에의 욕구, 성스러움에의 동경이 내 마음속에서 살아날 때까지?
그렇게 계속 기억을 따라갔다. 벌써 오래전에 밤이 되었고 바깥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서도 빗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로니에 나무들 밑,
그가 언젠가 프란츠 크로머 때문에 나한테 캐어묻고 나의 첫 비밀들을 알아맞혔
던 때였다. 하나하나가 나타났다. 학교 길에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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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들, 견진성사 수업 시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스 데미안과의 맨 마지막
만남이 떠올랐다. 거기서는 무엇이 문제되었던 것인가? 나는 얼른 대답이 떠오
르지 않았다. 천천히 생각했다. 그 생각에 완전히 침잠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떠오른다. 그것도. 우리들은 우리 집앞에 서 있었다. 그가 나에게 카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알려준 뒤였다. 거기서 그는 우리 집 현관문 위에 붙어 있는, 밑
에서부터 위쪽으로 넓어지는 마감석이 속에 새겨진, 오래되어 마모된 문장에 대
해서 말했다. 그는 말했었다. 그 문장이 흥미롭다고, 그런 것들에 유의해야 한다
고.
그날 밤 나는 데미안과 문장 꿈을 꾸었다. 문장은 끊임없이 모습이 바뀌었다.
데미안이 그것을 두 손에 들고 있었다. 작고 회색인가 하면, 거대하고 여러 색깔
이다. 그러나 데미안은 이것이 그렇지만 언제나 똑같은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나에게 억지로 문장을 먹였다. 그것을 삼키자, 삼킨 문장이
내 속에 살아 있어, 나를 다 채우고 안에서부터 나를 파먹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져 나는 엄청나게 놀랐다. 죽음의 두려움에 가득 차 나는 펄쩍 뛰어
일어나며 잠에서 깨었다.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한방중이었다. 방 안으로 비가 들이치는 소리가 들렸
다. 나는 창문을 닫으려고 일어났다. 그러나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 환한
것을 밟았다. 아침에 보니 그것은 내가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은 종이가 축축해
져서 방 바닥에 놓여 있었고 불룩하게 뒤틀려 있었다. 마르라고 그림을 압지 사
이에 끼워 무거운 책 속에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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넣었다. 다음날 다시 찾아보니, 말라 있었다. 그러나 그림이 달라져 있었다. 붉
은 입이 바랬고 약간 좁아져 있었다. 이제 완전히 데미안의 입이었다.
새 종이에 문장의 새를 그리기 시작했다. 새가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제
는 똑똑히 알 수 없었고 거기서 몇가지는 내가 아는 바로는, 가가이에서도 이제
잘 알아볼 수 업기도 했다. 문장이 낡은 데다가 자주 페인트를 덧칠했기 때문이
었다. 그 새는 무엇인가의 위에 서 있거나 아니면 앉아 있었는데, 어쩌면 한 송
이 꽃 아니면 광주리나 둥우리, 혹은 화관 위였는지도 모른다. 그걸 더 신경 스
지 않고, 뚜렷한 표상을 가진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명확하지 않은 욕구에 따라
나는 즉시 강한 색채로 시작했다. 새의 머리는 내 도화지 위에서 황금빛이었다.
기분 내키는 대로 계속해서 며칠 내로 완성시켰다.
이제 그것은 날카롭고 대담한 매의 머리를 가진 한 마리 맹금이었다. 그의 몸
절반은 어두운 지구 땅덩이 속에 박혀 있는데, 커다란 알에서부터인 듯 땅덩이
에서 나오려고 푸른 하늘 바탕 위에서 애쓰고 있었다. 그림을 꽤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점점 더, 마치 내 꿈 속에서 나타났던 색깔 있는 문장인 것 같
았다.
데미안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나로서는 불가능했던 것 같다. 설령 어디로 보
내야 하는지 알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당시에 내가 매사를 그렇게 처리했던
것과 똑같이 꿈같은 예감에 사로잡혀, 일단 보내고 나서 그림이 그에게 닿든 안
닿든 간에 그에게 매를 그린 그림을 보내기로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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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했다. 겉봉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내 이름도 쓰지 않았다. 가장자리들
을 조심스럽게 잘랐고, 커다란 종이 봉투를 사서 그 위에 내 친구의 예전 주소
를 적었다. 그리고는 보냈다.
시험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여느 때보다 더 학업을 위해 공부해야만 했다.
내가 형편없는 방황을 갑자기 청산하고부터 선생님들이 너그럽게도 나를 다시
받아들이셨다. 당시도 나는 훌륭한 학생은 아니겠지만, 나도 또 다른 누구도, 반
년 전에 나에게 벌로 내려졌던 정학 처분이 누가 봐도 잇음직한 일이엇다는 생
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도 이제는 비난도 위협도 없이 다시 전 같은 어조로 편지를 쓰셨다. 그
렇지만 나는, 아버지에게나 그 누구에게 어떻게 나에게 변화가 일어났는지 설명
할 충동을 느끼지 않았다. 이 변화가 우리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소망과 일치한
것은 우연이었다. 이 변화는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로 데려간 것이 아니었다. 나
를 그 누구에게도 접근시키지 않았다. 나를 오직 더 고독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 어딘가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데미안을, 먼 운명을, 내 스스로야 몰랐다. 그
한가운데 있었잖은가. 베아뜨리체로 일은 시작되었으나, 얼마 전부터 나는 그림
그려진 종이를 그리고 데미안에 대한 나의 생각들과 더불어 살고 있었다. 얼마
나 완벽하게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는지, 바아뜨리체마저 시야에서
생각에서 까마득히 사라졌다. 내 꿈들, 내 기대들, 내 내면의 극심한 변화에 대
해 나는 아무에게도 한마디도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설령 그렇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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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했더라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걸 원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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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내가 그린 꿈 속의 내 친구를 찾아 날아가고 있었다. 너무 놀랍게도 나에게로
답장이 왔다.
학교 우리 반 교실 내 자리에서, 한 번은 쉬는 시간이 끝난 뒤 다음 수업이
미처 시작되기 전에 쪽지 하나가 내책에 꽂혀 잇는 걸 발견했다. 그것은 우리
반 학생들이 수업 시간중에 몰래 서로 쪽지 편지를 보낼 때 흔히 접는 것과 똑
같이 졉혀 있었다. 내가 놀랐던 건 다만, 누가 나한테 그런 쪽지를 보냈을까 하
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어떤 학우와도 그런 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
문이다. 나야 끼지 않을 테지만, 그 어떤 학생다운 장난을 하자는 것이겠거니 하
고 족지를 읽지도 않은 채 앞쪽 책속에 끼워 넣었다. 수업 도중에 우연히 그 쪽
지가 다시 손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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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종이를 만지작거리다 아무 생각 없이 펴게 되었는데 그안에 몇 마디 말이 적
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위로 한 번 시선을 던지고는 말 하나에 사로잡혀 버렸
다. 놀라 읽었다. 그사이 나의 가슴은 운명 앞에서, 큰 추위가 닥친 때처럼 오그
라들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
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이 글줄을 몇 차례 읽은 뒤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어떤 의심도 불가능했
다. 이건 데미안이 보낸 답장이었다. 나와 그 말고 그 새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이 있을 수 없었다. 내 그림을 그가 받은 것이다. 그는 이해하였고 내가 풀이하
는 것을 도운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서로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
리고 무엇보다 나를 괴롭힌 것은 압락사스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수업을 조금도 듣지 못한 채 그 시간이 갔다. 다음 시간이 시작되었다. 오전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그 시간은 젊은 보조 선생님 담당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했
는데, 그렇게 젊다는 것, 그리고 우리들에 대해서 거짓 품위를 보이려 들지 않았
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우리들의 호감을 산 분이었다.
우리들은 그 플렌 선생의 지도로 헤로도투스를 읽고 있었다. 이 강독은 내가
흥미를 가진 몇 안되는 과목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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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였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정신이 딴데 팔려 있었다. 기계적으로 책을 폈으
나, 번역을 따라가지 않고 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무려나 나는 데미안이 그때
종교 수업 시간에 말했던 것이 얼마나 옳은지 이미 몇차례 경험을 통해 알고 있
었다. 사람이 충분히 강렬하게 소망하는 것, 그것은 정말 이루어졌다. 수업중에
내가 아주 강렬하게 내 자신의 생각에 열중하고 있으면, 선생님도 나를 그대로
내버려둘 만큼 열중해 있으면, 나는 조용히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 산만하거나
졸고 있을 때는 선생님이 갑자기 거기 와 계셨다. 여느 때 나도 겪던 일이다. 그
러나 정말 생각하고, 정말 침잠해 있을 때, 그럴 때는 지켜져 있었다. 뚫어질 듯
바라보는 일은 나도 벌써 시험해 보았고 믿을 만한 것임을 알았다. 그때 데미안
과 만나던 시절에는 되질 않았었는데, 이제는 자주, 시선과 생각으로 아주 많은
것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도 나는 그렇게 앉아 헤로도투스로부터 그리고 학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
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 선생님의 목소리가 번개처럼 내 의식을 치고 들
어왔다. 화들짝 깨어났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내 곁네 바싹 다가와
서 계시는 것이었다. 내 이름을 부르신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나를 보시지 않았
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 선생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목소리는 커다랗게 (압락사스) 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처음 부분은 내가 듣지 못했는데 폴렌 선생은 계속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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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었다. “우리는 저 종파의 세계관과 고대의 신비주의적인 합일을, 합리
주의적인 관찰의 입장에서 보듯이 그렇게 단순하게 상상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날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학문이란 고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대신 아
주 고도로 발달되었던, 철학적 신비주의적 진실들을 다루는 연구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부분적으로는, 아마 자주 사기와 범죄로도 이어지는 주술과 게임도 나
왔습니다. 주술에도 고귀한 유래와 깊은 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앞서 예로
들었던 압락사스 학설도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이 이름을 그리스의 주
문과 연관지어 일컫습니다. 오늘날도 미개 민족들이 믿고 있는 마술 부리는 악
마의 이름쯤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압락사스는 훨씬 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
키는 상징적 과제를 지닌 어떤 신성의 이름쯤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 조그만 학식 많은 분은 섬세하고도 열정적으로 계속 이야기를 해나갔다.
주목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압락사스라는 이름이 더 이상 나
오지 않자, 나의 주의력도 내 자신 안으로 가라앉았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한다)는 말의 여운이 귀에 남아 있었다. 여기
서 나는 연결시킬 수 있었다. 그말은 우리 우정의 맨 마지막 시절 데미안과 나
누었던 대화들에서 친숙한 것이었다. 데미안은 당시에 말했었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존경하는 신 하나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는 함부로 갈라놓은 세계의 절
반만 나타낸다고 (그것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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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적이고, 허용된 (환한) 세계였다). 그러나 세계 전체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
다고. 그러니까 악마이기도 한 신 하나를 갖든지, 아니면 신에 대한 예배와 더
불어 악마에 대한 예배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압락사스는 신이
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신이었다.
한동안 나는 아주 열성적으로 계속 그 자취를 찾았다. 진전은 없었다. 압락사
를 찾아 온 도서관을 성과없이 뒤지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기껏해야 손 안에 든
돌 한나에 머물러 있는 진실만을 찾아내는 식의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탐구에 나
의 본질이 깊이 열중하지는 못했다.
얼마 동안 내내 그토록 열중히 존중했던 베아트리체의 영상이 이제 서서히 가
라앉았다. 아니면 오히려 천천히 나로부터 떠나갔다. 점점 더 지평선에 접근해
가서, 더 그림자 같고, 더 멀어지고, 더 빛 바래 갔다. 이제는 영혼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제 특이하게 나 자신 속으로 자아넣은 현존 속에서, 내가 몽유병자처럼 영
위하고 있는 현존 속에서, 새로운 형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삶에의 동경이,
아니 그보다는 사랑에의 동경이 내 안에서 꽃 피었다. 그리고 한동안 베아트리
체 숭배를 통해 해소되ㄹ 수 있었던 성욕이 새로운 영상과 목표를 요구하고 있
었다. 아직 여전히 그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했다. 동경을 기만하고 내 친구들이
그들의 행복을 찾는 그런 소녀들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은 나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불가능했다. 나는 다시 심하게 꿈을 꾸었다. 그것도 밤보다 낮에
더 많이, 상상들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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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들 혹은 소망들이, 내 안에서 솟아올라 나를 바깥 세계로부터 분리시켰다.
현실의 환경보다 내 마음속의 이 영상들, 이 꿈들 혹은 그림자들과 더 현실적으
로, 더 생생하게 교류하며 살았다.
특정한 꿈, 혹은 거듭 나타나는 환상의 유희 하나가 나에게는 극히 중요해졌
다. 이 꿈,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불길한 꿈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내가 부모님 댁으로 간다. 현관문 위에는 문장의 새가 푸른 바탕 위에서 노란색
으로 빛을 내고 있다. 집 안에서는 어머니가 나를 향해 오신다. 그러나 내가 들
어서며 어머니를 포옹하려 했을 때, 그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한 번도 본 적 없
는 인물이었다. 키 크고 힘있는 인물, 막스 데미안이나 내가 그린 그림과 비슷한
데도, 또 달랐다. 그리고 힘이 있는데도 완전히 여성이었다. 이 인물이 나를 자
기에게로 끌어당겨 전율을 일으키는 깊은 사랑의 포옹을 했다. 희열과 오싹함이
뒤섞였다. 나를 포옹한 인물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너무 많은 추억, 내 친구 데
미안에 대한 너무 많은 추억이 유령처럼 서려 있었다. 그 인물의 포옹은 모든
경외심을 배척했으나, 그럼에도 축복의 희열이었다. 자주 나는 깊은 행복감을 느
끼며, 죽음의 두려움과 격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무서운 죄악에서 벗어나듯
이 꿈에서 깨어났다.
다만 서서히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이 완전히 내면적인 영상과 바깥으로부터
내게로 온, 찾아야 할 신에 대한 신호 사이에서 하나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그리
고 이 결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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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더 긴밀해지고 더 내밀해졌으며 나는, 내가 바로 이 예감의 꿈속에서
압락사스를 불렀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희열과 오싹함이 섞이고, 남자와 여자가
섞이고, 지고와 추악이 뒤얽히고, 깊은 죄에는 지극한 청순함을 통해 충격을 주
며, 나의 사랑의 꿈의 영상은 그러했다. 그리고 압락사스도 그러했다. 사랑은 이
제 더이상, 처음에 겁을 먹고 느꼈던 것처럼 동물적인 어두운 충동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또한 더 이상 내가 베아뜨리체의 영상에다 바친 것 같은 경
건하게 정신화된 숭배 감정도 아니었다. 사랑은 그 둘 다였다. 둘 다이며 또 훨
씬 그 이상이었다. 사랑은 천사상이며 사탄이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였고, 인간
과 동물, 지고의 선이자 극단적 악이었다. 이 양극단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을 맛보는 것이 나의 운명으로 보였
다. 나는 운명을 동경했고, 운명을 두려워했지만, 운명은 늘 거기에 있었다. 늘
내위에 있었다.
이듬해 봄에 나는 김나지움을 떠나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아직 어디서 무얼
해야 할 지 몰랐다. 코 밑에는 작은 수염이 자랐다. 나는 성인이었다. 그렇지만
완벽하게 무력했고 목표가 없었다. 단 한 가지, 내 속의 목소리, 그 꿈의 영상만
확실했다. 그 영상의 인도에 맹목적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임무를 느꼈다. 그리고
날마다 나는 반항했다. 내가 돌았나보다고 때때로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걸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해내는 것은 나도 모두 할 수
있었다. 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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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애쓰면 플라톤을 읽을 수 있었고, 삼각법 과제를 풀거나 화학 분석을
따라갈 수 있었다. 단 한 가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내 안에 어둡게 숨겨진 목
표를 끌어내어 내 앞 어딘가에 그려내는 일, 교수나 판사, 의사나 예술가가 될
것이며, 그러자면 얼마나 걸리고, 그것이 어떤 장점들을 가질 것인지 정확하게
아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려내는 일, 그것은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
그런 무엇이 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내가 그걸 안단 말인가. 어쩌면 나도 찾고
또 계속 찾아야겠지. 여러 해를, 그러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고, 어떤 목표에도
이르지 못하겠지. 어쩌면 나도 나도 하나의 목표에 이르겠지만 그것은 악하고,
위험하고, 무서운 목표일지도 모른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자주 나는 내 꿈속 강렬한 사랑의 영상을 그려보려 했다. 그러나 한번도 성공
하지 못했다. 성공했더라면 나는 그 그림 종이를 데미안에게 보냈을 텐데. 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알 지 못했다. 내가 아는 건 오직, 그가 나와 결합되
어 있다는 것뿐. 언제 그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베아트리체 시절의 저 몇 주일, 몇 달의 다정한 안정이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
나의 섬에 도달했고 평화를 찾아냈다고 그때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늘 그랬다.
하나의 상태가 나에게 좋아지자마자, 하나의 꿈이 내게 편안해지자마자, 그것은
어느새 벌써 시들고 흐려졌다. 부질없다. 그 뒷모습을 보며 탄식함은! 나는 이제
가라앉지 않은 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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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 팽팽한 기대의 불 속에 살고 있었다. 그것은 자주 나를 완전히 난폭하게
미치게 만들었다. 꿈의 여인의 영상이 자주 살아있는 연인의 모습보다 더 똑똑
하게 눈앞에 보였다. 내 자신의 손보다 훨씬 더 똑똑하게 , 그 영상과 더불어 나
는 이야기 했고, 그 앞에서 울었고, 거기서부터 도피했다. 나는 그것을 어머니라
고 부르고 그 앞에서 눈물를 흘리며 무릎 꿇었다. 연인이라고 불렀고 모든 것을
이루어주는 그 성숙한 입맞춤을 예감했다. 그것을 악마며 창녀, 흡혈귀며 살인자
라고 부르면, 그 영상은 더할 나위없이 애정어린 사랑의 꿈으로 파렴치한 황음
으로 나를 유혹했다. 그 무엇보다도 그 영상에게는 지나치게 선하고 귀하지 않
았다. 그 무엇도 너무 나쁘고 저열하지 않았다.
온 겨울을 나는 묘사하기 어려운 내면의 폭풍속에서 보냈다. 외로움에는 오래
전부터 익숙해 있었다. 외로움은 나를 짓누르지 않았다. 나는 데미안과, 새와, 내
운명이자 내 연인이었던 위대한 꿈속의 영상과 함께 살았다. 그 안에서 살기에
충분했다. 모든 것이 위대함과 광대함을 지향하고 있었고, 모든 것이 압락사스의
암시였다. 그러나 이 꿈들 중 어느것도 나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어느 것도 내가
부를 수는 없었다. 그것들이 와서 나를 가졌다. 나는 그것들의 다스림을 받았다.
그것들에 의해 살았다.
바깥으로는 내가 아마 안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
것을 내 학우들도 알아서 내게 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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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는 존경을 보내어, 자주 나의 미소를 자아냈다. 원한다면 나는 그들 대부분
을 아주 잘 꿰뚤어볼 수 있었고 이따금씩 그렇게 해서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었다. 다만 내게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드물게 생기거나, 전혀 생기지 않았
다. 나는 늘 나에게 열중해 있었다. 늘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이제 마침내 한 번
인생의 한 토막을 살아보기를, 나에게서 나온 무엇인가를 세계 안에다 주기를,
세계와 관계를 가지고 싸움을 벌이게 되기를 열렬히 갈망했다. 이따금씩, 저녁에
거리를 걸을 때 그리고 초조로 자정까지도 집으로 돌아올 수 없을 때, 그럴때
나는 이따금씩 생각했다. 지금, 바로 지금 틀림없이 나의 연인이 내게로 오고 있
을 거라고, 다음 모퉁이를 지나고 있을 거라고, 그 모든 것이 때로는 견딜 수 없
이 고통스러워 죽어버릴 작정도 했었다.
당시에 나는 흔히들 말하는 대로 우연에 의해서 특이한 도피처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런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
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찾아내면,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우연이 아니
라 그 자신이, 그 자신의 욕구와 필요가 그를 거기로 인도한 것이다.
두세 번 시내를 오가는 길에 어느 교외의 자그마한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 소
리를 들었다. 거기 머물지는 않았었다. 다음번에 지나갈 때, 그 소리를 또 들었
다. 그리고 바하가 연주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문으로 갔다. 문은 잠겨
있었다. 그리고 골목에는 거의 사람이 없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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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방충석에 앉아 외투 깃을 세우고는 귀귀울였다.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
은 오르간이었다. 그런데 연
주가 놀라웠다. 최고도로 개인적인 의지와 끈질김의 표현이어서 마치 기도처럼
들렸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연주하고 있는 사람은 그 음악 안에 보물
하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얻듯 이 보물을 얻어내
려고 구하고, 가슴 뛰고, 애쓰고 있다고. 나는, 테크닉면에서는 음악을 별로 많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바로 이런 영혼의 표현은 어린 시절부터 본능적으로 이해했
으며 내 마음속에서 음악적인 것을 자명한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음악가는 이어서 현대음악도 연주했다. 레거의 곡인 것 같았다. 교회는 거의
완전히 어두웠다. 다만 아주 엷은 빛줄기 하나가 바로 옆 창문을 뚫고 들고 있
었다. 음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 다음에는 이리저리 거닐고 있자니 마침
내 오르간 연주자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보다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 젊은 사
람이었다. 체격이 다부지고 땅딸막 하였는데, 힘차면서도 내키지 않는듯한 걸음
으로 급히 그곳을 떠났다.
그때부터 이따금씩 니는 저녁시간에 그 교회 앞에서 앉아 있거나 오락가락했
다. 한 번은 문이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오르간 연주자가 높은 곳에 매달린
빈약한 가스등 불빛 속에서 연주를 하는 동안, 나는 떨면서도 행복하게 반 시간
을 교회 회중석에 앉아 있었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에서 내가 들은 것은 그 사
람 자신만이 아니었다. 그가 연주하는 모든 것이 자기들끼리 밀접한 관계를 맺
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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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듯했다. 남모르는 연관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연주하는 모든 것에
신앙심이 담겨 있었다. 헌신적이고 경건했다. 그러나 교화 가는 사람들이나 목사
님들처럼 경건한 것이 아니라 중세의 걸인 순례자처럼 경건했다. 모든 종파를
초월하는, 세계 감정에의 남김없는 헌신으로 경건했다. 바하 이전의 대가들, 그
리고 옛 이탈리아인들의 음악이 노련하게 연주되었다. 그리고 모든 연주곡들이
한결같이 같은 것들을 말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 음악가의 영혼속에 담긴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움, 더없이 열렬한 세계의 포착, 세계와의 가장 난폭한 재
결별, 자신의 어두운 영혼에 대한 절실한 귀기울임, 헌신에의 도취와 경이로움에
대한 깊은 호기심을.
한번은 교회에서 나오는 오르간 연주자를 몰래 따라 갔는데, 멀리 도시 외곽
의 작은 선술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마음에 맞서지 못하고 이끌린 듯 그를
뒤따라갔다. 거기서 처음으로 그 사람의 모습을 똑똑하게 보았다. 작은 술집 한
모퉁이에 있는 주인 맞은편 테이블에, 머리에는 까만 펠트직 모자를 쓰고, 포도
주를 한 잔 앞에 놓은 채 그는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
같았다. 못생겼고, 약간 거칠었으며, 탐색적이고, 완고하고, 고집스럽고, 의지에
차 있었다. 그러면서도 입 주위는 부드럽고 어린아이 같았다. 남성다운 강함은
모두 눈과 이마에 모여 있었다. 얼굴의 아래 부분은 여리고 미완성이었다. 자제
되지 않고 부분적으로는 약간 약했다. 우유부단함이 여실히 보이는 턱은, 이마나
시선과는 대조적으로 소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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웠다 자부심과 적의에 찬, 짙은 갈색 눈이 호감을 주었다.
말없이 나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술집에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쫓아 버리려는 듯이, 그는 나를 쏘아 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버텨냈으며 마침내
그가 우악스럽게 툴툴거릴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
엇 때문에 그렇게 빌어먹게 쏘아본단 말요, 나한테 원하는 거라도 있소?”
“선생님한테 원하는 건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벌써 선생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요”
그가 이마를 찌푸렸다.
“그래, 음악 팬이오? 음악에 얼빠지는 것이 난 구역질나는데”
나는 놀라 물러서지 않았다.
“벌써 선생님 음악을 들었습니다. 저 바깥 교회에서요” 내가 ㅁ말했다. “아
무튼 귀찮게 해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선생님 곁에서 어쩌면 무얼 찾아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뭔가 특별한 것,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선생님
께서는 제 말은 전혀 듣고 싶지 않으신 것 같군요! 저는 선생님께 귀기울이는데
요. 교회에서 말입니다”
“난 언제나 문을 잠그느데”
“최근에 그걸 잊어버리셨습니다. 저는 안에 앉았구요. 보통 때는 바깥에 서
있거나 방충석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요? 다음번에는 들어오시구려, 안은 한결 따뜻하오. 그럴 때는 그냥 문
을 노크하시오. 노크는 힘차게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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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요. 내가 연주하는 동안은 하지 말고. 자 시작합시다. 무슨 말을 하려 했소?
아주 젊은 사람이로군. 아마 학생이거나 대학생이겠군. 음악가요? ”
“아뇨. 음악을 즐겨 듣습니다. 그러나 그냥, 선생님이 연주하시는 것 같은 거
요. 아주 절대적인 음악을요. 거기서는 한 인간이 천국과 지옥을 흔들고 있다고
느껴지는 그런 음악을요. 음악이 몹시 좋아요. 음악은 별로 도덕적이 아니기 때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것은 도덕적이지요. 저는 도덕적이지 않은 무엇
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저는 도덕적인 것에는 늘 시달렸거든요. 자신을 잘 표현
할 수가 없는데요. 아시죠,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인 신이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
그런 신이 있었다지요. 그런 이야길 들었습니다”
음악가는 넓은 모자를 약간 뒤로 젖히고 검은색 머리카락을 넓은 이마로부터
흔들어 쓸어냈다. 그러면서 나를 꿰뚫듯 바라보며 테이블 넘어 나에게로 얼굴을
숙이는 것이었다.
나직하면서도 호기심에 찬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조금전에 말한 신의 이름
이 뭐요?”
“유감스럽게도 그 신에 대해서는 거의 모릅니다. 사실 이름밖에 몰라요. 그
이름은 압락사스입니다”
음악가는 미덥지 않다는 듯 주위를 둘러 보았다. 마치 누군가가 우리를 엿듣
기라도 하듯이. 그러더니 나에게로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려니 했소.
당신은 누구요?”
“저는 김나지움 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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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락사스는 어디서 알았소?”
“우연히 알았습니다”
그는 테이블을 쳤다. 그의 술이 잔에서 넘쳤다.
“우연이라구?... 멍청한 소리 하지 말아, 이 사람아! 압락사스는 우연히 알게
되는 게 아니야. 알아두게. 압락사스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할테니. 난 압락사스에
대해 좀 알거든”
“그가 입을 다물고 자기가 앉은 의자를 뒤로 밀었다. 잔뜩 기대에 차서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서는 아니고 다음번에 그때 들으시오”
그러면서 그는 벗어 놓은 자기 외투 호주머니를 뒤져, 군 밤 몇개를 내게로
던졌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서 먹엇고 매우 만족했다.
“그러니까!” 그가 한참 뒤에 나직이 말했다. “어디서 알았소, 그에 대해서?
” 나는 망설이지 아노고 말했다.
“저는 혼자였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때 예전의 친구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아는 게 많다고 생각했던 친굽니다. 무언
가를, 새 한마리를 그려 놓았거든요. 지구를 뚫고 나오려는 새였습니다. 그 그림
을 그에게 보냈습니다. 얼마 뒤, 이제 답장을 받으리라고 기대도 안하게 되었을
때 쯤, 쪽지 하나를 손에 받았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새는 알에
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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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라고요”
그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우리는 밤 껍질을 벗겨 포도주에 곁들여 먹었다.
“한 잔 더 할까?” 그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술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는 다소 실망하여 웃었다.
“좋으실 대로! 난 술을 좋아하지. 난 여기 좀더 있을테니 먼저 가보시오!”
그 다음번 오르간 음악이 끝난 뒤 그와 함께 걸었을 때, 그는 별로 이야기하
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어느 오래된 골목 안, 낡았지만 위풍 있는 집 위층
으로 인도해 올라갔다. 커다랗고, 다소 황량하고 지극히 볼잘것 없는 방안으로,
거기에는 피아노 한대 외에는 음악과 상관있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편, 커다란 책장과 책상이 있어 무언가 학자의 방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책이 참 많으시군요!‘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그 일부는 우리 아버지 장서요. 아버지 댁에 살고 있거든. 그래, 젊은이, 난
아버지 어머니 집에 살아. 그러나 자네를 부모님께 소개할 수는 없어, 나의 교우
관계가 여기 집안에서는 큰 존중을 못 받거든. 나는 버려진 자식이오, 아시겠지.
우리 아버지는 빌어먹게 존경할 만한 분이시지, 이 도시에서 유명한 신부님이고
설교자시지. 그런데 나는, 바로 환히 알아두시도록 말하자면, 그 분의 재능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아드님이시고, 그러나 궤도를 벗어나 어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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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돌아버린 아들이지. 나는 신학도였는데 국가고시 직전에 그놈의 답답한 대
학을 그만두어버렸오. 사실 개인적인 연구를 얘기한다면, 나는 여태도 신학도인
데 말이오. 때에 따라 사람들이 어떤 신들을 그때그때 생각해 내었는지, 그것이
나에게는 늘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소. 그 이외에 나는 지금 음악가이며, 곧 자그
마한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얻게 될 것 같소. 그러면 나도 다시 교회에 돌아가
게 되는 거지“
나는 꽂힌 책들을 작은 스탠드의 약한 불빛이 비쳐주는 데까지 죽 살펴보았
다.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책 제목들이 보였다. 그 사이 그 사람은 벽 곁
방바닥 캄캄한 데 엎드려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이리 와보시오” 그가 한참 뒤에 말했다. “우리 지금 철학 좀 해봅시다. 철
학한다는 건(아가리 닥치고 배깔고 엎드려 생각하기) 라고 하오”
그는 성냥을 켜서 그의 앞에 있던 벽난로 속의 종이와 장작에 불을 지폈다.
불꽃이 높이 솟았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불을 쑤석였다. 나는 그 곁, 낡아 올
이 풀린 양탄자 위에 드러누었다. 그는 불을 응시했다. 불은 내 마음도 끌어당겼
다. 우리들은 말없이 아마 한 시간은 배를 깔고 타닥거리는 장작불 앞에 엎드려,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싯싯거리고 가라앉아 휘어지고 가물거리고 움칫거리다 마
침내는 사그라진 조용한 화염 속에서 잦아드는 모습을 바라 보았다.
“배화는 인간이 창안해 낸 것 중 가장 멍청한 짓만은 아니었어” 그는 혼자
서 한번 웅얼거렸다. 그 밖에는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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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 누구도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굳어진 눈으로 불을 응시하며 꿈과 정적
속으로 침잠하며, 연기 속에서 어떤 영상들을 보았고 재 속에서도 영상들을 보
았다. 한 번은 내가 화들짝 놀랐다. 함께 불을 보고 있던 그 사람이 이글거리는
불 속에 송진을 조금 던졌던 것이다. 조그맣고 날렵한 불꽃이 솟았다. 그 속에서
나는 노란 색 매 머리를 가진 그 새를 보았다. 꺼져 가는 난롯불이 황금빛으로
작열하는 실 가닥을 한데 모아 그물로 만들었다. 문자와 영상들이 나타났다. 문
득 정신이 들어 상대방 쪽을 바라보자 그는 턱을 두 주먹 위에 놓은 채, 몰두하
여 신들린 듯 재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가야겠는데요” 내가 나직이 말했다.
“그럼, 가시오. 또 봅시다”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등불이 꺼졌기 때문에 어두운 방과 어두운 복도며 계
단을 간신히 지나, 그 저주받은 낡은 집을 더듬어 나왔다. 거리에서 멈추어 그
낡은 집을 쳐다보았다. 어느 창에도 불빛이 없었다. 주석으로 만든 작은 문패가
문 앞의 가스등 불빛 속에서 반짝였다.
(수석 신부 피스토리우스)라고 적혀 있었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혼자 내 작은 방에 앉아 있을 때 비로소, 내가 압락사
스에 대해서도, 피스토리우스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듣지 못했으며 우리가 주고
받은 말이 열마디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집을 찾아갔던
것에 아주 만족했다. 게다가 그 다음번에는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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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오래된 오르간 작품인 북스테우데의 파사칼리아를 들려주겠다고 약속
했던 것이다.
나는 몰랐지만, 내가 그와 함께 벽난로 앞 그의 침울한 은둔자 방의 바닥에
누워 있던 그때 오르간 연주자 파스토리우스는 나에게 첫 수업을 해준 것이었
다. 불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 나는 기분 좋았다. 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내 안에 잠재되어 있었지만 사실 한 번도 보살핀 적이 없었던 내면의 성향들을
강화하고 확이시켜 주었다. 차츰 내게는 부분 부분 그것들이 명확해졌다.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나는 때때로 기괴한 형태를 가진 자연물을 바라보는 버
릇이 있었다. 그냥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유한 마력, 그 얽히고 설킨 깊은
언어에 깊이 몰두하여 관찰했다. 고목처럼 드러난 길다란 나무 뿌리, 암흑 속의
색색깔 광매, 물 위에 뜬 기름 얼룩, 유리에 난 금- 그런 것들이 종종 나에게 커
다란 마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물과 불, 연기, 구름, 먼지, 그리고 눈을 감으면 보
이는 아주 특별하게 선회하는 색 얼룩이. 피스토리우스를 처음 찾아간 뒤 며칠
동안 그런 것들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왜냐하면 그 이후 내가 느낀 활기와 기
쁨, 내 감정의 고조는 그대로 드러난 불을 오래 응시한 덕분이라는 것을 알아차
렸기 때문이다. 불을 응시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기분 좋고 풍요로워지는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내가 그때까지 본래의 삶의 목표로 가는 길에서 찾아낸 얼마 안 되는 경험들
에 이 새로운 경험이 추가되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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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비이성적이고, 얽히고 설킨, 기이한 자연의 형
태들에 몰두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서, 이 영상을 이루어지게 한 우리 내면의 의
지와의 일치감을 낳는다.- 우리는 곧 그 일치감을 우리들 자신의 기분으로, 우리
들 자신의 창조로 여기려는 유혹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와 자영 사이의 경계가
흔들리고, 흐려지는 것을 보고, 분위기를 알게 된다. 그 분위기 속에서 우리 망
막 위의 이 영상들이 바까ㄷ의 인상들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내면의 인상에서 비
롯된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 어디에서도 이런 연습에서처럼 간단하고
쉽게 발견해낼 수 없다. 우리가 얼마나 창조자인지, 우리 영혼이 얼마나 지속적
으로 세계의 끊임없는 창조에 관여하는지를. 우리들 안에서 그리고 자연 안에서
활동하는 것은 오히려 똑같은 불가분의 신성이다. 바깥 세계가 몰락한다 하여도
우리들 중 하나는, 그 세계를 다시 세울 능력이 있다. 산과 강, 나무와 잎, 뿌리
와 꽃, 자연의 모든 영상이 우리들 마음속에 미리 만들어져 있어서 영혼에서 나
오기 때문이다. 영혼의 본질은 영원이며, 그 본질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본질은 대개 사랑하는 힘과 창조력으로 우리가 느낄 수 있도록 주어진다.
몇 해가 지나서야 나는 어느 책에서 이 관찰을 뒷받침할 여러 근거들을 발견
하였다. 즉 많은 사람들이 침을 뱉어 놓은 담벼락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훌륭
하고 깊이 자극을 주는지에 대해서 언젠가 이야기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축축
한 담벼락에 있는 그 얼룩들 앞에서 그는 피스토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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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내가 불 앞에서 느낀 것과 똑같은 것을 느꼈다. 우리들이 다음번에 함께
있게 되었을 때 그 오르간 연주자는 설명했다.
“우리는 우리의 개성의 경계를 늘 너무나도 좁게 긋고 있어! 우리는 늘, 우리
가 개인적인 것이라고 구분해 놓은 것, 상이하다고 인식하는 것만 개성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총체로 이루어져 있어. 우리 하나하나가 말이야.
그리고 우리 몸이 진화의 계보를,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훨씬 멀리까지,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도 일찍이 인간 영혼들
속에 살았던 모든 것을 지니고 있지. 그리스인들이나 중국인들에게서든 아프리
카 토인들에게서든 일찍이 존재했던 모든 신과 악마, 모두가 우리들 속에 있어.
거기 있는 거야. 가능성으로, 소망으로, 탈출구로, 인류가 멸종하고, 아무런 교육
도 받지 않았지만 상당한 재능을 지닌 어린아이 하나만 남는다면, 이 아이는 사
물들의 전체 과정을 다시 찾아낼 거야. 그애가 신이 되어 수호신, 낙원, 계율과
금기, 신약과 구약, 모든 것이 다시 만들어질 수 있을 거야”
“좋습니다” 내가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어디에 개인의 가치가 있습니
까?” 우리가 모든 것을 우리들 속에서 이미 완성된 상태로 가지고 있다면 왜
우리는 아직도 죽는 거지요?“
“그만” 페스토리우스가 격하게 외쳤다. “세계를 그냥 자기 속에 지니고 있
느냐 아니면 그것을 알기도 하느냐, 이게 큰 차이지. 미친 사람이 플라톤을 연상
시키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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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놓을 수 있고, 헤른후트파 학교의 신앙심 깊은 조그만 학생이 영지파나 조
로아스터에서 나타나는 심오한 신화적 연관을 창조적으로 숙고할 수도 있어. 그
러나 그들은 세계가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몰라. 한그루 나무거나 돌인 거지.
기껏해야 동물이고. 그 사실을 모르는 한에서는 말이야. 그러나 이런 인식의 첫
불꽃이 희미하게 밝혀질 때, 그때 그는 인간이 되지. 자네는 그렇다고 모두를,
저기 거리를 걸어다니는 두 발 달린 것 모두를, 그들이 똑바로 걷고 새끼를 아
홉 달 뱃속에 품고 있다고 해서 인간이라고 여기지는 않겠지?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물고기거나 양, 버러지거나 거머리인줄은 아시겠지. 얼마나 많은 사
람들이 개미들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별들인지! 자아, 그들 하나하나 속에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지. 그러나 각자가 그 가능성들을 예감함으로써, 부분적으
로는 심지어 그것들을 의식하는 것을 배움으로써 비로소 그 가능성들은 자기 것
이 되는 거라네”
우리의 대화는 대략 이런 식이었다. 대화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 전적으로 놀
라운 것이 나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모두가, 가장 진부한 대화도, 나직하고
꾸준한 망치질로 내 마음속의 한 점을 계속 두드렸다. 모든 대화가, 나의 형성에
도움이 되었다. 모든 대화가 내 허물을 벗는 일에, 알 껍데기를 부수는 일에 도
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화 하나하나에서 짓부수어진 세계의 껍데기를 뚫
고 마침내 나의 노란색 새가 머리를 조금 더 높이, 조금더 자유롭게 쳐들어, 그
아름다운 맹금의 머리를 불쑥 내미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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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빈번히 우리들은 서로의 꿈을 이야기했다. 피스토리우스는 꿈 풀이를 할 줄
알았다. 놀라운 예 하나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내가 날 수 있는 꿈을 꾸었
다.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어느정도 큰 도약으로 대기를 가르고 내던져
졌다. 이 비상의 느낌은 기운을 복돋우는 것이었으나, 내가 의지도 없이 위태로
운 고공을 홱홱 날게 되자 그것은 곧 두려움으로 변했다. 그러나 호흡을 멈추었
다가 한꺼번에 힘껏 토하는 식으로 나의 상승과 하강을 조절할 수 있다는 구원
같은 발견을 했다.
그 꿈에 대해 피스토리우스는 말했다. “자네를 날게 만든 도약, 그것은 누구
나 가지고 있는 우리 위대한 인류의 재삼이지. 그것은 모든 힘의 뿌리와 연결되
어 있다는 느낌이지. 그러나 그러면서도 곧 두려워져! 그것은 빌어먹게 위험하
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렇듯 차라리 날기를 포기하고 법 규정에 따라
인도 위를 걷는 쪽을 택하지. 그런데 자네는 아니야. 자네는 계속 날고 있어. 유
능한 젊은이에게 합당한 대로 말이야. 그리고 보게. 자네는 놀라운 것을 발견하
네. 자네가 점차 그 주인이 된다는 것을 말이야. 자네를 계속 낚아채 가는 커다
랗고 알 수 없는 보편적인 힘에다가 하나의 섬세하고 작은 자신의 힘이 더해지
는 것을 발견하네. 하나의 기관, 하나의 방향키 말일세! 이건 대단한 거야. 그것
이 없다면 그냥 공중에 떠 있을 테지. 미친 사람들이 그렇듯 말이야. 자네에게는
인도를 걸어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보다 더 깊은 예감이 주
@p 145
어졌어. 그러나 거기에 맞는 열쇠와 방향 키가 없어. 바닥 없는 곳으로 솨악
빨려들고 있지. 그러나 자네는 말이야, 싱클레어, 자네는 그 일을 하고 있어! 그
런데 어떻게냐구? 그건 자네가 아직 전혀 모르겠지. 자네는 그것을 새로운 기관,
즉 하나의 호흡조절기를 가지고 하고 있어. 이제 자네의 영혼이 근본에 있어서
얼마나 (개인적) 이지 못한가를 알 수 있을 거야, 이런 조절기를 고안해 낸 게
자네의 영혼은 아니니까 말이야. 조절기란 새로운 게 아니야! 그것은 일종의 차
용이지.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하는 거야. 그것은 물고기의 평형 기관- 부레지. 실
제로 부레가 동시에 허파여서 상황에 따라서는 정말로 숨 쉬는데 부레를 이용하
는, 진화가 덜 된 희귀한 물고기 몇몇 종류가 오늘날에도 있지. 그러니까 자네가
꿈에서 날 때 비행용 기포로 사용한 허파와 한 치도 안 틀리고 똑같이 말이야!
”
그는 나에게 동물학 책가지 한 권 가져와 그 진화가 덜 된 물고기들의 이름과
도판도 보여주었다. 나는 마음속에서 한 가닥 특이한 전율을 느끼며 진화의 초
기 단계에서 나온 기능 하나를 생생하게 느꼈다.
@p 146
야곱의 싸움
특이한 음악가 피스토리우스로부터 압락사스에 대하여 들은 것을 짧게 다시
들려줄 수 없지만 그에게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로 가는 길 위의
또 한 걸음이었다. 나는 당시에 열여덟 살의 평범치 않은 젊은이였다. 수백가지
일에 조숙하고, 다른 수백가지 일에서 몹시 뒤처지고 무력했다. 때때로 다른 사
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자주 우쭐하고 교만했으나, 또 꼭 그만큼 자주 의기소
침하고 굴욕스러워했다. 어떤 때는 자신을 천재로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절반쯤 돌았다고 생각했다. 또래들의 기쁨과 생활을 같이 하는 것이 잘 되질 않
았고, 자주 비난과 근심으로 자신을 소모했다. 마치 내가 절망적으로 그들로부터
떨어져 있기라도 하듯이, 마치 내게 삶이 닫혀져
@p 147
있기라도 하듯이.
그 자신이 성숙한 괴짜였던 피스토리우스는 내게 용기와 스스로에 대한 존경
을 간직하는 법을 가르쳤다. 내가 한 말들, 내가 꾼 꿈들, 나의 환상과 생각에서
늘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언제나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논평하면서 그는 나에게 예를 제시했다.
그가 말했다. “나에게 이야기 했었지. 음악을 사랑하는 건, 음악이 도덕적이
지 않기 때문이라고. 나야 아무래도 괜찮은 일이지. 하지만 자네 자신이 도덕주
의자가 아니기도 해야지! 자신을 남들과 비교해서는 안돼, 자연이 자네를 박쥐로
만들어 놓았다면, 자신을 타조로 말들고 해서는 안 돼. 더러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자신을 나무라지. 그런
나무람을 그만두어야 하네. 불을 들여다보게. 예감들이 떠오르고 자네 영혼 속에
서 목소리들이 말하기 시작하거든 곧바로 자신을 그 목소리에 맡기고 물질랑 말
도록.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님 혹은 그 어떤 하느님의 마음에 들까 하고 말이
야. 그런 물음이 자신을 망치는 거야. 그런 물음들 때문에 인도로 올라서는 것이
며 화석이 되어가는 거지. 이봐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압락사스야. 그런데 그는
신이면서도 사탄이지. 그 안에 환한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가지고 있어. 압락사
스는 자네 생각 그 어느 것에도, 자네 꿈 그 어느 것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결코 잊지 말게. 하지만 자네가 언젠가 나무랄 데 없이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버
렸을 때, 그때는
@p 148
압락사스가 자네를 떠나, 그때는, 자신의 사상을 담아 끓일 새로운 냄비를 찾아
그가 자네를 떠나는 거라네』
내 모든 꿈들 가운데서 저 어두운 사랑의 꿈이 가장 끈질기게 이어지는 꿈이
었다. 자주, 자주 나는 그 꿈을 꾸었다. 문장의 새 밑으로 해서 오래된 우리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를 포옹하려 했는데, 어머니 대신 키 크고, 절반은 남자
이고 절반은 어머니인 여자를 안는 것이었다. 그녀가 무서웠는데도 불타는 욕망
이 나를 그녀에게로 끌었다. 그런데 이 꿈은 내 친구에게 결코 이야기해 줄 수
없었다. 다른 모든 것을 그에게 열어보이고 나서도 이 꿈만은 간직해 두었다. 그
것은 나만의 모퉁이, 나의 비밀, 피난처였다.
마음이 짓눌릴 때면 피스토리우스에게 전에 들었던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
를 연주해 달라고 청했다. 그럴 때면 어두운 저녁 교회 안에서 나는 그 자체에
몰두하고, 그 자체에 귀기울이는 이 기이하고, 내밀한 음악에 몰입하여 앉아 있
었다. 그 음악은 번번이 기분 좋았고 나로 하여금 더욱더 영혼의 목소리들을 인
정할 준비가 되도록 도와주었다.
때로 우리는 오르간 소리가 잦아들고 나서도 한동안을 그대로 교회에 앉아 희
미한 빛이 뾰족한 아치형의 높은 창문을 통하여 비쳐들다가 가물가물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습게 들리겠지」 피스토리우스가 말했다. 「내가 한때 신학도였고 신부까
지 될 뻔했다는 게 말이야. 그러나 내가 당시에 저지른 것은 형식상의 오류였을
뿐이야. 사제라는
@p 149
것, 그건 아직도 내 직업이자 목표지. 다만 난 너무 일찍 만족했고 나를 마음대
로 쓰시도록 여호와에 맡겼지. 압락사스를 알기 전이었어. 아, 어느 종교든 좋아.
종교는 영혼이야. 기독교적 성찬을 들든지 메카로 순례를 가든지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사실 사제가 되실 수도 있었겠는데요」 내가 말했다.
「아니, 싱클레어, 아니야. 난 거짓말을 해야만 했어. 우리의 종교는 마치 그것
이 종교가 아닌 것처럼 훈련을 받아. 종교가 인간 오성의 산물인 듯 취급되지.
카톨릭은 급하면 아쉬운 대로 괜찮을지도 몰라. 하지만 신교 목사, 아니! 진짜
신자들, 그런 사람들 몇을 내가 알고 있는데, 그들은 성경의 자자구구에 매달리
지. 그 사람들한테 그리스도는 나에게 그냥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영웅, 하나의
신화라고, 엄청난 그림자상이라고 말할 수 없어. 그 그림자 안에서 인류는 스스
로의 모습이 영원의 벽에 그려진 것을 보는데 말이야. 그리고 다른 사람들, 똑똑
한 말 한마디를 들으려, 의무 하나를 완수하러, 아무것도 놓치지 않기 위하여 등
등의 이유로 교회에 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내가 무얼 말할 수 있었을까? 그들
을 개종시켜
야 하나? 하지만 그건 전혀 내 뜻이 아니야. 사제란 개종시키려 하지 않아. 다
만 신자들 가운데서, 자기 비슷한 사람들 안에서 살려고 하지. 그리고 그것에서
우리가 우리들의 신을 만들어내는 그 감정의 보유자이자 표현이고자 하는 거야
」
거기서 그가 말을 뚝 끊었다. 그러더니 다시 계속했다.
@p 150
「우리가 지금 압락사스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우리의 새로운 신앙은 좋은 거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상의 것이라네. 그러나 그는 아직 젖먹이지! 아직 날개가
돋아나지 않았어. 아, 외로운 종교, 그건 아직 진정한 종교가 아니야. 그것은 공
동의 것이 되어야 해. 예배와 도취, 축제와 비밀의식을 가져야 해………」
그는 생각하며 자신에 침잠했다.
「비밀 의식이라면야 혼자서도 혹은 아주 작은 범위 안에서도 행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내가 망설이며 물었다.
「할 수야 있지」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벌써 오래 그렇게 해오고 있
어. 예배를 드렸지. 만약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걸로 여러 해를 교도소에 박혀
있어야 할지도 모를 예배지. 알고 있어. 이 예배는 아직은 옳은 것이 아니야」
갑자기 그가 내 어깨를 쳤다. 나는 움칫 몸을 오그렸다. 「이봐」 그가 집요하
게 말했다. 「자네도 비밀 의식을 가지고 있군. 자네는 틀림없이 나한테 이야기
하지 않은 꿈을 꿀 게야. 알 생각은 없네. 그러나 말해 두겠는데, 그것을, 그 꿈
들을 그대로 살게, 그것을 유희하게, 그것에 제단을 세워주게! 그것은 아직 완전
하진 않지만, 하나의 길이야. 우리가, 자네와 나, 그리고 몇몇 다른 사람들이, 세
계를 한번 새롭게 개혁하게 될지 못하게 될지 그거냐 두고 봐야지. 그러나 저
안쪽 우리들 마음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날마다 새롭게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
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걸 생각해 보게! 자넨 열여덟 살이네, 싱클레어.
길거리 창녀한테로 달려가는 게 아니라, 사랑의 꿈, 사
@p 150
랑의 소망을 가져야 하네. 어쩌면 그 꿈들은, 자네가 무서워ㄴ하는 그런 것이겠
지. 무서워하지 말게! 그것들은 자네가 지닌 최상의 것이야. 나를 믿어도 되제.
나는 꿈을 많이 잃어버렸어. 자네 나이에 사랑의 꿈들을 능욕했지. 그래서는 안
되는데. 압락사스를 알면,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돼. 아무것도 무서워해선 안 되
고 영혼이 우리들 마음속에서 소망하는 그 무엇도 금지되었다고 해서는 안 되지
」
놀라서 나는 이의를 말했다. 「그러나 생각나는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는 없잖아요! 어떤 사람이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죽여서는 안 되잖아요」
그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상황에 따라서는 죽여도 돼. 다만 죽이는 건 대체로 오류지. 생각을 스쳐간
모든 것을 그냥 행동으로 옮기라는게 아닐세. 다만 좋은 뜻을 가진 착상들을 몰
아내고 그걸 이리저리 도덕화해서 해롭게 만들지 말라는 걸세.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대신 장엄한 사상의 잔으로 술을 마시면서 치르는 희
생의 비밀 의식을 생각할 수 있지. 그런 것도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거든. 다시
한 번 무엇인가 정말 근사한 생각 혹은 죄 많은 생각이 떠오르거든, 싱클레어,
누군가를 죽이거나 그 어떤 어마어마한 불결한 짓을 저지르고 싶거든, 한순간
생각하게. 그렇게 자네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은 압락사스라는 것을! 자
네가 죽이고 싶어하는 인간은 결코 아무아무게 씨가 아
@p 151
랑의 소망을 가져야 하네. 어쩌면 그 꿈들은, 자네가 무서워하는 그런 것이겠
지. 무서워하지 말게! 그것들은 자네가 지닌 최상의 것이야. 나를 믿어도 되네.
나는 꿈을 많이 잃어버렸어. 자네 아니에 사랑의 꿈들을 능욕했지. 그래서는 안
되는데. 압락사스를 알면,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돼. 아무것도 무서워해선 안 되
고 영혼이 우리들 마음속에서 소망하는 그 무엇도 금지되었다고 해서는 안 되지
」
놀라서 나는 이의를 말했다. 「그러나 생각나는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는 없잖아요! 어떤 사람이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죽여서는 안 되잖아요」
그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상황에 따라서는 죽여도 돼. 다만 죽이는 건 대체로 오류지. 생각을 스쳐간
모든 것을 그냥 행동으로 옮기라는게 아닐세. 다만 좋은 뜻을 가진 착상들을 몰
아내고 그걸 이리저리 도덕화해서 해롭게 만들지 말라는 걸세.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대신 장엄한 사상의 잔으로 술을 마시면서 치르는 희
생의 비밀 의식을 생각할 수 있지. 그런 행위 없이도, 자신의 충동과 유혹을 존
경과 사랑으로써 다룰 수 있어. 그러면 그것들이 그 의미를 내보이지. 그런 행위
없이도, 자신의 충동과 유혹을 존경고 사랑으로써 다룰 수 있어. 그러면 그것들
이 그 의미를 내보이지.그런 것도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거든. 다신 한 번 무엇
인가 정말 근사한 생각 혹은 죄 많은 생각이 떠오르거든, 싱클레어, 누군가를 죽
이거나 그 어떤 어마어마한 불결한 짓을 저지르고 싶거든, 한순간 생각하게. 그
렇게 자네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은 압락사스라는 것을! 자네가 죽이고
싶어하는 인간은 결코 아무아무개 씨가 아
@p 152
닐세. 그 사람은 분명 하나의 위장에 불과할 뿐이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
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피스토리우스가 가장 은밀한 부분에서 나를 그토록 깊이 명중시키는 말을 나
한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강하게
그리고 가장 특별하게 내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이 위로가, 내가 여러 해전부
터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데미안의 말과 울림이 같다는 사실이었다. 피스토리우
스와 데미안은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둘이 나에게 똑같은 말을 한
것이다.
피우토리우스가 나직이 말했다. 「우리가 보는 사물들은 우리들 마음속에 있
는 것과 똑같은 사물들이지. 우리가 우리들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현실이
란 없어.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는 거지. 그
들은 바깥에 있는 물상들만 현실로 생각해서 마음속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계가
전혀 발언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댜. 그러면서 행복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한
번 다른 것을 알면, 그때부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겠다는 선택이
란 없어져 버리지. 싱클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쉬워. 우리들의 길은
어렵고. 우리 함께 가보세」
며칠 뒤, 두 차례 그를 기다렸으나 허탕을 친 다음, 저녁 늦게 길거리에서 그
를 마주치게 되었다. 추운 밤 바람
@p 153
속에서 그는 외롭게 모퉁이를 돌아 바람에 불려왔다. 비틀거리며 완전히 취해서.
나는 그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나를 보지 못한 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알 수 없는 것으로부터 오는 어두운 외침을 따르고 있기라도 하듯 이글이
글 타는 외로워진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한 거리쯤 그를 뒤따라갔
다.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철사 줄에 매여 당겨지는 듯 끌려갔다. 열광적으로
그렇지만 흐트러진 걸음걸이로 마치 유령처럼. 슬퍼져서 나는 집으로, 구제받지
못한 나의 꿈들에게로 돌아왔다.
「저렇게 그는 이제 자기 속의 세계를 새롭게 하고 있구나!」 나는 생각했으
며 또한 같은 순간에 그것은 저열하며 도독적인 발상이라고 느꼈다. 그의 꿈에
대해 내가 무얼안단 말인가? 그는 어쩌면 그렇게 술에 취해서, 불안에 휩싸인
나보다 오히려 더 안전한 길을 갔을 것이다.
수업 시간 사이 쉬는 시간에 이따금씩, 내가 한 번도 주의한 적 없었던 급우
하나가 내 가까이 오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눈에 뜨였다. 작고, 허약해 보이는
가냘픈 젊은이로 붉은 빛 도는 숱 적은 머리에 행동에는 무언가 나름의 것이 있
는 친구였다. 어느 저녁, 내가 집으로 갈 때 그가 골목길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자기를 지나쳐 가게 놔두더니, 그 다음에는 다시 뒤쫓아와서 우리 집 현관
문 앞에 서서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너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니?」내가 물었더니 그는 수줍게 말했다.
@p 154
「너하고 그냥 한번 이야기하고 싶었어. 몇 걸음만 함께 걷자」
나는 그를 따라 걸었는데, 그가 몹시 상기되고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넌 심령술 하니?」그가 난데없이 불쑥 물었다.
「아니야, 크나우어」내가 웃으며 말했다. 「전혀 아니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
「그럼 접신론 하니?」
「그것도 아니야」
「아, 그렇게 숨기지 마! 너한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아주
잘 느끼고 있어. 넌 그것을 눈에 담고 있어. 네가 영들과 교류한다는 걸 확실하
게 믿어. 호기심에서 묻는 게 아니야, 싱클레어. 아니야! 나 자신이 구도자이거
든. 그리고 난 너무도 외로워」
「이야기해 봐!」내가 그를 격려하였다. 「난 영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내 꿈속에서 살고 있어. 그걸 네가 감지했구나. 다른 사람들도 꿈속에서 살아.
그러나 자기자신의 꿈속이 아니야. 그게 차이지」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애가 나직이 말했다. 「어떤 종류의 꿈
속에서 살고 있느냐 그것만 문제라는 거지. 백주술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니?」
나는 아니라고 해야 했다.
「그건,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더라. 죽지 않을 수 있고 요
술도 할 수 있다는데. 너 그런 연습
@p 155
한번도 안 해봤어?」
그 연습에 대하여 호기심어린 질문을 하자 그가 처음에는 뭔지 숨기는 듯 알
수 없이 굴어서, 마침내 나는 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주섬주섬 털어놓
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내가 잠들고자 하거나 또는 집중하고자 할때, 나는 그런 연습을
해. 그 무엇인가를, 예를 들면 단어하나 혹은 이름 하나 혹은 기하학 도형 하나
를 생각해 그 다음에는 그것들을 생각하면서 몸 속으로 집어넣어. 할 수 있는
한 한껏 집중해서, 그것들이 내 안에, 내 머릿속에 있다고 상상해 보려 해. 마침
내 내 몸 안에 있다는 느낌이 올 때까지. 그런 다음 그것이 목에 걸렸다고 생각
하지. 그런 식으로 마침내 내 몸이 완전히 그것으로 가득 찰 때까지 생각해. 그
다음에는 완전히 확고해지지. 그러면 그때부터는 그 무엇도 나를 안정에서 벗어
나게 하지는 못하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정
작 하고 싶은 말은 아직도 딴데 있다는 것이 잘 느껴졌다. 그는 기이하게 흥분
해 있었고 조급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질문을 가볍게 해주려고 했다. 그러자 곧
그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관심사를 들고 왔다.
「너도 금욕을 하지?」그가 나에게 불안스럽게 물어왔다.
「무슨 뜻이지? 성문제 말인가?」
「그래, 그래. 나는 지금 이 년째 금욕을 하고 있어, 그학설에 대해 알고 난
다음부터야. 그 전에는 죄를 지었더랬어. 너도 벌써 알겠지만. 너는 그러니까 여
자하고 잔 적이 없지?」
@P 156
「없는데」내가 말했다.「그럴 상대를 못 찾았어」
「그러나 만약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아내고 맞는 상대라면, 그렇다면 그 여
자하고 자겠구나?」
「그래, 물론이야. 그 여자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말이야」내가 약간 비꼬듯 말
했다.
「오, 그 점에서 길을 잘못 들어선 거야! 내면의 힘은 완전히 금욕을 할 때만
키울 수 있어. 나는 그렇게 했어. 이 년 동안. 이 년하고도 일 개월 조금 더 됐
지! 그건 참 힘들어! 어떤 때는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야」
「아봐, 크나우어, 난 금욕이 그렇게 대단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나도 알아」그가 방어했다.「다들 그렇게 말하지. 그래도 너는 안 그럴 줄
알았어. 좀더 높은 정신적인 길을 가는 사람은 늘 몸이 정결해야 해, 반드시!」
「그래, 그래, 그렇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난 이해하지 못하겠어. 자신의 성을
억누르는 사람이 왜 다른 사람보다 <더 정결하다>는 건지. 아니면 너는 성을
모든 생각과 꿈에서도 배제해 버릴 수 있다는 거니?」
그는 절망적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하느님 맙소사, 그렇지만 그래야만 해. 나는 밤에
꿈을 꿔, 나 자신한테조차도 이야기 할 수 없는 꿈을 꾸는 걸! 무서운 꿈이라구!
」
나는 피스토리우스가 나한테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의 말이 참으로 옳다는
것을 느끼는데도, 그 말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내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
@P 157
며, 그것을 따르기에 나 자신이 아직 성숙해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충고를 남에
게 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가 나에게서 충고를 구
했는데, 아무런 해줄 말도 없다는 사실에 굴욕을 당한 느낌이었다.
「나는 별별 시도를 다 해봤어!」 크나우어가 내 곁에서 탄식을 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 냉수욕, 안력 훈련, 체조, 달리기. 그러나 다 아무 소용 없었
어. 밤마다 생각도 해서는 안 되는 꿈을 꾸다가 화들짝 깨어나곤 해. 끔찍한 것
은, 그러다 보니 내가 정신적으로 배워놓은 모든것이 내게서 차츰 다시 없어지
는 거야. 그러고 나면 그때부터는 아무리해도 집중하거나 잠들 수 없어. 자구 누
워서 밤을 꼬박 새워. 그것을 결코 오래 견뎌내지 못하겠어. 마침내 내가 그 싸
움을 해낼 수 없으면, 내가 항복하여 다시 자신을 더럽히면, 그 다음에 나는 한
번도 싸워본 적 없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나빠. 이해하겠니?」
나는 끄덕였지만 해줄 말이 없었다. 그가 지루해지기 시작했고, 그가 공공연하
게 드러낸 괴로움과 절망이 나에게 그다지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것에 내
심 놀랐다. 나의 느낌은 다만, 난 너를 도울 수 없어, 라는 것이었다.
그가 마침내 기진맥진하여 슬프게 말했다. 「그러니까 넌 전혀 모르는 거지?
전혀 모르겠다고? 그래도 뭔가 길은 분명 있을 거야! 넌 대체 어떻게 하지?」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있는 게 없구나,
크나우어. 사람들은 그런 일에서는 서
로 도울 수가 없단다. 나를 도와준 사람도 아무도 없었더. 네 스스로 생각해 내
려고 애써야
@P 158
해, 그러고는 정말로 네 본지로부터 나오는 것, 그걸 하면돼. 다른 길은 존재하
지 않는단다. 네가 네 자신을 찾아낼 수 없으면, 다른 영들도 찾아낼 수 없다고
생각해」
실망하여 갑자기 말을 뚝 끊더니 그 작은 녀석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의 시선이 갑작스러운 증오의 빛을 띠며 이글이글 타올랐다. 나에게
얼굴을 찡그리더니 노하여 소리쳤다. 「아, 너야 멋진 성인이시지! 너도 죄를 짓
겠지, 알아! 너는 마치 현인처럼 굴면서 남몰래 나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더러
운 것에 매달리는 거지! 넌 돼지야, 돼지, 나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다 돼지
야!」
나는 그를 세워둔 채 떠났다. 그는 두세 걸음 나를 따라오더니, 그 다음에는
그대로 뒤를 멈추었다가, 몸을 돌려 달아났다. 연민과 혐오의 느낌으로 속이 메
슥거렸다. 마침내 집에 와 내 작은 방에서 내 그림들 몇 개를 주위에 둘러세우
고 더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내 자신의 꿈들에 열중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 느낌
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자 곧 나의 꿈이 다시 또올랐다. 현관문과 문장에
대한, 어머니와 낯선 여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 여성의 표정이 어찌나 또렷하게
보이는지, 그날 저녁에 그녀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며칠 뒤 이 스케치가 완성되자 의식을 잃은 듯 몽환적인 상태에서 칠까지 하
여, 저녁에 벽에 걸고, 독서 등을 그앞으로 밀어놓고는 결판이 나도록 싸워야 하
는 신 앞에 선듯 그 앞에 서 있었다. 그것은 얼굴이었다. 전의 것과 비
@p 159
슷하고, 내 친구 데미안과 비슷하고, 몇몇 표정에서는 나자신과도 비슷했다. 한
눈이 다른 눈보다 눈에 뜨이게 높이 달려 있었고, 침잠하여 응결되고 운명에 가
득 찬 채 시선은 나를 넘어 어딘가로 행해 있었다.
그림 앞에 서서 나는 내적인 긴장으로 가슴속까지 써늘했다. 그 그림에게 나
는 물었다. 그림을 비난했다. 그림을 애무했다. 그림에게 기도했다. 나는 그 그림
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연인이라고 불렀다. 창녀고 매춘부라고 불렀다. 압락사스
라고 불렀다. 그 사이로 피스토리우스의 말이 - 아니면 데미안의 말이었을까?-
떠올랐다. 언제 그 말을 들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야곱과 천사의 싸움에 대한 말이었다. <나에게 축복을 내리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는 그 말.
그려진 얼굴은 램프 빛 속에서 그때그때의 간청에 따라 변했다. 환하게 밝아
지다가 까맣게 어두워지고, 꺼져 하는 눈 위로 파리한 눈꺼풀을 감다가는 다시
떠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그것은 여자였다. 남자였다. 소녀였다. 어린
아이였다. 동물이었다. 얼룩으로 흐렸다가 다시크고 뚜렷해졌다. 끝에 가서 나는
마음속에서 들리는 뚜렷한 부름을 따르며 눈을 감았고, 이제 그 그림을 내 마음
안에서 보았다. 다욱 강하게 더욱 힘있게. 나는 그림 앞에 무릅을 끓으려 했다.
그러나 그림이 어찌나 나의 안으로 들어가 버렸는지 그것을 나 자신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 마치 그림이 온통 나 자신이 되어버린 듯이.
그때 마치 봄의 폭풍인 듯 어둡고, 무거운 포효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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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렸다. 나는 형언할 수 없이 불안과 체험의 새로운 느낌에 휩싸여 몸을 떨었다.
별들이 내 앞에서 번쩍거리다가 꺼졌다. 최초의, 아주 잊혀진 유년으로까지, 실
로 전생과 생성의 초기 단계까지 이르는 거억들이, 콸콸 흘러 나를 스쳐 흘러갔
다. 나의 온 생애를, 가장 비밀스러운 것까지 되풀이하는 듯한 기억들은 어제 오
늘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계속 나아갔고, 미래를 비추었고, 나를 오늘로부터
낚아채어, 새로운 삶의 형식들 속으로 넣었다. 그 새로운 삶의 영상들은 엄청나
게 환하고 눈부셨으나 그 중 어느 것도 나중에는 제대로 기억 할 수 없었다.
밤에 깊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비스듬히 걸쳐 누워 있
었다. 불을 켰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생각해 내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몇 시간 전의 일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불을 켰다. 차츰 기억이 돌아왔다.
나는 그림을 찾았다. 그림이 이제는 벽에 걸려 있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여 있
지도 않았다. 확실치 않았지만, 내가 그것을 불태워 버린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면 내가 그것을 내 속으로 불태우고 재를 먹어버린 것이 꿈이었을까?
몸이 푸들푸들 떨리는 큰 불안이 나를 몰아댔다. 어떤 강압을 받는 듯이, 모자
를 쓰고 집과 골목을 지나쳤다. 폭풍에 불려가듯, 거리와 광장들을 빠른 걸음으
로 내처 걸었다. 내 친구의 어두운 교회 앞에서 귀를 기울였고, 어두운 충동에
휩싸여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는 채 찾고 또 찾았다. 사창가들이 있는 교외를 지
나갔다. 그곳은 여기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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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더 멀리 바깥에는 공사중인 건물들과 기왓장 더미가 놓
여 있었고, 일부는 충충한 눈으로 덮여 있었다. 몽유병자처럼 알 수 없는 힘에
눌려 이 활량한 곳을 해매다보니, 언젠가 나의 고문자 크로머가 처음으로 계산
을 하자고 나를 끌고 갔던 고향 도시의 공사장 생각이 났다. 비슷한 공사장이
잿빛 어둠 속에서 내 앞에 있었고, 검은 문 구멍들이 내 앞에서 입을 벌리고 있
었다. 그것이 나를 안으로 끌었다. 물러서려다가 모래와 허섭스레기에 걸려 비틀
거렸다. 충동 쪽이 더 강했다. 나는 들어가야 했다.
판자와 짓부숴진 벽돌들 너머로 나는 비틀비틀 그 황량한 공간 속으로 들어갔
다. 축축한 냉기와 돌 냄새가 침침하게 났다. 모래 더미가, 좀 밝은 잿빛인 지점
이 한 군데 있었다. 그 밖에는 온통 캄캄했다.
거기서 놀란 목소리 하나가 나를 불렀다. 「맙소사, 싱클레어, 어디서 내게로
온 거야?」
그러면서 내 곁 어둠 속에서 사람 하나가, 작고 마른 사내가 유령처럼 몸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나는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놀랐지만 그것이 내 학우
크나우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어떻게 네가 여기로 온 거야?」 흥분으로 제정신이 아닌 듯 그가 물었다.
「어떻게 네가 나를 찾아낼 수 있었지?」
나는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난 너를 찾지 않았어」 내가 당황하여 말했다. 말 하나하나가 힘들어, 그 말
은 얼어붙은 듯 무겁고 죽은 입술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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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가까스로 나왔다.
그가 나를 응시했다.
「찾지 않았다구?」
「찾지 않았어. 이끌려 온 거야. 네가 나를 불렀니? 네가 나를 부른 게 틀림없
어. 넌 여기서 대체 뭘 했어? 밤인데」
그가 가는 두 팔로 나를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그래 밤이야. 머지않아 틀림없이 아침이 될 거고. 오, 싱클레어, 네가 나를
잊지 않았다니! 날 용서할 수 있겠니?」
「데체 뭘 용서하지」
「아, 내가 그처럼 추하게 굴었잖아!」
비로소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났다. 삼사 일 전이었던가? 나에게는 그
ㄸㅒ 이후 한 평생이 지나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모든 것
을 알았다. 우리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뿐만 아니라, 왜 내가 이리로 오게
되었으며 크아우어가 여기 바깥에서 무엇을 하려했던가도.
「너 그러니까 죽으려 했구나, 크나우어?」
그가 추위와 두려움으로 몸을 덜덜 떨었다.
「그래, 그러려고 했어. 그럴 수 있었을지 없었을지는 모르겠어, 아침이 될 때
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어」
나는 그를 바깥으로 끌고 나왔다. 수직의 첫 새벽 빛이 잿빛 공중에서 말할
수 없이 차갑고 냉담하게 어렴풋이 빛나고 있었다.
얼마간 뒤 그의 팔을 잡고 데리고 갔다. 나에게서 말이 나왔다. 「에제 집으로
가, 그리고 아무한테도 무슨 말 하
@P 163
지 말아! 넌 길을 잘못 들어 해맸던 거야. 그냥 길을 잘못 들었던 거라구! 그리
고 우린 네 생각처럼 돼지가 아니야. 우린 인간이야. 우린 신을 만들고 신들과
싸우지. 그러면 신들이 우리를 축복해」
말없이 더 걷다가 우리는 갈라져 갔다. 집으로 돌아오자 날이 완전히 새어 있
었다.
그 시절 성 OO시에서 내게 주어진 최고의 것으 피스토리우스와 오르간 곁에
서 혹은 벽난로 앞에 서 있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압락사스에 대한 그리스어 텍
스트를 함께 읽었다. 그는 나에게 베다 경들에서 번역의 부분부분들을 읽어주었
고 나에게 신성한 <옴 Om>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가르쳐주었다. 그사이 나를
내면적으로 키워준 것은 학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기분 좋았던 것은,
나 자신 속에서 앞으로 나아감이었다. 나 자신의 꿈, 생각, 예감에 대한 커가는
신뢰였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힘에 대한 늘어나는 앎이었
다.
피스토리우스와 더불어 나는 어떤 식으로든 나 자신을 이해했다. 나는 다만
그의 생각을 강하게 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는, 그 자신이나 혹은 그가
보내는 인사가 나에게로 온다는 것을 확신했다. 나는 그에게, 데미안에게 그랬듯
이, 그 자신이 거기 없어도 무얼 물어볼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을 집중해서 그려
보기만 하면 되었고 나의 물음들을 집중해서 그에게로 향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물음 안에 담은 모든 영혼의 힘이 대답이 되어 내 마음속으로 되돌아왔
다. 다만 내가 상상한 것은 피스토리우스라는
@p 164
인물이 아니었다. 데미안이라는 인물도 아니었다. 내가 불러야 했던 것은 내가
꿈꾸고 그린 그림, 남자면서 여자인 영상, 내 수호신의 영상이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내 꿈속에서만 살지 않았으며 종이 위에 그려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
마음속에 소망의 상이 되어, 내 자신의 상승이 되어 살고 있었다.
자살 실패자 크나우어가 나와 맺게 된 관계는 특이하고 이따금씩은 코믹했다.
내가 그에게로 보내졌던 밤부터 그는 나에게 매달려 있었다. 충직한 하인이나
개처럼. 그의 삶을 나의 삶에 연결시키려 하고 맹목적으로 나를 따랐다. 더할 나
위 없이 놀라운 물음들, 소망들을 들고 그는 나에게로 왔다. 영들을 보려고 했으
며 카발라를 배웠고 내가 그런 모든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에게 단언
해도 나를 믿지 않았다. 나에게는 무슨 힘이든 다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기이했던 것은, 자주 그가 놀랍고도 멍청한 질문들을 들고 나를 찾아오는 것이
바로 내 마음속에서 그 어떤 매듭 하나가 풀려야 할 때였다는 점과 그의 변덕스
러운 착상들과 관심사들이 나에게는 자주 화두이자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충직한 그가 종종 귀찮아 보내버리면서도, 그 또한 나에게 보내진 사람
임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준 것이 갑절이 되어 그에게서도 나와
내 마음속으로 되돌아옴을, 그 또한 나에게는 하나의 인도자이고, 하나의 길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그속에서 자신의 구원을 찾았고 또 나한테로 들고 오는
놀라운 책들과 글들은 나에게, 내가 순간에 통찰할 수 있었던
@p 165
이상의 가르침을 주었다.
이 크나우어가 나중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길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와
는 대결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피스토리우스와는 필요했다. 이 친구
와 함께 나는 성 OO시에서의 내 학생 시절이 끝나갈 무렵에 또 한번 특이한 체
험을 했다.
악의 없는 인간도 살면서 한 번쯤 혹은 몇 번은 경건과 감사라는 아름다운 도
덕과 갈등에 빠지는 일을 겪게 마련이다. 누구든 한 번은 자신을 아버지로부터,
스승들로부터 갈라놓는 걸음을 떼어야 한다. 누구든 고독의 혹독함을 조금은 느
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걸 잘 견딜 수 없어 다시 밑으로 기어든다 하더
라도. 내 부모님들과 그들의 세계, 내 유년의 <환한> 세계로부터, 격렬한 싸움
속에서 결별하지 안혹 천천히 거의 눈에 뜨이지 않게 그들로부터 멀어지고 낯설
어졌다. 마음이 안됐었다. 그래서 고향을 찾아 갈 때면 자주 씁슬한 시간들이 있
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속까지 가지는 않았다. 견딜 만했다.
그러나 우리가 습관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고유한 욕구에서 사랑과 경의를 표
했던 곳, 우리가 더없이 진정으로 사도이자 친구였던 거기-바로 그곳에 씁쓸하
고 무서운 순간이 온다. 우리들 마음속의 이끌어가는 물결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부터 멀러져 가려함을 갑자기 알아차렸다는 생각이 들 때 말이다. 거기서는 친
구이자 스승을 거부하는 생각 하나하나가 독침으로 우리 자신의 심장을 찌른다.
거기서는 방어의 타격 하나하나가 자기 자신의 얼굴에 적중한
@P 166
다. 거기서는 유효한 도덕 하나를 자신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
에게 <충직하지 못함>과 <배은망덕>이라는 이름이 떠오른다. 치욕적인 기억과
낙인처럼. 놀란 가슴이 거기서는 두려움에 차 유년의 미덕들이 있는 아늑한 골
짜기로 도망쳐 돌아가며 이런 결렬이 이루어지고, 이런 끈도 끊어져 버려야 한
다는 것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시간이 가면서 서서히 내 마음속에서는 느낌 하나가, 내친구 피스토리우스를
그렇게 절대적으로 지도자로 인정하는 것에 저항했다. 내 청년 시절 극히 중요
한 몇 달 동안 내가 체험했던 것은 그와의 우정이었고 그의 충고, 그의위로, 그
의 친근함이었다. 그를 통해 신이 나에게 말했다. 그의 입으로부터 내 꿈들이 나
에게로 되돌아왔다. 밝혀지고 해석되어서, 그는 나에게 나 자신에게로 가는 용기
를 선사했다. 아, 그런데 이제 서서히 자라가면서 나는 그에 대한 저항을 감지한
것이다. 이제 들으니 그의 말에는 지나치게 많은 가르침이 담겼고, 그가 완전히
이해하는 건 나의 한 부분뿐이라고 느껴졌다.
우리들 사이에 다툼은 없었다. 요란한 장면도 없었다. 결론도, 청산조차도 없
었다. 나는 그에게 다만 단 한마디의, 사실은 무해한 말을 했다. 그러나 그 해롭
지 않은 한마디가 던져진 바로 그 순간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환상이 색색깔 조
각으로 깨어져 흩어졌다.
어떤 예감이 이미 한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이 분명한 느낌으로 구
체화된 것은 어느 일요일 그의 낡은 서재에서 였다. 우리들은 불 앞 방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그는
@P 167
비밀 의식과 종교 형태들을 이야기했다. 그런 것들을 그는 연구하고 명상하며,
그 가능한 미래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인생을 결정
할 만큼 중요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이하고 재미있는 것으로 보였다. 나에게는
그저 현학적인 과시로 들렸다. 내 귀에는 이전 세계들의 폐허를 뒤지는 고달픈
탐색의 소리가 거기서 들려왔다. 그리하여 문득 나는 이 모든 방식, 이런 신화
예배, 전승된 신앙 형식을 모자이크처럼 짜맞추는 유희에 대한 거부감이 느껴졌
다.
「피스트리우스」 내가 갑자기 말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악의가 담겨 있었
다. 「제게 다시 한 번 꿈 이야기를 들려주셔야겠어요. 밤에 꾸신 진짜 꿈 이야
기를요. 지금 말씀하시는 것, 그건 참 빌어먹게 골동품 냄새가 나네요!」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그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 자신도 말하는
바로 그 순간에 번개같이, 내가 그에게로 쏘아버렸고, 그의 심장을 맞춘 화살이
그 자신의 무기고에서 꺼낸 것이었음을 수치와 충격으로 느꼈다. 그가 냉소적
음색으로 이따금씩 내뱉던 자기 비난의 어휘들을, 이제 악랄하게도 내가 그에게
한껏 극단화된 형태로 던졌던 것이다.
그도 그것을 순간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즉시 잠잠해졌다. 마음속으로 두려움
을 느끼며 그를 보고 있자니, 그는 무섭게 창백해지는 것이었다.
길고 무거운 침묵 후에 그가 새 장작을 불 위에 얹었고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
했다. 「자네가 전적으로 옳아, 싱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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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어. 자네는 영리한 친구야. 나는 골동품으로 자네를 지켜주려는 걸세」
그는 매우 침착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가 입은 상쳐의 고통을 잘 느낄 수 있
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진심으로 그에게로 향하고 싶었다. 그에게 용서를 빌
고 싶었다. 그에게 나의 사랑, 나의 애정어린 감사를 확인해 주고 싶었다. 감동
적인 말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엎드려 불을 들여다
보며 말이 없었다. 그도 말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누워 있었고 불은 타내려가
다 꺼졌다. 탁탁 튀기며 꺼지는 불꽃 하나와 함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아름
다움과 친밀함도 다 타서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제 말을 잘못 이해사셨을까봐 두렵습니다」 내가 마침내 몹시 풀이 죽어 건
조하고 쉰 목표리로 말했다. 마치 신문연재 소설하울 둘오 냐숩알
「난 자네 말을 정확히 히해했네」피스토리우스가 나직이 말했다. 「자네가
옳아」 조금 뜸을 들인 다음 그는 천천히 계속했다.「한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맞서 옳을 수 있는 바로 그만큼 말일세」
아니, 아니, 나는 마음으로 외쳤다. 제가 틀렸어요!라고.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단 한 마디 보잘것 없는 말로써 그의 본질적인 약점, 그의 괴로
움과 상처를 가리켜 보였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불신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 그 점을 내가 건드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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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상에서는 <골동품 냄새가 났다>. 그는 과거를 향한 구도자였다. 그는 낭
만주의자였다. 그리고 갑자기 나는 느끼게 되었다. 피스토리우스는, 그가 나에게
준 것을 그 자신에게는 줄 수 없었으며 내 눈에 비쳤던 그의 모습도 그의 실체
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는 길잡이인 자신도 넘어서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길
로 나를 인도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게 되었는지는 신이나 아실 일! 나는 전혀 나쁜 뜻이
아니었고 파국의 예감도 없었다.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에도 무엇을 말하고 있
는 것인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그 무엇인가를 입 밖에 내어버린 것이었다. 약
간 위트 있고 약간 악의 있는 소소한 착상 하나에 굴복해 버린 것이었다. 그것
이 운명이 되었버렸다. 나는 부주의한 작은 횡포를 저질렀는데 그에게는 그것이
심판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당시에 나는 얼마나 간절히 소망했던가. 그가 화를 냈으면 하고, 그가 자신을
방어하고 나한테 소리쳐주었으면! 하고.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
을 내가 한 게 틀림없었다. 내 마음속에서 스스로 한 게 틀림없었다. 만약 할 수
만 있었더라면 그는 미소지었으리라. 그가 그럴 수 없었다는 것, 거기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심한 타격을 그에게 주었는지 가장 잘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피스토리우스가 주제넘고 배은망덕한 제자의 공격을 그렇게 소리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침묵하고 내가 옳다고 인정함으로써, 그가 나의 말을 운명으로
인정함으로써 그는 내가 나 스스로를 미워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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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경솔함을 천배 더 크게 만들었다. 때리려 달려들었을때 나는 방어력 있는 강
한 사람을 쳤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맡은 사람은 인고하고 고요한 인간, 말없
이 항복하는 무방비한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우리는 다 타버린 불 앞에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불 속에서는 타
오르는 모습 하나하나, 구부러져 들어가는 막대 모양의 재 하나하나가 나에게
행복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시간들을 기억 속에 불러왔고 피스토리우스에게
내가 진 빛더미를 점점 더 크게 쌓아올렸다. 마침내 나는 더 견디지 못했다. 일
어서서 나왔다. 오래 나는 서 있었다. 그 집 문 앞에, 어두운 계단 위에, 집 바깥
에서, 그가 혹시 와서 나를 따라오지나 않을까 한동안 더 기다리며. 그 다음에는
계속 걸었다. 몇 시간이고 시내와 교외, 공원과 숲을 돌아다녔다. 저녁까지. 그리
고 당시에 나는 처음으로 내 이마에 찍힌 카인의 표지를 느꼈다.
하지만 서서히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생각은 모두가 나 자신을 비난하
고 피스토리우스를 옹호하려는 뜻뿐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 반대로 끝나버
렸다. 수천 번이나 나는, 나의 경솔했던 말을 후회했고 다시 거두어 담을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제 비로소 피스토리우스가 이해되
었다. 그의 모든 꿈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이런 꿈이었다. 사제가 되어 새로운
종교를 알리는 꿈, 찬양, 사랑과 예배의 새로운 형식을 주고 새로운 상징들을 세
우려는 꿈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의 직분이 아니
었다. 그는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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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편안하게 이미 존재하는 것 속에 머물렀다. 그는 너무도 정확하게 예전의 것
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집트에 대해, 인도에 대해, 미트라스에 대해, 압락사스에
대해 너무도 많이 알고 있었다. 그의 사랑은 이미 지구가 보았던 형상들에 매여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것은 새롭고도 달라야 한다는 것, 새 땅에서 솟아야지 수집되거나 도서관에서
길어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의 직분은 어쩌면, 나에게 해주었듯이, 인간
이 그 자신에게로 이르도록 돕는 일일 것이다. 그들에게 들어보지 못한 전대미
문의 것, 새로운 신들을 제시하는 것, 그것은 그의 직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서 갑자기 예리한 불꽃 같은 인식이 나를 불태웠다. 누구에게나
하나의 <직분>이 있지만, 그것은 그 누구도 자의로 택하고 고쳐 쓰고 그리고
마음대로 주재해도되는 직분은 아니라는 것. 새로운 신들을 원한다는 것은 틀렸
다. 세계에다 그 무엇인가를 주겠다는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각성된 인
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이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그 생각이 내마음을 기ㅌ이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는 이 체험에서 얻은 열매였다. 나는 자주 미래의 영상들을 가지고
유희했었다. 어쩌면 시인으로 혹은 예언자로, 혹은 화가로 혹은 어떻게든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을 역할들을 꿈꾸곤 했었다.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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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 설교하기 위하여, 그림 그리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또
다른 그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건 다만 부수적
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시인으로 혹은 광인으로, 예언가로 혹은 범죄자로
끝장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그런 건 궁극적으로 중요
한 게 아니었다.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의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반쪽의 얼치기였다. 시도를 벗어남이고,
패거리의 이상으로의 재도피이고, 무비판적 적응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
이었다. 새로운 영상이 무섭고도 성스럽게 누앞에서 솟았다. 수백번 예감했고 어
쩌면 자주 입 밖에 내었지만 이제 비로소 체험한 것이었다.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어쩌면 새로운 것에로, 어쩌면 무에로 던져졌다. 그
리고 측량할 길 없는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 던져짐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
고,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이미 많은 고독을 나는 맛보았다. 이제 예감했다. 더 깊은 고독이 있으며 그
고독은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피스토리우스와 화해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변함없이 친구였다. 그러나 관
계가 달라졌다. 다만 단 한번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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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니 사실은 그렇게 한 것은 그였다. 그가 말했다. 「
나는 사제가 되려는 소망이 있어. 그걸 자네도 알지. 우리가 그토록 예감하는 새
로운 종교의 사제가 가장 되고 싶었어. 난 결코 사제가 될 수 없을 걸세. 그걸
알고 있어. 전에도 알았지. 자신에게 그걸 완전히 고백은 안했어도 벌써 오래전
부터 말이야. 나는 바로 다른 사제 봉사를 하려 하네. 어쩌면 오르간 건반 위에
서, 어쩌면 다른 곳에서. 그러나 나는 늘 무엇인가, 내가 아름답고 성스럽게 느
끼는 것에 에워싸여 있어야 해. 오르간 음악이든 비밀 의식이든, 상징과 신화든,
나는 그런 것이 필요해. 그리고 그런 것에서 떠나지 않겠네. 그게 나의 약점이
지. 왜냐하면 나도 때때로, 싱클레어, 내가 그런 소망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라
는 것을 알아. 그것이 사치이며 약점이라는 것을 알아. 만약 내가 아주 단순하게
아무런 요구 없이 운명에 자신을 내맡긴다면, 그 편이 더 위대한 일일 거야. 더
올바른 일일 거야.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어.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이지. 어쩌면 자네는 언젠가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운명에 자신을 내맡기는
건 어려워. 그건 세상에서 유일한 진짜 어려움이라네. 이보게, 나는 자주 그 꿈
을 꾸었지. 그러나 그럴 수 없어. 그 앞에서 몸서리쳐. 나는 그렇게 완전히 벌거
벗은채 외롭게 서 있을 수가 없어. 나 또한, 약간의 온기와 먹이를 필요로 하고
이따금씩은 자기 비슷한 것들을 곁에서 느끼고 싶어하는, 한 마리 가엾은 약한
개라네. 정말로 자신의 운명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 그에게는 그
@p 174
때부터는 자기 비슷한 사람이 없어. 완전히 홀로 서 있지. 주위에는 오직 차가운
우주뿐이지. 자네 알지, 그건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야.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히
려는 순교자들이 있었어. 그러나 그들도 영웅은 아니었어, 해방되지 않았어. 그
들 또한 무엇인가를 원했지, 그들에게 익숙하며 고향 같은 것을, 그들은 모범이
있었어. 이상이 있었지. 아직도 오로지 운명만을 원하는 자, 그에게는 이제 모범
도 이상도 없어. 사랑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어. 위로가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
어, 그는! 그리고 사실은 이 길을 가야 되는 것 같아. 나나 자네 같은 사람들은
정말로 고독해.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서로 가진 것이 있지. 우리는 남들과 다르
다는, 거역한다는, 비범한 것을 원한다는 남모르는 만족을 가지고 있지. 아 만족
또한 버려야 해. 그길을 완전히 가고자 한다면 말이야. 혁명가가 되려 해서도 안
돼, 모범이 되려 해서도, 순교자가 되려 해서도 안돼. 상상할 수도 없지만 말이
야」
그렇다.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꿈꿀 수는 있었다. 미리 느낄 수는 있었
다. 예감할 수 있었다. 아주 고요한 시각을 찾아낼 때면 몇 번 그것을 조금 느꼈
다. 그럴 때면 나는 내 마음속으로 눈길을 보내며 똑똑하게 뜨여 있는, 내 운명
의 영상의 두 눈을 들여다본다. 그 두 눈은 지혜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광
기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사랑이 환히 빛나는 것 같기도 하고 깊은 악의가
빛나는 것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 중 그 무엇도 택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무엇도 원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
@p 175
다. 스스로 갖겠다고 원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운명뿐이었다. 거기로 가는
한 구간을 피스토리우스는 길잡이로 나에게 봉사했다.
그때 나는 눈먼 듯 이리저리 헤매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폭풍이 포효하고 있
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험이었다. 앞에는 지금까지의 모든 길이 그리로 들어
가 가라앉아 버리고 마는 수렁의 어둠밖에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리고 나의 내
면에서는 인도자의 모습을 보았다. 데미안을 닮았으며 그 눈에 내 운명이 적혀
있었다.
나는 종이에 적었다. <한 인도자가 나를 떠났습니다. 나는 완전히 어둠 속에
서 있습니다. 한 발자국도 혼자 디딜수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데미안에게 그 종이를 보내려 했다. 그렇지만 그만두었다. 내가 그러려고 하면
번번이, 그게 멍청하고 무의미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작은 기도를 외
웠고 그것을 자주 내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그 말은 매시간 나와 함께 있었다.
기도가 무엇인지 나는 예감하기 시작했다.
내 학생 시절이 끝났다. 나는 방학 동안 여행을 했다. 우리 아버지가 생각해
내신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대학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어떤 대학에 갈지
는 몰랐다. 철학을 한 학기 듣기로 했다. 다른 과목을 들었더라도 마찬가지로 만
족스러웠을 것 같다.
@P 176
에바 부인
방학중에 한 번, 몇 해 전 막스 데미안이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으로 가보
았다. 어떤 늙은 부인이 뜰에서 산책을 하고 있어 말을 걸었더니, 그 집 주인이
었다. 데미안 일가에 대해 물었다. 잘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지금 어디 사는
지는 몰랐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는, 나를 집 안으로 데리고 가서
가죽 앨범을 찾아내어 데미안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내게 그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작은 사진을 모았을 때 심장의 고동이 멈추었다. 그
것은 내 꿈의 영상이었던 것이다! 그녀였다. 키 크고 거의 남자 같은 여성의 모
습, 아들과 비슷한데 어머니다운 표정, 엄격한 표정, 깊은 열정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아름다우면서 유혹적이고, 아름다우면서 접근할
@P 177
수 없었다. 수호자이자 어머니, 운명이자 연인이었다. 그녀었다!
내 꿈의 영상이 지상에 살이 있음을 그렇게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은 엄청난
기적처럼 내 온 전신을 꿰뚫었다! 그런 모습의 여성, 내 운명의 표정을 지닌 여
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그런데 그녀가 데미안의
어머니였다.
그 뒤 곧 나는 여행을 떠났다. 특별한 여행이었다! 나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
각을 따라 이곳 저곳으로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줄곧 그녀를 찾으면서. 그녀를
상기시키는 모습, 그녀를 닮은 모습, 뒤엉킨 꿈속에서처럼 낯선 도시들의 골목길
들을 지나, 역들을 지나, 기차로 나를 끌어들이는 모습, 온통 그런 모습들만 만
난 날들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를 통찰하는 다른 날들이 있었다. 그런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어딘가에,
공원에, 호텔 정원에, 대합실에 앉아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고 내 마음속의 그 영
상을 살아 있게 만들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부끄럼 타듯, 도망치듯 사라지
곤 했다. 한 번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기차를 타고 알 수 없는 풍경들을
지나며 나는 십오 분 정도씩 끄덕끄덕 졸았다. 한번은 취리히에서 어떤 여자가
나를 뒤쫓아왔다. 예쁘지만 다소 뻔뻔스러운 여자였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거의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갔다. 마치 그녀가 공기이기라도 하듯이. 다른 여성에게
한시라고 관심을 보내느니 차라리 즉시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P 178
내 운명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음을 나는 감지했다. 성취가 가까이 있음을 감
지했다. 성취를 위해 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초조로 미칠 것 같았다.
한 번은 어느 역에서, 인스부르크에서였던 것 같은데, 방금 출발한 기차의 창가
에서, 그녀를 상기시키는 모습 하나를 보았고 그래서 여러 날 불행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습이 밤에 꿈속에서 나타났다. 내 추적의 무의미함에 대한 부끄럽
고 또 황량한 느낌으로 깨어나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몇 주 뒤 나는 H대학에 등록했다. 모든 것이 실망이었다. 내가 들은 철학사
강의는 대학에서 공부하는 젊은이들의 방랑과 똑같이 실체 없고 공장식이었다.
모든 것이 찍어낸 것 같았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하는 게 같았다. 그리고
소년티 나는 얼굴들에 어린 달아오른 즐거움은, 보는 사람이 우울할 정도로 텅
비고 기성품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자유로웠다. 나 자신을 위해 온 하루를 쓸
수 있었다. 교외의 오래된 낡은 집에서 조용하고 아름답게 지냈고, 내 책상 위에
는 니체가 몇 권 놓여 있었다. 니체와 함께 살았다. 그의 영혼의 고독을 느꼈다.
그를 그침없이 몰아간 운명의 냄새를 맡았다. 그와 함께 괴로워했다. 그토록 가
차없이 자신의 길을 갔던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이 행복했다.
한 번은 저녁 늦게 한가롭게 시내를 걷고 있었다. 불어오는 가을 바람 속에
서, 술집들에서 대학생 무리들이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창문에서 담
배 연기가 자욱하게 솟아나왔다. 큰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노랫소리는 크
@P 179
고 요란했지만 활기가 없었고 생명 없이 획일적이었다.
나는 어느 길모퉁이에 서서 귀기울였다. 정확하게 연습된 젊음의 쾌활함이 두
술집으로부터 울려나와 어둠 속으로 치솟고 있었다. 어딜 가도 모임이, 어딜 가
도 함께 쭈그리고 앉는 모임이 있었다. 어디서나 운명의 짐 풀기와 따뜻한 아궁
이 곁으로의 도피가 있었다!
내 뒤에서 남자 둘이 천천히 지나갔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조금 들었다.
“어느 흑인 부락에 있는 청년 집회소나 여기나 똑같지 않아요?” 한 사람이
말했다. “다 똑같지요. 심지어 문신이 아직도 유행이구. 알아두시오. 이게 신유
럽이오”
그 목소리는 놀랍게 경고저이고 귀에 익은 것이었다. 나는 어두운 골목에서
그 두 사람을 따라갔다. 한 사람은 키가 작은 멋쟁이 일본이이었다. 어느 가로등
밑에서 그의 미소 띤 노란 얼굴이 문득 환히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다름 사람이 다시 말했다.
“그런데, 당신네 일본에서도 더 나을 게 없겠지요. 패거리를 뒤쫓지 않는 사
람들은 어디서나 드물어요. 여기에도 조금 있을 뿐입니다.”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쁜 놀라움으로 나의 뇌리를 꿰뚫었다. 말하는 사람
이 아는 사람이었다. 데미안이었다.
바람 부는 어둠 속에서 나는 그와 그 일본 사람을 따라 어두운 골목들을 지났
고, 그들의 대화에 귀기울였으며 데미안의 목소리의 울림을 즐겼다. 그 목소리는
옛날의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오래된, 아름다운 안정감과 평안을 지
@P 180
니고 있었고 나를 지배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게 다 잘됐다. 그
를 찾아낸 것이다.
어느 교외 거리의 끝에서 일본 사람이 작별을 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데미안
은 그 길을 되돌아왔다. 나는 그대로 멈추어 선 채로 길 한가운데에서 그를 기
다렸다. 뛰는 가슴으로 나는 그가 나를 향하여 마주 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꼿꼿하고 탄력 있게, 갈색 레인 코트를 입고, 팔에는 가느다란 단장을 걸고 있었
다. 그는 특유의 고른 보조를 유지한 채로, 내 바로 앞까지 와서 모자를 벗고 그
의 환한 얼굴을 내게 보였다. 결단력 있게 다문 입에, 넓은 이마가 특이하게 환
한 얼굴을.
“데미안!”내가 외쳤다.
그는 내게로 손을 뻗었다.
“너로구나, 싱클레어! 널 기다렸어”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았단 말이야?”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확신을 가지고 희망했어. 보는건 오늘 저녁이 처음이
구. 너 저녁 내내 우리를 뒤따라왔지”
“그럼 난 줄 금방 알았단 말이야?”
“물론이지. 네가 변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표적을 가지고 있구나”
“그 표적? 무슨 표적 말이야?”
“우리가 전에 카인의 표적이라고 그랬지. 아직 기억할 수 있다면 말이야. 그
건 우리들의 표적이지. 넌 그걸 언제나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네 친구가
되었었구. 그런
@P 181
데 지금은 그 표적이 더 분명해졌구나“
“난 몰랐어. 아니면 사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한번은 형 모습을 그렸
어, 데미안. 그런데 놀랍지. 그게 나하고도 비슷했어. 그것이 그 표적이었을까?”
나는 놀랐다.
“형 어머니? 여기 계셔? 날 전혀 모르시잖아”
“아니, 너에 대히서 아셔. 널 잘 아실 거야, 네가 누구인지. 내가 말씀은 안
드렸지만. 넌 오래 아무 소식이 없었지”
“오, 자주 편지를 쓰려고 했지만 잘 안 되었어. 얼마 전부터는, 형을 곧 찾아
낼 게 틀림없다는 느낌이었어. 날마다 기다렸어”
그는 내 팔짱을 끼고 나와 함께 계속 걸었다. 그에게서 안정감이 나와 내 마
음속으로 흘러들었다. 우리는 곧 예전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학생 시절
을, 견진성사 수업을, 떠 그 당시 방학 때의 저 불행한 만남도 기억했다. 다만
두 사람 사이의 가장 긴밀한 최초의 끈, 프란츠크로머에 대해서만을 그때도 이
야기가 없었다.
어느새 우리는 기아하고도 예감에 찬 대화 한 가운데로 빠져들어 있었다. 데
미안이 그 일본인과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하며, 대학 생활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거기서부터 다른 이야기로 옮아갔다.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던 다른 문제도 데
이안의 말 가운데서 긴밀하게 연관되었다.
@P 182
그는 유럽의 정신과 이 시대의 징표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디서나 연합과 패
거리짓기가 기세를 떨치고 있다고, 그러나 그 어디서도 자유와 사랑은 없다고
그가 말했다. 대학생 서클과 노래 동호인 모임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의 이 모
든 공동체는 두려움에서, 무서움에서, 당황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런 공동체는
내부가 상해 있고 낡고 와해가 임박해 있다는 것이었다.
“연대란”데미안이 말했다.“멋진 일이지. 그러나 지금 도처에 만발해 있는
것은 전혀 연대가 아니야. 진정한 연대는, 개개인들이 서로를 앎으로써 새롭게
생성될 것이고, 한동안 세계의 모습을 바꾸어놓을 것야. 지금 연대라며 저기 저
러고 있는 것은 다만 패거리짓기일 뿐이야. 사람들이 서로에게로 도피하고 있어.
서로가 두렵기 때문이야. 신사들은 신사들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들끼리, 학자는
학자들끼리! 그런데 그들은 왜 불안한 걸까?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그들은 한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그들은 모두가 그들으 삶의 법칙들이 이제는 맞지 않음을, 자기들
은 낡은 목록에 따라 살고 있음을 느끼는 거야. 종교도, 도덕도, 그 모두가 이제
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맞지 않아. 백 년 그리고 그 이상을 유럽은 그저
연구만 하고 공장이나 지였지. 사람들은 정확히 알아. 사람 하나 죽이는 데 확약
이 몇 그램 필요한지. 그러나 어떻게 신에게 기도해야 하는지는 모르지. 어떻게
한 시간을 유쾌하게 보낼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걸. 저런 대학생들 술집을 한 번
봐! 아니면 부
@P 183
자들이 가는 유흥장들을 봐! 절망적이지! 이봐 싱클레어, 그 모든 것에서는 진
정한 명랑함이 나올 수 없단다. 저렇게 겁을 먹고 서로 뭉친 사람들은 두려움과
악의로 가득 찼어. 아무도 남들은 신뢰하지 않아. 그들은 이제는 더 이상 이상이
못 되는 이상들에 매달려 있어. 그러면서 새로운 이상을 내세우는 사람에게는
돌을 던지지. 싸움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감지해. 싸움들이 다시 벌어질 거야.
날 믿어. 곧 벌어진다구! 물론 그것들이 세계를 (개선)하지는 못하지.
노동자들이
그들의 공장주를 쳐죽이든지, 혹은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 총질을 하든지, 주인만
바뀌겠지. 그러나 헛된 일은 아닐 거야. 오늘날의 이상이 얼마나 가지 없는지 밝
혀지겠지. 석기 시대의 신들을 청소하게 되겠지. 지금 있는 대로의 이 세계는 죽
으려고 하고 있어. 멸망하려 하고 있어. 그리고 멸망할 거야“
“그럼 우리들은 어떻게 될까?”내가 물었다.
“우리들? 오, 어쩌면 우리도 함께 멸망하겠지. 우리가 우리 같은 사람을 쳐죽
일 수도 있지. 제발 그럼으로써 우리가 다 없어져 버리는 일만 없기를. 우리에게
서 남는것, 혹은 우리들 중에서 그 후에도 살아남는 자들 주위에 미래의 의지가
집결되겠지. 우리 유럽이 한동안 자신의 기술 및 학문의 대목시장을 펼쳐놓고
소리소리 질러대는 통에 들리지 않았던 인류의 의지가 드러날 거야.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인류의 의지가 결코 그 어디서도 오늘날의 공동체들, 국가들과 민족들,
협회들과 교회들의 의자와 같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겠지. 오히려 자연의 의지는
개개인들
@p 184
속에 적혀 있어. 네 마음속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 예수속에 적혀 있고 니체
속에 적혀 있지. 이 유일하게 중요한 조류들을 위한-그런 건 물론 날마다 모습
이 다를 수 있겠지만-공간이 생기게 될 거야. 오늘날의 공동체들이 와해되고 나
면 말이야.“
우리들은 늦게 강가에 있는 어느 뜰 앞에서 멈추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데미안이 말했다.“ 한번 와! 우리는 널 몹시 기다리고
있어”
기쁜 마음으로 나는 서늘해진 어둠을 뚫고 먼 거리를 걸어서 돌아왔다. 이곳
저곳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대학생들이 시끌벅적 휘청거리며 시내를 지나가고 있
었다. 자주 나는 때로는 결핍감을 느끼며, 때로는 비웃으며 그들의 코믹한 즐거
움과 나의 외로운 삶이 대립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나하고 얼마
나 무관한지, 이런 세계가 나한테는 얼마나 멀리 실종된 것인지를 오늘처럼 안
정감과 남모르는 힘으로 느껴본 적은 아직 한번도 없었다. 내 고향 도시의 관리
들, 그 늙고 위엄 있는 신사들이 기었났다. 그네들은 축복받은 천국의 기념품처
럼 그들이 술집에서 허비한 대학 시절의 추억에 매달렸으며 그들의 학창 시절의
사라져버린 (자유)를 예찬했다. 여느 때 시인이나 다른 낭만주의자들이 유년에
바치는 숭배와 같이. 어디서나 똑같았다! 어디서나 그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시
간 속 그 어딘가에서 (자유)와 (행복)을 찾았다. 오로지 두려움에서, 그들은 자기
들 자신의 책임을 기억하고 그들 자신의 길을 가라는 경고를 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몇 년 술 퍼마시고
@p 185
방종한 생활을 하다가, 그 다음에는 밑으로 기어들어 국가에 봉사하는 근엄한
신사가 된 것이다. 그렇다. 썩어 있었다. 우리 사는 것은 썩어 있었다. 그리고 세
상에는 이 대학생들의 멍청함보다 더 멍청하고 더 나쁜 수백 가지 다른 멍청함
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멀리 떨어진 내 숙소에 도착하여 잠자리에 들었을 때, 이 모든
생각은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나의 생각은 온통 이 하루가 준 큰 약속에 쏠려
있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내일이라도 데미안의 어머니를 볼 수도 있을 것이
다. 대학생들이 그들의 술집을 멀리하고 얼굴에 문신을 새기든, 세계가 썩어 그
몰락을 기다리고 있든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오로지 기다리고 있었
다. 나의 운명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향해 오는 것을.
아침 늦게까지 깊이 잠을 잤다. 새로운 날은 소년 시절의 성탄절 잔치 이후
더는 겪어보지 모한 장엄한 축제일처럼 밝아왔다. 나는 속속들이 동요하고 있었
다. 그러나 불안은 전혀 없었다. 나에게 중요한 하루가 밝았다고 느꼈고 나를 에
워싼 세계가 변화했음을, 나와 깊은 관련을 갖고서 장엄하게 기다리고 있음을
보았고 느꼈다. 나직하게 내리는 가을비조차도 아름답고 고요하게 또 축일답게
엄숙하고도 즐거운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으로 바깥 세계가 나의 내면
세계와 어울려 순수한 화음을 냈다. 그 다음은 영혼의 축제일이었다. 그 다음은
살아볼 만했다. 어떤 집도, 어떤 쇼윈도도, 골목의 어떤 얼굴도 나한데 거슬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분명 그래야 할 그대로였지만 일상
@p 186
적이고 익숙한 것의 공허한 얼굴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자연이었으며 경건하게 운명을 맞을 채비가 되어 있었다. 어린 소년이었을 적
큰 축제일 아침에, 성탄절이나 부활절 아침에 세계를 그렇게 바라보았었다. 세상
이 아직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었다. 나는 내면을
향해 가는 삶을 살아가는 데 익숙했었다. 또한 바깥에 있는 것에 대한 감각은
내게서 상실되었다는 사실, 반짝이는 색채들의 상실은 유년의 상실과 불가피하
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영혼의 자유로움과 남성다움을 어느 정도는 이 아름
다운 광채의 포기로 지불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감수하는 데도 익숙했었다. 이제
나는 매혹되어 인색했다. 그 모든 것이 다만 엎질러지고 어두워져 버렸다는 것
을, 그러나 유년의 행복을 포기하고 자유로워진 사람에게도 세계가 빛을 뿜는
모습을 바라보고 어린이다운 시각의 내밀한 전율을 맛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을.
막스 데미안과 지난밤 작별했었떤 교외의 그 정원을 내가 다시 찾아가는 시간
이 왔다. 비에 젖어 잿빛이 도는 키 큰 나무들 뒤로 작은 집이 환한 빛을 발하
며 아늑하게 숨겨져 있었다. 커다란 유리벽 뒤에는 키 큰 다년생 화초목들이, 말
갛게 닦인 창문 뒤에는 그림들과 서가가 달린 어두운 벽들이 있었다. 현관문은
따뜻하게 해놓은 작은 롤로 곧바로 이어졌다. 검은 옷에 흰 앞치마를 입은 말없
는 늙은 하녀가 나를 맞아들여 외투를 벗겨주었다.
그녀는 나를 홀에 혼자 남겨두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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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나는 내 꿈 한가운데 있었다. 문 뒤, 위쪽 짙은 색 목재 벽에 걸린 검
정 유리 액자 속에 잘 아는 그림이. 지가을 뚫고 나오려고 몸을 솟구치고 있는
황금빛 매의 머리를 가진 나의 새가 들어 있었다. 사로잡힌 듯 나는 멈추어 서
있었다. 마음이 무척 기브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마치 이순간에 내가 행하고
경험한 모든 것이 대답과 성취가 되어 내게로 되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번개같
이 빠르게 한 무리의 영상들이 나의 뇌리를 스쳐갔다. 대문 아치 위에 오래된
돌 문장이 있는 고향 부모님 댁, 그 문장을 그리던 소년 데미안, 나의 적 크로머
의 나쁜 마술에 얽혀들어 꼼짝못하며 두려움에 차 있는 소년인 나, 조용한 교실
책상에서 내 그리움을 그림으로 그리는 청년인 나, 마음의 실 가닥들이 얽힌 그
물 속에 스스로 얽혀들 영혼, 그리고 이 순간까지의 모든 것, 또 모든 것이 나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쳤다. 나의 마음속에서 긍정되고, 대답되고, 시인되었다.
축축해진 눈으로 나는 나의 그림을 응시하며 내 마음을 읽었다. 그때 내 시선
이 아래로 향했다. 새 그림 아래 열린 문에 짙은 색 옷을 입은 키 큰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아들의 얼굴과 똑같이 시간과 나이가 없이
흔이 깃들인 의지로 충만한 얼굴로, 아름답고 기품있는 여성이 나를 향해 다정
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성취였다. 그 인사가 뜻하는 것은 귀향이
었다. 말없이 나는 그녀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그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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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그녀가 힘있고 따뜻한 두 손으로 마주 잡았다.
“싱클레어죠. 금방 알아봤어요. 어서 오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깊고 따뜻했다. 나는 감미로운 포도주처럼 그 목소리에 젖어
들었다. 그리고 이제 눈을 들어 그녀의 고요한 얼굴을,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검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신선하고 성숙한 입을, 자유롭고 당당한, 그 표적을 지
닌 이마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그녀에게 말하며 두 손에 키스하였다.“제
모든 생애는 늘 길 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그녀가 어머니처럼 미소지었다.
“결코 집으로 아주 돌아오지는 못하지만”그녀가 다정하게 말했다.“친한 길
들이 서로 만나는 곳, 거기서는 온 세계가 잠깐 고향처럼 보이지요”
그녀가 말하는 것은 그녀에게로 오는 길에 느낀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 또
그녀의 말은 아들과 매우 닮았으면서도 전혀 달랐다. 모든 것이 더 성숙하고, 더
따뜻하고, 더 자명했다. 그러나 막스가 예전에 그 누구에게도 소년의 인상을 주
지 않았던 것과 똑같이 그의 어머니는 전혀 장성한 아들을 둔 어머니처럼 보이
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라 주위로 감도는 숨결은 그토록 젊고 감미로
웠다. 그녀의 금빛 도는 피부는 그렇게 팽팽하고 주름이 없었다. 입은 그렇게 꽃
피고 있었다. 내 꿈속에서보다도 더 당당하게 그녀는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
곁에 있음은 사랑의 행복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성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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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 운명이 나에게 스스로의 모습을 보여준 새로운 영상이었다. 더 이
상 엄격하지 않고, 더 이상 고립시키지 않으며, 아니, 성숙하고 흔쾌하게 흥겹게
보여주었다! 나는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 맹세도 하지 않았다. 나는 목적에 도달
해 있었던 것이다. 높은 길이 난 곳에. 거기서부터 보면 앞으로 갈 길이 멀리 찬
란하게 언약의 땅을 마주 향하여 나 있었다. 가까운 행복의 나무 그늘이 드리워
지고, 가까운 갖가지 즐거움의 정원들에서 식혀진 길이었다. 어떻게 되어가든 나
는 행복했다. 세상에서 이 여성을 안다는 것이, 그 목소리에 젖어든다는 것이 그
녀 곁에서 숨쉰다는 것이. 그녀가 내게 어머니가 되든, 연인이 되든, 여신이 되
든 그녀가 거기 있기만 하다면! 나의 길이 그녀의 길에 가깝기만 하다면!
그녀는 나의 매 그림을 가리켰다.
“이 그림을 받았을 때만큼 우리 막스가 기뻐한 적은 없어요”그녀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나도 그렇구요. 우린 당신을 기다렸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이 왔
을 때, 당신이 우리들에게로 오는 도중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당신이 어린 소
년이었을 때, 싱클레어, 그때 어느 날 내 아들이 학교에서 오더니 말했지요. 이
마에 표적을 지닌 소년이 하나 있어. 그애는 분명 내 친구가 될 거야,라고요. 그
것이 당신이었어요. 사는 게 쉽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우린 다신을 믿었답니다.
한번은 방학에 집에 왔을 때 다시 막스와 만났지요. 열여섯 살 때쯤이었을 겁니
다. 막스가 나한테 그 이야길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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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단시켰다.“오, 형이 그런 말을 해드리다니! 그때는 제가 가장 비참했
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요, 막스가 나한테 이러더군요. 지금 싱클레어에게 가장 큰 어려움이 닥
쳐 있어요. 그애는 다시 한번 공동체속으로 도피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어요. 심
지어 술집 단골이 되었어요.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그의 표적이 가려져
있지만, 그러나 그 표적이 아무도 모르게 그를 불태우고 있습니다,라구요. 그렇
지 않았나요?”
“오 그래요, 그랬어요, 꼭 그랬어요. 그 다음에 저는 베아트리체를 발견했고
그 다음에 마침내 다시 저를 제 자신에게로 이끄는 인도자가 왔지요. 그 이름은
피스토리우스예요. 그때야 저는 왜 저의 소년 시절이 그토록 막스 형과 결합되
었는지, 왜 제가 글부터 벗어날 수 없었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머니,
아니 어머니, 전 당시에 자주 생각했어요, 죽어야겠다고요. 그 길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녀가 바람처럼 가볍게 손으로 내 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그건 늘 어려워요, 태어나는 것은요. 아시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
지요.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그 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지는 않았
나요? 혹시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았던가요?”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힘들었어요”내가 잠꼬대처럼 말했다.“힘들었어요. 꿈이 올 때까지는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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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꿰뚫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자신의 꿈을 찾아내요 해요. 그러면 길을 쉬어지지요. 그러나 영원
히 지속되는 꿈은 없어요. 어느 꿈이든 새 꿈으로 교체되지요. 그러니 어느 꿈에
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몹시 놀랐다. 놀람이 벌써 하나의 경고였을까? 방어였울까? 그러나 경고
든 방어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녀의 인도를 받으며 목적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을
용의가 있었다.
“모르겠습니다”내가 말했다.“얼마나 오래 제 꿈이 지속될는지. 이것이 영원
했으면 하고 소망합니다. 새 그림 아래서 제 운명이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어머
지처럼, 그리고 연인처럼요. 제 주인을 운명입니다. 달리는 그 누구도 아닙니다
”
“그 꿈이 당신의 운명인 한, 당신을 그 꿈에 변함없이 충실해야겠지요”그녀
가 진지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한 가닥 슬픔이 나를 사로 잡았다. 이 마력으로 불러온 듯한 시간에 죽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눈물이-얼마나 오래 나는 울지 않았던가!-걷잡을 수 없이
안에서 솟구쳐 나를 압도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격하게 나는 그녀로부터 몸을
돌려 창가로 가서, 흐려진 눈으로 화분의 꽃들 너머를 바라보았다.
등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침착하면서도, 술이 넘치도록 채
워진 잔처럼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싱클레어, 어린아이로군요! 당신의 운명은 당신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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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는데요. 언젠가 그것은 완전히 당신 것이 될 겁니다. 당신이 꿈꾼 대로
요. 당신이 변합없이 충실하면요“
나는 자제를 하고 얼굴을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난 친구가 몇 명 있어요”그녀가 미소를 띠고 말했다.“몇 안 되는 아주 가
까운 친구들이죠. 그들은 나한테 에바 부인이라고 그래요. 당신도 나를 그렇게
불러요, 원한다면요”
그녀가 나를 문까지 데려다주고, 문을 열며 정원을 가리켰다.“저기 바깥에서
막스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큰 나무들 아래 나는 마비되고 온통 뒤흔들린 채 서 있었다. 일찍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깨어 있었는지 아니면 더 꿈꾸고 있었는지, 그건 알 수 없었다. 나뭇
가지들에서 빗방울이 가볍게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정원 안으로 들어섰
다. 정원은 강 기슭을 따라 멀리 이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데미안을 찾아냈다.
그는 문이 열린 작은 정자에 웃통을 벗은 채로 서서, 걸려 있는 샌드백을 상대
로 권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놀라서 나는 멈추었다. 데미안은 화사해 보였다. 넓은 가슴, 단단하고 남자다
운 머리통, 근육이 팽팽한, 처든 두팔은 탄탄하고 실팍했다. 허리, 어깨, 팔 관절
이 마치 좔좔 솟는 샘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데미안!”내가 불렀다.“거기서 뭐 해?”
그가 즐겁게 웃었다.
“연습을 하는 거야. 그 작은 일본 사람하고 격투를 한판 벌이기로 했거든. 그
자는 고양이처럼 날쌔고 꼭 그만큼 꾀도 있지. 그러나 나를 해치우지는 못할걸.
나는 그에게 갚아야 할 아주 작은 굴욕이 있어”
그는 셔츠와 저고리를 걸쳤다.
“벌써 우리 어머닐 만나고 왔니?”그가 물었다.
“그래. 데미안, 어쩌면 그렇게 근사한 어머니가 있지! 에바 부인이시라지! 이
름이 완벽하게 어울리시더라. 모든 본질의 어머니 같으셔”
그가 한순간 생각에 잠겨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이름을 벌써 아는구나? 이봐, 넌 자랑스러워해도 되겠다. 어머니가 처음
만나 벌써 그 이름을 말해 준 건 네가 처음이야”
그 날부터 나는 아들이자 형제처럼, 또한 연인처럼 그집을 드나들었다. 등뒤로
그 집 문을 닫고 들어설 때면, 멀리서 정원의 큰 나무들이 나타나는 것이 보이
기만 해도, 나는 벌써 풍요롭고 행복했다. 바깥에는 (현실)이 있었다. 바깥에는
거리와 집들, 사람과 시설들, 도서관과 강의실들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 안에는
사랑과 영혼이 있었다. 여기에는 동화가 , 꿈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사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는 생각과 대화
가운데서 자주 그 세계 한가운데에서 살았다. 다만 우리는 다수의 사람들과 어
떤 경계선에 의하여 갈라져 다른 벌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다르게 바라
봄에 의하여 갈라져 있었다. 우리의 과제는 세계 안에서 하나의 섬을 제시하는
것, 어쩌면 하나의 모범을,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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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다른 가능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내가, 오래 고립되어 있던 사람인
내가, 완전한 혼자임을 맛보고 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동체를 알게 되었
다. 다시는 행복한 사람들의 연회를, 즐거운 사람들의 축제를 갈망하지 않을 것
이다. 결코 다시는, 다른 사람들의 연대를 보고 시샘이나 향수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나는 (그 표적)을 지닌 사람들의 비밀을 전수받았다.
표적을 가진 우리들은, 세상의 눈에는 이상한 사람들, 위험한 광인들로 비칠지
도 몰랐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깨어난 사람들, 혹은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은 점점 더 완벽한 깨어 있음을 지향했
다. 반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 추구는, 그들의 의견, 그들의 이상과 의무
들, 그들의 삶과 행복을 점점 더 긴밀하게 패거리에 묶는 것이었다. 그곳에도 노
력은 있었다. 그곳에도 힘과 위대함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 견해로는 우리 표
적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것, 개별화된 것 그리고 매래의 것을 향한 자연의
뜻을 제시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고수의 의지 속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인류가, 그들고 우리처럼 사랑하는 인류가 무언가 완성된 것, 보존되고 지켜져야
만 하는 것이었다. 반면 우리들에게는 인류가 하나의 먼 미래, 우리들 모두가 그
것을 향해 가는 도중에 있고, 그 모습은 아무도 모르는, 그 법칙은 그 어디에도
씌어 있지 않은 미래였다.
에바 부인, 막스 그리고 우리 말고도 우리 모임에는, 다소 멀들 가깝든 간에,
매우 다양한 종류의 구도자들이 있
@p 195
었다. 그들 중 더러는 특별한 오솔길을 걸어갔다. 뚝 떨어진 목표를 세워놓고
특별한 의견과 의무들에 매달렸는데, 그들 가운데는 천문학자와 카발라 연구가
들도 있었고 톨스토이 추종자도 한 사람 있었으며 온갖 종류의 다정하고, 수줍
어하며 상처입을 수 있는 사람들, 새로운 소수 종파의 추종자, 요가 장려자, 채
식주의자 등등이 있었다. 이런 모든 사람들과 우리는, 누구든 다른 사람의 비밀
스러운 꿈을 존중한다는 것 외에는 사실 아무런 정신적인 공유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좀더 가까웠는데, 과거의 신들이며 새로운 최고의 이상에
대한 인류의 추구를 추적하고 있어서, 그들의 연구는 자주 피스토리우스를 상기
시켜 주었다. 그들은 책을 가져왔고, 고대어로 씌어진 글을 우리들에게 번역해
주었으며, 옛 상징등과 의식들의 도면을 보여주고, 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이
상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인류가 가졌던 소유 전체가, 꿈들로, 그 가운데서 인류
가 더듬으면서 미래의 가능성의 예감을 따라갔던 꿈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그들은 가르쳐 주었다. 기독교에의 귀의라는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경
이로운, 머리가 수천 개인 고대 세계의 신들의 엉킨 덩어리를 그렇게 우리는 훑
어보았다.
고독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신앙 고백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었다. 민족에서
민족으로 이어지는 종교의 변전도 그랬다. 그리고 우리가 모은 모든 것에서는
우리들 시대와 지금의 유럽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유럽은 엄청난 노력을 기울
여 인류의 막강한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냈으나 마침내
@p 196
는 깊은, 결국 통탄할 정신의 황폐하에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유럽은 온
세계를 획득했는데, 그러느라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에도 특정한 희망과 구원의 교리를 믿는 신도와 신봉자들이 있었다. 유럽
을 개종시키려는 불교도들이 있었고 톨스토이 추종자들이 있었으며 다른 신앙도
있었다. 작은 모임 안에서 우리는 귀기울여 들었고 이 교리 중의 그 어느 것도
다만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미래에 어떤 모습을 줄 것인가에 대한 근심은 우리
표적을 지닌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어는 종교든지, 어느
구원론이든지 애처부터 죽어 있고 무익했다. 우리가 의무이자 운명이라고 느끼
는 것은 오로지 이런 것이었다. 불확실한 미래가, 그것이 가져올 어느 것에나 우
리가 준비되어 이음을 발견할 만끔 우리들 누구들 그토록 완전희 자기 자신이
되고, 자기 속에서 작요하는 자연의 싹의 요구에 그토록 완전히 따르며 기꺼이
살리라는 것.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의 신생이 그리고 지금 것의 와해가 가까웠음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미 말했든 안 했든, 우리들 모두의 감정 속에서 분명했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나에게 이따금씨 말했다.“지금 오고 있는 것은, 생각할 수
도 없는 무엇이야. 유럽의 영혼은 무한히 오래 묶여 있던 짐승이야. 자유로워지
면 그의 첫 활동은 그다지 사랑스러운 것은 아닐 거야. 그러나 그렇게 오랫동안
거듭거듭 없는 것처럼 거짓말하고 마비시켜 놓은 영혼의 진정한 곤궁이 드러나
기만 하면 어느 길로 가든 어느 우회로로
@p 197
가든 그건 아무래도 괜찮아. 그때면 우리들의 날이 되는거야.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를 필요로 해. 인도자나 새로운 입법자로서가 아니라-새로운 법은 우리는
살아 겪지 못하겠다-오히려 뜻있는 자로, 함께 가고, 운명이 부르는 곳에 서 있
을 용의가 되어 었는 사람들로 말이야. 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상이 위협당
할 경우, 믿을 수 없는 일도 할 용의가 있어. 그러나 새로운 이상, 새로운 움직
임, 어쩌면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발전의 움직임이 와서 문두드릴 때는 아무도
거기 없어. 그때 거기 있다가 함께 갈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우리들일 거야. 그
러라고 우리에게는 표적이 찍혀 있어. 무서움과 증오를 일으켜 당시의 인류를
그 옹색한 목가로부터 끌어내 위험하게 넓은 곳으로 몰아가도록 카인에게 표적
이 찍혀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인류가 가는 길에 영향력을 발휘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그들에게 닥친 운명을 맏아들일 자세였기 때문에, 오로지 그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었어. 그것은 모세와 부처에게 적용
되고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에게도 적용되지. 어는 조류에 봉사하느냐, 어느 극
의 다스림을 받느냐, 그것은 자신이 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만약 비스마르
크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에 대비하고 있었더라면, 그는 현명한
신사는 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운명의 인간은 되지 못했을 거야. 나폴레옹이 그
랬고, 시저가 그랬고, 로욜라가 그랬어. 다들 그랬어! 그것을 늘 생물학적으로 발
적사적으로 생각해야 돼! 지표 위에서 일어난 지각 변동이 물에 살던 동물을 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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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뭍에 살던 동물을 물로 던져넣었을 때, 그때 운명에 준비된 예들이 있었
지.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것을 완수하고 새롭게 적응하며 자신의 종을 구해
낼 수 있었던 예들이 말이야. 누가 전에 그들의 종 안에서 보수주의자, 현상 유
지자들이었는지, 혹은 괴짜며 혁명가였는지, 우리는 지금 몰라, 다만 그들은 준
비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 모든 것 너머로 그들의 종을 건져 새로운 발전 속
으로 구해 낼 수 있었어. 그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어. 그래서 우리는 준비가 되
어 있으려는 거야“
그런 대화들을 나눌 때 에바 부인이 자주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우리
들 누구에게나 신뢰와 이해심이 가득한 경청자였다. 이런저런 생각은 메아리였
다. 모두 그녀에게서 나와서 그녀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 가까이
에 앉아서 이따금씩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성숙과 영혼의
분위기에 젖어본다는 것이 나에게는 행복이었다.
나의 마음속에 그 어떤 변화가, 흐려짐이나 새로워짐이 진행되고 있으면 그녀
는 즉시 그걸 느꼈다. 내가 자면서 꾸었던 꿈들은 마치 그녀가 불어넣어준 영감
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자주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꿈들은 그녀
에게는 이해되는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녀가 그 맑은 느낌으로 쫓아갈
수 없는 특별한 것이라고는 없었다. 한동안 나는, 우리들이 낮에 나누었던 대화
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꿈들을 꾸었다. 온 세계가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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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꿈을, 나혼자 혹은 데미안과 함께 긴장하여 위대한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 꿈을 꾸었다. 운명은 여전히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왠지 에바 부인의 표
정을 지니고 있었다.-그녀로부터 선택당했든, 그것은 운명이었다.
더러 그녀는 나에게 미소를 띠고 말했다. “당신의 꿈은 완전치 않아요, 싱클
레어, 최상의 것을 잊어버렸어요”그리하여, 그 다음에 다시 그 생각이 떠오르
고,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었던 것 같다.
때때로 나는 만족하지 못했고 욕망에 시달렸다. 그녀를 포옹하지 않고 곁에서
바라보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한번은 며칠 그 집엘 가지
않다가 그 다음에 마음이 산란한 채 다시 가니, 그녀가 나를 한켠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다.“당신이 믿지 않는 소망들에 몰두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나는 알아요. 그런 소망들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완전
히 올바르게 소망하든지요. 한번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서 성취를 확신하도록 그
렇게 소망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성취도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소망
하고, 다시 후회하고 그러면서 두렵지요. 그 모든 것은 극복되어야만 합니다. 동
화 하나를 들려드리지요”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별과 사랑에 빠진 어떤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
다. 그 청년은 바닷가에 서서, 두 손을 뻗고 별에게 기도했고, 별에 대해 꿈구고,
그의 생각을 별에게로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혹은 안다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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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했다. 별은 인간의 포옹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성취에 대한 희망도
없이 별을 사랑하는 것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는 이 생각에서
포기와 말없는, 변함없는 고통, 자신을 개선시키고 정화시킬 고통에 관한 삶 전
체를 다룬 시를 지었다. 그의 꿈들은 그러나 모두 별에게로 쏠렸다. 한번은 그가
다시 밤에 바닷가 높은 절벽에 서서 별을 쳐다보며 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런데 극도로 커진 그리움의 한순간 그는 별을 향하여 펄쩍 뛰어 허공
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뛰어드는 순간 번개같이 떠뜩 그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결국 그는 으스러진 채 바닷가에 떨어지고
말았다. 사랑한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만양 뛰어드는 순간에 성취를
굳건하게 확실하게 하는 연혼의 힘을 가졌더라면, 그는 위로 날아올라 별과 하
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해요”그녀가 말했다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안에서 확신히 이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끌
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끕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끌리
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 겁니
다.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그러나 다음번에 그녀는 다른 동화를 들려주었다. 희망없이 사랑하는 연인이
하나 있었다. 그는 완전히 그 자신의 영혼 속으로 되돌아가 사랑에 다 타버리고
있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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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그에게는 세상이 없어져 버렸다. 그는 푸른 하늘도 초록 숲도 더는 보지
않았다. 개울물도 그에게는 소리를 내지 않았고, 하프도 그에게는 울리지 않았
다. 모든 것이 가라않았으며 그는 가엾고 비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커갔다. 사랑하는 그 아름다운 여인을 소유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죽어 썩어버렸
으면 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사랑이 그의 마음속의 다른 모든 것을 불태워 버
렸음을 감지했다. 사랑은 힘차게 되어 당기고 당겼으며 그 아름다운 여인은 따
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왔다.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서서 그녀를 자기에
게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녀가 그 앞에 서자,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
었다. 자기가 잃어버린 모든 세계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겨 놓았음을 그는 전율하
며 느꼈고 보았다. 그녀가 그 앞에 서서 그에게 자신을 헌신했다. 하늘 과 숲 그
리고 개울, 모든것이 새로운 색깔로 신선하고 찬란하게 그를 마주해 오고 있었
다. 그의 것이었고 그의 언어로 말했다. 그리고 그저 여자 하나를 얻는 대신 그
는 마음속에 온 세계를 소유했다. 하늘의 별 하나하나가 그의 안에서 불타고 그
의 영혼을 통해 기쁨의 빛을 뿜어냈다. 그는 사랑했고 그러면서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면서 자신을 잃어 버린다.
에바 부인에 대한 내 사랑이 내 삶의 단 하나의 내용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녀는 날마다 다르게 보였다. 더러 나는, 나의 본질이 이끌려 지향해 가는 것이
그녀라는 인물이 아니고 그녀는 다만 내 자신의 내면의 한 상징이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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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다만 더 깊게 내 자신 속에 인도하려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낀다고 생각
했다. 나는 나를 뒤흔드는 화급한 물음들에 대한 나의 무의식의 대답처럼 들리
는 말을 자주 그녀로부터 들었다. 그 다음에는 다시, 내가 그녀 곁에서 관능적
욕구로 불타며 그녀가 닿았던 물건들에 입맞추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점차
관능적이며 비관능적인 사랑이, 현실과 상징이 서로 포개지며 밀려왔다. 그 다음
에는 내가 내 방에서 고요히 열렬하게 그녀를 생각하면, 그럴 때 그녀의 손이
나의 손에,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었다. 혹은
내가 그녀 집에서 그녀 얼굴을 보고, 그녀와 말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
면서도, 그녀가 정말로 거기 있는지, 꿈은 아닌지 잘 분별할 수 없기도 했다. 어
떻게 하나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불멸로 소유할 수 있는지를 나는 예감하기 시작
했다.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에바 부인의
입맞춤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나에게 그녀의 성숙하
고 향내나는 온기를 미소로 보내주었을 때, 나는 마치 내가 내 자신 안에서 한
걸음 진보를 이루어내었을 때와 똑같은 느낌을 가졌다. 나에게는 운명이자 중요
한 모든 것이 그녀의 모습을 가졌다. 그녀의 모습이 내 생각 하나하나 속으로
녹아들고, 내 생각 하나하나가 그녀 속으로 들어갔다.
부모님 댁에서 지낸 성탄절 휴가 때, 나는 두려웠다. 두 주일이나 에바 부인으
로부터 떨어져 살야야 하는 것은 고통일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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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고통이 아니었다. 집에 있으면서 그녀를 생각하는 것은 근사했다. H시로
되돌아오고 나서도 나는 이틀 동안 그녀의 집에 가지 않았다. 이 안정과 그녀의
감각적 현존으로 부터의 독립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또한 나는 그녀와 나의 결
합이 새로운, 비유적 방식으로 완수되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바다였고, 그 안으
로 나는 흘러들고 있었다. 그녀가 별이었고, 나 자신도 별 하나로 그녀에게로 가
는 도중에 있었는데, 우리는 서로 만났고 우리가 서로를 끌어당겼음을 느꼈다.
함께 머물렀고 희열에 차 영원히, 소리 울리는, 가까운 원을 서로 에워싸며 돌았
다.
처음으로 다시 찾아갔을 때 이 꿈을 나는 그녀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 꿈 아름다운데요”그녀가 조용히 말했다.“그 꿈을 실현시키세요”
이른 봄날,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루가 있었다. 나는 홀로 들어섰다. 창문이 열
려 있었고 미풍의 물결이 히아신스의 짙은 향기를 온 방 안에 퍼뜨리고 있었다.
아무도 보이질 않아 나는 계단을 올라 막스 데미안의 서재로 들어갔다. 늘 익숙
했던 대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섰다.
방은 어두웠다. 커튼이 모두 쳐져 있었다. 막스가 화학 실험실을 설비해 놓은
작은 곁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었다. 거기서부터 봄 태양의 환한 흰 빛이
비구름을 뚫고 빛났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커튼을 젖혔다.
거기 작은 걸상, 커튼 쳐진 창 가까이에 막스 데미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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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하게 변해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번개처럼 한 가지 생각이 나를 스치
고 갔다. 이미 한번 본 모습이다! 그는 두 팔을 꼼짝도 않고 늘어뜨리고 있었다.
두 손은 무릎에, 약간 앞으로 숙인 채 두 둔을 뜬 얼굴은 시선이 없었고 죽어
있었다. 동공 속에서는 마치 한 조각 유리에서처럼 번들거리는 작은 빛이 반사
되어 번쩍였다. 창백한 얼굴은 스스로에 침잠하였는데, 엄청난 응결 말고는 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 얼굴은 마치 사원 현관에 있는 태곳적 동물의 가면처럼 보였
다.
기억이 나를 전율케 앴다. 저렇게, 꼭 저렇게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여러 해
전, 내가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 벌써 한번 본 적이 있었다. 저렇게 두 눈은
내면을 향하여 응결되어 있었다. 그때도 저렇게 수 손은 생명 없이 나란히 가지
런히 놓여 있었다. 파리 한 마리가 그의 얼굴 위를 기어갔었다. 또 당시에도, 어
쩌면 여섯 해쯤 전에, 바로 저렇게 늙고 저렇게 시간을 초월한 듯 보였었다. 얼
굴의 주름 하나도 오늘과 다르지 않았다.
두려움이 엄습해서 나는 가만히 방을 나와 층계를 내려왔다. 홀에서 에바 부
인을 만났다. 그녀는 창백했고 지쳐보였다. 그녀에게서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림자 하나가 창문을 스쳐갔다. 눈부신 흰 태양이 갑자기 사라졌다.
「막스 형한테 갔었어요」내가 얼른 낮은 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요? 형은 자고 있어요. 아니면 침잠해 있고요. 잘 모르겠어요, 전에도 벌써 한번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p 205
「그 앨 깨우진 않았죠?」그녀가 급하게 물었다.
「네. 제 소릴 듣지 못했어요. 저는 얼른 다시 나왔구요. 에바 부인, 말해 주세
요. 형이 왜 그렇지요?」
「침착해요, 싱클레어. 그애한테 아무 일도 일어난 게 아니에요. 돌아가 있는
거랍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일어나 비가 오는데도 정원으로 나갔다. 함께 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홀 안에서 왔다갔다했다. 히아신스의 마비시키는 향내를 맡았다. 문
위에 있는 나의 새 그림을 응시했고 마음 조이며, 그 날 아침 이 집을 채우고
있던 기이한 그림자를 호흡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에바 부인은 곧 돌아왔다. 빗방울이 그녀의 짙은 색 머리카락에 방울방울 맺
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안락의자에 앉았다. 피로가 그녀의 온 몸을 뒤덮고 있
었다. 나는 그녀 곁으로 다가서 그녀 위로 몸을 숙이고 그녀 머리카락에 매달린
물방울들을 입맞추어 떼어냈다. 그녀의 두 눈은 환하고 고요했다. 그러나 물방울
들이 내게는 눈물 같은 맛이 났다.
「형을 살펴보고 올까요?」내가 나직이 물었다.
그녀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어린아이처럼 굴지 말아요, 싱클레어!」자신 안에서 어떤 마력을 깨뜨리기
위해서인 듯 그녀가 강하게 경고했다. 「지금은 갔다가 나중에 다시 오세요. 지
금은 같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네요」
나는 떠났고 집을 나와 도시를 지나 산으로 빨리 걸어갔
@p 206
다. 비스듬히 내리는 성긴 비가 나를 향해 떨어졌다. 구름은 낮게 무거운 압력을
받으며 불안에 싸인 듯 흘러 지나갔다. 아래쪽에서는 거의 바람이 불지 않았는
데, 높은 곳에서는 폭풍이 부는 것 같았다. 이따금 잠깐씩 금속빛 어두운 구름장
에서 햇살이 창백하면서도 눈부시게 비쳐 나왔다.
그때 하늘 너머로 노란 빛 엷은 구름 한 조각이 떠왔다. 그 구름은 잿빛 벽에
막혀 더 가지 못하고 멈추어 있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노란 빛과 푸른 빛에서
형상 하나를 만들었다. 거대한 새의 모습이었다. 그 새는 푸른 혼돈을 찢어 떨치
고 큰 날갯짓으로 하늘 속으로 날아서 사라졌다. 그러더니 다시 폭풍우 소리가
들렸고, 비가 우박에 섞여 요란하게 타다닥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소리를 내는 짤ㅁ은 천둥 번개가 채찍질 당한 풍경 위에서
와지끈 부서졌다. 그 후 곧바로 다시 한줄기 밝은 빛이 뚫고 비쳤고, 갈색 숲 너
머 가까운 산들위에는 파리하고 비현실적으로 창백한 눈이 빛나고 있었다.
몇 시간 뒤 젖고 창백해져서 돌아오니 데미안이 직접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나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실험실에서는 가스 불꼬ㅎ이 타고
있었고, 종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앉자」그가 권했다. 「피곤하겠는데, 형편없는 날씨군. 바깥에 한참 있었나
본데. 곧 차를 가져올 거야」
「오늘 뭔가가 시작되었어」내가 망설이며 말했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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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단순한 천둥번개일 수 없어」
그가 나를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무얼 보았지?」
「응. 구름 속에서 한순간 분명하게 형상 하나를 보았어」
「무슨 형상?」
「새였어」
「매? 그것이었지? 네 꿈의 새였지?」
「맞아, 그건 내 매였어. 노란색이고 거대했는데 검푸른 하늘 속으로 날아갔어
」
데미안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노크 소리가 났다. 늙은 하녀가 차를 가져왔다.
「들어봐, 싱클레어. 네가 그 새를 우연히 본 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우연히? 그런 것들을 우연히 볼 수 있어?」
「좋아, 아니지. 무언가 뜻이 있지. 무엇인지 알겠니?」
「아니. 그 뜻이 어떤 충격이라는 것, 운명 속의 한 걸음이라는 것만은 느끼겠
어. 우리들 모두가 문제되고 있는 것 같아」
그는 격하게 이리저리 오갔다.
「운명 속의 한 발자국이라고!」그가 크게 외쳤다. 「똑같은 것을 나는 지난밤
에 꿈꾸었어. 우리 어머니는 어제 예감을 느끼셨구. 그것도 같은 의미였어. 내가
꾼 꿈은, 나무 등걸에나 탑에 놓인 어떤 사다리를 올라 위에 올라가니 온 나라
가 보였어. 그것은 커다란 평지였는데 도시들과 마을들이 있는 온 나라가 불타
고 있는 거야. 나는 아직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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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해 주지는 못하겠어. 아직 내게도 분명하지는 않거든」
「그 꿈을 자신과 관련시켜 해석해?」내가 물었다.
「자신과 관련시키겠느냐구? 물론이지. 아무도 자기하고 관계 없는 꿈을 꾸지
는 않아. 그러나 나만 관계되는 것도 아냐. 그 점에서 네가 옳아. 난 꽤 정확하
게 꿈들을 구분하지. 내 자신의 영혼 속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꿈들과, 다른 꿈
들, 매우 드물지만 온 인류의 운명이 그 가운데서 암시되는 꿈들을 말이야. 나중
의 꿈들은 매우 드물게 꾸고, 그건 예언이었으며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꿈은 한번도 꾸지 않았어. 풀이는 너무도 불확실하지. 그러나 그걸 분명하게 알
고 있어. 나는 나 혼자만 관련된 게 아닌 무엇인가를 꿈꾸었어. 그 꿈은 전에 꾼
꿈의 속편이었는데 예전의 꿈이 계속되는 것이었어. 이 꿈이었어, 싱클레어. 거
기서 내가 이미 말한 예감을 느꼈던 것은. 우리의 셰계는 정말 썩어 있어. 우린
알지. 그렇지만 그건 몰락이나 그 비슷한 것을 예언할 이유는 못될 거야. 그러나
몇 년째 꿈들을 꾸었는데, 거기서 추론하는 것은 혹은 느끼는 것은, 혹은 무엇이
든 간에 거기서 내가 느끼는 것은 낡은 한 세계의 와해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는 것이야. 처음에는 아주 약하고 멀리 떨어진 예감이었어. 그러나 점점 더 분명
하고 강해졌어. 아직 내가 아는 건, 나 자신에게도 함께 관련된 무엇인가 큰 것,
무서운 것이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다는 것뿐이야. 싱클레어, 우리는, 우리가 이
따금씩 이야기했던 것을 겪게 될 거야! 세계가 새로워지려 하고 있어. 죽음의 냄
새가 나.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죽음 없이 오진 않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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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충격적이야」
놀라서 나는 그를 응시했다.
「형의 꿈의 나머지를 이야기해 줄 수 없겠어?」나는 수줍게 청했다.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하겠어」
문이 열리고 에바 부인이 들어왔다.
「여기 함께 있구나! 얘들아, 너희 슬퍼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산뜻하고, 이제는 전혀 더 이상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이 그녀
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어머니가 겁먹은 아이들에게로 가듯 그녀는 우리들에게
로 왔다.
「슬프지는 않은데요, 어머니. 저희는 다만 이 새로운 표적의 수수께끼를 약간
풀어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거긴 아무것도 없네요. 오려고 하는 것은 갑자기 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 필요 있는 것은 겪게 되겠지요」
나는 기분이 언짢았다. 작별을 하고 혼자 홀을 지나가는데, 히아신스 향기가
시들고, 맥빠지고 시체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림자 하나가 우리들 위에 드리워
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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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시작
여름 학기도 H시에 머물 수 있게 해놓았다. 집에 있는 대신, 우리는 이제 거
의 언제나 강가의 정원에 있었다. 격투에서 보기좋게 진 일본인은 떠났고, 톨스
토이 추종자도 없었다. 데미안은 날이면 날마다 끈질기게 말을 타고 돌아다녔다.
나는 자주 그의 어머니와 단 둘이 있었다.
이따금씩 내 삶의 평화로움에 놀라곤 했다. 나는 워낙 오래 홀로였고, 포기를
연습하고, 내 자신의 고통으로 힘들게 허우적거리는 데 익숙했던 터라 H시에서
의 이 몇 달은 꿈의 섬처럼 느껴졌다. 거기서 나는 요술에 걸린 듯 편안하게 오
직 아름답고, 유쾌한 일과 생각들 속에서 살 수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구상하는
보다 높은 새로운 공동체의 전조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나는 넘치는 만족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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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적함 속에서 숨쉬도록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고통과 쫓김이 필요했다. 언젠
가 이 아름다운 사랑의 영상 안에서 깨어나 오로지 고독과 싸움뿐인, 평화난 공
존이란 없는 타인들의 차가운 세계속에서 홀로, 온전히 홀로 다시 서게 되리라
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운명이 아직도 이 아름답고 고요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데
기뻐하며 갑절의 다정함으로 에바 부인에게 바짝 다가갔다.
여름 몇 주일은 빠르고도 쉽게 흘러갔다. 여름 학기가 벌써 끝나가고 있었다.
이별이 곧 닥칠 것이다. 나는 그걸 생각해서는 안되었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
비가 꿀 많은 꽃에 매달려 있듯 나는 아름다운 나날에만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나의 행복한 시절이었다. 내 인생의 첫 성취였으며 동맹에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올까? 나는 어쩌면 다시 싸워나가리라, 그리움으로 괴로우
리라, 꿈을 꾸리라, 혼자이리라.
이 나날 중의 하루 이런 예감이 너무도 강렬하게 엄습하여, 에바 부인에 대한
나의 사랑이 갑자기 고통스럽도록 활활 타올랐다. 맙소사, 이제 곧 나는 그녀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안정되고 다정한 발걸음이 집 안을 거니는
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할 거이며 내 책상 위에는 그녀의 꽃이 더 이상 없으리
라. 그런데 내가 무엇에 도달했던가? 나는 꿈꾸었고 행복에 잠겨 흔들렸다. 그녀
를 획득하는 대신, 그녀를 얻기 위해 싸우는 대신, 그녀를 영원히 내게로 단숨에
끌어오는 대신! 그녀가 일찍이 진정한
@p 212
사랑에 대하여 내게 말했던 모든 것이 떠올랐다. 그 많은 다정하면서도, 경고하
는 말들, 그 많은 나직한 유혹들, 어쩌면 약속들이. 그걸로 내가 무얼 이루었는
가? 아무것도! 아무것도 이룬 것은 없었다!
내 방 한가운데 서서, 내 모든 의식을 모아 에바 부인을 생각했다. 내 영혼의
힘들을 한데 모으려 하였다. 내 사랑이 느껴지도록, 그녀를 내게로 끌어오도록.
그녀가 와서 나의 포옹을 열망해야 했다. 나의 입맞춤이 그녀의 성숙한 사랑의
입술을 끝없이 헤쳐야만 했다.
나는 서서, 손가락과 발에서부터 싸늘해져 올 때까지 긴장했다. 내게서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잠시 내 속의 그 무엇인가가 단단하고도 긴밀하게 한
데 모였다, 무엇인가 밝고도 환한 것이. 나는 잠시 심장에 수정 한덩이를 지니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자아라는 것을 알았다. 냉기가 가슴
까지 차올랐다.
무서운 긴장에서 깨어났을 때, 무엇인가가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죽도
록 탈진이 되어 있었으나 에바 부인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불타오르며 황홀하게.
그때 따가닥따가닥 말달리는 소리가 긴 길에서 망치 치듯 다가왔고, 가깝고
거세게 우릴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나는 창가로 뛰어갔다. 밑에서 데미안이 말에
서 내리고 있었다. 달려 내려갔다.
「무슨 일이지, 데미안? 어머니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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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몹시 창백했으며 땀이 그의 이마 양쪽으로
해서 뺨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열로 달아오른 말의 고삐를 정원 울타리에다
매고는 내 팔을 끼고 나와 함께 거리를 걸어 내려갔다.
「벌써 소식 들었니?」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데미안은 내 팔을 누르며 어둡고 연민에 찬, 특별한 눈길로 나에게 얼굴을 돌
렸다.
「그래, 이봐, 이제 시작된 거야. 러시아와 긴장이 고조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
었지」
가까이에 아무도 없건만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아직 선포되지는 않았어. 그러나 전쟁이 일어날 거야. 믿어. 지금껏 이 일로
는 널 더 번거롭게 하지 않았어, 그러나 그때부터 나는 세 번 새로운 징후를 보
았어. 그러니까 세계의 몰락도 아니고, 지진도 아니고, 혁명도 아닐 거야. 전쟁일
거야. 그것이 어떻게 닥치는지 나도 보겠지! 기뻐들 하겠지. 벌써부터 다들 한번
터지기를 바라며 기뻐하고 있어. 그들에게는 삶이 그토록 맥없어져 버린 거야.
그러나 넌 보게 될거야, 싱클레어. 이건 다만 다만 시작이야. 어쩌면 큰 전쟁이
될 거야, 몹시 큰 전쟁이. 그러나 이것도 그저 처음에 불과해. 새로운 것이 시작
되지. 새로운 것이란 낡은 것에 매달린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겠지. 넌 무얼 할
거니?」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아직 낯설고 믿어지지 않게 들렸
던 것이다.
@p 214
「모르겠는데, 형은?」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동원령이 내리면 곧바로, 나는 들어가야 해. 난 대위거든」
「형이? 그건 전혀 몰랐는데」
「그래, 그것이 나의 적응의 한 형태였어. 알고 있지. 난 바깥으로는 눈에 뜨
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늘 행동이 다소 지나쳐 정확하지 못한 편이지.
한 주일 이내에 벌써 나는 전장에 서 있을 거야」
「맙소사」
「자아, 이봐, 일을 감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지. 살아 있는 사람을 향하여
총을 겨누기를 지휘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내게 즐거울 리 없지. 그러나 그건 부
차적인 것일거야. 이제는 우리들 누구나 큰 수레바퀴 안으로 들어와버렸어. 너
도. 너도 분명 징집될 거야」
「그럼 형 어머니는, 데미안?」
그제서야 나는 다시, 십오분 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내었다. 세계가 얼마나
변했는가! 가장 감미로운 영상을 불러내기 위하여 모든 힘을 한데 모았었다. 그
런데 이제 나는 운명이 갑자기 새롭게, 위협적으로 무시무시한 가면을 쓰고 나
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 어머니? 아, 어머니 걱정은 할 필요 없어. 어머니는 안전하셔. 지금 세
상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더 안전하셔. 어머니를 그토록 사랑하니?」
「형도 알고 있었어?」
@p 215
그는 환하게 껄껄 웃었다.
「어린아이로군! 물론 알고 있었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우리 어머니한테 에
바 부인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무튼, 어땠어? 네가 어머니나 나를
오늘 부른 거지, 안 그래?」
「그래 내가 불렀어. 에바 부인을 불렀어」
「어머니가 들으셨어. 갑자기 나를 보내셨거든, 너한테로 가봐야 된다고. 어머
니께 방금 러시아에 대한 소식을 들려드리고 난 참이었는데 말이야」
우리는 돌아섰다. 별로 더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울타리에 매어두었던
말 고삐를 풀고 올라탔다.
위층 내 방으로 돌아와 나는 내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 비로소 감지했다. 데미
안이 전한 소식 그리고 그도바 더 조금 전의 긴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바 부
인은 내 소리를 들었다. 나의 생각으로 나는 마음속에서 그녀에게 가 닿은 것이
다. 그녀 자신이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더라도 이 모든 것은 얼마나
특별한가, 근본에 있어서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
가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던 것이 이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일거다. 그리고 데미
안은 거기에 대해 그 많은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얼마나 기이한가, 지금 세계
의 흐름이 더 이상은 그 어딘가에서 우리를 스쳐가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 지
금 갑자기 우리들의 가슴 한가운데를 뚫고 간다는 것이, 모험과 거친 운명들이
우리를 부르며, 이제, 아니면 머지않아 세계가 우리를 필요로 하고 스스로를 변
모시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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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 데미안이 옳다. 그것은 감상적으로 받아들일 일이 아니
었다. 그토록 외로운 일인(운명)을 내가 이제 그토록 많은 사람들과, 온 세계와
공동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었다. 그럼 좋다!
나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녁에 시내를 지나갈 때, 구석구석이 큰 흥분으로
들끓고 있었다. 어디서나(전쟁)이란 말이 들려왔다.
나는 에바 부인 집으로 갔다. 우리는 정원의 정자에서 저녁을 먹었다. 내가 유
일한 손님이었다.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다만 늦게, 내가 떠나기
직전에 에바 부인이 말했다. 「사랑하는 싱클레어, 오늘 날 불렀지요. 내가 왜
직접 가지 못했는지는 알지요. 그러나 잊지 말아요. 당신은 이제 부름을 알아요,
언제는 표적을 지닌 누군가가 필요하거든 그때 다시 불러요!」
그녀가 일어나 뜰의 어스름을 뚫고 앞서 갔다. 당당하게 왕녀처럼 그 비밀에
찬 여인은 말없는 나무들 사이를 걸어갔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는 조그맣고 사
랑스럽게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내 이야기는 곧 끝난다. 사태는 급격히 진전되었다. 곧 전쟁이 있었고 데미안
은 제복에 은회색 외투를 입어 놀랍게 낯선 모습으로 떠났다. 나는 그의 어머니
를 집으로 바래다주었다. 곧 그녀와도 작별했다. 그녀는 내 입에 키스했고 한순
간 나를 가슴에 안았다. 그녀의 큰 눈이 가까이에서 흔들림없이 내 눈 안으로
타들어오고 있었다.
@p 217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된 것 같았다. 그들은 조국과 명예를 말했다. 그러나 그
것은 운명이었다. 그들 모두가 한 순간 그 가림없는 얼굴을 들여다본 운명이었
다. 젊은 남자들은 병영에서 나와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많은 얼굴들에서 나는
표적하나를-우리들의 표적이었다-아름답고 가치있는 표적 하나를 보았다. 사랑
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한번도 본적없는 사람들이 포옹을 받았
다. 나는 그것을 이해했고 기꺼이 응답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일종의 도
취였다. 운명의 뜻이 아니었다. 그러나 도취란 신성하다. 그들 모두가 이 짧고,
뒤흔드는 시선으로 이미 운명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전장으로 갔을 때는 이미 거의 겨울이었다.
처음에 나는, 총격의 선정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 실망했다. 예전에 나는
한 인간이 하나의 이상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일이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드문지
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었다. 지금 나는 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
상을 위해 죽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것은 개인적 이상, 자유로
운 이상, 선택한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떠맡겨진 공동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내가 인간을 과소평가했음을 알았다. 그렇게 봉사와 공
동의 위험이 그들을 제아무리 제복을 입혀 획일화해 놓았어도 나는 많은 사람
들, 살아있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들이 운명의 의지에 눈부시도록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많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공격 때문만
@p 218
아니라 어느 때나 확고하고 먼, 약간 신들린 듯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시선은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며 엄청난 것에 몰두해 있음을 뜻한다. 이런
사람드은 그들이 무얼 원하든 믿고 생각한다-자기들이 준비되어 있고, 쓸모있다
고, 그들에게서 미래가 형성되리라고. 그리고 세계가 점점 더 경직되어 세계와
영웅주의에, 명예와 다른 낡은 이상에 맞추어져 있는 듯 보일수록 그만큼 더 요
원하게 그리고 그만큼 더 거짓말처럼 외면적인 인간성의 목소리 하나하나는 울
렸다. 이 모든 것은 다만 표면이었다. 전쟁의 외적이고 정치적인 목적들에 대한
물음이 표면에 그치듯이. 깊은 곳에서는 무엇인가가 생성중에 있었다. 새로운 인
간성 같은 무엇이.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으며 그들 중 어떤 사람
들은 바로 내 곁에서 죽었다. 그들에게는 미움과 분노, 살육과 말살이 대상에 매
어 있지 않다는 통찰이 느껴졌다. 아니다. 대상들은 목표들과 꼭 마찬가지로, 완
전히 우연이었다. 원 느낌, 가장 거친 느낌들도, 적에게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
었다. 그들의 유혈의 위업은 오로지 내면의, 그 자체 안에서 산산이 파열된 영혼
의 발산이었다. 새로 태어날 수 있기 위하여 광분하여 죽이고, 말살하고, 죽으려
는 영혼의 발산이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알은 세
계였고 세계는 짓부수어져야 했다.
우리가 점령한 농가 앞에서 어느 이른 봄날 밤 나는 보초를 서고 있었다. 가
끔씩 미풍이 불고 있었다. 높은, 플랑드르의 하늘을 구름떼가 몰려가고 있었다.
그 구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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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쯤엔가 달이 있으리라는 예감. 벌써 온종일 나는 불안했었다. 그 어떤 근심
이 내 마음을 어수선하게 했다. 지금, 어두운 지정된 내 자리에서 보초를 서며
나는 간절하게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삶의 영상들을, 에바 부인을, 데미안을 생각
했다. 한 그루 포플러에 기대어 요동치는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모르게 움
칫거리는 하늘의 밝음이 곧 솟구치는 커다란 형상들의 연속이 되었다. 내 맥박
이 기이하게 엷어지는 데서, 내 살갗이 바람과 비에 대하여 둔감해진 데서, 섬광
을 내는 내면의 깨어 있음에서, 내 주위에 한 지도자가 있음을 나는 감지했다.
구름 속에서 커다란 도시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거기서 수백만의 사람이 쏟아
져 나왔고, 그들은 떼를 지어 넓은 품경위로 퍼져갔다. 그들 한가운데서 힘찬 신
의 모습 하나가 나왔다. 머리에는 빛을 뿜는 별을 달고, 산처럼 크고, 에바 부인
의 표정을 가지고. 그 모습속으로 인간의 대열들이 거대한 동굴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그러고는 사라졌다. 여신은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녀 이마에서 표지가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꿈 하나가 그녀를 지배하는 힘을 가진 듯 보였다. 그
녀가 두 눈을 감았다. 그녀의 큰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갑자기 그녀가 맑
고 높은 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이마에서 별들이 튀어나왔다. 수천개의 빛나는
별들이. 그 별들은 찬란한 포물선을 그리며 검은 하늘 너머로 휘익 떨어졌다.
별들 중의 하나가 환한 음으로 똑바로 나를 향해 씽 날아왔다. 나를 찾고 있
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별은 요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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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내며 수천개의 불꽃으로 쪼개져서 나를 휙 끌어올렸다가 다시 땅바닥으
로 내동댕이쳤다. 천둥같은 소리를 내며 내 머리 위에서 세계가 무너졌다.
나는 포플러 가까이에서 흙과 상처로 뒤덮인 채 발견되었다.
나는 어느 지하실에 누워있었다. 머리 위에 포화가 퍼부어지고 있었다. 나는
어느 수레에 누워 덜컹덜컹 빈 벌판을 지나갔다. 대체로 나는 잠을 잤거나 의식
이 없었다. 그러나 깊이 잠자면 잘수록 무엇인가가 나를 끌어당김을, 나를 지배
하는 주인인 어떤 힘을 내가 따르고 있음을 그만큼 더 격렬하게 느꼈다.
어느 외양간 짚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어두웠다. 누군가가 내 손을 밟고갔다.
그러나 나의 내면적인 것은 더 나아가려 했다. 더 강하게 그것은 나를 끌고갔다.
다시 나는 수레위에 누었다. 나중에는 들것 혹은 사다리 위헤 누웠다. 점점 더
그 어딘가로 가라고 명령받고 있음을 느꼈다. 마침내 거기로 가려는 충동밖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때 나는 목적지에 와 있었다. 밤이었다. 의식은 분명했다. 이제 막 내 안의
끌림과 충동이 힘차게 느껴졌던 참이었다. 이제 나는 넓은 홀에, 바닥에 깔린 자
리에 누워있었다. 내가 부름을 받은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이었다. 주위를 바라보
았다. 내 매트리스 바로 곁에 다른 매트리스가 바싹 붙어 놓여 있었고 누군가가
그 위에 있었다. 그 사람이 앞으로 몸을 숙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마 위에 그
표
@p 221
적이 있었다. 그것은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도 말할 수 없었거나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그 너머 벽에 달려 있는 신호등 불빛이 드리워
져 있었다. 그가 나를 향해 미소지었다.
무한히 긴 시간 동안 내내 그는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천천히 그가 얼굴을
내게 더 가깝게 밀었다. 우리가 거의 닿을 때까지.
「싱클레어!」그가 나직이 말했다.
나는 그에게 눈으로 그의 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표시를 했다.
그가 다시 동정하는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어린 소년이 됐네!」그가 미소 띠며 말했다.
그의 입이 이제 내 입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나직이 그가 계속 이야기했다.
「프란츠 크로머 아직도 기억해?」
나는 그에게 눈을 깜박여 보였다. 미소지을 수도 있었다.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나게 될 거야. 너는 나를 어쩌면 다시 한번
필요로 할 거야. 크로머에 맞서든 혹은 그 밖의 다른 일이든 뭐든.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이제 나는 그렇게 거칠게 말을 타고, 혹은 기차를 타고 달려오지
못해. 그럴 때 넌 네 자신 안으로 귀기울여야 해. 그러면 알아차릴 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듣겠니? 그리고 또 뭔가 있어! 에바 부인이 말했어. 네
@p 222
가 언젠가 잘 지내지 못하면 날더러 네게 당신의 키스를 해달라고. 나에게 함께
해준 키스를... 눈을 감아, 싱클레어!」
나는 선선히 눈을 감았다. 내 입술 위에 가벼운 입맞춤이 느껴졌다. 입술에서
는 계속해서 조금씩, 그러나 결코 줄어들지 않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
고 나는 잠이 들었다.
아침에 사람들이 깨웠다. 붕대를 감아야 했던 것이다. 마침내 완전히 잠이 깼
을 때, 나는 얼른 옆 매트리스로 몸을 돌렸다.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
거기 누워 있었다.
붕대를 감을때는 아팠다. 그때부터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아팠다. 그러나 이
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거기 어두운 거울속에
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나는 그 검은 거울위
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
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p 223
작품 소개
「데미안」은 제1차 세계대전중인 1916년에 씌어지고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9년에 출판되었다. 당시에 이미 작가로서 유명했던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1877-1962)는 이 작품을 가명으로 발표했다. 작품성만으로 평가받아 보고
싶어서였다. 그 결과 에밀 싱클레어라는 유령 작가가 독일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폰타네상의 수상자로 지명되었다(헤세는 이 상을 사양하였다). 그 사이 눈밝은
독문학자가 문체 분석을 통하여 「데미안」이 헤세의 작품이라고 밝혀내기도 했
다.
자아의 삶을 추구하는 한 젊음의 통과의례 기록인 이 책은〈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라는 모토를
@p 224
앞세운 짧은 철학적 성찰로 시작된다. 이 책에서 헤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며 누구나 나름으로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
는 소중한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전언은 이 소중한, 단 한번뿐인 인간의
목숨이 총알 하나로 무더기로 소멸되는 전쟁의 충격 속에서 쓴 것이어서 더 더
욱 절실함이 배어있다.
〈나를 찾아가는 길〉의 인식의 첫 단계는 기존 규범으로부터의 떠남이다.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에 있으며 낡은 규범들-아버지
집, 종교, 도덕-의 속박에 괴로워하면서도 그것들을 점검한다. 그 속박들은 유년
의 맑고 밝은 세계와 그를 나누며,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에서 투쟁하여 벗어나
야 할 것들이다. 이 돌파구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그는 더 나이들고 더 경
험 많은 데미안을 만난다. 저지르지도 않은 도둑질을 떠벌림으로써 혹독하게 시
달리던 싱클레어를 데미안이 도와준다. 독심술과 혜안의 신비로운 힘으로 악마
같이 괴롭히는 친구 크로머를 쫓아주는 것이다. 크로머라는 첫 시련에 이어 나
중에는 사춘기의 문제를 극복하게끔 도와주고,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새롭게, 다
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며, 운명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운명을 받아들이라
고 가르쳐준다. 낯선 도시에서 홀로 지내던 학창 시절, 정신적 지주에 대한 동경
이 그도로 고조되었을 무렵, 싱클레어는 책갈피에서 쪽지 하나를 발견한다. 〈새
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
@p 225
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싱클레어는 이 압락사스를 찾아간다.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가 신성과
마성, 남성과 여성, 인성과 수성, 선과 악을 다 갖추고 있는 신비로운 신에 대하
여 이야기해 준다. 싱클레어가 그려내는 꿈의 영상, 문장에 그려진 그림,〈먼〉
연인 베아크리체, 구름의 모습 등이 압락사스의 모습을 가진다. 마침내 그는 데
미안과 그 어머니 에바 부인 속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목표에
도달한다. 그러면서도 또 도달하지 못한다. 어머니이자 애인인 영원의 여성, 에
바 부인(에바Eva는 영어의 이브이다)은 끌면서도 동시에 물리친다. 싱클레어의
눈에 그녀는 이따금씩 더 깊이 자기 자신속에 이르려는〈자신의 내면의 상징〉
처럼 비친다. 점차 에바 부인 가운데서 현실과 상징이 결합된다. 끝은 거의 불협
화음적이다. 전쟁이 터진다. 뜨겁게 갈구하는 에바 부인이 아니라 뜨거운 총상이
싱클레어를 맞추어 그는 치명적 부상을 당한다. 그러나 전쟁은 또한 새로운 창
조의 위업을 완수한다. 야전병원에서 싱클레어는 다시 한번 데미안과 마주친다.
데미안의 입맞춤은 에바 부인의 입맞춤이기도 하다. 그리고 구도자들, 개혁자들
의 동맹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의 입맞춤이다.
데미안이 사라진 후 싱클레어는 말한다.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 거기서 나는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
인 그와.〉 이렇듯 데미안과 〈내〉가 거의 하나로
@p 226
합치된 마지막 문장에서 사라진 데미안Demian은 독일어단어 데몬Damon을 연상
시킨다. 데몬은〈악령〉으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또한 선이든 악이든 한 인간
속에 내재하는 초인적인 힘을 가리킨다. 그러한 데미안이 마지막에〈그Er〉라고
대문자로 표기됨으로써 신처럼 드높여져 있다. 한 젊음이 몹시도 고통스럽게 찾
아낸 자아의 소중함이 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싱클레어Sinclair라는 이
름 역시 흔치 않은 독일 이름으로, 후반생을 광기에 사로잡혀 보냈던 천재 시인
흴덜린의 친구 이름이다. 불행했던 시인이 마음을 의지했던 사람의 이름을 주인
공이자 작가의 이름으로 빌려씀으로써,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스스로를 불행한
천재 시인의 자리에 세워볼 수도 있다.
머리말을 제외한 전체 8장은 유년으로부터 자아에 이르는 과정을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은 성장의 경험들을 통하여 성찰해 나간다.
제1장 「두 세계」는 나쁜 친구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흔한 경험을 통하여 유
년의 행복에 그어지는 첫 균열의 경험을 다룬다. 아버지 집이라는 밝은 세계 한
가운데서 다른〈어두운 세계〉, 집안의 정돈된 평화 한가운데서 경험하는 최초
의 어두운 세계의 고통스러운 체험으로부터 인식은 시작된다.
제2장 「카인」은 크로머로부터 싱클레어를 구출해 준 뛰어난 소년 데미안이
열어주는 또 다른 시각을 다룬다. 낙인찍힌 악인, 카인을 남달리 뛰어난 사람으
로 보는 데미안의
@p 227
해석은 주입된 모든 규범에 대한 다른 시각을 열어준다. 다시 아벨이 되어 예전
의 낙원 같은 유년의 세계에 안주하고 싶은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기피한다. 크
로머라는 작은 악으로부터 싱클레어를 구해 주기는 했지만 데미안은 그에게는
알고 싶지 않은 갈등 상황,〈또 하나의 악하고 나쁜세계와 나를 묶어주는 유혹
자〉인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어려운 길을 가고 싶지 않은 갈등이
부각된다.
제3장「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에서 데미안은 또 하나의 기존 규범의 단순
수용의 수정을 종용한다. 〈천천히 눈뜨는 성에 대한 감정이 하나의 적이자 파
괴자로, 금기로, 유혹과 죄악으로 들이닥친〉시절, 허용된 밝은 세계로 나올 수
없는 원시적 충동이 이제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사록 있다
는 것을 발견해야만 했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하여 또 한 차원의 의식 지평
의 확대를 경험한다. 한때 크로머였던 것이 이제는〈내 자신 속에 박혀 있음〉
을 느끼면서 오랫동안 멀리 있던 데미안이 다시 서서히 다가섰고 다시 힘과 영
향력을 발휘한다. 데미안은 독심술과 주의력 집중의 비결을 알려주며, 또 하나의
종교화,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 곁에 매다렸던 도둑들을 예로 싱클레어의 의식
지평을 넓혀준다. 마지막 순간에 회개한 도둑보다 그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간 도
둑 쪽이〈강한 개성을 가진〉도둑이고 뛰어난 카인의 후예일 수도 있다는 것이
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일면적 교리에 대한 대안이 되는 포괄적인 신앙에 대한
의식을 심어준다. 싱클레어는 각성을 통하여 기쁨을 잃는다. 부모님의 그늘에서
행복하려 했
@p 228
던 마지막 시도가 실패하고 견진성사 이후, 데미안마저 떠나고 싱클레어는 공허
와 고립감, 쓸쓸함 속에서 홀로 침잠하여 기다린다.
제4장「베아트리체」는 비애와 절망에 좀먹히고, 작은 타락을 경험하는 도시
생활을 그린다. 학교에서 쫓겨나는 일만 남았는데, 그걸 기다리는 나날 속에서
유년과는 최종적 결별이 이루어진다. 어느 날 우연히 본 소녀〈베아트리체〉가
아름다움과 정신성, 정결함에의 동경을 일깨우는 이상상으로 자리잡는다. 그 이
후 싱클레어가 그려내는 영상은,〈절반은 남자고 절반은 여자, 나이가 없고, 의
지가 굳세면서도 몽상적이며, 굳어 있으면서도 남 모르게 생명력있어〉보이는
얼굴,〈데미안의 얼굴(...) 나의 삶을 결정한 것, 나의 내면, 나의 운명 혹은 내
속에 내재하는 수호신, 친구의 모습, 애인의 모습, 운명의 모습〉으로 확대된다.
데미안이 그렸던 자기 집 현관문 위의 마모된 문장에 그려진 새의 모습과 결합
된다.〈몸 절반은 어두운 지구 땅덩이 속에 박혀 있는데, 커다란 알에서부터인
듯 땅덩이에서 나오려고 푸른 하늘 바탕 위에서 애쓰고 있〉는 날카롭고 대담한
매의 머리를 가진 노란빛 맹금의 모습과 결합된다.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한 시
절의 방황과 고투가 하나의 상징에 농축되어 있다.
제5장「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는 이 새의 그림을 데미안에게 보내
고 뜻밖의 답장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p 229
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우연히 역사 시간에 이 이름을 듣게 되어
그것이〈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과제를 지닌 어떤 신성
〉이라는 것 정도만 알게 된 싱클레어는 압락사스라는 낯선 신을 찾아 헛되이
도서관을 뒤지고,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 그 꿈의 영상에 집착한다.
그러다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와 만나게 되고, 자신의 어두운 영혼에 대
한 절실한 귀기울임과 배화를 경험한다. 또 하나의 스승을 만난 것이다.〈모두
가, 가장 진부한 대화도, 나직하고 꾸준한 망치질로 내 마음속의 한 점을 계속
수드렸다. 모든 대화가 나의 형성에 도움이 되었다. 모든 대화가 내 허물을 벗는
일에, 알 껍데기를 부수는 일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제6장「야곱의 싸움」은 나에게 축복을 내리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며 천사
와 씨름한 야곱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수백 가지 일에서 조숙하고, 다른 수백 가지 일에서 몹시 뒤처지고 무력한
열여덟 살의 평범치 않은〉젊은이에게 피스토리우스는 말한다.〈다시 한번 무엇
인가 정말 근사한 생각 혹은 죄 많은 생각이 떠오르거든, 싱클레어, 누군가를 죽
이거나 그 어떤 어마어마한 불결한 짓을 저지르고 싶거든, 한순간 생각하게. 그
렇게 자네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은 압락사스라는 것을! 자네가 죽이고
싶어하는 인간은 결코 아무아무개 씨가 아닐세. 그 사람은 분명 하나의 위장에
불과할 뿐이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
@p 230
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
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
지 않아.〉싱클레어는 결판이 나도록 싸워야 하는 정신/신 앞에 선 듯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런 친구이자 스승과도 파국이 와 결별이 이루어지고, 한때
자신이 데미안을 따랐듯 자기 자신을 따르는 친구와의 만남도 거치며 싱클레어
는 더 나아간다. 자신의 내면에서는 인도자의 모습을 본다. 다시 데미안이 보인
다.〈데미안을 닯았으며 그 눈에 내 운명이 적혀 있었다.〉
제7장「에바 부인」은 만남과 공동체에 대한 성찰이다. 데미안은 마침내 자신
이 그린 꿈의 영상의 현실의 모습을 찾아낸다.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이다.
데미안을 다시 만난다. 에바 부인 주변의〈자신의 길을 가는〉뛰어난 사람들도
만난다. 그러나 이 행복에는 그늘이 드리워진다. 허약한 사람들은 어디서나〈두
려움에서, 무서움에서, 당황에서 만든 공동체〉를 만드는데 그런 공동체는 패거
리짓기일 뿐이며, 내부가 상해 있고, 곧 무너질 것 같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사
람들은 서로에게로 도피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싱클레어는 지금의 공동체들
이 와해되고 나면 공간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말의 예감 속에서 싱클레
어는 푸른 혼돈을 떨치고 큰 날갯짓으로 짙게 구름 낀 하늘 속으로 사라지는 새
의 영상을 본다. 낡은 한 세계의 와해를 피부로 느낀다.
이 대목에서 보이는〈희망〉인 뛰어난 개인들과 〈절망〉인
@p 231
사회의 간극은, 자신의 길을 간 사람과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무리짓기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또한 이 작품의 씌어진 시기의 전쟁에 임박한 혼돈기 사회
에서 속출한 단체들, 이합집산하는 동맹들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다. 실
제로 작가 헤르만 헤세는 전쟁이 터지자 곧 자원했으며 부적격 판정으로 실전에
는 참전하지 못했지만, 스위스에서 전쟁포로들과 억류자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온갖 신문 잡지에의 기고, 호소문의 작성은 물론, 스스로 출판사를 만
들어《억류자들을 위한 잡지》를 스물두권이나 냈다.(이 활동을 위하여 팔려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제8장「종말의 시작」에서 싱클레어는 마음속으로 에바부인을 부른다. 에바
부인은 말했던 것이다.〈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 겁니다. 나는 선물을 주지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그러나 에바 부
인 대신 데미안이 달려와 싱클레어에게 전쟁이 터진 것을 알려준다. 사태는 급
격히 진전되어 데미안이 전장으로 나가고, 싱클레어 역시 전장으로 나간다. 겨울
전장에서 부상당한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다시 한번 만난다. 그의 키스와 그를
통한 에바 부인의 키스를 받지만, 다음날 아침 잠이 깨어 보니 이미 데미안은
거기 없다. 그러나〈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닮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
한다. 이제〈자신 속에 있는 뛰어난 존재〉와 하나가 된 것이다.
@p 232
헤세는 구도자 싱클레어의 모습을 마지막에서는 2차 세계대전과 연결시키기도
했지만, 그 대부분의 과정은 낭만주의 및 고대 신화세계와 결합시켰다. 이 결합
은 시대 착오적이며 실패라고도 평가된다. 명료하지 못한 언어와 지나친 상징성
이 비판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독일어권의 작품들 중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작가 헤세 자신의 성가도 아직도 독일보다 독일 국
외에서 오히려 더 높다.) 헤세의 대 주제〈자신에 이르는 길〉은 그만큼 범세계
적인 관심사인 것 같다.
대한 신입생들에게 이런저런 책을 읽히는 일을 십 년쯤 한 적이 있다.「데미
안」에 대하여 젊은이들이 썼던 빛나는 글귀들이 떠오른다. 사실 이 작품 내용
의 해설은 그런 이들,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그 고통스러운 성장의 세계를 방
금 뒤로 했거나 바로 그 한가운데 있는 젊은이들의 몫이어야 할 것이다.〈나를
찾아가는 길〉을,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고 하여도 그 누구도 근본에서 피해 갈
수 없는, 한 시절의 아픈 방황과 그 끝을 이 책은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이 번역된 작품을 다시 번역한다는 것이 많이 망설여졌었다. 그러나
바로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작품인지 아는 터라, 이 작은 책에다 그 어떤
대작의 번역보다도 더 힘을 쏟았다. 지나친 유문을 피하고 다소 건조하더라도
가급적 원문에 밀착하도록 번역하였다. 두어 가지만 예를 들면〈Der Vogel
kampft sich aus dem Ei〉라는 핵심적인 문장을〈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대신
아주 오랜 고심
@p 233
끝에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로 원어에 가깝게 바꾸었다. 기존
번역의 매끄러움과 유연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원어에 담긴 치열함을 살려내
고 싶었기 때문이다. 껍질을 깬다는 단어가 독일어에 있지만 헤세가 굳이〈투쟁
〉이라는 단어를 썼고, 껍질을 벗어나는 과정이 그야말로〈투쟁〉으로 표현되었
으며, 더구나 그 고통스러운 투쟁의 기록이 바로 이 작품 전체이기 때문이다. 반
면 프롤로그에 나오는 인간에 대한 설명인〈자연의 투척der Wurf der Natur〉
같은 경우는〈자연이 던진 돌〉로 풀어 옮겼다. 홍수 이후 살아남은 남녀가 등
뒤로 던진 돌이 인간이 되었다는, 로마 신화의 창조 설화가 배경에 있기 때문이
다.
다양한 연령층의 젊은이들이 읽어주어 문장을 다듬는 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정현규 군, 최귀범, 홍기윤, 김소니, 김동자 양에게 감사한다. 몽당연필로 까맣게
고쳐놓은 세인이에게도, 이〈글씨 많은〉책의 원고를 꼼꼼이 읽고 고쳐준 세건
이에게도 감사한다. 새로운 번영 정본을 만들어보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민음사
식구들의 세심한 도움과 인내에도 감사드린다.
1997년 6월
전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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