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똘스또이 지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
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
러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3:14)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
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
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요한의 첫째 편지, 3:17∼18)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
부터 오는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
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4:7∼8)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
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
는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 4:12)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
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 4:17)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
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
할 수 있겠습니까?(요한의 첫째 편지, 4:20)
1
한 구둣방 주인이 아내, 아들과 함께 어느 농부의 집에 세들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집도 땅도 없었으므로 구두를 짓고 고치는 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식
량은 비싼 데 비해 삯은 쌌기 때문에 번 것은 모두 먹는 데 들어갔습니다. 그는
아내와 같이 번갈아 입는 털외투가 한 벌밖에 없었으며 그것도 다 해져 누더기
가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새 털외투를 지을 양털을 사려고 벌써 2년째나 벼르고
있었습니다.
가을이 되자 구둣방 주인에게는 얼마의 돈이 모였습니다. 아내의 장롱 속에 3
루블이 있었고, 마을 농부들에게 빌려 준 돈이 5루블 20까뻬이까 가량 되었습니
다.
그래서 그는 아침부터 털외투를 사러 갈 채비를 하였습니다. 그는 조반을 마
치자 셔츠 위에 아내의 솜 재킷을 입고, 그 위에 긴 무명 두루마기를 걸치고 3
루블을 호주머니 속에 넣은 뒤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지팡이를 만들어 길을 떠
났습니다.
마을에 이르러 구둣방 주인은 어느 농부네 집에 갔습니다. 바깥주인은 집에
없었고, 그 아내가 일주일 안으로 주인 편에 보내 드리마고 약속할 뿐 돈을 갚
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농부네 집으로 갔습니다. 그 농부는 돈이 한푼도 없다
고 하느님께 맹세하면서 장화 고친 값20까뻬이까만을 줄뿐이었습니다. 구둣방
주인은 하는 수 없이 외상으로 양털을 사려고 하였으나 가죽 장수는 외상을 주
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돈을 가져오도록 해요. 그러면 마음에 드는 것을 줄 테니까. 외상값은
받기가 너무나 어려워요."
이리하여 구둣방 주인은 겨우 구두 고친 값 20까뻬이까를 받고 또 어느 농부
에게서 헌 펠트 구두에 가죽을 대는 일을 맡았을 뿐이었습니다.
구둣방 주인은 속이 상하여 그 20까뻬이까로 보드카를 마셔 버린 뒤 양털도
사지 못하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침에는 날씨가 좀 추운 것 같더
니 술이 한잔 들어가자 외투를 입지 않았는데도 몸이 후끈렸습니다. 구둣방 주
인은 길을 걸어갔습니다. 한 손으로는 울퉁불퉁 얼어붙은 땅을 지팡이로 두드리
며 또 한 손으로는 펠트 구두를 휘두르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털외투를 입지 않아도 따뜻하기만 하구나. 작은 보드카 한 병을 마셨더니 온
몸이 후끈거리는구먼. 털외투 따윈 없어도 좋아. 난 그런 사나이야! 그럼, 그런
건 없어도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래도 난 살 수 있어. 털외투 따윈 일생 동안
필요 없어. 단지 마누라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 걱정이지. 나는 애써 일했는데 상
대편에선 나를 아주 업신여긴단 말야. 이번에 돈을 안 가져오면 모자를 벗겨 버
려야지. 아암, 그러고 말고. 헌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돈을 20까뻬이까씩 찔
끔찔끔 주다니! 흥, 20까뻬이까로 무엇을 하란 말이야? 술이나 마실 수밖에 없
잖아. 생활이 곤란하다고 하지만 나는 곤란하지 않단 말이냐? 이봐, 네겐 집도
있고 소도 있고 말도 있지만 나는 빈털터리야. 너는 네 빵을 먹지만 나는 사서
먹어야 해. 아무리 절약해도 일주일에 빵값 3루블은 나가야 해. 집에 가면 빵이
없을 테니 1루블 반을 또 내놔야 하고, 그러니 너도 내 돈을 갚아 줘야겠어."
마침내 구둣방 주인은 길모퉁이에 있는 교회 근처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
뒤에 무언가 하얀 것이 보였습니다. 이미 황혼이 지기 시작했으므로 구둣방 주
인은 찬찬히 그것을 바라보았으나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돌 같은 건 없었는데, 소인가? 그러나 짐승 같지도 않다. 머리는 사람
같은데 사람의 머리가 왜 저렇게 흴까? 그리고 사람이 이런 곳에 있을 리 없
지."
구둣방 주인은 좀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물체가 똑똑히 보였습니다. 이게 웬일
인가. 그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벌거벗은 몸으로 교회의
벽에 기대앉아 꼼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구둣방 주인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
니다.
'누군가가 이 사나이를 죽이고 옷을 벗기고 나서 여기 버렸나 보다. 너무 가까
이 갔다가는 나중에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구둣방 주인은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교회모퉁이를 돌자 그 사나이
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좀 지나 뒤돌아보자 그 사나이는
벽에서 몸을 일으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쩐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구둣방 주인은 덜컥 겁이나 서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다시 가까이 가볼까? 아니면 이대로 가버릴까? 혹시 곁에 갔다가 무슨 봉변
이라도 당하지 않을지 몰라. 어떤 놈인지 아무도 모르니까. 아무튼 좋은 일을 하
고 이런데 와 있을 리는 없지. 가까이 가면 벌떡 일어나 내 목을 조를지 몰라.
그렇게 되면 나는 꼼짝없이 죽는 거지. 목 졸려 죽지 않더라도 좋지 않은 일을
당할 거야. 헌데 저 벌거숭이 사나이를 어쩌면 좋담? 내 옷을 벗어 줄 수도 없
고. 이대로 가버리자!'
그리고 구둣방 주인은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앞을 지나치자 양심
의 가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길 한가운데 우뚝 서서 "대체 무얼 하는 거야, 너는?" 하고 세묜은 자신
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하여 죽어 가는데 겁이 나서 그냥 가버리려 하다니. 네
가 부자라도 된단 말인가? 재산을 빼앗길까 봐 겁이 나는가? 그럼 못써요, 세
묜!"
세묜은 발걸음을 되돌려 그 사나이 곁으로 갔습니다.
2
세묜은 그 사나이 곁으로 다가가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젊고 튼튼하며
몸에 얻어맞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추위에 몸이 얼어붙어 벽에 기
댄 채 눈을 뜰 힘도 없는 듯 세묜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묜이 가까이 다가가자 사나이는 갑자기 정신이 드는지 고개를 돌리
며 눈을 뜨고 세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눈매를 보자 세묜은 그 사나이가 마음
에 들었습니다. 세묜은 펠트 신발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허리끈을 펄러 그
위에 놓은 다음 두루마기를 벗었습니다.
"자,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어서 옷을 입어요!"하며 세묜은 사나이를 부축하여
일으키려 하였습니다.
그는 일어섰습니다. 날씬하고 깨끗한 몸매에, 손발도 곱고 얼굴도 귀엽게 생겼
습니다. 세묜은 그에게 두루마기를 걸쳐 주었으나 그는 소매에 팔을 넣지 못했
습니다. 세묜은 두 팔을 끼워 주고 옷자락을 잡아당겨 앞을 여민 다음 허리끈을
매어 주었습니다.
세묜은 헌 모자를 벗어 그에게 씌워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머리도
추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대머리지만 이 사나이는 고수머리가 길게 자라
있으니 안 추울 거야.' 그는 다시 모자를 썼습니다. '그보다 신발을 신겨 주는 편
이 낫겠지.'
세묜은 그 사나이를 앉히고 펠트 장화를 신겨 주었습니다.
그 사나이에게 옷과 신발을 신긴 뒤 세묜은 말했습니다.
"이젠 됐네, 형제. 좀 움직여 몸을 녹이도록 하게. 다른 일은 우리가 아니더라
도 해결될 거야. 그런데 걸을 수 있겠나?"
사나이는 일어서서 감격한 눈으로 세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말은 한마
디도 입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왜 가만있지? 여기서 겨울이라도 날 셈인가? 집
으로 가야지. 자, 여기 내 지팡이가 있으니 기운이 없으면 이걸 짚게. 자, 걸어
봐!"
사나이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성큼성큼 잘 걸었습니다.
세묜은 길을 걸으며 물었습니다.
"자네는 대체 어디서 왔나?"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닙니다."
"이 고장 사람이면 내가 다 알고 있지. 그런데 왜 이 교회에까지 왔었나?"
"말할 수 없습니다. "
"틀림없이 누구한테 당했지?"
"아닙니다. 나는 하느님의 벌을 받았습니다."
"그야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지. 하지만 어디에서 좀 쉬어야지. 자네 어디
로 갈 건가?"
"아무데라도 좋습니다."
세묜은 놀랐습니다. 나쁜 사람 같지도 않고 말씨도 온순한데 자기에 대한 이
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묜은 생각했습니다. '세상에는 말못할 일도
많이 있지.' 그리고 사나이에게 말했습니다.
"어때, 우리 집으로 가세. 몸을 좀 녹일 수 있을 테니까."
세묜은 집으로 향했습니다. 낯선 젊은이도 뒤지지 않고 나란히 걸었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세묜의 셔츠 밑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술기운이 깨면서 차차 추
워 왔습니다. 그는 코를 훌쩍이며 마누라의 재킷을 여미고 걸으면서 생각했습니
다.
'이게 어떻게 된 셈인가. 외투를 사러가서 두루마기를 없애고 이 벌거숭이 사
나이까지 달고 오게 됐으니. 마뜨료나에게 잔소리 깨나 듣겠는걸!' 마뜨료나 생
각을 하니 세묜은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사나이를 보며 그가
교회 뒤에서 자기를 바라보던 때를 생각하자 기쁨으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
다.
3
세묜의 아내는 집안을 얼른 치웠습니다. 장작을 패고 물을 긷고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인 뒤, 자기도 밥을 먹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빵은 언제 구울까? 오늘
할까, 내일 할까? 아직 큰 덩어리가 하나 남아 있는데. 세묜이 거기서 점심을 먹
고 온다면 저녁은 많이 먹지 않겠지. 그렇다면 내일 빵은 이것으로 충분할 거
야.'
마뜨료나는 빵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또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빵을 굽지 말아
야지. 밀가루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걸로 금요일까지 버텨보자.'
마뜨료나는 빵을 치우고 식탁에 앉아 남편의 해진 셔츠를 깁기 시작했습니다.
옷을 기우면서 마뜨료나는 양피 외투를 사올 남편을 생각했습니다.
'양피 장수에게 속지 말아야 할텐데. 사람이 너무 어수룩해서 말야. 그이는 누
굴 속이지 못하지만 어린아이한테도 속아넘어가는 사람이니까. 8루블이면 적지
않은 돈이지. 좋은 외투도 살 수 있을 거야. 제일 좋은 것은 아니더라도 어떻든
털외투를 살 수 있을 거야. 지난 겨울엔 털외투가 없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
라! 강에는 물론이고 그 외 아무데도 나갈 수 없었지. 그런데 이제 남편이 옷이
란 옷은 다 입고 나가 버려 나는 걸칠 옷이 하나도 없잖아. 일찍 떠난 건 아니
지만 이제 올 때도 됐는데. 이 양반이 술이라도 마셔 버린 게 아닐까?'
마뜨료나가 마악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현관 계단이 삐걱거리며 어떤 사람
이 들어왔습니다. 마뜨료나는 바늘을 꽂고 나서 입구 쪽으로 나갔습니다. 두 사
람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세묜이 모자도 쓰지 않고 펠트 장화를
신은 웬 사나이와 함께.
마뜨료나는 남편의 입에서 얼른 술냄새를 맡았습니다. '역시 마시고 왔구나.'
두루마기도 입지 않고 재킷 하나만 걸친 남편이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말없
이 서 있는 것을 보자 마뜨료나의 가슴은 미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다 털어 마신 모양이구나. 얼굴도 모르는 이 사나이와 어울려 퍼마시고 그것
도 부족하여 집에까지 데려왔구나.'
마뜨료나는 두 사람을 집안으로 들여보내고 자기도 뒤따라오다가 그 낯선 빼
빼 마른 젊은이가 입고 있는 두루마기가 자기네 것임을 알았습니다. 두루마기
밑으로 셔츠도 보이지 않았고 모자도 쓰고 있지 않았습니다. 집안으로 들어선
젊은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눈도 쳐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뜨료나는
이 사나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 겁을 먹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뜨료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난로 쪽으로 가 그들의 거동을 지켜보았습니다.
세묜은 모자를 벗고 태연히 걸상에 앉았습니다.
"여보 마뜨료나, 어서 저녁 준비를 해야지."
나그네는 걸상에 앉았습니다.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소?"
마뜨료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만들긴 했지만 당신을 위해 만든 건 아니에요. 당신은 이제 엽차마저 마셔 버
린 모양이구려. 외투를 사러간 사람이 두루마기까지 없애고, 그것도 모자라 벌거
숭이 건달까지 데려오다니. 우리 집엔 당신들과 같은 주정뱅이에게 줄 저녁은
없어요."
"그만해요, 마뜨료나. 까닭도 모르고 함부로 말하면 못써요. 먼저 이 사람이 어
떤 분인지 물어 봐야지."
"돈은 어디 있어요? 어서말해 봐요."
세묜은 두루마기 주머니를 뒤져 돈을 꺼내 보이며 말했습니다.
"돈은 여기 있어. 뜨리포노트한테서는 돈을 못 받았어. 내일 주겠다더군."
마뜨료난는 한층 더 화가 났습니다. 외투도 사지 않고 하나밖에 없는 두루마
기를 어떤 벌거숭이에게 입혀 집으로 데려오다니.
마뜨료나는 식탁 위의 돈을 집어 숨기며 말했습니다.
"저녁은 없어요. 벌거숭이 주정뱅이에게 어떻게 다 밥을 줘요."
"말 좀 조심해요, 마뜨료나. 먼저 이야기를 들어보고 말해야지……"
"멍청한 주정뱅이한테서 무슨 말을 들어요. 전에 당신 같은 주정뱅이에게 시집
을 오려 하지 않은 것도 괜한 고집은 아니었어요. 어머니가 주신 옷감도 당신이
술값으로 다 마셔 버렸죠. 그리고 이번엔 외투를 사러가서 그 돈으로 술을 마셔
버렸고."
세묜은 자기가 마신 술값이 20까뻬이까밖에 되지 않으며, 이 젊은이를 발견하
게 된 사정을 말하려고 하였으나 마뜨료나가 말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디서
나오는지 한꺼번에 두 마디씩 지껄여대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10년 전의 일
까지 낱낱이 들추어내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이야기하고 나서 마뜨료나는 세묜에게 덤벼들어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습
니다.
"내 옷을 이리줘요. 한 벌밖에 없는 내 옷을 강제로 벗겨 입고 가다니. 이리내,
이 거지 같은 영감쟁이야!"
세묜은 재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소매가 뒤집혔습니다. 그때 마누
라가 그것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솔기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마뜨료나는 재킷을
빼앗아 뒤집어쓰고 문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다가 그 자리에
우뚝 섰습니다. 화가 치밀어오르긴 했지만 이 사나이가 누군지 알고 싶어진 것
입니다.
4
마뜨료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습니다.
"착한 사람이라면 벌거숭이로 있을 리가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셔츠도 없
잖아요. 또 당신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어디서 이 사람을 데려왔는지 말했
어야 될 게 아녜요."
"그렇지 않아도 벌써부터 이야기하려던 참이오. 집으로 오는데 이 사람이 교회
옆에 있더군. 거의 얼어붙은 채 말이야. 여름도 아닌데 벌거벗은 몸으로. 하느님
이나를 이 사람에게 이끄신 거야. 안 그러면 이 사람은 죽었을 거야. 이런 때 어
떡해야겠소?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무슨 일을 당할지 누가 알겠소! 그래서 옷을
입혀 데려왔지. 자, 당신도 마음을 좀 가라앉혀요. 그렇게 하면 죄악이야, 마뜨료
나. 우리도 언젠가는 죽을 게 아니오."
마뜨료나는 욕을 해주고 싶었으나 나그네를 보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나그네
는 걸상 끝에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머리를 숙
인 채 답답한 듯 줄곧 눈을 감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습니다. 마뜨료나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세묜은 말을 이었습니다.
"마뜨료나, 당신 마음속엔 하느님도 없소?"
마뜨료나는 이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젊은이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갑자
기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녀는 문 곁을 떠나 난로가 놓인 구석으로가서 저
녁 준비를 하였습니다. 컵을 식탁 위에 놓고 즈바스(곡물로 만든 맥주 같은 음료
수)를 따르고, 마지막 빵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이프와 포크를 놓으면서 "어
서 들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세묜은 젊은이를 식탁으로 데려갔습니다.
] "앉아요, 젊은이."
세묜은 빵을 잘게 잘라 둘이서 저녁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마뜨료나는 식탁
곁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낯선 젊은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살펴 주고 싶은 생
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갑자기 명랑해지며 찡그렸던 얼굴을 펴고
마뜨료나쪽으로 눈을 쳐들어 빙그레 웃었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마뜨료나는 식탁을 치운 다음 낯선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어디서 왔소?"
"나는 이 지방 사람이 아닙니다. "
"왜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강도라도 만났나요?"
"하느님의 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소?"
"예, 알몸으로 누워 있다가 얼어죽을 뻔했지요. 그걸 세묜이 발견하고 불쌍히
생각하여 입고 있던 두루마기를 벗어 나에게 입혀 준 다음 여기까지 데려온 것
입니다. 여기에 오니까 마님께서 나를 불쌍히 생각하여 또 먹고 마실 것을 주셨
습니다. 하느님은 두 분에게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마뜨료나는 일어나서 좀전에 기운 세묜의 셔츠를 창가에서 집어 젊은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바지도 찾아 주었습니다.
"이제 보니 셔츠도 없잖아. 이걸 입고 아무데서나 자도록 해요 침대 위든 난롯
가에서든."
젊은 나그네는 두루마기를 벗고 셔츠와 바지를 입은 다음 침대위에 누웠습니
다. 마뜨료나는 등불을 끈 뒤 두루마기를 가지고 남편 곁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두루마기 자락을 덮고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 젊은이의
생각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젊은이가 마지막 빵을 다 먹어 치워 버렸으므로 내일 먹을 빵이 없으며,
셔츠와 바지를 줘버린 일을 생각하자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빙그레
웃던 일을 생각하자 마음속이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마뜨료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세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지
두루마기 자락을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세묜!"
"응?"
"빵을 다 먹어 버렸는데 구워 놓지 않았으니 내일은 어떡하죠? 말라냐 대모에
게 가서 좀 꾸어야겠어요."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소."
마뜨료나는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저 젊은이는 좋은 사람인 것 같은데 왜 자기 자신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말못할 사정이 있겠지."
"세묜!"
"응!"
"우리는 남에게 주는데, 남들은 왜 우리에게 안 주는거죠?"
세묜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이제 그만해 두지." 하고 말
하고 세묜은 돌아누워 잠들어 버렸습니다.
5
이튿날 아침 세묜은 잠이 깨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자고 있었고, 아내는 이
웃집에 빵을 빌리러 갔습니다. 어저께 온 나그네는 헌 바지와 셔츠를 입고 걸상
에 앉아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표정은어제보다 밝아 보였습니다.
세묜이 말했습니다.
"어떤가, 젊은이. 배에서는 쪼르륵 소리가 나고 몸에는 옷을 걸쳐야 하니 일을
해야 할 게 아닌가. 자넨 무슨 일을 할 줄 아나?"
"아무 일도 할 줄 모릅니다."
세묜은 놀랐으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되지. 사람은 무슨 일이나 배울 수 있어."
"모두 일을 하니 저도 일을 하겠습니다. "
"자네 이름은 무언가?"
"미하일입니다."
"미하일, 자네는 자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데, 그건 아무래도 좋
지만 밥벌이는 해야겠어. 내가 시키는 일을 하면 밥을 먹여 주겠네."
"고맙습니다. 일을 배우겠습니다. 제가 할 일을 가르쳐 주십시오."
세묜은 실을 들어 손가락에 감고 매듭을 지었습니다.
"어려울 건 없어. 자, 보게……"
미하일은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얼른 배워 손가락에 실을 감아 매듭을
지었습니다.
이번에는 세묜이 실 찌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미하일은 그것도 곧 배웠습
니다. 다음에는 가죽 다루는 법과 깁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미하일은 그것
도 얼른 배웠습니다.
세묜이 무슨 일을 가르치든 미하일은 얼른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사흘째부터
는 오랫동안 구두를 만들어 온 사람처럼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만 하고 밥은 조금밖에 먹지 않았습니다. 쉴 때에는 잠자코 천장만 쳐다보았
습니다. 밖에 나가는 일도 없었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도 않았으며, 농담도, 웃
는 법도 없었습니다. 미하일이 웃는 모습을 본 것은 그가 처음 오던 날 마뜨료
나가 밥상을 차려 줄 때뿐이었습니다.
6
날 이가고, 일주일이 가고, 한 해가 지나갔습니다. 미하일은 여전히 세묜의 집
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미하일의 소문은 사방에 퍼졌습니다. 미하일만큼 멋지
고 튼튼하게 구두를 짓는 사람은 없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웃 마을에
서 까지 구두를 맞추려고 사람들이 몰려와 세묜의 수입은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
니다.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마차는 가게 앞에 멎었습니다. 마
차가 멎자 젊은 사람이 마부석에서 펄쩍 뛰어내려 문을 열었습니다. 털외투를
입은 신사가 마차에서 나와 세묜네 집을 향해 층계를 올라왔습니다.
마뜨료나가 달려나가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신사는 몸을 굽히고 방안으로 들
어섰습니다. 머리는 거의 천장에 닿을 정도였고, 몸은 방안을 가득 채울 것만 같
았습니다. 세묜이 일어나서 절을 하며 놀랐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이런 사람을
본 일이 없었습니다. 세묜과 미하일도 마른 편이고 마뜨료나는 명태처럼 바싹
여위었는데, 이 신사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 같았습니다. 얼굴이 벌겋고 기름
이 흘렀으며 목은 황소만 하였고, 온몸은 무쇠로 되어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신사는 후유 하고 외투를 벗고 걸상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구둣방 주인이 누구지?"
세묜이 나서며 말했습니다.
"제가 주인이옵니다, 나리."
신사는 자기가 데려온 젊은이를 소리쳐 불렀습니다.
"이봐, 페지까. 물건을 이리 가져와."
젊은이는 달려가 작은 보자기를 가져왔습니다. 신사는 보자기를 받아 책상 위
에 놓으면서 말했습니다.
"끌러."
젊은이가 보자기를 끌렀습니다.
신사는 가죽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세묜에게 말했습니다.
"이봐, 이 가죽 보이지?"
"예, 나리."
"이게 무슨 가죽인지 알겠어?"
세묜은 가죽을 만져 보고 나서 말했습니다.
"좋은 가죽이옵니다."
"그야 물론 좋은 가죽이지! 너같은 바보는 아직 이런 가죽을 못 보았을 거다.
이건 독일젠데, 20루블이나 줬어."
세묜은 겁을 집어먹고 말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어디서 그런 걸 구경하겠습니까."
"그렇겠지. 헌데 자네 이걸로 내 발에 맞는 장화를 만들 수 있겠나?"
"그러믄요, 나리."
신사는 세묜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만들 수있다'고 했겠다. 하지만 알아 둬 ―네가 누구의 구두를, 어떤 가죽으로
만드는지. 나는 일 년을 신어도 모양이 변치 않고 실밥이 터지지 않는 장화를
바란단 말야. 할 수 있으면 가죽을 자르고, 할 수 없으면 맡지 마. 미리 말해 두
는데 일 년 안에 구두 모양이 변하거나 실밥이 터지면 너를 감옥에 처넣을 거
야. 그 대신 일 년이 되어도 모양이 변하지 않고 실밥이 터지지 않으면 만든 값
으로 10루블을 주지."
세묜은 겁이나서 무엇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는 미하일을 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팔꿈치로 쿡찌르며 귀엣말로 물었습니다. "맡을까?"
미하일은 '맡으라'고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세묜은 미하일의 말을 따라 일 년 안에 모양이 변하지도 실밥이 터지지도 않
는 장화를 주문 받기로 하였습니다. 신사는 젊은이를 불러 왼쪽신발을 벗기라고
하며 발을 내밀.
"발을 재게!"
세묜은 한 자가 훨씬 넘게 종이를 붙여 바닥에 깐 다음 두 무릅을 꿇었습니
다. 그리고 신사의 양말에 때를 묻히지 않으려고 앞치마에 손을 잘 문지른 다음
치수를 재기 시작했습니다. 세묜은 발바닥을 재고, 발등 높이를 재었습니다. 그
리고 종아리를 재려는데 종이 양끝이 닿지 않았습니다. 신사의 장딴지가 통나무
처럼 굵었던 것입니다.
"이봐, 거길 좁게 해서는 안돼."
세묜은 다시 종이를 덧붙였습니다. 신사는 가만히 앉아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미하일을 발견하고 물었습니
다.
"저 친구는 누구야?"
"우리 집 직공인데, 그가 나리의 구두를 만들 것입니다."
"이봐, 자네도 잘 들어둬. 일 년은 끄떡없도록 만들어야해." 하고 신사는 미하
일에게 말했습니다.
세묜도 미하일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미하일은 신사를 보지 않고 그의 뒤
쪽구석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누군가를 꿰뚫어 보려는 것 같았
습니다. 그러다가 미하일은 갑자기 웃음을 띠며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바보자식, 왜 웃어? 기한 내에 만들도록 정신 바짝 차려."
그러자 미하일이 말했습니다.
"필요할 때까지 만들어 놓겠습니다."
"좋아."
신사는 장화를 신고 털외투를 입고 문 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깜박 잊고 허
리를 굽히지 않았으므로 문설주에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신사는 욕을 퍼붓고 머리를 문지르며 마차를 타고 떠나 버렸습니다.
신사가 떠나자 세묜이 말했습니다.
"차돌같이 단단한 사람이군. 몽둥이로 후려쳐도 안 죽겠어. 머리를 그렇게 부
딪쳤는데도 별로 아프지 않은가 봐."
그러자 마뜨료나가 말했습니다.
"저런 생활을 하는데 어찌 살이 빠지겠수. 귀신도 저렇게 튼튼한 사람에게는
꼼짝 못할 거예요."
7
세묜은 미하일에게 말했습니다. "일을 맡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불행한 일은 없
어야겠는데. 가죽은 비싼데 나리는 신경질적이니까 말야. 실수를 말아야 할 텐
데. 자네는 나보다 눈도 밝고 솜씨도 좋으니까 발 잰 것을 자네에게 맡기겠네.
가죽을 재단하도록 하게. 나는 겉가죽을 꿰매도록 하지."
미하일은 주인의 말대로 신사의 가죽을 받아 들고 책상 위에 두 겹으로 포개
놓은 다음 칼을 들고 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마뜨료나는 미하일의 곁으로 가서 그가 하는 일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마
뜨료나는 장화 만드는 일을 보아왔는데, 미하일은 장화 모양과는 달리 가죽을
둥글게 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뜨료난는 한마디하려다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나리의 장화를 어떻게
짓는지 잘못 알아들었는지도 몰라. 나보다 미하일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참견
말아야지.'
미하일은 가죽을 자르고 실을 꿰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장화가 아닌 슬리
퍼를 꿰맬 때처럼 겹실이 아니라 한 겹으로 깁고 있었습니다.
마뜨료나는 그것을 보고 또 깜짝 놀랐으나 역시 참견하지 않았습니다. 미하일
은 열심히 깁고 있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어 세묜이 자리에서 일어나다 보니 미
하일은 신사의 가죽으로 슬리퍼를 한 켤레 꿰매어 놓고 있었습니다.
세묜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미하일은 일 년이나 우
리 집에 같이 살면서 한 번도 실수를 해본 적이 없는데 하필이면 지금 실수를
하다니, 나리는 굽이 달린 장화를 주문했는데 평평한 슬리퍼를 만들어 놓았으니
가죽을 버리지 않았나. 이걸 나리에게 어떻게 물어주지? 이런 가죽은 구할 수도
없는데.'
그래서 그는 미하일에게 말했습니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내 목을 자르려고 그래! 나리는 장화를 주문했는데
자네는 무엇을 만들어 놓았는가?"
이렇게 세묜이 미하일에게 마악 이야기를 꺼내는데, 계단에서 쿵쿵 소리가 나
더니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누군가가 타고 온 말을
붙들어 매고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바로 그 나리의 하인이었
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시오. 그런데 무슨 볼일로 왔나요?"
"그 장화 때문에 주인마님의 심부름을 왔습니다."
"뭐요, 장화 때문이에요?"
"장화는 이제 필요 없게 되었어요. 나리는 돌아 가셨으니까요."
"아니 뭐라고요!"
"집으로 돌아가시던 도중에 마차에서 돌아가셨어요. 마차가 집에 도착하여 부
착해 내리려고 가보니 나리는 짐짝처럼 나뒹굴고 계셨어요. 벌써 세상을 떠나
송장이 되어 누워 계셨던 것입니다. 간신히 끌어내렸죠. 그래서 마님께서 저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너 구둣방 주인에게 가서 전해라. 아까 나리께서 주문하신 장
화는 필요 없게 되었으니 대신 죽은 사람이 신는 슬리퍼를 빨리 만들어 달라고
말야. 그리고 만드는 동안 기다렸다가 가지고 오라고요."
미하일은 남은 가죽을 둘둘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 만든 슬리퍼를 들고 탁탁
치더니 앞치마에 문지른 다음 하인에게 내주었습니다. 젊은 하인은 슬리퍼를 받
아 들고 "안녕히 계십시오, 여러분!" 하고 인사했습니다.
8
다시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 미하일이 세묜의 집에 온 지도 벌써 6년이 되
었습니다. 그는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데도 나가지 않았고
쓸데없는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동안 두 번밖에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
다. 한 번은 이 집에 처음 오던 날 마뜨료나가 저녁 밥상을 준비할 때였고, 또
한 번은 죽은 신사가 구두를 맞추러 왔을 때였습니다. 세묜은 미하일을 아주 좋
아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더 이상 물어 보지 않고
다만 어디로 가버리지나 않을까 그것만이 걱정이었습니다.
어느 날 온 가족이 집에 모여 있었습니다. 마뜨료나는 난로에 냄비를 올려놓
고 있었고, 아이들은 걸상 위로 뛰어다니기도 하고 창 밖을 내다보기도 하였습
니다. 세묜은 창가에 앉아 구두를 깁고 있었고, 미하일은 다른 창가에서 굽을 붙
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세묜의 아들이 걸상을 타고 미하일 곁으로 와서 그의 어깨를 짚고 창 밖
을 내다보며 말했습니다.
"미하일 아저씨 저것 좀봐. 가겟집 아주머니가 딸들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오
고 있어요. 한 아이는 절름발이예요."
아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미하일은 일손을 멈추고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세묜은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미하일은 창 밖을 내다본 일이 한 번도 없었는
데 지금은 창문에 얼굴을 바싹 갖다 붙이고 무엇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
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묜도 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한 여인이 자기 집 쪽으
로 오고 있었습니다.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여인은 털외투에 쇼을 두른 두계
집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여자아이들은 얼굴이 똑같아 누가 누군지 분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아이가 왼쪽 다리를 저는 것만이 달랐습니다.
여인은 바깥 층계를 올라와 현관으로 와서 문을 더듬더니 문고리를 잡아당겼
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아이들을 먼저 들여보낸 뒤, 자기도 뒤
따라 들어왔습니다.
"안녕하셔요, 여러분!"
"어서 오셔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여인은 책상 쪽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두 여자아이는 낯선 듯 여인의 무릅에
기대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봄에 신을 구두를 맞추려고요."
"지어 드리죠. 이렇게 작은 구두는 만들어 보지 않았지만 할 수 있습니다. 가
장자리에 장식이 달린 것도 만들 수 있고, 안에 천을 대어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만. 우리 집 미하일은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세묜은 미하일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미하일은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앉아 아이들에게서 눈을 뗄 줄 몰랐습니다.
세묜은 미하일의 그런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실은 그도 두 여자아이가 귀
엽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까만 눈동자에 뺨은 통통하고 살구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입고 있는 털외투도 숄도 멋진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두 아이를 아는 것만 같았
습니다.
세묜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자와 흥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값을 정
하고 발을 재야 할 차례였습니다.
"이 아이 발로 둘의 것을 재면 돼요. 아픈 발은 한 짝만 짓고, 이쪽은 세 짝은
지어 주세요. 두 아이는 발이 꼭 같거든요. 쌍둥이예요."
세묜은 치수를 재고 절름발이 아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아 아이는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요? 참, 귀엽게 생겼는데. 나면서부터 발을
저나요?"
"아니에요. 어머니에게 눌려서 이렇게 됐어요."
그때 마뜨료나가 끼여들었습니다. 그 여자는 누구며 쌍둥이는 누구의 아이들
인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럼 부인은 얘들의 엄마가 아닌가요?"
"나는 얘들의 어머니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라우. 생판 남인데 얘들을 양딸로
삼았다오."
"자기가 낳은 아이도 아닌데 정말 귀여워하시네요!"
"그럴 수밖에 없지요. 내 젖으로 키워 왔으니까요. 나도 자식이 있었는데 하느
님이 데려가셨어요. 그 아이는 가엾은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얘들은 정말 가엾
어요."
"애들은 대체 뉘 집 애들인데요?"
9
여인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6년 전의 일입니다. 이 애들은 일주일 사이에 고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버
지는 화요일에, 어머니는 금요일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 아이들은 아버지가
돌아간지 사흘만에 태어났고, 어머니는 하루도 못 살았어요. 그때 나는 남편과
같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얘들의 부모는 옆집에 살던 이웃이었습니
다. 얘들의 어버지는 외로운 농사꾼이었는데 어느 날 숲속에서 일을 하다가 나
무에 깔렸습니다. 집으로 옮기긴 했으나 곧 세상을 떠버렸습니다. 사흘 후 그의
아내는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이 아이들이 바로 그 애들이었지요. 워낙 가난하고
외토리인지라 그 여자에게는 도와 줄 노파도 처녀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혼자
서 낳고 혼자서 죽어간 것이지요.
이튿날 아침에 궁금하여 내가 그 집에 들러 보았더니 가엾게도 어머니는 숨이
끊어져 이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는 애를 깔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한 다리를
못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죽은 사람을 깨끗이 씻겨 옷을 입
히고 관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 주었습니다.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지요. 이제 두
갓난애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보낼 데가 없었습니다. 마을 여자들
중에 젖먹이가 있는 것은 나 혼자뿐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낳은 지 8주밖에
안 된 첫아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지요. 그래서 내가 임시로 이 아이들을 맡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여
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리아, 당신이 얼마 동안 이 아이
들을 맡아 주셔요. 조금만 돌봐 주면 우리가 이 아이들 문제를 생각해 볼 테니
까요.' 그러나 나는 성한 아이에게만 젖을 주고 다리를 저는 아이에게는 주지 않
을 생각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
니다. 하지만 천사 같은 어린 영혼이 죽어야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스스로 생각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이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 아이에게도
젖을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내 아이와 이 두 아이―이렇게 세 아이에게
젖을 먹여 키웠던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젊고 힘이 센데다 먹기도 잘했으
니까요. 하느님 덕분에 젖은 철철 넘쳐 흘렀습니다. 두 아이가 한꺼번에 젖을
빨고 한 아이는 기다렸지요. 그 중 한 아이가 젖꼭지를 놓으면 기다리던 아이에
게 젖을 주었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으로 두 아이는 잘 컸으나 내 아이는 두 살 때 죽어 버렸
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자식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재산은 점점 불어났습니다.
지금은 이 마을 어느 상인의 방앗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보수도 좋고 생활은
넉넉한 편입니다만 아이가 없답니다. 이 두아이가 없었다면 나 혼자 무슨 재미
로 살아가겠어요! 그러니 얘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얘들은 내게
촛불과도 같아요."
여인은 한 손으로 절름발이 아이를 안고, 또 한 손으로는 뺨에서 눈물을 훔치
기 시작했습니다. 마뜨료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부모 없이는 살아가도 하느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이 정말인 것 같군
요."
주인과 서로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여인은 가려고 일어났습니다. 세묜과
마뜨료나는 여인을 전송하며 미하일 쪽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무릅위에 손을
얹고 앉아서 천장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10
세묜은 미하일 곁으로 가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미하일은 걸상에서 일어나 일감을 놓고 앞치마를 벗은 다음, 주인 내외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주인 아저씨, 아주머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으니 두 분께서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인내외는 미하일의 몸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묜은 일어나 미하
일에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미하일, 나도 알고 있네. 자네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붙잡을 수도 없
고 그 이유를 물어 볼 수도 없다는 것을 말야. 하지만 하나만 대답해 주게. 내가
자네를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왔을 때 자네는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아내가
밥상을 차려 주자 빙그레 웃음을 띠어 보이며 밝은 표정을 지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네. 그 휴 나리가 장화를 주문했을 때 자네는 다시 빙그레 웃으
면서 또 밝은 표정을 지었었지? 그리고 지금 여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왔을 때
자네는 세 번째로 빙그레 웃으면서 온몸에서 빛이 났었네. 말해 주게, 미하일.
어째서 자네 몸에서 빛이 나며, 왜 세 번밖에 웃지 않았는지."
미하일이 대답했습니다.
"내 몸에서 빛이 나는 것은 내가 하느님이 벌을 받았다가 이제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세 번밖에 웃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세 마디 말씀을 깨달
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하느님의 그 세 마디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
니다. 한 마디 말씀은 주인마님께서 나를 가엾게 생각하셨을 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웃었습니다. 또 한마디 말씀은 부자 나리께서 장화를 주문했을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웃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말씀은 방
금 두 여자아이를 보았을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웃었습니다."
세묜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미하일, 자네는 무슨 죄로 하느님의 벌을 받았으며, 내가 지금 알고자
하는 그 세마디 말씀은 무엇인지 말해주게."
미하일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벌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늘
나라의 천사였는데 하느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하루는 하느님께서 어느 여인
의 영혼을 빼앗아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내려와보니 그 여인은
아파서 누워 있었습니다. 쌍둥이 딸을 낳았던 것입니다. 갓난아기는 엄마 곁에
꿈틀거리고 있었으나 엄마는 젖을 줄 힘이 없었습니다. 여인은 나를 보자 하느
님께서 자기 영혼을 부르러 보내신 것을 알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천사님! 제
남편은 숲에서 나무에 깔려 며칠 전에 죽었습니다. 내게는 이 아이들을 키워줄
고모도 이모도 할머니도 없습니다. 제발 이 애들이 클 때까지 내 손으로 키우도
록 내 영혼을 가져가지 마십시오. 아이들은 부모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 말
을 듣고 나는 한 아이에게 젖을 물려주고, 한 아이는 어머니 팔에 안겨 준 뒤
하늘 나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곁으로 가서 말했습니다. '저는 산모
의 영혼을 가져올 수 없었습니다. 남편은 나무에 깔려 죽고, 여자는 방금 쌍둥이
를 낳고는 자기 영혼을 거두어 가지 말아달라고 비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제손으로 키우게 해달라, 아이들은 부모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산모의 영혼을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가서 산모의 영혼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세 가
지 말의 뜻을 알게 되리라.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안 주
어진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세 가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알게 되면 다시 하늘 나라로 돌아오게[ 되리라.' 나는 다시
세상으로 내려와 산모의 영혼을 빼앗았습니다.
갓난아이들은 어머니의 가슴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시체가 침대
위에 뒹굴며 한 아이를 짓누르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나
는 여자의 영혼을 데리고 하느님에게 올라가려고 했습니다만, 그때 마침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제 날개를 꺾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의 영혼만 하
느님께로 가고, 저는 땅 위에 떨어져 길바닥에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11
세묜과 마뜨료나는 자기네와 함께 살아온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자 두려움과
기쁨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천사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나는 홀로 벌거숭이가 된 채 들판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인간
의 부자유도 추위도 굶주림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인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춥고 배가 고팠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들 가운데서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발견하고 몸을 피하고자 그리로 갔습니다.
교회는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날이 저물자 나는 춥고 배가
고파 온몸이 쑤셔 왔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장화를 신고 길을 걸어오면서 혼
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내가 사람이 되어 처음으로 본 사람은 송
장과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나는 너무나 무서워 얼굴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데 그 사나이는 이 추운 겨울에 자기 몸을 감쌀 옷과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춥고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 저기 오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두
내외가 걸칠 외투와 빵을 마련하나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다. 저 사람은 나를 도
와 줄 수 없다.' 그 사람은 나를 보자 얼굴을 찌푸리고 더욱 무서운 얼굴이 되어
지나가 버렸습니다. 나는 낙심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이 되돌아오는 소
리가 들렸습니다. 쳐다보니 좀전에 본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좀전까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그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습니다. 나는 그
얼굴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내 곁으로 다가와 옷을 입혀
주고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한 여자가 나와 말을 했습니다. 그 여
자는 남자보다 한층 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입에서 나오는
죽음의 입김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그 여자는 나를 추운 밖으로 몰아
내려고 했습니다. 그때 만약 나를 내쫓았다면 그 여자도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때 갑자기 남편이 하느님에 대한 얘기를 하자 그 여자는 곧 태도가 바뀌었습
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우리에게 저녁상을 차려 주며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러자 그 여자의 얼굴에서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생기가 돌고 있었습
니다. 나는 그 얼굴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나는 '사람이 마음속
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되리라'는 하느님의 첫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내게
약속하신 것을 깨우쳐 주셨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뻐서 처음으로 빙그레 웃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머지 두 말씀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에게 안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던 것
입니다.
이 집에 온 지 일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한 사나이가 와서 일 년 동안 닳
지도 터지지도 일그러지지도 않는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 사
람의 등뒤에 내친 구였던 죽음의 천사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나 이외에
는 아무도 그 천사를 보지 못했지만, 그날이 저물기 전에 부자의 영혼은 그의
곁을 떠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일년
신어도 끄떡없을 장화를 주문하고 있지만 오늘 저녁 안으로 죽는다는 것을 모른
다.' 그때 나는 '사람에게 안 주어진 것은 무엇인가'라는 하느님의 두 번째 말씀
을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가는 이미 아는 바였고 이번엔 사람에게 안 주어
진 것은 무엇인지를 또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몸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로
빙그레 웃었습니다. 나는 친구였던 천사를 만난 것도 기뻤으나 하느님께서 두
번째 말씀을 깨우쳐 주신 것이 더 기뻤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머지 한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
는가 하는 문제를 아직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살면서 하
느님께서 마지막 말씀을 내게 깨우쳐 주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6년째가 되었습
니다. 어느 여인이 쌍둥이 계집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나는 이 아이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식을 키우게
해달라는 그 어머니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부모 없이는 아이들이 자라지 못하
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남이 키우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여자가
남의 자식을 가엾이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을 때 그 속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였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마지막 말씀을 깨우쳐 주시고 저를 용서해 주신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세
번째로 웃었던 것입니다. "
12
천사의 몸은 벌거숭이가 되고 온몸이 빛으로 둘러싸여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
습니다. 그는 더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소리는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흘러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천사는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에 대한 걱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간다
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에게는 아이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그 부자 신사는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 수 있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산 사
람이 신을 장화인지 저녁나절에 죽을 사람에게 필요한 슬리퍼인지 그걸 알 만한
힘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사람이 됐을 때 살아 남게 된 것은 내 자신의 걱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길을 가던 사람과 그 아내의 마음에 사랑이 있어 나를 불쌍히 생각하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고아가 살아 남게 된 것도 그들 자신의 걱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여자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어 그들을 불쌍히 생각하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걱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속 깊이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어 살아가도록 바라시는 걸로
알았습니다만, 이제 한 가지 일을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떨어져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자 자기에
게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지 않았으며, 서로 모여 살아가기를 원
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
르쳐 준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일 뿐, 사
실은 사랑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이제야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이며, 하느님은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말하고 천사는 하느님께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 목소리로 집이 흔들리
더니 천장이 갈라지면서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습니다. 세묜 내외와 아이
들은 땅바닥에 엎드렸습니다. 천사의 등에서는 날개가 펼쳐지더니 하늘로 올라
갔습니다.
세묜이 다시 정신을 차려 보니 집은 전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방안에
는그들 가족 이외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양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말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마라.(마태의 복음서,
5:38)
이것은 아직 농노가 해방되지 않았을 적의 이야기랍니다. 그 무렵에는 지주에
도 별별 사람이 다 있어서 자기도 언젠가는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하느님을 공경하고 농노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 중에는 농노 출신으로 갑자기 지주가된, 말하자면 미꾸라지가 용
이 된 것처럼 귀족의 대열에 끼인 자들만큼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없었지요.
그런 사람 때문에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귀족의 토지에 그런 마름이 나타났습니다. 농군들은 부역을 하고 있었지
요. 토지는 충분하고 땅은 기름지고 물도 풀밭도 숲도 모두가 남아돌아갈 정도
로 넉넉해서도 농노도 아쉬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주는 다른 곳에 있는 농군 출신의 하인을 마름으로 앉혔던 것입니다.
마름은 권력을 잡자 농민을 구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도 한 가정의 가장으
로 아내 말고도 시집간 딸이 둘이나 되고 벌만큼 벌었으므로 그렇게 심하게 굴
지 않아도 편안히 살아갈 수 있었는데 욕심이 너무 많은 때문에 나쁜 길로 빠져
버린 것입니다. 우선 첫 시작으로 농민들을 예정된 날짜 이상으로 일을 시켰습
니다. 벽돌 공장을 세워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마구 끌어다가 일을 시키고, 만들
어 낸 기와는 팔아먹는 것이었어요.
농민들은 모스끄바에 있는 주인에게 가서 마름의 일을 호소했으나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지주는 그냥 농부를 쫓아낼 뿐 마름의 권력을 빼앗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마름은 농민들이 호소하러 모스끄바를 갔었다는 소식을 듣고선 앙갚음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에 농민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어렵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농민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어렵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농민 중에는 좋지 못한
자들까지 있어서 친구의 일을 마름에게 일러바쳐 서로가 서로를 구렁텅이에 빠
뜨리려고 했습니다. 이리하여 농민들은 단결은커녕 서로 싸우게 되고 마름은 더
욱더 나쁜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마름의 횡포는 심해져서 결국 농민들은 누구나 이 마름을
사나운 짐승보다도 더욱 무섭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마름이 마차를 타고 마을을
지나갈 때면 모두 늑대라도 나타난 것처럼 아무데나 재빨리 몸을 숨겨 그의 눈
에 뜨이지 않게 했습니다. 마름은 그런 모양을 보고 놈들은 나를 무서워하는군
하면서 더더욱 화를 내고 때리고 일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농민들
은 퍽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무렵, 농민들은 때때로 그런 좋지 못한 악인은 슬쩍 죽여버려야겠다는 생
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마을 농민들도 그렇게 할 것을 의논했습니다. 그들
은 으슥한 곳에 모였는데 그 중에도 가장 배짱이 있는 친구가 말을 꺼냈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저 악당을 내버려둬야 하나?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지 아
닌가. 하니 저놈을 차라리 우리가 죽여 없애자!"
그런 어느 부활제 전날이었습니다. 농민들은 숲속에 모였습니다. 마름이 지주
의 숲을 말끔히 손질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점심을 먹으려고 모였을 때
의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래 가지고야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겠는가? 저놈은 우리를 고스란히 말려
죽일 작정인가 봐. 일이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쉴 시간도 주지 않아. 게다가 조
금이라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두들겨 패지를 않나, 세묜 같은 자는
얻어맞고 죽었지. 아니심은 족쇄에 채워져 곤욕을 치렀지. 도대체 우린 더 이상
무엇을 기다리겠나? 오늘 저녁, 여기 와서 또 몹쓸 짓을 하거든 놈을 말에서 끌
어내려 도끼로 한 대 꽝 치면 그걸로 끝장일거란 말일세. 그런 후엔 개처럼 어
디다 묻어버리면 들킬 까닭이 없어. 다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모두가 마음을
합해서 말을 입밖에 내지 않기로 약속하는 거야!"
바실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마름을 미워하고 있었습니
다. 마름은 일주일이 멀다 하고 바실리를 때리는가 하면 그의 아내마저 빼앗아
자기 집 하녀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농민들은 결정을 보았습니다. 저녁때 마름이 왔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왔는데 느닷없이 나무 베는 방식이 틀렸다면서 야단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잘라 버린 나뭇가지더미 속에서 보리수 한 그루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나는 보리수를 베 않았어. 누가 베었나? 어서 말하지 못할까? 말 안 하면 모
조리 두들겨 패 줄테다."
그리하여 누가 맡은 자리에 보리수가 끼여들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것은 시도르가 맡은 자리라고 했으므로 마름은 시도르의 얼
굴을 피가 나도록 때렸습니다. 바실리도 나무를 적게 베었다고 가죽 채찍으로
실컷 두들긴 다음 마름은 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다시 농민들이 모였습니다. 거기서 바실리가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 당신네들도 사람이오? 참새 새끼들만도 못해! '해치운다'고 입으로만 말
하면서 막상 코앞에선 꼬리를 감추니…… 꼭 매 앞에 움츠린 참새 같단 말이야.
'동료를 배반해선 안 된다. 기운을 내 해치우자!' 고 염불외듯 하면서 막상 매가
날아오면 모두 풀숲으로 흩어지니. 그러니까 매는 자기가 노렸던 자를 잡아 족
치는 거예요. 매가 날아가고 나서 참새들이 나와 짹짹거리며 돌아보니 한 마리
가 모자란다…… '대체 누가 없어졌나? 아아, 반갑구나. 그놈은 그런 꼴을 당할
만하지. 그만한 까닭이 있는거야.' 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오. 당신네들이 꼭 그렇
소. 배신 않겠다고 했으면 배신하지 말아야지! 놈이 시도르에게 손찌검을 했을
때 당신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놈을 박살내야 하는 거란 말이오. '배신 않겠다.
해치우자!' 고 했다간 매가 덤벼들면 놀라 숲으로 도망쳐버리니……"
농민들은 점점 더 자주 그런 의논을 하고 마침내 마름을 죽이기로 했습니다.
그리스도 수난 주간에 마름은 농민들에게 명령을 내려 부활제가 시작되면 쌀,
보리씨를 뿌릴 준비를 해서 지주의 밭을 갈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농민들은 사
람을 어떻게 알고 하는 수작이냐고 툴툴거리면서 바실리의 집 뒤꼍에 모여 다시
의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놈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그런 짓을 거리낌없이 하려 들다니 정말이지 때
려죽여야만 해. 어차피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거기에 미혜예프가 왔습니다. 지금까지 농민들의 모임엔 한 번도 나온 일이
없었으나 오늘 처음 나온 온화한 이사나이는 농민들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 이렇
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네들은 정말 엄청난 일을 생각하고 있구려. 사람을 죽인다는 건 여간 큰
일이 아니에요. 남의 목숨하나 죽이기야 수월하겠지마는 자기의 목숨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놈이 나쁜 짓을 했다면 가만 내버려둬도 벌을 받을 것이오. 그
러니 참아야하오."
그 말을 듣고 바실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소리쳤습니다.
"맨날 그 말이지…… 사람을 죽이는 건 죄라구. 죄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놈도
인간인가? 정말 착한 사람을 죽이는 건 죄가 되겠지만 그 따위 개만도 못한 놈
을 죽이는 건 하느님의 분부야. 인간을 불쌍하게 여긴다면 미친개는 죽여야만
해. 죽이지 않으면 죄를 더욱 거듭 지을 뿐이야. 놈이 사람을 때린 생각을 하면
이가 갈린단 말이야! 설사 우리가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그건 사람들의 위해서
야. 모두 고마워들 할거야. 그런 걸 우리가 더럽다고 침이나 뱉고 앉아 있으면
놈은 우리를 모조리 패 죽이고 말 거야. 자넨 당치도 않는 말을 하고 있어, 미혜
예프. 도대체 뭔가, 그리스도의 축제일에 일하러 가는 편이 죄가 덜 된다는 말인
가? 그렇게 말하는 자네부터 일하러 가진 않을걸!"
그러자 미혜예프가 말했습니다.
"안 가긴 왜 안 가겠나! 일하러 가라면 가야지.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겐가. 누가 나쁜지는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셔. 우린 다만 하느님을 잊어버
리지 말아야 되는 거야. 여보게들 나는 말이지, 내 생각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닐세. 만일 악을 악으로 뿌리뽑으라고 하는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그와 같은
본을 보여 주셨을 테지만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그게 아니란 말이거든. 우리
가 악을 악으로 다스리려 하면 악은 우리 쪽으로 옮겨오네. 사람을 죽이기야 수
월한 일이지만 그 피는 자신의 영혼에 달라붙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피투성이로 만드는 일이야. 자신은 나쁜 놈을 죽였다, 악을 이젠 뿌리 뽑
았다, 생각하고 있어도 실상 그보다 더 나쁜 걸 자신의 영혼에다 뿌리내리게 하
는 결과가 되네. 재난에는 지고 들어가야 해. 그러면 재난 쪽에서 우리에게 져줄
거란 말일세."
이렇게 하여 농민들은 결정을 보지 못했습니다. 의견들이 구구하여 바실리처
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혜예프처럼 죄를 짓지 말고 견뎌내는 편이
좋다고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농민들이 부활제 축하 행사를 끝마친 저녁때, 이장이 관청의 서기 한 사람과
함께 지주네 집을 다녀와서 마름인 미하일 쎄묘니치의 명령으로 내일은 농민 모
두가 밭에 나가 쌀, 보리씨를 뿌리기 위해 밭을 갈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장
과 서기는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알렸습니다. 한 패는 개울 저쪽으로,
다른 한 패는 신작로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농민들은 울며 겨자 먹
기로 그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모두 쟁기를 들고 나가 밭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아
침 기도 시간을 아리는 종이 울리고 사람들은 어디서나 명절을 축하하고 있는데
이곳의 농민들만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마름은 늦게 잠이 깨어 농장일을 둘러보러 나갔습니다. 마름의 아내도, 그의
과부 딸도(그녀는 명절을 쇠러 왔습니다) 집안을 치우고 옷을 곱게 차려입고 하
인에게 마차 준비를 시켜 기도회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마름은 하녀가 준비한
차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차를 잔뜩 마신 후에 파이프의 연기를 뿜으면
서 이장을 부러 물었습니다.
"그래 농군들은 밭으로 다내보냈겠지?"
"그럼요, 미하일 쎄묘니치. "
"어때 다들 나왔던가?"
"모두 다 나왔지요. 제가 장소까지 모두 정해 주었는걸요./"
"장소를 정해 준 건 잘한 일인데, 제대로 일을 하고 있을까? 지금 가서 일을
잘하나 살펴봐. 그리고 점심때 내가 직접 나가 볼 테니깐 한 정보를 둘이서 다
일구도록 그렇게 일러! 아주 잘 말이야! 만일에 소홀한 점이 발견되면 축제일이
라고 해서 봐주지 않을 테니깐!"
"잘 알았습니다. "
그렇게 말하고 나가는 이장을 미하일 쎄묘니치는 다시 불렀습니다. 막상 불러
들이기는 했으나 울물쭈물하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할말이 있었는데 어떻게 해
야 좋을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다가 마름은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도둑놈들이 내 말을 어떻게 하는지 자네 슬쩍 들어보
게. 누가 무슨 말을 하고 누가 무슨 욕을 하는지 낱낱이 내게 들려줘. 나는 그놈
들을 잘 알고 있어. 일하기보다는 비스듬히 누워 놀고만 싶어하는 놈들이니까
말야. 먹고 놀기만 좋아하고 밭 갈 때를 놓치면 일을 그르친다는 생각은 조금도
않거든. 그러니 가서 누가 뭐라고 하는지, 놈들이 지껄이는 말을 듣고 와서 모조
리 보고하란 말이야. 나는 그걸 알아 둬야해. 자, 어서 가봐. 그리고 내게 하나도
숨김없이 말해야 한다고, 알았나?"
이장은 밖으로 나가 말을 타고 농민들이 일하는 밭으로 달려갔습니다.
마름의 아내는 남편이 이장과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와서 부탁을 했습니다.
마름의 아내는 온순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여자였으므로 되도록 남편의 마음
을 가라앉혀 농민들을 감싸 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와서 이렇게 부탁했던 거예요.
"여보 그리스도의 대축제일이니 제발 죄를 짓지 말고 농민들을 쉬게 하시구
려!"
미하일 쎄묘니치는 아내의 말을 들으려고도 않고 껄걸 웃었습니다.
"한동안 매질을 하지 않았더니 당신 아주 간덩이가 부었어. 별 참견을 다 하고
나서니 말야."
"여보, 난 당신의 일로 아주 좋지 않은 꿈을 꾸었어요. 제발 내 말대로 농민들
에게 일을 시키지 마셔요!"
"안된다니깐 자꾸 그러네. 기름진 음식에 배가 부르니깐 채찍 맛을 까마득히
잊은 모양이군. 당신도 조심해야 한다고!"
쎄묘니치는 버럭 화를 내며 불이 붙어 있는 파이프로아내의 입을 쿡 찔러 방
에서 몰아내면서 빨리 식사 준비나 하라고 일렀습니다.
미하일 쎄묘니치는 고기묵이랑 고기만두랑 돼지고기수프와 통돼지구이를 우유
국수에 곁들여 먹고 버찌로 빚은 술을 마시고 달콤한 과자를 먹은 다음 하녀를
불러 노래를 부르게 하고 자기도 기타를 가져와 노래에 맞추어 퉁겨대기 시작하
는 거였어요.
마름이 거나한 기분이 되어 트림을 하면서 기타 줄을 뜯고 하녀와 같이 히히
덕거리고 있을 때 들어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들에서 본 일을 보고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래 어때, 밭은 갈고 있던가?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마칠 수 있겠던가?"
"벌써 절반 이상 갈았습니다. "
"잘못된 곳은?"
"그런 건 없구요. 모두 겁쟁이들이라 제대로 일하고 있어요."
"흙도 곱게 다지고?"
"잘 다져져서 양귀비 씨같이 곱던걸요."
마름은 잠자코 있다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마름은 잠자코 있다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 나에 대해선 뭐라고 하던가? 욕을 하던가?"
이장이 머뭇거리자 마름은 사실대로 이야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숨김없이 그대로 말해! 딴말로 꾸며대지 말고 놈들이 말한 대로 다 털어놓으
란 말이야. 정직하게 말하면 상을 주겟지만 혹시 놈들을 감쌌다간 매로 대신해
줄 테니까. 자까쮸샤, 이 사람에게 술 한잔 줘라. 기운 좀 나게."
하녀는 나가더니 이장에게 술을 갖다 주었습니다. 이장은 감사의 말을 하고
쭉 들이켠 다음 입언저리를닦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마찬가지야. 모두가 이 사람을 욕한 게 내 탓은 아니니까. 명령이니
들은 대로 말해 버리자.'
이렇게 생각하고 이장은 기운을 내어 말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불평을 하고 있더군요. 수군수군하면서 말이요."
"그래 뭐라고 하더냐? 빨리 말해 보라구."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름 양반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구요."
마름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누가그런말을 했지?"
"다들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마름 양반은 악마에게 고개 숙이고 있다구
요."
마름은 계속 웃으면서, "좋아. 자네 낱낱이 말해주게, 누가 뭐라고 했는지. 바
실리는 뭐라고 했나?" 하고 물었습니다.
이장은 자기의 친구들을 나쁘게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바실리와는 전부터 사
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바실리는 누구보다 욕을 많이 하더군요."라고 말해 버렸
습니다.
"뭐라고 욕하던가? 말해 봐."
"입에 담기조차 무서울 정도죠. 그 작자는 틀림없이 고해성사도 못 받고 죽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
"흥, 장하기도 하지. 놈은 그러면서 왜 진작에 날 죽이지 않았다는 거야? 아무
래도 손이 자라지 않았던 모양이지? 좋아, 바실리 네놈과는 당장에 셈을 치를테
니까. 다음엔 찌쉬까란 놈, 그 놈도 뭐라고 했겠지?"
"네, 모두 고약한 말만 하고 있습니다. "
"그러니까 뭐라고 했느냐 말이야?"
"뭐가 지저분하단 말인가? 겁낼 것 없어. 말해 보라니까."
"그 작자의 배가 툭 터져서 창자가 튀어나왔으면 좋겠다고 그랬습니다."
미하일 쎄묘니치는 무엇이 좋은지 껄걸 웃기까지 했습니다. "흥, 어느 쪽이 먼
저 터질지 어디 두고 보라고. 그건 누구였나? 찌쉬까였나?"
"네에, 모두 좋은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 욕을 하거나 위협하는 듯한
말들을 하고 있어요."
"그래, 한데 미혜예프는 어때? 놈은 뭐라고 했지? 그 빌어먹을 자식도 날 욕
했겠지?"
"아닙니다, 쎄묘니치. 미혜예프는 욕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했나?"
"네, 농군들 중에서 그 사나이 하나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똑똑한 놈
이더군요! 나도 깜짝 놀랐습니다, 미하일 쎄묘니치!"
"뭐가 놀라운가?"
"글세 그 사나이가 한 일에 모두들 놀라고 있습니다."
"글세 무슨 일을 했냐니까?"
"아주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그의 곁으로 갔을 때 그 사나이는 뚜르낀의
비탈진 언덕을 갈고 있었습니다. 더 가까이 가보았더니 누군가 노래부르는 소리
가 들려 왔습니다. 가늘고 고운 목소리였죠. 그런데 쟁기 손잡이 사이에 뭔가 반
짝이는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불빛 같은 거였습니다. 그래 바싹 다가가 자세히 들여야보니 5까뻬
이까짜리 양초였습니다. 그걸 쟁기의 가로대에 세워 놓았지 뭡니까. 그게 불타고
있었는데 바람이 불어도 꺼지질 않았습니다. 그는 새 셔츠를 입고 부지런히 밭
을 갈면서 부활절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겁니다. 쟁기를 홱 돌리기도 하고 잡아
당기기도 하는데도 춧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쟁기를
돌리고 손잡이를 꺾으면서 마구 밀어대는데도 글세 촛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
고 있었다구요."
"그래 무슨 말은 없었구?"
"아뇨,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그냥 나를 보더니 부활절인사를 할 뿐 다시 노
래를 부르는 것이었어요."
"자넨 그에게 뭐라고 했나?"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농민들이 몰려와서 미혜예프는
부활절에 밭을 했으니까 아무리 기도를 드려도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놀려대
더군요."
"그래 그 사내는 뭐라고 대답하던가?"
"그 친구는 그저 '땅에는 평화, 사람에게는 선한 마음이 있을 지어다'라고 했을
뿐, 다시 쟁기를 잡고 말을 몰면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
나 촛불은 꺼지지 않고 그대로 타고 있었습니다."
마름은 웃음을 멈추고 기타를 내려놓은 다음 머리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습니
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하녀도 이장도 물러가게 하고 커튼 뒤로 들어가 침대 위
에 누워서 한숨을 쉬며 끙끙 거렸는데, 그것은 마치 곡식을 싣고 가는 짐수레와
도 같은 힘겨운 소리였습니다. 그때 아내가 와서 말을 걸었으나 대답도 하지 않
았습니다. 다만,
"그놈이 날 이겼어! 이번엔 내 차례야!"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습니다.
아내가 타이르기 시작했습니다.
"여보, 지금부터라도 당신이 농장에 가서 농군들을 돌려보내세요. 그렇게만 하
면 아무 일없을 거예요! 이제 까진 별의별 짓을 다 하고도 태연했는데 이번엔
왜 그렇게 겁을 내는지 모르겠군요."
"나는 이젠 틀렸어. 그놈이 이겼어."
아내는 더욱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놈이 '이겼다 이겼다'하시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보다 어서 가서 농민들
을 돌려보내세요. 그럼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거예요. 자, 가셔요. 제가 나가서 말
에 안장을 놓으라고 하겠어요."
말이 끌려 나왔고, 마름의 아내는 남편을 타일러 지금부터 들에 나가 농민들
을 집으로 돌려보내게 했습니다.
미하일 쎄묘니치는 말을 타고 들에 나갔습니다. 마을 어귀에 이르자 어떤 아
낙네가 마을 문을 열어 주어서 그는 마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마름
의 모습을 보기가 무섭게 어떤 사람은 뒤꼍으로, 어떤 사람은 집 모퉁이로, 어떤
사람은 채마밭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마름은 마을을 다 지나, 나가는 문에 이르렀습니다. 문이 닫혀 있어서 말에 올
라앉은 채로는 문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문 열어라, 문 열어라." 하고 마름이
소리쳤지만 아무도 달려나와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말에서 내려 손
수 문을 열고 다시 말을 타려고 발걸이에 한쪽 발을 걸고 몸을 올리는 순간, 달
려나온 돼지에 놀라 말은 옆의 울타리에 부딪혔습니다. 마름은 뚱뚱했으므로 안
장에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말에서 덜어져 울타리에 부딪혔습니다. 그 울타리
에 한쪽 끝이 뾰족하고 길게 튀어나온 말목이 있었는데 마름의 뚱뚱한 배는 그
말목 끝에 꽂히고 말았습니다. 마름은 배가 찢어지면서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농군들이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문 앞에 다다르자 말이 콧김을 불어대며
문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쎄묘니치가 벌렁 자빠져 있
었습니다 두 팔은 좌우로 벌리고 눈은 부릅뜨고있었으며 창자는 땅바닥에 흘러
나오고 피가 괴어 괴어 웅덩이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땅이 그의 피를 빨아들여
주지 않았던 때문입니다.
농군들이 깜짝 놀라 뒷길로 말을 몰아 달아나 버렸습니다. 다만 미혜예프만이
말에서 내려 그 옆으로 가 마름이 죽은 것을 보고 그의 눈을 감겨 주고 짐수레
에 말을 매어 아들과 함께 그의 시체를 실은 다음 지주의 집으로 갔습니다.
지주는 모든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농민들에게 부역을 시키지 않고 소작료만
받도록 했습니다.
농민들도 하느님의 힘은 악은 악으로 갚는데 있지 않고 착한 일 가운데 있다
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리야스
우파 현에 이리야스라는 바쉬끼르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일리야스는 아버
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장가보낸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일리야스의 재산은 암말 일곱 마리, 암소 두 마리
그리고 양 스무 마리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리야스는 집안의 주인이었으므로
아내와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 일했습니다. 남보다 일찍 일어나고 남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면서 열심히 일한 덕분에 그의 재산은 해마다 불어났습니다.
이렇게 30년을 열심히 일하며 살아오는 동안 그의 재산은 꽤 많이 모이게 되었
습니다.
지금 일리야스는 말 200마리, 소 150마리, 양 1500마리를 소유하게 되었습니
다. 남자 일꾼들은 일리야스의 가축들을 치고, 여자 일꾼들은 소와 말의 젖을 짜
서 우유 술이나 치즈와 버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지금 일리야스의 집에는 없
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주위 사람들은 모두 일리야스의 생활을 부러워하
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리야스는 행복한 사람이야. 그 사람은 없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게 억울
할 거야."
이렇게 잘살게 되자 훌룡한 사람들도 일리야스를 알게 되고 그와 친하게 지냈
습니다. 심지어 멀리서부터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일리야스는 어떤 손
님이나 마다 않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대접하였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누구
든 마유와 차, 생선 수프와 양고기를 내놓았습니다. 손님이 적을 때는 양 한두
마리만 잡고 많을 때는 암말까지 잡는 것이었습니다.
일리야스는 슬하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모두 시집,
장가를 보냈습니다. 일리야스가 가난했을 때는 아들도 아버지와 같이 일하며 손
수 말이나 양을 돌보았으나, 부자가 되자 빈둥거리며 한 놈은 술을 마시기 시작
했습니다. 결국 큰놈은 싸움질하다 맞아 죽었고, 작은놈은 콧대 높은 마누라를
만나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리야스는 하는 수 없어 아들에게
살림을 따로 내주었습니다.
아들에게 집과 가축을 주어 딴살림을 내보내자 일리야스의 재산은 줄어들었습
니다. 그후 얼마 안 있어 양들마저 병에 걸려 많이 죽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또
흉년이 들어서 먹을 풀을 마련하지 못해 겨울에 또 많은 가축들이 굶어 죽었습
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말들을 끼르기즈 사람들에게 빼앗겨 일리야스의 재산은
더욱 줄어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일리야스네 집안은 점점 기울어지고 힘도 약
해졌습니다 그래서 일흔이 되자 일리야스는 털외투와 양탄자, 말 안장, 마차를
하나씩 팔아먹다가, 결국엔 마지막 남은 가축까지 다 팔아먹고 말았으므로 이제
0 빈털터리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일리야스 자신도 자기가 왜 이렇게 빈털터
리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그막에 아내와 같이 남의 집에 일을 하러 가지 않으면 안되었
습니다. 지금 일리야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몸에 걸친 옷과 털외투, 모자, 침실
에서 신는 장화와 구두, 그리고 역시 늙은 아내인 샴 셰마기뿐 이었습니다. 살림
을 따로 차린 아들은 먼 곳으로 가버렸고 딸은 주고 없었습니다. 두 늙은 부부
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웃에 사는 무하메드샤흐가 이들을 불쌍히 생각하였습니다. 무하메드샤흐는
가난뱅이도 부자도 아닌, 그저 보통으로 살아가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
은 예전에 일리야스에게 후한 대접을 받았던 일을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리야스, 우리 집에 오셔서 부인과 같이 사셔요. 여름에는 힘닿는
대로 오이 밭에서 일하고, 겨울에는 짐승들에게 먹이나 주면 돼요. 할머니는 말
젖을 짜서 마유나 만들어 주시고. 그러면 두 분이 먹고 입을 것을 드리겠어요.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셔요. 드리겠어요."
일리야스는 이웃에게 고맙다고 하고 아내와 같이 무하메드샤흐네 집에서 일하
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힘든 것처럼 생각되었으나 좀있으니 익숙해졌습니다.
두 몸 닿는 대로 일하며 살아갔습니다.
주인의 입장으로서는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있는 것이 유리하였습니다. 두 사
람은 얼마 전까지 집안의 주인이었으므로 질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게으름도
피우지 않고 힘껏 일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무하메드샤흐로서는 그렇게 잘
살던 사람들이 이렇게 밑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것을 보기가 딱했을 뿐입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무하메드샤흐네 집에 멀리 사는 친척들이 놀
러 왔습니다. 회교의 승려도 왔습니다. 무하메드샤흐는 양을 한 마리 잡으라고
했습니다. 일리야스는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빼낸 다음 양을 구워 손님에게 내
놓았습니다. 손님들은 양고기를 먹고 차를 마시고 마유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
렇게 손님들은 주인과 같이 양탄자에 깔아놓은 깃털 방석 위에 앉아 컵의 마유
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이릴야스가 일을 마치고 문 앞을
지나갔습니다. 무하메드샤흐는 그를 보고 한 손님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문 앞으로 지나간 노인을 보셨습니까?"
"예, 봤습니다. 그런데 저 노인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손님이 말했습니다.
"우리 고장에서 제일 가는 부자였지요. 일리야스라는 이름을 혹 들어 본 적이
있나요?"
"그러믄요. 만나 본 적은없지만, 그 사람 소문은 멀리까지 퍼졌지요."
"그런데 그 일리야스가 지금은 빈털터리가 되어 우리 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부인도 같이 말 젖을 짜고있지요."
손님은 놀라서 혀를 찼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행복이란 수레바퀴처럼 도는가 보군요.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려가
는 사람도 있으니. 어떻습니까, 노인은 지금 괴로움에 잠겨 있겠지요?"
손님이 말했습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마는 조용히 말썽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일도 잘하고요."
그러자 손님이 말했습니다.
"그 노인과 얘기 좀 할 수 있을 까요? 어떻게 지내는지 좀 물어 보고 싶군요."
"뭐 그러시죠."
주인은 이렇게 말하고 뒤켠으로 소리쳤습니다.
"할아버지, 이리 와서 마유나 한잔 드셔요. 할머니도 오시라고 하셔요."
일리야스는 아내와 같이 들어왔습니다. 일리야스는 손님과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기도를 드린 후 옆에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아내는 커튼 뒤로 가
서 안주인 곁에 앉았습니다.
일리야스에게 마유잔이 왔습니다. 일리야스는 손님과 주인에게 고맙다고 절하
고 조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떠셔요, 할아버지?" 하고 한 손님이 말했습니다.
"우리를 보니 옛날에 잘살던 생각이 나시죠? 아마 따분하실 거예요. 그렇게
행복하게 지내다가 지금 괴로운 생활을 하니 어떻습니까?"
일리야스는 싱긋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행복과 불행에 대해 말한다 해도 당신은 믿지 않으실 것입니다. 차라리
제 아내에게 물어 보십시오. 아내는 여자여서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할 것입
니다. 말하자면 이런 생활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말해 줄 거예요."
그러자 손님은 커튼 저편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어떻습니까, 할머니? 옛날의 행복과 지금의 슬픈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셔요?"
샴 셰마기가 커튼 뒤에서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영감하고 50년을 같이 살아오면서 행복을 찾으려
고 애썼으나 못 찾았어요. 그런데 빈털터리로 남의집살이를 시작한 지 두 해째
되는 지금에야 우리는 진짜 행복을 찾아냈어요. 이제 우리에게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손님도 놀라고, 주인도 놀랐습니다. 그래서 손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파를 보
려고 커튼까지 열어 젖혔습니다.
그러나 노파는 팔짱을 끼고 서서 남편을 보고 싱긋이 웃고 있었습니다. 남편도
웃었습니다. 노파는 다시 말했습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지난 50년 동안 우리는 행복을 찾으려고 했
습니다마는 잘살 때는 그걸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 빈털터리로 남의 집살이를
하게 된 지금에야 행복을 찾았어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지금 당신들의 행복이란 대체 어떤 것입니까?"
"그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부자였을 때는 나와 영감은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없었어요. 얘기할 시간도 없었고, 영혼을 생각하고 하느님에게 기도할 시간조
차 없었어요. 그만큼 우리에겐 걱정거리가 많았었죠! 손님이 오면 실례가 되지
않게 무엇을 대접해야 할까, 무엇을 선물해야 할까 걱정이고, 손님이 떠나면 또
일꾼들을 살펴봐야만 해요. 그들은 틈만 나면 놀고 맛있는 것을 먹으려 하지만,
우리는 재산이 없어지지 않도록 눈을 크게 뜨고 보지 않으면 안 돼요. 그래서
죄를 짓게 되는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늑대에게 망아지나 송아지가 잡아먹히지
나 않을 까, 도둑에게 말이 끌려가지 않을까 또 걱정이랍니다. 잠자리에 들어서
도 새끼 양들이 큰 양들에게 짓밟혀 죽지나 않을까,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지요. 그래서 밤중에도 잠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 가보고야 겨우 마음을 놓
게 되지만, 다음순간 겨울에 줄 먹이를 어떻게 장만하나, 또 다른 걱정이 고개를
쳐든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감과 나 사이에도 의견이 잘 맞지 않게 되었어요.
영감이 이렇게 하자면, 나는 저렇게 하자고 서로 다투며 죄를 짓게 되었지요. 지
난날의 생활이란 걱정에서 걱정, 죄에서 죄로 이어지는 생활이었으므로 행복한
삶이라곤 몰랐지요."
"그럼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영감과 티격태격하지 않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둘이서 다툴 일이 없으므로 걱정거리가 없지요. 다만 우리에게
걱정거리가 있다며, 어떻게 하면 주인 양반의 일을 잘해드리나 하는 것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주인 양반께 손해를 끼치지 않고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도
록 힘 닿는 대로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우리에겐 점심도,
저녁도, 마유도 있어요. 추우면 방안을 따뜻하게 만들 땔감도 있고, 털외투도 있
어요. 그뿐만 아니라 둘이서 이야기할 시간도 있고, 영혼을 생각하고 하느님께
기도할 시간도 있어요. 지난 50년 동안 우리가 찾으려던 행복을 이제야 겨우 찾
게 된 셈이지요."
이말을 듣고 손님들이 웃었습니다.
그러자 일리야스가 말했습니다.
"형제들 웃지 마십시오. 이건 농담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말한 것입니다. 아내
와 나는 옛날에 바보였기 때문에 재산을 잃고 울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
금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이
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자 회교의 승려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말입니다. 일리야스의 말은 모두 참된 진리의 말입니
다. 이 말은 성서에도 씌어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손님들은 웃음을 그치고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두 형제와 금화
옛날 옛날에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의
이름은 아파나시였고 동생의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 두 형제는 읍내에서 멀지
않은 산속에 살면서 사람들이 주는 것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형제는 노동으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일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일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일에 시달린 사람들과 병자, 고아와 과부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 일
을 해주고 품삯도 받지 않은 채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두 형제는 일주일
동안 떨어져서 일하다가 토요일 저녁에야 집으로 돌아와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만은 바깥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기도와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습
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의 천사도 이들에게 내려와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다
가 월요일이 되면 다시 제 갈 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이렇게 여러 해를 지내는
동안에도 천사는 매주 이들을 찾아와 축복해 주었습니다.
어느 월요일이었습니다. 형제는 집을 나와 제각기 자기 일터로 떠났습니다. 그
러나 아파나시는 사랑하는 동생과 헤어지기 섭섭하여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
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머리를 숙이고 제 갈 길만 걸어갈 뿐 뒤돌아보려고도 하
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요한도 걸음을 멈추고 무엇을 발견한 듯 저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후 요한은 그리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더니 갑자
기 옆으로 물러나며 뒤돌아보지도 않고 산 아래로 막 뛰어내려 갔습니다. 그러
다가 이번엔 맹수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산밑에서 산 위로 뛰어올라 갔습니다.
아파나시는 웬일인가 싶어 그쪽으로 되돌아가 보았습니다. 동생을 그렇게 놀라
게 했던 것이 무엇인가 알아보기 위해서 였습니다. 가까이 가자 무엇인가가 햇
볕에 반짝이는 것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다가가 보니, 풀숲에 금화가 잔뜩 떨어
져 있었습니다. 두 아름은 될 것 같았습니다. 아파나시는 동생이 금화를 보고 도
망쳤다는 사실에 한층 더 놀랐습니다.
'동생은 어째서 그렇게 놀랐으며 무엇 때문에 도망을 쳤을까?'하고 아파나시는
생각했습니다.
'금화에 무슨 죄가 있어, 사람에게 죄가 있지. 금화는 나쁜 일을 만들 수도
있고 좋은 일을 만들 수도 있고 좋은 일을 만들 수도 있다. 이 금만 가지면 얼
마나 많은 고아와 과부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고, 얼마나 많은 헐벗은 사람에
게 옷을 입힐 수 있으며, 또 얼마나 많은 병자와 불구자를 고칠 수 있겠는가! 지
금 우리 형제는 남을 위해 일하고 있지만, 그 일이란 우리의 힘이 부족하기 때
문에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금만 있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도
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아파나시는 그것을 동생에게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
한은 불러도 들리지 않을 먼 곳으로 가버리고, 그 모습만이 작은 벌레처럼 저편
산마루에 보일 뿐이었습니다.
아파나시는 옷을 벗어 자기가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 금화를 싼 뒤 어깨에
메고 읍내로 갔습니다. 읍내의 여인숙에 도착한 아파나시는 가지고 간 금화를
주인에게 맡기고 나머지를 또 가지러 갔습니다. 금화를 다 옮기자, 이번엔 장사
꾼을 찾아가서 읍내의 땅을 샀습니다. 그런 다음 돌과 나무를 사들이고, 일꾼을
얻어 집 세 채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석 달 동안을 읍내에서 지내면서 아파나시는 집 세 채를 다 지었습니
다 한 채는 과부와 고아들을 위한 양육원이고, 또 한 채는 병자와 불구자를 위
한 병원이고, 나머지는 한 채는 순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묵을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아파나시는 믿음이 깊은 세 노인을 골라서 한 분은 양육원에, 한 분은
병원, 또 한 분은 순례자의 집을 보살피도록 했습니다. 그러고도 금화 삼천 냥이
아직 아파나시의 수중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그 돈을 세 노인에게 천 냥씩
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했습니다. 세 채의 집은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은 아파나시가 이룩해 놓은 일을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
을 보고 아파나시도 기분이 좋아 시내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아파나시는 동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들과 작별을 했습니다. 그리고
돈 한푼 없이 읍내로 올 때 입고 온 헌 옷 그대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파나시는 자기가 살던 산 가까이 이르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동생이 금화
를 보고 놀라서 도망쳐 버린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역시 나의 행동이 옳지 않
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갑자기 눈앞에 무엇이 보였습니다. 전에 형제를 축복해
주던 바로 그 천사가 길 앞에 서서 나무라는 눈초리로 아파나시를 바라보고 있
었던 것입니다. 아파나시는 정신을 잃고 "왜 그러십니까, 주여?" 하고 말했을 분
입니다.
천사는 입을 열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떠나라. 너는 동생과 같이 여기서 살 자격이 없다. 네 동생이 금화를
보고 도망친 행동은 네가 금화로 이룩한 일보다 값진 것이다."
그러나 아파나시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과 순례자에게 먹을 것을 주었던 일,
수많은 고아들을 돌보아 주었던 일을 천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말했
습니다.
"그건 너를 유혹하기 위해서 금화를 갖다 놓은 마귀가 너에게 그르쳐 준 말이
다."
그러자 아파나시는 양심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을 위한 길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울면서 뉘우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천사는 옆으로 비켜나며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 길 위엔 형을 기다
리는 요한이 서 있었습니다. 그 후로 아파나시는 금화를 던져 주는 마귀의 유혹
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을 돕는 길은 돈이 아니라 오직
일로서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형제는 그전처럼 일을 하며 살아갔습니다.
두 순례자
그랬더니 그 여자는 "과연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렸는데 선생님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
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
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
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
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오기 때문이
다.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요한의 복음서, 4:19∼24)
1
두 노인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한 사람은 예 따라시치
세벨료프라는 부자 농부였고 다른 한 사람은 엘리세이 보드로프라는 노인이었습
니다.
예핌은 착실한 농부였으며, 술 담배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물론 냄새조차 맡
지 않았습니다. 욕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모든 일에 엄격하고 철저했습
니다. 그는 두 차례나 이장을 지내면서 단 한푼도 모자람이 없이 일을 마쳤습니
다. 두 아들과 장가든 손자까지 있는 많은 식구였지만 모두가 함께 살고 있었습
니다. 그는 아주 건강했으며 턱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르고 있었습니다. 일흔 살인
데도 등도 구부러지지 않고 수염은 이제 겨우 희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세이는 부자도 가난뱅이도 아닌 노인이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목수 일
로 살아왔으나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집에서 꿀벌을 치고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먼 곳으로 돈벌이를 떠났고, 둘째아들이 집일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엘리세이는 마음씨 좋고 명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노래도 잘 불렀으나 워낙 사람이 착해서 집안 식구나 이웃하고도 사이가 좋았습
니다. 그는 짤막한 키에 얼굴빛이 거무스름하고 허약한 몸집의 농부로서 곱슬곱
슬한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같은 이름을 가진 구약의 예언
자 엘리세이와 흡사한 대머리였습니다.
두 노인이 함께 순례를 떠나자고 약속한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습니다. 그러
나 예핌은 늘 바빠서 일이 끝나지를 않았습니다. 한 가지 일이 끝났는가 하면
또 뒤이어 다른 일이 생겼습니다. 손자의 결혼식을 치르고 나면 또 막내가 군에
서 제대해 돌아오고, 거기다 이번엔 새 집을 지을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명절날, 두 노인은 우연히 만나 통나무 위에 나란히 걸터앉았습니다.
"어때? 이젠 성지 순례를 떠날 때가 되지 않았나?" 하고 엘리세이가 말했습니
다.
"아니, 좀더 기다려 주게. 올해는 모든 일이 제대로 되지를 않아. 집을 짓기 시
작할 때는 그저 백 루블 정도로 충분할 줄 알았는데, 벌써 삼백 루블이나 들였
는데도 아직 멀었어. 아무래도 여름까지 끌 것 같아. 글세 주님의 뜻이라면 요번
여름엔 떠날 수 있겠지."
"내 생각으로는,"하고 엘리세이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자꾸 미루는 건 좋지
않다고 보네. 결심을 하고 떠나야지. 봄철이라 지금이 가장 좋을 때이고……"
"때는 좋지만 일단 시작한 일을 그냥 두고 떠날 수야 있나?"
"아니, 자네 집에는 일 맡길 사람이 그렇게도 없나? 아들이 다 알아서 할 텐데
뭘 그러나?"
"알긴 뭘 알아! 큰 자식놈이라고 어디 믿을 수가 있어야지. 틀림없이 엉뚱한
일을 벌여 놓을 거야."
"아니야, 어차피 우리가 먼저 죽을 건데 우리가 떠나도 남은 자식이 모두 잘해
나간다구. 자네 아들도 그래. 일은 지금부터 배워서 익혀야지."
"그건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다 짓는 걸 내 눈으로 보고 싶단 말이야."
"아이구, 난 모르겠네! 이런저런 일들을 모두 끝내자면 한이 없지. 아무렴 한
이 없고 말고. 바로 조금 전에도 명절이 가까웠다고 우리 집 여자들이 빨래며
집안 치우기며 이런 일 저런 일로 아주 난리가 났었다네. 그런데 우리 큰며느리
가 참 영리하게도 이런 말을 하더군. '명절날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빨리 다가
오니까 그래도 다행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암만 일을 해도 다끝내지 못할 건데
요.'하고 말이야."
예핌은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그렇지만 집 짓는 일로 돈을 너무 써버렸어. 한푼도 없이 먼 길을 떠날 수도
없고…… 한두 푼 가지곤 어림도 없을 테고…… 그래, 백 루블은 있어야 할 텐
데."
엘리세이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벌받을 소리 말게. 자네 재산은 나보다 열 배나 많으면서 돈걱정을 하다니.
그런 걱정은 말고 언제 떠날지나 생각해 보게. 나는 돈이라곤 한푼도 없지만 그
래도 떠날 때면 어떻게 마련되겠지."
"거참, 대단한 부잔데. 어디서 어떻게 마련할 셈이지?"
예핌은 웃으며 물었습니다.
"난 집안에 있는 돈을 모두 긁어 모을 작정이네. 그래도 모자라면 밖에 통나무
꿀벌 통을 열 개쯤 팔면 될 테지. 옆집에서 전부터 사려고 했으니까 말야."
"팔고 난 뒤 그 벌통에서 꿀이 많이 나오면 속이 상할텐데."
"속이 상한다고? 그런 말은 아예 말게. 이 세상에 속상할 일은 죄짓는 것밖에
없어. 영혼보다 귀중한 것이 어디 있겠나?"
"하긴 그래. 그래도 역시 집일을 잘 정리해 두지 않으면 아무래도 불안해서…
…"
"그런 일보다 더 불안한 것은 영혼을 바로잡지 못하는 일이라네. 어떻든 약속
대로 떠나도록 하세."
2
엘리세이는 이렇게 친구를 설득하였습니다. 예핌은 밤새워 생각한 뒤, 다음날
아침 일찍 엘리세이를 찾아왔습니다.
"자네 말이 맞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뜻일세. 살아서 기운 있
을 때 순례를 떠나기로 하세." 하고 예핌은 말했습니다.
일주일 동안에 두 노인은 떠날 채비를 끝냈습니다.
예핌은 저축한 돈이 많았습니다. 그는 여비로 백 루블은 자기가 지니고, 늙은
아내에게 2백 루블을 맡겼습니다.
엘리세이도 채비를 했습니다. 밖에 늘어놓은 통나무 꿀통 중 열 개를 옆집에
팔고, 또 거기서 생기는 애벌도 함께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70루블의 돈
을 마련했습니다. 부족한 30루블은 온 집안 식구들에게서 긁어 모았습니다. 늙은
아내는 죽을 때를 위해 모아 둔 돈을 모두 털어놓았고, 며느리도 비상금을 내놓
았습니다.
예핌 따라시치는 맏아들에게 집일을 모두 맡겼습니다. 풀은 어디서 얼마 정도
를 베어야 하고, 거름은 어디로 나를 것이며, 새 집 일은 어떻게 끝내야 하고,
지붕은 어떤 모양으로 올릴 것인지, 집안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시했습
니다.
그러나 엘리세이는 팔아 버린 통나무 꿀통에서 깐 애벌은 따로 모아서 그대로
옆집 주인에게 주라고 아내에게 말했을 뿐입니다. 집일에 관한 것은 아무 지시
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그 일을 맡게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며, 너희들도 주인이니 자기가 할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라는 식이
었습니다.
두 노인은 채비를 끝냈습니다. 식구들은 과자도 굽고 자루도 만들고, 다리싸개
를 새로 마름질하고 농부화도 새로 만들었습니다. 갈아 신을 나막신까지도 준비
한 노인들은 드디어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식구들이 동구 밖까지 나와 전송
하고 두 노인은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엘리세이는 마음이 들떠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는 마을에서 점점 멀어
지자 집일 따위는 까마득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그저 여행하는 동안 친구와
잘 지내자, 아무에게도 싫은 말은 하지 말자, 아무 사고 없이 기분 좋게 목적지
에 도착하고 또 집을 돌아오자, 이런 생각으로만 꽉 차 있었습니다. 엘리세이는
입 속으로 기도문을 외거나 자기가 알고 있는 성인의 일생을 생각하며 길을 걸
었습니다. 도중에서 만나는 동행에게나 여인숙에 들어서도 남에게 친절히 대하
기로 마음먹고 항상 하느님의 뜻에 맞는 말만을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걸어가면
서도 아주 기분이 좋았는데, 오직 한 가지만은 엘리세이로서도 어쩔 수 없었습
니다. 코담배를 끊겠다고 굳게 결심하여 쌈지를 집에 두고 떠났는데 그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마침 도중에 어느 사람한테서 얻은 것이 있어 친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이따금 슬그머니 뒤쳐져 코담배 냄새를 맡곤 했습니다.
예핌 따라시치도 기분이 좋은 듯 활기차게 걸었습니다. 나쁜 짓이라곤 전혀
하지 않았으며 한마디도 쓸데없이 지껄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편
안하지 못했습니다. 집일이 항상 마음에 걸렸습니다. 집안 일은 어떻게 되어 가
나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뭔가 아들에게 지시할 것을 빠뜨리지는 않았는지, 아들
은 저렇게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만 당장 집에 돌아가 자기 손으로
모든 일을 해 버렸으면 하는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3
두 노인은 계속 다섯 주일을 걸었습니다. 집에서 신고 온 나막신도 다 떨어져
서 새로 사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그들은 소러시아 지방까지 갔습니다.
집을 떠나니 잠자는 것도 먹는 것도 모두 돈을 내야 했는데, 이 지방에 들어서
니 모두들 다투어 두 노인을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재워 주고 잘 먹여 준 뒤
돈도 받지 않았고, 거기다 가는 도중 먹으라고 빵과 과자를 자루 속에 넣어 주
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두 노인은 별 어려움 없이 7백 베르스따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다시
고을을 지나서 흉년이 든 지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지방에서는 잠은 그냥
재워 줬지만 먹을 것은 하나도 주지 않았습니다. 어디 가도 빵은 주지 않았고
어떤 때는 돈을 주고도 빵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지난해에
심한 흉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가진 물건들을
팔아 버리고, 중류층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으며, 가난한 사람은 딴 지방으
로 떠나든지 구걸을 하든지, 아니면 마을에서 근근히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형편이라고 했습니다. 밀기울과 명아주로 끼니를 이으면서 겨울을 보냈다는 것
입니다.
어느 날 두 노인은 작은 마을에서 빵을 열 다섯 근쯤 사고 하룻밤을 묵은 뒤,
새벽 일찍이 길을 떠났습니다. 더워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려는 생각
이었습니다.
10베르스따쯤 걸은 뒤에 어떤 시냇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다리를 펴고
앉아 컵으로 물을 떠서 빵을 축여 가며 배부르게 먹은 뒤 나막신을 갈아 신었습
니다. 한참 동안 앉아서 쉬는 사이에 엘리세이는 담배쌈지를 꺼냈습니다. 그것을
보고 예핌은 머리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어째서 그 나쁜 버릇을 모 버리나!"
엘리세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손을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죄에 빠져 버렸네. 어쩔 수가 없어."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10베르스따 정도 더 가자 큼 마
을이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마을을 다 지났을 때는 벌써 햇볕이 너무나 뜨거워져 있었습니다. 엘리세이
는 너무나 피곤하여 잠깐 쉬면서 물이라도 한 그릇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핌은 쉬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핌은 잘 걸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세이는 그와
함께 걷는 일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물 좀 마셨으면 좋겠어."
"마시게. 나는 괜찮아."
"그럼 자네 먼저 가게. 나는 저 집에 가서 물 좀 얻어 마시고 뒤쫓아갈 테니."
하고 엘리세이는 발길을 멈추고 예핌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게."
예핌은 혼자 신작로를 걸어가고, 엘리세이는 농가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엘리세이가 농가 가까이 가보니 석회칠을 한 작은 집이 있었습니다. 위쪽은
희고 아래쪽은 검은 집이었는데 칠도 벗겨지고 지붕도 한쪽이 허물어지고 없었
습니다. 아마 오랫동안 집을 손보지 못한 모양입니다. 뒷문 쪽에 입구가 나 있어
엘리세이는 뒷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담장 밑에 쓰러져 있는 한 남자가 보
였습니다. 턱수염도 없는 바싹 마른 사나이는 소러시아식으로 셔츠 자락을 바지
속에 넣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마 처음엔 시원한 그늘 밑을 찾아 누웠던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지금은 햇볕이 바로 위에서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누운 채 잠들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엘리세이는 물 좀 마실 수
없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병에라도 걸렸든지 아니면 꽤 무뚝뚝한 사람인 모양이다, 엘리세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때 집안에서 어린애 울음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엘리세이는 문고리쇠로 덜
컹덜컹 소리를 내면서 "실례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었
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말해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그래도 역시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엘리세이가 막 돌아
서려 할 때 문 앞에서 누군가의 신음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무슨 불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 한번 알아보고 떠나야지.'
엘리세이는 집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4
엘리세이가 손잡이를 돌려 보니 문은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문을 열고 복도
에 들어서니 방으로 통한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오른쪽에 난로가 있었고, 곧바
로 보이는 쪽이 상좌였습니다. 그 구석에는 성상과 탁자가 놓여 있고 탁자 맞은
편에 걸상이 있었습니다. 걸상에는 속옷만 입은 할머니가 머리에 두건도 쓰지
않고 앉아서 머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너무 말라서 배
만 커다랗고 얼굴이 밀랍처럼 창백한 남자애가 앉아서 할머니의 옷소매를 잡아
당기며 무언가 조르고 있었습니다.
엘리세이가 방안으로 들어가자 숨이 막힐 듯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난로 저쪽 마룻바닥 위에 한 여자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쪽을 보려
고도 하지 않고 엎어져서 단지 가래 끓는 소리만 내며 한쪽 다리를 폈다 오므렸
다 하고 있었습니다. 몸에서는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를 풍기며 이리저리 뒤척
이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대소변을 못 가리는 모양인데 아마
도 뒤처리를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문득 눈을 뜨고
이 낯선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무슨 일로 왔어요? 무엇이 필요해서 왔어요? 무엇이 필요해
서 왔어요? 누군지 모르지만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다오……"
엘리세이는 그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습니다.
"할머니, 물을 좀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했잖소. 물 떠올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직접 가서 떠마시도
록 해요"
"할머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 집엔 건강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모양이지요?
이 아주머니를 돌볼 사람도?"하고 엘리세이가 물었습니다.
"아무도, 아무도 없소. 뒷문 쪽으로 한 사람이 죽어가고 우리도 여기서 이렇
게……"
낯선 사람을 보자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내아이는 할머니가 말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소매를 집적거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빵 줘. 할머니, 빵줘!"
엘리세이가 할머니에게 또 말을 물으려고 하는데 밖에 있던 남자가 비틀거리
며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벽을 짚고 걸어가 의자에 앉으려 했으나 그러
지도 못하고 문 근처의 한 구석에 기대듯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말 한마디하
고는 쉬고, 도 한마디하고는 숨을 몰아쉬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전염병에 걸렸어요. 거기다 흉년까지 들어서…… 저 애도 배가 고파 다 죽게
됐어요!" 하고 그는 턱으로 사내아이를 가리키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세이는 등에 지고 있는 자루를 치켜 올려 멜빵에서 두 팔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자루를 내려서 걸상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끌렀습니다. 그리고 자루를
열고 빵과 나이프를 꺼내서 농부에게 한 조각 잘라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빵을
받지 않고 사내아이와 여자 쪽을 가리켰습니다. 그들에게 주라는 뜻입니다. 엘
리세이는 사내아이에게 주었습니다. 빵을 본 사내아이는 몸을 뻗쳐 두손으로 빵
을 움켜쥐고는 거기에 코와 입을 처박았습니다.
그러자 난로 구석에서 한 계집애가 기어나와 빵을 뚫어지듯이 쳐다보았습니
다. 엘리세이는 그 애한테도 한 조각을 줬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도 한 조각
잘라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물을 한 그릇 떠다 주면 고맙겠는데, 우린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라오. 어젠
지 오늘인지 내가 물을 길러 갔었지요. 그런데 떠오지도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오. 누가 가져가지 않았다면, 물통이 거기 그냥 있을텐데……" 하고 할머니는 말
했습니다.
엘리세이는 우물이 어딘지를 물었습니다. 할머니가 자세히 일러준 대로 가자
물통이 있었습니다. 물을 길어서 모두에게 마시도록 하였습니다. 할머니와 아이
들은 물과 빵을 먹였지만 남자는 먹으려 하지 않고 "속이 영 좋지를 않다,"고 말
했습니다. 여자는 몸을 일으키려고도 않고 정신없이 그냥 그 자리에 쓰러져 몸
부림만 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엘리세이는 마을의 가게로 가서 옥수수와 소금, 밀가루, 버터를 사왔습니다.
그리고 도끼로 장작을 패 난로에 불을 지폈습니다. 계집아이가 도와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엘리세이는 수프와 죽을 끓여 모두에게 먹였습니다.
5
주인 남자도 조금 먹었고 할머니도 먹었습니다. 계집아이와 사내아이는 그릇
바닥까지 깨끗이 핥아먹고 난 뒤 서로 껴안고 잠들어 버렸습니다. 농부와 할머
니는 이렇게 된 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가난하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살아왔어요. 그런데 지난 흉년
으로 추수한 것이 없어서 가을부터는 남았던 양식으로 연명했지요. 나중엔 그것
도 떨어져 이웃과 친절한 분들의 도움을 받았답니다. 처음엔 더러 꾸어 주기도
했지만 차차 거절을 당하게 됐지요. 어떤 사람은 꾸어 주고 싶긴 하지만 아무것
도 없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더군요. 한두 번도 아니고 저희도 자꾸 그러기가
너무 민망스러웠어요., 이곳 저곳에서 돈과 밀가루, 빵을 꾸었으니 말입니다. "
농부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나는 일을 찾아 나섰지만 어디 일자리가 있어야 하지요. 생계를 위해 모두들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형편이었습니다. 어쩌다 하루 일하면 그 다음 이틀은 일자
리를 찾아 헤매고 다녀야 했어요. 그래서 할머니와 계집애가 이웃마을로 동냥을
갔지만 누구나 다 빵이 없으니 제대로 먹을 걸 얻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도 굶
어 죽지는 않을 정도로 입에 풀칠을 했습니다. 그런 대로 햇보리가 날 때까지
견뎌 보자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봄이 되자 아무도 동냥을 주지 않았어요. 거
기다 이렇게 열병까지 번지더군요. 점점 더 형편이 나빠져 하루 먹으면 이틀은
굶게끔 됐습니다. 나중에는 풀까지 뜯어먹게 되었지요. 그 풀이 잘못인지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아내가 병에 걸려 쓰러졌어요. 아내는 앓아 누웠고
나도 힘이 다빠져 버렸으니 앞일이 암담합니다. "
농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나도 먹고살려고 안간힘을 다해봤어요. 이젠 힘도 없고 너무 지쳐서 주저앉아
버렸지요. 손녀딸도 몸이 너무 약해졌고 거기다 겁까지 먹어 가까운 데 심부름
을 시켜도 가질 않으려 해요. 꼼짝도 않고 구석에만 박혀 있지요. 엊그제 무슨
볼일이 있는지 이웃 아주머니가 찾아 왔다가 모두 굶주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
고는 깜짝 놀라 도로 나가 버리더군요. 그럴 만도 하지요. 그 아주머니도 남편은
도망쳐 버리고 어린아이들과 도망쳐 버리고 어린아이들과 굶는 형편이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죽을 날만 기다리며 누워 있는 참이라오."
엘리세이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친구를 따라갈 생각을 치우고 그
날부터 그 집에 머물렀습니다. 다음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자, 엘리세이는 자기
가 이집 주인이나 되듯 집안 일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밀가루
반죽을 하고 난로에 불을 지폈습니다. 또 계집아이와 함께 근처를 돌아다니며
쓸 만한 물건을 찾아보았습니다. 이것저것 골라 보아도 쓸 만한 것이라곤 하나
도 없었습니다. 모두 먹을 것과 바꾸어 버렸던 것입니다. 연장도 없고 걸칠 옷마
저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세이는 꼭 필요한 물건을 마련하기 시작
했습니다. 자기가 직접 만들기도 하였고 밖에 나가 사온 것도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엘리세이는 하루, 이틀, 사흘을 보냈습니다. 사내아이는 건강을 회복
하여 가게로 심부름도 다니며 엘리세이를 무척 따랐습니다. 계집아이도 퍽 명랑
해졌습니다. 무슨 일이나 거들려고 하였고 항상"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며 엘리
세이의 뒤를 따라 다녔습니다 할머니도 일어나 이웃집으로 나다닐 수 있게 되었
습니다. 주인남자도 벽을 짚고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직 그의 아내
만은 아직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도 사흘째가 되자 정신을 차
리고 뭔가 좀 먹고 싶어했습니다. 엘리세이는 그제야 비로소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는걸. 이젠 그만 길을 떠나야겠군.'하고 생각하였습니다.
6
나흘째 되는 날은 바로 축제일 하루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세이는 그들과
같이 전야를 축하하고 선물을 좀 사준 뒤, 저녁나절에 떠나도록 하자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엘리세이는 다시 마을에 가서 우유와 밀가루와 기름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엔 교회의 기도식에 참례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집으로 돌아와서
그들과 같이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날은 여자도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을
슬슬 거닐기 시작했습니다. 주인 남자도 수염을 깎고, 할머니가 빨아 준 셔츠로
깨끗이 갈아입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을의 잘사는 농부를 찾아갔습니다. 이 농
부에게 밭과 풀밭을 저당 잡혔기 때문에 햇보리가 날 때까지 그 밭과 풀밭을 좀
쓰게 해 달라고 간청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녁 무렵에 어깨가 축 처져서 돌아
온 남자는 눈물을 흘렀습니다. 잘사는 농부가 사정도 봐주지 않고 돈을 가지고
오라 했다는 것입니다.
엘리세이는 다시 생각에 잠기며 중얼거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딴 사람들이 모두 풀 베러 갈 때 이 사람들은 멍하니 그냥 있어
야 한다. 풀밭이 저당 잡혔으니까. 남들은 쌀보리가 익을 때면 추수를 할 텐데
(정말 잘 영글었더군 ! ) 이 사람들에겐 아무 기쁨도 없겠구나. 밭을 부잣집에
팔아 버렸으니. 내가 이대로 가버린다면 이 사람들은 다시 전처럼 길에서 헤매
게 될 것이다. '엘리세이는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켜 그날 저녁때도 출발을 못하
고 다음날 아침에 길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밖에서 기도를 드린 뒤 자리에 누웠
지만 잠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 동안 돈도 시간도 너무 써버려 이제는 그만
떠나야 하는데도 이 집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도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처음엔 물이나 떠 주고 빵이나 한 조각씩 주고
떠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돼 버렸구나. 이제는 풀밭과 밭을 찾아 주어야만 하
게 되었다. 밭을 찾아 주고나면 그 다음엔 애들에게 먹일 우유를 위해 젖소를
사주어야 된다. 그리고 주인 남자한테는 보릿단을 나를 말을 사주어야 된다. 그
리고 주인 남자한테는 보릿단을 나를 말을 사주어야 될 것이다. 이봐, 엘리세이,
너는 아주 호되게 걸렸구나. 일을 벌여 놓고는 아주 뒤죽박죽이 됐구!'
엘리세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베개로 썼던 긴 외투를 더듬어 담배쌈지를 꺼냈
습니다. 머릿속을 맑게 하려고 담배를 한줌 쥐었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리 생각
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떠나긴 떠나야 할
텐데 이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는 다시 긴 외투를 둘둘 말
아서 베개로 만들어 드러누웠습니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있는 동안 어느새 닭이 울고 마침내 깊이 잠들어 버렸습
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엘리세이를 부르는 듯했습니다. 어느 틈에 자기가 떠
날 채비를 차리고 잇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루를 등에 지고 손에는 지팡이를 짚
었습니다. 그는 문 밖으로 나가려 했습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어 바로 나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가 막 문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이쪽 울타리에 자루가 걸렸
습니다. 그걸 떼려니까 이번엔 저쪽 울타리에 다리 싸개가 걸려 다 풀어질 형편
이었습니다. 그것을 다시 감으려고 내려다보니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것을 다
시 감으려고 내려다보니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것은 울타리에 걸린 것이 아
니라 계집아이가 다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빵 좀
줘요!"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또 발에는 사내아이가 다리싸개를 계속 붙잡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와 주인 남자는 창문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엘리세
이는 잠에서 깨어나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내일은 밭과 풀밭을 찾아 주어야지 또 말도 사주고 먹을 밀가루도 사고 아이
들에게 우유를 먹일 젖소도 사주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힘들여 바다를 건너
그리스도를 찾아간다 해도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잃게 될 것이다. 살기 어려
운 사람을 돕도록 하자!"
그러고 나서 엘리세이는 아침까지 푹 잤습니다. 아침 일직 일어나서 잘사는
농부를 찾아갔습니다. 돈을 치르고 밭을 도로 찾아 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서 낫을 사왔습니다. (그것까지도 팔아먹었던 것입니다. ) 주인 남자는 풀을 베
도록 풀밭에 보냈습니다. 엘리세이는 마을 농가를 돌아보다가 주막집 주인이 파
는 수레와 말을 흥정해서 샀습니다. 짐수레에 밀가루 한 부대를 사서 싣고, 이번
에는 젖소를 사러 갔습니다. 가는 동안 소러시아 지방의 두 여인들이 뒤를 따라
가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열심히 이야기를 하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소러시
아어로 이야기했지만 엘리세이는 알아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세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그가 누군지 전혀 몰랐대요. 그저 순례자거니 했답니다. 물을 얻어 마
시러 왔다가 그냥 눌러 앉았다는 거예요. 오늘도 그분이 주막집에[서 짐수레와
말을 사가는 것을 봤어요. 이 세상에 그렇게 착한 사람이 있다니, 우리 거기 구
경가지 않겠어요?"
엘리세이는 자기를 칭찬하는 말을 듣고는 젖소를 사지 않기로 하고 주막으로
돌아가서 말 값을 치렀습니다. 수레에 말을 맨 뒤 밀가루를 싣고 돌아왔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말을 세우고 마차에서 내렸습니다.
그 집사람들은 말을 보고 놀랐습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말을 샀을 것이라는
짐작은 했지만 자기네들 입으로 그걸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남자는
문을 열고 "아니, 이 말은 웬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샀다네, 마침 싼 게 있어서. 오늘 밤 잘 먹도록 풀을 좀 넣어 주게. 그리고 이
자루도 좀 내려 주게나."
주인 남자는 말을 풀고 밀가루 부대를 창고에 갖다 넣었습니다. 그리고 풀을
한 아름 베어서 구유에 넣어 주었습니다. 이윽고 모두들 잠을 자러 갔습니다. 엘
리세이는 집 밖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저녁 전에 벌써 자기의 짐을 밖에서 자기
로 했습니다. 저녁 전에 벌써 자기의 짐을 밖에서다 내 놓았던 것입니다.
모두가 잠들자, 엘리세이는 자기의 자루를 짊어지고 나막신을 신은 뒤 긴 외
투를 걸치고 예핌의 뒤를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7
엘리세이가 5베르스따쯤 깠을 때 날이 밝아 왔습니다. 그는 나무 밑에 앉아
자루를 열고 남은 돈을 세어 보았습니다. 17루블 20까뻬이까가 남아 있었습니다.
'가만있자, 이 돈으로는 바다를 건너 긴 여행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주님
의 이름을 팔아 돈을 구걸하기는 싫다. 그러다가 잘못 죄라도 지으면 큰일이야.
예핌이 내 몫까지 촛불을 밝혀 주겠지. 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다시는 성지 순
례를 떠날 수 없을 것 같군. 그러나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살펴보시
니까 틀림없이 용서해 주실거야.'
엘리세이는 자리에서 일어서자 자루를 짊어지고 오던 길을 되돌아 갔습니다.
그 마을을 지날 때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멀리 돌아서 갔습니다. 이리하여
얼마 후에 엘리세이는 집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갈대는 걷기
가 무척 힘들어 예핌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는데 돌아올 때는 마치 하느님이 돕기
라도 하듯 암만 걸어도 지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나들이라도 가는 듯 지팡이
를 휘두르며 걸었습니다. 그래도 하루에 70베르스따씩이나 걸을 수 있었습니다.
엘리세이가 집에 도착했을 때, 마침 식구들은 들일을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집
식구들은 노인이 돌아온 것을 무척 기뻐했습니다 모두들 이것저것 물어 왔습니
다 구경은 잘했는지 왜 예핌과 헤어지게 됐으며, 왜 목적지까지 가지 않았느냐
고 물어 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세이는 별로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주님이 인도해 주시지 않았어 도중에 돈을 잃어버리고, 놓쳐 버렸지. 그
래저래 갈 수가 없었어. 어떻든 내 잘못이니 너무 나무라지는 마라!"
그는 남은 돈을 할멈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세이는 집안 형편을 이것저
것 물어 보았습니다. 모든 일이 다 잘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일은 밀리지 않고
처리되었고, 식구들도 모두 화목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날 예핌의 가족들이 엘리세이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자기네 노인의 소식
을 물으러 왔습니다. 엘리세이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무사히 잘 갔네. 나하고 베드로 축제일 사흘 전에 헤어졌지. 나는
뒤쫓아갈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상하게 되어 돈을 잃어버렸다네. 그래 돈이 모자
랄 것 같아서 그냥 돌아온 거지."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 어리석지도 않은 성실한 사람이 성지 순례를
떠났다가 중간에 돈을 잃어 버리고 돌아오다니, 왜 그렇게 바보짓을 했을까? 하
고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차차 잊혀지게 됐습니다. 엘리세이 자신
도 잊어버리고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겨울을 지낼 땔나무를 장만
하고 아낙네들과 같이 밀을 빻기도 했습니다 창고에 지붕을 새로 올리기도 하고
꿀벌의 월동 준비도 해주었습니다. 꿀벌 통나무 열 개는 새로 깐 애벌과 함께
옆집으로 보냈습니다. 아내는 이미 돈을 받은 통나무에서 애벌이 얼마나 깠는지
속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세이는 어떤 통이 쓸모 없는지, 어떤 통에서 새끼
를 깠는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 무더기가 아니라 열일곱 무더기를
옆집에 줬습니다. 가을일을 다 끝내고 엘리세이는 아들들을 일하러 보냈습니다.
자기는 겨우내 집에서 나막신을 만들거나 꿀통으로 쓸 통나무를 파내면서 나날
을 보냈습니다.
8
엘리세이가 아픈 사람이 있는 농가에 들르던 날, 예핌은 온종일 친구가 오기
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조금 가다가 길가에 앉아서 한참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 푹 자고 나서 다시 친구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습
니다.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보니 벌써 해는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나 엘리세이
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깜박 잠든 새 모르고 그냥 지나친 게 아닐까? 다리가 아파서 남의 짐수
레를 얻어 타고 나를 못 본 체 여기를 지나간 게 아닐까? 그렇지만 못 볼 리가
없는데…… 넓은 벌판이라 눈앞이 훤한걸. 내가 다시 되돌아가면 영감은 앞서
가 버려 더 크게 어긋날 수도 있지. 나도 앞으로 가는 것이 옳아. 여인숙에서 만
날 수 있을 거야.'
다음 마을에 이르자, 그는 이장에게 이러이러한 할아버지가 여기 오면 내가
있는 여인숙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세이는 그 여인숙에
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핌은 다시 앞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러이러한 대머리 영감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보았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핌은 어처구니없어 하며 혼자서 계속 길을
갔습니다.
'그래, 오뎃사 근처에 가면 만나게 될 거야. 배 안에서 만나든지.'
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가는 도중 한 순례자를 만나 동행이 되었습니다. 그는 보통의 법복을 입고 법
모를 썼으며, 머리가 길게 자라 있었습니다. 아토스에 간 적도 있고, 이번이 예
루살렘에 두 번째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여인숙에서 만나 여러 가
지 이야기를 나눈 뒤 동행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오뎃사까지는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두사람은 꼬박 사흘 동안 배를 기
다렸습니다. 순례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숱하게 모여들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예핌은 다시 엘리세이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본 사람은 아무
도 없었습니다.
예핌은 5루블을 내고 외국의 여행 허가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왕복 뱃삯 40
루블을 지불한 뒤 도중에 먹을 빵과 청어를 샀습니다.
이윽고 배는 짐을 싣고 순례자들을 본선에 태웠습니다. 예핌도 그 순례자와
함께 탔습니다.
닻을 끌어올리고 배는 해안을 벗어나 큰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날의 항해는
무사했습니다. 그러나 저녁때부터 바람이 일고 비가 쏟아졌습니다. 배는 몹시 흔
들리기 시작했고 바닷물이 갑판을 휩쓸었습니다. 배 안이 시끄러워지더니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남자 중에도 겁이 많은 사람은 배 안에서 허
둥대며 안전한 장소를 찾느라 야단이었습니다. 예핌도 두렵긴 했지만 겉으로 드
러내지는 않았습니다. 배에 오르자마자 담보프의 농부들과 함께 마룻바닥에 앉
아 있었습니다.
앉은 자세 그대로 그날 밤과 다음날 하루 종일 보냈습니다. 오직 자기 자루만
움켜 쥔 채,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흘째가 되자 겨우 폭풍이 멎었습니다. 닷새째 되는 날 콘스탄티노플에 도착
했습니다. 어떤 순례자들은 땅으로 올라가, 지금은 터키에 점령되어 있는 성 소
피아 대성당을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핌은 땅에 오르지 않고 그대로
배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저 흰 빵만 조금 샀을 뿐입니다.
만 하루를 항구에 머무른 뒤 다시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스미르나
항과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머무른 뒤에 마침내 야파에 도착했습니다.
순례자들은 모두 야퍄에서 내렸습니다. 여기서 70베르스따쯤 걸으면 예루살렘
입니다. 배에서 내릴 때도 위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보트는 계속 흔들리고 있었
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잘못해도 바닷속에 떨어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물에 빠져서 건져냈지만, 어쨌든 무사히 내렸습니다.
배에서 내리자 모두들 걸어서 떠났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점심 녘에 예루살
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변두리에 있는 러시아인 숙소에 여장을 풀고, 여권
뒷면에 도장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 식사를 하고 순례자와 둘이서 성지 순례를
갔습니다. 제일 중요한 그리스도의 관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 대주교 수도
원을 참배했습니다. 참배자들은 모두 안으로 안내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자리는 따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신을 벗은 뒤 둥글게 둘러
앉았습니다. 그때 한 신부가 수건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발을 닦
아주기 시작했습니다. 발을 닦아 준 뒤 입을 맞추고 하면서 그런 식으로 쭉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예핌의 발도 닦아준 다음 입을 맞춰 주었습니다. 밤 기도와
아침 기도로 예배에 참석하였고, 죽은 부모님을 위해 촛불을 올려 미사를 드렸
습니다. 그때 성찬과 포도주가 나와서 먹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이집트의 마리아가 목숨을 건졌다는 암자로 가서 촛불을 바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거기서 아브라함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신을 위해 아들을 찔러 죽이려 했던 사베크의 동산을 보았습니다. 다음엔 그리
스도가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났던 성지와, 주의 형제 야곱의 교회에도 가 보
았습니다. 순례자는 여러 곳을 안내하며 여기선 얼마, 저기선 얼마 하고 돈을 얼
마 정도 바쳐야 하는지 일일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낮이 됐을 때 숙소로 돌아와서 식사를 했습니다. 막 잠자리에 들려고 준비를
하는데 순례자가 앗 하고 놀라며 자기 옷을 여기저기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갑을 도둑맞았다. 틀림없이 23루블 있었는데…… 10루블짜리 두 장하고 잔
돈이 3루블……"
순례자는 화가 나서 떠들어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두들 잠자리
에 누웠습니다.
9
예핌도 자리에 누웠지만, 문득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순례자는 돈을 도둑맞았을 리가 없다. 틀림없이 처음부터 돈을 가지고 있
지 않았어. 어느 곳에서도 돈을 바치지 않았으니까. 나한테만 내라고 하고 자기
는 한 번도 낸 적이 없어 오히려 내돈 1루블을 빌려 갔는데.'
이렇게 생각하면서 예핌은 자기 자신을 꾸짖었습니다.
'내가 왜 남을 의심하고 이러지. 남을 의심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야. 이런
쓸데없는 생각은 다시 하지 말자.'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으려니, 다시 순례자가 돈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과 돈지갑을 도둑맞았다고 야단스레 떠들어대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아니야, 돈은 정말 없었어.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연극일 거야.'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부활 대성당에서 거행되는 새벽 미사에 참석하였습니
다. 그곳에는 그리스도의 관이 있었습니다. 순례자는 예핌의 곁에서 잠시도 떠나
지 않고 줄곧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은 성당에 도착했습니다. 러시아인 외에서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터키
인, 시리아인, 이렇게 여러 나라에서 순례자들이 모였습니다. 예핌은 다른 사람
들과 함께 문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신부가 안내를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터키
군인이 지키고 있는 옆을 지나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려져서 기름을 발랐
다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는 굵은 촛불이 아홉 개 켜져 있었습니다. 신
부는 하나하나 설명을 하며 보여 주었습니다. 예핌은 여기서도 촛불을 바쳤습니
다.
다음에는 안내하는 신부의 인도대로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갔습니다. 십자가에
못이 박혀 세워졌던 골고다로 예핌을 안내한 것입니다. 예핌은 거기서도 잠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땅이 지옥까지 갈라졌다는 곳과, 그리스도의 손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혀졌다는 곳도 가 보았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가 아담
의 뼈를 적시었다는 아담의 관도 보았습니다.
그 다음엔 그리스도가 가시관을 쓸 때 앉았다는 바위와, 그리스도가 채찍질
당할 때 묶여졌던 기둥에도 가 보았습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의 발에 채워졌던
구멍이 두 개 뚫린 돌도 보았습니다. 안내하는 신부는 그 외의 다른 곳도 보여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재촉을 받아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는 동
굴로 따라 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지금 다른 교파의 의식이 끝나고, 러시아 정교
의 기도식이 막 시작되려는 때였습니다.
예핌은 어떻게 하든지 순례자와 헤어지고 싶었습니다. 줄곧 죄가 되는 의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례자는 좀처럼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
스도 관앞에서 드리는 기도식에도 함께 참석했습니다. 두 사람은 조금이라도 관
가까이에 서려 했지만 때가 너무 늦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꽉 차 있어서 앞으
로든 뒤로든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핌은 가만히 선 채로 앞을 보며 기도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지갑에 신경이 쓰여 더듬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핌은 마음이 두 갈래였습니다.
하나는 순례자가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고, 또 하나는 만약 정말 도둑맞
았다면 제발 자기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10
예핌은 이렇게 선 채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관이 있는 회
당 앞에서 타고있는 36개의 성화를 바라보았습니다. 예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
고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상스러운 일이 일어났습
니다! 성화가 타고 있는 등불 바로 밑 맨 앞자리에, 값싼 농부의 작업 외투를 입
고 몸집이 작은 노인이 보였습니다. 그 노인은 엘리세이를 꼭 닮은 대머리였습
니다.
'아니, 엘리세이가 아닌가? 그렇지만 그럴 리가 없어. 저 영감이 나보다 먼저
여기 왔을 리가 없지. 앞의 배는 일주일 먼저 떠났는데, 저 친구가 나를 앞서 왔
을 리가 없어. 또 우리가 탔던 배에도 없었는데. 난 순례자들을 샅샅이 살펴보았
으니까.' 하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예핌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작은 노인은
기도를 시작했고 머리를 세 번 숙였습니다. 한 번은 맞은 편의 상단을 향해 절
하고, 다음엔 양옆에 있는 러시아 정교 사람들을 향하여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노인이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때 예핌은 분명하게 그 얼굴을 알아보
았습니다. 역시 그였습니다. 틀림없는 엘리세이였습니다. 가무스름하고 곱슬한
턱수염, 희끗희끗한 구레나룻, 눈썹, 눈, 코, 모든 모습이 꼭 엘리세이였습니다.
엘리세이 보드로프가 틀림없었습니다.
예핌은 친구를 찾아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자기보다 먼저
여기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보드로프 이친구, 어떻게 앞으로 잘도 나갔군! 아마 어떤 재주 있는 사람을
만나 안내를 받았을 게다. 그렇지. 나가는 곳에서 저 영감을 만나야지. 법복 입
은 순례자를 따돌리고 난 뒤, 이제 저 친구와 함께 다니면 되겠군. 그렇게 된다
면 아마 나도 앞자리로 갈 수 있을 것이다.'하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핌이 혹시 엘리세이를 놓칠까 봐 줄곧 그쪽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기도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입맞추기
위해 밀고 당기고 하다가, 예핌은 옆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잘
못하면 지갑을 도둑맞게 될 것 같은 걱정이 와락 생겼습니다. 예핌은 지갑을 한
손으로 꽉잡고 사람들이 좀 적은 곳으로 헤치고 나갔습니다.
겨우 덜 복잡한 곳으로 나와서 엘리세이를 찾으려고 그 부근을 마구 돌아다녔
습니다. 대성당 안에 이쪽저쪽으로 있는 암실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많이 보
였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도시락도 먹고 마실 것도 마시며 책을 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세이는 어떤 곳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핌은 숙소에
돌아가 보았지만 그곳에도 엘리세이는 없었습니다. 그날 밤 동행했던 순례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내 1루블을 돌려주지 않고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
고 말았습니다. 예핌은 외토리가 된 것입니다.
다음날 예핌은 담보프에서 온 노인과 함께 다시 그리스도의 관에 경배드리러
갔습니다. 그 노인은 배 안에서 동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앞쪽으로 나가려
했지만 이번에도 사람들에게 밀려나 버렸습니다. 그는 기둥 옆에 서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문득 앞쪽을 보니까 이번에도 역시 제일 앞인, 성화 밑의 그리스도
관 옆에 엘리세이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제단 옆에서 신부처럼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좋아, 이번엔 절대 놓치지 말아야지.'하고 예핌은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막 헤치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겨우 앞자리에 이르고
보니 벌써 엘리세이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셋째 날에도 눈에 제일 잘 띄는 그리스도 관 옆의 특별 상좌에 엘리세이가 있
었습니다. 그는 두 팔을 벌리고 머리 위에 무엇이 보이는 듯 위를 우러러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됐어.'하고 예핌은 생각했습니다.
'이번엔 정말 놓치지 말자. 출구에서 지켜 서 있어야지. 거기라면 놓칠 리 없
어.'
예핌은 밖에서 오랫동안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반나절을 쭉 서 있었지만 끝
내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엘리세이가 없었습니다.
예핌은 여섯 주일 동안 베들레헴에 머물며 성지를 두루 돌아봤습니다. 베들레
헴에도 갔고, 베다니에도, 요단강에도, 그 외 여러곳을 순례했습니다. 또 그리스
도 관옆에서 죽은 뒤에 입는 수의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 다음엔 요단강의 물
을 작은 병에 담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흙을 담고, 성화를 태웠던 초를 얻기
도 했습니다. 여덟 곳에서 연미사에 이름을 써넣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돈
을 다 써 버리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갈 노자만 남겼습니다. 예핌은 귀로에 올랐
습니다. 야파에 도착해서 기선을 타고 오뎃사까지 왔습니다. 거기서부터는 집까
지 줄곧 걸어갔습니다.
11
예핌은 올 때와 꼭 같은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집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또다
시 자기가 집을 떠난 뒤에 집에선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이 되살아났습니다.
'일년이나 지났으니 많이 변했겠지. 한 집안을 일으키는 데는 평생이 걸리지
만, 재산을 없애는 것은 잠깐 사이의 일이야.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들 녀석
은 집일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농사는 봄에 시작했는지? 겨울 동안 소와 말은
무사히 지냈는지? 내가 시킨 대로 새집은 다 지었는지?' 하고 그는 생각하였습
니다.
한참만에 예핌은 지난해 엘리세이와 헤어진 마을 가까이에 왔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지난해와는 전혀 다르게 변해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주 형편이 어려웠
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밭에는 곡식이 무
르익었습니다. 사람들은 넉넉한 생활을 누리며 지난해의 어려움을 잊고 있었습
니다. 저녁 무렵 예핌은 지난해에 엘리세이가 물을 얻으러 갔던 마을에 닿았습
니다. 그가 마을에 들어섰을 때 어떤 집에서 흰 셔츠를 입은 소녀가 달려나왔습
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우리 집에서 쉬고 가셔요!"
예핌은 그대로 지나쳐 가려 했지만 소녀는 소매를 붙들고 생글거리며 마구 집
으로 끌었습니다.
문의 계단에서 남자애를 데리고 서 있던 여자도 역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습
니다.
"할아버지, 오셔서 저녁을 드시고 주무시고 가셔요."
예핌은 마지못해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안에 들어왔으니 엘리세이에 대해 물어 보자. 그 영감이 그때 물을 얻으러 들
른 집이 아마 여기쯤 될 텐데.'
예핌이 방안에 들어가니까 여자는 그의 어깨에서 자루를 내려 주었습니다. 그
러고 나서 몸 씻을 물까지 떠다 주었고, 식탁으로 안내했습니다. 우유와 보리 단
지를 내놓고 식탁 위에 죽을 올려놓았습니다. 예핌은 그 가족들이 순례자에게
이렇게 친절히 대해 주어 고맙다고 인사하며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머리
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순례하시는 분들을 친절히 대접할 수밖에 없답니다. 어떤 순례자 덕분
에 참되게 사는 법을 배웠으니까요. 예전에 우리는 하느님을 잊고 제멋대로 살
았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벌을 내려, 우리는 거의 다 죽을 지경이었지요. 끝
내 지난해 여름엔 식구들 모두가 병에 걸리고, 먹을 것도 다떨어지고 말았답니
다. 만약 그때 하느님께서 손님과 비슷한 할아버지를 우리 집에 보내 주시지 않
았다면 우리는 벌써 오래 전에 죽었을 거예요. 한낮에 물을 얻어 마시러 들어오
셨더군요. 그때 우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겨 그대로 우리 집에 머물렀지요. 병
들고 굶주려 쓰러져 있는 우리들에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셨고, 건강도 되찾
게 해주셨습니다. 또 논밭을 찾아 주셨고, 짐수레와 말까지도 사주셨지요. 그 뒤
그분은 암말 없이 떠나 버리고 말았답니다. "
그때 할머니가 들어오며 여자가 하는 말을 가로챘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분이 사람이었는지 천사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식구들
을 끔찍이 사랑했고 불쌍히 여겼는데, 아무 말도 없이 떠나 버렸지요. 그분의 이
름조차 모르니 누굴 위해 하느님께 기도 드릴지 모르겠군요. 지금도 눈앞에 보
이는 듯합니다. 나는 쓰러져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별로
특이하지도 않은 대머리 할아버지가 물을 얻으러 들어오지 않았겠어요? 그때도
이 죄많은 늙은이는 누가 절에 들어와서 어물거리나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분은 방금 말했던 그런 일을 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을 보자 서슴치 않고
등에 짊어졌던 자루를 내려놓고, 그래 이 자리예요, 바로 이 자리에다 놓고 끈을
풀었답니다."
그러니까 소녀도 말을 거들었습니다.
"아니에요, 할머니. 처음엔 자루를 방 복판에 내려놓았다가 다시 걸상 위로 올
렸잖아요."
이렇게 그들은 서로 다투어 가며, 그 노인이 한 말과 한 일들을 자세히 이야
기해 주셨습니다 어디에 앉았고 어디에서 잤고, 무슨 일을 어떻게 했고 누구에
게 어떤 말을 했다는 것을, 그들은 끝도 없이 들려주었습니다.
밤이 되자 주인 남자가 말을 타고 돌아왔습니다. 그도 역시 엘리세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엘리세이가 자기 집에 있으면서 어떻게 도와주며 지냈는지 들
려주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그분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죄많은 채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
는 절망에 빠져 하느님과 사람들을 원망하며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런데 그분이 오셔서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느님도 알게 됐
고, 친절한 사람을 알게 되었지요. 하늘의 예수 그리스도여, 부디 그분을 보호하
여 주소서! 예전엔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았는데, 그분이 우리를 사람답게 만
들어 주셨으니까요."
그들은 예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도 자러 갔습니다.
예핌은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세 번씩이나 엘
리세이를 앞자리에서 본 일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엘리세이는 여기서 나를 앞질렀구나…… 내 예배를 하느님께서 받아
들이셨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 친구의 예비가 받아들여진 것만은 틀림없다.'
다음날 아침, 그 집 식구들은 예핌에게 이별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
는 도중 먹을 고기만두를 그의 자루 속에 넣어 준 다음 일터로 나갔습니다. 그
리하여 예핌은 다시 집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12
예핌은 꼭 1년 만인 봄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이른 것은 저녁때였습니다. 아들은 집에 없었습니다. 술집에 있었던 것입
니다. 늦게야 아들은 술이 잔뜩 취해서 돌아왔습니다. 예핌은 아들에게 여러 가
지 일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가 집에 없는 동안에 아들이 쓸데없이 낭비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예핌은 아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아들도 말대
꾸를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집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아닙니까. 아버지는 돈을 잔뜩
가지고 성지 순례를 갔잖아요. 나는 조금밖에 쓰지 않았는데……"
노인은 화가 나서 아들을 때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예핌 따라시치는 이장에게 아들의 일로 의논하러 가는 도중 엘
리세이의 집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엘리세이의 아내가 문 앞 계단에 서서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하셔요 영감님,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예핌은 걸음을 멈추고 말했습니다.
"걱정해 주신 덕택입니다. 가는 도중에 엘리세이와 헤어졌는데, 먼저 돌아와
있다면서요?"
그러자 좀 수다스러운 편인 할머니는 이야기를 마구 늘어놓았습니다.
"벌써 오래 전에 돌아오신걸요, 영감님. 성모승천제가 지난 뒤 곧장 왔답니다.
하느님께서 돌봐 주셔서 무사히 돌아왔지요. 그래서 온 식구가 아주 기뻐했어요.
그분이 계시지 않으면 집안이 허전하답니다. 이젠 나이가 많아서 큰일은 못하지
만 그래도 한 집안의 가장이니 모두들 의지하는 거지요. 글세 아들이 얼마나 반
기는지 워! 아버지가 계시지 않을 땐 눈빛까지 꺼지는 것 같다면서 말입니다. 그
분이 집에 없으면 정말 허전해요. 우리 식구들은 모두 그를 의지하고 소중하게
생각한답니다. "
"그럼 지금 집에 계신가요?"
"계셔요, 영감님. 꿀벌집의 애벌을 나누고 있지요. 금년에 깐 애벌은 정말 아주
좋은 것이라는군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보살핌이지요. 그이도 그렇게 기운 좋은
벌은 처음 봤다고 했어요.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사니까 하느님께서 돌보시나
봐요. 영감님, 어서 들어오세요. 무척 반가워하실 겁니다. "
예핌은 복도를 통해서 뒷 문으로 나가 엘리세이가 있는 꿀벌집으로 갔습니다.
꿀벌집에서 엘리세이는 그물도 쓰지 않고, 장갑도 끼지 않고 있었습니다. 긴 회
색 외투를 입고 자작나무 밑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
다. 그러자 그 대머리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관 옆에서처럼 환히 빛나고 있었
습니다. 그 머리 위에서는 역시 예루살렘에서 본 대로 자작나무 잎 사이로 햇빛
이 타는 듯이 빛을 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머리 둘레에는 금빛 꿀벌이 관처럼 동그라미를 그리며 날고 있었지만
쏘지는 않았습니다.
엘리세이의 아내가 그를 불렀습니다.
"예핌 영감님이 오셨어요."
엘리세이는 뒤돌아보고 반가워서 친구에게로 달려왔습니다. 턱수염 속에 기어
든 꿀벌을 살며시 집어내면서 "어서 오게. 그래 잘 갔다 왔네. 자네한테 주려고
요단강물을 가지고 왔지. 좀 있다 우리 집에서 가져가게. 그런데 하느님께서 내
예배를 받아 주셨는지……"
"어쨌든 기쁜 일이야. 하느님, 자비를 베푸소서!"
예핌은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몸만은 갔다 왔지만, 아무래도 영혼은 모르
겠어. 그보다도 누군가 딴사람이 갔다 왔는지도 모르지." 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모두 하느님의 뜻이지. 예핌 영감, 하느님의 뜻이야."
"돌아오는 길에 자네가 물 마시러 갔던 집엘 들렀었다네."
엘리세이는 깜짝 놀라며 손을 휘저었습니다.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야, 예핌 영감. 하느님의 뜻이지. 아무렴, 자, 집안
으로 들어가세. 내가 꿀을 떠 갈 테니까……"
엘리세이는 살림살이 이야기로 말을 바꾸면서 그 이야기를 더 이상 못하게 했
습니다.
예핌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그 농가에서 들은 이야기나 예루살렘에
서 본 사실에 대해선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
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제가끔 얘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사랑과 착한 일로써 자기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
1
도회에서 사는 언니가 시골에 사는 동생을 찾아왔습니다. 언니는 장사꾼에게
시집을 가서 도회에 살았고, 동생은 농사꾼에게 시집을 가서 시골에서 살고 있
었습니다.
언니와 동생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언니는 자랑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자기가 도회에서 얼마나 넓고 깨끗한 집에 살고 있고, 아이들은 얼마
나 멋진 옷과 음식을 먹고 마시는지, 마차를 타고 놀러도 다니고 극장 구경은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른다고 자랑이 대단하였습니다.
동생도 화가 나서 장사꾼의 생활을 업신여기며 농민의 생활을 추켜올렸습니
다.
"나는 우리 생활을 언니네 생활과 바꿀 생각이 없어요. 우리 생활은 호화롭지
는 않지만 그 대신 걱정은 없어요. 언니네 생활은 우리보다 좀 호화롭긴 하지만,
크게 벌든가 아주 망하든가 두 중에 하나가 아니에요? '손해는 이익의 형님'이라
는 속담이 있잖아요. '오늘의 부자가 내일에 남의 집 처마 밑에 선다' 는 말도
있고요. 거기에 비하면 우리네 농삿일은 틀림이 없지요. 농민의 생활은 굵지는
않지만 오래 가요. 부자는 못 되더라도 배고픈 일은 없거든요."
그러자 언니가 말했습니다.
"배만 고프지 않으면 뭘해. 돼지처럼 살면서! 게다가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나,
훌륭한 사람을 사귈 수 있냐. 아무리 뼈빠지게 일해 봐야 너희들은 어차피 거름
속에서 살다가 죽어갈 거야. 네 아이들도 마찬가지야."
"그럼 어때요."
동생이 말했습니다.
"그게 우리의 일인걸요. 그 대신 우리네 생활은 흔들림이 없어요. 누구에게 머
리를 숙일 필요도 없고 누구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요. 그러나 언니네 도회에
서는 모두들 유혹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오늘은 좋지만 내일은 어떤 마귀에
게 홀릴지도 몰라요. 형부도 언제 노름에 미칠지, 술독에 빠질지 몰라요. 그땐
모든 게 끝장이에요. 그렇잖아요?"
동생의 남편 빠홈은 난롯가에서 여자들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건 옳은 말이야." 하고 동생의 남편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땅을 파먹고 살아왔기 때문에 바보 같은 생각은 하지도
않아요. 하나 유감스러운 일은 땅이 모자라는 것이지. 땅만 많다면 세상에 겁날
사람이 없지. 악마도 말야!"
여자들은 차를 다 마시고 나서도 잠시 동안 옷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찻잔
을 치운 다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란 놈이 난로 뒤에 숨어서 이 말을 다 들었습니다. 악마는 농부가
아내의 말에 우쭐해 하는 것을 몹시 기뻐하였습니다. 농부는 땅만 있으면 마귀
도 무섭지 않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생각했습니다. '좋아, 우리 한번 겨뤄 보자. 내가 너에게 땅을 주어 그
것으로 너를 사로잡겠다.'
2
이 마을에 한 여지주가 얼마의 땅과 머슴들을 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가지
고 있는 땅은 120제사짜나(1제사짜나는 약1헥타르)였습니다. 이 여지주는 지금까
지 농민들과 사이 좋게 지냈으며 그들을 천대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
마 전에 군에서 제대한 사나이가 관리인으로 들어오면서부터 그는 걸핏하면 농
민에게 벌금을 물리며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빠홈이 아무리 조심을 해
도 말이 지주의 귀리 밭에 뛰어들고, 암소가 마당에 들어가고, 송아지가 풀밭에
들어가 그때마다 벌금을 물곤 하였습니다.
벌금을 물때마다 빠홈은 집안 식구를 욕하거나 때리곤 하였습니다. 이 관리인
때문에 뺘홈은 여름 동안에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가축을 우리 속에 가
두는 계절이 되자 오히려 마음이 놓였습니다. 먹이는 아까웠지만 걱정거리가 없
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해 겨울에 이런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여지주가 땅을 팔려고 내놓았
는데 여관집 주인이 땅을 사려고 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농부
들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만일 여관집 주인이 손에 땅이 들어가게 되면 그 놈은 여지주보다도 더 많은
벌금을 매겨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우리는 그 땅 없이는 살 수 없다. 우리는 모
두 그 주위에 살고 있으니까.'
농부들은 떼를 지어 여지주를 찾아가 땅을 여관 주인에게 팔지 말고 자기들에
게 넘겨 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여관 주인보다 더 많이 주겠다는 약속도 하였
습니다. 여지주는 승낙했습니다. 농부들은 공동으로 땅을 모두 사들이려고 한두
번 모였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마귀가 훼방을 놓았기 때문에 의
견을 모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각자 자기 형편대로 땅을 사기로 하였습니다. 여지주도 이를
승낙했습니다. 빠홈은 옆집에 사는 농부가 여지주에게서 20제사짜나 땅을 사기
로 하였습니다. 여지주도 이를 승낙했습니다. 빠홈은 옆집에 사는 농부가 여지주
에게서 20제사찌나의 땅을 샀는데 돈을 절반만 주고 나머지 절반은 일 년 후에
주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빠홈은 그것이 부러웠습니다. '사람들이 땅을
사버리면 나는 아무것도 없게 되잖아.' 그래서 그는 아내와 상의를 했습니다.
"모두들 땅을 사는데 우리도 10제사찌나 정도는 사야 하지 않겠소. 안 그러면
우린 살아갈 수 없어. 관리인이 벌금으로 다 가져가 버렸으니까."
두 부부는 어떻게 하면 땅을 살 수 있을까 연구해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저
금한 돈이 100루블 있었습니다. 그래서 망아지 한 마리와 벌꿀을 절반 팔고 아
들을 머슴으로 보내고, 동서에게 빚을 얻어 땅값의 절반을 모았습니다.
돈이 모이자 빠홈은 작은 숲이 있는 15제사찌나의 땅을 골라 놓고 여지주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땅값을 정하고 계약금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읍에 나가 매매
수속을 마치고, 땅값의 절반을 치르고 나머지 절반은 2년안에 치르기로 하였습
니다.
이래서 빠홈은 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빠홈은 씨앗을 빌려 새로 산 땅에 뿌
렸습니다. 곡식은 잘되었습니다. 일 년 만에 여지주와 동서에게 진 빚을 다 갚을
수 있었습니다. 빠홈은 이제 진짜 땅임자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땅을 갈아 씨앗
을 뿌리고, 자기 땅에서 풀을 베고, 자기 땅에서 땔감을 베고, 자기 땅에서 가축
을 길렀습니다. 빠홈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된 땅을 갈러 나가거나 씨앗이 얼마나
나왔나 보러 가거나 풀밭을 돌아보려 나갈 때마다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풀도 꽃도 다른 집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 땅으로 말
할 것 같으면 전에도 수없이 지나다녔던 땅이었건만, 지금은 전혀 특별한 땅처
럼 생각되었습니다.
3
이렇게 빠홈은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빠홈의
곡식과 풀밭을 짓밟지만 않았다면 모든 일은 그저 그만이었을 것입니다. 점잖게
부탁을 해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풀밭에 소를 풀어 놓기도
하고 야경꾼의 말이 곡식 밭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빠홈은 내쫓기만
하고 용서해 주었으며 한 번도 고소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일이 계속되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재판소에 고소를 했습
니다.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땅이 좁기 때문이지 마음이 나빠서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빠홈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
다.
'이대로 내버려둘 순 없다. 그러다간 사람들이 우리 것을 다 망쳐 버릴 거야.
혼을 좀 내줘야 해.'
그리하여 빠홈은 한 번, 두 번 재판을 걸어 따끔한 맛을 보여 주고 두 사람에
게 벌금을 물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웃 사람들은 빠홈을 원망하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일부러 밭을 짓밟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밤중에 숲속으로 숨어
들어가 열 그루 정도의 보리수나무를 벗기고 모조리 베어 버렸습니다. 숲을 지
나던 빠홈은 무언가 하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껍질이 벗겨진
보리수 나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잘린 밑동이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가
장자리의 것을 베든가 한 그루라도 남겨 두었으면 좋으련만 악당들은 모조리 베
어 버렸던 것입니다.
빠홈은 화가 났습니다. '이놈을 찾아내어 복수를 해줘야지.' 그는 누구의 짓일
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건 셈까의 짓이 틀림없어.' 이렇게 생각하고 빠홈은 셈까의 마등으로 가서
증거를 찾으려 하였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말다툼만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빠홈은 더욱더 셈까의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고소를 했습니다. 두
사람은 법정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몇 차례 조사를 받았으나 셈까는 무죄가 되
었습니다. 증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빠홈은 더욱더 화가 나서 이장과 재판관하
고도 욕을 하며 싸웠습니다.
"당신들이 도둑의 편을 들 수 있어요? 만약 당신들이 바른 생활을 한다면 도
둑을 무죄로 풀어 주진 않았을 겁니다."
빠홈은 이웃과 재판관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빠홈의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이렇게 빠홈은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으나 좁은 세
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런 소문이 들려 왔습니다. 마을 농부들이 새로운 고장으로 옮겨가려고
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빠홈은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 땅을 떠나야 할 이유가 없지. 우리 마을에서 누가 떠난다면 더 넓어
지겠지. 그러면 그들의 땅을 사들여 이 일대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그렇게 되
면 생활도 나아지겠지. 지금은 너무 좁아.'
어느 날 빠홈이 집에 있는데 길 가던 농부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빠홈은
나그네를 집에 재우고 밥도 주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나그네는 저 아래 볼가강 저편에서 왔으며, 거기서 일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나그네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이사를 온다고 띄엄띄엄 말
했습니다. 사람들이 거기로 이사와서 마을 조합에 들게 되면 한 사람 앞에 10제
사찌나의 땅을 나누어준다는 말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땅이 얼마나 기름진지 호밀을 심으면 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이
자라며, 다섯 줌으로 한 다발이 될 만큼 밀알이 많이 열리지요. 어떤 농부는 하
도 가난하여 맨주먹으로 왔는데 지금은 말 여섯 마리와 암소 두 마리를 가지게
되었답니다."
빠홈은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렇게 잘살 수 있다면 이 좁은 데서 구차하게 살
필요가 없지. 여기 집과 땅을 팔아 가지고 그 돈으로 거기 가서 집을 짓고 잘살
아 보자. 여기처럼 비좁은 곳에 살다가는 죄만 지을 뿐이지. 아무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와야지.'
여름이 되자 빠홈은 채비를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사마라까지는 볼가강을 따
라 기선으로 내려가고, 그 다음의 4백 베르스따 정도는 걸어서 갔습니다. 마침내
목적지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것이 듣던 대로였습니다. 농부들은 한 사람 앞에
10제사찌나의 땅을 받아 가지고 여유있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조합
에서 받아 주었습니다. 돈을 가진 사람은 나누어주는 땅 외에도 3루블에 제일
좋은 땅을 얼마든지 살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다 알아 가지고 빠홈은 가을이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 이
것저것 다 팔았습니다. 땅은 이익을 보고 팔았습니다. 집도 가축도 다 팔았습니
다. 그런 다음 마을 조합에서 적을 떼어 봄을 기다렸다가 가족과 함께 새 고장
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4
가족을 데리고 새 고장으로 온 빠홈은 어떤 큰 마을의 조합에 들었습니다. 마
을 노인들에게 술을 대접하고 무든 서류를 갖추었습니다. 빠홈은 조합에 들어
다섯 사람 몫의 땅을 나누어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 군데 흩어져 있기는 했으
나 풀밭을 빼고도 50제사찌나가 되었습니다. 빠홈은 거기다 집을 짓고 가축을
사들였습니다. 그의 땅은 한 사람당 나누어 받는 것의 세 배나 되었습니다. 더구
나 곡식이 잘되는 기름땅이었습니다. 생활도 전에 비해 열 배나 좋아졌습니다.
농사를 지을 땅과 가축에게 먹일 풀밭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축도 얼마든지 키울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집을 짓고 가축을 사들이는 동안만 해도 빠홈은 기분이 좋았으나, 자
리가 잡히자 이 땅도 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해에 빠홈은 자기 밭에 밀을
심었습니다. 농사는 잘되었습니다. 밀을 더 심으려고 했으나 땅이 모자랐습니다.
남은 땅은 밀 농사에 알맞지 않았습니다. 이 고장에서는 밀을 나래새풀 밭이나
쉬는 땅에 심는데, 일이 년 심고 나면 풀이 다시 자랄 때까지 내버려둡니다. 그
런데 그런 땅은 바라는 사람들이 많아서 모든 사람에게 다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땅을 놓고 역시 싸움을 벌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직접
농사를 지을 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땅세를 받고 장사꾼에게 빌려주었습니다. 빠
홈은 농사를 더 짓고 싶었습니다.
다음해에 빠홈은 어느 장사꾼을 찾아가서 1년 동안 땅을 빌렸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밀을 심었는데 농사가 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마을에서 멀어15
베르스따나 운반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서는 장사와 농사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농장을 가지고 잘살았습니다. '만일 땅을 영원히 자기 것을 만들어 농
장을 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되면 이 마을에서 부러울 것이 없
을 텐데.' 하고 빠홈은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3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빠홈은 땅을 빌려서 계속 밀을 심었습니다.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밀 농사도 잘되고 돈도 모았습니다. 생활은 그것으로 충분
하였지만 빠홈은 해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땅을 빌리기 위해 쩔쩔매야 하는 것이
지겨웠습니다. 어디서 좋은 땅이 나오면 사람들이 당장 몰려들어 빌려 버립니다.
제때에 땅을 빌리지 못하면 농사도 못 짓게 됩니다. 3년만에 빠홈은 어느 장사
꾼과 돈을 반반씩 내어 농부들로부터 풀밭을 빌렸습니다. 그래서 밭을 갈아 놓
았는데 농부들이 재판을 거는 바람에 일은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 땅만 있다면 남에게 머리를 숙일 필요도 없고, 좋지 못한 일도 없을 텐데.'
빠홈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빠홈은 영원히 자기 땅으로 사들일 땅이 없나 하고 두루 알아보기 시
작했습니다. 마침내 한 농부를 찾아냈습니다. 그 농부는 5백 제사찌나의 땅을 가
지고 있었는데 망해서 헐값에 판다는 것이었습니다. 빠홈은 그 사람과 흥정을
벌였습니다. 여러 번 흥정 끝에 천오백루블에 사기로 하고 땅값의 절반은 조금
있다 주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흥정이 다 되어 갈 무렵에 길 가던 어느 장사꾼이 먹을 것을 좀 달라
고 빠홈의 집에 들렀습니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
다. 장사꾼은 멀리 바쉬끼르에서 오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쉬끼르
사람들로부터 천오백 제사찌나의 땅을 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땅값은
천오백 루블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빠홈은 묻기 시작했습니다. 장사꾼은 대답했
습니다.
"노인들의 기분만 잘 맞춰 주면 됩니다. 나는 옷과 양탄자를 백 루블 정도 나
눠주고 그밖에 차 한 상자와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에겐 술을 대접했습니다.
그래서 1제사찌나에 20까뻬이까씩 주고 땅을 샀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나그네는 땅문서를 보여 주었습니다.
"게다가 이 땅은 냇물을 끼고 있으며 모두 나래새풀로 뒤덮인 초원이랍니다."
빠홈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잘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 당은 일 년을 걸어도 다 돌지 못합니다. 그게 모두 바쉬끼르 사람들의 땅
이지요. 그 사람들은 양같이 순해서 거의 공짜로 땅을 살 수 있어요."
이 말을 듣고 빠홈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5백 제사찌나의 땅을 천 루블을 주고, 게다가 빚마저 얻을 필요가
있을까. 그곳에 가면 천 루블을 주고도 땅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텐데!'
5
빠홈은 거기로 가는 길을 자세히 물어 보고 나서 나그네가 떠난 다음 자기도
떠날 채비를 하였습니다. 집안 일은 아내에게 맡기고 하인 한 사람만 데리고 길
을 떠났습니다. 빠홈은 가는 도중에 읍에 들러 나그네가 말한 대로 차 한 상자
와 여러 가지 선물을 사고 술도 샀습니다. 그리고 5백 베르스따쯤 갔습니다.
일주일 쯤 걸려 그는 바쉬끼르 사람들이 가축을 기르며 사는 땅에 이르렀습니
다. 모든 것이 나그네의 말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냇물을 끼고 있는 초원에서 천
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밭도 갈지 않고 곡식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초원에는 소와 말들이 떼지어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천막 뒤에는 망아지들이
매어져 있었으며, 하루에 한두 번씩 어미 말이 거기로 끌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말의 젖을 짜서 삭혀 술을 만들었습니다. 여자들을 그것을 휘저어 치
즈를 만들고 남자들은 우유로 만든 술과 차를 마시고 양고기를 먹으며 피리를
불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살이 찌고 여름에는 놀기만 하였습니다. 사람들
은 까막눈이어서 러시아 말도 할 줄 몰랐으나 친절하였습니다.
빠홈을 보자 바쉬끼르 사람들은 천막에서 나와 손님을 에워쌌습니다. 통역이
나왔습니다. 빠홈은 땅을 사러 왔다고 통역에게 말했습니다. 바쉬끼르 사람들은
몹시 기뻐하며 빠홈을 안다시피 하여 제일 좋은 천막으로 안내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양탄자 위에 깃털 방석을 놓고 자리를 권하며 자기들도 그 주위에
둘러앉아 차와 우유 술을 대접했습니다. 양고기 요리도 대접했습니다. 빠홈은 마
차에서 가지고 온 선물을 꺼내어 바쉬끼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
고 나서 차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몹시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자
기들끼리 소곤거리더니 통역을 시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습관에 따라 선물에 대한 답
례로 손님을 어떻게든 기쁘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좋은 선물
을 주셨으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말씀하
셔요.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빠홈이 말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당신들의 땅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좁은데다가 너무 오래 곡식을 심어 먹었기 때문에 못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긴 땅이 많고 기름집니다. 이렇게 좋은 땅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통역이 그 말을 전했습니다. 바쉬끼르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잠시 이야기를 나
누었습니다. 빠홈은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기분 좋은 듯 뭐라고
소리치며 웃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그 사람들은 조용해지더니 빠홈을 바라보았
습니다. 통역이 말을 전했습니다.
"당신의 친절에 대해서 얼마든지 기꺼이 땅을 드리겠다고 합니다. 어느 땅이든
지 손으로 가리키기만 하셔요. 그러면 당신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다시 저희들끼리 의논을 하다가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빠홈은 왜
다투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통역이 대답했습니다.
"땅에 관한 문제라면 이장 어른께 물어서 결정해야 한다는 사람과 그럴 필요
가 없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6
바쉬끼르 사람들이 말다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우털 모자를 쓴 사나이가
왔습니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통역이 말했습니다.
"이분이 바로 이장 어른이십니다."
빠홈은 얼른 일어나 제일 좋은 옷 한 벌과 5파운드짜리 차를 꺼내 주었습니
다. 이장은 그것을 받아 들고 제일 윗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러자 바쉬끼르
사람들은 곧 이장에게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장은 그들의 말을 듣고
나서 머리를 끄덕이며 잠자코 있으라는 시늉을 하더니 빠홈에게 러시아 말로 말
하기 시작했습니다.
"좋습니다. 마음에 드는 거로 가지셔요. 땅은 많으니까요."
빠홈은 생각했습니다.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가지라고 하는데 어떻게 가져야
좋담? 어떻든 땅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어. 그렇지 않으면 네 땅이라 해 놓고
나중에 도로 빼앗아 갈지 모르니까.'
그래서 빠홈은 말했습니다.
"친절한 말씀 고맙습니다. 당신들에게는 땅이 많지만 나는 조금밖에 필요 없습
니다. 다만 내 땅이 어떤 것인지 그것만 알아두었으면 합니다. 아무튼 한 번 재
어서 내땅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사람이란 언제 죽을지 모르니
까요. 당신들은 좋은 분이니까 주시겠지만 당신네 아이들은 도로 빼앗아 갈지
모르잖습니까."
"옳은 말입니다. 분명히 해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고 이장은 말했습니다.
그래서 빠홈이 말했습니다.
"어떤 상인이 여기에 왔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신들은 그 사람에게 땅을
판 후에 땅문서를 만들어 주었다는데 나에게도 그렇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장은 그의 말뜻을 다 알아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거야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지요. 우리에겐 서기가 있으니까 같이 읍으로
가서 서류에 도장을 찍도록 합시다."
"땅값은 얼마로 할까요?" 하고 빠홈이 물었습니다.
"여기서는 땅값이 하나로 정해져 있습니다. 하루치에 천 루블입니다."
빠홈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치란 대체 어떻게 재는 건가요? 그게 몇 제시찌나나 됩니까?"
"우리는 그렇게 잴 줄 모릅니다. 하루에 얼마로 팔고 있지요? 말하자면 하루
에 걷는 만큼 그 사람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의 땅값은 천 루블이
랍니다."
빠홈은 놀랐습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닌다면 꽤 많은 땅이 되겠는데요."
이장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게 다 당신의 땅이 됩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만약 하루 안에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당신 돈은 못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돌아다닌 곳은 어떻게 표시를 하지요?" 하고 빠홈이 물었습니
다.
"당신이 원하는 장소에 우리가 같이 가서 서 있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곳
을 출발하여 한바퀴 돌아오면 됩니다. 그때 당신은 삽을 가지고 가서 필요한 장
소에 표시를 해 두시오. 작은 구덩이를 파고 풀을 꽂아 두십시오. 나중에 우리가
구덩이와 구덩이 사이를 쟁기질할 테니까요. 어떻게 도시든 상관은 없지만, 반드
시 해 떨어지기 전에 출발했던 장소로 되돌아와야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돌
아온 땅은 모두 당신의 것이 됩니다."
빠홈은 기뻤습니다. 그들은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 뒤에 이야
기도 하고 우유로 만든 술도 마시고 양고기도 먹고 거기다 차까지 마셨습니다.
어느 새 밤이 깊었습니다. 바쉬끼르 사람들은 빠홈을 깃털 이불을 덮고 자게 해
주고 자기들 천막으로 뿔뿔이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내일 새벽에 모여서 해 뜨
기 전에 출발 장소로 가기로 약속하였습니다.
7
빠홈은 깃털 이불을 덮고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아 계속 땅 생각만 하고 있었
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땅을 크게 차지해야지. 하루 종일 걸으면 50베르스따 정도는
돌 수 있을 거야. 지금은 해가 긴 때니까. 50베르스따면 너비가 얼마나 될까. 그
중 나쁜 땅은 팔아 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좋은 데만 골라서 그곳에
자리잡기로 하자. 황소 두 마리가 끌 쟁기를 사고, 머슴도 두 사람쯤 써야지. 그
리고 50제사찌나만 밭을 만들고 나머지는 가축을 치는 목장으로 만들자.'
빠홈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그러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습니다. 그
는 잠이 들자마자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이런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가 바로 지금 자고 있는 그 천막 속에 누워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큰소리로
웃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웃는가 보려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가보니 바로 그 바쉬끼르 이장이 천막 앞에
앉아서 두 손으로 배를 움켜잡고 무엇이 우스운지 뒹굴고 있었습니다. 빠홈은
곁으로 가서 "무엇이 그렇게 우스우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바쉬끼
르의 이장이 아니라 빠홈에게 땅이야기를 하여 이리로 오게 한 그 상인처럼 보
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여기 온 지 오래 되었소?" 하고 물으려 하자, 그는 상
인이 아니라 전에 볼가강 저쪽에서 왔던 농부였습니다. 빠홈이 다시 보니 그것
은 농부도 아니고 뿔과 발톱이 길게 자란 마귀였습니다. 마귀는 앉아서 웃고 있
었고, 그 앞에는 셔츠와 바지를 입은 어떤 사나이가 맨발로 누워 있었습니다. 이
것은 또 누군가 하고 빠홈은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나이가 맨발
로 누워 있었습니다. 이것은 또 누군가 하고 빠홈은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
런데 그 사나이는 죽어 있었으며, 죽은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빠홈은 깜짝 놀라 잠이 깼습니다. '뭐야, 꿈이 아닌가?' 생각하고 빠홈은 주위
를 둘러보았습니다. 열린 문 쪽으로 뿌옇게 날이 밝아 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을 깨워야지. 떠날 시간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빠홈은 일어나 마차에서 잠자는
머슴을 깨워 마차에 말을 매게 한 다음 바쉬끼르 사람들을 깨우러 갔습니다.
"시간이 됐습니다. 초원으로 가서 땅을 재야지요."
바쉬끼르 사람들은 일어나 모두 모였습니다. 이장도 왔습니다. 바쉬끼르 사람
들은 다시 우유로 만든 술을 마시며 빠홈에게 차를 대접하려고 했으나, 그는 기
다리려 하지 않고 "가려면 빨리 갑시다. 늦기 전에." 하고 말했습니다.
8
바쉬끼르 사람들은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말을 타고 어떤
사람은 마차를 타고 떠났습니다. 빠홈은 머슴과 같이 마차를 타고 삽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초원에 이르자 날이 밝았습니다. 바쉬끼르 말로 '쉬한' 이라는 언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 다음 사람들은 말과 마차에서 내려 한데 모였습니다.
이장이 빠홈 곁으로 와서 한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여기 보이는 것이 다 우리 땅입니다. 아무것이나 골라 잡으셔요."
빠홈의 눈이 이글거렸습니다. 땅은 온통 나래새풀로 뒤덮여 있는데다가 손바
닥처럼 반듯하고 양귀비처럼 까맣게 기름졌으며, 좀 팬 곳에는 잡초들이 가슴팍
까지 자라 있었습니다.
이장은 여우털 모자를 벗어 땅위에 놓으며 말했습니다.
"자, 이것이 표적입니다. 여기서 출발하여 이리로 돌아오십시오. 한바퀴 돌아오
면 그 안의 당은 모두 당신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빠홈은 돈을 꺼내 모자 위에 놓고, 웃옷을 벗고 조끼 바람에 허리끈을 단단히
매었습니다. 그리고 빵 주머니를 품속에 넣고 술병도 허리끈에 찬 다음 장화를
단단히 신고, 머슴에게서 삽을 받아 쥐는 등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빠홈은 어
느 쪽으로 가면 좋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도 좋았습니다. '어
디로 가도 좋은 땅이라면 해 뜨는 쪽으로 가자.'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해 드는 쪽을 향해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해가 떠오르기만을 기다렸
습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되지. 서늘할 때 걷는 것이 한
결 나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빠홈은 저쪽 땅 끝에서 해가 떠오르기가 무섭게
삽을 어깨에 메고 초원으로 떠났습니다.
빠홈은 보통 걸음으로 걸었습니다. 1베르스따쯤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작은
구덩이를 파고, 조금이라도 눈에 잘 띄게 풀 몇 포기를 넣어 두었습니다. 그러고
는 또 걸어갔습니다. 걷기 시작하자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습니다. 얼마쯤 가서
또 구덩이를 팠습니다.
빠홈은 뒤돌아보았습니다. 언덕은 햇볕을 받아 환히 바라다 보였으며, 사람들
이 그 뒤에 서 있었습니다. 마차의 쇠바퀴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빠홈
은 이제 5베르스따쯤 걸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차차 더워져 조끼를 벗어
어깨에 걸치고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다시 5베르스따쯤 갔습니다. 점점 더워졌습
니다. 해를 쳐다보니 벌써 아침 먹을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하나가 끝났구나. 하루에 네 구덩이를 파게 되어 있으니 아직 돌아가기
는 이르겠지. 그러나 장화는 벗기로 하자.' 이렇게 생각하고 빠홈은 앉아서 장화
를 벗어 허리끈에 매고 또 걷기 시작했습니다. 걷기가 한결 편했습니다. '5베르
스따만 더 걷자. 그리고 왼쪽으로 구부러지도록 하자. 땅이 너무 좋아 그냥 버리
고 가기는 아깝다. 갈수록 땅이 좋구나.' 빠홈은 계속 곧바로 걸어갔습니다. 뒤돌
아보니 언덕은 아득하게 멀었고 사람들은 개미처럼 까맣게 보였으며, 무언가 희
미하게 반짝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쪽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이젠 구부러지자. 땀을 흘렸더니 목이 타는군.' 빠
홈은 이런 생각이 들자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구덩이를 좀더 크게 파서
풀을 놓았습니다. 그러고는 허리에서 물통을 끌러 물을 잔뜩 마신 다음 왼쪽으
로 급히 구부러졌습니다. 걸을수록 풀의 키는 더 커져서 몹시 더웠습니다.
빠홈은 피곤해 왔습니다. 해를 쳐다보니 바로 점심때였습니다. '자, 좀 쉬어 가
자.' 이렇게 생각한 빠홈은 걸음을 멈추고 거기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빵과 물을
마셨을 뿐 눕지는 않았습니다. 누우면 잠이 들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잠깐 앉
았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쉽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빵을 먹어
힘이 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더위가 점점 심해지자 졸음이 왔습니다. 그래도 그
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한 시간을 참으면 일생을 편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
니다.
빠홈은 이쪽도 많이 걸었기 때문에 다시 왼쪽으로 구부러지려고 했습니다. 그
러다가 보니 근처에 물기가 촉촉한 분지가 있었습니다. 그냥 버리고 가기는 아
까웠습니다. '저기면 아마가 잘될 거야.' 생각하고 빠홈은 다시 곧바로 걸어갔습
니다. 분지를 차지하자, 저편에 구덩이를 파고 두 번째 모퉁이를 만들고 돌아왔
습니다.
빠홈은 언덕 위를 돌아보았습니다. 더위로 뿌연 공기 속에서 무엇이 아른거리
고, 그 사이로 언덕 위의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두 쪽은 이렇게 길게
잡았으니 이쪽은 좀 짧게 잡아야겠는걸.' 이렇게 생각하고 빠홈은 세 번째 모퉁
이를 향하여 걸음을 빨리 했습니다. 해를 보니 한나절이 훨씬 넘었는데 세 번째
편에서는 2베르스따 정도밖에 걷지 못했습니다. 출발 지점까지는 15베르스따는
남아 있었습니다. '땅 모양이 비뚤어져도 이젠 곧바로 가야겠다. 더 이상 가지려
고 해서는 안 돼. 땅은 이만하면 충분해' 빠홈은 얼른 구덩이를 파고 곧바로 언
덕으로 향했습니다.
9
빠홈은 언덕을 향해 곧바로 걸었습니다. 힘이 들었습니다.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고 맨발이 찢기고 긁혀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좀 쉬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해질 때까지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해는 기다리지 않고 자꾸만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아아, 실패한 게 아닐까? 너무나 땅을 많이 차지한 게 아닐까? 만약 제시간에
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초조한 생각에 빠홈은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힘이 들었으나 계속 걸음을 재
촉했습니다. 그러나 가도가도 갈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하였습니다. 그는 달음질
치기 시작했습니다. 조끼도 장화도 물통도 모자도 다 버리고 오직 삽만 가지고
그것으로 지팡이 삼아 뛰었습니다.
'아아, 욕심이 너무 지나쳤구나. 이젠 다 틀렸어. 해떨어지기 전에는 못 갈 것
같아.' 그러자 더욱 무서운 생각이 들어 숨까지 막혀 왔습니다. 빠홈은 막 달렸
습니다. 셔츠와 바지는 땀에 젖어 몸에 착 달라붙고 입안은 바싹 말랐습니다. 가
슴은 풀무처럼 펄떡거리고, 심장은 망치질하듯 뛰고, 다리는 남의 다리처럼 휘청
거렸습니다. 빠홈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을 써서 죽지나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무서워졌습니다.
죽음은 무서웠으나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죽을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달려왔
는데, 이제 와서 그만둔다면 사람들이 바보라고 하겠지.' 이런 생각에 빠홈은 달
리고 또 달렸습니다. 출발점에 가까이 왔을 때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쉬끼르 사
람들이 그를 향해 질러대는 날카로운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에 그의 가슴은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빠홈은 마지막 힘을 다하여 달
리고 있었으나 해는 지평선 쪽으로 기울어 핏빛처럼 빨갛고 쟁반처럼 둥글게 되
었습니다. 이제 곧 떨어지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해는 기울어가고 있었습니다.
출발점까지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빠홈은 언덕 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
기에게 손을 흔들며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땅위에 있는 여우
가죽 모자와 그 위에 있는 돈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당위에 앉아 두 손으로 배
를 움켜잡고 있는 이장도 보였습니다. 빠홈은 어젯밤의 꿈을 머리에 떠올렸습
니다. '땅은 많이 얻었으나 하느님이 거기에 살게 해 주실까? 아아, 내 자신을
내가 망쳤구나! 아무래도 출발점까지 닿지 못할 것 같다.'
빠홈은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해는 이미 땅에 닿았으며, 한쪽 끝은 가라앉아
밑으로 활처럼 휘어져 있었습니다. 빠홈은 마지막 힘을 다하여 몸을 앞으로 내
밀며 넘어지려는 것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언덕 밑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돌아보니 해는 이미 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빠홈
은 아아! 하고 소리쳤습니다. '나의 노력도 허사가 되고 말았구나.' 생각하고 그
가 걸음을 멈추려는데, 바쉬끼르 사람들이 계속해서 뭐라고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때 빠홈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덕 밑에서 보면 해가 진 것으로 보
이지만, 언덕 위에서 보면 해가 아직 다 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빠홈은
용기를 내어 언덕위로 달려 올라갔습니다. 언덕 위는 아직도 밝았습니다. 빠홈은
올라가기가 무섭게 모자를 보았습니다. 모자 앞에는 이장이 앉아서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큰소리로 웃고 있었습니다. 빠홈은 꿈 생각을 하고 아아! 하고 소
리쳤습니다. 그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앞으로 쓰러지면서도 두 손으로 모자
를 잡았습니다.
"정말 장하십니다! 이제 많은 땅을 가지게 됐구먼요."하고 이장은 소리쳤습니
다.
빠홈의 머슴이 달려가서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으나 그의 입에서는 피가 흐
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어서 쓰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바쉬끼르 사람들은 혀를 차며 빠홈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했습니다.
머슴은 삽을 들고 빠홈의 무덤을 판 뒤 거기에 그를 묻었습니다. 머리에서부
터 발끝까지 그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은 정확히 2미터 가량밖에 되지 않았습니
다.
대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
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마태의 복음서, 5:38∼39)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
(로마서 12:19)
1
어느 가난한 농부네 집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농부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
며 이웃집에 가서 아들의 대부가 되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웃집 사람은
거절했습니다. 가난한 농부네 자식의 대부가 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농부
는 다른 집으로 가보았으나 거기서도 거절당했습니다.
이렇게 온 마을을 다 돌아다녀 보았으나, 아무도 대부로 와주겠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농부는 다른 마을로 갔습니다. 그때 저쪽에서 걸어오는 한 나그네를
만났습니다. 나그네는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걸었습니다.
"안녕하시오, 농부? 어딜 가는 길이오?"
"하느님께서 아이를 주셨답니다. 아이란 젊어서는 구경거리가 되고, 늙어서는
위로가 되고, 죽고나면 연미사를 올려 주지요. 하지만 가난하다 보니 이 마을에
서는 아무도 대부가 되어 주려고 하지 않는군요. 그래서 대부가 되어 줄 사람을
찾으로 가는 길이랍니다."
그러자 나그네가 말했습니다.
"나를 대부로 써주시오."
농부는 몹시 기뻐하며 나그네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고 나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대모는 누구로 하면 좋을 까요?"
"대모는 상이네 딸에게 부탁해 보시오. 읍내에 가면 광장에 가게가 딸린 돌집
이 있을 겁니다. 그 집 문 앞에 가서 상인에게 부탁해 보시오. 따님을 아들의 대
모가 되게 해달라고."
농부는 의심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대부님, 나 같은 농사꾼이 어떻게 부자 상인을 찾아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같은 건 업신여기고 딸을 보내주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말고 우선 가서 부탁이나 해봐요. 그리고 내일 아침에 영세 받을 준
비를 해두시오. 내가 가서 대부를 서줄 테니."
가난한 농부는 집에 돌아갔다가 다시 읍내에 있는 상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리
고 바깥에다 말을 세웠습니다. 그때 상인이 나오더니 "어떻게 왔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실은 주인 어른, 하느님께서 나에게 아이를 주셨답니다. 아이란 젊어서는 구
경거리가 되고, 늙어서는 위로가 되고, 죽고나면 연미사를 올려 주지요. 제발 댁
의 따님을 우리 아들의 대모로 허락해 주십시오."
"영세는 언제 받소?"
"내일 아침입니다."
"좋아요. 돌아가시오. 내일 아침 기도 때쯤 돼서 딸을 보내겠소."
이튿날 대부, 대모가 와서 아이의 영세를 받았습니다. 아이의 영세가 끝나자마
자 대부는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디에 사는 누군 지도 몰랐으며, 그
후로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2
아이는 자라면서 부모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힘도 세고 부지런하고 똑똑한
데다 성격도 온순했습니다. 아이가 열 살이 되자, 부모는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
려고 학교에 보냈습니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5년 걸려야 터득할 것을 이 아이
는 1년만에 다 배워 버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습니다.
부활절이 왔습니다. 아들은 대모네 집에 가서 부활절 인사를 드린 뒤 집으로
돌아와서 물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 대부님은 어디에 사셔요? 찾아가서 부활절 인사를 드려
야 할 텐데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귀여운 내 아들아, 우리도 늘 걱정이란다. 그분은 대부를 서주시고 자취를 감
추어 버리셨어. 소문도 못 들었고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며, 살아 계신지 돌아가
셨는지도 모른단다."
아들은 아버지, 어머니에게 절하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대부님을 찾아가게 해주셔요. 저는 대부님을 찾아 부활절 인
사를 드리고 싶어요."
부모는 아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소년은 대부를 찾아 나
섰습니다.
3
소년은 집을 나와 길을 걸었습니다. 반나절쯤 가서 소년은 길가는 나그네를
만났습니다.
나그네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습니다.
"얘야, 너 어딜 가는 길이냐?"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저는 대모님을 찾아가 부활절 인사를 드리고 왔어요. 그리고 대부님에게도 인
사를 드리고 싶어서 부모님께 대부님은 어디계시냐고 물어 봤어요. 하지만 부모
님은 대부님이 어디에 사시는지 모른다는 대답이셨어요. 그분은 너의 대부를 서
주신 뒤에 떠나 버렸기 때문에 우리도 대부님이 어떤 분이며 또 어디에 사시는
분인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부님을 뵙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자 나그네가 말했습니다.
"내가 너의 대부란다."
소년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대부에게 부활절 인사를 드렸습니다.
"대부님, 대부님은 지금 어디로 가셔요? 혹시 우리마을 쪽으로 가시는 길이면
우리 집에 들러 주셔요. 그러나 댁으로 가신다면 저도 함께 가겠어요."
그러자 대부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너희 집에 들를 시간이 없단다. 여러 마을에 볼일이 있어서 집에는
내일이나 돌아갈 예정이다. 그때 오너라."
"어떻게 찾아가면 되나요, 대부님?"
"먼저 해가 떠오르는 쪽으로 곧장 가거라. 그러면 숲이 나오고, 그 가운데 풀
밭이 보일 것이다. 이 풀밭에 앉아 좀 쉬면서 무언이 있나 둘러보아라. 그러고
나서 숲을 벗어나면 뜰이 있고, 그 뜰 안에 금빛 지붕을 가진 집이 있을 것이다.
것이 내 집이다. 대문까지 오면 내가 마중 나가마."
이렇게 말하고 대부는 대자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4
소년은 대부가 가르쳐 준 대로 갔습니다. 한참 걸어가니 과연 숲이 나왔습니
다. 그래서 숲 속의 풀밭으로 나가보니 그 한 가운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
었습니다. 그런데 소나무 위에는 줄이 매어 있고, 그 줄에는 50킬로그램쯤 되는
참나무 몽둥이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꿀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 왜 벌꿀을 놓아 두고 통나무 몽둥이를 매달아 두었을까 하고 생각하
고 있는데 갑자기 숲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곰 몇마리가 이리로 오
고 있었습니다.
어미 곰이 앞장서고 그 뒤에 두 살짜리 곰이, 또 그 뒤에 새끼 곰 세 마리가
따라왔습니다. 어미 곰은 코를 벌름거리며 벌통쪽으로 갔습니다. 새끼 곰들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어미 곰이 벌통에 코를 디밀고 새끼 곰들도 그 뒤를 따랐습니
다. 어미 곰이 벌통에 코를 디밀고 새끼 곰을 불렀습니다. 새끼 곰들은 쫓아가서
벌통에 매달렸습니다. 그때 통나무가 조금 움직이더니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새
끼 곰을 슬쩍 밀었습니다. 이를 본 어미 곰은 한발로 통나무를 밀어 버렸습니다.
통나무는 전보다 더 멀리 갔다가 돌아오면서 새끼 곰들의 한복판을 후려쳤습니
다. 이 때문에 어떤놈은 등을 얻어맞고 어떤 놈은 머리를 맞았습니다. 새끼 곰들
은 죽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습니다. 어미 곰은으르렁거리며 두 발로 통나무를
잡고 머리 위로 올려 힘껏 내던졌습니다. 통나무가 높이 날아가자 두 살짜리 곰
이 벌통 곁에까지 못 가서 통나무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바람에 두 살짜리 곰은
머리를 얻어 맞고 죽어 버렸습니다. 어미 곰은 먼저 보다 더 큰소리로 으르렁거
리며 통나무를 잡고 힘껏 위로 밀어붙였습니다. 통나무는 소나무 가지보다 높이
올라가 줄이 느슨해질 정도였습니다. 어미 곰이 벌통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새끼
곰들도 뒤따랐습니다. 그대 하늘로 높이 올라갔던 통나무가 잠깐 멈추었다가 다
시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통나무는 밑으로 내려올수록 더 빨라졌습니다. 이렇
게 빠른 속도로 어미 곰 쪽으로 날아와 어미 곰의 머리를 후려쳤습니다. 어미
곰은 벌렁 나자빠져 네 발을 부르르 떨다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새끼 곰들
은 제각기 달아나 버렸습니다.
5
소년은 놀라서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마침내 큰 정원에 이르렀습니다. 정원에
는 금빛 지붕을 인 높은 궁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문 앞에 대부가 서서
웃고 있었습니다. 대부는 소년에게 어서 오라고 한 뒤 대문 안으로 안내하여 정
원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 아름다움과 그 정원에 깃들여 있는 기쁨은 꿈속
에서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부는 소년을 궁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궁전은 더 좋았습니다. 대부
는 방들을 다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볼수록 훌룡하고 기쁨을 주는 방이었습니다.
마침내 종이로 봉해 둔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이 문이 보이지?"
대부가 말했습니다.
"여긴 자물쇠가 없고 종이로 봉해만 놓았다. 이 문을 열 수는 있으나 열지 말
아라. 그 외엔 어디서든 마음대로 뛰어놀아도 좋다. 무슨 놀이를 하며 즐겨도 괜
찮지만 이 방에만은 들어가서는 안된다. 만약 이 방에 들어가게 되면 네가 숲에
서 본 일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대부는 집을 떠나 버렸습니다. 대자는 혼자 그 집에 살게 되었
습니다. 그의 생활은 너무나 즐거워 여기 온 지 3시간 밖에 되지 않은 것 같은
데, 사실은 30년이 흘렀습니다. 30년이 흘렀을 때 대자는 종이로 봉해 둔 방문앞
으로 가서 생각했습니다. '대부님은 왜 이방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을까?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 한 번 들어가 보자.'
문을 잡아당기자 찢어지며 문이 열렸습니다. 대자는 방안으로 들어가 보았습
니다. 그 방은 궁전 안의 어떤 방보다도 크고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에는 금으로 된 옥좌가 놓여 있었습니다. 대자는 그것을 잡아 보았습니다. 그러
자 갑자기 네 벽이 다 열렸습니다. 사방을 둘러보니 온 세상이 다 보이고, 사람
들이 하는 일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다가 보이고 그
위에 배들이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오른쪽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교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왼쪽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교인 이긴 하
지만 러시아인이 아닌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벽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러시아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무엇을 하나 한 번 보자. 곡식은 잘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자기집 밭을 보니 노적가리가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곡식이 얼
마나 되나 하고 노적가리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짐수레가 밭 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뒤에는 농부 한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대자는 아버지가 밤중
에 보릿단을 실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만 보니 그것은 바실리 꾸드
라쇼프라는 도둑이었습니다. 도둑은 노적가리 곁으로 와서 보릿단을 싣기 시작
했습니다. 대자는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밭
에서 곡식을 훔쳐가요!" 하고.
아버지는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말했습니다. "보릿단을 도둑맞는 꿈을
꾸었는데 어디 한 번 가봐야지." 하고는 말을 타고 밭으로 나갔습니다.
밭에 가보니 바실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소리쳐 불렀습니다. 바
실리는 흠씬 두들겨 맞고 손이 묶여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대자는 또 대모가 사는 읍내를 둘러보았습니다. 대모는 어느 장사꾼의 아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대모는 잠들어 있는데 남편이 살그머니 일어나 다른 여자에게
가는 것이었습니다. 대자는 대모에게 소리쳤습니다. "일어나셔요, 주인 아저씨가
나쁜 짓을 했어요."
대모는 벌덕 일어나 옷을 입고 남편이 간 곳을 찾아내어 함께 있는 여자에게
망신을 주고 함씬 두들겨 팬 뒤 남편을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대자는 다시 자기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 자고 있었습
니다. 그런데 도둑이 들어와 금고를 부수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잠이 깨어 소리쳤습니다. 그것을 본 도둑은 도끼를 들고 어머니를
죽이려 했습니가.
대자는 참을 수가 없어서 지팡이를 도둑에게 던졌습니다. 관자놀이께를 정통
으로 얻어맞은 도둑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6
대자가 도둑을 죽이기가 무섭게 네 벽은 다시 닫히고 방은 전처럼 되었습니
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대부가 들어왔습니다. 대부는 대자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옥좌에서 끌어내리며 말했습니다.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았구나. 첫 번째 잘못은 금지된 문을 연 것이고, 두 번
재 잘못은 옥좌에 올라가 내 지팡이를 잡은 일이다. 그리고 세 번째 잘못은 세
상에 나쁜 일을 더 많이 보탠 것이다 만약 네가 한동안만 더 앉아 있었다면 세
상 사람들의 절반은 못쓰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대부는 다시 대자를 옥좌 있는 곳으로 데려가 지팡이를 잡았습
니다. 그러자 다시 네 벽이 열리며 모든것이 다 보였습니다.
그러자 대부가 말했습니다.
"자, 이번에는 네가 아버지에게 저지른 잘못을 보아라. 바실리는 일 년 동안
옥살이를 했는데 그 안에서 나쁜 짓이란 짓은 다 배워 아주 사나워지고 말았어.
봐라, 저기 저 사람은 방금 네 아버지의 말을 두 마리 훔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까지 불질러 버릴 것이다. 네가 아버지에게 저지른 잘못은 바로 이런 것이다."
대자는 아버지의 집이 불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대부는 그것을 곧 닫
고 다른 쪽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자, 봐라. 네 대모는 일 년 전에 남편이 자기를 버리고 다른 여자들과 놀아나
는 바람에 괴로워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단다. 남편이 전번에 사귀던 여자도 완
전히 타락하고 말았고. 네가 대모에게 저지른 잘못은 바로 이런 것이다."
대부는 이것도 닫아 버리고 대자의 집을 가리켰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
습니다. 어머니는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치며 울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그때 도둑에게 맞아 죽었더라면 이렇게 많은 죄를 짓지는 않았을 텐
데."
"네가 어머니에게 지은 잘못은 바로 이것이다."
대부는 이것도 닫고 저 밑을 가리켰습니다. 도둑이 보였습니다. 간수 두 사람
이 감옥 앞에서 도둑의 시체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대부는 대자에게 말했습니다.
"이 도둑은 사람을 아홉이나 죽였다. 그래서 자기가 지은 죄를 자기가 갚지 않
으면 안 되었어. 그런데 네가 그 사람을 죽여 버렸기 때문에 네가 그사람의 죄
를 대신 떠맡아야만 한다. 지금부터 너는 저 사람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해서 책
임을 져야 한다. 이건 네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다. 어미 곰이 처음에 통나무를
살짝 밀었을 때 새끼 곰들은 놀랐을 뿐이다. 그런데 두 번째 밀었을 때는 두 살
짜리 곰이 죽고, 세 번째 밀었을 때는 저 자신이 죽고 말았다. 네가 한 짓도 그
와 똑같아. 이제 30년 세월을 네게 주겠다. 세상에 나가서 도둑이 지은 죄를 대
신 갚도록 하여라. 만약 갚지 못하면 네가 대신 도둑이 될 것이다."
그러자 대자가 말했습니다.
"도둑의 죄를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대부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지은 죄만큼 세상에 나가 죄를 없애 버리면 너와 도둑이 지은 죄를 다
갚게 되리라."
대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세상에 나가 죄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대부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해가 떠오르는 쪽으로 곧장 가거라. 밭이 나오고 그 밭에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먼저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고 나서 네가 아는 바를 가르쳐 주어라.
그리고 다시 앞으로 가면서 눈에 띄는 것을 눈 여겨봐 두어라. 그렇게 나흘쯤
가면 숲이 나올 것이다. 숲속에는 암자가 있고 그 암자에는 한 노인이 있을 것
이다. 그분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 하여라. 그러면 어떻게 하라
고 가르쳐 줄 것이다. 노인이 시키는 일을 다 하면 너와 도둑이 지은 죄를 다
갚게 된다."
이렇게 말하고 대부는 대문 밖으로 대자를 내보냈습니다.
7
대자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걸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의 죄를
어떻게 없앨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서는 나쁜 사람을 귀양 보내고 감옥에 가두
고 사형에 처하고 있다. 그런데 세상의 죄를 없애고 남의 죄를 자기가 떠맡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대자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걷다 보니 밭이 나왔습니다. 밭에는 곡식이 무르익어 추수할 때를 기
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곡식밭으로 송아지 한 마리가 뛰어들었습니다. 이
를 본 사람들은 말을 타고 송아지를 쫓아 곡식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밭에서 송아지가 튀어나오려고 하면 그앞에 다른사람이 말을 타고 나타나는 바
람에 송아지는 놀라서 다시 곡식밭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면 사람들도 다
시 그 뒤를 쫓아 밭으로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길가에 한 여자가 서서 "저 사
람들이 우리 송아지를 몰고 있다."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자는 농부들에게 말했습니다.
"왜 그런 식으로 소를 모시오? 어서 바깥으로 나오셔요. 그리고 저 아주머니
가 자기 송아지를 불러내도록 하셔요."
농부들은 대자의 말을 따랐습니다. 여자는 밭 가에 가서 소리쳤습니다. "누렁
아 이리온, 이리 온……" 송아지는 귀를 곤두세우고 듣더니 주인 여자 쪽으로 달
려나왔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여자의 치마폭으로 주둥이를 디밀었습니다. 그
바람에 여자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습니다. 그래서 농부들도 기뻤고, 여자도
기뻤고, 송아지도 기뻤습니다. 대자는 다시 앞으로 걸어가며 생각했습니다. '악은
악을 낳는다는 것을 이제야 나는 알겠다. 사람들이 악을 몰아치면 몰아칠수록
악은 자꾸 퍼져만 간다. 말하자면 악을 악으로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으로
악을 없애야 할지 모르겠다. 그 송아지도 주인 여자의 말을 들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밭에서 몰아낼수 있었을까?'
대자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8
한참 가다 보니 마을이 나왔습니다. 제일 끝 집에 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자 주인 아주머니가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고 여자 혼자
서 걸레로 방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대자는 방안으로 들어가 벽난로 뒤에 앉아서 주인 여자가 하는 일을 지켜 보
았습니다. 여자는 방안을 다 훔치고 나서 이번에는 식탁을 물로 씻기 시작했습
니다. 그런 다음 더러운 걸레로 닦기 시작했습니다. 한쪽을 문질러 보았습니다.
식탁은 깨끗이 닦아지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걸레 때문에 식탁 위에 땟자국이
몇줄 생겨났습니다. 다른 쪽을 문질러 보았습니다. 그러자 먼저 땟자국이 없어지
는 대신 새로운 자국이 생겨났습니다. 다시 문질러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습
니다. 더러운 걸레로 닦기 때문에 식탁은 깨끗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먼저 땟자
국이 없어지면 다른 땟자국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대자는 한참 동안 이것을 바
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아주머니, 지금 무얼 하시는 거예요?"
"안 보여요? 명절이어서 청소를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놈의 식탁은 아무리
닦아도 깨끗해지질 않네요. 이젠 녹초가 됐어요."
"그런데 이놈의 식탁은 아무리 닦아도 깨끗해지질 않네요. 이젠 녹초가 됐어
요."
"그 걸레를 깨끗이 발아 춤치면 될 텐데요."
주인 여자가 그렇게 하자 식탁은 금세 깨끗해졌습니다.
"고마워요, 가르쳐 줘서."
이튿날 아침 대자는 주인 여자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한참 걸어가자 숲이 나왔습니다. 농부들이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는 것이 보였습
니다. 가까이 가보니 농부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으나 나무는 구부러지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무틀이 꽉 박혀 있지 않아 겉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던 대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 무얼 하시오?"
"이렇게 수레바퀴를 만드는 중이라오. 두 번씩이나 땀을 뻘뻘 흘려 봤으나 나
무가 구부러지지 않는군요. 이젠 지쳤어요."
"형제들, 틀을 움직이지 않게 하셔요., 그렇지 않으면 틀과 같이 돌게 되니까
요."
농부들은 대자의 말을 듣고 나무틀을 움직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일이
잘 되어 갔습니다.
대자는 그 사람들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하루 밤
낮을 꼬박 걸어 새벽녘에 목동들이 있는 곳을 발견하고 그 사람들 곁에 누웠습
니다. 그 사람들은 가축을 매어 놓고 모닥불을 피웠습니다. 마른 나뭇가지를 주
워다가 불을 피우고 있었는데 불이 활활 타오르기 전에 젖은 나뭇가지를 올려놓
았기 때문에 불을 픽픽 소리를 내며 꺼져 버렸습니다. 목동들은 다시 마른 나무
를 주워다가 불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젖은 나뭇가지를 다시 올려놓아 불은 또
다시 꺼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목동들은 오래도록 애를 써봤으나 불은 활활
피어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대자가 말했습니다.
"성급히 젖은 나무를 올려놓지 말고 불이 활활 타오른 다음에 얹도록 하셔요."
목동들은 시키는 대로 불길이 세게 타오른 다음에 젖은 나무를 올려 놓았습니
다. 그제야 모닥불은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올랐습니다. 대자는 그 사람들과 같이
잠시 있다가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대자는 무엇 때문에 이 세 가지 일을 보여
주었을까 생각해 봤으나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9
대자는 계속 걸어갔습니다. 하루가 지났습니다. 마침내 숲이 나오고 숲속에는
암자가 있었습니다. 대자는 암자 쪽으로 가까이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암자 안에서 "거 뉘시오?" 하고 어떤 목소리가 물었습니다.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남의 죄값을 갚으려고 왔습니다."
한 노인이 밖으로 나와 물었습니다.
"남의 죄를 짊어졌다니, 어떤 죄를 지었느냐?"
대자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대부에 대한 이야기,
어미 곰과 새끼 곰들에 대한 이야기, 종이로 봉해 둔 방에 들어가 옥좌에 앉았
던 일, 대부가 자기에게 하라고 했던 일 그리고 밭에서 농부들을 보았던 일, 그
들이 온 밭을 짓밟던 일, 송아지가 주인 여자에게 달려나오던 일 등을 빼놓지
않고 모두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악은 악으로 없앨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긴 했습니다마는 악을 없애려면 어떻
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방법을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노인은 말했습니다.
"그 외에 네가 여기 오면서 본 일을 말해 보아라."
대자는 어떤 여자가 집안 청소를 하던일, 농부들이 수레바퀴를 만들려고 나무
를 구부리던 일, 모닥불을 피우던 목동들의 이야기를 노인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노인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암자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빨 빠진 도끼 한 자
루를 들고 나와 "자, 가자."고 했습니다.
노인은 암자 구역 내에 있는 어떤 곳으로 가서 나무를 가리켰습니다.
"이 나무를 베어라."
대자는 나무를 베어 쓰러뜨렸습니다.
"이번에는 그것을 세 토막으로 잘라라."
대자는 셋으로 잘랐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다시 암자로 가서 불을 가져왔습니
다.
"이 나무토막 셋을 태워라."
대자는 불을 피워 나무토막을 태웠습니다. 타다 만 나무토막 셋이 남았습니다.
"이것을 땅속에 반쯤 파묻어라. 이렇게."
대자는 불탄 나무토막 셋을 각각 파묻었습니다.
"저기 산 아래 강이 보이지. 거기 가서 입으로 물을 길어다가 이 불탄 나무에
주어라. 첫째 나무에는 네가 어느 여자에게 가르쳐 준 대로 물을 주고, 둘째 나
무에는 네가 수레바퀴 만드는 농부들에게 가르쳐 준 대로 물을 주고, 또 셋째
나무에는 네가 목동들에게 가르쳐 준대로 물을 주도록 하여라. 이 세 나무토막
에서 모두 싹이 움터 사과나무로 자라면, 그때 너는 사람들 사이에서 악을 없애
는 방법을 알게 되리라. 그러면 모든 죄도 갚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노인은 암자로 가버렸습니다. 대자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으
나 노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자는 노인이 시키는 대
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10
대자는 강가로 가서 물을 한 입 물고 와서 불탄 나무 하나에 주었습니다. 그
리고 또 가고 또 가고 이렇게 백번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제야 한 그루의 흙
이 촉촉히 젖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른 두 그루에도 이렇게 물을 물어다 주었
습니다. 대자는 지쳐서 무엇을 먹고 싶었습니다. 그는 먹을 것을 달라려고 노인
의 암자로 갔습니다. 그러나 문을 열어 보니 노인은 긴 걸상 위에 숨져 누워
있었습니다. 대자는 암자를 뒤져 마른 빵덩이를 찾아 먹었습니다. 그런 뒤에 작
은 삽을 찾아 노인의 무덤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밤에는 불탄 나무에 물을 길어
다 주고 낮에는 무덤을 팠습니다. 이렇게 무덤을 파서 노인을 막 묻으려고 하는
데 마을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노인에게 먹을 것을 가져온 것입니다. 마을 사
람들은 노인이 죽으면서 자기 자리를 대자에게 물려준 것으로 생각 했습니다.사
람들은 노인을 묻고 대자에게 빵을 남겨 둔 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
나 버렸습니다.
대자는 노인이 암자에서 홀로 살게 되었습니다. 대자는 사람들이 가져다 주는
것을 먹고 살면서 노인이 시킨 대로 일을 하였습니다. 강에서 물을 입으로 길어
다가 불탄 나무에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1년이 지났습니다.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에 대한 소문
은 널리 퍼졌습니다. 숲속에 성인이 살고 있는데, 그 사람은 산밑에서 물을 입으
로 길어다가 불탄 나무에 주면서 도를 닦고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많
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돈 많은 장사꾼도 찾아와서 선물을 주
고 갔습니다. 그러나 대자는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대자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반나절은 입으로 물을 길어다 불탄 나무에 주고,
나머지 반나절은 쉬면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대자는 이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생활이며, 이런 생활을 통하여 악을 없애고
모든 죄를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자는 또 1년을 보냈습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불탄 나무에
물을 주었으나 어느 나무에서도 싹이 돋아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대자가 암자에 앉아 있노라니가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노래를 부르
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대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고 밖으로 나가 보았
습니다. 몸이 튼튼한 젊은 사나이였습니다. 옷도 잘 입었고 말도 안장도 값비산
것이었습니다.
대자는 사나이를 불러 세워 어디서 무얼 하는 사람이며, 어디로 가는 길이냐
고 물어 보았습니다.
사나이는 말을 세우고 말했습니다.
"나는 강도인데 길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죽인다. 나는 사람을 만이 죽일수록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부른다."
대자는 겁에 질려 생각했습니다. '저 사나이의 마음속에 있는 죄악을 어떻게
하면 지워 버릴 수 있을까?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뉘우치며 그런
말을 내게 하기를 좋아하는데, 저 사나이는 나쁜 일을 자랑하고 있잖은가.'
대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옆으로 물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저 강도가 이 부근을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무서
워 나에게 오지 못할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에게도 이로울 게 없지
만 나는 어떻게 살아간담?'
그래서 대자는 발걸음을 멈추고 강도에게 말했습니다.
"여기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나쁜 일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가 지
은 죄를 뉘우치며 용허해 달라고 빌고 있소. 그러니 젊은이도 하느님이 두려우
면 뉘우치도록 하시오. 만약 뉘우칠 생각이 없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는 나타나
지 마시오. 그리고 내 마음을 어지럽히거나 사람들을 위협하여 내 곁에 못 오게
하지 마시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하느님의 벌을 받을 것이요."
강도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네 말은 듣지 않겠어. 너는 내 주인이 아
냐. 너는 기도를 드려 먹고 살지만, 나는 강도질로 먹고 살지. 사람은 저마다 먹
고 살아야 하지 않아? 설교 따위는 찾아오는 부인네들에게나 하고 나한테는 집
어치워. 네가 하느님 이야기를 내게 한 대가로 내일은 두 사람을 더 죽이겠다.
지금 당장 너를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런 일로 손을 더럽힐 생각은없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 눈에 듸지 않도록 해."
이렇게 위협한 뒤 강도는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강도는 더 이상 오지 않았
으므로 대자는 전처럼 평온하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8년이 지나자 대자는 지루
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11
어느 날 밤 불탄 나무에 물을 주고 나서 암잘 돌아와 쉬고 있었습니다. 그리
고 이제 곧 사람들이 찾아올 때가 되었을 텐데 하고 오솔길을 바라보고 있었습
니다. 그런데 그날은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자는 저녁때까지 가
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적적하여 지금가지 자기가 걸어온 길을 생각해 보
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너는 하느님게 기도나 드리며 먹고 사는 놈이라는 강
도의 비난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대자는 지금가지 자기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의 생활은 노인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 같다. 노인은 나에게 육체적인 욕망
을 버리고 정신적인 삶을 누리라고 하였는데 나는 그런 생활을 미끼로 빵이나
얻어먹고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게 되었다. 그리고 칭찬받고 싶은 생각 때문에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시무룩해지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나를 성인으로 받들
어 모시는 줄 알고 좋아한다. 이런 생활을 해서는 안 되겠다. 나는 사람들의 칭
찬에 눈이 어두워 남의 죄를 갚기는 커녕 새로 죄를 짓지 않았는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깊은 산속으로 떠나야겠다. 혼자 살면 옛날의 죄를 갚게 되고
새로운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이다.'
대자는 이렇게 생각하고 마른 빵이 든 작은 자루와 삽을 가지고 암자를 떠나
골짜기로 내려갔습니다. 깊은 산속에 움집을 짓고 사람들로부터 자취를 감추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빵 자루와 삽을 들고 가는데 저쪽에서 강도가 말을 타고 오고 있었습
니다. 대자는 놀라서 도망치려고 했으나 강도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어딜 가는 거요?" 하고 강도가 물었습니다.
대자는 사람들을 피해 아무도 찾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강도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무얼 먹고 살 거요?"
그건 생각은 아직 해본일이 없으나 강도가 그렇게 물어 오자 대자는 먹을 것
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면 되겠죠."하고 대자는 대답했습니다.
강도는 아무 말도 없이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자 대자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저 사나이의 생활에 대해서 아무것도 물어 보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쯤
뉘우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전보다 좀 부드러워진 것 같고 사람을 죽이
겠다고 위협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대자는 강도의 등에다 대고 소리쳤습니다.
"아무튼 당신은 죄를 뉘우치지 않으면 안 되오. 하느님을 피할 수는 없으니
까!"
강도는 말 머리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대자를 내리치려
고 하였습니다. 대자는 깜짝 놀라 숲속으로 도망쳤습니다.
강도는 뒤쫓아 오려하지 않고 이렇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두 번은 용서해 줬지만, 세 번째는 내 눈에 띄지 않도록 해. 그땐 죽여 버리
겠어."
이렇게 말하고 강도는 가버렸습니다. 저녁에 대자는 불탄 나무에 물을 주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한 나무에 싹이 돋아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과나무였습니다.
12
대자는 사람들 곁에서 자취를 감추어 혼자 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빵도
다 떨어졌습니다. '이젠 풀뿌리라도 캐러 가야겠다.'고 대자는 생각했습니다. 그
리고 풀뿌리를 캐러 나가다 보니 나뭇가지에 빵 주머니가 걸려 있었습니다. 대
자는 그것을 가져다 먹었습니다.
빵이 떨어지면 곧 또 다른 빵 주머니가 그 나뭇가지에걸려 있었습니다. 이렇
게 대자는 살아갔습니다. 그에게 꼭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강도가 나타나지 않
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도가 나타느는 기척이 있으면 얼른 몸을
숨기며 생각했습니다. '저자의 손에 잡혀 죽으면 나는 죄를 갚지 못한다.'
이렇게 10년이 또 흘렀습니다. 사과나무는 한 그루만 자랄 뿐, 나머지 둘은 여
전히 불탄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루는 대자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 자기의 일을 하러갔습니다ㅣ. 불탄 나무
둘레에 촉촉히 물을 주고 앉아 쉬었습니다. 앉아 쉬면서 그는 이런 생각을 해보
았습니다. '나는 또 죄를 지었다.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이 원하신
다면 죽음으로 나의 죄를 갚으리라.'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자기 인기척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강도가 욕을 하
며 말을 타고 오는 소리였습니다. 대자는 그 소리를 듣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하느님 이외에 누가 나에게 사람을 보내겠는가.'
그리고 그는 강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강도는 혼자가 아니라 안장 뒤
에 어떤 사나이를 태워 가지고 어디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나이는 손과 입이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나이는 가만히 있는데 강도는 그에게 욕을 하고 있
었습니다. 대자는 강도 쪽으로 가서 말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가?"
"숲속으로. 이놈은 장사꾼의 아들인데, 지 애비의 돈을 어디에 숨겨 두었는지
입을 열지 않는단 말야. 입을 열 때까지 두들겨 패야지."
이렇게 말하고 강도는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자는 말고삐를 잡고 놓
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을 놔주게."
강도는 화를 내며 대자에게 채찍을 쳐들었습니다.
"너도 이런 꼴을 당하고 싶어? 약속한 대로 너를 죽여 버리겠다. 이것 놔."
그러나 대자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못 놓겠네. 내가 두려운 건 자네가 아니라 하느님뿐이야. 그런데 하느님은 이
걸 놓아 주지 말라는 분부셔. 이사람을 놔주게."
강도는 얼굴을 찌푸리며 칼을 뽑아 오랏줄을 끊은 뒤, 상인의 아들을 놔주었
습니다.
"두 놈 다 꺼져 버려.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지 않도록 해."
상인의 아들은 말에서 펄쩍 뛰어내려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강도는 그냥 가
려고 했으나 대자가 다시 그를 불러세우며, 그런 나쁜 생활은 이제 그만두라고
말했습니다. 강도는 잠깐 동안 서서 대자의말을 다 듣고 난 뒤 아무 말도 없이
떠나 버렸습니다.
이튿날 아침 대자가 불탄 나무에 물을 주려고 가서 보니 도 한 그루에 싹이
돋아나 있었습니다. 역시 사과나무였습니다.
13
다시 10년이 흘렀습니다. 어느날 대자는 움막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없고 겁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그때 대자는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얼마나 큰 행복을 주셨는지 모른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연
히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기쁨 속에 살아갈 수도 있는데도.'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죄악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불쌍해졌습니다.
'내가 왜 쓸데없이 이런 생활을 하나. 바깥 세상에 나가서 내가 아는 바를 사
람들에게 알려 줘야지.'
이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인기척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강도가 말을 타고
오는 소리였습니다. 대자는 강도가 지나가도록 가만히 내버려두면서 생각했습니
다.
'저런 놈에게 이야기해 봤자 못 알아들을 거야.'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나중에 생각을 고쳐먹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강
도는 우울한 얼굴로 땅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말을 몰고 있었습니다. 대자는 그를
보자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쫓아가 그의 무릎을 잡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부디 자기의 영혼을 불쌍히 생각하게! 자네의 마음 속에도
하느님이 계시니까. 자네는 스스로 괴로워하며 남도 괴롭혀 왔어. 앞으론 더 괴
로움을 겪게 될 거야.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네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어떤 행
복을 주시려고 하는지 아는가! 제발 자신을 망치는 일은 하지 말게, 형제. 그리
고 자네의 생활을 고치게."
강도는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습니다.
"비켜."
대자는 강도의 무릎을 더 꽉 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강도는 눈을 쳐들어 대자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말에서 내려 대자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영감님, 당신이 저를 이겼습니다. 20년 동안 저는 당신과 싸워 왔으나 결국
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저는 제 자신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당신이 처음 제게 설교하려 했을 때는 화만 더 났을
뿐이었습니다. 제가 당신의 말을 생각하게 된 것은 당신이 사람들로부터 아무것
도 바라지 않고 피해 갈 때였습니다."
그때 대자는, 옛날에 농가의 아주머니가 걸레를 깨끗이 빨았을 때 비로소 식
탁을 깨끗이 닦을 수 있었던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처럼 대자도 자기 걱정을 그
만두고 먼저 자기 마음을 깨끗이 했을 때 남의 마음도 깨끗이 할 수 있었던 것
입니다.
강도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당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
을 때 부터 였습니다."
그때 대자는, 농부들이 받침틀을 움직이지 않게 했을 때 비로소 수레바퀴로
나무를 휠 수 있었던 일을 생각했습니다. 강도는 다시 말했습니다.
"내 마음이 눈처럼 완전히 녹아 버린 것은 당신이 나를 불쌍히 여겨 내 앞에
서 눈물을 흘렸을 때였습니다."
대자는 몹시 기뻐하며 불탄 나무가 있는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가까
이 가보니 마지막 한 나무에서도 사과나무의 싹이 움트고 있었습니다.그때 대
자는, 목동들의 모닥불을 활활 타오를 때 젖은 나무가 타던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 일처럼 자기 마음이 먼저 타오른 후에 남의 마음을 태울 수 있었던 것입니
다.
이제야 죄를 다 갚아 대자는 몹시 기뻤습니다.
대자는 그 이야기를 강도에게 다 들려주고 나자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습니
다. 강도는 대자를 장사지낸 뒤 그가 시킨 대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살아갔습니
다.
세 노인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 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 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
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마태의 복음서,
6:7∼8)
어떤 주교가 배를 타고 아르한겔스끄에서 솔로브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배
에는 여기저기로 가는 순례자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바람도 잔잔하고 날씨도 맑
아 배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순례자들은 누워서 혹은 무엇을 먹으면서, 혹은
한데 모여 앉아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주교도 갑판 위로 나가서
배다리를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러다가 뱃머리 쪽으로 가보았습니다. 그 곳엔 한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
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다 저쪽을 손짓하며 무엇을 말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주교도 걸음을 멈추고 농부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햇빛에 바다만 반짝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교는 한 발 더 다가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고 했습니다. 주교를 보자 농부
는 모자를 벗고 절을 하더니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주교
를 보고 역시 모자를 벗어 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교가 말했습니다.
"형제들, 꺼려 하지 마십시오. 착한 양반, 나도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으니
까요."
"실은 이 어부가 세 수도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참이었습니다."
한 상인이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수도사에 대한 이야기라니, 어떤 이야기 입니까?"
주교는 이렇게 묻고 뱃전으로 가서 궤짝 위에 앉았습니다.
"나도 좀 들어 봅시다. 아까 당신은 무엇을 가리켰습니까?"
"저기 작은 섬이 보이지요?" 어부는 말하며 오른쪽 앞을 손짓했습니다. "바로
저 섬에 세 노인이 수도를 하고 있어요."
"작은 섬은 대체 어디 있습니까?"
주교가 물었습니다.
"제가 가리키는 쪽을 보십시오. 저기 저 구름이 있습죠. 거기서 좀 왼편 아래
쪽으로 띠처럼 보이는 게 그 섬이랍니가."
주교는 보고 또 보았으나 햇빛에 물이 반짝이는 바람에 그것에 익숙지 못한
그로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교는 물었습니다.
"내 눈에는 안 보입니다만, 그 섬에 어떤 수도사들이 살고 있습니까?"
"하느님 같은 분들이요."
어부가 대답했습니다.
"그 분들의 얘기는 오래 전부터 들어 왔으나 그동안 저도 뵈올 기회가 없었습
니다. 그러다가 재작년 여름에야 뵙게 되었습니다."
이어 어부는 자기가 고기잡이 나갔다가 풍랑에 휩쓸려 그 섬에 올라갔던 이야
기를 다시 했습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섬을 둘러보다가 우연히도 움막을
발견했습니다. 그 앞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습니다. 잠시 후 두 노인이 움막에서
또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에게 먹을 것도 주고 옷도 말려 주고 배 고치는
일을 도와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교가 물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던가요?"
"한 분은 작달막한 키에 등이 구부러진 꼬부랑 늙은이였는데, 다 해진 수도복
을 입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백살은 넘었을 거예요. 턱수염은 푸른빛이 돌 만큼
백발이 었으며, 얼굴에는 언제나 천사처럼 밝은 웃으ㅁㄹ 띠고 있었습니다. 또
한 분은 그보다 키가 좀 큰,
역시 나이 많은 분으로 찢어진 윗도리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누르스름한
턱수염을 넓게 기른 힘센 노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미처 거들기도 전에 노
인은 제 배를 물통처럼 뒤집어 버렸습니다. 역시 쾌활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분은 턱수염이 무릎까지 길게 내려온 백발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
딘지 우울하고 눈썹이 온통 눈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거의 발가벗고 허
리에 거적 같은 것을 두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 그분들이 당신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주교가 물었습니다.
"대체로 아무 말없이 일했으며 자기네들끼리도 별로 말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
이 쳐다보기만 해도 마음을 다아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키 큰 분에게 여기 산
지 오래 되셨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분은 얼굴을 찡그리며 뭐라고 했는데,
그 표정이 마치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제일 나이 많은 작달막한
노인이 그의 손을 잡고 웃어 보이자, 키 큰 노인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제일 나
이 많은 노인은 '미안하다'고 한마디할 뿐 웃고만 있었습니다. "
어부가 이야기하는 동안 배는 점점 섬 가까이로 다가갔습니다.
"이제 또렷이 보이게 됐습니다. 자, 주교님 보십시오."
상인은 섬 쪽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주교는 그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검은 띠
같은 작은 섬이 분명히 보였습니다. 주교는 한참동안 섬을 바라보다가 배의 뒤
쪽에 있는 키잡이 곁으로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저게 무슨 섬이지요? 저기 보이는 섬 말이요."
"이름없는 섬입니다. 저런 섬은 이 근처에 얼마든지 있지요."
"저 섬에 있는 노인들이 수도를 하고 있다는데 정말인가요?"
"그런 말은 있습니다, 주교님. 하지만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저도 모르겠씁
니다. 어부들이 봤다고는 하지만, 그 사람들은 하도 엉토리 같은 소릴 잘해서 믿
을 수가 있어야지요."
"저 섬으로 가서 노인들을 만나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갈 수 있겠소?"
주교가 물었습니다.
"큰 배로 갈 수는 없습니다. 보트로 갈 수는 있습니다만, 그건 선장님에게 물
어 보십시오."하고 키잡이는 말했습니다.
선장이 불려 왔습니다. 그러자 주교가 말했습니다.
"저 섬의 노인들을 만나 보고 싶은데 나를 좀 데려다 줄 수 있겠소?"
선장은 그만두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갈 수야 있습니다만 시간이 많이 걸리옵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 사람들은
볼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듣기엔 아주 바보 같은 노인들이 살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를 뿐 아니라 바다 고기처럼 말도 못한다더군요."
"하지만 한 번 만나 보고 싶고. 수고비는 드릴 테니 나를 좀 데려다 주시오."
하고 주교는 말했습니다.
선원들은 선장의 지시로 하는 수 없이 돛을 바꾸었습니다. 키잡이는 뱃머리를
돌려 섬 쪽으로 향했습니다. 뱃머리 쪽에 주교가 앉을 의자를 내왔습니다. 주교
는 의자에 앉아서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뱃머리로 몰려와
섬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눈 밝은 사람들에겐 섬의 바위와 움막도 보였습니다.
한 사람은 이미 세 노인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선장은 망원경을 꺼내어 섬
을 살펴본 다음, 주교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분명히 보입니다. 큰 바위 오른편 언덕에 세 사람이 서 있습니다. "
주교는 망운경을 눈에 대고 자기가 보고자 하는 곳으로 가져갔습니다. 분명히
세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하나는 키가 크고, 하나는 그보다 좀 작고, 또하나는
아주 작았습니다. 세 사람은 손을 잡고 해변가에 서 있었습니다.
선장이 주교 곁으로 가서 말했습니다.
"주교님, 이배는 여기서 멈추어야만 합니다. 더 가시려면 여기서부터는 보트를
타고 가셔야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닻을 내리고 기다리겠습니다."
곧 닻줄이 풀리고 닻이 던져지고, 돛이 내려졌습니다. 배는 멈추자 흔들거렸습
니다. 보트가 내려지고 노저을 사람들이 뛰어내렸습니다. 주교가 사다리로 다 내
려가 보트의 의자에 앉아, 선원들은 섬을 향해 노를 저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돌
팔매질을 하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갔으나 세 노인은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키
큰 노인은 벌거숭이 몸으로 허리에 거적때기 같은 것을 하나만 두르고, 그보다
작은 노인은 다 해진 수도복을 입고, 셋이서 손을 잡고 서 있었습니다.
선원들은 보트를 해변가에 대고 밧줄을 묶었습니다. 주교가 내렸습니다.
노인들이 머리를 굽혀 절하자 주교는 축복을 내렸습니다. 그 사람들은 머리를
더 깊이 숙였습니다. 그러자 주교가 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여기서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 수도를 하며, 세상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에게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 서있는 나는 보잘것
없는 그리스도의 종이오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분의 종을 돌보라는 부름을 받
고 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종인 여러분을 만나 뵙고, 가능하면 아무것이나
가르쳐 드리고 싶습니다."
노인들은 잠자코 웃으면서 서로 쳐다보기만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교는 말했
습니다.
"당신들은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어떻게 수도를 하고 있으며, 하느님을 또 어
떻게 섬기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중키의 노인은 한숨을 쉬며 제일 나이 많은 노인을 바라보았습니다. 키 큰 노
인 역시 얼굴을 찌푸리고 제일 나이 많은 노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제일
나이 많은 노인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종인 우리는 하느님을 섬길 줄 모릅니다. 다만 우리 자신을 섬기고
우리자신을 키워 나갈 뿐입니가."
"그럼 하느님께는 어떻게 기도드리지요?" 하고 주교가 ㅜ었습니다.
그러자 제일 나이 많은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도 셋, 우리도 셋이오니 우리
를 어여삐 여기소서!"
제일 나이 많은 노인이 이 말을 하자마자 세 노인은 다같이 하늘로 눈을 쳐들
고 말했습니다.
"당신께서도 셋, 우리도 셋이오니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주교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삼위일체라는 말을 들은 모양인데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
다. 하느님의 종이여, 나는 당신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ㅣ. 여러분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하는데 그분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 같군요.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르쳐 드릴 테니 잘 드으셔요. 그러나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려는 것은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하느님께
서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그분의 책 속에서 이르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교는 하느님이 어떻게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났는가를 설명해 주었
습니다. 이어 성부, 성자, 성신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성자는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 이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
르쳐 주셨습니다. 내 말을 잘 듣고 따라 하도록 하셔요."
주교는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아버지시여." 그러자 한 노인이 따라 했습
니다. "우리 아버지시여." 또 한노인이 따라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시여." "하늘
에 계신" 하고 주교는 계속했습니다. 노인들도 "하늘에 계신"하고 따라 했습니
다. 그러나 이번엔 중키의 노인이 제대로 따라 하지 못했습니다. 키가 큰 벌거숭
이 노인도 따라 외지 못했습니다. 그의 콧수염이 입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
로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일 나이많은 이빨 없는 노인도 역시 우물우
물했을 뿐입니다.
주교는 다시 한 번 되풀이했습다. 노인들도 다시 되풀이 했습니다. 주교는 바
위위에 걸터앉고 세 노인은 그 주위를 둘러서서 주교의 입을 들여다보고 있었습
니다. 그리고 주교가 말하면 따라서 했습니다. 이렇게 주교는 하루 종일 저녁때
까지 세 노인을 붙들고 애를 썼습니다. 같은 말을 열 번, 스무 번, 백 번가지 되
풀이한 적도 있습니다. 노인들도 그를 따랐습니다. 주교는 그들이 잘못하면 그것
을 고쳐 주면서 처음부터 되풀이 시켰습니다.
그래서 주교는 노인들이 기도문을 다 욀때까지 그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
다. 노인들은 먼저 주교의 말을 따라 하다가 나중엔 자기들끼리 외었습니다. 중
키의 노인이 제일 먼저 기도문을 다 외었습니다. 그래서 주교는 그 노인에게 자
꾸만 되풀이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두 노인도 기도문을 다 외우게 되었
습니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 왔습니다. 주교는 바다에서 달이 떠오를 무렵에야
큰 배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주교가 작별 인사를 하자 세노
인은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습니다. 주교는 그들을 일으켜 세워 키스를 해주
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르쳐 준 대로 기도하라고 이른 뒤 보트를 타고 큰
배로 향했습니다.
큰 배로 오는 동안 세 노인이 큰소리로 기도문을 외는 소리가 계속 들려 왔습
니다. 보트가 큰 배에 가까워지자 노인들의 목소리는 차차 들리지 않게 되었으
나 그 모습만은 달빛에 환히 보였습니다. 세 노인은 주교가 그 섬으로 갈 때 서
있던 바로 그 해변가에 서 있었습니다. 제일 작은 노인이 가운데서고, 키 큰 노
인이 그 오른편에, 중키의 노인이 왼편에 서있었습니다. 주교가 큰 배에 이르러
갑판 위에 오르자 닻과 돛이 올려지고 배는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
다. 주교는 배의 뒤쪽으로 가 앉아 계속 섬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처음 얼마동
안은 노인들의 모습이 보였으나 얼마 안있어 눈에서 사라지고 섬만 조그맣게 보
였습니다. 나중에는 섬도 사라지고 바다만 달빛에 어른거릴 뿐이었습니다.
순례자들은 잠이 들고 갑판 위는 아주 조용했습니다. 그러나 주교는 잠이 오
지 않아 혼자 배 뒷전에 앉아 사라져 간 섬 쪽 바다를 바람보며 착한 노인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주교는 노인들이 기도문을 알게 되어 얼마나 기뻐할까 생
각했습니다. 그리고 신과 같은 세 노인을 도와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도록 그섬에 인도하여 주신 하느님께 고마워하였습니다.
주교는 이렇게 앉아서 사라져 간 섬 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부셔 오며 여기저기서 달빛이 물결에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달빛 속에서 갑자기 무엇이 하얗게 반짝이는 것이보였습니다. 샐까,
갈매길까, 아니면 보트의 돛이 반짝이는 것일까. 주교는 자세히 바라보며 생각했
습니다. '보트가 돛을 달고 우릴 쫓아오는모양이군. 얼마 안 있으면 우리를 따
라잡을 거야. 처음에는 멀었는데 이젠 아주 가까워졌어. 그런데 보트는 아닌 것
같아. 돛 모양도 아니고. 그러나 무엇이 우리를 쫓아오는 것만은 확실하다.' 주교
는 그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배 같기도 하고 새 같기도
하고, 물고기 같기도 하였습니다마는 또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얼핏 보기에 사람
같기도 한데 사람치고는 너무 컸고, 사람이 또 바다위에 서 있을 리가 없습니다.
주교는 일어나 키잡이 곁으로 가서 말했습니다.
"저걸 좀 보시오. 저게 뭡니까?"
"형제, 저게 뭐지여? 대체 저게 무엇인가요?"
이렇게 주교가 묻고 있었지만, 이미 자기 눈으로 그것을 확실히 보고 있었습
니다.
"노인들이 바다 위로 달려오는군. 흰 수염을 번쩍이며 마치 부둣가에 서 있는
배로 다가가듯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소."
키잡이는 뒤돌아보고 깜짝 놀라 키를 내동댕이치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큰일났다! 노인들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 땅처럼 바다 위를 달려서." 이 말
을 듣고 다른 사람들도 일어나 모두 배 뒤쪽으로 갔습니다. 과연 노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양쪽에 선 노인들이 배를 세우라고
손을 흔들어댔습니다. 세 노인들은 모두 땅처럼 바다 위를 달려오고 있었으나,
발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배를 멈출 겨를도 없이 노인들은 뱃전으로 와서 머리를 쳐들고 똑같이 말했습
니다.
"하느님의 종이신, 우리는 당신의 가르침을 잊어먹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머지 말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젠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사오니 다시 우리
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주교는 성호를 긋고 세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종이시여, 여러분의 기도는 이미 하느님께 닿았습니다. 당신들을 가
르칠 사람은 내가 아닙니다. 오희려 당신들이 죄많은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
시오!"
그리고 주교는 코가 땅에 닿도록 노인들에게 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노인들은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노인들이 사라져 간쪽에서는 한 줄기 빛이
새벽까지 빛나고 있었습니다.
뉘우치는 죄인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감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
다." 하고 대답하셨다. (루가의 복음서, 23 : 42 ~ 43)
옛날 어느 곳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칠십 평생 동안 온갖 죄
악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인
은 뉘우칠 줄 몰랐습니다. 마침내 죽음의 시각이 닥쳐왔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 사람은 울면서 하느님께 빌었습니다.
"주여, 당신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도둑을 용서하듯 저도 용서하여 주시옵소
서!"
이 말을 하자마자 그의 영혼은 육체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죄인의 영혼은 하
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에 천구의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죄인은 문을 두드리고 천국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문 뒤
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고? 이 사람은 살아 생전에 무슨 일을 했
느냐?"
그러자 폭로자의 목소리가 대답했습니다. 폭로자는 이 사람이 저지른 죄악을
낱낱이 들추어냈습니다. 그러나 착한 일은 하나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문 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대답했습니다.
"죄인들은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 어서 물러가라."
죄인이 다시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의 목소리는 들리오나 얼굴도 보이지 않고 이름도 모르겠나이다."
목소리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나는 사도 베드로다."
그러자 죄인이 말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생각해 주십시오, 사도 베드로님. 사람의 약함과 하느님의 자비
로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까? 당신은 그분이
말씀하신 가르침과 그분의 모범적인 생활을 보지도 못하셨습니까? 이런 일을 생
각해 보십시오. 언젠가 예수님이 괴로워하시며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당신더러
자지 말고 기도드려 달라고 세 차례나 당부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
은 눈이 감겨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그분은 잠자는 당신을 세 번씩이나 보았습
니다. 나도 그와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분을 모른
다고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그분이 가이샤의 집으로 끌려갔을 때 세 번
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나도 그와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또 이런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닭이 울기 시작하자 그곳을 떠
나 슬피 울었습니다. 나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니 당신은 나를 천국에 넣어 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러자 천국의 문 뒤에서 목소리가 잠잠해졌습니다.
죄인은 조금 서 있다가 다시 문을 두드리며 천국에 들여보내 달라고 부탁했습
니다.
그러자 문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냐? 저 사람은 세상에서 어떤 생활을 했느냐?"
폭로자의 목소리가 대답했습니다. 그는 또다시 죄인의 나쁜 일을 낱낱이 들추
었습니다. 그러나 착한 일은 하나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문 뒤에서 목소리가 대답했습니다.
"어서 물러가라. 그런 죄인들은 우리와 함께 천국에서 살 수 없느니라."
죄인이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의 목소리는 들리오나 얼굴도 보이지 않고 이름도 모르겠나이다."
문 뒤의 목소리가 다시 말했습니다.
"나는 예언자 다윗 왕이다."
죄인은 실망하지 않고 천국의 문에 붙어 서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생각해 주십시오, 다윗 전하. 그리고 사람의 약함과 하느님의 자
비로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시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칭
찬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국도 명예도 돈도 처
자식도. 그런데 당신은 지붕 위에서 가난한 사람의 아내를 발견하고 마음속에서
나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아몬 자손의 칼로
바로 그 남편을 죽였던 것입니다. 당신은 잘 살면서도 가난한 사람에게서 마지
막 양을 빼앗고 그 사람을 죽여 버렸습니다. 나도 그렇게 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후에 가서 당신이 어떻게 뉘우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내가
지은 죄를 알고 있으며, 그것을 몹시 슬퍼한다'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나도 그와
마찬가집니다. 그러니 당신은 나를 천국에 넣어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문 뒤의 목소리가 잠잠해졌습니다.
죄인은 조금 서 있다가 다시 문을 두드리며 천국에 들여보내 달라고 부탁했습
니다. 그러자 문 뒤에서 세 번째의 목소리가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군고? 저 사람은 세상에서 어떤 생활을 했느냐?"
폭로자의 목소리가 대답했습니다. 그는 세 번째도 죄인의 나쁜 일만 들추어낼
뿐 좋은 일은 하나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문 뒤에서 목소리가 말했습니다.
"어서 물러가라. 죄인들은 천국에 들어올 수 없느니라."
죄인이 말대답을 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들리오나 얼굴도 보이지 않고 이름도 모르겠나이다."
목소리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신학자 요한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던 제자이니라."
그러자 죄인은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이젠 나를 천국에 넣어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다윗은 사람의
허약함과 하느님의 자비를 알고 있으므로 나를 들여보내 줄 것입니다. 신학자
요한님, 당신은 당신의 책 속에서 하느님은 곧 사랑이며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른다고 쓰지 않았습니까?
'형제들이여, 서로 사랑하라!'고 늙어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은 당신이 아니었습
니까? 그런 당신이 이제 와서 어떻게 나를 미워하고 쫓아낼 수 있겠습니까? 당
신의 입으로 한 말을 거짓이라고 하든가, 아니면 나를 사랑하여 천국에 들여보
내 주십시오."
그러자 천국의 문이 열렸습니다. 요한은 뉘우치는 죄인을 안아서 천국으로 들
어오게 했습니다.
달걀 만한 씨앗
어느 날 산골짜기에서 어린이들이 가운데줄이 든 씨앗 같은, 달걀 만한 물건
을 보았습니다. 마침 거기를 지나가던 사람이 어린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 물건
을 보고 5까뻬이까를 주고 사서 성안으로 갖고 와 귀한 물건으로 황제에게 팔았
습니다.
황제는 현인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것이 무슨 물건인지, 즉 달걀인지 씨앗인지
를 알아보라고 일렀습니다. 현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해답을 얻지는 못했어요. 한데 그것을 창문 위에 놓아 두고 있으려니까 암탉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그것을 쪼아 구멍을 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현인들은 그것
이 씨앗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현인들은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아뢰었습니
다.
"이것은 호밀이옵니다."
황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현인들에게 이 씨앗이 언제 어디서 어
떻게 생겨났는지를 알아보라고 일렀습니다. 현인들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
여러 가지 책을 뒤져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황제 앞에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소인들의 책에는 이것에 관해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습
니다. 그러니 농부들에게나 한 번 물어 봐야 할 줄 압니다. 늙은이들 가운데 누
가 언제 어디에 이런 씨앗이 뿌려졌는지 혹시 들어 본 적이 없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황제는 사람을 보내 늙은 농부 한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일렀습니다.
신하들은 나이 많은 농부 한 사람을 찾아 황제 앞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 농부
는 벌써 이도 다 빠지고 얼굴도 푸르죽죽하게 쪼그라든 늙은이였습니다. 그는
두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들어섰습니다.
황제는 그에게 씨앗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늙은 농부는 벌써 눈이 잘 안 보였
습니다. 그래서 반쯤은 눈으로 보고 반쯤은 손으로 만져 보는 것이었습니다.
황제는 그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영감, 이런 씨앗이 어디서 생겼는지 모르겠소? 밭에 이런 곡식을 심은 일은
없었소? 혹은 농사짓던 시절에 혹시 이런 씨앗을 사본 적은 없었소?"
귀까지 가물가물 멀어가는 노인은 겨우 알아듣고 가까스로 대답했습니다.
"소인은 밭에다 이런 곡식을 심은 일도 없고 거두어들인 일도 없으며 사본 일
도 없습니다. 소인들이 곡식을 심었을 때 씨앗은 이것보다 훨씬 작았습죠. 지금
도 그렇긴 하지만. 하오나 소인의 아버님에게 한 번 여쭈어 봐야겠습니다. 어쩌
면 그 어른은 어디서 이런 씨앗이 나왔는지를 혹시 들었는지 모르니까요."
황제는 이 노인의 아버지에게 사람을 보내 불러오게 했습니다. 노인의 아버지
도 찾아서 어전으로 데려왔습니다. 이 늙은 할아버지는 지팡이 하나에 몸을 의
지하고 들어왔습니다.
그에게 황제는 씨앗을 보여 주었습니다. 늙은이는 아직도 밝은 눈을 갖고 있
었으므로 잘 알아보았습니다. 황제는 그에게도 묻기 시작했습니다.
"영감, 그대는 이런 씨앗이 어디서 생겼는지 알 수 있겠소? "그대 밭에 이런
곡식을 심은 적은 없소? 혹은 그대가 농사를 짓던 시절에 어디서 이런 씨앗을
산 적도 없었던가?"
할아버지는 귀가 다소 멀기는 했지만 아들보다는 잘 알아들었습니다.
"없소." 하고 그는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인은 밭에다 이런 씨앗을 뿌린 일도 거두어들인 일도 없습니다. 또 산 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인이 젊었을 때는 돈이란 게 없었거든요. 모든 사람이 자
기 곡식을 심고 거두어 먹었으며 모자랄 때에는 서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소인
은 어디서 이런 씨앗이 생겼는지 모릅니다. 옛날의 씨앗은 요즈음의 씨앗보다
더 굵고 더 많은 열매를 열게 했지만 이처럼 큰 것은 못 보았습니다. 이건 저의
아버님께 들은 이야기지만 아버지 시절의 곡식은 더 많은 열매를 거두어들였는
데 한결 열매도 굵었다고 합니다. 저의 아버님께 물어 보시면 잘 알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하여 황제는 다시 이 늙은이의 아버지를 데리러 사람을 보냈습니다. 맨
처음에 온 늙은이의 할아버지인 그 노인도 찾아서 데려왔습니다. 그 노인은 지
팡이도 짚지 않고 가벼운 걸음으로 황제 앞에 나섰습니다. 눈도 밝고 귀도 잘
들리며 말도 또렷했습니다. 황제는 이 노인에게 다시 그 씨앗을 보여 주었습니
다. 노인은 그것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더니,
"오랫동안 이런 옛날 곡식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씨앗을 물어뜯어 잘근잘근 씹더니,
"이게 그 곡식이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어서 말해 보오, 영감. 어디서 이런 씨앗이 생겼는지? 그대는 이런 곡식을 자
기 밭에 심은 일은 없소? 혹은 옛날 어디서 누구에게 그런 곡식을 산 일은 없었
던가?"
그러자 노인은 말했습니다.
"이런 곡식은 소인이 젊었을 때 어디서나 났습니다. 이런 곡식으로 저는 평생
먹고 살아왔고 또 사람들을 먹여 살려 왔습죠."
그러자 황제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영감, 어디서 그런 씨앗을 처음에 사서 심었소? 혹은 자신이 자기 밭에
뿌린 일은 없었소?"
노인은 히죽 웃었어요.
"소인이 젊었을 때, 곡식을 팔고 사는 일을 궁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곡식은 누구에게나 넉넉히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곡식을 직접 심고 거두어들이
고 타작도 했었고요."
황제는 거듭 물었습니다.
"어디 그럼 말해 보시오, 영감. 그대는 어디에다 이런 곡식을 심었고 또 그대
의 땅은 어디에 있었는지를 말이오."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소인의 밭은 하느님의 땅이었지요. 쟁기질을 하면 거기가 밭이 되는 것이었습
니다. 땅은 따로 있는 게 아니어서 제 땅이란 걸 몰랐습니다. 제 것으로 불렀던
것은 소인의 노력뿐이었습니다."
"그럼 두 가지만 더 말해 주오. 한 가지는, 어째서 옛날에는 이런 씨앗이 있었
는데 지금은 나지 않으며 또 한 가지는, 그대의 손자는 지팡이 둘을 짚고 다니
고 또 그대의 아들은 지팡이 하나를 짚고 왔는데 나이가 더 많은 그대는 그처럼
가뿐하게 혼자 걷는가 하면 눈도 밝은데다 이도 튼튼하고 말도 또렷하고 상냥한
지, 그것은 도대체 무슨 탓이오? 그 까닭은 무엇이오?"
그러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세상 사람들이 제 노력으로 살아가지를 않고 남의
것을 탐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를 않았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고 있었고 제 것만 가졌을 뿐 남의 것을 결코
탐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악마의 농부
어느 가난한 농부가 아침도 굶은 채 빵 한 조각을 싸들고 밭을 갈러 들로 나
갔습니다. 농부는 쟁기를 내리고 수레를 풀어 덤불 밑에 끌어다 놓은 다음, 그
위에 빵을 놓고 윗도리로 덮어 두었습니다. 한참 밭을 갈고 나니 말도 지치고
농부도 배가 고팠습니다. 농부는 쟁기를 땅속에 꽂아 둔 채 말을 풀어 풀을 뜯
어먹게 한 뒤 자기도 점심을 먹으려고 윗도리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농부가 윗도리를 쳐들어 보았으나 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그
근처를 찾아보기도 하고 윗도리를 뒤집어 털어 보기도 했으나 빵은 보이지 않았
습니다. 농부는 놀라서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아무도 온 사람은 없는데 누가
빵을 가져갔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 동
안 작은 악마가 빵을 훔쳐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덤불 뒤에 숨어서 농부
가 욕할 때를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목을 기쁘게 해줄 생각이었습니
다.
농부는 약간 슬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는 수 없지.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나! 필요한 사람이 가져갔겠지. 아무나
잘 먹게 내버려두자!"
그리고 농부는 샘물 가로 가서 물을 실컷 마신 뒤 잠시 쉬다가 다시 말을 붙
들어 쟁기를 채우고 밭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악마는 농부가 죄를 짓게끔 하는 데 실패하자 당황한 나머지 마왕에게
이야기하러 갔습니다. 마왕 앞에 나타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가 농부의
빵을 훔쳤는데도 그는 욕 대신 오히려 '잘 먹으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왕
은 몹시 화를 냈습니다.
"만약 농부가 그 일에서 너를 이겼다면 그건 네 잘못이다. 방법이 서툴렀기 때
문이야. 만약 다른 농부들에 이어 여자들도 그런 버릇이 생기면 우리는 무엇으
로 살아가겠는가. 그 일은 절대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 다시 농부에게 가서
그 빵의 값을 하고 오너라. 만약 3년 안에 그 농부를 이기지 못하면 너를 성수
속에 빠뜨려 버리겠다!"
작은 악마는 깜짝 놀라 세상으로 달려나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자기의
잘못을 되돌릴 수 있을까,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작은 악마는 좋은 사람으로 둔갑하여 가난한 농부네
집 머슴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여름에 가뭄이 들 것을 생각하여 습기 많은
땅에 곡식을 심으라고 농부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농부는 머슴이 시키는 대로
습기 많은 땅에 씨앗을 뿌렸습니다. 다른 집 곡식은 모두 타죽는데, 이 가난한
농부네 곡식은 큼직하게 잘 자라 풍작이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이듬해 햇곡식
이 나올 때까지 먹고도 아직 많이 남아돌아갔습니다.
다음해 여름 머슴은 농부에게 언덕 위에 곡식을 심으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다른 집 곡식들은 모두 쓰러지고
물에 잠겨 제대로 영글지 않았는데, 이 농부네 언덕 위의 곡식만은 잘되었습니
다. 농부네 집에는 더 많은 곡식이 남아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농부는 그것을 어
떻게 처분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러자 머슴은 농부에게 밀을 빻아서 술을 담그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농부는
술을 많이 담가 가지고 자기도 마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작은 악마는 마왕에게 가서 빵의 실수를 갚게 되었다고 자랑하였습니다. 마왕은
그것을 보러 갔습니다.
농부네 집에 가보니, 돈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놓고 술을 대접하고 있었습니
다. 안주인이 손님들에게 술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탁 모퉁이를 돌다
가 옷에 걸려 그만 술잔을 엎지르고 말았습니다. 농부는 화를 내며 아내를 나무
랐습니다.
"조심해, 바보 같으니! 이 좋은 술을 엎지르다니 이게 개숫물인 줄 알아? 이
안짱다리야."
작은 악마로 팔꿈치로 마왕을 쿡 찔렀습니다.
"보셔요. 이젠 저 농부도 빵 조각을 아까워하게 됐어요."
농부는 아내를 꾸짖고 나서 손수 술을 날랐습니다. 이때 일을 마치고 가던 가
나한 농부가 초대도 받지 않았는데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앉아 보
니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침을 삼키며 앉아 있었으나 주
인은 술을 주지 않고 혼자 입 속으로 중얼거릴 뿐이었습니다. "아무에게나 술을
줄 수야 있나."
이 말도 마왕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작은 악마는 우쭐하여 "두고 보십시오. 이
제 시작이니까요." 하고 뽐내는 것이었습니다.
잘사는 농부들은 술잔을 비웠습니다. 주인도 한잔 죽 들이켰습니다. 그러고 나
서 그들은 서로 비위를 맞춰 가며 상대를 추켜 올리고 입에 발린 거짓말을 지껄
여댔습니다.
마왕은 열심히 듣고 있다가 작은 악마를 칭찬했습니다.
"만약 저 술 때문에 그렇게 아첨하고 서로 속이게 된다면 저들은 모두 우리
손아귀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다."
그러자 작은 악마가 말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아직도 멀었습니다. 저들에게 한잔씩 더 먹여 보십시오. 지금
은 여우처럼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서로 속이려 하고 있지만, 얼마 안 있으면
심술궂은 늑대가 될 겁니다. 두고 보셔요."
농부들은 한잔씩 더 마셨습니다. 그들의 말소리는 점점 커지고 거칠어졌습니
다. 간지러운 칭찬의 말 대신에 그들은 서로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맞붙어 싸우
다가 마침내 서로 콧잔등까지 잡아당겼습니다. 주인도 싸움판에 끼여들었다가
흠씬 두들겨 맞았습니다.
마왕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도 마음에 들어 "그것 참, 재미있
는데." 하였습니다.
그러나 작은 악마는 말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아직 멀었습니다! 놈들에게 한잔씩 더 먹여 보십시오. 지금
놈들은 늑대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잠시 후에 한잔씩 더 들어가면 당장 돼지
처럼 되어 버릴 겁니다."
농부들은 한잔씩 더 들이켰습니다. 그러자 완전히 취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무
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흥얼거리고 소리치며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
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집을 나와 흩어졌습니다. 하나, 둘, 셋씩 짝을 지
어 비틀거리며 거리를 휩쓸었습니다. 주인은 손님들을 보내려고 나왔다가 웅덩
이에 처박혀 온몸이 물구덩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돼지처럼 뒹굴며 으르렁거
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층 마왕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주 멋진 음료수를 생각해 냈구나. 이것으로 너는 빵의 실수를 갚게 되었다.
그런데 너는 이 음료수를 어떻게 만들었지? 아마 그 속에 먼저 여우의 피를 넣
었겠지. 그래서 농부가 여우처럼 꽤가 많아졌을 거야. 그 다음에 너는 늑대의 피
를 넣었어. 그래서 농부가 늑대처럼 사나워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는 돼지의
피를 넣었어. 그래서 농부가 돼지처럼 되었지."
"천만에요."하고 작은 악마가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만 곡식을 남아돌게 만들어 주었을
뿐입니다. 그 짐승과 같은 피는 언제나 그 농부의 몸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러나 필요한 정도밖에 곡식을 짓지 못할 때는 그 피는 밖으로 나타나지 않았죠.
그때는 그 농부가 하나뿐인 빵도 아까워하지 않았는데 곡식이 남아돌게 되자 무
슨 재미나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농부에게 위안
거리로 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농부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자기
의 위안거리로 만들고자 술을 담갔습니다. 이때 그의 몸 속에 있던 여우와 늑대
와 돼지의 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술만 마시면 언제나 짐승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마왕은 작은 악마를 칭찬하고 빵의 실패를 용서한 뒤 더 높은 자리로 올려 주
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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