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의 딸(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
한 구두장이가 마누라와 자식들을 거느리고 허름한 농가에 세들어 살고 있었
다. 집도 땅도 없었으므로 오직 구두를 만들고 고치고 하여 생계를 유지해 나가
고 있었다. 곡물은 비싸고 일삯은 헐하기 ㄸ문에 버는 것은 모조 리 먹는 것을
사는 데 들어갔다. 구두장이는 마누라와 공동으로 입는 모피 외투를가지고 있었
는데 그것도 다 해져 누더기가 돼 버렸다. 그래서 벌꺼 2년째나 새 모피 외투
ㅍ 만들기 위해양피를 사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가을이 되자 구두장이는 약
간의 돈이 생겼다. 3루블짜리 지페가 마누라의 롱 속에 있었고, 또마을 농부들에
게 꾸어 준 돈이 5루블 20코페이카 가량 있었다.
그리하여 구두장이는 꾸어준 돈을 받아 양피를 사려고 아침부터 마을에 갈 채
비를 했다. 그는 조반을 마치자 루 바시카 위에다 솜을 넣은 마노라의 무명 자
켓을 껴입고 그위에 긴 보직 외투를 걸친 다음 3루블을 호주머니에 놓 고 지팡
이로 사용할 요량으로 나뭇가지를 한가지 꺾어 손에 쥔채 실을 떠났다. 두장이
는 마을에 이르러 한 농 부의 집을 찾아갔는데 주인이 없었다. 그 마누라는 일
주일 안으로 주인 편에 돈을 보내겠다고 약속할 뿐 빚을 갚 지 않았다. 또 다른
농부에게고 갔다. 그 농부는 돈이 한 푼도 없다고 딱 잘라 말하고는장화를 고친
값 20코 페이카를 줄 뿐이었다. 구두장이는 양피를 외상으로 사려고 했으나 가
죽 상에서는 외상을 주려하지 않았다. "돈을 가지고 와요, 그러면 얼마든지 줄
테니까, 외상이 얼마나 받어먹기 어려운지 우리넨 너무나 잘알아요." 이렇게 되
어 구두장이는 겨우 구두를 고친 값 20코페이카를 받고, 그리고 어느 농부에게
서 낡은펠트화에 가 죽을 대어 꿰매는 일을 맡았을 뿐이었다. 구두장이는 속이
상해서 20코페이카를 몽땅 털어 보드카를 마셔 버린 다음 양피도 사지 못한 채
집을 행해 걸었 다. 아침엔, 좀 추운 것 같았지만 한잔마시자 모피 외투 따윈 입
지 않아도 몸이 후끈거렸다. 구두장이는 길을 걸 었다. 그는 한쪽 손에 쥔 지팡
이로 울퉁불퉁 언 땅을 두두리고 다른쪽 손으로는 펠트화를 휘두르면서 투덜댔
다. "젠장, 모피 외투같은 거 입지 않아도 따습기만 하군. 작은 병 하나 마셨더니
온 의 피가 달음박질치는구먼. 이 정도 추위에 모피라니! 난 사내 대장부라니까!
아암, 아무렇지도 않아, 난! 모피 외투 따윈 없어도 살수 있 어. 그런건 한평생
필요 없어. 하지만 마누라가 가만 있지 않을 거란 말야. 그게 개운찮은데. 는 죽
어라 일하 는데 그 여잔 날 아주 깔본단 말이야. 가만 있자. 다음엔 돈을 갚지
않으면 모자를 잡아벗기고 말 테니, 아암, 반드시 그렇게 하고말고 그런데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20코페이카씩 찔끔찔금 주다니! 흥, 20코페이카로
대체 뭘 한란 말인고? 술이나 마실 수밖에 없잖은가 말야. 넌 곤란하다고 하
지만 그래, 나는 곤란하지 않은 줄아 나? 너는 집도 있고 소도 있고 말도 있지
만 나는 알몸뚱이다. 넌 네 빵을 먹고 있지만 나는 사서 먹는다구. 아무 리 몸
부림을 쳐 보아야 일주일에 빵값만도 3루블은 치러야 돼. 집에 돌아가면 빵도없
을테니 또 1루블 반은 내놔
야 해. 그러니까 자네도 다음번엔 내 돈을 갚아 줘야겠어." 이윽고 구두장이
는 길모퉁이의 교회 근처까지 왔다. 교회 뒤에 무엇인가 허연 것이 보였다.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으므로 구두장이는 찬찬히 보았지만 무엇인지 알아볼 수
가 없었다. "기에 돌 같은 건 없었지, 아마 소인가? 그런데 짐승 같지도 않아. 머
리는 사람같지만 사람치곤 너무 희군.
그리고 사람이 이런데 있을리가 없지." 좀더 다가가니 물체가 똑똑히 보였다.
이게 웬일인가. 아니나다를까 사람은 사람인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몸으 로
교회벽에 기대어 앉은채 꼬짝도 하지 않았다. 구두장이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누가 저 사나이를 죽이고 옷을벗겨 여기 내버린 모양이야. 너무 바싹 다가갔가
는 나중에 무슨 봉면을 당할지 모르겠군.'
그래서 구두장이는 그냥 지나쳐 갔다. 교회 모퉁이를 돌아다 보니 사나이가꿈
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쩐 지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구두장이는
더럭 겁을 내며 생각했다. '가까이 가 볼까, 그냥 지나쳐 갈까? 혹시 갔다가 무
슨 봉변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지. 저놈이 누군지 내가 모르잖 아. 좋은 일을 하
고서 이런데 왔을리는 없겠고, 가까이 가기가 무섭게 덤벼들어 날 목졸라 일는
지도 몰라. 그 렇게되면 꼼짝없이 죽는 거다. 설령 목졸라 죽이지 않더라도 시
끄러운꼴을 당할건 뻔해. 저 벌거숭이 사나일 어 쩐다? 내가 입고 있는 것을
홀랑 벗어줄 수도 없고, 에라, 그냥 지나쳐 가자, 제기랄!' 그렇게 생각하면서
구두장이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 양심이 고개를쳐들
었다. 구두장 이는 한길 복판에서 말을 멈추고 혼잣말을 했다. "도대체 너는 뭘
하는거냐.세묜?" "사람 하나가 죽어가고 있는데 겁을 집어 먹고 도망가려 하다
니. 네가 뭐 큰부자라도 된단 말이냐? 가진 물건을 빼앗길까봐 겁이 나는가?
세묜, 그건 나쁜일이다!" 그리하여 세묜은 되돌아서서 사나이에게 다가갔다.
2
세묜은 그에게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직 젊은 사나이여서 힘도 있을
듯하고 몸에 얻어맞은 흔적도 없었 으나, 몸이 꽁꽁 얼어 말을 듣지 않는 모양
이었다. 벽에 기대앉은 채 세묜쪽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눈을 뜰 수도 없는 것 같았다. 세묜이 다가가자 사이
는 그제야 제 정신이 든 듯 고개 를 제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들고 눈을 떠 세
묜을 바라보았다. 사나이의 그 시선이 세묜의 마음을 끌었다. 그래서 펠트화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허리띠를 끌러 그 허리띠를 펠트화 위에 놓은 다음외투
를 벗었다.
"이러고 있을때가 아냐! 자아, 이걸 입어요! 자!" 세묜은 사나이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사나이는 일어섰다. 세묜이 좀더 자세히 그 얼굴을 보니 사나이는 드
럽고 깨끗한 피부에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묜은 그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 주려 했으나 팔이 소매 속으로 잘 들어가지 않았다. 세묜은 두팔을 끼워
주고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앞을 여며준 다음 허리띠를 매어 주었다. 세묜 은
헌 모자도 벗어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나는 대머리지만 이자는 긴 고수머리가
덥수룩히 자라 있어,' "그보다도 자네는 신을 신어야 겠군."
구두장이는 사나이는 앉히고 펠트화를 신겼다. 이제 됐다. 자아, 이번엔 좀
움직여서 언 몸을 녹여야지. 뒷일은 내가 걱정 하지 않더라고 다른 사람이 다처
리 해 줄거야. 자네 걸을 수 있나?"
사나이는 멀거니 서서 감격한 듯한 표정으로 세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나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왜 말을 하지 ㅇ는 거야? 이런데서 겨울을 날 셈인가?
집으로 돌아가야 지., 자, 여기 내 지팡이가 있으니까 몸 이 말을 듣지 않거든
이걸 짚어요. 자, 자, 걸어요, 걸어!" 그러자 사나이는 걷기 시작했다. 조금도 뒤
떨어지지 않고 잘 걸었다. 두 사람이 길을 걷기 시작했을때 세묜이 말했다.
"자네 대체 어디서 왔나?"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닙니다."
"이 고장 사람이면 난 다 알아. 그래 왜 이런데까지 왔나? 교회 근처까지 말
야."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어떤 나쁜 놈들이 이런 짓을 ㅎ겠
지?" "그런일은 없었습니다. 나는 신의 벌을 받았지요."
"그야 물론 만사가 신의 뜻임엔 틀림없어. 그렇더라도 어디 좀 들어가 쉬어야
할텐데. 자네 어디로 갈건가?"
"저는 오갈데가 없는 몸입니다." 세묜은 깜짝 놀랐다. 보기에는 거리를 떠도
는 부랑아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세묜은 생각했다. '그야 물론 세상 에는 말못
할 일도 많기는하지.' 그는 사나이에게 말했다.
"어ㄸ, 우리 집에 가는게? 불을 쬘 수 있어." 세묜은은 집을 행해 걸었다. 낯
선 사나이는 한 발짝도 뒤떨어지지 않고 나란히 따라 걸었다. 찬바람이 세묜의
루바시카 밑으로 스며들었다. 차차 술이 깨며서 추워져 왔다. 세묜은 코를 훌거
리며 몸에 걸친 마누라의 자켓 앞 섶을 여미고 걸으면서 생각했다.
'아니 이건 어떻게 된 모피 외투람. 모피 외투를 마련하러 갔다가 외투를 고하
고 벌거숭이 사나이까지 거느리 게 됐으니. 이거 마트료나가 야단일텐데!'
마트료나를 생각해 내자 세묜의 마음은 우울해졌다. 그러나 옆의 낯선 사나를
쳐다보고 교회 뒤에서 이 사나이 가 자기를 쳐다보았던 시선을 생각해 내자 다
시 마음이 유쾌해졌다.
3
세묜의 마누라는 얼른 일을 마쳤다. 장작을 패고 물을 긷고 아이들과 같이 녁
식사를 하면서 빵을 굽는일을 오늘 할까, 내일로 미룰까, 하는 문제만 생각하고
있었다. 빵은 큰 것이 한 조각 남아 있었다. '세묜이 거기서 점심을 먹고 온다
면 저녁은 그리 많이 먹지 않겠지. 그렇게 되면 내일 빵은 이것으로 충분다.'
마트료나는 빵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오늘은 빵을 굽지 말아야겠
다. 밀가루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걸로 금요일까지 먹도록 하자.' 마트료나는
빵을 치우고 테이블 옆에 앉아 남편의 루바시카를 깁기 시작했다. 바느질은 면
서 마트료나는 남편 이 어떤 양피를 사올까만 생각했다.
'모피 장수에게는 속아 넘어가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사람이 워낙 좋아으니 수
없어. 그이는 조금도 남을 속이 지 못하지만 어린 아이도 그이를 속이는 것쯤
은 문제없으니 말이야. 8루블이라면 큰 돈이니까 좋은 모피 외투를 만들수 있
겠지. 최고급은 아니라도 어쨌든 모피 외투를 살 수는 있어. 작년 겨울에는 피
외투가 없어서 얼마나 고생을 했나! 강엘 갈수가 있었나, 산엘 갈수가 있었나.
지금도 그렇지, 옷이란 옷은 모조리 입고 나가버리니까 난 걸칠 것도 없어. 그
리 일찍 떠난 건 아니지만, 이제 올때도 됐는데... 아니, 이 양반이 또 술령을 하
고 있 는 게 아닐까?'
마트료나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입구 층층대가 삐그덕거리면서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마트료나는
바늘겨레에 바늘을 꽂은 입구쪽으로 나갔다. 그리고 보니 사나이 둘이 들어는
것이 아닌가. 세묜 옆에는 낯선 사나이가 맨발에 펠트화를 신고 모자도 없이
서 있었다. 마트료나는 당장에 남편이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알았다. 역시 마시고
왔구나. 남편은 외투도 입지 않고 속옷바람엔데, 게다가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고 말없이 서 있었다. 마트료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돈으로 몽땅 마셔
버린게 틀림없어. 알지도 못하는 건달하고 퍼마시고 한술 더 떠 그작까지 끌고
왔구먼.' 마트료나는 두 사람을 앞세우고 뒤를 따라들어가다 생판 모르는 젊고
빼빼 마른 사나이가 입고 것 같지도 않았고 모자도 쓰지 않았다. 집 안으로 들
어온 좋은 사나이가 입고 있는 외투가 바로 자기네 것임을 알았다. 외투 밑에는
셔츠를 입은 것 같지도 않았고 모자도 쓰지 않았다. 집 안으로 어온 젊은 사나
이는 그냥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도 않고 눈도 쳐들지 않았다. 그래서 마트
료나는 필경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겁을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트료나는 심
쩍은 눈으로 페티카쪽을 떨어져 서서 두 사람의 거동을 살폈다. 세묜은 모자를
멋고 채연하게
의자에 앉았다. "여보, 마트료나, 식사 준빌 해야지." 마트료나는 입속으로 무
엇이라고 중얼거릴 뿐 페치카 옆에 선 채 움직이려도 하지 않고 두사람을 번갈
아 쳐다보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세묜은 마누라가 화난 것을 보고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낯선 사나이의 손을 잡았다.
"자, 앉아요, 저녁을 먹어야지." 낯선 사나이는 의자에 앉았다.
"왜 안해요, 하긴 했지만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예요. 보아하니 당신을 염치저
홀랑 마셔 버린 모양이군요. 모피 외투를 마련하러 간다더니 모피 외투는 커녕
입던 외투까지 없앤데다 건달까지 데리고 오다니. 당신네들 주정뱅이에게 줄 저
녁은 없어요." "마트료나, 까닭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면 안 돼요. 먼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 보아야지." "그런 건 어떻든 좋아요. 그래 돈은 어디 있어요?
말해 봐요." 세묜은 외투 호주머니를 더듬어 돈을 꺼냈다.
"여기 돈 있잖아. 트리포노프가 주질 않더군, 내일은 꼭 주겠다고 약속하긴 지
만." 마트료나는 더욱더 화가 치밀었다. '모피도 사지 않고 단 하나밖에 없는
외투를 낯선 벌거숭이 사나이에게 입혀 가지고 집으로 끌고 오다니.'
마트료나는 테이블 위의 돈을 집어 함롱 속에 간수하며 말했다. "저녁은 없어
요. 벌거숭이 술주정뱅이를 일일이 대접하다간...." "마트료나, 말 삼가해. 내 말
좀 들으라니까...." 당신 같은 주정뱅이에게서 내가 무슨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거
예요. 난 처음부터 당신 같은 술꾼하고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흥! 어머니가
주신 피륙도 당신이 술값으로 없앴죠. 모피 사러 간다더니 그것마저 다 마시고
오다니." 세묜은 아내에게 자기가 마신 것은 고작 20코페이카뿐이라는 것을 납
득이 가도록 이야기하고 이 사나이를 데리고 온 경위도 밝히려 했으나. 마트료
나는 틈을 주지 않았다. 어디서 쏟아져 나오는지 단번에 두마디씩 지껄이니 세
묜이 끼어들 겨를이 없었다. 10년도 더 지난 옛날 일까지 들추어 내는 형편었
다., 마트료나는 마구 욕설을 퍼부으면서 세묜의 곁으로 다려가 그의 옷소매를
부여잡았다. "자, 내옷을 돌려 줘요. 하나밖에 없는 내옷을 뺏아 입고 염치도 좋
지. 빨리 ㅂ어 놔요. 못난 인간 같으니! 차라리 뒈지기나 하지!"
세묜이 마누라의 무명 자켓을 벗으려 하는데 한쪽소매가 뒤집어졌다. 그때 누
라가 그것을 잡아 당겼으므로 솔기가 부드득 뜯겨져 나갔다. 그리고 나가 버리
려고 하다가 발을 멈췄다. 속상하기만 이 사나이가 누군인지 알아 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
마트료나는 발길을 멈추고 말했다. "온전한 사람이라면 벌거숭이로 있을리가
없어요. 그런데 이 사나이는 셔츠도 입고 있지 않아요. 당신이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어디서 이 사나이를 끌고 왔는지 왜 말 못 하는 거예요? "내 말하지
않았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회 담 밑에 이 사람이 알몸으로 거의 얼어붙은
채 앉아 있었단
말이요. 글쎄, 이 추운 날씨에 벌거숭이가 아니 겠소? 마침 하늘이 도와서 가
그리로 지나오게 됐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죽고 말았을 거요. 살아가
노라면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누가 알겠소! 그래 외투를 입혀 데리고 왔지. 어
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돌봐 주는건 좋은 일이라오." 마트료나는 다시 욕설을
퍼부으려고 하다가 문득 낯선 사나이를 쳐다보자 말이 막혔다. 사이는 죽은 듯
이 앉아 있었다. 의자 끝에 앉아 있었다. 의자 끝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
다. 두 손으로 무릎 위에 올려 놓고 머리를 가슴에 떨어뜨리고서 눈을 드는 일
도 없이 무엇인가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듯 사뭇 얼굴을 일러뜨리고 있었다.
마트료나가 입을 다물고 있으므로 세묜은 이렇게 말했다.
"마트료나, 당신에게 하나님도 없소?" 이 말을 듣고 마트료나는 다시 한 번
낯선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차츰 마트료나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문앞에
서 발길을 돌려 난로 한쪽 구석으로 가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컵을
탁자 위에 놓고 크바스 (러시아인의 음료로 귀리와 엿기름으로 만든 맥주의 일
종)를 따르고 남은 빵을 잘라 내놓았다. 그리고 나이프와 스푼을 놓으면서 말했
다. "식사하세요."
세묜은 낯선 사나이를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앉아요, 젊은이."
세묜은 빵을 잘게 자른 다음, 둘이서 먹기 시작했다. 마트료나는 테이블 한끝
에 앉아서 차가운 시선으로 낯선 사나이는 기쁜 듯한 표정이 되더니 찡그렸던
눈썹을 펴고 마트료나쪽으로 눈길을 돌려 싱긋 웃었다. 식사가 끝났으므로 마
트료나는 식탁을 치우고 낯선 사나이에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 어디 사는 사람
이죠?"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길에 있었죠?"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노상 강도라도 만났나요?" "나는 하나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벌거숭이가 되어 자고 있었단 말예요?' "네, 그래서 알몸뚱이로 자다
가 얼어 죽을뻔했던 겁니다. 그것은 바깥 양반이 보고 가엾게 생각하여 입고 던
외투를 벗어 내게 입히고 집으로 같이 가자고 했던 거죠. 또 댁에 오니까 주
머니가 나를 불쌍히 여기고 먹고 마시게 해 주셨습니다. 두 분께는 신이 은총를
내리실 겁니다!' 마트료나는 일어서서 금방 기워 놓았던 세묜의 낡은 셔츠를
창가에서 가져다가 낯선 사나이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 그 밖에 속바지도 찾
아내서 주었다. "아니 셔츠도 없잖아. 자, 이걸 입고 어디든 마음에 드는 자리에
누워서 자요. 침대 위나 페치카 옆에서나." 낯선 사나이는 외투를 벗고 셔츠를
입은 다음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마트료나는 등불을 들고 외투를 집어남편
있는 데로 갔다. 마트료나는 외투자락 덮고 누웠으나 통 잠이 오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낯선 사나이의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사나이가 조금 남았던 빵을 다 먹어 버려 내일 먹을 빵이 없다는 것과 츠
랑 속바지랑을 주어 버린 일을 생각하니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는바도 아니었으
나 젊은이가 싱긋 웃던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밝아지는것 같았다.
오래도록 마트료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세묜도 역시 잠들지 못하고 연신외
투자락을 잡아당기곤 했다. "남은 빵을 다 먹어 버렸는데 반죽을 해 두지도 않았
으니 내일 아침은 어떻게 한담. 이웃 마리냐 네 가서 좀 꾸어 달랄까?"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칠라고." 마트료나는 한참 동안 가만히 드러누워 있었
다. "그런데 저 사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신상 이야기를 하지 않을
까요?" "아마 말 못할 사정이 있겠지."
"세묜!" "음?"
"우리는 남을 도와 주는데 왜 남은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지 몰라요."
세묜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 지 몰랐다. "그만해 둬요."라고만 했을뿐 휙 돌아
누워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5
이튿날 아침, 세묜은 잠에서 깨었다.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마트료나는 이집
에 빵을 꾸러 갔다. 어제의 그 낯선 사나이는 낡은 셔츠를 입고 속바지를 입은
채 위자에 앉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어제보다 밝아 보였다.
"어때 젊은이, 뱃속에선 빵을 요구하고 알몸뚱이는 옷을 원하니 벌이를 해야하
지 않겠나. 자네 무슨 일을 할 줄 아나?"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릅니다." 세묜은 깜짝 놀랐지만 이렇게 말했다.
"할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거야. 사람은 뭐든지 배워사 익히면 돼." "모두 일하
는데 나도 일을 해야지요." "자네 이름을 뭐라 부르지?"
"미하일입니다." "이봐요, 미하일, 자네는 신상 이야기를 하고 깊지 않은 모양
인데 그건 아무래도 좋아. 굳이 듣고 깊은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밥벌이는 해야
해. 내가 시키는 일을 하면 자네를 먹여 주지." "고맙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익
히겠습니다. 뭐든지 가르쳐 주십시오." 세묜은 실을 집어 손가락에 감고 꼬기
시작했다. "그다지 어려운 건 아냐. 자 보라고...."
미하일을 그것을 들여다보더니 금방 배워 그와 마찬가지로 손가락에 감아 을
꼬았다. 세묜은 이번에는 꼰실 짜는 법과 돼지털을 이용해 가죽을 꿰매는 일을
해보이자 이것도 미하일은 금방 배웠다. 미하일은 세묜이 어떤 일을 가르쳐도
금방 배워 사흘 후에는 벌써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마치 오래 전부터 구두를
꿰매 온 것 같은 솜씨였다. 허리를 펼 사이도 없이 부지런히 일만 하고식사는
조금밖에 하지 않았다.
한가할때는 잠자코 천장만 쳐다보았다.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농담도 하지 고
웃지도 않았다. 미하일이 싱긋 웃은 것은 처음 왔던 날 마트료나가 저녁 식사
준비를 했을때 뿐이었다.
6
하루하루사 지나가 일주일, 또 일주일이 지나서 1년이 가까워졌다. 미하일은여
전히 세묜의 집에 살면서 일했는데 세묜의 보조공으로 소문이 자자하세 퍼졌다.
세묜의 보조공 미하일만큼 모양 좋고 튼튼한 구두를 짓는 사람은 없다고 하여
이웃 마을에서 까지 구두 주문이 밀려들어 세묜의 수입은 점점 늘어 갔다. 어느
겨울 날의 일이었다. 세묜이 미하일과 마주 앉아서 일을 하고 있는데 울을 잔뜩
단 삼두 마차소리가 요란히 들렸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그 마차는 바로 가게 앞
에 섰다. 그리고 젊은 사람이 마부석에서 뛰어내려 마차 문을 열어 주자 마차
안에서 모피 외투를 입은 신사가 나왔다. 그리고 는 세묜의 집을향해 입구 층계
를 올라왔다. 마트료나는 뛰어나가 문을 활짝 열었다. 신사는 몸을 굽히고 안으
로 들어와 허리를 쭉 폈는데, 머리는 거의 천장에 닿을 지경이고, 온 방 안은 신
사의 몸뚱이로 꽉 들어찬 것 같았다. 세묜은 일어서서 인사했으나 신사의 큰 몸
집을 보고 벌린 입이 다물어짖 않았다. 이런 사람은 이제까지 본일이 없었다. 세
묜도 살집이 없는편이고 미하일도 깡마른 편이며 마프료나조차도 마치마른 나무
잎사귀처럼 살이 없는데, 이 신사는 다른 나라에서 왔는지 얼굴이 불그스름 하
니 운이 나고 은 황소처럼 굵어서 마치 몸뚱이 전체가 무쇠로 된 것 같았다.
신사는 후욱 숨을 크게 내쉬더니 모피 외투를 벗으며 위자에 앉아 말했다. "이
구두 가게 주인은 누군가?" 세묜이 나서며 말했다.
"제가 주인인뎁쇼,나으리 !" 그러자 신사는 자기가 데리고 온 젊은 하인에게
커다란 소리로 명령했다. "페치카, 그걸 이리 가져와!"
하인이 달려 가더니 무슨 꾸러미를 가지고 왔다. 신사는 꾸러미를 받아 테블
위에 놓디니 "끌러라"하고 그 젊은이에게 명령했다.
하인은 보퉁이를 끌렀다. 신사는 거기서 나온 가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찌르
며 세묜에게 말했다. "주인, 이것이 무슨 가죽인지 알겠나?"
"네, 나으리." "이봐, 이 가죽이 무슨 가죽인지 안단 말인가?"
세묘은 가죽을 만져 보고 나서 대답했다. "썩 좋은 가죽입니다."
"그야 물론 틀림없이 좋은 가죽이지, 바보 같으니라고, 자네는 이제까지 이런
가죽은 보지도 못했을 거다.
독일산이야, 이건 20루블이나 주었다고." 세묜은 겁을 먹고 말했다.
"저 같은 사람이 어찌 구경이나 했겠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어디 이 가죽
으로 내 발에 꼭 맞는 구두를 지을 수 있겠나?" "지을 수 있구말굽쇼라고? 너
는 누구의 구두를 짓는지, 무슨 가죽으로 짓는지를 명심해야 해. 나는 일년을 신
어도 찢어지거나 모양이 변하거나 하면 네놈을 감옥에 넣어 버릴 테다. 만일1년
이 넘도록 모양이 변하지도 않고 찢어지지도 않으면 삯으로 10루블을 주겠다."
세묜은 겁이 더럭 나서 대답할 말을 잃고 미하일쪽을 돌아다보았다. 그러고는
미하일을 쿡 찌르면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하지?" 미하일은 자신 있다는 듯이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세묜은 미하일의 고개짓을 보고 1년 동안 일그러지지도 찢어지지도 않을 구를
주문 받았다. 신사는 젊은이를 불러 왼쪽 구두를 벗기게 하고 다리를 쭉 폈다.
"치수를 재라!" 세묜은 한 자이상이나 되는 종이를 꿰매 붙여 자리에 펴고,
두 무릎을 ㄲ고서 신사의 양말을 더럽힐세라 앞치마에 손을 잘 닦은 다음, 치수
를 재기 시작했다. 바닥을 재고 발등 높이를 재고 종아리를 잴 차례가 되었는데
종이 양끝이 마주 닿지 않았다. 신사의 종아리가 통나루만큼이나 굵던 것이다.
"똑바로 해! 거긴 좀 넉넉해야 하니까."
세묜은 다시 종이르 덧붙였다. 신사는 위젓하세 앉아 양말 속의 발가락을 질
꼼질 놀리면서 방 안 사람들을 둘러 모고 있다가 미하일을 보더니 "저건 누구
야?" 하고 물었다. "제 조수 미하일입니다 저 친구가 구두를 만들 겁니다."
똑ㄸ히 알아 둬라. 1년 간은 끄떡도 않도록 꿰매야 한다." 신사는 이렇게 미
하일에게 말했다. 세묜도 미하일을 돌아다보았다. 그런데 미하일은 신사의 얼은
보지 않고 그 뒤의 구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누구인지를 알아 내려고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미하일은 갑자기 싱긋 웃더니
활짝 밝아졌다. "넌 뭘 싱글러기고 있는거야? 바보처럼. 정신차려서 기한 안
에 만들어 낼 생각이나 하지 않고." 그러자 미하일이 말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신사는 구두를 신고 모피 외투를 입자 문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리
굽히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이마를 문에다 세게 부딪혔다.
신사는 욕설을 퍼뭇고 이마를 문지르며 마차를 차고 가 버렸다. 신사가 나가
자 세묜이 말했다. "정말 굉장한 나으리야. 그 어른은 웬만한 무기로도 죽이지
못할걸. 방이 흔들거리도록 이마를 부딪혔는데도 별로 아프지도 않은 모양이던
데." 그러자 마트료나도 말했다.
"저렇게 부유한 행활을 하는데 테격인들 왜 좋지 않겠수. 저런 튼튼한 사람게
는 염라대왕도 감히 접근하지 못할 걸요."
7
세묜은 미하일에게 말했다.
"일을 맡긴 했지만 이거 까딱 잘못하는 날엔 감옥살이야. 가죽도 비싼데다, 으
리는 성깔이 대단하시고, 실수를 말아야 할텐데. 자, 자네는 눈도 발고 솜씨도
나보다 나으니 여기 이 치수 본을 주겠네. 나는 겉가죽을 꿰맬 테니까."
미하일은 이르는 대로 신사의 가죽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다음 칼을 들어
재단하기 시작했다.
마타료나는 미하일의 옆으러 다가가 미하일이 재단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다.
마트료나는 이제 구두 만드는 일에는 익숙한 터인데 가만히 보니 미하일은 장화
모양과는 전혀 다르게 둥글게 가죽을 자르는 것이 아닌가? 마트료나는 주의를
줄까 하다가 생각했다. '아마 내가 그 나으리의 구두를 어떻게 지을 것인지잘 듣
지 못 했는지도 몰라. 미하일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참견하지 말아야지.'
미하일은 가죽 재단을 마치고 실을 바늘에 꿰매는 한겹실이 아닌가? 그것을
보고 마트료나는 또 크게 놀랐으나 역시 참견하지 않았다. 미하일은 열심히 매
고 있었다. 점심ㄸ가 돼서 세묜이 일어나 보니, 미하일은 신사의 가죽으로 슬리
퍼를 꿰매 놓고 있었다. 세묜은 "앗!" 하고 크게 소리질렀다.
이게 대체 웬일일까.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미하일은 1년이 되도록 실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나으리는 굽이 있는 장화를 주문했
는데 미하일은 평평한 슬리퍼를 만들어 버렸으니 영 가죽을 버리지 않았나.나으
리에겐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가죽은 구할래야 구할 수도 없을
텐데....' 세묜은 미하일에게 말했다.
"아니 여보게, 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일하는 건가? 나으리는 장화를 주문는
데 자넨 도대체 뭘 만들었나?" 세묜이 미하일에게 꾸지람을 하는데 바깥문의
고리쇠가 덜컹거리더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누군가
타고 온 말을 붙들어 매고 있는 참이었다. 나가 보니 그 나으리의 하인이 와있
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와요. 무슨 볼 일이라도?"
"구두 일로 마님의 심부름을 왔지요." "구두 일로?"
"구둔지 뭔지, 하여간 장화는 이제 필요 없게 되었어요. 나으리는 돌아가셨니
까요." "아니 뭐라고요?"
"여기서 저택으로돌아가시는 도중 마차 안에서 돌아가셨어요. 마차가 저택에닻
아, 내리는 걸 도와 드리려고 보니까 나으리는 짐짝처럼 뒹굴고 있지 않겠습니
까. 돌아가신 거예요. 간신히 마차에서 끌어내린 형편이이죠. 그래서 마님께서
나를 보내어 '너 구둣방에 가서 이렇게 전해라. 아까 나으리가 주문하신 장는 이
제 필요 없게 되었으니 그 가죽으로 죽은 사람에게 신기는 슬리퍼를 지어 달라
고 말이야. 그리고 다 뛔매기를 기다려서 그 슬리퍼를 가지고 와야겠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왔지요." 미하일은 테이블 위에서 마름질하고
남은 가죽을 집어 둘둘 뭉치고 다 된 슬리퍼를 꺼내어 탁탁 소리 내어 털고는
앞치마로 곱게 닦아 하인에게 내밀었다. 하인은 슬리퍼를 받자 인사했다. "안녕
히 계십시요. 여러분! 그럼 갑니다!" 그리고는 돌아갔다.
8 다시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 미하일이 세묜의 집으로 온지도 이제 6년
이 되었다. 여전히 처음이나 마찬가지로 아무데도 가지 않고 한 마디도 공연한
말은 지껄이지 않았다. 그 동안 싱긋 웃은 것은 단 두 번뿐, 한 번은 마트료나가
저녁 식사 준비를 했을 때와 구두 맞추러 온 신사를 보았을 때였다. 세묜은 자
기 제자가 대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는 어디서 왔는지를 묻도 않고 다만
미하일이 나가면 어쩌나 하고 그것만을 거정하게 되었다. 하루는 온 식구가 모
여 앉아 있었는데, 마트료나는 화덕에 냄비를 올려 놓고 있었고 아이들은 위자
사이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세묜은 창가에서 구두를 꿰매고있었고 미하일
은
다른 창가에서 구두 뒤꿈치를 붙이고 있었다. 그러자 사내아이 하나가 의자
를 타고 미하일 곁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어깨를 흔들면서 이상하다는 듯 창 을
내다보며 말했다. "미하일 아저씨, 저것 좀 봐요. 모르는 아주머니가 여자애
둘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오는 것 같애. 여자애 하나는 절름발이인데?"
사내아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미하일은 하던 일을 멈추고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 유심히 바라보았다.
세묜이 돌아다보니 이제까지 창 밖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던 미하일이 온 신
을 쏟아 창 밖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래서 세묜도 일을 멈추고 창 밖을 내다보
니 정말 ㄲ긋한 옷차림을 한 부인이 자기 찝쪼긍ㄹ 행해 오고 있었다. 부인은
모피 외투를 입고 긴 목도리를 목에 두른 두 계집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계
집아이들은 얼굴이 서로
닮아 누가 누군지 모를 지경이었다. 다만 한 아이는 다리를 가볍게 절룩거며
걷고 있었다 연인은 마깥 층계를 올라와 입구로 들어와서 문을 열더니 두 계집
아이를 앞세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신가요?"
"어서 오십시오. 무슨 볼 일이신지?" 여인은 테이블 곁에 앉았다. 두 계집아
이는 무릎에 안기 듯이 기댔는데 낯설어하는 모양이었다. "저어, 이 아이들이
봄에 신을 가죽 구두를 맡출까 해서요." "아, 그렇습니까? 우리는 어린애들의
구두를 지어 본 적은 없지만 할 수 있습니다. 가장자리 장식이 달린 거로 할까
요, 안에 천을 대어 접는 것으로 할까요? 이 미하일이 여간 솜씨가 좋지 않니
다." 세묜이 미하일을 돌아다보니 미하일은 우두커니 앉아 두 계집아이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었다. 세묜은 그런 미하일의 모습이 이상하게 행깍됐다. 하
긴 두 아이가 모두 귀엽운 얼굴이다. 눈이 까맣고 빰이 통통하고 발그레하며 입
고 있는 모피 외투도, 목에 두른 목도리도 질이 좋은 것이지만 그렇더라고 슨
이류로 미하일이 저렇게 열심히 바라보고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마치 두
계집아이를 알고 있기라고 한 듯했다. 세묜은 의아스럽게 여기면서도 여인에게
로 돌아앉아값을 흥정했다. 가격을 정하고 치수를 잴 차례가 되었다. 여인은 절
름발이 계집아이를 안아올려 무릎에 앉혔다. "어렵겠지만 이 아이로 두아이의
치수를 재 주세요. 불편한 발쪽은 한짝만 하고 이쪽 발에 맞춰서 세 짝을지어
주세요. 둘의 발 치수가 아주 꼭 같거든요, 아주 똑같은 쌍둥이지요." 세묜은
치수를 재고 절름발이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이는 어쩌다가 이렇게 됐습
니까?"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날 때부터 그런가요?" 이에 부인이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 애 어머니가 그렇게 했어요." 그 때 마트료나가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어디에 사는 누구의 아이인지 알고싶어 이렇게 물은 것이다. "그럼, 부
인께선 이 아이들의 친엄가 아니신가요?" 나는 어머니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지
요.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인데 그냥 맡아서 키우노라면 자연 정이 들게 마련 아
닌가요?" "아주머니가 낳은 아이도 아닌데 정이 들었단 말이죠?"
"몰론이지요. 나는 두아이를 다 내 젖으로 키웠어요. 내 아이도 있었지만 하님
께서 데려가셨어요. 그 아이는 그다지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았는데 이 애 둘은
정말 애처로워서...." "그런데 대관절 누구의 애들인가요?"
9
여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벌써 6년 전의 일입니다. 이 두 아이는 일 주일도 못 되어 천애고아가 되어버
렸던 거예요. 아버지는 낳기 사흘 전에 죽고 어머니는 아기를 낳고 하루도 못
살았으니까요. 나는 그 당시 제 남편과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이 아이들의 부
모와는 이웃간이었지요. 우린 늘 뒷문으로 서로 왕래했지요. 이 애들의 버지는
언제나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서 허리를 세게 맞아 쓰러지지 않았겠어요. 집에
까지 간신히 돌아오셨지만 곧 저 세상으러 가 버렸지요. 그런데 그 아내 되는
사람은 며칠 후에 쌍둥이를 낳았던 거예요. 이 아이들이 바로 그 애이지요. 가난
한데다가 일가 친척도 없고 일을 보아 줄 만한 할머니나 아주머니 하나 없이 그
야말로 외토리여서 혼자 해산하다가 죽어간 거지요. 내가 그 이튿날 아침에 궁
금해서 뒷문으로 보았더니 가엾게도 벌써 숨이 끊어져 있었지요. 게다가 숨이
넘어가는 순간 바로 이 아이에게 쓰러져 버려씩 때문에 몸의무게로 다리를 못
쓰게 만들었던 거예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시체를 목욕시키고 수의를 입히고
관을 짜고 해서 장례식을 마쳤지요. 모두들 친절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갓난
아이 둘만 남았으니 정말로 야단이지 뭡니까. 거기 모인여자 중에 젖먹이를 가
진 사람은 저뿐이었어요. 낳은지 겨우 8주 밖에 안 되는 첫아들에게 젖을 주고
있었죠. 그래서 내가 임시로 두 계집아이를 맡기로 했지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 아기들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고 여러 가지로 의논한 끝에 이렇게 말했습니
다. '마리아 아줌마가 이 아기들을 한동안 맡아 주지 않겠어요? 조금만 돌보아
주면 우리가 곧 다른 방법을 ㅌ을 테니까요.' 저는 다리가 온전한 아이에게만
젖을 빨렸습니다. 이쪽 절름발이 애에게는 줄생각도 안했죠. 도조히 살지 못하리
라고 행각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어떻게나 측하지 그뒤부
터는 꼭 같이 젖을 물려 주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내 아이와 두 계집아이, 말하
자면 세 아이를 동시에젖을 먹였던 것입니다! 그나마 내 나이가 젊어 기운도
있고 먹새도 좋았으니까 괜찮았죠. 두 아이에게 젖을 리고 있으면 다음 가 기다
리고 있어, 하나가 젖꼭지를 놓는 대로 기다리는 애에게 젖을 주고 그랬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으로 이 두 아이는 잘 키워 갔으나 내가 낳은애는 2년째 되
던 해에 죽어 버리고 그 뒤 아기를 낳지 못했죠. 다행히도 살림살이는 차차 좋
아져서 지금은 이 거리 상인들의 소유인 수차장을 맡아 보고있답다. 급료도
넉넉해서 유복한 살림을 꾸려 가기는 합니다만 아이는 생기지 않는군요. 정말
이 두 아이가 없었더라면 혼자
쓸쓸해서 어떻게 살았겠어요! 내가 이 아이들을 귀여워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이 두 아이는 내게 있어서
촛불과도 같아요." 여인이 한 쪽 손으로 절름발이 계집아이를 끌어당기고 한
쪽 손으로 빰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마트료나도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였다.
"부모 없이는 살아갈 수 있지만 하나님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고 말하는데정
말로 그런 것만 같군요!" 세 사람은 이런 말들을 주거니받거니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미하일이 앉아 있는 쪽 구석에서 섬광이 비쳐와 온 방 안이 환하게 밝아
졌다. 모두가 놀라 그쪽을 돌아다보니 미하일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위를쳐
다보면서
싱긋 웃고 있었다.
10
여인이 두 계집아이를 데리고 나가자 미하일은 의자에서 일어나 일감을 테블
위에 올려 놓고 치마를 벗으며 주인 내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인 아저씨. 이제 하나님께서도 저를 용서하셨으니, 두분서
도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세묜 내외가 그를 바라보니 미하일에게서 후광이 비
치고 있지 않아가. 세묜은 미하일에게 고맙다고 인사말을 했다.
"미하일, 자네는 보통 인간은 아닌 모양이나 자네를 붙잡을 수도 없고 꼬치 치
캐물을 수도 없네. 꼬 한 가지만 알고 ㅅ은 것이 있네. 자네를 이끌고 집으로 돌
아왔을 때 자네는 몹시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내
아내가 저녁 식사준비를 하기 시작하니까 자네는 싱긋 웃으며 밝은 표정을 지
었는데 어찌된 까닭인가? 또, 나으리가 장화를 주문했을때도 자네는 웃으면서
표정이 맑아졌었네. 지금 또 부인이 아이 둘을 데리고 왔을ㄸ 자네는 세 번째
싱긋 웃었네. 그리고 몸에서는 후광이 비쳤네. 미하일, 어떻게 자네 몸에서 그런
빛이 비치는지,
그리고 왜 세 번 싱긋 웃었는지 그 까닭을 좀 말해 주겠나." 미하일이 말했
다. "제 몸에서 빛이 나는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
는 중이었는데 지금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제가 세 번 웃은 것은 하나님
의 세 가지 말씀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말씀은 아주머니가 저를 가엽
다고 생각하셨을 때에 깨달아서 웃었고, 또 한가지 말씀은 부자 나으리가 장화
를 주문했을때 알게 되어 웃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두 계집아이를 보았을때마지
막 세번째 말씀을 알게 되어
또다시 웃은 것입니다." 거기서 세묜은 말했다.
"그럼 내게 들려 주지 않겠나, 미하일? 어떻게 하여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벌을
내리셨는가. 그리고 자네가 알지
않으면 안 되었던 세 가지 말씀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러자 미하일은 대답했
다. "제가 벌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천사였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지상에 내려가 한 여자에서
영혼을 거두도록 제게 명령했습니다. 제가 인간 세계에 내려와 보니 그 여인은
몹시 쇠약한 몸으로 누어 있었습니다. 쌍둥이 딸을 낳았던 것입니다. 갓난아기
는 어머니 곁에서 꼬무락거리고 있었으나 어머니는 젖을 줄 기운도 없었던것입
니다.
여인은 제 모습을 발견하자 하나님이 부르러 보내신 줄 짐작하고 매우 슬프게
흐느끼며 말했습니다.
'아아, 천사님! 제 남편은 숲에서나무에 깔려 죽어 바로 며칠 전에 장례식을치
른 참입니다. 제게는 형제나 일가 친척도 없기 때문에 이 갓난애들을 거두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제발 제 생명을 가져가지 마시고 이 아이들을 내
손으로 키우게 해 주세요! 어린 아이는 부모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저는 그너
가 하는 말을 듣고 한 아이를 안아 젖꼭지를 물려주고 다른 한 아이를 어니의
팔에 안겨 준 다음 하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고백 했습니다.
'저는 산모의 혼을 빼올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나무에 깔려 죽고 부인은 방금
쌍둥이를 낳고서 제발 생명을 거두어 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아이들을 키우게 해 달라면서 어린 아이는 부모 없이는 살지 못한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저는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렇
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시 내려가 산모의 혼을 거두어라. 그러면 세 가지 말
을 알게 되리라. 즉 인간의 내부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
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그것을 알게 되면 는 나라로 돌아올수
있으리라.'
그래서 저는 다시 지상으로 내려가 산모의 혼을 데려갔습니다. 두 아기는 머
니의 가슴에서 떨어져 있었으나 시신이 침상위에서 쓰러지는 바람에 한 아이를
덮쳐 눌러 한쪽 다리를 못 쓰게 한 것입니다. 저는 여인의 혼과 함께 하늘로 날
아 올라갔는데, 갑자기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제 두날개를 부러뜨렸니다. 그
래서 여인의 혼만 하나님께로 가고 저는 지상에 떨어져 길바닥에 쓰러졌던 것입
니다."
11
그 때 세묜과 마트료나는 자기들이 먹이고 입혔던 사람이 누구인지, 자기들과
같이 살면서 일해 온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두려움과 기쁨으로 눈물을 흘렸
다. 그러자 천사는 말했다. "저는 홀로 알몸인 채 들판에 버려졌습니다. 저는 인
간의 부자유라는 것도, 위도 배고픔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런 제가 갑자기 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배고픔도 극한에 달했고 몸도 얼어 뭍어 어떻게 해야좋을
지 몰랐습니다. 문득 들 하가운데 하나님을 모시는 교회가 눈에 띄어 몸을의지
하려고 그 곁으로다가갔으나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저
는 바람을 피하려고 교회 뒤로 아가 앉아ㅆㅂ니다. 이윽고 날이 저물자, 배픔은
더욱 심해지고 몸은 얼 대로 일어, 저는 완전히 지쳐 버렸습니다. 그 때 문득어
떤 사람이 장화를 들고 걸어오면서 혼잣말을 하는소리가 귀에 들려 왔습니다.
저는 인간이 되엇 맨 처음,언젠가 죽을 인간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얼
굴이 무서워 홱 돌아앉았습니다. 그런데자세히 들으니 그 사나이는, 어떻게 이
추운 겨울에 몸을 감쌀 옷을 마련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처자를먹여 살려야할
것인가를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젠 더이상 추위와 배고픔을 견딜 수가 없구나. 저기 오는 사람에게 부탁볼
까? 하지만 저 사람은 모피 외투를 걱정하는 걸로 보아 나를 도와 줄만한 힘이
없을거야.' 그는 저를 발견하자 얼굴찡그리고 먼저보다 더 무서운 표정이 어 터
덜터덜 제 곁을지나갔습니다. 그나마 한줄기 희망도 사려져 버린 느낌이었데
갑자기 사나이가 되돌아오는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다시 그 얼굴을 쳐다보았을
대는 방금 지나간 사나이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좀전의 그
얼굴에는 죽의 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생기가 돌고 그 얼굴에 신의
그림자가 어리어 있었습니다. 사나이는 제 곁에 다가와서 옷을 입혀 주고 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이르니 한 여자가 나와 말을 늘어놓기 시작
했는데그
여자는 사나이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그 입에서는 죽음의 입김이 뿜어나와는
그 독기 ㄸ문에 숨을 쉴 수도 없었습니다. 여자는 저를 추운 밖으로 몰아 내려
고 했습니다. 만약 그대로 나를 내쫓았더라면 여자는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때 남편이 갑자기 하나님의 얘를 꺼
내자 여자는 금방 태고가 누구러졌습니다. 여자가 제게 저녁을 권하면서 저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을때 그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자취도 없이 사
라지고 생기가 넘쳐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신의 얼굴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때 저는 '인간 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것을 알게 되리라'고 하나님의 첫번째
말씀을 생각해 냈습니다. 나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것을 깨달았습
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일을 이렇게 내게 계시해 주시는구나, 생각하니
저는 그만 너무 기뻐서 싱긋 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그 전부를 알 수
는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무엇이 허락되어 있지 않은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가 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당신들과 같이 살면서 1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나이가 찾아와서 1년 동안 닳지도, 찢어지지도, 일그러지지도 않을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문득 그 사나이를 다보니 뜻밖에도 사이
의 등 위에 나의 동료였던 죽음의 천사가 서 있는것을 발견했습니다. 저 이외에
는 아무도 그 천사를 보지 못했지만 저는 알고 있었죠. 그리고 채 날이 저물기
도 전에 그의 영혼은 그에게서 떠나 버린다는 것을 알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
다. '이 사나이는 일년 신어도 끄떡 없는 구두를 만들라고 하지만 자기가 오늘
녁 안으로 죽는다는 것은 모른다.' 그래서 '인간에게서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
엇인가'라는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을 생각해 냈습니다. 인간 안에 무엇이 있는
가는 이미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
를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자기 몸에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저는 두 번째로 싱긋 웃었습니다. 친구였던 천사를 만난 일도 기뻤으며 하나님
께서 두 번째의 말씀을 계시해 주신 것도 기뻤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전부는 깨
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직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그래
서 저는 언제까지나 여기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최후의 말씀을 계시해 부실 때를
기습니다. 6년째 되는 오늘, 쌍둥이 계집 아이를 키우는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
고 찾아와 그들을 보게 되었을 때, 저는 엄마가 없더라도 두 쌍둥이는 잘자라
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자깃을 봐서 살려 달
라고 무탁했을 때 나는 그 말을 정말이라 믿고, 아이들은 부모 없이 살가지 못
한다고 행각했는데 다른 사람이 엄연히 두 아이를 잘 기르고 있지 않은가.' 또
한 저는 그 부인이 다른 사람의 아이로 인해 눈물을 흘렸을 때 거기서 살아 계
신 신의 그림자를 발견했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
서 최후의 말씀을 계시하여 저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세 번째로
싱긋 웃었던 것입니다."
12
그러자 천사가 나탔는데 온 몸이 빛으로 둘러싸여서 눈을 똑바로 뜨고 볼 조
차 없을 정도였다. 그 때 천사는 커다란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울려 오는 목소리 같았다. 천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상에서 깨달은 것은, 모든 사람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마
음에 의하여 갈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기 아이들의 생명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지 못하게 되있
었다. 또 부자는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
저녁때까지 무엇이 필요한지, 산 자가 신는 장화인지, 죽은 자에게 신기는 리
퍼인지를 아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인간이 되고 나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자신의 일을 잘돌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씨 선량한 두 부부에게 사랑이 있어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도와 주었기 때문이였다. 고아가 잘 자라고 있는 것은
모두가 두 아이의 생계를 걱정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인 한 여인에게
사랑의 마음이 있어 그 애들을 가엾게 생각하고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것도 모두가 각기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있기 문
이 아니라 그들 속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내려 주시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록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번엔, 한 가지 일을 더 깨달았다.
내가 ㄲ달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개개인을 위해 사는것
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각자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계시하신
것이다. 이제야말로 나는 깨달았다. 모두가 자신을 걱정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
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뿐, 정말은 사랑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 속에 사는 자는 하나님 안에 살고 있다. 하나님은 그 사
람 안에 계시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그렇게 말하고 천사는 집
안이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찬송을 했다. 그 다음 순간 천장이 두 으로 쫙
갈라지면서 땅에서 하늘까지 불기둥이 뻗쳤다. 세묜 내외도 아이들도 모두 땅바
닥에 엎드렸다. 미하일은 등에서 날개가 활짝 펼쳐지더니 천사는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세묜이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때는 집은 그 전대로였고 방에는 그의
가족들만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
톨스토이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
초라한 어느 길가에 마르틴 아부제이치라는 구두장이가 살고 있었다.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반 지하의 작은 방이 그의 거처였다. 이 근처에는 구두때문에 두
번 마르틴의 손을 빌리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구두 창
을 갇아 댄 것도 있고 해진 데를 기운 것과 둘레를 다시 꿰맨 것도 있으며 그
중에는 가죽을 전체 새로 갈아 끼운 것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창너머로 기가
한 일감을 보는 때도 많았다. 주문은 많이 있었다. 그것은 마르틴이 정성스럽고,
재료도 좋은 것을 쓰며 삯이 싼 데다가 약속울 꼬박꼬박 지켰기 때문이다. 손
님이 원하는 기한 안에 될 일은 맡고 그렇지 못한 것은 겸손하게 거절했다. 이
런 마르틴의 성격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마
르틴 아부제이치는 원래 착한 사람인데가가 나이를 먹으면서부터는 더욱 자신의
영혼을 생각하게 되어 한결 신께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마르틴이 옛날 보조공
으로 일하고 있을때 아내가 죽었다. 그 후 세 살짜리 어린 아들을 두었을 뿐이
다. 그들 부부에겐 어찌된 일인지 위에서부터 큰 아이들은 모두 죽어 버렸기
때문에 처음에 마르틴은 이 아들을 시골 누님에게 맡기려고 생각했으나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아기 카피토시카를 남위 집에 맡기다니 마나 가엾은 일이
냐, 차라리 내가 데리고 고생하자, 하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
마르틴은 주인 밑에서 떠나 아이와 둘이서 셋방살이를 했는데 마르틴의 운이
랄까, 어렸던 카피토시카도 퍽 자라서 아버지의 심부름이라도 할 만해져 이젠
한결 안정되었다고 생각할 즈음에 병으로 앓아 눕더니 일 주일가량 고열로 신
음한 끝에 죽어 버렸다. 마르틴은 아들의 장례를 마치고 나자 완전히 실의에빠
졌다. 그런
나머지 하나님을 원망하게조차 되었다. 마르틴은 비참한 마음이 들어 제발 기
를 죽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빈 적도 한두 번이 아니였다. 그리고 늙은 자기보
다 어린 외동아들을 데려 가신 하나님께 원망의 말을 하기도 했다. 마르틴은
교회에도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트로이츠아에서 같은 고향의 노
인이 마르틴을 찾아왔다. 이 사람은 벌써 팔 년째나 성지 순례를 하고 있는 중
이었다. 마르틴은 이 노인과 세상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자기 신상에 대한 푸념
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영감, 난 이제 산다는 게 싫어졌소. 그저 죽고 싶은 심정
인데 심술궂은 하나님은 나를 데려가지도 않는다요."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
마르틴,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러쿵저러쿵 비
판할 수 없어. 무슨 일이건 우리의 생각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되
는 것이니까. 자네 아들은 죽었지만 자네는 살아야 하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네. 그것을 비관하는 것은 자네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려고하기 때문이야." "
그럼 뭣 때문에 산다는 거요?"
하고 마르틴은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해, 마
르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목숨이니까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도리가 아
니겠나.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세상 걱정이 사라지고 모든 일이 편안하게만생각
되네." 마르틴은 잠자코 있다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다니, 도대체 어떻게 사는 거요?"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느냐는 것은 그리수도께서 다 가르쳐 시
네. 자네 글을 읽을 줄 알지? 성경을 사서 읽으라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거야. 성경엔 뭣이든 다 씌어 있으니까." 이
말이 마르틴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 날로 당장 커다란 활자로 찍힌 성서를 다가
읽기 시작했다.
처음이 마르틴은 일요일이나 축제일에만 읽을 셈이었으나 한 번 읽기 시작니
완전히 끌려들어 날마다 읽게 되었다. 어떤 때는 너무나 골똘하게 읽은 나머지
램프의 석유가 죄다 닳았는데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마르틴은 저녁마다 성경을 읽게 되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서
무엇를 말씀하시는지, 신을 위해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어
마음을 더욱더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전에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꺼질듯 한숨만
쉬며 줄곧 카피토시카의 일만을 생가했으나 지금은 오로지, "하나님이시여, 감
사하옵니다! 감사하옵니다! 모든 일을 당신의 뜻에 맡기오니 주관하여 옵소서!"
라고만 기도 드릴 뿐이었다.
그 뒤 마르틴의 생활은 눈에 뛰게 달라졌다. 전에는 축제일 같은때 빈둥빈둥
놀러나 다니고 음식점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보드카도 사양치 않았다. 아는 사람과 한 잔 들이켜고 나면 별로
취하지 않았는데도 공연히
쓸데없는 잔소리를 늘어놓거나 호통을 치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
조용하고 만족스런 나날이 흘러갔다. 아침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정한 시간큼
일하면 램프를 걸쇠에서 벗겨 테이블 위에 놓은 다음, 벽장에서 성경을 꺼내어
읽던 페이지를 펼쳐 놓고 앉아서 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뜻을 알게 되어 그의 마음 속은 더욱 밝아지고 즐거워져 갔다. 여느 날과 마찬
가지로 마르틴은 그 날 밤도 늦게 까지 골똘히 성경을 읽고 있었다. 침 누가가
전하 복음서를 읽는 중이었다. 제6장의 '누가 네 뺨을 치거든 다른 뺨도 돌려 대
며, 누가 네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까지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사람에게
는 주고 누가 네 것을 빼앗거든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라. 너희는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라는 제29절을 읽은 다음, 다시 다음 구절을
읽었다. 거기서는 그리스도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면서 왜 내가 일러 주는 것은 행하지 않느냐. 내게 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무엇과 같은지 보여 주마. 그는 마치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주추를 두고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큰 물이 나서 탁류
가 그 집을 들이치더라고 그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잘 지은 집이기 ㄸ문다. 그
러나 내 말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주추없이 땅 위에 집을 지은 사
람과 같다. 물살이 들이치면 곧 집이 무너지고 그 무너짐이 대단할 것이다.'
이 말씀을 읽은 마르틴은 크게 감동해서 안경을 벗고 골똘한 생각에 잠기게되
었다. 그리고 자기가 이제까지 해 온 일들을 이 말씀에 견주면서 혼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 집은 어떤가. 반석 위에 서 있는가, 모래 위에 서 있는가? 반석
위에 서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혼자서 성경 말씀을 읽으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지시대로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지만 어쩌다 그만 죄를 짓게 되니, 참.
아니, 그래도 더욱 열심히 하자. 아아, 참으로 유쾌하다! 원하옵건대하나님이시
여, 제게 힘을 주시옵소서!'
마르틴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만 자려고 했으나 그래도 쉽사리 책을 놓을 수가
없어 다시 제 7장을 읽었다.
백부장의 이야기를 읽고, 과부 아들의 이야기를 읽고, 요한이 제자에게 대답한
대목을 읽고, 그리고 마침내 부자
바리새 인이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초대한 데까지 읽었다. 그리고 다시 죄 은
여자가 그리스도의 발에 향우를 바르고 그 위에 눈물을 뿌리고 그리스도가 죄
를 용서했다는 이야기도 읽었다. 이렇게 제 44절까지 읽어 나가고 다시 다음 절
을 읽기 시작했다. '여인을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을 보
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았다. 너는 내게 입추지 않았
으나 이 여인은 들어와서부터 끊임없이 내 발에 입맞추었다. 거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으나 이 여인은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
이 일 절을 일고 마르틴은 생각했다.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입 맞추지 않고
머리에 기름도 발라 주지 않고....' 마르틴은 다시 안경을 벗고 책 위에 놓고 생
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 바리새 인과같았던 모양이야... 오로지
나 자신만 생각해왔다. 차를 마시고 싶다든지 따스하고 깨끗한 옷을 걸치고 싶
다는 따위의 일만 생각하고 손님을 위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오직나만을
위주로 손님의 일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었지,. 그런데 손님은 누군가? 다름아
닌 하나님이셔.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면 나는 대체 어떻게 할 것인
가?' 마르틴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어느 사이 깜박 잠이 들어 버렸
다. "마르틴!" 문득 누군가가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마르틴은 놀
라며 저기 있는 사람이 누굴까 하고 생각했다. 고개를 돌려 문쪽을 보았으나아
무도 없었다. 도로 몸을 굽혀 드러눕자 더욱 또렷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마르틴, 마르틴아! 내일 네가 사는 곳으로 내가 가겠다."
마르틴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꿈결에서 그 말소리를 들었는지 깨어서 들는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등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마르틴은 아직 날이 새기도 전에 일어나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난로에 불을 지펴 국과 보리죽을
끊이고 사모바르 (구리나 은으로 만든 러시아 특유의 주전자)를 준비하고 치
마를 두르고 창가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마르틴은 일을하면서도 마음 속으로
어젯밤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 들었을 뿐일 거라고 생각되기도 하
고, 한편으로는 정말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고 생각되기도 하였다. '뭐, 이런 일
은 흔히 있는 일이니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창가에 앉은 마르틴은 일을 하는
것보다 창 너머로 한실을 내다보는 편이 더 많았다. 낯선 구두를 신고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몸을 구부려 밖을 내다 보면서 구두뿐 아니라 얼굴도 보려고 애
썼다. 새로 지은 장화를 신은 정원지기가 지나가는가 하면 지게를 진 일꾼도
지나갔다. 그 뒤로 여기저기를 땜질한 낡은 장화를 신은 니콜라이 1세 시대의
늙은 병사가 삽을 손에 들고 창 앞으로 다가왔다. 마르틴은 그 장를 보고 곧 그
라는 것을 알았다. 이 늙은은 병사는 보통 스체파니치라고 불렀는데 옆집 상인
이 인정상 데리고 있었다. 정원지기의 일을 도와 주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스
체파니치는 마리틴의 바로 눈앞에서 길에 있는 눈을 치우기 작했다. 한참 동안
그 모양을 바로보고 있다가 마르틴은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도
이젠 늙어서 노망이 든 모양이야."
하고 마르틴은 혼자 웃었다. "스체파니치가 눈을 치우고 있는데 나는 그리스도
가 내게 오신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니 말이야. 난 아주 정신이 나갔어."
하지만 몇 바늘 꿰매다가 마르틴은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스체파니치가삽
을 세워놓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제 늙어서 눈을 치울 만한 기력도 없는
모양이다. 마르틴은, 저 삶에게 차라도 대접할까? 마침 사모바르의 물도 끓었으
니, 하고 생각하고 바늘을 일감에 찌르고 일었났다. 사모바르를 테이블 위에올려
놓고
차를 준비한 다음 손가락으로 참눙 유리를 똑똑 두드렸다. 스체파니치가 돌다
보더니 창가로 다가왔다. 마르틴은 마주 손짓을 하면서 문을 열러 갔다.
"들어와 몸 좀 녹이지그래." 마르틴은 말했다.
"몸이 꽤 얼었겠네." "아이고 고맙네, 온 몸의 뼈마디가 쑤시느구면."
스체파니치는 대답했다. 스체파니치는 들어오자 눈을 털고 마룻바닥에 자국이
나지 않도록 장화에 묻은 눈을 털어 내고 있었는데 그 몸은 떨리고 있었다. "닦
지 않아도 되네. 이리 주게나 내가 털테니, 나야 늘 하는 일이니까, 자, 어서 이
쪽으로 와서 앉게나." 마르틴은 말했다.
"자, 차나 마시게." 마르틴은 두 개의 잔에 차를 따라서 하나를 그에게 주고
나서 자기 찻잔을 들어 후후 불며 마시기 시작했다. 스체파니치는 다 마셔 버리
자 잔을 엎어 놓고 그 위에 먹던 설탕을 올려 놓고는 잘 마셨다고 고마워다.
그런데도 아직 추어 보였다. "한 잔 더 합시다."
마르틴은 자기 전에도 그의 잔에도 다시 차를 가득히 따랐다. 한데 차를 마면
서도 눈길을 자주 한길로 쏠리기가 일쑤였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자네,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나 ?" "누굴 기다리느냐고? 누굴 기다리는지는
부끄러워서 말을 못 하겠구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지 않는 것도 아니
지만 무슨 소리를 들었지만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모르겠는데, 어젯저녁에 나는성
서를 읽었지.
그리스도가 이 세상 여러 곳을 다니며 고생한 이야기를 말이야. 자네도 몰론
읽었거나 들었거나 했겠지만."
"듣기는 들었어. 하나 원래 나야 배우지 못해서 글을 읽을 줄 모르잖아." "신
약 성서 중에서 나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두루 다니신 이야기를 읽었지. 잘들
어 봐. 바리새 인들이 말이야. 그리스도를 변변히 대접도 하지 않았다, 라는 대
목을 읽었거든, 한데 나는 엊저녁에 그 구절을 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리스도를 대접하지 않다니 뭘 말인가! 그렇지만 혹시 만에 하나라도 게든가
또 다른 누구에게 오신 일이 있다면 어떤 대접을 했을지 알 게 뭐야. 그 바리
새 인은 대접다운 대접을 하지 않았어! 이런 일을 생각하는 동안에 나는 가물
가물 잠이 들었지. 그렇게 졸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겠나? 깜짝
놀라 일어나니 분명히 누군가가 조금한 목소리로 내일 내가 가겠다, 하지 않겠
나. 그것도 두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야. 하도 그 말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나는
정말로 그리스도의 방문이 기다려지네 그려." 스체파니치는 머리를 저을 뿐 아
무 말 않고 잔에 남은 차를 마저 마시고 잔을 놓았다. 마르틴은다시 그 잔에
가득 차를 따랐다. "자, 기운나게 한 잔 더 마시게나! 내가 생각하건대 그리스
도가 이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셨을 때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가리지 않고, 신
분이 낮은 사람들을 오히려 더 보살펴 주셨을 것이 틀림없어. 언제나 가난한사
람들을
상대하시고 제자도 우리네 같은 사람, 우리네와 같이 죄많은 기술자 가운데서
취하셨지. 마음이 교만한 자는 오히려 아래로 떨어지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오
히려 위로 올라간다고 말씀하셨으니까, 너희들은 나를 주님이시여 하고 부르지
만 나는 너희들의 발을 씻어 주겠다, 우두머리가 되고 싶은 자는 모든 사의 하
인이 되라, 그도 말씀하셨네,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하며 인정이 있는 자는 행복
할지니, 라고 말씀하셨거든," 스체파니치는 차 마시는 것도 잊었다. 가만히 앉아
듣고 있는 그의 불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 잔 더 들고 가게나."
마르틴이 다시 말했으나 스체파니치는 가슴에 성호를 긋고 인사말을 한 다음
잔을 밀어 놓으며 일어섰다.
"고맙네, 마르틴 아부제이치. 정말 잘 마셨네. 덕분에 몸도 마음도 훈훈하게 았
네." "종종 들어 주게나. 나는 손님이 찾아오는 걸 좋아하니까."
스체파니치가 나갔다. 마르틴은 남은 차를 따라 마시고 찻잔을 치운 다음 가
일터로 돌아가 구두의 뒤꿈치를 꿰매기 시작했다. 꿰매면서도 역시 창밖을 바라
보며 연방 그리스도의 왕림을 고대하고 그리스도의 일, 그리스도의 행적만을 생
각하는 것이었다. 머릿속에는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여러 가지 일들이 꽉들어차
사라지지 않았다.
창 밖으로 두 병사가 지나가고 있었다. 한 사람은 군화를, 다른 산 사람은 사
화를 신고 있었다. 그 뒤로 이웃집에 살고 있는 주인이 반짝반짝 운이 나는 방
한용 덧신을 신고 지나가고, 또 바구니를 옆에 낀 빵가게 사람이 지나갔다. 모
두가 지나가 버리는데, 이 때 털실로 짠 긴 양말에 낡은 신발을 신은 여자가창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창 옆 바로 벽께에 발을 멈췄다. 마르틴이 창 너머로 내다니
다른 마을 사람인 듯한 허술한 차림새로 아기까지 데리고 있었다. 그녀는 바람
을 등지고 벽과 마주 서서 아기가 춥지 않도록 감싸 주려 하는 모양이었으나 감
싸 줄 덮개 하나 없었다.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은 얇은 여름 옷이었다. 마틴이 방
안에서 듣고 있으려니 여자가 우는 아기를 달래려고 애쓰는 모양이었으나 아기
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마르틴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돌층계 위에서,
"아주머니! 아주머니!"
하고 커다란 소리로 불렀다. 여자가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았다. "여보시오, 이
런 추위에 왜 거기서 아기를 울리고 있소 방으로 들어오시오. 따뜻한 방 안이어
린애 달래기에
더욱 좋겠소. 어서 이리로 들어오시오!" 여자는 낯선 구두장이 노인의 친절에
어쩔 줄 모르며 고마워했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돌층계를 내려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노인은 넓은 의자를 꺼냈다. "자, 아주
머니, 여기 앉아요. 난로 가까운 쪽으로, 몸을 녹이면서 아기에게 젖을 주도록해
요."
젖이 나오지 않아요.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를 못해서요." 여자는 말하면서
그래도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마르틴은 딱한 듯 혀를 차며 식탁으로 가서 빵
과 그릇을 꺼내더니 난로 뚜껑을 열어 수프를 꺼내 그것을 그릇에 따랐다. 보
리죽이 든 항아리를 꺼내 보았으나 아직 덜 물러 있었다. 그래서 스프만 따라식
탁 위에 놓았다.
"아주머니, 여기 앉아서 어서 먹어요. 아기는 내가 안고 있을테니까. 나도 예에
는 아기를 키워 봐서 아기는 볼 줄 알죠."
여자는 식탁에 앉더니 가슴에 성호를 긋고는 먹기 시작했다. 마르틴은 아기가
있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열심히
입술을 오무려 소리를 내려고 했으나 잘 되지않는다. 이가 없기 때문이다. 가
고픈지 아기는 자꾸만 울어댔다. 마르틴은 아교가 묻은 손가락을 아기의 볼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아기를 달랬다. 그러자 아기는 울음을 그치도 이윽고 웃
게 되었다. 마르틴도 좋아서 웃었다. 여자는 식사를 하면서 자기의 신세 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의 남편은 병사로 여덟 달 전에 어디론가 멀리 전속되었는데
그런 뒤로 통 소식이 없습니다. 저는 남의 집 하녀로 들어갔는대 얼마 안 돼 이
아이를 낳았지요. 하지만 아기가 있어서는 일을 하지 못 한다고 일을안 줘서
벌써 석 달째나 일 없이 지내고 있답니다. 입고 있던 옷까지도 다 팔아 이젠
유모로라도 들어갔으면 싶지만 그런
자리도 없군요. 말라서 젖이 잘 나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지금은 어느 장사는
집의 아주머니에게 갔다 오는 길이에요. 그 집에 저희 마을 여자가 들어가 사는
데 써 주겠다고 액속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야기가 다 된 줄 알고 갔더니 다
음 주에 다시 오라는군요. 그 집이 어찌나 먼지, 저도 지쳐서 쓰러질 지이지만
갓난아이도 여간 혼이 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주인 아주버니가
하나님을 믿고 우리 모자를 불싸하게 여겨 주시기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살아갈 뻔했는지." 마르틴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따뜻한 옷이 없소?" "이제 따뜻한 옷을 입어햐 할 때가 되었는데, 바로 어제
도 하나밖에 없는 목도리를 20코페니카 받고 거당잡힌 형편이지요."
그녀는 마르틴에게서 아기를 받아 안았다. 마르틴은 일어나 벽께로 가더니 참
을 무엇인가 부스럭거리며 찾는 모양이다. 이윽고 소매 없는 낡은 외토를 들고
왔다. "이걸로 어떻게 안 되겠소? 다 낡았지만 그래도 아기를 감쌀 만은 할 요."
여자는 소매 없는 외투와 노인을 번갈아 보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마틴
도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침상 밑으로 들어가 옷궤를 끌어내 놓고 그 속을 뒤
졌다. 그녀가 말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실 겁니다. 아무래도 주님께서
저를 할아버지의 창 앞으로
보내신 모양입니다. 정말 하마터면 이 아이를 얼어 죽일 뻔했어요. 집을 나을
ㄸ는 따뜻했는데 갑자기 추워지는군요. 이것은 필시 주님께서 할아버지를 창가
에 앉게 하셔서 저의 가엾은 모습을 보여 측은히 여기도록 만드신 게 틀림없어
요." 마르틴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과연 그리스도가 나를 저기 앉아 있게 하셨소. 사실 내가 창 밖을 내다보고있
었던 것은 아주머니, 공연히 그랬던 것이 아니었지요."
마르틴으 병사의 아네에게도 주님께서 오늘 자기에게로 오겠다고 약속한 일을
들려 주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로군요." 이렇게 말하며 여자는 일어나 소매 없는 외투를
입고 그 속에 아기를 감싸안고 다시 허리를 굽혀 마르틴에게 인사했다.
"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것을 받으시요." 마르틴은 여자에게 20코페이카
를 주었다. "이것으로 목도리를 찾아 두르도록 해요.
여자는 성호를 그었다. 마르틴도 성호를 그으며 여자를 배웅했다. 여자가 가
버리자 마르틴으 스튜를 먹고 설거지를 한 다음 다시 일감을 붙잡았다. 일을 면
서도 창 밖을 내다보는 일을 잊지는 않았다. 창문이 그늘지며 얼른 고개를 들어
누가 지나가나 하고 보는 것이다. 아는 사람도 지나가고 모르는 사람도 지나갔
으나 별달리 이렇다 할 일은 없었다. 잠시 후 마르틴의 창문 바로 앞에 멈춰 선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사고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거의 다 판 모양으로
나머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 대신 나무 부스러기가 든 자루를 깨에 메고 있
었다. 아마 어딘가의 공사장에서 주워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런
데 어깨가 아파서 다른 쪽 어깨에 바꿔 메려고 자루를 한길 위에 내려 놓고 사
과 바루니를 말뚝에 걸어 놓은 채 자루 속의 나무 부스러기를추스르려는 참이었
다. 바로 자루를 들어올리려는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찢어진 모자를 쓴 사내
아이가 불쑥 튀어나와 바구니의 사과 한 개를 훔쳐 가지고 그대로 내빼려고 했
다. 한데 할머니느 재빨리 눈치를 채고 곧 돌아서서 개구이의 옷소매를 꽉 움켜
잡았다. 개구쟁이는 마구 발버둥치며 할머니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할머니
는 두 손을 꽉 잡고 사내아이의 모자를 벗기더니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사내아
이는 마구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고 있었다. 마르틴은 바늘을 어디다 찔러 놓
을 겨룰도 없이 마루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문 밖으로 뛰나갔다. 충계에 발이 걸
려 안경을 떨어뜨렸을 정도였다. 마르틴이 한길로 뛰어나갔을 때 할머니는 사내
아이의 머리채를 잡고 욕을 하면서 경찰서에 가자고 하는 참이었다. 사내아이는
죽을 힘을 다하여 발버둥치며, "난 훔치지 않았어요. 왜ㄸ려요,
이거 놔요!" 라고 외쳤다. 마르틴이 말렸다.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할머니, 아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해 주십시요!" 라고 했다.
"참견하지 말아요. 이런 애는 다신 이런 짓 못하게 경창서에 끌고 가서 손을좀
내야지!" 마르틴은 할머니를 달랬다.
"그만 놓아 주시구려. 다신 그러지 않겠죠. 그리스도이 일음으로 놓아 주십요!"
할머니는 손을 놓았다. 사내아이가 도망치려 하는 것을 마르틴이 얼른 붙잡아
세우며 말했다.
"할머니께 잘못했다고 빌어라. 이제 다시 나쁜 짓을 해선 안돼! 네가 사과 내
는 걸 나도 다 보았으니까." 사내아이는 훌쩍훌쩍 울면서 말했다.
"음, 이제 됐다. 자, 이 사과는 가지고 가거라." 하고 마르틴은 바루니에서 사
과 하나를 집어 사내아이에거 주었다. "할머니, 값은 내가 치르지요." 하고 할머
니에게 말했다. "공연한 짓을 해서 아이의 버릇을 그르치지 말아요. 저런 애는
붙잡아다 혼구명을 내줘야 정신을 차린다니까요." 할머니는 말했다.
"아니에요, 할머니. 그거야 물론 우리네들의 생각이지만 주님의 뜻은 그게 니
거든요. 사과 한개 때문에 이 아이를 때려야 한다면 이 죄많은 우리는 도대체
어떤 벌을 받아야 하나요?" 노파는 잠자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마르틴은 할머니에게, 주인이 마름에게 큰 빚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그 마은
그 길로 가서 자기에게 빚을 진 사나이를 괴롭히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할머니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사내아이도 거기 서서 듣고 있었다. "주
님께서는 죄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죄를 용서받을
수 없잖겠소? 어떤 사람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하거늘, 하물며 철없는 어린아이
는 더욱 그렇지요." 마르틴은 열심히 말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그렇지만 이렇게 못되
먹은 아이는...." "그러니까 우리들 늙은이가 가르쳐야 하지 않겠소."
"그래요." 하고 할머니는 대꾸했다.
"나도 일곱이나 아이들은 낳았지만 지금은 딸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리
고는 어느 마을에서 그 딸과 같이 살고 있는지, 외손자가 몇인지 등등을 이야하
기 시작했다. "나도 이젠 기운이 없지만 그래도 일을 하지요. 어린 손자들이 가
엾어서 말이에요. 그것들이 모두 어지나 착한지 돌아가면 쭉 나와서 마중해 준
답니다. 글쎄, 아크슈트 그놈은 내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졸졸 따라다니지뭡니
까.
'할머니, 우리 할머니가 난 젤 좋아!' 하면서 말이에요...." 할머니는 완전히 음
이 풀어졌다. "너도 물론 철없는 생각에 그런 짓을 했겠지?" 하고 할머니는 사내
아이를 보며 말했다. 노파가 자루를 들어올리려고 하자, 사내아이가 재빨리 나서
며 말했다. "제가 들어다 드릴게요."
노파는 뭐라고인지 중얼거리면서 자루를 사내아이의 어깨에 올려 주었다. 렇
게 하여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노파는 마르틴
에게서 사과 값 받는 것을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마르틴은 우두커니 서서 두 사
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둘이서 걸으면서 연방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것에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자 마르틴은 집 안으로 되돌아왔다. 층계에 떨어져
있는 안경을 주웠는데 깨진 데는
없었다. 마르틴이 다시 일감을 잡고 부지런히 손을 웁직이는 사이에 어느덧날
이 저물어 바늘 구멍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벌써 점등부가 가스등을 켜느
라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르틴은 '아무래도 불을 켜야겠군' 하고 생각했다. 램
프에 불을 당겨 고리에 걸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한 쪽 장화 일을 끝내고 이리
저리 살펴보니 상당히 잘 꿰매졌다. 도구를 치우고 가죽 부스러기를 어 낸 다음
실과 바늘을 간수하고 램프를 떼어 테이블 위에 놓고는 벽장에서 성서를 꺼냈
다. 어젯저녁에 가죽 조각을 끼워 놓은 데를 펼치려고 했는데 다른 페이지가 펼
쳐졌다. 마르틴은 성서를 펼치자 어젯저녁의 꿈이 생각났다. 꿈이 되살아나는
동시에 무엇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 왔다. 마르틴이 뒤를 돌아다보
니 어두컴컴한 사람이 서 있었다. 확실히 사람은 사람인데 누군지알 수 없었다.
다만 마르틴의 귀
밑에서 소곤대는 것이었다. "마르틴, 마르틴,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
"누구를요?" 하고 마르틴은 말했다.
"날 말이다. 아까는 나였어." 목소리가 말했다. 그러자 어두운 한구석에서 스
체파티치가 앞으로 나오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형체도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렸
다. "그것도 나였어." 하고 말했다. 그러자 어두운 한구석에서 아기를 안은 여자
가 나차났다. 여자가 미소짓고 아이가 활짝 웃었다고 생각하자 이내 사라져 버
렸다. "이것도 나였지." 하고 목소리가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와 사과를 가진 사내아이가 나와서 둘이 같이 정답게 웃으며 찬
가지로 사라져 버렸다. 마르틴은 기쁨에 들떠 성호를 긋고 안경을 끼고 성서의
펼쳐진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페이지의 첫머리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때에 마실 것을 주었며
나그네 외었을 때에 영접했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거....'
그리고 같은 페이지 아래쪽에는, 또한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내 형제 중에 지
극히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가 전한복음
서 제25장)' 마르틴을 곧 깨달았다. 어젯밤 꿈의 약속대로 그리스도는 그에게로
왔고 마르틴은 그를 대접했다는 것을. 불을 놓아 두면 끄지 못한다
톨스토이 그 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죄를 지을
ㄸ에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가 전한 복음
서 제18장 제21절)"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씩
일곱 번까지라도 하라(제22절)."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마치 이와 같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게산을 맞추게 되었다(제23절). 계산을 시작하자 1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나왔다(제25절). 그런데 그는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로
주인은 그에게 명하여 그의 몸과 처자와 그 밖에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갚으라고
했다(제25절). 그래서 종이 엎드려 주인에게 절하며 "참아 주십시요. 다 갚겠습니
다."하고 말하자(제26절), 주인은 그를 가엾게 여겨 놓아 보내며 빚을 탕감해 주
었다(제27잘).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하나를 만
나자 붙들어 멱살을 잡고 "네가 내게 빚진 것을 갚으라" 하고 말했다(제28절).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29절)."
그러나 그는 듣지 않고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갚을 ㄸ까지 옥에 혀
있게 했다(제30절).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유감스럽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고했다(제31절).
불을 놓아 두면 끄지 못한다.
어떤 마을에 이반 시체르바코프라는 농부가 살고 있었다. 살림도 넉넉하고 건
강하여 마을 제일의 일꾼이었으며
세 아들 또한 다 성장해 있었다. 큰아들은 벌써 결혼했고, 둘째 아들도 이제
결혼할 나이였으며, 셋째는 아직 한 사람 몫은 안 되었으나 짐도 지고 밭일도
슬슬 하기 시작하였다. 이반의 아내도 영리하여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나갔으
며 며느리도 얌전하고 일 잘하는 여자가 들어왔다. 이반은 그들을 거느리고 유
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온 집안에서 일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곤 오직 고 병든
아버지뿐이었다 (천식으로 벌써 7년째나 페치카옆에 누워 있었다). 이반에게는
무엇이나 다 갖춰져 있었다. 말은 세필이나 되고 망아지도 있었다. 어미소와 송
아지, 양은 열세마리나 된다. 여자는 남자들의 신발도 만들고 옷도 꿰매고 틈틈
이 밭일도 거들었으며 남자들은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추한 보리가 다
음 해 새로 보리를 거둬 들일때까지도 남아 돌 정도였다. 그리고 세금과 그밖의
비용은 귀리로 충당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반의 식구들은 항상 유복한
살림살이를 꾸려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반은 이웃에 살고 있는 코
르세이 이바노프의 아들 가브릴로 호로모이라는 사나이와 우게 되었다.
예전 코르세이 노인이 살아 있고, 이반의 아버지가 살림을 맡아서 했을 무렵,
두 집은 서로 정다운 이웃이었다.
여인들이 키나 물통이 필요하거나, 남자들이 곡식을 넣을 포대가 필요하거나,
또 갑자기 수레바퀴를 갈아야
된다든지 하면 서로 달려가 도와 주곤 했던 것이다. 간혹 송아지가 탈곡장에
뛰어들거나 하면 그것을 몰아 내고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송아지를 좀 단속해서 이리 못 오게 해 줘. 우린 아직
짚단을 그냥 걸어 놓았으니까." 그 송아지를 탈곡장에 가둬 두거나 서로 욕을
하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노인들의 시적에는 그렇게 오손도손 살았는데
그 아들들이 농삿일을 맡아 하게 되자 형편이 달라졌다. 일의 발단은 주 하찮
은 데서 일어났다.
이반의 며느리가 치는 닭이 겨우 알을 낳게 되었다. 젊은 며느리는 부활절에
쓰려고 그 달걀을 정성스레 모으고
있었다. 매일 같이 광 안에 있는 닭의 둥우리에 가서 알을 꺼내 보곤 했는데,
어느 날 암탉이 무엇에 놀랐는지
울바자를 넘어 이웃집 마당으로 들어가 거기에다 알을 낳았다. 젊은 며느리는
암탉이 꼬꼬댁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나, 마침 집안을 청소하는 중이었으므로 일을 마치고 가려고 생각했다.
저녁때가 되어 광 안의 둥우리에
가보니 달걀이 없었다. 젊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시동생에게 알을 꺼내지 았
느냐고 물어 보았으나 꺼내지 않았다는 대답이다.
그때, 막내 시동생 타라스카가 "형수님, 암탉은 이웃집 마당에서 알을 낳고 꼬
꼬댁거리던데요."라고 했다. 젊은 며느리가 자기의 암탉을 보니 벌써 수탉과 나
란히 홰에 올라앉아 이제 그만 자자고 하는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너 어디서
알을 낳았느냐고 물어 보려 했으나 어차피 대답은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젊은 며
느리는 옆집으로 갔다. 그러자 그 집 할머니가 나와서 웬일이냐고 물었다. "다
름이 아니구요. 우리 집 암탉이 댁의 마당으로 들어 와 알을 낳은 것같아서요."
"원, 그런 건 통 보지 못했다우. 우리도 닭이 있어서 매일 아침 알을 낳기 때문
에 남의 달걀 같은 건 필요 없지. 우리는 남의 집 마당을 어슬렁거리면서 달걀
을 살피지는 않으니까." 젊은 아낙은 화가 나서 언짢은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
자 이웃 할머니도 마주 덤벼들어 두 아낙은 서로 욕지거리를 했다. 이반의 아내
도 물통을 메고 오다가 한몫 끼어 들었다. 가브릴로의 마누라도 어나와 욕설을
하며 갖가지 일을 몽땅 들추어 내는 것이었다. 거기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모두
가 한꺼번에 뒤떠들며 자기 말이 옳다고 지껄이는 형편이었다. 너는 이렇다, 아
니 너야말로 그렇다, 너는 도둑놈이다, 너는 몹쓸 계집이다, 너는 어른 알기를
우습게 안다, 너는 깝죽거린다 등등.
"남의 키를 뚫어 놓고! 그리고 우리 집 멜대도 당신네가 훔쳐갔지? 어서 썩이
래 내놔!" 그렇게 말하고선 벨대를 와락 끌어 잡아당겼으므로 물은 엎질러지고,
머리에 두른 수건은 찢어지면서 이번에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거기에 들판에서
돌아오던 가브릴로가 달려들어 자기 마누라의 편을 들자 이반도 아들과 함께 뛰
어와서 그야말로 치거니받거니 큰 난장판이 벌어졌다. 이반은 건장한 사이였으
므로 사람들을 사방으로 밀어 젖히고 가브릴로의 턱수염을 한 줌이나 뽑아 버
렸다. 거기에 동네 사람들이 여럿 몰려와 겨우 싸움을 말렸다.
이것이 긴 싸움의 시초였던 것이다. 가브릴로는 그 길로 턱수염을 진정서와함
께 읍사무소에 가지고 가서, "내가 턱수염을 기른 것은 곰보딱지 바니카에게 뜯
기기 위해서가 아니었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마누라는 마누라대로 이웃을 돌아
다니면서 머지않아 이반이 소소에 져서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된다고 떠들어
댔다. 이렇게 하여 두집안은 원수처럼 되어 버렸던 것이다. 노인은 애당초에아들
을 타일렀으나 젊은
혈기는 그런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재차 이렇게 말했다. "너
희들은 보아하니 어줍잖은 짓들을 하고 있다. 공연한 일로 싸움을 벌이다니. 잘
생각해 보아라. 일의 시초는
달걀 한개가 아니야? 옆집 어린아이가 알 하나 주웠다. 그게 뭐 나쁘냐? 달걀
하나에 값이 얼마나 나간단
말이냐?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란다. 아니 치고받고 싸웠다 할지라도 죄은
인간끼리 한 짓이니 탓할 것 없다. 이제라도 가서 화해하도록 해라. 그러면 그
만이지 언제까지나 고집을 부리고 있으면 점점 더 꼬이느리라." 젊은이들은 노
인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쓸데없는 잔소리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노망들린찻
이라고 투덜댔다.
그러니 이반이 꺾일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그놈의 턱수염을 뽑은 일은 없다
구요! 놈이 제 손을 뜯어 놓구 거짓말하는 거예요. 게다가 녀석의 아들은 남의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고 루바시카도 찢었어요. 자, 이걸 좀 보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이반도 고소하러 갔다. 두 사람은 중재 재판소에서도, 마을 재소에서도
다퉜다. 그 소송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가브릴로 네 수레바튀의 바퀴통
이 없어졌다. 가브릴로의 어머니도 그의 아내도 이반의 짓이라고 주장했다. "우
리는 다 보고있었어요. 그놈이 한밤중에 창문 앞을 지나서 짐수레 있는데로 갔
으니까. 그리고 이웃 할머니 말씀이 녀석이 훔친 바퀴통을 주막에 가서 돈으로
바꾸려고 했다잖아요." 그리하여 다시 소송이 벌어졌다. 날마다 입씨름 아니며
들러붙어 싸우기가 일쑤였다. 어린아이들까지 어른들이 하는 짓을 본떠서 서로
욕을 하고, 며느리들은 개울에서 만나며 발랫방망이보다 혓바을 더 열심히 놀리
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서로 트집을 잡는 정도였으나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나중는
상대방의 것을 서로 훔치게까지 되었다. 아낙네들이 아이들에게 그렇게 시켰던
것이다. 두 집의 살림 형편은 자꾸만 기울어져 갈 뿐이다. 이반 시체르바코르와
가브릴로 흐로모이는 마을의 모임에서도, 마을 재판소에서도 중재 재판에서도
소송 사태를 벌여 왔으므로, 중재하는 쪽에서도 이젠 싫증을 냈다. 가브릴로가
이반에게 벌금을 물리든지 유치장살이를 시키든지 하면 다음에는 이반이 가브릴
로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그러면 그럴수록 두 사은
더욱 고집불통이 되어 갔다. 개들이 싸울때는 몹시 사나워져서 한쪽 개를 에
서 건드리기만 해도 그 개는 상대방 개가 물었다, 생각하고 더욱 달려드는 법이
다. 두 농부도 그와 마찬가지로 소송을 걸어 둘 중의 어느 쪽인가가 벌금이나
구류 처분 받으면 그 때문에 두 사람은 또다시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다. "어디
두고 보자, 혼구멍을 내줄테니."하고 서로 벼르는 형편이었다. 이리하여 소송은
계속되었다. 오직 노인만이 페치카 옆에서 언제나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었다.
우선 이렇게 말머리를 연다.
"너희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헛된 싸움 같은 것은 그만두고 젠
버려 두었던 일을 해라. 남을 곯릴 생각만 하다간 이쪽도 골탕먹는다. 화를 내면
낼수록 점점 더 악화될 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노인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
다. 7년째 되는 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 어떤 혼인 잔칫자리에서 이반의 아내가
가브릴로에게, 당신은 말을 훔치다가 들키지 않았느냐고 하여 여러 사람 앞에
서 크게 망신을 주었다. 화가 치민 가브릴로는 술이 거나하게 오른 참이라 이반
의 아내에게 덤벼들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반의 마누라는 임신 중이었므로 몹시
앓게 되었다. 이반은 신이 나서 당장에 고소장을 가지고 예심 판사에게 달려갔
다. 이번에야말로 혼 좀 날걸, 시베리아 행은 어김없으렷다, 하고 생각했던 것이
다. 그런데 또다시 이반의 고소장은 아무런 일도 못했다. 예심 판가 소송을 받
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아내의 몸을 조사했던 바 아무런 상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반은 그곳에서 이리저리 쏘다니며 서기와 배심원들에게 술을 대접
함으로써 끝내 가브릴로가 태형을 받도록 하였다. 가브릴로는 재판소에서 판결
문을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 서기는 다음과 같이 읽었던 것이다. "당 재판소는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린다. 농부 가브릴로 호로모이에게 태형 2대를 선고한다."
이반은 그 판결을 들으면서 아주 즐거운 표정ㄹ을 지으며 가브릴로가 있는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가브릴로는 판결문 낭독이 끝나자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홱 돌
아서서 복도로 나가 버렸다. 이반도 그 뒤를 따라 밖으로 가
말이 묶여 이있는데로 가려고 할때 가브릴로가 멀리서 외쳐대고 있었다. "내
등에 매가 내려지게 하고도 너는 무사할 줄 아느냐? 네 등이나 불에 데지 않게
조심하라구."
이 말을 들은 이반은 그 길로 재판관에게 달려갔다. "존경하옵는 판사님! 녀
석은 내 집에 불을 지른다고 을러 댑니다. 잘 물어 보아 주십시요. 증인들 앞서
한 말이니까요."
판사는 가브릴로를 불러 내어 "정말이냐, 자네가 했다는 말이?"하고 물었다.
"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판사님이 권리가 있으시거든 어서 저를 ㄸ시
죠. 그놈은 죄도 없는 내게 매를 맞게 하고도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을 줄 아
는 모양입니다." 가브릴로는 너무 분한 나머지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판사들도
그의 그러한 모양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자칫 잘못하다간 옆집 사나이와 그들
자신에게 어떤 무무한 짓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이
많은 판사가 말했다. "어떤가, 자네들. 이제 이 자리에서 화해하는 것이 좋지 않
겠는가? 이봐, 가브릴로 자네도 그렇지, 임신한 아낙을 치다니. 그래서야 되겠
나? 하나님 덕분에 무사했기망정이지 어떤 큰 죄를 저질렀을지 모르지 않가.
대체 이것이 좋은 일인가? 자네는 이반에게 사과하게. 이반도 용서해 주겠지.
그렇게 하면 나도 이 판결문을
다시 쓸테니까." 그것을 듣고 서기가 말했다.
"그것은 안됩니다. 형법 제 117조에 이한 쌍방의 시담이 성립되자 않고 재판의
판결이 성립되었으니 그 판결을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러자 판사는 화가나서 말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일
이다. 알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화목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말하고 판사
는 다시 그 두 사람을 타일렀으나 막구가내였다. 가브릴로는 숫제 들으려고도하
지 않았다. '저는 1년 뒤엔 쉰이됩니다. 아들도 며느리도 있습니다. 저는 태어나
서 아직 한 번도 남에게 매맞은 일이 없는데, 이번에 이 곰보딱지 바니카 놈니
나를 채찍 아래 밀어 넣으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제가 저놈에게 빌어야 합니까!
천마의 말씀입니다... 바니카, 너 이녀석, 어디 두고 보자!" 가브릴로이 입술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말도 계속하지 못했다. 돌아서더니 그대로 나가
버렸다. 마을 재판소에서 자기 집까지는 10베르스차 가량 되어 이반이 돌아왔
을때는 퍽 늦은 시각이었다. 벌써 여자들은 소와 말들의 마중을 나갔다. 이반은
말을 마차에서 떼고 뒷처리를 한 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아무도
없었다. 아들들은 들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아낙네들은 말과 소를 목고오
는 중이다. 이반은 집 안으로 들어가서 위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가브릴로가
판결문을 듣고 낯빛이 변하면서 홱 벽을 향해 돌아앉던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반은 가슴이 아픈 듯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에 자기가 채형 선를 받으
면 어떨까, 하고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가브릴로가 측은해졌다.
문득 페치카 옆에서 늙은 아버지의 기침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몸을 움직여서
아래로 내려왔다. 간신히 내려오자 노인은 의자에 앉았다. 노인은 내려와 의자까
지 오는 데도 힘이 들어서 기침을 했다. 이윽고 기침이 가라앉아 테이에 손을
얹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느냐, 판결이 났겠지?"
"태형 20대입니다." 라고 이반이 대답했다. 노인은 머리를 저으면서 말했다.
"이반아, 너는 좋지 못한 짓을 하고 있다. 그것은 죄야. 가블리로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이다. 그래, 그
사람이 채찍을 맞아 등에 피라도 나면 네가 뭐 편안하게 되는 일이라도 있
냐?"
"앞으로 그 자가 나쁜 짓을 안 하게 되겠죠." "뭘 안 한다고? 도대체 그 사람
이 뭘 내개 나쁘개 했다는 거냐?" "아니, 그 녀석이 얼마나 행패를 부렸다구
요!" 하고 이반은 말하기 시작했다.
"제 아내가 하마터면 죽을 뻔한데다가 이번에는 또 불을 지르겠다고 을러대는
형편이라니까요. 그런데도 가만히
있어야 하나요?" 노인은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이반아, 너는 자유로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고 나는 벌써 몇 년째나 페치카
옆에 누워 있으니까 너야말로
세상의 모든 일을 보아 알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잘못된 각
이다. 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있어. 네 눈은 증오심 때문에 흐려졌다.
남의 잘못은 눈앞에 환히 보여도 자기의 잘못은 못 보는 거지. 너는 지금 뭐라
고 했지. 그가 나쁜 짓을 한다고? 그 사람 혼자만 나쁜 짓을 했다면 싸움이벌어
질 리가 없어.
싸움은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거다. 상대방의 잘못은 작은 것도 들
보처럼 보이지. 만약 그 사람만 심술궂고 너는 착한 사람이었다면 싸움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 그 사람의 턱수염을 뽑은 건 누구냐? 반타작할
느릅나무를 빼앗은 건 누구냐? 그 사람을 이 재판소에서 저 재판소로 끌고다닌
자는 누구냐?
그런데도 너는 모든 걸 그 사람에게 돌리고 있다. 너의 참을성 없는 행동으로
만사가 이 지경이 되었다. 나는
말이다, 이반, 그런 짓을 해 오지 않았었고, 너희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지 았
다. 나나 그 사람의 아버지인 옆집 노인이나 그런 방식으로 살지 않았다. 우리들
사이는 어떠했는 줄 아느냐? 그야말로 진짜 이웃 사촌이었지. 그 집에 밀가루
가 떨어지면 아낙네가 와서 "프로르 아저씨, 밀가루가 떨어졌는데요'했고 럼 난
'광에 가 쓸 만큼 가져 가시죠.'라고 했다. 옆집에 말을 몰고 나갈 사람이 없으
면 '야, 브류트카야, 옆집 말을 좀 몰려마'했다. 그리고 우리가 부족한 것이 있으
면 서슴지 않고 가서 '고르제이, 이러이러한 게 없는데 하면 '가져가요, 프로르'
했지. 우리는 이렇게 지내 왔다. 우리가 그렇게 지낵 때에는 살림도넉넉했는데
요즘 형편이 어떠냐? 바로 얼마 전에도 어떤 군인이 프레부나 (1877년의 발칸
전쟁에서 러시아 군이 터키 때문에 고전하 싸움터)의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지
만, 어떠냐, 지금 너희가 하는 싸움은 그 프레부나보다 한결더 나쁘다고 생각지
않느냐. 도대체 이것도 인간의 행활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니 그건 죄라고
할 수밖에 없어! 너는 이 집안의 가장이니 책임이 제일 크다. 아이들 교욱에도
못된 영향을 주게 돼! 며칠 전에도 타라스카, 그 코흘리개 녀석이 아리나 아주
머니에게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하고 있는데도 어미는 그걸 보고 웃고 있지 않겠
니. 도대체 이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느냐? 네 책임이다! 영혼이란 것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그래, 그런 짓을 해도 좋겠니? 저쪽이 한 마디 하면 이쪽은 두 마디
내뱉는다. 저쪽이 한 대 때리면 이쪽은 두 대 때린다.그래선 안 된다. 이반, 그리
스도가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우리들 바보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그런 것이 아
니다. 상대방이 뭐라 해도 잠자코 있으면 저쪽도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고 그리
스도는 가르쳐 주셨다. 상대방이 뺨을 때리면 한쪽뺨도
마저 내밀고, 때릴 만한 이유가 있으면 이쪽 뺨도 때리시요, 해야 한다. 저도
양심이 있어 그렇게는 못할 게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은 바로 이것이지
고집이 아니다. 왜 잠자코 있느냐, 내 말이 틀렸느냐?" 이반은 조용히 듣고 있
었다. 노인은 한참 콜룩거리다가 간신히 기침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너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다고 생각하느냐? 남을 먼저 생하
는 마음이지. 지금 현재의 네 살림살이를 생각해 보아라. 그 싸움이 시작 된 이
래로 살림 형편이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 소송으로 돈을 얼마나 버렸는지, 마
차 삯, 음식 값은 또 어떻고, 아들들이 자라 일을 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형편이
차차 나아져
재산도 불어나야 할 터인데 되려 줄어들지 않느냐.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냐?
이도저도 다 그것 때문이야. 네 고집 때문이다. 너는 자식들과 함께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할때에 악마의 부추김에 넘어가 재판소다, 예심... 뭣이다, 하고 돌
아다니기만 하니... 밭을 가는 것도 씨를 뿌리는 것도 때를 맡추지 못하면 은 아
무 것도 낳아 주지 않아. 왜 올해는 귀리가 흉작이지? 네가 도대체 귀리를 언
제 갈았느냐? 거리에서 돌아와서였다. 그래 재판에 이겨서 무슨 덕을 보았느냐.
쓸데 없는 짐만 짊어졌을 뿐이 아닌가 말이다. 자기의 생업을 잊어서는 안 된다.
들일도 집안 일도 아이들과 같이 땀흘려가며 하고, 혹시 누가 화나는 리를 하더
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용서해 주어라. 그렇게 하면 일은 순조롭게 잘 돼 나
가고 마음도 편안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이반은 잠자코 있었다.
"자 어떠냐, 바니카! 이 늙은 아비의 말을 들어 주지 않겠니! 지금 곧 마차를
몰아 이제 돌아온 길을 되돌아
가서 소송을 취하하고 오너라.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가브릴로에게 가서 하님
의 가르침대로 화해하고 집으로 데리고 오너라. 내일은 마침 부활절이니까 보드
카라도 마시면서 이제까지의 잘못을 말끔하게 씻어 버리는 게 좋겠다. 이제 앞
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며느리들에게나 젊은 아이들에게도 잘 타일러 주고말
이다."
이반도 긴 한숨을 내쉬면서 과연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다.그
러자 가슴 속의 무거운 짐이 금방 거뜬해지는 것 같았다. 한데 어떻게 화해해
야 좋을지 망설여졌다. 그러자 노인은 아들의 마음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이렇
게 말했다. "바니키야, 어서 가거라. 미뤄서는 안 된다. 불은 시초에 잡지 않으
면 커진 뒤에는 손을 쓸 수가 없게 되느니라."
노인은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었으나 때마침 아낙네들이 돌아와 떠들어대기
시작했으므로 말을 멈춰야 했다.
아낙네들은 가브릴로에게 태형 판결이 내렸다는 것도, 가브릴로가 불을 지겠
다고 한 것도 모두 들어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저 혼자 생각해낸 일까
지 덧붙여서 벌써 목장에서 옆집 여인네들과 입씨름까지 벌이고 오는 참이었
다. 가브릴로의 아내가, 예심 판사에게 뭔가를 쳐들며 협박까지 했다는 말도나왔
다. 분명치는 않으나 예심 판사가 가브릴로의 역성을 들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사태가 바뀐다든가, 게다가 학교 선생님도 직접 황제 폐하에게 이반의 일로 소
장을 냈는데, 소장에는 바퀴총에 관한 일도, 채마밭 일도 낱낱이 썼기 때에
이반의 토지는 이제 금방 옆집 차지가 돼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는
동안 이반의 마음은 다시 돌같이 굳어져 가브릴로와 화해하려던 마음은 사라져
버렸다. 농가의 주인은 언제나 밖에서 돌보아야 할 일이 많은 법이다. 이반은
아낙네들을 상대로 이야기할 생각이 없어 훌쩍 일어나 밖으로 나가 탈곡장을 지
나 곳간쪽으로 갔다. 그쪽을 대간 치우고 뒷마당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봄 보리
씨를 뿌리기 위해 둘이서 밭을 갈았던 것이다. 이반은 그들에게 들일에 관해 이
것저것 물어 보고 그들의 일을 거들어 주려고 했으나 이미 날은 저물었다. 이반
은 통나무는 다음날 아침까지 놓아 두기로 하고, 마소에 짚을 주고 마구간에 가
타라스카가 밤일을 하러 가도록 말을 밖으로 끌고 나온 다음, 마간의 문을 닫고
밑에 판대기를 대어 틈을 막았다.
'이제 저녁을 먹고 자야겠군.' 이반은 말의 망가진 목걸이를 들고 집쪽을 항
하여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아네 가브릴로의 일도, 아버지가 하신 말씀도 다
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고리르 잡아당겨 입구의 복도로 들어선 순간 올자 저
쪽에서 옆집 주인의 욕설하는 목 쉰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녀석, 그런 녀석은 실컷 두들겨 줘야 해!" 가브릴로는 누군가를 욕
하고 있었다. 이것을 들은 이반의 마음 속에는 또다시 옆집 주인에 대한 증오
심이 불길같이 일어났다. 가브릴로가 욕지거리를 하는 동안 이반은 몇 번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브릴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이반은 방 안로
들어갔는데 젊은 며느리는 등불 아래서 물레를 돌려 실을 잣고, 아내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장남은 목피 구두
가장자리를 꿰매고 있고, 둘째 아들은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타스
카는 밤일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집안은 평온하여 옆집의 가브릴로만 아니며 더할 나위없이 행복할 듯 싶었다.
이반은 화난 듯한 얼굴로 안에 들어가 의자에 도사리고 앉은 고양이를 집어 지
고 대야를 놓아 둔 자리가 다르다고 여자들을 꾸짖었다. 한바탕 그러고 나자 이
반은 어쩐지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자리에 앉아 씁쓰레한 얼굴로 말의 목걸이
를 손보기 시작했으나 가브릴로가 하던 말이 아무래도 머리에서 떠나지 았다.
재판소에서 하던 얘기, 그리고 방금 누구를 욕하는 소리인지, "실컷 두들겨 줘야
해...." 하던 목쉰 소리 등이 말이다. 늙은 아내는 타라스카에게 저녁밥을 주고
있었다. 타라스카는 식사를 마치자 짧은 겉옷 위에 긴 외투를 걸치고 허리띠로
질끈 동여맨 다음 빵을 가지고 말들이 기다리고 있는 한길로 나갔다. 아들이 아
우를 배웅하려고 했으나 이반은 자기가 일어나 입구 층계로 나갔다. 이반은 입
구 층계로 내려가 아들을 말에 태우고 뒤에 있는 망아지를 몰아 세운 다음 한참
거기 머물러 서서 주위를 바라봤다. 타라스카는 마을의 큰길로 려가다 동행하는
젊은이들과 만난 모앙이었으나 그런 뒤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반은
문간에서 언제까지나 서 있었다. "너도 조심해야 할 걸. 언제 무엇이 홀랑 타
버릴지 누가 알아." 하던 가브릴로의 말이 머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ㅇ는 것이
었다. '고약한 놈이라 자기 몸이 다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을 거야.' 하고 이
반은 생각했다. '죽 가물었겠다, 게다가 바람도 있겠다, 울타리 뒤로 슬쩍 기어
들어와서 불을 지르고 그냥 도망쳐 버리면, 그렇게 되면 남의 집을 불사르고도
아무 죄에 걸리지 않을게 아닌가! 어떻게 해서라도 현장에서놈을 붙잡아야지. 아
무렴 놓쳐서는 안돼!'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이반은 입구 층계쪽으로 되돌아 가려하지 않고 곧장 로
나가 대문 뒤에서 모퉁이로 돌아왔다.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이반은 마당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작정하고 살금살금 문을 따라 걷기 시작했
다. 모퉁이를 돌아 울바자에 붙어서 들려다보니 저쪽 모퉁이에서 무엇이 움직인
것같이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엿보다가 울바자 모퉁이에 도로 숨어 버린 것
같았다. 이반은 발길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온 정신을 모았으나 주위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다만 바람이 버드나무 가지를 떨게 하고 밀짚을 바락거리게 할
뿐, 눈을 뽑아가도 모를 정도로 온통 캄캄하기만 했다. 차차 눈이 어둠에 익숙해
졌다. 이반의 눈에 기둥과 추녀, 그 밖의 것이 하나씩 보이게 되었다. 한참 서서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잘못 봤을까?'
이반은 나막신을 신고 있었으므로 천천히 걷자 마치 맨발로 걷는 것처럼 조했
다. 곳간쪽으로 왔을때 저쪽 끄트머리 기둥 곁에서 무엇인가 번쩍 빛났다가 다
시 꺼졌다. 이반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걸음을 멈출 겨를도 없이 다시금 같은 자리에서 먼저보다 밝은 빛이 타랐다. 모
자를 쓴 한 사나이가 이쪽으로 등을 꾸부정하게 돌린 채 손에 든 짚단에 불을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반의 가슴은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이반은 아랫배
에 힘을 주고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 놓았으나 발이 땅을 밟는지 허공을 나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는 속으로 좋아서,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는다.현장을 붙잡을
테다!
하고 생각했다. 이반이 두 개의 차양이 마주 닿은 데까지 채 가기도 전에, 갑
자기 그 언저리가 눈부실 정도로 밝아지면서 이제 그 자리에는 조그만 불이 아
니라 차양 밑의 밀짚이 확 타올라 지붕으로 뻗치고 있었다. 거기에 가브릴도 서
있어 그의 전신이 완전히 불빛에 드러나 보였다.
종달새를 덮치는 매처럼 이반은 흐로모이에게 다려들었다. '이놈, 이번엔 안
놓친다.'고 생각했다. 그 때 호르모이는 발소리를 들었던 모양으로 홱 뒤를 돌
아보자 어디서 그러 힘이 나왔는지 절름거리는 (흐로모이는 절름발이란 뜻으로
가브릴로의 별명이다) 다리를 용케 끌며 토끼처럼 깡충깡충 도망쳤다. "게 섰거
라!" 하고 이반은 외치며 가브릴로를 뒤쫓았다. 이반이 그의 멱살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가브릴로는 그 손아귀에서 빠져 나갔다. 이반이 외투자락을 붙잡았
으나 찢어지는 바람에 넘어지고 말았다. 이반은 벌떡 뛰어 일어나 "야아! 저놈
잡아라!" 하고 크게 외치며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반이 넘어지는 바람에 가브
릴로는 재빨리 자기 집 마당으로 들어갔는데 거기까지 이반이 쫓아갔다. 락
붙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이반은 무엇인가로 머리를 세게 맞았다. 아무래도 로
맞은 것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돌이 아니라 가브릴로가 마당에 뒹구는 떡갈나
무 막대기를 주워 들고 이반이 다려들었을때 힘껏 그 머리에 내리쳤던 것이다.
이반은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고 생각하자 이내 정신이 몽롱해지고 또 주위가
캄캄해져 버렸다. 정신이 아찔하며 머리가 핑 돌았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때는
이미 가브릴로는 없었다. 온 누리는 대낮같이 환하고, 자기 집쪽으로부터는 마
치 기계라도 운전하는 것 같은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나고, 무엇인가탁탁 퉁기는
소리도 났다. 이반이 돌아다보니 뒷마당의 곳간이 온통 불덩이가 되어 그 저쪽
곳간으로 옮겨 붙는 중이었다. 불티랑 불붙은 짚단이 안채쪽으로 날아갔다. "아
니, 이게 어떻게 된일일까? 아이구" 하고 외치며 이반은 양 주먹을 쳐들어 가슴
을 마구 쳤다. "아아, 그 때 차양 밑에서 불붙는 짚단을 끌어 내어 껐으면 괜찮
았을텐데! 아니 이게 웬 날벼락이냐!" 그는 이 말만 되풀이하였다. 힘껏 소리를
질렀다고 자기는 생각하나 숨이 차고 목소리가 나오지않았다. 다려가려고 해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고 얽혀들 뿐이다.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았는데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더니 다시 숨이 막혔다. 한찬 멈춰 서서 숨을 돌리고 다시 걷기 시
작했다. 겨우 곳간을 한 바퀴 돌아 불난 것에 닿을 때는 불이 옮겨 붙은 곳간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고, 안채과 대문에까지 불이 붙어서 불길이 뿜어나오는 바람
에 마당은 걸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숱한 사람이 모여들었으나 손을 쓸 방도
가 없었다. 근처 마을 사람들은 자기네의 가재 도구를 끌어 내기도 하고 가축
들은 딴 데로 몰아 내기도 하는 것이다. 집채도 타기 시작했다. 게다가 바람까지
불어 오기 때문에 한길 건너까지 옮겨 붙어 마을이 절반이나 타 버렸다. 이반
의 집은 겨우 식구들이 옷만 입은 채 튀어나왔을 뿐 몽땅 타고 말았다. 가축들
도 밤일을 나간 말을 빼놓고는 전부 찜이 되고, 닭도 홰에 앉은채 타 죽었으며,
마차도, 가래도, 써래도, 여자들의 옷궤도,뒤주에 간수한
곳식도 모조리 타 버렸다. 가브릴로의 집에서는 그래도 가축들을 몰아 냈고
이것저것 더러 꺼낼 수도 있었다. 불은 밤새도록 타올랐다. 이반은 한쪽 구석에
서서 멀거니 자기 집쪽을 바라 보면서, "아, 이게 웬일이란 말이나가! 그냥 짚단
을 끌어 내어 비벼 껐더라면 됐을텐데."하고 혼자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러나안
채의 천자이
무너져 내려앉을때 이반은 그곳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온통 그을은 재목을 아
끌어 내려고 했다. 마누라가 그것을 보고 불러 내려고 했으나 이반은 보따리
하나를 끌어 내고 또다시 들어가 하나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하나 그대로 비틀
비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불더미 속에 쓰러졌다. 그 때 아들이 뛰어들어가 쓰
러진 아버지를 구했다. 이반은 턱수염과 머리칼이 타고 옷까지 타서 여기저기구
멍이
나고 두 손에는 화상을 입었으나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모양었
다. "쯧쯧, 아주 정신 나간 거 아냐?"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말했다. 불길은 차차
로 사그라들었으나 이반은 희미한 정신으로, "여보시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요! 그냥 끌어 내기만 했으면 됐을 텐데."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침이 되어
마을 반장이 이반을 부르러 아들을 보냈다. "이반 아저씨, 아저씨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됐어요. 아저씨를 좀 보시겠대요, 어서 가세요!" 이반은 아버지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버
지라고? 누가 누굴 부른다고?" "아저씨를 부르고 있어요. 죽기 전에 한번 보신
다구요. 할아버진 우리 집에서 지금 돌아가시려고 그래요. 자, 가세요, 이반 아
시." 반장 아들은 그의 팔을 끌었다. 이반은 반장 아들의 뒤를 따랐다.
노인은 업혀서 낭로 때 불이 붙은 짚이 떨어져 화상을 입었다. 그래서 멀리떨
어진 마을 반장 집으로 떠메어져 갔던 것이다. 이반이 아버지에게로 갔을 때 집
안에는 늙은 반장의 아내와 페치카 옆의 아이들밖에 아무도 없었다. 모두 불구
경하러 갔던 것이다. 노인은 촛불을 손에 들고 침대에 누워 문가 쪽을 보고있었
다. 아들이
들어왔을때 노인은 조금 몸을 움직였다. 노파가 다가가 아들이 왔다고 하자곁
으로 가까이 오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반이 곁으로 다가가자 노인은 말했
다. "어떠냐, 브뉴트카?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더녀? 누가 이 마을을 태웠느
냐?" "그놈이에요, 아버지."하고 이반은 말했다.
"그놈이에요. 내가 이 눈으로 보았거든요. 내가 보는 앞에서 불이 붙은 짚을지
붕 ㅂ에 밀어 넣었어요. 나는 그냥 불붙은 짚단을 끌어 내어 비벼 껐으면 됐어
요. 그렇게 했더라면 아무 일 없었을 걸 그랬어요. "이반아!"하고 노인은 말했
다. "나는 이제 죽을 때가 왔지만 너도 역시 언젠까는 죽는다. 도대체 이건 누
구의 죄냐?" 이반은 멀거니 아버지에게 눈길을 쏟은 채 잠자코 있었다. 한 마디
도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나님 앞에 섰다고 생각하고 말을해라. 도대체
누구의 죄냐? 내가 네게 뭐라고 하더냐?" 그 때 비로소 이반은 잠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이 들면서 모든 일에 납득이 갔다. "이건 제 잘못입니다. 아버지!"
이반은 이렇게 외치며 아버지 앞에 쓰러져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아버님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대해서도 할 말이 없습다.!"
노인은 양손을 움직여 촛불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을 이마로 올려 성호를 그려
고 했으나 거기까지 손이 닿지 않아 단념했다.
"주께 영광 있으라! 주께 영관 있으라!"고 외며 다시 아들을 바라보았다. "바
니카, 얘, 바니카야!" "뭡니까, 아버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이반은 눈물을 흘렸다.
"모르겠어요. 아버지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아버지?" 노인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천천히 말했다.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과
같이 산다면 능히 살아간다."
노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알았느냐, 바니카야, 누가 불을 질렀는지 말해서는 안 돼. 남의 죄를 하나 감
싸 주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둘 용서해 주신다."
노인은 촛불을 양손으로 맏쳐 들고 그서을 가슴에다 갖다 대면서 후욱 숨을내
쉬었다. 그리고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이반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가브릴로의 소행을 발설하지 않았으므로 어떻게 여
불이 일어났는지 끝내 아무도 몰랐다.
이반에게서 가브릴로를 미워하는 마음은 사라져 버렸다. 한편 가브릴로는 찌
하여 이반이 자기의 악행을 남에게 말하지 않는가, 은근히 놀라고 있었다. 그래
서 한동안 가브릴로는 이반을 두려워했은나 차차로 그런 마음이 없어지고 미안
한 마음이 생겨났다. 양쪽 주인들이 싸움을 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식구들도서로
싸우지 않게
되었다. 집들을 다 지을 때까지 두 집 가족은 한 지붕 밑에서 살아다. 그리고
온 마을의 집이 새로 지어졌을때 이반과 가브릴로는 다시 그 전 자리로 돌아가
이웃이 되었다. 이반과 가브릴로는 아버지 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웃끼리 정답
게 지냈다. 이반 시체르바코프는 노부의 교훈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가르침이기
도 하느 불을 애초에 끄지 않으면 안된다는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두고 잊지
않았다. 혹시 누가 자기에게 나쁜 장난을 걸어 와도 맞서서 싸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고 애썼다. 또 혹시 누가 자기를 옥해도 마주 욕
하려 하지 않고그런 나쁜 말을 하지 않게 일깨워 주려고 노력했다. 이반 시체르
바코프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자기집 아낙네들이나 아이들에게도 그렇게가르쳤
으므로 전보다 더 풍족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달걀만한 씨앗
톨스토이 달걀만한 씨앗
어느 마을의 산골짜기에서 어린애들이 달걀만한 크기의 줄무늬 씨앗을 발견
다. 마침 거기를 지나가던 사람이
어린애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보고 5코페이카에 사서 문안으로 가지고 와귀
물로 황제에게 팔았다. 황제는 중신들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이것이 무슨 물건
인지 즉 달걀인지, 씨앗인지 알아보라고 일렀다. 중신들은 함께 모여 의견을 물
었다. 그러나 씨앗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 물건은 창문 위에 놓여 있었데 한
마리의 암탉이 날아와서 쪼기 시작하여 구멍을 내 버렸다. 그리하여 중신들은
그것이 호밀 씨앗이라고 생각했다. 중신들은 입궐하여 황제에게 아뢰었다. "이
것은 호밀 씨앗인 줄 아뢰오."
황제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다시 중신들에게 이 씨앗이 어디서 언제 생겼지
를 알아보라고 어명을 내렸다. 중신들은 요모조모로 생각을 거듭하고 어전에 나
와 아뢰었다. "대답을 드릴 수 업사옵니다. 소신들의 책에는 이것에 관해서 아
무것도 쒸어 있지 않사옵니다. 그러하온즉 농부들에게 한번 물어 모아야 할 줄
로 아옵니다. 늙은이들 가운데서 누가 언제 어디에 이런 씨앗을 뿌렸는지 듣지
않았느냐고." 그리하여 황제는 사람을 보내어 늙은 농부를 한 사람 데리고 오라
고 명령했다. 나이 많은 늙은이가 황제에게로 불려 왔다. 그 농부는 벌써 이도
다 빠지고 얼굴도 꺼멓게 쪼그라진 늙은이였다. 그는 두 지팡이를 짚고 신히
들어섰다. 황제는 그에게 씨앗을 보였다. 그러나 늙은 농부는 벌써 시력이 희미
해졌다. 그리하여 가까스로 절반은 살펴보고 나머지 절반은 손으로 더듬었다. 황
제는 그에게 묻기 시작했다.
"영감, 이런 씨앗이 어디서 생겼는지 그대는 모르겠는가? 그대 밭에 이런 곡을
심지 않았었는고? 혹은 농사를 짓던 시절에 어디서 이런 씨앗을 산적이 없는
고?'늙은이는 귀가 멀어 간신히 알아듣고 가까스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네, 소인은 밭에다 이런 곡식을 심은 일도 없고 거두어 들인 일도 없고 산도
없사옵니다. 그런데 저어... 소인의 아버지에게 한번 여쭈어 보아야겠습니다. 어
쩌면 그 어른은 어디서 이런 씨앗이 생겼는지 들으셨는지 모르니까요."
황제는 영감의 아버지한테 사람을 보내어 자기에게로 데리고 오라고 명령다.
늙은이의 아버지도 찾아서 어전으로 불려왔다. 볼 품 없게 찌들어 빠진 늙은이
는 지팡이 하나를 짚고 왔다. 황제는 그에게 씨앗을 보여 주었다. 늙은이에게는
아직 시력이 있었으므로 잘 알아보았다. 황제는 그에게 묻기 시작했다.
"영감, 이런 씨앗이 어디서 생겼는지 그대는 알고 있는고? 그대 밭에 이런 식
을 심은 적이 없는고? 혹은 또 그대가 농사를 짓던 시절에 어디서 이런 씨앗을
산 적이 없는고?" 늙은이는 다소 귀가 멀기는 했지만 아들보다는 오히려 잘 알
아 들었다. "예."하고 그는 말했다.
"소인은 밭에다 이런 씨앗을 뿌린 일도 없고 거두어 들인 일도 없사옵니다. 또
산 일도 없사옵구요. 왜냐 하면
소인들의 시절에는 아직 돈이라는게 없었기 때문이었사옵니다. 모든 사람이자
기 곡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모자랐을 적에는 서로 나눠 가졌사옵니다.
소인은 어디서 이런 씨앗이 생겼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소인 네 시절 때 씨앗
은 요새 것보다야 더 굵고 더 소출이 많긴 했습죠. 그러나 이런 것은 본 일이없
사옵니다. 이건
소인이 아버지한테 들은 얘기옵니다만 아버지 시절에는 소인 시절 것에 대면
더 곡식이 산출 되었는데, 한결
소출도 더 많고 한결 더 굵기도 했었다는 것이옵니다. 소인의 아버지에게 문
하셔야 할 줄로 아뢰옵니다." 그리하여 황제는 다시 이 늙은이의 아버지를 데리
러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황제의 편전으로 데려왔는데 노인은 지팡이도 짚지
않고 어전으로 나왔다. 가벼운 걸음걸이였다. 눈도 밝고 귀도 잘 들리며 말도또
렷했다. 황제는
이 노인에게 다시 그 씨앗을 보여 주었다. 노인은 그것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이렇게 뜯어 보고 ㅈ게 뜯어
보았다. "오랫동안, 소인은 이렇게 옛날 곡식을 보지 못해서...."
노인은 씨앗을 물어뜯어 자근자근 깨물었다. "오호라! 이건 바로 그것이었군
요." 그는 말했다.
"그럼 영감, 어서 말해 보라, 어디서 이런 씨앗이 생겼는고? 그대는 이런 곡을
자기 밭에 심은 일이 없는고? 혹은 또 그대 시절의 다른 사람들한테서 산 일은
없는고?"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이런 곡식은 소인 시절에는 어디서나 생산되고 있었사옵니다. 이런 곡식을 인
은 평생 먹어 왔고 또 다른 사람들도 먹고 살아 왔사옵니다."
그러자 황제는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디서 이런 씨앗을 산 일이
있는고? 손수 자기 밭에 뿌린 일이 있는고?"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소인 적에는, 곡식을 팔고사고하는 그런 죄악을 궁리해 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사옵니다. 또
돈이라는 것도 몰랐구요. 곡식은 누구에게나 얼마라도 있었습지요. 소인은 런
곡식을 소인이 직접 심기도 하고 거두어들이기도 하고 타작하기도 했었습니다."
황제는 거듭 물었다.
"어디 그럼 말해 보라. 그대는 어디다 이런 곡식을 심었고 또 그대 밭은 어디
있었는고?"
노인은 말했다. "소인은 밭은 신의 땅이었사옵니다. 쟁기질을 한 건기가 밭이
었사옵니다. 땅은 자유였사옵니다. 제 땅이란 걸 몰랐었지요. 제 것으로 불렀던
건 제 노동뿐이었사옵니다." "그럼. 두 가지만 더 말해 보라. 한 가지는 어째서
옛날에는 이런 씨앗이 생겼는데 지금은 생기지 않나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그대의 손자는 두 자루의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또 그대의 아들도 한1루의 지팡
이를 짚고 왔는데 그대만이 그처럼 가뿐히 혼자 걷는가 하면 눈도 밝은데다 이
도 실하고 말도 또렷하고 상냥함은 어찌된 영문인가 하는 것인데, 어찌 그런고?
말해 보시오. 이 두 가지 까닭은 무엇이고?" 그러자 노인은 다시 이렇게 말했
다. "하문하옵신 두 가지 까닭이란 다름이 아니오라 세상 사람들이 제 노력으로
살아가기를 그치고 남의 것을 넘보게 됐기 때문이옵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렇
게 살 지 않았사옵니다. 옛날 사람들은 신의 뜻에 좇아 살고 있었사옵니다. 제
것을 가질 뿐이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았던 것이옵니다. 그이 제가 이처럼 젊은
이유랍니다."
두 노인 톨스토이
여인이 말했습니다. "주님, 제가 보니 당신은 예언자이십니다(요한이 전한 은
서 제4장 제19절). 우리 조상은 이 산 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들은 예배드
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제20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내 말을 믿으라. 이 산 위에서도 아니요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너
휘가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올 것이다(제21절). 너희는 알지 못 하는 것에 예
배 하지만 우리는 아는 이에게 예배드린다. 구원은 유대 사람에게서 온다(제22
절).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들릴 때가 온다.지
금이 바로
그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와 같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제2
절).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제24절)." 두 노인
1
두 노인이 성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다. 한 사람은 부자 농부로 예타라
스이치 세베료프라는 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한 에리세잉 보도로프라는
노인이었다. 예핌은 고직식한 농부로 보드카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
있으며 입담배조차 하지 않았다. 태어난 이후 욕을 해본 적도 없으며, 매사에 엄
격하고 야무진 성미였다. 예핌은 두 번이나 마을의 반장을 지냈으나두 번 다 1
코페이카의 어김도 없이 기한을 마쳤던 것이다. 가족은 대가족이라 두 아들 외
에 벌써 장가 든 손자까지는 형편인데, 그래도 모두가 함께 살고 있었다. 얼핏
보기만 해도 건강한 노인임을 알 수 있었다. 길게 턱수염을 기르고, 지금 일흔이
되었는데도 등도 구부러지지 않고 이제야 수염에 흰서리가 리기 시작한 정도 였
다. 에리세이는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노인으로 젊어서는 목수 일을 하
러 다녔으나 나이 먹은 뒤로는 집에 있으면서 꿀벌을 치기 시작했다. 큰아들은
멀리 벌이를 하러 떠나 집에 없었고, 둘ㅉ 아들이 집에서 하고 있었다. 에리세
이는 사람 좋은 명랑한 노인으로 보드카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조용한 성격
이었으나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서 이웃 사람들에게 꽤나 인기가 좋은 노인이었
다. 그는 키가 작달막한 거무스름한 얼굴빛의 빈약한 농군으로, 곱슬한 턱수염을
기르고 자기와 같은 이름의 옛 예언자 에리세이와 찬가지로 대머리였다. 두 노
인은 벌써 오래 전부터 같이 떠날 약속을 하고 잇었으나 예핌 노인쪽은 언제나
분주하여 일에 끝이 없었다. 한 가지가 끝났다 하면 곧 다음 일이 생기곤 했다.
손자의 혼인 잔치가 끝났다 했더니 막내아들이군대에서
돌아왔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새로 집을 지어야 할 모양이다. 어느 감사절
에 두 노인은 우연히 만나 통나무 위에 나란히 걸터 앉았다. 에리세이가 말했
다. "어떤가? 언제 성지 순례를 떠날 건가?"
예핌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니, 조금만 더기다려 줘야겠어. 올해는 영
매사가 뒤틀려진단 말야. 그 공사를 시작했을땐 그저 100루블 정도면 될 것 같
았는데 벌써 300루블이나 들었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으니. 아무래도 여름까는
끌 모양이야. 글쎄,올 여름엔 주님의 뜻이라면 떠나게 되겠지."
"내 생각 같아선." 하고 에리세이는 말했다. "그렇게 미루기만 해서는 좋지
않아. 마음먹고 떠나야지. 지금은 봄이라 아주 좋을 ㄸ거든." "일단 시작한 일을
어찌 버려 두고 가나?" "아니 그래, 자네 집엔 그렇게 일을 맡길 사람이 없나?
아들이 다 알아서 할 게 아닌가?" "뭘 알아서 하겠나! 큰아들놈이라고 어디 믿
음직스러워야지. 엉뚱한 짓을 해 놓을 게 뻔해." "그렇지 않아. 우리는 이제 물
러날 때도 됐는데, 어서 빨리 애들에게 일을 맡겨 배우도록 하는 것도 중요지."
"그야 그렇긴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내 눈으로 일 맺음을 보고 싶어." "아이
고, 난 모르겠네! 이런 일 저런 일 끝장을 보자면 한이 없어. 아암, 한이 없고고.
바로 얼마 전에도 우리 집 아낙네들이 감사절이 다가온다고 빨래를 한다, 집
안을 치운다, 저것을 한다, 이것을 한다, 아주 난리가 난 것 같더군. 그런데 우리
큰며느리가 아주 영리해서 이렇게 말하잖나. '감사절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빨
리
다가오니까 그래도 살겠군요. 그렇지 않다간 아무리 일을 해 봐야 다 할 순없
으니까요.' 라고 말이지." 예핌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나는 그 공사에 여간 돈을 처넣었어야지. 길을 떠나는데 빈손으로 갈
수도 없고... 그것도 한두 푼으론
되지 않을 테고... 그렇지 100루블은 가지고 가야지." 에리세이는 웃음을 터뜨
렸다. "자네, 그런 소리를 하다가는 죄 받아. 자네 재산은 내게 대면 열 갑절이
나 되는데 그래 돈 때문에 걱정하다니. 그런 일은 접어 놓고 언제 떠날 것인지
작정이나 하게. 내게는 돈이 없지만 그래도 떠난다면야 마련하지 못하겠나." 핌
노인은 씩 웃으며 말했다. "야, 대단한 부자로군. 어디서 어떻게 마련할 건가?"1
"뭘, 온 집 안을 뒤지면 얼마쯤은 나올 거고, 모자라는 몫은 밖에 세워 놓은 나
무 꿀벌통 여남은 개만 옆집에 팔면 되겠지. 전부터 사겠다고 해 왔으니까."
"팔아 버린 벌통에서 수확이 좋으면 속이 상할 걸." "속이 상해? 자네 그런
말 꿈에도 말게. 이 세상에는 죄짓는 일 외에는 속상 할일이 하나도 없어. 영보
다 더 소중한 건 없으니까."
"그야 물론 그렇지만, 역시 집안일이 정돈돼 있지 않으면 아무래도 마음이 안
하지 않거든." "그보다도 영혼의 일이 질서가 잡히지 않으면 더 편안찮을걸. 어
떻든 약속한거니까 떠나지. 정말 떠나자니까!"
2
이렇게 하여 에리세이는 친구를 설복시켰다. 예핌은 밤새도록 생각한 끝에 튿
날 아침, 에리세이에게로 와서, "그럼 떠나세. 과연 자네 말대로 인간이 사는 것
도 죽는 것도 주님의 뜻이니, 아직 살아서 기운이 있는 동안에 가기는 꼭 가야
겠어." 하고 말했다. 그로부터 일 주일 후 두 노인은 준비를 마쳤다.
예핌은 집에는 돈이 많았으므로 100루블을 여비로 마련하고 2백 루블은 늙은
자기 아내에게 맡겼다. 에리세이도 준비가 갖춰졌다. 바깥에 놓은 통나무 꿀통
중에서 열 개를 옆집주인에게 팔아 넘기고 거기서 생겨나는 애벌도 붙여서 건네
기로 약속했다. 그리하여 70루블이라는 돈이 련되었다. 나머지 30루블은 온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고 식구들에게 조금씩 받았다. 그늬 늙은 아내도 죽을 때 려
고 모아 두었던 돈을 모두 털어서 내놓고 며느리도 자기 돈을 내놓았다.
예핌타라스이치는 뒷일을 모조리 아들에게 맡겼다. 어디서 얼마만큼의 건초를
벤다든가, 거름은 어디로
운반한다든가, 공사는 어떻게 완공시키며 지붕은 어떤 모양으로 올린다든가,여
하튼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지시했다. 그런데 에리세이쪽은 아내에게, 팔아
넘긴 꿀통에서 깐 애벌은 따로 모았다가 조금도 어김없이 옆집 주인에게 건네
주라고 분부했을 뿐,가사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자기 앞에
일이 닥치면
스스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노인은 준비를 다 마쳤다. 식
구들은 과자를 굽고 자루를 만들고 새 각반을 마름질하고 새로 농부화를 만들
었다. 노인들은 갈아 신을 나막신도 마련해 가지고 마침내 떠났다. 식구들은동구
밖까지 전송나와서 작별을 고하고 두 노인은 여행길에 올랐다.
에리세이는 들뜬 기분으로 첫발을 내딛으며 마을에서 멀어지자 집의 일 같은
건 죄다 잊어버렸다.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여행 중엔 부디 친구의 마음에 들도록 하자, 누구에게나
언짢은 말 같은 것은 삼가자,
무사히 만족한 마음으로 목적지에 도착하고 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자는 뿐
이었다. 에리세이는 길을 걸으면서 기도문은 입속으로 외고자기가 알고 있는
성자의 전기를 마음 속으로 자꾸 더듬었다. 도중에 누군가와 동행이 되거나 여
인숙에 들 때는 어떻게든지 남에게 살뜰한 응대를 하자,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말하도록 하자고 다짐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기뻐서 견딜 수 없을 정도
였는데 다만 한가지, 에리세이에게는 도저히 맘대로 안 되는 일이 있었다. 담배
를 끊어 보려고 일부러 쌈지를 집에 두고 왔는데, 그것이 아쉬워서 견딜수 없었
던
것이다. 마침 도중에 어떤 사람에게서 얻었으므로 친구에겐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슬쩍 뒤처져서 담배를
피우곤 했다. 예핌 타라스이치도 기분이 좋은 듯 기운차게 걸어갔다. 나쁜 짓
은 하나도 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은 한 마디도 지껄이지 않았으나 마음 속은
편안치가 않았다. 집 걱정이 한시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늘 집에서는
어떻게들 하고 있을까, 그것만 생각했다. 뭔가 아들에게 일러 줄 것을 잊어버지
는 않았나, 아들은 분부한 대로 하고 있을까? 도중에 남이 감자를 심거나 거름
운반하는 것을 보면 집에서도 역시 아들이 저렇게 하고 있을까, 하고 걱정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돌아가서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해 버리고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3
두 노인은 5주일 동안 계속해서 걸었으므로 집에서 가지고 온 목피 구두도 다
떨어져 이제 새 신을 사야 하게
되었을 무렵에 소러시아로 들어갔다. 집을 떠나서 자는 것도 식사도 전부가돈
이었는데, 소러시아로 접어드니 모두 다투어 두 노인을 자기 집으로 끌어가려고
했다. 잠을 재우고 식사를 대접하고서도 돈을 받지 않을 뿐더러, 도중에서 먹으
라고 자루 속에 빵이랑 과자를 넣어 주는 형편이었다. 며칠 수 노인은 홀분하게
700베르스타의 길을 걸어 다시 고을을 지나 흉년이 든 고장이 이르렀다. 거기서
는 잠을 재워 주고 방값을 받지 않았으나 먹을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빵
은 아무데서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때는 돈을 내고도 살 수 없을때가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지난 해 곡식이 하나도 영글지 않았다고한
다. 부자도 먹을 것이 없어 가진 물건들을 팔아 버리고 중류 생활을 하던 자는
빈털터리가 되었으며 가넌뱅이는 다른 지방으로 가든가 동냥을 나서든가, 아니
면 마을에서 그럭저럭 하루하루 지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겨울 동안은 밀울과
명아주로 끼니를 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두 노인은 작은 마을에 들어가 빵을 열다섯 근 가량 사고 하룻밤을잔
다음, 동이 트기 전에 길을 떠났다. 뜨러워지 전에 조금이라도 더 걸으려는 것이
었다. 10베르스타쯤 걸어가 어떤 개울가에 이르렀다. 거기 다리를 펴고 앉아 찻
잔에 물을 떠서 빵을 축여 가며 배불리 먹은 다음에 나막신으로 갈아 신었다.
이렇게 앉아서 한참 쉬는 동안에 에리세이가 담배 쌈지를 꺼내자 예핌은 그것을
보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왜 그런 좋지 못한 버릇을 고치지 못하나?"
에리세이는 어쩔수 없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정말 나는 죄인이야. 도저히 안
되는군." 하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얼마나 다시 앞길을 재촉했다. 거기서 다시 10베르스타쯤 걸어가니
커다란 마을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 마을을 완전히 통과했을 때는 벌써 볕이
여간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었다.에리세이는 지쳐 잠시 쉬고 물도 한 그릇 마시
고 싶었으나 예핌은 걸음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예핌은 걸음을 잘 걸어 에리
세이는 그 뒤를 따라가기조차 어려웠다. "물을 좀 마셨으면."
에리세이는 걸음을 멈추고 예핌에게 이렇게 말했다. "뭐 마시지그래. 난 괜찮
아." "그럼, 먼저 가게나. 난 잠깐 저 농가에 들어가서 물을 얻어 마신 다음 곧
뒤따라 갈테니까." "그래 알았어." 하고 예핌은 혼자 신작로를 걸어가고 에리세
이는 농가 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에리세이는 농가에 다가가보니 석회칠을 한
자그마한 집이 있었다. 아래쪽은 꺼멓게 되고 윗부분만이 허연데 오래도록 손보
지 않은 모양으로 칠은 벗겨지고 지붕은 한쪽이 허물어지고 없었다. 집의 구가
뒷문쪽에 붙어 있어 에리세이는 뒷문으로 들어갔는데 문득 보니 담장 밑에 사나
이가 드러누워 있었다. 마르고 턱수염도 없으며 루바시카 자락은 소러시아 식
으로 바지 속에 넣고 있었다. 짐작컨대 이 사나이는 시원한 그늘을 찾아서 드
러누웠던 모양이나 지금은 볕이 똑바로 내리쬐고 있었다. 그런데 사나이는 드러
누운 채 잠들어 있지도 않았다. 에리세이는 물을 좀 마실 수 없느냐고 말을 걸
었으나 사나이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앓고 있거나, 아니며 꽤 무뚝뚝한 사나이
인 모양잉군'하고 생각하고 에리세이는 문께로 다가갔다. 그러자 집 안에서 어
린아이의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에리세이는 문의 고리쇠를 덜컹덜컹소리나게
하면서, "실례합니다." 라고 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라고 해도
바스락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에리세이는 그만 돌아서려고 하는데 문 앞에서
누군가가 신음하고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어디
한번 들여다보고 가야지.' 에리세이는 집 안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4
에리세이가 손잡이를 돌려 보니 문에는 쇠가 걸려 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도
에 들어서니 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었다. 오른편에는 난로가 있고 정면이
상좌로 되어 있었으며, 그 구석에 성상과 테이블이 놓여 있고, 테이블 저쪽에는
의자가 있었다. 의자에는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은 속옷바람의 할머니가걸터앉
아 테이블에 앉아 테이블에 머리를 올려 놓고 있었다. 그 곁에는 비쩍 말라 배
만 커다란 밀랍 같은 얼굴빛의 사내아이가 앉아서 할머니의 옷소매를 잡아 당
기며 칭얼대고 있었다. 에리세이는 그 방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방 안서는 숨이
막힐 듯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보니까 페치카 저쪽 마룻 마닥 위에는
한 여자가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엎어진 채 이쪽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
냥 가래 끓는 소리만 내면서 한쪽 다리를 폈다 오무렸다 할 뿐이었다. 괴로운
듯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는 그 몸에는 코를 찌를는 악취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
이다. 틀림없이 여자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 하는데 아무도 그 뒤치닥거리를 해
주지 못하는 모양이다. 할머니가 문득 눈을 들어 낯선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
당신은 누구요? 보아하니 뭘 얻으려고 왔나본데 여기엔 아무것도 없어요...." 에
리세이는 가까이 다가가서, "할머니, 물을 좀 얻어 마시려고 그래요." 하고 말했
다. "아무것도 없다고 그랬잖우. 아무도 물을 떠 올 사람이 없으니 마시려거든
가서 떠 마셔요." "어떻게 된 겁니까, 할머니? 이 댁엔 성한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나요? 이 아주머닐 돌봐 줄 사람도?" 하고 에리세이가 물었다. "아무도, 아무
도 없어요. 밖에는 내 아들이 죽어 가고 있고 우린 여기서 이렇게...." 사내아이
는 낯선 사람을 보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할머니가 말하는것을 보자 다
시 그 소매를 지근거리며 "빵 줘, 할머니, 빵!" 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에리세이
는 할머니에게 다시 말을 물으려고 했을 때 밖에 있던 사나이가 안으로 비틀거
리며 들어왔다. 벽을 의지하고 걸음을 옮겨 의자에 앉으려고 하는 모양이었으
나 그러지도 못하고 출입문 어귀에 한쪽 구석에 의지하듯 쓰러졌다. 그러고는
일어나려고도 하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한 마디 하고는말을 끊고, 한 마디
하고는 숨을 몰아쉬고 하면서 다음 말을 이어갔다.
"전염병에 걸렸는데, 게다가... 흉년이 들어 모두가 굶어 죽게 되었소!" 농부는
턱으로 사내아이를 가리키며 울기 시작했다. 에리세이는 등에 짊어진 자루를
치켜올려 두 팔을 멜빵에서 뽑고, 자루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가 다시 의자위에
놀려 놓은 뒤 끄르기 시작했다. 자루를 열고 안에서 빵과 나이프를 꺼내어 한조
각 잘라서 농부에게 주었다. 농부는 받지 않고 아이들에게 주라고 손짓을 했다.
에리세이는 사내아이에게 주었다. 사내아이는 빵 냄새를 맡자 몸을 뻗어 두 손
으로 빵을 움켜쥐더니 입과 코를 거기 처박았다. 그러자 페치카 구석에서 계집
아이가 기어나와 물끄러미 빵을 바라보았다. 에리세이는 그 아이에게도 한 조주
었다. 그리고도 한 조각을 잘라 할머니에게도 주었다. 할머니는 그것을 받아들
이자 우물우물 씹기 시했다. "목이 말라.... 누가 물을 좀 가져 왔으면... 내가, 어
제 물을 뜨러 갔었는데 다 오기도 전에 쓰러져 버렸지. 물통이 거기 있긴 할텐
데, 혹시 누가 가져갔다면 모르지만...." 에리세이는 우물이 어디 있는가를 물어
보았다. 할머니가 자세히 가르쳐준 대로 갔더니 물통 있었다. 그래서 물을 떠다
식구들에게 먹였다. 아이들과 할머니는 물을 마셔 가며 빵을 먹었으나 남자는
입에 대려고 하지 않았다. "속에서 받지 않아요." 라고 했다.
그의 아내는 숫제 일어나려고도 하지 않고,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그냥
나무 침대 위에서 몸부림칠 뿐이었다. 에리세이는 가게에 가서 옥수수랑 소금,
밀가루, 버터를 사왔다. 그리고 도끼를 찾아 장작을 패어 페치카에 불을 지폈
다. 계집아이가 거들었다. 그리하여 에리세이는 수프와 보리죽을 만들어 온 식
구에게 먹였다.
5
주인 남자도 겨우 수프를 떠먹었다.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는 그릇 바닥까지 싹
싹 핥아 먹고, 사로 껴안은 채 잡이 들었다. 농부와 할머니는 왜 그렇게 되었는
지를 이야기했다. "우리는 원래 넉넉한 살림살이도 아닌데다 지난해엔 추수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이번 기근이 든 가을부터는 내내 전에 남았던 거나 그냥
털어 먹었지요. 나중에는 식량이 모자라 이웃 분들의 신세를 지게 되었니다. 처
음엔 물론 꾸어 주기도 했지만 차차로 거절하게 되었습죠. 어떤 사람은 꾸어 주
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또 저희들은 한
두 번이 아니어서 매번 손을 벌리기가 여간 민망스럽지 않았습니다.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과 밀가루와 빵을 온통 꾸어 썼으니 말입니다." 농부는
말을 계속했다. "나는 일을 찾아 돌아다녔으나 일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입에
풀칠하기 위해 일을 찾아다니는 형편이니 어쩌다 하루 일하면 그 다음 이틀은
일을 찾아 헤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어머니와 아이들은 이웃 을
로 동냥하러 떠나게 되었는데 아무도 빵이 없으니까 어디 동냥인들 쉬운가요?
그래도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입에 풀칠을 했습죠. 그래서 이럭저럭 햇보리가
날때까지 연명해 가겠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글쎄 이 봄부터는 전혀 동냥을 주는
집이 없게 된데다 이렇게 열병까지 퍼지지 않았겠습니까? 형편은 로 심해져서
하루 먹으면 이틀은 굶어야 하게 되었죠. 마침내 풀까지 뜯어 먹게 되었는데
그 풀 때문인지 아닌지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아내가 병으로 쓰러졌습니
다. 아내는 앓아 드러누웠죠. 내겐 힘이 없으니 암담한 형편입니다." 농부의 말
에 이어, 할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혼자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터인데 아
무리 돌아다녀 보아야 아무데서도 먹을 게 나와야 말이죠. 그만 지고
근력도 빠져서 주저앉아 버렸어요. 손녀딸도 몸이 잔뜩 약해진데다가 이제 까
지 집어먹고 근처에 심부름을 보내도 가려고 하질 않는군요. 구석에 처박혀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어요. 엊그제 이웃집 아주머니가 무슨 볼 일로인지 왔다가
온통 굶어서 쓰러져 있는 것을 보더니 깜짝 놀라 돌아서서 나가 버리지 뭡까!
그 아주머니도
남편은 도망쳐 없고 어린아이들하고 굶주리는 판이라 그럴 만도 하죠. 그래서
이렇게 드러누워 천주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에리세이는 그날로
친구를 따라 가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 집에 머물렀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자마자 에리세이는 마치 자기가 이 집의 주인이라도 된 듯이 서둘러 일하기시작
했다. 할머니와 둘이서 가루를 반죽하고 페치카에 불을 지피고 계집아이와 같
이 쓸 만한 물건을 찾아 보려구 근처를 돌아다녔다. 무엇 하나라도 남은 게 있
을까 하고 찾아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모조리 먹을 것과 바꿨던 것다. 농기
구도 없었고, 입을 옷가지도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에리세이는 꼭 있어야 할
물건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손수 만들기도 하고 밖에 나가서 사 오기도 했다. 이
렇게 하여 에리세이는 하루를 보내고 이틀이 지나 사흘을 묵었다. 사내아이는
기운을 다시 찾아 가게에 심부름도 가고 에리세이를 잘 따랐다. 계아이는 아주
명랑해서 무슨 일이나 거들려고 나섰다.
줄곧 "아저씨, 아저씨!" 하며 에리세이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할머니도 일나
이웃에 드나들게 되었으며 주인 남자도 에리세이가 구해다 준 농기구로 밭에 나
가 일하게 되었다. 드러누워 있는 사람은 그의 아내뿐이었으나 그녀도 사흘째
되는 날에는 정신을 차리고 수프를 먹게 되었다. '이렇게 오래 묵으려고 생각지
도 않았는데 그만 떠나야지.' 하고 에리세이는 생각했다.
6
나흘째 되는 날은 바로 감사 주일 전날이었다. 에리세이는, 농부의 가족들과전
야를 축하하고 감사절 선물로 뭘 좀 사 준 다음 저녁때는 떠나야지, 하고 혼자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에리세이는 또다시 마을에 내려가 우유와 밀가루, 기름
등을 사다가 할머니와 둘이서 음식 장만을 했다. 이튿날 아침에는 교회의기도식
에 참여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식구들과 같이 맛있는 요리를 먹었다. 이날은 농
부의 아내도일어나 집 안에서 슬슬 거닐었다.
남편은 수염을 만지고 깨끗한 루바시카를 입고(할머니가 빨았던 것이다), 마에
서도 부자 소리를 듣는 집 주인을 찾았다. 그것은 이 부잣집 주인에게 밭도 풀
밭도 저당을 잡혔으므로 햇보리가 나기까지 그 밭과 풀밭을 좀 쓰게 해 줄 수
없느냐고 청하러 갔던 것이다. 저녁때 남편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와 물을
흘렸다. 부잣집 주인이 인정사정도 없이 돈을 갖고 오라 했다는 것이다.
거기서 에리세이는 다시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이 사람들은 장차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풀을 베러 가는데 이 사람들은 멀거니
앉아
있어야 하다니. 풀밭이 저당 잡혀 있으니, 쌀보리가 익으면 남들은 추수를 게
되는데(사실 썩 잘 영글었더군!) 이 사람들은 아무리 전처럼 길에서 헤매야 할
거야.' 에리세이는 생각이 여러 갈래로 흩어져 그 날 저녁때도 출발하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까지 미루게 되었다. 마당에 나가 기도를 마친 다음 잠을 자려고
드러누웠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 까닭은 돈을 많이 써 버리고 날짜도
퍽 허비하였으므로 그만 출발해야 하는데 차마 이 집 사람들이 가엾어서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걸 도와 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처음에는 물이나 길어다 고
빵이나 한 조각씩 먹일 셈이었는데 그것이 이렇게까지 돼 버렸으니, 이제 와서
는 풀밭이나 찾아 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밭을 찾아 주고 나면 다음에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이도록 젖소도 사 주어야 되겠고 주인 남자에게는 릿단을
운반할 말도 사 주어야 되지 않겠나.
여봐, 에리세이, 너 아주 함빡 말려 든 모양이구나, 닻을 던져 놓고는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게 된 모양이군!'
에리세이는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외투를 더듬어 담배 쌈지를 꺼내고 담배를
한 줌 피워 머릿속을 개운하게
하려고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이렇다할 묘이
떠오르지 않았다.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이 사람들이 가엾어서 견딜 수
없으니 도리가 없었다. 다시 긴 외투를 둘둘 말아 베개로 삼아 벌렁 드러누웠
다. 가만히 그렇게 드러누워 있는 동안 어느 사이에 닭이 울고 이윽고 깊은 잠
에 빠져 버렸다. 그 때 갑자기 누가 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니 어엿이
출발할 채비를 한 자기가 등에는 자루를 짊어지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서 문
을 나서려는 참이었다. 문은 활짝 열려져 있으므로 그냥 걸어서 나가만 하면 되
었던 것이다. 문을 빠져 나가려고 하는데 이쪽 울타리에 각반에 걸려 다 풀어지
게 되었다. 그것을 떼어 감으려고 내려다보니 이게 웬일인가. 이건 울타리에 걸
린 것이 아니라 계집아이가 붙잡고, "아저씨, 아저씨, 빵 좀 주세요!"하고 울부짖
는 것이 아닌가, 발을 보니 사내아이가 각반을 움켜쥐고 있었고, 창문으로는 할
니와 주인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리세이는 그오 같은 꿈을 꾸고는
잠이 깨어 결심했다. "내일은 밭과 풀밭을 도로 사 주자. 그리고 말도 사 주고
햇보리가 날 때까지 먹을 밀가루도,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일 젖소도 사 주어야
겠다. 그렇지 않으면 일껏 바다를 건너서 그리스도를 찾아간다고 해도 자신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지."
그리고는 에리세이는 아침까지 단잠을 잤다. 아침 일찍 잠이 깨자 곧 부자 가
를 찾아가서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쌀보리 밭을 도로 사고 풀밭 대금도 치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낫을 사 가지고(그것마저도 팔아 먹었던 것이다)갔다. 주
인 남자는 풀밭에 풀을 베도록 내보내고 자기는 마을 농가를 돌아다니가 주막
집 주인이 수레를 붙여서 판다는 말에 관한 얘기를 듣고 값을 흥정하여 샀다.
밀가루도 한 푸대 사서 짐수레에 실은 다음, 이번에는 젖소를 사러 갔다. 걸어
가는 동안 두 사람의 소러시아(우크라이나) 여인들의 뒤를 따르게 되다. 이 여인
들은 걸으면서 에리세이는 그것을 알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녀들은 에리세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긴 처음에는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는 거예
요. 그냥 순례자라고 생각했대요. 몰을 얻어 마시러 들어왔다가 그대로 눌러 앉
아 버렸다는군요. 아까도 누가 그러는데 주막집에서 짐수레하고 을 샀다는 군요.
요즘 세상에 그런 성자가 다 있으니 우리 그 집엘 가보지 않을래요?" 에리세이
는 여자들이 자기를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젖소 사는 일을 포기하고 주
막으로 돌아가 말값을 치뤘다. 말에 수레를 맨 다음, 밀가루를 싣고 집으로 돌아
왔다. 문 앞에 당도하자 말을 세우고 마차에서 내렸다. 식구들은 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자기들을 위해서 말을 산 모양이라고짐작은 했으나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말하기는 쑥스러웠다. 주인 남자는 문을 열면서 "아니, 그 말은 도대체어
떻게 된겁니까?" 하고 물었다. "샀어. 마침 싼 걸 만났기에 말이지. 오늘 하룻밤
잘 먹도록 풀을 좀 베어 넣어 주게. 그리고 이 자루 좀 끌어 내려 줄텐가?"
주인 남자는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는 말을 풀고 가
루 푸대를 광에 갖다 놓고 풀을 한아름 베어다가 말 구유에 넣어 주었다. 이윽
고 모두들 잠자리에 들고 농부의 집 안은 고여해졌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에
리세이는 자신의 행낭을 짊어지고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나막신을 힌고 긴외
투를 걸친 다음 예핌의
뒤를 쫓아 나선 것이다.
7
에리세이가 5베르스타쯤 갔을 때 날이 밝았다. 에리세이는 나무 밑에 앉아 루
입을 열고 돈을 세어 보았다. 17루블 20코페이카가 남아 있었다.
'아니 이 돈으로 바다를 건너서 긴 여행을 할 수가 없다. 순례를 한답시고 연
히 구걸하며 다니다 자칫 죄다 지으면 큰일 아닌가. 예핌 영감이 혼자 가서 내
대신 촛불을 밝혀 줄 테지. 나는 아무래도 죽기 전에는 성지 순례를 못 할 모양
이군. 하지만 감사하게도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굽어 살피시니까 용소해 실 것
이 틀림없어.' 에리세이는 일어나서 자루를 짊어지고 가던 길을 되돌아섰다. 다
만 그 마을만은 사람들의 눈에 띌세라 멀리 돌아서 지나갔다. 이렇게 하여 에
리세이는 얼마 후에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목적지를 행해 갈 때는 걷는 것이
힘들어 예핌을 뒤쫓아 가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되돌아가기 시작하니 마치 하님
께서 도와 주시기라도 하는 듯이 아무리 걸어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나들이
가는 기분으로 지팡이를 내두르며 걸어도 하루 70베르스타씩이나 갔다. 에리세
이는 집에 돌아오니 식구들은 마침 들일을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모두 노인
의 귀가를 기뻐하며 구경이 어떻든가, 어쩌다가 동행과 떨어졌는가, 왜 목적까지
가지 않고 돌아 왔는가, 하고 여러 가지 묻기 시작했다. 에리세이는 그 동안 있
었던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글쎄, 내 실수로 중간에서 돈을 잃었지 뭐냐?
게다가 예핌 영감은 놓쳐 여러 가지로 물어 보니 만사가 순조로웠고 일도 거침
없었으며 아무런 불행없이 식구들도 오손도손 지내고 있었다. 예핌 영감네 집
에서는 에리세이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서 자기 집 노인의 소식을 들러 왔다.
그들에게도 에리세이는 비슷한 말을 일러 주었다.
"예핌 영감은 탈없이 잘 가셨네. 나하고는 베드로 축제일 사흘 전에 헤어졌지.
나는 뒤쫓아 가려고 했는데 내 실수로 그만 돈을 잃어버려 모자라겠길래 돌아온
거야." 사람들은 깜짝 놀다. 어리석다고는 할 수 없는 성실한 노인이, 성지순례
를 떠났다가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돈을 잃어버리고 돌아오다니, 어쩌다가 그런
실수를 을까, 하고 갸우뚱했으나 차차 그 일을 잊기 시작했다. 에리세이는 아들
과 둘이서 올 겨울에 ㄸ 나무를 장만하고 아낙네들과 같이 밀을 빻고 곳간 지
붕을 새로 얹고 꿀벌의 월동 준비를 해 주고 열 개의 꿀벌 통나무를 로 깐 애
벌과 함께 옆집에 넘겨 주었다. 할멈은 돈을 받고 판 통나무에서 애벌이 얼마나
갔는지 속이려고 했으나 에리세이는 어느 통은 소용 없게 되고 어는 통에서는
새끼를 깠는지 죄다 알고 있어 열 무더기가 아니라 열일곱 무더기를 옆집에 주
었다. 가을 일이 다 끝나자 에리세이는 아들을 벌이하러 내보고 자기는 줄곧 집
에 있으면서 나막신을 만들고 꿀통으로 쓸 통나무를 파내곤 했다.
8
에리세이는 병자 있는 농가에서 묵던 날, 예핌은 하루 종일 친구를 기다렸다.
그는 혼자 너무 많이 가지 않고 길가에 한참 기다린 끝에 한잠 푹 자고 깨어 일
어나 다시 우두커니 기다렸나 친구는 오지 않았다. 에리세이는 나타나지않았던
것이다. '이거 내가 잠자는 사이에 모르고 그대로 지나쳐 간 게 아닌가? 다리가
아프다 보니 남의 짐수레를 얻어 타고 여길 지나가면서 나를 보지 못한 게 아닐
까? 하지만 보이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허허벌판이어서 눈앞이 죄다 보이는걸.
내가 다시 되돌아가면 오히려 영감이 앞으로 먼저 가 버려서 더 게 어긋날지도
몰라. 계속 가는 게 옳겠군. 여관에서 만나게 되겠지.'
다음 마을에 당도하자, 혹시 이러이러한 할아버지가 이리로 오거든 내가 있는
여관으로 데려다 주시오, 하고
주인장에게 부탁해 놓았다. 그런데 에리세이는 그 여관에도 끝내 오지 않았다.
예핌은 앞으로 다시 길을 떠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러이러한 대머리 영감을 못 모았으냐고 물어 보았으나 무
도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예핌은 어처구니가 없어 혼자 계속 걸었다.
'그렇지. 오뎃사 근처가 아니면 배 안아서 만나게 될 거야.' 그는 더 이상 생
각하지 않기로 했다. 도중에 한 순례자와 동행하기 되었다. 그 순례자는 보통
입는 법복에 법모를 쓰고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다. 아토스에도 간 일이 있고,
지금 이 길이 두 번째로 가는 예루살렘 행이라고 했다. 어떤 여인숙에서 나 여
러 가지 이야기를 한 끝에 동행이 되었던 것이다.
오뎃사에 도착하기까지는 무사했다. 두 사람은 밤낮으로 사흘 간 배를 기다다.
이 세상 각 처에서 모여든 숱한 순례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도 예핌은
에리세이에 대해 물어 보았으나 아무도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예핌은 외국
의 여행 허가장을 받았는데 그 값은 5루블이었다. 그리고 왕복 배삯으로 40블을
치른 다음 도중에서 먹을 빵이랑 청어 들을 샀다.
이윽고 배의 선적도 안벽에 떨어져 큰 바다로 나갔다. 그 날은 무사히 항해으
나 저녁때가 되자 바람이 일고 비가 쏟아지면서 배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바닷
물이 갑판을 휩쓸었다. 배 안은 술렁거리고 여자들 중에는 큰 소리로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으며, 남자도 겁이 많은 사람은 안전한 장소를 찾아 배 안을우왕좌
왕하는 것이었다. 예핌도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배에 오르자 곧 담보프의 농부들과 같이 마룻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그
대로의 자세로 그 날 밤과 다음 날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오로지 자기 자루만
열심히 붙잡고 있었을 뿐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사흘째에 겨우바람이 자고
닷새째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순례자들 중에는 상륙하여 지금은 터키에
점령되어있는 성 소피아 대성당을 구경 간 사람도 있었으나 예핌은 상륙하지
않고 배 안에 남아 흰 빵을 조금 샀을 뿐다. 하룻밤 하루 낮을정막한 뒤에야 다
시 바다로 나왔다. 스미르나 항에 기항한 다음에 알렉산드리아 항에 들렀다가
마침내 야파에 도착했다. 야파에서는 순례자들이 모두 상륙했다. 예루살렘까지
는 걸어서 70베르스타다. 상륙할 때에 사람들은 또 아찔한 꼴을 당해야 했다.
기선의 높은 갑판에서 밑에 있는 보트로 뛰어내려야 하는데, 보트는 계속 흔들
리고 있어서 자칫하다간 보트에서 바닷속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두 사람이
물에 빠진 생쥐가 었으나, 어떻든 무사히 상륙했다. 상륙하자 모두 걸어서 떠났
다. 사흘째 되는 점심때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변두리의 러시아 인 숙소에 여장
을 풀고 여행 허가장 뒷면에 사인을 받은 다음 식사를 마치고 순례자와 둘이 성
지 순례를 떠났다.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관은 아직 구경하지 못했으므로 대
주교 수도원을 참배했는데, 참배자 일동을 안으로안내하는
것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자리가 따로따로 돼 있었다. 신을 벗고 둥그렇게 둘
러 앉았다. 그러자 한 신부가 세수 수건을 들고 나와서 사람들의 발을 닦아 주
기 시작 했다. 발을 닦고서는 입을 맞추는 모양으로 빙 한 바퀴 돌았다. 예핌의
발도 닦아 주고 입도 맞춰 주었다. 그 때 성찬이 나와 포도주도 마셨다. 이 새자
이집트의 마리아가 칩거했다는 암실로 가서 촛불을 바치고 기도드렸다. 그곳에
서 아브라함 수도원으로 돌아가 아브라함이 신을 위해 자식을 찔러 죽이려고
한 사베크의 동산을 보았다. 다음에 막달라 마라아에게 그리스도가 모을 나타내
셨다는 성지를 참관하고 주님의 형제의 야곱의 교회에도 들렀다. 순례자는 장소
를 하나하나 안내하며, 여기서는 얼마, 저기서는 얼마라고 희사하는 돈의 액수를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한낮이 되어 숙소에 돌아와서 식사했다. 윽고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하기 시작했을 때 순례자는 앗, 하고 놀라며 자기 옷을 이리저리 뒤
지기 시작했다. "아, 지갑을 도둑맞았구나. 틀림없이 23루블 있었는데... 10루블
짜리 두 장에다가 잔돈이 3루블...." 순례자는 속이 많이 상해서 푸념을 늘어놓
은 것이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자리에 들었다.
9
예핌도 잠을 청하고자 누웠으나 문득 마음 속에 의심이 생겼다. '저 순례자는
돈을 도둑맞은 게 아니야. 처음부터 돈이 없었던 게 분명해. 아무데 가서도 헌하
지 않았으니까. 내게만 내라고 하면서 자기는 하나도 내기 않았어. 그건 고사하
고 내게서 1루블까지 빌려 가지 않았나.' 예핌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를 스스
로 꾸짖었다. '내가 왜 사람을 의심하는지 모르겠군. 남을 의심한다는 건 죄스
러운 일이야. 이런 쓸데없는 생각은 다시 말아야지.'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고
생각하자, 다시 순례자가 돈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점이랑 지갑을 도둑맞았다
고 허풍스럽게 떠들어 대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니, 정말로
돈이 없었어. 사람들 눈을 속이기 위해 연극을 꾸몄지.' 저녁때 사람들은 일어
나서 부활 대성당에서 거행되는 기도식에 참배하러 갔다. 그곳은 그리스도의 이
있는 곳이다. 순례자는 예핌 곁을 떠나지 않고 졸졸 따라다녔다.
성당에 도착했다. 순례하는 사람들은 러시아 인 외에 그리스 인, 아르메니아
인, 터키 인, 시리아 인 등 각국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다. 예핌 영감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성문으로 들갔
다. 한 신부가 안내역을 맡고 있었다. 터키 인이 파수인의 곁을 지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려 기름을 칠했다는, 아홉 개의 큰 촛대가 점화된 곳으로 안내하였
다. 신부는 일일이 설명하며 보여 주는 것이었다. 예핌은 거기서도 춧불을그쳤
다. 그 다음,
안내 신부는 오른쪽 층계를 올라가 못박혔던 십자가가 세워졌다는 골고다로예
핌을 안내하였으므로 예핌은 거기서 잠시 기도드렸다. 그리고 예핌은 대지가 지
옥까지 갈라진 자리를 구경하고 다음으로 그리스도위 손발에 못이 박혔다는 장
소,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피가 아담의 뼈에 뿌려졌다는 아담의 관을 보았다.그
리고 또 그리스도가 가시관을 쓸 때에 걸터앉았다는 돌과 그리스고가 채찍질 당
할 때묶였다는 기둥오 보았다. 그 다음에 예핌은 그리스도의 발에 채워졌다는
두 개의 구명 뚫린 돌도 구경했다. 안내신부는 그 밖의 다른것도 보여 주려고
했으나 다른 사람들이 앞길을 재촉했으므로 그리스도의 관이 있는 굴으러 따라
갔다. 거기서는 다른 종파의 의식이 끝나고 러시아 정교의 기도식이시작되고 있
었다. 예핌은 어떻게든 순례자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자꾸만 죄스운 의혹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례자는 잠시도 곁에서 떠나려 하지 않고, 그리스도
관 앞에서의 기도식에도 같이 참여했다. 두 사람은 되도록 관 가까이 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숱한 군중이 운집하여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예핌은 가만히 서서 앞을 바라보며 기도드렸
는데 때때로 지갑이 무사한가, 하고 더듬게 되는 것이었다. 예핌의 마음은 두 갈
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순례자가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생각하고, 또
한편으로는 만약 정말로 도둑을 맞은 것이라면 나도 도둑을 조심해야지, 하고
생가가하는 것이었다.
10
예핌은 이렇게 서서 기도드리면서 주님의 관이 놓인 회당 앞쪽에 36개의 성화
가 타고 있는 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핌이 꼼짝도 않고 서서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아아, 이 무슨 불가사의인가! 성화가 타고 있는 등
경 바로 아래 맨 앞자리에 낡은 농부의 작업용 외투를 걸친 자그마하나노인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노인은 머리가 훌떡 벗겨진 것이 에리세이 보도로프를
꼭 닮았다. '아니, 에리세이와 꼭 같잖아. 하지만 에리세이일 리가 없어.저 영감
이 나보다 먼저 당도할 까닭이 없지, 없어. 앞의 기선은 일 주일 먼저 떠났다니
까 저 친구가 나를 앞질렀을리 없어.그리고 우리가 탔던 배에도 없었더.나는 순
례자들을 하나한 죄다 살펴보았으니까.'
그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예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자그마한 노인
은 기도하기 시작했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한 번은 정면의 신위에 대해서
하고, 다음은 죄우에 있는 러시아 정교 사람들을 향해 절했던 것이다. 노인이오
른쪽으로 얼굴을
돌렸을 때 예핌은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바로 에리세이임에 틀없
었다. 거무스름하고 곱슬곱슬한 턱수염,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구레나룻, 게다가
눈썹도 눈도 코도, 하나에서 열까지 바로 에리세이이다. 에리세이 보도로프임에
틀림없다. 친구를 찾아 냈으므로 예핌은 좋았서 어쩔 줄 몰랐으나 어떻게 에리
세이가 자기보다 먼저 도착했는지 이사ㅇ서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사람 보도로프, 어떻게 잘도 앞으로 나갔네그려! 아마도 누군가 이곳 사과
친해져서 안ㅇ내를 받았겠지. 가만 있자, 나가는 출구에서 저 영감을 붙잡고 법
복의 순례자를 따돌린 다음, 이제 저 친구와 같이 다녀야겠군. 그렇게 되면 나
도 앞쪽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혹시라도 에리세이를 놓칠세라 예핌은 연방 그쪽으로만 눈을 두고 었
다. 이윽고 기도식도 끝나 군중이 술렁거리기 시작하고 십자가의 입맞춤이 시
작되어 밀고 당기고 하다가 예핌은 밀려가 버렸다. 다시 예핌은 잘못하다간 지
갑을 도둑맞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갑자기 치솟았다. 예핌은 한쪽 순으로 열히
지갑을 더듬어 잡고 조금이라도 덜 붐비는 자리로 나가려고 사람들을 헤치기 시
작했다. 간신히 덜 혼잡한 데로 빠져 나와 그는 근처를 마구 돌아다니며 에리
세이를 찾았다. 그 대성당 안의 이쪽 저쪽의 암실에서 각 나라 사람들을 뜩
보았다. 바로 그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고 마실 것을 마시며 책을 읽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에리세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예핌은 숙소로 돌아가 보았으나 거기도
친구는 없었다. 그 날 밤, 순례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리론가 자취를 감추었는
데 그 1루블은 끝내 돌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예핌은 외토리가 돼 버렸다.
이튿날 예핌은 다시 그리스도의 관을 배례하고 담보프에서 온 노인과 같이
다. 배 안에서 동행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에서도 역시 앞쪽으로 빠져나가려고 해 보았으나 여전히 밀려나
기둥 옆에 남아서 기도드렸다.
그런데 앞을 바라보니 또 제일 앞 성화 아래의 그리스도 관 옆에 에리세이가
서 있었다. 제단 옆에 신부처럼 두
팔을 벌리고 머리에 함빡 빛을 받고 서 있었다. '좋아, 이번에는 꼭 놓치지
않는다.' 예핌은 생각했다.
사람들을 마구 헤치고 앞쪽으로 다가갔다. 겨우 앞으로 나섰다고 생각하자 리
세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 돌아간 모양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리스도 관 옆을 보니 가장 눈에 잘 띄는 특별 성좌에 에리세이가 서서 두 팔
을 벌린 채 머리 위에 무엇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이 위를 우러러보고 있다. 예
핌은 머리에 함빡
빛을 받고서였다. '됐어.' 하고 예핌은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놓치지 말아야지. 출구에 가서 서 있자. 거기서라면 어날
리는 없지.' 예핌은 밖에 나가서 언제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반나절을 지키
고 서 있었으나 밖으로 나오는 군중 속에 에리세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예핌은 예루살렘에 6주간 묵으면서 베들레헴과 베다나, 그리고 요단 강과 그
밖의 여러 곳을 가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 관 옆에서는 새 루바시카에 도장을 찍어 받기도 하고(그것은 죽어서
수의로 입게 된다), 요단 강의 물을 조그만 병에 담기도 하고, 예루살렘의 흙을
간수하고, 성화가 타고 있는초를 얻기도 하여 여덟 군데서
연미사에 이름을 써 넣고 하느라고 돈을 모조리 써버리고 간신히 집으로 돌갈
여비만 남겼다. 거기서 예핌은 귀로에 올랐다. 야파에 당도하자 기선을 타고 테
사까지 와서 그 다음부터는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11
예핌은 혼자서 가던 길을 걸어 돌아오는데 집이 가까워 짐에 따라 또다시 에
서는 자기가 집을 ㅣ운 사이에 어떻게 살고들 있는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났으니 퍽이나 달라졌겠지. 재산을 모으려면 한평생이 걸리지만 없려
면 눈 깜짝할 사이거든. 내가 없는 동안 아들놈은 어떤 모양으로 집안 일을 처
리했을까? 봄에 농삿일은 시작했을까? 소와 말은 겨울을 무사히 넘겼을까? 새
로 지은 집은 내 지시대로 완공을 보았을까?'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예핌은 지난 해에 에리세이와 헤어졌던 마을 근처에 이르렀다. 그 근
처 사람들은 몰라 볼 만큼 달라져 있었다. 그 때는 형편없이 곤란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가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밭의 곡식도 풍성
하고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 살람살이를 하며 옛날 어렵던 일 같은 것은잊어버리
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때, 작년에 에리세이가 물을 마시러 들어간 마을에 이르렀다. 마을에 발을
들여 놓기가 바쁘게 흰
루바시카를 입은 소녀가 어떤 집에서 뛰어나왔다. "할아버지! 우리 집에서 쉬
었다 가세요!" 예핌은 그냥 지나치려고 했으나 소녀는 옷자락을 붙잡고 마구
집쪽으로 끌면서 생글거렸다. 입구 층계에 사내아이를 데리고 여자가 나와 서
서 역시 손짓해 부르는 것이다. "할아버지, 저희 집에서 저녁 잡수시고 가세요.
주무셔도 좋아요." 그래서 예핌은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왔으니 에리세이 영감의 일을 물어 볼까. 그 때 그 영감이 물을 마신다고
들른 집이 아무래도 이쯤 될
거야.' 예핌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여자는 어깨에 멘 자루를 내려 주고 몸을
씻을 물까지 따라 주고, 테이블로 안내했다. 우유와 보리 단지를 내놓고 죽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예핌은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고 순례자를 이렇게 접
대하니 정말 고마운 일이라고 그 가족들을 칭찬했다. 그러자 여자는 고개를저으
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순례하시는 분들을 접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
떤 순례자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셨으니까요. 우리는 예전
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멋대로 살았기 때문이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모가 죽을
판이었는데 하나님께서 할아버지와 비슷한 분을 저희 집으로 보내 주셨어요. 한
낮에 물을 얻어 마시려고 들어오셨다가 우리들의 꼴을 보고 가엾게 생각하시고
그냥 집에 머물렀습니다. 병들고 굴ㄴ어 드러누운 우리에기 마시고 먹게 하여
마침내 우리들이 일어날 수 있게 만드신 후, 땅과 짐수레와 말을사 주신 다음
말없이 떠나
버리셨던 거예요." 이 때 할머니가 들어오면서 그 여자의 말을 가로챘다.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도 그분이 인간이었는지 천사였는지 모를 정도입니다.온
식구들을 위해 헌신을 다 하시고는 아무 말 없이 떠나 버렸으니 도대체 누굴 위
해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나는 드러누
워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득 보니 아무 별다른데라곤 는 대머
리 할아버지가 물을 마시러 들어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데 이 늙은이는 죄많은
인간이라, 어떤 사람이 저렇게 공연히 들어와서 어물거리나,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분은 지금 말한 것과 같은 일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몰골을
보자 두말 없이 들에 짊어졌던 자루를 내려서, 자, 여기예요, 바로여기다 놓고
끄르지
않겠습니까?" 소녀도 말참견을 했다.
"아이 할머니도, 처음에는 방 한가운데에 자루를 내려 놓았다가 다시 의자 에
올려 놓았는데." 농부의 가족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 노인을 칭찬하며 성호
를 긋곤 하는 것이었다. 밤이 되었다.
말을 타고 돌아온 주인 남자도 역시 에리세이의 말을 꺼내고 나서 자기 집서
어떻게 도와 주며 지냈는가를 이야기했다.
"만약 그분이 오시지 않았더라면 우린 모두 죄를 지은 채 죽어 버렸을 겁니다.
모두가 아무 소망도 없이
하나님과 인간을 원망하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참에 그분이 오려서 우를
살려 주셨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도 알게되고 친절한 사람을 믿게도 되었습니
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원하옵건데 그분을 지켜 주시옵소서! 그 전에는 짐승
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던 우리들 그분이 인간으로 만들어 주셨으까요."
모두들 예핌에게 마실 것, 먹을 것을 대접한 다음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들도
잤다. 예핌은 자리에 드러줍기는 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에리세이의 일이, 예루살렘에서 세 번이나 에리세이를 특별 상좌에서 보았던
일이 예핌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구나. 에리세이의 몸은 그것에 오지 않았어도 그 영혼에 하나님
이 함께 계셨던 거야.' 이튿날 아침, 식구들은 예핌과 작별을 고하면서 도중에
먹으라고 자루 속에 고기만두를 넣어 준 뒤에 일하러 들로 나갔다.
그리하여 예핌은 집을 향해서 길을 떠났다. 12
예핌은 꼭 1년째 되는 어느 봄 날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당도한 것은 저때
였다. 아들은 주막에 가고 집에 없었다. 이윽고 아들이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왔
으므로 예핌이 여러 가지를 물어 보았는데, 그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들이 돈을
헤프게 썼다는 것이 어느 모로 보나 역력했다. 돈을 모두 나쁜 짓으로 써버리고,
일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버지가 책망을 하자 아들은 반항조로 나왔다. "아
버지께서 순례를 가지 않았음녀 좋았을 것 아니에요. 아버지는 내가 조금 쓴 것
가지고선...."
예핌은 화가 나서 아들의 뺨을 후려쳤다. 이튿날 아침, 예핌 타라스이치는 아
들의 일을 의논하러 이웃에게로 가던 도중 에리세이의 집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러자 에리세이의 아내가 입구 층계에 서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영감
님,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예핌은 발길을 멈추고 말했다.
"덕분에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두중에 댁의 영감님과 헤어졌는데, 듣자니 벌써
돌아왔다구요?"
그러자 할머니는 좀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떠벌려 대기 시작했다. "돌아오고말
고요, 영감님. 벌써 옛날에 돌아왔어요. 성모승천제가 지난 뒤 금방 왔지 ㅁ니까.
하나님 덕택으로
무사히 돌아와서 온 식구가 경사가 난 듯이 좋아했었죠. 그이가 없으며 집이
쓸쓸해서요. 이제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힘든 일은 하지도 못하지만 뭐니뭐니 해
도 한 집안의 주인이니까 모두가 위지하는 거죠. 글쎄 아들이 어찌나 반가워하
는지원! 아버지가 안계시니까 눈 속의 빛이 꺼진 것 같다면서 말이에요. 이가 어
디 가면 정말 쓸쓸해요. 우린 모두 그분을 의지하고 살아가니까요."
"그래, 지금 집에 있나요?" "있지요, 영감님. 꿀벌집에서 애벌을 나누고 있어
요. 올해는 아주 썩 좋은 애벌을 깠대요. 모두가 하나님 덕책이거든요. 그이도
그렇게 기운이 좋은 벌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하셨다는군요.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하나님께서 굽어 살피셨나 봐요. 영감님, 들어오셨다 가세요. 퍽 가
워하실 텐데요." 예핌은 복도를 지나 윗문께로 나가서 꿀벌집에 있는 에리세이
로 갔다. 꿀벌집에 들어가 보니 에리세이는 머리에 그물도 쓰지 않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 긴 회색 외투를 입고서 자작나무 밑에 서서 양팔을 벌리고 위를쳐
다보고 있었는데, 마치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관 곁에서와 마찬 가자로 대머리
가 햇빛이 자작나무 잎사귀 너머로 비치어 꼭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 둘레에는 금빛 꿀벌이 관모양으로 떼지어 날아다니고 있었으나 쏘려고는
하지 않았다.
에리세이 할머니는 남편을 불렀다. "예핌 영감님이 오셨어요!"
되돌아선 에리세이가 예핌을 보자 반가워서 예핌에게로 달려오며 턱수염 속에
기어 든 꿀벌을 살그머니 집어
냈다. "어서 오게나. 그래 무사히 다녀왔나?"
"몸만 갔다 왔지. 자네에게 줄 선물로는 요단 강물을 가지고 왔네. 이따 우리
집에 와서 가져가게나. 한데
하나님께서 내 정성을 받아들이셨는지 그건 모르겠다네." "아무튼 축복받을
일이야.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예핌은 함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몸은 갔다 왔지만 영혼은 갔다 왔는지 누가 알겠나. 정작 다른 사람이 갔다왔
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지." 하고 말했다.
"무슨 일이고 간에 하나님의 ㄸ이네. 예핌 영감, 하나님의 뜻이라니까." "그리
고 돌아오다가 잔네가 물 마시러 들어갔던 그 집에 들렀었지." 에리세이는 허둥
지둥 손을 내저었다. "허허. 그 말을 그대로 접어두게나. 모든 일은 내가 한 게
아니라네. 나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네. 자, 자, 안으로 들어가세
나. 내 꿀을 가지고 올테니...." 에리세이는 그 이야기를 더 못 하게 하고 다른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다. 예핌도 더이상 아무 소리를 하지 않고 그냥 웃을
따름이었다.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죽는 날지
자기의 의무를 사랑과 선행으로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
이 라는 것을.
촛불
톨스토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신 너희는 들었다(마태가 전
한 복음서 제5장 제38절). 그러자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말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돌려 대고(제38절)... 촛불
이 이야기는 아직 농노가 해방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그 무렵에는 지주도
별별 사람이 다 있어, 자기도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하나님을 공경
하며 농노를 불쌍히 여기는 자가 있는가 하면, 농노를 개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나쁜 지주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농노 출신을 단번에 귀족이 된 지주, 하자면
개천에서 용이 나와 높은 사람들 틈에 끼인 지주들의 포악성은 말 그대로 무시
무시했다. 어떤 귀족의 토지에 그러한 마름 지주의 위임을 받아 소작지를 관리
하던 사람이 나타났다. 농군들은 부역을 하고 있었다. 토지는 충분히 있겠다,
토질도 좋겠다, 물도, 풀밭도, 숲도 모든 것이 남아 돌아갈 정도로 넉하여 지주
도 농군도 아무런 부자유가 없었다. 그런데 지주는 다른 소유지에 있던 농군 출
신 하인을 그 토지를 관리할 마름으로 앉혔던 것이다. 마름은 권력을 잡자 농
민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 아내 말고도 이미 출가한
딸이 둘이나 되고 돈도 벌 만큼 벌었으므로 그리 심하게 굴지않아도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었는데, 욕심이 너무 많다 보니 나쁜 길로 빠져 버렸던 것이다. 우
선 첫 시작으로 농민들에게 배당된 일 이상으로 일을 시켰다. 기와 공장으로 세
워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끌어다가 일을 시키고, 만들어 낸기와를 높은
값에 팔아 먹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무스크바에 있는 지주에게 가서 호소했으
나 잘 되지 않았다. 지주는 농군들을 그냥 쫓아 돌려 보낼 뿐 마름의 권력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다. 마름은 농민들이 호소하러 갔었다는 것을 알고 그앙갚
음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농민들의 살림살이는 한층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농
민 중에도 좋지 못한 자들이 있어, 동료의 일을 마름에게 밀고 하여 서로가 정
에 빠뜨리려 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농민들의 단결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마름
은 더욱더 횡포해졌다. 날이 가면 갈수록 심해져서 결국 농민들은 누구나가 이
마름을 사나운 짐승보다 더 무서워하게 되었다. 마름이 마차를 타고 마을을 지
나갈 때면 모두 저승사자라도 온 것처럼 재빨리 몸을 숨겨 눈에 뜨이지 게 하였
다. 마름은 그런 모양을 보고 더더욱 화를 내고 때리고 노역을 시키고 괴롭혔
다. 그 때문에 농민들은 나날이 쓰라린 꼴을 당해야 했다.
그 무렵, 이웃 마을에서는 어떤 못된 마름이 농민들의 손에 위해 살해되었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자 이 마을의 농민들도 소문에 귀가 솔깃해진 것이다. 어
느 날 농민들은 으슥한 곳에 모였는데, 그 중에 그래도 배짱이 있다는 자가 먼
저 그 일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저 악당을 내버려 둬
야 하나? 어차피 죽기는 매일반이니 저런 놈은 차라리 죽여 없애자." 부활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농민들을 점심 시간을 이용해 숲 속에 모였다. "이래 가지고
서야 어떻게 우리가 살아 나가겠나! 저놈은 우리를 송두리째 말려 죽이나 봐. 심
한 노동으로 지쳐 쓰러질 정도이고 쉴 시간도 주질 않거든? 게다가 조금이라도
제 맘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두들겨 패지 않나. 세묜같은 자은 얻어맞고 죽었지.
아니심은 수갑 족쇄에 채워져 곤역을 당했어. 도대체 우리는 더 상 무얼 기다
리는가? 오늘 저녁, 여기 와서 또 몹쓸 짓을 하기 시작하거든 놈을 말에서 끌어
내려 도끼로 한 대 쾅 치면 그것으로 일은 끝장난다. 그리고 어딘가에 개처럼
파묻어 버리면 발각될 까닭이 없어. 다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모두가 마음을
합해서 발설하지 않기로 약속해야 해!" 바실리 미나에프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심하게 마름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마름은 일주일이 멀다 하고
미나에프를 때리는가 하면, 그의 아내마저 빼앗아 자기 집하녀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저녁때 마름이 왔다. 말을 타고 왔는데 느닷없이 나무 베는 방식이 틀
린다면서 트집을 잡았다. 그는 잘라 놓은 나뭇더미 속에서 잘려진 보리수 한그
루를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보리수를 베라고 하지 않았다. 누가 베었나? 썩
나서지 못할까. 어디 보자, 모조리 두들겨 줄테니!" 그리하여 누가 맡은 자리에
보리수가 끼어 들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것은 시의
구역이라고 했으므로 마름은 피가 맺히도록 시들의 얼굴을 구타했다. 바실도
나무를 적게 베었다고 가죽 채찍으로 실컷 두들긴 다음 마름은 자기 집으로 돌
아갔다. 그 날 밤, 다시 농민들은 모였다.
거기서 바실리는 입을 열었다. "아니, 당신네들은 쓸개도 없소? 바보같으니라
구! 해치운다고 입으로만 말하면서 막상 코앞에 닥치면 뒷구멍으러 기어들어가
니... 꼭 매 앞에 움츠린 참새떼 같단 말야. 동료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 기을 내
서 해치우자고 염불 외듯 하면서 막상 매가 날아오면 모두 풀숲에 숨어 버리
니... 그러니까 매는 자기가 눈독들였던 자를 붙잡아다 요절을 내잖소! 매가 날아
가고 나서 참새들이 짹짹거리며 기어나와 살펴보니 한 마리가 모자란다... 대체
누가 없어졌나? 방카구나. 아아, 그놈은 그런 꼴을 당할 만해. 그만한 까이 있어,
하는 식이오... 당신네들이 꼭 그렇소. 배신 않겠다고 약속했던 정말로 배신하지
말아야지! 놈이 시들에게 손찌검을 했을 때 우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 놈을 요절
냈어야 했단 말이오. 배신 않겠다, 해치으자고 하다가도 매가 덤들면 혼비백산
숲으로 도망쳐 버리는 꼴이란!"
농민들은 빈번하게 그런 의논을 하고, 마침내 마름을 죽이기로 결정을 보았다.
수난 주간에 마름은 농민들에게
영을 내려 부활제가 시작되면 쌀보리를 뿌릴 준비로 지주의 밭을 갈아야 한고
했다. 농민들은, 사람을 어떻게 알고 하는 수작이냐고 수난 주간 동안에 바실리
의 집 뒤꼍에 모여 다시 의논을 했다. "놈이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고 이런 짓
을 거리낌없이 하려 들다니 정말 때려 죽어야 해. 어차피 한 번은 죽을 목숨이
아닌가!" 거기에 표트르 미헤예프가 왔다.
표트르 미헤예프는 온화한 사나이로 이제까지 농민들의 모임에는 한 번도 오
지 않았으나 오늘 처음으로 여기 와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안 다음, 이렇게 말
했다. "당신네들은 정말 엄청남 일을 생각하고 있군요. 사람을 죽인다는 일을
몹시 끔찍한 일이오. 목숨 하나 죽이기야 수월하겠지만 죽은 사람의 영혼은 어
떻게 될 것 같소? 놈이 나쁜 짓을 했다면 우리가 손을 쓰지 않더라도 천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들 참아야 해요."
그 말을 듣고 바실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뭐라구? 건방진 놈! 사람
을 죽이는 건 죄라고? 죄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죽이겠다. 그놈은 너두
알지?
정말 착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죄임에 틀림없짐나 그런 개만도 못한 놈을 이
는 건 하나님의 분부다. 인간을 불쌍하게 여긴다면 미친 개는 죽여애 해. 죽이지
않으면 더욱 죄를 거듭할 뿐이야. 놈이 사람을 때린 생각을 하면 이가 갈려. 설
령 우리가 고초를 당한다 해도 그건 사람들을 위해서야. 모두가 감사할 게틀림
없어. 그런 걸
우리가 안됐다는둥 어떻다는 둥 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으면 놈은 우릴
모조리 패 죽이고 말거야. 자넨
당치도 않은 걱정을 하고 있어, 미헤예프, 도대체 뭔가, 그리스도의 부활절에
일하러 가는 편이 죄가 덜 된다는
말인가? 그렇게 말하는 자네 부터도 일하러 가진 않을걸." "안 가긴 왜 안가!
나는 시키는 대로 하겠어. 가고 싶으면 가고, 싫으면 안 가는게 아니니까. 누가
나쁜지는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셔. 우린 오직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돼. 보게들, 나는
말이지, 내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만약에 악을 악으로 뿌리 뽑으라고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그
롸 같은 본을 보여 주셨을 테지만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그게 아니야. 우리
가 악을 악으로 다스리려 하면 그 악은 이쪽으로 옮겨 오네. 사람을 죽이기야
수월한 일이지만 그 피는 자신의 영혼에 달라붙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신의
영혼을 피투성이로 만드는 일일세. 자신은 나쁜 인간을 죽였다, 악을 뿌리 뽑았
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실상 그보다 더 나쁜 걸 자기 마음 속에도 심는 결과가
되네. 고난에는 지고 들어가야 하네. 그러면 고난쪽에서도 져 줄 걸세." 이렇게
하여 농민들의 의논을 결정을 보지 못했다. 의견이 분분하여 바실리처럼생각하
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죄를
짓지 말고 견뎌 내는 편이 좋다고 하는자도 있었다. 농민들이 부활절 축하
행사를 끝마친 저녁때, 반자이 관청 서기와 같이 지주네 집을 들러 와서 마름미
하일 세묘니치의 명령으로 내일은 농민 모두를 끌어 내어 쌀보리 씨를 뿌리기
위해 밭을 갈게 한다고 말했다. 반장은 서기와 같이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내일
은 모두 나와 밭을 갈도록 하라고 공고하였다. 한패는 개울 저쪽에서, 또 한 패
는 신작로에서부터 시작하라는 분부였다. 농민들은 울며 겨자 먹는 식이으나 명
령에 반항할 용기는 없었다.
이튿날 아침 모두 가래와 삽을 득고 나가 밭을 갈기 시작했다. 교회에서는
아침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사람들은 어디서나 부활적을 축하하고 는
데 이곳 농민들만 밭일을 했다.
마름 미하일 세묘니치는 퍽 늦게 잠이 깨어 농원을 들러보러 나갔다. 마름의
아내도, 과부가 된
딸도(부활절이라다니러 왔다) 곱게 차려 입고 하인에게 마차 준비를 시켜 도
식에 참례했다가 이윽고 돌아왔다.하녀가 사모바르 준비를 막 끝냈을 때 미하일
세묘니치가 돌아왔으므로 같이 차를 마시게 되었다. 미하일 세묘니치는 충분히
차를 마신 다음 파이프의 연기를 내뿜으며 반장을 불러 물었다. "그래 농군들을
밭으로 내보냈나?" "내보냈습니다. 미하일 세묘니치님."
"어때, 다 나왔던가?" "모두 나왔습니다. 제가 장소도 전부 지정해 주었습니
다." "장소를 정해 준 건 좋은데 제대로 잘들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지금 가서
살펴보게. 점심때 내가 직접 나가 볼 테니까 한 정보를 둘이서 일구도록, 아주
잘 일구도록 그렇게 일러! 만약 소홀한 점이 발견되면 부활절이라고 해서 용서
하지는 않을테니까!" "잘 알았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반장은 나갔으나 미하일 세묘니치는 다시 그를 불러들였다. 던
사람을 불러 들이기는 했으나 무슨 곤란한 말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공연히 망설
이는 꼴이, 어떻게 말해야 좋을 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망설인 뒤에 그
렇게 명령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도둑놈들이, 내 말을 어떻게 하
는지 자네 슬쩍 들어보게. 욕하고 흉 본 이야기를 모두 내게 들려 줘. 나는 그놈
들을 너무 잘 알고 있지. 일하기는 싫어하고 그냥 놀고만 싶어하는 족속니까. 먹
고 마시고 노는 것만 좋아하고, 밭갈 때를 놓치면 일을 그르친다는 생각을 않는
단 말이야. 그러니까 누가 뭐라고 했는지, 놈들이 지껄이는 말을 듣고 와서 모조
리 내게 보고 해. 나는 그걸 알아 두지 않으면 안 되니까. 자, 어서 가 보라구.
그리고 죄다 숨김없이 내게 말해 줘야 해. 알았나!" 반장은 발길을 돌려 밖으러
나가자, 말을 타고 농민들이 일하는 밭으로 향해 갔다. 마름의 아내는 남편이
반장과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들어와서 제발 그만두면 어떻겠냐고간청했다. 마
름의
아내는 온순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여자였으므로 되도록 남편의 마음을 라
앉혀, 농민들을 감싸려 했다. "여보 미셉카, 그리스도의 부활절이니 제발 죄스러
운 짓을 하지 말고 농민들을 쉬게 하시죠." 미하일 세묘비치는 아내의 말을 들
으려고도 않고 웃음으로 넘겨 버렸다. "한동안 다끔한 맛을 보여 주지 않았더니
당신 아주 건방져졌군. 참견을 다 하고 나서니." "미셉카, 난 당신의 일로 좋지
않은 꿈을 꾸었어요. 제발 제 말대로 농민들에게 오늘만은 일을 시키지 마세요!"
"안 된다니까 자꾸만 그러는군. 맛있는 음식을 배부리 먹고 지내니까 채찍이 떻
게 생긴 줄 모르는 모양이야. 당신도 조심해요!"
세묘니치는 벌컥 화를 내며서 담배를 피우던 파이프로 아내의 입을 쿡 찔러자
기 방에서 몰아 내며서 식사 준비나 하라고 명령했다.
미하일 세묘니치는 어묵에다 돼지고기를 넣은 만두를 먹고, 그것도 모자라 돼
지구이와 우유에다 볶은 국수를 먹고, 버찌로 빚은 술을 마시고 달콤한 케이크
를 먹은 다음, 하녀를 불러 노래를 부르게 하고 자기도 기타를 가져다가 노래에
맞추어 퉁기기 시작했다. 미하일 세묘니치가 거나한 기분으로 트림을 함녀서
기타줄을 퉁기고 하녀와 함게 노닥거리고 있을 때 반장이 들어오더니 허리를 굽
혀 인싸를 하고 나서 들에서 듣고 본 일을 보고 하기 시작했다. "그래 어떻든
가, 갈고들 있던가? 오늘 할당에 준 일을 다 마치겠던가?" "벌써 절반 이상 갈
았습니다." "그래, 잘못된 곳은 없던가?"
"그런 건 없었습니다. 모두 겁쟁이들이라 제대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 흙
도 곱게 다지고?" "잘 다져져서 아주 고운 겨자씨 같습니다."
"그런데 그 천한 놈들이 내 욕은 하지 않던가?" 반장이 머뭇거리거 있자 미
하일 세묘니치는 들은 대로 죄다 털어놓으라고 다그쳤다. "숨김없이 그대로 말
해. 딴 말로 꾸며 대지 말고. 놈들이 말한 대로 털어놓으란 말이야. 곧이곧대로
말하면
상을 주지만 혹시 놈들을 감쌌다간 매로 대신 할테니 알아서 하게나. 야, 카
샤, 이 사람 보드카 한 잔 주어라.
기운 좀 내게." 하녀는 나가더니 반장에거 술을 갖다 주면서 반장을 축하의
인사말을 하고 쭉 들이킨 다음 입 언저리를 닦고 나서 생각했다.
'어차피 마찬가지 아닌가. 모두가 이 사람을 욕한 게 내 탓은 아니니까. 분니
까 들은 대로 말해 버리자. 그렇게 생각하고 반장은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모두들 불평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름 양반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
는다나요." 마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말 누가 했지? 하나하나 말해 주게. 바실리는 뭐라고 했나?" 반장은 자
기 동료를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바실리와는 먼저부터 사이가 좋지 았
으므로, "바실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욕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대답했
다. "입에 담기조차 무서울 정도인데, 그 작자는 필시 개처럼 죽을 게 틀림없다
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흥, 장하군! 놈은 그러면서 왜 진작에 날 죽이
지 않았다는 거야? 아무래도 미처 손이 돌아가지 않았던 모양이군. 좋아, 좋아,
바실리, 네놈과는 당장에 셈을 할테니까. 다음에는 치슈카는, 그놈도 역시 라고
했겠지?"
"네, 모두 고약한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거 원, 입에 울리기조차 지저분
해서 어디...." "도대체 뭐가 지저분한가? 겁낼 것 없어. 말하라니까."
"그 작자의 배가 툭 터져서 창자가 튀어 나왔으면 좋겠다고 그랬습니다." 미
하일 세묘니치는 그만 껄껄 웃었다. "흥, 어느 쪽이 먼저 터질지 어디 두고 보
자. 다른 놈들은?" "네에, 모두 좋은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욕을 하거나
협작조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흐음, 그렇다면 표트르 미헤예프는 어때? 놈은
뭐랬지? 틀림없이 그 빌어 먹을 놈도 욕지거릴 했으렷다." "아닙니다. 미하일
세묘니치님. 표트르는 욕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다는 말인가?"
"글쎄 그 사나이가 한 행동은... 모두들 놀라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아니, 그저 모른다고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곁으로 갔을 때 그
사나이는 트루킨 언덕의 경사지를 갈고 있었습니다. 차차 가까이 아가갔더니 누
군가 노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주 가늘고 고운 목소리였죠. 게다가 가
래 손잡이 사이에는 뭔가 반짝이는 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불빛 같아 보였습니다. 바짝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저어, 교회에서 코
페이카에 파는 초를 가래 가로대에 세워 놓았지 뭡니까. 그게 타고 있었는데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 루바시카를 입고 부지런히
밭을 갈면서 부활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가래를 홱 돌려도 힘껏 잡아겨
도 촛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가래르 홱 돌리고 손잡이
를 꺾으면서 마구 밀고 나갔습니다만 촛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타는 것입니
다!" "그래, 뭐라고 하던가?"
"아니요, 아무 말 없었습니다. 그냥 나를 보더니 부활절 인사를 했을 뿐 다시
노래를 불렀습니다."
"자넨, 그에게 뭐라고 했나?"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농민들
이 몰려 와서 미헤예프는 부활절에 들일을 했으니까 아무리 기도를 드려도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면서 놀렸습니다." "그래, 그 사나이는 뭐라 하던가?"
"뭘요, 그 사나이는 그냥 '땅에는 평화, 사람에게는 선한 마음이 있을지어다!라
고 했을 뿐, 다시 연장에 손을 얹더니 말을 몰면서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
습니다만 촛불은 꺼지지 않고 그대로 타고 있더군요." 마름은 웃음을 그치고 기
타를 아래에 내려 놓은 채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리고 감나히 앉더니 하녀
도 반장도 물러가게 하고 커튼 뒤로 들어가 침상에 쓰러져서 한숨을 쉬며 끙끙
거렸는데, 그것은 보릿단을 실은 짐수레라도 끌고 가는 듯한 소리 같았다.그 때
아내가 들어와서 말을 걸었으나 대답도 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놈이 나를 이겼다! 이번에는 내 차례가 왔다!"고 할 뿐이었다. 아내
는 타이르기 시작했다. "여보, 당신, 지금부터라도 가서 농군들을 돌려 보내세
요. 그렇게만 하면 아무 일 없을 테니까요! 이제까지는 더 나쁜 짓을 하고도 태
연했는데 이번에는 왜 그렇게 겁을 내는지 모를 일이군요." "나는 졌어. 그놈은
무서운 놈이야. 나를 이겼어!"(이 뒷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계속되는 것과같은
베리언트가 씌어 졌다.)
아내는 더욱 목소리에 힘을 주어 "자꾸 그놈이 이겼다, 이겼다고만 하시면 무
슨 소용 있어요? 그보다 어서 가서 농민들에게 일손을 멈추게 하세요. 모든 일
이 잘 될테니까요. 자, 가세요. 나가서 말에 안장을 놓으라고 하겠어요." 말이
끌려나왔다. 아내는 남편을 타일러 지금부터 들에 나가서 농민들을 집으로 돌가
게 하도록 했다. 미하일 세묘니치는 말을 타고 들로 나갔다. 마을 입구에 이르
자 어떤 아낙이 마을 문을 열어 주어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마름의
모습을 보기가 무섭게 어떠 사람은 뒤꼍으로 어떤 사람은 길 모퉁이로, 어떤 람
은 채마밭으로 도망치느라고 야단이었다.
마름은 마을을 빠져나가는 문에 이르렀다. 문이 닫혀져 있었는데 말에 올라앉
은 채론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문을 열라고 고함을 질렀다. 아무도 대답하는 자
가 없었다. 말에서 내려 순수 문을 열고 다시 말을 타려고 한쪽 발을 등자에
걸면서 훌쩍 몸을 올려 안장에 걸터앉으려는 순간, 말은 그만 돼지에 놀라옆의
울타리에 부딪혔다. 마름의 둔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져 울타리에
세게 부딪혔다. 그 울타리 중 한 쪽 끝이 뾰족하고 다른 것보다도 길게 튀어나
온 말목이 있었다. 마름은 그만 말목에 배가 걸렸다 그걸 배겨 낼 장사가어디
있겠는가. 배가 찢어지면서 땅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농군들이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는데 문께서 말이 콧김을 불어 대며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것
이 아닌가! 농군들이 놀라 보니, 미하일 세묘니치가 벌렁 나자빠져 있니 않은
가. 양팔은 좌우로 늘어지고 눈은 부릅떴으며 창자가 온통 터져 나오고 피가
괴어 물웅덩이처럼 돼 있었다. 대지가 그걸 빨아들여 주지 않은 것이다.
농군들은 너무 눌라 뒷길로 말을 몰고 제작기 달아났다. 다만 표트르 미헤프
만이 말에서 내려 마름 곁으로 다가갔는데, 보니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으므로
그의 눈을
감겨 주고 짐수레에 말을 매어 아들과 함께 시체를 실은 다음 지주의 저택로
갔다. 미헤예프에게서 그 동아네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지주는 눙민들에게 부
역을 시키지 않고 소작료만 마치도록 했다.농민들도 하나님의 힘은 악을 악으
로 갚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보 이반 이야기
톨스토이 바보 이반, 그의 두 형인 무과 세묜과 배불뚝이 타라스, 그리고 벙
어리 누이 말라니아와 큰 도깨비, 작은 도깨비의 이야기.
바보 이반 이야기 1
아주 먼 옛날, 어느 나라의 평화로운 마르에 부유한 농부가 있었다. 이 부유한
농부에게는 세 아들, 즉 무관인 세묜, 배불뚝이 타라스, 바보 이반과 귀머거리이
자 벙어리인 딸 마라니야가 었다. 무관인 세묜은 임금님을 섬기러 전쟁에 나갔
고, 배불뚝이 타라스는 무안의 장사치한테 장사 기술을 배우러 갔으며, 바보 이
반은 누이와 함께 집에 남아 땀흘려 일하고 있었다. 무관인 세묜은 높은 벼슬과
사전을 얻고 어느 귀족의 한테 장가들었다. 그런데 녹이 많은데다 전답이 많았
는데도 매양 수지가 들어맞지 않았다. 남편이 돈을 벌어오기가 바쁘게 여편네
는 사치스러운 귀족 행세에 정신이 팔려 돈이 불어 있을 날이 없었다. 그래서
무관인 세묜은 도조를 받으려고 농장으로 갔다. "도조는 드릴 수가 업습죠. 저
희들에겐 가축이고 농구고 말이고 소고 쟁기고 간에 하나도 없으니 말이에요.
먼저 이런 것들을 갖추어야 합죠. 그래야만 비로소 수익이 생기는 겁니다." 그
래서 무관인 세묜은 아버지에게 갔다. "아버지, 아버지는 부자이면서도 저에게
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땅을 3분의 1만 나눠 주십쇼. 제 땅으
로 이전하겠습니다."
"너는 뭐 집에대 보태 준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뭣 때문에 너에게 땅을 3의
1이나 준단 말이냐? 그러는 날엔 이반과 네 누이가 못마땅해 할 것이다."
그러자 세묜은 말했다. "그렇지만 그애는 바보 아녜요? 그리고 누이란 애도
귀머거리에다 벙어리고 말이에요. 그런 것들한테 뭐가 필요하겠어요?"
이 말에 대해서 영감은 "이반이 뭐라고 말하나 어디 그애한테 한번 물어 자."
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반은 "좋아요. 그리죠." 하고 말했다.
무관인 세묜은 집에서 3분의 1의 땅을ㄹ 얻어 그 땅을 제 것으로 이전하고 시
임금님을 섬기러 떠났다. 배불뚝이 타라스도 돈을 많이 모아 장사치의 딸한테
장가들었다. 그래도 그는 불만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찾아와 "저에게도 제
몫을 주십쇼." 하고 말했지만 영감은 타라스에게도 나누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말을 꺼냈다. "너는 우리들에게 보태 준 게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지
금 집에 있는 것은 모두 이반이 번 것뿐이다. 나는 그애하고 딸년을 섭섭하게
할 수는 없다." "저런 녀석한테 뭐가 필요합니까. 저 녀석은 바보 아니에요? 녀
석은 장가도 갈 수 없습니다. 아무도 올 사람이 없습니다. 벙어리인 누이도 그렇
죠, 역시 필요한 거ㅓ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잖아, 이반. 나에게 곡을
절반만 다오. 그리고 난 연잔 따윈 갖지 않을테니까 가축 중에서 저 ㅈ빛 말
이나 한 마리 갖겠다. 저건 너에게 밭을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닐테고."
이반은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하더니 "가지세요. 난 또 가서 잡아 오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이렇
게 해서 타라스도 제 몫을 탔다. 타라스는 곡식을 저자에 실어 내고 수말도 리
고 갔다. 그리고 이반은 예나 다름없이 늙어 빠진 암말 한마리로 농사를 지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봉양했다.
2
큰 도깨비에게는 이 형제들이 재산을 분배함에 있어 말다툼을 하지 않고 의게
헤어진 것이 꽤나 배가 아팠다.그래서 그는 작은 도깨비 셋을 큰 소리로 불렀
다. "자. 봐." 그는 말했다.
"세상에 한 고을에 세 형제가 살고 있지. 세묜이란 무관과 타라스란 배불뚝이,
그리고 이반이라는 바보 녀석이
말이야. 나는 저녀석들에게 꼭 싸움을 붙여야겠는데, 아 저녀석들이 의좋게 고
있지 않겠나. 서로서로가 너 먹어라, 하고 지내고 있거든. 저 이반이란 바보 녀
석이 내 기분은 완전히 망쳐 놓았지 뭐야. 이제부터 너희
셋이서 모두 나가 저 세 녀석들에게 눌어붙어 서로 싸움을 하도록 의를 끊어
놓아라. 어때, 그것을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다마다요!" 하고 그들은 말했다.
"모슨 좋은 방법잉라고 있니?"
"있고 말고요. 먼저 저 녀석들을 먹을 게 하나도 없도록 홀랑 발가벗긴 다음
세 녀석을 한 곳에다 모으죠.
그러면 저 녀석들도 필시 서로 치고받고하게 될 겁니다."
큰 도깨비가 껄껄 웃었다.
"좋아, 좋아! 그럴 듯한 방법이군. 자, 모두 땅위로 가러가! 그리고 저 세 형제
놈들의 사이를 갈라 놓기 전에는
아무도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명심해라!"
작은 도깨비들은 어느 늪 속으로 들어가 어떻게 일에 착수 할 것인지를 상의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마다 조금이라도더 수월한 일을 맡으려고 오랫동안 궁
리한 끝에 겨우 심지를 뽑아서 누가 누구를 맡을 것인지를 정하기로 하였다. 그
리고 다른 도깨비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일찍 일을 마친 자는 다른 도깨를 도우
러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작은 도깨비들은 심지를 뽑고 나서 언제 다시 이 늪
에 모일 것인지 날짜를 정하고, 그 날 누구의 일이 끝나고 누구를 도우러 가야
할 것인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작은 도깨비들은 저마다 제 심지대로 행동하기
로 하고 헤어졌다. 드디어 그 날이 닥치자 작은 도깨비들은 약속대로 늪에 모
였다. 그리고 각기자기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묜이란
무관한테서 돌아온 첫째 도깨비가 입을 열었다. "내 일은 말이야." 하고 말했다.
"잘 돼 나가고 있어. 내가 맡은 세묜은 내일 틀림없이 아버지한테 갈 거야."
그의 동료들이 묻기 시작했다. "그래 너는 어떻게 했지?" 하고 그들은 입을 모아
물었다. "나는 말이야." 도깨비는 으시대며 말했다. "나는 우선 먼저 세묜에게
잔뜩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지. 그랬더니 그 녀석은 제 임금님에게 온 세계를 정
복해 보이겠다고 약속하지 않았겠나. 그러자 임금님은 세묜을 대장으로 만들어
서 디아 나라를 치러 보낸 거야. 모두들 전쟁 준비를 하던 날 밤, 나는 세묜 군
사들의 화약을 모조리 적셔 놓은 다음 인디아의 임금에게로 가서
짚으로 군사들을 무수히 만들어 놓았지. 세묜의 군사는 자기네 쪽으로 사방
팔방에서 지푸라기 군사들이 몰려 오는 것 보고는 잔뜩 오그라든거야. 세묜은
부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대포고 총이고 간에 나가야 말이지. 세묜의
군사들은 사색이 다 되어 줄행랑을 놓을밖에. 헤헤헤헤. 그러자 인디아의군사은
그들을 쳐부쉈지. 세묜은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재산을 몽땅 몰수당한 데다 내
일은 사형을 집행하려는 참이야. 나에겐 이제 꼭 하루 일감이 남았을 따름이야.
말하자면 집으로 내빼도록 그 녀석을 옥에서 내놓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란 말
이야. 내일은 완전히 끝장이 나니까 저희 둘 중에서 누가 내 도움이필요한지 자,
말해봐." 타라스에게서 돌아온 다른 작은 도깨비도 제 일에 대해서 이렇게 애기
하지 시작했다. "나는 말이야, 도움 따윈 필요없어. 내 일도 잘 돼 자가고 있으
니까. 타라스란 녀석도 이제 일 주일 이상을 부지하지 못할 거야. 나는 제일 먼
저 그 녀석 배를 잔뜩 불려 욕심꾸러기가 되게 했지. 그랬더니 그녀석은 남의
재산을 턱없이 탐내어, 보지도 못한 것까지 모두 사고 싶어졌지 뭐야. 돈을 는
대로 탈탈 털어 무진장으로 사 버렸지. 그래도 모자라서 여ㅕ전히 또 하고 있
는 거야. 지금은 빚까지 져 가면서 사들이고 있는 형편이야. 이제는 너무 긁어모
으다 보니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어. 일 주일 에는
이것저것 갚아야 할 기한이 닥치는데, 그러면 그녀석은 필시 갚지 못하고 이내
제 애비한테 달려가게 될 거야." 그러고는 그들은 이반에게사 돌아온 셋째 도깨
비에게, "네 일은 어떻게 됐지?" 하고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상하게 내 일
은 잘 돼 나가지 않아. 우선 먼저 배탈을 나게 할 양으로 말이야, 그 녀석의 크
바스를 담은 병 속에다 침을 잔뜩 뱉어 놓고는 그 녀석 밭으로 가서 땅바닥을돌
처럼 ㄲ혀 놓았지. 그 녀석이
꼼짝 못하게 말이야. 그ㅉ 되면 녀석도 밭을 갈진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데,
어딜, 아 그 바보 녀석은 말없이 쟁기를 가지고 와서는 갈아 젖히지 않겠나. 배
가 아파 끙끙 앓으면서도 여전히 갈아대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그 녀석의 쟁기를
부숴 놓았지. 그랬더니 그 녀석은 집으로 돌아가 딴 보습으로 갈아끼우는 새 성
에를 몇 갠가 대고 또다시 갈기 시작하지 뭐야. 그래서 나는 땅 밑으로 기어 들
어가 보습을 뭍들어 보려고 했는데, 어딜, 오무지 붙잡아져야 말이지. 그 녀석
이 쟁기를 누르는데가 보습은 날카롭고 해서 내 손은 마구 베이고 말어.
그래 그 녀석은 거의 다 갈아 버리고 이제는 겨우 한 두둑밖에 남지 않았어.
그러니 애들아! 와서 좀 도와줘.
우리가 그 바보 하나를 때려잡지 못하는 날엔 우리들의 일은 모두 허사가 고
말테니 말이야. 만약 그 바보가 남아 농사를 짓게 되면 그들은 별로 곤란을 받
지 않게 될 거거든. 그 녀석이 두 형들을 부양하게 될테니 말이야."
무관인 세묜을 맡고 있는 다른 도깨비가 내일 도우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작
은 도깨비들은 그것으로 일단 헤어졌다.
3
이반은 묵혀 두었던 밭을 다 갈고 이제는 그저 한 두둑만 남겨 놓았을 뿐이
다. 그는 마저 다 갈아 버리려고
말을 타고 왔다. 배가 아파 견딜 수 없었으나 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고삐의 줄을 툭 치며 쟁기를
돌려 갈기 시작했다. 한 번 갔다가 되돌아서 다시 되짚어 어려고 하는데, 마치
나무 뿌리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쩐 일인지 쟁기가 나가지 않았다. 그것은 작은 도깨비가 두 발로 깃
술에 매달려 꽉 누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별 이상한 일도 다 있다고 이반은 생
각했다. '아까만 해도 나무 뿌리 같은 건 없었는데. 그래도 역시 나무 뿌린지도
모른다.' 이반은 두둑 속에도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러자 무엇인가 부드러운 것
이 뭉클 손에 닿았다. 그는 그것을 움켜 잡아 밖으로 끌어 냈다. 나무 뿌리 같
은 새까만 것이었는데 그 위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자세히 보니까 살아 있
는 작은 도깨비가 아닌가. "아니, 이게! 뭐 이런 빌어먹을 게 다 있어!"
이반은 작은 도깨비를 번쩍 치켜들고 흙더미에다 내리쳐 박살을 내버리고 다.
그러자 작은 도깨비가 소리를 지르면서, "제발 죽이지 말아 주십쇼. 그 대신 무
엇이건 원하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래 무슨 짓을 하겠다는
거냐?" "그저 무얼 원하시는지 말씀만 해 주십쇼."
이반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나는 배가 아픈데 말이야, 낫게 할 수 있
겠니?" "할 수 있고말고요." 하고 작은 도깨비는 말했다.
"어디 그럼 낫게 해 보렴."1 작은 도깨비는 두둑 위에 몸을 구부리고 여기저
기 손톱으로 뒤져 가며 무엇인가를 찾았다. 이윽고 가지가 세 개 달린 조그만
뿌리를 쑥 뽑아 그것을 이반에게 건네며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이 뿌리를 한
뿌리만 삼키시면 천하에 없는 아픔도 이내 가셔집니다." 이반은 뿌리를 받아 찢
어서 가지 하나를 삼켰다. 그러자 금방 복통이 가셨다. 작은 도깨비는 다시 사
정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놓아 주십쇼. 나는 땅 속으로 기어 들어가 이제 다
시 나오지 않으렵니다." 그러자 이반은 말했다.
"자, 그럼 잘 가러가!" 그런데 이반이 말을 시작하기가 바쁘게 작은 도깨비는
물 속에 던진 돌처럼 땅 속으로 금방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그 자리엔
구멍만이 하나 남았을 뿐이었다. 이반은 나머지 두 가지의 뿌리를 모아 속에다
쑤셔 넣고 그대로 발을 갈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이랑을 다 갈고 나자 쟁
기를 뒤집어 엎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을 풀어놓고 오두막 들어가자 형인 무관
세묜이 아내와 함께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는 전답을 몰수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옥에서 도망쳐 나와 아버한
테서 살 양으로 여기에 달려온 것이었다. 세묜은 이반을 보자 이렇게 말했다.
"난 너한테서 살려고 왔다. 새 일자리를 구할때까지만 나와 집사람을 먹여오."
"아, 그렇게 하세요. 염려 말고 여기서 사세요." 이반은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이반이 막 의자에 걸터앉았는데 이반에게서 나는 흙냄새가 부
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저 바보같은 시동생에게서는 정말 고약한 냄새가 나는군요. 토할 것 같아요,
여보."
그러자 세묜은 말했다. "내 처가 너에게서 나는 냄새가 싫다고 말씀하니까 너
는 부엌에서 먹었으면 좋겠구나." "아, 그렇게 하죠." 하고 이반은 말했다.
"그렇잖아도 난 바로 밤 순찰을 나갈 시간이 되었으니까요. 말에게도 먹이를주
어야 하고." 이반은 빵과 웃옷을 집어 들고 밤 순찰을 하러 나갔다.
4
무관인 세묜을 맡은 작은 도깨비는 그 날 밤 안에 일을 마치고 약속대로 바로
를 곯려 주려고 이반을 맡은 작은 도깨비를 찾아왔다. 밭으로 와서 여기저기 한
참 동료를 찾아 헤맸으나 어디에도 없고, 그저 구명이 하나 퀭하니 뚫려 있는
것만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친구한테 무슨 불행한 일이라도 일
어난 모양이다. 좋아! 내가 대신 바보 이반을 곯려 줘야지. 이번에는 풀밭으로
가 볼까?' 작은 도깨비는 목장으로 가 이반네 풀밭에 큰물이 들게 했다. 풀밭은
온통 진흙바닥이 되었다. 이반은 새벽에 가축의 밤 순찰에서 돌아와 큰 낫을 들
고 풀밭으로 풀을 베러 나갔다. 이반은 도착하자마자 이내 베기시작했다. 그러
나 한 번이나 두 번 내두르기만 했는데도 낫의 날이 무더져 들지 않게 되어 갈
아야 했다. 이반은 여러 가지로 해 보았다. 그는 혼잣말로 했다. "안 되겠다. 집
에 가서 숫돌을 가져와겠다. 그 김에 빵도 가져와야지. 비록 일 주일이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다 베기 전에는 여기서 떠나지 않겠다." 작은 도깨비는 이 소리
를 듣고 좀 생각을 하더니 "제기랄, 이 녀석은 바보로군. 이 녀석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무슨 딴 수를 쓰든지 해야지." 하고 말했다. 이반은 돌아와서 낫을 갈아
베기 시작했다. 작은 도깨비는 풀 속에 몰래 기어 어가 낫공치를 붙잡고 그 날
을 흙속에 처박기 시작했다. 이반은 힘이 들었으나 끝까지 일을 해냈다. 이제 늪
의 한 다랑이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작은 도깨비는 늪 속으로 기어 들어가 이
렇게 생각했다. '이번에는 비록 손가락이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베지 못하게 해
야지.' 이반은 늪으로 왔다. 보기에는 풀이 그렇게 칙칙하지도 않은데 어쩐지
낫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이반은 바짝 약이 올라 힘껏 낫을 내두르기 시작했
다. 작은 도깨비는 배겨 내지 못하게 됐다. 뒤로뛰어서 물러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일이 틀린 것으로 보고 작은 도깨비는 덤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반은 큰 낫을 마구 휘둘러
덤불을 치면서 작은 도깨비의 꼬리룰 절반 잘라 버렸다. 이반은 풀을 다 베고
나서 누이에게 그것을 긁어
모으라고 일러 놓고 이번에는 호밀을 베러 갔다. 갈고랑낫을 가지고 갔을 때
는 꼬리를 잘린 작은 도깨비가 어느 틈에 거기에 와서 호밀을 마구 흩어 놓았기
때문이 갈고랑낫을 가지고 와 베기 시작하여 곧 다 베어 버렸다. "자, 이번에는
귀리르 베어야지." 꼬리를 잘린 작은 도깨비는 이 말을 듣자 이번에야 말로저 녀
석을 곯려 주어야지, 어디 내일 아침까지 두고 보아라 하고 생각했다. 그 이튿날
아침 작은 도깨비가 귀리밭에 달려가 보았더니 귀리는 벌써 다 베어져 있었다.
밤 사이에 귀리의 낟알이 보다 적게 떨어지게 할양으로 이반이 그것을 말끔히
베어 놓았던 것이다. 작은 도깨비는 약이 바짝 올라 중얼거렸다.
"그 바보 녀석은 내 꼬리를 잘라 놓은데다 또 나를 괴롭히고 있다. 전쟁에서더
이처럼 경을 치는 일은 없었다.
그 빌어먹을 놈은 밤에도 잠을 자지 않으니 도무지 당해 낼 도리가 없다. 러
나 이번에는 호밀 가리 속으로 기어 들어가 모조리 썩혀 버리고 말겠다." 작은
도깨비는 호밀 가리가 있는 대로 가자 그 다발 사이로 기어 들어가 썩히기 시
작했다. 그런데 호밀단을 띄우고 있는 사이에 저도 따듯해져 그만 꾸벅꾸벅졸기
시작했다. 한편 이반은 암말에게 수레를 끌게 하고 누이와 함께 호밀단을 나르
러 왔다 호밀 가리 옆으로 다가와 호밀단을 짐수레에 싣기 시작한 이반은 두어
단 가량 던져 올리다가 똑바로 작은 도깨비의 등짝을 밀어 대게 되었다. 그래서
치켜들어 보았더니 갈튀발 끝에 꼬리가 ㅉ은 작은 도깨비가 걸려 버둥리면서 한
창 도망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이반이 말했다.
"아니, 요놈 보게, 뭐가 이렇게 못된 게 있어! 너 또 나온 게로구나?" 그러자
작은 도깨비는 말했다. "아니에요, 내가 아닙니다. 요 앞의 것은 내 친구였어요.
나는 당신의 형님이신 세묜한테 있었던 놈입니다." "네가 어떤 놈이건 똑 같이
혼을 내놓아야겠다." 이반은 말했다. 이반이 밭두덩에다 내리쳐 박살을 내려고
하는데 작은 도깨비가 두 손을 싹싹 빌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한번만 놓아 주
세요. 이제 다시는 나오지 않겠습니다. 놓아 주시기만 하면 당신이 원하시는 은
뭐든 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뭣을 할 수 있다는 거냐?" 하고 이반이 묻자 작은 도깨비가 말했다. "
나는 원하신다면 무엇으러라도 군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까
짓게 무슨 소용이 있지?" "어디에나 쓰입죠. 그들은 내 생각 대로 무슨 짓이건
할 수 있습니다."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단 말이지?"
"그렇고말고요." "어디 그럼 한번 만들어 보렴." 이반은 말했다.
그러자 작은 도깨비는 이렇게 말했다. "이 호밀단을 한 단 들어 땅바닥에다
반듯이 세우고 흔들면서 그저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 종이 이르는 말
이노라, 다발이 아니라 모릿짚 수만큼의 군사가 되어라!" 이반은 호밀단을 들고
그것을 땅바닥에다 세우고 흔들면서 작은 도깨비가 일러 준대로 했다. 그러자
호밀단이 산산히 흩어져 많은 군사가 되고, 고수와 나팔수가 선두에서 둥거리는
것이었다. 이반은 웃음을 떠뜨렸다.
"그것 참, 도깨비들은 여간한 솜씨가 아니구나! 이건 계집애들이 보면 정말 뻐
하겠는걸." "그럼 이제 놓아 주세요."
"아니야." 하고 이반은 말했다. 낟알도 털지 않은 호밀단으로 군사를 만들면
낟알을 버리게 되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다시 호밀단으로 되돌려 놓은 지를
가르쳐 주어야지. 그 낟알을 떨어야 할 게 아니야." 그러자 작은 도깨비는 말했
다. "이렇게 말하시면 됩니다. 군사의 수만큼 보릿짚이 되어라, 또 다발이 되어
라. 내 종이 이르는 말이노라!" 이반이 그대로 말하자 다시 다발이 되었다. 작
은 도깨비는 도다시 사적하기 시작했다. "이제 놓아 주세요."
"그래, 그렇게 하마." 이반은 작은 도깨비를 밭두덩에다 걸쳐 놓고 한쪽 손으
로 누르면서 그를 갈퀴에서 배 주었다. "잘 가러가."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그가 말을 마치기가 바쁘게 작은 도깨비는 물 속에 던진 돌처럼 금방
땅 속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그러고는 그저 퀭하니 구멍이 하나 남을 뿐이었다. 이반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둘째 형인 타라스가 아내와 함께 와 있어 한창 저녁을 먹고 있는 중었
다. 배불뚝이 타라스는 돈을 치르지 못하고 빚 때문에 도망쳐 온 것이었다.
그는 이반을 보자 "얘, 이반." 하고 말했다. "내가 다시 장사를 시작할 때까지
집사람과 나를 좀 먹여 살려 주어야겠다." "아, 좋을 대로 하세요." 하고 이반은
말했다. 이반은 웃옷을 벗고 식탁 앞에 앉았다.
그러자 장사치의 아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바보 따위가 같이 밥먹을 수가
없어요! 땀 냄새가 고약하게 나서 말이에요." 그러자 타라스도 이렇게 말했다.
"이반, 너에게서 나는 냄새가 좋지 않다, 저기 부엌에 가서 먹어라." "그럼 그
렇게 하죠." 하고 이반은 말했다. 그기고 제몫의 빵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
그렇지 않아도 마침 밤 순찰을 나갈 시간이에요. 말에게도 먹이를 주어야 하요."
5
세 번째의 작은 도깨비는 그 날 밤이 일이 끝나 약속 대로 동료를 거들어, 그
러니까 바보 이반을 곯려 주려고 타라스한테서 왔다. 밭으로 와서 여기저기 동
료들을 찾아 헤맸으나 아무도 없고 그저 구멍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풀
밭으로 가 보았더니 그곳의 늪에서 잘린 꼬리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호을 베어
낸 밭에서도 또하나의 구멍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이거, 친구들의 신사에 무엇인가 화가 미친 모양이다. 내가 그들을
대신해서 그 바보 녀석을 혼구멍을
내줘워야겠구나.' 그는 생각하였다.
작은 도깨비는 이반을 찾으러 타작 마당으로 갔다. 그랬더니 이반은 벌써 일
을 마치고 숲 속에서 나무를 베고 있었다.
두 형들을 모두 같이 사는 것이 옹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기가
살 집을 지을 나무를 베어 새 집을 지어 달라고 바보인 이반에게 이른 것이었
다. 작은 도깨비는 숲으로 달려가자 나뭇가지로 기어올라가 이반이 나무를 베어
눕히는 것을 훼방하기 시작했다. 이반은 쓰러뜨리기 좋게 나무 밑둥을 쳐 고 일
하기 좋게 나무를 쓰러뜨리려고 했으나 나무는 이상하게 굽으면서, 쓰러뜨렸다.
이반은 다른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그러ㄴ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이반은
갖은 애를 쓴 나머지 가까스로 커다란 나무를 쓰러뜨렸다. 세번째 나에
달겨들었다. 그것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반은 쉰 그루쯤 베어 눕힐 것으로생
각했었는데 열 그루도 채 베어 눕히기 전에 벌써 해가 뉘엿뉘엿 했다. 그리고
이반은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그의 몸뚱이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 마치 안
개처럼 숲 속에 끼었는데도 그는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또 한 그루 어 눕
혔다. 그랬더니 등짝이 지끈지끈 쑤시기 시작하여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그래
서 도끼를 나무에다 쳐박아 놓고 조금 쉴 양으로 앉았다. 작은 도깨비는 이반이
잠잠해진 것을 알고 기뻐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녹초가 되어 내동댕이친 거로
군. 어디 그럼 나도 이제 좀 쉬어 볼까.' 작은 도깨비는 나뭇가지 위에 올라타
고 앉아 속으로 고소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반은 다시 벌떡 일어나 도끼를
쳐들어 그것을 반대쪽에서 냅다 내리 쳤으므로 나무는 별안간 뿌리직 개지면서
쓰러졌다. 작은 도깨비는 워낙 갑작스런 일을 당하여 미처 발을 비킬 겨를도
없이 우지끈 하고 가지가 꺾이는 바람에 그 사이에 손일 끼고 말았다. 이반은
깜짝 놀랐다. "아니, 요 망할 게 너 이놈! 또 나왔구나?"
그러자 작은 도깨비는 말했다. "내가 아닙니다. 저는 당신 형님이신 타라스한
테 있었던 놈이에요." "아니, 네가 어떤 놈이건 내가 알 바 아니다."
이반은 도끼를 번쩍 치켜들어 도끼 들으로 내리쳐 죽이려고 했다. 작은 도비
는 정신없이 싹싹 빌어 대며 말했다.
"제발 치지만 마십쇼.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거나 해 드릴테니." "그래
도대체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길래?" "나는 당신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만큼이
돈을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고 이반은 말했다.
"어디 한번 만들어 보렴!" 작은 도깨비는 이반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이 떡갈나무 잎을 들고 두 손으로 비비세요. 그러면 금화가 땅바닥에 떨어테
니." 이반은 나뭇잎을 들고 비벼 보았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누런 금화가
우수수 ㅆ아졌다. "거 좋겠는걸. 어린애들이 가지고 놀기엔."
"자 그럼 놔주세요." 작은 도깨비는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지!" 이반은 지
렛대를 들고 작은 도깨비를 빼 내 주었다. 그리고 "잘 가거라." 하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작은 도깨비는 물 속에 돌을 던지기라도한
것처럼 금방 땅 속으로 기어 들어가 버리고 그저 구멍만이 하나 퀭하니 남았을
뿐이었다.
6
형제들은 새로 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이반은 들일을 마치고는 맥주를 가
두 형제들 잔치에 초대했다. 그러나 형들은 이반의 초대에 응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들은 보통 농부들하고는 신분이 다른 몸이다." 하고 그들은 말하는 것이었
다. 이반은 농부며 아낙네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또 자기도 마셨다. 그리고 취기
가 올라오자 춤놀이가 벌어진 한길로 걸어나갔다. 이반은 춤놀이 판으로 다가
가 아낙네들에게 자기를 칭찬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면 나는 여러분들에게 아
직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한 것을 줄테니까요." 말을 들은 아낙네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그를 칭찬해댔다. 그러고 나서 "자 그럼 주어요." 하고 말했다. "금방
가져올게." 하고 이반은 말하고 나서 씨앗 상자를 안고 숲 속으로 뛰어 갔다.아
낙네들은 "어머, 저 바보
좀 보게!" 하고 비웃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그냥 잊어 버리고 있었다. 런
데 보니까 이반이 되돌아
달려오는데 무엇인가를 가득 채워 넣은 씨앗 상자를 들고 있었다.
"어때 나누어 줄까?"
"어디, 나누어 봐요."
이반은 금화를 한 주먹 쥐어 아낙네들에게 던졌다. 그러자 갑자기 소란이 일
어났다. 농부들과 아낙네들은 서로
금화를 잡아채려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떤 한 노파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이반은 껄껄 웃어 댔다.
"그렇지만 서로들 밀치지는 말아요. 여러분들에게 더 줄테니까."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흩뿌리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잇달아 떼지어
왔다. 이반은 상자에 있는 대로 전부
뿌려 버렸다. 그런데도 군중응ㄴ 더 달라고 아우성쳤다. 그래서 이반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다 털어 버렸어요. 다음 번에 또 주죠. 자 이젠 춤을 추어 볼까, 좋은 노
래를 불러 봐요."
아낙네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재미없는데, 당신네 노래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럼 어떤 노래가 좋죠?" 아낙네들이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금방 당신들에게 보여 드리죠."
그러고는 헛간으로 가 보릿단을 한 움큼 뽑아 내어 낟알을 떨어내고는 그것을
반듯이 세워 놓더니 툭 치며
말했다.
"자, 내 종이 이르는 말이노라. 다발로 있을 게 아니라 보릿짚의 수만큼 군사
가 되어라." 그러자 모릿단을
산산히 흩어져 군사가 되더니 북과 나팔을 쿵작거리기 시작했다. 이반은 군사
들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이르고
그들과 함께 한길로 나갔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군사들은 잠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윽고 이반은
아무도 뒤따라와서는 안 된다고
일러놓고 그들을 도로 헛간으로 데리고 가 다시 본디대로 다발을 지어 밑자리
가 되어 있는 마른 풀 더미 위에
내던졌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마구간에 들어가서 자 버렸다.
7
이튿날 아침 맏형인 무관 세묜이 소문을 듣고 헐레벌떡 이반에게 달려왔다.
"너 나한테 죄다 말하렴. 도대체 너는 그 군사를 어디서 데려왔다 어디로 데려
갔지?" "그걸 알아 뭘 하시려구요?" "뭘 하려느냐구? 군사만 있으면 뭐나 다
할 수 있단 말이야. 나라를 얻을 수도있어." 이반은 깜짝 놀랐다.
"그럼 왜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죠? 얼마든지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 드리겠니
다. 마침 누이와 둘이서 데리서 보릿단을 잔뜩 장만해 놓았으니까."
이반은 형을 헛간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군사를
만들어 드릴테니 말씀이에요, 그 대신 꼭 데리고 가셔야 해요. 그렇지 않고 만일
먹여 살려야 하는 날엔 그야말로 하루에 온 동네를 몽땅 털어 될테니까요." 무
관인 세묜이 군사를 데리고 가겠노라고 약속하여 이반은 군사를 만들어내기 시
작다. 그는 보릿단으로 타작 마당을 내리쳤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1개 중대의
군사가 되었따. 또 한번 내리치면 1개 중대의 군사가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온
들판을 가득 메울 만큼의 무수한 군사를 만들어 냈다. "어떻습니까, 이제 그만
됐어요?" "오오, 됐어, 고맙다, 이반." 세묜은 크게 기뻐하여 이렇게 말했다. "
뭘요. 더 필요하시거든 언제든지 오세요. 얼마든지 더 만들어 드릴테니, 요새는
보릿짚이 잔뜩 있으니까요." 무관인 세묜은 떠나자 이번에는 배불뚝이 타라스가
터덜터덜 찾아왔다. 그도 또한 어제의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우에게
이렇게 간청하기 시작했다. "숨기지 말고 말해 보렴. 그래 너는 어디서 금화를
얻었지? 만일 나한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돈이 있다면 나는 그 돈으로 온 세
계의 돈을 긁어모아 불텐데 말이야." 이반은 깜짝 놀라 말했다.
"그래요? 아, 그렇다면 진작 말씀하실 일이지. 형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
드리죠."
형은 크게 기뻐했다. "나는 씨앗 상자로 세 상자만 있으면 된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숲 속으로 갑시다. 한데 말을 챙겨가지고 가셔야죠. 날오
기가 힘들테니까." 둘이는 숲 속으로 말을 타고 갔다. 그리하여 이반은 떡갈나
무에서 잎을 훑어 비비기 시작했다. 금화가 쏟아져 산더미처럼 쌓였다.
"당자은 이만큼 있으면 충분하다. 정말 고맙다, 이반." "뭘요, 더 필요하시거
든 언제든지 오세요, 더 만들어 드릴테니까. 얼마든지 만들어 드리겠어요. 잎귀
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말이에요."
배불뚝이 타라스는 달구지에다 금화를 가득 싣고 장사를 하러 떠났다. 이리
하여 두 형은 제작긱 떠났다. 세묜은 빼앗겼던 따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시작고,
타라스ㅜ는 장사를 시작했다. 무관인 세묜은 두 나라를 정복하고 배불뚝이 타라
스는 많은 돈을 벌었다. 어느 날 세묜과 타라스는 한자리에서 만나 서로 숨김
없는 말을 주고받게 되었다. 세묜은 군대를 얻은 정위에 대해서, 그래서 또 타라
스는 돈을 모으게된 경위에 대해서 말했다. 무관인 세묜은 아우에게 "나는 말이
야, 나라를 정복해 잘 지내고 있기는 한데 그저 돈만 넉넉치 못 할 뿐이야. 군대
를 먹여 살려야 할 돈이 말이야." 하고 말했다. 그러자 타라스가 말했다.
"그런데 나는 말이에요, 돈은 어지간히 모았는데 그저 한 가지 그것을 지키게
할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게
골칫거리예요." 그 때 무관인 세묜이 말했다. "이반에게 찾아가 보자꾸나. 나
는 그 녀석에게 군대를 더 만들게 하여 네 돈을 지키게 할 테니까, 너는 그 군
대를 먹여 살릴 만큼의 돈을 만들어 주도록 그 녀석에게 말하란 말이야." 이리
하여 둘은 이반한테로 찾아왔다. 이반의 집에 오자 세묜은 이렇게 말문을 었다.
"이봐, 이반, 내겐 아무래도 군사가 좀 모자라. 그러니까 군사를 점 더 만들어다
오. 비록 한두어 짚단만이라도 좋으니 말이다."
이반은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안 돼요." 하고 그는 말했다.
"형님에게는 이제 더 이상 군사를 만들어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니, 이반,
왜 그러지? 그 전에 너는 약속했었잖아." "그야 약속하기는 했었죠. 그러나 이
제 더는 만들지 않겠습니다." "아니, 왜 만들지 않겠다는 거냐, 이 바보 녀석
아!" "왜냐 하면 형님의 군사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에요. 내가 길가의 밭을
갈고 있다가 본 것인데, 한 아낙네가 그 길로 널을 지고 가면서 어어 통곡하고
있잖겠어요. 그래서 나는 물어 봤죠. '누가 돌아가셨어요?'하고. 그러자 그 아낙
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묜의 군사가 전쟁에서 남편을 죽였오.'하
고 말이에요. 군사란 건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사람을 죽였다잖아요. 그래서 나는 제
더는 군사를 만들지 않기로 했어요." 이렇게 우겨 대고 이반은 이제 더는 군사
를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았다. 한편 배불뚝이 타라스도 이반에게 금화를 더
만들어 달라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이반은 고개를 두리두리 내저었다.
"한데 어째서 그러지? 너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었잖아?" "그야 약속은
했었죠. 하지만 이제 더는 만들지 않겠어요." "어째서 만들지 않겠다는 거냐, 이
바보 녀석!" "어째서가 아니라 형님의 금화가 미하일로브나에게서 암소를 빼앗
아 갔기 때문입죠." "어째서 빼앗겼다든?"
"그 얘기를 자세히 할까요? 미하일로브나한테 암소가 한 마리 있어서 어린들
이 우유를 마시고 있었대요. 1 그런데 이즈막에 그 어린애들이 나한테 찾아와
서 우유를 달라고 졸라 대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 어린애들한테 물어 봐죠.
'너희 집 암소는 어디 있니?'하고, 그랬더니 끌려가 버렸다는 거에요. '어떤놈이
끌고
갔는데?'했더니 '배불뚝이 타라스 네 마름이 찾아 와 엄마에게 금화를 세 닢
주니까 엄마가 그 사람에게 암소를
주어 버렸어요. 우리들은 이제 마실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하고 말하더군요.
나는 형님이 금화를 노리개로
삼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린애들한테서 암소를 빼앗아가 버렸어요.
나는 이제 형님에개는 금화 따윈
만들어 드리지 않겠습니다!" 바보 이반은 고집을 세워 더 이상 만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두 형제는 허탕을 친 채 떠났다. 두 형제는 귀로에 올랐다. 그리
고 가는 도중 어떠한 방법으로 그 곤경을 서로 도와 나갈 것인지에 대해서 의했
다. 세묜이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그러니까 네가 나에게 군대를 기를
돈을 주고 내가 너에게 군대를 절반 준다. 네 돈을 지키도록 말이지." 타라스는
동의했다. 두 형제는 가지고 있는 것을 서로 나누어 갖고 둘이 다 임이
되었으며 둘이 다 부자가 되었다.
8
그러나 이반은 내내 집에서 살고 있었고, 부모를 봉양하면서 벙어리인 누이와
함꼐 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반 네 집의 늙은 개가 병이나고 옴이 생겨 죽게
되었다. 이반은 그것을 가엾게
여기고 벙어리인 누이에게서 빵을 얻어 모자 속에 넣자 개에게로 가지고 가서
던져 주었다. 그런데 모자에
구멍이 뚫러 있어 빵과 함께 작은 도깨비가 준 조그만 뿌리가 한 가지 굴러어
졌다. 늙은 개는 빵과 함께 그것을 주워 먹어 버렸는데 그 뿌리를 먹은 개는 갑
자기 생기가 올라 뛰어오르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하며, 짖기도 하고 꼬리를
흔들기도 하게 됐다. 병이 말끔히 나은 것이었다. 그의 부모는 그것을 보고 깜
짝 놀랐다. "너는 뭣으로 개를 낫게 했지?"
그러자 이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떤 병이든 낫는 풀뿌리를 가지고 있었
는데 그 하나를 이 개가 먹은 거예요." 마침 이 무렵, 임금의 딸인 공주가 병을
앓고 있었다. 임금은 방방곡의 도시와 촌락에 방을 써 붙이게 하여 누구라도
좋으니 공주의 병을 낫게 해 준 자에게는 크게 포상을 할 것이며, 만일 그가 총
각이라면 공주를 아내로 맞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반네 마을에도 몰론이
방이 나붙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반을 불러 놓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도 임금님의 방문이 어떤 것이라는 걸 들었겠지. 너는 만병통치의 풀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얘긴데, 한번 가서
공주님의 병을 낫게 해 보렴. 그러면 너는 임금님의 사위가 될 게 아니야." "
알겠습니다." 하고 이반은 말했다. 그리고 곧 떠날 채비를 했다. 부모님이 나들
이 옷으로 갈아 입혀 주었다. 이반은 마을로 나가 무슨 병이든 낫게 한다면서
요? 어디 내 손도 좀 낫게 해 주시구료. 이대로는 내 손으로 신발도 신을 수
없다오." 하고 그 여자 거지가 말했다. "그렇게 해 주지." 하고 이반은 말했다.
그리고 풀뿌리를 꺼내어 여자 거지에게 주고 그는 그것을 삼키라고 말했다. 여
자 거지는 그것을 삼켰다. 그러자 갑자기 여자 거지의 병이 나아 그 자리에서손
을 내두르게 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반을 임금에게 데리고 가려고 나왔다가 이반이 한 가밖
에 남지 않은 풀뿌리를 여자 거지에게 주어 버려 공주를 낫게 할 방도가 없게
되었음을 알고 크게 꾸짖었다. "그래, 가엾은 공주님께 드릴 풀뿌리를 거지에게
몽땅 줘버리다니!" 그러자 이반은 곧 공주도 가엾어졌다. 그는 말에게 수레를
끌게 하고는 부랴부랴 짚을 쌓고 그 위에 앉아 떠나려고 했다.
"그래 도대체 너는 어디로 가려는 거냐, 이 바보 녀석아?" "공주님을 낫게 해
드릴 게 아무것도 없잖아." "뭐, 그렇지도 않아요." 이렇게 말하고 그는 말을 몰
았다. 이반이 궁궐에 닿아 막 궐문에 내려서자마자 어느 틈에 공주의 병은 씻
은 듯 나아 버렸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신하에게 이반을 자기에게로 부러들
이라고 이르고 그에게 훌륭한 옷을 차려 입혔다. 그리고 이반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그대는 집의 부마로다." "황공합니다." 하고 이반은 말했다.
그리하여 이반은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몇 년 후 임금이 죽자, 이반이 위
에 오르게 되었다. 이라하여 세 형제가 모두 임금이 되었다.
9
세 형제는 저마다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맏형인 무관 세묜은 빈틈없는 통치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짚으로 만든 군사를
바탕삼아 진짜 군사를 모집했다.
그는 온 나라에다 열 호마다 한 명씩의 군사를 내되 그 군사는 키가 크고 갗
이 희며, 얼굴이 깨끗해야 한다고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런 군사를 잔뜩 모집
하여 무두 훈련시켜 놓았다. 그리고 그에게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이내 군사를
풀어 그의 뜻대로 어떠한 짓도 감행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람이 그
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의 생활은 자기 마음대로였다.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 그의 눈에 띄는 것은어김없이 그의 것이 되었다. 군대만 풀어 놓으면 구 군
대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건 ㅃ앗아 날오기도 하고 데려오도 하는 것
이었다.
배불뚝이 타라스의 생활도 호화로웠다. 그는 이반에게서 얻은 돈을 낭비하지
않고 그것을 밑천 삼아 거액의 돈을 모았다. 그는 제 나라에서 그럴싸한 제도
를 펴 놓았다. 그는 제 돈을 둔궤 에 딱 집어 넣어 두고 백성에게서 돈을 우려
냈다. 그는 인두새, 통행세, 거마세, 짚신세, 감발세, 옷끈세로 돈을 짜냈다. 그리
하여 그에게는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없었다. 누구나가 돈이 없
었기 때문에 모두들 돈이 아쉬워 무엇이나 그에게 날라왔고 일을 하려고 몰려
들었다. 바보 이반의 생활도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았다. 장인의 장례를 치르기가
바쁘게 그는 임금의 의대를 다 벗어 던지고 그것을 왕비의 옷장에 집어 놓게 했
다. 그리고 자기는 다시 삼베 속옷에 잡방이를 걸친데다 짚신을신고 일에 매달
렸다. "나는 도무지 답답해 못 견디겠어. 배만 자꾸 커지는 데다 먹을 수도 잠
을 잘 수도 없으니 말이야." 하고 그가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부모와 벙어리 누
이를 불러와 또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
하지만 당신은 임금님이 아니십니까!" "임금도 사람이야. 임금도 먹어야 하니
까." 그는 대답했다. 대신이 들어와 "녹봉을 치를 국고금이 없사옵니다." 하고
진언했다. "뭐, 일없어. 없거든 치르지 않으면 되지."
"그럼 그들은 근무를 하지 않게 될 것이옵니다." "그럼 그렇게 하라지. 내버
려 둬. 근무하지 않아도 좋아. 오히려 자유롭게 일들을 하게 될테니까. 모두들
거름이나 내게 해. 그들은 거름을 많이 만들어 놓았을 테니까." 사람들이 이반게
로 재판을 받으려고 왔다. 한 사람이 "저 자가 소인의 돈을 훔쳤사옵니다." 하
고 말하자 이반은, "아, 좋아, 좋아! 그러니까 저 자는 돈이 필요했다 그 말이
지?" 하고 말했다. "모두들 임금님을 바보라 말하고 있다 하옵니다."
"하하! 괜찮아." 하고 그는 말했다. 이반의 아내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러나 그녀도 또한 어리숙했다. "제가 어찌 감히 남편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실은 바늘 가는 데로 따라 가야 하는 것이어늘." 이렇게 말하고 그녀도 왕비의
옷을 벗어 옷장 속에 집어 넣고 벙어리 처녀에게로 농삿일을 배우러 갔다. 그
리하여 일을 익히고 나서 남편을 거들기 시작했다. 똑똑한 사람은 모두 이반의
나라를 떠나 버리고 남은 것은 그저 바보들뿐이었다. 돈이라는 것은 어느 구에
게도 없었다. 모두 일을 하여 자기 스스로 살아감과 동시에 착한 사람들을 도
와 주면서 아 나갔다.
10
큰 도깨비는 작은 도깨비들이 세 형제를 어떻게 파멸시켰는지 하는 것에 대한
소식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래서 사정을 살펴볼 양으로 자기가 직접 가
여기저기 찾아 돌아다녔지만 찾아낸 것이라곤 그저 세 구멍뿐이었다.
'아무래도 실패한 모양이군. 그렇다면 내가 직접 손을 쓸 수밖에 도리가 지.'
그는 형제들을 찾으러 갔으나 그들은 이미 살던 곳에는 없었다. 그는 형제을
가가 다른 나라에서 발견했다. 셋이 다 건재하고 있는데다 나라를 다스리고 있
었다. 이것을 본 그는 혼잣말을 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완전무장을 하고 나어
야 겠군." 그는 먼저 무관인 세묜의 나라로 갔다. 그리고 제 모습을 감추고 장
수로 둔갑하여 세묜 왕을 찾아갔다. "듣자 온즉 세묜 임금니, 임금님께서ㅓ는
위대한 무인이신 듯하옵니다. 그러나 신도 그 일에 있어서느 확고히 익히고 있
는 바가 있사와 전하를 섬기고자 하옵니다만."하고 그는 말했다. 세묜 왕은 그
에게 여러 가지로 물어 보고 나서 그가 현명한 사람임을 알았으므로 기용하로
했다. "우선 첫째로 더 많은 군사를 모아야 할 줄로 아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나라에는 집안 일을 일사는 백성이 너무 많아지게 되옵니다. 젊은 사람들은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징집하셔야 하옵니다. 돌째로 신식 소총과 대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옵니다. 신이 흡사 콩이라도 흩뿌리듯이 단번에 백 발의 알이 나가
는 소총을 만들어 올리겠사옵니다. 그리고 또 대포도 어떠한 것이든 불로 태워
버리게 될 무서운 성능의 것을 만들어 올리겠사옵니다. 이것은 사람이고 말이고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태워 없애 버리고 말 것이옵니다." 세묜 왕은 새로 기용
한 장수의 진언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젊은이는 모조리 군대에징집할 것을 멍
령하고 또 새로운 공장을 지어 신식 소총과 대포를 만들어 내자, 이내 이웃 나
라의 임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리하여 싸움이 벌어지자마자 세묜 왕은 자기의
군사를에게 적군에게 총포를 마구 퍼부으라고 명령하여 단숨에 쳐부수고 그 절
반을 불태워 버렸다. 이웃 나라의 임금은 질겁을 하여 곧 항복하고 자기 나라를
바다.
세묜 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번에는 인디아도 정복하고 말아야지." 하고 말다.
그런데 인디아 왕은 세묜 왕의 소문을 듣고 그의 전략을 이미 알고 그것에 제
생각을 덧붙였다. 인디아 왕은 젊은이들을 군대에 징집할 뿐만 아니라 독신의
여자들까지도 모조리 군사로 뽑았다. 그리하여 그의 군대는 세묜의 그것다 더
많아졌다. 게다가 또 그는 소총이며 대포 만드는 법을 세묜 왕에게서 배운데가
머리 위에서 포탄을 던지는 것까지 생각해 냈다. 세묜 왕은 드디어 인디아 왕의
나라로 군사들을 이끌로 쳐들오 왔따. 그러나 꾀가 많은 인디아 왕은이미 여자
군사들을 적군들이 들어오는 양 길의 산봉우리에 배치시켜 머리 위에다 포을
일제히 던지도록 했다. 여자 군사들은 공중에서 마치 진딧물 위에다 붕사를 뿌
리듯 세묜의 군대에 포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세묜의 군대는 혼비백산하여 여기
저기로 어지럽게 달아나 세묜 왕 혼자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인디아 왕은 세묜
의 나라를 몰수하고 세묜은 발가는 대로 정처없이 도망쳐 다녔다. 큰 도깨비는
결국 세묜을 망쳐 놓고 이번에는 타라스 왕에게로 갔다. 그는 장사꾼으로둔갑하
여 타라스의 나라에 자리를 잡아 선심을 베풀기도 하고 돈을 마구 ㅆ기도 했
다. 이 장사치는 온갖물건에 많은 값의 돈을 치러 주었으므로 백성은 모두 돈을
벌기 위해 이 장사치에게 몰려들었다. 이리하여백성의 호주머니가 아주 두둑해
졌으므로 체납금은 모두 말끔히 내게 되고 어떤 세금 이건 기한 안에딱딱 바치
게 되었다. 타라스 왕은 크게 기뻐했다. 그 장사치는 참으로 고맙구나 하고 그
는 생각했다. 그에게는 자꾸자꾸 더 많은 돈이 생겼고 살기가 더욱더 나아져
갔다. 그리하여 타라스 왕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자기으 새 궁정을 기
시작했다. 재목이나 돌을 나르기 위해 일을 하러 나오라고 백성들에게 영을내
린 뒤, 모든 일에 비싼 품삯을 매겼다. 타라스 왕은 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돈을
노리고 백성들이 자기에게 일을 하려고 몰려오라니 생각했다. 그런데 재목이며
돌은 모두 장사치에게로 실려 가고 있는데다 일꾼도 모두 그리로 몰려가고있는
것이 아닌가.
타라스 왕은 품삯을 올렸다. 그러나 장사치는 더 많은 돈을 내던졌다. 타라스
왕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장사치는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계속 장사치는 임금의 품삯을
누르고 매겼다. 궁전은 착공된채 좀처럼 준공되지 않고 있었다. 타라스 왕은 정
원을 만들려고 계획했다. 가을이닥쳤으므로 타라스 왕은 정원을 만들어 오라고
백성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는 사람은 없고, 모두장사치네 못을 파러
가 버렸다. 겨울이 닥쳐 신하를 보냈더니, 신하는 돌아와 이렇게 말하였다. "그
장사치가 모조리 사 들였기 때문에 검정 담비는 없사옵니다. 그자는 한결 비싼
값을 주었고, 그 가죽으로는 방석까지 만들었다 하옵니다." 타라스 왕은 종마를
사 들여야 했다. 그래서 그것을 사러 내보냈더니 모두 돌아와서 전하는 말에 의
하면 좋은 종마는 모두 그 장사치의 손에 들어가 장치의 못을 채울 물을 나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임금에게는 돈이 너무 남아 돌아 그것을 어디에다 두
어야 할지 모를정도였지만, 생활은 차츰 나빠졌다. 임금도 이제는 온갖 계획 세
우던 것을 그만두고 어떻게든지 살아나갈 것 밖에 생각하지 않게 되었으나 이
윽고 그것 마저도 어떻게든지 살아 나갈 것 밖에 생각하지 않게 되었으나 이윽
고 그것마저도 위태로워졌다. 숙수도 여자도 사제들도 모두 그에게서 장사치쪽
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벌써 료품까지 모자라기 시작했다. 시장으로 물건을
사러가 보아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장사치가 모두 몰아서 사 들여 버렸기
때문이며, 왕은 다만 조세로 돈을 받아들일 따름이었다. 타라스 왕은 잔뜩 화가
나 장사치를 국외로 내쫓았다. 그러나 장사치는 국경에 도사리고 앉아 역시 똑
같은 짓을 했다. 며칠씩 먹지고 못할 적이 있는가하면 장사치는 임금에게서 왕
비까지도 사려 한다는 풍문지 들려 왔다. 타라스 왕은 이제 주눅이 들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몸들 바를 모르게 되었다. 어느 날 형 세묜이 그에게로 찾아와 이렇
게 말했다.
"좀 도와 줘. 나는 인디아 왕에게 패배했어." 그러나 배불뚝이 타라스 자신도
지금은 뱃가죽이 등뼈까지 붙어 있는 지경이었다. "나도 벌써 이틀 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단 말이야."
11
큰 도깨비는 두 형제를 거덜나게 하고 이반에게로 갔다. 큰 도깨비는 장수로
둔갑하여 이반에게로 찾아가 군대를 만들 것을 구에게 권했다. "임금께서 군대
가 없어 지내신다는 것은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 아닌가 하옵니다. 어명을 내시
기만 한다면 신은 임금의 백성 가운데서 군사를 모아 훌륭한 군대를 만들어 올
리겠사옵니다." 이반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 "그것도 좋은 말이오. 그럼 어디
만들어 보오. 그리고 그들이 노래를 잘 무르도록 가르치오. 나는 그것을 좋아하
ㄴ까." 하고 말했다. 큰 도깨비는 이반의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지원병을 모집하
기 시작했다. 군사를 지원하는 자는 누구나 보드카 한병과 빨간 보자를 타게 될
거라고 설명했다. 바보들은 코 웃음을 쳤다. "술 따윈 우리들에겐 얼마든지 있
단 말이야. 우리 손으로 직접 빚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모자도 아낙들이
어떤 것이건 갖고 싶은 걸 만들어 준단말이야. 얼룩덜룩한 것이나 술이 예쁘게
달린 것까지도." 이리하여 어느 누구 한 사람 군대를 지원하는 자라곤 없었다.
큰 도깨비는 이반에게 찾아왔다. "당신 나라의 바보들은 자진해서 군사가 되려
고는 하지 않사옵니다. 그리하온즉 그들을 권력으러써 몰아 대야 할 줄로 아뢰
오." "응, 그것도 좋겠는 걸. 그럼 권력으로써 몰아 대 보오."
큰 도깨비는 '백성들은 모두 군사가 되어야 하며 만일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이반 왕께서 참형을 내릴 것이니라.' 하고 포고했다. 바보들은 장수에게로 찾아
과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우리들이 만일 군사가 되지 않으면 임금님께서 형을
내리신다고 말씀하고계시는데 병사가 되면 어떻게 된다는 건 말씀하고 있지 않
습니다. 군대에 나가면 목숨을 잃는다는말이 있던데." "물론, 죽을 수도 지." 그
말을 듣고 바보들은 옹고집이 되었다.
"그럼 우리들은 나가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집에서 죽게 해 주시는 게 더 낫뭡
니까. 어차피 죽어야 하는 거라면." "어휴, 골치야! 이 바보들아, 군사가 됐다고
해서 꼭 죽는 것은 아니야. 그렇지만 군사가 되지 않으면 그건 영락없이 반 왕
에게 처형당할 것이다." 바보들은 곰곰이 생각하닥 임금인 바보 이반에게 어 보
러 갔다. "장수께서 나오셔서 모두 군사가 되라고 소신들에게 명령하고 계시옵
니다. 대에 나가면 죽임을 당할는지 당하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나가지 않으면수
신들에게 꼭 참형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정말이옵니까, 그건?" 이반은 껄껄 웃었다. "그래, 어떻게 짐이 혼자서 그대들
을 모두 참형할 수 있으리오? 나는 사람을 때리는 일도 안 해요. 짐 자신도 뭐
가 뭔지 모르겠서." "그러하오시면 소신들은 군대에 가지 않겠사옵니다."
"맘대로 해요. 나가지 않아도 좋아." 바보들은 장수에게로 가서 군사가 되기
를 거절했다. 큰 도ㄲ비는 이 일이 잘 되어 가지 않자 타라칸 왕에게 자서 알
랑알랑 비위를 맞추면서 부추겼다. "싸움을 걸어서 한번 이반 왕의 나라를 치십
시다. 그 나라에는 비록 돈은 없을지라도 곡식이며 가축이며 그 밖의 온갖 것
이 풍부히 있으니까요." 타라칸 왕은 싸움을 걸기로 했다. 먼저 대군을 모으고
총이며 대포를 갖추자 국경으로 나가 이반의 나라에 침입하기 시작했다. 사람들
은 이반에게로 달려와 이렇게 아뢰었다. "타라칸 왕이 우리들에게 싸움을 걸어
왔사옵니다." "뭐 어떨라구. 싸움을 걸어 오겠으면 걸어 오라지."
타라칸 왕은 국경을 넘자 척후병을 보내어 이반 군대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그는 여기저기 찾아다녔지만 군대 같은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서고 나타날는지도 모른다고생각하며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군대에 대해서
는 뜬소문도 들을 수 없었다. 누구와 싸울래야 싸울 상대가 었다. 타라칸 왕은군
사를 보내어 마을들을 점령하게 했다. 군사들이 한 마을에 들이닥쳤다. 그러자
남녀 바보들이 뛰어나와 군사들을 바라보더니 미심쩍어하며 놀란 눈치다. 군사
들은 바보들에게서 곡식이며 가축을 약탈했다. 바보들은 무엇이건 선선히 내주
었고 어느 누구도 자기를 지키려 하기는커녕 여기 와서 살라고 권유하는것이었
다. 군사들은 딴 마을로 가 보았으나 거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ㄴ사들은 그
날도 그 이튿날도 여기저기 진종일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녀 보았지만 이르는
곳마다 어디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백성들은 있는대로 탈탈 털다시피 여 내주었
고, 어느 한 사람 자기를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거 보세요. 당신네 나라가 살기가 어려우시거든 모두 이리로 이사오시구려."
군사들은 사방 팔방으로 헤매고 돌아다니면서 알아보았으나 아무데도 구ㅜ대 같
은 건 없었고 백성은 모두 일을 하면서 자기 스스로 살아가고 한편으로는 서로
도와 주고 있었는데, 꼭 제 한 몸만을 지키려고 버둥대기는커녕 오히려 여기 와
서 살라고 권유할 따름이었다. 군사들은 지루해졌다. 그리하여 타라칸 왕에게로
돌아갔다. "소신들은 전쟁을 할 수가 없사옵니다. 소신들을 다른 나라로 보내주
시옵소서. 전쟁이 있으면 좀 좋겠사옵니까만 이건 무엇이옵니까. 흡사 나약한
사람을 참살하는 것 같아 이 나라에서는 이제 이 이상 더울 수 없사옵니다." 타
라칸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리하여 온 나라를 돌아다녀 마을 어질
러놓고 집과 곡식을 불사르며 가축을 죽여 버리라고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만
일 어명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누구나 모두 가차없이 처벌하리라." 군사
들은 깜짝 놀라 임금의 명령대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이며 곡식이며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바보들은 모두 자기를 지키려고 하
지 않고 그저 울 뿐이었다. "어쩌자고 당신들은 우리를 괴롭히는 거지? 너희들
은 어째서 우리 집을 불태우는 거냐? 필요하거든 차라리 가져가는 게 더 나을
것 아니냐?" 군사들은 어쩐지 침울해졌다. 그래서 그 이상 돌아다니기를 그만
두었다. 이윽고 군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12
이리하여 큰 도깨비는 떠나 버렸다. 군대의 힘으론 이반을 곯리지 못했던 것
이다. 큰 도깨비는 다시 말쑥한 신사로 둔갑하여 이반의 나라로 살러 왔다. 배불
뚝이 타라스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돈으로 곯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훌륭한 지식을 전달함으로써 당신네에게 착한 일을 해 보자고 합니다.나
는 먼저 당신네 나라에서 집을 짓고 그리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거 좋은 일이오. 그러시다면 여기서 사시죠." 한 벼슬아치가 신사에게 숙사
를 빌려 주었다. 이윽고 이 신사는 잠자리에 들었다. 하룻밤을 지내고 난 이튿날
아침, 그는 금화가 들어 있는 커다란 자루와 종잇조각을 가지고 광장으로 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네는 모두 마치 돼지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네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자 합니다. 먼저 이 도면처
럼 집을 지어 주시오. 당신들은 일을 하고, 지시는 내가 하겠습니다. 그리고그
답례로 이 금화를 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금화를 보였다. 바보들은 깜
짝 놀랐다. 그것은 그들의 관습에는 돈이라는 것이 없고 그 대신 서로 물건과
물건을 바꾸기도 하고 품앗이를 하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금화를보고
놀랐다. "거, 노리갯감으로 좋은데." 하고 그들은 말했다. 큰 도깨비는 타라스의
나라엣 했듯이 싯누런 금화를 마구뿌려 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금화
와 물건을 바꾸기도 하고 온갖 일을 하여 금화르 품삯ㅇ로 얻으려고 에게 드나
들기 시작했다. 큰 도깨비는 속으로 고소해 하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거 이쯤 되고 보면 일이 순조로이 되어 나가는 것이렷다! 이번에야 말로그
바보 녀석을 타라스처럼 엉망진창이 되게 해 주리라. 그 녀석을 다시는 일어나
지 못하게 혼구멍을 내 주어야지." 그런데 바보들은 금화를 손에 넣자마자 목걸
이 용으로 아낙네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처자들의 댕기에 달아 주기도 했다.
이제는 어린애들까지도 한길에서 금롸를 노리갯감으로 가지고 놀게 되다.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금화가 생기게 되자 이제는 더 얻으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말쑥한 신사쪽은 대궐 같은 집이 아직 절반도 돼 있지 않은데다 곡식이
며 가축도 아직 한 해치도 비축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신사는 이게 알렸다.
나한테로 일들을 하러 오라, 곡식이며 가축을 가지고 오라, 어떤 물건이 됐건 어
떤 일이 됐건 그 값으로 많은 금화를 주겠다, 하고.
그러나 어느 누구 한 사람 일하러 오는 자도 없는가 하면, 무엇 하나 들고 는
사람도없었다. 이따금 사내애며 계집애가 뛰어와서 달걀과 금화를 바꾸거나, 혹
은 금화를 받고 물건을 날라다 주는 정도가 고작일 뿐 달리 찾아오는 사람이라
곤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말쑥한 신사에게는 차츰 먹을 것이 달리게 되다. 시장
기가 들어 무엇이나 먹을 것을 사 보려고 마을 안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그는
어느 한 집에 쑥 들어가 암탉을 사려고 금화를 내밀었다. 그랬더니 안주인이 그
것을 받지 않으며, "우리집엔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어린애들이 없어서 아무도
가지고 놀 사람이 업습죠. 게다가 또 나도 심심풀이로 세 닢 가져다 습죠." 하고
말했다. 큰 도깨비는 다음엔 빵을 사려고 어는 농사꾼 집에 들렀다. 그러나 이
농사꾼도 돈을 받지 않으며, "우리집에선 필요없어요. 하지만 배고 고라서 온
거라면 좀 기다리시구려. 금방 여편네보고 빵을 조금 올리라고 이를 테니까."
하고 말했다.
도깨비는 침을 뱉고, 냅다 농사꾼 집에서 줄행랑을 놓았다. 배가 고프고 어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로서는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칼보다도 더 무서웠던 것이
다. 이래서 빵도 얻지 못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모두 금화를 충분히 손에 넣었
떤 것이다. 그리하여 큰 도깨비가 어디를 가나 어느 누구 한 삶 돈을 보고는
어떤한 것도 주려고 하지 않고 모두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무엇인가 딴
것을 가지고 오거나, 일을 하러 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깡통을 들고 동냥을하러
오거나 하구려." 그러나 도깨비는 돈밖에는 아무것도 가진것이라곤 없는데다 일
을 하기는 싫었고 그렇다고 깡통을 들고서 동냥을 할수도 없었다. 큰 도깨비는
잔뜩 화가 났다. "어떻게 된 거야. 당신네는 금화가 더 필요할텐데 말이야. 언제
당신네들에게 돈을 주어야 하나? 돈만 가지면 무엇이든지 사고 어떤 일꾼이든지
들여 놓을텐데 말이야." 그러나 바보들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아
니죠. 그런 건 필요 없습죠. 여기선 기불이라든가 세금이라든가 하는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까짓 돈 따위는 가져도 쓸 데가 없어요." 큰 도깨비는
저녁도 먹지 못한채 잠자리에 들었다.
이 일이 바보 이반의 귀에 들어갔다. 백성들이 그에게로 찾아와 이렇게 물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소신들은 어찌해야 하오리까? 소신들한테 말쑥한 샌님이나
타났사옵니다. 그는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술만을 좋아하고 깨끗한 옷이나 입기
좋아하면서 일은 숫제 하려고 들지도 않는가 하면 동냥을 하지도 않고그저 금
화라는 것만 내밀 뿐이니 말이옵니다. 전에 금화가 모이기 전에는 모두들그 님
에게 무엇이나 다주었었는데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주는 사람이 없사옵니다. 이
샌님을 어떻게 해야 하오리까? 굶어서 죽지나 않아야 할텐데 말이옵니다." 이반
은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먹여 살려야 하는니
라.11 목자처럼 집집마다 돌아다니게 하라." 할 수 없이 큰 도깨비는 이집 저집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이반의 궁궐로 차례가 돌아왔다. 큰 도깨
비가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 이반네서는 벙어리 여동생이 점심을 차리고 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주 게으름뱅이에게 속아 왔다. 게으름뱅이는 일을 하지도않
는 주제에 꼭 맨 먼저 밥을 먹으러 와서는 장만해 놓은 음식을 싹싹 먹어 치우
는 것이었다. 그 결과 벙어리 처녀는 사람의 손만 보고도 게으름뱅이를 곧잘분
간했다. 손에 못일 박힌 사람은 식탁에 앉히지만 못이 박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먹다 남은 찌꺼기를 주고 있었다. 큰 도깨비가 식탁 너머에 앉아 벙어리 처녀
는 얼른 그 손을 살짝 들여다 보았다. 못이 박히지 않았다. 손은 깨끗하고매끈
하며 손톱이 길게 자라나 있었다. 벙어리 처녀는 무엇이라고 외쳐 대더니 도ㄲ
비를 식탁에서 끌어 냈다. 그러자 이반의 아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무라지 마세요. 우리 시누이는 손에 못이 박히지 않은 사람을 식탁에 앉지
못 하게 하고 있으니까요. 자, 잠깐 기다리세요. 곧 다들 드실테니까, 그 다음에
남은 것을 잡수세요." '임금의 궁궐에서는 나에게 돼지에게 먹이는 것과 똑 은
것을 먹이러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자 큰 도깨비는 몹시 화가 났다. 그리하여
이반에게 말했다. "임금님 나라에는 모든 사람에게 손으로 일을 하도록 하는 어
리석은 법률이 있는 가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들이 어리석기 때문에 런
궁리가 생긴 것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영리한 사람은 무엇으로일을 하는지 아십
니까?" "바보인 우리가 어찌 그런 걸 다 알겠는가. 우리들은 무엇이나 대체로손
과 등으로 하고 있지.' "그것은 말하자면 여러분들이 바보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럼 소신이 어떻게 버리로 일을 하는 것인지 그 요령을 가르쳐 드릴까 하옵다.
그러면 여러분들도 아시게 될 것이옵니다. 손보다 머리로 일을 하는편이 이롭는
것을." 이반은 놀랐다. "음 그러고 보니 그게 바로 우리가 바보로 불리는 이유
렷다!" 그러자 큰 도깨비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켤코 수월하지는 않사니
다. 머리로 일을 한다는 것도. 소신의 손에 못이 박히지 않았다고 하여 지금만
해도 여러분들은 소신에게 먹을 것을 주시지 않사오나 그것은 말이옵니다, 그것
은 말하옵자면 런 것을 모르고 계시기 때문이옵니다. 즉 머리로 일을 하는 이
백 갑절이나 더 어렵다는 것을... 음, 때로는 머리가 빠개지는 수도 있으니까 이
옵니다." 이반은 생각에 잠겼다. "한데 어찌 그대는 그렇게 제 자신을 괴롭히는
거지? 머리가 빠개지는 수도 있다니 과연 수월한 일은 아니로다! 그보다는 차
라리 그대로 손과 등을 써서 더 수월하게 일을 하면 될 게 아닌가!" 그러자 깨
비는 말했다. "소신이 소신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바보인 여러분들을 불쌍히 기
기 때문이옵니다. 만일 소신이 소신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영히
바보가 되고 말 것이옵니다. 그러나 소신은 머리로 일을 해 왔사온 죽 이제부터
여러분들에게도 가르쳐 드릴까 하옵니다." "어디 가르쳐 주게. 손이 지쳤을 때
머리로 대신할 수 있다는 그 법을." 도깨비는 그것을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다.
이반은 온 나라에 방문을 붙였다. '훌륭한 신사가 나타나 여러분들에게 머리로
일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머리는 손보다는 훨씬 더 많은 벌이를 할 수 있다.모
두들 배우러 나오라.' 그리하여 광장에는 높은 망애가 세워지고 거기에 반듯한
사닥다리가 걸쳐지고그 위에 단이 마련되었다. 이반은 신사의 모습이 잘 보이
도록 그곳으로 안내했다. 신사는 단 위에 서서 지껄기 시작했다. 바보 백성은 구
경을 하러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바보들은 손을 쓰지 않고 머리로 일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신사가 실지로 보여 주려니 하고 생가가하고 있었던 것
다. 그러나 큰 도깨비는 단지 그저 말로만 떻게 하면 일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바보들에게 가르칠 뿐이었다. 바보들에게는 뭐가 뭔지 통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바라보고 있가 이윽고 저마다 제 일들을 하러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큰 도깨비는 진종일 단 위에 서 있었다. 다음 날도 내내 서 있었다. 그리하바
보들은 만일 저 사람이 손보다 머리로 훨씬 더 일을 잘 할 수 있다면 머리로 제
빵쭘은 실컷 만들려니, 생하고 단 위의 그에게 빵을 가져다 주어야겠다든가하는
생각은 숫제 하지도 않았다. 큰 도깨비는 그 이튿날도 단 위에 올라 서서 줄곧
지껄여 댔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와 잠시 바라보고는 이내 또이리저
리 흩어져 버렸다. 이반은 이따금 흩어져 갈 뿐이었다. "그래 어떤가, 그신사는
머리로 일을 하기 시작했나?" "아니옵니다. 아직은 여전히 지껄여 대고 기만 할
뿐이옵니다." 큰 도깨비는 또 진종일 단 위에 서 있었고 이제는 차츰 쇠약해지
기 시작하여비틀거리게 되었다. 한 차례 비틀거리다가 그만 기둥에 머리를 부딪
혔다. 한 바보가 이것을 보고 이반의아내에게 알리자 이반의 아내는들에 나가
있는 남편에게로 달려갔다. "자, 가시죠. 구경을 하시러. 신사가 드디어 머리로
일을 하기 시작한 모양이니다." "그게 정말이오?" 이렇게 말하고 반은 말을 돌
려 단쪽으로 갔다. 가까이오자 도ㄲ비는 굶주리다 못해 이제 완전히쇠약할 대로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비틀거리면서 머리를 기둥에 박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
반이 도착한 그 순간, 도깨비는 쿡 거꾸러지더니 우당탕 요란스런소리를 내면
서 사닥다리를 따라거꾸로 떨어져 내렸다. 한
층 한 층 발판을 세기라도 하듯이. 이반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하,
머리가 빠개지는 수도 있다고 언젠가 훌륭한 신사가 말하더니 아닌게아니라 말
인걸. 이건 정말 못이 문제가 아니다. 저렇게 일을 하다가는 머리가 남아 있지
못할 게 아닌가." 큰 도깨비가 사닥다리 밑으로 굴러 떨어지자 땅 속에 대가리
를 처박고 말았다. 신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볼 양으로 이반이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데 별안간 땅밑이 쫙 갈라지더니 큰 도깨비는 땅 사이로 어져
들어가고 나중에는 그저 구멍이 하나 남을 뿐이었다.
이반은 머리를 긁적긁적 긁었다. "아, 이런 빌어먹을 게 다 있나! 아니 또 그
놈이었단 말이야! 그놈들이 장난한게 틀림없으렷다. 별별 지독한 놈도 다 있구
나!" 이반은 오늘날까지 살아 있고 온갖 백성이 그의 나라로 몰려오고 있다. 두
형도 그에게 찾아와 그가 그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누군가가 찾아와서 "우리들
을 좀 먹여 살려 주시구려." 하고 말하면, "그렇게 하지. 와서 살게나. 여기엔
무엇이든지 있으니까." 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꼭 하나의 습관이 있
다. 손에 못이 박힌 자는 식탁에 앉게 되지만 못이 박히지 않은 자는 먹다 남은
찌꺼기를 먹어햐 하는 것이다.
대자
톨스토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가 전한복
음서 제5장 제38절).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
에게 보복하지 말라...."(제39절) "원수를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보상하
겠다"(로마서 제12장 제19절).
대자 1
어느 가난한 농가에 아들이 태어났다. 농부는 크게 기뻐하며 이웃집에 가서
아들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웃집에서는 가난한 농가 자식
의 대부나 대모가 되는 것이 싫었으므로 대번에 거절했다. 가난한 농부는 다름
집으로 가 보았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온 마을을 돌아다녔지만 이름을 지어 주
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농부는 이웃 마을을 행해 떠났다. 그
때 저쪽에서 한 나그네가 오고 있었다. 나그네는 그를 보더니 발길을 추고 인사
를 했다. "안녕하시오? 그래 어딜 그렇게 가오?"
"네, 사실은 하나님께서 보배를 주셨습죠. 어린아이란 젊어서는 줄거움이 돼주
고 나이 먹서는 의지가 되며 죽어서는 연미사를 올려 주게 되는데, 가난하다
보니까 우리 아들 놈에게는 아무도 이름을 지어 주려고 하지 않는군요. 그래서
이름지어 줄 분을 찾아가는 길입지요." 그러자 길손은 "내가 대부가 되면 떻겠
소?" 라고 했다.
농부는 크게 기뻐하며 길손에게 고맙다고 말한다음 "그러면 대모는 누구를 면
좋을까요?" 하고 물었다. "대모는 장사꾼의 딸에게 부탁해 보시오. 시내에 나가
면 광장에가게를 몇채 가진 돌집이 있을 거요. 그 가게 입구에서 상인을 불러
딸을 대모로 해 달라고 부탁하시오." 농부는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여보시오
손님, 나같이 천한 농부가 어떻게 부자 상인을 불러낼 수 있겠습니까? 나 같은
건 우습게 보고 딸을 보내주지 않을 겁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
요. 가서 부탁만 하면 될터이니, 내일 아침나절에 죄다 준비해 두시오. 내가 서
세례를 해 주리다." 가나한 농부는 집에 돌아갔다가 거리의 상인을 찾아갔다.안
마당으로 들어가 말을 메고 있는데 가게 주인이 나와서 물었다.
"무슨 볼 일이오?" "실은 다름이 아니오라 어르신,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아
들 하느를 점지해 주셨습니다. 아들이란 젊어서는 즐거움이 되고 나이 먹어는
의지가 되며 죽어서는 연미사를 올려 주게 되는 것입지요. 제발 댁의 따을 대모
로 삼게해 주십시오." "그래, 세례가 언제 하는데?" "음, 좋아, 돌아가 있어요.
내일 기도식이 올려지기 전에 딸을 보내 줄테니."이튿날 대부가 될 사람도,대보
가 될 사람도 모두 와서는 아이에게 세례를 주었다. 아이의 세례를 마치마자
대부는 가버려서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몰랐다. 그 뒤로는 아무도 그 사람을 보
지 못했다.
2
아이는 커감에 따라 어머니 아버지의 즐거움이 되었다. 힘이 세고 부지런하고
영리한데다 또 온순했다. 이윽고 아들은 열 살이 되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학
교에 보내자 다른 아이들이 5년 걸려 배우는 것을 이 아이는 1년만에 ㄲ쳤므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게 되었다. 부활절이 돌아왔다. 아들은 대모에게 가서, "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하고 축하 인사를하고 입을 맞춘 다음 집로
돌아와서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 제 대부님은 어디 계십니까? 찾아가서 부
활절 축하 인사를 드려야 할텐데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얘야, 네 대부님이 어디 계신지 우리도 모른단다. 우리도 늘 그분을 만나뵙고
싶지만 그분은 너에게 세례를 해
주고 가시더니 영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는구나. 소문도 들은 적이 고,
어디 계신지도 모르니, 살아 계신지 어쩐지도 모르는 형편이다."
아들은 부모에게 절하며 말했다. "아버니, 어머니, 제게 기회를 주세요, 대부
님을 찾아가게 말예요. 꼭 찾아서 부활절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부모는 아들
에게 허락해 주었다. 그리하여 아들은 자기의 대부를 찾아 길을 떠났다.
3
아들은 집을 나와 정처없이 걸었다. 반나절쯤 걸었을 때 어떤 길손을 만났다.
길손은 발을 멈추고 "젊은이 어딜 가나?" 하고 물었다. 아이가 말했다. "저는
제 대모님에게 가서 부활절 인사말씀을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고 서
부모님께 저의 대부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여쭈었는데 부모님께선, 저의 대부님
이 어디 계신 지 어쩐지조차 모른다는 대답이셨습니다. 저는 대부님을 만나 뵙
고 싶어서 이렇게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자 길손을 말했다.
"내가 네 대부란다." 사내아이는 기뻐하며 대부와 부활절의 입맞춤을 했다.
"대부님,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인가요? 지금 저와 함께 저희 집으로 가시요.
그렇지 않고 댁으로 돌아가신다면 저도 따라가겠어요."
이 말에 대부는 대답했다. "나는 지금 저희 집에 들를 틈이 없단다. 이쪽 저
쪽 마을에 볼 일이 많아서 말이다. 집으로는 내일 돌아갈 예정이니 그 때 우리
집으로 오려무나." "어떻게 찾아야 하나요, 대부님?"
"그래, 먼저 태양이 떠오르는 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라. 그러면 숲이 나온다.그
숲 한가운데 널찍한 푸른 들판이 눈에 띌 것이다. 그 풀밭에 앉아 다리를 쉬면
서 그 언저리의 풍경을 둘러 보아라. 그러고나서 숲을 나서면 그것에 뜰이 있고
그 뜰에는 금빛 지붕으로 된 집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내 집이란다. 그 문앞까지
오면 내가 마중 나가지."
대부는 이렇게 말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4
사내아이는 대부가 사르쳐 준 대로 갔다. 한참 걸어가니 숲이 나왔다.
숲 속의 넓은 들판에 닿아서 문득 바라보니 풀밭 한복판에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그 소나무에 새끼가 메어 있고 그 새끼에는 무게가 12관쯤은 되어
보이는 떡갈나무 통나무가 매달려 있었다. 통나무 밑에는 벌꿀이 든 통이 놓여
있었다. 도대체 이런 곳에다 왜 벌꿀을 놓아 두고 통나무를 매달아 놓았을까,하
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숲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앞을 보니 몇
마리의 곰이 이리로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암콤이 앞장서고 그 뒤에 2살 리 곰
이, 또 뒤에는 3마리의 새끼곰이 따라온다. 암콤은 코를 벌름거리도니 통으로 다
가가고 새끼곰들도 그 뒤를 따랐다. 암콤이 통에 코끝을 처박고 새끼들을 부르
자 새끼곰들도 달겨가서 통에 매달렸다. 그 때 통나무가 슬쩍 쓰러지는 가 싶
더니 금방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새끼곰을 건드렸다. 암콤은 그것을 보고
앞발로 통나무를 밀어젖혔다. 통나무는 먼저보다 세게 밀렸다가 돌아오면서 새
끼곰들을 몹시 쳤다. 등을 얻어맞은 놈도 있고 머리를 맞은 놈도 있었다. 새끼
곰들을 비명을 올리며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암콤은 으르렁거리며 두 발로 통나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면서 힘껏 내던
다. 통나무가 공중으로 높이 튀어
올라갔으므로 2살짜리 곰을 통으로 달려가 꿀 속에 코끝을 처박고 홀짝홀짝핥
아먹기 시작했다. 다른 새끼곰들도 다가왔다.
그러자 통 곁으로 다가오기가 무섭게 통나무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서
2살 짜리 곰의 머리를 세게 때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고 말았다. 암콤은 먼
저보다 더 무서운 소리로 으르렁거리며 통나무를 움켜잡고 힘껏 하늘을 향해
내던졌다. 통나무는 떡갈나무 가지보다 더 높이 올라가 새끼가 느슨해졌을 정
도였다. 암콤이 통 으로 다가드니 새끼곰들도 다가들었다.
통나무가 높이 튀어 올라 잠시 멈췄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려
오는 속도로 인해 그 무게가 더 커졌으므로, 결국 무서운 힘으로 떨어져 내려오
면서 암콤을 덮쳐 그 머리를 꽈당 ㄷ렸다. 암콤은 벌렁 자빠져 버둥거리다가 숨
어 끊어졌다. 새끼곰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나 버렸다. 5
사내아이는 놀라서 앞으로 마구 달려갔다. 한참 정신없이 가다 보니 이윽고
커다란 뜰이 나왔다. 뜰 가운데에는 금빛 지붕을 이은 높직한 궁궐이 자리잡고
있었다. 궁문 앞에는 대부가 나와 서서 웃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문 안으로 맞
아들여뜰을 구경시켰다. 널따랗게 펼쳐진 아름다운 뜰에는 이제껏 본 적이 없
는 오만가지 꽃들이 앞을 다투어 피어 었다. 대부는 대자를 궁궐 안으로 리고
들어갔다. 그곳은 더 황홀했다. 대부는 이방 저방을 빠짐없이 보여 주었다. 보면
볼수록 훌륭하기만 하여 아이는 더욱더 즐거워졌다. 잠시 후 문이 닫힌 한 방
문 앞에 이르렀다. "너는 이 문이 보이겠지?" 대부가 말했다.
"여긴 자물쇠가 없다. 그냥 닫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열수는 있지만 열지 않야
한다. 어디서든 네 마음대로 뛰어다니며 놀아라. 무슨 놀이를 하며 즐겨도 상관
없으나 다만 한 가지, 이 방에만은 들어가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만약에 안으
로 들어가는 날에는 너는 아까 숲 속에서 본 일을 생각하게 되리라." 그렇게 말
하고 대부는 가 버렸다. 사내아이는 홀로 남아 거기서 살기 시작했다. 거서는 정
말로 즐겁고 기쁜 일뿐이었으므로 겨우 두 시간쯤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었으나
사실을 거기서 30년 동안 살았던 것이다. 30년이 지났을 때 사내아이는 꽉 닫힌
문 앞으로 다가가서 생각했다. '대부님은 왜 이 방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
셨을까? 어디 한번 들어가서 뭐가 있는지 모아야지.' 문의 손잡이를 획 잡아당
기자 닫혔던 문이 열렸다. 대자가 안으로 들어가보니 방은 온 궁궐 의 어느 방
보다 크고 훌륭하며 방 한가운데에는 금으로 꾸민 옥좌가 놓여 있었다. 대자가
방 안을 이리저리 실컷 돌아다니다가 옥좌에 다가가 층계를 밟고 올라가 앉았
다. 자리에 앉아서 내려다보니 옥좌 옆에 홀이 놓여 있었다. 대자가홀을 홀에
잡자마자 갑자기 벽이 이쪽 저쪽으로 쫙 열리며 온 세계가 한눈에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다 볼수가 있었다. 앞으로 바라보니 바다가 있고
배의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오른쪽을 바라보니 그리스도 교인이 아닌 다른 종
교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고 왼쪽을 보니 그리스도 교인이긴 도 러시아 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니 러시아 인들
이 사는 동네였다. '어디 한번, 우리 부모님들은 어찌 지내시는지 봐야겠다. 밭
에 보리는 잘 영글었는지.' 자기 집 밭을 보니 보릿단이 잔뜩 쌓여 있다. 얼마
나 되나 하고 다발을 세기 시작했는데 얼핏 보니 그 밭쪽을 향해 짐수레가 온
다. 그 위에는 농사꾼이 앉아 있다. 대자는 이건 틀림없이 아지가 밤중에 보릿단
을 가지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을 바실리 크로라소프라는 도욱이 아닌가. 도둑은 비
곁에까지 오자 보릿단을 수레에 싣기 시작했다. 사내아이는 속이 상해서 "아버
지, 보리를 훔쳐가요!" 하고 소리쳤다. 밭에 와 보니 바실리가 보릿단을 훔쳐
가고 있었으므로 커다란 소리로 이웃 농부들을 불렀다. 바실리는 붙잡혀 감옥으
로 보내졌다. 다음에 대자는 대모가 살고 있는 거리쪽을 바라보았다. 대모는 어
떤 상인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대모는 마침 잠자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자 남편은 살그머니 일어나 정부에게로 가려고 했다. 대자는 대모에게 "어
나세요. 주인 아저씨가 나쁜 짓을 하려고 해요." 하고 커다란 소리로 가르쳐 주
었다. 대모는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 입고 남편의 정부가 사는 집으로 달려가
한껏 망신을 준 뒤에 정부를 마구 때리고 남편을 몰아 냈다.
그리고 다시 대자는 자기 어머니를 찾아보았다. 어머니는 집에서 자고 있었데
집 안에 도둑이 들어 와 옷궤의 자물쇠를 부수고 있는 참이었다.
어머니는 잠이 깨어 큰 소리로 외쳤다. 도둑은 그것을 보더니 도끼를 꺼내 벼
들며 당장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 대자는 참을 수 없어 홀을 도욱에게로 던졌
다. 이마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홀을 맞은 도욱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어 버렸다.
6
대자가 도욱을 죽이자마다 훤히 트였던 사방의 벽이 싹 닫혀지면서 방은 여느
때처럼 되었다. 그 때 문이 열리면서 대부가 들어왔다. 대부는 대자에게 다가와
그 손을 잡아옥좌에서 내려놓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가 일러 준 말을 듣지
않았구나. 네가 저지른 첫째 잘못은 금단의 을 연 일이다. 두 번째 잘못은 좌에
올라앉아 내 홀을 손에 잡을 일이다. 세 번째 잘못은 세상에 악을 더하게 한일
이다. 만약 네가 한 시간만 더 앉아 있었다면 인간의 절반은 못쓰게 말들었을
것이다." 대부는 다시 한번 대자의 손을잡고 옥좌에 올라가 홀을 들었다. 그러자
다시 벽이 열리면서 무엇이나 다 보이게 되었다. 그 때 대부가 말했다.
"자, 이번에는 네가 아버지에게 한 짓을 보아라. 바실리는 1년 동안이나 감에
갇힌 뒤무서운 원한을 품고 온갖 나쁜 짓을 배워서 손댈 수 없는 악당이 돼 버
렸다. 보아라, 방금 저 사나이는 네 아버지의 말을 두 필이나 훔쳐 갔는데 이제
조금 있으면 집까지 불살라 버릴테니... 네가 너의 아버지에게 한 일은 런 것이
다." 아버지의 집이 차는 것이 대자의 눈에 비치자 대부는 그것을 닫고 또 다른
쪽을 보여 주었다. "자, 봐라. 네 대모의 남편은 벌써 1년 전부터 아내를 버리고
딴 여자와 놀아나고 있어서 대모는 술로 밤낮을 지새우고 있다. 맨 처음 정부는
아주 타락한 여자가 돼버렸다. 네가 대무에게 한 짓은 이런 일이다." 대부는 그
광경도 닫아 버리고 이번에는 대자의 집을 보여 주었다. 어머니 모이 보인다. 그
런데 어머니는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치면서 슬피 울고 있었다.
"차라리 그 때 내가 그 도둑에게 죽임을 당했더라면 좋았을걸. 그러면 이렇게
괴로움에 몸부림 치진 않아도
되었을텐데." "네가 어머니에게 한 짓은 이렇다."
대부는 그 광경도 닫아 버리고 아래쪽을 가리켰다. 대자의 눈에 도둑의 모이
비쳤다. 두 사람의 감수가 감옥 앞에서 그 도둑을 잡아 누르고 있었다. 대부는
말했다. "이 사나이는 9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자기 스스로 그 죄를 갚지 않으
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너는 이 사나이를 죽여 버렸기 때문에 이 사나이
의 죄는 모두 네가 떠맡아야 한다. 이제부터 너는 저 사나이가 저지른 모든 죄
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 너는 스스로 이렇게 만들었다. 암콤이 음
통나무를 건드렸을 때는 새끼곰을 놀라게 했을 뿐이나, 두 번째로 밀어 젖혔을
때는 2살짜리 곰을 죽이고, 세 번째로 집어던졌을 ㄸ는 스스로 파멸시켜 버렸다.
네가 한 짓도 꼭 그와 마찬가지다. 나는 네게 지금부터 30년의 기회를줄테니 세
상에 나가서 도둑의 죄를 대신 갚도록 하여라. 만약 그 일을 하지 못하면 네가
대신 도둑이 된다." 대자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도둑의 죄를 다 갚을 수 있을까요?" 대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지은 만큼의 죄를 세상에 나가서 지워 가면 그 때 너는 도둑의 죄를 는
게 된다." 대자는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 나가 죄를 지울 수 있을까요?" "태양이 떠오르는 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거라. 그러면 밭이 나오고 그 밭에 숲한 사람들이 있을 것다.
그 사람들이 하는 짓을 잘 보고 네가 알고 있는 일을 가르쳐 주어라. 그리고 다
시 앞으로 걸어나가면서 눈에 뜨이는 일을 머리에 새겨 두어라. 나흘 째 되는
날에는 숲에 닿을 것이다. 그 숲 속에는 암자가 있고 그 암자에는 은인이 살고
있는데 그분에게 이제까지 있었던 일을 모조리 이야기하여라. 그 은이 네가 가
르쳐 줄 것이다. 은인이 지시한 일을 모두 해내면 그 때 너는 도둑이 지은 죄를
갚게 되는 것이다." 대부는 그렇게 말하고 대자를 성문 밖으로 내보냈다.
7
이미 사십 세가 된 대자는 심각한 생각에 싸여 걷기 시작했다. '대관절 어떻
게 이 세상의 죄를 지워 나가야 한단 말인가? 세상에서는 보통 악인을 유배 내
고 감옥에 가두거나 사형에 처하여 그것으로 악을 지우고 있는데, 죄를 지워
가면서 남의 죄를 자기가 떠맡지 않으려면 대관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대자는 곰곰이 생각했지만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정처없이 걸어가는 동안
누렇게 아주 잘 익은 보리밭 앞을로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보니 보리밭 속으로
망아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저마다 말을 타고 밭
속을 이리저리 뛰어 다니면서 망아지를 몰아내려하고 있었다. 망아지가 보리밭
에서 뛰어나오려고 하면 마침 거기로 다른 사람이 말을 목고 오기 때문에 망아
지는 놀라서 다시 밭 속으로 달려들어가곤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그 를 쫓
아 보리밭 속을 뛰어다니는 것이다. 밭 가장자기에서 한 여자가 서서, 사람들이
자기 망아지를 몰아세워 기운을 빠지게 한다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거기서 대자는 농부들에게 말했다. "여보시오들, 모두 밭에서 나와 저 아주머
니에게 자기 망아지를 불러 내도록 하세요." 그러자 사람들은 대자의 말대로 했
다. 아주머니는 밭 한쪽 끝에 서서 "오너라, 누러아, 이리 와!" 하고 불렀다. 망
아지는 귀를 쫑긋거리며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이윽고 아주머니에게로 뛰어가느닷
없이 그 품 안으로 파고들어가 하마터면 아주머니는 쓰러질 뻔했다. 그래서 농
부들도 기뻐하고 아주머니도 좋아했으며 망아지도 이리저리 뛰었다.
대자는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제야말로 악은 악 때문
에 불어 나간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이 악한 일을 꾸짖으면 꾸짖을수록 더욱더
악은 퍼져만 간다. 다시 말해서 악은 악으로 갚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
게그걸 없앨 수 있는지 모르겠다. 마침 망아지가 아주머니의 말을 들었으니 망
정이지 만약 듣지 않았다면 어떻게 몰아 냈을지 막연하지 않은가.' 대자는 골똘
히 생각했으나 이렇다 할 묘책이 떠오르지 않아 묵묵히 다시 걸어갔다.
8
마냥 정신없이 걸어가는 동안 어떤 마을에 닿았다. 맨 마지막 집에 가서 하밤
재워줄 것을 부탁하니 주인 아주머니가 들어오라고 했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
고 다만 아주머니 혼자서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대자는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은 다음 아주머니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가만히 보니 아주머니는방을
다 훔치고 나서 이번에는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다. 다 닦자 더러운 걸레 자이
위에 줄무늬처럼 남는다.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문지르니 처음 걸레자은 없어지
는데 새로 자국이 난다. 다음에는 세로로 문질러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다. 더
러운 걸레로 훔치기 때문에 먼저 자국이 없어졌나 하면 금방 다른 국이 난다.
대자는 하남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으나 보다 못해 이윽고 말을 걸었다.
"아주머님, 지금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니, 당신 눈에는 이게 보이지 않아요? 감사절 준비로 청소를 하고 있죠. 런
데 이 테이블은 아무리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고 자꾸 더러워만지니 기운이 다바
지는군요." "아주머님, 그 걸레를ㄹ 깨끗이 빨아서 닦으면 될텐데요."
아주머니가 그대로 하자 테이블은 금방 깨끗해졌다. "가르쳐 주어서 고마워
요." 이튿날 아침, 대자는 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한
참을 걸어가니 숲에 다다랐다. 숲 속에서는 농사꾼들이 수레바퀴 만들 나무를
휘려 하고 있었다. 대자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농부들은 열심히 빙빙 돌고 있
으나 나무는 조금도 구부러지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농사꾼들이 만든 대
가 꽉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대가 서로 따로따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대자가 이 광경을 한참 본 다음 이렇게 말했다. "무척 수고가 많으시군요." "
이렇게 수레바퀴를 만드는 중인데 두 번이나 휘게하려 해도 영 나무가 휘어지지
않는군요. 모두 기운이 쑥 빤져 버렸다오."
"그렇다면 대를 꽉 고정시키고 하세요. 지금 당신들은 대와 함께 들고 있잖
요." 농부들이 그 말을 듣고 대를 단단히 고정시키니 일이 제대로 잘 되었다.
대자는 거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길을 떠났다. 하루낮 하룻밤을 걸어 새에
소 거간꾼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곁에 잠시 드러 누웠다. 누워서바라
보니 그들은 소를 매어 놓고 화톳불을 피우고 있었다. 마른 가지를 주워다가 불
을 붙이면서 활활 타오르기 전에 생나무 가지를 불위에 올려 놓았게 때에 생나
무는 뿌지직 소리를 내면서 밑불을 꺼뜨렸다.
소 거간꾼들은 다시 마른 가지를 주워다 거기 불을 붙였으나 생나무를 마구지
펴, 또 다시 불을 꺼지고 말았다. 오래도록 애를 썼으나 여전히 화톳불이 피워
지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대자가 말했다.
"당신네들이 너무 성급히 생나무를 지피니까 안 되는 거요. 그러기 전에 불이
잘 타기를 기다렸다가 화력이 세진
다음에 생나무를 지펴야죠." 소 거간꾼들은 그렇게 했다. 불꽃이 세진 다음에
생나무를 올려 놓으니까 순조롭게 타기 시작하여 훌륭한 화톳불이 되었다. 대자
는 한참 동안 그들과 같이 있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도대체 대부는 무슨 닭으
로 이 세가지 일을 보게 한 것일까 하고 대자는 골똘히 생각했으나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9
부지런히 걸어가는 동안 하루가 지났다. 어떤 숲에 다다르자 숲 속에 암자가
있었다. 대자가 암자로 다가가 문을
두드리니 암자 안에서 묻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거기 있는 자는?"
"큰 죄인이옵니다. 남의 죄갚음을 하려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안에서 은인
이 나와 다시 물었다. "대체 너는 어떤 남의 죄를 짊어졌느냐?"
대자는 자기에게 세례를 준 대부의 이야기, 암콤의 이야기, 닫힌 방 안의 옥좌
이야기, 대부가 자기에게 명령한 일, 그리고 밭에서 망아지르 쫓느라고 농부들
이 보리를 마구 짓밟은 일, 망아지가 스스로 주인 아주머니에게 간 일 등을 모
조리 이야기하였다. "나는 악을 악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만,
이렇게 해야 그것을 없앨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라옵건대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러자 은인이 이렇게 말했다.
"그 밖에 네가 오는 동안 본 일을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아라." 그래서 대
자는 아주머니가 집 안 청소하던 일,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던 농부들의 일, 화불
을 지피던 소 거간꾼들의 이야기를 했다.
은인은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자 암자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빠진 손도를
가지고 나와 함께 가자고 했다. 은자는 암자에서 10리 가량 떨어ㅓ진 곳에 이
르자 한 그루의 나무를 가리켰다. "이 나무를 찍어라."
대자가 나무를 찍자 나무는 쓰러졌다. "이번에는 그것을 세 토막으로 잘라
라." 대자는 나무를 셋으로 잘랐다.
그러자 은인은 다시 암자로 돌아가더니 불을 가지고 왔다. "그 세 토막의 나
무를 태워라." 대자가 불을 피워 세 개의 나무 토막을 태우고 나시 타다 남은
세 개의 그루터기가 남았다. "그것을 반 쯤 흙 속에 파묻어라, 이렇게."
대자는 흙 쏙에 그루터기를 심었다. "저기 보이지, 이 산 아래 개울이 있다.
저기서 물을 한입 머굼고 와서 이 그루터기에 뿜어 주어라. 또 다음 그루터기에
는 제가 농부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물을 주어햐 한다. 그리고 저 그루터에는
제가 소 거간꾼들에게 가르텨 준 것처럼 물을 주어라. 이 세 그루터기그 모조기
뿌리를 내려 세 개의 사과나무로 자라면 그 때야말로 어떻게 하면 인간의 악을
없앨 수 있는지를 알게 되리라. 그러면 너는 모든 죄를 갚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은인은 암자로 돌아갔다. 대자는 골똘히 생각해 보았으나 은인이한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시받은 대로 일하기 시작했다.
10
대자는 개울에 가서 입에 가득 물을 머금고 와서 한 그루터기에 끼얹어 주고,
다시 가고 또 가고 하여 차례차례 물을 주었다. 그러고 나니 대자는 그만 지칠
대로 지쳐 뭐가 좀 먹고 싶어으므로 은인에게 먹을 것을 청하려고 암자로갔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은인은 이미 숨을 거둔 채 평상 위에 누워 있었다.
암자에는 먹다 남은 마른 빵이 있었으므로 대자는 그것을 먹었다. 다음에 을
찾아 내어 은인의 무덤자리를 팠다. 그 때부터 밤에는 입에 물을 머굼어 다 타
다 남은 구루터기에 끼얹어 주고, 낮에는 무덤 자리를 팠다. 겨우 다 판뒤 묻으
려는데 마을 사람들이 왔다. 은인에게 먹을 것을 가져 온 것이다. 모두들 은인
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대자를 축복하며 스승의 자리를 잇게 했다. 모두 께 은
인을 묻은 뒤 대자에게 음식을 남겨 놓고,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며 돌아갔다.
그는 은인의 뒤를 이어 거기서 살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들이 가져다 주는 것을 먹고 살면서 지시받은 일을 계속하였다. 산
아래 개울에서 물을 머금어다가 타다 남은 그루터기에 끼언정 주는 것이다. 그
가 이렇게 1년을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그는 다름이 니
야. 숲 속에 사는 성인이셔." 산 아래에서 몰을 입으로 머금어다가 타다가 남은
그루터기에 끼얹어 주며 도를 닦오 있다는 소문은 세상에 쫙 퍼졌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려고 찾아왔다. 돈 많은 상인들도 찾아와서 여러 가지선
물을 놓고 갔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 말고는 선물 받은 물건들
을 모조리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하루의 반나절은 물을 에 머
금어다 타자 남은 그루터기에 끼얹어 주고 나머지 반나절은 쉬기도 하고 찾아
오는 사람들과 만나기도 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것이 자기가
지켜 나가야 할 생활이며 이렇게 하고 있으면 이 세상 악을 없애고 죄갚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대자는 다시 1년을 살며 타다 남은 그루터기에 하루도 물을 주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한 그루도 움이 트지 않았다. 어느 날, 암자 안에 있으려니까 누군지
모를 사나이가 노래를 부르며 앞을 지나가는 소리가 들여 왓다. 대자는 대관절
누구일까 하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것은 몸집이 크고 힘세게 생긴 젊은이였는데,
값진 옷을 몸에 걸쳤으며 타고 있는 말도 안장도 여간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나이를 불러 대관절 어디 사는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로 가지 물어 보았
다. 그러자 사나이는 말을 세우고 대꾸했다.
"나는 강도인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을 죽인다. 사람을 많이 죽이면 일
수록 기분이 좋아져서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대자는 몸을 움츠리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 같은 인간 속에 깃든 악은 대체
어떻게 없애야 할까?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의 죄를 뉘우칠 뿐인데
이 사나이는 나쁜 짓을 하고서도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삼다니!' 대자는 아
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살인 강도 옆에서 물러나 이렇게 생각하였다. '앞으로 일
이 어떻게 돼 갈까? 이 강도가 이 언저리에서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겁ㅇ에 려
내게 잘 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도 불편한 일이지만 나
도 그 ㄸ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지 않는가.' 그래서 그는 발길을 멈추고
강도에게 말을 걸었다. "내 암자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나쁜 일을 자랑하지는 않
소. 모두가 죄를 뉘우치고 속죄하려고 하오. 그러니 그대도 하나님이 두렵다고
생각하면 죄를 뉘우치시오. 또 죄를 뉘우치지 못하겠으면 이곳을 떠나 두번 다
시
오지 마시오. 세상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내 곁에서 쫓는 것 같은 짓은 하지
말아 주시오. 내 말 듣지 않으며
천벌을 받을 것이오." 강도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하나님 같은 건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네 말 따윈 들을 필요가 없다.네가
내 주인이라도 된단 말이냐? 너는
하나님께 기도드려서 먹고 살지만 나는 강도질로 먹고 산다. 사람은 다 저마
다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 법이낟. 너 같은 건 너를 찾아노는 부인네들에게 설
교나 하면 되지 웬 잔소리냐? 나는 네 설교를 들을 까닭이 없다. 나에게 하나
님을 설교해 준 보답으로 내일은 사람을 둘 더 죽여야지. 지금 당장 널 여 버려
도 되지만 그런 일로 손을 더럽힐 마음을 없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 눈 앞에
서 얼씬거리지 말도록 해라." 강도는 으름장을 놓고선 가 버렸으나 그 뒤로 다
시 오지 않았으므로 대자는 8년 동안 평온하게 살 수있었다.
11
어느 날, 그는 새벽녘에 여느 때처럼 타다 남은 그루터기에 물을 준 뒤에 자
로 돌아와 이제 사람들이 찾아올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물끄러미 오솔길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대자는 해질 무렵
까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달리 할 일도 없어 이제까지의 자기의 생애를이리
저리 돌이켜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서 먹고 산다는 자신
의 생활 방식에 대해 강도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온 딜을 돌
이켜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 은인의 지시대로 살고 있지 못한 것 같
아. 은인은 내게 고행을 지시했는데 나는 그 고행을 나날의 양식과 바꾸고 또
세상 사람의 존경을 바라게 되었다. 나는 자만심에 빠져 사람들이 아오지 않으
면 언짢아 하고 사람이 찾아오면 모두가 나를 성인으로 여기는 줄 알고 괜스레
우쭐해진다. 이런 생활 방식으론 안 되겠어. 나는 세상의 평판에 현혹되어 앞서
지은 죄를 갚기는 커녕 오히려 새로 죄를 짓지 않았는가. 깊은산중으로 ㅇ겨가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도록 하자. 이미 지은 죄를 갚아 가면서 다시는 새로운
죄를 짓지 않도록 혼자 살아가자.'
대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마른 빵이 든 조그만 자루와 괭이를 집어들고 암자를
나와 골짜기쪽으로 내려갔다.
한적한 곳에 움막을 짓고 세상 사람들의 눈앞에서 모습을 감추려는 것이다.
그가 자루와 괭이를 들고 걸어가는데 저쪽에서 강도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자
는 놀라 피하려고 했으나 기어코 강도에게 들켰다.
"어딜 가나?" 하고 강도는 물었다. 그는 세상 사람을 피하여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으로간다고 대답했다.
강도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앞으로
무억 머고 살아갈텐가?" 미처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대자는 강도가 묻자
먹을 것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허허허,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것으로 살
아가면 돼지." 대자는 대답했다. 강도는 아무 말도 않고 말 머리를 돌려 가 버
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저 사나이의 생활 수단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 사이
도 이번엔 뉘우칠지도 모르지. 오늘은 먼저보다 한결 거동이 부드럽고 협박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 때 대자는 강도의 뒷모습에 대고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누가 뭐래도 그대는 죄를 뉘우치지 않으면 안 되오. 하나님의 논을 피할수는 없
는 것이오!" 강도는 말머리를 홱 돌려 달려오더니 허리에서 칼을 빼어 그를 내
리치려고 했다. 대자는 깜짝 놀라 숲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강도는 뒤쫓아오려고는 않고 그냥 이렇게만 말했을 뿐이다. "이것까지 두 번
너를 용서해 주었지만 이제 세 번째로 걸려드는 날엔 용서없다. 못된 늙은이! 이
고 말테니!" 그루터기에 물을 주러 갔다가 들여다보니 그 가운데 한 나무에 싹
이 움트고 있지 않겠는가. 사과나무 잎이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12
대자는 세상 사람의 눈 앞에서 사라져 혼자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른
빵도 다 떨어지자, 이제 풀뿌리라고 캐러 가자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움막을
나왔다. 그런데 밖으로 나와 보니 나뭇가지에 바른 빵이 든 자루가 걸려 었다.
대자는 그것으로 나날의 양식을 삼았다. 그런데 그 마른 빵이 다 떨어지기가
무섭게 같은 나뭇가지에 또 같은 자루가 걸려 있었다 이것으로 대자는 살아갔으
나 꼭 한가지 꺼림칙한 일이 있었다. 다름 아닌 강도가 두려워졌던 것다. 강도가
나타나는 기척이 있으면 재빨리 자취를 감추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저 자의 손에 걸려 죽으면 죄갚음을 하지 못한다.' 이렇게 하여 또 10년이
지났다. 사과나무는 한 그루만 자랄 뿐 남머지 두 그루는 여전히 타다 남은 루
터기 그대로였다.
그는 남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타다 남은 그루터기 둘레의 흙을 축여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너무도
지쳐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그는 앉아 쉬면서 이런 저런 들
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죄를 저리르고 말았다. 죽음을 두려워하다니.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음을 나의 죄갚음을 하자.'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강도가 말을 타고
역지거리를 함녀서 오는 기척이 났다. 그는 그 소리를 듣고서, 하나님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좋은 꿀이나 나쁜 꼴을 겪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고 강도가 는 쪽
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도는 혼자가 아니고 안장 뒤에 한 젊은이를 태워 어딘
가로 데리고 가는 중이었다. 젊은이는 두 손을 묶인 채 입에는 재갈마저 물려
있었다. 젊은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강도는 욕을 퍼붓고 있었다. 그는강도
에게로
가서 말 앞을 가로 막아 섰다. "너는 이 젊은이를 어디로 데리고 가느냐?"
"숲 속 가까운 곳으로 끌고 간다. 이놈은 어느 돈많은 장사치 아들인데 돈이어
디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아 털어놓을 때까지 괴롭히는 수밖에 없어."
이렇게 말하면서 지나쳐 가려 했으나 그는 말고삐를 잡은 채 놓지 않았다. "
이 사람을 놓아 주어라." 강도는 화가 나서 그를 치려서 채찍을 들어올렸다.
"아니, 너도 이런 꼴을 당하고 싶으냐? 목숨이 아깝거든 어서 놓아라!" 그러
나 그는 두려워 하지 않았다. "못 놓겠다. 나는 너 같은 건 무섭지 않다. 나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놓아선 안 된다고 분
부하신다. 이 사람을 놓아주어라." 강도는 미간을 찌푸리고 칼을 내리쳐 새끼줄
을 탁 끊었다. 장사꾼의 아들을 풀어 주었던 것이다. "모두들 썩 꺼져라!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었다간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장사꾼의 아들은 말 위에서 뛰
어내리자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강도도 그대로 가 버리려고 했으나 대자는그
를
불러 세워 그런 어두운 생활은 이제 집어치우도록 다시 타일렀다. 강도는 두
커니 그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나더니 아무 말 없이 가 버렸다.
이튿날 아침, 그가 타다 남ㅁ은 그루터기에 물을 주러 가보니 둘째 나무에도
움이 터서 역시 사과나무가 되어
가고 있었다.
13
이렇게 또 다시 10년이 지났다. 어느 날 움막에 들어 앉아 있던 대자에게는이
제 더이상 모자라는 것도 두려운 것도 없었으며, 마음속은 기쁨으로 가득찼다.
거기서 대자는 생각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큰 행복을 인간들에게 내려 주
셨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괜스레 자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 참으로
기쁨 속에 살아갈수 있는데도....' 이렇게 갖가지 인간악을 돌이켜 보며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인간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내가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잘못이다. 세상에 나가서 내가 알고 있는것
을 세상 사람들에게 얘기해 주자.'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이내 강도의 말발굽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그것을 지쳐
버리며ㅕ서 생각에 잠겼다. '저런 사나이에게 들려 준다 해도 알아 듣지도 않을
걸.'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다시 마음을 고쳐 먹고 신작로로 나갔다. 강
도는 시름에 잠긴 표정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말을 몰고 있었다. 그 모양
을보니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그에게로 달려가 그의 무릎을 잡았다. "정다운 형
제여, 제발 자신의 영혼을 아끼는 마음을 가져 주게! 구대 안에는 하나님께서좌
정하고 계시니까.
그대는 남을 괴롭히고 있지만 이제 자신은 더 심한 괴로움을 겪을 게 틀림어.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대를 위해 어떤 즐거움을 마
련하셨는지 아는가! 제발 스스로 자신을 멸망시키는 것 같은 짓은 그만 두게.
그 생활을 고쳐 보게나!" 강도는 얼굴을 찌푸리고 딴 곳을 보며 말했다.
"비켜라!" 그는 먼저보다도 더욱 세게 강도의 무릎에 매달리면서 눈물로써 뉘
우치도록 타일렀다. 강도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말에서 내
려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결국 당신은 나를 이겼소. 나는 20년 동안 당신
과 싸웠으나 오늘 나는 당신에게 졌소. 지금 나는 이미 나 자신을 마음대로 음
직일 수 없게 되었소. 아무렇게나 당신 좋을 대로 하시오. 처음에 당신이 내게설
교했을 때
나는 괜히 화가 치밀 뿐이었소. 그런데 당신이 세상 사람을 피하여 몸을 숨려
했을 때, 나는 당신 자신이 세상 사람에게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고, 그 때 비로소 당신의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 뒤 나는 당신을 위
해서 마른 빵을 나뭇자기에 걸어 놓게 되었던 것이오.' 그는 생각해 냈다. 그
농가의 아낙네가 걸레를 깨끗이 빨았을 때에야 비로소 테이블을 깨끗이 닦을 수
있었던 것을. 그와 같이 자신의 걱정을 그치고 자기의 마음을 말게 할때 다른
사람의마음도 맑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도는 계속하여 말했다. "그리고 당
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때 내 마음은 움직였소." 거기서 그는 생각해냈
다. 농민들이 받침대를 탄탄하게 고정시켰을 때, 수레의 윤목을 휠 수 있었던 이
다. 그와 같이 자기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활을 하나님 안에 탄탄히 들
어 맸을 때 굽힐 줄 모르던 나쁜 고집도 꺾였던 것이다.
강도는 다시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가엾게 여겨 내 앞에서 눈물을 흘
렸을 때 내 마음은 얼음이 풀리 듯 녹아 버렸소."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
타다 남은 그루터기가 있는 곳으로 강도를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
가보니 마지막으로 하나 남았던 그루터기에서도 사과나무의 싹이 움트고 있다
거기서 대자는 다시 깨달았다. 소 거간꾼들의 화톳불도 불기운이 강해졌을 때
에야 비로소 생나무가 탔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이 뜨겁게 타올
랐을 때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불을 붙여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대자는 그 동
안의 이야기를 강도에게 모두 들려주며 평화로운 모습으로 죽어갔다. 강도는대
자의 시신을 땅에 묻고 그가 가르쳐 준 대로의 생활을 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세
상 사람을 가치게 되었다. 세 아들 톨스토이 세 아들
세 아들을 둔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재산과 토지를 나누어 주면서 말했다. "처
럼 살아가도록 하여라. 그렇게 하면 행복을 알게 될 것이다." 몫을 나누어 받자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나 자기 멋대로 살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선 당신처럼 살
라고 하셨거든? 아버진 항상 줄거워하셨으니까 나도 신나게 살면 되는 거야."
이렇게 1년을 살고 2년을 살고 3년, 10년을 살았으나 마침내 나누어 받은 재을
모두 흥청망청 써 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가
"제발 도와 주십시오." 하고 애원했으나 아버지는 아들을 못 본 체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환심을 사려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 가운데에서도 가장좋은 것
을 선물로 드리고, "제발 도와주십시오." 하고 빌다시피하며 애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아들의 애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 때 아들은 지난 날 무슨일로 아버
지를 화나게 했나를 생각해고 잘못이 있으면 용서해 달라고 사죄했으나 아버지
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욕을퍼붓은 것이
었다. "아버지는 지금 제게 아무것도 주시지 못할 거라면 왜 그 때 제 몫을 나
눠 으며 그것으로 한평생 넉넉히 살 것이라고 했습니까? 이제까지 제가 맛본
기쁨과 즐거움도 지금 제가 겪고 있는 고통에 견주어 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금방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건강이 날로 나빠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불행의 원인은 누굽니까? 아버지죠... 제 행
복이 나중에는 제게 해를 끼친다는 것을 아버지께선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런데도 그 위험을 제게 주의시켜 주시지 않고 그냥 '나처럼 살아라, 그러면 든
일이 잘 될터이니'라고만 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본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버
지께서는 그렇게 살아도 될 만큼 충분한 돈이 있었지만 저는 그게 모자랐던 거
지요. 아버지는 거짓말쟁입니다. 흥! 될 대로 되라지! 저를 속인 아버지를 저주
해요. 아버지는 얼굴 같은 건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평생을 아버지를 증하겠습
니다!" 아버지는 그와 같은 몫을 둘째 아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그 때도 다
만, "나처럼 살도록 해라. 그렇게 하면 너도 행복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했을
뿐이다. 이 아들은 그 몫을 나누어 받았어도 진심으로 기뻐하지 않았다. 그것은
큰아들이 받은 것과 같은 액수였지만 둘째 아들은 형에게서 일어난 일을이미 알
고 있었으므로
무슨 짓을 해서라도 형처럼 거지나 다름없는 신세는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
다. 형이 "나처럼 살아라." 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잘못 받아 들였으며, 쾌락만을 좇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된는
것을 둘째 아들은 뚜렷하게 알았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나누어 받은 재산을
더 늘릴 수 있을까, 하고 밤낮으로 고심하는 것이었으나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
다. 하루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의논하러 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은 아쩌면 아버지는 행복의 비밀을 가르
쳐 주기를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가 재산을 만든 방법들을
알아 내려고 했다. 아들은 돈을 모르려고 마음먹었으나 아무리 모아도모자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자니친 욕심을 인전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한평생 옹스
럽게 살면서 아버지는 무엇 하나 나누어 주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다 자기 손
으로 모았고, 다른 사람들이면 같은 세월에 더 많이 모았을 것이라고 퍼뜨리
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며 지내는 동안 아버지에게서 나누어 받은 재산이 다
없어졌다. 한 푼도 남김없이 바닥이 나자 둘째 아들은 이제 죽을 수밖에 없다
고 생각하고 자살해 버렸다. 셋째 아들에게도 아버지는 위의 두 아들에게 준
것만큼 재산을 나누어 주고 하던 말을 되풀이했다. "나처럼 살아라. 그러면 행
복을 알게 될 것이다." 몫을 나누어 받은 셋째 아들은 기뻐서 자기가 태어난 집
을 버리고 나갔다. 그러나 두 형의 실패한 인생을 보아서 잘 아는 그는 아버지
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큰형님'은 하고, 셋째 아들은 이 궁리 저 궁리
하는 것이다. '아버지처럼 산다는 것이 자신의 쾌락을 좇는 일이라고 잘못 생각
하고 그 때문에 가지고 있던 돈을 모조리 없애 버렸다. 둘ㅉ 형님은 아버지의
말씀을 아버지의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인 줄 알고 역시 파멸의 구렁이에 빠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나처럼 살라라' 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의 뜻은 도대체
어디 있는지 더욱 모르겠다.' 거기서 셋째 아들은 아버지의 생활에 대해서 자기
가 알고 있는 한 생각나는 기억을 모두 떠올려 보았다.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해
내는 동안 셋째 아들은 이런 것을 깨달았다. 자기는 꼭 한가지 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태어나기까지 아버지는 자기를 위해 아무것도 준
비한 것이 없었으며 또 자기라는 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오직 이웃 사
람들이나 자식들에게만 모든 즐거움을 맛보게 하고 '나처럼살아라. 그렇게 하면
행복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만 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두 형을 위해서도 마찬가지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때
셋째 아들은 '나처럼 살아라'고 한 아버지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남을 위해 살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겨우 마음 놓았을 때 아버지
가 곁으로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말로 우리는 다시 같이 살면서 행복
을 누리게 되었다. 어서 네가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가서 '나처럼 살아라'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나를 본받는 자는 정마로 행복하게 된는 것을 일러
주고 오너라." 거기서 셋째 아들은 자기와 같은 젊은이들을 찾아가 아버지에게
서 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뒤부터 자식들은 자기의 몫을 나누어 받았을
때 많이 받은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처럼 살아야 행복하게된다는 것에 대
해 기뻐하게 되었다.
아버지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이고 아들들은 인간, 행복은 우리들의 생활이다.
인간은 하나님 따위는 없어도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자는 인생이란 끊이지 않는 쾌락의
연속이라고 생각하고 들뜬 생활을
즐기고 있으나, 마침내 죽을 때가 오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 왔는지.죽
음의 고통으로 끝나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저주하면서 죽어 가고 신을 부정한다. 이런 사이
바로 맏아들인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 삶의 목적은 자아 의식이고 자기 완
성이라고 믿어 자신을 위해 새롭고 보다 좋은 생활을 만들기에 있는 힘을 다하
나 지상의 생활만을 완성시키고 있는 동안 행복을 잃어버리고 차츰 그것에서멀
어져
간다. 마지막으로 셋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신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신은 인간에게 선을 베풀고 이웃에도
그같이 할 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본받아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이 이렇게 말한다면 신께서는 그들을 찾아와 이
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너희에게 바랐던 것이다. 내가 하는
대로 하여라. 너희가 진정 행복할지니." 대위의 딸
푸슈킨 제1장 근위대의 중사
"내일이라고 근위대 대위가 될 수 있을텐데." "그건 안 돼. 보병대에 집아넣
어 둬." "그 말 잘 하셨쇼. 따끔한 맛을 좀 보여줘야 돼요."
"..." "그런데 그놈 아비는 어떤 작자요?"
-크냐지닌- 내 아버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그리뇨프는 청년시절 미니프백작
(표트로 대제가 초정한 덴마크의 기사로 후에 육군 원수가 되었금) 휘하에서 장
교로 근무하다가 17xx년에 중령으로 퇴역했다. 그리고 신비르스크에 있는 고향
으로 돌아와 가난한 귀족인, U의 딸 아브도차 바실리예브나와 결혼했다. 이는
아홉 명이나 태어났는데 나만 살아 남고 여덟 명은 모두 어릴때 죽었다. 어머니
가 임신했을 때 아버지는 나를 아들이라고 확신했는지 가까운 친척뻘이 되는 근
위대소령 B공작의 도움을 얻어 태어나지도 않은 나를 세묘노프 근위대에 중사
로 등록(당시의 러시아 귀족 자제들은 출생과 동시에 군적에 등록되었으며 입대
할 때까지의 성장 기간도 복무 연한에 가산되었음.)했다. 만약 예상을 위엎고 기
대에 어긋나게 어머니가 딸을 낳았더라면 아버지는 사망 신고를 해서 이 중사
의 등록을 취소했을 것이다. 학업을 마칠 때까지는 휴가 중이라는 형식이 취해
졌는데, 당시 우리가 받은 교육은 요즘 것과는 그 방법이 달랐다. 다섯 살 때부
터 나는 우리 집 하인 사베리치의 손에 맡겨졌다. 이 사나이는 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나를 가르치고 키우는 일체의 양육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지도를 받아 여러가지 공부를 했다. 열두 살 때는 러시아 어로된 책을 읽고 러
시아 어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좀더 자라자, 아버지는 보플레라는 프
랑스 인을 가정교사롤 고용했는데 이 선생은 모스크바에 주문했던 1년 분의 포
도주와 올리브유와 함께 도착했다. 사베리치는 가정교사 채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도련님께서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목욕도 자주 시키고 머리
도 빗겨 주고, 먹고 싶어하는 건 무엇이든 즉시 갖다 바치는데 도대체 무엇 때
문에 프랑스 건달을 가정교사로 끌어들이는지 모르겠네. 이 아까워, 돈이. 그런
것한테 헛돈을 쓰다니. 우리 하인들 만으로는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지, 원!" 그
는 화난 얼굴을 이렇게 중얼거렸다.
보플레 선생은 고국에서 이발사로 일하다가 프로이센에 가서 군대생활을 조금
하고는 선생 노릇을 하기 위해
러시아로 건너왔지만, 가정교사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었
다. 본바탕은 무골호인이었으나 결박하고 몸가짐이 좋지 않은 점에 있어서 결코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위인이었다. 그의 가장 큰 결점은 여자를 보면 분별없
이 정열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이 고약한 버릇 때문에 그는 며칠씩이나 낮으로
끙끙 앓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술하고는 애초에 원수라도 진 일이 있는 사람처
럼 끊이없이 마셔댔다. 러시아 식으로 말하면 한 잔 쭉 들이켜 뱃속을 후끈후끈
하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우리집에서는 저녁 식사 때만 포도주가 나오
고, 그것도 작은 컵으로 한 잔씩만 마시는데 그나마 무슨 특별한 이 없을 때는
함부로 포도주 잔을 꺼내지 않는 것이 통례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플레 선
생은 러시아 토산의 과실주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보다 위장에
더 좋은 약은 없다면서 프랑스의 포도주보다 이 과실주를 즐겨마시게 되었다.
보플레 선생과 나는 얼마 안가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애초의 계약대로한면
그는 프랑스 어와 독일 어, 그리고 그 밖의 필요한 여러 가지 학문을 내게 가
르칠 의무가 있지만 그보다 먼저 러시아 어를 나한테 배우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결국 입장이 거꾸로 되고 말았다. 내 덕분으로 서투르게나마 러시아어를
한두 마디
지껄이게 되자 나에 대한 그의 태도는 더없이 부드럽고 친절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서로 상대방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고 아주 사이 좋게 지냈다. 나는 점차 보플레 선생이 좋아지기 작
했다. 그러나 얼마안 가서 우리 사이를 운명의 장난이 갈라 놓고 말았다. 다음과
같은 소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세탁 일을 맡아 하는 뚱뚱한 곰보 하녀 파라시
카와 외양간 일을 하는 애꾸눈 하녀 아클리카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숫처
녀인 자기들을 유혹해서 몸을 더럽혔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했다. 용한 성격
의 어머니도 이런 일만은 덮어둘 수 없었는지 즉시 아버지에게 알렸다. 아버지
의 처벌은 가차없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하인을 불러 프랑스 인 악당을 끌어오
라고 호령했다. 가정교사를 부르러 갔던 하인이 돌아와서 무슈 선은 지금 도련
님께 공부를 가르치고 있다고 보고하자 아버지는 직접 내방으로 행차했다. 그
ㄸ 보플레 선생은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었으므로 나는 혼자서 무엇인가에 열
중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 마디 말해 둘 게 있다. 아버지는 내 지리 학습에 도움
이 될 거라고 해서 일부러 모스크바에 사람을 보내 큰 지도를한 장 구해 왔는데
그것이 제
구실을 못하고 한쪽 벽에 장식처럼 걸려 있었다. 나는 벌써부터 이 지도를, 도
라기보다는 두껍고 질겨 보이는 종이를 탐내고 있었다. 그 종이로 연을 만들
작정이었다. 보플레 선생이 자고 있어 마침 좋은 기회를 얻은 나는 작업에 착
수해 아프리카에 케이프타운에, 창호지를 오려서 길게 꼬리를 달고 있을 때아버
지가 들어온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지리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
는 내 귀를 한 번 잡아 당기더니 보플레 선생이 잠자고 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
가 거칠게 그를 흔들어 깨우더니 소리치기 시작했다. 보플레 선생은 깜짝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허사였다. 팔과 다리가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가엾은 프
랑스 인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의 멱살을 잡아 침대에서 끌어내리더니 욕설을 퍼부으면서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그리고 그 날 중으로 그는 아주 해고돼 버렸다. 보플레 선이 쫓아 날리
기도 사베리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내 교육은 이것으로 끝장이 나고 말았다.
그 후 나는 마당에서 모이를 쪼는 비둘기를 쫓아 날리기도 하고 농노의 아들놈
들과 개구리뛰기나 말타기 같은 놀이를 하면서 소년 시절의 나을 보냈다. 내
앞에 운명의 갈림길이 당도한 것은 만 열여섯 살 때였다. 가을의 느 날 어머니
는 응접실에서 벌꿀로 만든 잼을 찌고 있었고 나는 곁에서 침을 삼며 그 냄새를
맡고 있었다. 아버지는 창문 옆에서 해마다 집으로 송달되는 궁연감을 일고 있
었는데 이 ㅊ은 아버지에게 강렬한 영향과 감흥을 주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 책
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고, 읽고 나면 반드시 이상하리큼
마음이 들뜬 표정을 드러내곤 했다. 어버니는 그런 태도는 보기에 안 좋았던
듯 그것을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치워두곤 했다. 그 대신 한번 손에 잡혔다 하면 아버지는 좀처럼 놓으려고 지
않았다. 그 날도 아버지는 어깨를 움추리기도 하고 중얼중얼 소리를 내리도 하
면서 감흥어린 눈으로 이 궁중연감을 읽고 있었다.
"육군 중장이라, 그놈은 내가 지휘하던 중대에서 중사로 근무했는데... 러시의
최고 훈장을 두 개나 받았구먼. 그놈이 이렇게 되다니...."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다가 아버지는 연감을 곁의 소파에 올려놓고 깊은 생에
잠겼는데, 이것은 무슨 좋지 못한 말을 끄집어내는 아버지의 버릇이었다.
갑자기 침묵을 깨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돌아다니며 물었다. "아브도차 바실리
예브나, 페트루샤가 지금 몇 살이지?" "만 열여섯 살의 생일이 지났어요. 페트
루샤가 태어나던 해에 나스타샤 게르시모브나 백모님의 한쪽 눈이 짓물러서 멀
어졌고 또...." "됐군!" 아버지는 말을 가로막았다.
"군대에 보내도 좋을 때가 됐어. 만 열여섯이면 하녀들 방에서 달음박질치고비
둘기 집에 기오올라갈 나이는 나이야."
눈앞에 닥쳐온 아들과의 이별을 생각하고 어머니는 가슴이 쓰라려 자시도 르
게 냄비 속에 손가락을 빠뜨렸다. 그러고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어머니의 슬
픔과는 정반대로 내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상상하던 군대
생활은, 자유롭고 즐거운 것으로만 생각되는 페체르부르그의 생활에 대한상상과
일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근위장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 보며 간
으로 태어나 그 이상의 행복은 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일단 마음 먹으면 그 뜻을 변경하거나실
행을 연기하는 법이 없는 아주 완고한 사람이었다. 마침내 출발 날짜가 결정되
고 그 전 날 아버지는 미래의 내 상관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며 펜과 종이를 가져
오거라 했다. 그 때 어머니가 말했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B공작에게 제 안
부도 전해 주세요. 그리고 페르투샤를 잘 돌봐 주십사 하고 부탁 말씀드린다고
적어 주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얼굴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어째서 내가 B공작한테 편지를 써야 단
말이오?" "아니, 금방 페트루샤의 상관에게 편지를 쓰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어
요?" "응, 그랬어. 그게 어떻다는 거요?"
"페트루샤의 상관은 B공작이 아녜요? 저 애는 세묘노프 근위 연대에 등록되어
있으니 말예요."
"등록 따윈 소용없다오. 페트루샤는 페체르부르그에 안 보내. 그런데 가서 뭘
배우겠어? 안 돼. 근위 연대는
안돼. 이놈은 보병부대로 보내야 해요. 무거운 탄약 상자도 나르고 화약 냄도
맡으면서 고생을 해야 훌륭한 군인이 돼요. 페체르부르그에 가면 낭비와 도락에
몰들 위험이 많아. 근위대에 등록은 했지만 근무까지 시킬 생각은 처음부터 없
었소. 이놈을 놈팽이로 만들고 싶진 않으니까, 이 아이의 거주증은 어디 소? 이
리 갖고
와요." 어머니는 내가 세례를 받을 때 입었던 옷과 함께 보관해 두었던 거주
증을 갖고 와서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에게 주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받아 찬찬
히 훑어 보더니 책상 위에 놓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페체르부르그가 아니라
니. 나는 순간 두려움과 호기심에 잔뜩 긴장했다. 내 눈은 천천히 움직이는 버지
의 펜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아버지는 편지를 다 쓰자 거주증과 함께 봉투에
넣고는 안경을 벗어 놓고 내게 말했다.
"이 편지는 안드레이 카를로비치에게 보내는 거다. 갖고 가라. 안드레이는 날
의 내 동료다. 퍽 친숙하게 지냈다. 너ㅓ는 올렌부르크(우랄 산맥 남쪽에 있는
도시)에 가서 이 사람이 지휘하는 부대에 근무하는 것다." 이리하여 내 꿈은 산
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페체르부르그의 즐거운 생활대
신 쓸쓸한 변경의 지루한 생활이었다. 방금전까지만해도 내 가슴을 부풀어 오르
게 했던 군대 생활이 이제와서는 견딜 수 없는 불행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튿날 아침 하인들은 여ㅎ용 썰매를 현관 앞에서 고
트렁크며 다기와 그 밖의 자질구레한 일용품이 담긴 궤짝이며 귀염둥이 아에
게 주는 마지막 시념물이 될 흰 빵과 고기만두를 넣은 작은 상자 등속을 실었
다. 양친은 나를 축복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표트르, 가서 충실히 근무해야 한다. 일단 충성을 맹세하면 상관의 명령에 대
복종해야 돼. 알겠나? 상관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것도 좋지 않아. 쓸데없는
일에 함부로 나서는 경박한 태도도 취하지 말아라. 근무를 태만히 하는 건 더욱
나쁘다. '옷은 처음부터 아껴입고 이름은 젊을 때부터 아껴라'라는 속담을항상
명심해라."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몸을 조심하라고 거듭 말하고는 사리
치는 나를 잘 돌 봐 주라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일렀다. 나는 어머니가 시키
는 대로 토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그 위에 역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걸쳤
다. 그리고 사베리치는 함께 포장을 둘러 씌운 썰매를 타고 집을 떠났다. 물이
쏟아졌다. 그 날 저녁은 우리는 신비르스크에 도착했는데 필요한 물건을 사 모
으기 위해 거기서 하루를 머물러야 했다. 물건을 사는 것은 사베리치가 할 일이
었다. 우리는 음식점을 겸하고 있는 여관에 묵었다. 이튿날 아침 사베리치는 물
건을 사러 나가고 나는 연관에 남아 창문 너머로 지저분한 길거리를 바보고 있
었는데 얼마 안가서 싫증을 느껴 여관 안을 이리저리 어슬렁거렸다. 당구장에
들어가보니, 서른대여섯 살쯤 되는 키가 크고 콧수염을 기른 신사가 잠옷바람으
로 파이프를 한 잔 얻어 마시고 지면 당구대 밑을 엉금엉금 기어다게 되어 있었
다. 나는 함참 동안 그들의 게임을 하고 있었다. 카운터는 이기면 워트카를 한
잔 얻어 마시고 지면 당구대 밑을 엉금엉금 기어다니게 되어 있었다. 나는 함
참 동안 그들의 게임을 구경했다. 승부가 거듭됨에 따라 카운터는 제 발 산책
을 부지런히 하다가 나중에는 당구대 밑에서 뻗어버리고 말았다. 사는 마치 조
사를 외는 것 같은 말투로 그를 놀려 주고는 내게 한 판하자고 말했다. 나는
당구를 칠 줄 모르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러자 신사는 딱하게 여기는 듯한 시선
을 내게 던졌다. 그러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신사는 제XX기병연대에 와서 이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이름은 이반
이바노비치 주린이었다. 주린은 단단한 요리로, 함게 군식으로 식사를 하자고 나
를 초대했다. 나는 기꺼이 이 초대에 응했다. 우리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주린은 몇 잔의 술을 연거푸 들이켜고 나서 군대생활의 요령을 빨리 터
득하지 않으면 안 되다며 내게도 술을 권하고는 군생활의 갖가지 에피소드를 들
려 주었다. 에피소드의 내용이나 말하는 투가 아주 재미있고 유쾌했다. 우리는
친숙한 사이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서다. 주린은 그 때 당구를 내게 가르쳐 주
겠다고 말했다. "이건 군대 생활에서는 절대로 필요해. 그러니까 배워 둬야지.
가령 행군 도중에 벽지의 어떤 도시에 들어갔다고 해 보자. 유태인을 때려 눕
히는 것만으로는 심심풀이가 되지 않아. 싫든 좋든 술집에 들어가게 되고 한 잔
한 다음에는 당구라도 칠까 하면서 큐를 잡게 마련이야. 그러니까 배워 둬야 하
지 않게나." 나는 이 말을 옳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당구를 배웠다. 주린은 내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뜻밖에 숙달이 빠른 데에 탄복했다.
그는 대여섯 번 연습상대가 되어 주더니 한 에 2코페이카(러시아의 화폐단위.1코
페이카는 1루블의 백분의 1)씩 걸고 치자고 말했다. 돈을 따는 것이 목적이 니라
아무것도 걸지 않고 그냥 게임을 하면 싱겁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말에 동의하자 주린은 폰스(브랜디나 감주에 과즙과 우유, 설탕, 향료 등을 뒤섞
은 술)를 주문하더니 폰스 없는 군대 생활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서 자꾸만 내 잔에 그것을 따랐다. 나는 그가 권하는 대로 술을 마다. 그러는 동
안에도 우리의 게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술잔을 기울이는 횟수가 잦아짐에 따
라 대답해져서 내가 치는 공은 당구대 밖으로 날아가기가 일쑤였다. 나는 술김
에 후끈 달아 아리숭하게 채점하는 카운터에게 똑똑히 셈을 하고 호통을 치고는
2코페이카씩으로 했다.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된 풋내기의 만용을 과
시한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밤이 꽤 깊어졌다. 주린은 시계를 보더니 큐를 놓
고 내가 내야할 돈이 1백 루블이라고 말했다.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내 돈은
사베리치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변명을 늘어기 시작했다. 그러
자 주린은 내 말을 가로막았다.
"괜찮다. 염려 마라. 나중에 내도 좋아.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우리 알리뉘카
한테 가 보세." 나는 이 말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날이 끝날 때까지는
나는 하루 종일 건달짓을 한 셈이었다. 우리는 알리뉘시카 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주린은 군대 생활이 요령을 빨리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되풀이하서
연거푸 내잔에 술을 따랐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주린이 나를 여관까지 바래다 준 것은 한밤중이었다. 사베리치가 현관 계단
밑에서 우리를 맞았다. 군대 생활에 대한 내 열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는
것으로
보고 사베리치는 안절부절 못했다. "도련님,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어디서
그렇게 곤드레가 됐습니까! 아아, 이 일을 어쩐다지? 지금까지 이런 일은 한 번
도 없었는데!" "웬 잔소리야, 영감! 쓸데없는 말 마라... 자, 가서 자자. 나를 침
대에 눕혀줘." 이튿날 아침 나는 머리가 지끈지끈 쑤시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
다. 그리고 어제 있었던 일을 어렴풋이 기억에 떠올렸는데 이 상념을 차를 갖고
들어온 사베리치 때문에 지워지고 말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표트
르 도련님, 술은 아직 이릅니다. 대체 누구를 닮으셨을까. 분명히 도련님의아버
님과 할아버님께서는 술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또 어머님께서는 크바스(청량음료의 한 가지) 밖에는 입에
대지 않으셨는데, 도련님이 그릇된 길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건 눅 탓일까... 그
렇지, 그 못된 가정 교사 때문입다. 그놈은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언제나 치피에
나 집에 가서 "마담, 즈부 프리 보드카(아주머니, 워트카를 한 잔 줘요.)"고 했으
니까. 도련님은 그놈한테서 물이 들어 '즈 부 프리'가 되고 말았어요... 어먹을
놈, 좋은 걸 가르쳐 줬다.그런 사교도를 가정교사로 고용했으니 정말 기가 말힐
노릇이지. 그놈이 아니라도 우리 손으로 충분히 도련님을 돌보고 가르치고 할
수 있었는데." 나는 기가 막혀서 얼굴을 돌린 채 그에게 말했다.
"알았어. 저리 가, 사베리치, 차는 나중에 마시겠어." 그러나 사베리치는 입을
다물려고 하지 않았다. 한번 설교를 시작했단 하면 성이 찰 때까지 떠들어 대는
것이
그의 성미였다. "그것 보십시오, 표트르 도련님. 취하면 그렇게 됩니다. 머리
가 무겁고 입맛이 떨어져요. 도련님이 벌써부터 술꾼이 되다니 정말 튼일이군.
오이를 절인 소금물에 꿀을 타서 드시겠습니까?" 그때 어떤 소년이 들어와서
주인이 보낸 쪽지를 내게 주었다. 재용은 이러했다. 친애하는 표트르 안드레비
치, 어제 게임에서 자네가 지불해게 된 1백루블을 이 소년 편에 보내 주기 바오.
지금 급히 돈을 쓸 일이 생겼소. 이만 줄이오. 이반 주린 어쩔 도리가 없었
다. 나는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짓고 돈이면 속옷이며 일체의 내 뒤치다꺼리를 는
사베리치를 돌아보며 이 소년에게 1백 루블을 주라고 명령했다.
"1백 루블을요? 그건 무슨 돈인데요?" 사베리치는 어리둥절해진 얼굴로 물었
다. "그 사람한테서 꾸어 쓴 둔이야."
나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사베리치는 물러서지 않고 꼬치치
캐묻기 시작했다. "꾸어 쓴 돈이라구요? 아니 도련님, 언제 그렇게 많은 빚을
만들었습니까? 말씀하시는게 이상한데요. 난 모르겠습니다. 돈을 꾸어 쓰시는건
도련님 자유지만 난 그 빚을 갚아 드릴 수 없습니다." 만일 이 결정적인 순간에
완고한 이 노인의 기를 꺾어놓으면 앞으로 새로운 속박에 얽매여 곤란을격을 때
가 많으리라고 생각한 나는 위압적인 시선을 던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베리치. 나는 네 주인이고 너는 내 종이란 걸 모르니? 돈을 내 것이다. 내
돈 내 마음대로 쓰는 무슨
참견이냐? 1백 루블은 당구 게임에서 잃은 돈이다. 잔소리 말고 내가 하라대
로 해!" "도련님, 표트르 도련님...."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를 너무 슬프게 하지 말아 주십시
오. 소중한 도련님, 이 늙은 것의 말을 듣고 그 도둑놈에게 '그건 장난이다. 나
한테는 그렇게 큰 돈이 없다.'고 쪽지에 적어 보내십시오. 1백 루블이라니, 렇게
큰 돈을 빼앗기다니, 말도 안되지. 호도 이외엔 어떤 안 된다고 부모님께서 엄
하게 이르셨다고 그 도둑놈한테 써 보내십시오. 그리고...." 나는 눈을 부라리면
서 그의 말을 막았다. "듣기 싫다! 잔소리 말고 빨리 돈을 갖고 와! 내 말을 안
들으면 당장에해고 하겠어!" 시베리치는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돈을 가
지러 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정든 이 노인이 가엾게 생각되었지만 속박의 사슬
을 끊고 자유로운 몸이 되기 위해서는 할 후 없는 일이었다. 또 나는이미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도 싶었다. 돈은 주린에게 전달되었다. 사베리
치는 주스러운 이 여관에서 한시 바삐 나가려고 했다. 얼마 후 는 출발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러 왔다. 나는 내게 필요한 여러 가지를 가르친 린에게 작별 인
사도 하지 않고, 또 언제 그를 다시 만나리라는 생각도 하지 고 신비르스크를
또나게 되었다. 제2장 길잡이 낯선 이 곳도 내 조국인가, 누가 나를 이런 데로
끌어들였나. 오고 싶어 온 것도 아니고 말체 끌려 온 것도 아고 성급한 의지와
술집의 술냄새가 순진고 다부진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다. 낯선 이곳으로. -옛
민요-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당구 게임에서
잃은 돈 1백 루블은 그 당시로서는
쾌 큰 돈이었다. 신비르스크의 여관에서 취한 내 행동이 어리석었다는 것을나
자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베리치에게도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괴로움으로 가득찬 머리를 가눌 수조차 없게 되었다. 선량하고 충실
한 이 노인과 화해하고 싶었으나 적당한 구실을 찾을 수가 없어 나는 이런 로
말을 건넸다. "사베리치,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고 뉘우치고 있으니 이젠 마음을
돌려줘. 어제는 어쩌다 그만 그렇게 돼 버리고 말았어. 정말 미안해. 이제부터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그러니까 사베리치, 화를 내지 말아
줘." 그러자 사베리치는 한숨을 쉬고 나서 대답했다.
"표르트 안드레비치 도련님, 나는 나 자신에게 화를 낸 겁니다. 내가 잘못했요.
도련님을 혼자 여관에 남겨두고 나 혼자서 물건을 사러 나간 게 잘못이었어요.
어제는 아무래도 귀신한테 홀렸던가 봅니다. 그곳 성다의 일을 보는 영감의 마
누라가 도련님의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라 인사라도 하고 간다고 잠깐 렀는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 땐 도련님 생각을 미처 못했습니다. 아아, 주인 어
른과 마님을 무슨 낯으로 대할꼬. 도련님이 술을 마시고 노름을 했다는 걸 두
분께서 아시면 내 입장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엾은 사베리치는 슬픔에 잠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앞으로 그의 승낙없이는 단돈 1코페이카도 지 않겠다고
나는 약속했다. 노인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 같기는 했으나, 여전히 이따
금 고개를 저으면서 '1백 루블! 적은 돈이 아니야!'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임지는 차츰 가까워졌다. 내 주위에는 언덕과 골짜기로 주름진 광막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이 눈에 덮여 있고 해는 기울어지고 있었다. 우리를 태
운 말은 좁다란 길을 미끄러져 갔다. 이 길이란 것은 정확히 말하면 농부들의
썰매가 지나간 자국이었다. 갑자기 노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모자를 벗고 내
게 얼굴을 돌렸다. "도련님, 되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 그래?" "날씨가 말썽을 부릴 것 같습니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어요. 저기
보십시오. 눈발이 흩날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러나, 괜찮
아." "아니, 저쪽을. 저쪽 하늘을 보십시오. 저건 구름입니다."
흰 지평선과 맞닿은 동쪽 하늘끝에 잿빛 구름이 보였다. 나는 처음에 그것을
언덕인 줄 잘못 보고 있었다.
"도련님, 저 구름은 큰 눈보라가 불어닥칠 조짐입니다." 사베리치가 염려스러
운 듯이 말했다. 이 지방의 눈보라는 아주 지독해서 농작물을 나르는 썰매의 렬
이 눈 속에 파묻혀 버리는 일도 가끔 있다는 말을 나도 들은 적이 있었다. 사
베리치는 자기 의견에 따라 줄 것을 바랐으나 내가 보기에는 바람은 별로 세게
부는 편이 아니었다. 나는 눈보라가 닥치기 전에 다음 숙박지에 도착할 생각으
로 썰매를 더 빨리 몰라고 명령했다. 사베리치는 연방 채찍을 휘둘렀다. 그의
눈은 줄곧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은 차츰 거세게 불기 시작했고
구름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 하늘을 잿빛으로 뒤덮었다. 싸라기눈이 내는가 했더
니 갑자기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하늘과 들판의 눈바다가
한데 뒤엉켜 암흑의 천지를 만들고 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련님!
큰일입니다! 굉장한 눈보랍니다!"
나는 포장 안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주위는 온통 암흑과 눈보라에 뒤덮여 었
다. 회오리치는 바람은 마법사의 마술처럼 엄청난 힘을 보이면서 사납게 울부짖
고 있었다. 마부석의 사베리치도 포장 안의 나도 눈사람처럼 되었다. 힘겹게 썰
매를 끌던 말은 얼마 못 가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왜 안 가는 거야?"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러자 사베리치는 내려서면서 대답했다. "그
러지 마십시오, 도련님. 말한테는 죄가 없습니다... 남의 의견이라면 무엇이든 아
들이지 않는게 도련님 취민가 봅니다."
그는 화가 난다는 듯이 언성을 약간 높였다. "신비르스크로 되돌아가 여관에
서 따끈한 차라도 마시고 아침까지 푹 쉬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빨리 썰매를
몰라니 어디로 몰고 가란 말입니까? 도시 방향을 분간할 수 없는데." 사베리치
는 말대로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눈보라는 점점 세게
몰아닥쳐 썰매 주위에 눈 언덕을 쌓아 올렸다. 말은 고개를 떨구고 이따금 몸을
부르르 떨면서 서 있었고 노인은 말의 갈기에서 눈을 털어 내기도 하고 마구를
고치기도 하면서 썰매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을이나 길의 흔적라도 보
였으면 나는 사방 팔방으로 눈을 돌렸으나 회오리 치면서 불어닥치는 눈보라 이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검은 물체 같은 것이 문득
내 시야에 들어왔다. "사베리치! 저기 뭐가 보이지?"
나는 그 곳을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노인은 내가 가르키는 곳을 응시하다가
마부석에 앉으면서 말했다. "보이긴 하지만 뭔지 모르겠어요. 썰매 같기도 하고
나무 같기도 하고... 움직이고 있구나. 늑대가 아니면 사람이 틀림 없어요."
나는 정체 불명의 그 물체를 향해 썰매를 몰고 가라고 사베리치에게 명령다.
그쪽에서도 우리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분 뒤 우리 눈앞에 한 사나이
가 나타났다. "여보시오, 좀 물읍시다. 우린 길을 잃었소."
사베리치가 큰 소리로 그 사나이에게 말을 건넸다. "이게 길이오."하고 사나
이가 대답했다. "당신들이 서 있는 길 말고 어떤 길을 말하는 거요?"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말했다. "자네는 이 근처 지리를 잘 아나? 우리를 하밤
묵을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수 없겠나?
"물론 그럴 수 있지요. 이 고장이라면 내 발길 안 닿은 곳이 없지요. 말을 고
도 다녔고 썰매를 타고도 다녔고, 구석구석 안 간 본데가 없어요. 하지만 날씨
가 이 모양이니 길을 잘못 들기 쉬워요. 여기서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습니다. 눈보라가가 그치고 하늘이 맑아지면 별빛으로 길을 찾을 수있어
오."
농부의 말을 듣고 나는 기운을 냈다.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들판의 한복판서
밤을 새우려고 결심했을 때 그 사나이가 재빨리 마부석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사베리치에게 말했다. "저쪽으로, 오른쪽으로 갑시다. 마을이 가까이 있는 것 같
으니까." "뭐 마을이 가깝다고? 그래 당신 눈에 길이 보인단 말이오? 죽어도 제
말이 아니고 부서져도 제 썰매가 아니라 아무 데든지 마구 달려 보라 이 말이로
군!" 사베리치의 말이 옳다고 나는 생각했다.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지?" 나는 사나이에게 물었다.
"저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연기가 섞여 있어요. 연기 냄새가 납니다. 그건 을
이 가깝다는 말이지요." 나는 그 사나이의 영리한 머리와 날카로운 후각에 탄복
하면서 사베리치에게 말을 몰라고 말했다. 말은 무거운 걸음으로 눈을 해치면서
썰매를 끌었다. 썰매는 골짜기로 미끄러져 내려가기도 하고 눈더미 속에 박히기
도 하면서 굼벵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폭풍우 속을 항해하는 배와도 같
았다. 사베리치는 연방 내 옆구리에 부딪히면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나는 갈
대로 엮은 발을 내리고 털가죽 외투를 뒤집어쓰라고 눈보라치는 소리를 들으며
흔들리는 썰매에 몸을 맡기고 있다가 어느 새 잠이 들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꿈은 암으로 내 생애에 일어날 여러 가지기막힌 사건과
맞추어 생각하면 하나의 예언과도 같은 암시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독자들은
이 말을 양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간은 선입감을 몹시 경멸하면서도 미
신에 의족하려는 선천적인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경헝ㅁㄹ충해서
익히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이 들자 나는 현실 본연의 모습이 몽상
속으로 밀려 들어와 그 환상과 한데 어울릴 대 맛 볼 수 있는 감각과 감정에 싸
였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우리는 황야를 헤매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대
문을 보았다. 그리고
썰매를 탄 채 안으로 들어갔다. 맨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내가 집에 아
온 것을 보고 아버지가 화를 내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과 그것을 계획적인 반항
행휘로 간주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엇따. 이러한 심정으로 썰매에서
내리자 어머니가 슬픔에 잠긴 얼굴로 나를 맞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조
용히 해라. 아버님께서 병환 중이신데 위독하다. 너를 마지막으로 만나보고싶어
하시니 가 뵈어라." 나는 공포에 싸여 어머니의 뒤를 따라 침실로 들어 갔다. 방
안은 희미한 불빛으로 밝혀져 있고 침대 곁에는 사람들이 슬픔 얼굴로 서 있었
다. 내가 침대 곁으로 조용히 다가가자 어머니는 휘장을 조금 걷어올리고 말했
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페트루샤가 돌아왔어요. 당신이 외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왔어요. 축복해 주세요." 나는 무릎을 꿇고 침대 위로 시선을 보냈다. 그런
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고 구레나룻이
시커면 농부였다. 그는 유쾌한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는 어리둥절해
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대체 어찌된 영문입니까. 이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잖아
요? 왜 내가 이런 농부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 거지요?" 그러자 어머니는 "마찬
가지란다. 페트루샤. 이 어른은 네가 결혼할 때 양아버지가 돼 실 분이야. 어서
이 분 손에 키스하고 축복을 받아라." 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
했다. 이 말을 듣고 농부는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뛰어내리더니 도끼를 마구
휘두르면서 닥치는대로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나는 달아나려고 했으나 뜻대
로 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방 안은 시체로 가득찼다. 나는 체에 발이 걸려 엎어
지기도 하고 방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에 미끄러져 자빠지기도 하면서 갈팡질팡
했다. 그 때 험상궂게 생긴 그 농부가 말했다. "겁낼 것 없다. 내 축복을 받아
라." 공포와 의혹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순간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사베리치
가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도련님, 내리십시오. 도착했습니다." "여긴 어디야? 어디에 도착했다는 거
야?" 나는 눈을 비비면서 물었다. "주막 집입니다. 하나님이 우릴 도우셨어요.
도련님, 빨리 내려서 몸을 녹이십시오." 나는 썰매에서 내렸다. 눈보라는 조금
누그러졌지만 계속되고 있었다. 코를 어 가도 모를 만큼 주위는 캄캄했다. 주막
주인이 램프를 들고 옷소매를 바람을 막으면서 문 앞까지 나와서 우리를 맞았
다. 나는 좁기는 해도 꽤 정돈이 잘 된 깨끗한 방으로 안내받았는데 관솔불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벽에는 소총과 통이 높은 카자흐 모자가 걸려 있었다.
주인은 우랄 강 유역의 카자흐 부락에서 태어난 예순 안팎의 농부였는데 노답
지 않게 기운이 왕성해 보였다. 사베리치가 다기를 넣은 상자를 들고 들어와 차
르 끊일 테니 불을 좀 갖다 달라고 했다. 나는 그 때만큼 차를 마시고 싶은 적
이 없었다. 주인은 차 끊일 준비를 하러 나갔다. "그 길잡이는 어디 있지?"
나는 사베리치에게 물었다. "여기 있습니다, 나리." 대답하는 소리가 천장쪽에
서 들려 왔다. 거의 천장에 가깝게 놓이 만들어진 침대로 시선을 보내자 시커ㅓ
구레나룻과 번쩍이는 두 눈이 보였다. "왜 그러나? 몸이 동태가 되었나?"
"몸이 얼지 않을 수 있습니까? 걸친 건 헤진 외투 하나뿐인데요. 털가죽 옷이
있지만 어제 저녁 술값으로 저ㅓ당
잡혔어요. 추위쯤이야 별 게 아니겠지하고 말입니다." 그 때 주인이 펄펄 끊
는 사모바르를 가지고 들어 왔다. 나는 그 길잡이에게 차를 한 잔 권했다. 농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의 풍채가 주는 인상은 꽤 좋은 편이었다. 나이는 마흔
살 가량이고 키는 보통이었으며 어깨가 딱 벌어진데다 얼굴에 궁상이 조금도 없
어 몸 전체가 아주 야무져 보였다. 시커먼 구레나룻에는 한 올 두 올 흰 터럭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빛을 내뿜듯 생기가 넘치는 두 눈은 잠기도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제법 호인 같은 느낌을 주면서
도 만만찮은 투지를 나타내고 있었으며, 머리는 가장자리를 짧게 깎아 올려 둥
그렇게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은 누더기가 된 외투와 타타르 식 누비바였다. 차
를 따라 주자 그는 한 모금 마시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나리. 이왕이면 술을 한 잔 주십시오... 술을 가져오라고 하십시오. 우리 카흐
들은 이런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서슴지 않고 농부의 청을 들어 주었다. 주인은 나무상자에서 술병과 을
꺼내 들고 농부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자네 또 나타났군. 어디를 돌아다니다가 이 고장으로 굴러 들었나." 길잡이
는 의미 있는 듯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고 비유하는 투로 대답했다. "채소밭에
날아가서 삼씨를 쪼아먹고 있으니까 할망구가 돌을 던집디다. 맞진 않았죠. 이쪽
패들은 어떻게 됐어요? 뭘하고 있지요?" "여전해. 밤의 기도에 집합시킬 작정
으로 종을 치려 하니까 신부의 여편네가 훼방을 놓더군. 종을 치면 안 된다는거
야. 신부가 외출 중이었으니 무덤 속에 마귀가 들어갔던 것이지." 주인의 대답
도 알쏭달쏭한 것이었다. "말 마시오. 비가 오면 버섯이 돋아나고 버섯이 돋아
나면 바구니도 생겨요. 도끼는 꺼내지 말고...." 길잡이는 여기서 말을 끊고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숨겨 두시오. 산지기가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나리, 나리
의 앞날을 축복하며!"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들고 성호를 긋더니 단숨에 들이
켰다. 그리고 내게 인사를 하더니 다시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나는 그 때 수수께끼 같은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가서 것
이 1772년에 반란(푸가초프가 반란을 일으킨 전 해)을 일으켰다가 곧 진압된
우랄 카자흐 군의 정세를 이야기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베리치는 기분 나
쁜 표정으로 길잡이와 주막 주인을 번갈아 보면서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지방 말로 우묘트(초원지대의 술집을 겸한 여인숙)라고 불
리우는 이 주막은 부락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도둑놈들 소굴처럼 보였
다. 기분이 몹시 불쾌했으나 날씨가 날씨인 만큼 어쩔 수가 없었다. 어두운 눈
보라 속으로 썰매를 몰고 나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베
리치는 불안해 하는 얼굴이 무척 재미있게 보였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시이 흘
러 나는 한잠 잘 생각으로 벽에 갖다 붙인 벤치에 누웠다. 사베리치는 페치카
위에 자리를 잡았고 주인은 방바닥에 누웠다. 이윽고 사람들은 모두 코를 골기
시작했고 나도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느즈막하게 눈을
떠 보니 바람은 가라앉고 햇빛이 온 벌판에 가득했다. 끝없는 광야는눈이 부시
도록 흰 천으로 덮여있는 것 같았다. 사베리치는 출발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주인을 불러 숙박 요금을 치렀다. 요금이 쌌기 때문에 사베리치는
여느 때의 버릇처럼 말다툼을 하지 않았고 값을 깎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젯
밤의 의혹도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져 버렸는지 얼굴 표정이 아주담담했다. 나
는 길잡이를
불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사베리치에게 사례금으로 50코페이카를 주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50코페이카요? 무슨 사례끔이 그렇
게도 많습니까, 도련님. 눈 속에서 헤매는 걸 썰매를 태워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그 사례금인가요? 도련님 좋은 대로 하십시오. 난 모르겠습니다. 우리한테는여분
의 돈이 없어요. 돈을 헛되게 없애면 나중에 그만큼 고생하게 된다는 것도 좀
생각하셔야지요." 돈 문제에 대해서는 사베리치와 다투어도 소용없었다.그의 허
락없이는 단돈 1코페이카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부터 돈지갑을 그가 꽉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난이라고까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불안한 상태에서 우리를 구해 준 사람의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 그대로 넘겨 버릴 수는 없었다. "좋아."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50코페이카가 아까우면 내 옷가지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 꺼내 줘. 이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 너무 얇으니까 코끼 가죽으로 만든 덧
옷을 줘!" "천만의 말씀입니다. 도련님. 어째서 이 사람한테 표트르 도련님의 토
끼 가죽 옷을 줘야 합니까? 안 됩니다. 안 돼요. 이런 놈에게는 줄 필요가 없어
요. 술집이 눈에 띄기가 바쁘게 잡혀 먹어요." 이 말을 듣고 길잡이가 입을 열
었다. "이봐 영감,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내가 술집에 잡혀 먹건 어떻게
하건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란 말이야. 나리가 자기 옷을 주시겠다는데 왜 영
감쟁이가 주책없이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는지 모르겠네. 제 신분이 뭔지 잊어버
렸나? 영감은 그 입 덮어 두고 나리가 하라는 대로 하면 돼." "하나님이 두렵지
않느냐, 이 도둑놈아!" 사베리치는 화를 냈다.
"도련님은 아직 분별이 모자라신다. 분별 없는 인정을 쓰시는 그 틈을 타서 는
값진 토끼 가죽 덧옷을 빼앗을 작정이지? 어림없는 수작. 도련님이 입은 옷을
네놈 몸에 걸쳐 보겠다고? 안 돼!" "자, 이젠 그만 하고 빨리 토끼 가죽 옷을
이리 갖고 와." 하고 내가 말하지 사베리치는 풀 죽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아, 한심한 일이다. 새것이나 다름없는 토끼가죽 옷을 주다니! 은혜를 베어
도 고마워할 줄 모르는 떠돌이 주정뱅이에게 주다니!"
사베리치는 할 수 없이 토끼가죽 옷을 꺼내 왔다. 사나이는 그것을 몸에 대보
면서 좋아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입었다. 옷이 너무 작아 여기저기서 실밥
터지는 소리가 났다. 사실 이 옷은 내 몸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실밥 터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사베리치는 험악한 얼굴로 눈을 부라리며 그를 쏘아 보다. 길
잡이는 내 선물에 대만족이었다. 그는 썰매 있는데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고맙습니다, 나리. 나리의 인정에 하나님의 보답이 있기를 빕니다. 고맙습니다.
나리의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제 갈 곳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에
도 생각 못한 길잡이와의 운명적인 첫만남이었다.
주막을 떠난 지 얼마 안 가서 나는 어젯밤의 눈보라도, 그 길잡이도 그리고토
끼 가죽 덧옷도 모두 잊엉버리고 말았다. 올렌부르크에 도착하자 나는 곧장 장
군을 찾아갔다. 그는 늙어서 허리가 구부러진 백발 노인이었다. 낡고 색이 바랜
군복은 안나 요아노브나 여왕시대(1730~40)의 군인을 연상케 했다. 편지를주자
그는 겉봉의
아버지 이름을 보더니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월은 정말 빠르구나! 안드
레이 페트로비치가 자네 나이만 할때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훌륭한 들
이 있으니, 세월은 정말 빨라!"
장군은 이렇게 말하고 서평을 가하면서 낮은 소리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그
의 말투에는 독일 사투리가 많이 섞여 있었다.
'안드레이 카를로비치 각하. 각하께옵서..., 이거 무슨 글투가 이런가. 예의도좋
고 군대 규율도 좋지만 옛날 동료한테 각하께옵소라니! '각하께옵서도 기억하고
계실' 흠! '그리고 고인이 되신 민 원수... 행군할 때의... 그리고 또 칼로 링카를'
으흠, 옛날 장난했던 일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구나! '다름아니오라 돈를
보내오니'...흠, '고슴도치 장갑을 끼시고'... 고슴도치 장갑이라? '고슴도치 갑
을 끼시고 다스리시와'... 이건 러시아의 옛날속담을 인용한 말 같은데 무슨 뜻일
까? 자네 아나?" 그는 편지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순진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그건 너무 엄격하게 다루지 말고 위로와 친
절을 많이 베풀어 편안하게 지낼수 있도록 해주라는 뜻입니다." "응, 알겠어... '
조금도 자유를 주지 마시고 규율을 어기면 가차없이' 아니, 그런 뜻이 아닌 것같
다... '돈아의 거주증을 등봉하오니'... 어디 있나, 아 이거로구나.' 세묘노프 연대
에 연락하시어'... 응, 좋아... 모든걸 소원대로 처리하지. '실례인 줄은 아오나
옛정을 생각해 각하를 포옹하오니 해량하기 바라옵니다.'... 여차 여차라 ...이제
알았다." 그는 편지를 다 일고 나서 내 거주증을 책상 한쪽에 놓고 말했다. "
자네를 장교로 임관해서 XX연대에 배속하니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내일 곧 베
로고르스크 요새로 출발하게. 거기서 자넨 미로노프 대위의 지휘하에 들어간다.
미로노프 대위는 정직하고 친절한 사람이야. 가서 군기를 잘 지키고 열심히 근
무하게. 이곳 올렌부르크에는 자네한테 맡길 만한 일이 없네. 군인이란자고로 바
빠야 한단
말일세. 오늘은 손님이니 내 숙소에 가서 함께 식사를 하세." '일이 점점 우
습게 돼 가는구나.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근위대 중사로 등록된 건 아무 소이
없는 일이야.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야. 근위대 아닌 XX연대에 들어가 키르키
즈 카이사츠크 초원의 요새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니. 이게 군대 생활의 운명이었
던가!' 나는 안드레이 카를로비치의 숙소에서 늙은 부관과 함께 셋이 식사를
했다. 노장군의 엄격하고 검소한 생활이 기풍이 그 식탁을 지배하고 있었다. 홀
아비 생활을 하는 노장군의 심사가 나를 멀리 떨어진 변경의 요새 수비대로 보
내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튿날 나는 군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제3장 요새
우리는 변경의 요새 수비대. 빵과 물로 사는 중영창이 정황 모르고 적의 무
리가 고기만두 달라고 빌어닥치며 대포에 우산타 재어 손님을 접대 하리, 유산
탄의 향연 -병상의 노래-
자네, 그것은 구식 사람들이네 -미완성 인간-
베르고르스크 요새는 올렌부르크에서 40킬로키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길
은 야이크 강의 험한 강둑을 따라 이러져 있었는데, 아직 얼자 않은 강물은 양
쪽 둑이 흰 눈에 덮여 있기 때문인지 검푸른 빛이 한창 짙어 보였다. 강 건너
편에는 키르키즈의 황야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흔들리는 썰매에 몸을 내긴 채
나를 기디리고 있을 앞으로의 생활을 상상해 보았다. 수비대 생활은 내게 아무
런 흥미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내 상관이 될 미로노프 대위에 대해 여러모로
상상해 보았는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이외에는아무것
도 모르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부하가 사소한 과오를 범해도 빵과 물만 먹고 살야
하는 영창에 처박아 넣은 엄격하고 화 잘내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놀이 깔리기 시작했다. 썰매는 제법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요새는 아직 멀었나?" 나는 사베리치에게 물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도련님. 아, 이제 보이는군요." 나는 견고한 성벽과
위압적인 망루를 상상하면서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눈에 띄는 것은 조그마한 락
뿐이었다. 마을 한쪽에는 건초더미가 서넛, 반쯤 눈 속에 파묻혀 있고 또 한쪽에
는 기울어져 가는 풍차가 보리수나무 판자로 만든 날개를 힘에 겨운 듯이 달고
있었다. "요새가 어디 있다는 거야. 아무데도 안 보이잖아."
나는 마부에게 물었다. "저기 보이는 것, 저겁니다."
마부는 눈앞의 마을을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얼마 후 우리는 그 마을에 당했
다. 마을 어귀에는 무쇠로 만든 구식 대포가 놓여 있었다. 길은 좁고 구불구불했
으며 집들은 대게 처마가 낮고 지붕은 모두 짚으로 엮어서 덮은 것이었다. 나
는 사령관의 숙소 앞에 썰매를 갖다 대라고 마부에게 명령했다. 얼마 후 마는
언덕 위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목조 건물 앞에 썰매를 세웠다. 그 집 옆에는 교
회당이 서 있었다. 나를 맞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현관으로 들어
가 거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늙은 상이군인 한 사람이 탁자에 걸터 앉아 초
록색 군복 상의의 팔꿈치에 헝겊을 대어 깁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안내를 했다.
"들어가십시오. 모두들 계십니다."
상이군인이 대답했다. 나는 옛날식으로 장식된 아담한 방으로 들어갔다. 한쪽
구석에는 찬장이 놓여 있고 벽에는 액자에 넣은 장교 임명장이 걸려 있었다. 또
그 옆으로 키스트린과 오티아코프 요새의 점령이라든가, 색시를 선보는 장이라
든가, 죽은 고양이를 묻는 장면 같은 그린 값싼 판화들이 울긋불긋 걸려 있었
다. 창문가에는 소매가 없는 덧저고리를 입고 머릿수건을 쓴 뚱뚱한 보인이 앉
아서 장교복을 걸친 애꾸는 노인이 두 손으로 받쳐들고 있는 실을 감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부인은 일을 계속하며 물었다. 나는 이곳에 배속된 사람인데 의무상 대위님계
신고를 하러 왔다고 대답하며
애꾸눈 노인이 사령관인 줄 알고 그에게로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러자 부이
내 말을 가로막으며 이렇게 말했다.
"쿠즈미치는 지금 안계세요. 게라심 신부 댁에 가셨지요. 하지만 마찬가지예요.
내가 이 집 안주인이니까요.
거기 앉으세요." 부인은 큰 소리로 하녀를 불러 카자흐의 하사관을 찾아오라
고 일렀다. "실례의 말씀이지만 어느 연대에서 근무하셨지요?"
근위대에서 어떻게 이런 변경지대의 요새 수비대로 전속되었느냐는 질문이다.
나는 이유는 어떻든 상부에서 그렇게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왔을 뿐이라고 답
했다. "그럼 필시 근위대 장교로서 불미스러운 사고라도 냈던 모양이군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뒤요." 대위 부인은 주책없이 말을 걸고 있는 애꾸눈
을 핀잔했다. "이 젊은 분은 먼 길을 오셔서 몹시 피로해요. 여행하면 피로하다
는 것쯤은 알아야지. 쓸에없는 소리 하지말고 그 손이나 좀 똑바로 들어요... 그
런데...." 부인은 다시 내게로 얼굴을 돌리더니 말을 이었다.
"이런 외진 곳으로 쫓겨왔따고 해서 뭐 그리 비관할 건 없어요. 당신이 처음이
아니고 또 마지막도
아닐테니까요. 참고 지내다 보면 정도 들게 될 거예요. 시바블린은, 그 알렉이
이바니치는 사람을 해친 죄값으로 이 곳으로 전속된 지 벌써 5년이나 돼요. 대
체 무슨 악마한테 홀려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어떤 중위와 겨외로 나
가 서로 칼을 빼들고 찌르기 시합을 하다가 푹 쑤셔 버렸지요. 알렉세이 이니치
가 그 중위를 찔러 죽인거예요. 입회인은 두 사람이나 있었다지 뭡니까. 그렇게
된 이상 별 수 없지요. 무사히 넘기지는 못해요. 아무튼 사람은 실수를 저지르
도록 돼 있어요." 그 때 하사가 들어 왔다. 체격이 단단해 보이는 젊은 카자흐
였다. "막시미치! 이 장교님을 깨끗한 숙소로 모셔다 드려."
하고 대위 부인은 그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 장교
님을 이반 포레자예프의 집으로 모시는게 어떻겠습니까?" "거긴 안 돼, 막시미
치. 포레자예프네 집은 비좁아서 안 돼. 그리고 그분은 우리 아이의 대부님이만
그래도 우리를 웃사람으로 대하고 있으니 난처해. 가만있자 이 장교님은... 이름
이 뭐라고 하셨더라? 아아 참, 표트르 안드레비치라 하셨지요? 표트르 안드레비
치를 세무 쿠조프네 집으로 모셔. 그 망할 녀석이 글쎄 자기네 말을 우리 채소
밭에 놓아 두었다니까! 그건 그렇고 막시미치, 뭐 별다른 일은 없자?" "네 덕분
에 아무런 일도 없습니다. 다만 푸로홀로프 하사가 목욕창에서 몰 한 바지 때무
넹 우스치니야 제그리나와 맞붙어 싸운 것밖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하고 카자흐 인이 대답했다. "푸로홀로프와 우스치니야를 불러서 싸운 까닭을
알아보고 두 사람에게 단단히 훈계를 해 줘요. 그럼 막시미치, 자넨 표트르 안
드레비치를 숙소로 안내 해드려." 나는 인사를 하고 물러나왔다. 하사는 요새
끝쪽의 높은 강둑 위에 있는 조그마한 오두막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 집의
반은 세묜 쿠조프네 식두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나머지 반을 사용하게
되었따. 방은 한 칸
뿐이었지만 비교적 깨끗했고 칸막이를 해서 가운데가 막혀 있었다. 사베리는
곧 방안을 정돈하기 시작했고 나는 작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눈앞에는 황량한
들한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창문 가까이 엇비슷하게 오두막집 몇 채가 보였
고 한길에서는 너댓 마리의 닭이 한가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무통을 든노파
라 문 앞
층계에서 돼지를 부르는지 돼지들이 꿀꿀대며 그쪽으로 몰려갔다. 말하자면이
와 같은 한산한 풍경들이 내 청춘을 보내도록 결정된 고장이었다. 나는 서글프
기만 했다. 나는 창가에서 물러나 사베리치의 잔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저녁밥도 먹지 않고 잡자리에 들어가 버렸다. 사메리치는 근심스러운 목리로 중
얼거리고 있었다. "참 큰일이로군!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겠다니. 그러다가 도련
님이 병이라도 나면 마님께선 뭐라고 하실까?" 이튿날 아침 옷을 갈아 입고 있
는데 문이 열리며 키가 작달막한 젊은 장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가무잡한
얼굴이 어지간히 못생긴 사나이였지만 무척 활발하게 보였다. "실례합니다.
이렇게 허물없이 인사드리러 온 걸 용서하십시오. 나는 어제 당신이 도착한 걸
알았습니다. 이제야
인간다운 사람을 볼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
도 앞으로 얼마 동안만 여기 있어 보면 이러한 심정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는 프랑스 어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친구가 바로 근위대에서 결투를
하다가 쫓겨온 장교임을 알았다.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시바블린은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가 하는 말은 재치에 넘쳤고 또 흥미가 있었다. 그는 내게 령관의
집안 사정과 그가 사귀고 있는 친구들이며,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경위까지 스
스로 상상해내며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정신없이 웃고 있을 때 어제 사령관 집 문간방에서 군복을 꿰매고 던
상이군인이 들어왔다. 바실리사 에고르브나가 나를 점심에 초대한다는 것이다.
시바블린도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사령관 집에 가까이 왔을 때 광장에는 세
모진 모자를 쓰고 머리를 길게 땋아늘인 늙은 재향군인들이 스무 병 정도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횡대로 정렬하고 있었다. 그 앞에 둥그런실내를 쓰고
중국옷 비슷한 실내복을 입은 사령관이 서 있었는데, 그는 키가 크고 아직도 기
력이 정정한노인이었다. 우리는 보더니 가까이 다가와 나에게 몇 마디 다정스
럽게 인사이 말을 하고는 다시 병정들을 지휘기 시작했다. 우리가 대로 서서 훈
련하는 것을 구경하려고 했더니, 그는 자기도 곧 뒤따라갈테니 실리사 에고로브
나한테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다. "여기 있어 봐야 자네들이 구경할 만한 게 있어
야지." 하고 그는 덧붙여 말했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는 허없는 태도로 우리
를 맞아 주었고, 마치 오랜 친지에게 하듯이 가서 점심 잡수시러 오라고 해라.
마샤는 또 어디 갔어?" 사령관 부인이 말했다. 이 때 얼굴이 둥글고 불그스레
한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처녀가 들어왔다. 연한 불론드 머를 양쪽 귀 뒤로
빗어 넘겼는데 그 작고 귀여운 귀는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나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기는 내가 선입을
가지고 그녀를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바블린으로부터 대위의 딸 마샤가
아주 멍텅구리나 다름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한
쪽 구석에 앉아 수를 놓기 시작했다. 바실리사는 남편이 오자 앉자 다시파라시
카를 보냈다. "손님이 기다리시니 어서 오시라다고 해라." 잠시 후, 대위는 애
꾸눈 노인과 함께 들어왔다. "무슨 일이 그리도 바빠요?" "병정들을 훈련시미
고 있었어. 바실리사 에고로브나." "그까짓 훈련은 해서 뭘 해요. 가르쳐봤자 제
대로 근무할 만한 위인들도 아닌데. 게다가 당신도 근가 어떤 건지 통 모르고요.
그것보다는 집에서 기도나 올리는 편이 나아요. 자, 손님들 어서 앉세요." 우리
는 식탁에 앉았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는 한시도 입을 다물지 않고양친은 어떤
분이며 지금 두 분 다 생존하고 계시는지 어디서 살며 재산은 마나 되는 지를
물었다. 아버지가 농노 3백 명을 데리고 다고 대답하자 그녀는입을 딱 벌렸다.
"어머나, 세상엔 그런 부자도 다 있군요! 우리 집엔 종이라곤 파라시카라는 집
애 하나뿐이에요. 하지만 그럭 저럭 살아 갈 수는 있지요. 그런데 한 가지 마샤
를 시집 보내는 일일 걱정거리예요. 과년한 처녀인데 혼수감을 장만해 놓은 게
하나도 없어서요. 머리빗 한 개와 부엌 비 한 자루, 그리고 목욕탕에 갈 돈로 3
코페이카짜리 은전 한 닢뿐이라니까요. 어떻게 좋은 사람이 나타나 주면 다행이
지만 그렇지 않으면 저 애는 한 평생 처녀로 늙어야 할 거예요."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나는 보기에 민망스러워서 이내
화제를 바꾸었다.
"파시카르 인들이 이 요새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
까?"
"자네,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었나?" 이반 쿠즈미치가 물었다.
"괜히 하는 소리겠지, 여기선 한 번도 그런 소리를 못들었네. 파시키프 놈들의
기를 아주 죽여 버렸고
키르키즈놈들도 단단히 맛을 보여 주었거든. 절대로 우리한테 덤벼들지 못할
걸세. 만일 덤벼든다면 그 때는 내가 한 10년 동안 꼼짝 못하게 혼내 줄 생각일
세." "그럼 부인께서는 어떻습니까?" 나는 대위 부인을 향해 말을 이었다. "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런 위험한 요새에 있으면서 왜 무서운 생각이 안겠
어요? 하지만 이젠 습관이 돼서 아무렇지도 않아요. 약20년 전에 연대에서 처음
으로 여기로 왔을때는 그저주할 이교도놈들이 어찌나 무서웠던지 지금 생각해도
지긋지긋할 정도 였지요. 그 너구리 가죽으로 만든모자가 눈에 띈다든가,그 놈들
의 고함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금방 가슴이 뛰곤 했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예싸가 되어 악당들이 오새 근방에서 말을 몰고 돌아다니고 있다는보고가 들어
오면 귀찮을 따름이지요." "바실리아 에고로브나는 무척 대담한 부입니다. 그건
누구보다 이반 쿠즈미치가 알고 계시는지요." 시바블린이 점잔을 고 한 마디 했
다. "사실이라네. 우리 마누라는 겁쟁이가 아니야." 하고 이반 쿠즈미치가 입을
열었다. "그럼 마리아 이바노브나도 역시 부인처럼 용감하십까?""
"마샤가 용감하냐고요? 천만에요. 저 애는 아주 겁쟁이지요. 총소리만 나면 들
부들 떤다니까요. 한2년쯤 되었을까, 한번은 내 세례명 축일에 이반 쿠즈미치가
축하 포탄을 쏘려고 했더니 글쎄 저 애가 어떻게 겁을 내던지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니까요. 그 후부터 대포는 절대 쏘지 않고 있지요." 하고 부인이 말했
다. 우리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대위와 부인은 침실로 들어가고 나는 시바블린
이 숙소로 가서 그와 함께 밤새 이야기 꽃을 피웠다.
제4장 결투 그래 좋아, 맞서 봐
그 몸뚱이에 구멍을 뚫어 주마 칼맛을 톡톡히 보여 주마.
-크냐지닌- 몇 주일이 지났다. 베로고르스크 요새에서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사령관 집에서는 나를 한식구나 다름없이 대해 주었고
특히 그들 부부가 전경할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나를 기쁘게 했다. 일개 병졸
로부터 장교로 승진해 온 이반 쿠즈미치는 교육을 받지 못해 무식하고 단순한인
간이었지만 그 대신 매우
착실하고 선량했다. 그래서 보통 부인의 손에 쥐어 살기는 해도 오히려 그이
그의 낙천적인 성격과 잘 조화되는 것이었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는 군대 일
도 집안 일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었고 따라서 오새 전체를 마치 자기 집안
처럼 다스리고 있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와도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롭게가까워
졌다. 나는 그녀가 성실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처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
느덧 나는 이 선량한 가족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고 또 경비대 중위인 애꾸
눈 이반 이그나츠이치에게까지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시바블린은 마치 애꾸눈
영감이 바실리사 에고로브나와 심상치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것처럼 지껄인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말은 아무도 곧이 들을 사람이 없는 허튼 말에 지나지 않
았지만, 그래도 시바블린은 그런 소리를 태연히 입 밖으로 내는 것이었다. 나는
장교로 승진됐다. 군대 생활은 조금도 괴로울 것이 없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
은 이 요새에는 검열도 없었고 훈련이나 훈련시키기도 했지만 그들은 여지껏
좌우를 분간 할 만큼도 훈련도 되어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병정들이 방향을
클리지 않으려고 가슴에 성호를 그어 보곤 했으나 그것도 별 효과가 없었다. 시
바블린은 몇 권의 프랑스 서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책을 빌려 읽기 시작
했다. 그러자 문학에 대한 취미가 다시 되살아나 어전 중에는 대개 독서와 번
역 연습으로 시간을 보냈고 ㄸ로는 시를 써 보기도 했다.저녁이면 가금 게라심
신부가 부인인 아클리나 판필로브나와 함께 사령관 집에 나타나곤 했는데, 신부
의 부인은 이 고장에서 수다스럽기로 이름난 여자였다. 알렉세이 이바니치 시바
블린와는 거의 매일 같이 만났지만 날이 갈수록 나는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
낄 수 없게 되었다. 사령관 집 식구들에 대한 변함없는험담, 특히 마리아 이바노
브나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방은 더없는 불쾌감을 주는 것이었다. 시바블린 이외에는
요새 안에서 사귈 만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내게는 없었다. 파시
카르 인들이 요새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을
일으키지 않았다. 우리 요새 주변에는 언제나 평온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 집안 싸움이 평화를 깨뜨린 것이다. 내가 문학 공부를 하고 있었
다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다. 내 습작은 그 당시로서는 상당한 준에
달하는 것이어서 몇 해 후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스마코프로부터 격찬을 받은
적도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며칠 간의 손질을 거쳐 시를 한 편 완성했다. 문학
을 창작하는 사람들이 조언을 요청한다는 구실 아래 자기에게 호의를 가진 독자
를 찾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림이다. 그래서 나도 창작한 시를 리래 가지고
요새 안에서 시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시바블린을 찾아갔다.
나는 기분좋게 호주머니에거 수첩을 꺼내어 다음과 같은 시를 낭송했다.
사랑의 불씨를 꺼 버리려고
아름다운 그대를 지워버리려고 아아, 비통한 마음으로 그대를 피하며
자유의 빛 찾아 나 돌아서네 그러나 나를 사로잡는 그대 눈동자
끊임없이 내 고달픈 머릿속에 어른거리고 사나이 가슴 속에 아픈 못을 박네
내 휴식을 무참히 깨뜨려 버리네
그대 나의 이 쓰라림을 안다면 내게 온정을 베풀어 다오, 마샤여.
규율 엄한 부대에서 그대에게 사로잡힌 나를 본다면
"이 시를 어떻게 생각하나?" 틀림없이 찬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기다하며 나
는 시바블린에게 물었다. 그러나 여느 때는 관대하던 그가 천만 뜻밖에도 대뜸
유치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분한 마음을 꾹 누르고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냐고? 그런 종류의 시는
내 선생인 바실리 키릴루이치 트레자코프스키가 도맡다시피 쓰고 있는데 자네의
시는 그 선생의 삼류 연애시와 비슷하기 때문이지."
이렇게 말하고는 그는 내 수첩을 빼앗아 들더니 어디까지나 신랄한 말투로 정
거리며 한 귀절 한 귀절 한 단어마다 꼬집기 시작했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그
의 손에 들려 있는 수첩을 낚아챈 후 앞으로는 절대로 내 작품을 보여주지 않겠
다고 쏘아붙였다. 시바블린은 내 위협적인 태도를 일소에 붙이고 이렇게 했다.
"두고 보세, 자네가 지금 한 말을 지킬 수 있는지. 시인에게는 자기 작품을 평해
줄 사람이 필요한 거야. 그건 마치 이반 쿠즈미치에게 식전에 워트카 한 잔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야. 그건 그렇고, 자네가 달콤한 불씨니 온정이니 하며 사
랑을 고백하고 있는 그 마샤라는 상대방은 누구인가? 설마 마리아 이노브나를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
"여기 이 마샤가 누가를 가리키든 자네에게 무슨 상관이야?" 하고 나는 미간
을 지푸리며 대답했다. "흐흠! 자존심이 대단한 시인이며 동시에 침착성 있는
애인이시로군. 하지만 친구의 충고도 들어 주는 편이 좋을 걸. 만일 자네가 연
애에 성공하고 싶다면 그 따위 시를 쓸게 아니가 직접 행동을 취해야 할 야."
시바블린은 한층 더 비위에 거슬리는 말만 했다. "그건 무슨 뜻인가. 한번 고
견을 들을 수 있는 영광을 갖고 싶군." "좋아, 설명하지. 그건 무슨 뜻인가 하
니,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어두운 밤에라도 자네를 찾아 다니게 하려면 그 정도
의 미즈근한 연애시는 집어치우고 귀고리라도 한 개 선사하란 말이네." 나는 온
몸의 피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네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그녀에게 그
따위 허튼 소리를 하는가." 나는 분통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근거라고? 그것은 내 경험을 통해서 그 여자의 성격과 습성을 잘 알고 있기 때
문이지." 그는 얼굴에 조소를 띠며 대답했다.
"거짓말 마, 이 비열한 놈아. 그런 파렴치한 수작을 어디다 감히 하는 거야."
나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시바블린의 얼굴이 금방 변해 버렸다. "지금 그 말은
들어 넘길 수 없어. 자네는 내 결투 신청에 응해야 하네." 그는 내 손을 덥석
움켜쥐며 말했다. "좋아, 언제든지."
나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 순간 나는 그 놈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주고 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즉시 이반 이그나츠이치를 찾아갔다. 마
침 그는 사령관 부인의 부탁을 받고 겨울에 먹을 마른 버섯을 실에 꿰고 있는
중이었다. "야, 이거 표트르 안드레비치가 아닙니까. 어서 오시오. 그런데 별안
간 무슨 일로 이렇게 찾아왔는지. 실례의 말입니다만 무슨 급한 용무라도 있습
니까?" 그는 나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알렉세이 이바니치와 다툰 이야기를 간단히 한 후 이반 이그나츠이치게
결투의 입회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러 왔다고 말했다. 이반 이그나츠이치는
한 쪽밖에 없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귀를 기울여 듣고 있다가 이렇
게 말했다. "그러니까 알렉세이 이바니치를 한칼에 찔러 버리고 싶으니 나 보고
그 입회인이 되어 달라 이 말씀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네, 바로 그렇습니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표트르 안드레비치! 무엇 때문
에 그런 짓을 하려는 겁니까? 당신은 알렉세이 이바니치와 다투셨다고요? 그게
뭣이 대단한 일입니까. 욕지거리 같은 건 한쪽 귀로 흘려 버리는 게 상책지요.
저쪽에서 욕설을 퍼부으면 이쪽에서도 한 마디 해주면 그만이고, 저쪽이 콧등을
갈기면 이쪽은 한 대 쥐어 박고, 이렇게 하면 저렇게, 저렇게 하면 이렇게, 그러
다가 헤어지면 그만 아닙니까. 그 다음은 우리가 화해를 붙이지요. 그렇지 않고
친한 사이에 칼부림을 한다는게, 실례의 말씁입니다만 과연 옳은일이라 할 수
있을까요? 사링은 나도 그 친구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당신이 저쪽의 배
를 푹 찔러 버린다면 나로서도 서러울 건 없지요. 그 때는 가슴에 성호를 그으
면 그만일테니까. 하지만 만일 저쪽에서 당신의 몸에 구멍을 어 놓는다면 어떻
게 됩니까. 무엇이 시원하겠습니까. 실례의 말씁입니다만 손해를 보는 건 누구
지요?"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할 줄 아는 중위의 말도 내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결심한 바를 고집했다. 나는 이미 결심한 바를 고집했다. "
그렇다면 마음 편하실 줄 아는 중위의 말도 내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나
는 이미 결심한 바를 고집했다. "그렇다면 마음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한데... 어
째서 내가 입회인 노릇을 해야 합니까. 그럴 필요가 어디 있어요. 사람들이 결
투를 한다... 실례의 말씀인데요, 그게 무슨 구경거리가 됩까. 나는 스웨덴 전쟁
과 터키 전쟁에 종군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런 구경은 실컷 했어요." 나는 입회
인의 역할에 대해 분명치는 못하나마 대략 설명해 보았으나 이반 이그나츠이치
는 끝내 내 말을 알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투를 하건 말건 그건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만일 내가 이 일에 끼어게
된다면 내 의무상 사전에 이반 쿠즈미츠에게 보고해야 합니다. 상부로부터 금
지되어 불상사가 우리 요새 안에서 일어날 것 같으니 사령관님께서는 적당한 조
치를 취하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 보겠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사령관에게 아무 말도 말아 달라고 빌다시피 애원해 겨우 그를 설복고,
그로부터 다짐가지 받았다. 결국 나는 그의 입회를 단념하기로 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나는 사령관 집에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나는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시침을 떼고 명랑한 태도를 보이려고 애썼다. 털끝만큼도 의심을
사지 않음으로써 귀찮은 질몬을 받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나와 같은 입장에 서게 되면 누구나 일부러 시위하고 싶어하기 때에 그러
한 침착성을 가질 수 없었다. 그 날 저녁 내 마음은 자꾸만 감상적인 방향으로
기울러지려 했다. 그래서인지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여느 때보다 유달리 예쁘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녀를 보는 것도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 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모습을 어떤 감동적인 상상과 함께 내 눈에 비치게 던 것이다.
그 자리에 시바블린이 나타났다. 나는 그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이반 이그나츠
이치와의 교섭 결과를 말했다. "반드시 입회인이 있어야 할 필요가 어디 있어?
없으면 없는 대로 해치우면 되지." 우리는 요새 근처에 있는 건초더미 위에서
결투를 하자는 것과 내일 아침 6시에 그곳으로 나가자는 데 합위를 보았다. 남
보기에는 우리들이 아주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으므로 이반 이그츠이치는 반
가운 나머지 그만 쓸데 없는 말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진작 그랬어야지. 아무리 착한 싸움이라도 악한 평화만은 못한 법이고, 승도
좋긴 하지만 자기 목숨만큼 소중할라고요."
만족한 표정으로 그는 내게 말했다. "이반 이그나츠이치, 지금 뭐라고 했지
요? 무슨 말인가요? 구석에서 트럼프 점을 치고 있떤 대위 부인이 끼어들었다.
이반 이그나츠이치는 내 얼굴에 나타난 불만의 빛을 보고 낮에 한 약속을 각
했던지 대답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시바블린이 구원이 손길을 뻗
쳤다. "이반 이그나츠이치는 우리들이 화해해서 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누구하고 다투었군요?" "표트르 안드레비치와 대판 싸움이 벌
어졌었지요." "아니, 그런 또 왜?"
"뭐 대수롭지 않은 일 때문이었어요. 실은 노래 때문에 싸웠습니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
"노래 때문이라니, 참 별일 다 가지고 싸우는군. 그래 어떻게 되었길래 그런걸
가지고 다투었지요?" "네,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에 표트르 안드레비치가 노래
를 한 수 지었는데 오늘 내 앞에서 그걸 부르더군요. 그래서 나도 내가 좋아하
는 '대위의 딸이여, 한밤중의 산책은 그만두세요'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데
여기서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표트르 안드레비치는 불끈 화를 냈지만 나중에
그것이 쑥스러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부르고 싶을 때 노래를 부
르는 건 누구에게나 자유니까요. 그래서 싸움은 원만히 해결되었습니다."
시바블린의 뻔뻔스러운 수작에 나는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으나 나를 빼놓고는
누구도 그의 추잡한 비유를
알아듣지 못했고 또한 그 말에 주의를 기울일 사람조차 없었다. 노래로부터화
제는 시인에게로 옮겨졌다. 사령관은 시인이란 모두 난봉꾼이며 주정뱅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시를 쓴다는 것은 군대 생활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결코 좋은 결
과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니 집어치우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나에게 친절히충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시바블린과 도저히 한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 잠시 후 사령관을 비하
여 그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숙소로 돌아와 사베리치에게 아침 6시에
깨워 달라고 부탁한 후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약속 시간이 되자 나는
이미 건초더미 뒤에서 시바블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에 그가 나타다.
"아무래도 들킬 것 같네. 빨리 결판을 내세." 우리는 군복을 벗어 던지고 조
끼 바람으로 장검을 뽑아 들었다. 바로 그 때 건초더미 뒤에서 이반 이그나츠이
치와 대여섯 명의 병정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그는 우리들에게 사령관 앞으로연
행하겠다고 말했다.
분하기 짝이 없었지만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정들이 우리를 둘러쌌다.우
리는 이반 이그나츠이치의 뒤를 따라 요새로 들어갔다. 그는 몹시 우쭐거리며
의기양양하게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연행해 왔습니다."
우리들 앞에 나선 것을 바실리사 에고로브나였다. "세상에! 이게 무슨 짓들이
에요? 네? 우리 요새에서 살인을 하려 들다니 이반 쿠즈미치, 당장 이 두 사을
영창에 집어 넣어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알렉세이 이바니치, 대검을 이리 놔
요. 빨리 내놓으라니까. 파라시카야, 이 칼을 창고 속에 갖다 둬라. 표트르 안드
레비치, 난 당신이 이런 짓을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그래 부끄러운
생각도 없어요? 알렉세이 이바니치야 별문에이지요. 원래가 살인을 하고 위대에
서 쫓겨왔고 하나님도 믿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다르지 않아요?
글쎄 무슨 생각으로 그 따위 결투를 하려고 했어요?"
이반 쿠즈미치도 부인의 말에 이어 끼어들었다.1 바실리사 에고로브나의 말
이 옳아. 결투라는 건 군인 복무 규정에 의해 절대로 금지되어 있다는 걸 충히
알 만한 사람들이 어째서 결투를 했지?"
한편 파라시카는 우리에게서 장검을 받아 들고 창고쪽으로 가 버렸다. 나는갑
자기 웃음이 터져나겨는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시바블린은 여전히 점잔을 ㅃ
고 있었다. "나는 모든 점에서 부인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인께서 우리에게 징계하는 것은 공연한 참견입니다. 이런
일은 이반 쿠즈미치에게 맡겨야 할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사령관의 임무
입니다." 내 반항에 사령관 부인은 냉정한 어조로 맞섰다.
"원, 이 양반이 나중에 못하는 말이 없군. 부부는 일심동체란 말을 모르는가봐.
여보, 이반 쿠즈미치! 뭘
우물쭈물하고 있어요? 이 사람들을 당장 빵과 물만 주는 영창에 따로따로 어
넣지 못하겠어요? 단단히 정신을 차리게 해야지. 그리고 게리심 신부님을 모셔
다가 속죄를 시켜야 해요.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빌고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의 죄를 뉘우치게 해야지요." 이반 쿠즈미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
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츰 격했던 음성
이 가라앉더니 사령관 부인은 마음을 진정하고 우리들에게 키스를 했다.파라시
카가 우리들의 장검을
다시 가져왔다. 시바블린과 일단 화해의 형식을 취하고 사령관 집에서 나왔다.
이반 이그나츠이치도 함께 따라
나왔다. "그렇게 약속을 해 놓고서 사령관에게 고자질을 해야만 속이 편하시
오?" 나는 성난 음성으로 그에게 말했다.
에고로브나가 나를 붙잡고 꼬치꼬치 캐내서 알았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부이
사령관에게 알리지도 않고 직접 지시했어요. 그렇지만 무사히 끝나서 다행입니
다." 말을 끝내기 바쁘게 그는 자기 집쪽으로 발길을 돌려 버렸기 때문에 나와
시바블린만이 남게 되었다. "이 문제는 끝장이 났다고 할 수 없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이지."
시바블린도 내 말에 동의했다. "자네는 내게 준 모욕에 대해 피를 가지고 보
상해야 하네. 그러나 우리는 감시를 받고 있으니까 당분간은 앰전히 있어야 할
거야. 그럼 또 보세."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헤어졌다. 사령관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마리아 이바노브나 곁에 앉았다. 이반 쿠즈
미치는 집에 없었고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는 집안일로 분주했다. 우리은 소리를
죽여 가며 이야기 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내가 시바블린과 싸우는 바람에
모두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고 나를 가볍게 나무라는 것이었다.
"두 분이 칼을 빼들고 결투하신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정말 기절한 뻔했어요. 1
남자들이란 참 이상해요. 일 주일만 지나면 잊어버릴 그런 대수롭잖은 말 한
마디 때문에 칼부림까지 해 가며 목숨뿐만 아니라 양심까지 그리고 또... 그 어
떤 사람의 행복까지 희생시키려 하니까요. 그러나 저는 당신 편에서 싸움을먼저
걸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어요. 알렉세이 이바니치가 나쁘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
니까요." "마리아 이바노브나,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사람은 아주 못된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지요. 저는 알렉세이 이니
치 같은 사람은 정말 싫어요. 징그러울 지경이에요. 그런데 참 이상해요. 저는
그 사람을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미움을 받기 싫으니까요. 웬지 그
러면 제게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예요." "그럼 마리아 이바노브나,
당신은 정말 어떻게 생각하지요? 시바블린이 당신을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던
요?"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대답을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한참 만에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할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저한테 청혼한 적이 있었어요." "청혼이라니! 그 녀석이 당신한테 청혼을 했
어요? 그건 언제 일입니까?" "작년에... 그러니까 당신이 오시기 두어 달 전이지
요." "그래서 당신이 거절했다는 말이군요."
"알다시피... 알렉세이 이바니치는 물론 똑똑한 사람이고 집안도 훌륭하고 또재
산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결혼식 때 여러 사람 앞에서 키스해야 할 생각을
하니... 정말 싫었어요. 저는 어떤 행복이 온대도 그런 사람하고는 싫어요."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말은 나를 눈뜨게 했고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깨닫게했
다. 이제야 나는 그녀에 대해 시바블린이 악의에 찬 험담을 끊임없이 늘어놓은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우리들이 서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
고 두 사람 사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떼어 놓으려고 했음이 분명했다. 움의 동기
가 된, 그가 함부로 뇌까린 말들이 단순한 악담이 아니라 사실은 계획적인 중
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그 심보가 한층 더 추악하게 생각 되었다. 그
비겁한 놈을 한칼에 찔러 본때를 보여 줘야겠다는 생각이 갈수록 어져 가기만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나는 기회가 다시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러나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이튿날 비가를 지으려고 책상 앞에 앉아 펜
대를 깨물며 시상이 머리에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을때 시바블이
창문을 두드렸다. 나는 펜을 놓고 장검을 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시바블린이
말했다. "승부는 빠를수록 좋지. 감시가 없는 것 같으니 강으로 가세. 그리고 가
면 우리를 방해하는 놈은 없겠지." 우리는 말없이 강가로 나갔다. 그리고 가파
른 비탈길을 내려가 강기슭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시바블린은 나보다 검술이
훌륭했으나 나는 힘과 용기에 있어서 그보다 월등했다. 군대 생활을 한 무슈1
보플레가 검술을 가르쳐 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서 배운 수를 써
보았다. 시바블린은 내가 그처럼 만만찮은 적수인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참 동안 우리들은 서로 털끝만한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드디어시바블
린에게 피로한
기색이 엿보이자 나는 맹렬히 공격을 가하여 그를 강 언저리까지 바짝 몰고나
갔다. 순간 누군가 목청이 터지도록 내 이름을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높은 비
탈길을 사베리치가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나는 오른편 어깨 조금
아래쪽 가슴팍을 찔려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제5장 사랑
색시야 색시야, 인물 잘난 색시야
철없는 몸으로 시집이랑 가지 말라
부모님한테서, 친척들한테서
배워서 쌓아라, 지혜와 분별
지혜와 분별이 더없는 혼수감
-민요-
나보다 잘난 여자 눈에 뜨이면
나를 잊어 주어요
나보다 못난 여자 눈에 뜨이면
나를 생각해 주어요
-민요-
의식이 깨어난 뒤에도 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낯선 방의 침대에 누워 심한 허탈감을 맛보고 있다
는 것 이외에는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침대 곁에서 사베리치가 촛불을 두 손으로 들
고서 있었고 누군가 내 어깨와 가슴팍에 감겨 있는 붕대를 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오랜 잠에서 깨어나
차츰 정신이 맑아져 왔다.
그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여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요, 좀 나으셨어요?"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벌써 닷새째가 됩니다."
사베리치가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나는 그쪽으로 얼굴을 천천히 돌렸다.
"여긴 어디지? 거기 누가 있는거요?"
나는 겨우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침대 곁으로 다가와서 내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어떠세요? 좀 나으셨어요?"
"덕분에... 당신은 마리아이바노브나군요, 마샤...."
나는 힘없이 소리로 대답하고는 말을 이을 기력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사베리치가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소리쳤
다.
"도련님! 깨어나셨군요!"
그는 되풀이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도련님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난 얼마나 걱정했는지, 정말 간이 콩알만큼 오므라 들
었습니다. 아아, 이젠 살았다! 벌써 닷새째예요, 닷새째!"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너무 얘기를 시키면 안 돼요, 사베리치. 아직 회복이 덜 됐으니까요."
이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내 가슴 속에서 여러 가지 상념이 걷잡을 수 없이 맴돌았다.
나는 지금 사령관 집에 있다. 그렇다면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때때로 문병하러 와서 내 용태를 살펴본 것이 틀림
없다.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사베리치에게 물어 보았으나 노인은 고개를 저을뿐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눈을ㅇ
감고 사베리치를 불만스럽게 생각하다가 다시 잠에 빠졌다.
얼마 후 잠에서 깨어나 사베리치를 불렀는데 내앞에 나타난 사람은 그가 아니라 마리아 이바노브나였다. 그녀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음성으로 내게 인사를 했다. 그 순간에 나를 사로잡았던 감미롭고도 황홀한 감정은 도저히 말
로는 표현한 길이 없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손을 내 가슴에 갖다 대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마샤는 손
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문득 나는 그녀의 입술이 내 볼에 닿는 것을 느꼈다. 뜨겁고도 상쾌하고 달콤한 입술
이었다. 순간 불길 같은 정열이 내 몸 속을 맹렬히 휘저었다.
"사랑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 소중한 마리아 이바노브나, 내 아내가 되어주오. 나와 결혼해 줘요."
나는 마샤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 가슴에서 손을 ㄸ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일에 정신을 쓰시면 상처가 빨리 아물지 않아요. 저를 생각하셔서라도 몸을 소중히 해
주세요."
그녀는 나를 기쁨과 감동의 황홀경 속에 잠기게 해 놓고 방에서 나갔다.
사랑이 나를 살려냈다. 마샤는 내 여자, 내 아내가 된다. 마샤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그 순간의 내 전 존재에 보람을 갖다 주었다.
이 때부터 건강이 회복되는 속도가 빨라졌다. 내 상처를 치료해 준 사람은ㅇ 연대에 소속되어 있는 젊은 이발사
였다. 요새에는 의사가 한 사람도 없어 이 이발사가 의사 역할까지 했는데 그는 젊은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세
심하며 말수도 적었다. 사령관 집 사람들은 나를 극진히 돌봐 주었다. 특히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내 머리맡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첫번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마 전에 절반쯤 이야기하다 만
사랑의 고백을 다시 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내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리고 조금도 꾸밈새
가 없는 진실한 얼굴로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는 양친도 자기의 행복을 축복해 줄 것
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혹시 당신 부모님께서 반대하시지는 않을는지요."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의 부드럽고 인자한 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나 아버니의 완고한 성격과
사고방식의 문제였다. 아버지는 내 사랑에 대해 별로 감동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철부지의
분별없는 장난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이 점
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움직일 수 있는 그럴 듯한 편지를 보내 양친의 축복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편지를 써서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보였더니 그녀는 이만큼 걸득력이 있는 감동적인 편지라면 반드시 허락을 하
실 것이라고 탄복하면서 젊음과 사랑에는 반드시 따르게 마련인 맹목적인 신뢰감으로 황홀한 꿈 속에 잠겼다.
시바블린과는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 며칠 후에 화해했다. 이반 쿠즈미치는 내가 결투한 것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들어 봐, 표트르 안드레비치, 나는 자네를 영창에 집어넣으려고 했었지만 그게 아니라도 자네는 이미 벌을 받은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마음을 바꿨네. 그렇지만 알렉세이 이바니치는 그렇지 않아. 그자는 지금 식량창고에 갇혀
있고 그자의 칼은 바실리사 에고로브나가 보관하고 있어. 그 녀석한테는 반성할 시간을 충분히 줘서 자기 죄를
뉘우치게 해야 되니까."
이반 쿠즈미치가 이토록 온정을 기울려 주는가 생각하니 너무나 기쁘고 고마워 내 가슴은 행복으로 가득 찼다.
나는 시바블린에 대한 선량한 사령관은 부인의 동의를 얻어 시바블린을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시바블린은 영창에
서 풀려나자 나를 찾아와서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을 진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나서 모든
불행은 자기가 나빴기 ㄸ문에 일어났다는 점을 인정한다며 과거는 일체 잊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천성이 질투
나 증오심을 오래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 말을 쾌히 받아들여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가 험담을 늘어놓아
나를 중상한 것은 구애를 거절당한데 대한 단순한 화풀이지 그 밖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에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불행한 사랑의 경쟁자를 용서한 것이었다.
며칠 후에는 상처가 완전히 아물어 내 숙소로 옮겨 갈 수 있었다. 나는 집으로 보낸 편지가 나에게 희소식을 안
겨 주리라는 기대를 갖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우울한 예감을 털어 버리려고 노력하면서, 하루가 천 년처럼 지겹게
여겨지는 초조한 마음으로 회답을 기다렸다. 그 때까지 바실리사 에고노브나와 그녀의 남편에게는 아직 그런 뜻
을 비치지 않고 있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결혼 할 뜻을 밝힌다 해도 그들은 놀라거나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는 희망과 자신을 나는 가질 수 있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나는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입에서 일단 그 말이 나오기만 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승낙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어느 날 사베리치가 한 통의 편지를 두 손으로 들고 내 방에 들어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회답이 온 것이다. 나
는 세차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면서 낚아채듯 그 편지를 받아 들었다. 겉봉의 주소와 이름은 아버지의 지필이
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어떤 중대한 운명에 부딪힐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내게 편지는 어머니
가 썼고 아버지는 그 끝에다 짤막하게 몇 줄 덧붙여서 적어 놓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참 동안 겉
봉은 뜯지 않고,
올렌부르크 주 베로고르스크 요새 내
표트르 안드레비치 그리뇨프 앞
이라고 적힌 위엄 있는 글자를 바라보며 그 필적으로 아버지의 의중을 헤아려 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
어 마침내 겉봉을 뜯고 읽어 보았다. 그리고 모든 일이 틀어져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
았다.
내 아들 표트르에게
이반의 딸 마리아 미로노바(마리아 이바노브나를 경멸해서 일컫는 말)와의 결혼에 대해 우리들 부모의 허락과 축
복을 요구하는 너의 편지를 이 달 15일에 받았다. 그러나 너의 요구에는 응할 수 없다. 허락이니 축복이니 하는
기대는 아예 버려라. 축복이 다 뭐냐. 철없이 날뛴 네게는 벌을 내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너는 장교의
신분을 가진 군인이 아니라 말썽만 일으키는 개구쟁이와 다름이 없다. 너는 허리에 칼을 찰 자격이 없는 인간이
라는 것을 네 스스로 증명했다. 칼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차고 다니는 것이지 너처럼 결투를 하기 위해 차고 다
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말할 수 없이 실망했다. 당장 안드레이 카를로비치에게 편지를 써서 너를 베로고르스크
요새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전속시키도록 할 작정이다. 너의 어머니는 네가 결투를 해서 상처를 입었다는 것
을 알고 속을 태운 나머지 병석에 누워 앓고 있다. 너는 어떤 인간이 되려고 그런 짓을 했느냐. 하나님의 각별한
은혜를 바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네가 올바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그 나쁜 버릇만이라도 고쳐 줍시사고 하나
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 아버지 씀.
이 편지는 내 감정을 무척 자극했다. 아버지가 꺼림없이 써 보낸 지나치게 가혹한 표현에서 나는 극도의 모욕을
느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이름을 모멸적인 대명사로 바꿔 부른 아버지의 태도가 내게는 옳지 못한 것으로 생
각 되었다. 베로고르스크 요새에서 더 먼 곳으로 전임되는가 생각하니 가슴이 섬뜩했으나 무엇보다도 나를 슬프
게 한 것은 어머니가 나때문에 몸져 누우셨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결투한 사실을 양친에게 알린 사람은 사베리치가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몹시 분개했다. 좁은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 노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내가 영감 때문에 근 한 달동안이나 생사지경을 헤맸는데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이젠 내 어머니까지 몸져 눕게
만들다니."
사베리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깜짝 놀랐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도련님."
노인은 금시에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변명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도련님이 나때문에 몸을 다치셨다니! 나는 그 때 도련님을 구하려고 알렉세이 이바니치
의 칼을 내 가슴으러 막으려고 달려갔던 겁니다. 이건 하나님도 알고 계십니다! 한데 늙은 몸이라 발이 말을 들
어 주지 않아 ㄸ를 놓쳤지요. 내가 한 건 그것뿐입니다. 그런데 내가 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구요? 아니, 내가 마
님을 뭄져 눕게 만들었다구요? 이거 원통해서 어디 살겠나!"
"시치미 떼지 마라. 누가 부추겨서 고자질을 했나. 바른 대로 말해 봐. 영감은 그따위 짓이나 하려고 나를 따라
다니나?"
"내가요? 내거 고해 바쳤다고요? 아아, 하나님! 도련님, 그럼 주인 어른께서 보내신 편지를 읽어 보십시오. 그걸
읽어 보면 내가 어떤 고자질을 했는지 아실 겁니다. 자...."
사베리치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고는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나는 그 편지를 받아 읽었다.
'수치를 보르나냐. 늙은 수캐놈아, 네가 내 명령을 무시하고 내 아들 표트르 안드레비치가 저지른 과오를 보고하
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다못해 내게 알려 주었다. 그게 의무를 수행하는 방법이냐. 너는 주인의 명령을
어기고 내 아들의 못된 장난을 숨진 죄에 대한 벌로 돼지우리 당번을 시키겠다. 그 사람의 편지로 표트르이 상처
가 다 나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여하튼 이 편지를 받는 즉시 표트르의 건강 상채를 상세히 보고하라. 상처는 어느
부분에 입었는지, 치료는 충분히 받았는지도 알려라.'
사베리치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히 증명되었다. 나는 그에게 까닭없이 의심하고 꾸짖어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노인의 비탄에 잠긴 마음은 돌이켜지지 않았다.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잘못이지. 나 같은 건 빨리 죽어야돼."
사베리치는 한숨 섞인 소리로 투덜거렸다.
"지금껏 주인댁 양반들을 성실히 모셔온 대가로 늙은 수캐놈이란 말을 들었고 돼지우리 당번 노릇을 하게 됐으니
정말 기가 막히는구나! 도련님이 몸을 다친 게 나 때문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내가 아니라 무슈인가 뭔가 하는 그 프랑스 인 가정교사 탓입니다. 책임은 모두 그놈한테 있어요. 쇠꼬챙이로 사
람을 푹푹 찌르는 연습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 놈을 가정교사로 고용해서 아까운 돈을 낭비했으니 내
참...."
사베리치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내 행동을 아버지에게 알렸을까. 장군이 그랬을까? 아니야, 장군은 내게 그리 관
심을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아. 물론 이반 쿠즈미치도 아니다. 그는 내가 결투한 것을 상관에게 보고할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나는 시바블린을 의심했다. 결투사건을 밀고한 결과 내가 베로
고르스크 요새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전속되고, 따라서 사령관의 가족들과 헤어지게 되면 득을 보는 것은 시바
블린 한 사람뿐이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려고 사령관 집으로 갔다.
그녀는 현관 밖의 계단까지 나와서 나를 맞아 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얼굴빛이 아주 창백해요."
나는 흥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고 호주머니에거 아버지의 편지를 꺼내 주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편지를 읽고 나자 그녀의 떨리는 손으로 내게 되돌려주고 슬픔을 감추지 못
하는 얼굴로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되다니! 당신 부모님은 저를 가적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이건 하나님이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세
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부디 당신만이라도 행복하게 살아주세요."
"그게 무슨 말이오, 마리아 이바노브나!"
나는 그녀의 손을 힘 있게 쥐고 말했다.
"내 마음은 결정돼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어떤 장애물이라도 헤치고 나갈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자 갑시다. 가서 당신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그 분들은 이해심을 갖고 있어요. 냉정하지도 않고 오만하
지도 않은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틀림없이 우리를 축복해 주실 겁니다... 그러면 곧 결혼식을 올립시다. 우리 집
에서 반대한다고 비관할 건 없습니다. 어머니를 설복해서 우리 편을 들어주게 하면 아버지도 고집을 꺾고 용서해
줄테니까. 나는 꼭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있어요...."
"그건 안 돼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저는 당신 부모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한 결혼 할수 없어요. 당신 부모님
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결혼하면 저는 불행해져요. 행복하게 살 수가 없어요. 그러지 말고 우리 하나님의 뜻에
따르도록 해요. 앞으로 좋은 사람을 만나면... 결혼 상대가 나타나면 저를 잊어 주세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저
는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 오직...."
그녀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울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뒤를 쫓아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격렬한
감정을 누를 수가 없을 것 같아 내 숙소로 돌아왔다.
착잡한 심정으로 깊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사베리치가 들어와서 내 머리 속을 헝클어 놓았다. 그는 ㄲ알 같은
글을 빽빽이 써 넣은 쪽지를 내밀면서 말했다.
"자, 도련님. 내가 도련님께 해가 되는 짓을 했는지, 고자질이나 하는 주책없는 인간인지, 내가 주인어른과 도련
님 사이에 풍파를 일으켰는지 어쨌는지 이걸 좀 보십시오."
나는 사베리치가 두 손으로 내민 쪽지를 받아 읽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편지에 대한 사베리치의 회답이었다.
자비로우신 저희들의 어버이,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님, 주인 어른께서 보내신 편지는 잘 받아 보았습니다. 제게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몹시 화를 내시고 수치를 모르냐면서 저를 꾸짖으셨습니다만 저는 어디까지나 주인 어른
을 충실히 모시는 종이지 늙은 수캐는 아닙니다. 이렇게 얼굴이 주름지고 백발이 되도록 저는 한결같이 성의를
다해서 주인 어른을 모셔왔습니다. 도련님이 결투를 하다가 부상당한 데 대해서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인 어른을 놀라시게 하지 않으려는 뜻에서 그랬을 뿐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소문을 들으니 저희들
의 어머님이신 아브도차 바실리예브나 마님께서는 상심한 나머지 병상에 누워 계시다고 하는데 하루 속히 회복되
기를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도련님은 오른쪽 어깨뼈 바로 아래 상처를 입었으며 깊이
는 6센티 가량입니다. 강둑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을 사령관님 댁으로 옮겼습니다. 치로는 이곳 이발사인 스
텐판 파라마노프가 맡아서 했는데 지금은 완쾌되어서 기쁜 소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전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도련님은 상관들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는 모양인데 특히 사령관님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여하튼 도련님의
일상 생활에는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불상사를 일으켰는가고 의심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네 발을 가진 말도 때로는 넘어지는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 아시고 아무쪼록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인
어른께서는 제게 돼지우리 당번을 시키겠다고 하셨는데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그럼 이
상으로 실례하겠습니다.
주인 어른의 충실한 종 알르히프 사베리치
나는 이 선량한 노인의 구구하게 변명을 늘어놓은 편지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웃음을 흘렸다. 아버지에게는 회답
을 쓰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데는 사베리치의 편지로 충분하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내 입장은 아주 달라지고 말았다. 바리아 이바노브나는 의식적으로 나를 피했고 어쩌다가 만나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방에 혼자 틀어 막혀 있는 습관이 붙기 시작했다. 바시리사 에고로브나는 그러한 나를
나무랐으나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어 이상 귀찮게 굴지 않았다. 이반 쿠즈미치와 만나는 것은
근무상의 공적 용건이 있을 때뿐이었다. 시바블린과는 가끔가다 마지못해 얼굴을 대했는데 그럴때마다 언제나 내
게 대한 반감이 그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것 같아 그를 만나는 것이 점점 싫어졌다.
이와 같이 불쾌감을 주는 일이 쌓이고 쌓요 내 생활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내 마음은 고독과 무위
에서 생기는 어둡고 침울한 상념에 잠겼고 내 사랑은 쓸쓸한 외톨박이 생활 속엣어 외롭게 불타 올랐다. 나는 시
를 짓는 일도 그만두었다. 모든 일에 의욕이 나지를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머리가 돌아버리지 않으면 방탕한
생활이라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이 때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내 전 생애를 통해 중대한 영향을 끼
쳤다.
제6장 푸가초프의 반란
젊은이들아, 들어 보아라
우리들 늙은이의 옛이야기를
-목가-
내가 직접 체험한 갖가지 기괴한 사건을 기술하기 전에 올렌부르크가 1773년 말에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를
몇 마디 설명해 둘 필요가 있다.
드넓고 기름진 이 지방에는 얼마 전에는 러시아 제국 황제의 통치권을 인정한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
이 미개인인 그들은 자주 반란을 일으켰고 또 법률이나 공동 생활 규범에 어두운데다 무분별하고 잔인했기 ㄸ문
에 정부는 그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엄격히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이 지역에 요새를 구축
하고 옛날 우랄 강 유역에 살고 있던 카자흐를 이주시켜 요새 수비 임무를 부여했다. 그러ㄴ 변경이 안전을 지키
고 평화를 유지하는 의무를 지닌 이 우랄 카자흐가 어느 새 불순한 반정부 집단으로 변모해 버리고 1772년에는
주요 도시에서 반란까지 일어났다. 트라우벤베르크 소장이 자기 휘하의 군대를 복종시켜기 위해 엄걱한 수단을
취한 것이 발단의 동기가 됐던 것이다. 그 결과 트라우벤베르크 소장은 처형되고, 사령부가 전면적으로 개편되었
으나 얼마 안 가서 반란은 유산탄에 의해 진압되고 주모자들은 가혹하게 처형되었다.
이것은 내가 베로고르스크 요새에 배속되기 얼마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 지방 일대가
평화로웠다. 아니 겉으로는 평화로운 것처럼 보였다. 당국은 음흉하고 간악한 폭도들의 위장 전술에 넘어가 그들
이 뉘우치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폭도들은 가슴 깊이 원한을 품고 복수심을 불태우면서 다시 폭동을 일
으킬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폭동 이야기는 이쯤 해 두고 여기서부터 화제를 본론으로 돌린다. 1773년 10월 상순의 어느 날 밤, 나는
혼자서 방에 틀어박혀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달을 스치고 흘러가는 구름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사령관이 보낸 병사가 나를 부르러 왔다. 나는 곧 숙소로 나섰다. 사령관집에는 시바블린과 이반 이그나츠이
치, 그리고 카자흐의 하사관이 있었다. 그런데 바실리아 에고로브나와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
다. 사령관은 침울한 빛을 띤 얼굴로 내 인사를 받았다. 그러고는 방문을 잠그고 문 곁에 서 있는 하사관을 제외
한 사람들을 모두 자리에 앉게 한 다음 호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내 들고 이렇게 말했다.
"장교 제군, 중대한 연락이 왔다. 장군께서 보낸 명령서를 읽을테니 잘 들어라."
그러고는 안경을 끼고 명령서를 읽었다.
베로고르스크 요새 사령관 미로노프 대위 앞
극비
다음 사항을 지시한다.
감옥에서 탈출한 돈 카자흐의 분리파 교도(17세기 중엽에 대두한 러시아 정교의 한 분파)인 에벨리얀 푸가초프
(에카테리나 2세 시대에 일어난 농민 전쟁의 지도자)라는 자가 불경부도하게도 고 표트르3세의 어명을 사칭, 불
순분자들을 규합하여 도당을 만들고 우랄 강 유역의 여러 촌락에서 난동을 일으켰으며 이미 몇 개소의 요새를 점
거 파괴하고, 도처에서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고 있으니 이 명령서를 수령하는 즉시 베로고르스크 오새 사령
관 미로노프대위는 전술한 바 이 반란자를 격퇴하고 또 그 자가 귀관이 수비하고 있는 요새를 습격할 경우에는
이를 전멸시킬 수 있는 방법을 속히 찾아내라.
"방법이라."
사령관은 안경을 벗고 쪽지를 접으면서 말했다.
"입으로 한다면 쉬운 일이지만 실지 행동은 용이하지 않아. 흉악한 이 역적은 보통놈이 아닌 것 같은데 이쪽 병
력은 130명밖에 안 되니 말이야. 물론 카자흐들은 계간에 넣지 않은 병력이지. 그놈들은 믿을 수가 없어. 너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야. 막시미치(이 말을 듣고 카자흐 하사관은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야. 장
교 제군! 힘을 다해서 잘해 보게. 부탁하네. 적이 습격해 올 경우에는 요새의 출입문을 닫고 병사들을 집합시켜
야 돼. 막시미치, 너는 네 동료 카자흐들을 빈틈없이 감시해라. 대포를 검사하고 충분히 손질해 두지 않으면 안
돼. 이것은 모두 비밀이니 절대 사전에 누설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게."
이상과 갚이 지시를 내리고 이반 쿠즈미치는 우리를 해상시켰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과연 반란이라도 일어날까?"
나는 시바블린에게 물었다.
"그애 모르지. 하지만 모든 것은 예상을 뒤엎을 경우가 많거든."
여기까지 말하고 시바블린은 새어나기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다했는데도 푸가처프 출현의 소문은 온 요새에 퍼
져 갔다. 이반 쿠즈미치는 자기 아내를 무척 소중히 여기고 또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지만 직무 수행
상 필여하다고 인정되는 군사 비밀은 결코 이야기하지 않은 엄격한 군인이었다. 장군의 편지를 받았을때 그는 교
묘한 수법으로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를 밖으로 내보냈다. 게라심 신부가 올렌부르크에서 무엇인가 굉장한 소식을
듣고 왔는데 그걸 털오놓기가 아까운지 입을 다물고 있다고 그녀에게 말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바실리사 에
고로브나는 호기심이 생겨 신부 부인한테 가서 물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마샤가 혼자 집에 있으면 심
심할테니 함께 가 보라는 이반 쿠즈미치의 권유에 따라 딸을 데리고 갔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가 딸을 데리고 나가자 절대적 권위를 장악한 이반 쿠즈미치는 즉시 사람들을 보내 우리들
불러오게 하고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엿듣지 못하도록 파라시카를 곳간에 가둬 버렸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는 신부 부인을 찾아갔으나 무엇 하나 캐내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자기 집을 비운
사이에 이반 쿠즈미치가 회의를 열었고 파라시카가 곳간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남편한테 속았다
고 생각하고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아내의 공격에 대한 방어 태세가 준비되어 있는 이반 쿠즈미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집요한 아내의 질문공세를 침착하게 받아넘겼다.
"글쎄 내 얘길 들어 보라니까. 병사의 아낙네들이 페치마에 밀짚을 때기 시작하기에, 그런 걸 ㄸ면 액우닝 닥쳐
재난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앞으로는 밀짚을 때지 말고 가랑잎이나 마른 나뭇자기를 때라고 엄하게 주의를 준 것
뿐이야."
"그럼 왜 파라시카를 곳간에 가뒀어요? 그럴 필요가 있었나요? 내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그 애는 가엾게도 곳간
에 갇혀 있었어요. 왜 가둬 놓았지요?"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는 날카롭게 질문의 화살을 던졌다.
이반 쿠즈미치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 우물쭈물
얼버무려 넘겼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는 남편의 엉큼한 뱃속을 눈치챘지만 그 흑막의 내면을 실토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질문을 중지했다. 그리고 화제를 돌려 아클리나 판필로브나가 종래와는 아주 다른 방법으
로 오이를 소금에 절인 이야기를 했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는 그 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남편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비밀의 베일에 싸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리 머리를 짜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튿 날 미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이반 이그나이치가 대포의 포신속에서 아이들이 집어놓은 나무토막과 독
멩이, 헝겊조각, 고기 뼈다귀등 잡동사니 쓰레기를 꺼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건 분명히 전쟁 준비를 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웬일일까. 키르키즈 인들의 습격에 대비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이반 쿠즈미치가 그런 사소한 일을 내게 숨길 리는 없는데... 정말 이상하구나.'
하고 바실리아 에고로브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여성 특유의 호기심을 누를 수가 없어 이 비밀을 참지해 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이반 이그나츠이치를 불렀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는 피고인의 경계심을 무디게 하기 위해 일부러 관련성이 희박한 문제부터 심문하기 시작하
는 재판관처람 집안일에 대해 몇 가지 주의를 주었다. 그러고는 한참 있다가 깊은 한숨을 쉬고 나서 고개를 저음
녀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아, 이런 일이 생기다니, 무서운 일이에요. 이런 소식을 들을 줄을 꿈에도 물랐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
말 큰 걱정이에요."
"무슨 말씀입니까, 마님.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고 우리에겐 언제나 하나님의 은헤가 있으니 걱정될 일은 아
무것도 없습니다. 이 요새에는 병사들도 많이 있고 화약도 넉넉히 있어요. 대포 손직을 제가 했지요. 푸가초프가
습격해와도 문제 없어요. 충분히 반격을 가할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는 이상 싸워서 지진 않
습니다."
"푸가초프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사령관 부인은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이반 이그나츠이치는 상대방이 넘겨짚은 데 걸려들어 함부로 지껄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갑자기 입을 다
물어 버렸다. 그러나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내
세워 끝내 모든 것을 털어놓게 하고 말았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는 그 약속을 지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부의 아내는 예외였다. 신부 집에서
는 소를 들판에 놓아 기르고 있었는데 그것을 악당들에게 약탈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만
귀띔해 주었던 것이다.
알마 안 가서 사람들은 몇몇이 모이기만 하면 푸가초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소문은 제각각이었다. 사령관은
근처의 여러 마을과 요새의 상황을 면밀히 정찰 파악하는 임무를 카자흐 하사관에게 부여했다. 하사관은 이틀 후
에 돌아와서 보고했다.
"이 요새에서 약 6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장집단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으며 봉화도 여러
군데서 올랐다는 말을 파시키르 인들에게서 들었습니다."
이 하사관이 수집한 정보은 이것뿐이었다. 그는 겁이 나서 그 이상 앞으로 나갈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적
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고하지 못했다.
요새 안에 카자흐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 모여 수군수군 말을 주고받
다가 순찰병의 모습이 눈에 띄면 흩어져 버리고 했다. 카자흐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사령관은 몇 사람의 첩자
를 동원했다. 며칠 후 러시아 정교의 세례를 받은 유라이 라는 카르미크 인이 사령관에게 중대한 보고을 했다.
내용인 즉 하사관이 모고한 것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고 실상은 적과 내통하고 돌아와 동료 카자흐들에게 자기
폭도의 진영으로 가서 수령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령관은 즉시 교활한 그 하사관을 감금하고 유라이를 후임자로 결정했다. 이 소문을 들은 카자흐들을 노골족으
로 불만의 빛을 나타냈다. 사령관의 명령을 집행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이반 이그나츠이치는 카자흐들이 '두고
보자 수비대의 쥐새끼놈'이라고 독기서린 말을 내뱉는 것을 들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대답하게도 큰 소리로 불
평을 늘어 놓으면서 떠들어 댔다. 사령관은 그 날 중으로 배신자를 심문하려고 했으나 약삭빠른 그의 카자흐 하
사관은 어느새 도망쳐 버리고 없었다. 동료 카자흐들이 그의 탈출을 도와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사태가 발생ㅎ하여 사령관의 불안을 더욱 크게 했다. 비밀리에 선동우인물을 도리던 파시키르가
붙잡힌 것이었다. 그래서 사령관은 다시 장교들을 소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번데도 적당한 구실을 붙여 바
실리사 에고로브나를 멀리 따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반 쿠즈미치는 원래 정직한 사람이어서 한 번 써
먹은 수법 이외의 것을 고안해 내지 못했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 소문을 들으니 게라심 신부한테...."
이반 쿠즈미치는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그러나 사령관 부인은 톡 쏘아 그 말을 가로막았다.
"거짓말 말아요. 이반 쿠즈미치. 당신은 나를 내보내 놓고, 내가 없는 자리에서 장교들과 회ㄹ를 열고 에멜리얀
푸가초프에 관해 의논하려는 거지요? 다 알고 있어요. 이젠 안 속아요!"
이 말에 이반 쿠즈미치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건 어떻게 알았지? 그럼 여기 있어요. 당신이 있는 데서 얘기하도록 할 테니까."
"진작 그러실 일이지. 당신 답지 않게 잔꾀를 부리려 들다니,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요. 자, 그럼 장교들을 부르
세요."
우리는 다시 모였다. 이반 쿠즈미치는 아내가 있는 자리에서 푸가초프의 격문을 읽었다. 그것은 글을 제대로 일
고 쓰지고 못하는 카자흐가 작성한 것인데, 약탈자는 곧 베로고르스크 요새로 쳐들어갈 작정이라고 선언한 다음
카자흐와 병사들에게는 자기네 도당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지휘관에게는 반항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만일
여기에 거역하면 목숨을 빼앗아 버리겠다고 협박한 것이었다. 이 격문은 난폭하고 무지한 것이지만 박력 있는 문
체로 씌어져 있어 단순한 두뇌를 가진 인간에게는 틀림없이 위험을 느끼게 할 것이었다.
"정말 지독한 악당이네요!"
사령관의 아내가 입을 열었다.
"뻔뻔스럽게도 우리에게 요구 조건을 내세우다니!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라니! 40년 동안이나 군대생활을
하면서 쓴맛 단맛 다 체험한 사령관이라는 걸 그 짐승놈은 모르고 있을까요? 이 세사에 도둑놈이 하라는 대로 하
는 사령관이 어디 있다구."
그녀의 말이 끝나자 이반 쿠즈미치가 대답했다.
"그런 사령관은 있을 리가 없지. 그런데 그 역적놈은 만만치가 않은 모양이오. 벌써 다른 곳의 요새를 점령했다
는 소문이 있으니까."
"정말 큰일이군요!"
사령관의 말을 받아 시바블린이 한 마디 했다.
"그놈이 강한지 약한 지 이제 곧 진짜 힘을 알게 될 거야. 바실리사 에고로브나, 곳간 열쇠를 줘요. 이반 이그나
츠이치, 그 파시키르 놈을 데려오게. 그리고 유라이더러 채찍을 갖고 오라고 하게."
그러자 사령관의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려 줘요. 이반 쿠즈미치. 마샤를 우선 다른 곳으로 데리고 나가야겠어요. 그런 걸 보면 겁을 집어먹고 비명
를 지를테니까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을 고문하는 건 못 봐요. 그럼 여러분, 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고문은 옛날부터 죄인을 취조하는 수단으로 습관화되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폐지하라는 칙령
(1701년 알렉산드로 1세에 의해 공포)이 내려도 여전히 존속되었다. 당시에는 범죄이 중거로써 범인의 자백이 필
요 불가결한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론적 근거라 없을 뿐만 아니라 법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만일 피고의 범죄 부정이 무죄의 증거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 자백도 유죄의 증거가 되지 않
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 야만적인 고문의 폐지를 애석하게 여기는 재판관이 더러 있다. 우리
가 살던 시대에는 대부 분의 사람들이 고문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사령관의 고문
명령을 듣자 우리는 당연 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반 이그나츠이치는 사령관 아내한테 열쇠를 받아 곳간에 갇혀 있는 파시키르 인을 데리러 갔다. 얼마 후 죄인
이 현관 곁에 방으로 끌려 왔다. 사령관은 그 죄인을 자기 앞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파시키르 인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간신히 무턱을 넘어섰다. 그의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통이
높은 모자가 벗어 들고 문 곁에 섰다. 나는 그 사나이를 보고 온 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내 평생 그
사나이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이는 일흔이 넘어 보였는데 얼굴에는 코도 없고 귀도 없었다. 머리는 ㅈ
대가리처럼 깎았고 턱에는 흰 터럭이 몇 올 붙어 있었다. 낙은 키에 몸은 비쩍 마르고 허리가 활처럼 구부정했지
만 눈은 불꽃이 틔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사령관은 무섭고도 징그러운 그의 인상을 본 순간 1741년의 반란사건(올렌부르크 요새를 구축했을 때 일어난 파
시키르 인의 폭동)에 가담했다가 형벌을 받은 폭도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음, 그렇지. 네놈은 우리 올가미에 걸려든 적이 있는 늙은 여우로구나. 틀림없다. 네놈이 폭동에 가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맨들맨들한 중대가지가 증거다. 좀더 가까이 와. 누가 시켜서 이곳에 침입했나 말해봐!"
늙은 파시키르 인은 입을 다문 채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말은 안 하나! 러시아 어를 몰라서 벙어리 짓을 하는 거냐? 유라이, 통역 좀 해. 누가 시켜서 이 요새에
침입했느냐? 배후 조종자는 누구냐?"
유라이는 타타르 어로 이반 쿠즈미치의 심문을 통역했다. 그러나 늙은 파시키르 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상
대방을 바라보고 있을 뿐 대답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고약한 놈! 내가 입을 열게 해 주마. 이봐, 이 놈의 옷을 벗기고 등가죽이 터지도록 후려쳐라. 알겠나, 유라이,
사정없이 후려치는 거다."
노병사 두 사람이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파시키르 인의 줄 무늬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죄인의 얼굴에 불
안한 빛이 떠올랐다. 개구쟁이들에게 붙잡힌 작은 짐승처럼 그는 겁먹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사 한 사
람이 그의 두 순을 움켜쥐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유라이가 채찍을 휘두르려고 하자 늙은 파시키르 인은 힘없는
소리로 애원하듯 신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벌렸다. 입 속에는 혓바닥 대신 얇은 나무
조각이 있었는데 그것이 혓바닥처럼 나불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알렉산드르 황제의 온화한 태평성대와 견주어 생각할 때마다 나는 계몽사상의 급속적인 성과와 박애주의
의 보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청년들이여! 만일 내 수기가 그대들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면 최선의 항구적
사회개혁은 일체의 강제적 대 변동을 수반하지 않는 습관의 개선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상기해 주기 바란다.
"입 속이 저 모양이니 아예 들을 수도 없게군. 유라이, 이놈을 다시 곳간에 가둬라. 그럼 장교제군, 회의를 계속
하세."
사령관이 말했다. 우리는 현재의 정세에 대해 토의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 때 바실리사 에고로브나가 몹시 당황
한 얼굴로 헐레벌떡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어찌 된 일이오?"
사령관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여러분, 큰일났어요!"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는 성급하게 말했다.
"니지네오조르나야 요새가 오늘 아침에 함락됐어요. 폭도들 손에 넘어갔어요. 게라심 신부 댁의 하인이 지금 거
기서 돌아왔어요. 점령당할 때의 광경을 목격하고 온 거예요. 그 요새 사령관과 장교 전원이 학살되고 병정들은
모두 포로가 됐다는군요. 폭도들이 언제 우리 요새를 습격할는지 몰라요. 지금 쳐들어오고 있는지도 몰라요."
이 소식은 우리 모두를 전율시켰다. 니지네오조르나야 요새는 이곳에서 약 27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는
데, 그것의 사령관은 매우 침착하고 겸손한 청년 장교로 나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두어 달 가량 전에 젊은
아내를 데리고 임지로 가던 도중 이 요새에 들러 이반 쿠즈미치의 집에서 묵은 적이 있었다. 우리는 푸가초프의
습격을 결정적인 사실로 보고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
가슴이 메어 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사령관에게 말했다.
"제 의견을 들어 주십시오. 이반 쿠지미치.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는 목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요새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고의 여지도, 의심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비전투원인 부녀자들의 안전을 도모하
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켤코 안 될 겁니다. 길이 막히기 전에 부녀자들을 올렌부르트로 피난시키는게 어떻겠습니
까? 어ㅉ든 악당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안전지대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겁쟁이처럼 그러지 마세요! 총아리 날아오지 않는 요새가 어디 있어요? 어째서 베로고르스크 요새를 못비더워하
는 거예요? 우리가 여기 온 지 벌써 22년째가 되는데 그 동안 우리는 파시키르 인과 키르기스 인들의 난동을 여
러번 겪으며 경험을 쌓았어요. 푸가초프의 습격도 틀림없이 막아낼 수 있을 거예요."
"바실리사 에고로브나, 이 요새를 신뢰한다면 당신은 여기 남아도 좋아요. 문제는 마샤란 말이오. 우리가 이긴다
든지 증원군이라도 많이 온다면 별 문제겠지만, 만약 우리가 패배한다면...."
"그렇게 되면...."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는 사령관의 말에 말끝을 맺지 못하고 심한 동요의 빛을 드러낸 채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
다. 사령관은 자기 말의 효과를 자인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말 한 마디로 아네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는 효과를
거둔 것은 어쩌면 결혼 이후 처음인지도 모른다.
"마샤가 여기 남아 있는 건 좋지 않아. 그 애는 올렌부르트의 교모네 집으로 보냅시다. 거기라면 군대도 ㅁ낳고
대포도 충분하니까 걱정없어. 성벽도 돌로 쌓아서 아주 튼튼해. 그렇지, 당신도 함께 가는 게 좋을 거요. 늙은
여자인데 어떠랴 하는 생각은 버려야 돼. 만일 적이 이 요새를 습격해서 함락시킨다면 어떻게 되겠ㄴ나 생각해
봐요."
"알겠어요."
사령관의 아내가 대답했다.
"그렇게 해요. 마샤는 보냅시다. 하지만 난 안 가겠어요. 나더러 함께 가라는 말씀은 아예 하지 마세요. 난 어떤
일이 생겨도 안 가겠어요. 앞으로 여생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당신과 헤어져 낯선 곳에 가서 나 혼자 ㅁ힐 무
덤을 찾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지금까지 당신과 같이 갈아 왔으니 죽을 때도 같이 죽어야지요."
"당신 마음이 정말 그렇다면 좋을 대로 해요. 그럼 곧 가서 마샤의 여행 준비를 해요. 우물쭈물 시간을 보내지
말고. 내일 새벽에 출발시켜야 할테니까. 인원 부족이지만 호위병도 한 사람 딸려 보내야겠어. 한데 마샤는 어디
있지?"
"아클리나 판필로브나 집에 있어요. 니지네오조르나야 요새가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쇼크를 받은 거예요. 저
러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쩌죠? 아아, 하나님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악당들을 무리쳐 주십시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의 딸의 출발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사령관방에서는 대책을 강구하는 토의가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마샤에 대한 걱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해질 무렵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창백한 얼굴이 되어 돌아왔다. 얼굴은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우리는 묵묵히
저녁 식사를 했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작별 인사를 하고 우리는 각자 자기 집으
로 향했다. 나는 일부러 칼을 놔두고 왔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러 가는 척하고 발길을 돌렸다. 마리아 이바노브나
와 단둘이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현관 앞에 당도했다. 그녀는 현관 층계에서 나를 맞아 주었다.
"안녕히 계세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난 올렌부르트로 가게 됐어요. 부디 몸조심 하세요. 하나님의 은헤로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몰라요. 부디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아니기를...."
그녀는 칼을 건네주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잘 가요, 나의 천사! 나의 사랑스러운 천사, 나의 귀여운 사람! 내 몸에 어떤 재난이 닥치더라도 나는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리겠습니다."
마샤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나는 그녀에게 뜨거운 키스를 하고 방에서 나와 황급히 걸음을 옮
겼다.
제7장 습격
용감한 사람아, 정직한 사람아
한결 같은 마음으로 성실하게 일한 사람아
꼬박 삼십삼 년 동안이나
충실히 근무했다. 성실한 사람아
아아, 그래도 상을 못 타고
돈도 기쁘도 정다운 음서도 지위도 없다
용감하고 성실한 사람이 받을 것은
길고 굵은 기둥 두개
그 위에 가로놓인 단풍나무 들보
게다가 명주실로 꼬아 만든 올가미 밧줄
-민요-
그 날 밤 나는 잠을 자지 못했다. 옷도 벗지 않았다. 새벽이 되면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지나가게 될 요새의 문까
지 나가 그녀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려고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
을 느끼고 있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나는 기분은 얼마 전까지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침울한 기분과는 비교도 않을 만큼 밝은
것이었다. 이별의 슬픔이 내 마음 속에서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숭고한 공명심 등과
한데 뒤섞여 있었다.
어느 새 날이 새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나가려고 할 때 하사가 들어와서 우리 요새의 카자흐들이 밤중에 탈출했
는데 그 때 유라이를 강제로 끌고 갔고 요새 주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말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요새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근심부터 앞섰다. 나는 하사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는 곧장 사령관 집으로 달려갔다.
동쪽 하늘이 훤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전속력으로 달리는데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이반 이그나츠이치가 뒤쫓아와서 숨가쁜 소리로 말했다.
"어디 가요? 이반 쿠즈미치는 보루에 계시는데 당신을 찾아요. 푸가치(푸가초프의 별명. 올빼미라는 뜻)가 나타
났어요."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출발했습니까?"
심장의 고동 소리가 갑자기 높아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다급히 물었다.
"떠나지 못했어요. 요새 밖에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으니까요. 이 요새는 포위되고 올렌부르크로 가는 길도 막
혔어요. 정말 안됐어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우리 두 사람은 보루로 갔다. 모루라고는 해도 자연의 힘으로 쌓아 올려진 고지에 통나무로 목책을 듈러친 것뿐
이었다. 거기에는 요새의 전 인원이 모여 있었다. 수비대 병사들은 총을 들고 정렬해 있었고 대포도 운반되어져
있었다. 사령관은 정렬한 소수의 수비대 병사들 앞을 침착하게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절박한 위험이 이 늙은 군
인에게 이상한 기운을 불어 넣어 주었던 것이다. 요새에서 그리 멀지 않은 들판에서 20명 가량의 폭도들이 말을
몰고 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 무리는 카자흐들이었고 그 속에 파시키르 인도 보였다. 파시키르 인은 삵괭이 가죽
모자와 독특한 화살통으로 쉽게 판별해 낼수 있었다.
사령관은 정렬한 병사들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최선을 다해서 여왕 폐하의 권위를 수호하고, 우리의 용기와 충성심을 전세계에 보여 줄 때가 왔다!"
병사들은 환성을 올려 최선을 다해 싸울 의사를 표현했다. 시바블린은 내 곁에 서서 적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지
켜보고 있었다.
들판을 돌아다니던 자들이 요새의 동태를 알아차리고 한군데 보여 무엇인가 의논하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이반
이그나츠이치에게 대포를 그쪽으로 돌리라고 명령했다. 그러고는 자기가직접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포탄은 바람
을 가르는 소리를 내면서 그드르이 머리 위를 날아가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그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때 바실리사 에고로브나가 자기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 마샤를 데리고 보루로 왔다.
"싸움은 어떻게 돼 가요? 적은 어디 있어요?"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령관에게 물었다.
"바로 저기 있소. 하지만 두려울 건 없소. 하나님이 지켜 주셔서 만사가 잘 될테니까. 마샤, 너 무섭니?"
"아녜요. 아버지. 집에 혼자 있는게 더 무서워요."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내게 시선을 돌리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어제 저녁 그녀
를 통해서 칼을 받은 것을 상기했다. 그리고 흉악한 적으로부터 내 연인을 지키기라도 할는 것처럼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내 가슴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끝까기 지킬테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사랑과 신뢰를 받을 가치가 충분히 있는 사나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
으로 가슴이 가득 차는 것을 느끼면서 결전의 순간을 기쁘게 기다렸다.
그 때 요새에서 5백 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언덕 모통이에서 말을 탄 폭도들의 집단이 나타났다. 잠시 수
들판을 창과 활로 무장한 폭도의 무리로 꽈 메워졌다. 그들 가운데 붉은 망토를 입고 백마를 탄 사나이가 장검을
뽑아 들고 다리고 있었다. 그 자가 바로 푸가초프였다. 푸가초프가 말에서 내리자 부하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호위했다.
이윽고 두목이 명령을 받았는지 네 사나이가 전속력으로 말을 몰고 요새의 목책 바로 아래까지 왔다. 우리는 이
네 사나이가 요새에서 탈출해 나간 배신자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중 한 사나이의 높이 쳐든 손에는 한 장의
종이쪽지가 쥐어져 있었고 또 한 사나이가 들고 있는 창끝에는 유라이의 목이 꽂혀 있었는데 그 사나이는 창을
마구 휘둘러 그 목을 목책 너머 우리들 앞으로 던졌다.
가엾은 카르미크 인의 목이 사령관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 때 배신자들이 소리쳤다.
"쏘지 마라! 총을 버리고 황제 폐하의 어전으로 나오라! 폐하께서 행차하시어 지금 여기 계신다!"
"천하에 무도한 역적놈! 사격 개시!"
사령관이 사격 명령을 했다. 우리 수비대 병사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종이쪽지를 들고 있던 카바흐가 팍
고꾸라지는가 했더니 이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다른 카자흐들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돌아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유라이의 목을 보고 겁을 집어먹은 데다 일제사격의 총소
리에 놀라 그녀의 얼굴은 거의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반 쿠즈미치는 하사관을 불러 사살된 카자흐가 쥐고 있는
종이쪽지를 갖고 오라고 명령했다. 요새의 목책 밖으로 나간 하사관은 죽은 카자흐가 타고 온 말을 끌고 돌아왔
다. 그리고 그 쪽지를 사령관에게 주었다. 이반 쿠즈미치는 그것을 읽어 보더니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 버리
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폭도들은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 후 총탄이 빗발처럼 날아오고 화살이 우리 주
위에 땅바닥과 목책에 꽂히기 시작했다.
사령관이 곁에 있는 아네에게 말했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 당신은 여기 있을 필요가 없으니 빨리 마샤를 데리고 가요! 애 얼굴을 좀 봐, 곧 기절하
겠어! 빨리 가요!"
그녀는 폭도들이 쏘아 대는 총소리에 기가 질렸는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겼다는 듯한 얼굴로 적의 무리가 밀려
오는 들판을 보고 있다가 남편에게 눈을 돌리면서 대답했다.
"이반 쿠즈미치,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에요. 마샤를 축복해 주세요. 마샤, 아버지
앞으로 가거라."
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마샤는 아버지 앞에 가서 무릎을 끓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노
사령관은 마샤에게 세 번 성호를 긋고는 그녀를 일으켜 볼에 키스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마샤, 부디 행복하거라.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라. 하나님은 켤코 너를 저버리지 않으실 거야. 좋은 사람 만서
잘 살기 바란다.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지혜가 베풀어지기를 빌겠다. 너희들도 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
았던 것처럼 행복하게 살아라. 그럼 가 보라, 마샤. 바실리사 에고로브나, 이 애를 빠리 데리고 가요."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아버니의 목을 껴안고 흐느껴 울었다. 딸이 우는 것을 보고 바실리나 에고로브나도 울면서
말했다.
"이반 쿠즈미치, 우리도 키스해요... 부디 안녕히, 이반 쿠즈미치. 지금까지 내가 당신께 잘못한 일이 있었다면
용서해 주세요."
사령관은 아내를 껴안았다.
"그럼 가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마샤에게 사라판(경사 때 입는 소매가 없는 옷)을 입
혀요."
사령관 부인은 딸과 함께 발길을 돌려 집을 향했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도 나를 돌아보더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슬픈 눈빛을 남기고 돌아섰다. 아내와 딸을 바라보던 이반 쿠즈미치는
우리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모든 주의는 적에 집중되었다. 두목 주위에 모여 있던 폭도들이 갑자기 말에
서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사령관이 말했다.
"저놈들이 공격할 모양이다.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자."
이 때 함성이 들판을 흔들었다. 폭도들이 요새를 향해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우리 대포에 유탄이 장전되었다. 사
령관은 폭도들이 유효 사격거리 안에 들어왔을 때 발포를 명령했다. 유탄은 적의 무리 한복판에 떨어져 폭발했
다. 폭도들은 양쪽으로 흩어져서 후퇴했다. 그러나 빨간 망토를 입은 두목은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칼을 휘
두르며 달아는 부하들을 불러 모으려고 했다. 잠시 후 조용했던 들판에 다시 함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사령관이 명령했다.
"문을 열어라! 북을 울려라! 이제부터 기습출격. 반격을 가한다! 나를 따르라! 전진!"
사령관과 이반 이그나츠이치와 나는 보루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겁을 먹고 사기를 잃은 수비대는 움직이려고 하
지 않았다.
"너희들은 어ㅉ서 서 있나! 죽을 때는 깨끗하게 죽는 게 군인이다! 빨리 나를 따르라!"
사령관이 소리쳤다. 이 큼을 타서 폭도들은 물밀듯이 요새 안으로 밀어닥쳤다. 북소리는 그치고 수비대는 총을
내던졌다. 나는 폭도들 사이에 끼어 요새 안으로 달려갔다. 카자흐들이 머리에 상처를 입은 사령관을 에워싸고
요새의 명도를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사령관을 구출하려고 그쪽으로 뛰어가다가 수며ㅕ의 건장한 카자흐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가죽 허리띠로 내 손을 묶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 항거하는 놈의 말로가 어떤 건지 보여 주마!"
나는 두 손을 묶인 채 그들에게 끄려갔다. 길가에는 주민들이 빵과 소금(러시아의 관습으로 환영의 뜻을 나타낸
다)을 갖고 나와 있었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때 군중 속에서
"황제 폐하가 광장에서 포로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리고 공순의 서양을 받고 계신다."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
다. 사람들은 광장으로 몰려갔다. 우리들도 그쪽으로 끌려갔다.
푸가초프가 사령관의 집 현관 층계 위에 있는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가장자리에 황금빛 레이스가 달
린 카자흐 식 붉은 망토에 담비 털가죽으로 만든 통이 높은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눈은 이글거리는 불길처럼 무
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어딘가 낯익은 데가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카자흐의 대장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게라심 신부가 창백한 얼굴로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두 손으로 십자가를 들고 현관 층계 옆에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을 처형될 포로들의 구명을 무언으로 푸가초프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광장에는 교수대가 서둘러
세워졌다. 우리가 다가가자 파시키르 인들이 군중을 헤치고 우리를 푸가초프 앞으로 끌어냈다. 종소리가 그치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사령관은 누구냐?"
푸가초프가 물었다.
우리 요새에 있던 한 하사관이 군중 속에서 나와 이반 쿠즈미치를 가리켰다. 푸가초프는 무서운 눈으로 노인을
노려보고 말했다.
"이놈, 너는 황제도 몰라 보느냐? 황제인 내게 항거하다니!"
사령관은 두려움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네 놈은 우리 황제가 아니다. 네놈은 반역자다. 황제를 사칭하는 역적이다! 알겠나."
이 말을 듣자 푸가초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휜 손수건을 흔들었다. 수명의 카자흐가 노사령관을 교수대쪽으로
끌고 갔다. 교수대 들보 위에는 어제 우리에게 심문을 받았던 그 불구의 파시키르 인이 말을 탄 것처럼 걸터앉아
한 쪽 손에 밧줄을 쥐고 있었다. 얼마 후 나는 공중으로 끄려 올라가는 이반 쿠즈미치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다.
그 다음에는 이반 이그나츠이치가 푸라초프 앞으로 끌려 나왔다.
"여기 있는 이 표트르 표트르비치 황제 폐하에게 순종과 충성을 맹해하라!"
푸라초프가 말하자 이반 이그나츠이치는 노사령관이 한 말을 되풀이했다.
"너는 황제가 아니다. 너는 반역자다. 황제 폐하를 사칭하는 역적이다."
푸가초프는 눈을 부라리며 아까처럼 흰 손수건을 흔들었다. 선량한 중위는 노사령관 옆에서 축 늘어졌다. 이번에
는 내 차례였다. 나는 지조 있는 상관들이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할 작정으로 각오를 굳히고 푸가초프를 쏘아보
고 있었다. 그 때 나는 폭도 대장들 가운데 머리를 카자흐 식으로 깎고 카자흐의 복장을 하고 있는 시바블린의
모습을 보고 말할 수 없이 놀랐다.
시바블린이 푸가초프에게 다가가서 귀엣말을 보냈다.
"저놈을 매달아라!"
하고 푸라초프는 나를 보지도 않고 명령했다.
이윽고 내 목에 밧줄이 걸렸다. 나는 속으로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모든죄를 하나님께 회개하고 내 동료들의
운명에 하나님의 은혜와 가호가 있기를 빌었던 것이다.
나는 교수대 아래로 끌려갔다.
"자, 자, 너무 무서워 말라구!"
살인자들이 내게 말했다. 마지막 기운을 북돋우어 주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 운명이 이 세상의 모든 미련과
작별하려고 할 때 갑자기 노인의 목 쉰 호리가 내 귀청을 올렸다.
"잠깐만 내 말을 좀 들어 보시오!"
사형 집행인들은 손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사베리치가 푸라초프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생각 좀 해 보십시오. 귀족의 아들 하나 죽여 뭘 하겠습니까. 소용없는 일입니다. 풀어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
오. 본보기로 죽여야 하는 것이라면 이 늙은 몸을 매달아 주십시오. 제발 그렇게 해 주십시오!"
사베리치의 말이 끝나자 푸가초프는 사형 집행인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리항 내 목에 걸었떤 밧줄이 벗겨졌다.
"너그러우신 황제 폐하께서 너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이런 말이 내 귀에 들려왔다. 그 때의 내 기분은 한 마디로 형언하기 어렵다. 목숨을 건진 것을 기뻐한 것은 아
니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그 순간의 내 감정은 흩어져 있었다. 나는
다시 황제를 사칭하고 있는 자의 앞으로 끌려가 무릎을 꿇었다. 푸라초프는 억세게 생긴 손을 내밀었다.
"키스하라! 폐하의 손에 키스하라!"
주위에 둘러서 있던 자들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내 마음은 돌처럼 굳어졌다. 그런 짓을 하느니 나는 차라리 잔인한 사형을
받고 죽어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내 뒤에 서 있던 사베리치가 나를 앞으로 밀면서 나직이 말했다.
"도련님,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고집은 그만 부리시고 어서 키스하십시오. 키스하는 것쯤 아무것도 아닙니
다. 침을 뱉어 버리시는 기분으로 어서 키스하십시오. 어서요."
그러나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푸라초프는 내밀었던 손을 내리고 차가운 웃음을 얼굴에 띠면서 말했
다.
"이 소위님은 너무 기뻐서 머리가 돌아 버린 모양이다. 일으켜 줘라!"
내 곁에 서 있던 카자흐가 나를 일으켰다. 나는 자유의 몸이 되어 무서운 ㅎ극이 연출되는 것을 지켜보기 시작했
다. 주민들이 순종과 충성과 선서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십자가에 키스를 하고 푸라초
프에게 머리를 숙였다. 수비대 병사들도 한쪽에 정렬해 있었다. 요새의 재봉사가 날이 무디어 잘 들지 않은 가위
로 병사들의 긴 머리를 잘랐다. 카자흐 식으로 머리를 잘린 병사들은 머리카락을 털면서 푸가초프 앞으로 나가
그의 손에 입술을 갖다댔다. 그러면 푸가초프는 사면을 선언하고 자기 도당에 가입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
이 진기한 희극이 세 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푸라초프는 팔걸이의자에서 일어나 부하 대장들을 거느리고 충계를 내려왔다. 화사한 마구로 장식도니 백마가 그
의 곁으로 끌려왔다. 두 사람의 카자흐가 양쪽에서 그를 부축하여 안장 위에 올려 태웠다. 푸가초프는 게라심 신
부를 내려다보며 그의 집에서 점심 식사를 할 작정이니 준비하라고 말했다.
그 때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대여섯 명의 악당들이 바실리사 에고로브나를 현관 앞 층계로 끌고 왔
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모습이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헝겊 조각 하나 붙어 있지 않은 알몸이었다.
악당중의 한 사나이는 그녀가 입고 있던 솜옷을 빼앗아 자기 몸에 걸치고 있었고, 다른 패들은 새털이불이며 속
옷이며 옥함이며 다기 등속을 들고 나왔다.
가엾은 부인은 악당들에게 애원했다. 그러다가 문득 교수대로 눈을 돌려 들보에 늘어진 남편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눈이 뒤집혀서 소리쳤다.
"악마놈들아! 이 악마놈들아! 저게 무슨 짓이니! 왜 저 사람을 죽였느냐! 아아, 하나님... 아아, 내 소중한 이반
쿠즈미치, 당신은 용감한 군인이었어요. 훌륭한 군인이었어요. 프러시아 군의 총검도 터키 군의 총탄도 당신 몸
을 건드리지 못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게 아니라 탈옥수의 손에 걸려 무참히 목
숨을 잃다니! 아아! 여보!"
"저 늙은 암퀴신이 떠들지 못하도록 해라!"
젊은 카자흐가 그녀의 어깨를 칼로 내리치자 가엾은 여인은 층계 위에 쓰러져 곧 숨을 거두었다. 푸가초프가 그
곳을 떠나자 군중은 그의 뒤를 다라 우르르 몰려갔다.
제8장 불청객
불청객은 타타르 인보다 더욱 난처한 것
-속담-
드디어 광장은 텅 비었다. 나는 말뚝처럼 한 자리에 선 채 너무나 끔찍했던 방금 전의 기억으로 인해 혼란된 정
신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것이 무엇보다도 안타까웠다. 그녀는 지금 어디 있을까. 아ㅓ전하게 몸
을 피할 수 있었을까... 말할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인 채 나는 사령관의 집으로 들어갔다. 가재 도구는 성한 것이
없었다. 의자도 책장도 궤짝도 모두 부서져 있었고 식기 등속은 모두 박삭이 나서 산산이 흩어져 있었으며 그 밖
의 물건을 말끔히 약탈되어 흔적도 없었다. 나는 안쪽 방에 들어가 보았다. 거기서 나는 폭도들 손에 의해 엉망
이 된 그녀의 침대를 발견했다. 옷장은 형편없이 부서지고 옷가지는 모두 도둑맞아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다
만 성상을 넣어 두는 궤짝 앞에 놓인 등불만이 꺼지지 않고 있었으며 창문 사이의 멱에 걸린 조그마한 거울이 그
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늑한 방의 주인은 어디 갔을까,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폭도
들 소굴로 끄려간 그녀를 상상했다. 그래서 가슴이 쥐어뜯기듯 아팠다. 나는 비통한 마음을 안고 울음 섞인 목소
리로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때 인기척이 나더니 부서진 옷장 뒤에서 새파랗게 질린 파라시카가 몸
을 떨면서 나타났다.
"아아, 표트르 안드레비치! 오늘 같은 날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이보다 무서운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어떻게 됐어?"
나는 성급히 물었다.
"아가씨는 무사해요. 지금 아클리나 판필로브나의 집에 숨어 계십니다."
"뭐, 신부의 집에?"
나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큰일 났다. 푸라초프가 그리고 갔는데...."
나는 방에서 뛰쳐나와 한길로 나가서 신부의 집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신부의 집은 환성과 웃음소리와 노랫소리로 떠들썩했다. 푸가초프가 일당과 함께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
다. 파라시카도 내 뒤를 쫓아왔다. 나는 그녀를 몰래 안으로 들려보내 아클리나 판필로브나를 불러 오게 했다.
잠시 후 신부의 부인이 빈 술항아리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어디 있습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흥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 순간은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 애는 내 침실에서 누워 있어요."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네, 그런데 표트르 안드레비치,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요. 저 악당놈이 식탁에 앉아 있는데 ㄱ교롭게도 그 애
가 정신이 들어 끙끙 앓는 소리를 냈어요. 난 놀라서 그만 까무러칠 뻔했어요. 그 애의 앓는 소리를 듣고 지금
이 집에서 앓고 있는 사람은 누구야, 하고 묻지 않겠어요. 그래서 나는 악당놈한테 굽실거리며 폐하, 제 조카딸
이옵니다. 앓아 누운 지 벌써 보름 가까이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니까, 조카딸은 젊은 앤가 하고 물으며 히죽거
리기에 네, 젊사옵니다 했더니, 할멈 그 조카딸을 내가 좀 볼 수 없을까 했을 때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하지만 어쩔 수 있어야죠. 나는 엉겹결에 그렇게 하시옵소서, 폐하, 하오나 그 애는 제 발로 어전에 나와 뵐 수
가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 하니까, 괜찬하, 재가 직접 가서 보겠어, 이렇게 말하며 그 마귀 같은 놈은 장지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겠어요. 그래 어떻게 되었겠어요! 침대에 드리운 휘장을 획 걷고는 독수리 같은 눈으로 들여다
봤으니 말예요.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요...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어요. 정말 그 때는 나도 우리 주인 양반도
그 애를 대신해 죽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애가 그놈을 알아보지 못한 게 참 다행이었어요. 아
아, 하나님, 이런 변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불쌍한 이반 쿠즈미치! 이렇
게 될 줄을 누가 꿈엔들 생각했겠어요. 그리고 바실리나 에고로브나, 그리고 이반 이그나츠이치, 그분한테 대체
무슨 죄가 있겠어요... 그래도 당신은 용케 벗어났군요. 그런데 저 시바블린-알렉세이 이바니치는 머리를 둥글게
깍아 올리고 우리 집ㅈ에서 그 악당들과 어울려 술에 취해 고주 망태가 되어 있으니 한심한 인간이지 뭐예요. 정
말 그렇게 번개알 구워 먹듯이 옮겨 앉은 놈은 처음 봤어요. 내가 조카딸이 앓고 있다는 말을 하니까, 아 글쎄
그 놈이 칼날처럼 시퍼런 눈초리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겠어요. 하지만 옆에서 고자질을 하지 않았으니 이
것만은 고맙게 여겨도 될 것 같아요."
이 때 악당놈들의 술취한 고함소리와 함께 신부의 부인을 찾는 소리가 들려 왔다. 놈들이 술을 더 가져오라는 모
양이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난 지금 당신과 이러고 있을 수가 없어요. 저놈들의 술 심부름을
해야 되니까, 속히 떠나세요. 주정뱅이한테 걸려들면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모든 일을 운명
에 맡길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주님께서 반드시 당신을 돌봐 주십니다. 그럼 몸조심 하세요."
신부 부인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숙소를 향해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광장을 지날 때 나는 수 명의 파시키르 인들이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 축 늘어진 사람들의 장화를 벗기느라 난장
판을 이루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나는 분노가 불길처럼 치밀어 올랐으나 겅연히 나설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
간신히 그것을 억제했다. 요새 안에서는 폭도들이 사방으로 돌아치면서 장교들의 집을 털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술취한 폭도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집에 돌아오니 사베리치는 문간에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초췌한 그의 모습
을 보고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참 고마워."
그는 잠시 침묵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도련님이 그놈들한테 다시 붙잡혀 곤욕을 치르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표트르 안드레비
치 도련님. 천하에 몹쓸 악당놈들이 우리 살림살이를 몽땅 훔쳐 가 버렸어요. 의복이니 가구니 접시니 할 것 없
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털어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까짓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련님께서 이렇게 무사하
신 것만이 눈물나도록 고마울 뿐입니다. 참 그런데 도련님, 그 악당 두목 녀석을 알아보셨습니까?"
"아니, 난 모르고 있어. 그놈이 대체 누군데."
"원 그놈을 못 알아보시다니. 그 때 주막집에서 도련님의 털옷을 강제로 빼앗은 길잡이 주정뱅이을 잊으셨습니
까. 토끼 가죽으로 만든 덧저고리는 아주 새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놈이 억지로 껴입자 꿰맨 실이 툭툭 터져 실밥
이 튀어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길잡이와 푸가초프의 모습은 정말 놀랄 만큼 닮아 있
었다. 나는 푸라초프와 그 길잡이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게 특사를 베푼 이유를 비로소 깨
닫게 되었다. 나와 그와의 기이한 인연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부랑자에게 주었던 어릴적 털옷이 교수대의 올
가미에서 나를 구해 주었고, 주막집을 찾아 돌아다니던 보잘것없는 주정뱅이가 지금은 곳곳의 요새들을 함락시키
고 온 나라를 뒤흔들게 된 것이다. 착잡한 상념에 잠긴 내게 사베리치는 언제나 하던 버릇대로 이렇게 물었다.
"뭘 좀 드려야지요. 집엔 아무것도 없으나 밖에 나가서 무엇이든지 좀 마련해 보겠습니다."
방 안에 혼자 남게 되자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폭도들 손에 들어간 요
새에 마냥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들에게 항복하는 것은 장교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군인으로
서의 의무감은 이 어려운 정세하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유익하게 복무할 수 있는 것으로 내가 떠나기를 요구하
고 있다. 그러나 한편의 나는 사랑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있는 곳에 남아서 그녀를 지키고 보호할 것을 강경
히 요구했다. 나는 가까운 장래에 틀림없이 정세가 호전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입장이 위
험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서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은 듯이 조용한 집 안에 인기척이 들려 나는 혹시나 밖에 나갔던 하인이 돌아오는가 했는데, 아무런 예고도 없
이 한 사람의 카자흐 인이 방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얼굴이 무척 험상궂게 생긴 놈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나를 데려오라고 해서 달려왔다는 것이다.
"어디서 보르고 있나?"
"사령관 집에 계십니다."
"나를 부를 만한 이유가 있다던가?"
"별다른 말씀은 없었고 속히 모셔 오라는 명령만 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저녁 식사를 마치신 후에 목욕을 끝내
고 쉬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무엇을 보더라도 보통 어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식사 때에는 돼지
새끼를 통째로 두 마리나 거뜬히 잡수셨고 또 그 다음엔 굉장히 뜨거운 증기 목욕탕에 들어가셨는데 함께 들어갔
던 타라스 크로치킨은 어떻게 뜨거웠던지 견딜 수 없어 목욕 솥을 포므칸비크바예프한테 주고는 냉수를 몸에 끼
얹고 말았습니다. 하시는 일마다 모두 비범해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애기도 있습니다. 목욕탕
에서 가슴에 박혀 있는 황제의 표식을 보여 주셨다는데 한쪽에는 5코페이카짜리 은전만한 쌍두치가 있고 다른 한
쪽에는 황제 자신의 얼굴이 새겨져 있더랍니다."
나는 카자흐 인의 말에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를 따라 사령관 집으로 가면서 나는 푸가초프와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며 그것이 어떠한 결과로 끝을 맺게 될 것인가를 예측해 보려고 애썼다. 그 당시 내가 완전히 냉정
을 회복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독자들도 능히 짐작할 것이다.
사령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황혼이 깃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교수대는 희생자들을 매단 채 서 있어서 으
시시한 기분이 들었다. 두 명의 카자흐 인은 보고하러 안으로 들어갔다가 금방 돌아와서, 어제 저녁에 내가 마리
아 이바노브나와 정겨운 이별의 인사를 나우었던 그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어수선한 방 안에서 이상한 광경이
눈앞에 벌어졌다. 술병과 잔들을 늘어놓은 식탁에는 푸가초프를 위시해서 열 명 가량의 카자흐 인 대장들이 울긋
불긋한 루바시카를 입고 보자를 쓴 채 술이 취해 시뻘개진 얼굴로 눈알을 번들거리며 돌러 앉아 있었다. 다행히
그들 중에 시바블린도, 내 보대의 하사로 있었던 자도, 그 밖의 새로운 변절자들의 얼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어, 친구, 어서 오게. 자, 앉아야지."
푸가초프는 나를 보자 말했다. 대장들이 좌석을 좁혀 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탁 끝머리에
앉았다. 내 옆에 자리잡은 미남 형의 젊은 카자흐가 익숙한 솜씨로 포도주를 따라 주었지만 나는 술잔에 손을 대
지 않았다. 호기심을 가지고 나는 좌중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푸가초프는 상좌에 앉아서 식탁에 팔굽을 올려 놓
고 커다란 주먹으로 수염투성이의 턱을 받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상당히 호감을 주는 편이었으나 흉악하게 생
긴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그는 쉰 살 가량 되어 보이는 사람에게 자주 말을 걸곤 했는데 백작이라 보르
기도 하고 어떤 때는 티모페이치, 또 어떤 때는 아저씨라고 존대하기도 했다. 좌중에서는 모두들 서로 친구지간
으로 대하고 있었는데 두목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인정하는 눈치가 조금도 없는 것이 놀랄 만했다. 주고 받는 대
화는 오늘 아침의 돌격으로부터 반란의 성공과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것이 주류였는데, 제각기 자기의 공훈을 자
랑하고 의견을 제출했으며 푸가초프의 말에도 서슴치 않고 자유롭게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무분별한
군사 회의에서 올렌부르크의 진격이 결정되었다.
"자 형제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그 노래를 불러 보자. 추마코르, 시작해 봐."
푸가초프가 명령하자 내 옆에 앉았던 사나이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애조를 띤 뱃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모두들
그를 따라 합창했다.
조용히해 다오
어머니의 품인 대지의 푸른 숲이여
헝클지 말아 다오
희망의 티를 닦는 나의 머릿속을
내일은 내가
심판대에 서는 날
준엄한 사직을
홀로 맡아 보는 황제 앞에서
심판자 황제는
나에게 물으리라
말하라, 바른 대로 말하라
거기 있는 젊은 놈, 농부의 아들놈아
도둑질 강도질은 누구와 했느냐
너의 패거리는 몇 놈이나 되느냐
말씀드립니다, 폐하
러시아 정교의 덕망 높은 황제 폐하
숨김없이 거짓없이
사실대로 말씀드립니다
저의 공범은 모두 해서 넷
하나는 밤의 암흑
하나는 단검
하나는 준마
하나는 활
달리는 사자는
날카로운 화살
러시아 정교의 덕망 높은 황제는 말씀하시리
장하다, 훌륭하다
거기 있는 젊은 놈, 농부의 아들놈아
도둑질도 대답도
천하 일품이로다, 잘 났다 잘났어
상을 내릴지니 들판 가운데
두 개의 기둥 세워 들보를 질러서
너에게 주리라
언제인가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을 지닌 폭도들이 소리 높여 부른이 교수대의 민요가 내게 얼마나 ㄱ은 감
명을 주었는지 그것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험상궂은 얼굴과 잘 맞아 들어가는 목소리, 마디마디 이어
진 애절한 곡조, 그리고 곡조를 붙이지 않아도 넉넉히 인상적이었던 가사, 이러한 모든 것은 그 어떤 시적인 영
감이 되어 내 가슴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난 후에 그들은 다시 한 잔씩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푸가초프가 제지했다.
"자 앉지. 나는 자네하고 할 말이 있네."
나는 그와 마주앉았다. 서로 입을 떼지 않은 채 몇 분이 지나갔다. 푸가초프는 눈을 모아 나를 바라보며 이따금
교활하고도 조소어린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왼쪽 눈을 지그시 감곤 하는 것이었다. 드리어 그는 웃음을 터뜨렸는
데 그 웃음이 하도 꾸밈새 없이 명랑해서, 나도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함께 따라 웃었다.
그는 웃는 것을 멈추고 말을 했다.
"그래 어떤가? 솔직히 말을 해 봐. 내 부하 녀석들이 자네 목에 올가미를 씌웠을 땐 겁이 났겠지. 아마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을테지. 그 때 자네의 종놈이 나서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교수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거야. 난
첫눈에 그 늙은이를 알아봤네. 그런데 여보게, 자네를 주막집에 안내한 사람이 마주 앉은 황제 자신이었으리라곤
설마 생각도 못했겠지."
여기서 그는 엄숙하고 신비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을 계속했다.
"자네는 나한테 큰 죄인이야. 하지만 나는 자네의 선행을 참작하여 관대하게 용서한 것이네. 내가 한때 적에게
쫓겨 몸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에 자네가 베풀어 준 친절을 생각해서 용서했을 뿐이야. 앞으로도 두고
봐. 나의 왕국을 만드는 날 나는 자네에게 정식으로 사례할 작정이야. 어때, 내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겠나?"
이 사기꾼의 질문과 뻔뻔스러운 배짱이 하도 우스꽝스러워서 나는 그만 픽 하고 웃어 버렸다.
"무엇이 우스워. 그럼 자네는 나를 황제라고 믿지 않는단 말인가. 어디 바른대로 대답을 해봐."
나는 당황했다. 한낱 부랑인에 지나지 않는 자를 황제라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비열한 짓이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맞대 놓고 그를 사기꾼이라고 한다면 나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게 할 것이 뻔했다. 아까 전 주민이 보고 있는 교수대 밑에서 분노의 불길이 솟구쳐 오를 때 내가 하려고
준비했던 대답은, 지금 생각해 보면 부질없는 장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푸가초프는
초조하게 내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나의 의무감은 인간적인 약한 마음을 꺾고 승리했다. 나는 푸가초프에게
대답했다.
"그럼 바른대로 말하겠습니다. 우선 당신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과연 내가 당신을 황제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
지.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니까 내가 속에 없는 말을 꾸며서 대답을 해도 다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럼 좋아. 자네 생각으로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인단 말인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어떤 인물이든 간에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푸
가초프는 재빨리 나를 훑어보았다.
"그렇다면 내가 표트르 표트르비치 황제임을 잘 믿지 못하겠단 말이지. 좋아, 그러나 대담무쌍한 자에게 성공이
과연 없단 말인가. 옛날에 그리시카 오트레비에프(황태자의 이름을 사칭하여 1605년 모스크바에서 일 년 동안 황
제 노릇을 한 수도승)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단 말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나제의 자유지만 내
곁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남이야 진짜든 가짜든 자네가 그걸 따져서 무엇을 하겠나. 결국 노새냐 당
나귀냐 하는 걸 따지는 것과 같은 일이야. 나를 충성스럽게 섬기기만 하면 자네한테 사령관도 줄 수 있으며 공작
을 줄 수도 있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귀족 가문에서 여왕 폐하에게 충성르 맹세한 몸이기 ㄸ문에 당
신을 섬길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나를 진실로 생각해 준다면 나를 올렌부르트로 보내 주십시오."
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푸가초프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만일 내가 자네를 놓아 준다면, 적어도 내게 총을 겨누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함부로 약속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당
신과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신은 부하를 거느린 상관이요, 부하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만일 내가 군대 생활에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임무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건 당신도 이해할 것입니다. 지금 내 목숨은 당신의 수중에 있습니다. 나를 놓아 준다면 감사하게 생각할 것은
물론이지만, 만일 죽인다면 그 때 하나님은 당신의 옳고 그른 것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지금, 나는 진실을 말하
고 있을 뿐입니다."
내 성실한 태도가 푸가초프를 감동시켰는지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의 말이 옳아. 죽일 놈은 죽이고 일단 용서하면 깨끗이 용서해 주어야지. 어디로든지 가고 싶은 곳으로 가
서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럼 내일 다시 만나서 이별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도록 하지. 나도 이젠
졸려서 자리에 들겠네."
나는 푸가초프와 작별하고 거리로 나왔다. 쌀쌀한 밤이었다. 엷은 흰구름 사이로 달ㅂ이 광장의 교수대를 비추고
있었다. 요새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하고 어둠침침했다. 다만 선술집에서 등불이 보이고 늦도록 술에 취한 주정꾼
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나는 신부의 집을 바라보았다. 덧문과 대문이 모두 닫혀져 있었다. 집 안에서
는 아부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왔다. 내가 없는 새 사베리치는 무척 걱정을 하며 속을 태운 모양이었다. 내가 푸가초프에게서 완전
히 석방되었다는 말을 듣자 그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는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 날이 밝으면 여기를 떠나 어디로든지 갑시다. 제가 저녁상을 차려 놓았으니
좀 드십시오. 그리고 아침까지 푹 주무십시오. 예수님 품 안에 안긴 마음으로."
나는 그가 권하는 대로 맛있게 저녁을 먹고 나서 몸이 몹시 피곤한 것을 느끼며 아무것도 깔아 놓지 않은 방바닥
에서 그냥 잠들어 버렸다.
제9장 이별
내 가슴에 단꿈 심은
아름다운 그대여
즐거웠던 이 가슴
이별의 슬픔으로 한숨 짖는다
내 영혼과 이별할 때처럼
-헤라스코프-
아침 일찍 북치는 소리에 잠을 깼다. 나는 집합 장소로 나가 보았다. 푸가초프의 무리들은 어제의 희생자들이 아
직까지 그대로 매달려 있는 교수대 근처에 이미 정렬해 있었다. 깃발들은 바람에 나부끼고 몇 문의 대포가 행군
용 포가에 얹혀 있었는데 그 중에는 우리들이 빼앗긴 대포도 끼어 있었다. 전 주민이 그곳에서 푸가초프가 나타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령관 집 층계 아래는 한 놈이 카자흐가 키르키즈 산의 아름다운 백마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사령관 부인의 시체를 찾아보았다. 개보다 못한놈들은 어제 그자리에 시체를 돗자리
로 덮어 두었다. 드디어 푸가초프가 현관에 나와 얼굴을 보였다. 군중은 모자를 벗었다. 푸가초프는 층계 위에서
발을 멈추고 군중의 인사에 답례했다. 대장 가운데 한 놈이 동전이 든 주머니를 그에게 내주자 그는 돈을 꺼내어
던지기 시작했다. 군중은 앞을 다투어 돈을 줍느라고 아우성을 치며 달려들었고 그래서 결국 부상자까지 생기는
소동이 벌어졌다. 일당의 부두목격인 대장들이 푸가초프를 들러싸고 있었는데 그 속에 시바블린도 끼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내 눈에서 경멸의 빛을 발견했는데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증오와 어색한 조소를 띠며 얼
굴을 돌리고 말았다. 푸가초프는 군중 속에서 나를 발견하자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 손짓으로 나를 가까이 불렀
다.
그는 내게 말했다.
"그럼 자네는 지금 곧 올렌보르크로 떠나도록 해. 거기에 도착하면 그곳 지사와 장군들에게 1주일 후에 내가 간
다고 말해줘. 그리고 만일 황제에 대한 예의바른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극형을 면치 못할 거라고 말해. 그럼 소
위, 잘 가게!"
이렇게 뇌까리고 그는 군중을 향하더니 시바블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서 있는 사람은 너희들의 새로운 사령관이다. 앞으로는 만사에 있어서 이 사람 말에 절대 복종하라. 이 사
람은 나를 대신해서 너희들과 이 요새의 책임을 맡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자 등골에 오싹하니 소름이 끼쳤다. 시바블린이 이 요새를 지배하게 된다면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아, 그녀는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될까, 푸가초프는 층계를 내려왔다. 그는 받
들어 올리려는 카자흔 인들을 기다리지 않고 날쌔게 몸울 날려 말 위에 올라앉았다. 이 때 군중 속에 있던 사베
리치가 튀어나와 푸가초프에게 가까이 가더니 그에게 종이 쪽지를 내밀었다. 나는 깜짝 놀라 사베리치를 바라보
았다.
"이게 뭐냐?"
푸가초프는 위엄 있는 말투로 물었다.
"읽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푸가초프는 종이쪽지를 받아 들고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 들여다보고 나서 말했다.
"무슨 글씨가 이렇게 괴상하지? 내 밝은 눈으로도 무슨 수작이ㄴ 전혀 알아 볼 수가 없다. 서기장은 어디 있는
냐?"
하사 계급을 단 젊은 놈이 재빨리 푸가초프 앞으로 나섰다.
"어디 한번 읽어 봐라."
자친 황제인 푸가초프는 종이조각을 내주며 말했다. 나는 늙은 종이 도대체 무엇을 푸가초프에게 써 주었는지 무
척 궁금했다. 서기장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떼어가며 커다랗게 읽기 시작했다.
"옥양목 자리옷 및 비단 줄무늬 자리옷 두 벌에 6루블...."
"그게 무슨 뜻이지?"
푸가초프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물었다.
"다음을 계속해서 읽으라고 하십시오."
사베리치는 시침을 떼고 대답했다.
서기장이 다시 계속해서 읽고 있었다.
"녹색 사지 군복에 7루블. 백색 세루 바지에 5루블. 네덜란드 제 모시 커프스 와이셔츠 열두 벌에 10루블 찻잔이
든 휴대용 상자에 2루블 30...."
듣고 있던 푸가초프는 답답했던지 말을 가로챘다.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야? 휴대용 상자니 커프스 와이셔츠니 하는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냐."
사베리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 말씀입죠. 아시다시피 악당들이 빼앗아간 우리 도련님의 물품 목록입니다."
"악당이라니, 그건 누굴 가리키는 말이냐?"
하고 푸가초프가 화를 내며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말이 좀 헛나갔습니다. 뭐, 악당이라는 게 따로 있겠습니까. 당신 부하들이 집을 뒤져서 훔쳐 갔
지요. 성을 내시면 곤란합니다. 말은 네 발을 가지고도 걸려 넘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 보라고 하
시기 바랍니다."
사베리치는 두려움없이 말했다.
서기장이 계속했다.
"갱사이불 한 채, 호박단이불 한 채에 4루블. 붉은 나사로 씌운 여우 가죽 외투에 15루블. 그 밖에 주막집에서
선사한 토끼 가죽 덧저고리가 15루블."
"무엇이 어쩌고 어째!"
푸가초프는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 나는 가엾은 노인이 신상을 생
각하자 가슴이 서늘했다. 그는 다시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했으나 푸가초프가 말문을 가로막았다.
"그 따의 허튼 수작을 하겠다고 감히 네놈이 내 앞에 기어나왔단 말이냐!"
이렇게 고함을 지르며 그는 서기장의 손에서 종이조각을 낚아채어 사베리치의 얼굴에 홱 집어던졌다.
"네, 속 편할 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저는 종의 신분으로 주인의 물건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바보 같은 늙은 놈아, 물건 좀 빼앗겼다고 해서 그게 무슨 큰일이냐. 네놈은 저기 있는 주인과 함께 저 역적
놈들처럼 교수대에 매달리지 않은 것을 감사하여, 나와 내 부하들을 위해 한평생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도 시원치
않을텐데. 뭐 토끼가죽! 오냐, 네놈한테 토끼가죽을 주마. 네놈이 생가죽을 벗겨서 그걸로 가죽옷을 만들어 줄테
니 그런 줄 알아라."
그러나 푸가초프는 무슨 관대한 마음이 들었는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시바블린과 대
장들이 그 뒤를 따랐다. 폭도들은 대오를 지어 요새에서 나갔다. 군중들은 푸가초프를 배웅하러 따라 나섰다. 나
와 사베리치만이 광장에 남게 되었다. 내 늙은 종은 물품 목록을 손에 들고 매우 섭섭한 얼굴로 그것을 들여다보
고 있었다. 그는 푸가초프와 나와의 사이가 원만한 것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려 한 것이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
간 것이다. 나는 그의 엉뚱한 열성을 꾸짖어 줄까 했으나 웃음이 먼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얼마든지 웃으셔도 좋습니다. 도련님, 어서 실컷 웃으십시오. 그렇지만 이제 다시 살림을 차리게 될 때는 이것
이 웃을 일인지 아닌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베리치는 중얼거렸다. 나는 그를 숙소로 가도록 이르고 바리아 이바노브나를 만나러 신부의 집으로 달려갔다.
신부 부인은 슬픈 얼굴을 하고 나를 맞았다. 간밤부터 마리아 아비노브나가 열이 심해서 지금은 정신없이 헛소리
를 하며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신부 부인은 나를 그녀의 방으로 안내했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침대로 다가서서 핼쓱해진 얼굴을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게라심 신부와 그의 착한 부인은 여러 가지로 나를 위로해 준 것 같
았지만 내 귀에는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암담한 생각만이 겹치고 겹칠뿐이었다. 사고무친한 고아가 되어
흉악한 폭도들 속에 남게 될 그녀의 신세와 나 자신의 무력함을 생각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엇보다도 시바블
린의 존재가 돌덩이처럼 가슴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자칭 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그가, 전날의 애매한 원한
이 남아 있는 불행한 처녀가 있는 이 요새를 지배하게 된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짓이든지 그녀에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그녀를 악당의 손에서 빼낼 수 있단 말
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의 방법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베로고르스크 요새의 탈환을 서도르도록 재촉하기 위해,
나 자신도 있는 힘을 다해 싸우기 위해서 한시 바삐 올렌부르크로 출발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아클리나 판필로
브나에게 이별을 고하고, 신부 부인에게는 이미 나의 아내나 다름없는 마샤를 거듭 부탁했다. 나는 가엾은 처녀
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마주 댔다.
"잘 가세요. 부디 안녕히, 표트르 안드레비치. 반드시 좋은 시절이 와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을 잊
지 마시고 자구 소식 전해 주세요. 불쌍한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이젠 당신밖에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신부 부인은 대문 밖까지 나를 따라나오며 말했다. 광장으로 나와서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교수대를 향하여
머리를 숙인 후 정들었던 요새를 뒤로 하고 올렌부르크로 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내 곁에서 떠나지 않는 사베
리치가 나를 뒤따랐다.
깊은 상념에 잠겨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요새
쪽에서 한 사람의 카자흐가 말을 타고 달려오며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그는 또 한필의 파시키르 산 말의 고삐를
잡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달려와 말에서 내리더니 끌고 온 말의 고삐를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소위님, 폐하께서 당신에게 이 말과 입고 계시던 외투를 손수 벗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반 루블의 돈을 주셨
습니다만 오는 도중에 그걸 잃어버렸습니다. 관대하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잃어버렸다는 반 루블의 돈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우선 말 안장에 묶여 있는 양털가죽 외투를 바
라보았다. 그 때 사베리치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 카자흐에게 중얼거렸다.
"흥, 도중에 잃어버렸다고? 그런 네 호주머니에 짤랑거리는 건 뭐냐. 뻔뻔스러운 녀석 같으니."
"이놈의 영감쟁이야, 주머니에서 나는 소리는 돈이 아니라 단추 소리다."
하사는 조금도 당황한 빛을 보이지 않고 딱 잡아떼었다.
"어떻든 좋아. 자네를 보낸 두목한테 고맙다고 말해 줘. 잃어버린 반 루블은 돌아가는 길에 찾아봐서 혹시 찾거
든 그걸로 술값이나 해."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소위님, 감사합니다.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 두고두고 기도하겠습니다."
그는 말고삐를 돌리더니 한 손으로 호주머니를 꼭 잡은 채 요새쪽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몇 분 후에는 이미
시야에서 사려져 버리고 말랬다. 나는 털옷을 입고 말에 올라탔다. 사베리치도 등 뒤에 함께 타게 했다. 누인은
등 뒤에서 내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
"그것 보십시오, 도련님. 제가 그 악당놈한테 요구한 보람이 있지 않습니까. 도둑놈도 양심은 있어서 마음이 거
리끼는 게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기는 이따위 말라빠진 파시키르 산 말 한 필과 양가죽 외투만 가지고는 놈들이
훔쳐간 물건과 도련님 선사한 옷의 반 값도 안되지만 어쨋든 요긴하게 쓸 수 있게 됐습니다. 미친 개한테는 하다
못해 털이라도 한 줌 뽑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제10장 포위돈 거리
... 들판과 언덕에 진지를 구축하고 고지에서 그는 독수리 같은 눈초리로 거리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진지 뒤쪽
에 포대를 만들고는 소리를 내지 않게 대포를 감추고 밤이 되면 성벽 가까이 옮기라 명령했다.
-헤라스코프-
올렌보르크가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나는 머리를 박박 깍고 형무소의 낙인이 얼굴에 흉하게 찍힌 죄수들의 무리
를 보았다. 그들은 경비대 병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보루 근처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떤 자는 참호를 베운 쓰레기
를 수레에 담아 내고 어떤 자는 삽으로 땅을 파고, 또 보루 위에서는 석공들이 벽돌을 날라다가 성벽을 수리하고
있었다. 위병들이 성문에서 우리를 제지하며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는데, 위병 중사는 내가 베로고르스크 요새에
서 왔다는 말을 듣자 곧 장군 댁으로 안내했다.
나는 뜰 안에서 장군을 만났다. 마침 그는 가을 바람에 잎사귀가 떨어진 사과나무를 살펴보며 늙은 정원사의 도
움을 받아 짚으로 나무 줄기를 정성스럽게 싸 주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기품 있는 성격이 엿보였다. 그는 나
를 진심으로 반겨 주었고 내가 직접 목격한 무서운 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묻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상세하게 전달했다. 늙은 장군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마른 나뭇가지를 잘라내고 있었다. 내 비참한 목격
담이 끝나자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르노프가 죽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야. 정말 훌륭한 장교였는데, 미로노프이 부인은 지혜로운 여자였어. ㅇ
버섯을 소금에 절이는 솜씨가 그만이었는데. 그럼 대위의 딸 마샤는 어떻게 됐나?"
나는 그녀가 신부 부인과 함께 요새에 남아 있다고 대답했다.
장군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쯧쯧! 그건 좋지 않네. 불행한 일이야! 폭도들의 군기같은 건 믿을 것이 못 되지. 그 가엾은 애는 어떻게 될
까."
나는 여기서 베로고르스크 요새는 이곳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각하께서는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예하부대
를 파견하는데 주저하지 않으실 줄 믿는다는 의견을 말해 보았다. 그러ㄴ 장군은 자신 없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저였다.
"좀더 두고 보세. 그건 좀더 검토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야. 조금 있다가 자네도 차를 마시러 이리로 오게. 오늘
여기서 군사회의가 있을 예정이니까. 자네는 우리에게 그 푸라초프라는 악당과 그의 군대에 대해 확실한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하네. 그럼 그 때까지 숙소에 가서 좀 쉬도록 하지."
나는 배정된 숙소에 가서 초조한 마음으로 회의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사베리치는 벌써 이것 저것 집 안을 손
질 하기에 바빴다. 나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그 회의 시간을 내가 얼마나 장확히 지켰을 것인지는 독자들도 쉽사
리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정해진 회의 시간에 나는 이미 장군 댁에 가 있었다.
나는 장군 댁에서 이 고장 관리의 한 사람인 뚱뚱한 몸집에 얼굴이 볼그스름한데다 금실을 섞어 짠 비단옷을 입
은 노인과 만났다. 그는 이반 쿠즈미치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문제에 대해서까지 부수적인 말을 하기도 하고 교
훈 비슷한 의견을 내놓기도 하면서 자주 내 말을 중단시키는 것이었는데, 그의 말하는 품이 비록 전술에 밝지는
못할 망정, 천성이 총명하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참석자들도
하나 둘 들어왔다. 그들 가운데 군인은 장군 한 사람뿐이었다. 일동이 자리에 앉고 차가 각자에게 돌아가자 장군
은 당면한 문제에 대해 극히 명쾌한 태도로 빈틈없는 설명을 했다.
"그러면 여러분. 지금 우리는 이 폭도들에게 어떻한 행동을 취할 것인가, 즉 공격이냐 그렇지 않으면 방아냐 하
는 문제를 결정할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양쪽 다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격은 적을 신속히 소탕하는
데 보다 적합하며 방어는 보다 확실성이 있고 안전합니다. 그럼 회의 규정에 따라 관등이 아래인 사람의 의견부
터 듣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소위인 자네의 의견부터 말해 보게."
그는 나를 불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푸가초프와 그 무리들의 상황을 설명한 후, 현재의 폭도들은 우리 정규
군에 대항할 만한 역량이 없다고 단언했다. 내 의견은 참석한 관리들에게 노골적으로 푸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내가 한 말이 무모하고 경솔한 장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누구의 말인지는 몰라도 입속말로 젖비린내가 난다고 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지만, 회의 진행을 위해서 꾹
참았다. 장군은 나를 바라보고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귀관, 군사회의에서는 어디서나 처음엔 공세 지지론이 나오는 법이야. 즉, 말하자면 그건 정칙처럼 되어 있네.
자, 여러분 그럼 계속해서 의견을 듣기로 하겠습니다. 6등관, 이번엔 당신의 의견을 들어 보겠소."
금실 섞인 비단옷을 입은 6등관이라는 아까 그 노인은 꽤 많은 양의 럼주를 탄 세 벌째 찻잔을 급히 들이키고 나
서 장군에게 대답했다.
"각하, 저는 공격도 방어도 우리가 취할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또 무슨 뜻인가, 6등관. 전술에는 방어냐 그렇지 않으면 공격이냐 하는 두 가지 원칙밖엔 없을텐데?"
장군은 의아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각하, 이번에는 매수작전이라는 것을 한번 써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하, 그 의견도 그럴 듯 하군. 하긴 매수작전이라도 것도 한 가지 전술로써 통할 수 있을 것이오. 당신의 의견
도 참작해 보기로 합시다. 그 망나니놈의 모가지에 20루블... 아니, 100루블까지라도 현상금을 걸 수 있어. 기밀
비가 있으니까 말이야...."
세관장이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말씀입니다. 만일 그 도둑놈들이 자기들의 두목의 손발을 꽁꽁 묶어서 우리한테 넘겨 주지 않는다면
그 때 나는 6등관이 아니라 키르키즈키바란(키르키즈의 양)이라 부러 주셔도 무방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차차 생각하면서 의논해 보기로 합시다. 그러나 어ㅉ든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으
니까 여러분, 규칙에 따라 순서대로 의견을 말하시오."
그러나 다른 관리들의 의견을 우리 군대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한결같이 공격보다는 방어를 주장했다.
그들은 적에게 노출된 들판에서 모험을 하기보다는 둘로 쌓은 견고한 방패로 대포의 엄호를 받으며 싸우는 편이
보다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참석자 전원의 의견을 청취하고 나서 장군은 파이프의 재를 툭툭 털고 다음
과 같이 자기 견해를 피력했다.
"여러분, 본관의 입장에서는 소위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전술이란 어떠한 경우에
는 방어보다는 공격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군은 말을 멈추고 파이프에 담배를 담기 시작했다. 나의 자존심은 다시 불쑥 고개를 쳐들어 나는 퍽 오
만한 눈초리로 관리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은 불평 불만에 찬 얼굴로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장군은 진한
담배 연기를 깊은 함숨와 함께 내뿜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여러분, 황송하옵게도 자비하신 여왕 폐하께서 분관에게 위임한 이 지방의 안전에 관계되는 문제인 이
상, 본관은 그처럼 위험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관은 성 안에서 적의 기습을 대비
했다가 적이 공격해 오면 포병의 화력으로 대항하다가 가능한 시기에 성 밖으로 출격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 가
장 현명하고 안전한 방책이라고 말한 대다수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이번에는 관리들이 나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회의는 끝났다. 나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무지하고 경
험도 없는 자들이 의견을 따르기로 결심한 늙은 군인의 심약한 결정에 적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주목할 만한 회의가 개최된 며칠 후에 나는 푸라초프가 자기의 약속을 충실히 지켜 올렌보르트로 접군해 온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성벽 높은 곳에 올라가 폭도들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병력은 내가 직접 목격한
지난번 습격 때에 비해 십 배나 중강된 것같이 보였다. 적군에게는 푸가초프가 여러 곳의 작은 요새에서 노획한
대포들로 편성된 포병대도 있었다. 군사회의의 경위를 상시하며 앞으로 올렌보르크 성내에서의 농성이 장기간 계
속되리라는 것을 예견할 때 나는 너무 안타까워 울고 싶을 심정이었다.
나는 올렌부르크 농성에 대해서는 여기에 기술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기에 기록될 성질의 것이며, 나의 개
인적인 수기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간단히 몇 마디 한다면 이 농성 작전을 지방 당국의 무주의로 말미
암아 굶주림 속에서 온갖 고생을 겪어 내지 않을 수 없었따. 주민들에게 실로 치명적인 타격을 주엇던 것을 사실
이었다. 올렌부르크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처참했던가는 상상하기에 다려 잇는 것이다. 누구나가 다 암담한 마음
으로 자기 운명의 종말을 기다렸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폭등하는 물가고에 신음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뜰 안에
날아 들어오는 포탄에도 별로 놀라지 않게 되었으며 이따금 덤벼드는 푸라초프의 습격에도 궁금한 마음조차 가지
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는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실로 짜증스러워미칠 지경이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으며 베로고르스크 요새로부터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따. 도로라는 도로는 모두 차
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멀리 떨어져서는 정말 한시도 살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일
어한 나에게 유일한 위안은 출격이었다. 푸가초프의 호의 덕분에 나는 훌륭한 말을 가지고 있었고, 그 말에게 넉
넉치 못한 나의 식량을 반씩 나누어 주며 매일같이 성밖으로 출격하여 푸가초프의 유격병들과 교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전에서는 보통의 경우 배불리 처먹고 얼큰히 취한 데다가 좋은 말까지 가지고 있는 폭도들 편이 우
세한 법이었다. 먹지 못해 말라빠진 성 안의 기병대는 도저히 그들과 맞설 수 없었다. 가끔 우리 보병들의 굶주
린 배를 안고 들판으로 출격하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깊이 쌓인 눈은 분산되어있는 적의 기병대에 대한 그들의
효과적인 활동을 방해했다. 포병대는 보루 위에서 공연히 포성을 울릴 뿐이었고, 일단 들판에 나서기만 하면 포
를 끄는 말들이 힘을 쓰지 못해 진흙탕에 빠져 꼼짝하지 못했다. 우리들의 군사 행동이란 대체러 이런 꼴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올렌보르크이 관리들이 주장한 신중하고 현명한 방책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출격에서 우리는 꽤 많은 적의 밀집부대를 분산시키고 추격할 수 있었는데 그 때 나는 미처 도망치지 못
한 카자흐에게 덤벼들었다. 내가 장검을 휘둘러 내펴치려 하자 그는 별안간 모자를 벗고 소리쳤다.
"안녕하십니까. 표트르 안드레비치, 그 후 별고 없으셨지요?"
웬놈일까 하고 얼굴을 쳐다보았더니 그는 우리 하사로 있었던 자였다. 나는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아, 자네는 박시미치로군. 베로고르스트에서 언제 나왔는가?"
"바로 어제 그것에 다녀왔습니다. 표트르 안드레비치, 당신에게 전할 편지가 있습니다."
"편지라니? 어디 빨리 읽어 보자."
나는 온 몸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외쳤다. 막시미치는 한 손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대답했다.
"여기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꼭 당신한테 전하겠다고 파라시카에게 약속하고 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차곡차곡 접은 종이조각을 나에게 내주고는 곧 발을 몰고 달려가 버렸다. 나는 편지를 펼쳐
들고 울렁거리는 가슴으로 편지를 읽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저는 한꺼번에 부모님을 잃고 이제는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식구도 의지할 사람도 없는 고
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이 언제나 저의 행복을 빌어 주시고 또 누구에게나 도움을 주시려는 착한 분
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오직 당신에게 의지하고 매달리려 합니다. 그리고 이 편지가 부디 당신
손에 들어가도록 기도합니다. 막시미치가 꼭 당신에게 전해 주마고 약속했습니다만, 파라시카가 막시미치로부터
들었다는 말에 의하면 출격할 때마다 자주 당신을 멀리서 본다고 하며, 당신께서는 조금도 몸을 돌보시지 않는
것 같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에 대해선 아무 생각도 하시지 않는다는 것 같다는 얘기였습니다. 저는 오랫동
안 병석에 누워 있다가 겨우 일어날 만하니까 푸라초프의 명령이라는 핑계로 시바블린은 게라심 신부님을 위협하
여 강제로 저를 그 집에서 빼앗아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우리가 살던 집에 돌아와서 감시를 받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알렉세이 이바니치는 저에게 결혼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제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하고 있
습니다. 아플리나 판필로부나가 폭도들에게 저를 자기 조카라고 거짓말을 했을 때 모르는 체하고 덮어주었기 때
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알렉세이 이바니치와 같은 사람의 아내가 될 바에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는 저에게 몹시 잔인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만일 제가 마음을 돌려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악
당의 병사들에게 끌고 가서 리자베타하를로바처럼 만들겠다고 위협합니다. 저는 알렉세이 이바니치에게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사흘만 기다리겠다고 승낙했습니다만 만일 사흘이 지난 후에도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절대로 그냥 놔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아, 표트르 안드레비치! 믿고 의지할 사람은 오직 당신밖
에 없습니다. 이 불쌍한 몸을 구해 주십시오. 장군님과 여러 지휘관들께서는 한시 바삐 이곳으로 구원군을 보내
도록 간청해 주십시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당신께서 직접 와 주실 것은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의 불싸한 고아
편지를 읽고 난 다음 나는 곧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애꿎은 말 잔등에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며 성 안으로
달렸다. 말을 달리면서도 한시라도 빨리 불행한 그녀를 구출해 낼 수 있는 묘안을 궁리해 보았지만 이렇다할 것
이 떠오르지 않았다. 성 안에 들어서자 나는 장군 댁을 향해 달음직쳤다. 장군은 해포석 파이프를 입에 물고 이
리저리 방 안을 거닐고 있다가 나를 보자 발을 딱 멈추었다. 아마도 내 태도가 그를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그는
근심스러운 어조로 내게 허겁지겁 달려온 이유를 물었다.
나는 말을 꺼냈다.
"각하, 저는 각하를 친아버지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부탁을 드리러 달려왔습니다. 저의 청원을 꼭 들어 주십시오.
이것은 제 일생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노장군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부탁이라니 대체 무슨 일인가? 자네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서 말을 해 보게."
"각하. 제게 1개 중대의 병력과 카자흐 인 50명을 주십시오. 그리고 베로고르스크 요새의 소탕을 명령해 주십시
오."
장군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내 정신이 나가지 않았나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을
오히려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뭐라고? 베로고르스크 요새를 소탕하겠다고?"
한참 만에 그는 이렇게 반문했던 것이다.
"성공을 맹세하겠습니다. 부디 보내 주십시오."
하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절대로 그럴순 없네. 그만큼 거리가 멀면 멀수록 적이 자네들과 전략기지인 이곳과의 연락을 끊는 건 극히 용이
한 일일세. 따라서 자네들은 전멸시키는 것도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연락이 두절된다는 것은 즉...."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나는 그가 전술론에 열을 내려고 하는 것을 듣고 답답해서 급히 그의 말을
막았다.
"실은 미로노프 대위의 딸이 제게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시바블린이란 놈이 지금 그녀에게 결
혼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인가? 음, 그 시바블린은 정말 고약한 악당놈이군. 만일 내 손에 걸려 드는 날이면 이십사 시간 이내
에 판결을 내려 보루 위에서 총살해 버리겠다. 하지만 지금은 기다려 보는 게 상책이야."
"기다린다구요?"
하고 나는 무의식중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간 그놈이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강제로 결혼해 버릴 것입니다."
"할 수 없지. 그런 것쯤은 별로 큰 일이 아니야. 그 애는 시바블린의 나애가 되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 지금 같
은 시국에서 그 애를 보호하기에는 그놈이상으로 적합한 자는 없네. 그리고 나중에 그놈이 총살되면 그 때 또 그
때대로 하나님께서 적당한 남편감을 찾아 주시겠지. 귀엽게 생긴 젊은 과부가 숫처녀보다 빨리 남편을 얻는다는
뜻일세. 알아듣겠나?"
하고 장군이 말을 받았다.
"그 사람을 시바블린 따위한테 빼앗긴다면 저는 차라리 죽음 택하겠습니다."
"허허! 이제 알만하군. 그러고 보니 자네는 마리아 이바노브나한테 홀딱 반한 모양이군. 음, 그렇다면 문제가 다
르지. 나도 자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나로서는 자네에게 1개 중대의 병력과 카자흐 인50명을 줄
수가 없어. 자네가 하겠다는 원정은 무모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야. 나로서는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에 거절하겠
네."
나는 절망에 빠져 맥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때 문득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것이 어떤 생각인지
옛날 소설가들이 흔히 말하듯 독자느 다음장에서 알게 될 것이다.
제11장
태어날 때부터 잔인한 사자,
그러나 그 때만은 배가 불렀던지
"어째서 나를 찾아왔지?"
사자는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스말로코프-
나는 급히 장군 댁을 물러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사베리치는 나를 보기가 무섭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도련님 쓸데없는 수고를 하십니다. 그따의 도둑놈들과 날마다 맞설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어디 귀족이 할 일인
가요. 언제 무슨 일이 있을 지 누가 알아요? 그러다가 목숨이라도 잃게 되면 어떡합니까. 그서도 상대가 터키나
스페인이라면 또 모르지만 그 악당들과는 치사스러워서라도 맞서지 않는게 좋습니다."
나는 그의 충고를 가로막으며 물었다.
"지금 남아 있는 돈이 얼마나 되지?"
"넉넉히 가지고 있습니다. 악당놈들이 눈을 번뜩거리며 뒤졌지만 제가 감쪽같이 감춰 놓아서 한 푼도 뱃기지 않
았습니다."
하고 그는 자랑스런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은전이 가득 들어 있는 길쭉한 지갑을 꺼냈다.
"그럼 사베리치, 그 돈의 반만 갖고 와. 그리고 나머지 돈은 자네가 가지고 있어. 난 베로고르스크 요새로 가야
겠어."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하고 착하기만 한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하나님을 좀 두려워 하십시오. 악당들이 길목마다 지키고 있는 이 때에 길을 떠나다니 될 일입니까? 자기 목숨
이 아깝지 않더라고 부모님에게 불효하고 있다는 생각쯤은 하셔야지요. 지금 가셔야 한다니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요? 조금만 더 참고 계십시오. 군대가 가서 반란군들을 모조리 잡아 버리면, 그 때 어디를 가도 말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나의 결심이 동요될 리는 만무했다.
"긴 얘기를 할 시간이 없어. 나는 반드시 가야 하고 또 가지 않을 수 없는 곳이야. 그러나 사베리치, 걱정하지
마. 하나님께선 자비로우시니까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줄 거야! 그리고 미안하게 생각하거나 인색을 떨지 말고
자네한테 필요한 것이면 뭐든지 사 갖도록 해. 값이 세 갑절이면 어때. 나머지 돈은 자네에게 주는 것이니까 마
음대로 써도 좋아. 만일 사흘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사베리치는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 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도련님을 혼자 가시도록 할 줄 아십니까. 꿈에도 그런 말씀 마십시
오. 떠나셔야만 하겠다면 저는 걸어서 쫓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도련님 곁에서는 절대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도
련님을 보내고 나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을 성미 같은가요. 정신이 나가기 전엔 그럴 수 없습니다. 떠나시든지
말든지 도련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렇지만 저는 도련님 곁에서 떨어져 있진 않을테니까요."
나는 사베리치와 다투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도 떠날 준비를 시켰다. 삼십 분 후에
나는 준마에 올라타고 사베리치는 말라빠진 절름발이 말에 탔다. 그것은 사료가 없어서 성 안의 주민이 그에게
거저준 말이었다. 성문에서는 보초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를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우리는 올렌보르크를 뒤
로 하고 말을 몰았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곧바로 뻗은 도로는 바람에 날려 온 눈에 덮여 있었지만 들판에는 날마다 새로 찍힌
말발굽 자국이 낭자했다. 나는 말이 빨리 달리도록 채찍질을 했다. 사베리치는 멀리 뒤떨어져서 간신히 쫓아오며
연방 소리를 질러 애원하는 것이었다.
"도련님! 제발 좀 천천히 달리십시오. 이 말라빠진 병신 말로 도련님을 쫓아 갈 수 있습니까? 그렇게 서둘러 가
셔야만 됩니까? 잔칫집에라도 간다면 몰라도 자칫 잘못하면 시퍼런 칼이 머리 위에서 번쩍할 판인데 표트르 안드
레비치 도련님! 아아, 저러다간 귀한 집 도련님 한 분 망치고 말겠군."
얼마 후에 베르다 마을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마을의 자연적인 방벽을 이루고 있는 골짜기로 돌아섰
다. 사베리치는 쉴새없이 우는 소리를 하며 그래도 용케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마을을 무사히 우회할 수 이ㅛ
을 것 같았다. 그러자 바로 눈앞의 어둠 속에서 방망이를 든 너댓 병의 농부가 나타났다. 그들은 푸가초프의 전
초병이었다. 우리는 정지 명령을 받았다. 그들의 암호를 몰랐기 때문이 잠자코 그 옆을 지나치겨 했더니 그들은
잠깐 새에 나를 에워싸고 그 중 한 놈이 말의 재갈을 붙잡았다. 나는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농부의 머리를 내리
쳤다. 모자를 쓰고 있어서 목숨을 건졌지만 그는 비틀거리며 쥐고 있던 재갈을 놓아 버렸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쏜살같이 말을 달렸다. 점점 짙어지는 밤의 어둠이 모든 위험으로부터 나를 구출해 주는 것인 줄 알고 뒤를 돌아
보니 사베리치가 보이지 않았다. 절름발이 말에 탄 그는 가엾게도 도둑놈들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어
떻게 해야 할까? 나는 함참을 기다리다가 그가 붙잡힌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여 말을 돌려 그를 구출하기 위해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골짜기가 가까워지자 떠들썩한 고함소리와 사베리치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 왔다.나는 말에 채찍질을 하며 달려가
조금 전에 나를 정지시켰던 보초들 가운데로 뚫고 들어갔다. 사베리치는 그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놈들은 말
라빠진 말에서 그를 끌어내려 포승을 감으로려는 참이었다. 내가 되돌아 온 곳을 보자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멋
대로 덤벼들어 나를 말에서 끌어내렸다. 그 중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이 나를 즉시 폐하의 어전으로 끌고 가겠
다고 말했다. 나는 반항하지 않았다. 사베리치도 내가 하는 대로 했다. 보초병들은 의기양양해져서 나를 끌고 갔
다.
골짜기를 건너 마을로 들어갔다. 오막살이 집마다 불빛이 흘러나왔고 도처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행길에서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지만 어둡기 때문에 누구 하나 나를 유심히 보지 않았고, 또 내가 올렌보르크에서
근무하는 장교라는 것도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네거리 한쪽 모퉁이에 자리잡은 농부의 집으로 끌려갔다. 대문
앞에는 술통 몇 개와 대포 두 문이 놓여 있었다.
농부들 중의 한 놈이 말했다.
"여기가 궁전이다. 너희들은 잡아왔다고 보고하고 나오겠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사베리치를 돌아보았다. 늙은이는 기도문을 외면서 성호를 긋고 있었다. 꽤 오랫
동안 기다리게 한 후에야 들어갔던 농부가 나오더니 내게 말했다.
"들어와, 폐하께서 장교를 데리고 들어오라는 분부시다."
나는 농부의 집, 아니 농부의 말을 빈다면 궁정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두 대의 촛불이 밝혀져 있고 벽에는 금
박칠을 한 도배지가 사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자, 탁자, 굵은 노끈으로 매달아 놓은 조그마한 세숫대
야, 못에 걸려 있는 수건, 구석에 놓인 부젓가락, 그리고 단지 등속을 올려 놓은 페치카의 선반, 이런 것들은 모
두 흔히 볼 수 있는 농부의 집과 다름이 없었다. 푸라초프는 붉은 겉옷에 높다란 모자를 쓰고 위엄 있게 손을 허
리에 얹은채 성상 아래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좌우에는 그의 참모격인 인물들 몇 놈이 자못 황송하다는 표정을
꾸미고 있었다. 올렌부르크에서 장교가 왔다는 말은 폭도들에게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또 그들의 엄숙
한 분위기 속에서 내 말을 들으려 했음이 명백했다. 푸가초프는 첫눈에 나를 알아보았다. 일부러 꾸미던 그의 위
엄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는 활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아, 누군가 했더니 자네로군. 그래, 그 후 어떻게 지냈는가. 이번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ㅕ기 나타났지?"
나는 개인적인 용무로 이곳을 지나다가 당신의 부하에게 붙들리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개인적인 용무라니?"
그가 물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푸가초프는 내가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기를 꺼려함을 눈치채었던지 부하들
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다.
모두들 명령에 복종했지만 그 중 두놈만은 꼼짝하지 않고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이 사람들은 상관없으니 어서 말해. 나도 이 친구들에겐 비밀이 없으니까."
나는 곁눈으로 자칭 황제의 측근자들을 훑어보았다. 그 중 하나는 수염이 희고 허리가 꼬부라져서 기력이 없어
보이는 늙은이였는데, 회색 외투를 입고 그 위에 어깨로부터 푸른 수를 드리운 것 이외에는 이렇다할 특징이 없
었다. 그러나 다른 한 놈은 평생을 두고도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뚱뚱한 몸집에 어깨가 딱 벌어진 마흔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붉고 짙은 구레나릇이며 번들거니는 잿빛 눈, 구멍이 아주 없어져 버린 코며 이
마와 볼에 박힌 불그죽죽한 얼굴점 같은 것이 그의 넓은 곰보 얼굴에 붙어 있어 이상야릇한 느낌을 가제 했다.
그는 붉은 루바시카에 가랑이가 넓은 카자흐 바지를 입고 키르기스 식 자리옷을 걸치고 있었따. 첫번때 사내는
정부군에서 탈출한 베로볼로도프라는 자였고, 다음 아파나시 소코로프라 불리우는 사내는 시베리아 광산에서 세
번이나 탈주한 유형수였다. 그 때 내 마음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어쩌다 발을 들여놓
게 된 그들의 사회는 나의 상상력을 몹시 자극하였다. 그러나 푸가초프의 질문에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럼 말해 봐. 자네는 무슨 용무로 올렌부르크에서 빠져 나왔는가?"
내 머릿속에 기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다시금 나를 푸라초프 앞으로 끌고 온 운명은 어쩌면 내 계획이 실
현될 기회를 주는 것이나 아닌가 생깍한 것이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결심하자 그 결심에 대해 다시 생각
해 볼 여유도 없이 푸가초프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는 심한 학대를 받고 있는 어떤 고아를 구출하기 위항 베로고르스크 요새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푸가초프의 눈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떤 놈이야, 내 부하로서 고아를 못살게 구는 놈은? 그따위 놈은 제아무리 똑똑해도 내 처단을 면치 못해. 어
서 말해 봐, 못된 짓을 하는 놈이 대체 누구인가?"
"시바블린입니다. 당신이 게라심 신부의 집에서 보신 그 병든 처녀를 감금해 놓고 강제로 결혼하려고 하는 천하
에 못된 놈입니다."
푸가초프는 살기가 등등해서 말했다.
"좋아, 내 시바블린이란 놈을 콱 죽여 주지. 내 밑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든가 백성을 괴롭히면 어떻게 되는지 본
때를 보여주겠네. 그놈의 모가지를 매달아 죽일 거야."
홀로프샤(아파나시 소코로프의 별명)가 목쉰 소리로 끼어들었다.
"제가 한 마디 하지요. 요새 사령관으로 임명한 시바블린은 요새 사령관ㅇ느로 임명한 것도 너무 경솔했지만, 지
금 그자의 목을 달아맨다는 것도 역시 경솔한 일입니다. 당신이 귀족 출신인 그자를 윗자리에 앉혀 카자흐 인들
의 비위를 거슬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행에 대한 고발이 한 번 들어왔다고 해서 그를 처형하면 귀족
들에게 공포감을 안겨 주기 때문에 현명한 방법이 아닙니다."
"아닙ㄴ나. 귀족 따위를 불쌍하게 여긴다든가 두둔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이번에는 어깨에 푸른 수를 드리운 늙은이가 입을 열었다.
"시바블린을 처형하는 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지만 이 장교 양반이 무엇 때문에 여길 왔는지 한번 정식을오 심문
해 보는 것도 결코 헛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사람이, 당신을 황제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처치는 간
단하지만 그렇지 않고 인정한다면 어째서 오늘까지 역적놈들과 함께 올렌보르크에 붙어 있었느냐 하는게 문제입
니다. 이 사람을 재판소로 끌고가서 심문을 시작하면 어떻겠습니까. 내 생각 같아서는 아무래도 올렌부르크의 우
두머리가 이 사람을 이곳에 잠입시킨 것만 같습니가."
늙은 악당놈의 이론은 사실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누구의 수주에 들어 있는가
를 생각할 때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이었다.
푸가초프는 내가 곤경에 빠진 것을 알아챘다. 그는 내게 눈짓을 해 보이며 말했다.
"어떤가, 자네 생각은? 우리 원수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푸가초프의 냉소는 내게 다시 용기를 찾게 했다. 나는 태연한 어조로 내 목숨은 그의 손 안에 있으니 좋을 대로
하라고 대답했다.
"좋아."
하고 푸라초프가 말했다.
"그럼 내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지금 성내의 사태는 어떤가?"
"덕분에 만사 태평입니다."
"만사 태평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지 않아."
자칭 황제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나는 선서한 대제국의 군인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해 그것은 허튼 소문에 지나지
않으며 올렌부르크에는 모든 물자가 충분히 저장되어 있다고 역설했다.
늙은이가 말을 가로막았다.
"어떻습니까. 이 친구는 당신에게 맞대 놓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탈주명들은 모두 올렌부르크에서는 사람들
이 굶어 죽고 있으며 염병이 돌고 송장까지도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이라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데 이 자는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떠벌이고 있으니 말이 됩니까. 시바블린을 교수대에 매달 생각이시면 이 애송이놈도 목을 매달
아야 합니다. 한쪽만 매달면 아마 다른 한쪽이 섭섭해 할 겁니다."
이 저주받을 늙은이의 말이 푸가초프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홀로프샤가 그 말에 반대하고
나섰다.
"뭐 그럴 것가지 있나, 나우미치. 자넨 엎어 놓고 목을 옭아야 한다느니 잘라 버려야 한다느니 하는 개수작 같은
소리만 뇌까리고 있으니 대단한 호걸이란 말이야. 겉보기에는 용케도 목숨이 붙어 있구나 할 지경인 형편없는 늙
은이가 제 자신은 무덤 속에 한 발을 걸치고 있으면서도 매일 사람을 죽이고 싶어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야. 자네
는 양심도 없나?"
"그래서 자네는 성인군자란 말이군. 언제부터 그 따위 선심을 주어 왔지?"
베로볼로도프가 대꾸했다.
"그야 물론 나도 죄많은 놈이긴 하지. 이 손으로 말하더라도 기독교도들의 피에 적은 죄는 있지. 하지만 난 어디
까지나 역적놈들을 죽였지 제 집에 찾아 들어온 손님을 죽인 일은 없네.널따란 네거리에서나 어두운 숲 속에서
죽인 일은 있지만 집 안에서 난롯불을 쬐며 죽인 일은 없단 말씀이네."
홀로프샤는 울퉁불퉁한 주먹을 불끈 쥐고 소매를 걷어올려 털이 부수수한 팔뚝을 내보이면서 말했다. 늙은이는
외면을 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콧구멍 없는 녀석이 지랄이야."
홀로프샤는 말을 알아 듣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뭘 씨부렁거리고 있어, 이 늙어빠진 무지렁이가. 왜 네 놈도 콧구멍이 막히고 싶으냐. 오냐, 두고 봐라. 이제
네 차례가 올테니. 널 만두 냄새도 못 맡게 해주마... 우선 그 수염부터 몽땅 뽑아 버릴테니 그런 줄이나 알고
있어라."
푸라초프가 부하들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위엄 있게 입을 열었다.
"이거 봐, 장군들. 싸움은 그만들 둬. 올렌부르크의 개새끼들이 같은 들보에 매달려 발을 버둥댄다면 몰라도 우
리집 수캐들이 서로 물어뜯는 건 볼 수 없어. 그만 화해를 하도록 해."
홀로프샤와 베로볼로도프는 입을 봉하고 서로 노려보고만 있었다. 나는 내게 매우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는
지 모르는 이 화제를 딴 데로 돌려보리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푸가초프를 향해 명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정말! 당신이 말과 가죽옷을 준 데 대하여 감사하다는 말을 잊을 뻔했군요. 당신이 그 때 친적을 베풀어 주
시지 않았던들 성 안가지 가지도 못하고 도중에서 얼어 죽었을 것입니다."
내 계교는 완전히 성공했다. 이 말을 듣고 푸가초프는 기분이 좋아서 가늘게 뜬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빌려 쓴 돈은 깨끗이 갚으란 말이 있네. 그건 그렇고, 시바블린한테 학대를 받고 있다는 처녀가 자네와 무슨 관
계가 있는지 말할 수 없겠나? 젊은 총각의 연애라는 것이겠지, 응?"
나는 분위기가 호전되는 것을 보자 사실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솔직히 푸가초프에게 대답했다.
"그 처녀는 내 약혼녀입니다."
"뭐, 자네 약혼녀야? 왜 진작 그렇게 말하지 못했어? 그렇다면 내가 결혼식을 올려 주고 잔치도 벌여 줄텐데?"
하고 그는 베로볼로도프를 행해
"이거 봐, 원수! 난 이 사람하고 오랜 친구 지간일세. 함께 저녁이라도 먹기로 하세. 아침엔 저녁보다 좋은 지혜
가 생긴다지 않았나. 이 사람의 문제는 내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나는 바라지도 않았던 이 호의를 거절하면 마음이 편했겠지만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이 집 주인의 딸인 두 카자
흐 처녀가 식탁에 빵과 생선국, 그리고 포도주와 맥주병을 차려 놓았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금 푸가초프를 위시
해서 그의 험상궂은 일당들과 더불어 같은 식탁에 앉게 된 것이다.
내가 부득이 한몫 낀 향연은 밤이 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침내 좌중은 모두 술에 취하기 시작했다. 푸가초프
가 의자에 앉은 채 꺼벅꺼벅 졸기 시작하자, 부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개도 밖으로 나가자고 눈짓을 했다. 나
는 그들과 밖으로 나왔다. 홀로프샤의 지시를 받고 보초병이 재판소로 쓰이고 있는 오두막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사베리치는 일이 되어 나가는 꼴을 보고 놀란 나머지 얼빠진 사람이 되어 내게 한 마디 질문도 하지 않았
다. 그는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한숨을 쉬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더니 이윽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밤이 새도록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잡념 때문에 끝내 한잠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푸가초프의 호출을 받고 나는 그에게 갔다. 문 앞에는 타나르산 말 세마리가 이끄는 썰매가 서 있었
고 한길에는 군중이 모여 있었다. 현관에서 푸가초프와 만났는데 그는 털가죽 외투에 키르키즈 보자를 쓰고 길
떠날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만났던 패거리들이 그를 둘러싸고 굽실거리고 있어지만, 어제 저녁에 보았
을 때에 비하면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푸가초프는 명랑한 얼굴로 내게 아침 인사를 하고 자기와 함께 썰
매를 타자고 말했다. 나는 그와 함께 나란히 포장 속에 들어가 앉았다.
"베로고르스크 요새로 말을 몰아라."
하고 푸가초프는 말고삐를 쥐고 있는 어깨가 떡 벌어진 타타르 인에게 명령했다. 짤랑짤랑 방울소리를 내며 썰매
를 미끄러져 나갔다.
"기다려요! 기다려요!"
몹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여 와서 돌아보니 사베리치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푸사초프는 말을 멈추게
했다.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그래 이 늙은 놈을 팽개치고 혼자 가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아, 영감이로군! 또 만나게 됐군. 마부 옆에 올라타도록 해."
푸가초프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이 늙은 놈을 살펴 주시어 마음을 놓게 한 보답으로 백살까지 장수하시도록 평생을 두고 빌
겠습니다. 드리고 그 토끼가죽 얘기도 이제는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사베리치는 자리에 올라타며 연방 입을 놀렸다. 토끼가죽을 들먹거리는 소리를 듣고 이번에야말로 푸가초프가 노
발대발 하지나 않을까 근심했으나 다행히 자칭 황제는 그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체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때에 맞
지 않은 유치한 풍자라고 묵살해 버린 것 같았다.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고 군중은 길가에 죽 늘어서서 허리를 깊이 구부려 경의를 표했다. 푸가초프는 양쪽으로 번
갈아 가며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우리는 곧 마을 밖으로 나와 평탄한 대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 때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추측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몇 시간 후면 나는 임 이ㄹ어
버렸다고 단념했던 그 여인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만나는 순간을 마음 속에 그려 보았다. 나는 또
한 나의 운명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기이한 인연으로 나와 신비로운 관계를 맺게 된 사나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내 애인의 해방을 위한 역할을 스스로 맡고 나서 이 사나이의 성급한 잔인성과 피에 굶주린 습성이 내
머릿속에 되살아났던 것이다. 푸가초프는 그녀가 미로노프 대위의 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약이 바싹 오른
시바블린이 그에게 내막을 폭로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푸가초프 자신이 딴 방면에서 진상을 알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어찌도리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고 머리털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그 때 갑자기 푸가초프가 말을 걸어 내 상념을 깨뜨렸다.
"자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나?"
"생각이 없을 수 있습니까? 나는 귀족 출신의 장교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당신과 맞서서 싸웠는데 오늘은 이렇
게 한 트로이카에 타고 있습니다. 더구너 내 일생의 행복은 당신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 자네는 겁이 나는가?"
푸가초르가 물었다. 나는 이미 그에게 관대한 용서를 받은 이상 그의 동정뿐만 아니라 원조까지도 기대하고 있다
는 대답을 했다.
"그렇지, 자네 말이 지당하단 말이야. 자네도 눈치를 챘겠지만 내 부하 녀석들은 자네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
다네. 특히 그 늙은이는 오늘도 자네가 틀림없이 간첩이니까 고문을 해서 목을 옭아 버리자고 주장했지만 내가
그 말을 받아 들이지 않았지."
자칭 황제는 말했다. 그리고 잠깐 생각을 하다가 사베리치와 타타르 인이 듣지 못하게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때 자네가 준 한이 술과 토끼가죽 덧저고리를 내가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야. 어떤가, 내가 자네 동ㄹㅎㅎ
들이 말하는 것처럼 잔인무도한 인간이 아니란 것을 알겠지? 올렌부르크에선 내 얘기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켤코 얕잡아볼 수 없는 상대라 말하고들 있습니다. 당신은 충분히 실력을 발휘한 사람이니까요."
나는 베로고르스크 요새가 점령되었을 때의 참혹한 광경을 생각하면, 그와 다틀 만한 이유가 충분하지만 그럴 필
요가 없었기 때문에 한 마디로 대꾸했다. 내 말에 자칭 황제는 흡족한 모양이었다. 그는 사뭇 유쾌한 어조로 말
했다.
"그야 그렇지! 내가 향하는 곳엔 덤벼들 놈이 없으니까. 올렌부르크에선 저 유제바의 전투를 알고 있는가? 그 때
사십 명의 장군이 전사하고 네 개의 군단이 몽땅 포로로 잡혔지. 자넨 어떻게 생각하는가, 프러시아 왕은 나와
견줄수 있겠는가."
나는 이 비적 두목의 자만심이 하도 재미있어서 물었다.
"당신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프리드리히 왕과 싸워서 이길 것같습니까?"
"표트르 표드로비치 말인가. 나는 이미 자네 편의 군들에게 이겼는데, 그 장군들이 쳐부신 그를 내가 어째서 이
기지 못하겠나? 지금까지 나는 운이 좋았네. 내가 모스카바로 진격할 때도 역시 운이 좋을지는 모르지만."
"그럼, 당신은 모스크바까지 진ㅈ할 작정입니까?"
자칭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야. 사실 나는 활개칠 수 없는 형편이네. 부하놈들은 각기 아는 체하고 잔소리가 너무 많
이 탈이야. 모두 형편없는 자들이지. 그래서 나는 놈들의 기미를 살펴보고 있지 않을 수 없다네. 한번 정세가 불
리하게 돌아가기만 하면 그들은 자기들 모가지 대신 내 목을 가차없이 잘라다 바칠 놈들이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당신이 결단을 내려 여왕 폐하의 자비심에 호소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안 될 말이야. 이제 후회를 한대도 때는 이미 늦었어. 나 같은 놈이 용서받을 리는 없고 어ㅉ든 끝까지 밀고 나
가는 수밖에 없네. 하지만 누가 아나?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르지! 그리시카 오트레비에프는 모스크바를 통치하지
않았는가 말이네."
"당신은 그자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들창 밖으로 내동댕이친 후 갈기갈기 사지를 찢어서 불에 태
우고 그 재는 대포에 재어 쏘아 버리지 않았습니까."
푸가초프가 그 어떤 살벌한 흥분을 느끼는 듯 입을 열었다.
"이봐, 내 얘길 좀 들어 봐. 자네에게 옛날 이야길 하나 하지. 이건 내가 어릴때 카르미크노파에게 들었는데, 하
루는 독수리가 까마귀에게 이렇게 물었다네. 까마귀야 너는 이 세상에서 3백 년이나 살 수 있는데 어째서 나는
겨우 33년밖에 못살지. 하니까 까마귀가 대답하는 것이 걸작이었네. 당신은 생피를 빨아먹고 나는 송장을 먹으니
까 그렇지요, 라는 말을 듣고 독수리가 생각하기를 음, 그렇다면 난도 어디 송장을 먹어 볼까 해서 독수리와 까
마귀는 하늘을 날아가다가 죽어 넘어진 말을 발견하고 내려와서 말 위에 앉았지. 까마귀는 맛있게 쪼아먹기 시작
했지만, 독수리는 한두 번 쪼아 보더니 날개를 치며 까마뤼에게 말했다네. 역시 안 되겠다, 까마귀야. 3백 년 동
안 썩은 고기만 먹는 것보다는 단 한 번 이라도 생피를 배불리 먹는 편이 낫겠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지, 라고
하던 독수리의 말에 대해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거 참 재미있군요. 하지만 살인이나 강도질을 하며 사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송장을 쪼아 먹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 같습니다."
푸라초프는 뜻밖이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아무 대꾸도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제각기 자기 생각에 잠겨
서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타타르 인은 구슬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사베리치는 마부석에서 몸을 흔들면
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트로이카는 평탄한 길을 쏜살같이 달라고 있었다. 잠시 후에 우랄 강의 험한 기슭이
언뜻 보였다. 그러고 나서 15분쯤 뒤에 우리들은 베로고르스크 요새에 도착했다.
제12장 고아
앞뜰에 한 그루 외로운 사과나무
가지도 잎도 꽃도 없어요
우리들의 사랑스런 신부
아버님도 어머님도 안 계셔요
들러리도 없고 축복하는 사람도 없어요
-혼례의 노래-
썰매는 방울소리를 내며 사령관 집 층계 앞에서 멎었다. 주민들이 몰려들어 자칭 황제 주위에서 연실 굽실거렸
다. 시바블린은 현관 층계에서 푸가초프를 정중히 영업했는데 그는 카자흐 인들이 입는 옷을 걸치고 수염을 기르
고 있었다. 변적자는 비열한 말투로 충성을 표시하며 자칭 황제가 썰매에서 내리는 것을 부축했다. 그는 나를 보
자 당황한 빛을 보였으나 곧 태연스럽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네도 우리 편으로 넘어왔나? 진작 그럴 것이지."
나는 외면한 채 아무 대꾸도 하지를 않았다. 오래 전부터 낯익은 방 안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는 가슴이 미어
지는 듯 아파왔다. 벽에는 폭도들에게 죽음을 당한 사령관의 임관 사령장이 지난 날을 말하는 슬픈 묘비명처럼
그대로 걸려 있었다. 푸가초프는 이전에 이반 쿠즈미치가 부인의 다분한 잔소리를 귓전에 흘려 버리며 곧잘 졸고
앉았던 그 의자에 걸터앉았다. 시바블린은 푸가초프에게 손수 워트카를 가져다 바쳤다. 그는 한 모금 마시더니
나를 가리키며 시바블린에게 말했다.
"이 친구에게더 한 잔 부어 줘."
시바블린이 쟁반을 들고 내 옆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다시 외면을 하고 말았다. 그는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았
다. 원래 눈치가 빠른 그는 푸가초프가 자기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푸가초프는 요
새의 상황과 적군의 동정에 대해 여러 가지를 질문하다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불쑥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자네가 감금하고 있는 처녀를 어디 한번 보세."
시바블린은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폐하, 감금한 게 아닙니다. 몸이 편치 않아서... 지금 안방에 누워 있습니다."
"그럼 나를 그곳으로 안내하도록 해."
자칭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핑계가 있을 수 없었다. 시바블린은 푸가초프를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방으로 안
내했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시바블린은 발을 멈추고 말했다.
"폐하! 폐하께서는 제게 무엇이든지 요구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아내의 침실에 들어가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나는 온 몸이 후들후들 떨려 왔다.
"그럼, 결혼했단 말인가?"
나는 그에게 금방 덤벼들 기세로 외쳤다.
"가만 있어!"
푸가초프가 나를 제지했다. 그리고 시바블린에게 언성을 높여 말했다.
"너 말이야, 공연히 똑똑한 체하고 건방진 수작 따위는 하지 말아. 그 여자가 네 아내든지 아내가 아니든지간에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을 데리고 들어갈 뿐이야."
안방 문 앞에 와서 시바블린은 다시 발을 멈추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폐하, 아내는 열이 높아서 벌써 사흘째 줄곧 헛소리만 하고 있다는 걸 미리 말씀드립니다."
"어서 문이나 열어!"
푸가초프가 말했다. 시바블린은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하더니 열쇠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푸가초프가
발길로 걷어차자 자물쇠가 벗겨지며 문이 열렀다. 우리들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광경을 보고 나는 경악했
다. 방바닥에는 창백하게 여윈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헝클어진 머리에 갈기갈기 찢어진 농부의 옷을 입고 앉아 있
었다. 앞에는 빵조각을 올려 놓고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몸을 보를 떨며 "악" 하고 소리를 질
렀다. 내가 그 순간에 무엇을 어떻게 했었는지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푸가초프는 시바블린을 바라보고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
"자네 집 병실은 이렇게 훌륭하군!"
그리고 그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이거 봐요, 색시는 남편에게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벌을 받고 있나?"
그녀가 대답했다.
"남편이라구요? 저 사람은 제 남편이 아니에요. 저는 죽어도 저 사람의 아내가 되지 않겠어요. 만일 아무도 저를
구해 주지 않는다면 죽어 버리기로 결심 했어요. 저는 정말 죽어 버릴테예요."
푸가초프는 눈을 부릅뜨고 시바블린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감히 나를 속여? 이 개자식아, 네 죄가 어떤 벌을 받아야 마땅한지 알고 있느냐?"
그 말에 시바블린은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순간 모멸이 증오와 분노의 감정을 물리치고 내 가슴 속을 차지 했
다. 나는 탈옥한 카자흐의 발밑에 엎드려 있는 이 귀족을 혐오에 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푸가초프는 좀 누그러진 어조로 시바블린에게 말했다.
"딱 한 번만 용서해 주지. 하지만, 한 번 더 죄를 저지르면 그 땐 이번 것도 합쳐서 벌을 줄테니 그리 알아."
그러고 나서 그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귀여운 아가씨, 여리서 나가라. 내가 자유를 주겠다. 나는 황제야."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재빨리 그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그가 바로 부모의 원수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두 손으로 얼
굴을 가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나는 그녀에게 달려들었으나 그 때 낯익은 하녀 파라시카가 재빨리 방 안으
로 뛰어들어와서 주인 아가씨를 간호하기 시작했다. 푸가초프가 안방에서 나왔으므로 우리 세 람은 응접실로 돌
아왔다.
"소감이 어떤가, 친구. 귀여운 처녀를 구출해 냈으니 말이야. 곧 신부한테 사람을 보내서 조카딸의 결혼식을 올
리도록 하면 어떨까? 내가 대신 아버지 노릇을 하고 시바블린에게 들러리를 부탁하면 될 걸세. 그리고 실컷 마셔
보세.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잔치를 벌이세."
푸가초프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일이 기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푸가초프의 제의가 시바블린의 분통을 터뜨린 것이
다.
"폐하, 제가 폐하께 거짓말을 한 것을 분명히 잘못입니다. 하지만 그리뇨프도 폐하를 속이고 있습니다. 그 여자
는 이곳 신부의 조카가 아니라 이 요새가 점령될 때 처형된 이반 쿠즈미치의 딸입니다."
시바블린은 미친 듯이 외쳤다. 푸가초프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인가?"
"시바블린의 말이 옳습니다."
나는 서슴치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자넨 낭네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지?"
푸가초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건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부하들이 있는 앞에서 어떻게 미로노프의 딸이 살아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었겠습
니까. 그랬다간 그들이 가만 놔 두질 않았을 겁니다. 어차피 목숨을 건지진 못했겠지요."
"자네 말이 옳아. 그 주정뱅이 녀석들이 불쌍한 처녀를 용서해 주었을 리가 만무하지. 하긴 신부의 마누라가 그
들을 속여 넘기길 잘 했다고 할 수 있네."
나는 그의 기분이 좋은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내 말을 들어 주십시요.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게 베푼 은혜에 보
답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목숨이라도 기쁘게 바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다만
나의 명예와 기독교도로서 양심에 위반되는 일만은 요구하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은 나의 은인입니다. 이와 도와
주시는 김에 끝까지 봐주십시오. 나와 저 가련한 여자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떠나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어느 곳에 계시더라도 그리고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죄많은 당신의 영혼을 구해 달라고 매일
같이 하나님께 빌겠습니다."
푸가초프의 거친 성품도 이 말에는 다소 동정심이 생긴 것 같았다.
"좋아, 자네 마음대로 해! 죽이기로 한 놈은 죽이고 용서하기로 한 놈은 깨끗이 용서하는게 언제나 내 주의니까.
자네가 그 미인을 데려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해 주겠어. 나는 하나님께서 사랑과 충고를 주시기를 바랄 뿐일
세!"
시바블린은 얼이 빠진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푸가초프는 요새를 순시하러 나섰다. 시바블린은 그를 따갔지만
나는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는 구실로 뒤에 남았다.
나는 안방으로 달려갔다. 문이 닫혀 있어서 노크를 했다.
"누구세요?"
하고 파라시카가 물었다. 내가 왔다고 대답하자 이번에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애처로운 음성이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전 지금 옷을 갈아 입고 있어요. 아클리나 판필로브나네 집에 먼저가 계세요. 저도 곧
그리고 가겠어요."
나는 그녀의 말대로 게라심 신부 집으로 갔다. 신부도 부인도 나를 맞으러 달려나왔다. 사베리치가 미리 알렸던
것이다.
"오오! 표트르 안드레비치. 하나님께서 당신을 돌봐 주셨군요. 그 후 어떻게 지내셨어요? 여기선 날마다 당신 얘
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가엾게도 당신이 없는 사이에 갖은ㅇ 고초를 다 겪었답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과 푸가초프는 어떤 사인가요? 어째서 그가 당신을 죽이기 않았을까요. 어쨌든 잘 됐어요. 그것
만을로도 나는 그 악당들을 고맙게 생각해요."
"여보, 이젠 그만 해 두오."
게라심 신부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함부로 지껄여 대는게 아니야. 말이 많으면 구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아. 자, 표트르 안드레비
치,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정말 오래간만이군요."
부인은 집에 있는 음식으로 나를 대접했다. 그러면서도 한시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녀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자기 집에서 빼앗아 간 것은 시바블린의 엉큼한 수작이며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울면서 그들과 헤어지기 싫어하던
모습이며 그 후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파라시카를 통해 자기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는 얘기며, 그리고 자기가 마
리아 이바노브나에게 나한테 편지를 쓰라고 권했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얘기를 들려 주었다. 나도 그 동안 지내
온 얘기를 간단히 했다. 그들이 거짓말을 꾸며댄 것을 푸가초프가 알게 되었다는 말을 듣자 신부와 부인은 성호
를 그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거예요. 하나님, 어두운 구름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하시옵서소. 그건 그렇고,
그 알렉세이 이바니치는 정말 못된 녀석이에요."
하고 아클리나 판필로브나가 말했다.
바로 이 때 문이 열리고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핼쑥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누추한 농
부의 옷을 벗어 버리고 전처럼 깨끗하고 예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한참 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우리는 양쪽이 다 가슴이 벅차 올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인 부부는 자기들이 끼어
들 때가 아님을 눈치채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우리는 단둘이 남게 되었다. 일체의 잡념은 사라졌다. 우리는 서
로 얘기를 주고 받고 했으나 해도해도 끝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스럽던 지나간 날을 회상했다. 그녀와 나
는 함께 울었다. 이윽고 나는 나의 계획을 그녀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푸가초프의 세력하에서 시바블린이 지배
하고 있는 이 요새에 그녀가 이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적의 포위 하에서 갖은 곤궁을
다 겪고 있는 올렌부르크로 갈 수도 없는 문제였다. 또한 그녀에게 가까운 친척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
서 나는 나의 부모가 계시는 고향으로 가자고 제의했다. 그녀는 내 아버지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꺼림칙하게 여겨 처음에는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타일러 그녀를 안심시켰
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공훈 있는 군인의 딸을 자기 집에 받아들이는 것을 아버지는 기쁘게 여길 것이며,
또 그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하리라고 나는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여운 마리아 이바노브나! 나는 당신을 아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명이 우리를 떨어질 수 없게 결합시켰습
니다! 이젠 어느 무엇도 우리를 갈라 놓을 수는 없어요."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어색한 수줍음이라든가 일부러 사양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솔직하게 내 말을 듣고 있었
다. 그녀도 자기의 운명이 나의 운명과 결부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 양친ㅇ의 승
낙을 받을 때까지는 나의 아내가 될 수 없다고 거듭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반박하려고 들지 않았다. 우리들
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키스를 주고 받았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모든 일에 대해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한 시간 가량 지난 후 하사가 푸가초프의 서투른 글씨로 서명한 통행증을 가지고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
다. 푸가초프에게 갔더니 그는 이미 길 떠날 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는 폭군이며 악
당인 무서운 사내와 이별하며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그것을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째서 진실을
그대로 말할 수 없단 말인가? 그 순간 내 마음 속에는 그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연민이 솟구쳐 일어났다. 그가
이끌고 있는 폭도들 사이에서 그를 떼내어 때를 놓치기 전에 그의 목숨을 건져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바
블린과 주위에 몰려든 군중 때문에 나는 끝내 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나의 뜨거운 염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말
았다.
우리들은 다정한 친구들처럼 헤어졌다. 푸가초프는 군중 속에서 아클리나 판필로브나를 발견하자 손가락을 들어
위협을 주는 시늉을 하며 의미심장하게 눈을 깜박거려 보이고 나서 썰매에 올라타더니 베르다르 출발하자고 명령
했다. 그리고 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는 다시 한 번 포장 속에서 몸을 내밀고 내게 소리쳤다.
"그럼 잘 가! 언제든지 다시 한 번 만날 날이 있을 거야."
사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어떤 환경이었던가... 푸가초프는 떠났다. 나는
오랫동안 그의 썰매가 달려가는 흰 설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였던 사람들은 흩어져 갔다. 시바블린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신부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들은 떠날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었고 나도 그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
았다. 우리들의 짐은 전부 사령관이 사용하던 낡은 마차에 실려 있었다. 마부는 재빨리 말잔등에 멍에를 씌웠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교회당 뒤에 있는 양친의 무덤에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갔다. 나도 함께 가려 했으나 그녀는
혼자 가기를 원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나와 파라시카, 이렇게 세 사람이 포장 속 좌서게 타고 사베리치는 마
부가 앉는 앞자리에 올라 탔다.
"잘 가요, 착한 마리아 이바노브나! 잘 가요, 우리들이 좋아하는 표트르 안드레베치, 부디 몸 조심하고 그리고
두 분이 행복하게 지내세요."
선량한 신부 부인의 키스를 받고 우리들은 출발했다. 나는 사령관 집 들창가에 시바블린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
다. 그의 얼굴에는 원한의 그림자가 덮여 있었다. 나는 이미 패배해 버린 적에게 자랑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드리어 우리는 요새의 성문을 나와 영원히 베로고르스크를 멀리 했다.
제13장 체포
분노하지 말라, 내 직책의 임무에 따라 그대를 체포하겠다.
반항하지 않겠다, 나 바라노니 지난 사건을 해명할 시간을 주기 바란다.
-크냐지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나를 그토록 안타깝게 만들었던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쉽게 만날 수 있게 된 나는 나 자신
을 믿을 수 없었으며 방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달콤한 꿈인 것만 같았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멍하니 나를 쳐
다보기도 하고, 혹은 길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아직도 제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잠자코 있었
다. 왜냐 하면 너무나 지쳐 있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새 두 시간 가량이 지나서 우리는 푸가초프의 수
중에 있는 다음 요새에 도착했다. 거기서 말을 갈아 채웠다. 말을 교대하는 속도가 빠른 것이라든지 푸가초프로
부터 사령관으로 임명된 텁석부리 카자흐가 분주하게 도와 주고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우리를 태우고 온 마부가
허풍을 떤 덕택에, 그들이 나를 자칭 황제의 총애를 받는 측근자로 대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길을 재촉했다. 황혼이 깃들기 시작하면서 조그마한 도읍에 가까워졌을때 텁석부리 사령관은 그것에도 자
칭 황제와 합류하기 위해 이동 중인 강력한 부대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보초로부터 정지 명령을 받았다.
"누구냐?"
그러자 마부는 커다란 소리로 대답했다.
"황제 폐하의 친구되시는 분과 그 부인이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패의 기병대 병사들이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험악한 얼굴을 하고 우리를 에워쌌다.
"오냐, 잘 만났다. 악마의 친구놈아! 너희들에게 좋은 맛을 보여 주마."
콧수염을 기른 상가가 말했다. 나는 포장 속에서 나와 그들의 대장한테 안내하라고 명령했다. 내가 장교라는 것
을 알자 병사들은 욕지거리를 그만두었다. 상사가 나를 소령에게 안내했다. 사베리치는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친구라니. 그게 어디 될 뻔한 소립니까. 뜨거운 자리를 피하다 보니 불 속으로 들어간 격이 되었군
요. 아아, 하나님! 저희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차는 우리들의 뒤를 천천히 따라왔다. 5분 후에 우리들은 불을 밝게 켜 놓은 자그마한 집에 도착했다. 상사는
나를 보초병에게 인계하고 보고를 하러 갔다. 그는 곧 돌아와서 말하기를, 소령님께서 나를 만날 시간이 없으니
영창에 집어넣고 부인만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건 무슨 뜻인가? 소령님은 머리가 돌아 버린 게 아냐?"
나는 버럭 고함을 쳤다.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소위님. 저는 다만 소위님을 영창에 넣고, 부인을 소령님한테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나는 현관 층계를 달려 올라갔다. 보초병들이 나를 제지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장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는 대여섯 명 가량의 기병 장교들이 노름을 하고 있었는데 소령이 물주였다. 그는 이반 이바노
비치주린이었다. 언젠가 신비르스크의 여관에서 내 돈을 딴 바로 그 친구라는 것을 첫눈에 알아보았을 때 나의
놀라움은 어떠했을까!
"이게 어찌된 일이야? 이반 이바노비치! 당신이었군요."
"야아, 자네 표트르 안드레비치가 아닌가. 어떻게 된 일이야? 어디서 오는 길인가? 그래 그 동안 잘 있었나. 어
때, 자네도 판에 끼어들어 보는 게."
"고맙소. 그러나 우선 숙소를 하나 구해 구십시오."
"숙소를 구하다니? 여기 나 있는 데 머물지 그래."
"그럼 그 친구도 이리 데려오지."
"친구가 아니라, 나는 부인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부인을 동반했다고? 대체 어디서 낚아 왔나, 이 친구야! 그렇다면 할 수 없군. 숙소를 마련해 주지. 그러나 유
감스러운걸... 옛날 식으로 주연이라도 베풀었으면 놓을텐데... 이봐, 거기 사병 그 푸가초프의 마누라라는 건
왜 안 데려오는 거야? 안 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나? 우리 나라는 훌륭한 신사가 돼서 절대로 야비한 짓은 하지 않
을 테니까, 조금도 겁낼 건 없다고 타일러서 슬쩍 목덜미를 붙잡아 가지고 오란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오. 푸가초프의 마누라가 어디 있어요? 그 여자는 죽은 미로노프 대위의 따님입니다. 포로다 돼
있는 걸 내가 구출해서 지금 우리 아버지가 계시는 시골에 맡겨 둘 생각으로 데려가눈 중입니다."
"뭐라고! 그럼 방금 보고가 들어온 건 자네 얘기인가? 제기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지요. 그러나 우선 가련한 그 처녀를 안심시켜 주시오. 당신의 부하들한테 여간 혼나지 않
았어요."
주린은 즉시 적당한 조취를 취했다. 그는 자기가 직접 한길로 나와서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본의 아닌 푸대접을
사과하고, 거리에서 제일 좋은 여관으로 그녀를 안네하라고 부하에게 명령했다. 나는 일행과 떨어져 주린의 숙소
에서 묵기로 했다. 저녁 식사를 끝마친 후 둘이만 남게 되자 나는 주린에게 그 동안 내가 겪은 사건들을 얘기했
다. 그는 귀를 기울이고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얘기가 끝나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잘 알겠네. 고생이 많았겠군. 그런데 자네는 왜 결혼을 하려는 거지? 나는 명예를 존중하는 장교야. 자네에게
괜한 소릴 하려는 생각은 추호는 없지만, 내 말을 믿어, 결혼이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야. 도대체 무엇 때문
에 마누라의 시중을 들고 어린애들의 어리광을 받고 있어야 하나? 집어치우지 그래. 그리고 내 말대로 하란 말이
야. 대위의 딸과는 헤어지게. 신비르스크로 가는 길은 내가 깨끗이 소탕해 놨으니까 안전하네. 내일이라고 그 처
녀를 자네 양친께 혼자 보내고 우리 부대에 남는 것이 좋겠네. 올렌부르크로 돌아갈 필요는 없을 거야. 공연히
폭도들에게 다시 붙잡혀 봐, 이번에도 그들 손에서 쉽사리 빠져나올 수 있다고 어떻게 장담하느냔 말이야. 그러
니까 내 말대로하면 여자에게 빠졌던 마음도 저절로 가라앉고 만사가 잘 될 것으로 믿네."
나는 그의 말을 전적으로 찬성할 수는 없었지만, 한편 내 마음 속의 군인으로서의 의무감은 여왕 폐하의 군대에
그대로 남아서 종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주린이 충고에 따라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고향으로 모내고
나 자신은 그의 부대에 남아 있기로 결심했다.
마침 사베리치가 갈아 입을 옷을 가지고 왔다. 나는 그에게 내일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혼자서 모시고 떠나도록
하라고 했다. 그는 순순히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떻게 도련님을 혼자 두고 갈 수 있겠어요? 그럼 앞으로 누가 도련님ㅁ이 시중
을 들겠어요? 그리고 양친께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나는 노인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타일러 그를 설득하기로 했다.
"알르히프 사베리치,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내 부탁을 잘 들어서 내 은인이 되어줘. 이젠 시중을 들어 줄 사람
이 없어도 불편할 건 없을 거야. 만일 자제를 바리아 이바노브나에게 딸려 보내지 않으면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없어. 그 사람을 돌봐 주는 건 내 시중을 드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사정만 허락한다면 나는 곧 그 사람과
결혼할 것이야."
그러자 사베리치는 사뭇 놀란 표정으로 손뼉을 탁 치며 내 말을 받았다.
"결혼이라구요? 도련님이요? 그 말을 들으면 아버님께선 뭐라고 하실까요. 그리고 어머님께선 기뻐하실까요?"
"허락해 주실 거야.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어떤 처녀라는 것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허락해 주실 거야. 나는 결혼
문제에 대해서 자네의 도움을 바라고 있네. 자네가 우리들을 위해 좋도록 말씀드리면 아버지나 어머님ㅁ은 자네
말을 믿을 거야. 그렇지 않나?"
노인은 내 말에 감동되었다.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장가를 드시는 건 아직 빠르지만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흠잡을 데 없는 아가씨니까
이 기회를 놓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지요. 그러면 도련님 생각되로 하십시오. 저는 천사와 같은 아가씨를 모시
고 가서 힘자라는 데까지 부모님께 잘 말씀드리지요. 이렇게 훌륭한 색시라면 친정에서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할
지라도 탓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사베리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주린과 한방에거 잠자리에 들어갔다. 나는 몹시 들떠 있었기 때문에 되는
대로 지껄여 댔다. 주린도 처음에는 달갑게 상대해 주었으나 점점 대꾸가 적어지며 동문서답격인 말을 하더니 마
침내 대답을 그만두고 코를 드르렁 골기 시작했다. 나도 곧 입을 다물고 그의 뒤를 따라 꿈속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찾아가서 나의 계획을 얘기했다. 그녀는 나의 의견이 타당하다는 것을 인
정하고 군말없이 찬성했다. 주린의 부대는 그 날 중으로 출동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시간을 지체할 필요도 없었
다. 그래서 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사베리치에게 무탁하고 양친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곧 떠나 보내기로 했
다.
"무디 몸조심하세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다시 만나게 될는지 어떨는지, 그런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언제까지나 당신을 잊이 않겠어요. 제 목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제 마음 속에 있는 건 당신뿐일 거예요."
그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서
가슴속에서 들끓는 감격을 나타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녀는 떠나가 버렸다. 나는 슬픔에 잠겨 말
없이 주린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내 기분을 전환시켜 주려고 했고, 나도 역시 시름에 젖어 있고 싶지 않았으므로
온 종일 난장판이 되도록 놀았다. 너녁녘에 우리는 출동했다.
2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군사 행동을 방해하고 있던 겨울이 지나가자, 우리 장군들을 합동작전으로 들어갈 준
비를 하고 있었다. 푸가초프는 여전히 올렌부르크를 포위하고 있었지만, 한편 정부군 부대들은 그의 주위에서 상
호 연결을 유지하마 사면팔방에서 반란군의 거점으로 육박하고 있었다. 폭동에 가담했던 마을들은 우리 군대를
보기가 무섭게 항복했고 폭도의 무리들은 도처에서 패주를 계속해, 모든 전세는 신속하고도 순조로운 정말을 예
고하고 있었다.
얼마 후 고르츠 공작이 타치시체프 요새 근처에서 푸가초프를 격파하고 폭도들을 분산시켜 올렌부르크를 해방시
킴으로써 반란군에게 최후의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주린은 그 때 폭동에 가담했던 파시키르
족들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폭도들은 우리가 나타나기도 전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봄이 되자 우리는 어느 타타르 마을에 갇히고 말았다. 홍수가 나서 통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비적
이나 야만인들을 상대로 하는 따분하고 시시한 전쟁도 이제 곧 끝날 것이라는 생각으로 권태를 잊으려 했다. 그
러나 푸가초프는 체포되지 않았다. 그는 시베리아 공장 지대에 나타나서 새로운 폭도를 규합해 가지고 또다시 잔
악한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시베리아의 여러 요새가 함락된 것을 알게 되었다. 푸가초프가 승전했다는
소문이 다시 떠돌게 되었다. 얼마 안 가서 그가 카잔을 점령하고 모스크바로 진격했다는 소식이, 폭도를 대수롭
지 않게 생각하고 태평하게 잠자고 있던 사령관의 눈을 번쩍 뜨이기 했다. 주린은 볼가 강을 건너 진격하라는 명
령을 받았다.(푸슈킨이 삭제한 원고의 일부 '제13장에서 생략된 부분'은 여기에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들의 진격과 전투의 종결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다만 전쟁으로 인해 민중의 큰 피해를 입
었다는 것만은 간단히 기술해 둔다. 우리는 폭도들에게 파괴되고 약탈당한 마을을 지나며 주민들이 숨겨 두었던
식량을 부득이 징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는 곳마다 행정은 무질서한 상태에 있었고, 따라서 지주들은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비적떼들은 도처에서 못된 짓을 하고 돌아다녔으며 정부군의 지휘관들은 제멋대로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하고 또 용서해 주기도 했다. 전쟁의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광대한 지방의 형편은 처참하기 짝이 없
었다. 이처럼 어리석고 무자비한 러시아의 폭동을, 신이여, 다시는 우리들에게 보여 주지 마소서.
푸가초프는 이반 이바노비치 주린의 추격을 받으며 도주하고 있었다. 얼마 후 우리는 그가 완전히 패망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주린은 자칭 황제가 체포되었다는 통지와 함께 군사 행동 정지 명령을 받았다.
전쟁은 끝났다. 이제는 나도 부모에게 돌아갈 수 있게 된 이다. 양친을 포옹하게 되고, 그 후 소식이 묘연한 마
리아 이바노브나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환희의 절정에 올려 놓았다. 나는 어린애처럼 깡충깡충 뛰었다.
주린은 나를 보고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안 돼지, 그러다간 따끔한 맛을 보고야 말 걸. 결혼해 보라니까, 절대로 신통한 일이 없을테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상한 감정이 나의 기쁨에 검은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그처럼 무고한 희생자들의 엄청난
피를 뒤집어 쓴 악한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극형에 대한 생각이 내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것
이었다.
'에멜리얀! 어째서 너는 총검 앞에 가슴을 드러내지 못했느냐! 어째서 포탄 앞에 몸을 내던지지 못했느냐! 아무
리 생각해도 그보다 더 좋은 길을 너는 발견하지 못했을텐데 말이다!'
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탓할 것인가. 나는 그가 자기 생애에서 가장 살기가 등등하던 그
순간에 내 목숨을 살려 주었고, 비열한 시바블린의 손에서 내 약혼녀를 구출해 준 사실을 떼어 버리고 그를 생각
할 수는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주린은 내게 휴가를 주었다. 며칠만 지나면 나는 집안 식구들과 다시 한자리에 어울리게 될 것이며, 나의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때,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출발이
허가된 날, 내가 막 실을 떠나려는 순간에 주린이 종이쪽지를 쥐고 매구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내 방에 들어왔다.
나는 그 어떤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뜨끔했다. 왜 그랬는지 나 잔시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내 당번병을 내보내고
나서 볼 일이 있어서 왔다는 말을 했다.
"무슨 일입니까?"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다.
"약간 복잡한 문제가 생겼어."
그는 종이쪽지를 내주며 대답했다. 나는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를 발견하는 대로 체포하여, 푸가초프의 사건
을 처리하기 위해 카잔에 설리된 사문위원회로 즉시 호송하라는 각 부대장 앞으로 보낸 비밀 명령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종이쪽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미안하이.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내 의무니까. 아마 자네가 푸가초프와 다정하게 동행했다는 소문이 어떻게 돼
서 정부에 알려진 모양이야. 그러나 자네가 위원회에서 진상을 밝히면 무사히 해결되리라 생각되네. 쿼 크게 상
심 할 것까지는 없어. 그럼 준비하도록 하지."
나는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사문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샤와는 줄거운 상봉이 어쩌면 수 개
월 늦어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쓰라렸다.
마차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주린은 나와 우정어린 작별 인사를 나우었다. 나는 마차에 올랐다. 장검을 빼어든
두 명의 기병에게 호위되어 카잔을 향해 떠났다.
제14장 사문
세상에 떠도는 풍문은 천 리를 달리는 바다의 물결
-속담-
나는 올렌부르크에서 무당 이탈한 것 밖에는 죄가 될 만한 것이 없다고 믿었다. 개별적인 출격을 금지한다는 법
규정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극장려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간단히 해명할 수 있었다. 혹시
지나치게 행동을 했다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명령 위반이라는 추궁을 받지 않을 것이다.그렇지만 푸가초프와의 우
정 관계에 대해서는 수많은 목격자들의 증언이 있을지도 모르며, 그렇게 되면 혐의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카잔으로 가는 도중 나는 내내 내가 받게 될 심문 내용과 거기에 대한 답변을 검토한 결과 법정에서는 어쨌든 사
실 그대로를 진술하기로 했다. 그것이 가장 솔직하고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화로 인해 허허벌판이 된 카잔에 도착했다. 거리에는 건물 대신에 숯이 되어 버린 나무 조각이 쌓여 있
고, 불에 그을린 벽이 지붕도 들창도 없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이것이 푸가초프가 남겨 놓고 간 발자취였던 것
이다. 나는 불타 버린 도시 한복판에서 그나마 무사히 남아 있는 요새로 연행되었다. 기병들은 나를 일직장교에
게 인계했다. 대장장이를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나이 발에 굵다란 족쇄가 채워져 감옥으로 끌려가서,
조그만 철창과 거무죽죽한 벽만으로 된 좁고 침침한 감방에 혼자 갇혀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시작은 결코 좋은 일
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용기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모든 수납자들을 생각함으로써 거
기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공허하면서도 아픈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의 감미로움을 처음으로 맛보면서 앞
으로의 운명에 대해 두려워함이 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
이튿날 간수는 위원회에 출두하라는 통보를 가지고 와서 나를 깨웠다. 두 사람의 병사가 안뜰 건너편에 있는 사
령관 숙소로 나를 연행하여, 자기들은 문 앞에 남고 나만을 들여 보냈다. 나는 꽤 널찍한 홀에 들어섰다. 서류가
가득 쌓여 있는 책상에는 두 삶이 앉아 있었다. 엄격하고도 냉정하게 보이는 나이 지긋한 장군과, 인상이 좋은
용모에 민첩하고 시원시원한 태도를 가진 이십칠팔 세의 젊은 근위대였다. 찬문 가까이 놓인 다른 책상에는 귀에
펜대를 꽂은 서기 한 삶이 내 진술을 기록하려고 서류를 바싹 앞에 당겨 놓고 앉아 있었다. 김문이 시작되었다.
성명과 신분을 묻더니 장군은, 혹시 내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그리노프의 아들이 아니냐고 물었다. 내 대답에
그는 냉엄한 어조로 내뱉듯 말했다.
"그렇게 존경할 만한 사람에게 이따위 아들이 있었다니, 실로 애석한 일이로군."
나는, 내가 비록 어떤 혐의를 받고 있다 할지라도 진상을 솔직히 해명함으로써 그 혐의는 없어질 줄 믿는다고 침
착하게 대답했다. 나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허어, 대단한 친구로군 그래. 그러나 그 따위 소리에 우리가 넘어갈 줄 알아?"
그는 펜대를 책상 위에 던지듯 놓고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젊은 쪽에서, 언제 어떠한 동기로 푸가초프의 부하가 되었으며 거기서 임무를 받아 수행했는지 말하라
고 할 때 나는 분개한 어조로, 장교이며 귀족인 내가 푸가초프의 부하가 될 수도 없는 일이며, 그로부터 어떠한
임무도 받은 적이 없다고 잘라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장교이며 귀족인 자가, 자기 동료들이 모두 학살될 때 혼자서만 자칭 황제로부터 특사를 받았
는가? 또한 어찌하여 장교이며 귀족인 자가 폭도들이 베푸ㅌ 주연에 참석했으며, 그로부터 모피외투라든가 반 부
를의 돈을 선사받았는가, 이처럼 괴상한 우정이 과연 변절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추악하고 범죄적인
비겁한 행동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연유에서 생긴 것인가?"
나는 근위장교의 질문에 깊은 모욕을 느끼고 흥분한 어조로 그 연유를 해명하기 시작했다. 푸가초프와의 관계가
눈보라치는 설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베로고르스크 요새 점령시에는 그가 나를 알아보고 용서해 주었다는 것을
얘기했다. 또 하나는 자칭 황제로부터 모피외투와 말을 받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베
로고르스크 요새에서는 폭도들에 대항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사수했다고 말했다. 끝으로 나는 올렌부르크의 비참
한 포위전에서의 내 충성을 증언할 수 있는 인물로서 직속 상관이었던 장군의 이름을 들었다. 그러나 냉엄한 장
군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개봉되어 있는 편지를 집어 들고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군기를 위반하고 군인 선서의 의무를 망감함으로써 금번 반람에 가담하여 그 괴수와 친밀한 관계를 맺은ㅇ 죄목
의 혐의자인 소위 그리뇨프에 관한 각하의 조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신함. 상기 소위 그리뇨프는 지난 1773년
10월 초순 경부터 금년 2월 24일까지 올렌부르크에서 복무했으나, 동 2월 24일 당시를 이탈함으로써 그리뇨프는
푸가초프의 복거지로 가서, 얼마 뒤 괴수와 더불어 전에 근무했던 베로고르스크 요새로 향했다 하며 따라서 그의
행동에 관하여 본관은 오직...
여기서 읽던 것을 멈추고 엄숙항 어조로 말했다.
"자, 이래도 변명할 말이 있는가?"
나는 이미 시작한 진상의 해명을 계속해 솔직한 태도로 마리아 이바노브나와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려 했다. 그러
나 나는 문득 그 어떤 억제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만일 여기에서 그녀의 이름을 끄집어낸다면 위원회는 필
경 그녀를 증인으로 불러 들이리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되면 악당들의 추악한 고박 속에
그녀의 이름이 오를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을 그들과 함께 법정에 내세워야 한다는 무서운 생각이 내게 강한 충
격을 주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심문관들은 그 때까지 나의 답변을 어느 정도 호의를 가지고 듣고 있는 것 같았으나 나의 주저하는 태도를 보자
또다시 불리한 선입감을 갖게 되었다. 근위 장교는 나와 고박인과의 대심을 요구했다. 장군은 어제의 역적을 불
러 오라고 명령했다. 나는 방문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나를 고발한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족쇄 소리
가 들리더니 방문이 열리며 들어온 사람은 시바블린이었다. 나는 그의 모습이 아주 변해 버린 데에 놀랐다. 그는
형편없이 여위었고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까맣게 운이나던 머리털은 아주 백발이
되어 버렸고 자랄 대로 자란 턱수염을 흉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그는 맥빠진, 그러나 거리낌없는 어조로 나에 대
한 고발을 되풀이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나는 간첩 임무를 띠고 푸가초프로부터 올렌부르크에 파견된 자로서,
매일 같이 성 밖으로 출격한 것은 성내이 모든 상황을 기록한 밀서를 전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며, 나중에는 공공
연하게 자칭 황제 편으로 넘어와서 괴수와 함께 각처의 요새를 돌아다니며 갖은 술책을 써서 동네의 변절자들을
없애 버리려고 모함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지위를 빼앗고 자칭 황제가 나누어 준 상을 독차지하려는 야심에서였
다는 것이었다.
나는 끝까지 그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리고 다만 한 가지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이름이 역적의 입에 오르지 않
은 것을 만족하게 생각했다. 아마도 그의 자존심이 자기를 경멸로써 끝까지 거부한 그녀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마음 속에도 나의 입을 다물게 한 것과 같은 그런 감정의 불꽃이 숨겨져 있었
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베로고로스크 요새 사령관의 딸 이름은 위원회의 사건 심의에서 누구의 입에도 오
르지 않았다. 나는 더욱 결심을 굳게 하고 심문관들이 무엇으로 시바블린의 진술을 반박할 수 있는냐고 물었을
때에도, 아까 내가 해명한 사실 이외의 다른 변명은 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장군은 나를 물러나게 하라고 명령했다. 시바블린과 나는 함께 밖으로 나왔다. 나는 예사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
라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비수를 품은 웃음을 입가에 띠더니 발에 달린 족쇄를 들고 빠른 걸음으
로 나를 앞질러 갔다. 나는 다시 감방으로 끌려가서 그 후부터는 심문을 위한 호출도 받지 않았다.
아직도 독자들에게 전해야 할 내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것은 내가 직접 목격한 사실은 아니지만 하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마치 내가 현장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만큼 극히 상세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내 기억 속
에 아로새겨져 있다.
나의 양친은 노인들만이 가지는 진정한 친절로써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맞아 들였다. 그들은 이 불행한 고아를 자
기 집에 있게 하여 돌보아 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얼마 안가서 그들은
그녀가 어떤 처녀라는 것을 알고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우리들의 관계가 부질없는
풋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어머니는 어서 빨리 페트루샤가 귀여운 대위의 딸과 결혼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내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집안 식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래서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양친에게 나와 푸가초
프와의 기묘한 교제에 대해 얘기했는데, 그녀의 말이 조금 미심쩍은 데가 없어서 두 분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몇 번이나 배를 움켜쥐고 웃게 했다. 아버니는 왕실의 전복과 귀족의 전멸을 목적으
로 하는 추악한 폭동에 내가 가담할 수 있으리라고는 처음부터 문제시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사베리치를 엄걱
하게 심문해 보았다. 그는 내가 에밀리얀 푸가초프에게 갔었다는 것과, 그가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을 숨기지 않았으나, 변절했다는 말은 도대체 들은 일도 없다고 맹세했다. 그 말을 들은 부모님은 마음을 놓고
좋은 소식이 오기만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도 몹시 불안한 상태에 있었지만 원래가 매우 겸
손하고 조심성 있는 성격이었으므로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있었다.
몇 주일이 지나갔다. 하루는 페체르부르그에 사는 친척인 공작으로부터 아버지에게 편지가 왔다. 공작은 나에 대
한 소식을 써 보낸 것이었다. 편지에는 틀에 박힌 안부 말에 이어, 내가 폭도들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는 불
행하게도 너무나 확정적인 것이어서 세상이 본보기가 되도록 마땅히 극형에 처할 것이었으나, 여왕 폐하께서 아
버지의 공적과 높은 연세를 참작하시어 죄를 지은 자식의 감형을 결정, 수치스러운 사형을 면하고 다만 시베리아
벽지로 유형을 보내난 특사를 내리셨다고 적혀 있었다.
이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아버지는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그는 평소에 가졌던 의연한 태도를 잃어버렸고, 그
마음의 아픔은 보통 입 밖에 내는 법이 없었지만 폐부를 찌르는 비통한 탄식이 둑을 ㄲ고 쏟아져 나왔다.
그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울분을 터뜨렸다.
"이럴 수가 있나! 내 자식이 푸가초프의 음모에 가담하다니, 진작 죽기나 했더라면 이런 꼴을 보지 않았을 것인
데, 여왕 폐하에서 그놈한테 사형을 면해 주셨다고? 그것은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다. 나는 내 아들의 사형 그 자
체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내 조상 가운데는 양심에 따라 신성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끝까지 고수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분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선친께서는 볼루인스키라든가 후르시초프와 같은 정의의 투사들과 정
의를 위해 운명을 함께 하셨다. 그런데 귀족으로서 자기의 선서를 저버리고 살인강도나 도망친 노예 등속과 공모
를 하다니. 가문에 이런 수치와 불명예가 어디 있느냔 말이다!"
아버지가 너무 원통해 하는 것을 보고 놀란 어머니는 아버지 앞에서는 눈물조ㅗ차 보이지 못하고 세상에 떠도는
풍문을 믿을 수 없다는 것, 사람들의 말이란 변하기 쉽다는 것을 누누이 말하며 아버지의 원기를 회복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 드릴 수는 없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내가 자기의 이름을 입 밖에 내려고 생각했다면 얼마든지 결백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사건 심의의 진상을 짐작하고 내 불행의 원인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눈물을 보이지 않고 자기의 고민을 숨기고 있었지만, 한편 어떻게 하면 나를 구해 낼 수 있을
까 하는 방법만을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궁중연감을 뒤지고 있었으나, 생각은 먼 곳에 가 있었기 때문에 이 책도 그
에게 여느 때와 같은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옛날 행진곡을 휘파람으로 불고 있었다. 어머니는 묵묵히 털
실로 스웨터를 뜨고 있었는데, 이따금 눈물이 일감에 떨어지곤 했다. 그 때 역시 바느질을 하고 있던 마리아 이
바노브나는 갑자기, 자기는 암만해도 페체르보르그에 가 봐야겠는데 길을 떠날 수 있게 주선해 주었으면 좋겠다
는 말을 했다.
"갑자기 페체르부르그엔 왜 가겠다는 거냐? 마리아 이바노브나, 설마 너까지 우리를 저버리겠다는 건 아니겠니."
하고 어머니는 목시 섭섭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자기의 장래 운명이 이번 여행에 달려 있다는 것과 자기가 가려는 목적은 나라를 위해 목숨
을 바친 사람의 딸로서 유력한 인사들의 보호와 주력을 구해 보려는 데 있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머리를 숙였
다. 아들의 죄를 상기시키는 모든 일은 그에게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마음을 찌르는 꾸지람으로 들리는 것이었다.
"그럼 갔다 오려무나!"
하고 그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네 행복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런 역적의 누명을 쓰지 않은 훌륭한 신랑감이 너에게 나타나 주기
만 빌 뿐이다."
아버지는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어머니와 둘이 남게 되자 자기 계획의 일부를 털
어놓았다.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포옹하고 계획한 일이 뜻대로 이루어져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하나님
께 빌었다. 집안 식구들은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여행 준비를 해 주었고, 그리하여 며칠 후 그녀는 충실항 파라시
카와 충직한 사베리치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부득이 내 곁에서 떨어져 있던 사베리치에게는 하다못해 내 약혼녀
의 시중을 들 수 있다는 것으로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무사히 소피아에 도착했는데 그 때 여왕께서 차르스코예 셀로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머물기로 했다. 그녀는 칸막이 저쪽의 구석방으로 안내되었다. 역장 부인은 그녀와 곧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자기
는 궁중의 페치카 불을 때는 사람의 조카딸이라고 하며 남이 모르는 궁중생활의 세세한 내막을 털어놓았ㄷ. 여왕
께서 몇 시에 일어나시며, 몇 시에 커피를 드시며, 몇 시에 산책을 하시며, 또 어떠한 귀족들이 여왕의 측근에
있으며, 어제 수라 시간에는 무슨 얘기를 하셨으며, 저녁에는 누구를 접견했다는 것까지 늘어놓았다. 말하자면
역장 부인 안나 블라시예브나의 이야기는 역사적 기력의 몇 페이지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후세를 위한 귀중한 자
료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그녀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 다음 그들은 공원을 찾아갔다. 안 블라시예브나는 공
원이 오솔길이라든가, 여기저기 걸려 있는 다리를 지날 때마다 그 내력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산책에 지친 두
사람은 서로 흡족한 기분으로 여관에 들어왔다.
이튿날 아침,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일찍 일어나서 옷을 갈아 입고 혼자서 살짝 공원으로 빠져나왔다.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태양은 싸늘한 가을의 입김을 받고 이미 노랗게 단풍이 든 보리수 꼭대기에 비치고 있었다. 넓고 넓
은 호수는 잔잔히 빛나고 있었다. 잠을 깬 백조들이 의젓한 모습으로 호숫가에 그늘을 이루고 있는 관목 덤불 밑
으로부터 미끄러져 나왔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바로 얼자 전에는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루미안체프 맥작의 전
승 기념기가 세워진 아름다운 잔디밭 근처 거닐고 있었다. 별안간 영국 종의 흰 개 한마리가 그녀를 보고 짖어
대며 달려왔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겁을 먹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바로 그 때 상냥한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그 개는 물지 않으니까."
마리아 이바노브나느 어떤 귀부인이 기념비 맞은 편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그
벤치 한쪽 끝으로 가서 앉았다. 부인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고 마리아 이바노브나도 몇 번인가 곁눈질을 하며
부인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훑어보았다. 부인은 새하얀 아침 복장에 실내모를 쓰고 두터운 덧저고리를 껴입고 있
었다. 나이는 마흔 안팎으로 보였는데 알맞게 살찐 불그레한 얼굴에는 위엄과 평온이 깃들어 있었고 푸른 눈과 가
벼운 미소는 말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게 했다.
"아가씨는 이 지방 사람 같진 않은데?"
"네, 그렇습니다. 전 어제 시골에서 올라왔어요."
"어른과 함께 왔나요?"
"아뇨, 전 고아라 혼자 왔습니다."
"혼나서? 아직도 나이 어린 처녀가 어떻게...."
"저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안 계십니다."
"그럼 이곳에 무슨 볼 일이라도 있어서 왔나요?"
"네, 다름아니라 여왕 폐하께서 진정서를 올리려고 왔어요."
"고아라고 했으니, 그럼 무슨 억울한 일이라도 호소하려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폐하께서 자비를 베풀어 줍시사 하고 왔습니다."
"실례지만 당신은 어떤 분이시지?"
"저는 미로노프라는 대위의 딸입니다."
"미르노프 대위라니! 그럼 베로고르스크 요새 사령관으로 있던 바로 그분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남의 일에 끼어들어 실례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궁중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니까 당신이 무엇을 진정하려
는 건지, 혹시 도와 드릴 수 있을는지도 몰라요."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일어나서 공손히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처음 만나는 이 귀부인에게 어쩐지 그녀는 마음
이 끌리고 신뢰의 정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호주머니에거 차곡차곡 접은 종이를 꺼내어
그것을 초면의 귀부인에게 주었다. 부인은 말없이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의 깊게 동정어린 표정으로 읽어
내려가던 부인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부인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조금 전가지만 해도
그렇게 상냥하고 다정스럽던 얼굴이 아주 엄한 표정으로 굳어 버린 것을 보고 놀랐다.
"당신은 그리뇨르의 일을 탄원하려는 것인가요?"
하고 부인은 쌀쌀하게 말하면서 다시,
"여왕께서는 그 사람만은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 사람이 역적 편에 붙은 것은 무식하다거나 경솔하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원래가 양심이 없는 악질적인 인간이기 때문이에요."
"아니에요. 그건 잘못 아신 거에요. 정말 잘못 아셨어요. 제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막을 말씀
드리지요. 그분이 지금 그렇게 된 것은 모두 저 한 사람 ㄸ문입니다. 만일 그분이 재판을 받을 때 자기의 결백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직 저를 사건에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흥분해서 언성을 높여 말했다.
"무엇이 아니란 말이지요?"
부인은 거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여기서 그녀는 이미 독자들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열심히 설명했다. 부인은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그녀의 이
야기를 듣고 나서 물었다.
"지금 어느 곳에 유숙하고 있지요?"
안나 블라시예브나 집에서 묵고 있다는 대답을 듣더니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아, 알겠어요. 그럼 안녕히. 여기서 우리가 만난 얘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말아요. 당신의 진정서에 대한 회답은
아마 곧 받게 될 겁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부인은 나뭇가지에 덮인 호젓한 공원길로 걸어 들어갔다. 마리아 이바노브는 기쁜 기대를 가
슴 가득히 안고 안나 블라시예브나의 집으로 돌아갔다.
주인 마누라는 그녀에게 몇 마디 나무라는 말을 했다. 쌀쌀한 가을 날의 아침 산책은ㅇ 처녀의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모바르를 가져왔다. 차를 한 잔 마시는 동안에도 그녀는 무진장한 궁중비화를 늘어놓기 시작
했는데 마침 그 때 왕실 마차가 집 앞에서 멎더니 시종이 들어와 여왕 폐하께서 미로노프 양을 부르신다는 분부
를 전했다. 안나 블라시예브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수선을 떨기 시작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여왕 폐하께서 당신을 부르신대요. 어떻게 당신 얘기를 아셨을까요? 그런데 어떻게 여왕
님께 나선담! 마샤 양은 궁중의 걸음걸이가 어떤 지도 모르잖아요? 내가 함께 가면 어떨까? 그래도 내가 옆에 있
으면 이것저것 눈치 있게 귀뜸을 해 줄 수도 있을 거야. 그리고 그렇게 여행 복장으로 들어갈 수야 있겠어! 산파
네 집에 가서 노랑빛 로브론(옛날 부인들의 나들이옷)이라도 가져오게 할까?"
시종은, 폐하께서는 마리아 이바노브나 혼자서, 입고 있는 복장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고 분부를 전했다. 그러ㅓ
다면 주저할 필요는 없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마차에 올라타고 안나 블라시예브나의 충고와 축복을 받으며
궁중으로 향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우리 두사람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가슴이 두근거려 금방 숨이 막힐 지경이었
다. 몇 분 후에 마차는 궁전 앞에 멈추어 섰다. 그녀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층계를 올라갔다. 커다란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그녀는 시종의 안내로 비어 있는 웅장한 방을 몇 개나 지나 들어 갔다. 드리어 묵직하게 닫혀
진 문 앞에 다다르자 시종은 안에 들어가서 아뢰고 나오겠다고 말하며, 그녀를 혼자 남겨 두고 들어가 버렸다.
이제 곧 여왕 폐하를 만나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서 있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시종에게
안내되어 여왕의 거실로 보이는 방을오 들어갔다. 여왕은 경대 앞에 앉아 계셨다. 몇 삶의 시종들이 멀찍이 여왕
을 둘러싸고 있다가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공손히 길을 열어 주었다. 여왕은 부드러운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
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그 얼굴을 보자 아까 자기가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털어놓은 바로 그 귀부인이라는 것
을 알았다. 여왕은 그녀를 가까이 불러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는 약속대로 그대의 소원을 풀어 줄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대의 몰 일은 다 끝났습니다. 나
는 그대의 약혼자가 결백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여기 이 편지는 앞으로 시아버님이 되실 분에게 직접 전해주시
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받고는 흐느껴 울며 여왕의 발밑에 엎드렸다. 여왕은 그녀를 일으켜
세워 키스를 해 준 다음 그녀를 상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대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미로노프 대위의 딸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앞으로의 일은 하나도 염려하지 마시오. 필요한 것은 내가 모두 마련해 줄테니까."
여왕은 불행한 고아에게 위로의 말을 한 다음, 그녀를 물러가게 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궁전으로 갈때와 같
이 마차로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안나 블라시브예브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기
가 무섭게 질문을 퍼부었으나, 그녀는 아무렇게나 몇 마디 대꾸해 주고 말았다. 안나 블라시예브나는 그렇게 기
억력이 나쁘냐고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그것도 어수룩한 시골뜨기 처녀로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너그럽게 용
서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페체르보르그를 구경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날로 다시 시골을 행해 떠났다.
표트르 안드레비치 그리뇨프의 수기는 여기서 끝을 맺고 있다. 그의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위하면, 그는
1774년 말에 칙령으로 석방되어 푸가초프를 처형하는 형장게 나갔는데 푸가초프도 군중 속에서 그를 알아보고 1
분 후면 숨이 끊어져 피투성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전시될 그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고 한다. 그 후 표트르 안드레
비치는 마리아 이바노브나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의 자손은 지금도 신비르스크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XXX로부터 30킬로 가량 떨어진 곳에 열 사람의 지주들이 소유하는 마을이 있다. 그곳 지주들의 저택 별채 가운데
한 채에는 에카테리나 2세의 친필로된 편지를 넣은 유리액자가 벽에 결려 있다. 그것을 표트르 안드레비치의 아
버지에게 보낸 것으로 편지에는 그의 아들이 결백과 미로노프 대위의 딸의 총명과 착한 마음씨에 대한 칭찬의 말
이 적혀 있었다.
또한 표트르 안드레비치 그리뇨프의 수기는 그의 손자들 중의 한 사람이 우리가 자기 조부의 수기가 씌어진 시대
에 관한 저술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제공해 준것이다. 우리는 그의 일가 친척들의 양해를 얻어 각 장의
첫머리에 적당한 제사를 붙이고 약간의 고유명사를 임의로 변경해서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로 한 것이다.
1836년 10월 19일 간행자
제13장에서 생략된 부분
우리들은 볼가 강변에 접근해 가고 있었다. 우리 연대는 XX마을로 들어가 거기서 야영하려고 행구ㅜ을 정지했다.
이장이 내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건너편 마을은 모두 폭동에 가담한 푸가초프의 무리들이 설치고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이 정보는 내 마음을 몹시 혼란케 했다. 우리는 내일 아침에 강을 건너게 되어 있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고향의 마을이 강 건너 30베르스타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뱃가공을 찾았다. 이 고장
백성들은 모두 어부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조그마한 어선은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주린(원문에는 그리뇨프로
되어 있으나 편의상 바꾸어 놓았음)에게 가서 내 마음을 밝혔다.
그는 말했다.
"경솔한 짓은 그만두는 게 좋아. 혼자서 가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으니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내일 강을 건너
면 제일 먼저 자네 집을 방문하세.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경기병을 50명쯤 데리고 말이야."
나는 끝내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나룻배가 준비되었다. 나는 두 사람의 뱃사공과 함께 배에 올라탔다. 그들은
닻줄을 걷어올리고 노를 젓기 시작했다. 달빛으로 인해 하늘은 맑게 빛났다. 바람은 잔잔하여 볼가 강은 물결도
없이 묵묵히 흐르고 있었다. 배가 가볍게 흔들리며 어두운 강물을 헤치고 미끄러져 나갔다. 나는 여러 가지 공상
에 빠져 들어갔다. 반 시간 가량이 지나갔다. 우리들은 강 복판에 나와 있었는데 갑자기 뱃사공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가?"
나는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이상한 물체가 떠내려오고 있습니다."
하고 사공들은 한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강물을 따라 흘
러 내려오는 어떤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낯선 물체는 차츰 가까워졌다. 나는 사공에게 배를 멈추고 이쪽으
로 떠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달이 구름에 가리워졌다. 떠내려오는 물체는 더욱 검게 보였다. 이미 눈
앞에까지 왔는데도 나는 여전히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일까?"
사공들이 말했다.
"돛이라 보면 돛도 아니고, 돛대라고 보면 돛대도 아닌데."
순간 달이 구름 속에서 빠져나와 무시무시한 구경거리를 비추었다. 이쪽으로 떠내려오는 것은 뗏목 위에 단단히
세워 놓은 교수대였던 것이다. 세 사람의 시체가 줄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병적인 호기심에 사로잡혀 처형된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명령에 따라 사공
들이 갈고리를 뗏목에 걸었기 때문에 배는 떠 있는 교수대에 부딪혔다. 나는 뗏목으로 뛰어올라 두 기둥 사이에
섰다.
밝은 달이 이 불행한 인간들의 흉한 얼굴을 비춰 주고 있었다. 한 사람은 늙은 추바시 인이었고, 다음은 몸집ㅈ
이 탄탄하 수무 살 가량의 젊은 러시아 농부였다. 세 번째 시체에 시선을 옮긴 순간 나는 너무나 놀라 비명을 질
렀다. 그것은 바니카였다. 천성이 우둔했기 때문에 푸가초프에게 가담했던 그 불쌍한 바니카였던 것이다. 그들의
머리 위에 박혀 있는 검은 판자에는 흰 글씨로 커다랗게 도적과 폭도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배 위로 옮겨 탔다.
뗏목은 점차 하류로 흘러갔고 교수대는 어둠 속에서 검게 보였다. 이윽고 그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배는 높
고 험한 강변에 닿았다.
나는 사공들에게 배삯을 넉넉히 주었다. 그랬더니 그 중 하나가 나를 나루터 근처에 있는 마릉 이장네 집으로 안
내해 주겠다고 나섰다. 나는 그와 함께 어떤 농부의 집으로 들어갔다.이장은 내가 말을 구한다는 말을 하자 무척
무뚝뚝한 태도를 보였으나, 나의 길잡이가 몇 마디 귀에 대고 소곤거리자 그 인정머리 없는 태도가 돌변하더니
급히 서둘러 내 부탁을 들어 주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마차가 준비되어 나는 마차에 올라타며 고향 마을로 가자
고 했다.
나는 큰길을 따라 잠든 마을들을 스치며 마차를 몰았다. 도중에 혹시 정지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한 가지만이 염
려되었다. 볼가 강 위에서 만난 교수대는 폭도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정부군의 강력한
대항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나는 푸가초프가 내준 통행증과 주린 대령의 명령서를 주
머니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와도 만나지 않았고 날이 샐 무렵에는 고향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
과 전나무 숲을 멀리 바라보게 되었다. 마부가 채찍을 휘둘러서 15분 후에는 마을에 들어섰다. 지주의 저택은 마
을 저쪽 끝에 있었다. 말들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갑자기 한길 가운데서 마부는 말꼬비를 당기기 시작했
다.
"왜 그러는 거야?"
나는 초조하게 물었다.
"나리님, 검문입니다."
마부는 설치는 말을 겨우 세우며 대답했다. 정말 그곳에는 통나무로 길을 막아 놓고 나무 작대리를 손에 든 보초
가 서 있었다. 보초를 서고 있던 농부는 내게로 다가오더니 신분증을 보여 달라소 하며 모자를 벗었다.
"뭐야? 왜 이런 곳에 통나무로 길을 막아 놨어? 자네는 누구를 지키고 있는 거야?"
"나리님, 실은 저희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그럼 너희 주인 어른은 어디 계시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우리 주인 말인가요? 우리 주인 양반은 곳간에 들어가 있습니다."
농부는 마을쪽을 향해 손짓했다.
"뭐라고! 길을 비켜, 망할 자식아. 뭘 우물쭈물하고 있어."
보초는 움찔하고 물러섰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그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통나무를 치웠다. 농부는 쩔쩔매며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다시 마차에 올라타고 지주의 저택으로 달리라고 명령했다. 곳간은 저택 안에 있
었다. 마차는 곧바로 그들의 코 앞에 가서 멎었다. 나는 마차에서 뛰어 내리기가 무섭게 달려 들었다.
"문을 열어!"
나는 고함을 쳤다. 아마도 내 호통이 무시무시했던지 그들은 장대를 던지고 도망쳐 버렸다. 나는 자물쇠를 열어
보려다가 여의치 않아서 문짝을 부셔 보려고 했으나 튼튼한 참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꼼짝하지 않았다. 그 때
머슴집에서 젊은 농부가 나오더니 몹시 건방진 태도로 어째서 야단이냐고 꾸짖었다.
"마을 서기 안드류시카는 어디 있어? 그놈을 빨리 이리로 불러와."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때 안에서 불쑥 나서는 놈이 있었다.
"내가 바로 안드레이 아파타시에비치야. 안드류시카가 아니란 말이야."
그는 거만하게 두 손을 허리에 얹으며 말했다.
"그래, 왜 찾나?"
대답 대신 나는 그의 목덕미를 움켜쥐고 곳간 문을오 끌고 가서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서기는 말을 듣지 않으려
했으나, 내 아버지 식의 주먹다짐은 이놈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그는 열쇠를 꺼내 곳간 문을 열었다. 나는 단숨
에 달려 들어갔다. 지붕에 뚫린 조그만 구멍에서 흘러들어온 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한쪽 구석에 아버지와 어머니
의 모습이 보였다. 두 분은 모두 손을 묶이우고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나는 두 분을 끌어 안았으나 한
마디도 말을 못했다. 두 분은 눈이 둥그래져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군대 생활 3년은 나를 부모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모시켜 놓은 것이다.
"표트르 안드레비치! 당신이 오셨군요."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저쪽 구석에 역시 손발이 묶이운 마리아 이바노브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말뚝
처럼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아버지는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
에는 곧 희색이 넘쳤다. 나는 칼을 뽑아 포승을 끊었다.
"아아, 페트루샤로구나!"
아버지는 나를 가슴에 끌어안으며 맒했다.
"죽기 전에 너를 만나다니 이렇게 감사할 데가 어디 있겠니."
하시며 내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페트루샤, 내 소중한 페트루샤! 어떻게 이렇게 돌아왔니? 몸은 성하냐?"
나는 세 사람을 밖으로 끌어내려 했으나 곳간 문에 가 보니 그것은 밖으로 잠겨 있었다.
"안드류시카, 문을 열어."
"흥, 제기랄. 너도 가만히 앉아 있어. 공연히 날뛰거나 폐하의 관리의 목덕미를 붙잡고 끌고 다니면 어떤 보답을
받는지 이제 맛을 보여 줄테다."
문 밖에서 서기가 말했다.
"문을 열지 않으면 좋지 않을 것이다."
밖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도둑놈처럼 남몰래 자기 곳간에 드나들 그 따위 주인은 아니야."
나의 출현에 기뻐한 것도 순식간의 일이고 이제는 나까지 집안 식구들의 비극에 끼어든 것을 보자 모두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과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만나게 되면서부터는 전보다 오히려 침착해졌다. 내
게는 장검과 권총 두 자루가 있다. 얼마 동안은 감금을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녁때가 되면 주린이
와서 우리를 구출할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얘기를 부모에게 하고 어머니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
은 다시 재회의 기쁨에 젖어들었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표트르야, 네가 여러 가지 못된 짓을 해서 실은 나도 꽤 화가 났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을 들출 필
요는 없다. 이제는 너도 정신을 차리고 착실한 사람이 된 줄 믿는다. 네가 명예로운 장교로서 훌륭히 근무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고맙다. 너는 이 늙은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다. 만일 너에게 구출되다면 내 여
생은 갑절이나 즐거울 거야."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손에 입을 맞춘 후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는 거시 무
척 기뻤는지 완전히 행복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정오 경에 우리는 심상치 않은 소음과 고함소리를 들었다.
"저건 뭘까? 네가 말한 대령이 벌써 온 것이 아닐까?"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럴리는 없는데요. 저녁때가 되기 전에는 오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대답했다.
소음은 더욱 커졌다. 경종이 울렸다. 말을 탄 사람들이 뜰 안으로 들어왔다. 그 때 벽 큼으로 사베리치의 흰 머
리가 보이더니 가엾은 늙은이의 비통한 소리가 들여왔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표트르 안드레비치 도련님! 마리아 이바노브나 아가씨! 큰일났습니다. 악당놈들이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표트르 도련님, 누가 그놈들을 끌고 왔는지 아십니까? 시바블린입니다. 그 알렉
세이 이바니치예요. 그 망할 놈의 자식이!"
이 저주스러운 이름을 듣자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두 손을 합장한 채 못박힌 듯 한자리에 서 버렸다.
나는 사베리치에게 말했다.
"이것 봐, 누구든지 말을 태워 나루터로 보내서 빨리 기병대 연대를 데려오란 말이야. 대령님께 우리들의 위급하
다고 전해."
"그러나 도련님, 누굴 보냅니까. 머슴놈들은 모두 악당들 편이고, 말은 다 빼앗겨서 한 마리도 없어요. 아아! 벌
써 안에 들어왔습니다. 곳간으로 옵니다."
그러자 곳간 문 밖에서 몇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머니와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한쪽 구석으로 물러가
있으라고 손짓하고는 장검을 빼들고 문 옆에 붙어 섰다. 자물쇠가 찰칵 소리를 내고 문을 열리더니 서기의 머리
통이 나타났다. 그와 때를 같이해 아버지는 문 밖으로 권총을 쏘았다. 우리들은 포위하고 있던 무리들은 욕지거
리를 퍼부으며 달아났다. 나는 부상자를 문턱에서 끌어내고 문을 닫았다.
"무서워할 건 없어요."
하고 나는 어머니와 마리아 이바노브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아직 살아날 방법은 있습니다. 아버지, 이젠 쏘지 마십시오. 마지막 총알을 아낍시다."
어머니는 잠자코 기도만 올리고 있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천사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자기 운명을 기다리며
그 옆에 서 있었다. 문 밖에서는 공갈과 욕설과 저주의 소리가 들여왔다. 나는 다시 문 옆에 붙어 서서 제일 먼
저 덤벼드는 놈의 머리를 내리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갑자기 밖이 잠잠해졌다. 내 이름을 부르는 시바블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다. 왜 그러느냐?"
"항복하라, 그리뇨프, 반항해도 소용없다. 늙은이들을 좀 생각해 봐라. 고집부려 봐야 죽음뿐이다. 그러다간 따
끔한 맛을 볼 것이다."
"어서 덤벼라, 이 역적놈아."
"내가 어리석게 그곳에 머리를 들이밀 줄 알았느냐. 나는 부하의 목숨도 아낄 줄 아는 인간이다. 곳간에 불이나
질러 놓고 베로고르스크의 돈키혼테인 네놈이 어떻게 하는지 멀찍이 구경이나 하겠다. 마리아 이바노브나, 당신
에겐 조금도 안됐다는 생각이 없소. 어두컴컴한 곳에서 기사와 함께 있으니 적적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리고 그리
뇨프, 마침 점심 시간이니까 그 동안 잘 생각해 봐라. 그럼 이따가 오마."
시바블린은 곳간에 감시병을 남겨 놓고 가버렸다. 우리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누구나 자기 혼자만의 생
각에 잠겨 있었고 또 그것을 말할 기력도 없었다. 나는 원한에 불타는 시바블린이 취할 온갖 보복 행위를 머릿속
에 그려 보았다. 나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한다면 부모님이 운
명조차 마리아 이바노브나의 운명에 대한 것만큼 나를 전율케 하지는 못했다. 나는 어머니가 마을의 농부들이나
집안의 하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아버지도 엄격하긴 하지만 원래가 공평하고 자기
에게 예속되어 있는 마을 사람들의 곤란한 점을 잘 알아 주었기 때문에 역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들의
폭동은 단지 부화뇌동에서 온 것이며 결코 분노의 표출은 아니었다. 따라서 아버지나 어머니는 용서를 받고 목숨
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어떤가? 음탕하고 파렴치한 시바블린은 그녀를 어떻게 할
까? 나는 이 무서운 생각에 오래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또다시 그녀가 흉악한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보기
보다는 차라리 눈 딱 감고 내 손으로 죽야 버릴 것을 각오했다.
다시 한 시간 가량이 지났다. 마을에서는 주정꾼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감시하고 있는 자들은 그것이 부러웠던지 공연히 우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고문을 하겠다느니 죽여 버리
겠다느니 하고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시바블린의 공갈이 어떤 행동으로 나타날 것인지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뜰 안이 왁자지껄하더니 다시 시바블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결심했느냐? 자진해서 내 앞에 굴복하겠느냐?"
아무도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기다려 보고 나서 시바블린은 짚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몇 분 후에 불
길이 일어나며 화광이 어두운 곳간을 밝게 비추었다. 연기가 문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리아 이바노
브나는 그 옆으로 다가와서 손을 잡으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젠 안 되겠어요. 표트르 안드레비치! 저 때문에 당신과 양친을 희생시킬 수는 없어요. 저를 밖으로 내보내 주
세요. 시바블린이 제 말은 들어 줄 거에요."
나는 불끈 화를 내며 외쳤다.
"뭐라고요? 무엇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그런 말을 합니까?"
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욕을 보게 될 때까지 살아 있지는 않겠어요. 그 대신 저는 생명의 은인인 당신과 가련한 이 고아를 친절히 돌봐
주신 부모님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안드레이 페트로비치! 안녕히 계세요, 아브도
차 바실리예브나. 두 분께서는 저에게 은인 이상의 분이었어요. 저를 축복해 주세요. 그럼 표트르 안드레비치,
당신도 안녕히! 그리고 이것만은 믿어 주세요. 저는... 저는...."
여기서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나는 미친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가 흐느껴
울며 말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 이제 그런 소리는 그만둬라. 누가 너만을 저 비적놈들에게 내줄 줄 알았느냐? 자 아무 말
말고 여기 앉아 있거라. 죽으려면 함께 죽어야지. 밖에서 또 뭐라고 지껄이는데 들어 봐라."
"끝내 항복하지 않겠느냐? 불이 안 보이느냐? 5분도 안 가서 너희들은 까맣게 타 버릴 것이다."
사고 시바블린이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악당놈아, 개수작 마라."
아버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주름투성이의 아버지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생기가 돌았고 두 눈이 흰 눈썹 밑에서
광채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이젠 밖으로 나가자, 내 뒤를 따라라!"
아버지는 문을 열었다. 불길이 확 몰려 들어와서 마른 이끼로 틈새를 막은 통나무 벽을 핥으며 타올라갔다. 아버
지는 권총을 발사하고 문턱을 넘어갔다. 나는 어머니와 마리아 이바노브나이 손을 잡고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곳간 문 앞에는 시바블린이 쓰러져 있었다. 아버의 늙은 손으로 사격한 탄환이 명중한 것이었다. 우리들의 불의
의 출격에 놀라 도망치던 폭도들은 즉시 기세를 회복하여 우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몇 놈을 칼로 내
리쳤으나 놈들이 던진 벽돌이 가슴 한가운데 명중했다. 나는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정신이 들어 보니 피투성이가 된 풀 위에 시바블린이 앉아 있었고, 그 앞에 우리 집안 식구가 끌려와 있었다. 나
는 양손이 결박되어 있었다. 농부와 카자흐 인들, 그리고 파시키르 인들이 떼를 지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시바블린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그는 한 손을 겨드랑 밑 상체에 갖다 대고 있었다. 얼굴에는 고통과 증
오가 뒤섞여 나타났다. 그는 천천히 얼굴을 들고 나를 힘끔 쳐다보더니 숨이 끊어지는 것같이 똑똑치 못한 목소
리로 말했다.
"어서 저놈을 목매달아라 처녀만 빼놓고 모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악당들은 우리에게 덤벼들어 마구 고함을 치며 대문 쪽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그들은 갑
자기 우리를 팽개쳐 두고 앞을 다투어 도망쳐 버렸다. 때마침 주린이 칼을 빼든 기병 중대를 이끌고 안으로 달려
들어왔던 것이다.
폭도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저리로 도망쳤다. 기병들은 뒤를 쫓아가며 칼로 찌르고 사로잡고 했다. 주린이 말에
서 내려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내 손을 굳게 잡았다.
"큰일날 뻔했군! 아, 자네 약혼녀도 여기 있었나?"
그는 우리들에게 말했다.
마리아 이바노브나는 귀까지 새빨개졌다. 아버지는 주린에게 가까이 가서 감격어린, 그러나 침착한 태도로 감사
하다는 말을 했다. 어머니는 그를 구원희 천사라고 부르며 포옹했다.
"자, 어서 집으로 들어갑시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고 그를 집으로 안내했다. 시바블린의 곁을 지나칠 때 주린은 발은 멈추었다.
"이건 누굽니까?"
그는 부상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고약한 놈이 바로 폭도의 대장격인 인물이지요. 하나님이 내 늙은 손을 도와 주셔서 이 젊은 악당놈에게 벌
을 주고, 또 아들이 흘린 피의 복수까지 겸해서 하게 하신 겁니다."
아버지는 늙은 군인 특유의 어떤 자랑을 가지고 대답했다.
"이놈이 시바블린입니다."
나는 주린에게 말했다.
"시바블린이라구? 그것 참 명도 긴 놈이군. 자, 기병들, 이놈을 데려가거라! 군의관에게 상처를 치료하라고 해
라. 히바블린은 카잔의 비밀 위원회에 보내야겠다. 이놈은 우두머리 축에 낄 놈이고 따라서 그 진술은 매우 중요
할테니까."
시바블린은 흐리멍텅한 눈을 떴다. 그 얼굴에는 육체의 고통 이외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병들은 그를
들것에 싣고 갔다.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설레는 가슴으로 주위를 두러보았다.
집안은 무엇 하나 달라진 곳이 없고, 모든 것은 옛날처럼 간직되어 있었다. 시바블린은 자신이 타락은 했어도 치
사스러운 탐욕을 미워하는 마음만은 그래도 잃지 않았던지 가재도구의 약탈은 허락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인들
은 문간 방에서 나왔다. 그들은 폭동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구출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사베리치는 몹시 우쭐거렸다. 하기는 그것도 당연하다. 폭도들이 습격해 와서 참한 소란을 피울 때 말 안장을 올
려 놓고 슬쩍 끌어내어, 때마침 혼란한 틈을 타서 나루터로부터 주린에게 달려갔던 것이다. 그는 이미 볼가 강을
건너 와서 휴식하고 있는 연대를 만났고, 주린은 우리의 위급함을 알고 즉각 승마를 명하여 위기일발의 순간에
달려온 것이다.
주린은 서기의 모가지를 선술집 옆에 있는 장대에 몇 시간 동안 매달아 놓게 했다.
기병들은 몇 놈의 포로를 끌고 추격에서 돌아왔다. 포로들은 우리가 뜻깊은 포위를 끝까지 견디어 낸 바로 그곳
간에 갇혔다. 우리는 제각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노인들에게는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간밤에 한잠도 자
지못한 나는 침대에 몸을 던지자 깊이 잠들어 버렸다.
주린은 부하들에게 지시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그 날 저녁 우리들은 응접실에서 사모바르를 가운데 놓고 모여 앉아서 지나가 버린 위험과 고난을 얘기했다. 마
리아 이바노브나가 차를 따랐다. 나는 그 옆에 나란히 앉아 오직 그녀에게만 마음을 쏟고 있었다. 양친은 우리들
의 다정한 모습을 흡족한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 날 저녁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내 생애에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시간이엇다. 힘 없는 인
긴의 생애에 이와 같은 순간이 과연 몇번이나 있겠는가?
이튿날 아버지는 마을의 농부들이 용서를 빌러 뜰 안에 와 있다는 연락을 받고 현관 층계로 나갔다. 아버지가 나
타나자 농부들은 무릎을 끓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나리님."
그들은 입을 모아 잘못을 빌었다.
"용서를 구하겠다고? 그래, 그런 끔찍한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는 모두 알고 있겠지.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
아들 표트르 안드레비치를 만나게 해 주신 기쁨으로 이번만은 용서한다. 음, 좋아, 뉘우친 모가지엔 칼도 들어가
지 않는다는 말이 있으니까."
"잘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요즈음은 날씨가 좋아서 건초를 베어 들이기 알맞은 시기인데 너희들은 사흘 동안이나 무슨 짓을 했느냔 말이
야. 반장! 한 놈도 빼놓지 말고 풀베기에 내보내도록 해. 그리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서 이반의 축제일(6월 24일)
까지는 우리 집 건초를 완전히 쌓아 올리도록. 이제는 돌아들 가라!"
농부들은 허리를 굽신거리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을 하러 나갔다.
시바블린의 부상은 치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카잔으로 호송되어 갔다. 나는 창문응로 그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우리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얼굴을 돌려 버렸고 나는 흠칫하여 창에서 물러섰다. 적의
굴욕과 불행에 대해 자랑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린은 다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며칠 동안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역시 그
를 따라 출발하기로 결심했다. 떠나기 전날 밤 나는 양친한테 가서 그 당시의 관습에 따라 무릎을 꿇고 엎드려
마리아 이바노브나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노인들은 나를 안아 일으키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동의
했다. 나는 파랗게 질려 몸을 떨고 있는 마리아 이바노브나를 양친 앞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축
복을 받았다.
부모의 축복을 받던 그 순간의 내 기쁨에 대해서는 표현하지는 않겠다. 내가 처했던 것과 같은 입장에 서분 경험
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말히자 않아도 그 때의 내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이 없는 사
람에게는 미안한 마음과 함께, 시기를 놓치기 전에 사람을 해서 양친의 축복을 받고록 충고하는 수밖에 없다.
이튿날 연대는 집결했다. 주린은 우리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우리는 모두 토벌작전이 곧 끝날 것으로 믿
고 있었고 나도 한 달 수에는 마리아이바노브나와 결혼식을 올리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작별할 ㄸ 여ㅕ러
사람들 앞에서 키스를 해주었다. 나는 말을 탔다. 사베리치는 다시 내 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연대는 출발했
다. 그리고 연대는 출발했다.
나는 한동안 다시금 떠나게 된 내 집을 멀리서 바라보며 어두운 예감과 동요하는 마음을 느꼈다. 너의 불행은 아
직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라고 누구인가 내 귀에 대고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마음
은 내 앞길에 일어날 새로운 폭동을 예감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행군과 푸가초프반란의 종식에 대해서는 상세히
기술하지 않겠다. 우리는 푸가초프에게 짓밟힌 여러 마을을 지나면서 가난한 주민들로부터 폭도들이 미처 약탈하
지 못한 식량을 징발했다. 이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다. 주민들은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
다. 행정은 완전한 정지상태에 있었고, 지주들은 숲 속에 숨어 있었다. 폭도의 잔당은 도처에서 잔인무도한 만행
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 무렵 푸가초프는 아스트라한으로 달아나고 있었는데, 이들을 추격하던 부대의 지휘관들은 폭도들에 가담했건
하지 않았건 일부 주민들을 단독적으로 처벌하고 있었다. 화염에 휩싸인 이 지방 일대의 참상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었다. 신이여, 다시는 러시아에 이러한 무의미하고 무자비한 반란을 일으키지 말아 주소서.
불가능한 변혁을 우리 나라에서 시도하는 자들은 우리 국민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분별한 젊은 패들이 아니
면, 목숨의 값어치를 1코페이카짜리로 알고 남의 목숨은 4분의 1코페이카밖에느 생각하지 않는 잔인한 패들이다.
푸가초프는 이반 이바노치지 미헬리손의 추격을 받고 도주하고 있었는데, 얼마 못 가서 완전히 항복할 수밖에 없
었다. 마침내 주린은 자기 산관으로부터 자칭 황제의 체포 통지와 함께 작전중지 명령을 받았다. 이제 나도 집으
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내 가슴은 희망과 기쁨으로 부풀어 올랐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파고드는 쓰디 쓴 감정
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제13장에서 생략된 부분은 푸슈킨 자신이 초고에서 삭제한 것이다. 객관적 견지에서 작품의 기조를 보완하기 위
해 작자의 사후 원고 정리자가 말미에 첨가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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