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영의정 서애 유성룡 씀. 징비록(懲秘錄) 2권.<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cript> <!-- 가로 배너3 큰 모바일 배너 320X100 --> <ins class="adsbygoogle" style="display:inline-block;width:320px;height:100px" data-ad-client="ca-pub-5075237022023531" data-ad-slot="1591600305"></ins> <script> (adsbygoogle = window.adsbygoogle || []).push({}); </script>
본문 바로가기

18. 태도서관, 정보의 밭. 씨앗/18. 3. 懲秘錄. 징비록. 서애 유성룡 지음.

16세기 영의정 서애 유성룡 씀. 징비록(懲秘錄) 2권.


懲秘錄 第 2 券




12월에 중국에서 크게 군사를 냈다. 


병부 우시랑 송응창을 경략으로 삼고, 병부 원외랑 유황상과 주사 원황으로 찬획 군무를 맡게 하여 모두 요동에 머무르게 했다. 


제독 이여송이 대장이 되어서 삼영장 이여백 장세작 양원과, 남쪽 장수낙상지 오유충 왕필적등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니 군사의 수효는 4만을 넘었다. 


이보다 앞서 심유경이 간 뒤에 적들은 과연 군사를 거두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50일이 지나도록 유경이 오지 않으므로 왜병들은 의심하여, 곧 압록강 물을 기어서 우리(왜)말에 먹이겠다고 큰소리쳤다. 적진에 잡혀갔다가 도망해 돌아온 자의 말을 들어도 모두들 적병이 우리 성을 크게 칠 준비를 하고 있다 하여 인심이 갈수록 흉흉해졌다. 


그러던 중 12월 초에 유경이 다시 와 성안에서 수일을 머무르면서 그들과 회합하여 무슨 약속을 하고 가는 모양이었으나, 그 회담 내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러고 있을 무렵 갑자기 중국 군사가 안주에 이르러 성 남쪽에 영을 치니 깃발과 병기가 정숙하여 마치 신과 같았다. 


나는 제독 이여송에게 할 말이 있노라고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동헌에 앉아 나를 맞이하는데, 대해 보니 그는 헌헌한 장부였다. 의자에 마주 자리를 잡자, 나는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꺼내 놓고 지형이며 군사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여송은 나의 설명을 열심히 들으며 내가 가리키는 곳마다 붉은 글씨로 표를 해두었다. 나의 말이 끝나자 그는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병들이 믿는 것은 오직 조총뿐이 아니겠소. 그러나 우리는 대포를 사용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포는 모두 5,6리는 가니, 적들이 조총으로 어찌 이를 당해 낼 수 잇겠소? 


면담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에게 이여송은 다음과 같이 시 한수를 부에 써서 주었다. 


군사 거느리고 밤 도와 강을 건넘은, 


삼한 나라 편안치 못한 까닭이로세. 


황제의 생각하심 날마다 깊으시며, 


내 또한 밤에도 술잔 들어 즐기는 것 그쳤구나, 


봄날이라 이는 살기 내 맘 더욱 장할씨고, 


이제부터 왜적들 뼈 절로 저리리, 


담소 오가는 속엔들 승산 없다고 말할쏘냐, 


말 안장에 앉았음이야 꿈 속 엔들 잊을쏜가. 


이때는 중국 군사가 성안을 가득 차 있을 때였다. 


내가마침 백상루 위에 있으려니까 밤중에 졸연히 중국 군사 한 사람이 군중의 밀약 삼조를 가지고 나를 찾아와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의 성명을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고 그냥 가버리고 말았다. 


제독 이여송이 부총병 사대수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순안으로 가게 하여 왜병에게 거짓말로 이르기를, [우리 조정에서 이미 화친하기를 허락했고, 유격 장군 심유경도 와 있다.] 하니 왜병들은 몹시 기뻐했다. 


현소가 헌시 하기를, 


동쪽 나라 싸움 그치고 중국과 강화하니, 


사해와 구주가 모두 한집 되었네. 


기쁜 기운 갑자기 나라 밖 눈을 녹이니, 


건곤에 봄은 아직 이르건만 태평한 꽃 피었도다. 


라 하였다. 


때는 바로 계사년(1593) 정월 초하루 였다. 


왜적은 그들의 소장 평호관을 시켜 부하 20여명만을 거느리고 순안에 나와 삼유경을 맞이했다. 


사총병이 이들을 유인하여 술을 대접하는 체 하면서 한편으로 복병을 시켜 평화관을 사로잡고 따라온 왜병을 잡아 죽였다. 


이틈에 겨우 왜병 셋이 살아 도망하여 자기 진에 사실을 보고하니, 왜적은 그때서야 비로소 중국의 구원병이 온 줄을 알고 몹시 소요스러웠다. 


이때는 중국의 대군이 숙천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윽고 날이 저물자 그들은 영책에게 내려와 밥을 지어 먹고 있었다. 군사들이 진군을 멈추었다는 보고를 받은 제독은 아무런 말없이 활을 잡고 말에 올라 수기를 데리고 순안을 향해 달리는 것이었다. 이를 본 모든 역책의 군사들도 뒤따라 진병했다. 


이튿날 아침에 대군은 평양을 포위하고 보통문 칠성문을 치니 적병은 성 위에 올라가 홍백기를 내세우고 대항하였다. 


이에 이편에서는 대포와 화전으로 치는 그 소리는 땅을 울려 수 십리 사이의 산들이 모두 움직이는 듯 요였고, 화전이 성안에 떨어지자 곳곳마다 불이 일어 나 수목이 모두 타고 있었다. 





낙상지와 오유충등은 친병을 거느리고 개미처럼 성에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앞의 군사가 떨어지면 뒤의 군사가 올라 하나도 물러나는 자가 없다. 


성안에는 적의 칼과 창이 마치 고슴도치 털처럼 벌려 섰건만 중국 군사는 더욱 힘써 싸우니 적들은 대적치 못하고 내성으로 쫓겨 들어갔다. 


이 싸움에 칼에 맞고 불에 타 죽은 적병은 부지기수였다. 우리군사는 다시 적의 뒤를 쫓아 내성으로 쳐들어갔다. 





적들이 성위 토벽에 구멍을 많이 뚫어 놓아 마치 벌집과 같았다. 적들은 그 틈으로 총을 어지러이 쏘며 대항 했다. 이 바람에 우리 편 군사가 적의 총에 많이 상했다. 


이를 본 제독은 궁한 적을 급히 치다가 오히려 우리 군사가 많이 상할까 걱정하여 성 밖으로 군사를 거두어 적의 달아날 길을 열어주니 그 밤으로 적들은 허겁지겁 얼음 위로 달아났다. 


이보다 먼저 내가 안주에 있을때 대병이 장차 나온다는 말을 들은 나는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 김경로에게 은밀히 말하여 그들의 돌아가는 길을 막아 치도록 했다 


그리고 경계하여 이렇게 말했다. 





[적은 반드시 이 길로 달아날 것이니, 그대들 양군은 길 좌우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려 공격하라. 


그러면 적들은 필연 주리고 곤해서 싸울 마음이 없을 것이나, 그때를 타 모두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나의 말을 들은 이시언은 곧 중화로 떠나고, 김경로는 딴 일이 있다 하여 가지 않으려 했다. 나는 다시 군관 강덕관을 보내어 싸움을 독려하게 하였더니 김경로도 하는 수 없이 중화로 갔다. 


달아나던 적은 하루 전날 황해도 순찰사 유영경의 관에 막혀서 길을 바꾸여 재령으로 달아났다. 그의 관에 막혀서 길을 바꾸어 재령으로 달아났다. 그때 유영경은 해주에서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군사만으로 방위하려 하였고, 김경로는 적과 싸우기를 꺼려 피해 달아나 버렸다. 


적장 평행장 평의지 현소 평소신등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밤을 도와 달아나게 바빴다. 그들은 기운이 빠지고 발이 부르터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되었으며, 무릎으로 기어 밭고랑에 엎드려 숨기도 하고, 인가에 들어와 밥을 훔쳐 굶주림을 면하는 형편에까지 이르렀다. 


 (206) 


그러나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한 사람도 이를 치는 군사가 없었고, 중국 군사 또한 그들의 뒤를 추격하지 않았다. 오직 이시언만이 그뒤를 쫓았으나 역시 치지는 못하고 다만 굶주리고 병들어 뒤떨어진 왜병 60여 명만을 베었을 뿐이었다. 


이때 왜장 중에서 서울에 남아 있던 자는 평수가였다. 그는 나이가 어린 탓으로 군무를 지휘하지는 못하고 다만 행장의 제재만 받는 형편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청경은 함경도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을 때였다. 


만일 행장, 의지, 현소등만 사로잡는다면 서울에 있는 적은 저절로 무너질 판국이었다. 서울이 무너진다면 청정이 돌아갈 길도 자연히 막힌 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적의 군심이 흉흉해지고, 반드시 바다를 끼고 달아나지 않는 한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한강 남쪽에 있는 적 또한 따라와 와해되었을 것이 뻔한 사실이다. 이때를 타서 구원병이 북을 울리고 추격한다면 부산까지 아무 거리낌 없이 내려쫓았을 것이 아닌가? 이대로만 했더라면 잠간 사이에 온 나라가 맑고 깨끗했을 것이니, 수년 동안 분분했던 전쟁이 왜 있었을까보냐. 한 사람의 잘못으로 천하 대사를 그르쳤으니 실로 통석할 일이로다. 





나는 임금께 장계를 올려 김경로를 베이자고 아뢰었다. 이때 나는 평안도 체찰사로 갔을 때라, 김경로가 내관하가 아니므로 먼저 임금께 아뢰었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선전관 이순일을 보내어 표신을 가지고 개성부에 가서 그를 베이고자 먼저 제독 이여송에게 알리게 했다. 


보고를 받은 제독은, 그 죄는 죽어 마땅할 것이나, 적병을 완전히 쳐 없애지 못한 이마당에 한 사람의 무사도 아껴야 할 것이다. 우선 백의로 종군케 하였다가 그로 하여금 공을 세워 속죄케 해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노라. 하고 자문을 주어 순일을 돌려보냈다. 


순변사 이일을 다시 이빈으로 바꾸었다. 





평양 싸움에 참여한 구원병은 보통문으로 들어가고, 이일과 김응서등은 함구문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군사를 거둘 때 보니 이일과 김응서의 군사는 모두 성밖에 물러나와 진치고 있어, 적들이 밤을 타 도망쳤다는 사실은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것을 안 이 제독은 아군이 잘 지키지 못해서 적이 달아나도 모르고 있었다고 나무랐다. 이때 중국 장수 중에 순안을 왕래하여 이빈과 교분이 두터운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이 제독의 눈치를 살펴 이렇게 아뢰었다. 





[이일은 본시 장재가 아닙니다. 그 자리를 이빈과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제독은 이 말을 옳게 여겨 그 대로 우리 조정에 그 뜻을 전해왔다. 


이에 조정에서는 우상 윤두수로 하여금 평양에 가서 이일을 문죄하고 군법을 행코자 하였으나 얼마 있다가 이일을 석방시키고 이빈을 순변사로 삼아 군사 3천기를 뽑아 제독을 따라 남쪽으로 가게 했다. 


이 제독은 파주에 진병하여 적과 벽제 남쪽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개성으로 돌아가 주둔하였다. 


평양을 회복하고 대동강 남쪽에 있던 적들이 모두 도망하니 제독은 이를 추격하라 하고, 나를 보고는, [이제 대군이 바야흐로 전진하려 하는데 앞길에 군량과 마초가 없다니 공은 대신으로서 마땅히 군사를 생각하실지라, 수고를 아끼지 마시고 급히 떠나 군량을 준비하되 그릇됨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 하고 부탁했다. 


 (207) 


이에 나는 제독과 작별하고 나왔다. 구원병의 선봉은 벌써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대숲처럼 빽빽이 줄지어 가는 군사들 때문에 길이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된 나는 옆길로 돌아 빨리 가서 군사의 앞에 나섰다. 그날 밤으로 중화를 거쳐 황주에 다다르니 밤은 이미 삼경이었다. 


그때는 적병이 금방 물러간 뒤였다. 고을바다 텅빈 채 백성들이 보이지 않아 수습할 길이 없었다. 급히 황해 감사 유영경에게 글을 보내어 서두르게 하는 한편, 평안 감사 이익원에게도 글을 보내어 김응서등이 거느린 군사 중에 싸움에 나가지 못할 자들을 동원하여 평양으로부터 곡식을 황주로 운반케 하고, 또 배로 평안도 세 고을 곡식을 청룡포를 거쳐 황해도로 운반케 하였다. 





이렇듯 일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임시로 졸지에 서두른 것은, 갑자기 대군이 이르고 보면 군량이 모자랄까 두려워했던 터로 나로서는 임을 몹시 걱정하여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유영경에게는 적을 피해 산골짜기에 쌓아 두었던 곡식이 괘 있어 백성들을 재촉하여 운반하도록 하였다. 서두른 보람이 있어 연도에서 군량이 결핍되는 일은 없었다. 그런 뒤에 이윽고 대군이 개성부에 도착하였다. 





정월 24일, 적들은 우리 백성들이 여겨 서울에 남아 있던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고, 또한 관공서, 사삿집들에 모두 불을 놓아 태워 버렸다. 그들은 한바탕 살인, 방화를 자행하고 나서 군사를 모두 성루에 집결시켜 다시 한번 우리와 싸울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에 나는 제독에게 빨리 적을 추격해야 한다고 여러 번 건의해서 서둘렀으나, 여러 날 만에 겨우 파주에 다다랐다. 그 이튿날, 부총병 사대수가 우리 장수 고언백과 함게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먼저 가서 적의 정세를 정찰했다. 이들 일행은 벽제역 남족 여석령에서 적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우리 편은 적병 백여 명의 머리를 베고, 혹은 사로잡았다. 


제독이 이 소식을 듣자 대군은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하고, 자기 혼자서 말탄 군사 천여 명만 거느린 채 길을 재촉했다. 막 혜음령 고개를 넘어설 순간 탔던 말이 실족하여 땅에 떨어지는지라, 따르던 사람들이 급히 붙들어 일으켰다. 


 이때 적들은 대병을 여석령 뒤에 숨겨 놓고 겨우 수백 명만 고개 위에 있었다. 


제독이 이들을 바라보고 자기 군사를 두 길로 나누어 앞으로 나가니, 적병도 역시 고개에서 내려와 점점 가까워졌다. 





바로 그때 숨어 있던 적군이 산 뒤에서 다시 고개 위로 올라와 진을 치니, 그 수가 수만을 헤아렸다. 이것을 본 구원병은 사울 마음이 없는 듯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나 이미 싸움은 피할 수는 없었다. 


원래 제독이 거느린 군사는 모두 북쪽 기병이라, 화기는 없고 다만 짧은 칼만 가졌는데, 적은 보병을 써서 3, 4척이나 되는 날카로운 길 칼로 휘둘러 좌우로 치니, 인마가 모두 쓰러져 도저히 당해 낼수가 없었다. 자못 형세가 위태롭게 된 제독은 후군을 불렀으나 거느린 군사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모두 패하여 혹은 죽고, 혹은 상하는 자가 무척 많았다. 다행히 적들도 거두고 그이상 급히 따르지 않았으므로 날이 저물자 그대로 파주로 돌아왔다. 


제독은 그날 싸움에 패한 것을 말은 하지 않았으나, 심기가 몹시 상하여 그날 밤 자기의 가까운 부하의 죽음을 위해 남몰래 통곡까지 하였다. 


그 이틑날 제독은 동파로 퇴병할 기세를 보였다. 이를 본 나는 우의정 유홍과 도원수 김명원, 순변사 이빈등과 함께 제독을 찾아 갔다. 제독은 장막 밖에 나와 서 있었고, 여러 장수들도 좌우에 서 있었다. 


나는 힘써 권했다. [승패는 병가의 상사라, 이제 적의 형세를 보아 다시 도모함이 옳겠거늘 제독은 어찌 가벼이 움직이려 하시오?] 


이말을 듣자 제독은, [어찌 싸움에 적병을 많이 무찔러 우리 편에 이롭기는 하지만, 이곳 땅이 비가 조금만 와도 질어서 군사가 머무르기에 여간 불편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동파로 돌아가 군사를 쉬게 하였다가 다시 진병할까 하는 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내가 같이 간 여러 사람과 함께 거듭 제독의 퇴병 계획을 만류하니, 제독은 자기가 본국에 보낸 편지를 나에게 내보였다. 그 글 속에는, 


(209) 


[서울에 응거해 있는 적병만 20만이오니, 우리 적은 순사로는 대적할 수가 없사옵고 …] 


하는 구절이 들어 있고, 또한 끝에 가서, [신이 병이 심하여 중임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른 사람을 대신해 주옵소서.] 하는 말이 있었다. 


이를 본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적병의 수는 불과 얼마 안 되는데 20만이란 무슨 말씀이시오?] 


[내가 알겠소? 공의 나라 사람들 말이 그렇다 하니 그런 줄 알 뿐이지요.] 


제독의 이 말은 핑계였다. 


명나라 장수 중에서도 특히 장세작이 퇴병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우리 일행이 굳이 이를 만류하여 물러나지 않자, 그는 몹시 화가 난 듯 순변사 이빈을 발로 차면서 꾸짖는 소리가 자못 날카로웠다. 


이때 큰 비가 날마다 계속 내리는데 적은 길가 산들을 모두 불살라 버려 말먹이 풀 한 포기조차 찾아볼 수없었다. 게다가 마역이 생겨 수일 동안에 수만 필의 말이 쓰러졌다. 


이날 세 영책 군사가 도로 임진강을 건너 동파역 앞에 진을 쳤고, 그 이튿날 다시 동파로부터 개성부로 돌아가려 했다. 


이를 본 나는 또 제독을 보고, [대군이 한 번 물러서면 그만큼 적들은 교만해지고 우리 민심은 원근이 모두 놀라서 임진강 이북도 보존키 어려울 것이니, 원컨대 잠시 이곳 동파에 유했다가 틈을 보아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하니, 제독은 거짓 허락하는 체 하였다. 


그러나 내가 물러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제독은 말을 채쳐 개성으로 돌아갔고, 모든 군사도 뒤따라 개성으로 물러가 버리고 말았다. 


이대 다만 부총병 사수대와 유격장군 관승선만이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임진을 지키고 있었으며, 나는 혼자 동파에 머무른 채 날마다 제독에게 사람ㅇ르 보내어 진병할 것을 청했다. 


제독은 꾸며대기를, [비가 개고 땅이 마르거든 진병에 보자.] 하고 회답해 보냈으나, 실제로는 진병할 의사가 없었다. 


대군이 개서에 이른 지 여러 날이 지났다. 다라서 군량이 딸리기 시작했다. 이때는 다만 수로로 좁쌀과 말먹이 풀을 강화에서 운반해 올 뿐이요. 또 충청 ? 전라도에서 세금으로 거두어 둔 양식을 배로 겨우 실어오고 있는 형평인데, 이것도 실어오자마자 떨어져 버리곤 하니 그 형세가 더욱 급했다. 


어느 날 중국 장수 여럿이 제독을 보고 군량이 없으니 빨리 퇴병하자는 말을 했다. 군량이 떨어졌다는 말에 제독은 여간 노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나와 호조판서 이성중과 경기 좌감사 이정형을 불러 뜰아래 끊어 앉히고 큰 소리로 꾸짖으면서 군법을 행하고자 하였다. 


나는 이를 보고 급히 사죄하면서 제독을 말리기에 진땀을 빼야했다. 나라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생각하자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제독도 나의 모습을 보고 민망했는지 다시 자기 부하 장수를 향해서, [너희가 전날에 나를 따라 서하를 칠적에는 군사가 여러 날을 먹지 못하였어도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않고 마침내 큰 공을 세우더니, 이제 조선에 와서는 겨우 2, 3일 동안 양식이 없다하여 감히 군사를 돌이키자 하느냐? 너희들 중에 갈 사람은 가도 좋다. 나는 여기서 적을 쳐 없애지 않고는 결코 돌아가지 않고, 마땅히 말가죽으로 나의 시체를 꾸리리라.] 


하고 꾸짖으니 그때서야 제장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는 것이었다. 


제독을 작별하고 나와서 나는 군량을 단속하지 못한 개성 경력 심예겸을 장형에 쳐했다. 


이날 군량미를 실은 배 수십 척이 강화로부터 서강에 도착하여 겨우 무사하였다. 그날 밤 제독은 총병 장세작을 시켜 나를 불렀다. 그는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며 한 편 싸울 일을 의논하였다. 


 (211) 


그 후 제독은 평양으로 돌아갔다. 이때 적장 청정은 함경도에 있었는데, 들리는 말로는 청정이 장차 함흥으로부터 양덕, 맹산을 넘어 평양으로 습격해 온다는 것이었다. 제독은 원래 북쪽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해 망설이던 참이라 이 소문을 듣자, 


[평양은 싸움의 요지요 중심지로서, 이곳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 대군이 돌아갈 기링 없을 것이다.] 


하면서 드디어 평양으로 회군했던 것이다. 


이에 제독은 왕필직등에게 머무르면서 개성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는 대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떠나려하였다. 


그는 또한 접반사 이덕형을 보고, [조선 군사는 형세가 고립되고 구원병도 없으니, 마땅히 임진강 북쪽으로 옮기게 하라.]하였다. 


이때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고향의 해웆에 있었고, 순변사 이빈은 파주에 있었다. 고언백, 이시언등은 해유령에 있었고, 원수 김명원은 임진 남쪽에 있었다. 나는 동파에 있었으니, 제독은 혹 적이 틈을 타서 쳐올까 하여 이렇게 시켰던 것이다. 


그런 나는 이 말을 듣고 종사관 신경진을 시켜, 달려가 제독을 보고 퇴각해서는 안 될 다섯 가지 이유를 말했다. 


[우리나라 역대 선왕의 분묘가 모두 경기에 있어, 이 땅이 도적에게 짓밟히고 있으니 신인의 소망이 끊어질 것이라, 차마 버리고 갈수 없는 것이 그 첫째요, 경기 남쪽에 남은 백성들이 목마르게 기다리던 것은 구원병이었는데, 이제 졸지에 퇴군하게 되면 의지할 길 없는 백성들이 살 길을 찾아 적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이것은 불가한 그 둘째요, 우리나라 땅으로 한 치라도 쉽사리 버릴 수는 없는 것이 그 셋째요, 장졸들이 비록 힘은 약하나 구원병의 힘을 믿고 용기를 얻어 함께 진병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터인데, 이제 퇴병한다는 말을 들으면 모두 원한을 품고 흩어질 것이니 이것이 넷째요, 일단 퇴병하고 보면 적들이 승세하여 쳐올 것이니 임진 이북마저 보존치 못할 것이라, 이것이 그 다섯째입니다.] 


제독도 이 말을 듣고 묵연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편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적을 행주에서 격파하고 군사를 파주로 옮겼다. 


이보다 먼저 권율이 광주 목사로서 이광을 대신하여 순찰사가 되어 군사를 거느려 임금을 돕고, 이광등이 야전에서 패한 것을 징계하고, 수원에 이르러 독성 산성에 웅거하게 되니 감히 공격해 오지 못했다. 


이럴 즈음, 권율은 구원병이 장차 서울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이때에 적들은 서울로부터 크게 공격해 왔다. 이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서 싸울 생각을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질 기미마저 엿보였다. 그러나 뒤에는 강이 가로막혀 있어 달아날 길이 없으므로 할 수 없이 다시 성으로 들어가 힘써 싸웠다. 화살이 비오는듯했다. 적들은 세 진으로 나누어 쳐들어왔으나 모두 다 패하고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날 날이 저문 후 적들이 서울로 돌아가자 권율은 군사들로 하여금 적의 시체를 찢어 사방으로 나뭇가지에 걸어 놓아 분함을 풀고자 하였다. 그러나 적들이 다시 나와 싸우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두려운 나머지 권율은 영책을 헐어 버린 다음 임진으로 가 도원수 김명원을 따라다. 


 (212) 


이 소식을 듣고 나는 단기로 달려 파주산성에 올라가 지형을 살폈다. 큰 길을 가로막아 대적한다면 가히 지킬만한 곳이었다. 나는 곧 권율과 순변사 이빈으로 하여금 합세해서 이곳을 지켜 적이 서쪽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도록 하였다. 


또 한편으로 방어사 고언백, 이시언과 조방장 정희현, 박명현등을 유병으로 해유령을 막게 하고, 의병장 박유인, 윤선정, 이산휘등은 우로로 창릉, 경릉 사이에 숨었다가 적이 많이 나오거든 싸우지 말고, 조금 나오거든 곳곳에서 만나 치도록 했다. 이리하여 적들은 마음대로 나와서 나무도 하지 못했고 군마 또한 수없이 죽었다. 


한편 창의사 김천일, 경기수사 이빈, 충청수사 정걸등을 시켜 배를 타고 용산 서강으로부터 적의 세력을 쪼개라 했다. 


충청도 순찰사 허욱은 양서에 있으면서 본도를 지키는 반면 적이 남쪽으로 뻗치려는 세력을 꺽도록 했다. 


도 경기, 충청, 경상 각도의 관병, 의병들에게 글을 보내어 각각 자기들이 맡은 곳에 있으면서 적이 가는 길을 좌우에서 막도록 했다. 


양근 군수 이여양에게 용진을 지키게 한 다음 벤 적의 머리를 모두 개성 남문 밖에 매달게 하였다. 


제독은 참군 여응종은 이를 보고 기뻐하여, 이제 조선 사람도 적의 머리를 수비게 자르는군.하고 칭찬하였다. 


어느 날 적은 동문으로부터 많이 나와서 양주 ? 적성을 거쳐 대탄에 이르기까지 산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에 사대수는 적이 쳐올까 두려워하여 나를 보고, 


 (213) 


[정탐병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들이 사총병과 유체찰(유성룡을 말함)을 잡으려 한다 하니 이 제라도 개성으로 피하는 것이 어떠시오?]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듣자 단호하게 말했다. 


정탐병이 와서 하는 말을 믿을 수 있습니까? 더구나 지금 적들은 우리 대군이 가까이 올까 겁이 나서 야단인판인데, 저들이 어찌 강을 건너온단 말이오. 또 우리가 한번 움직이면 민심이 동요될 것이니 가만히 동정을 더 살핍시다. 


사대수는 내 말을 듣자 웃으면서, 옳은 말씀이오. 혹 적이 온다 하더라도 나나 유 체찰은 사생을 같이 해야 할 것이거늘 어 찌 혼자 갈수 있겠소. 하고 오히려 자기가 거느린 병사 중 용맹한 군사를 수십인을 보내어 나를 호위하게 하였다. 


그는 그 병졸들에게 단단히 타일러 아무리 비바람이 사나운 날이라도 밤새워 지키게 했다. 그들로 하여금 조금도 게으름이 없게 해서 적들이 저희들 성으로 들어간 뒤에야 파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 적들은 적들이 파주에 있단 말을 듣고서는 전남 원수를 갚고자 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서로를 통해 광탄으로 나온 후 산성 밖 몇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더 앞으로 나오지 않고 오시로부터 미시에 이르도록 나와서 싸움을 돋우는 일이 없었고, 영책으로 들어간 뒤로는 다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권율이 웅거해 있는 곳이 험해서 쉽사리 움직일 수 없는 곳임을 적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왕필적에게 글을 보냈다. 


[적이 이제 험한 곳에 웅거하고 있으니 쉽사리 칠 수가 없는지라, 대군은 동파 ? 파주에 진주시켜 적의 뒤를 누르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리고 남쪽 군사 1만을 뽑아 강화로부터 한남으로 나가서 불의에 적을 쳐서 모든 영책을 부수고 보면 서울에 있는 적들은 반드시 용진으로 달아나 것이니, 이대를 타서 강진을 덮어 치면 일거에 적을 섬멸할 수가 있을 것이오.] 


왕필적은 내 글을 다 읽고 나서, [참 기이한 계교로다.] 하고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그는 서둘러 정탐군 36명을 뽑아 충청도 의병장 이산겸의 진에 보내어 적의 형세를 살피라 하였다. 


이때 적의 정병은 모두 서울에 있었고, 뒤에 떨어진 것은 거의 다 병들고 쇠약한 군사뿐이라, 정탐병이 이를 자세히 보고하기를, 적의 수는 1만이 넘을까 말까 한데, 우리 군사는 2, 3천이면 넉넉히 파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제독은 북쪽 장수라 이 싸움에 남쪽 군사를 지나치게 억제해 오던 터였다. 그는 이번에도 그들의 성공을 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남은 군량을 보내어 주린 백성을 구제하도록 임금께 청하였더니 허락하시었다. 이때는 적병이 서울을 점령한 지 벌써 2년, 군사가 이르는 곳마다 천 리가 모두 쑥밭이 되는 판이라,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해 굶어 죽는 자가 부주기수였다. 성중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내가 동파에 있다는 말을 듣고 노약이 모두 쫓아오니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때마침 사총병이 마산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는 길가에 쓰러진 어미의 시체 위에 엎드려 젖을 빨고 있는 어린애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부하 병졸들을 시켜 거두어다가 군중에서 기르게 하고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적은 물러갈 생각을 않고 죄 없는 백석들은 이 지경이 되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그는 다시 탄식한다. [하늘도 원망스럽고 땅도 참혹하구려.] 


나는 이 말을 듣자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때 대병이 장차 계속해서 온다는 전갈이 왔다. 이 때문에 군량을 실은 배가 남쪽에서 계속하여 올라와 강언덕에 널려 있었지만, 이 곡식은 한 톨도 다른 데 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마침 소모관 안민학이 피곡 천 석을 배에 싣고 왔다. 이것을 보고 나는 즉시 장계를 올려 이 곡식을 급한 대로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먹이자고 하였다. 또 전 군수 남궁제는 감진관으로 있으면서 솔잎으로 가루를 만들어서 이 솔잎 열 숟가락씩 가루 한 숟가락씩 섞어 물에 타서 먹이는 비상수단을 쓰지 했다. 그러나 곡식은 그 양이 워낙 적고, 사람의 수가 많아서 이런 방법으로도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기가 힘든 형편이었다. 


이것을 보고 중국 장수들도 우리 백성들을 몹시 불쌍하게 여겨 자기네 군량 30석을 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는 해결이 될 수가 없었다. 


이날은 큰비가 내렸다. 내 옆에 모여 신음하는 주린 백성들의 소리는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이틑날 보니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하고 늘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이 전 전적 이노를 급히 내게 보내어 급한 사정을 보고해 왔다. 


전라좌도 곡식을 내어 주런 백성들에게 나누어 먹이게 해주시고, 또 봄에 뿌릴 종자도 이것으로 쓰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전라도사 최철견은 곡식을 내려 하지 않았다. 


그때 지사 김찬이 체찰부사로 호서에 있을 때라, 나는 즉시 김찬에게 글을 보내어 나무언 둥지에 있는 곡식 1만 석을 풀어서 영남 백성들을 나누어 먹였다. 


대개 이때는 서울로부터 남쪽 끝까지 적병이 줄을 달아 이어 있었고, 때가 바로 4월인데도 백성들은 높은 산이나 골짜기에 숨어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농사지을 사람이 없고 보니, 만약 이 상태로 몇 달이 더 지나갔더라면 이 땅의 생민이 씨를 말리는 무서운 결과가 왔었을 것이다. 


유격대장 심유경이 다시 성루에 들어가 적병에게 퇴병하라고 꾀었다. 대는 이해 4월 초이렛날, 제독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부터 개성에 이르렀다. 


이보다 앞서 김천일의 진중에 이신충란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215) 


[제가 서울에 가서 적의 허실을 탐지하고 겸해서 두 왕자 및 장계군 황정욱을 만나 뵙고 오겠나이다] 


. 하기에 그를 서울에 모냈었다. 


얼마 뒤에 돌아와 보고하기를, [적들이 강화할 의사가 있는 모양이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서 적은 용산에 있는 군데에 그를 보내서 화친하기를 청했다. 김천일은 이 글을 바로 내게로 보내왔다. 


나는 생각하기에, [제독이 이미 싸울 의사가 없던 판이라, 혹 이를 빙자하여 적을 물리친다고 하면, 그도 다시 개성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일은 거의 끝나게 된 게 아닌가] 싶어 이 글을 사수대에게 보였다. 


사수대는 그 길로 이 글을 자기 하인 이경을 시켜서 평양으로 보냈다. 


이제 제독은 심유경을 불러들이게 되었는데, 김명원이 심유경을 보고 말하기를, [적이 평양에서 속은 것을 분하게 여겨 반드시 좋은 심사가 없을 것이니, 다시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듯하오.] 


하니 심유경은, [적들이 빨리 퇴병하지 않았기 때문에 패한 것인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겠소.] 하고 다시 적진으로 들어갔다. 


그가 적의 진중에서 한 말은 듣지 못했으나, 대게 그들로 하여금 왕자의 배신을 돌려보내고 부산으로 환군하라고 책망하였을 것이고, 또 그런 뒤에야만 강화하겠다고 하였을 것이다. 


적들이 약속을 이행하겠다고 하자, 제독은 그제야 다시 개성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때 나는 적의 글을 제독에게 보이면서 화친하는 것만이 상책이 아니니 빨리 쳐서 물리치기를 강력히 권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먼저 내 마음에 결정한 것이 있소.] 하면서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유격장군 주홍모를 적의 영책에 보냈다. 우리들과 함께 기패에 참배하기를 권했다. 


나는 말하기를, [이것은 왜적의 영책에 들어갈 기패인데 왜 우리가 참배를 한단 말이오? 또 여기에는 송시랑의 금살 적이라는 비문까지 있는데 더욱 그 말을 들을 수 없소이다.] 하고 거절했다. 


주홍모는 나에게 참배하기를 재삼 권했지만, 나는 끝내 이를 저러하고 말을 달려 동파로 돌아왔다. 


홍모가 이 사실을 제독에게 보고하자 제독은 크게 노했다. 


[기패는 황제의 명령이라, 비록 북쪽 오랑캐라도 머리를 숙여야 하는 법이거늘 어찌 이렇듯 무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내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리고 나서 회군하리라.] 


접반사 이덕형이 이 말을 듣고, 급히 내게 사람을 보냈다. 


일이 급하니 빨리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이틑날 나는 김원수와 함께 개성으로 가서 성명을 통하고 제독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제독은 노염이 풀리지 않은 탓인지 만나 주지도 않았다. 


돌아가려는 김원수를 붙잡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217) 


[제독은 필연 우리의 마음을 떠보려는 것일 터이니, 좀더 기다려 봅시다.] 


이때 비가 조금 내렸으나 우리 둘은 면담이 허락되기를 기다리며 문 밖에 서있었다. 


얼마를 그러고 서 있으려니까 제독의 부하들이 두 번이나 나와서 우리의 동정을 살피고 들어갔다. 한참 뒤에 들어오라는 기별이 왔다. 


제독은 마루 위에 서서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는 앞에 나가 예를 하고 나서 사과의 뜻을 말했다. 


우리가 아무리 어리석을망정 어찌 기패의 소중함이야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기패 옆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적을 죽이지 말라는 글이 있기에 우리는 내심 원통히 여겨서 참배하지 않았을 뿐이옵니다. 실로 죄를 면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제독은 갑자기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었다. [옳은 말씀이오. 하나 그 글은 송시랑이 쓴 것이라 나는 모르는 일이오. 그런데 이 지방에 유언비어가 하도 많으니, 만일 송시랑이 배신이 참배하지 않은 것을 내가 내버려두고 책망하지 않은 것을 듣는다면 반드시 나까지도 책망을 받을 것이오, 그러니 정문을 한 통 만들어 두었다가 송시랑이 묻거든 내보여 오해를 풀도록 합시다.] 


이리하여 우리 둘은 그 자리를 물러나와 제독의 말대로 정문을 만들어 보냈다. 


이런 뒤로 제독은 사람을 보내어 연달아 적진을 왕래하였다. 


하루는 김원수와 함께 제독에게 인사를 하고 동파로 돌아오는 길에 천수정 앞에 이르렀다. 이때 마침 사대수의 하인 이경이 동파로부터 개성으로 향하고 있는 길이었는데, 우리를 보자 말 위에서 읍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다. 


우리가 초현리에 당도했을 때 뒤에서 말탄 사람 셋이 급히 따라오면서 황급히 물었다. 


[유 체찰사 어디 계십니까?] 


나는 얼른 말을 멈추고 그들을 돌아보며 마주 소리쳤다. 


[내가 체찰사요. 그런데 무슨 일이오?] 


그 사람들은 내 곁으로 오더니 내가 탄 말을 채찍질하면서, 


[어서 가십시오.] 


할 뿐 아무런 말도 없이 연달아 내 말을 몰아 달리는 것이었다. 


나는 어찌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채, 그저 덩달아 얼마 동안을 같이 개성을 향해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통에 일행은 모두 뒤떨어지고 나는 그 사람들 셋과 함께 앞서 달렸다. 유독 군관 김제와 종사 신경진만이 애써 뒤를 따랐다. 


우리가 청교역을 지나 토성의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또 한 사람의 기병이 성안에서 달려나왔다. 그러고는 저희끼리 무엇인가 수군거리더니 그들은 나에게 읍하면서, 


[그냥 돌아가십시오.] 


할뿐이었다. 


나는 어찌된 일인지를 알리 없었다. 


이틑날 이덕형의 편지를 받고서야 겨우 곡절을 알게 되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제독이 신임하는 심부름꾼 하나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더니 제독을 보고, 


[유 체찰사는 강화하는 것을 반대하여 임진강에 있는 배들을 모두 거두어가서 왜영에 드나들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고 보고를 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자 제독은 크게 노하여 당장 나를 잡아다가 곤장 40대를 때리라고 했다 한다. 내가 아직 도착하기 전인데 제독은 눈으로 부라리면서 분함을 참지 못하여 안절부절 못하여 팔을 걷어 올리기도 하고, 좌우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모두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이때 마침 돌아온 이경을 보고, 제독은 임진강가에 배들이 있더냐고 물었다. 


이경은 자기가 본 대로 배들이 그냥 있어 왕래하기에 방해되지 않겠다고 하니, 제독은 그제서야 심부름꾼의 말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나를 잡으러 간 사람을 도로 불러들이는 한편, 그 심부름꾼을 불러 매질을 몹시 해기절한 후에 끌어내었다. 


제독은 몹시 뉘우치면서, 


[체찰사가 오면 내 무슨 면목으로 대한단 말인가?] 


하더라는 것이다. 


원래 제독은 내가 강화하는 것을 평소부터 원치 않고 있음을 알고 있던 터라, 남의 말을 듣자 의심할 여지가 없이 곧이들어 진상을 자세히 조사해 보지도 않고 크게 성을 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몹시 위태롭게 여겼던 것이다. 


그 후 수일이 지난 뒤 제독은 다시 유격장군 척금과 전세정을 시켜 기패를 가시고 동파 와서 나와 김원수를 불렀다. 


이때 관찰사 이정형도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용히 강화할 사정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219) 


[적들이 왕자와 배신을 내보내고, 서울을 돌려주고 물러가기를 청하오니, 이제 마땅히 그들의 소청대로 쫓는체하여 적을 속여 성에서 나가게 해 가지고 계교를 써서 치는 것이 좋겠소.] 이는 제독이 사람을 보내어 내 뜻이 어떠한가를 탐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소신을 굽히지 않고 먼저대로의 주장을 고집했다. 그들은 나의 뜻을 굽혀보려고 몇 번이나 강화에 찬성할 것을 재촉하였다. 


전세정은 성미가 조급한 사람이라, 급기야 성을 버럭 버럭 내면서, 그렇게 강화하기가 싫으면 당신네 국왕은 어찌하여 성을 버리고 도망쳤단 말인가? 하고 욕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서서히, 그거야 자리를 옮겨 다시 회복되기를 도모하는 것도 한방도가 아니겠소? 하고 능쳐 버렸다. 이때 척금은 연해 나를 쳐다보며 정세정과 더불어 미소를 띨 뿐 아무런 말이 없더니 돌아가 버렸다. 


4월 19일, 제독의 대군이 동파에 이르러 사대수의 진중에서 잤다. 이때는 벌써 적이 퇴병할 것을 약속한 뒤라, 서울로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제독의 처소에 나가 그에게 인사를 하려 하였으나 제독은 나를 만나 주지 않았다. 


[체찰사는 나를 불쾌하게 생각할 터인데 무엇하러 나를 만나려 하는 거요?] 하고 통역에게 말할 뿐이었다. 


4월 20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중국 구원병은 성안으로 들어가고 이 제독은 소공주댁(뒤에 남별궁이라 불렀음)에 숙소를 정했다. 


이러기 하루 앞서 적들은 이미 성을 비우고 달아난 터였다. 이때 나도 중국 군사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에 남아 잇던 백성들을 보니 백에 하나도 성한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남아 있던 백성들은 모두가 굶주리고 병들어 그 꼴은 차마 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이때 날씨가 여간 덥지가 않았다. 사람들은 이름 모를 병으로 죽고, 말들도 아무런 까닭 없이 쓰러지니 그 수효가 적지 않았다. 거리마다 인마 썩는 냄새에 사람들은 코를 막아야 지나다닐 형편이었다. 


관공서, 사삿집 할 것 없이 집이란 집은 모두 불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다만 숭례문으로부터 남산 밀까지는 적들이 사처로 쓰던 집들이라 다행히 다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종묘와 세 대궐, 그리고 종루와 큰 거리 북쪽에 있는 각관청과 관?학 등도 모두 재가 되어 버렸다. 소공주 댁은 역시 왜장 수가 있던 곳이라서 화를 면하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먼저 종묘로 들어가 한바탕 통곡을 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발길을 돌려 제독에게 들러 인사를 나누었다. 여러 대신들도 만날 수 있었다. 나를 맞는 그들과 얼마 동안을 붙들고 서로 통곡을 그치지 못했다. 


이튿날 또 제독을 찾았다. 나는 인사를 마치고 나서 이렇게 권해 보았다. 


[이제 적이 물러가기 시작은 했으나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니, 원컨대 이때를 타 군사를 내어 그 뒤를 추격하면 크게 이기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독의 대답은 여전히 나의 뜻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급히 쫓지 못하는 것은 한강에 배가 없기 때문이오. 강을 건널 길이 없으니 어찌하겠소. 하고 짐짓 난처한 빛을 띠었다. 


이에 나는 다시 용기를 얻어, [만일 제독께서 적을 쫓으시기만 한다면 내 먼저 가서 서둘러 배를 준비하도록 하지요.] 제독도 내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는 체했다. 


제독과의 면담을 마치자 나는 그 길로 급히 한강으로 나갔다. 


이보다 먼저 나는 우감사 성영과 수사 이빈에게 글을 보내어 적이 간 다음에 급히 강위에 있는 대소 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한강으로 모으게 했다. 이리하여 벌써 한강에는 배 80여 척이 준비되었다. 


나는 사람을 제독에게 보내어, [배가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하고 보고했다. 


이윽고 영장 이여백이 군사 만 여명을 거느리고 한강에 나왔다. 이때 이여백은 갑자기 발병이 났다고 야단을 떨더니, 성안으로 들어가 발을 고쳐야 한다고 교군을 불러 타고 돌아가 버렸다. 이에 군사들도 하는 수없이 이여백을 따라 성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나는 가슴을 치면서 원통해 했으나 아무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원래 제독은 실상 싸울 의사가 없었지만, 나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절할 수가 없어 이러한 연극을 꾸몄던 것이다. 


 (221) 


23일, 나는 병으로 자리에 눕는 몸이 되었다. 


5월에 이 제독은 적병을 따라서 문경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송시랑이 제독에게 글을 보내어 추격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적병이 떠나간 지 이미 수십일이 지난 뒤였다. 송시랑이 생각하기를, 제독은 필시 적들을 그대로 놓아 보내고 쫓지 않으리라 해서 일부러 글을 제독에게 보내왔던 것인데, 과연 제독은 적을 두려워해서 끝까지 쫓지 않았었다. 


이쯔음 적들은 천천히 마음 놓고 퇴병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군사들은 그들이 돌아가는 연번에 있다가도 모두 길을 피해 주고 좌우로 흩어져 숨을 뿐, 감히 나가서 싸우지를 못했다. 


적병은 해변에 진을 쳤다. 울산, 서생포로부터 다시 동래, 김해, 웅천, 거제로 수미가로 연해서 모두 열여섯 곳에 진을 쳤다. 그들은 그 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양으로, 모두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껴 성을 쌓고 참호를 파서, 바다를 건너갈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이에 중국에서는 또 사천 총병 유정에게 복건 서촉 남만 등지에서 모집한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나와서 성주 팔거에 진을 치게 했다. 남쪽 장수 오유충은 선산의 봉계에 둔치고, 이녕 조승훈 갈봉하는 거창에 둔치고, 낙상지 왕필적은 경주에 둔쳐서 사면으로 에워싸고 서로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식량은 모두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공급 하는데, 험한 고개를 넘어 여러 진에 나누어 주자니 민력은 갈수록 곤비해질 뿐이었다. 


제독은 또 심유경을 왜영으로 보내서 왜적을 달래어 빨리 돌아가라고 권했다. 한편 서일관 사용재를 낭고야에 보내어 관백을 찾아보고 교섭하게 했다. 


그 뒤 6월에 이르러 비로서 왕자 임해군 순화군 과 재신 황정욱 황혁 등을 돌려보내면서, 심 유경을 보내어 귀보케 하였다. 


한편으로는 진주를 포위하고 서 지난해에 패전한 원수를 갚는다고 떠들었다. 원래 임진년에 적병이 진주를 칠때 목사 김시민이 이를 막아 저항치 못하고 달아났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이런 지 8일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목사 서예원, 판관 성수경, 창의사 김천일, 본도 병사 최경희, 충청병사 황진, 의병 복수장 고종후 등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죽은 자는 관민을 합하면 6만여 명에 달했고, 우마 계견까지 남기지 않았으며, 적들은 성을 불태우고 참호와 우물을 메우고 나무도 베어 전날의 원한을 풀었다. 


때는 6월 28일이었다. (222) 


처음에 조정에서는 적병이 남쪽으로 퇴군한다는 말을 듣고 모든 장수들에게 전지를 내려 적을 빨리 쫓도록 지시했다.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권율 이하 관병 의병들이 모두 의령에 모였다. 이때 권율은 행주 싸움에 이긴 뒤라 자신을 가지고 기강을 건너 전진하려 했다. 


그러나 곽재우 고언백이, [적세는 강성하고 우리 군사는 오합이 많아서 싸움을 견딜 사람이 많지 못할 뿐 아니라, 앞으로 군량도 준비 되지 않았으니 경솔히 전진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만류하여 모두 이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오직 이빈의 종사관 성호선이 공연히 용기를 내어 여러 장수들을 충동하여 놓고 권율과 의논해서 강을 건너 함안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그러나 함안성은 텅 비어 있고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군사들이 익지 않은 푸른 감을 따서 먹을 지경이었으니 싸울 용기가 날 리 만무하였다. 


이튿날 첨보가 들어왔다. 적병이 김해로부터 크게 밀려온다는 것이었다. 


이대 우리 편에서 혹은 함안을 지켜야 한다고도 하고, 혹은 퇴병하여 정진을 지키자고도 하여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결정을 짖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즈음, 느닷없이 적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삽시간에 인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하였다. 서로 앞을 다투어 성문에 빠져나가려고 서두르다가 적교에 떨어져 죽는 자만도 수없이 많았다. 하는 수 없이 정진으로 퇴병하여 건너다보니 적병은 다시 수륙 양로로 물려오고 있었다. 


들판을 덮고 내를 매워 밀려오는 적병을 바라본 제장들은 하나둘 흩어져 달아나 버리고, 권율, 김명원, 이빈, 최원등은 재빨리 전라도로 가버렸으나 오직 김천일, 최경희, 황진등이 진주를 향해 들어가니 적은 이를 포위하였다. 


목사 서예원, 판관 성수경은 중국 장수를 접대 하느라고 오래도록 상주에 머물러 있다가 적이 본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돌아온 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이 성은 사면이 모두 험악한 곳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는데 임진년에 동쪽으로 옮겨 평지에 쌓았던 것이다. 


 (223) 


이때 적들은 비루 여덟 개를 세워 그 위에 올라가서 성안을 들여다보고 한편 성 밖 대숲을 베어다가 커다랗게 묶어서 가려 세워 그 시석을 막고 그 안에서 조총을 비오듯 쏘아댔다. 


왜적들의 조총 소리에 성안 사람들은 감히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또 김천일이 거느린 군사는 전부가 서울 사정에서 모집한 무리들이요, 김천일 역시 군사의 일을 몰라 자기 멋대로 할 뿐 아니라, 더욱이 서예원과는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못했던 터여서 주객이 서로 시기하고 명령이 어긋나게 되었다. 이러고서야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황진만이 홀로 동쪽 성을 지키고 여러 날 싸우다가 총알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 광경을 본 군사들은 맥이 빠지고 용기를 잃었다. 게다가 구원병이 이르지 않자 사기는 더욱 저하되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때마침 심한 폭우가 내려 성이 무너졌다. 


이때를 놓칠세라. 적병들이 개미떼같이 몰려들어왔다. 성안 사람들은 힘을 합쳐 이를 나무로 막고 돌을 던져 막아 마침내 적을 물리치고야 말았다. 


한편 김천일은 북쪽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성안이 필시 함락되었으리라고 미리 짐작한 그의 군사들은 여기저기서 흩어져 버렸다. 산 위에서 이 광경을 본 적병이 때를 놓칠세라 일시에 쳐 올라오니, 이로써 제군은 크게 어지러웠다. 





이때 김천일은 촉석루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너무나 어이가 없는지라, 최경회와 마주 손을 붙들고 통곡하다 급기야는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 통에 살아남은 군민은 부로가 얼마 되지 않았다. 왜변이 생긴 이래 이 싸움처럼 사람이 많이 죽은 때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김천일이 의리에 죽었다하여 의정부 우찬성을 증직했고, 또 권율은 용감히 싸우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여 김명원을 대신해서 원수로 삼았다. 


총병 유정은 진주가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팔거로부터 하번에 이르렀고, 오유충은 봉계로부터 초계에 이르러 모두 우도를 지켰다. 


적들도 진주를 함락한 후 부산으로 돌아가서 말하기를, 


(224) 


[중국에서 강화 있기를 기다려 회군한다.] 하였다. 10월에 임금의 행차가 환도했다. 


12월에 중국 사신 행인사의 행인 사헌이 왔다. 이보다 앞서 심유경은 왜장 소서비와 함게 관백의 항표를 가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것이 관백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행장등이 거짓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심유경도 또한 자기들이 중국에 들어오자마자 진주가 함락되었나는 말을 듣고 보매 이것을 진심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소서비를 요동에 머물러 있게 하고 한동안 그에 대한 회답을 왜에 통보하지 않았다. 


이때 제독과 그 밖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고, 다만 유정 오유충, 왕필적등이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팔거에 주둔해 있었다. 


그러나 안팎이 모두 기근에 허덕이고 양식을 운반하기 도 힘든데다가 노약은 병들어 누웠고, 젊은 장정들은 모두 도둑이 되고만 형편이었다. 더욱이 질병이 심해서 쓰러져 죽는 자가 많아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부자와 부부가 서로 뜯어먹기에까지 이르렀다. 노천에 뒹구는 벼만 짚단같이 늘어져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주정의 군사는 팔거로부터 다가, 남원에서 다시 서울로 옮겨 웅거하였다. 거기서 10여 일을 머무르다가 그들도 천천히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런데 적들은 그때까지도 해상에 머무르면서 돌아가지를 않았기 때문에 인심은 더욱 소요스러웠다. 


이때 경략 송웅창은 탄핵을 받아 돌아가고, 새로 고양점이 경략이 되어 요동에 이르렀다. 그는 참장 호택을 시켜 우리 군신들에게 이런 공문을 보내었다. 





[왜적이 무단히 침입해서 파죽같은 형세로써 세도화를 점령했고, 그대들의 토지와 인민을 열에 여덟은 빼앗았고, 그대들의 왕자와 중신들을 사로잡는 등 많은 횡포를 자행하였다. 


이에 우리 황상이 노하사 군사를 일으켜 한번 싸워 평양을 빼앗고, 두 번 싸워 개성을 도로 찾은 바 되었다. 마침내 왜적은 서울에서 달아나고 왕자와 중신을 돌려보내고, 따라서 토지 2천여 리를 수복하였으나, 여기에 소비한 인마와 비용이 또한 적지 않았다. 우리 조정에서 조선을 대접함이 이와 같으니 회상의 망극한 은혜 또한 지나친 바 있도다. 


그러나 이제는 식량도 더 운반해 올 수 없고 군사도 다시 진군시킬 수 없다. 다행이 왜적들도 황제의 위엄을 두렵게 여겨 항복하기를 청하고 또 조공할 것을 빌었다. 천조 또한 이것을 허락하여 외신으로 용납해 두고자 하고, 왜조들로 하여금 빨리 바다를 건너가서 다시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군사를 풀어 다시 싸우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대들 나라의 구원한 계획을 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대들의 나라는 양식이 다 없어져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고 있는 형편이라 하는데, 무엇을 믿고 다시 청병하는가? 


이제 우리가 졸지에 군사를 거두고 왜노의 분공도 받지 않고 보면, 왜노는 필시 그대들에게 노여움을 두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어늘, 어찌 일찍이 방도를 차리지 않는가. 


옛날 구천이 회계에서 곤욕을 당할 때에, 어찌 부차의 살을 씹어 먹고 싶지 않았으리요마는, 부끄러움을 참고 견딘 것은 후일을 기다리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몸이 부차의 신하가 되고 자기 처로 부차의 첩을 삼엇거늘, 하물며 왜노에게 신첩이 되기를 청했다가 서서히 후일을 도모하는 것은 오히려 구천의 군신의 꾀보다 낫지 않은가? 이것을 참지 못한다면 이는 못생긴 소장부의 의견일 뿐, 복수를 하고 치욕을 씻는 영웅의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대들이 왜에게 봉공을 청해서 다행히 이것을 들어주고 보면, 왜는 반드시 중국 처사에 더욱 감동하고 조선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을 두어, 자연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다. 왜군이 돌아간 뒤에 그대들 군신들이 참으로 노심초사하고 와신상담해서 구천의 엣 일을 본받으면, 천도가 좋게 돌아와서 왜의 원수를 갚을 날이 어이 없으랴.] 


그 글은 여러 천 마디 길었으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호택이 관역에서 석 달을 머물렀으나 조정의 의논은 결정을 보지; 못하고, 임금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때 나는 병으로 누워 있을 때라 장계를 올려, [왜에게 봉공을 한다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니 마땅히 근일의 설정을 자세히 중국에 알려서 그 곳으로부터 회답을 기다려 처리하옵소서.] 하고, 다시 계속해서 여러 번 글을 올리매 임금도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진주사 허옥이 중국으로 떠났다. 고경략은 돌아가고 새로 손광이 왔다. 


중국 병부에서 황제에게 아뢰어 소서비를 불러놓고 세가지 약속을 받았다. 





첫째, 봉만을 받고 공물은 요구하지 말것. 


둘째, 왜병 한 사람도 부산에 머물러 있지 말것. 


셋째, 앞으로 영구히 조선을 침노치 말것. 





이 세가지 약속을 지킨다면 즉시 봉을 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자는 것이다. 이때 소서비는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고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심유경으로 하여금 소서비를 데리고 왜영으로 들어가 선유하고, 한편 이종성, 양방형을 각각 상, 부사로 삼고 왜에 가서 평수길을 일본 국왕에 봉하고, 다시 이종성등은 그대로 우리 도성에 머물러 왜적의 퇴병이 끝나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이리하여 을미년(1595년) 4월에 이종성등이 서울에 이르러 연달아 왜의 퇴병을 재촉했다. 


왜병들은 먼저 웅천, 거제, 장문, 소진포등에 있던 군사를 먼저 철수하여 신용을 보였다. 그러면서 전번 평양에서처럼 속지 않을까 겁내어, 황제의 사신이 하루 바삐 왜영에 들어오면 약속대로 모든 것을 지키겠다고 말하였다. 


(226) 


8월에 양방형이 병부의 분부로 먼저 부산에 이르러보니 과연 왜병은 천연하여 곧 퇴병치 않고 있었다. 그는 다시 상사에게 이 사실을 전하니 사람들은 모두 왜의 행동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병부상서 석성은 심유경의 말을 믿었다. 그는 왜가 딴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 여기고, 이종성을 보내여 퇴병을 재촉할 뿐, 비록 조정의 의논이 분분했으나 자기가 책임지고 일을 진행하였다. 


9월에 이종성이 또 부산에 이르렀으나 평행장은 바로 와서 보이지 않고, [관백의 행동을 본 후에 황제의 사신을 맞겠노라.]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 이듬해인 병신년(1596년) 정월에 돌아와서도 오히려 철병할 뜻을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이때 심유경은 두 사신을 머무르게 하고 자기 혼자 행장과 함께 배를 타고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는 장차 산신을 맞을 예절을 의논한다 했으나, 그 뜻은 남들이 알 수 없었다. 


유경은 비단옷을 입고 배를 탔고, 뱃머리에는 조집양국이란 네 글자를 크게 써서 달고 떠났는데, 간지가 오래 되도록 아무런 회보가 없었다. 


이종성은 본래 명나라 개국공신 문총공의 자손으로, 그 공으로 작을 받아 고이 자랐기 때문에 몹시 겁이 많은 성품의 사람이었다. 


이때 어느 사람이 그를 보고, [왜는 실상 봉을 받을 의사가 없는데, 공연이 이종성등을 유인해다가 가두어 두고 욕을 보이려 한다.] 하니, 이종성은 이 말을 듣고 두려운 생각이 불현듯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미복으로 밤중에 영을 나와 종복과 인절등을 모두 버린 채 도망해 버렸다. 


이틑날 아침 이 사실을 안 왜적들은 길을 나누어 이종성을 쫓아 양산의 석교까지 이르렀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양방형은 혼자 왜영에 머물러 있으면서 왜군을 무마하는 한편, 우리에게 글을 보내어 조금도 경동치 말도록 부탁했다. 한편 이종성은 큰 길로 가지도 못하고 산골짜기로 들어가 여러 날 먹지도 못한 채, 경주를 거쳐 서쪽으로 도망하였다. 


이즈음 심유경과 행장이 돌아와서 서생포, 죽도 등지의 왜병을 철퇴시키니, 남은 것은 부산의 네 곳에 있는 군사뿐이었다. 


 (227) 


이때 다시 유경은 양부사와 함께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우리 사신도 동행케 하라고 자기 조카 심무시를 보내어 재촉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꺼리는 눈치로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심무시는 기어이 같이 갈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무신 이봉춘을 보내기로 했는데, 혹 무신은 저쪽에 가서 실수가 있을지 모르니, 사리를 아는 문관을 보내는 것이 옳다 하여 전에 심유경의 접반사를 지낸 황신을 보내게 되었다. 


중국 사신 양방형과 심유경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양방형 등이 일본에 갔을 적에 관백은 관사를 웅장하게 차리고 그들을 영접할 차비를 하였다. 그러나 난데없는 지진이 일어나 관사가 허물어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딴 집에서 그들을 맞았다. 


관백은 두어 차례 중국 사신들과 만나는 동안 처음에는 봉을 받을 것처럼 하더니 갑자기 노한 빛을 띠고 언성을 높였다. [내가 조선 왕자를 놓아 보냈으니 의당 조선에서도 왕자를 보내어 사례할 것이어늘, 이렇듯 조선의 사신이 낮으니 이 또한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대드는 것이었다. 


황신 등은 하릴없이 국서도 전하지 못한 채 양방형과 심유경을 재촉하여 본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적장 평행장은 부산포로 돌아왔고, 청정은 다시 군사를 거느려 서생포에 주둔하면서, [왕자를 보내서 사례하지 않으면 군사를 풀지 않겠다.] 하고 위협했다. 


이것은 관백이 바라는 것은 봉공뿐만이 아닌데도 중국서는 봉만을 허락하고 공을 허락하지 않는 까닭에서였다. 이 내용인즉, 원래 심유경과 평행장이 친숙한 자로, 자기들끼리 억지로 일을 성사시키다 보니 이렇듯 구차한 결과를 지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석성과 심유경은 본국에 득죄한 바 되었고, 중국 군사가 다시 나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옥에 가두었다. 


처음에 원균은 이순신이 자기를 구하여 준 것을 고맙게 여겨 서로 사이가 좋았으나, 마침내 일을 끝내고 공을 다투는 마당에 가서는 그렇지 못했다. 본래 원균은 성품이 응험하여 간자했다. 그는 중외 인사들과 접촉이 많은 것을 기화로 이순신을 모함했다. 


[이순신은 예초부터 우리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내가 여러번 청해서 부득이 왔던 것이다. 그러니 적을 물리친 공으로 하면 내가 으뜸을 차지할 것이다.] 라고 했다. 


원균의 말을 듣자 조정의 공론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렇듯 되고 보니 내가 이순신을 천거했기 때문에 나와 사이가 나쁜 사람들은 원균의 편을 들어 이순신을 몹시 모함했다. 


오직 우상 이원익만은, [이순신과 원균은 그 맡은 바가 다 각각 있으니, 처음에 가서 구원치 않았다 해서 그것이 그다지 죄 될 게 무어란 말이오?] 하고 그들의 의견을 반대했다. 


이보다 먼저, 적장 평행장은 자기의 사졸 요시라를 경상 우병사 김응서의 진에 자주 왕래시켜서 사이가 좋았었다. 


다시 나오려는 청정을 보고 어느 날 요시라는 가만히 김응서를 대하여, [우리 장수 행장이 말하기를, 이번화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청정 때문인데, 자기도 이 사람을 미워한다 합니다. 그리고 이번 모일에 청정이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당신네 조선 군사는 수전에 능한 터인즉, 이때를 타서 청정의 군사를 섬멸시키고 아예 기회를 놓치지 마시라 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김응서는 바로 이 일을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또한 이 말을 믿었고, 더우기 해평군 윤근수는 좋아라고 뛰면서 이 기회를 놓칠세라 연달아 임금께 아뢰어서 이순신을 재촉해 나가 싸우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간계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주저하기를 여러 날 했다. 이때 요시라가 다시 왔다. 


(229) 


[청정이 벌써 착륙했소이다. 조선에서는 왜 그를 쳐서 없애지 않는단 말이오?] 하고 거짓 안타까운 체 했다. 이 말이 또 조정에 들어가자 조의는 이순신을 허물하기 시작했다. 


대간에서는 이순신을 국문하자는 말까지 나왔다. 또 현풍 사람인 전 현감 박성이란 자는 그 때 시론을 따라서 상소를 올려 이순신을 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임금은 이 일 모두가 진심인가 의심하여 특별히 성균관 사성 남이신을 보내어 한산에 가서 사실을 알아오라 하였다. 


남이신이 전라도에 들어가자 군민들 중에는 길을 막고 이순신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애원하는 자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남이신은 이런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그는 터무니없이, [청정이 섬에서 7일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으나, 이때 우리 군사가 나가 싸웠더라면 그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인데, 이순신이 겁내어 머뭇거리는 바람에 아까운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하고 회보하였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조정에서는 대신들에게 명하여 이순신의 죄과에 대한 의논을 하도록 했다. 모두들 이순신의 죄를 맹렬히 공박하고 엄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홀로 판중추부사 정탁만이 말하기를, [이순신은 명장입니다. 절대 죽일 수 없습니다. 군기의 이해는 보통 사람이 추측지 못한 것이온즉, 이순신이 경솔히 나가 싸우지 않은 것은 무슨 짐작이 있어 그리 하였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데 뒷일을 생각하시어 그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하고 이순신을 옹호하고 나섰다. 


마침내 조정에서도 사형에 처하려던 주장을 누그러트려서 한 차례 고문을 한 다음, 관직만을 빼앗아 그대로 군중에 나가게 하였다. 


이때 이순신의 노모는 아산에서 아들이 하옥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심려 끝에 애가 타서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뒤로 이순신은 옥에서 나와 아산을 지나다가 겨우 성복을 하고, 바로 권율의 진으로 가서 종군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중국에서는 병부상서 형개를 총독 군문으로 삼고, 요동 포정사 양호를 경리 조선 군무로 삼고, 마귀를 대장으로 삼아서 양원, 유정, 동일원등이 계속하여 우리나라로 나왔다. 


정유년 (1597년) 5월. 


양원은 군사 3천을 거느리고 먼저 이르러 며칠 동나 서울에 머무르다가 전라도에 내려가서 남원을 지켰다. 대개 남원은 호남과 영남의 요지인 동시에 성도 자못 견고했다. 


게다가 지난번에 낙상지가 이것을 중축하여 가히 지킬 만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성 밖에는 교룡 산성이 있어, 여러 사람들이 이 산선을 지키자고 하였다. 그러나 양원은 본성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성 위를 더 쌓고 참호를 더 팠다. 그리고 참호 안에서 양마장까지 설치하여 밤낮으로 역사를 독촉하니 한 달 만에 일을 마쳤다. 


8월 초이렛날, 한산 수병이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전사하고 경상 우수사 배설은 도망쳤다. 


원균은 한산에 부임하자 이순신이 쓰던 전법을 모두 바꾸고, 이순신에게 신임을 받던 부하들을 쫓아 버렸을 뿐 아니라, 이영남이 지난번에 자기가 패하던 전말을 모두 알고 있다 하여 더욱 미워하는 등 지휘관답지 않은 통솔을 했다. 이로 인하여 군심이 흉흉해지고 원망의 소리가 자자했으니, 이 싸움은 처음부터 승산이 있을 리 없었다. 


이순신이 한산에 있을 때에는 운주당이란 당을 짓고, 밤낮으로 거기서 모든 장수들과 병사를 의논했을 뿐 아니라, 하졸이라도 군사에 관한 의견을 말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와서 군정을 통하도록 했었다. 또 전쟁에 임할 때에는 모든 장수들을 모아 계략을 세운 다음에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원균은 이와는 반대로 자기의 애첩과 이 당 안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자연 부하 장수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고, 더구나 그는 술을 좋아해서 날마다 술에 취해 있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는 술에 취하면 공연한 형벌로 군사들을 못 견디게 하였다. 그래서 병졸들은 서로 쳐다보며, 만일 적병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달아나는 수밖에 없지. 하고 수군거렸다. 


장수들은 장수들대로 또한 원균을 비웃어 마지 않으니, 통제사의 위품은 찾을 길이 없었다. 


이때 적병이 다시 쳐들어왔다. 


평행장은 요시라를 다시 김응서에게 보내어 허위 정보를 제공하게 했다. 


(231) 


[왜선이 모일에 나올 것이니 조선 수군은 이를 맞아 쳐 없애라.] 하고 꾀었다. 


도원수 권율은 이 말을 그대로 곧이들었다. 더구나 지난번에 이순신이 주저하고 나가 싸우지 않다가 득죄한 것을 생각하니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원균을 시켜 즉시 나가 싸우라고 했다. 원균 역시 평소에 적을 보고도 나가지 않은 이순신을 탓해 왔던 터이라, 이제 그의 소임을 대신 맡은 마당에 왜적과 싸워 이길 승산은 적으나, 무엇이라 거절할 입장이 못되었다. 그는 배를 이끌고 군사를 거느려 바다로 나갔다. 


이즈음 언덕 위에 있던 왜영에서는 바다로 나오는 우리 배를 내려다보고, 그때그때 형세를 일일이 자기네 본영에 보고하여 정세를 낱낱이 탐지하고 있었다. 


원균의 배가 절영도에 다다르자 풍랑이 일기 시작하는데 어느덧 날이 저물어왔다. 배를 대어 쉴 곳도 없는데 멀지 않은 곳에 왜선이 출몰하는 것이 보였다. 


원균은 제군을 재촉해서 앞으로 나갔다. 군사들은 한산에서부터 종일토록 노를 저어 오느라고 힘이 빠져 피로하고 기갈이 심해 배를 저을 기운도 없었다. 모든 배들이 서로 앞서고 뒤서며, 옆으로 가로 방향 없이 풍랑에 흔들려 가뜩이나 지친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왜적들은 우리 군사를 더욱 피로하게 하고자 거짓으로 가까이 나타났다가 달아나는 체 하면서 교전치 않고 피하기만 했다. 


이때 밤은 점점 깊어가고 바람은 갈수록 드세어, 우리 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서로 찾지를 못하게 되었다. 이것을 본 원균은 간신히 남은 선척을 수습해서 겨우 가덕에 다다랐다. 군사들이 기갈을 차밎 못해 서로 다투어 배에서 내려 물을 마시느라고 붓나했다. 


이때 외병들이 섬 속에 숨어 있다가 일제히 내달아 사로잡으니 이 싸움에 장병 4백여 명을 잃었다. 원균은 겨우 사지를 벗어자 거제 칠천도에 이르렀다. 


이때 권율은 고성에 있다가 이 소문을 듣고 급히 원균을 불러 매를 때리고 다시 나가 싸우라 했다. 원균은 군중에 돌아와 홧김에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장중에 누워 버렸다. 더더구나 장수들이 군사일을 의논코자 했으나 만나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날, 밤중에 왜선이 쳐들어왔다. 원균의 군사는 또다시 크게 패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이 꼴을 당한 원균은 도망해 해변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언덕에 올라 비둔한 몸을 이끌고 걸리지 않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소나무 아래 이르러 잠시 숨을 돌릴 동안에 좌우 사람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흩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원균이 이곳에서 혼자 있다가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하기도 하고, 혹은 여기서 피해 살아 달아났다고도 전하는데, 그 확실한 것은 알 길이 없다. 


이억기는 배 위에서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배설은 원균의 계교가 그르다고 여러 번 간해 오던 터였다. 이때에는 칠천도란 데가 물이 얕고 협착해서 배를 댈 곳이 못되니 딴 곳으로 옮기자고 말했으나 원균은 댈 곳이 못되니 딴 곳으로 옮기자고 말했으나 원균은 한번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배설은 생각다 못해 자기가 거느린 배 몇 척을 적병에 대비시키고 있다가, 적이 오는 것을 보고 항구를 벗어나 먼저 달아났기 때문에 유독 그 군사만은 화를 면하였다. 배설은 한산도에 다다르자 불을 놓아 군기와 양곡, 여사를 불사르고 있는 도민들을 피나하게 하였다. 





우리가 한산도에서 이미 패하자 적들은 승세하여 서쪽을 향해 쳐들어가니 남해 순천이 차례로 함물되었다. 다시 적선은 두치진에 이르러 육지에 올라 남원을 포위했다. 이 때문에 충청 전라 지방이 일시에 흉흉해졌다. 


임진년에 우리나라를 침범한 이후로 오직 수전에서만 여러 번 참패를 당했기 때문에 평수길은 이를 항상 분하게 여겨왔다. 


그는 행장을 책망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이 분풀이를 하라고 했다. 이에 행장은 김응서를 교묘한 방법으로 꾀어서 이순신으로 하여금 죄를 얻어 파면 당하게 하고, 다시 원균을 유인하여 바다 가운데로 나오게 해가지고 그의 허실을 낱낱이 탐지해 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불시에 원균을 엄습했다. 


계교가 그렇게도 간교해서 우리는 모두 그들의 계교에 빠졌으니 슬픈 일이로다. 


왜병이 황석상정을 함락시키자 안음현감 곽준과 전 함안 군수 조종도가 목숨을 잃었다. 


처음에 체찰사 이원익과 원수 권율은 도내 산성들을 고쳐서 적을 막가 방안을 의논해 공산 금오 용기 부산등에 성을 쌓았다. 이때 공산과 금오에는 백성들이 노동력을 여간 많이 제공하지 않았고, 이웃 고을에서까지 도구와 양식을 가져다가 일을 마쳤다. 성이 완성된 뒤에는 수령을 독려해서 노약과 남녀들을 데려다가 성을 지키게 하니 원근 인심이 소연해졌다. 


 (233) 


급기야 왜적이 다시 쳐들어왔다. 청청은 서생포로부터 서쪽 전라도로 향해서 장차 행장의 수로병과 합쳐서 함께 남원을 치고자 했다. 이에 우리 편에서는 원수 이하 전 장병이 모두 퇴병했고, 각처 산성에 전령을 보내어 각각 적병을 피해 도망하라 하였다. 


그러나 이때 오직 의병장 곽재우 만 창녕 화왕산성에 들어가 죽기로써 성을 지키고 있었다. 


적들은 산 밑에 이르러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성안 사람들을 보고는 그대로 지나갔다. 


안음 현감 곽준이 화석산서로 들어가고 전 김해 부사 백사림도 역시 성안으로 들어갔다. 


백사림은 본래 무인이이어서 성안으로 들어갔다. 백사림은 본래 무인이어서 성안 백성들은 그에게 크게 의지했다. 그러나 적병이 성을 치기 시작한 지 하루가 못되어 백사림이 머저 도망하지 제군은 모두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적이 성안에 들어오자 곽준과 그의 아들 이상 이후가 모두 죽었다. 유문호에게 시집간 곽준의 딸만 남았는데, 유문호 역시 왜적에 사로잡혀간 지라, 문호의 처 곽 씨 부인을 피난 갔다. 성 밖에 나와 이소문을 듣고 종들을 돌아보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적에 내가 따라 죽지 못한 것은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제 남편마저 잡혀갔으니 내 살아 무엇하랴.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일찍이 조종도가 말하기를, [내 일찍이 대부의 뒤를 좇은 사람이니, 하잘것 없는 무리들과 섞여 죽을 것이 아니라 죽으려면 마땅히 명백하게 죽어야 한다.] 


하고 처자들을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가서 시를 지었다. 





공동산 밖에서는 사는 것 오직 기쁘고, 


수원성 가운데서는 죽는 것 또한 영광이로다. 





이러고 나서 종도는 준과 함게 적에게 죽었던 것이다.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삼았다. 한산도에서 우리 군사가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야는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임금은 비변사 제신들을 불러 계책을 물었으나, 여러 신사들은 황황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이때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이 조용히 임금께 아뢰었다. [이번에 참패는 모두 원균의 죄인 줄로 아옵니다. 마땅히 이순신을 다시 불러서 통제사를 삼으시 옵소서. 





임금도 이 말을 옳게 여겨 즉석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이대 권율은 원균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남은 군사를 거두어 후사를 도모케 했다. 


이순신은 군관 한 사람과 함께 경상도로부터 전라도에 들어가 밤낮으로 잠행하여 진도에 다달아 군사를 거두어 적을 막으려 했다. 왜병은 남원을 함락시켰다. 


중국 장수 양원은 달아나 돌아가고, 전라 병사 이복남과 남원 부사 임현, 조방장 김경로, 광양 현감 이춘원, 등이 모두 전사 하였다. 군시기에는 파진군 12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양원을 따라 남원으로 들어갔다가 모두 적군에게 죽었다. 


홀로 김효의 란 자가 빠져나와서 성이 함락되던 일을 나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다. 


양 총병은 남원에 이르자 성을 한길이나 증축했다. 성 밖에 있는 양마장에는 대포 구멍을 많이 뚫어 놓고 성문에는 대포 두세 개를 묻어 놓았다. 참호를 두길이나 깊이 팠다. 


한산도가 패하자 적은 수로와 육로로 달려들어 왔다. 


이 소식이 남원성에까지 들리자 성안의 인심은 몹시 흉흉해졌다. 드디어 백성들은 모두 도망해 흩어지고 말았다. 


유독 총병이 거느린 요동 마군 3천 명이 성안에 있을 뿐이었다. 총병은 격문을 보내어 전라 병사 이복남을 불러 함께 지키자고 했다. 그러나 복남은 천연히 쉽게 오지 않았다. 밤에도 게속하여 사람을 보내자 부득이 해서 왔으나 데리고 온 것은 겨우 군사 수백 명 밖에 없었다. 


광양현감 이춘원과 조방장 김경로등이 계속하여 이르렀다. 


8월 13일, 왜병의 선봉 백여 명이 성 아래에 이르러서 조총을 어지러이 쏘아대다가 이내 그치더니, 모두 흩어져 밭두둑 사이로 숨어 버렸다. 그런 다음 그들은 다시 삼삼오오 떼를 지어 갔다가는 다시 오곤 했다. 성 위에서는 우리 군사가 승자소포를 쏘았다. 그러나 왜병의 대진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다시 유병을 내어 교전케 하고, 병사들도 드문드문 교대로 내보냈으므로, 포를 쏘아도 잘 맞지 않았다. 그러나 성안에 있는 군사들은 적의 조총에 맞아 가끔 쓰러졌다. 


이윽고 왜병이 성 아래에 이르렀다. 그들은 우리와 이야기 하고자 큰 소리로 떠들었다. 


총병은 하인 한 사람을 시켜 통역과 함께 왜영으로 가보라 하였다. 


왜영에서 가지고 온 편지를 별다른 것이 아니라 싸움을 약속하는 글이었다. 


(235) 


14일, 왜병은 지난번처럼 성을 삼면으로 포위하여 진을 치고 총을 쏘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성 남문 밖에는 민가가 몹시 조밀하게 있었는데, 적이 진군해 오자 총병은 이것을 모두 불살라 버려 오직 돌벽과 흙담만이 남아 있었다. 적들이 담과 벽에 몸을 숨기고 총을 쏘자 성안 사람들이 많이 맞았다. 


15일, 성안에서 바라다보니 성 밖 잡초와 논에 있는 벼를 베어다가 다발을 커다랗게 수없이 묶고 있는 왜병들이 보였다. 


적병들은 이것을 담과 벽 사이 여기저기에 쌓아놓았으나, 성안의 아군들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즈음에 중국의 유격 장군 진우층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전주에 있었다. 


남원에서는 날마다 진우층이 와서 구원하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오래 되도록 오지 않았다. 이리하여 군중의 인심은 더욱 흉흉한 참이었다. 


이날 밤 늦게 성첩을 지키던 군사들이 왕왕 서로 귀엣 말을 주고받으며, 말안장을 준비하는 꼴이 필시 도망할 기색인 것 같았다. 


밤 초경쯤 되었다. 왜진 속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인가 운반하는 기미가 보이더니 성안을 향해서 총을 어지러이 쏘기 시작했다. 탄환이 성 위에 마치 우박처럼 쏟아지니, 성 위에 있는 사람들은 목을 움츠리고 감히 내다보지도 못했다. 


한두 시간이나 지났을까. 씨끄럽던 소리가 차츰 그쳤다. 


묶은 풀을 가져다가 참호를 메우고 또 양마장 안팎에 쌓아 올려 삽시간에 성 높이와 같게 하였다. 이에 왜병들은 맘대로 성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내 성안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효의는 처음에 빠져나와 남문 밖 양마장을 지키고 있다가 황망히 성에 들어가 보니, 성 위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다만 성안 곳곳에 불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달려서 북문에 이르니 중국 군사들은 모두 말에 올라 성문을 나서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쉽게 열리지 않았다. 말 들이 묶어놓은 것 같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군마가 앞을 다투어 나갔다. 


그러나 왜병은 성 밖에서 두 겹 세 겹으로 포위하고 있는 터였다. 그들은 각각 요긴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긴 칼을 빼어 어지러이 갈기니 중국 군사는 목을 늘여 칼을 받을 뿐이었다. 때마침 달이 밝아 더구나 도망한 사람이라고는 몇이 되지 못했고, 총병은 하인 몇 사람과 말을 달려 포위망을 뚫고 나가서 겨우 자기 몸만 죽음을 면했다. 


혹은 말하기를 왜병도 그가 총병인 줄을 알고 살려 보냈다고도 한다. 


효의는 한 사람을 동반해서 성문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동반했던 사람마저도 적에게 죽자 논으로 뛰어들어 풀 속에 엎드렸다가 왜병이 모두 수습해 돌아간 뒤에야 비로소 도망해 왔다고 한다. 


원래 양원은 요동 장수라, 한갓 오랑캐를 막을 줄만 알았지 왜병을 방어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이렇게 피했던 것이요, 또한 평지에 잇는 성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도 알지 못했던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효의의 말을 이렇듯 자세히 적는 것은, 뒤에 적을 막을 자로 하여금 경계가 되게 함이다. 남원이 함락되자 전주 이북은 모두 와해되어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양원은 이 때문에 극형을 당했고, 벤 그의 머리는 효시 당했다. 


통제사 이순신은 왜적을 진도의 벽파장 아래에서 대파시키고, 적장 마다시를 죽였다. 


이순신이 진도에 이르러 병선을 수습하니 겨우 십여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연해에는 배를 타고 피난하는 백성들이 무수히 많았는데, 이순신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순신은 이들을 여러 길로 불러 맞이하니, 원근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들은 뒤에 거느려 아군의 형세를 돕게 하였다. 


적장 마다시는 수전에 매우 능한 자로서 선척 2천여척을 거느리고 와서 서해를 침범하려다가 양군이 서로 벽파정 아래에서 부딪쳤다. 


이순신은 겨우 배 열두 척에 대포를 싣고 조수를 이용하여 순류를 타고 적을 치니, 적은 저항치 못하고 패하여 달아나매, 이로부터 군중의 사기가 크게 떨쳤다. 


이때 이순신의 휘하에는 이미 8천여 명이 넘는 군사가 모여들었다. 그는 이들을 이끌고 나가서 고금도에 진주하였다. 그러나 군량이 떨어졌음을 걱정하여, 바다에 통행하는 첩지를 만들고 영을 내렸다. 


(237) 


[삼도 연해를 통행하는 모든 선박은 공, 사선을 막론하고 첩지가 없을 경우에는 간첩으로 인정하고 통행치 못 하게 할 것이다.] 이에 피난하던 백성들이 다투어 와서 첩지를 받아 갔다. 


이순신은 이들에게 선박의 종류에 따라 군량미를 바치고 첩지를 받아가게끔 하였는데, 큰 배는 석섬, 중간 배는 두섬, 적은 배는 한 섬씩으로 하였다. 


피난민들은 그들의 배에 재물과 곡식을 다 싣고 나왔기 때문에 군량미 정도 쯤 바치는 것은 어렵게 여기지 않았고, 통행할 수 있는 것만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열흘 만에 군량미 만여 석을 얻게 되었다. 


이순신은 다시 사람을 모집하고, 구리와 철을 모아 대포를 만들고,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기에 분주하니, 모든 일이 잘 되어 갔다. 원근의 피난민들이 모두 와서 순신에게 의지하여 집과 막을 만들고, 물건을 파는 것으로 생업을 하니, 조그만 섬 속에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중국 장수 진린이 왔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 고금도에서 이순신과 합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품이 사나워서 꺼리는 사람이 많았다. 


임금이 청파까지 나와 진린을 전송할 때 나도 나가 보았지만, 그는 수령을 패고 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노끈으로 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어서 얼굴에 피가 낭자하게 했다. 나는 급히 역관을 시켜 이를 말리도록 했으나 그는 끝내 듣지 않았다. 


나는 같이 앉았던 재상들을 보고 탄식했다. [허허, 이버 싸움이 이순신의 군사가 또 패하겠구나. 진린과 같이 군중에 있으면 자연히 장수의 권리를 잃을 것이니, 저렇듯 군사들에게 횡포하고서야 그 군사가 패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말을 듣던 다른 여러 사람들도 내 말을 옳게 여겨 탄식해 마지않았다. 


한편 이순신은 진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시켜 물고기를 낚고 돼지와 사슴을 잡아 안주를 푸짐하게 장만해 놓고 그를 맞이했다. 


진린의 배가 도착하매 순신은 군의를 갖추어 멀리 나가 그를 맞고, 그 군사들을 크게 대접하니 제장들과 이하 군사들 중에서 취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사졸들은 모두 이순신을 가리켜, [과연 참 양장이로다.] 하고 칭송해마지 않았고, 진린도 마음이 흐뭇한 모양이었다. 


진린이 온 지 얼마 안 되어 적병이 와서 근처 섬을 침범했다. 이순신은 즉시 군사를 보내어 이를 파하고 적병 40명의 머리를 베어 왔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전공을 모두 진린에게로 돌렸다. 진린은 마음속으로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그는 이순신을 어렵게 여겼다. 모든일을 일일이 이순신에게 물어서 처리했고, 출입하는 데에도 이순신과 나란히 교자를 타고 다녔지 감히 앞서 가지 못했다. 이에 이순신은 진린과 약속하여 중국 군사와 우리 군사는 조금도 다름이 없는 처지이니, 만일 조금이라도 백성들에게 누를 끼치는 자가 있으면 용서 없이 엄벌키로 했다. 이로부터 섬 속의 규율이 잡히고 질서가 섰다. 


이것을 본 진린은 임금게 글을 올렸다. [통제사는 경천위지의 재주와 보천욕일의 공이 있습니다.] 이렇듯 진린이 이순신을 칭찬한 것은 그에게 감복하였기 때문이다. 


적병은 물러갔다. 그러나 당시 적은 3도를 짓밟아 지나가는 곳마다 민가를 불태우고 인민들을 살육했다.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붙잡기만 하면 모조리 코를 베어 적들의 위세를 보였다. 적병이 진산에 이르니 서울 사람들이 모두 도망해 흩어졌다. 


9월 초아호렛날, 


내전은 적병을 피하여 서족으로 내려갔다. 


경리 양호와 제독 마귀는 서울에 남아서 평안도 군사 5천여 명과 황해도와 경기도 군사 수천 명을 모집해다가 나누어 강 여울을 지키게 하고 창고도 수비하게 하니, 적들은 경기도의 경계에서 돌아갔다. 


청정은 다시 울산에, 행장은 순천에, 심안돈오는 사천에 둔치니, 그 길이가 7, 8백 리에 뻗쳤다. 이때 서울이 거의 지키지 못할 상태에 이르니, 조신은 다투어 피난할 방책을 임금께 아뢰었다. 


지사 신잡이 나와 아뢰었다. [임금게서는 마땅히 영변으로 거동하셔야 합니다. 신이 일찍이 병사가 되었을 제, 영변 사정을 대강 아옵는바, 가장 조심되는 것은 간장이 없는 것이오니, 이것을 미리 예비하시지 않는다면 가서 마련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말을 듣고 모두 웃으면서 말했다. 


 (239) 


[신일에는 간장을 담그지 못한다더니 … ]이때 한 대신이 조당에 나가 말했다. 


[이까짓 적을 가지고 무엇을 조심하란 말입니까. 오래 되면 자연 없어질 것이니 오직 임금님을 모시고 편안한 곳으로 갈뿐입니다.] 원수 권율이 서울로 들어왔다. 


임금이 불러서 보시고 사정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당초에 임금님께서 갑자기 서울로 돌아오시지 말고, 그대로 서쪽에 머물러 계시면서 적의 형세가 어떠한지를 보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적은 물러갔다고 들려왔다. 그리하여 권율은 다시 경상도로 내려갔다. 


대간에서는 권율이 꾀가 없고 겁만 많아서 원수의 자격기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임금은 듣지 않았다. 





12월에 양 경리와 마 제독이 기병 수만을 거느리고 경상도로 내려가 울산에 있는 적의 영책을 쳤다. 


이때 적장 청정은 울산 동쪽 해변의 험준한 곳에 성을 쌓고 있었는데, 양 경리와 마 제독이 불의해 쳐들어가 철갑으로 무장한 기병으로 습격하니, 적은 견디지 못하고 바깥 성을 버린 채 내성으로 물려 들어갔다. 이에 중국 군사들은 노획한 물건만을 수습하는 데 정신이 없을 뿐, 더 진공치 않았다. 적들은 그 사이에 성문을 굳게 닫고 고수하니, 중국 군사가 아무리 공격해도 소용이 없었다. 


여러 중국 군사 진영에서는 소규모 부대를 내어 성 밑을 포위하고 지켰다. 이런 지 13일이 지났는데도 적들은 여전히 성 밖에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9일, 나는 경주에서 떠나 경리와 제독을 만나본 다음, 적의 보루를 바라다보니 몹시 한가로워 사람의 기척이라곤 없었다. 


성 위에는 성곽도 설치하지 않고, 다만 사방으로 줄행랑을 만들어 군사들은 모두 그 안에서 지키고 있었다. 밖에서 아군이 성 밑에 이르고 보면 총알을 비오듯 쏘아 날마다 싸우는데, 중국 군사와 우리 군사가 수없이 죽어갔다. 


적의 배는 또 서생포로부터 와서 후원했다. 그들은 물위에 마치 오리처럼 벌려 섰다. 그러나 이 섬에는 식수가 없어 적은 밤마다 성 밖으로 나와 물을 길었다. 


경리는 김응서로 하여금 용사들을 거느리고 성 밖 샘 곁에 매복하게 해서 밤마다 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주리고 피로해서 겨우 생명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이 생각하기에 성안에는 양식이 떨어져서 날이 갈수록 적은 절로 패퇴되리라 여겼다. 그러나 때마침 일기가 몹시 춥고 비까지 내려 병사들은 모두 손발에 동상을 입고 견딜 수 없는데다가 적들이 다시 육로로 구원하러 오므로 양 경리는 겁을 먹고 급히 회군하여 버렸다. 정월에 중국 장수는 모두 서울로 돌아갔다가 다시 진격할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무술년(1598년) 7월에 경리 양호가 파면되고 다시 만세덕이 대신 경리가 되었다. 당시 행한  일 20여 건을 보고해서 파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임금은 여러 경리들 중에서도 적을 파하는데 그가 가장 많은 힘을 썼으므로, 좌의정 이원익을 보내어 구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8월에 드디어 그가 떠나가게 되자 임금은 몸소 홍제원까지 나가 전송하며 석별의 눈물을 흘렸다. 아직까지 만세덕은 도착하지 않았다. 


9월에 형개는 또 군사를 나누어 주둔했다. 


마귀는 울산을 맡게 하고, 동일원은 사천을 맡게 했다. 유정은 순천, 그리고 진린은 수로를 맡게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동시에 진격했으나 모두 이롭지 못했다. 특히 동일원의 군사는 적에게 패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10월에 유제독은 다시 순천에 응거한 적을 쳤고, 통제사 이순신은 구원병을 바다 위에서 크게 이겼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순신은 전사했다. 


적장 평행장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부산, 울산, 하동 등 바닷가에 주둔하고 있던 적병도 모두 퇴병했다. 


행장은 순천 예교에 성을 쌓고 굳게 지키고 있었다. 


유정이 중국 대병을 거느리고 쳤으나 전세가 불리해서 순천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나가 쳤다.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해구를 끼고 몰아나갔다. 


이에 행장은 하는 수 없어 사천의 적장 심안돈오에게 구원을 청했다. 수로로 와서 합세하는 돈오를 이순신이 진격하여 대파시키고, 적의 배 2백여 척을 불사르고 무수한 적병을, 혹은 죽이고 혹은 사로잡는 대전과를 세웠다. 그리고 또 달아나는 적을 추격해서 남해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순신은 이 싸움에 친히 시석을 무릅쓰고 힘써 사우다가 날아온 적탄에 가슴을 맞았다. 


좌우가 황급히 그를 부축해서 장중으로 들어갔다. 


이때 이순신은 가만히 입을 열러, [지금은 싸움이 심히 급한 때이니 아예 내가 죽었단 말을 내지 말라.] 하고 한마디를 남긴 채 애석하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순신의 조카 이완은 본래 담략과 국량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순신의 말대로 그의 죽음 소식을 발표하지 않고 이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싸움을 독려했으므로, 군중에서도 그의 죽음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진린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자 이완은 배를 몰아 해쳐 들어가 구원했다. 


진린은 이순신이 자기를 구원한 줄로만 알고 사람을 보내어 사례하다가 비로소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자에 앉았다가 몸에 땅을 던지면서, 


(241) 


[나는 통제사가 와서 구원해 주었거니 여겼는데 세상을 떠났다니 이게 웬말인가?] 


하고 큰 소리로 통곡하니, 군중이 모두 소리를 내어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바닷속에서 곡성이 진동했다. 


행장은 우리 수군이 적병을 쫓아 그의 병영을 지나간 틈을 이용하여 뒤로 빠져 달아났다. 


이보다 앞서 7월에 평수길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바닷가에 둔쳤던 적들은 점차로 물러가기 시작했다. 


한편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들은 우리 군사와 중국 군사들의 영책에는 곡성이 끊이지 않아 마치 자기들의 어버이를 애통함을 이기지 못했다. 영구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곳곳에서 제물을 차려가지고 따라나서며 울었다. 


[공께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시고 어디로 가신단 말입니까?] 


하고 수례를 붙들고 우니, 길이 막혀 영구가 나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길에서 보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의정부 우의정을 증직했다. 


형개가 이 해상에 사당을 지어 충혼의 제사를 지내자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해변 사람들이 서로 의논해서 사당을 짓고 이를 민충사라 하여 제사 지내게 했다 


장사꾼들과 어선들도 이곳을 왕래할 때마다 꼭 제사 지내고 간다 한다. 


이순신의 자는 여해요 본은 덕수이다. 조상에 변이란 분이 있어 벼슬이 판부사에 이르렀는데, 강직하기로 이름이 있었다. 그의 증조 거는 성종을 섬겼다. 연산이 동궁으로 있을 때 거는 강관이 되었는데, 너무 엄하다 해서 연산에게 미움을 받았다. 


일찍이 장령이 되었을 제, 탄핵하기를 서슴치 않으니, 백료들이 그를 꺼려 호랑이 장령이란 별명까지 붙였다. 조부 백록은 가문의 덕으로 음사를 지냈고, 아버지 정은 벼슬하지 않았다. 순신은 어렸을 대부터 씩씩하여, 여러 동무들과 놀 때에도 나무를 깍아 활을 만들어가지고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지나가면 그 살마의 눈에 대고 활을 쏘려했기 때문에, 나이 많은 어른들도 이를 꺼려 그 집 문앞에 잘 지나 다니지 못했다 한다. 


차차 장성하자 과연 활쏘기를 잘해서 무과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조상들은 본래 문관이었는데, 유독 그만이 무과에 올라 권지훈련봉사에 보직되었다. 


한번은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기 서녀가 있어 이순신에게 첩으로 주고자 하였으나 순신은 이를 즐겨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까닭을 묻자 그는, [내가 이제 처음 나가 벼슬을 하는데 어지 권문에 장가들어 거기게 의지할 수 있으랴!] 하고 물리쳤다.. 


어느날 병조정랑 서익은 자기와 친근한 사람이 훈련원에 있었는데, 서열을 건너뛰어 친거해서 올려 쓰려 했다. 


이때 이순신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서익이 이순신을 불러 힐문했으나 그는 조금도 얼굴을 변치 않고, 사리에 옳지 않은 짓이라고 직변했다. 서익이 크게 노하여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판이었는데도 그는 조금도 동요됨이 없었다. 


서익은 본래 성품이 사나운 사람으로 동료들도 그를 꺼려서 말다툼을 모사는 터였다. 


계하에서 이 거동을 바라보던 하리들은 서로 쳐다보며 혀를 내밀며, [이 양반이 정랑에게 항거하다니 앞길을 생각하지 못하는 분인 모양이군.] 하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날이 저물도록 이순신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서익은 부끄러운 빛으로 이순신을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식자들 간에는 이순신의 이름이 차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옥에 갇혔을 대 장차 무슨 변고가 생길지 몰라 옥리들이 그의 조카 분을 보고 뇌물을 쓰면 나올수 있겠다 하였으나, 이순신은 이 말을 듣고 조카를 불러, [내가 죽으면 죽었지 어찌 도리에 어그러진 일을 해서 살기를 도모한단 말이냐?] 하고 꾸짖었다 한다. 


그의 지조가 얼마나 곧은지를 이만하면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가 단아하고 수려하여 근엄한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는 담기가 있어 몸을 잊고 싸우다가 순국하였으니, 이는 평소부터 그의 정신 속에 쌓여온 수양의 결정이었다. 


그에게는 회신, 요신의 두 형이 있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그는 두 형들의 자녀를 자기 혈육과 같이 사랑으로 길렀고, 장가들고 시집보내는 것도 자기 자녀보다 먼저 서둘러 하곤 했다. 


이러한 재질을 가진 그가 명을 타지 못하고 재주의 한 가지도 제대로 베풀어 보지 못한 체 세상을 떠났으니, 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그는 통제사로 있을 때 주야로 마음을 스스로 단속하여 갑옷을 벗는 일이 없었다. 


견내량에서 적과 상치한 지 오래되던 어느 날 밤, 배는 모두 닻을 내리고 달밤은 낮과 같은데, 그는 갑옷을 입은 채 북을 베고 잠시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좌우를 불러 소주를 가져오라 했다. 


그는 술 한 잔을 따라 마시더니 제장들을 불러오라 했다. 


[오늘밤 달이 이렇듯 밝으니 필시 적병이 간계를 부릴 듯 하다. 달이 없는 날이면 반드시 우리를 엄습해 왔으니 이렇게 달이 유난히 밝은 날도 공격해 올 듯싶다. 제장들은 각별히 경비하여 소루함이 없도록 하라.] 


이에 호령의 나팔을 불어 모든 배에 닻을 올리게 하고 또 척후를 시켜 적정을 살피라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척후가 급히 와서 보고했다. 


[적들이 진격해 옵니다.] 이때 달은 서산에 걸려 산 그림자가 바닷속에 거꾸로 있어 그 곳은 약간 어두웠다. 그 위를 적선이 새까맣게 덮쳐 오고 있었다. 


이를 기다리고 있던 이순신의 군사가 적선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일제히 대포를 쏘고 함성을 올리니 아군의 여러 배가 모두 이에 호응했다. 


적은 우리가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더 접근치 못한 채 일시 조총을 쏘았으나, 소리만 바닷속에 진동할 뿐 탄환은 모두 물 위에 비처럼 떨어졌다. 결국 적들은 감히 범하지 못하고 패해 돌아갔다. 이것을 보고 제장들은 모두 그를 신이라 했다. 


잡 기 


무인년(1578년) 가을. 


장경성이 하늘에 뻗쳤는데, 그 모양이 마치 흰 비단과 같았다. 


이 별은 서쪽으로부터 동족으로 향해 그대로 뻗쳐 있다가 몇 달이나 되어서 없어졌다. 


무자년(1588년)연간에 한강 물빛이 사흘 동안이나 붉었다. 


신묘년(1591년)에 죽산 태평원 뒤에 있던 돌 하나가 저절로 일어섰다. 도 통진현에서는 누워 있던 버드나무가 다시 일어났다. 이런 일이 있는 지라, 민간에서는 장차 도읍을 옮길 징조라는 유언이 전해졌다. 


또 동해 바다에서 나던 물고기가 서해 바다에서 나더니 점점 한강으로 올라왔다. 


해주에서는 본래 칭어가 났었는데 근 십여 년 동안 도무지 나지 않았다. 이것이 요동 바다로 옮겨가 요동 사람들은 이것을 신어라고 불렀다. 


또 요동 8참에 사는 사람들이 어느 날 모두 놀라서 하는 말이, [조선에 적이 침입해 와서 조선 왕자가 교자를 타고 압록강을 이르렀다.] 하고 말을 서로 전하니, 이에 노약들이 산에 올라가는 등 인심이 어수선했다. 그런지 수일 후에야 비로소 안정되었다. 


또 우리나라 사신이 북경에서 돌아오다가 금석산에서 하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자게 되었다. 


그 주인이 사진을 보고 말했다. [조선 역관이 나보고 하는 말이, 당신 집에 3년 된 술과 5년 된 술이 있다 하지 그걸 아끼지 마시오.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군사들이 쳐들어 올 거요. 그때는 비록 술이 있어도 누구와 같이 먹으려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요동 사람들은 조선에 딴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해서 모두 놀라고 의심했다. 


사신이 돌아가 그 일을 조정에 아뢰었다. 조정에서는 역관이 말을 꾸며 일을 만들어 가지고 본국을 모함한다고 생각했다. 몇 사람을 체포해서 인정전 대뜰 아래 꿇려 놓고 무릎에 화형을 썼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죽었다. 


이는 신묘 연간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듬해의 결국 왜변이 있었으니, 이는 큰 난리가 장차 생길 것을 안 것이다. 


사람은 비록 이를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짐으로 나타난 그 형상은 한 가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또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고 태백이 하늘에 뻗치는 등 이런 일이 없는 해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도 보통일로 여겨왔다. 


또 서울 성안에는 항상 검은 기운이 있었다. 그것은 연기도 아니요, 안개도 아니었다. 이것이 땅에 서리고 하늘에 닿아 이렇게 하기를 십여 년이나 했다. 


그 밖의 변괴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러고 보니, 하늘이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가히 깊고 간절하다 할 것이나, 사람들이 능히 살피지 못할 뿐이다. 


두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장안성 성머리 머리 흰 새, 


받이면 연추문 위에 날아와 우네. 


사람의 집에 와서 대들보를 쪼니, 


그집 높은 벼슬아치 달아나 오랑캐 피하네, 





이것도 역시 이산한 조짐을 기록한 시다. 


임진년(1592년) 4월 17일에 적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조야가 황황했다. 


이대 갑자기 괴상한 새가 궁중 후원에서 울더니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그는 새는 혹 멀리 갔다가 혹 가까이도 왔다. 한 마리 새가 우는데 그 소리는 온 성중에 가득했다. 이 울음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날이면 날, 바이면 밤, 그는 새는 잠시도 그치지 않고 울었다. 이러기를 십여 일 했는데, 임금의 행차는 서울을 떠나갔고 왜적들이 성으로 들어왔다. 궁궐과 묘사와 모든 민가는 일제히 비워졌다. 


아하! 이또한 괴상한 일이로다. 또 이해 5월, 내가 임금의 행차를 다라 평양에 갔을 때였다. 나는 김내진의 집에 묵고 있었다. 내진이 어느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245) 


[연전에 표범이 성중으로 들어온 일이 있고, 또 대동강 물이 붉은 적이 있었습니다. 동쪽은 몹시 흐리고, 서쪽은 조금 맑았었지요. 그러더니 오늘날 이런 변고가 생기는군요. 


이때 아직 적병은 평양에 이르지 않았을 때라, 나는 이 말을 듣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 역시 심중으로는 몹시 불쾌했다. 이러고서 또 얼마 안 되어 평양이 함락되었다. 대개 표범이란 역시 야수다. 이것이 성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마치 춘추에 구욕새가 와서 집을 짓고, 여섯 마리 익새가 날아가며 사슴과 여우같은 짐승 등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는 말과 같다. 


하늘이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이 분명하고, 성인의 경계가 이같이 깊다.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랴. 어찌 삼갈 일이 아니랴! 


또 임진년 봄과 여름 사이에 목성이 미기를 지키니 미기는 곧 연분이라, 옛날부터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연과 같다고 해오던 터였다. 이때 적병들이 날로 밀어닥쳐 인심이 흉흉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어느 날 임금이 교서를 내려 말했다. 


[복성이 지금 우리나라에 있으니 적을 두려워할 게 없다.] 이것은 핑계로써 인심을 진정시켜 보려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런 두에 서울은 비록 잃었어도 마침내 능히 예전대로 회복해서 옛 도읍으로 돌아갔다. 또 적 수길은 마침내 흉측한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저절로 죽었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모두 하늘의 뜻 아님이 없는 것이다. 


왜인은 몹시 간교한 놈들이었다. 그들이 용병하는 것은 하나도 사술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임진년 일은 서울에만 중점을 두었고 평양에는 너무 소홀했었다. 


우리나라는 백년동안 승평한 세월이 흘러 백성들이 군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졸지에 적병이 왔다는 말을 듣고 보니 창황하고 어찌할 줄을 몰라 원근이 모두 넋을 잃고 우두커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병은 파죽의 형세를 타고 열흘 동안에 서울에 몰아 닥쳤다. 


우리는 지혜가 있어도 괴를 낼 수 없었고 용맹이 있어도 이것을 써보지 못했다. 


인심은 무너져 수습할 길이 없었다. 이는 병가에서 좋은 꾀를 냈어도 적의 간사한 계교에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서울에 중점을 두었다고 말한 것이다. 





적들의 상승의 위엄을 믿고 저들의 뒤는 돌아다보지 않았다. 이리하여 여러 도로 흩어져 나와 저들 맘대로 굴었다. 대체 군사란 나누면 형세가 약해지니 않을 수가 없는 법이다. 천 리에 영책을 연하여 오랫동안 날짜를 끄니, 이는 이른바 아무리 강한 화살이라도 그것이 멀리 가고 보면 낡은 허겊 하나도 뚫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또 장숙야가, 


(247) 


[여진이 군사 쓰는 법을 알지 못하는구나. 외로운 군사가 깊이 들어가고서 능히 살아서 돌아갈 수가 있는가. 


라고 한 말과도 같다. 


이 까닭에 중국 군사 4만 명으로 평양을 쳐서 깨쳤고, 평양이 깨지자 여러 도에 있는 군사들은 맥을 추지 못했다. 비록 서울만은 그대로 점령하고 있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었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우리 백성들이 곳곳에서 적을 맞아 공격해서 적의 수미가 서로 통하지 못하게 되니 드디어 적은 퇴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양에는 소홀했다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아하! 적이 실수한 것은 오직 우리에겐 다행한 일이었다. 


정말 우리나라에 훌륭한 장수라도 있어 군사 수만명을 거느리고 때를 보아 기계를 쓰고, 긴 뱀과 같은 적의 영책을 쳐서 저들의 어깨와 허리를 잘라 놓아 이것을 평양 싸움에 써먹었더라면 그들의 대병을 모두 무찌를 수가 있었을 것이다. 또 이런 계교를 서울 이남에서 썻더라면 그들의 수레바퀴 하나도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햇을 것이다. 


이렇게 한 연후라야 적은 마음이 놀라고 담이 부서져서 수십년, 수백 년이 지난 뒤에라도 감히 우리를 바로 보지 못하여 다시는 뒷근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쇠간한 기운을 겨우 지탱했을 뿐, 능히 이런 일을 하지 못했다. 또 중국의 여러 장수들도 이렇게 해야 됨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적으로 하여금 조용히 물러가게 했을 뿐, 조금도 징계하고 두려움을 주지는 못했다. 


이에 아주 하책으로서 그들을 봉공하려 했으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랴. 어찌 에석한 일이 아니랴.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이가 떨리고 주먹이 쥐어지는 일이다. 


옛날 조조(전한 때의 정치가-역주)는 임금에게 병사를 이렇게 말했다. 





[군사를 쓰고 싸움에 임해 싸우는 데 세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형을 얻을 것, 둘째는 군사들이 명령에 복종할 것, 셋째는 병기는 좋은 것을 쓰는 것입니다.] 


과연 왜병은 공격하는 싸움에도 익숙하고 병기도 정밀했다. 옛날에 없던 조총이 있었으니, 그 멀리 가는 힘과 명중하는 것이 화살보다 배가 더하다. 


우리 군사와 만일 넓은 들판에서 만나 양진이 서로 대해서 법도대로 교전한다면 그들을 대적하기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대개 우리가 쓰는 활이란 백 보 밖에 못 가는데 조총은 수백 보를 나간다. 그런데다 바람 속에 우박처럼 쏟아지니 그것을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먼저 지형을 골라서 산골짜기 험한 곳과 수목이 우거진 곳에 미리 활 쏘는 군사를 매복시켜, 적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고 있다가, 좌우에서 한꺼번에 활을 쏘고 보니 저들에게 비록 조총이나 창도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쓸 사이도 없이 크게 이겼던 것이다. 





이제 한 가지 일을 들어서 증거로 삼겠다. 적은 임진년에 서울에 들어왔다. 날로 성 밖으로 노략질해 나갔다. 심지어 원릉까지도 보존하지 못했다. 고양 사람 전사 이노는 활을 잘 쏘고 담력도 있었다. 


어느날 동지 두 사람과 함께 활을 가지고 창경릉에 들어갔었다. 뜻밖에 적의 대부대가 나오더니 골짜기 속에 가득 찼다. 이노 등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등나무 가지가 우거진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적들은 그들을 찾으려고 가까이 와서 기웃거렸다. 


노 등은 그 속에서 활을 당겼다. 시위 소리가 나면서 적은 번번이 맞아 거꾸러졌다. 이들은 다시 자리를 옮겼다. 


이리저리 옮겨 숨으면서 적을 쏘아 죽이니, 적들은 그들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이로부터 적들은 숲만 보면 도망해 달아났기 때문에 능은 보존할 수가 있었다. 


이것으로 보면, 지형을 얻고 못 얻는 데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이 상주에 있을 때, 신입과 이일 등이 만일 이런 방법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먼저 토천과 조령 3, 40리 사이에 활 쏘는 군사 수천 명을 매복해 두어서, 그 수효를 적들에게 알리지 않았더라면 능히 적을 대적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합의 무리와 훈련되지 않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더욱이 험한 요새지는 버려둔 채 평지에서 버티고 있었으니 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내가 이것은 병기에서 자세히 말했지만, 여기에 또 한번 특별히 기록하는 것은 뒷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내가 안주에 있을 때 경상 우감사인 친구 김사순이 나에게 글을 보내왔다. 


[진주에서 성을 고쳐 가지고 끝까지 지킬 계획입니다. 


이보다 앞서 적은 일찍이 진주를 한 번 침범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간 일이 있었다. 


나는 사순에게 답장했다. 


(249) 


[적이 조만간에 반드시 올 것이오. 만일 온다는 소식을 듣거든 반드시 대세를 써서 지키도록 하시오. 전날과는 사뭇 다를 것이니 마땅히 포루를 세우고 기다려야만 걱정이 없을 것이오.] 





계사년(1593년) 6월에 나는 적이 다시 진주를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종사관 신경진에게 말했다. [진주가 몹시 위급한데 다행히 포루가 있으면 지탱할 수 있을 게고, 그렇지 않으면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이윽고 합천으로 내려갔더니 진주가 함락되었단 말이 들렸다. 단성 현감 조종도도 역시 사순의 친구였다. 


그가 그 뒤에 나에게 글을 보내왔다. [지난해에 사순과 진주에 같이 있을 때, 사순은 공의 편지를 보고서 기뻐 뛰면서 참 용한 계교라고 칭찬하더군요. 그는 즉시 막하에 있는 몇 사람과 성을 돌아보고는 그 지형에 의해서 포루를 여덟 곳에 설치했습니다. 나무를 베어 떼를 만들어 강물에 띄워 내려 보내니 고을 백성들은 역사를 하기 싫어서 모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전에는 포루 없이도 적을 막았는데 지금 왜 이렇게 사람을 들볶느냐고. 그러나 사순은 듣지 않았습니다. 재목이 도착되어 공사를 시작하려 하는데 마침 사순은 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했지요. 그래서 그 일이 중지되었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우리는 서로 한 번 탄식하였다. 아하! 사순의 불행함이여! 이는 곧 온 성중 사람의 불행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운수라,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임진년 4월에 적은 연달아 여러 고을을 함락시켰으나, 우리 군사는 쉽게 무너져 감히 교봉하지도 못했다. 


비변사의 모든 신하들은 날마다 권하로 모여 들어서 적을 막아낼 방책을 강구했으나 아무런 계교도 나서지 않았다. 그중 이런 것이 건의됐다. 


[적들은 창도를 잘 쓰는데 우리는 이것을 막아낼 굳센 갑옷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능히 적을 대적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두꺼운 쇠로 갑옷을 만들어 온몸을 감추고 적진에 들어가면 적들은 찌를 데가 없을 것이니 이렇게 하면 이길 것 입니다.] 


여러 사람들은 이 말을 옳게 여겼다. 이에 여러 공장들을 동원시켜 주야로 쇠를 두드려 갑옷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 이것을 반대했다. 


[적과 싸우는 데는 구름같이 모여들고 새처럼 흩어져, 동작이 바른 것이 제일이다. 그런데 온몸에 두꺼운 갑옷을 입으면 그 무게를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또 물건도 운반할 수 없을 것이니 어떻게 적을 죽일 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말했더니 여러 사람들이 과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를 중지했다. 


또 대간이 대신을 만나 계교를 말하려 했는데, 대신 중 한 사람이 성을 내어 대신들에게 무모하다고 배척했다. 그러나 좌중에서는 그에게 무슨 방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강 가에 높게 목책을 쌓아 적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그 밑에 엎드려서 활을 쏘면 이길 것이 아닙니까?] 


어느 한 대신이 물었다. [적의 총알도 목책을 뚫지 못한단 말인가?] 


이 물음에 그 사람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물러나갔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던 사람들은 모두 웃고 말았다. 아하! 군사란 일정한 세력이 없는 것이고, 싸움이란 일정한 법이 없는 것이다. 그때그때를 당했을 적마다 방법을 변경해서 나아갔다가 물러나고, 합했다가 헤어져 기이한 꾀를 무궁하게 내는 것은 오직 장수의 손에 달렸을 뿐인 것이다. 





조조가 말한 세 가지 방책은 또한 절대로 필요한 것으로, 한 가지만 빼놓아서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 나머지 여러 말이야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대개 국강서는 아무 일도 없을 때에 장수를 뽑아 두었다가, 일이 생긴 때에 임명을 해야 하는 것이니, 뽑아내기도 정하게 해야 되는 것이요, 임명하기도 전일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 경상도의 수장은 박홍과 원균이요, 육장은 이각과 조대곤이었다. 이들은 원래 장수될 재목은 아니었다. 변고가 생기던 날, 순변사와 방어사, 조방장등은 모두 조정으로부터 명을 받고 갔었다. 





그들은 모두 전단할 권리를 가져서 저마다 호령을 내리고, 나가고 물러가는 것도 저마다 맘대로 하는 등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설사 싸움에 패하면 시체가 되어 돌아올 뿐, 무슨 일을 해낼 수가 있었겠는가? 


또 자기가 기른 것을 쓰지 못하고, 자기가 쓸 것을 기르지도 못하여 장수와 군사가 서로 알지 못하니 이는 모두가 병가에서 크게 꺼리는 바였다. 





어찌해서 먼저 사람이 잘못한 것을 뒤의 사람도 이것을 고칠 줄 모르고 지금까지 그것을 계속 답습해서 마침내 일을 그르치는가? 이러고서는 일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은 오행을 바랄 분이라, 이것을 설명하자면 말만 길어질 뿐이다. 아하! 위험한 일이로다. 


(251) 


계사년(1593년) 정월에 중국 군사가 평양을 떠났다. 


나는 그대 군사의 앞에 가고 있었다. 임진강은 물이 얼어서 건너갈 수가 없었다. 제독은 연달아 사람을 보내어 부교를 만들라고 재촉했다. 


내가 금교역에 도착해서 보니, 황해도 수령이 아전과 백성들을 시켜 대군에게 밥을 대접하느라고 들에 가득히 앉아 있었다. 


나는 우병 현령 이희원을 불러서 물었다. 


[그대가 데리고 온 읍인은 몇 명이나 되는가?] 


[수백 명은 됩니다.] 


나는 그에게 분부하였다. 


[그대는 속히 읍인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칡을 많이 끊어 가지고, 내일 낮에 임진강 어귀에서 나를 만나도록 하되 기약을 어기지 말라.] 회원은 영을 받고 물러갔다. 





이튿날 나는 개성부에서 자고 그 이튿날 새벽 덕진당으로 달려가 보니 아직도 강의 얼음이 풀리지 않았다. 


얼음 위에도 물이 반 길이나 흐르고 있는 터였다. 더구나 하류에는 배가 올라오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경기 관찰사 권지오가 수사 이빈, 장단 부사 한덕원, 그리고 창의 충의군 천여 명이 강 위에 모여들었으나 모두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오봉 현령을 불러서 칡을 가져오라 해서 굵은 새끼를 꼬게 했다. 이것으로 크기는 몇 아름, 길이는 강을 건널 만큼 만들어, 남쪽, 북쪽, 언덕에 각각 기둥 두 개씩을 세우고 가로 나무 하나씩을 매었다. 거기에 새끼 열다섯 가닥을 늘여 강을 덮었다. 


강이 넓다보니 새끼는 가운데서 늘어져 물에 잠겼다. 보고 있던 여러 사람들이, 


[공연히 헛품만 없애는군!] 하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나는 다시 처여 명을 시켜 각각 짧은 막대기를 가지고 새끼를 몇 바퀴 감으니 팽팽하여 마치 빗살과 같이 뻗쳤다. 이것을 여럿이서 가로 엮어 나가니, 어엿한 다리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가느다란 버들가지를 꺽어다 깔고 풀을 덮은 다음 다시 흙을 덮었다. 


중국 군사는 이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모두 말을 달려 건너가고 포차와 군기도 이 다리로 건넜다. 


차츰 계속하여 건너가는 자가 더욱 많아지자 새끼는 약간 늘어져 물 위에 닿으려 했다. 이것을 본 대군이 얕은 여울로 해서 강을 건너니, 이리하여 이 강은 완전히 건너게 되었다. 


내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창졸간에 칡을 많이 준비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여기에 다시 새끼 30줄을 꼬아 다리를 만들었던들 줄이 늘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사년 여름에 나는 병으로 서울 목사동에 누워 있었다. 어느날 중국 장수가 낙상지가 나를 찾아와 간곡히 문병했다. 이때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 군사는 미약한데 적은 아직도 국경에 머무르고 있으니, 군사를 조련해서 적을 막는 것이 가장 급무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중국 군사가 돌아가기 전에 군사 조련하는 방법을 배웠다가, 하나가 열 명을 가르치고, 열 명이 백 명을 가르치게 되면 수 년 안에 모두 조련한 군사가 되어 가히 나라를 지킬 만한 것입니다.] 


나는 이 말에 몹시 감동했다. 즉시 임금이 계신 곳으로 글을 보냈다. 


금군 한사립을 시켜 서울에서 사람 70여 명을 데리고 낙상지에게로 가서 가르쳐 주기를 청했다. 낙상지는 자기 부하 중에 진법을 아는 장육삼등 열 명을 교관으로 삼아 창과 칼 쓰는 기술을 가르쳤다. 


그 뒤에 내가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자 이 일은 중단되었다. 다시 임금은 내 장계에 의해서 이를 비변사에 내려, 달리 도감을 설치하고 군사를 훈련하게 하여 윤두수로 하여금 이 일을 말아서 행하게 했다. 


그 해 9월에 나는 남쪽 있다가 불려 임금이 계신 곳으로 갔다가 행차를 해주에서 맞아 가지고 호종하여 서울에 돌아갔다. 


일행이 연안에 이르자 임금은 다시 그 일을 나에게 맡겼다. 


당시 서울에는 기근이 심했다. 


나는 용산 창고 속에 있는 중국 좁쌀 1천 석을 내다가, 하루 한 사람 앞에 두 되씩 나누어 주니 이것을 타려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도감 덩상 조경은 곡식이 적어서 고루 나누어 줄 수가 없다고 하여 이것을 조절하고자 했다. 커다란 돌 하나를 놓아두고, 곡식을 받으려 오는 자에게 먼저 이 돌을 들어 보라 해서 그들의 힘을 시험해 봤다. 또는 한 길이 넘는 담을 뛰어 넘으라 해서 뛰는 자에게는 이를 거절하니, 기근이 심해서 여기에 합격하는 자가 열에 하나둘 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도감 문 밖에는 곡식을 얻지 못해서 땅에 쓰러져 죽는 자까지 있었다. 


(253) 


머지않아 그는 힘센 사람 수천 명을 얻어 데리고 와서 초관에게 맡겨 그 속에 분류하여 배치하게 했다. 또 그들에게 조총을 가르치고자 했으나 화약이 없었다. 


때마침 군기시에 있는 공장 대풍손이란 자가 적진에 들어가서 화약을 구워 적에게 주었다고 해서 잡혀 와서 죽게 되었다. 


나는 특별히 그를 용서해 주고 그 대신 화약을 만들라 하고 시켰더니, 그는 몹시 감동하여 진력해 일을 해서 하루에 수십 개를 구워 냈다. 


이것을 날마다 각부에 나누어 주어 주야로 조총 쏘는 법을 조련시켜 잘하고 못하는 것을 보아 상벌을 분명히 했다. 한 달이 되자 이들은 나는 새도 쏘아 맞추고, 두어 달 뒤에는 항복받은 왜병이나 남방의 조총 잘 쏘는 자들과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었다. 





나는 다시 임금께 글을 올려 군량을 조치해 달라고 했다. 군사를 계속 모집해서 만 명이 되었다. 이것을 다섯 영으로 나누고 한 영에 2천 명씩으로 숫자를 정했다. 이들에게는 반년 동안은 성 안에서 교련을 받고 반년은 성 밖으로 나가 기름진 땅을 골라 농사를 짓게 했다. 


이렇게 교대하여 실시했더니 수년 뒤에는 군사와 식량의 근원이 두텁고, 굳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병조에서 이것을 실행하지 않아 결국 효험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심유경은 평양에 있을 대부터 적의 진중을 출입했으니 그 노고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적진을 출입한 것은 강화한다는 명분 때문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최후에 적은 부산에 머물러 있는 채 오랫동안 건너가지 않았다. 


이 책사가 도망해 돌아오자 중국에서는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 양사와 함께 왜국에 들어가게 했지만, 종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행장도 등은 바다 위에 돌아와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중국과 우리 사이에는 여러 가지 의논이 분분했다. 


모두 허물을 심유경에게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심한 사람은 심유경이 적과 함께 모반할 계획을 한다고까지 말했다. 


우리나라 중 송운이 서생포에 들어가서 청정을 만나봤다. 그리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적들은 중국을 범하고자 하여 그 말이 몹시 불공하니, 즉시 중국에 이 사실을 알리라는 거시었다. 이것을 듣고 사람들은 더욱 노했다. 


심유경은 화가 장차 자기 몸에 미칠 것을 알았다.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김명원에게 글을 보내어 일의 시말을 갖추어 변명했다. 


그의 글은 이러했다. 


[세월이 흘러 지난 일들이 어제와 같습니다. 생각하면 전에 왜적이 귀국을 침입해서 바로 평양에 다다랐으니 우리 안중에는 이미 팔도가 없었습니다. 이 늙은 몸이 명을 받고 왜인의 실정을 탐지하고자 서로 기회를 보아 족하와 이체찰과 더불어 시끄러운 속에서 서로 만나지 않았습니까. 평양 서쪽 일대를 목격하건대 거민들이 유리하고 조심해서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아 아침에 저녁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어찌 이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족하께서는 몸소 그 일을 겪어 보았으니 이 사람이 여러 말으 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내가 행장을 불러서 건복산에서 만났을 적에는 다시 서족으로 침입하지 않기로 약속했었습니다. 그런 뒤로 그들은 우리말을 들어 감히 어기지 못한 채 몇 달이 지나갔었지요. 그 뒤에 대병이 이르러 평양을 탈환한 게 아닙니까. 만일 ! 그때에 내가 나오지 않았던들 왜적은 조승훈의 파한 것을 승세하여 의주까지 왔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평양 한 도의 거민만이라도 그들의 화를 입지 않은 것은 역시 귀국의 큰 다행이 아닙니까. 이윽고 왜장 행장이 물러가 서울을 지키고 있을 때 수길은 삼정, 장성 등 장수 30명을 보내어 군사를 합하고 영책을 연해 험하고 요긴한 곳을 점거하고 있었으니, 이 견고함을 깨칠 수가 없었습니다. 벽제에서 싸운 뒤로 우리는 더욱 나가지 못하고 있었지요. 이때 귀국의 판서 이덕형이 개성에 와서 나를 만나보고 이렇게 말했지요.] 


[적세가 저렇듯 굉장한데 중국의 대병이 물러가면 서울을 수복시킬 가망이 없습니다. 그는 울면서 또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울은 나라 근본이 되는 곳입니다. 여러 도를 통솔하는 곳인데 지금 사세가 이렇게 되었으니 장차 어찌한단 말입니까.] 


이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갓 서울만 수복하고 한강 남쪽이 만일 없다면 여러 도의 사세를 유지할 수가 없지요. 덕형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서울만 수복하고 보면 한강 이남은 우리나라 군신이 자력으로 지탱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 말에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그대 나라를 위해서 한 번 해보지요. 서울을 도로 찾고 아울러 한강이남 제도까지 수복시켜 왕자와 대신들을 돌아오게 해서 나라를 온전하게 해보지요.]나의 이 말을 듣자 덕형은 또 울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더군요. 


[만일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 노야의 우리나라를 재조해 주신 공덕이 실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한강까지 내려갔던 것이 아닙니까. 


당시 왕자 임해군이 청정의 영에서 사람을 보내어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나를 돌아가게 해 준다면 한강 이남의 땅은 어디든지 요구대로 왜국에 떼어 줍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왜장과 맹세를 했지요. 


[왕자가 돌아오려 하거든 돌려보내고, 만일 돌아오려 하지 않거든 너희가 죽여도 좋다. 그 나머지는 말할게 없다.] 왕자는 귀국의 적군이라, 내 그가 소중한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이때를 당해서는 차라리 죽이라고 말할지언정 딴 조건을 승낙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 뒤에 그들은 부산에 이르자 물건을 주고 예의를 다하여 왕자의 환심을 사려 했소. 전에는 거만했지만 그때에는 몹시 공손해졌소. 


그러나 그때 다소 일이 있었던 것은 역시 부득이한 일이었소. 몇 마디 말을 남기고 왜적은 서울에서 물러갔습니다. 당시 연도에 흘린 양식은 이루 계산할 수가 없이 많았고, 한강이남 땅은 모조리 수복했습니다. 


왕자와 대신들은 모두 돌아왔고 왜병은 부산 바닷가에서 손을 맺고 3년 동안! 자기 나라의 명령을 기다렸을 뿐, 감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계속하여 봉공의 의논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까. 나는 당시 명을 받고 서울을 수습하려고 다시 족하와 이덕형과 만나서 말했던 것입니다. 


[지금 왜국을 봉해 준다면 그들이 퇴병해 갈 것이니 귀국의 뒷일을 위해서 그렇게 계획하는 것이 어떻소.] 그러나 덕형은 내 말을 이렇게 대답했지요. 


[우리의 앞길을 도모하는 것은 우리나라 군신의 책임이니 노야는 관계하지 마시오.] 


이 말을 듣고 보니 그에게는 큰 역량과 큰 식견이 있어 마치 커다란 주석처럼 보이더군요. 하지만 지금 와서 그 사실을 생각해 보면 문자오가 공업은 서로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군요. 내 이 판서를 위해서 애석히 여기는 바입니다. 


또 부산과 죽도의 모든 영책을 곧 철수시키지 못한 것은 나의 책임입니다. 


기장과 서생의 모든 곳에 있던 왜병은 모두 건너가고 영책을 다 불태웠으며 지방의 관운을 떼어 주어서 모두 좋은 사이를 맺었다고 합니다. 


청정은 이곳에 와서 한 번 싸우지도 않고 화살 하나 분지르지 않았는데, 지방 관원을 양보해 주었다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전에 이미 한강 남쪽은 자기들 스스로 지탱한다고 말하고서 지금 이렇게 다시 땅을 잃은 것은 무슨일입니까. 


또 그는 앞일을 계획하는 것은 자기 나라 책임이라 하더니 어찌큰 계획은 들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대궐 밑에서 우는 방법밖에 없었던가요. 


법에 말하기를, [강약은 서로 당할 수가 없고, 많은 것은 적은 자가 대적하지 못한다.] 


고 하였습니다. 나도 역시 귀국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당사자들이 다만 말하기를, 


[일이 늦추어지면 그 근본을 다스리고, 일이 급하면 그 끝을 다스린다.] 


고 말하고 군사를 조련하고 성을 쌓고 지킬것이거늘, 귀국의 당사자 여러분은 또한 이런 것을 생각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바다를 건너온 뒤로 내가 네 번이나 귀국의 국왕을 만나 봤는데, 피차를 문답한 말은 모두 가슴 속에 나왔고 시기에 맞는 것이라, 조그만 거짓이나 터럭만한 잘못도 없었습니다. 국왕의 마음이나 내 마음은 서로 거울같이 비쳤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말 생각하기를, 이 나라일이 이만하면 딴 근심은 없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의외에도 귀국의 모신이나 책사들은 여러 가지로 기지가 있고, 엉뚱한 생각을 하며, 또한 위태로운 말을 해서 우리 조정을 노엽게 했습니다. 


밖으로는 약한 군사를 가지고 일본과 틈을 만들고, 심지어 송운같은 사람은 예의 밖에 말을 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왜병이 먼저 가서 명나라를 치라는 등, 또는 조선 팔도를 쪼개 줄 것이고, 국왕이 친히 일본에 건너가서 항복한다는 등의 말을 했습니다. 


이러한 두어 마디 말은 국왕으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우리 조정을 격분하게 해서 군사를 내도록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 말대로 한다면 귀국은 모두 팔도밖에 없는데 이것을 일본에 주고 또 국왕이 친히 건너가서 항복한다면, 이는 귀국의 조사와 신민은 모두 일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두 왕자는 어떻게 하려는 것입니까. 나는 생각할 적에 삼척동자라도 이런 실언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청정이 제아무리 방자해도 역시 이렇듯 오만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또 한편 생각하면 우리 당당한 조정으로서 외방 번국들을 거느리고 있는 데에는 스스로 대체가 있어, 한편으로는 은헤를 베풀고, 한편으로는 위엄을 보이는 것이 또한 스스로 그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필경 수백년 동안 서로 전해 내려오던 속국을 제멋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약속도 이행치 않은 역적의 나라에 우리의 번리를 내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내가 지극히 모든 일을 잘 살피지 못하지만 내외 친소의 분별이나 역순, 향배의 인정에 이르러서는 누구나 또한 쉽게 아는 터인데, 하물며 천자의 칙명을 받들어 이 일을 주선하는 데는 성패와 휴척의 관계가 적지 않은 터에 어찌 감히 귀국의 일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생각을 하겠습니까. 


또 만일 일본의 방자함이 있으면 이것을 같이 숨기고 보고하지 않게습니까. 족하께서는 대체에 깊이 밝으시고 국사를 자세히 아시는 터이기로 이같이 글을 보내는 터이오니, 다행히 족하께서는 나의 본래 마음을 밝게 살피시어 이를 곧 국왕께 아뢸 것이며, 도한 모든 당사자들에게도 알려 그 내력을 대강이라도 밝히도록 하시옵소서. 이미 우리 조정을 받드는 것이 만전의 계책이라고 했으니, 마땅히 명령을 듣고 처분을 기다려 무량한 복이 있기를 기다리고 부질없이 지나친 계획을 하여 날로 수고롭기만 하고 날로 일을 그르치지 마소서. 간절히 부탁해 마지않습니다. 





이 글을 보면 그가 서울이 수복되기 전까지는 말이 조리에 맞으나, 부산으로 내려간 뒤 이야기는 쓸데없는 말을 해서 거짓을 적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공과 죄는 서로 섞을 수가 없다. 이 다음에라도 유경을 의논하는 자는 이런 생각으로 단안을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기록하는 바이다. 


심유경은 유세하는 선비다. 


평양 싸움 이후에 다시 적중에 들어갔으니 이는 사람의 여러운 바이다. 마침내 능히 입을 가지고 군사를 대신해서 여러 적병을 내쫓고 이 강산 수천 리를 수복시켰다. 그러나 끝에 가서 한 가지 일을 그르쳐서 큰 화를 면치 못했으니 슬픈 일이다. 


평행장은 유경을 크게 믿었었다. 그가 서울에 있을 적에 유경이 비밀히 행장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오랫동안 여기 머물러 있고 물러가지 않고 보면, 중국 조정에서 다시 대병을 내어 서해로 해서 건너올 것이다. 군사가 충청도로 들어와 너희들의 돌아갈 길을 끊는다면 그대는 비록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평양서부터 너와 정리가 친숙하기로 차마 이 내용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노라.] 이 말을 듣고 행장은 성을 내고 퇴병했다. 


이 일은 심유경이 스스로 우상 김명원에게 말했고, 김명원 또 내게 이같이 말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