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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태도서관, 정보의 밭. 씨앗/18. 3. 懲秘錄. 징비록. 서애 유성룡 지음.

16세기 영의정 서애 유성룡 씀. 징비록(懲秘錄) 1권.


자서 





징비록이란 무었인가? 임진왜란 뒤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에 간혹 난 이전의 일까지 섞여 있는 것은 난의 발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오호라, 생각하면 임진의 화야말로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십여 년 동안에 도읍(서울, 개성, 평양)이 함락되었고 온 나라가 무너졌다. 이로 인하여 임금은 마침내 파천까지 했다. 그리고도 오늘날이 있다는 것은 진정 하늘이 도운 게 아니라고 누가 말하겠는가. 


바꿔 생각하면 이것은 또한 조정의 어지신 은덕이 넓게 우리들 백성에게 미쳤던 것이기도 하다. 


백성의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은 그치지 않았고 또 임금의 사대하는 마음이 명나라 황제를 감동시켰다. 이래서 중국은 몇 번이나 구원의 군사를 내보냈던 것이니 만일 그렇지 않았으면 필경 나라가 위태로웠을 것이다. 


시경에 이런 말이 있다. 


'내 지나간 일을 징계하고 뒷 근심이 있을까 삼가노라.'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징비록'을 쓰는 연유라 하겠다. 


나같이 못난 몸이 당시의 국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감히 나라의 중한 책임을 맡아가지고 위태로움을 바로 잡지도 못했고 또 기울어지는 형세를 붙들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제 오히려 산 속에서 목숨을 붙여 성명을 보존하고 있으니 이 어찌 임금의 너그러우신 은덕이 아닐까보냐? 


걱정스럽던 일이 겨우 가라앉으매 지난 일을 생각해본다. 


새삼그럽고 황송하고 부끄러워 낯을 들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에 한가로운 틈을 타서 지난날에 내 귀로 듣고, 내 눈으로 본 것들 중에서 임진왜란으로부터 무술년에 이르기까지의 몇 가지 일을 기록한다. 또 장계.상소.차자와 문이잡록을 그 밑에 붙 사적들임에는 틀림없으므로 이 또한 허술히 여길 수는 업ㅄ는 것들이다. 


이제 전야에 숨어서 나라와 임금에 충성하는 생각으로,내가 과거 나라에 보답으로 못한 한없는 죄를 기록하는 바이다. 


제 1 권 





만력 병술년 (1598)에 일본 사신 귤강광이 왔다. 그는 자기 나라 임금 평수길('평'은 일본 천황이 호족에게 내린 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여기에 나오는 평수길의 원명은 풍신수길이다. 따라서 저자가 [평]을 성처럼 쓰고 있는 것은 [수길]을 호족으로 보아 이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 이하 [평]이 붙은 일본인의 경우도 이와 같다)의 글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온 것이다. 


원래 일본의 국왕 원씨는 홍무 처년(1368년 경)에 나라를 세워 우리나라와 이웃하여 사이 좋게 지낸지 2백 년이나 되었다. 


당시는 우리나라에서도 항상 사신을 보내어 경조하는 예도 잊지 않았다. 


그 증거로는 이런 일이 있다. 신숙주가 임금의 친서를 가지고 왕래한 사실이 그것이다. 


또 그가 뒷날 죽을 때 당시 임금 성종이 물었다. 숙주는 대답했다. 


'아무쪼록 앞으로 일본과 실화하지 마시옵소서.' 


성종도 이 말에 감동했다. 부제학 이 형원과 서 장관, 김흔을 보내어 화친하는 예를 닦게 했다. 성종도 할 수 없었다. 글과 폐백만을 대마도 도주에게 전하고 오도록 했다. 


이런 뒤로 다시는 사신을 보내지 못했다. 간혹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어 왔을 적에도 다만 예대로 대접해 돌려보낼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는 풍신수길이 왕이 되었다. 그래서 맨 먼저 우리에게 사신 귤강광을 보내온 것이다. 


수길이란 자는 일설에 의하면 원래 중국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는 왜국에 흘러들어가 나무 장사로 생업을 삼고 살았는데 어느 날 국왕이 길가에서 그의 얼굴을 보고 그가 범상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즉시 그를 불러다가 군사로 삼았다. 과연 수길은 용맹이 있고 잘 싸웠다. 여러 번 출전해서 공을 세워 자연 대관에까지 올라갔다. 그리하여 권력을 잡았다. 그는 마침내 원씨의 자리를 빼았아 국왕이 되었다고 한다. 


또 그러산 사실에 대해서는 이론도 있으니 원씨가 죽은 것은 딴 사람의 손에 죽었으며 수길은 원씨를 죽인 자를 죽이고 나라를 대신 차지했다. 고도 한다. 


그것은 어찌 되었던 간에 이때 수길은 일본국의 모든 성을 모조리 평정하고 나라 안 66주를 통틀어 하나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외국까지 침략할 야심을 갑기에 이르렀다. 


그는 우리 조정에 트집을 잡았다. 


'우리는 자주 사신을 보내는데 그대들은 한 번도 사신을 보내지 않고 있오. 이것은 필연 우리나라를 업신여기는 게 아닌가.‘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귤강광을 시켜 우리에게 통신하기를 요구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편지 내용은 몹시 거만했다. 그 글 속에는 '이제 천하는 모두 짐의 수중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때는 원씨가 망한 지 이미 10여 년이나 지난 뒤였다. 


그동안 여러 섬에 사는 왜인들은 해마다 우리나라에 왕래를 했다. 하지만 워낙 금령이 엄한 탓으로 그들의 내정은 누설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조정에서는 이런 일을 까맣게 알지 못했던 것이다. 


강광의 그때 나이는 대략 50여 세였다. 용모가 크고 수염과 머리털이 반백이 넘었다. 그는 지나는 역마다 좋은 곳이 아니면 거처하지 않았고 그 행동이 몹시 오만하여 전에 오던 왜사보다는 다른 점이 많은 까닭에 그를 보는 사람들이 자못 괴상하게 여겼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부터 왜사가 지방을 지날 때에는 그곳 백성들이 창을 가지고 길 좌우에 벌려 서서 군사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이때에도 역시 이같이 했다. 


강풍이 안동지방을 지낼 때다. 그는 이런 것을 보고 조소하는 빛으로 말하기를 '너희들이 들고 있는 창의 자루가 몹시 짧구나, 하면서 웃었다. 또 상주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목사 정응형이 잔치를 차려 강광을 대접했다. 그는 기생들과 악공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응형의 늙은 모습을 보고 통역을 시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전운 속에서 늙었기 때문에 이렇게 털이 희어졌소. 하지만 귀하는 기생들의 노래 속에서 걱정 없이 지내면서 왜 저렇게 머리가 세었소? 


이 풍자에서 우리를 모욕한 언사였다. 


강광이 서울에 도착하자 예조판서가 또 잔치를 베풀어 그를 대접했다. 그는 호초를 한 주먹 자리에 흐뜨렸다. 이것을 본 기생들과 악공들이 다투어 줍느라 좌석이 어수선했다.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강광은 동평관에 돌아오자 통역을 보고 '너희 나라가 망하겠구나. 기강이 이렇게 땅에 떨어졌으니 이러고서야 나라가 성할 수가 있겠느냐? 하고 조소하더라는 것이다. 


강광이 용무를 마치고 저의 나라도 돌아갈 때다. 우리 조정에서는 다만 글로만 이렇게 답장을 했다. '수로가 험하기로 사신을 보내지 못하노라.' 


강광은 이 말대로 회보했다. 수길은 회보를 받자 화를 발끈 내어 그 자리에서 강광은 죽이는 동시에 그의 가족까지도 멸했다고 전한다. 


본시 강광은 그의 형 강년과 함께 원씨 때부터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자주 왔던 터이므로 우리나라에서 직명까지 받았다. 그래서 제딴엔 우리나라을 위해서 두둔하는 말도 많았었기 때문에 마침내 수길에게 화를 입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수길은 강광을 죽인 뒤에 우리에게 평의지를 사신으로 보내고 우리에게도 사신을 보내달라고 청해왔다. 평의지란 자는 왜국 주병대장 평행장의 사위로 또한 수길의 심복 부하였다. 


원래 대마도 태수 종성장은 대대로 섬을 지키고 우리나라를 섬겨오던 터이다. 이때 수길이 종씨를 내쫓고 평의지에게 도무를 대신 주관하게 했다. 


우리나라에서 바닷길에 익숙지 못하여 사신을 보내지 못한다고 했더니 이 핑계를 막기 위하여 이렇게 말해온 것이다. 


'의지는 도주의 아들로서 매우 바닷길에 익숙하니 이 사람과 함께 왕래하도록 하시오.' 이렇게 말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거절할 구실이 없도록 만들었다. 또 이로 인하여 우리의 허실도 엿보려고 평조신과 중 현소 등을 같이 데리고 왔다. 


의지는 나이는 젊었으나 정력이 있어 보이고 성품이 사나운 까닭에 저희들 왜인끼리도 모두 두려워했다. 이 사람 앞에서는 엎디어 기어 다니다 싶이 했고 감히 얼굴을 바로 들어 쳐다보지도 못했다. 


사신으로 온 의지는 동평관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러고는 기어이 우리 사신과 함께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조정의 의논은 좀처럼 쉽게 결정되지 못했다. 


이보다 앞서 수년 전에 왜병이 전라도 손죽도를 침략하여 변장 이대원을 죽인 일이 있었다. 그때 포로로 잡힌 왜구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 변방에 사는 사을배동[업보,가만히 있는데 참략할리 없잖아]이란 자가 모반하여 우리나라로 도망해온 다음 우리들을 인도하여 조선을 침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조정에서는 이 말을 듣고 그들의 소행을 몹시 괘씸하게 여긴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터라 이때 관객을 시켜서 의지를 보고 넌지시 말해 봤다. 


'그 당시의 소위 반민들을 깨끗이 돌려보낸 뒤에 통신에 대한 일을 다시 의논하자.' 의지도 이말을 듣고 쾌이 승낙했다. '그야 무슨 어려울 게 있겠소.' 


그는 즉시 조신을 본국에 보내어 이대로 회보케 했다. 그 후 수개월 만에 그들은 과연 우리나라 백성 10여 명을 데려다 바치는 것이었다. 


이때 임금은 인정전에 거동하여 군사들의 위엄을 크게 떨쳐 보인 채 사을배동을 잡아들여 심문케 한 다음 성밖에 내다가 죽이게 했다. 


한편 의지에게는 상으로 내구마 한 필을 선사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왜사 일행을 인견하고 잔치를 베풀어 주도록 했다. 듸지, 현소 등은 모두 대궐 안에 들어와서 차례로 임금께 술잔을 올렸다. 


나는 그때 예조판서로서 그 자리에서 왜사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통신사에 대한 의논은 결정되지 않았다. 그런 뒤 나는 대제학이 되어 국서를 쓰게 되었다. 


나는 임금께 글을 올려 '이 일을 빨리 결정하시고 아무쪼록 양 국간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그 이튿날 조회 때에 지사 변협 등도 임금께 아뢰었다. 


'사신을 보내어 회답하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이 계제에 그들의 동정도 살피고 오는 것이 실계될 것은 없을까 하나이다.' 이때 비로소 조정의 의논이 결정되었다. 


조정에서는 사신으로 보낼 사람을 뽑게 되었다. 대신들이 첨지 황윤길과 사성 김성일로 각각 상사와 부사를 삼고 전적 허성으로 서장관을 삼았다. 


이리하여 경인년(1590)3월에 왜사 의지와 함께 일본을 향해 떠났다. 


의지가 돌아갈 적에 공작 두 마리와 조총, 창, 칼 등을 우리 임금께 바쳤다. 그러나 임금은 공작은 남양의 해도로 날려 보내게 하고 조총은 군기사에 두게 했다. 우리나라에 조총이 들어오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신묘년(1591) 봄, 통신사로 갔던 황윤길, 김성일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이때 왜인 평조신과 현소도 같이 따라 왔다. 


그 전 해 4월 29일 윤길 등이 사신으로 떠날 적 일이다. 부산포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에 이르러 한 달 동안에 체류했다. 거기서 다시 수로로 40여리를 가서 일기도를 거쳐 바다주 장문주 낭고야를 지나서 7월 22일에야 비로소 그들의 국도에 이르렀다. 


이것은 왜인들이 일부러 길을 돌고 또 곳곳에서 필요 이상으로 체류했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 달이 걸린 것이었다. 


대마도에 머물러 있을 때의 일이다. 평의지는 우리 사신들을 절로 청해다가 잔치를 베풀어 대접한 일이 있었다. 이때 딴 손들은 벌써부터 자리에 와서 앉아 있었다. 주인격인 평의지는 늦게서야 교자를 타고 오더니 뜰 밑에 와서야 교자에서 내리는 것이다. 


이것을 본 김성일은 화를 버럭 냈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의 번신이오. 우리가 이제 왕명을 받고 여기 왔는데 어찌 이토록 업신여긴단 말이오. 나는 이 대접을 받을 수가 없소,' 성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허성도 함께 뒤따라서 나와 버렸다. 


당황한 의지는 자기의 허물을 교군에게 뒤집어 씌어 그를 내다 죽이게 했다. 그러고는 교군의 머리를 가지고 와서 사과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는 왜인들이 성일을 몹시 두려워했다. 의지는 모든 것을 예법대로 대접하고 먼빛으로 라도 성일을 보기만 하면 말에서 내리곤 했다. 


그러나 이때 수길은 마침 동산도에 출전한 참이라 수개월이나 기다린 뒤에야 돌아왔다. 또 수길이 돌아온 뒤에도 저희들의 궁실을 수리한다는 구실로 즉시 국서를 받지 않았다. 이래저래 전후 다섯 달 동안 머물러 있다가 겨우 국명을 전하게 된 것이다. 


이 나라는 천황이 따로 있어 그를 높이고 수길까지도 신하로서 그를 섬기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나라 안에서는 수길을 왕이라 부르지 않고 다만 관백이라고만 불렀다, 또 혹은 박륙후라고도 했다. 소위 관백이란 칭호의 내력은 이러하다. 


옛날 곽광의 '모든 일은 곽광에게 관백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만 말을 따서 지은 칭호다. 당시 그들이 우리 사신을 대접하는 것을 보면 이러했다 한다. 사신 등이 교다를 타고 둘중에 들어가도록 허락했고 가각을 불어 길을 인도하게 했으며 당에 올라와서 예를 행하게 했다. 


수길은 얼굴 모양이 못생기고 빛이 거무스름했다. 보통 사람과 아무런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오직 눈썹 속에 샛별 같이 빛나는 안광만은 사람을 뚫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한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를 보면 삼중석을 만들어 남쪽을 향해 앉았으며 사모를 머리에 얹고 검은 도포를 입었다. 그 옆에는 신하 몇 사람이 벌려 앉았다가 우리 사신들을 안내하여 자리를 정해준다. 


좌중에는 아무런 연구도 준비되어 있지 않고 다만 방 가운데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다 떡 한 그릇을 놓고 항아리에서 술을 따랐는데 그나마도 탁주였다. 이것은 도저히 남의 나라 사신을 대접하는 범절이 아니다. 그것도 겨우 두어 순배에 지나지 않아 파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 절하는 것이다 읍하는 것으로 인사 절차를 밟으려 하지 않았다. 


수길은 자기 자리에 잠시 앉아다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 보통이었다. 이러 때는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조금 있다가 한 사람이 편복을 입은 채로 어린애 하나를 안고 나와서 마루 안을 돌아다녔다. 


자세히 쳐다보니 이가 곧 수기이었다. 이것을 보고서도 좌중 사람들은 그대로만 앉아서 부복할 뿐이었다. 이윽고 수길은 난간에 의지해 앉더니 우리나라 악공을 시켜서 여러 가지 음악을 들었다. 


이때 자기가 안고 있던 어린애가 오줌을 쌌다면서 웃고 나서 심부름꾼을 불렀다. 계집 심부름꾼이 옷을 갈아입히는데 보니 그들의 하는 꼴이란 제멋대로여서 아주 방약무인하였다. 


사신이 사퇴하고 물러나오자 그 뒤로는 다시 수길을 만나 볼 수 없었다. 다만 상사, 부사에게는 400냥을 주면서 서장관, 통역이하 각각 차등 있게 나누어 주게 할 뿐이었다. 


우리 사신들이 장차 돌아오려 다지 그는 삽서도 써주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내려 했다. 이것을 보고 성일은 '우리는 사신이 되어서 국서를 가지고 왔소. 만일 우리가 답서를 받아 가지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는 마치 허수아비에게 명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하고 따지려 했다. 


그러나 윤길은 그들이 자기들을 붙들어 둘까 겁이 나서 그대로 떠나 국계 해변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지 얼마 뒤에야 답서가 왔다. 한데 글 내용이 너무나 거만해서 우리가 바라던 바와 많이 어긋났다. 성일은 이 글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여러 번 글을 고쳐 왔기에 사신들은 미흡한 대로 받아 가지고 길을 떠났다. 일행이 지나는 곳마다 왜인들은 여러 가지 물건을 선사했다. 그러나 성일은 그것을 모조리 퇴각 시켰다. 


윤길은 부산에 도착하자 우선 글을 올려 자기들의 겪은바 정세를 보고하고 나서 반드시 머지않아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고했다. 


임금께 복명하는 자리에서 윤길은 먼저 보고와 같았으나 성일은 이와 반대였다. 성일은 '신은 그런 기미는 보지 못했습니다.' 하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또 계속하여 성일은 말했다. '윤길은 공연히 인심을 동요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윤길의 말을 옳게 여기는 쪽과 성일의 말을 옳게 여기는 쪽으로 의견이 두 갈래로 갈렸다. 나는 성일 보고 말했다. '그대 의견이 황사와 전혀 다르니 앞날에 만일 병화가 있다면 어떻게 하려오?' 이에 성일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 역시 왜국이 끝내 동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오. 하지만 윤길의 말이 하도 과격해서 안팎 인심이 동요되겠기에 인심을 진정시키고자 일부러 한 말이오.' 그때 사신들이 가지고 온 왜서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를 쳐들어가겠다.' 


이것을 보고 나는 말했다. 


'이것은 마땅히 이 사실대로 명나라에 알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상은 반대했다. 


'그러다가 명나라에서 만일 우리가 왜국과 사통했다고 책망하면 어찌하겠소? 차라리 그대로 숨겨두는 것이 좋을 듯하오.' 


나는 다시 말했다. 


'일이 있어서 이웃나라에 왕래하는 것이야 국가로서 없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성화 연간에는 일본도 우리나라를 통해서 중국에 조공하기를 청한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 때도 사실대로 명나라에 알려서 그 곳에서 칙서를 내려서 회유한 일이 있을 터이니 이것은 또한 비단 오늘에만 있는 일이 아니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 터입니다. 지금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숨기고 알리지 않는다면 이는 대의에도 어그러질 뿐 아니라 또 더욱이 적들이 우리를 모략하기 위해서 이 말을 딴 길로 전파시켜 명나라 조정으로 들여보낸다면 그때에는 도리어 우리가 그들과 공모해서 숨긴 것으로 의심받기 쉽지요. 이렇게 되고보면 죄가 더 크지 않겠습니까?' 


조정에서도 이 말을 옳게 여겨 결국 김응남 등을 시켜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게 되었다. 당시 복건 지방사람 허의후, 진신 등이 왜국에 잡혀와 있었다. 그들은 왜국의 이러한 내정을 비밀히 자기 나라에 보고했다. 또 유구국 세자 상녕도 연해 사신을 보내 소식을 명나라에 통했다. 


그러나 유독 우리나라만이 아무런 기별이 없었던 것이다. 명나라에서는 우리가 왜적과 함께 이심을 품지나 않았는가 싶어 이 일로 의논이 분분한 판이었다. 


이때 각로 허국은 전에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온 일이 있는 터라 분명히 주장했다.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조선은 진심으로 우리나라를 섬기고 있는 나라입니다. 왜국과 함께 모반한다는 말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요. 좀더 자세한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이렇게 우리를 두둔해오던 끝에 얼마되지 않아 응남이 도착하고 보니 모든 의심이 일소되었다. 그런 뒤로 우리조정에서는 왜국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변방 사정에 밝은 사람을 뽑아서 남쪽 삼도를 방비하게 했다. 


경상 감사에는 김수, 전라 감사에는 이광, 충청 감사에는 윤선각을 보내어 병기를 준비하고 성지를 수축케 했다. 그중에도 경상도에는 가장 많은 성을 쌓고 영천, 청도, 삼가.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 등지에는 병영까지 신축 또는 증수케 했다. 


이때 국가는 오랫동안 승평한 세월이 흐를 때다. 안팎이 모두 편하게 사니 백성들은 자연 노역을 꺼려서 원망하는 소리가 자자했다. 이것을 본 나와 동년배인 합천 사람 이노가 내게 글을 보냈다. 


'지금 태평한 세상에 성을 쌓다니 당치도 않은 일이오.' 그는 정부가 하는 일을 이렇게 또 비평하기도 했다. 


'삼가 앞에는 정진 나루가 가로막고 있는데 왜적이 어찌 뛰어넘는단 말이오, 그런데 왜 함부로 성을 쌓아 백성들을 괴롭힌단 말이오." 


대체 큰 바다를 가지고서도 왜병을 막아내지 못했는데 이까짓 한 줄기 냇물을 가지고 무얼 한단 말인가. 그 사람의 의견도 또한 잘못된 일이었다. 당시 사람들의 의논은 모두 이와 같았고 홍문관에서도 글을 올려 이렇게 의논했던 것이다. 


한편 경상, 전라, 양 남도에 쌓은 성도 모두 올바른 형태를 갖추지는 못했고 쓸데없이 규모가 크기만 했다. 특히 진주성 같은 것은 본래 험한 산을 의지해서 세웠기 때문에 지킬만 했던 것인데 이제 와서 너무 작다고 하여 동쪽 평지로 옮겨서 크게만 쌓았다. 


그래서 그 뒤에 적들이 침입해 왔을 때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졌던 것이다. 


대체 성이란 작더라도 견고한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인데 이와 반대로 크게만 만들어 놓았으니 이는 모두 시론이 그렇게 시끄러웠던 때문이다. 


또 군정의 근본이라든가 장수를 뽑아 쓰는 요령, 또는 군사를 조려하는 방법 같은 것은 한 가지도 연구하지 않았던 까닭에 전쟁은 자연 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정읍 현감으로 있는 이순신을 불러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삼았다. 


순신은 어려서부터 담략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유난히 능숙한 사람이다. 


전에 조산만호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북쪽 변방에 일이 많은 것을 보고 계책을 세워 모반한 오랑캐 우을기내를 꾀어내다가 결박지어 병영으로 보낸 다음에 죽였다. 그런 뒤로부터는 북쪽 오랑캐의 근심이 저절로 없어졌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순찰사로 있던 정언신이 순신으로 하여금 녹둔도의 둔전을 지키도록 했다. 어느 날 안개가 자욱하게 낀 속에 이편 군사들은 모두 나가서 곡식을 거두고 있었다. 영책에는 겨우 수십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 졸지에 적의 기병들이 무수히 쳐들어왔다. 이에 순신은 급히 영책문을 막고 유엽전을 쏘아서 적 수십 명을 맞추어 말에서 떨어뜨리니 적들은 놀라서 모두 도망해 버렸다. 


이것을 본 순신은 영책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혼자서 말에 올라 크게 소리치며 쫓아갔다. 적들은 어찌 할 줄을 몰라 군기를 모두 땅에 버리고 어지러히 흩어지니 이 싸움에서 약탈당했던 물건들을 모두 되찾았다. 


순신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 숨은 공이 많았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아무도 그를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과거에 급제한 지 10여 년이 되어 겨우 정읍 현감이 되어 있었다. 


이즈음 왜인의 교만스러운 태도는 날로 극성스러워만 갔다. 임금은 비변사에 명하여 제각기 장수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하였다. 


이때 내가 순신을 천거해서 비로서 수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본 사람들은 순신이 갑자기 승진한 것을 의심하는 이도 더러 있었다. 


당시 조정에 있는 무장 중에는 신립과 이일이 가장 이름이 있고 경상 우병사 조대건은 나이도 늙고 용맹함도 없었으며 게다가 인망까지도 좋지 않았다. 


나는 경연에서 주장했다. 


'이일과 조대건을 바꾸십시오.' 


그러나 병조판서 홍여순이 반대했다. 


'명장은 서울에 두어야 하오. 이일을 경상도에 보내선 안되오.' 


나는 다시 말했다. 


'매사에 예비한다는 것은 상당히 소중한 일이오. 더구나 군사를 다스려 적을 막는데 있어서 어찌 소홀히 일을 처리한단 말이오. 일조에 일이 있고 보면 이일을 보내야 할 판인데 이왕 내보낼 바에야 일찍 보내어 예비 시켰다가 불의의 변을 막도록 하는 것이 유리하지 않겠소. 만일 창졸간에 아무나 내보낸다면 이는 그 지방 지리에도 밝지 못할 뿐 아니라 군사들의 실력조차 알지 못할 것이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적을 대적해 낸단 말이오. 이는 병가의 법으로 보아 매우 꺼리는 것으로서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훗일에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오.' 


나는 간곡히 주장했다. 그러나 임금은 아무런 결정도 짓지 못했다. 나는 또 비변사와 그 밖의 사람들과 의논하고 대대로 내려오던 진관의 법을 소홀히 하지 말도록 글을 올렸다. 


그 대략을 추려보면 이러했다. 


'국초에 각 도의 군병은 모두 진관에 분속되어서 무슨 일이 있는 날에는 진관이 속읍을 통솔토록 했습니다. 또 이것이 차츰 물고기의 비늘처럼 정돈되어서 주장의 명령을 기다리게 되어 있는 터입니다. 경상도로 말하자면, 김해, 대구, 상주, 경주, 안동, 진주 등 여섯 진으로 되어 있어 적병이 쳐들어와 한 진의 군사가 혹시 패하는 일이 있더라도 딴 진이 굳게 지킴으로써 한꺼번에 모두 허물어지는 폐단이 없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는 도내의 여러 읍을 쪼개어 이를 모두 순변사, 방어사, 조방장, 도원수 및 본도의 병사, 수사에 예속시켰습니다. 


이것은 바로 제승방략이라는 것입니다. 이 법을 여러 도에서 본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지관이란 이름뿐이요, 실상 서로 연락도 되지 않습니다. 장수 없는 군사들만 들판 가운데 모여 있게 됩니다. 천리 밖에서 장수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때맞추어 장수는 오지 않고 날카로운 적군이 몰려들 게 되면 군대의 사기는 어지럽고 싸움은 반드시 패하게 마련입니다. 이리하여 대군이 한 번 무너진 다음에는 장수가 온다 하더라도 때는 이미 늦을 것입니다. 누구를 데리고 전쟁을 하겠습니까? 바라옵건데 진관 제도는 대대로 내려온 법이니 다시 거쳐서 평시에는 훈련하기에 쉽고 일이 있을 때에는 모이도록 하며 또 앞뒤가 서로 상응하고 안팎이 서로 의지하여 일시에 무너지고 흩어지는 폐단이 없도록 하시옵소서.' 


이 일을 본도에 내렸다. 그러나 경상 삼사 김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제승방략은 써온 지가 벌써 오래여서 졸지에 고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의 이 건의는 결국 쓰이지 못하고 말았다. 





임진년 봄의 일이다. 


신입, 이일을 각각 보내어 변방을 순회하게 했다. 이때 일은 충청, 전라도로 가고 입은 경기, 황해도로 갔다. 그들은 한 달 뒤에 돌아왔다. 


그들이 조사한 것이란 겨우 활, 화살, 창, 칼 같은 것뿐이었다. 군이나 읍내에서는 문서상으로만 법에 저촉되지 않게 갖췄고 달리 방비하는 좋은 방책은 없었다. 


입은 본시부터 성질이 잔인하고 사납다는 소문이 있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자기의 위엄만 세우려 하니 수령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그래서 백성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고 또 매우 융숭히 대접하니 대신들의 행차보다도 더욱 극진한 바 있었다. 


이들은 4월 초하루 서울로 돌아와 복명했다. 이때 신입은 사저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를 보고 물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머지않아 변이 있을 듯싶소. 그때에는 그대가 군사 일을 말아봐야 할 텐데 오늘날 적의 형세를 보아 넉넉히 막아낼 자신이 있으시오?' 


그러난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까짓 것쯤 걱정할 게 없소이다.' 


나는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않지요. 전에는 왜병이 다만 짧은 병기만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와서는 조총이 있는데 어떻게 만만히 볼 수가 있단 말이오.' 


그러나 신입은 종시 태연한 말씨다. 


'왜병들이 조총은 가졌지만 그게 쓸 적마다 맞는답디까?' 


'나라가 오랫동안 아무 일도 없을 때는 사졸들이 모두 겁약한 법이오. 그러다가 일조에 변이 생기고 보면 이것을 감당하기가 몹시 어려운 법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몇 해 뒤에는 우리 군사도 모두 병기에도 익숙해져서 난을 수습할 수도 있을 것이오. 하지만 지금 같아서는 매우 걱정이 되는 바올시다.' 


그러나 신립은 내내 내 말을 옳게 여기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입이 계미년(1583년)에 온성 부사로 있을 적의 일이었다. 


오랑캐들이 모반해서 종성을 포위했다. 신입은 구원하기 위해 급히 가서 부하 십여 기만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오랑캐를 무찔렀다. 


이것을 보고 조정에서는 신입은 대장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고 했다. 이내 북병사, 평안병사로 올려 썼다. 얼마 되지 않아 품계가 자헌대부에까지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는 의기 날카로워서 마치 옛날 조나라 조괄이 철없이 강한 진나라를 업신여기던 것과 같았다. 아무 일에나 겁내는 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식자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그를 근심했다. 


경상 우병사 조대곤의 자리를 임금의 특지로서 승지 김성일로 바꾸도록 하였다. 그러나 비변사가 이의를 제기했다. 


'성일은 유신입니다. 이런 시절에 변방을 지킬 장수감이 아니옵니다.' 


그러나 임금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성일은 임금께 하직하고 임지로 떠났다. 





4월 13일에 왜병이 국경을 침범해서 부산포가 함락되고 첨사 정발이 죽었다. 


이보다 앞서 왜국 평조신, 중 현소 등이 우리 통신사와 함께 와서 동평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비변사에서는 황윤길, 김성일로 하여금 그들을 청해다가 사사로이 술자리을 베풀어 놀면서 조용히 저들의 내정을 살펴 방비할 계책을 마련하자 하니 임금도 이를 옳게 여겨 허락했다. 


성일이 그들을 만나 여러 가지로 수작해 보았다. 현소가 가만히 말했다. 


'명나라가 오랫동안 일본과 국교를 끊고 지내서 조공이 없어졌소. 평수길이 이것을 내심으로 몹시 분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제 필시 전쟁을 일으킬 눈치인 것 같소. 


조선에서는 이 일을 미리 명나라에 알려 조공만 하도록 해주면 이 땅에는 별 일이 없을 것이며 일본 66주의 백성들도 전쟁을 해야 할 수고를 덜 게 될 것이오.' 


이 말을 듣고 성일 등은 대의로 책망도 해보고 한편 달래기도 해보았다. 그러나 현소는 이렇게 말하는 거이었다. 


'옛적에 고려가 원나라 군사를 인도해서 우리 일본을 친 일이 있었소. 우리가 지금 이 일로 해서 그때 원수를 갚으려 하는데 무엇이 그르단 말이오.' 


그의 말투가 점점 무례해졌다. 


우리는 이것을 본 뒤로는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조신, 현소 등은 돌아가고 신묘년(1591년)에 또다시 평의지가 부산포에 왔다. 


그는 우리 변장을 보고 위협조로 말했다. 


'지금 일본이 명나라와 통신하려 하고 있소. 당신 나라에서 이 말을 전해준다면 아무 일도 없으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두 나라 사이에 화기를 잃게 될 것이오. 이 어찌 큰일이 아니겠소. 우리가 일부러 와서 알리는 것이니 알아서 하시오.' 


변장은 이대로 위에 보고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우리 통신사만 꾸짖고 또한 그들의 오만무례한 것만 탓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답하지도 않고 있었다. 


의지는 10여 일 동안이나 배에 머물러 있다가 좋지 않은 낮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뒤로 왜인은 다시 오지 않았다. 


부산포에 머물러 있던 왜인 수십 명도 하나씩 자취를 감추어 마침내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것을 우리는 매우 이상하게 보았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날(임진년 4월13일)에 와서 졸지에 몰려든 것이다. 왜선이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어오니 바라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이때 부산 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로 사냥을 나갔었다가 갑자기 이 말은 듣고 허둥지둥 성으로 돌아왔다. 왜병은 벌써 상륙해서 사면으로 몰려들었다. 삽시간에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것을 본 좌수사 박홍은 적의 세력이 너무나 큰 것을 보고 감히 나가 싸우지도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왜군은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 다대포를 연달아 쳐서 함락시켰다. 이때 다대포 첨사 윤흥신은 힘껏 싸우다가 적에게 죽었다. 


좌병사 이각은 이 소식을 듣고 병영을 떠나 동래로 들어갔다. 그때는 벌써 부산이 함락된 뒤라 각은 어쩔 줄을 모르고 다른 군사들과 적을 협격할 것을 핑계 삼아 성밖에 나가 소산역으로 퇴진했다. 


한편 부사 송상현은 이각에게 자기와 함께 성을 지키자고 말했다. 그러나 각은 듣지 않았다. 





15일에 이르러 왜병은 동래로 들어왔다. 


송상현은 성 남문에 올라가 반나절이나 힘껏 전투를 지휘했으나 성은 함락되었다. 그러나 상현은 앉은 채로 꿋꿋이 버티면서 왜병의 칼에 맞아죽었다. 이에 왜병도 그의 사수를 장하게 여겨 시체를 관에 넣어 성밖에 묻고 말뚝을 세워 표해주었다. 


이로부터 각 고을 모두 보잘 것 없 무너지기 시작했다. 


밀양 부사 박진은 동래로부터 급히 돌아와서 작원의 좁은 길을 막아 대항하려했다. 그러나 적은 양산을 함락하고 작원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작원의 길목을 지키는 군사가 있은 것을 보고 산 뒤에 높은 곳으로 올라간 다음 넓게 흩어져서 개미떼처럼 쳐내려왔다. 


우리군사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이에 박진은 밀양으로 다시 달려갔다. 그는 병기와 창고를 불사르고 성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다. 


이각은 그 뒤에 병영으로 돌아와 먼저 자기 첩부터 성밖으로 피난시키니 성안 인심은 한층 더 흉흉해 갔다. 군사들은 공연히 놀라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각은 마침내 새벽을 틈타 몸을 빼어 도망했다. 이것을 본 군사들은 제각기 흩어지고 말았다. 


이때 적은 길을 나누어 계속하여 여러 고을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이편에서는 한 사람도 나가서 이것을 막지 못했다. 


김해 부사 서예원은 성문을 닫고 지키고 있었다. 적들은 성밖에 있는 보리를 베어다가 성 높이와 같게 쌓아 놓고서 쳐들어왔다. 초래 군수 이모는 이것을 보고 먼저 도망해 버렸다. 예원도 그 뒤를 따라 도망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성은 이내 함락되고 말았다. 


순찰사 김수는 진주에 있다가 처음으로 이러한 왜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동래로 급히 달려가는 길에 중로에서 적이 가까이 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오던 길로 하여 우도로 도망했으나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생각다 못해 여러 고을에 격문을 띠웠다. 백성들에게 적을 피하라고 하는 격문이었다. 이로 인해서 도 내가 텅 비게 되고 보니 더구나 어쩔 수가 없었다. 


용궁 현감 우복룡은 그 고을에 있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병영으로 가는 길이었다. 도중, 영천 길가에서 밥을 지어 먹고 있었다. 때마침 하양 군사 수백 명이 방어사에 예속되어 북쪽으로 가는 길에 그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 군사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이것을 본 복룡은 괘씸히 여겨 붙잡고 꾸짖었다. 


'너희들은 반란을 일으키는 군사로구나.' 


하양 군사들은 병사의 공문을 내보이며 변명했다. 하지만 복룡은 종시 듣지 않았다. 


자기 군사를 시켜 그들을 포위하고 모두 쳐 죽여 시체가 들에 가득했다. 


그러나 순찰사는 도리어 우복룡에게 공이 있다고 했다. 통정대부로 승급시키고 다시 정희적을 대신해서 안동 부사에 임명했다. 


그런 뒤로 하양 군사들의 가족인 고아, 과부들은 사신을 만나기만 하면 말머리를 가로막고 울면서 원통한 사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복룡은 그때 벌써 소문이 자자하던 터라 아무도 그들을 위해서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17일 이른 아침. 


변장의 급보가 겨우 조정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좌수사 박홍의 장계였다. 이때 대신들과 비변사는 빈처에 모여서 임금을 뵙자고 청했다. 그러나 허락이 없었다. 


다시 글을 올려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중로로 내려 보냈고 성웅길은 좌방어사로 삼아서 좌도로 내려 보냈다. 조경을 우방어사로 삼아서 서로로 내려 보냈고 유극량을 조방장으로 삼아서 죽령을 지키게 했다. 변기도 역시 조방장을 삼아 조령을 지키게 했다. 


한편 경주 부윤 윤인함은 유신으로서 유약하고 겁이 많다 하여 전에 강계 부사로 있던 변응성을 내려 보내어 대신하게 했다. 


그들에게는 모두 군관을 가려서 데리고 가도록 영을 내렸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왔다. 당시 부산은 적에게 포위된 채 사람이 통행도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높은 데 올라가 바라보니 붉은 깃발이 성안에 가득하옵니다.' 이 장계로 해서 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 것이다. 


'이때 이일은 서울에 있는 정병3백 명을 거느리고 가고자 했다. 병조에서 뽑았다는 군사들은 모두 민가나 시정에 있는 사람들 또는 서리와 유생들이 태반이었다. 


군사를 점검하면서 보니 유생들은 관복에 책을 옆에 끼고 있었고 서리들도 모두 평정건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군사로 뽑히기를 꺼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만 뜰에 가득히 모집 해다 세웠으니 데리고 갈만한 군사라곤 하나도 없었다. 이일은 조정의 명령을 받고서도 3일이나 지나도록 떠나지 못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서는 할 수 없이 이일을 혼자 먼저 가게 했다. 별장 유옥을 시켜서 군사를 데리고 뒤 따라 가도록 했다. 


이때 나는 장계를 올려 말했다. 


'병조판서 홍여순에게는 그 책임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또 군사들도 그를 바꾸어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여 김응남을 병조판서로 삼고 심충겸을 병조참판으로 삼았다. 


대간이 또 청했다. 


'대신을 체찰사로 삼아서 여러 장수들을 검독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 의논도 받아들였다. 


수상은 이 책임을 나더러 맡으라 했다. 나는 이 일을 승낙하고 다시 임금께 아뢰어 김응남을 부사로 삼도록 했다. 


전에 의주 목사로 있던 김여물은 무략이 있는 사람이다. 이때 그는 남의 일에 연좌되어 옥에 갇혀 있었으므로 나는 임금께 아뢰어 그의 죄를 용서하여 나를 따라가게 해주기를 청했다. 


이리하여 무사 중에서 이 밖에도 비장이 될 만한 사람 80여 명을 모집했다. 


이즈음 급보가 연달아 올라왔다. 적의 날쌘 군사는 밀양의 큰 재를 넘어 머지않아 조령에 가까워지리라는 소식이었다. 


나는 김응남, 신입을 보고 말했다. 


'적들이 저렇듯이 급하게 쳐들어오니 급하지 않소?'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오.' 


신입이 대답했다. 


이일이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 앞에 나가 있는데 뒤에서 응원 부대가 없으니 딱한 일이오. 이제 체찰사(유성룡을 말함)께서 내려가시기는 하지만 이는 싸우는 장수와는 다릅니다. 차라리 딴 장수를 뽑아 먼저 빨리 내려 보내어 일을 후원토록 하는 게 나을 것 같소이다.' 


이렇게 신입이 서두르는 폼이 금시에라도 자기가 손수 떠나고자 하는 눈치였다. 


이에 나는 김응남과 함께 들어가 임금을 뵙고 이러한 사실은 모두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직접 신입을 불러서 물어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신입을 도순변사로 삼았다. 신입은 궐문 밖으로 나가 몸소 다니면서 같이 갈 사람을 구하는 것이었다. 


하나 무사들 중에 가고자 하는 자가 한 사람도 나서지 않았다. 


때마침 나는 중추부에서 떠날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입이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거기에는 내가 모집한 군사가 뜰 앞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얼굴에 불만스런 빛을 감추지 못했다. 신입이 김응남과 나를 번갈이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런 분을 대감이 데리고 가서 무엇에 쓰겠습니까? 소인이 부사가 되어 가고 싶습니다.' 


분명한 부평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노여움이 딴 것이 아니라 무사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야 다 같은 나라 일이 나니오. 이것저것 따질 게 무어 있겠소. 이제 공이 급히 먼저 가시니 우선 내가 모아 놓은 군관들을 데리고 떠나시오. 나는 뒤에 따로 모집해가지고 천천히 가겠소이다.' 


나는 군관들의 이름을 쓴 단자를 그에게 내주었다. 신입은 그제야 뜰 앞에 모여 있는 무사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리로들 오게.' 


그가 앞에 서서 나가니 여러 사람들은 멀거니 쳐다보면서 따라갔다. 


그들 중에는 김여물도 섞여 있었다. 그는 속으로 좋지 않게 생각했다. 신입이 떠날 무렵 임금은 그를 불러 보셨다. 임금은 보검을 주면서 말했다. 


'이일 이하 그 밑의 사람으로서 그대의 영을 거스르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베이게 하라.' 


신입은 명령을 받고 물러나왔다. 다시 빈청으로 대신들을 찾으려고 막 뜰을 내려설 무렵이었다. 머리에 썼던 사모가 갑자기 땅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옆에서 보던 사람들까지 모두 실색했다. 


시입은 길을 떠나 용인에 다다르자 우선 임금께 글을 올렸다. 한데 그 글에 자기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은 혹 그의 맘속에 딴 생각이 있지나 않은가 하고 의심하는 이까지 있었다. 


경상 우병사 김성일을 잡아서 옥에 가두라 하였다가 그러기 전에 그를 불러서 초유사를 삼았다. 그 대신 함안군수 유승인을 병사로 삼았다. 성일이 처음으로 전지로 가는 길이었다. 상주에 다다르자 벌써 적들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주야고 본영을 향해 돌아오다가 중간에서 조대곤을 만나 인장과 부절을 주었다. 


이때 적은 벌써 김해를 함락시키고 우도 여러 고을을 노략질했다. 


성일이 마침 앞으로 나가다가 적들을 만난 것이다. 성일의 휘하 장수들은 적을 보고 말에서 내려 큰 책상 위에 올라섰다. 그는 꼼짝도 않고 군관 이종인을 불렀다. 


'너는 용사가 아닌가? 적을 보고서 달아나다니 어찌 남아의 일인가?' 


하고 성일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럴 즈음 쇠로 만든 탈을 쓴 왜적 하나가 칼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종인이 이를 보자 말을 놓아 달려 나가며 활을 당겨 한 번 쏘니 적은 한 살에 맞아 땅에 쓰러졌다. 모든 적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하나도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성일은 흩어진 군사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또 여러 고을에 격문을 띄워 수습할 방책을 세웠다. 그러나 임금은 성일이 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왔을 때 적이 쉽게 올 것 같지 않다고 주장해서 인신을 해이하게 하고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해서 의금부 도사에 명하여 잡아오게 했던 것이다. 


 일은 장차 크게 벌어질 뻔했다. 감사 김수는 성일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길에 나가서 작별했다. 그러나 성일은 얼굴에 강개한 빛을 띨 뿐 한 마디도 자기 집 일을 부탁하지 않았다 . 성일은 다만 김수를 권면할 뿐이었다. 


'되도록 직력해서 적을 물리치시오.' 


이것을 본 노리 하자용은 탄식하기를 마지않았다. 


'자기 죽는 것은 말하지 않고 오직 나랏일만을 걱정하니 참 충신이로군!' 


성일이 직산에 다다랐다. 임금은 그동안 노여움도 풀리고 또 성일이 본도에서 인심을 얻은 것도 잘 알기 때문에 그 죄를 용서하고 우도 초유사를 삼아 도내 인심을 수습하고 또 군사를 모아 적을 막도록 했던 것이다. 


당시 유승인은 전공이 있었다 하여 그를 병사로 삼았던 것이다. 


첨지 김륵을 경상좌도 안집사로 삼았다. 그때 감사 김수는 우도에 있었다. 적병이 가로 막아서 좌도와 소식이 서로 통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수령들은 모두 벼슬을 버리고 달아나 인심이 몹시 해이해 졌다. 


조정에서 이 말을 듣고 김늑은 영천 사람으로서 본도 민정을 소상히 알 터이니 이 사람이면 인심을 수습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금께 아뢰어 이 사람을 안집사로 삼아 보내도록 했던 것이다. 





김늑이 좌도에 도달했다. 좌도 인민들은 비로소 조정에서 사람이 왔다는 말을 듣고 차츰 모여들기 시작했다. 영천, 풍기, 두 고을만은 다행히 적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또 이 곳에서는 의병도 여러 번 일어났다고 한다. 


적이 상주를 함락시켰다. 순변사 이일은 패해서 충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경상도 순찰사 김수는 적의 침입 소식을 듣고 곧 제승방략의 문군법에 의하여 여러 고을에 회장을 보내서 각각 소속 군인들을 거느리고 맡은 곳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장수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게 했다. 


문경 이하의 수령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로 나갔다. 냇가에서 노영을 하며 순변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런 지 수 일이 지나도록 순변사가 오지 않고 적들만 점점 가까이 왔다. 


자연 떼 지은 군사들은 시로 놀라 동요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큰 비가 왔다. 옷은 모두 젖었고 설상가상으로 양식까지 떨어졌다. 이로고 보니 군사들은 밤중에 모두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수령들까지도 단기로 도망해 버렸다. 


이때 순변사는 문경으로 들어갔다. 고을 안은 텅 비어있고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손수 창고 속에 있는 곡식을 풀어 데리고 간 사람들에게 나누어 먹였다. 순변사는 이내 함창을 거쳐 상주로 들어갔다. 


상주 목사는 김해였다. 그는 순변사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역참에 나갔다가 그 길로 산 속으로 도망해 버렸다. 


판관 권길만이 혼자서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일은 군사가 하나도 없는 것을 책망하여 권길을 끌어내어 죽이려 했다. 그러나 권길은 다시 군사를 모아 오겠다고 애원했다. 권길은 밤새도록 촌락으로 돌아다니면서 수백 명을 데리고 아침 일찍이 돌아왔다. 그러나 끌려온 사람들이란 모두 농민뿐이었다. 


이일은 상주에 하루를 머물렀다. 창고에 있는 곡식을 내어 흩어져 있는 백성들을 달래서 불러 모았다. 산골짜기 속에서 하나 둘씩 군사들이 모여들어 다시 수백 명이나 되었다. 


창졸간에 대오를 짜서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이들은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뿐이었다. 이때 적들은 벌써 선산에 도착했다. 


저녁 무렵 개녕 사람 하나가 와서 적들이 가까이 왔다고 보고했다. 이일은 이 자가 민심을 현혹시킨다 해서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애걸했다. 


'그렇게 내말을 믿지 못하십니까? 그렇다면 나를 잠시 동안 가두어두로 기다려 보십시오. 내일 아침이면 적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때 보아서 내말이 거짓이거든 죽여주십시오,' 


이날 밤 적들은 장천까지 와서 주둔했다. 장천이란 상주에서 거리가 불과 2리였다. 


그러나 이일의 군중에는 척후가 없었다. 그래서 적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개녕 사람을 옥에서 끌어내어 놓고 말했다. 


'아직도 적은 아무 소식이 없다. 너는 분명 민심을 현혹시킨 것이 아니냐?' 


이렇게 말하면서 그 죄 없는 사람을 베어 죽였다. 억지로 불러 모은 민군과 서울에서 데리고 온 장수 등 모두 합쳐서 겨우 8-9백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을 데리고 북쪽 냇가로 갔다. 





이일은 진 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산을 의지해 진을 치고 그 가운데 대장기를 꽂았다. 이일은 갑옷을 입고 그 깃대 밑에 말을 타고 섰고 종사관 유심, 박호와 판관 권길, 사근찰방 김종무 등은 모두 말에서 내려 이일의 뒤에 섰다. 


얼마 후에 저만큼 멀지 않은 숲속에서 사람 두 셋이 나와서 이편을 바라보고 배회하다가 도로 사라졌다. 


이일의 부하들은 적이 우리 동정을 엿보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그날 아침 개녕 사람이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감히 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성중을 바라보니 여러 곳에서 연기가 일어났다. 이일은 그제야 군관 한 사람을 보내어 탐지해 오도록 일렀다. 군관은 말을 타고 역졸 두 명으로 하여금 말고삐를 잡게 하여 천천히 나아갔다. 


그러나 왜군은 그전부터 다리 아래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조총으로 군관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린 다음 머리를 베어 가지고 달아났다. 


우리 군사는 이것을 쳐다보고 그만 맥이 풀려 버렸다. 이런 지 얼마 안 되어 적들은 크게 몰려왔다. 조총 십여 개를 가지고 연달아 쏘았다. 총에 맞은 자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는 것이었다. 


이일은 급히 군사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했다. 그러나 화살은 겨우 수십 보밖에 나가지 못했다. 도저히 적의 조총을 당할 수가 없었다. 적은 이미 군사를 좌우익으로 나누어 깃대를 들고 우리를 포위했다. 


이일은 일이 급한 것을 알고 말을 돌려 북쪽으로 달아났다. 이로 인하여 군사들은 어지러이 각각 자기들의 목숨만을 건지려고 도망쳤다. 그래도 살아 도망한 사람은 몇 명 되지 못했고 종사관 이하 미쳐 말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적에게 화를 입었다. 


적은 이일을 몹시 급히 쫓았다. 


이일은 말을 버리고 의복을 벗어 버린 채 머리털을 풀고 알몸뚱이로 달아났다. 문경에 도착한 그는 지필묵을 찾았다. 우선 자기가 패한 내력을 임금께 급히 아뢰고 물러가서 조령을 지키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신입이 마침 충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충주로 달려갔다. 


우상 이양원을 수성대장으로 삼았다. 또 이전, 변언수를 경성좌우위장으로 삼고 상상군 박충간을 경성 순검사로 삼아 이들로 하여금 서울의 성을 수리하게 했다. 그리고 김명원을 다시 불러서 도원수를 삼아 한강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이때 이일이 패해 달아났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보니 인심은 모두 흉흉했다. 궁중에서는 천도하자는 말까지 나왔다. 그래도 부중에서만은 이런 소문을 알지 못했다. 


이마 김응수가 빈청에 와서 수상과 귀엣말을 하고 갔다가 다시 오곤 했다. 


보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두 의아하게 여겼으나 당시 수상은 사복제조까지 맡아 보았던 때문엘 뿐 딴 일은 없었던 것이다. 


도승지 이항복이 손바닥에 '영강문 안에 말을 세운다.' 라는 여섯 자를 써서 나에게 보였다. 


대간은 '수상이 국사를 그르쳤으니 파면시키십시오.' 하고 청했다.' 


그러나 임금은 듣지 않았다. 


또 종친들은 문 밖에 모여들어 통곡하면서 '성을 버리지 마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영부사 김귀영은 더욱 분하게 여겼다. 그는 대신들과 함께 들어가 임금을 뵙고 서울을 고수할 것을 청했다. 


그는 다시 말했다. 


'성을 버리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소인배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니 임금도 교지를 내려 말했다. 


'종사가 여기에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이오.' 


이 말을 듣고 그때서야 여러 사람들은 모두 안심하고 흩어져 물러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급했다.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다급했다. 각 동에 사는 백성들과 공사의 천민, 서리들, 그리고 삼의사를 뽑아서 성첩을 나누어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지켜야할 첩은 3만이 넘는다. 거기에 반해서 성을 지키는 인구는 겨우 7천 명에 지나지 못했다. 그나마도 이들은 모두 오합들이고 보니 제가기 성을 버리고 도망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상번 군사들은 비록 병조에 소속되어 있다고 하지만 이들 역시 모두 하리들과 결탁해서 뇌물을 받고 슬며시 노아 보내는 자가 많았다. 심지어 관원들까지도 사람들의 거취를 간섭하지 않는 형편이었다. 막상 급한 일이 있고 보면 쓸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군정이 이렇듯이 해이해졌으니 그 나머지야 말해 무엇하랴. 


이에 대신들은 세자를 세워 인심을 수습하자고 청했다. 임금도 이를 허락했다. 


동지사 이덕형을 사신으로 삼아 왜진에 보냈다. 


이일이 상주에서 패할 때의 일이다. 왜학동사 경응순이란 사람이 있었다. 이일의 군중에 있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다. 


한데 왜장 평행장은 평수길의 글과 또 예조에 보내는 공문을 응순에게 주어 보내면서 말했다. 





'동래에 있을 적에 울산 군수를 생포해서 우리에게 편지를 보냈다.(그때 생포한 울산군수란 이언함이다.) 그가 적의 진중으로부터 돌아오기는 했으나 조정에서 벌을 줄까 두려워하여 거짓 도망해 왔다고 속이고 수길의 편지도 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이런 일이 있는 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껏 아무런 소식도 없다. 너희 나라가 만일 우리와 강화할 생각이 있거든 이덕형을 보내어 오는 28일에 충주에서 우리와 마나도록 하라. 


덕형은 원래 전에 선위사로서 왜사를 접대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행장이 그를 만나고자 한 것이다. 





응순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에는 벌써 일이 급해져서 조정에서는 아무런 좋은 방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혹 이런 것으로써 왜군의 진격을 늦출 수는 없을까 하는 의견도 나왔고 또 덕형도 자기가 가기를 청했으므로 곧 예조의 답서를 주어 응순과 함께 내려 보냈다. 가는 도중에 벌써 충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응순을 먼저 보내어 왜의 소식을 탐지해 오도록 했다. 그러나 응순은 적장 청정에게 죽고 돌아오지 못했다. 


덕형은 하는 수 없었다. 중도에서 되돌아가서 복명했다. 


재앙이 변란의 조짐이라는 형혹성이 두성을 범했다. 


경기, 강원, 황해, 평안, 함경, 등 여러 도의 군사를 뽑아서 서울을 지키도록 했다. 





이조판서 이원익을 평안도 도순찰사로 삼고 지사 최흥원을 황해도 도순찰사로 삼아 모두 그날로 떠나가게 했다. 그것은 장차 서쪽으로 파천하자는 의논이 있고 또 일찍이 원익과 흥원은 각각 안주 목사와 감사를 지내면서 모두 거기서 어진 정치를 베풀어 인심을 얻었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먼저 가서 군민을 위무하여 임금이 순행하는 데 예비를 하자는 것이었다. 


적병이 충주에 들어왔다. 신입은 이를 맞아 싸우다가 적에게 죽었다. 이러고 보니 우리 군사들은 모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신입이 충주에 있을 적에 충청도에 있는 여러 고을 군사들을 수습하니 모두 8천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대로다로 그는 조령을 보전하려했다. 그러나 적에게 패했단 말을 듣자 그만 낙담하고 말았다. 그는 충주로 돌아오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일과 변기 등도 불러서 충주로 모두 오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조령처럼 험준하고 요긴한 곳은 모두 버리고 지키지 않았다. 또한 상부의 명령도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들이 필히 패하리라 예측했다. 


시입이 가까이 하는 군관 한 사람이 와서 넌지시 말했다. 


'적들이 벌써 조령을 넘어섰습니다.' 


그때는 27일 초저녁이었다. 이 말을 듣자 신입은 그만 성밖으로 뛰어나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렸다. 이에 군중도 따라서 소란하기 시작했다. 밤이 늦은 뒤에야 신입은 가만히 객사로 되돌아왔다. 그 이튿날 아침, 어제 밀보한 군관을 불러냈다. 


'네 어찌 요망스런 보고를 하여 군심을 소란케 하느냐?' 


이렇게 꾸짖어 그를 목 베어 죽였다. 그리고 나서 임금께 글을 올렸다. 


'적은 아직 상주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적병은 이미 십 리 가까이 쳐들어오고 있었으나 신입의 군사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신입은 탄금대 앞의 두 개천 사이에 진을 쳤다. 이곳은 좌우에 논이 있어 벼가 무성하게 자랐다. 또 잡초도 우거져 있어 말과 사람이 달리기에는 몹시 불편한 곳이었다. 


적들은 단원역으로부터 쳐들어왔다. 길을 나누어 진군해 오는데 그 기세란 마치 풍우가 몰려오는 것과도 같았다. 한 길은 산을 넘어 동쪽으로 오고 한 길은 강을 끼고 내려오고 있었다. 총소리는 땅을 울리고 먼지는 하늘을 가렸다. 


신입은 이것을 보자 어쩔 줄 몰랐다. 자기 혼자서 적진으로 쳐들어가려고 두 번이나 애썼으나 들어가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되돌아온 그는 강물로 뛰어들어 죽었다. 


이것을 본 군사들도 모두 강물로 뛰어드니 그 시체가 강을 덮어 떠내려갔다. 김여물도 병사들에 섞여 죽었다. 이일은 동쪽 변두리로 해서 산속으로 도망쳤다. 


적병이 몹시 강하다는 말을 처음 들은 조정에서는 이렇게 의논했다. 


'이일 혼자서는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신입은 한 때 명장으로서 사졸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명령에 잘 복종하는 터이니 이 사람으로 하여금 큰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라 후원토록 하리다. 이렇게 두 장수가 서로 협조하고 보면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이요, 큰 실수는 없을 것이라.' 


하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이도 본도의 수륙의 장수들은 모두 겁을 집어먹었다. 수군만 보더라도 좌수사 박홍은 군사 한 사람도 내지 않았다. 


우수사 원균은 비록 수로가 좀 멀다고는 하지만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배가 많고 또 적들이 하루나 이틀 동안에 몰려온 것도 아닌데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위세를 보이고 단 한 번만이라도 싸웠던들 적들은 뒤를 염려해서 그토록 몰려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데 먼데서 바라보기만 했지 나와서 교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뿐만 아니다. 또 적이 상륙해 오자 좌병사 이각과 우병사 조대곤이 혹 숨기도 하고 교체되기도 하니 적들은 북을 치면서 의기양양해서 맘대로 횡행하여 백 리 사이를 무인지경처럼 몰려들었다. 그들은 북쪽을 향하여 주야로 진군하였으나 한 곳에서 나마도 그들과 맞서 그 기세를 수그러뜨린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열흘이 못되어 적들은 상주까지 다다랐던 것이다. 


이일은 한낱 객장이었다. 그는 군사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졸지에 싸움이 벌어지자 적과 교전하지를 못했다. 그는 신입이 충주에 다다르기도 전에 벌써 적에게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진토가 어렵게 되고 모든 일이 이토록 그릇되었으니 아하! 참으로 원통한 일이로다. 그 뒤네 들으니 적은 상주에 들어왔으나 그 곳은 너무 험하다고 하여 주둔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원래 적들은 여기서 지키는 군사가 있을까 두려워해서 사람을 놓아 재삼 와서 탐지했다. 그러나 아무도 없음을 알자 좋아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 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왜적을 쫓아 조령을 지나다가 이렇게 탄식한 일이 있다. 


'이런 험한 곳을 두고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총병(신입)도 무모한 사람이로군.' 


원래 신입은 날쌘 사람으로 그 당시에 비록 이름은 있었지만 싸우는 주략에는 능하지 못했다. 


옛 사람이 말한 '장수가 군사 쓸 줄을 알지 못하면 그 나라를 적에게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지금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다만 뒷날을 위해서 경계해야할 것이기에 여기에 덧붙여 써 둘 따름이다. 





4월 30일 새벽.(161쪽) 


임금은 서쪽으로 파천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당초 신입이 떠난 뒤로 서울 사람들은 날마다 첩보라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데 전날(4월 29일)저녁 무렵 전립을 쓴 사람 셋이 승인문으로 달려 들어왔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몹시 마음을 졸였다. 성안 사람들은 다투어 가며 그 에게 싸움 소식을 물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천만의외였다. 





'우리는 순변사 군관의 부하들이오. 어제 순변사(신입)는 싸움에 패해서 충주에서 전사하였소. 이 까닭에 군사들이 모두 흩어지는 형편이오. 우리들은 간신히 도망해 빠져나와 집식구들이나 피신시키려고 오는 길이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자연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전했다. 얼마 안 되어 성안은 떠들썩해졌다. 


임금은 동상에 거동하여 촛불을 켜놓고 앉았다. 종실 하원군과 하릉군이 시좌하고 있었다. 이때 대신들이 임금께 아뢰었다. 


'사세가 이렇게 되었사오니 전하께서는 잠시 평양으로 가시도록 하옵소서. 그리하여 명나라 구원을 청해가지고 수복할 것을 도모하십시오." 


한편 장령 권협은 임금께 뵙기를 청하여 무릅을 끓고 아뢰었다. 


'원하옵건데 서울을 고수하십시오.'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는데 그 음성이 몹시 요란스러웠다. 나는 옆에 있다가 말했다. 


'아무리 나라가 위태오운 때라 할지라도 군신의 예의에 이럴 수가 있소. 물러가서 장계를 올리도록 하오.' 


그러나 권협은 연거푸 '좌상까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면 서울은 아주 버리시렵니까?' 하고 사뭇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이었다. 나는 미안스러워서 임금께 아뢰었다. 


'권협의 말이 매우 충성스럽습니다만 지금 사세가 그렇지 못하옵니다.' 나는 말을 끊었다가 다시 아뢰었다. 


'왕자를 여러 도에 보내시어 근와병을 모집하도록 하시 옵고 세자는 대가를 따라 가시도록 하시옵소서.' 





이때 대신들은 궐문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은 명령을 내렸다. 임해군은 영부사 김귀영과 칠계군 윤탁면을 데리고 함경도로 가도록 했다. 순화군은 장계군 황정욱, 호군 황혁, 동지 이기를 데리고 강원도로 가도록 했다. 


이는 황혁의 딸이 순화군의 부인이요, 이기는 원주 사람인 까닭에 같이 가게 한 것이다. 


이때 우상은 유도대장이 되고 영상은 재신 수십 인을 데리고 임금의 행차를 수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런 분부도 없었다. 이에 나는 승정원에서 아뢰었다. 


'호종에 유성룡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나도 같이 가게 되었다. 


내의 조영선과 정원리 신덕린 등 십여 인이 큰 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서울을 버릴 수가 있습니까?' 


이런 소리에 뒤이어 조금 있다가 이일의 장계가 들어왔다. 


궁중에 있던 위사들도 모두 흩어졌으므로 경루조차 울리지 않아 시간을 알 수가 없었다. 선정관청에 불을 얻어다 켜놓고 이일의 장계를 읽었다. 


'적이 금명간 서울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 장계가 서울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대가는 궐문 밖으로 나갔다. 삼청의 금군들이 모두 달아나 숨느라고 어둠 속에서 서로 마주치고 부딪친다. 마침 우림위 지귀수가 앞으로 지나갔다. 나는 그를 책망했다. 





'그대는 빨리 전하를 따를 일이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소.' 


귀수는 이 말을 듣자 머리를 수그리고 말했다. 


'어찌 감히 힘껏 하지 않으리까.' 


그는 뒤를 돌아보더니 다시 두어 사람을 불러가지고 함께 내 뒤를 따랐다. 


나는 그들과 함께 경북궁 앞을 지났다. 시가지에 좌우편에서는 백성들의 곡성이 들려왔다. 승문원 서원 이수겸이 내 말고삐를 붙들고 물었다. 


'원중 문서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내가 그 중에서 중요한 것만 수습해 가지고 오도록 이르니 수겸은 울면서 돌아갔다. 


돈의문을 지나서 사현에 다다르니 동쪽 하늘이 겨우 밝아오고 있었다. 머리를 돌려 성중을 바라보니 남대문 안 큰 창고에 불이 나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뻗었다. 


사현을 넘어서 석교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경기 감사 권징이 따라 이르렀다. 벽제 역에 도착하니 빗줄기가 커져서 일행의 옷이 모두 젖었다. 이에 임금은 할 수 없이 들러 잠시 쉬었다. 


다시 길을 떠나서 이때부터 전송 나왔던 중관 중에는 성안으로 되돌아가는 자가 많았다. 혜읍령을 지나자 비는 점점 세차게 퍼붓는다. 궁인들은 약한 말 위에서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따라가고 있었다. 


마산역을 지날 때 밭에서 일하던 한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며 통곡했다. 


'나라가 우리를 버리고 가니 이제 누굴 믿고 산단 말이오.' 


임진강에 이르도록 비는 멎지 않았다. 이때 임금은 배안에서 수상과 나를 불러 보셨다. 


강을 건너서 이미 황혼이 지나 길을 찾기가 몹시 힘들었다. 임진강 남쪽 기슭에 옛날 승청이 있었다. 적이 그 재목을 베어다가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올까 두려워 우리는 이 재목에 불을 놓게 하니 불빛이 강 북쪽까지 비쳐서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 초경이나 되어서 동파역에 이르렀다. 파주 목사 허진과 장단 부사 구효연이 임금을 접대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로 하여금 그 굿에서 임금께 드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호위하는 사람들도 종일 굶어가며 왔기 때문에 음식이 있는 것을 보자 요란스레 주방으로 들어가 함부로 빼앗아 먹었다. 이렇게 되니 임금께 드릴 음식마저 없어질 지경이라 이 꼴을 당한 허진과 효연은 어쩔 줄을 몰라 도망해 버렸다. 





5월 초하루 아침 임금은 대신을 불러놓고 물었다. (163쪽) 


'남방 순찰사 중에 능히 근왕할 자가 있는가?' 


그러나 대시등은 아무 대답도 없다. 


날이 어두운 뒤에 수레를 타고 개성을 향해 떠나려 했으나 경기 이졸들이 모두 도망해 흩어져서 호위할 사람이 없었다. 이때 마침 황해 감사 조인득은 행차를 돕기 위해 본도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떠났는데 서흥 부사 남의가 군사 수백 명과 말 5, 60 필을 가지고 먼저 도착했다. 일행은 이것으로 길을 떠날 수가 있었다. 떠나려할 무렵 사약 최언준이 나와 말했다. 





'궁중 사람들이 어제도 먹지 못하고 오늘도 굶었으니 쌀을 좀 구해다가 요기를 하고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리하여 남의의 군인이 가지고 가던 쌀과 좁쌀이 섞인 것 몇 말을 가져왔다. 낮에 초현참에 도착하니 조인득이 와서 임금을 뵙고 길 가운데에 장막을 쳐 일행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백관들은 그제야 모두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저녁 무럽 개성부에 이르러 남문 밖 고서에 거동했다. 이때 개간이 번갈아 글을 올렸다. 그들은 수상의 오국한 죄를 얽어 탄핵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임금은 들은 체하지도 않았다. 


초이튿날, 대간이 다시 글을 올려 수상을 파직시키게 되자 내가 그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최홍원을 좌상, 윤두수를 우상으로 삼았다. 또 함경북도 병사 신할이 해임되었다. 


이날 낮에 임금은 남쪽 성 문루에 거동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기도 하고 또 무슨 소회가 있으면 말해 보라 했다. 그때 한 사람이 앞에 나와 엎드렸다. 





'전하! 원컨데 정 정승(정철을 말함)을 불러 쓰시옵소서.' 


당시 정철은 강계로 귀양 가 있는 터였다. 임금은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리하마.' 즉시 정철을 부르게 분부하시고 저녁 무렵에 임금은 궁으로 돌아왔다. 


이때 나는 죄가 있다 하여 파면되었다. 


유홍이 우상이 되고 최흥원, 윤두수를 차례로 올려 썼다. 


이때까지는 적이 아직 서울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은 '파천을 떠나게 한 것은 잘못이다.' 라고 내려진 것이었다. 


승지 신을 시켜 서울로 돌아가서 형세를 살펴오도록 했다. 


그러나 초사흔날 적은 서울에 들어왔다. 유도장 이양길은 양산, 밀양, 처요, 대구, 인동, 서산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러 이일의 군사를 패배시켰고 또 한 길은 장기 기장을 거쳐 좌도 병영인 울산, 경주, 영천 , 신영, 의홍, 군위, 비안을 함락시켰다. 이들은 다시 용궁과 하풍진 나루를 건너 문경으로 나온 후 중로로 온 적병과 합쳐 조령을 넘어 충주로 들어간 것이다. 이들은 다시 충주에서 군사를 두 길로 나누었다. 하나는 여주를 거쳐 강을 건넌 다음 양근을 거쳐 용진을 건너 서울 동쪽으로 들어왔고 하나는 죽산, 용인을 거쳐 한강 남쪽으로 들어왔다. 또 세 길 주의 한 길은 김해를 거쳐 성주 무계현으로 해서 강을 건너고 지례, 금산을 지나 충청도 영동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청주를 함락시킨 다음 쏜 살 같이 경기도로 향했다. 





이때 적의 깃발과 창검은 천 리에 뻗쳤고 총소리를 요란히 울리면서 진군했다. 지나가는 곳마다 10리 혹은 5, 60리에 모두 험한 곳을 가려서 영책을 세웠다. 영책은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밤에는 불을 켜서 저희끼리 서로 응하게 했다. 


도원수 김명원은 제천장에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적을 바라보기만 할 뿐 감히 나가 싸우지도 못했다. 군기와 화포와 기계를 모두 강물 속에 집어넣었다. 그가 변복을 하고 도망하려 하니 종사관 심우정이 굳이 이것을 말렸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다. 


이양원은 성안에 있다가 한강을 지키던 군사가 이미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지키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자 또한 양주로 도망해 버렸다. 





강원도 조방장 원호는 맨 처음에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여주 북쪽 기슭을 지키고 있었다. 적은 이를 보고 감히 건너오지 못했다. 그러나 며칠 뒤에 강원도 순찰사 유영길이 졸지에 글을 보내어 그를 본도로 불러 들였다. 이 틈을 타서 적들은 민가와 관사를 헐어다가 그 재목으로 긴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넜다. 강물이 거칠어 그들이 중류에 이르자 빠져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원호는 이미 가 버리고 강 위에는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 적은 마음을 놓고 여러 날에 걸쳐 유유히 건널 수 있었다. 


이리하여 세 길로 온 적병을 모두 서울로 들어왔다. 그러나 서울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 버리고 아무도 없었다. 





김명원은 건강을 잃은 다음 임금이 계신 곳으로 가려고 임진강에 이르러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임금은 '경기 황해도 군사를 뽑아서 임진강을 지키도록 하라.'하고 명령을 내렸다. 


또 신할에게도 명하여 함께 임진강을 지켜서 적이 서쪽으로 오는 길을 막도록 했다. 이날 임금은 개성을 떠나 금교역에 이르렀다. 나는 이때 비록 파직 당한 몸이지만 감히 뒤떨어질 수 없었다. 


따라간 지 4일만에 임금은 홍의 금암 평산부를 지나서 보산역에 이르렀다. 처음 개성을 떠날 적에 창졸간에 종묘 신주를 목청전에 두고 왔는데 종실 한 사람이 울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적이 있는 곳에 신주를 두고 가신단 말입니까?' 이리하여 하는 수 없이 밤으로 개성에 달려가 봉안해 왔다고 한다. 닷새 날 임금의 행차는 안성, 용천, 검수역을 지나 봉산군에 도착했다. 엿샛날 황주로 나갔고 이렛날에는 중화를 지나 평양으로 들어갔다. 삼도 순찰사의 군사는 용인에서 허물어졌다. 


처음에는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본도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가서 후원하려 했었다. 그러나 임금은 벌써 서쪽으로 떠났고 서울은 함락되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리하여 군사를 거두어 전주로 돌아오니 도내 사람들 중에는 이광이 싸우지도 않고 돌아왔다고 하여 불평하는 자도 있었다. 





이광은 마음이 불안했다. 다시 군사를 수습해 가지고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과 함께 군세를 합하여 앞으로 나갔다. 여기에 경상도 순찰사 김수도 자기 도로부터 군관 수십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합쳤다. 그들의 군사는 총 수가 5만이 넘었다. 


이 군사들이 용인에 이르러 앞을 바라보니 북쪽 두문산 위에 적의 작은 영책이 보였다. 이광은 이것을 대단치 않게 여겼다. 용사 백광언, 이시례 등을 시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오라고 일렀다. 


광언 등은 선봉을 거느리고 산으로 올라가 적의 영책 십여 보 밖까지 갔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활을 쏘았다. 그러나 영책 안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날 해가 저물었다. 적은 광언의 군사가 차츰 해이해진 것을 엿보고 칼을 빼어들고 큰 소리를 치면서 쫓아 나왔다. 





광언 등은 황급히 말을 찾아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졸지에 일이라 미처 달아나지 못하여 적에게 죽고 나머지 군사들도 이 소식을 듣고는 군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때 순찰사 세 사람은 모두 문인이었다. 다 같이 병부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군사의 수는 많았지만 영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또 험한 곳을 찾아서 지킬 준비도 하지 않았으니 이야말로 옛 사람들이 말한 





'군사 일을 마치 봄놀이 하듯 하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한 것 같다. 


이튿날 적들은 우리 군사가 겁내는 것을 알고 몇 명이 칼을 빼어 휘두르면서 달려 나왔다. 우리 삼도 군사들은 이것을 바라보고 모두 겁내어 흩어져 달아나니 그 흩어지는 소리가 마치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우리군사가 무너지며 버린 군자와 기계가 길에 무수히 널려 있어 사람이 다닐 수가 없었다. 적들은 이것을 모두 가져다가 불태워 버렸다. 이리하여 이광은 전라도로 돌아갔고 국형은 공주로, 김수는 경상우도로 제각기 돌아갔다. 





부원수 신각은 양주에서 저과 싸워 이겨서 적병 6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선전관을 보내어 신각을 군중에서 죽였다. 


처음에는 신각은 김명원의 부장으로 있었다. 그러나 한강 싸움에 명원을 따라가지 않고 양주로 이양원을 따라 갔던 것이다. 


이때 함 경우도 병사 이흔의 군사가 마침 왔다. 신각은 이와 같이 합세하여 서울로부터 나와 일반 민가를 약탈하는 적을 격파했다. 


그것은 왜병이 우리나라에 온 뒤로 우리군사가 처음으로 이긴 싸움이었다. 백성들은 모두 좋아하고 날뛰었다. 그러나 김명원은 임짐강에서 장계를 올렸다. 


'각이 제 마음대로 일을 하고 명령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고 우상 유홍은 그대로 임금께 아뢰었다. 임금은 그를 죽이라고 선정관을 내려 보냈다. 


그때 마침 신각의 첩보가 올라왔다. 조정에서는 급히 사람을 뒤쫓아 보냈으나 따르지 못했다. 먼저 간 선전관의 손에 각은 그만 죽고 말았던 것이다. 


신각은 비록 무인이나 본래 맑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전에 연안 부사로 있을 때는 성을 쌓고 도랑을 파며 군기를 많이 장만한 일도 있었다. 그 뒤에 이정암이 연안성을 지킬 적에 사람들이 모두 이는 각의 공로라고 말한 일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었다. 그뿐 아니라 그에게 90이 넘은 늙은 어머니가 있다. 하니 듣는 사람들 중에는 이를 애석해 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런 뒤에 지사 한응인으로 하여금 평안도 정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임진강에 가서 적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김명원의 절제를 받지 말라고 했다. 


그때 마침 응인은 북경에서 돌아왔던 참이었다. 윤두수가 여러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은 얼굴에 복기가 있으니 능히 일을 잘 처리할 것이오.' 라고 말하면서 응인을 떠나보냈던 것이다. 


한응인과 김명원이 거느린 군사가 임진강에서 적에게 패했다. 적병은 강을 건너 처 올라왔다. 원래 명원은 임짐강 북쪽에 있었다. 그는 모든 군사들에게 분부하여 '군사를 벌려 강을 지켜라.' 하였다. 그리고 강 위에 있는 배를 거두어 모두 북쪽 기슭에 머무르게 했다. 적들은 임진강 남쪽에 진을 쳤다. 그러나 배가 없어 강을 건너지 못하고 다만 군사를 조금씩 내어 강을 격해 싸울 뿐이었다. 


이렇게 십여 일이 지났다. 적병은 종시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강 위에 있는 막사를 불사르고 군기를 낱낱이 거두어 실었다. 그리고 거짓 퇴병하려는 기색을 보여 우리 군사를 유인했다. 


신할은 본시 날쌔기는 했으나 꾀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것을 보고 적병이 정말 물러가거니 생각했다. 경기 감사 권징과 힘을 합세해서 이내 강을 건너 적의 뒤를 쫓으려 했다. 명원은 이것을 보고도 금하지 못했다. 





이날 응인의 군사도 임진강에 도착했다. 이것을 보고 함께 적을 쫓으려 했다. 한데 응인의 군사는 모두 강변에서 자란 튼튼한 군사들이었다. 더욱이 북방 오랑캐와도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싸우고 진 치는 법과 형세를 보는 법을 어느 정도 터득하고 있었다. 


'이제 군사가 멀리 오느라고 너무 피로했습니다. 거기에 아직껏 밥도 먹지 못했고 병기도 정돈되지 않았으며 후군도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또 적의 동정을 보건데 퇴병하려는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바라건 데 조금 쉬었다가 내일 다시 적의 동정을 본 다음 나가 싸우도록 하십시오. 





응인은 이를 머무르려고 한다하여 군사 몇 명을 당장에 목 베어 죽였다. 명원은 혼자 생각해보았다. 


'응인은 새로 조정에서 왔고 또 지금 내 절제를 받을 처지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뻔히 그 처사가 옳지 못한 줄 알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별장 유극량은 나이가 늙었지만 싸움에 익숙한 장수였다. 이 모양을 보고 경동치 말기를 애써 권했다. 그러나 신할은 도리어 이를 목베려했다. 


유극량은 말했다. 


'내 어려서부터 전쟁에 나섰으니 어찌 내 몸 하나 죽는 것을 피해서 진군하지 않으려 하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오로지 국사를 그르칠까 두려워 함이 올시다.' 


말을 마치고 분연히 자기 군사를 데리고 앞장서서 강을 건넜다. 


이리하여 우리군사는 일제히 강을 건너 적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험한 지점에 당도하자 매복했던 적의 군사가 산 뒤로부터 일시에 일어났다. 


우리 군사들은 모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극량은 할 수 없이 말에서 내려 땅에 주저앉았다. 


'허허! 여기가 바로 내가 죽을 땅이로구나.' 


하고 탄식하며 활을 당겨 적군 몇 명을 쏘아 죽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왜군에게 해를 입었고 신할도 역시 죽었다. 


우리 군사들은 놀라 모두 도망해서 강기슭에 이르렀다. 뒤에서 왜병이 쫓아오니 미쳐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바위 위에서 물 속에 떨어져 죽었다. 


그 모양은 마치 모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과도 같았다. 미ㅕ 강에 떨어져 죽지 못한 군사는 적병이 뒤에서 긴 칼로 찌르자 모두 엎드려 칼을 받을 뿐 감히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다. 이때 응인과 명원은 강 북쪽에서 이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가 막혀 말도 아지 못했다. 


상산군 박충간은 마침 군중에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말을 달려 앞서 달아났다. 군사들은 명원이 달아나는 것으로 알고 모두 소리 높여 외쳤다. 





'야! 원수도 달아난다.'(169쪽) 


 강을 지키던 군사들은 이 말을 듣고 일제히 흩어져 버렸다. 명원과 응인은 임금이 계신 곳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 일을 불문에 붙이고 묻지도 않았다. 경기도 감사 권징은 가평군으로 들어가 난을 피했다. 이렇게 되니 적들은 제 마음대로 서쪽으로 밀려들어 꺼릴 것 없이 진군해 왔다. 


적군이 함경도에 다다르자 두 왕자는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들을 모시고 있던 김귀영, 황정욱, 황혁과 본도 감사 유영립. 북병사 한극함 등도 모두 잡혔다. 


남병사 이흔은 갑산으로 도망했다가 그 곳 백성들에게 해를 입었다. 이리하여 남북의 도와 군현은 모두 적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이때 왜학통사 함정호란 사람이 서울에서 적의 대장 가등청정에게 잡혔다. 그는 청정을 따라 북도로 들어갔다가 적이 물러난 뒤에 도망쳐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나를 보고 사정을 자못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원래 적의 장수 중에는 가등청정이 가장 용맹스럽고 싸움에도 능했다. 청정은 평행장과 함께 임진강을 건너서 황홰도 안성역에 이르러 보니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제비를 뽑아 행장은 평안도로 가고 정정은 함경도로 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청정은 안성에 사는 백성 두 사람을 사로 잡아서 길을 인도하라 하니 이들 두 사람은 모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성장해서 북쪽 지리에는 밝지 못하다.' 


청정은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한 사람을 칼로 쳐 죽였다. 그러고 보니 남은 사람은 하는 수 없이 길을 인도해 주었다는 것이다. 청정의 일행은 이 사람을 따라 산골짜기를 더듬어 노리현을 넘어 철령 북쪽으로 나왔다. 하루에 수백 리 길을 달리는데 그 형세가 풍우와도 같았다. 


북도 병사 한극함은 육진 군사를 거느리고 해정창에서 적을 만나 싸우게 되었다. 


북쪽 군사들은 원래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한 터이다. 더욱이 땅이 평탄한 까닭에 좌우로 달리면서 활을 쏘니 적은 지탱하지 못하고 창고 속으로 쫓겨 들어가 버렸다. 


이때 벌써 해가 저물었다. 군사들은 일제히 





'조금 쉬었다가 적이 나오거든 내일 다시 싸우도록 하십시오,' 


했으나 극함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군사를 지휘하여 적을 포위하도록 했다. 


적은 창고 속에서 곡식섬을 성모양으로 쌓고 우리 군사의 시석을 피하면서 그 속에서 조총을 수 없이 쏘아댔다. 


성밖에는 우리 군사가 겹겹이 서 있었다. 총 한 방에 무려 3-4명씩 쓰러지고 보니 얼마 안 가서 우리 군사는 형세를 지탱하지 못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극함은 남은 군사를 거둬 고개 위에 진을 치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적은 밤중에 가만히 우리 군사의 주위를 돌려 풀 속에 군사를 매복하고 있었다. 


때마침 아침 안개가 자욱해서 지척을 분별하지 못했다. 우리군사는 적군이 저만큼 먼 산 밑에 있거니 생각하고 안심하고 진군해 나갔다. 


그러나 대포소리 한 번 나면서 적의 군사가 사면에서 일제히 내달으니 우리 군사는 어지할 줄 모르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군사들은 적이 없는 곳을 찾아 달아나느라 모두 진흙 속에 빠져 있었다. 


이것을 적이 쫓아와 긴 칼로 베니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다. 


싸움에 져 도망친 극함은 경성으로 들어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혔고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모두 회령부로 갔었다. 순화군은 처음에는 강원도에 있었다. 강원도로 들어오는 적병을 보고 복도로 피한 것이다. 이때 적은 맹렬히 왕자를 뒤쫓았다. 


이것을 본 회령 아전 극경인이 저희 패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먼저 종신들을 묶어 놓고 적을 맞았다. 


이것을 본 청정은 묶은 것을 풀고 우선 군중에 두었다가 나중에 함흥으로 옮겨갔다 


칠계군 윤탁연은 도중에서 병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딴 길로 해서 별해보로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동지 이기는 왕자를 쫓아가지 않고 강원도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적에게 잡히지 않았다. 유영림은 적에게 며칠 동안 붙들려 있었지만 적들이 문관이라 해서 가두지 않았다. 


그래서 틈을 타서 빠져나와 임금이 계신 곳으로 도망 왔던 것이다. 


이일이 평양에 이르렀다. 이일은 본래 충주에서 패해 강을 건너 강원도 경계로 해서 겨우 이곳에 왔다. 그 당시 여러 장수들은 서울로부터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혹은 도망하고 혹은 죽어서 한 사람도 임금의 행차를 호위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때 적들이 머지않아 도착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민심이 몹시 설레는 판에 이일이 여기에 온 것이다. 이일은 무장들 중에서도 원래부터 명망이 두터웠던 터여서 비록 그가 싸움에 패해서 왔을망정 기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일은 벌써 여러 번 싸움에 패했다. 평량자를 쓰고 흰 도포를 걸쳤으며 짚신을 끌고 들어오는 모양이 몹시 초라하여 보는 이들이 탄식하여 마지않았다. 


이것을 보고 내가 말했다. 





'이곳 사람들이 그대에게 의존하려 하는데 꼴이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수습한단 말이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행장 속에서 남빛 비단옷을 꺼내어 그에게 주었다. 이에 딴 사람들도 다투어 혹은 종립도 주고 은정자, 채영도 주어 당장에 급한 치장은 일신해졌다. 


그러나 신들 벗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짚신을 그대로 끌고 있었다. 


나는 또 웃으면서 말했다. 


'비단옷에 짚신이라니 격에 맞지 않는군] (172쪽) 


이 말을 듣자 좌우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쳐다보면서 대소했다. 이윽고 벽동에 있는 토병 임옥경이 달려 왔다. 


'적이 벌써 봉산에 왔습니다.' 


하고 보고하는 것이다. 나는 급히 좌상을 돌아보았다. 


'필시 적의 척후가 강 건너에 와 있을 것이요. 이 영귀루 밑에 강물이 두 줄기로 흐르고 있소. 한 줄기는 물이 얕아 건널 만 한데 만일 적들이 우리 백성들을 앞장세우고 가만히 강을 건너 갑자기 쳐들어온다면 성이 위태로울 것이오. 급히 이일을 보내어 물이 얕은 강줄기를 지키도록 하시오.' 


윤공도 그렇게 생각하고 곧 이일을 보내도록 했다. 


그즈음 이일이 거느린 강원도 군사는 겨우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도저히 그 수로는 데리고 갈 수 없었다. 딴 군사로라도 수를 채워 보려고 이일은 함구문에 앉아서 군사를 전호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일이 급하다는 생각이 들어 사람을 보내어 가보라고 했으나 아직도 이일은 문루 위에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여러 번 윤공에게 재촉하여 이일을 떠나보냈다. 


이리하여 이일은 떠났다. 하지만 길을 인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강 서쪽 길로 잘못 들어서서 평양 좌수 김내유을 만나게 되었다. 겨우 김내윤에게 길을 물어 만경대 아래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곳은 성안에서 겨우 십여 리 떨어진 곳이다. 바라다보니 강 저편 남쪽 기슭에 적병이 벌써 수백 명이나 모여 있었다. 강 가운데 작은 섬에 사는 백성들은 놀라서 달아나고 있었다. 이에 이일은 무사 십여 명에게 급히 명해서 섬 속에 들어가 활을 쏘라 했다. 그러나 군사들은 겁을 내어 가지 못했다. 이일이 칼을 빼어 베려하자 그때서야 군사들은 마지못해서 섬으로 갔다. 


그러나 적들은 벌써 강을 건너 기슭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 군사들은 이것을 보고 급히 활을 쏘아 연달아 6-7명을 죽였다. 그때서야 적은 비로소 물러났다. 이리하여 이일은 계속 그 곳을 지키게 되었다. 


명나라 도사는 진무 임세록을 시켜서 우리나라에 가서 왜군의 실정을 탐지케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임세록을 대동관으로 불렀다. 





나는 5월에 벼슬을 파직 당했다가 6월 초하루에 다시 복직되었다.(173쪽) 


이날 마침 임금의 명령으로 임세록을 접대하게 되었다. 


이때 요동에서는 왜군이 우리나라를 침범한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래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 금시에 임금이 서울을 버리고 서쪽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이내 또 왜병이 평양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러고 보니 그들은 몹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왜병이 제 아무리 급히 진격한다 하더라도 이렇듯 빠를 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의심했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왜병의 길을 안내해서 진격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임세록을 시켜 그 여부를 탐지하게 하였던 것이다. 나는 세록을 안내하여 연광정으로 올라갔다. 왜진의 형세를 바라보니 마침 왜병 하나가 강 저편 동쪽 숲속에서 나와 이리저리 움직이고 이고 있었다. 이내 두세 놈이 또 따라 나오더니 강변에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것이 여유가 있어 마치 길가는 행인이 발을 쉬는 모습과도 같았다. 


이것을 보고 내가 말했다. 


'저것이 왜병의 척후병 올시다.' 


세록은 정자 기둥에 서서 그쪽을 바라보면서 몹시 수상스러운 눈치를 보였다. 





'왜병 척후가 저렇게 적을 수가 있나요?' 


하고 말하면서 세록은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뚱 거렸다. 


'왜병이란 원래 간사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들의 대병이 뒤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도 나와 척후하는 군사는 두세 명에 지나지 않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마을 보고 소홀히 여겼다가는 반드시 그놈들의 꾀에 빠지고 말지요.' 


라고 말하고 나서 다시 세록을 쳐다보았다. 세록은 그때서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면서 빨리 본국에 보고하기 위해 말에 올라 돌아가 버렸다. 


임금은 좌상 윤두수에게 명령을 내려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이원익 등을 거느리고 평양을 지키도록 했다. 이보다 수 일 전의 일이었다. 


임금이 평양을 떠나고자 한다는 소문을 듣자 성안 사람들은 제각기 도망하기 시작하여 온 고을이 텅 비게 되었다. 임금은 세자에게 명해서 대동관 문 앞에 나가 성안에 사는 부로들을 모아 놓고 타이르게 했다.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은 지킬 작정이니 염려하지 말라.' 


이렇게 타일렀지만 인심은 그렇지 못했다. 


부로들은 앞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동궁마마의 말씀만 가지고서는 백성들의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 친히 나오셔서 말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이튿날 임금은 할 수 없이 관문 앞에 나섰다. 승지를 시켜 그 전날처럼 부로들을 타일렀다. 그때서야 부로들 수십 명은 땅에 엎드려 통곡하면서 서서히 물러갔다. 이에 사람을 놓아 산골짜기에 숨었던 노약을 불러들이니 성안은 사람들로 전과 같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때 벌써 적의 선봉은 대동강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재신 노직 등은 묘사의 위판을 모시고 궁인들을 호위하면서 성문을 나섰다. 이것을 보자 이속과 불량한 백성들이 난은 일으켜 칼을 빼어들고 길을 가로막아 함부로 쳤다. 


위판은 길바닥에 떨어지고 모시고 가던 재신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재신들을 막고 욕설을 퍼부었다. 


'너희들은 평일에는 앉아서 국록을 먹다가 이제 국사를 그르치고 또 백성마저 속이느냐?' 


나는 이때 연광정에서 임금이 계신 곳으로 달려가다가 보니 길 위에 모여 있는 부녀들과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노기가 등등해서 서로 떠들고 있었다. 





'성을 버리고 도망가려면 우리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불러 들여다가 족의 손에 어육을 만들 게 무어냐?' 


궁문에 다다르니 난민이 길에 가득하다. 저마다 웃통을 벗어부치고 칼이나 몽둥이를 손에 들었다. 만나는 대로 후려갈겨서 소란스럽기 짝이 없으나, 이것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문 안에 있는 여러 재상들은 모두 얼굴빛을 잃고 어쩔 줄 몰라 뜰에 서있었다. 


이것을 보니 난민이 혹시 궁문 안으로 들어오는 날이면 어찌나 싶었다. 나는 문 밖 층계 위에 올라 바라보다가 그 중에 나이 먹고 수염 많은 사람 하나를 손짓하여 불렀다. 알아보니 그는 그곳 토관이었다. 조용한 말고 준절히 타일렀다. 


'당신들이 힘을 다하여 이 성을 지키려 하고 또 임금을 성밖으로 자가지 않도록 한다는 것은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지극한 것이라 매우 가상한 일이오. 하지만 이렇게 난을 일으켜 궁문까지 와서 소요를 떤다면 이것은 도리어 불공하기 짝이 없는 일이오. 더구나 조정에서도 지금 임금께 청해서 이곳만은 굳게 지키려는 참이오. 당신의 모양을 보니 식자도 있어 보이니 내 말대로 여러 군중에게 타일러 모두 순순히 물러가게 한다면 모르거니와 그렇기 못한다면 그대들의 지은 중죄는 요서치 못할 것이오.' 


듣고 나자 그 사람은 가졌던 몽둥일 당장 내던지고 손을 모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소인들은 나라에서 이 성을 버린단 말만 듣고 분한 마음에 이렇듯 망동했던 터입니다. 그러 하온데 이제 말씀을 듣고 보니 소인이 비록 우매하고 아는 것도 없아오나 가슴 속이 시원해집니다.' 


그 사람은 모였던 사람들을 쫓아 돌려보냈다. 


원래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조신들은 적병이 가까이 온다는 말을 듣고 모두 피해야 한다고 청했다. 그 중에서도 양사와 홍문관에서 연일 이것을 청했다. 또 인성 부원군 정철 따한 더 한층 평양을 피하자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의논에 반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날 사태는 전전 서울을 떠날 때와는 다릅니다. 서울은 군민이 모두 무너져서 지킬 래야 지킬 방도가 없었지만 이 성은 앞에 강이 막혀 있고 민심도 자못 굳단 말입니다. 또 명나라 땅에 가까우니 우리가 수일만 더 굳게 지키고 보면 중원에서 구원병도 올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형세를 지탱할 수가 있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고 의주로 가 버린다면 다시 버틸 만한 지세가 없어 어찌하지 못할 것이니 나라가 망하고 말 것입니다.' 


좌상 윤두수도 내 의견과 같았다. 나는 다시 정철에게 말했다. 


'평소 나는 생각하기를 공은 강개한 기운이 있어 어려운 일을 피하려 하지 않을 줄 알았더니 오늘날 이럴 줄 뜻하지 못했소이다.' 


옆에 있던 윤두수는 '내 칼을 빌어 아첨하는 신하를 베고 싶노라.' 


라는 문산의 시를 한 쪽 읊었다. 이에 정철은 크게 노하여 옷깃을 뿌리치고 일어서 버렸다. 이런 일이 있었기에 평양 사람들은 내가 이 성을 지키자고 주장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이날 내 말을 믿어 순순히 물러갔던 것이다. 


저녁 무렵 나는 감사 송언신을 불러 말했다. '왜 난민을 진정시키지 못하는가?' 


이렇게 책망하니 언신은 그 난민의 두목 세 사람을 적발해 내다가 대동문 앞에서 목 베어 죽이니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흩어졌다. 이때는 벌써 이 성을 피하기로 결정되었던 때이다. 그러나 한 사람도 어디로 갈 줄은 모른다. 조신들은 다만 북도가 땅이 궁벽하고 길이 험해서 군사를 피할 만하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적은 벌써 함경도를 범해서 길이 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실정을 보고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막연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동지 이희득은 전에 영흥 부사로 있으면서 어진 정치를 해서 민심을 얻었었다. 그래서 함경도 순찰사를 삼았다. 또 병조좌랑 김의원을 종사관으로 삼아 북도에 있게 했다. 


내전과 비번 이하는 먼저 북도를 향해서 떠나도록 했다. 이것을 보고 나는 굳이 반대했다. 


'본래 다시 나라를 흥복시킬 것을 도모하려던 때문입니다. 이제 명나라에 청병까지 하고 있는 터에 너무 북도로 깊이 들어갔다가 중간에서 적병이 길을 끊고 보면 명나라와의 소식도 두리와 서로 통해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고서 더구나 서울을 회복시키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또 지금 적들이 여러 도로 흩어져 있다 하는데 하필 북도만이 적병이 없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불행히 깊은 곳에서 적을 만나기라고 하고 보면 오도 가도 못할 것입니다. 간다면 오직 오랑캐 땅 뿐이니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어디에 의지한단 말입니까? 이제 조신들의 집식구들이 모두 북도로 피난해 가 있는 까닭에 각각 제 생각들만 해서 모두 북쪽으로 가자고 하는 모양입니다. 하오나 신의 노모도 역시 피난길을 떠났다 하옵는데 가 있는 곳을 분명히 알지는 못하오나 필시 강원도나 그렇지 않으면 함경도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신도 저의 사정만 생각하오면 역시 북쪽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오나 국가의 대계를 생각하오면 그렇지 못한 것이 있사와 이토록 간절히 여쭙는 바이올시다.' 나는 목메어 울며 눈물을 흘렸다. 임금도 측은한 빛으로 말씀하셨다. 


'경의 노모를 고생시키는 것도 오직 짐 한 사람 때문이로다.' 


내가 물러나온 뒤에 지사 한준이 다시 임금을 뵈었다. 그도 힘써 북쪽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이때 중전도 드디어 함경도로 향해 떠나고 말았다. 


그때 적은 대동강에 진을 친 지 이미 3일이나 되었다. 


우리들 몇 사람은 연광정에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왜병 하나가 나무 끝에 무슨 종이 한 쪽을 달아 강 위 모개 바닥에 꽂아 놓고 돌아갔다. 우리는 화포장 김생려를 시켜 조그만 배를 타고 가서 그것을 가져오라 했다. 


왜인은 무기를 지니지 않은 체 생려와 악수를 하면서 친절히 그 종이를 주어 보냈다. 


이렇게 하여 그 종이쪽지를 가져왔다. 그러나 윤상은 그 종이를 펴보려 하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이걸 떼어보는 데 해로울 게 무어 있겠소?' 


펴보니 거기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조선국 예조판서 이공각하께 드리노라.' 


이것은 이덕형에게 보내온 편지인 것이다. 이는 평조신, 현소 두 사람이 쓴 것이다. 필시 이는 이덕형을 만나 강화할 목적으로 의논하자는 것일 것이다. 


이에 덕형은 편주를 타고 건너가 평조신과 현소를 강 위에서 만났다. 평일과 같은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현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본이 이제 길을 빌어 중국에 조공하려 하는데 조선이 이를 승낙하지 않아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소이다. 하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길 하나만 내어 우리로 하여금 중국으로 가도록 하면 무사할 것이오.' 


그러나 덕형은 전일의 약속을 어기는 법이 어디 있느냐? 고 책망했다. 덕형은 다시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우선 그대들의 군사를 물리고 나서 다시 강화할 의논을 합시다.' 


이렇게 교섭했으나 조신 등의 언사는 매우 공손치 못했다. 드디어 하는 수 없이 서로 헤어지고 말았다. 이난 저녁 적은 수천 명을 거느리고 강 동쪽 기슭 위에 진을 쳤다. 





6월 11일.(177쪽) 


임금은 마침내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향했다. 이때 대신으로 있던 최흥원, 유홍, 정철,등은 임금을 따랐고 좌상은 원수 김명원, 순찰 이원익 등과 함께 평양에 머물러 있었다. 


나도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기 위하여 같이 머물러 있게 되었다. 


이날 적들은 성으로 쳐들어왔다. 때마침 나는 좌상, 원수, 순찰사와 함께 연광정에 있었다. 평안 감사 송언신은 대동성 문루를 지켰다. 병사 이윤덕은 부벽루 위쪽 강을 지켰다. 


자산 군수 윤우후 등은 장경문을 지켰다. 


성안에 있는 군사들은 도합 3-4천 명이었다. 이들을 성첩에 각각 분배했다. 그러나 대오가 정돈되지 못하여 사람이 무척 많은 데도 있고 또 몹시 적은 데도 있었다. 어떤 곳은 사람이 빽빽하여 서로 맞대고 있는 데도 있었다. 또 어떤 곳은 돔ㅜ지 사람이 없어서 을밀대 같은 데는 옷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놓고 의병을 만들어 적을 속이기도 했다. 


강 건너를 바라보니 적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했다. 동쪽의 큰 마을 기슭 위에 한 줄로 일자진을 벌리고 붉은 깃발과 흰 깃발을 꽂았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 만장 모양과도 같았다. 적들은 말탄 군사 십여 명을 내어 양각도로 향하여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강물은 말허리 까지 찼다. 모두 고삐를 잡고 벌려 서서 장차 일제히 강을 건너려는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 나머지 군사들은 강 위에 오락가락하는데 한두 사람 혹은 두 세 사람씩 칼을 빼어들고 있었다. 그 칼날은 햇빛에 비쳐 마치 번개처럼 번쩍였다. 


이것을 보고 누군가가 말했다. 


'저건 정말 칼이 아니오. 나무를 깎아 칼처럼 만들어 가지고 거기에 백랍을 칠해서 남의 눈을 속이는 거라오.' 하지만 먼 곳이어서 분별할 수는 없었다. 


적병 6-7명은 조총을 가지고 강변 가까이 와서 우리 성을 향해서 총을 쏘았다. 그 소리는 몹시 웅장하고 총알은 강을 건너 성안에까지 날아왔다. 그중에서도 제일 멀리 오는 놈은 대동관까지 와서 지붕 위에 떨어지기도 했다. 몇 천보나 되는 거리인데도 어떤 것은 성루의 기둥에 맞았는데 몇 치나 깊이 박혔다. 


붉은 옷을 입은 왜병 하나가 연광정 위에 앉아 있는 우리를 보고 장수들인 줄 알고 조총을 가지고 눈치를 보면서 모래벌판까지 다가와서 쏘았다. 그 총알은 정자 위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맞추었다. 하지만 워낙 거리가 먼 곳이라서 몹시 상하지는 않았다. 


나는 군관 강사익을 불러 활을 쏘라고 했다. 화살은 강건너 모래 위에 떨어졌다. 이것을 보고 적들은 두리번거리면서 물러가기 시작했다. 


김원수는 다시 활 잘 쏘는 군사를 뽑아 쾌선을 타고 중류에 떠서 적을 향해 쏘라고 했다. 


배가 저편 언덕에 가까워지자 왜병을 피해 달아나지 시작했다. 


우리 군사는 배 위에서 현자총을 쏘았다. 화전이 연달아 쏟아져 강을 넘으니 적들은 이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면서 요란스럽게 흐트러진다. 화전이 땅에 떨어지자 모두들 이를 다투어 주워보고 있었다. 





이날 병선을 정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방 한 사람을 목 베어 죽였다. 


이즈음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강물은 날마다 말라가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재신들은 나누어 단군, 기자, 동명왕의 사당에 각각 비를 빌었다. 그래도 비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나는 윤좌상을 보고  '이곳은 강물은 깊고 배가 없어서 적들이 건너오지 못하고 있소. 상류로 가면 물이 얕은 데도 있으니 적들은 머지않아 그곳으로 건너올 것이오. 이 강만 건너게 된다면 성은 지킬 도리가 없을 것이오. 이리 엄하게 예비해야 할 게 아니겠소.' 


원수 이명원은 워낙 성질이 느긋한 터였다. 


'이윤덕을 시켜서 벌써부터 지키게 했는데요.' 하고 말할 뿐 태연한 태도였다. 


나는 다시 말했다. '이윤덕만 믿고 있을 게 못되지요.' 


나는 다시 옆에 있는 이순찰을 보고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한 곳에만 모여 앉아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빨리 가서 강을 지키도록 하시오.' 


순찰사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가라고 명령만 내리 신다면 진력해서 지켜보겠습니다.' 


그때서야 윤좌상도 순찰사를 보고 명령을 내렸다. '공이 어서 가보시오.' 


이원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당시 나는 왕명에 의하여 다만 명나라 장수만 접대할 뿐이여. 군무에는 참여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적에게 패할 게 분명했다. 하루 빨리 명나라 군사를 중도에서 맞아다가 지원을 받아야만 모든 일이 구제될 것만 같았다. 


날은 벌써 저물었다. 종사관 홍종록, 신경진과 함께 성을 나섰다. 밤이 깊을 무렵 우리는 순안에 당도한 것이다. 중도에서 이양원과 종사관 김정목을 만났다. 그들은 회양으로부터 오는 길이나 하면서 적병은 벌써 철령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튿날 숙천을 지나 안주에 도착하자 요동 진무 임세록이 또 왔다. 나는 공문을 접수하여 임금이 계신 곳으로 보냈다. 이튿날 임금의 행차가 이미 영변을 떠나 박천으로 나갔다는 소식이 나에게 전해졌다. 나는 박천까지 달려갔다. 


임금은 동헌에서 나를 불러 보시고 물었다. '평양은 능히 지킬만 하던가?'(180쪽) 


이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거민들의 마음이 굳어서 지킬 만한 것도 같사오나 그렇다고 그대로 내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한시 바삐 구원병을 보내야 하겠기로 신이 이렇게 와서 뵙는 것은 빨리 명나라 구원병을 맞아다가 평양으로 보내려는 계획입니다. 하오나 이때껏 오지 않았사오니 참으로 걱정되는 일이 옵니다.' 


이때 임금은 윤두수의 장계를 한쪽 손에 들고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였다. 


'어제 벌써 노약자들은 모두 성밖으로 내보냈다 하니 필시 민심이 동요했을 것이오. 다시 무슨 재주로 지킨단 말인가?' 


나는 대답했다. 


'참으로 걱정하시는 바와 같사옵니다. 신이 그 곳에 있을 적에는 이런 일까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대개 그곳 형세가 보면 적병이 반드시 강물이 얕은 곳으로 해서 건너올 것 같습니다. 마땅히 가시철을 물속에 깔아서 방비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이에 그 고을에 있는 가시철을 찾아보니 수천 개가 있었다. 임금은 다시 나에게 말했다. 


'빨리 사람을 시켜 평양으로 보내게 하라.' 


나는 또 아뢰었다. 


'평양 서쪽에 있는 강서 용강 증산 함종 등의 고을은 곡식이 많고 거민도 많이 있습니다. 만일 적병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만 들으면 필경 놀라서 달아날 것이오니 급히 시종 한 사람을 보내어 인심을 수습하도록 하시옵소서. 또 군사를 거두어 평양을 구원하도록 하는 것이 옳겠나이다.'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소.' 


'병조정랑 이유징이 일을 잘 처리하는 도량이 있사오니 보낼 만한 줄 아룁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신은 지금 일이 급해서 오래도록 지체할 수 없아옵니다.' 밤새워 달려가서 명나라 장수를 만나보겠습니다.' 


나는 물러나와 곧 이유징을 불렀다. 임금과 하던 말을 그에게 전하니 유징은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그 곳은 적의 소굴인데 어떻게 간단 말입니까? 


그는 거절하는 물터였다. 


나는 낯빛을 고치면서 말했다. 


나라의 녹을 먹고 있으면서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도리가 아니오. 지금 국사는 몹시 위급하오. 비록 무이나 불 속이라도 가리지 않고 들어가야 할 때가 왔소. 그런데 이만한 일을 못하겠단 말이오? 


유징은 묵묵히 아무 말도 못했지만 원망스런 빛을 보였다. 


나는 이미 떠나겠다고 임금께 말한 터였다. 대동강 가에 이르러 보니 해는 벌써 서쪽으로 기울었다. 광통원 쪽을 돌아보니 들판에 흩어진 졸병들이 하나둘씩 계속해서 오는 것이 보였다. 


이것을 보니 평양은 벌써 적에게 빼앗긴 것이나 아닐까 하는 걱정이 났다. 곧 군관 몇 사람을 시켜 달려가서 알아 오도록 했다. 얼마 안 되어 군관들은 군사 19명을 데리고 왔다. 


이들은 모두 의주, 용천 땅에 있는 군사들로서 평양에 가서 강여울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말을 들어봤다. 


적병은 어제 왕성탄으로 해서 강을 건너 쳐들어 왔습니다. 강 위에 있던 우리 군사들은 모두 흩어지고 이 통에 병사 이윤덕도 도망해 버렸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크게 놀랐다. 


도중에서 글을 써서 군관 최윤원에게 주어 임금이 계신 곳에 갖다 바치도록 했다. 


나는 밤으로 기산군에 들어갔다. 


이날 저녁 내전은 박천에 도착했다. 


내전은 길가던 도중에서 적병이 이미 복도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앞으로 더 나가지 않고 되돌아온 것이다. 


이때 통천 군수 정구가 사람들을 시켜 음식을 보내왔다. 


평양은 마침내 함락되고 임금은 가산으로 옮겼다. 


동궁도 묘사와 신주를 모시고 박천을 거쳐 가산으로 들어왔다. 


처음에 적병은 강 모래 위에 십여 곳으로 나누어 둔치고 풀을 엮어 막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날이 지나도록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어 경비가 자못 해이해 있었다. 


이때 김명원 등은 성 위에 올라 이 모양을 바라보고 밤중에 엄습하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날랜 군사를 뽑아 고언백등을 시켜 거느리게 한 다음 부벽루 아래 능라도로부터 배를 타고 몰래 건너게 했다. 


삼경으로 약속하고 거행하려 했던 것이 그만 시간을 놓쳤다. 강을 건넜을 때는 벌써 동이 훤히 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의 장막 속을 보니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182쪽) 


제1진을 쳐들어가니 적병은 놀라서 어지러워졌다. 우리 군사들은 활을 당겨 적을 많이 쏘아 죽였고, 그중에 토병 임욱경은 앞장서서 힘껏 싸우다가 적에게 죽었다. 그러나 이 싸움에 적의 말을 3백여 필이나 빼앗았다. 


적병은 얼마 안 되어 여러 곳에 있던 군사들을 합쳐서 한꺼번에 진군해 왔다. 


우리 군사는 할 수 없어 강으로 돌아와 급히 배에 올라타려 했으나 이때 배에 있던 사람들이 보니 적은 벌써 뒤에 바싹 따라오고 있었다. 중류에서 미처 배를 갖다 대지 못하여 강몰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나머지 군사들은 왕성탄으로 해서 얕은 곳을 골라 허겁지겁 건너왔다. 


적병은 이것을 보고 비로소 강물이 깊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날 저녁 때, 여울을 따라 건너오는 적병에게 이곳을 지키던 우리 군사들은 화살 하나 소아보지 못하고 모두 흩어져 버렸다. 


그러나 적들은 군사를 모두 건네어 놓고서도 우리 성중에 방비가 있을까 의심해서 진격을 서두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이날 밤 윤두수, 김명원은 건너오는 적병을 보고 성문을 열어 성안 백성을 모두 내보냈다. 군기와 화포를 가져다가 풍월루 못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보통문으로 빠져 도망해서 순안에 도착했다. 


적들은 아군의 뒤를 따르지는 않았다. 


한편 종사관 김신원은 혼자서 대동문으로 나와 배를 타고 물을 따라 강서로 향했다. 


이튿날이 되었다. 적병들은 성 밖에 이르자 모란봉에 올라 오랫동안 성안을 바라보았다. 성안에 아무도 없음을 알고 그때서야 비로소 군사를 몰아 들어갔던 것이다. 


맨 처음 임금이 평양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모두들 양식을 걱정하여 여러 고을의 전세를 거두어 평양으로 보내 두었었다. 


이제 평양이 함락되고 보니 창고에 둔 곡식 십여 만석이 그대로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때 내가 올린 장계는 벌써 박천에 이르렀고, 또 순찰사 이원익과 종사관 이호민이 평양으로부터 와서 말했다. 


적들이 벌서 강을 건너왔습니다. 


이 말을 듣자 임금과 내전 행차는 밤새워 가산으로 향했다. 또 세자에게 명하여 묘사를 받들고 딴 길로 가서 사방에 있는 군사들을 수송하여 형세를 회복할 계책을 도모하라고 했다. 


이에 영의정 최흥원은 세자를 따라갔고, 우의정 유홍은 자기도 세자를 따라가겠노라고 자청했다. 그러나 임금은 대답이 없었다. 


임금의 행차가 이미 떠나자 유홍은 길가에서 엎드려 임금을 하직하고 가려 했다. 내관도 여러 번 우상 유홍이 하직하기를 청한다는 말을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은 종시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유홍은 할 수 없이 동궁을 따라 길을 떠났다. 


이때 윤두수는 평양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임금이 계신 곳에는 다만 정철만이 옛날 재상의 몸으로 행차를 따라 가산에 다다랐다. 때는 벌써 오경이었다. 


행차가 정주에 이르렀다. 


임금이 평양을 떠나면서부터 인심이 흉흉하기 시작했다. 


지나는 곳마다 난민들은 패를 지어가고 남의 창고 속에 들어가 곡식을 약탈해 가는 일이 허다하였다. 


이리하여 순안, 숙천, 안주, 영변, 박천등 여러 고을이 연달아 모두 패했다. 


이날 임금의 행차가 가산을 떠나는데 군수 심신겸이 나를 보고 말했다. 


(183쪽) 


이 고을은 원래 곡식이 많아서 관청에도 백미가 1천석이나 있습니다. 이것으로 명나라 구원병을 먹이려 했던 것인데 불행히 이제 일이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공께서 이곳에 머물러 계시어 민심을 진정시킨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고 보면 고을 주민들이 모두 난동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인도 이곳에 있을 수 없고 부득이 해변을 향해 도망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이미 심신겸은 부하들에게 영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데리고 있는 군관 6명과 도중에서 수습한 패잔병 19명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나를 따르도록 하였으므로 활과 화살을 가지고 내 곁에 있었다. 심겸은 이것을 빙자하여 자기 신변을 보호하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나도 차마 졸연히 떠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 이에 얼마 동안 앉았으려니 날은 벌써 한낮이 지났다. 


다시 생각하니 임금의 명령도 없이 제멋대로 여기 머물러 있는 것도 도리에 어긋난 일이었다. 생각도 못해 할 수 없이 신겸과 작별하고 길을 떠났다. 


효성령에 올라 가산을 돌아다보니 고을 안이 벌써 어지럽기 시작했다. 창고에 있는 곡식도 내버린 채 도망가는 신겸이 보였다. 


이틑 날 임금의 행차는 정주를 떠나 선천으로 향했다. 


나는 정주에 머물러있으라 명령했다. 그러나 거민들은 이미 사방으로 피난하여 흩어지고 늙은 관리 백학송 등 몇 사람이 성안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대 나는 길가에 엎드려 임금의 행차를 보냈다. 그러고 나서 연훈루 아래서 울고 앉아 있었다. 


군관 몇 사람이 좌우 뜰 아래남아 있었다. 도중에서 얻었던 군사 19명도 가지 않고 길가 버드나무에 말을 매고 둘러앉아 있었다. 


저녁 무렵 남문을 바라보니 몽둥이를 든 자들이 밖으로부터 연거푸 들어와 왼편으로 가고 있었다. 군관을 시켜 따라가 보라 했더니 창고 아래 모여든 사람들이 벌써 수백 명에 달한다고 했다. 


혼자 생각해 보니, 내가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란 불과 몇 명에 지나지 않는데, 그렇다고 저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난민이 점점 많아져서 서로 싸운대도 막아낼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차라리 일찍이 쳐서 흩어지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다시 성문을 보니 또 십여 명이 연달아 모여들고 있었다. 


이에 나는 급히 군관을 불렀다. 군사 19명을 데리고 가서 저놈들은 모두 잡아오라고 했다. 


이것을 본 군중들은 모두 도망해 버려서 겨우 그중 9명만을 잡아왔다. 이들의 머리를 풀고 옷을 벗겨 창고 옆 길가에 내세웠다. 


십여 명의 군사들이 그 뒤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창고를 터는 도적놈들은 모두 이렇게 해서 목 베어 죽일 테다. 


저만큼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성안 사람들은 뿔뿔이 헤어져 도망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정주 땅 곡식은 겨우 보전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용천, 선천, 철산등 여러 고을 창고도 난민들이 범하지 못했다. 


정주 판관 김영일은 무인이었다. 그는 평양에서 도망쳐 온 후 자기 처자를 바닷가에 두고 창고의 곡식을 훔쳐내어 보내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그를 불러 꾸짖었다. 


너는 무장의 몸으로 싸움에 패하고서도 죽지 않았으니 그 죄가 크거늘, 하물며 관곡까지 훔쳐내다니 그게 옳은 일이냐? 이 관곡은 앞으로 명나라에서 올 구원병을 위해 둔 것이지 네가 사사로이 처분할 것이 아니다. 


곤장 60번을 때려서 내쫓았다. 


조금 뒤에 윤좌상과 김원수, 무장 이빈등이 평양에서 모두 정주로 왔다. 


원래 임금은 정주를 떠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좌상은 오거든 정주에 머물러 있도록 하라. 


그래서 나는 윤 좌상을 보고 이 말을 전했다. 


그러나 윤 좌상은 대답도 하지 않고 바로 임금이 거센 곳으로 가버렸다. 


나도 또한 김명원, 이빈 등을 남겨두어 정주를 지키게 하고 용천에 계신 임금을 뒤따랐다. 


그러나 이대 그 고을 사람들은, 벌써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민들은 적들이 필시 뒤를 따라올 것이라 생각해서 모두 산골짜기로 숨었다. 길바닥엔 사람 자취 하나 구경할 수가 없었다. 


이곳뿐 아니라 강변에 있는 여러 고을과 강게 등지에서도 모두 이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곽산 산성 아래 이르러 보니 길이 두 갈래로 되어 있었다. 하졸을 불러 물었다. 


이것은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졸들은 모두 귀성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말을 세우고 종사관 흥종록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185쪽) 


[길가에 있는 창고가 모두 비었으니 구원병이 온다 해도 무엇으로 식량을 댄단 말인가. 이 지방에서는 귀성 땅 하나가 가장 지킬 말한 듯싶으나, 이곳도 이속이나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 도망하고 없다니 어떻게 곡식을 운반한단 말인가. 자네는 오랫동안 귀성에 있었으니, 그 지방 사람들은 자네가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산골짜기에 숨었던 사람이라도 나와서 적의 형세를 듣자고 할 것이니 빨리 가보도록 하게, 그 곳 백성들을 보거든 왜병은 아직 평양을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또 중국 구원병이 방금 물려나오고 있어 머지않아 잃었던 땅이 모두 수복될 것이라고 하게, 그리고 다만 양식이 부족한 것이 걱정이니 너희들은 관민 구분 없이 힘을 다해 군량을 운반하고 보면 후일에 반드시 큰 상이 있을 것이라 타이르게, 그러면 후일에 반드시 큰 상이 있을 것이라 타이르게, 그러면 아마 동심 합력하여 모두가 산으로 군량을 수송해 어려움을 면케 될 걸세.] 


종록은 이 말을 듣고서 쾌히 응낙하고 길을 떠났다. 


나는 용천을 향해 떠났다. 


본래 종록은 기축년 옥사에 연좌되어 귀성으로 귀양 가 있었다. 임금이 평양에 다다르자 비로소 불러들여 사個ㅐ?시켰던 사람인데, 사람됨이 충실해서 자기 일신을 잊고 나라 일을 위하여 험한 일도 가리지 않고 할 뜻이 있는 사람이었다.  


행차가 의주에 이르렀다. 


이대 중국 참장 대모와 유격장 사유가 각각 한 떼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향해 오던 중 임반역에 이르러 평양이 이미 함락되었단 말을 듣고는 되돌아와서 의주에 묵고 있었다. 


그때 중국에서는 우리 군사에게 주라고 은 2만 냥을 보내왔었다. 


중국의 관리들과 장령들이 의주에 도착했다. 


이보다 앞서 요동에서는 우리나라에 적들이 침입했다는 말을 듣고 곧 조정에 알렸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까지 있었다. 


하지만 병부상서 석성만은 이 말을 반대하는 우리나라를 구원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때 우리 사신 신점은 마침 옥하관에 있었다. 


요동에서 성상서는 신점을 불러들여 우리나라에 적변이 생겼다고 보고한 문서를 내보였다. 


신점은 이것을 보고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는 일행과 함께 조석으로 구원병을 청했다. 이에 석상서는 황제에게 청하여 두 대의 군사를 내주면서 우리 국왕을 호위하도록 했으며 또 은도 줘서 보냈던 것이다. 


신점을 이것을 보고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는 일행과 함께 조석으로 구원병을 청했다. 


이에 황제에게 청하여 두 대의 군사를 내주면서 우리 국왕을 호위하도록 했으며 또 은도 줘서 보냈던 것이다. 


신점은 통주로 돌아왔는데 우리나라에서 보낸 고급사 정공수도 뒤이어 들어왔다. 


상서는 이들을 방에 불러들여 천히 정세를 묻고는 간혹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사신은 연달아 요동에 들어가 사태가 급함을 알리고 구원병을 청했으며 또 중국에 합병할 것을 청했던 것이다. 


그때 생각으로는 적병이 평양을 함락시키고 보니 그 형세가 강대해서 금시에 압록강까지 치밀어 올라올 것 같았다. 그래서 이같이 위급한 사태가 없다고 하여 중국에 합병하려고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적들은 평양에 들어와 성안에 머물러 있는데 여러 달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평양에서 다시 북쪽으로 올라오지 않은 것이다. 


순안 영유는 평양에서 지척인데도 손을 대지 않고 있는 곳이었다. 


이것을 보고 비로소 차츰 인심을 안정되고 흩어진 군사를 수습할 수도 있었다. 


또한 명나라 구원병을 인도하여 일을 회복시켰으니 아는 참으로 하늘이 한 일이요, 우리네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겠다. 


(187쪽) 


7월에 요동 부총병 조승훈이 구사 5천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나라를 구원하게 되었다. 


이 기별이 먼저 이르렀을 때에 나는 치질로 누워 꼼짝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은 좌상 윤두수를 시켜서 구원병이 오는 길을 닦고 연도에 군량을 준비하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비록 병중일망정 종사 신경진을 시켜서 임금께 글을 올렸다. 


이제 전하가 계신 곳에 현직 대신이라고는 윤두수 한 사람 밖에 있지 않사옵니다. 그러 하온데 그 사람마저 내보낼 수가 있습니까. 신이 이왕 중국 장수를 접대하는 소임을 맡아왔던 터이오니 아무리 병이 있을지라도 나가서 일을 보겠나이다. 


임금도 이글을 보시고 이를 허락하시었다. 이에 초이렛날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행국에 나가 임금을 뵈었다. 임금은 가까이 오라 명했다. 나는 앞에 엎드려 임금께 아뢰었다. 





(187쪽) 


[이제 중국 구원병이 소관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사옵니다. 그들이 정주 가산에 도착하고 보면 군사 5천 명의 하루 이틀 먹을 것은 마련할 만합니다. 하오나 안주 숙천 순안 세 고을은 양식이 하나도 없는 터이옵니다. 그러하오니 명나라 구원병이 이곳을 지날 때는 반드시 3일 동안 먹을 양식을 미리 준비해서 안주 이남에서 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구원병 평양에 이르러, 가는 즉시로 성을 수복하고 보면 성안에 양식이 많이 있은 즉 별 걱정이 없을 것 이옵고, 또 비록 여러 날을 두고 싸운다 하더라도 평양 서쪽 세 고을 에 있는 양식을 부지런히 운반하고 보면 아무런 부족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이런 형편을 짐작하시와 이곳에 있는 여러 대신들로 하여금 명나라 장수와 상의하여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하시옵소서.] 


임금도 듣고 나자 이 말을 옳게 여겼다. 


임금을 뵙고 나와서 길을 떠나려 하는데 임금은 웅담과 납약을 내려주시고 또 내의원 용운이란 사람을 보냈다. 그는 성문 밖 5리 까지 따라와서 나를 전송하면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 사람의 우는 소리는 내가 전문령 고개를 넘도록 그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이날 저녁 소관역에 이르렀다. 


주위를 살펴보니 이졸들은 모두 흩어져 도망해 버려서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군관을 촌락에 보내어 정세를 살펴오라 했다. 얼마 안 되어 군관은 이졸 몇 사람을 데리고 왔다. 이에 나는 그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국가에서 평일에 너희들을 길러온 것은 지금 같은 때에 쓰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먼저 도망을 하다니 이 무슨 꼴이란 말이냐. 지금 중국에서 구원병까지 이르렀으니 공을 세울 때이다.] 


나는 공책을 한 권 꺼내서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성명을 써서 보였다. 


[이 다음날에 이 책을 가지고 너희들의 공과 죄를 등급을 정하여 임금께 아뢰어 상을 주고 벌도 줄 것 이다. 만일 여기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람은 일일이 조사해서 벌을 줄 것이니, 사람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렇게 말해서 그들을 돌려보냈다. 


얼마 안 되어 뒤를 이어 이졸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모두 사죄를 했다. 


[소인들은 마침 볼일이 있어서 나갔던 터 이옵고, 감히 책임을 회피한 것은 아니올시다. 원컨대 그 책에 이름을 적어 주시옵소서.] 


이것을 보고 나는 이곳은 인심을 수습할 수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즉시 이 소식을 글로 써서 여러 곳에 전하여 이와 같은 방법을 취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모여들었다. 나무와 마초도 운반하고 집도 세웠다. 음식도 준비하여 수일 동안에 모든 일이 차츰 수습되었다. 


그러나 난리 속의 백성들이라, 일을 급히 서둘러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지성껏 타이를 뿐이요. 한사람도 매질을 하거나 몹시 꾸짖지는 않았다. 


정주에 이르러서 보니 흥종록이 귀성 사람들을 모두 정주에 이르러서 보니 홍종록이 귀성 사람들을 모두 일으켜 말먹이 콩과 밀을 운반하여 정주 가산으로 옮겨 놓은 것이 이미 2천여 석이 넘었다. 


오히려 나는 안주 이후부터가 걱정이 되었다. 


한데 마침 충청도 아산 쌀 1천 2백여 석이 배에 실려 임금이 계신 곳으로 가려고 정주 입암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몹시 기뻤다. 즉시 임금이 계신 곳으로 나가서 아뢰었다. 


[먼 곳에 있는 곡식이 때마침 기약이라도 한 듯이 와있사옵니다. 이야말로 하늘이 우리에게 중흥할 운수를 줌인가 합니다. 그러하오니 원하옵건대 이 곡식을 가져 다가 군량에 보충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승낙을 얻자 나는 즉시 수문장 강사웅을 입암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쌀 2백석은 정주로, 2백석은 가산으로 또 8백석은 안주로 각각 운반하게 했다. 


그러나 안주는 적병이 있는 곳에 가까운 터여서 잠시 주 첨 강 위에 대고 기다리게 하였다. 선사포 첨사 장우성은 대정강에, 노강 첨사 민계중은 청청강에 각각 중국 군사가 건너갈 부교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먼저 안주에 가서 정세를 살폈다. 이때 적병은 평양에 들어 온지 오래도록 나오지 않고 있었다. 순찰사 이원익은 병사 이빈과 함께 순안에 머무르고 도원수 김명원은 숙천에 있었으며, 나는 안주에 머물러 있었다. 


(189쪽) 


19일에 조승훈은 평양을 치다가 형세가 불리하여 퇴각 했다. 이때 유격 장군 사유는 전사했다. 이보다 먼저 조승훈이 의주에 이르자 사유는 자기 군사를 거느려 선봉이 되었던 것이다. 조승훈은 원래 요좌의 용장이다. 북쪽 오랑캐와 여러 번 싸워서 공을 세우기도 했던 터라, 이번 길에도 왜병을 쉽사리 물리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승훈은 가산에 이르자 우리 군사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평양에 있는 왜적이 아직도 도망하지 않았는가?] 


군사들은 대답했다. 


[아직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승훈이 이 말을 듣자 술잔을 들어 하늘을 향해 빌었다. 


[적이 아직 그대로 있다 하오니 이번에도 하느님은 나로 하여금 반드시 큰 공을 세우게 해 주시옵소서.] 


이날 순안에서 밤 삼경에 군사를 내어 평양을 쳤다. 


때마침 큰 비가 내렸다. 성 위에는 적병이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었다. 군사가 칠성문으로 쫓아 들어가니 성안은 길이 몹시 좁고 꼬불꼬불 하여 말이 맘대로 달리지 못했다. 게다가 적들은 험한 곳에 숨어서 조총을 요란스럽게 쏘니, 이 싸움에 사유는 총알에 맞아 죽었고, 그 밖에 군마도 많이 잃었다. 승훈은 할 수 없이 군사를 물리고 말았다. 


이때 적들은 급히 뒤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승훈의 후군 증 진흙 속에 빠져 도망치지 못한 자는 모두 적에게 죽고 말았다. 


승훈이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순안 ? 순천을 지나 밤중에 안주에 다다랐다. 


그는 성 밖에 말을 세우고 통역관 박의겸을 시켜 크게 외쳤다. 


(190쪽) 


[우리 군사가 오늘 싸움에 적을 많이 죽이기는 했지만, 불행이 유격장군이 전사하고 또 천시가 불리해서 큰비가 내려 진창을 이루었기 때문에 적을 전멸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군사를 더 보충시켜 가지고 가서 싸우려 한다. 너희 정승에게 말해서 조금도 동요하지 말게 하고 또 부교도 없애지 말아라.] 


말을 끝내자 말을 달려 두 강을 건너 공강정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것은 승훈이 그날 싸움에 패해서 몹시 겁이 났던 터로 혹시 젹병이 따라오지나 않을까 해서 두 강을 건너고 이 같이 서둘렀던 것이다. 


이때 나는 종사관 신경진을 보내어 승훈을 위로케 했다. 


한편 양식과 먹을 음식을 보내어 그의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승훈이 공강정에 머문지 2일 동안 날마다 비가 내렸다. 이때 군사들은 모두 들에서 노숙하던 터라, 갑옷이 젖고 고생스러워 모두 승훈을 원망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승훈은 요동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나는 인심이 동요될까 염려하여 임금께 아뢰고, 안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후군이 오기를 기다리도록 했다. 


전라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경상 우수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등과 함께 거제 앞바다에서 적병을 크게 쳐부수었다. 


처음에 상륙하는 적병을 본 원균은 그 형세가 매우 큰데 놀라서 감히 나가서 싸우지도 못했다. 전선 백여 척과 화포, 군기 등을 바닷속에 내다버렸다. 


그는 수하 비장 이영남, 이운룡 등 만 데리고 배 네 척에 나누어 타고 황망히 도망해서 곤량 바다 어귀에 상륙하여 적을 피하려 했다. 이리하여 그가 거느린 수군 만여 명은 모두 없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본 비장 이영남은 이렇게 말했다. 


[공께서 수군절도사라는 높은 자리에 계시면서 이렇게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피하시고 보면 후일 조정에서 죄를 물을 적에 무슨 말로 이것을 모면하려 하시오? 제 생각으로는 전라도에 군사를 청해 가지고 한번 싸워 본 다음에, 만일 그 싸움에 이기지 못하거든 퇴군하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이말을 듣자 원균이 이를 좇았다. 즉시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구원을 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우리에게는 각각 책임을 맡은 분계가 따로 있는 것이오. 그런 터에 조정의 명령도 없이 어떻게 내 맘대로 지경을 넘어갈 수 있겠는가?] 


하면서 한마디로 거절하였던 것이다. 


원균은 5, 6차례나 이영남을 보내어 간절히 청해 보았다. 


또 영남이 순신에게 다녀올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서 앉아서 통곡하였다. 


이윽고 순신은 몸소 판옥선(거북선) 40척을 가지고 이억기와 함께 거제로 나와 원균과 군사를 합쳐 적과 싸우게 되었다. 


이리하여 적병을 견내량에서 만났다. 


순신은 원균을 보고 말했다. 이곳은 바다가 좁고 물이 얕아 배를 싸울 수가 없소이다. 우리는 거짓 도망하는 체하여 적병을 유인해 넓은 곳으로 가서 싸우는 것이 좋겠소. 


그러나 원균은 급한 마음에 금시로 나가 싸우려 했다. 


순신은 다시 주장했다. [그대가 용병할 줄을 알지 못하니, 이러다가는 반드시 패하고 말겠소.] 이렇게 말하고는 깃발을 흔들어 지휘하여 거짓 패해 달아나는 체 했다. 


적병은 크게 기뻐하여 그 뒤를 급히 따라왔다. 


이윽고 넓은 바다에 다다랐다. 


순신의 군사는 북소리 한번 울리자 일제히 뱃머리를 돌려 바다 위에 열을 지어 벌려 섰다. 이때 전선과의 거리는 불과 수십 보 박에 되지 않았다. 


원래 순신은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판자로 배 위를 깔아 그 모양이 마치 거북과 같고 전사와 노 젓는 수부들은 배 안에 들어가 있고 전후좌우로 화포를 싣고 있어 물위를 마치 베 짜는 북과 같이 맘대로 종횡했다. 


적선을 만날 때마다 화포를 쏘는데 여러 배가 동시에 공격을 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고 적의 배는 그 속에서 수없이 불타고 침몰했다. 


이때 적의 장수가 탄,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고 붉은 비단으로 두른 배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배 역시 거북선의 화포에 맞아 깨어졌다. 적의 군사는 모두 물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 뒤에도 여러 번 쌍루 적마다 적은 순신에게 패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부산과 거제로 도망해서 다시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순신은 싸움을 지휘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날아오는 탄환이 순신의 왼편 어깨에 맞았다.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순신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싸움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칼을 가져오라 해서 살을 갈랐다. 살 속에 두어 치나 깊이 박힌 탄환을 꺼냈다. 옆에서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얼굴빛이 변하고 아연해 했으나, 순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이야기하여 평상시와 같았다. 


이 싸움에 이겼다는 첩보는 바로 조정에 전해졌다. 임금은 매우 기뻐하고 순신에게 일품 벼슬을 주려 했으나 옆의 사람들이 반대했다. 이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겨우 정헌부대로 승급시켰다. 


또 이억기, 원균등은 가산대부로 승급시켜 주었다. 


이보다 앞서 적의 장수가 평행장이 평양에 이르러 우리에게 글을 보냈다. 





(192쪽) 


[일본 수군 십여 만이 지금 서쪽 바다로 오는 중이오. 그렇게 되면 대왕의 행차는 장차 어디로 가시렵니까?] 이렇게 위협했다. 


원래 적들은 수륙 양면으로 군사를 합세하여 서쪽으로 치려했었다. 그러나 순신과의 싸움에 패해서 그들은 위세를 크게 꺽이고 말았다. 그래서 행장이 평양을 얻기는 했으나 형세가 위태로워 감히 더 진격하지 못했다. 


우리 국가가 보존된 것은 오로지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에 전라 ? 충청도로부터 황해 ? 평안 각도의 연안 일대에 군량을 준비시키고 전령을 내려 중흥을 도모했던 것이다. 


또 요동, 천진 등지에 적의 발자국이 들어가지 못한 까닭에 구원병이 육로로 나와 적을 물리친 것도 또한 모두 순신이 이 싸움에 이긴 공이었다. 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닐까 보냐! 이 뒤로 순신은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한산도에 머물러 있으면서 적들이 서쪽으로 오려는 길을 막았다. 


전 의금부 도사 조호익은 군사를 모집하여 강동에서 적을 토벌했다. 


호익은 창원 사람이다. 원래 지행이 있었으나, 남에게 무고를 당하여 온 집안이 모두 강동으로 이사해 살았다. 집이 가난해서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쳐서 20여넌 동안 겨우 연명을 하고 살았다. 하지만 그의 굳은 지조는 말할 수 없이 강한 터였다. 


이때 임금의 행차가 평양에 이르자, 호익은 죄를 용서 받고 의금부 도사로 임명되었다. 그런 뒤에 평양이 적병에게 포위되자, 호익은 급히 군사를 모집해서 위급한 평양을 구원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금 뒤에 평양이 함락되고 군민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니, 호익은 할 수 없이 다서 임금이 계산 곳으로 가다가 양책역에서 나를 만났다. 


나는 그를 보고 말했다. 


[이제 구원병이 올 것일세, 그대는 의주로 가지 말고 강동으로 다시 가서 군사를 더 모아가지고 오도록 하게. 그래서 구원병과 평양에서 합쳐 군세를 돕는 것이 좋겠네.] 


호익도 내 말을 듣자 그대로 시행했다. 


나는 이 사유대로 임금께 글을 올렸다. 그리고 기병문을 호익에게 주어 돌리게 했다. 또 군기도 더 나누어 주어 보냈다. 


그 뒤로 호익은 내 말대로 강동으로 갔다. 군사 수백명을 모아가지고 상원으로 나와 진쳤다가 적병과 싸우면서 많은 공을 세웠던 것이다. 


호익은 본래 한낱 서생이었다. 궁마에 능하지도 못하였지만 오직 충의로써 군사들의 마음을 격려했던 것이다. 그는 동짓날 사졸을 거느리고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하여 4배를 하고 밤새도록 통곡하니 군사들도 따라서 울었다 한다. 


적의 군사가 전라도를 침범하자 김제 군수 정담과 해남 현감 변응정 등이 힘써 싸웠다. 


이 싸움에서 적벙을 수없이 활로 쏘아 죽이니 적들은 이를 저항하지 못하고 물러서려 했다. 날은 이미 저물고 설상가상으로 화살도 떨어졌을 때 적병들이 다시 힘을 내어 쳐들어 왔으므로 두 사람은 할 수 없이 그 자리에서 전사했고 그가 거느렸던 군사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 이틑 날, 적들이 전주에 이르자 관리들은 도망치려 했다. 전주 사람으로 전에 진적을 지낸 이정란이 입성하여 이속들과 백성들을 일으켜 성을 굳게 지켰다. 


당시 적은 정예병들을 웅령(곰제)에서 많이 잃어 사기가 이미 땅에 떨어져 있었다. 


전라감사 이광도 성 밖에서 의병을 만들고, 낮이면 기치를 수없이 꽂아 위엄을 보이고 밤이 되면 온산에 횃불을 만들어 적을 속였다. 


적병은 성 밑에 이르러 몇 번이나 돌아다니면서 형세를 살폈다. 그리고는 감히 싸우지 못하고 그대로 가버렸다. 


적들은 물러가다가 웅령에서 전사한 우리 군사들의 시체를 거두어 길 옆에 묻고, 큰 무덤을 몇 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말뚝을 세워 이렇게 썼다. 


(193쪽) 


[조선국의 충성스런 심간과 이로운 담기를 조상하노라.] 


이는 우리 군사들이 힘써 싸운 것을 가상히 여긴 것이었다. 


이리하여 전라도만이 홀로 온전하였다. 


8월 초하루. 


순찰사 이원익과 순변사 이빈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에 나가 치다가 형세가 불리하여 도로 물러났다. 그때 이원익과 이빈은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순안에 둔쳤다. 


별장 김응서등은 용강, 삼화, 증산, 강서등 네 고을의 군대를 20여개로 나누어 평양 서쪽에 둔쳤다. 김억추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하류에 머무르면서 서로 기각의 형세를 취하려 했다. 이날 원익등은 평양성 북쪽으로부터 군사를 몰고 나가다가 적의 선봉을 만나 20 여 명을 쏘아 죽였다. 


이윽고 적의 군사가 크게 몰려왔다. 우리 군사는 모두 놀라서 흩어지고 강변의 용사들이 많이 다쳤다. 이래서 할 수 없이 순안으로 물러가 둔치게 되었다. 


9월에 명나라 유격 장군 심유경이 왔다. 조승훈의 군사가 패한 뒤로 적들은 더욱 교만해져서 아군에 글을 보내기를 양떼가 범을 치는 것과 같다. 고 하였으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양은 중국 군사들이요, 범은 저들을 가르킨 것이다. 


유경은 본시 절강 사람으로 석상서가 짐짓 왜의 정세를 살피고자 거짓으로 유격장군이란 이름을 붙여 서 보냈던 것이다. 유경은 순안에 이르자, 왜장에게 글을 보내어 황제의 명으로 꾸짖었다. 


[조선이 일본에 무슨 잘못이 있기에 군사를 내어 이러한 난리를 일으키는고?] 


이때 왜국에는 졸지에 변이 일어나서 그 여파가 매우 컸는데, 우리는 모두 두려움에 잠겨 있는 판이어서 누구도 감히 그들의 병영을 엿보는 자가 없었다. 유경은 심부름꾼이 노란 보자기에 편지를 싸가지고 보통문으로 들어가니, 왜장 행장이 받아 보고는 이내 만나서 상의하자는 회보를 써 보내었다. 유경은 즉시 서둘러 떠나려 하였다. 그러나 주위에서 위태로운 짓이라고 적극 만류하였다. 유경은 태연히 웃으면서 [저들이 어찌 나를 해칠까보냐] 하면서 3, 4명의 심부름꾼을 데리고 왜진으로 건너갔다. 


행장과 의지 현소등은 군기를 크게 벌여 위세를 돋우고 성 북쪽 십 리 밖 강복산 아래에까지 나와서 맞았다. 우리 군사는 대흥산 꼭대기에 올라 바라보고 있었다. 왜군은 수가 매우 많아 검극은 눈과 같았다. 우경이 말에서 내려 적진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면에서 왜군이 그를 에워 싸는게 아닌가! 그가 사로잡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유경은 날이 저물녘에 돌아왔다. 더구나 왜군은 무리를 지어 나와 공손히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날, 행장한테서 문안하는 글이 왔는데 대인께서는 칼날 가운데서도 얼굴빛이 변치 않으니, 우리 일본사람으로서도 이에 미치지 못하겠소이다. 하는 구절이 있었다. 


이에 유경이 회답하기를 [너는 우리나라의 곽영공이란 사람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그는 단기로 회홀의 만군 중에 들어갔으되 조금도 두려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너를 겁내겠는가?] 하였다. 


그는 다시 왜에 약속하면서 [내가 돌아가 우리 황제께 보고하면 반드시 무슨 처분이 있으실 것이니, 50일 동안 기약하되, 왜병은 약탈하러 평양성 십 리 밖에 나오지 말 것이며, 모두 푯말을 세워 경계를 삼을지니라.] 하였으나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예측하지 못하였다. 


경기감사 심대가 적의 습격을 받아 삭녕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대는 사람됨이 강개하여 왜변이 있는 후로 항상 우울한 기색으로 지냈으며, 나라일로 전지를 출입할 때에도 험한 곳을 가리지 않았는데, 이해 가을에 권징을 대신하여 경기 감사가 되었던 것이다. 


임지로 갈 때, 그는 안주를 지나다가 나를 찾아왔었다. 


백상루에서 담소를 하는데, 이야기가 국란에 이르자 개연한 안색을 지으며 자기가 직접 싸움터에 나가서 적과 싸울 뜻을 보이는 것이었다. 


[옛 사람의 말에 가는 길은 종에 물으라. 하지 아니할세. 그곳에 양주 목사 고언백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용력이 있고 싸움에 익숙하네. 그대는 뒤에서 군병이나 수습해 주고 언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싸우게 하면 공을 세울 것이니 결코 직접 나서지 말도록 하게.] 


내가 경계하여 일렀으나 심대는 그저 대답만 예! 예! 할 뿐이었다. 


적들이 있는 곳으로 혼자 떠나는 심대를 보고 나는 활을 잘 쏘는 의주 사람 군관 장모를 딸려 보냈다. 


그후 수개월 동안 경기도에서 임금이 계신 곳으로 보고를 하러 안주를 지나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그는 나에게 글을 보내 문안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 사람에게는 경기도에 있는 적의 형세와 감사의 동정을 물었다. 


(196쪽) 


[경기도는 다른 데보다도 적의 발호가 한결 심해서 매일같이 불 지르고 약탈하여 평안한 곳이 없습니다. 전의 감사 및 수령 이하는 모두 깊은 곳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거나, 변장을 하여 몰래 다니거나, 이리저리 옮겨 다녀 거처를 일정하지 않게 하여 적의 화를 방지하려 하였는데, 새로 부임해 온 감사께서는 조금도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매양 순찰을 다닐 때에는 평시처럼 먼저 공문을 띄워 알리고, 깃발을 꽂아 젓대를 불면서 행차 한답니다.] 


이러한 말을 들은 나는 매우 근심이 되어 조심하라는 글을 보냈다. 


그러나 심대는 듣지 않았다. 군사를 모으려 하니 군사들이 자진해서 모여들었으며, 서울을 다시 찾겠노라고 공언하는 것이었다. 


심대는 어느 날 성중에 사람을 보내어 내응할 사람을 모집했다. 


성중 사람들은 만일 적을 물리친 뒤에 적들에게 협력 했다는 죄를 뒤집어쓸까 겁내서 연명장을 써가지고 감사에게 내응할 것을 약속해 왔다. 


스스로 내응하겠다고 하는 자들이 하루에도 많은 수에 달하였다. 그들은 약속을 한다는 둥, 군기를 실어 온다는 둥, 적정을 보고 한다는 둥 하여 사람들의 내왕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이 일은 적에게 누설되고 말았다. 적들은 여러 차례 우리의 동정을 살피러 와서는 어지러이 출몰했다. 


그러나 심대는 내응자의 보고만 믿고 의심치 않았다. 이때 심대는 삭녕군에 있었다. 


적들은 이를 염탐해서 알아내고 말았다. 적들은 몰래 큰 여울을 건너 밤에 습격해 왔다. 대는 깜짝 놀라 일어나 옷을 걸쳐 입고 도망쳐 달아났다. 그러나 적이 뒤를 쫓아 살해하였고 군관 장모도 역시 함께 죽었다. 


저기 물러간 후, 다시 나타난 적들은 심대의 시체를 찾아내어 그 머리를 종로 길거리 위에 매달아 놓았다. 그런지 5, 60일이 지났으나 대의 얼굴빛은 오히려 산 사람과 같아, 이를 보는 서울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그의 충의에 감복한 사람들은 재물을 모아 지키는 왜병에게 뇌물을 주고 머리를 찾았다. 그 머리를 목함에 넣어 강화로 보냈다가 적이 물러간 뒤에 찾아다가 시체와 함께 고향에 장사지내 주었다. 


심대는 본이 청송이요, 자는 공망이다. 그의 아들은 대복인데. 조정에서는 심대의 옛일로 해서 현감 벼슬을 주었다. 


강원도 조방장 원호는 적을 귀미포에서 쳐 무찌르고, 또 춘천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죽음을 당했다. 이때 적의 대진은 충주와 원주에 있었는데, 영책이 서울까지 연달아 있어 충주에 있는 적들은 죽산, 양지, 용인길을 거쳐 왕래하고, 원주에 있는 적들은 지평, 양근, 양주, 광주에 거쳐 서울로 오고자 했었다. 


원호는 여주 귀미포에서 적을 쳐서 섬멸하고, 이천 부사 변응성은 또 활 쏘는 군사를 베에 싣고, 안개가 자욱한 틈을 타 적을 여주의 마찬에서 맞아 싸워 많이 죽였다. 


이 까닭에 원주의 적로가 끊어지매, 적들은 모두 충주 길을 거쳐 올라오게 되었다. 


이로써 여주, 양근, 지평의 읍민들은 적의 칼날을 면했으니, 사람들은 이를 원호의 공이라고 말했다. 


순찰사 유영길은 원호에게 춘천으로 가서 다시 적을 치라고 재촉하였다. 


원호는 싸움에 이기자 자못 적을 만만히 보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적은 원호의 군사가 올 것을 알고 군사를 매복시키고 기다리고 있었다. 원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나가다가 복병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강원 일도에는 적을 막을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게 되었다. 


한편, 훈련 부봉사 권응수, 정대임등 이 향병을 거느리고 영천에 있는 적을 쳐서 이겨 드디어 영천을 수복했다. 


응수는 영천 사람으로 담력과 용맹이 있었다. 대임과 함께 향병 천여 명을 거느리고 영천에서 적을 포위했으나 우리 군사들은 두려워해서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했다. 


이에 응수는 칼을 빼어 몇 사람을 쳐 죽이니 그제야 군사들은 앞을 다투어 성을 넘어 들어가서 적을 습격했다. 


이때 적은 혹 창고 속으로 도망하고, 혹 명원루로 올라가기도 했는데 그대로 불을 질러 전멸시키니, 그 냄새가 몇 라 밖에까지 풍겼다. 남은 수십 명은 도망하여 경주로 달아났다. 


이로부터 신영, 의홍, 의성, 안동 등지에 있던 적들이 모두 한쪽 길로 모였기 때문에 좌도의 군 ? 읍에서는 난을 면했으니, 이는 영천 싸움이 공이었다. 


좌병사 박진은 경주를 수복했다. 


진은 처음에 밀양에서 달아나 산 속에 들어가 있었다. 


조정에서는 전 병사 이각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하여 그를 찾아 목 베이고 대신 박진을 병사로 삼았다. 


이때 적병은 그 도내에 가득히 들어와 행조의 소식이 남쪽 지방에 끊긴 지 오래여서 인심은 한층 동요되어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런 중에 박진이 병사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흩어졌던 백성들이 차차 모이고 수령도 산골짜기에서 다시 나와 나라 일을 보게 되니, 비로소 조정이 있는 듯하였다. 


(198쪽) 


권응수가 영천을 회복하자, 박진이 좌도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 성 밑까지 진병해 나갔다. 그러나 적은 북문으로 나와 진의 후군을 엄습했기 때문에 진은 하는 수 없이 안강으로 돌아갔다. 


진은 그 밤으로 다시 성 밑에 군사를 잠복시켜서 비격진천뢰를 성안에 대고 쏘니 객사 마당에 떨어졌다. 


적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서로 다투어 모여들어 구경했다. 조금 있더니 폭탄이 속에서 저절로 터져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폭음이 나면서 철편이 무수히 흩어지니, 여기에 맞아 즉시 죽은 자가 30여 명이요, 직접 맞지는 않았어도 놀라서 쓰러지는 자가 많았다. 살아난 자들도 한참 만에 일어나서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그 제도를 알지 못하니 모두 귀신이 한 것이라 생각하고 이튿날 드디어 모두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달아났다. 이리하여 진주 경주 성안에 들어가 만여 석의 곡식을 얻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박진을 가선으로 올렸고, 응수는 통정으로, 대임은 예천군수로 삼았다. 진천뢰란 원래는 없었던 것으로, 군기시의 화포장으로 있는 이장손이란 자가 창안해 낸 것이다. 이것은 진천뢰를 대완구포로 쏘아서 5, 6백보 밖에 떨어지게 하고, 땅에 떨어진 뒤 잠시 후에 저절로 터지게 만든 것으로, 적들이 가장 두려워했다. 


그때 각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친 자가 많았다. 


우선 전라도에서는 전 판결사 김천일, 첨지 고경명, 전 영해 부사 최경희등이 있었다. 


천일의 자는 사중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경기도에 이르니, 조정에서 그를 가상히 여겨 창의라는 군호를 주었다. 그러나 결국 일을 이루지 못하고 강화로 들어갔다. 


또 경명의 자는 이순이니, 맹영이 아들로서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역시 향병을 거느리고 군헌에 격문을 돌려 적을 치도록 하였으나 적과 싸우다가 패해 죽었다. 그 아들 종후가 그를 대신하여 군사를 거느렸으니 이를 복수군이라 하였다. 


경희는 뒤에 경상 우병사가 되었다가 진주 싸움에서 죽었다. 


경상도에 있어서는 현풍 사람 곽재우, 고령 사람 전 좌랑 김면, 합천 사람 전 장령 장인홍, 예안 사람 전 한림 김해, 교서정자 유종개, 초계 사람 이대기, 군위교생 장사진등이 있었다. 


재우 는 월의 아들로서 자못 재략이 있는 터로 적과 여러 번 싸웠는데, 적들이 모두 이를 두려워하고 꺼렸다. 정진을 굳게 지켜 적으로 하여금 의령 지경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곧 재우의 공이라 하겠다. 


면은 무장 세문의 아들로서 거창 우척현에서 적을 막아 여러 번 적을 물리쳤다. 이 소문이 들리자 조정에서는 그를 우병사로 올려 썼으나 병으로 군중에서 죽고 말았다. 


또한 종개는 군사를 일으킨 지 얼마 안 되어 적을 만나 죽음을 당하니, 조정에서는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중직으로 예조참의를 제수했다. 


사진은 전후에 직병을 쏘아 죽인 수가 많아 적들이 그를 장장군 이라 부르고 감히 군위 지경을 범하지 못했다. 어느 날 적들은 군사를 매복하고 사진을 유인하여 궁한 지경에 빠뜨리고 말았으나 사진은 오히려 큰 소리를 지르면서 힘껏 싸웠다. 그러나 사진의 군사들에게는 화살이 모자랐다. 적들은 달려들어 그의 한쪽 어깨를 칼로 쳐서 떨어뜨리니 사진은 그래도 한쪽 팔로 한참 동안이나 적을 치다가 마침내 힘을 다하여 죽고 말았다. 이것을 들은 조정에서는 그에게 중직으로 수군절도사를 주었다. 


충청도에 있어서는 중 영규를 비롯하여 전 제독관 조헌, 진 청주목사 김홍민, 서얼 이산겸, 선비 박춘무, 충주 사람 조덕공, 내금위 조웅, 청주 사람 이봉등이 있었다. 


영규는 원래 용력이 있고 잘 싸워서 조헌과 함께 청주를 수복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 적에게 패해서 모두 죽고 말았다. 


조웅은 더욱 용감한 사람이다. 특히 말 위에 서서 달리기를 잘하여 적을 많이 죽였으나 그도 또한 전사했다. 경기도에는 전 사간 우성전, 진정 정숙하, 수원 사람 최흙, 고양 사람 전사 이노, 이산휘, 전 목사 남언경, 유학, 김탁, 전 정랑 유대진, 충의위 이질, 서얼 홍계남, 선비 왕옥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 계남은 제일 용맹스러웠고, 그 나머지는 제각기 자기 동리에서 혹 백명, 혹 수십명씩 사람을 모아 가지고 의병이라 하여 군사를 일으킨 자가 셀 수 없이 많았으나, 기록할 만한 공적은 하나도 없고 모두 날짜만 보낼 뿐이었다. 


유정은 금강산 표훈사에 있던 중이다. 금강산에 들어온 적을 보고 딴 중들을 모두 도망했으나 유정은 홀로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적들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혹 합장해 절하고 되돌아가기도 했다. 


이들이 도착되매, 유정은 그것을 불탁 위에 펼쳐 놓고 중들을 불러 같이 읽으면서 울다가, 드디어 승군이 일으켜 서쪽으로 가서 임금을 도왔다. 그가 평양에 이르자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평양성 동족에 둔치고 순안군사와 합세하였다. 종실 호성감도 또한 백여 명을 거느리고 임금이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이것을 보고 조정에서는 그를 호성도정으로 삼고 순안에 둔쳐 대군과 합세하도록 하였다. 북도에서는 평사 정문부와 훈융 첨사 고경민 등이 가장 공이 컸다. 


이일을 순변사로 삼고 이빈을 임금이 계신 곳으로 불려 왔다. 처음에 이일은 대동강 여울을 지키고 있었다. 


평양이 함락되자 강을 건너 남쪽으로 들어가 황해도 안악을 거쳐 해주로 갔다. 해주에서 다시 강원도 이천으로 가서 세자를 따라 수백명 가량의 군사를 모집해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적병이 평양에 들어갔단 말을 듣고 오랫동안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다시 중국 구원병이 장차 온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평양으로 돌아왔다. 임원평에 진을 치고 평양 동북쪽 십여 리를 머물러 있으면서 의병장 고충경과 함께 힘을 모아가지고 적을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다. 


한편 이빈은 순안에 있었다. 


진병할 때마다 패하니 무군사 종관은 모두 이일과 바꾸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원수 김명원만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빈이 무군사와는 의견이 맞지 않아 서로 싸우고 있단 말이 들려왔다. 


조정에서는 나로 하여금 순안 군중에 가서 이를 진정시키라 하여 나는 순안에 이르렀었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은 이일의 실력이 빈보다 낫다고 말했고, 또한 구원병이 장차 이르고 보면 빈은 그 책임을 맡아 보지 못할 거라고 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이일로 하여금 순변사를 삼고, 대신 박명현으로 하여금 일의 군사를 거느리게 했다. 그래서 빈은 임금이 계신 곳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적의 간첩 김순량을 사로잡았다. 


(201쪽) 


그해 12월 초이틀, 나는 안주에서 군관 성남으로 하여금 전령을 가지고 수군장 김억추에게 보내어 적을 공격할 일을 비밀리에 알리도록 했다. 


그리고 경계하기를, [앞으로 6일 안에 이 전령을 다시 돌려보내도록 하라] 고 하였다. 


그러나 기일이 지나도록 전령을 보내오지 않으므로, 이에 성남에서 사람을 보내어 추궁했다. 그의 대답은 벌써 강서 군사 김순량을 시켜서 보냈다는 것이다. 


김순량을 잡아다가 전령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횡설수설이라 종잡을 수가 없다. [순량이 전령을 가지고 나가더니 며칠 뒤에 소한 마리를 끌고 군중으로 들어와 잡아먹었습니다. 이소가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일가 집에서 먹이고 있던 것을 찾아온 것이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자의 행동이 수상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나는 비로소 순량을 엄하게 고문하여 실정을 말하도록 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소인은 적의 간첩이 되었었습니다. 그리고 상으로 소 한 마리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이 일한 서한룡에게는 비단 다섯 필을 주었습니다. 다시 딴 비밀을 탐지하여 15일 안에 와서 보고할 것을 약속하고 나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다시 말했다. [그러면 이러한 간첩은 너뿐이냐, 너 이외에 또 몇 명이나 있느냐?] 하고 물으니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모두 40여 명이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순안 강서 등 여러 진에 흩어져 있고, 숙천 안주 의주 등지에도 들어가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가서 보고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듣자 나는 몹시 놀랐다. 


곧 임금께 장계를 올리고 각 진에도 각각 통지해서 이런 자를 잡아내도록 했다. 그랬더니 혹 잡기도 하고, 혹 놓쳐 버리기도 했다. 순량은 성 밖에 내다가 목 베어 죽였다. 이런 일이 있는 지 얼마 안 되어 중국 구원병이 왔다. 


그러나 적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동안 간첩들이 놀라 달아났기 때문이었으니, 이 역시 사기의 우연한 일이라 하겠으나, 한편 생각하면 또한 하늘의 도움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