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자렛 예슈아도 틀렸다. 원수를 사랑하라? 왜 그래야 하는가? 원수는 원수인 것을 원수는 증오하고 원수가 아닌 자를 사랑해야지. 원수를 사랑하면 원수가 넘처날 뿐이다. 이것 또한 제대로 된 것이 아닌 원형이 거짓과 악에 의해 이용되고 변형된 것이다. 원수를 미워하라 하지만 내 안의 증오는 키우지 마라. 이것이 바르고 제대로된 나자렛 예슈아의 원형의 말이다.
정확히는 그 말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틀렸다. 그 말은 진리나 그 말은 신이나 그 말을 이용하는 자는 쓰느 자는 진리가 아니니 신이 아니니 3위 일체가 아니니 그 말을 입에 담지고 퍼트리지도 마라. 그저 생각만 해라.
입 밖에 내지 마라. 입 밖에 내는 순간 세상은 하니 빛이 물러남이다.
거짓과 진실의 여과필터 의심을 신용과 믿음
언제나 거짓을 걸러내야 된다. 여과필터는 항상 작동 해야 한다.
진실만 하고 살아간다 내면과 외면 모든 부분에서 그러나 처음부터 잘 될 수 없다 하다보면 잘하게 되니까.
아마 사회에서 배척받아온 자들이 하는 외로움을 달래는 방편이 아닐까? 사람은 어딘가 쓰여야 된다. 선에게 쓰이지 못한다면 사람은 악에게 쓰이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 나름의 또 선을 발전시키는 토대와 사건이 된다. 사람을 악에게 까지 밀어 내면 안된다. 사람이 무너질 때까지 밀면 안된다. 절벽에 떨어지느니 차라리 앞의 사람을 죽이고 밟고 올라갈 테니
의심하냐 되려 묻는 자가 의심을 사는 자이기에 의심하라.우리는 상대평가를 버리고 절대평가를 취해야 합니다. 상대평가는 나태와 시기 질투를 낳고 절대 평가는 자신의 본위와 자긍심 발전을 낳습니다. 위대한 아버지 절대평가를 저와같이 숭배하세요.
내기 쓰는 언어는 니들이 쓰는 언어와 같으면서 다르다. 내 언어는 니들이 쓰는 단어와 깊음의 차이와 대나무와 같은 구별의 차이가 확연히 다르다. 혼돈하지 아니하고 맑은 청명한 봄의 절기 날씨와 같다. 봄이 좋은 이유는 청명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의 재질 색감 색채 깊음 위에 더 깊음
거짓말하는 자와 도둑놈은 이음동의어다. 거짓말 하는 자는 신의 말씀이 적힌 성경이나 불경 조차 그 힘을 훔쳐서 자신의 권위로 두른다. 신이 지켜보지 않는다도 그 틈을 타 훔쳐서 자신의 권위로 만드는 역겨운 신의 피조물, 신이 만든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며 면전에 구토를 할 자들. 바로 가짜현존 저세끼처럼 새로 쓰지 않는다. 말을 모두 크고 작던 씨앗이다. 새와 새는 동음 이의어 기에 혼돈의 여지가 있어 새 대신 세를 쓴다. 물론 세도 세와 동음이의어 지만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다
생각과 선택은 직선이 아닌 곡선이 되어야 된다. 직선은 1차원이지만 곡선은 위아래가 있는 2차원이다. 그것에 발전시켜 우좌 3차원까지 한다면 모두가 평화지경에 이를 수 있으리라.
선택는 작용과 반작용 반응과 반응 1차원적인 직선이다. 이 선이 곡선이 되어 2차원 볼 수 없는 것을 불가능 하다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준다.
통합이 되려면 물리와 인문 모두 알 아야 된다. 다름이 아닌 하나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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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혼의 형제 도스토예프스키 이름에서 창조의 도를 찾았다.
창조란 이런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ㄷ가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ㄷ 기반 ㅌ가 만들어진다. 절대 토스도예프스키가 만들어 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삿된 바람으로 토스도예프스키라고 해왔다. 마법을 꿈꿔왔지만 마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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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체가 될 수 없다. 나는 전체의 일부 일 뿐. 내가 전체의 일부로 전체가 되려 해봤지만 전체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일부로 전체가 될 수 있을까 전체와 일부는 같은 법이 쓰이고 적용되니 일부와 전체는 다르지 않다 같다. 그러니 나는 세계인 것이고 세계는 나인 것이다. 나와 세계는 다른 게 아닌 그저 구분되어있는 일부로 써 전체다.신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아무 이유도 근거도 없고 하나님이 왜 인격체입니까? 아무 이유도 근거도 없고 무논리와 감정에 의해서 쓰여진 쓰레기 같은 글
거짓말을 당장 그만 둬라. 불가능이 가능하게 되니까. 눈의 코 앞에 앞에 있는 진리를 볼 수 없는 건 거짓이 있기 때문에 말해줘도 평생을 거짓과 함께 하면 절대 볼 수 없다. 너무나 당연한 것에 눈 돌리고 진정한 행복도 느끼지 못하고 진정한 환희도 느끼지 못함 진정한 황홀경고 느끼지 못한다. 온 세상 천지가 모두 가 하나님인데 너도 나도 모두 땅도 바다도 하늘도 공기도 시궁창도 쥐도 사람도 짐승도 천인도 원자 하나 분자하나 전자하나 양력 강력 모두 하나님의 의지인데 왜 그렇게 어리석에 세계를 분리해서 보는 가
어제야 비로소 공자와 모하메드의 반열에 한 씩 닿았고 앞섰다. 공자의 생각을 말을 추학한 니들의 생각으로 남을 선의가 아닌 이용만하려는 니들의 생각으로 번역하니 그토록 이기적인 논어가 나온 것이다.
宰我問 "三年之喪, 期已久矣. 君子三年不爲禮, 禮必壞, 三年不爲樂, 樂必崩, 舊穀旣沒, 新穀旣升, 鑽燧改火, 期可已矣." 子曰 "食夫稻, 衣夫錦, 於女安乎?" 曰 "安." "女安則爲之. 夫君子之居喪, 食旨不甘, 聞樂不樂, 居處不安故, 不爲也. 今女安則爲之." 宰我出, 子曰 "予之不仁也. 子生三年然後, 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予也, 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
재아가 물었다.
"부모에 대한 삼년상은 너무 깁니다. 위정자가 3년 동안 예식을 시행하지 않으면 예식이 반드시 폐기되고, 3년 동안 음악을 하지 않으면 음악이 전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묶은 곡식이 다 할 무렵은 바로 새 곡식이 여무는 때입니다. 불씨를 뚫어 불을 피우는 것처럼 1년이면(期)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이니 1년만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공자께서 물으셨다.
"부모 돌아가시고 1년 만에 기름진 음식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면 너는[1] 편안하겠느냐?"
"편안합니다."
"네가 편하다면 그렇게 해라.
공자처럼 위대한 자를 낳은 조상과 부모라면 원소에 이어 9년상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닐까? 내 부모는 훌륭한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러니 모른다. 이 나라는 훌륭한가? 나는 훌륭한가? 소카라테스 나는 훌륭하지 않다. 미비하다. 내 느끼기에. 그런데 왜 타인에게 훌륭함을 찾는가? 그저 세파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는 갈대 였슴을 깨닫는 구나. 누구도 누구를 공격하지 않으면 그게 곧 감동의 눈물과 영구토록 이어질 평화 아니겠는가.
니들의 부모의 사랑은 몇년인가? 몇개월인가? 몇일인가? 아니 몇시간인가 몇분인가? 몇 절기인가?
부모란 어차피 긴 세월새 만나도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것일 뿐이니 헤어짐을 슬퍼하지 마라.
내는 내 부모의 사랑은 하루도 아니라고 하고 싶다. 외치고 싶다. 부정하고 싶다. 제멋대로 지껄이는 것들. 부모가 사랑을 줘야 자식은 부모에 효를 한다. 부모가 자식에 정성을 다해야 자식은 부모에 정성을 다한다. 공자가 한 말은 이것이지만 니는 인하지 못하다는 그저 공자의 말 조차 이용해 먹는 그래서 사람을 죄인으로 불효자로 만드는 그의 제자들이다. 공자는 제자를 제대로 두지 못하였구나 아니면 한 국 사람들이 쓰레기 천지 인 것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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