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선축원(行禪祝願) ■
조석향등헌불전
朝夕香燈獻佛前 부처님께 조석으로 향과 등불 불전에 올리옵고
귀의삼보예금선 (▶ 예금선:부처님)
歸依三寶禮金仙 삼보전에 귀의하여 공경 예배하옵나니
국계안녕병혁소(▶병혁:전쟁)
國界安寧兵革消 국계는 안녕하고 병혁은 소멸하며
천하태평법륜전
天下太平法輪轉 천하가 태평하여 법륜 굴러가게 하소서
원아세세생생처
願我世世生生處 원컨대 저희로 하여금 세세생생 나는 곳마다
상어반야불퇴전
常於般若不退轉 언제나 반야의 큰지혜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사
여피본사용맹지
如彼本師勇猛智 석가모니 부처님의 용맹한 지혜를 얻게하오며
여피사나대각과
如彼舍那大覺果 노사나불의 큰깨달음 얻게 하여지이다.
여피문수대지혜
如彼文殊大智慧 문수보살과 같은 큰 지혜
여피보현광대행
如彼普賢廣大行 보현보살과 같은 광대한 행원
여피지장무변신
如彼地藏無邊身 지장보살님과 같은 가 없는 몸
여피관음삽이응(▶ 삽 :삼십(30),서른)
如彼觀音삽二應 관세음보살과 같은 32가지의 응신을
시방세계무불현
十方世界無不現 시방세계 어디든지 마음대로 나투시어
보령중생입무위
普令衆生入無爲 널리 중생들을 무위도에 들어가게 하사
문아명자면삼도
聞我名者免三途 나의 이름 듣는 이는 삼악도의 괴로움 여의고
견아형자득해탈
見我形者得解脫 나의 형상 보는 이는 해탈을 얻게 하소서.
여시교화항사겁
如是敎化恒沙劫 이와 같이 무량겁토록 교화하게 하사
필경무불급중생
畢竟無佛及衆生 필경 부처도 보살도 없는 세계 이뤄지이다.
산문숙정절비우
山門肅靜絶悲憂 산문은 고요하여 슬픈 근심 끊어지고
사내재앙영소멸
寺內災殃永消滅 도량안의 모든 재앙 영원히 소멸되며
토지천룡호삼보
土地天龍護三寶 토지신과 천룡은 삼보를 보호하시고
산신국사보정상
山神局司補禎祥 산신과 국사는 정상을 도우소서
준동함령등피안
蠢動含靈登彼岸 꿈틀거리는 미물까지도 피안에 오르게 하시고
세세상행보살도
世世常行菩薩道 세세생생에 항상 보살도를 행하여
구경원성살바야
究竟圓成薩婆若 구경에는 일체종지 이루어지고
마하반야바라밀
摩訶般若婆羅蜜 큰지혜 완성하여지이다.
나무서가모니불 나무서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서가모니불
南無釋迦牟尼佛 南無釋迦牟尼佛 南無 是我本師 釋迦牟尼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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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선축원(行禪祝願)
축원은 삼보에 귀의하고 지금까지 닦아온 공덕을 자신의 깨달음과 중생들과 진리에 회향1)하여 부처님의 본원과 공양자의 소원이 속히 성취되기를 염원하는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축원은 무조건적 기복이 아니라 예불과 예참(禮參)을 통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고 난 후에 불보살님의 가피를 발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자신만의 안위(安慰)와 이익이 아니라 일체공덕을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고 자타(自他)가 더불어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발원입니다.
행선축원은 이러한 축원 가운데 새벽예불 후 올리는 축원입니다.
절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잘 아는 것입니다만, 새벽예불에 앞서 도량석(道場釋)과 종송(鐘頌), 사물, 그리고 예불이 이어집니다.
‘행선축원(行禪祝願)’은 새벽 예불문을 한 후에 그 사찰의 큰스님이 하게 되고, 행선축원이 끝난 뒤에는 신중단(神衆壇)을 향해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다함께 암송함으로써 예불은 끝나고 사찰에 따라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행선축원에서
행선이라는 것은 참선을 하는 것, 정신통일을 하는 것입니다.
축원이라는 것은 바라는 것을 비는 것, 소원을 기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행선축원이라고 하는 것은 선정(禪定)의 힘으로 사람들이 희구하는 것을 이루어지게끔 기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스님이 빌어준다고 해서, 기원해 준다고 해서 소원이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당연히 효과가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씀드립니다.
(기도와 가피1에서도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여기에 똑같은 꽃이 심어진 두 개의 화분이 있다고 해봅시다. 한 꽃에는 잘 자라라고 축원해주고, 다른 꽃에는 죽으라고 저주를 보냅니다. 똑같은 양의 물을 주고, 햇볕을 쬐는 시간도 똑같이 하더라도 한쪽은 생기가 나는데, 다른 한쪽은 시들시들 말라죽고 만다고 과학자들이 실험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일반인이 축원을 하거나 저주를 퍼부어도 이렇게 현저한 효과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오랜 시간 수행하여 마음이 깨끗해진 스님들은 어떻겠습니까? 개인차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지만 일반인보다 못하지는 않겠죠. 그렇기 때문에 신도들이 절에 기도를 붙이는 것입니다.
1. 삼보례(三寶禮)
행선축원은 가장 먼저 삼보에 예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조석향등헌불전
朝夕香燈獻佛前
“조석으로 부처님 전에 등불을 바치옵고”
여기서 향등(香燈)은 향과 등으로 따로 새기지 않습니다. 여기서 쓰인 향(香)은 향기가 아니라 좋다,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불전(佛前)에 공양을 올리는 것을 육법공양(六法供養), 혹은 공양육물(供養六物)이라 하는데 등불, 향, 과일, 쌀, 꽃, 차 등 여섯 가지입니다. 향등을 부처님 전에 올린다고 하는 것을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해 보면 여러 가지 공양물을 올린다는 것이고, 자신의 모든 정성을 모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의미입니다.
왜 등불을 올리는가?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것이므로 불교에서는 이를 지혜에 비유합니다. 불전에 등불을 올리는 의미는 부처님이 갖추신 지혜의 등불이 중생의 어리석음과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기 때문에 이러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또 등불을 올리는 것은 부처님의 이러한 큰 지혜에 대해 예경하는 것이며, 그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고, 널리 펴서 온 세상에 진리의 법등을 밝히겠다는 발원이며 다짐입니다.
귀의삼보예금선
歸依三寶禮金仙
“삼보에 귀의하고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귀의는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귀의를 귀명(歸命)이라고도 하는데, 귀(歸)를 ‘…을 맡기다’라고 하고 명(命)을 ‘목숨’이라고 하면 목숨을 삼보에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삼보께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가 됩니다.
삼보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을 말하는데, 진리를 깨달으신 분을 불(佛)이라고 하고,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법(法), 부처님의 제자를 승(僧)이라고 하여 삼보라고 합니다.
이와 달리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주에 가득한 진리를 법(法)이라고 하고, 진리를 깨달은 분을 불(佛)이라고 하고, 불(佛)의 가르침에 따라 법(法)을 깨닫기 위해서 수행하는 모든 사람을 승(僧)이라고 합니다.
왜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을 보배라고 표현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불교수행자 집단인 승가(僧伽)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없는 불교, 교리가 없는 불교, 교단이 없는 불교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금선(禮金仙)은 금선(金仙)께 예배한다는 의미입니다. 중국에서는 도교가 성행했었는데 그 영향으로 부처님을 금빛나는 신선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는 도교와의 마찰을 피하고 동시에 불교의 우월감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표현법인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몸이 금빛으로 빛난다고 믿었던 것은 중국만이 아닙니다. 인도의 고대사상(古代思想)에 32상(相) 80종호(種好)라는 것이 있습니다. 32상을 32대인상(大人相)이라고도 하는데 위대한 인간이 가진 32가지의 빼어난 모습10)을 말하고, 80종호는 부차적인 특징11)을 말합니다. 고대 인도인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기 전부터 부처님이나 전륜성왕이 이 세상에 올 때 이러한 모습을 갖추어 나타난다고 믿었습니다. 그 가운데 ‘피부가 부드러우며 황금과 같다’고 하는 게 있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몸을 황금빛이라고 함으로써 고대인도인들이 기다려왔던 부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불상에 금을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이 위대한 것은 황금빛의 피부색 때문이 아닙니다. 그 분의 위대성은 그분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에서 찾아야 합니다.
진리를 구하기 위해 세속의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버리고 출가하신 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혹독한 고행도 참고 이기셨던 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으심으로써 고해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에게 열반의 세계를 보이셨던 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부처가 되신 뒤 80평생을 잠시도 쉼없이 법을 전하신 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목숨을 바쳐 귀의하는 것이고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2. 천하태평원(天下太平願)
삼보와 부처님께 예배를 하고난 뒤에는 나라와 세상이 평안해지기를 발원합니다. 개개인의 행복과 깨달음은 국가와 세상이 편해질 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므로 국가와 세상에 대한 기원이 개별적인 발원에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국계안녕병혁소
國界安寧兵革消
“나라가 안녕하고 전쟁이 없어지며”
국경이 무사하길 바란다.
이것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전쟁이 자주 일어났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약 50만 년 전 원시인 사회가 일정한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를 교환하게 된 무렵부터 전쟁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집단투쟁을 해왔습니다.
이와 같은 견해는 세계 도처에 남아 있는 고고학적 유물과, 현재 생존하고 있는 미개민족의 조사 연구에 의한 것입니다.
과거 소련의 군사 전문지(Soviet Military Review, 1986)에 실린 한 논문("Sources and Causes of Wars")에 따르면, 인류가 5,50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규모의 전쟁을 1만 4,500여 회나 치렀는데, 이 과정에서 36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전 세계 인구에게 수 천년동안 일용품을 지급할 수 있는 양의 재화가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여러분들은 이라크를 공격하는 미국의 부시를 보셨고, 알카에다가 저지른 9 · 11 테러를 보셨습니다. 뒤이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보셨고, 이제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공격받는 이라크의 모습을 여러분들은 TV를 통해 다시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전쟁과 난리가 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민중입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전쟁터로 끌려가 죽거나 크나큰 고통을 당해야만 합니다. 인간세상의 가장 큰 재앙이 전쟁과 난리이기 때문에 행선축원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고 그것들이 없어지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천하태평법륜전
天下太平法輪轉
“온 세상이 평화로우며 불법(佛法) 세상이 되게 하소서.”
개개인의 행복과 깨달음은 국가와 세상이 편해질 때 비로소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법륜전(法輪轉)은 법륜을 굴린다, 또는 법륜이 구르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법륜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유한 것인데, 법륜을 굴린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친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이나 내란에 휩싸여 있을 때는 부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생사의 고해에서 벗어나 성불하겠다는 원을 세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세계평화를 기원하면서 동시에 부처님의 정법에 의해 사람들이 수행하게 되기를 희망하는 발원인 것입니다.
삼보례와 천하태평원을 의역(意譯 ․ 뜻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온 정성 다하여 부처님께 등불 올리고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께 예배하오니
나라가 안녕하고 전쟁이 없어지며
평화로운 세상 되고 불법이 널리 퍼지게 하소서.”
3. 상구보리원(上求菩提願)
대승불교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보살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살사상의 핵심은 성불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중생제도를 위해 헌신하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보살의 실천덕목은 둘인데 하나는 상구보리(上求菩提)이며, 다른 하나는 하화중생(下化衆生)입니다. 상구보리가 수행자 본연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습이라고 한다면 하화중생은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대승 보살도에 있어서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은 동시에 닦아야 하는 과제입니다. 위로는 보리도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입니다. 상구보리에 치중하여 하화중생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하화중생을 한다면서 상구보리를 등한히 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 상구보리원(上求菩提願)에 있어서는 수행자 자신이 어떠한 인격체가 될 것인가? 또 어떠한 수행을 할 것인가 하는 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원아세세생생처
願我世世生生處
“원하옵나니, 제가 윤회하면서 태어나는 곳마다”
불교는 윤회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 생에 태어나기 전에 또 다른 형태의 삶이 있었고 이번 생을 마친 뒤에 또다른 형태의 삶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윤회설이라고 합니다. 전생에서 지은 행위에 따라 이번 생의 행복과 불행이 나타나는 것이고, 이번 생에서 지은 행위는 다음 생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생에서 전생에 지었을 수많은 죄업을 참회해야 하며, 다음 생을 위해 많은 공덕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어반야불퇴전
常於般若不退轉
“항상 반야를 향해 가는 길에서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불교의 궁극은 악업을 짓지 않고 선업을 닦는 데만 그치지 않고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성불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성불을 할 때까지 깨달음의 길에서 잠깐이라도 물러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행을 하면서 보리도로 나아가는가 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여피본사용맹지
如彼本師勇猛智
“석가모니 부처님 같이 용맹지를 갖추고”
석가모니불을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불교의 교조로서 역사적으로 실재하셨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흔들림 없는 굳건한 의지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셨습니다.
반야를 향한 길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용맹지를 갖추겠다는 견고한 의지가 있어야만 합니다.
여피사나대각과
如彼舍那大覺果
“비로자나 부처님 같이 큰 깨달음을 얻으며”
비로자나는 부처님은 진리 자체인 법신불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불법승의 법(法), 그 법은 부처님과 동일한 것입니다. 불(佛)은 곧 법(法)이고, 법은 곧 불입니다. 법(法), 그것은 진리를 말하는 것인데, 진리를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이름을 붙인 것이 비로자나불입니다.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되고, 비로자나 부처님과 한 몸이 된다, 법신과 한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야를 향한 길에는 비로자나 부처님과 한 몸이 되겠다는 견고한 의지가 있어야만 합니다.
여피문수대지혜
如彼文殊大智慧
“문수보살 같이 대지혜를 구족하고”
문수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협시보살로서 지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삼귀의례를 전통형식으로 할 때 게송으로 하게 되는데,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이라고 합니다. ‘두 가지를 구족하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이 뜻입니다. 구족한 두 가지가 바로 지혜와 복덕입니다. 지혜만 갖추어도 부처가 되지 않고, 복덕만 있어도 부처가 되지 않습니다. 지혜와 복덕을 둘 다 갖추어야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지혜를 보살로서 형상화한 것이 문수보살입니다. 지혜는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를 닦아야 부처가 된다, 지혜를 닦지 않으면 부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문수보살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를 향한 길에는 문수보살과 같은 지혜를 갖추겠다는 견고한 의지가 있어야만 합니다.
여피보현광대행
如彼普賢廣大行
“보현보살 같이 크나큰 실천행을 갖추며”
보현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협시보살로서 실천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갖추신 지혜와 복덕, 두 가지 가운데 복덕을 보살로서 형상화한 것이 바로 보현보살입니다. 복덕 혹은 공덕은 실천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복덕을 지어야 부처가 된다, 복덕을 짓지 않으면 부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보현보살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를 향한 길에는 보현보살과 같은 복덕을, 공덕을 갖추겠다는 견고한 의지가 있어야만 합니다.
여피지장무변신
如彼地藏無邊身
“지장보살 같이 끝없는 몸을 지니고”
지장보살은 흔히 대원본존이라고 합니다. 원력이 크다는 뜻이지요. 얼마나 원력이 큰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육지장(六地藏)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윤회하는 여?군데의 세계에서 지장보살을 모두 만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지옥 한 군데만 교화한다고 하더라도 그 원이 매우 큰 것인데 윤회하는 중생이 있는 모든 육도에서 중생을 교화하니 그 원이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반야를 향한 길에는 지장보살과 같은 무수한 몸을 갖추겠다는 견고한 의지가 있어야만 합니다.
여피관음삽이응
如彼觀音卅二應
“관세음보살 같이 서른 두 가지의 변화신을 갖추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마음의 눈으로 중생의 소리를 듣고 중생을 제도하는 자비의 보살입니다. 천수천안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천 개의 눈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살피고 천 개의 손을 내밀어 중생을 괴로움에서 건져주는 역할을 합니다. 중생을 구원함에 있어서 서른 두 가지의 몸으로 모습을 바꿔 도움의 손길을 뻗쳐주는 보살입니다. 서른 둘이라고 하는 숫자는 화현할 수 있는 변화신의 모습을 32가지로 설정한 것입니다. 이는 중생의 근기에 맞는 변화된 몸으로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입니다.
반야를 향한 길에는 관세음보살과 같이 중생의 근기에 맞추겠다는 견고한 의지가 있어야만 합니다.
상구보리원(上求菩提願)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제가 윤회하면서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반야를 향해 정진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용맹지를 갖추고
비로자나 부처님의 큰 깨달음과
문수보살의 대지혜와 보현보살의 실천행과
지장보살의 수많은 몸과 관음보살의 변화신을 갖추겠습니다.”
4. 하화중생원(下化衆生願)
깨달음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중생제도입니다. 결국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도 궁극에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중생이 성불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염두에 두셔야 할 것은 하화중생을 통해서도 상구보리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중생제도를 위한 보살행이 상구보리를 위한 훌륭한 수행법이기 때문입니다.
보리도를 구하는 것은 결국 중생제도를 위한 것이고, 중생제도를 하다보면 보리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방세계무불현
十方世界無不現
“시방세계에 곳곳마다 몸을 나투어”
시방은 동 ․ 서 ․ 남 ․ 북 ․ 동남 ․ 서남 ․ 서북 ․ 동북 ․ 상 ․ 하의 열 가지 방위를 말합니다. 공간적으로 ‘모든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세계에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다, 모든 세계에 나타난다는 것이죠.
보령중생입무위
普令衆生入無爲
“널리 중생들을 무위에 들게 하겠습니다.”
많은 중생들을 무위에 들게 하겠다는 겁니다. 무위란 것은, 열반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중생들을 열반으로 이끌겠다는 것입니다.
문아명자면삼도
聞我名者免三途
“제 이름을 듣는 사람은 삼악도를 면하고”
견아형자득해탈
見我形者得解脫
“저를 보는 사람은 해탈을 얻게 하겠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삼악도를 면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게 가능할까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자, 모두 눈을 감으십시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법정스님! 훌륭한 스님. 맑고 향기로운 스님. 이 시대의 진정한 수행자!
달라이라마! 관세음보살의 화신.
어떻습니까? 눈을 떠보십시오. 기분이 좋아지십니까?
(법정스님과 달라이 라마는 예로 든 분들입니다. 이 스님들에 대하여 의견이 다를 수도 있으므로 나름대로 적당한 예를 찾으시면 됩니다.)
옛날에 경봉 스님이 통도사 극락암에 계셨습니다. 그때 경봉스님은 생불(生佛)로 추앙받고 계셨습니다. 어느 불자가 스님을 찾아가서 친견했는데 스님 앞에서 몇 시간을 울었답니다. 스님의 속가 딸이라도 된거냐구요? 아닙니다. 처음 본 보살님이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만남 이후로, 그렇게 울고 난 이후로 가슴에 있던 한이, 가슴에 있던 응어리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말을 믿습니다. 그럴 수 있거든요.
저는 경봉스님을 처음 친견했을 때 마치 감전된 것처럼 온 몸이 찌릿찌릿 했습니다. 수행력이 커지면 그 이름을 듣거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충격과 같은 감동을 받습니다.
자신이 수행을 잘 해 가고 있는지 아닌지 스스로 판별하는 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지 물어보는 겁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진다면 수행이 잘 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면 기분이 나빠지고 피하고 싶어 한다면 수행 잘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충고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만났을 때 어려워하고 피한다면 스스로 되돌아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틀림없이 인생을 실패하고 있습니다.
스님이 수행을 훌륭히 하면 그 스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지고 그 스님을 만나면 행복감을 느낍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데 있다는 것, 반드시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여시교화항사겁
如是敎化恒沙劫
“이렇게 영겁동안 교화하여”
이렇게 교화하라(如是敎化). 어떻게 교화하는가.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용맹지를 갖추고 비로자나 부처님의 큰 깨달음과 문수보살의 대지혜와 보현보살의 실천행과 지장보살의 수많은 몸과 관음보살의 변화신을 갖추어서 시방세계 곳곳에 나타나서 중생들을 열반에 들게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를 항사겁 동안 하라고 했습니다.
항사겁. 항하사의 모래만큼 많은 겁(劫) 동안, 인도의 갠지즈강 모래만큼 많은 세월 동안 교화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영원히 하겠다는 말입니다. 중생이 있는 한 멈추지 않고 교화하겠다는 원을 세운 것입니다.
필경무불급중생
畢竟無佛及衆生
“마침내 부처님도 없고 중생도 없게 하겠습니다.”
인도의 갠지즈 강 모래만큼 많은 세월 동안 교화하면 마침내 모두가 성불해서 중생이 없습니다. 부처라는 게 중생이 있기 때문에 비교해서 부처인데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는 겁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자는 겁니다.
하화중생원(下化衆生願)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시방세계에 곳곳마다 몸을 나투어
널리 중생들을 열반에 들게 하겠습니다.
제 이름을 듣는 사람은 지옥에 가지 않고
저를 보는 사람은 해탈을 얻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영겁동안 교화하여
부처님도 없고 중생도 없게 하겠습니다.”
5. 옹호도량원(擁護道場願)
부처님에 대한 예경과 안팎으로 향한 발원이 모두 도량이 있으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화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량이 필요하므로 도량이 유지 ․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산문숙정절비우
山門肅靜絶悲憂
“산문은 고요하고 엄숙하며 슬픔과 근심이 끊어지고”
사내재앙영소멸
寺內災殃永消滅
“도량내에 재앙이 영원히 소멸하며”
도량 내에 온갖 재앙이 없어져 평화로워지기를 원하는 내용입니다.
토지천룡호삼보
土地天龍護三寶
“토지신과 천룡이 삼보를 보호하고”
산신국사보정상
山神局司補禎祥
“산신과 도량신들은 경사롭게 하소서.”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한 후 다른 지방으로 전파될 때 전파되는 지역에서 이미 믿고 있던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불교 내부로 수용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많은 신들을 거느리게 되었기 때문에 다신교적 요소가 다분히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그 신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삼보가 머무는 도량에 재앙이 발생하지 않아야 하고 평화롭고 경사스런 일이 생기기 위해서는 도량을 지키는 여러 신들이 제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신들이 해야 할 일이 있으므로 수행자 입장에서 신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 신들은 육도에서 윤회하는 중생이기 때문에 중생심이 발동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이들을 달래기 위해 스님들이 부처님께 예불을 올린 후 신중단을 향하여 반야심경을 독경해 줍니다.
옹호도량원(擁護道場願)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산문은 고요하고 엄숙하며 슬픔과 근심이 끊어지고
도량 내에 재앙이 영원히 소멸하며
토지신과 천룡은 삼보를 보호하고
산신과 도량신들은 경사롭게 하소서.”
6. 회향게(廻向偈)
예경과 발원 뒤에 회향이 이어집니다. 자신이 지은 선근(善根 : 좋은 과보를 얻을 훌륭한 因) · 공덕(功德 : 좋은 일을 쌓은 공과 불도를 수행한 덕)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어 자타(自他)가 함께 불과(佛果)의 성취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준동함령등피안
蠢動含靈登彼岸
“미물 중생을 포함한 모든 중생들이 피안으로 가서”
불교의 교리에서는 미물 중생이라고 하더라도 부처와 동일한 성품을 갖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는 것이죠. 따라서 이들도 시절인연을 만나면 언젠가는 성불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서 피안은 진리를 깨닫고 도달하는 이상적 경지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세속(世俗)으로부터 초월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세상행보살도
世世常行菩薩道
“세세생생동안 보살도를 닦고”
세세(世世)는 날 적마다, 보살도는 보살이 닦아야 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수행법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세상에 태어나든지 수행하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구경원성살바야
究竟圓成薩婆若
“마침내 모두가 일체지를 증득하여서”
마하반야바라밀
摩訶般若波羅蜜
“위대한 지혜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목표가 있고 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 언젠가는 도달하게 됩니다. 보살은 중생에게 목표를 가리키고 도달하는 법을 일러줍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함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온 정성을 기울입니다. 보살도를 닦으면 끝내는 모두가 일체지를 성취하게 되고 위대한 반야바라밀을 성취하게 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南無釋迦牟尼佛
“석가모니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南無釋迦牟尼佛
“석가모니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南無是我本師釋迦牟尼佛
“우리의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석가모니불을 세 번 부르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고통스러움과 그 고통의 원인과 고통이 없는 세상 즉, 열반의 세계를 제시해 주시고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향을 마친 뒤에 모두가 일심으로 찬탄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회향게(廻向偈)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미물중생을 포함한 모든 중생들이 피안으로 가서
세세생생동안 보살도를 닦고
마침내 모두가 일체지를 증득하여서
위대한 지혜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행선축원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삼보에 대한 예배가 있었고 이어 천하태평을 기원하였습니다. 이어서 자신의 깨달음과 중생제도를 위한 발원이 있었고 다음은 도량을 옹호하는 옹호도량원에 이어 회향이 있었습니다.
이 행선축원은 큰스님이 하신다고 해서 큰스님만의 것이 아닙니다. 축원하시는 분은 한 분이지만 자신을 포함한 모든 불자가 위와 같은 내용으로 예배, 발원, 회향, 찬탄하는 것입니다. 이 축원의 주체는 여러분 각자라는 사실을 인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온 정성 다하여 부처님께 등불 올리고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께 예배하오니
나라가 안녕하고 전쟁이 없어지며
평화로운 세상 되고 불법이 널리 퍼지게 하소서.
저는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반야를 향해 정진하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용맹지를 갖추고
비로자나 부처님의 깨달음과
문수보살의 지혜와 보현보살의 실천행과
지장보살의 수많은 몸과 관음보살의 변화신을 갖추겠습니다.
그리하여,
시방세계에 곳곳마다 몸을 나타내어서
널리 중생들을 열반에 들게 하겠습니다.
제 이름을 듣는 사람은 지옥에 가지 않고
저를 보는 사람은 해탈을 얻게 하겠습니다.
이렇게 영겁동안 교화하여
부처님도 없고 중생도 없게 하겠습니다.
산문은 고요하고 엄숙하며 슬픔과 근심이 끊어지고
도량 내에 재앙이 영원히 소멸하며
토지신과 천룡은 삼보를 보호하고
산신과 도량신들은 경사롭게 하소서.
미물중생을 포함한 모든 중생들은 피안으로 가서
세세생생동안 보살도를 닦고
마침내 모두가 일체지를 증득하여서
위대한 지혜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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