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펄벅
19
만약 이때쯤 들판의 물이 빠지고 여름 햇볕으로 젖은 땅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올라 마르기 시작했더라면 2,3 일 동안에 그
많은 땅을 갈아 엎고 씨앗을 뿌려야 하기 때문에 왕룽은 그
찻집엘 다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또는 아이들이 아프거나
늙은이가 위급한 불상사라도 생겼더라면 왕룽은 그런 데에
정신이 팔려 그 그림에 있던 여자의 얼굴이라든가 대처럼 허리가
날씬한 그 예쁜 자태를 잊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홍수는 언제까지나 한결같이 잔잔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해가 질 무렵에 찾아드는 여름 바람만이 가느다란
물결을 일으킬 뿐이었다. 늙은이는 언제나 졸고 있었고 아이들은
아침에 서당에 가면 해가 저물어야만 돌아왔다. 왕룽은 집안에
있을 때면 답답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어서 공연히 이리저리
방안을 배회했다. 걸상에 주저앉는가 하면 아내가 가져다 놓은
차를 마시지도 않고 일어서는 것이었다. 제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 놓고도 깜빡 잊어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리곤 근심스럽게
남편을 걱정하는 오란의 얼굴을 피하느라 애썼다. 왕룽은 하루
해가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기나긴 7월 해가 겨우 넘어가도
좀처럼 어두워지지 않고 황혼에 속삭이는 듯한 실바람이 물 위를
스쳐 지나갔다. 문턱에 한동안 서 있던 왕룽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라도 난 듯 방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었다. 아내가
명절을 위해 준비해 둔 새로 지은 옷이었다. 비단같이 빛나는
무명 두루마기였다. 왕룽은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서서 물
사이로 난 언덕길을 따라 성문을 지나 번화한 거리로 들어서자
옆도 안 돌아 보고 이층 찻집으로 향했다.
찻집은 휘황 찬란했다. 먼 해안 지방이 아니면 구하기 어려운
석유등이 아낌없이 켜져 있었다. 그렇게 밝은 불 밑에 여러
사람들이 놀고 마시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모두 시원한 저녁
바람에 옷깃을 젖히곤 부채질을 하면서 흥이 나게 웃는 소리가
거기까지 흘러나왔다. 이 집안에는 흙만 파면서 살아온 왕룽이
아직껏 한 번도 경험한 일이 없는 온갖 유흥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곳은 일을 하지 않고도 편안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환락의 장소인 것이다. 누구나 놀고 즐기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왕룽은 문지방에서 한동안 머뭇거렸다. 밝은 불빛이 정면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뜨거운 피는 혈관을 찢을 것만 같았으나
수줍은 탓으로 해서 그대로 서 있다가 아마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때마침 어둠침침한 문턱에 기대어 섰던
여자가 불빛 앞으로 나타났다. 뚜챈이었다. 오로지 이층의
여자들에게 손님을 붙여주는 것이 그녀가 맡고 있는
일이었으므로 남자의 그림자가 나타나자 가까이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촌뜨기 왕룽이란 것을 알자
빈정거렸다.
"난 누구라구...... 촌 양반이구먼."
왕룽은 자기를 비웃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그만 화가
치솟았다. 그는 도리어 용기를 내어 대담하게 말했다.
"그래, 나같은 촌뜨기는 이런 곳에 오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
왕룽은 자기가 부자라는 것을 으스대고 싶었다. 그는 허리춤에
한 손을 넣어서 은전을 수북이 꺼내어 뚜챈에게 보였다.
"이만 하면 되오? 그래도 부족하오?"
뚜챈은 그 손바닥에 가득한 은전을 보자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다.
"그럼 이리 오세요. 어느 색시를 원하세요?"
그러나 왕룽은 혼자 중얼거렸다.
"음, 난 뭐 생각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저 조그만 여자,
배꽃같이 희고 불그스레한 손에 연꽃을 가진 여자......"
다음 순간 왕룽은 불같은 욕망이 가슴에 치밀었다.
뚜챈은 어렵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그 많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앞서 걸어갔다. 왕룽은 약간 거리를 두고 뚜챈의
뒤를 따라갔다. 처음에는 여러 사람들이 자기만 쳐다보는 것
같아 부끄러웠으나 용기를 내어 사방을 살펴보니 아무도 그를
주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이런 말을 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아니 벌써 색시한테 갈 시간이 됐나?"
"초저녁부터 오입하러 가는 놈이 다 있구나."
그러나 이 때에는 왕룽도 뚜챈을 따라 벌써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이층에 올라간다는 것은 왕룽으로선
처음이었으나 그래도 올라가고 보니 보통 집과 똑같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다만 복도 창으로 밖을 내다보니
상당히 높이 올라온 것 같았다. 앞에 선 뚜챈은 그를 좁고
침침한 복도로 데리고 가면서 말했다.
"오늘 첫 손님이 오신다."
그러자 그 복도에 이어져 있는 방문들이 일제히 열리며 쏟아져
나오는 불빛과 함께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마치 햇빛에 꽃들이 한꺼번에 활짝 핀 것 같았다. 그러나 뚜챈은
심술궂게 쏘아붙였다.
"넌 아니야...... 너도 아니고, 누가 너 따위를 찾겠니? 이
손님은 소주서 온 저 석죽화같이 예쁜 렌화(蓮華)를 찾으신다."
여자들이 수근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그러자 석류빛
같은 얼굴을 한 여자가 큰 소리로 지껄였다.
"렌화는 참 좋겠네. 흙 냄새 마늘 냄새를 실컷 맡게 됐으니!"
이 말은 왕룽의 귀에도 들렸다. 상대를 하는 것은 점잖지 않은
것 같아 대꾸를 하지는 않았으나 농사꾼같이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내심으로는 이 말이 마치 살을 찌르는 것같이
가슴에 찔렸다. 그러나 그는 허리춤에 돈이 두둑이 들었다는
생각을 하면 용기가 용솟음쳤으므로 얼마든지 뽐내고 걸을 수
있었다. 마침내 복도의 어느 방에 닿은 뚜챈은 닫혀 있는 방문을
주먹으로 두드리고 들어오라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열고 들어갔다. 방안에는 꽃 무늬를 수놓은 붉은 이불로 덮은
침대 위에 날씬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만일 누군가가 이 세상에 이렇게 작고 나긋나긋한 손이 있다고
말했다면 그는 곧이 듣지 않았을 것이다. 렌화의 손은 그렇게
작고 날씬했으며 가느다란 손끝의 긴 손톱은 연꽃 봉오리처럼
붉게 물들여져 있었다. 그리고 또 누가 이렇게 작고 귀엽게 생긴
발이 있다 해도 왕룽은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복숭아 빛
공단 신을 신은 발은 한 주먹으로도 쥘 수 있을 만큼 작았다.
렌화는 침대에 걸터 앉아서 어린 아이처럼 그 발을 달랑거리고
있었다.
왕룽은 뻣뻣하게 그녀와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아서 그녀의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아래층에 걸린 그림 속의 여인 같았다.
가장 예쁜 것은 손맵시였다. 젖빛같이 흰, 손 맵시는 그림 속의
손과 닮았다. 그런 양손을 그녀의 비단옷 무릎 위에 나란히 올려
놓고 앉아 있었다. 왕룽은 저런 손을 만져 본다는 것은 감히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그림을 바라보듯 렌화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몸에 착
붙는 짧은 저고리를 입은 그녀의 허리는 대나무처럼 길고 늘씬해
보였다. 흰털로 수놓은 동정 위로 쑥 빼어난 조그만 얼굴은 그림
그대로 간드러지게 예뻤다. 그녀의 살구씨처럼 동그란 눈을 보자
왕룽은 이야기꾼들이 미인의 눈을 살구씨같이 둥근 눈이라고
형용하던 말 뜻을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왕룽은 렌화를
아무리 바라 보아도 이 세상 사람같이 여겨지지 않았다.
렌화는 무릎 위에 놓았던 팔을 왕룽의 어깨에 얹었다가 가만히
그의 팔을 쓰다듬어 내렸다. 그러고는 왕룽의 손을 애무했다.
왕룽은 이제까지 이렇게 명주 고름 같은 육체의 촉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만일 자신의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느끼지도 못할 만큼 아주 가벼운 촉감이었으나, 그 하얗고
조그마한 손이 그의 두 팔을 애무하는 모습을 바라보자니 마치
가슴에다 모닥불을 한아름 피워 놓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은
그의 소매 끝에서 머뭇거리다 그의 손목까지 오자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왕룽은 그녀의 손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왕룽은 그녀의 가늘고 부드러운 웃음 소리를 들었다. 오층탑에
걸린 은방울이 지나가는 실바람결에 대롱거릴 때 내는 소리처럼
아름다왔다. 그리고 그녀는 웃음 소리처럼 간드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르시나 봐요. 이렇게 큰 양반이......
아침까지 이렇게 보시기만 하실래요."
왕룽은 그제서야 렌화의 손을 두 손으로 모아 쥐었다. 불에
익은 나ㅁ잎처럼 말랑말랑해서 힘을 꼬옥 주어 쥘 수 없는
손이었다. 그는 무의식 중에 애원조로 입을 열었다.
"난, 아무 것도 모르오...... 가르쳐 주오."
그리하여 렌화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왕룽은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몹시 괴로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웠다. 불 같은 여름 햇빛 아래서 일하는
것보다도 살을 에이는 얼음같은 사막의 바람보다도, 큰 흉년의
기근보다도, 혹은 남방에서 절망에 잠겨 인력거를 끌던 그
시절보다도, 이 렌화의 하얀 손아귀에 잡혔을 때의 괴로움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었다.
그는 매일 찻집에 갔다. 거기서 그는 렌화가 부를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하여 왕룽은 밤마다 렌화의 방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아무 것도 모르는 촌뜨기처럼 어리둥절해 있었다.
문턱에서부터 사뭇 몸이 떨리고 어색한 자세로 조심조심 자리에
앉아서는 렌화가 웃을 때까지 꼼짝도 않고 기다리는 것을
비롯해서 그는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어색했다. 그래도 가슴의
피는 계속해서 끓어올랐다. 그러나 렌화가 몸을 내맡길 때까지
그는 우둔한 종처럼 일거일동을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할
뿐이었다. 렌화는 마치 꺾이기 위해 피어난 꽃처럼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래도 왕룽은 만족할 수 없었다. 아무리 렌화가 그에게 몸을
맡겨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오란에 대해선 본능적으로
강렬하게 요구하고 그러고는 스스로 만족하여 여자란 것을 잊고
들에 나가서 착실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렌화에
대해선 그런 만족감을 얻을 수 없었다. 렌화에겐 그러한 일이
허락되지 않았다. 왕룽의 욕심이 솟구치는 밤에도 렌화는
한손으로 그의 돈을 받으면서도 다른 가냘픈 손으로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면서 성난 듯이 왕룽을 문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면 왕룽은 그대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면 더욱 갈증이 나서 발광하는
것처럼 사랑에 굶주려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렌화를
찾아가지만 언제나 만족하지 못한 채 돌아오곤 했다.
더운 한여름 동안 왕룽은 이렇게 미친 듯이 렌화를 찾아
다녔다. 그는 렌화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어디서 온 여자인지 어떤 신분의 여자인지 알아볼 생각도
없었다. 그녀와 같이 있는 동안에 왕룽은 별로 말이 없었다.
렌화는 어린아이처럼 줄곧 웃고 지껄였지만 그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얼굴을, 손을, 몸뚱이를,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마음을 끌려고만 할 뿐이었다. 그는 아무리 해도
렌화를 완전히 소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새벽이면
언제나 머리가 혼미해져서 애틋한 생각을 가슴에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집에서 보내는 여름날의 하루 해는 무척 지루하고 길었다.
그는 방안이 덥다는 핑계로 침대에서 자지 않고 대밭 속에
거적을 펴고 누워 낮잠을 잤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금방
눈이 떠졌다. 멍하니 뾰족한 대잎의 그림자만 바라보려면 가슴
속에 자기도 모르는 사랑의 달콤한 병적인 괴로움이 밀려왔다.
그럴 때 그의 아내나 아이들이 무슨 말을 묻거나 혹은 칭 서방이
"물이 곧 빠질 성 싶고 또 물이 다 빠진 곳도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기나 하면, 그는 "왜 귀찮게 구는 거야!" 하고
역정을 내었다.
그는 이렇게 렌화에 대한 채울 수 없는 열렬한 감정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매일처럼 이렇게 고통스런 날을
보냈다. 매일 해가 저물기만 기다렸다. 그리고 오란의 우울한
얼굴을 피했다. 놀던 아이들까지도 자기 곁에 오면 침착해지는
것이었다. 그것조차 왕룽에겐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늙은 아버지까지도 그를 이상한 듯이 바라보곤
물었다.
"너, 어디 몸이 아프냐? 왜 그 꼴이냐? 심사도 거칠어지고
얼굴도 아주 안됐구나."
밤만 되면 렌화는 왕룽을 제 맘대로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변발을 비웃었다. 그래서 왕룽은 날마다 머리를 감고 빗고
야단법석을 떨지만 그녀는 여전히 비웃기만 했다. "남방
사람들은 그런 원숭이 꼬리 같은 걸 달고 다니지 않아요." 하고
비웃자 왕룽은 그 다음날 이발소에 가서 당장 변발을 잘라
버렸다. 이날까지 어떤 사람이 아무리 놀리고 비웃어도 자르지
않았던 변발이다. 오란은 변발을 자른 왕룽을 보자 질색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은 목숨 같은 머리를 잘랐군요."
그러나 왕룽은 도리어 역정을 냈다.
"그럼 나라고 평생 농사꾼 몰골이나 하고 살아야겠어? 성안
사람들은 모두들 머리를 깎는데 나도 이만하면 남부럽지 않게
살잖아."
그는 은근히 후회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렌화가 그에게 지시했거나 원했다면 목숨이라도 서슴지
않고 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왕룽이 여자에게 바랄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엔 그는 햇볕에 그을려 갈색이 된 몸을 씻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일을 하며 흘린 땀으로 씻긴 몸이 깨끗한 몸이라고
여겨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새삼스럽게 마치 다른 사람의
몸을 찬찬히 살펴보듯이 자기 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몸을 씻으니까 오란이 참다못해 말 참견을 했다.
"그렇게 너무 씻다간 죽겠어요."
왕룽은 외국제의 향기 높은 빨간 화장 비누를 사다가 부드럽게
살을 문질렀다. 그리고 좋아하는 마늘을 렌화의 앞에서 냄새가
날까봐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왕룽은 또 새로 여러 가지 옷감을 사들였다. 여태까지는
오란이 바느질을 도맡아 했다. 그녀는 옷감을 요령있게 잘라
실용적이고 튼튼한 옷을 만들었다. 그런데도 왕룽은 오란의
바느질 솜씨를 탓하며 새로 사온 옷감을 성안의 바느질 집에
맡겼다. 그러고는 성안 사람들처럼 연한 회색 두루마기를 몸에
꼭 맞게 해 입었다. 그 위에 입는 소매 없는 웃옷은 까만
공단으로 해 입었다. 또한 생전 처음으로 부인네들이 집에서
만들지 않는 신까지 사서 신었다. 이전에 황 노인이 발에 걸치고
다니던 그런 검은 비로드로 만들어진 신이었다.
그러나 왕룽은 이런 훌륭한 새 옷을 입고 갑자기 오란과
아이들 앞에 나서기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는 옷을 갈색
유지에 싸서 잘 아는 사이가 된 찻집의 급사에게 맡겨 두고
다녔다. 급사는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 왕룽이 이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몰래 내실에서 옷을 바꾸어 입게 도와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도금을 한 옥반지도 사서 끼었다. 또한 변발할 때
면도질을 했던 앞머리가 자라자 그는 은전 한 닢을 다 주고
조그만 병에 든 향기 좋은 외제 기름을 사 발라서 머리를 곱게
빗어 넘겼다.
오란은 이렇게 치장한 왕룽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을 함께 먹던 오란이
한참 동안 왕룽을 쳐다보며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잣집 서방님같이 보이는군요."
왕룽은 이 말에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쓰고도 남을 만큼 돈이 있는데 부러 촌뜨기처럼 보일 필요는
없잖아?"
그러나 왕룽은 아내의 걱정을 듣자 하루 온종일 속으로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만은 오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왕룽의 재산은 그의 손을 거쳐서 물쓰듯 헤프게 흘러나갔다.
렌화와 같이 지낸 시간의 대가 이외에는 그녀가 원하는 것들을
사주는 돈도 적지 않게 들었다. 렌화는 무엇이 갖고 싶기만 하면
으레껏 찢어지는 듯이 한숨을 지으면서 아양을 떨었다.
"아, 아 --- !"
렌화 앞에서 자신있게 말을 할 수 있게 된 왕룽은 그녀의 탄식
소리를 듣고 다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응?"
그러면 렌화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난 오늘 서글픈 생각만 들어요. 옆방의 은옥이는 그이가
금비녀를 사다 주더라는데...... 난 언제나 이렇게 낡아빠진
은비녀만 꽂아야 하니 속이 상해요."
그러면 왕룽은 렌화의 이런 야들야들한 귀 모양이나 곱게 빗은
머리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사주지. 사주고 말고, 내 예쁜 꽃이
머리치장을 한다는데 안 사줄 주 있나......"
렌화는 마치 어린애에게 말을 가르치듯이 이러한 말들을
왕룽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의 구슬' 이라든가 '예쁜 마음씨'
라든가 하는 낱말들을 가르쳐 주고는 자기를 이런 단어로 불러
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왕룽은 지금껏 씨앗을 뿌린다거나 추수를
한다거나 햇볕이 어떻고 비가 어떻고 하는 농사에 대한 말밖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렌화가 가르쳐 주는 대로 더듬거리며
말하면서도 자기의 애정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리하여 왕룽의 재물은 그가 간직해 둔 벽 속에서도 자루
속에서도 자꾸만 흘러나갔다. 전날 같으면 오란도, "왜 벽 속에
넣어 둔 은전까지 꺼내 가요?" 하고 물었겠지만 이젠 남편이
자기에게서 떠났고 농사도 잊어버린 채 알 수 없는 방랑 생활을
하고 있는지라 다만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더구나
오란으로선 남편이 그녀의 못생긴 꼴을 입 밖에 낸 날로부터
남편이 무섭기만 하고 또 걸핏하면 윽박지르는 바람에 도저히
물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느 날 왕룽이 들을 지나 돌아오려니 오란이 못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물끄러미 오란을 바라보던 왕룽은 그녀에게로
다가가서 거친 소리로 물었다.
"자네, 가졌던 진주를 어디 두었어?"
왕룽은 달리 말하기가 어색했기 때문에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편편한 돌 위에 빨래를 놓고 문지르던 오란은 남편을
쳐다보며 의아한 듯이 말했다.
"진주요? 갖고 있어요."
왕룽은 차마 아내를 바라보기가 거북스러워 그녀의 젖은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쓸데 없이 가지고만 있으면 뭘 해."
"두었다가 귀고리를 만들려고요......"
오란은 천천히 대답하다가 남편이 웃을까 봐 얼른 말을
이었다.
"훗날 작은 계집애 시집 보낼 때 써도 좋지 않아요?"
왕룽은 억지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 흙투성이 같은 년에게 줘서 뭘 해. 진주란 예쁜 여자들이
치장으로 갖는 거지."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거친 소리로 말했다.
"이리 줘. 내가 쓸 데가 있어."
그러자 오란은 천천히 쭈글쭈글해진 거친 손을 품에 넣더니
조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남편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 그가
자기 주머니를 끄는 모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왕룽의 손바닥에 놓여진 진주는 햇빛에 부드럽게 빛났다.
왕룽은 흐뭇한 듯이 소리를 죽여가며 웃었다.
오란은 다시 빨래에 방망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는
구슬 같은 눈물이 괴고 천천히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편편한
돌 위에 펼쳐 놓은 빨래를 더한층 힘을 주어 두드릴 뿐이었다.
20
이런 상태로 계속해서 왕룽의 재산이 탕진될 듯한 즈음에 돌연
그의 삼촌이 나타났다. 그는 지금까지 어디에서 살았으며 어떻게
지내왔는지 따위의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옛날 그때 그
모양으로 단추를 잠그지 않은 누더기를 걸친 채 문간에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풍상에 허덕인 듯 주름살은 더 깊어졌으나
험상궂은 그 얼굴은 지난날 그대로였다. 그는 왕룽의 가족들이
아침 밥상에 둘러앉은 모습을 싱글벙글 웃으면서 들여다보았다.
삼촌이 있는 지조차 잊어버렸던 왕룽은 마치 유령을 대한 듯
깜짝 놀랐다. 늙은 아버지는 가느다란 눈을 끔벅거리며
쳐다보았으나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삼촌
곁으로 다가서며 큰 소리로 떠들 때에야 비로소 자기 동생임을
알아차리고 바라보았아.
"안녕하세요, 형님. 그동안 조카나 손자들이랑, 질부랑 모두
무고들 하오?"
왕룽은 속으로는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으나 공손한 말로
인사했다.
"아저씨, 오랜만입니다. 아침은 어떻게 하셨소?"
"안 먹었다. 여기서 같이 먹지."
숙부는 마치 자기 집처럼 쉬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상을 새로
차릴 겨를도 없이 체면도 차리지 않고 먹어 대기 시작했다.
쌀죽을 세 그릇이나 후룩거리며 쉴 새 없이 먹어 치우고
고기뼈나 자반 할 것 없이 빠르게 씹는 바람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배를 채운 삼촌은 당연한 듯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젠 좀 자야겠다. 사흘 밤이나 뜬 눈으로 새웠어."
왕룽은 삼촌의 어이없는 거동에 한동안 어리둥절했으나 할 수
없다는 듯이 아버지 침실로 인도했다. 삼촌은 침대의 말끔한 새
이불과 의자나 탁자들이 모두 화려한 것에 한참동안 눈을 팔며
말했다.
"야, 네가 부자가 됐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부자가 됐을
줄은 생각도 못했지."
그는 자기 침실에 들어온 것처럼 침대에 반듯이 누워
여름날인데도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덮고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가운뎃방으로 돌아 온 왕룽은 매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부자인 이상 삼촌을 부양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삼촌을 문전박대해서 쫓아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왕룽은 삼촌만이 아니라 숙모가 따라올 것이 더한층 불쾌했다.
아무튼 이제 삼촌의 가족은 그의 집으로 찾아올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일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침내 그가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삼촌은 한낮이
지나서야 부시시 일어나서 세 번이나 거듭 하품을 하곤 구겨진
옷을 펴면서 침대에서 나와 왕룽에게 말했다.
"이젠 가서 네 숙모와 사촌을 데려오겠다. 이렇게 큰 집에서
우리 세 식구가 먹고 입는 것 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왕룽은 얼굴을 찡그렸다. 넉넉한 사람이 어버이 형제되는
가족을 부양하지 않는다는 것은 남보기에도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집안 살림이 넉넉해져 마을에서도
존경을 받는 그가 체면상으로도 삼촌을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룽은 머슴들을 전에 쓰던
헌집으로 옮겨 가게 하고 문간방을 비워서 그날 저녁 무렵에
다시 온 삼촌과 가족들이 들게 했다. 왕룽은 불쾌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없는 반가운 얼굴로
그들을 맞으려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유들유들한 숙모의 얼굴을
대하니 그만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고, 뻔뻔스런 사촌의 꼴을
보자니 주먹이라도 날아갈 듯이 화가 났으나 꾹 참아야 했으므로
무척 힘이 들었다. 이처럼 화가 난 그는 사흘 동안이나 성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삼촌 가족들의 얼굴도 익어지고 또 오란이,
"화를 내면 어찌하우. 참을 수밖에 없지." 하고 위로했고, 또
삼촌 가족들도 신세를 지는 만큼 은근한 태도로 그를 대했기
때문에 왕룽의 마음은 점점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에
비례해서 렌화에 대한 정열이 새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집구석에 사나운 개들만 우글거려 어디 견딜 수 있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전날의 불꽃 같은 정열은 더욱 크게 불타 올랐다.
불이 나도록 렌화에게 드나들었지만 아무래도 계속해서 일어나는
정욕을 다 메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오란은 너무 단순해서인지 아무 것도 몰랐고, 늙은이는
늙어서 정신이 몽롱해 알려 하지 않았고, 또 칭 서방은 왕룽을
극히 존대하는 터라 그의 행동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그의
숙모만은 대번에 알아차리고 교활한 웃음을 지으면서 지껄여
댔다.
"조카는 어디로 꽃 따러 다니는 중이군."
그러나 오란은 그 말뜻이 무슨 말인지 짐작하지 못하고 숙모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숙모는 웃으며 또다시 말했다.
"질부는 수박을 갈라야만 수박씨가 보이나? 다시 말하면 네
남편이 다른 여자를 보고 있단 말이다."
아침 일찍 집에 들어온 왕룽은 간밤의 사랑으로 지친 고된
몸으로 침실에 들어가 드러누웠다가 창 너머로 들려 오는 숙모의
이야기를 들었다.
숙모의 빠른 눈치에 놀라며 다음 말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숙모의 이야기는 비둔한 목구멍에서 기름이 흘러나오듯이 술술
풀려 나왔다.
"틀림없어. 나는 별별 사내들을 다 보아 왔지. 벌써 머리에
기름 바르고 곱게 차려 입거나 비로드 신을 사 신고 하는 건
틀림없이 새 계집이 생겼단 증거라니까."
대꾸하는 오란의 말소리가 이따금씩 들렸다. 그러나 무어라고
말하는 것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숙모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멍청한 사람이 있나! 어떤 사내고 한 계집으로 만족하는
줄 아나? 또 남자들은 일에 지친 계집에게는 만족하지 못해.
질부 같은 여자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가 못돼. 그저 고분고분
일이나 하는 소보다 낫다고 생각할 뿐이지. 조카도 이젠 부자가
됐으니 첩을 들인다고 해도 자넨 싫다고 못해. 사내들은 다
그러니까. 우리 영감쟁이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맘이야 뻔하지,
뭐. 그렇지만 입에 풀칠도 못하고 나 하나도 못 먹여 살리는
처지니까 아무 것도 못하지만."
숙모는 계속해서 지껄였으나 침실에 누웠던 왕룽은 더이상
듣지 않았다. 숙모의 말에 왕룽은 생각을 잠시 멈췄다. 사랑하는
렌화에 대한 아쉬움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숙모의 말대로 렌화의 몸값을 주고 아주 이 집으로 데려오리라.
그리하여 혼자 독차지 하고 그녀의 육체를 맛보고 또 먹고
마시고 하며 그의 채워지지 않는 정욕을 만족시키리라. 이
생각이 들자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숙모를
손짓으로 불렀다. 숙모는 문 밖의 대추나무 밑까지 따라 나왔다.
아무도 듣지 않는 것을 확인한 왕룽은 숙모에게 은근히 말했다.
"아까, 아주머니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들었소. 아주머니
말씀대로 다른 계집 생각이 없는 게 아니오. 사실 모두 먹여
살릴 땅이 있는데 계집 하나 못 가질 거야 뭐 있소." 숙모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수다스럽게 거들었다.
"그야 그럴 수도 있지. 부자가 되면 사내란 다 그런 건데 뭐.
가난한 사람들이나 밤낮 한 그릇의 밥만 먹고 한 우물만 파는
거지."
그녀는 조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왕룽은 그녀가 생각했던 대로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누가 중간에 서서 그 사람을 데려오겠소?
중매쟁이가 있어야 할 것 아니오. 차마 내가 직접 내 집으로
오라곤 못하겠소."
그녀는 즉시 말을 받았다.
"그런 일은 내게 맡겨. 어떤 여자란 것만 알면 당장이라도
내가 일을 성사시킬 테니."
왕룽은 할 수 없이 그의 사랑하는 애인의 이름을 말했다.
아직껏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불안한 듯이
주저주저 하면서 말했다.
"렌화예요."
그는 두 달 전만 해도 렌화의 이름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숙모가,
"어디 사는 여자인데?" 하고 묻자 그는 그만 신경질을 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성안의 제일 큰 찻집에 있는 사람입니다."
"백화각(百花閣) 말인가?"
"그밖에 어디 또 있소?"
왕룽은 으레껏 알만한 일을 묻는 것이 불쾌하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나 숙모는 쫑그린 입에 손가락을 대고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난 그 집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
대관절 그 여잘 돌보는 사람은 누굴까?"
그 집에 일 보는 사람은 황부잣집의 종이었던 뚜챈이라고
왕룽이 말하자 숙모는 갑자기 소리 내어 웃으면서 말했다.
"아아, 그래? 황 영감이 죽자 그런 일을 하는군. 그럴 거야.
그 여자라면 그런 일을 할 만하지."
이렇게 말한 숙모는 다시 교활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 여자라면 쉽지, 쉬워. 그 여자는 돈만 쥐어 주면 못할
일이 없으니까. 태산이라도 쉽게 쌓을걸."
이 말을 듣자 왕룽은 갑자기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입 안의 침이 마르고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럼 돈은 얼마든지 내죠. 은이건 금이건 내 땅을 다
팔아서라도......"
사랑의 열병이란 이상 야릇한 감정이다. 그날부터 왕룽은 그
일이 주선될 때까지 찻집에 안 가기로 스스로 결심했다.
"만약에 렌화가 이 집으로 와서 내 사람이 되기를 거절한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그 여자 곁에 가지 않으리라."
그러나 만약에 렌화가 안 오면?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안절부절 못했다. 마치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몇 번이나 숙모에게 달려가서 재촉했다.
"돈으로 해결된다면 어떻게든 하지요."
"뚜챈에게 은이건 금이건 아끼지 않겠다는 말도 전했소?" 하고
재차 묻는가 하면,
"렌화에게 이렇게 말하시오. 내 집에 오면 아무 일도 안
시키고 또 비단 옷만 입힐 것이고 매일 산해진미만 먹일
것이라고......"
왕룽이 이렇게 귀찮게 자꾸 졸라 대므로 마침내 그 뒤룩뒤룩
살찐 숙모도 견디다 못해 눈알을 굴리며 조카에게 쏘아붙였다.
"그만, 그만해. 내가 바보인 줄 아는가 봐. 중매 일을 내가
처음 하나.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렇게 신물나게 조르지 말고
내게 모두 맡겨 두면 돼."
숙모가 화를 버럭 내자 왕룽은 그만 주춤해질 수밖에 없었다.
잠자코 손톱이나 깎으며 렌화에게 집안의 추한 모양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그는 오란에게 거리를 깨끗이
쓸게 하고 마루를 닦게 하고 탁자, 의자를 이리저리 모양 좋게
옮기게 하였다. 오란은 남편으로부터 아무 말도 안 들었으므로
잠자코 있었으나 이미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물쭈물 할 뿐이었다.
왕룽은 벌써 오란과는 침실을 같이 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집에 두 여자가 있으려면 다른 침실이 있어야 그로서도
마음에 드는 여자와 함께 거처하기 편리하다는 것을 느꼈다. 또
안뜰이 있어야겠고 함께 산책할 동산도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숙모가 렌화를 주선하려고 분주히 쫓아다니는 동안에
왕룽은 일꾼들을 불러 가운뎃방 뒤에 뜰을 만들고 그 안뜰
주위에 큰 방 한 개와 작은 방 두 개를 나란히 만들게 했다.
일꾼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그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룽은 손수 일꾼들을 부렸다. 일꾼들을
밭의 흙을 파다가 벽을 쌓았다. 지붕을 이을 기와는 왕룽이
성안에 직접 사람을 보내 사 왔다.
대강 벽이 세워지고 방바닥의 흙을 고르게 잘 다진 뒤에
벽돌을 사다 깔고 회를 칠해서, 세 방이 모두 훌륭하게
완성되었다. 그 밖에도 왕룽은 입구에 붉은 휘장을 하고 새
탁자와 아름다운 조각을 한 의자 두 개와 벽에 걸 족자 두
폭까지 샀다. 뿐만 아니라 붉은 옻칠을 한 과자통에는 참깨
과자와 튀긴 과자를 넣어서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조그만 방안에 가득할 만큼 크고 또 깊숙이 조각한 침대를 사다
놓고 그 주위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수놓은 휘장을 사다
드리웠다. 이렇게 새 여자를 위한 방을 꾸미는 데 오란의 손을
빌리기는 쑥스러웠다. 그래서 숙모에게 침대 휘장을 치게 하고
서투른 사내 손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부탁하였다.
마침내 집안은 더 손볼 일이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러나 거의
한 달이 지나도 렌화를 데려오는 교섭은 결말이 나지 않았다.
왕룽은 렌화를 위해서 마련한 뜰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문득 그 가운데에 연못을 만들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일꾼들을
불러다 사방 석 자의 못을 파고 둘레에는 벽돌을 쌓았다. 그리고
성안에 가서 금붕어 다섯 마리를 사다 넣었다. 왕룽으로선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또다시
안절부절 못하고 열병에 걸린 상태로 렌화가 하루 속히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침울함이 깊어져 누구하고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이 콧물을 흘리면 야단을 치거나 오란이 사흘만
머리를 빗지 않아도 고함을 치고 짜증을 낼 뿐이었다. 마침내
어느 날 아침 오란은 소리내어 울었다. 지난날 굶주릴 때도
이렇게 울지 않던 오란을 본 왕룽은 당황하여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누가 뭐랬나? 말꼬리 같은 머리를 빗으라고 말한 것 뿐인데
왜 이 야단이야?"
그러나 오란은 울음을 그치지 않으며 말했다.
"난 당신의 아들을 낳았어요. 당신을 위해 아들을 낳았어요."
그는 입을 다물고 다시 초조해 졌다. 아무래도 그녀에겐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녀가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기로
했다. 오란은 아들을 셋이나 낳았고 그 아들들은 모두 잘 자라고
있는 것이다. 법적으로 따져 보아도 왕룽은 아내에게 트집을
잡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지금 그의 행동은 오직 자기의
정욕을 채우기 위한 것밖에 아무런 구실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지루한 날을 보내고 있을 때 어느 날 숙모가 와서
말했다.
"이제야 결말이 났네. 뚜챈에겐 한꺼번에 은전 백 닢만 쥐어
주기로 하고 렌화에겐 옥귀고리와 옥반지, 금반지와 비단옷 두
벌과 신발 열두켤레, 비단 이불 두 채만 해 주면 오겠다고
했어."
왕룽의 귀에는 '이제야 결말이 났네.' 라는 말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다급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아아, 해주고 말고. 뭣이든지 소원 대로......" 그는 곧장
침실로 들어가서 은전을 꺼냈다. 여러 해 동안의 풍년의 결과를
이렇게 낭비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아무도 모르게
가만히 숙모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아주머니도 은전 열 닢만 받아 두시오."
숙모는 잠시 사양하는 시늉을 하면서 살찐 몸을 뒤로 빼고
머리를 저으면서 말했다.
"그게 말이나 되는가. 나야 한집안 식구인데...... 자넨 내
아들과 마찬가지고 난 자네 어머니와 같은 사람인데, 이런 일도
다 조카를 생각해서 하는 일이지 돈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야."
그러나 왕룽은 숙모가 입으로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손을
내민 것을 보고 그 손에 은전을 쥐어 주었다. 이렇게 돈을
쓰면서도 왕룽은 조금도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왕룽은 돼지고기, 쇠고기, 연어, 죽순, 밤상어 지느머리 등
그가 아는 좋은 음식을 마련해 두고 렌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여름도 끝나가는 8월 햇볕이 눈부시게 내리 쬐는 더운 어느 날
렌화는 왕룽의 집으로 왔다. 왕룽은 자기 집을 향해서 오는
가마를 멀리서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가마는 좁은 밭둑길을
따라 오는데 가마앞에 드리운 것에 가려져 렌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마 뒤에 따라오는 사람은 뚜챈이었다. 일순간 그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나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곤 무의식 중에 오랫동안 아내와 같이 자던 침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서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숙모가 문 밖에 와서 가마가 닿았으니 나와서
맞이하라고 소리쳤다.
그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레껏 렌화를 한 번도 대한 적이
없는 것처럼 우물거리다가 겨우 문을 열고 나섰다. 처음 이
여자와 만나는 것처럼 그는 호화로운 옷을 입고 머리를 푹 숙인
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뚜챈이 들뜬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이렇게 될 줄은 미처 몰랐어요."
뚜챈은 가마꾼이 내려 놓은 가마 옆으로 다가가서 발을 걷어
올리고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나오너라, 렌화야. 자아, 당신 집이야. 당신 주인 어른도
여기 계시고."
왕룽은 가마꾼들이 빙글빙글 웃는 것을 보자 불쾌했다.
'놈들은 성안 건달패들이니까 탓할 것도 못돼.' 하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자기 얼굴이 붉어지고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조롱당하는 것이 분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가마의 발이 올려지자 왕룽의 눈은 저절로 그 앞으로 갔다.
꽃같은 렌화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렌화를 보는 순간 왕룽은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비양거리는 가마꾼들조차 잊어버리고 이
여인이 내 것이 됐다는 것, 언제까지나 자신과 같이 살려고
왔다는 것밖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는 사뭇 떨리는 몸을 꼭
버티고 렌화의 자태만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한들거릴 만큼
탐스러운 렌화는 왕룽의 정신을 온통 잡아 끌었다. 렌화는
뚜챈의 손을 잡고 가마 밖으로 나오자 다소곳이 눈을 내리뜨고
몸을 뚜챈에게 의지하여 작은 발로 간들간들 걸었다. 왕룽의
앞을 지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가느다란 음성으로
뚜챈에게만 "내 방은 어디지요?" 하고 물었다.
그 때 왕룽의 숙모가 렌화의 다른 팔을 부축하여 안뜰을 지나
새로 지은 방으로 인도했다. 왕룽의 집안 사람들을 이렇게
렌화가 오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칭 서방과 머슴들은 먼
밭으로 일을 나갔고 오란은 끝의 두 아이를 데리고 왕룽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아침부터 나가고 없었다. 위의 큰 아이들은
서당에 가 있었고 늙은이는 벽에 기대어 졸 뿐 아무 것도 듣지
못했고 보지도 못했다. 천치인 딸은 누가 드나들어도 모르는
판이었다. 그래도 렌화는 새 방에 들어가자 곧 휘장을 내렸다.
얼마 뒤 그 방에서 나온 숙모는 빈정대는 투로 손에 무엇이
묻기나 한 듯 손을 털면서 말했다.
"에이, 향수와 분 냄새가 지독하군. 아주 갈보 냄새가 배어
버렸어." 하곤 더욱 악의찬 말투로 말했다. "여보게, 그 여잔
보기보다 나이 먹었어. 사내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나이니까
옥귀고리나 금반지나 비단이나 공단필을 바라고 촌사람 집에
오지. 그렇지 않고야 아무리 부자기로소니 올 까닭이 있나, 뻔한
일이지."
그러고는 너무나 노골적인 말투에 왕룽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자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래도 참 미인일세. 저런 미인은 본 일이 없네. 황부잣집
종질이나 하던, 사내 같은 질부만 상대하던 조카는 이제
팔보채를 먹는 거나 다름없을 게야."
왕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붉은 휘장을 걷고
렌화가 앉아 있는 어둠침침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해가 저물 때까지 렌화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오란은 집안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날
새벽녘에 벽에 걸어둔 호미를 들고 어린것들을 데리고 배춧잎에
밥을 싸들고 들로 나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해가 저물어서야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어린것들도 묵묵히 그녀 뒤를
따라왔다. 오란은 아무 말도 없이 부엌에 들어가서 저녁 준비를
하고 언제나처럼 탁자 위에 음식을 차려 놓고 늙은이를 불러
손에 수저를 쥐어 주고 천치 딸에게도 먹여 준 다음 아이들과
함께 자기도 조금 먹었다. 늙은이까지 모두 잠이 들고 왕룽이
우두커니 넋 잃은 사람처럼 탁자 앞에 앉아 있으려니 오란은
몸을 씻고 침실로 들어가서 혼자 자는 것이었다.
이날부터 왕룽은 밤낮으로 애욕에 빠져서 렌화의 방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매일같이 침대 곁에 앉아 그녀의 일거일동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초가을의 늦더위가 싫어서 그녀는 방안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채 뚜챈을 시켜서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몸을 닦에 하고 머리와 몸에 향수를 뿌리게 하였다.
그녀는 잠시도 뚜챈을 놓지 않았고 몸종으로 붙들어 두고
싶어했다. 왕룽도 흡족할 만큼 보수를 주기로 하고 뚜챈을 집에
머물게 했다. 이렇게 해서 뚜챈과 렌화는 왕룽의 가족과는
떨어져 이 새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렌화는 언제나처럼 온종일 가벼운 새 명주 속옷만 걸치고
컴컴한 방안에 반드시 누워 과자나 과일을 씹고 있었다. 왕룽은
그러한 렌화의 모습에 한없이 도취되었다.
해가 지면 렌화는 귀엽게 어리광을 부려 왕룽을 밖으로
쫓아내고 뚜챈을 시켜서 몸을 훔치고 향수를 바르게 하고는
부드러운 흰 명주의 안을 받친 보랏빛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물론 왕룽이 사다 준 것이다. 그러고는 전족을 한 그 조그마한
발에 예쁜 공단 신을 신고는 간들거리면서 뜰로 걸어 나왔다.
렌화가 다섯 마리의 금붕어가 헤엄치고 있는 못가에 서서 그
헤엄치는 양을 들여다볼 때는 왕룽은 황홀한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왕룽에겐 렌화의 그 섬세한 손과 가냘픈 몸매가
도저히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볼 수 없을 만큼 가장 아름다운
모습처럼 눈에 비쳤다.
그는 이렇게 사랑에 빠져 홀로 즐기며 만족하는 것이었다.
21
사람들은 지붕 밑에 여자 둘이 있으면 집안이 편할 날이
없다고들 말한다. 왕룽의 집에 렌화와 뚜챈이 들어오고 나서도
아무 불평이나 불화가 없으리라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왕룽은 그런 것을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오란의
불평스런 기색이나 뚜챈의 독기 서린 모습으로 어쩐지 무언가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으나, 렌화에 대한
애욕에 빠져 있는 그에게 그런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낮이 밤이 되고 밤이 아침으로 바뀌어도, 왕룽은 아침 해가
떠오를 때마다 그의 곁에 렌화가 누워 있는 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느꼈다. 하늘에 뜬 달이 그 주기에 따라 차고
기울듯이 렌화는 언제나 옆에 가까이 있으므로 그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언제나 렌화를 껴안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갈증이 약간 채워지자 그는 지금껏 생각지 못했던
사실들에 겨우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하나는 오란과 뚜챈 사이에 곧 말다툼이 생긴 것이다. 이
일은 왕룽이 상상도 못해 본 일이었다. 남편이 둘째 여자를
들이면 아내는 대들보에 목매어 죽거나 그런 짓을 한 남편을
따지고 들어 맥도 못추게 하는 여자의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다.
왕룽도 오란이 렌화를 미워할 것이라고는 짐작했지만 다행히도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그 화살이 뚜챈에게 날아갈 줄을 미처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왕룽이 뚜챈을 처음 집에 두기로 작정했을 때는 렌화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그때 렌화는 "뚜챈을 내 몸종으로 두게 해 줘요.
난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에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 나이에 양친이 모두 돌아가셨고, 큰아버지는 내가
예쁘장하니까 이렇게 팔아먹었어요. 그래서 조금도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어요." 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왕룽에게
애걸했던 것이다. 그녀의 그 아름다운 눈에 글썽거리는 눈물을
본 왕룽은 두말 없이 그것을 승낙했다. 렌화에게는 몸종이 한
사람도 없었고, 그녀가 이 집에서 외톨박이란 것도 사실이었다.
오란이 첩의 시중을 들 리 없었다. 그녀가 렌화에게 말을 걸지
않을 뿐 아니라 렌화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할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 집안에 있는 렌화는 고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렌화의
곁에 가는 사람은 숙모 뿐이었지만 그의 신변에 대한 이야기까지
깊이 파고 들며 잡담할 것을 생각하니 불쾌한 일이었다. 종으로
어떤 여자가 적당한지 분별이 없는 왕룽은 뚜챈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란은 뚜챈을 대하자 이제껏 왕룽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화를 냈다. 뚜챈을 전날 당당한 황 영감의 몸종이었고
오란은 부엌일이나 하는 종이었지만, 이제는 왕룽네 집에
고용살이하는 만큼 오란과 다정하게 지내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오란을 처음 만났을 때 공손하게 말을 걸었다.
"어머, 반가와요. 다시 한집에서 살게 됐군요. 그렇지만
이번엔 당신이 대부인이고 내 주인이고...... 참 세상이란
이상하게 변하는군요."
그러나 오란은 뚜챈을 바라보다가, 그 뚜챈이 렌화의 몸종으로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들고 있던 물동이를 땅에 놓고
가운뎃방으로 들어가서 애욕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왕룽에게
말했다.
"저 종년은 무엇하러 집에 두었어요?"
왕룽은 갑자기 날카롭게 묻는 말에 당황했다. 그는 주인답게
떳떳이 말하고 싶었다. '내가 이 집 주인인데 어떤 여자를 두건
무슨 참견이야.' 하고 면박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의
애처로운 얼굴을 바라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그가 한 처사는 돈을 가진 부자들이면 누구나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다지 미안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왕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우물쭈물 주위를
살피면서 담뱃대를 찾는 척하고 허리춤을 이리저리 뒤적여 볼
뿐이었다. 오란은 꿈쩍도 않고 그 큰 발로 버티고 서서 남편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묵묵부답이자 오란은 다시 같은
말로 똑똑히 물었다.
"저 종년은 무엇하러 집에 두었어요?"
왕룽은 그녀에게 무엇이든 대답을 해야겠기에 맥풀린 어조로
대답했다.
"왜, 그 사람이 자네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가 황 영감댁에 있을 적에 얼마나 저년에게 구박을
받았다구요. 하루에 스무 번도 더 부엌에 달려와선 영감님
찻물이니, 영감님 진지니 하고 정신을 못 차리게 들볶고 언제나
음식이 너무 뜨겁다느니, 맛이 없다느니, 그러고도 나를
못난이라느니, 이러니저러니 몰아 대고......"
그러나 왕룽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란은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대답을 하지 않자 좀처럼
흘리지 않던 뜨거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푸른 앞치마
자락으로 아무리 눈물을 닦아도 자꾸만 흘러나왔다. 그녀는
앞치마 끝으로 눈물을 닦으며 겨우 말했다.
"내 집에서 이런 일을 하다니 너무해요. 이 집을 나갈래도
찾아갈 친정도 없고......"
그래도 왕룽은 담뱃대에 불을 붙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오란은 호소하는 듯 남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란은 말
못하는 짐승처럼 물끄러미 남편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단념한 듯
눈물이 앞을 가려 분별 못하는 손을 더듬으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오란이 사라지자 왕룽은 살아난 듯했으나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또 이런 자신의 생각이 부끄럽고 분하기도
하여 마치 누구와 싸움이나 하고 난 것처럼 큰 소리를 내어 혼자
중얼거렸다.
"다른 남자들은 마찬가지 아닌가. 나로선 안사람에게 섭섭하게
안했어...... 나보다 더 한 놈도 있는데......" 그러니까 오란은
그 쯤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란은 그걸로 끝장내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자기
방식대로 해 나갔다. 여느때나 다름없이 아침마다 차를 끓여
시아버지에게 봉양했고 왕룽이 렌화에게 가지 않고 있으면
그에게도 차를 주었다. 그러나 뚜챈이 렌화에게 찻물을 주려고
부엌에 가면 솥에 물이라곤 한 방울도 없었다. 뚜챈이 아무리 큰
소리로 불평을 해도 오란은 결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렌화를 위해서 필요한 물은 자기 손으로 직접 끓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벌써 아침 밥을 짓기 위해서 솥을
쓰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뚜챈이 아무리 큰
소리로 떠들어도 오란은 일언반구 대꾸 없이 제 할 일만 묵묵히
할 뿐이었다.
"작은 마님이 목이 말라 물을 기다리시는데......"
오란은 뚜챈의 말에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솥에 불만
지피면서 한 가닥의 나뭇가지라도 가난하던 옛시절을 생각해
가며 아껴서 조금씩 낭비되지 않도록 차근차근 집어넣을
뿐이었다. 그래서 뚜챈은 찢어질 듯한 소리로 왕룽에게
호소했다. 왕룽은 그가 사랑하는 렌화가 이런 일로 고통
받는다는 말을 듣자 그만 화가 치밀어서 부엌으로 쫓아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아침에 물을 끓일 때 좀더 끓일 수 없소?"
그러나 오란은 더욱 심각하게 증오가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난 종년의 종질은 못하겠어요."
왕룽은 화를 참지 못해서 그만 오란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말했다.
"잔말 말아. 누가 종년을 위해서래? 제 주인을 위해서지."
오란은 아무튼 꾹 참고 남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그 계집에게 내 진주를 두 개 다 주었죠?"
그러자 왕룽은 손을 어깨에서 떨구고 말을 잇지 못했다.
노여움도 잊은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곳을 떠나
뚜챈에게 가서 말했다.
"부엌을 따로 내고 솥도 따로 걸어야겠어. 저 미련한 것은
렌화가 좋아하는 음식도 마련하지 못할 게고 하니, 새로 부엌을
내서 자네 좋을 대로 장만하는 게 낫겠어."
왕룽은 곧 일꾼들을 불러 부엌을 새로 만들게 하고 솥도 새로
사왔다.
뚜챈은 왕룽이 '자네 좋을 대로 음식을 장만하는 게 낫겠어.'
라고 하는 말을 듣자 날아갈 듯이 기뻤다.
왕룽은 겨우 집안이 잠잠해지고 여자들의 말이 없어졌으니
이젠 자기의 사랑을 마음껏 즐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렌화에 대해서는 어떤 싫증도 느낄 줄 몰랐다. 렌화가 그 샛별
같은 눈의 백합 꽃잎 같은 새까만 긴 눈썹을 깜박거리며 애교를
부리거나 그를 바라보는 눈에 웃음의 빛이 흐를 때면 왕룽은
그만 전신이 움찔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새 부엌은 뜻밖에도 왕룽에게 괴로움을 가져왔다.
그것은 뚜챈이 매일 성안에 가서 남방에서 온 값비싼 식료품을
사오기 때문이었다. 왕룽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이었다.
야자 열매 끝에 담근 대추과자, 과실, 그 밖에도 온갖 해물 등
진기하고 값비싼 것 뿐이었다. 더욱이 뚜챈은 그런 물건 값의
얼마를 잡아 떼어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는 모양이었다. 만약
뚜챈에게 '넌 내 살을 갉아 먹는 것 아니냐?' 고 반박한다면
뚜챈은 골을 낼 것이고 따라서 렌화도 불쾌히 여길 것이라고
생각되어 그는 어쩔 수 없이 허리춤에서 은전을 꺼내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일은 매일같이 그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도 그런 딱한 사정을 말할 수도 없어
날이 갈수록 그는 냉가슴만 앓았다. 그러는 동안 렌화에 대한
왕릉의 애정도 차츰 식어 갔다.
뿐만 아니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그것은 그의 숙모가 식사 때마다 안채로 드나드는 것이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숙모는 은근히 렌화에게 추파를
던졌다. 날이 갈수록 숙모가 렌화와 친밀해지는 것이 왕룽은
몹시 싫었다. 여자 셋이 그렇게 값비싼 음식을 벌여 놓고 마음껏
먹어 대며 지껄이고 웃고 흥청거리는 모습은 왕룽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또한 렌화도 숙모를 정답게
대하는 것을 보니 왕룽은 더욱 불쾌했다.
그러나 왕룽은 참을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때로는
렌화에게 은근한 말로 타이르기도 했다.
"렌화, 자네는 왜 늙은 뚱보를 좋아해? 그렇게 해봤자 소용
없어. 나에게나 더 다정하게 해 줘. 그 숙모는 거짓말쟁이라
믿을 수 없는 사람이야. 자네 곁에 그런 노인네가 붙어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 아냐."
이 말을 들은 렌화는 발끈 성을 내며 토라졌다.
"나는 이 집에선 당신밖에 같이 놀 사람이 없어요. 나는 많은
사람이 복작거리는 집에서 자랐는데 이 집의 사람이라곤 날
미워만 하는 당신 부인과 귀찮게 구는 아이들밖에 없지 않아요.
아무도 친구가 없잖아요?"
렌화는 이렇게 심통을 부렸다. 그날 밤에는 왕룽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트집을 잡았다.
"내 행복을 생각해 주지 않는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왕룽은 마침내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하고 싶은 대로 해. 좋을 대로 해."
렌화는 여왕처럼 그를 용서했다. 왕룽은 렌화가 하는 일이라면
결코 탓하지 않고 좋다고만 했다. 그 후로부터 렌화는 왕룽이
렌화의 방문 앞까지 가까이 가도 숙모와 차를 마시거나 과자를
먹으면서 전혀 아는 척하지 않고 그를 오래도록 기다리게 했다.
왕룽은 렌화의 이러한 태도에 화가 났다. 이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자 왕룽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렌화에 대한 애정이 더욱
식어 갔다.
더욱 못 견디게 화가 나는 것은 렌화를 위해 산 비싼 음식을
먹은 숙모가 전보다 더 살찌고 기름기가 도는 일이었다.
그러나 영리한 숙모는 왕룽에게 더욱 다정한 태도를 취했고
비위도 잘 맞추었다. 그가 방으로 들어가면 곧 일어서곤 하였기
때문에 그는 트집을 잡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렌화에 대한 그의 사랑은 이전처럼 갈망에 빠진 몰아의
경지는 아니었다. 조그만 분노들을 속으로 삭히면서 꾹 참아야
했다. 사소한 일이지만 아무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일이
집안에서 자꾸 일어났다. 오란에게 그런 속사정을 털어 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에게는 더욱 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또 그 뿐이 아니었다. 어느 날 극도로 노쇠해서 정신이 몽롱한
그의 아버지가 아무 것도 모르고 보통때나 다름없이 담 밑에서
꾸벅꾸벅 졸고만 있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 아들이 생일 선물로
사다 준 용머리가 새겨진 지팡이를 들고 안뜰로 통하는 사이에
휘장을 쳐 놓은 곳까지 뒤뚱뒤뚱 걸어갔다. 지금껏 늙은이는
집안이 어떻게 됐는지, 새 집을 지었다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늙은이는 귀가 멀었기 때문에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듣지 못했고 자신의 생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왕룽도 첩을 들였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날은 이 늙은이가 생각 없이 이 휘장을 걷어 젖히니
그의 아들이 웬 여자와 나란히 못가에 서서 금붕어를 바라보고
놀고 있었다. 왕룽은 금붕어보다 렌화에게 한껏 눈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늙은이는 아들이 가는 몸매의 예쁘게 단장을 한
여인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자 놀란 듯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집에 갈보가 있구나!"
왕룽은 렌화가 성을 내면 큰일이라 생각했다. 연약한 그녀지만
한번 성을 내기만 하면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왕룽은 황급히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서 침착하게 달랬으나 늙은이는 잔소리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왕룽은 다시 늙은이를 이끌고 바깥 마당으로
데리고 가서 구구이 설명을 했다.
"진정하세요, 아버지. 저 애는 갈보가 아니라 제 소실이에요."
그러나 늙은이는 조용히 하지 않았다. 아들의 말이 귀에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큰 소리로 몇 번이나 말했다. "이 집에
갈보가 있구나!" 라고 소리소리쳤다. 그는 겨우 왕룽이 곁에
있는 것을 보자 별안간 말했다. "난 평생 한 여편네밖엔 안
가졌었다.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어. 우리는 대대로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냐." 하고 조금 있다가 또 "저건 갈보야." 하고
고함을 쳤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늙은이는 때때로 렌화에 대해 화가
치밀어오르는지 졸다 깨어나면 뜰 앞까지 걸어가서 큰 소리로
렌화에게 욕을 퍼부어 댔다.
"이 갈보야." 하고 침을 뱉기도 하고 돌을 집어 떨리는 손으로
못에 던져 금붕어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마치 심술궂은
아이처럼 유치한 방법으로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늙은 아버지의 이런 행동도 왕룽에게는 괴로운 일 가운데
하나였다.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편
렌화가 성내는 것도 여간 질겁할 일이 아니었다. 렌화가
걸핏하면 발끈 신경질을 내고 소란을 피우는 것이 왕룽으로선
귀여우면서도 못 견딜 만큼 지긋지긋했다. 아버지의 속을 풀게
하고 렌화의 마음을 좋게 하는 것이 여간 힘에 겨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애정은 이 일로 해서 또 한 가지 무거운 짐을
덧붙였다.
또 하루는 뒤채에서 별안간 찢어지는 듯한 렌화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왕룽이 부리나케 가 보니 쌍둥이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천치 누이를 가운데 놓고 서 있었다. 아이들은 렌화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위의 큰아이 둘은 그녀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조용히 속삭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밑의 작은
아이들은 방안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코를 벌름거리며
향수 냄새를 맡기도 하고 식사 후에 뚜챈이 날라내는 음식
쟁반에 손을 넣는 것쯤으로 만족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렌화는 몇 번이고 아이들이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왕룽에게
부탁했지만 왕룽은 그럴 때마다 농담조로 얼버무렸다.
"그래, 아이들도 나처럼 고운 얼굴이 보고 싶은 게지."
그리고 그는 아이들에게 그저 간단히 안뜰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타일렀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왕룽이 볼 때는
가까이 가지 않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슬그머니 드나드는
것이었다. 천치 계집애는 아무 분별 없이 바깥 양지쪽에서 헝겊
조각이나 가지고 자기 혼자 벙글벙글 웃으면서 놀 뿐이었다.
이 날은 큰애들이 서당에 가고 난 뒤 쌍둥이가 이 천치에게도
안채에 있는 여자를 구경시킬 생각으로 끌고 안뜰로 왔던
것이다. 이 천치 계집애가 오자 렌화는 처음 보는 아이라서 앉은
채 계집애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계집애는 렌화가 입고 있는
찬란한 옷이라든가 반짝이는 옥귀고리를 보고 이상하게 느꼈는지
손을 뻗쳐 보려고 하며 야릇하게 웃어댔다. 뜻도 모를 공허한
웃음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놀란 렌화가 고함을 지른 것이다.
왕룽이 가까이 가 보니 렌화는 분해서 전신을 바르르 떨며
전족한 작은 발을 구르고 웃고 있는 천치 아이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것이 내 곁에 온다면 난 당장에 나가겠어요. 이런
징그러운 천치가 있는 줄 알았으면 누가 와요? 더러운
새끼들만......" 렌화는 그 천치의 손을 잡고 멍하니 서 있는
사내애를 떠밀었다.
아이를 사랑하는 왕룽은 이 모습을 보자 갑자기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이...... 이...... 내 아이에게 그런 욕을 하면 용서 못해.
아무도 내 애들에겐 욕하지 못해. 이 천치에게도 그럴 수는
없어. 애를 가져 보지도 못한 네까짓 주제에 무슨 야단이야."
그러고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타일렀다. "자, 너희들은 저리로 가
있거라. 다시는 오지 마라. 이 여자는 너희들을 싫어한다.
너희들을 싫어한다는 건 너희 아비인 나도 싫다는 거야." 천치
아이에겐 더욱 자상하게 말했다. "자, 넌 양지쪽으로 가야지."
왕룽은 여전히 공허하게 웃는 딸 아이의 손목을 잡고 바깥 뜰로
나갔다.
왕룽은 이 천치 아이의 욕을 하고 더럽다고 한 렌화가 더욱
밉살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새삼스럽게 천치 아이에 대해 불쌍한
생각이 가슴에 솟구쳐 올랐다. 그는 며칠 동안 렌화의 방엘 가지
않고 아이들만 데리고 놀았다. 성안에 가서 과자를 사다가 천치
아이에게 주고 그 좋아하는 양을 바라보곤 얼마간 마음을 놓기도
했다.
그 후 왕룽은 다시 렌화의 방엘 갔으나 그들은 지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렌화의 태도는
이상하게 변했다. 왕룽의 마음을 사려고 특별히 애쓰는 것이
완연했다. 그가 돌아오자 숙모의 차를 마시던 렌화는 반색을
하며, "주인이 오셨네. 내 할 일이란 주인을 모시는
일인데......" 라고 말하면서 숙모를 돌려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왕룽을 다정스레 맞으며 손을 잡아 제 뺨에다 비비는
등 갖은 아양을 떨었다. 그는 렌화의 하는 양이 귀엽긴 했으나
그래도 예전처럼 사랑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맑고 서늘한 가을날 아침, 하늘은
맑게 개이고 바다처럼 끝없이 푸르렀다. 상쾌한 바람이 제법
힘차게 논밭 위를 불어가자 왕룽은 긴 잠에서 깬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문앞으로 나가 그의 논밭을 바라보았다. 물은 이미
빠지고 논밭은 햇볕에 말라서 바람결에 빛깔조차 빛났다.
그의 깊은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소리가 있었다. 애욕보다
더 깊은 농토에 대한 심각한 외침 소리, 그것은 그의 생활의
어떤 부분보다 가장 높은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은 그는,
입었던 두루마기를 벗어 버리고 우단 신과 버선 따위도 벗어
던지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기운차게 일어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괭이는 어디 있나. 쟁기는?...... 보리씨를
뿌려야지. 여보게, 칭 서방! 여보게 모두들 불러 주게. 들로
가세!"
22
대지는 왕룽이 남방에서 돌아왔을 때 그가 도시에서 받은 모든
마음의 상처를 풀어 주었듯이, 이번에도 그의 비옥한 논밭은
열병과 같은 애욕의 구렁에서 다시 그를 건져 주었다. 그는
홍수가 지나간 눅눅한 밭을 밟을 때마다 발에 느껴지는 감촉을
느끼며 씨앗을 넣기 위해 갈아 일으킨 흙냄새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그는 부리나케 머슴들을 부리는 한편 자신도 손수
쟁기를 잡고 소 등에 채찍질을 하며 땅이 깊게 갈리는 것을
보고야 칭 서방을 불러 고삐를 맡기었다. 그러고는 괭이를 들고
갈아붙인 흙덩이를 이리저리 부수면서 부드럽게 했다. 부드러운
흙에는 아직도 물기가 배어 있어서 검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뼈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부지런히 일하다가 지치면 그는 그전처럼
흙바닥에 누워서 잠을 잤다. 흙 속에서 피어 오르는 대지의
입김이 그의 몸에 배어 들어 애욕의 상처를 아물게 했다. 그의
애욕의 열병은 이렇게 해서 씻겨졌다.
한점의 구름도 없는 하늘에 태양이 서쪽으로 기어들 때 그는
놀 속에서 고된 몸에도 무한한 행복감을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일한 그는 마치 개선 장군처럼 안뜰로
통하는 휘장을 걷어 젖히고 유유히 들어서니 보통때 같이
비단옷을 입은 렌화가 거닐고 있었다. 그녀는 흙투성이가 된
왕룽을 보자 그만 놀란 듯 자지러지게 소리를 치며 그가 가까이
다가서지 몸을 도사렸다. 그러나 그는 너털웃음을 한바탕 웃고
나서 그의 흙묻은 손으로 섬세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때? 네 주인은 농군인 걸 알았지? 너는 농군의 계집이야."
렌화는 날카롭게 말했다.
"당신이야 뭐든, 난 농군의 계집은 아니에요."
왕룽은 더한층 소리높여 너털웃음을 웃고는 아무 미련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흙투성이인 채로 저녁밥을 먹었다. 그리고 자기 전에도
내키지 않는 목욕을 했다. 억지로 몸을 씻으면서도 계집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혼자 흡족하게 웃었다. 애욕의
구렁에서 벗어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그는 또다시 웃었다.
왕룽은 오랫동안 집을 비워 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여러
가지 할 일이 한꺼번에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논밭에는
가을 씨앗을 뿌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매일 들로 나갔다. 여름
동안 애욕에 빠져서 창백했던 그의 피부는 다시 햇볕에 검게
그을었다.
들로 나가게 되고부터 그는 점심과 저녁을 모두 오란이 지은
식사로 했다. 쌀과 배추, 두부, 그리고 마늘 등을 넣어서 만든
밀가루 빵이었다. 그가 렌화의 방에 들어 가려면 렌화는 코를
막으며 냄새가 난다고 호들갑을 부렸지만 그는 태연히 웃을
뿐이었다. 오히려 렌화의 코에 숨을 내뿜으며 지금부터 난 먹고
싶은 대로 먹을테니 네가 참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고 애욕에서 해방되었다. 언제나 그녀의
방에 들어가지만 일을 끝내면 곧 그녀를 잊고 다른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한 집안에 두 여자가 있어서 생기는 여러 가지
불상사는 사라지고 다시 자리가 잡혔다. 렌화란 여자는 왕룽의
노리개이고 성욕의 대상으로서, 아름다운 것으로서, 섬세한
것으로서 왕룽을 만족케 하고, 오란은 아들을 낳아준
안주인으로서 처신을 간소하게 하며 그의 남편과 시아버지와
아들의 의복과 식사를 맡아 보았다. 왕룽은 마을 사람들이
호사스런 첩 살림을 부러워하는 말을 할 때면 어깨가 저절로
으쓱해졌다. 그것은 세상의 귀한 보석이나 노리개 등과 같이 그
자신의 일상 생활에서 소용이 없는 것이지만 평시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이 궁색지 않은 부유한 생활의 표시로 마을 사람들은
여간 부러워하지 않았다.
더구나 왕룽이 부자라는 것을 유별나게 떠들고 다니는 사람은
그의 허풍선이 삼촌이었다. 요즘의 삼촌은 마치 충실한 개처럼
조카의 환심을 사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내 조카는 우리 같은 평민은 보지도 못한 선녀같은 첩을
가졌지." 라고 치켜세우기도 하고, "그 여자는 명주나 공단만
몸에 걸치고 마치 대갓집 마님 같아. 난 못봤지만 우리 마누라는
잘 알지." 그리고 또 이렇게도 지껄였다. "내 형님의 아들인
우리 조카는 굉장한 부자가 된 셈이야. 그 집 아들도 부잣집
아들이 됐으니 평생 놀고 먹을 수 있어."
그 덕에 마을 사람들은 더욱 왕룽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왕룽을 벌써 그들 자신과는 처지가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대갓집의 고귀한 사람으로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들은 왕룽에게 돈을 빌리러도 오고 그들 자녀들의
혼사에 대한 의견도 들으러 왔다. 또 밭의 경계 때문에 싸움이
생겨도 그에게 해결을 부탁하러 왔다. 그들은 왕룽의 판정에
두말 없이 복종했다.
지금껏 애욕에 사로잡혔던 왕룽은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하늘의 비는 계절에 맞추어 내렸고 밭의 밀싹은 무럭무럭
자랐다. 그해에도 겨울이 되자 왕룽은 곡식을 성안의 시장에
내었다. 그는 값이 오를 때까지 곡식을 저장해 두었던 것이다.
이번엔 큰아들을 데리고 갔다.
자기 아들이 제 손으로 문서를 꾸미고 또 소리 높여 남에게
읽어 주는 모습을 보는 일은 그 어버이로서 무척 신이 나는
일이었다. 왕룽은 지금 그런 뿌듯한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어깨를 젖히고 자기 아들이 읽고 쓰는 양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전에 자기를 업신여기던 점원들이, "참 글씨를
잘 쓰는데...... 영리한 아드님을 두셨군요." 하고 칭찬을
했지만 겉으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태연한 척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이 글자는 삼수 변에 쓸 것을 나무목 변이
되어 있군요." 하고 계약서의 잘못된 글자나 문장을 지적하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뻐근할 만큼 기뻤다. 왕룽은 아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옆을 돌아보며 침을 뱉거나
기침을 하면서 그런 감정을 감추려고 하였다. 잘못 쓴 글씨를
지적한 것을 보고 점원들이 놀라는 기색을 보여도 왕룽은 그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을 뿐이었다.
"그럼 고쳐 써라. 틀린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수야 있나?"
그는 장남이 붓을 들고 계약서를 고쳐 쓰는 것을 옆에 서서
바라보며 무한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계약서를 다시 고쳐 쓰고 곡물 매도증서와 대금 영수증에
왕룽의 이름을 대필하고 도장을 찍은 다음 부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왕룽은 집으로 돌아오며 이렇게 생각했다.
"내 아들도 이만하면 다 컸다. 더구나 장남이니 어버이로서
부끄럽지 않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내 아들은 부잣집 지주
아들이니까 옛날의 나처럼 어느 부잣집의,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
종을 아내로 맞이할 필요는 없어."
이날부터 왕룽은 며느리감을 구하기 시작했으나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민의 딸을 며느리로 데려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어느 날 밤 하루 일을 마치고 칭 서방과
가운뎃방에 앉아 봄씨앗으로는 무엇이 얼마나 들 것인지 또
얼마큼 사들여야 하는지를 의논한 다음 이런 사정을 얘기하였다.
물론 칭 서방은 그런 의논 상대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믿음직한
칭 서방에게 그런 얘기라도 하면 속이 후련해질 것만 같았다.
칭 서방은 언제나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왕룽 앞에 서서 주인과
같이 걸터 앉는 일이 없이 조신스럽게 얘기했다. 왕룽이 부자가
된 이후로 왕룽이 아무리 권해도 그는 결코 마주 앉는 법이
없었다. 주종간의 구별을 엄격히 지키며 어떠한 왕룽의 태도에도
대등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칭 서방은 왕룽의 아들에 대한
얘기라든가 며느리에 대한 얘기에 귀를 기울이더니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속삭이듯 약간 주저하며 말했다.
"내 딸년이 있었던들 은혜를 갚을 겸 그저 드리겠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
왕룽은 칭 서방의 생각이 고맙게 여겨졌지만 한편 칭 서방
따위의 딸은 턱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칭 서방은 어진
사람이긴 하지만 역시 한갓 농사꾼에 지나지 않고 또 그의
머슴에 지나지 않는가? 그런 말은 가당치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왕룽은 며느리감에 대한 것을 혼자 여러 가지로 궁리했다.
찻집에서 처녀 이야기가 나거나 또 그럴 듯한 부잣집 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그는 그쪽으로 귀가 솔깃해졌다.
그러나 숙모에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눈치를
감추려고 애썼다. 숙모는 찻집에 있는 색시를 소개하는 데는
알맞겠으나 여염집 딸을 가진 사람을 알 까닭이 없고 또 소중한
아들의 장래에 대한 것을 그런 가벼운 여자에게 말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그해도 저물어 눈이 많이 쌓이고
몹시 추운 겨울이 왔다. 그리고 곧 설날이 와서 온갖 음식물을
장만해서 먹고 마시며 놀았다. 왕룽의 집에 세배 오는 사람들은
마을 사람 뿐이 아니었다. 성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세배를
왔다.
"이 이상 더 바랄 것이 있겠소? 아들도 많고, 마님도 있고,
돈도 있고, 땅도 있으니까 더 바랄 것이 없군요."
왕룽은 비단옷을 입고 좋은 옷을 입힌 두 아들을 양 옆에
나란히 앉혀 놓고 사람들을 맞이했다. 복을 비는 붉은 종이들은
어느 방에나 붙어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도 무한한 행복에
만족했다.
봄이 왔다. 버들가지가 푸릇푸릇하고 복숭아꽃이 다시 피어
올랐다. 그러나 왕룽은 아직껏 며느리감을 찾지 못했다.
봄은 더욱 짙어가고 해는 길어지고 날씨도 더욱 따뜻해졌다.
자두꽃, 벚꽃이 향기롭게 피고, 축 늘어진 버들가지에는 잎이
활짝 피었다. 나무마다 푸른 새 잎이 하늘거렸고 축축한 땅에선
무럭무럭 아지랑이가 피어 올랐다. 그러자 왕룽의 장남이 갑자기
어른이 되어 갔다. 점점 우울해지고 괴팍해져서 음식도 전과
같이 아무거나 먹지 않고 책을 읽는 데도 곧 싫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왕룽은 갑작스런 큰아들의 태도에 놀라 근심했으나
의원을 불러 보아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는 큰아들에게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비위를 맞추어 줄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들의
심각한 우울증은 부드러운 말로 휘어잡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왕룽이 참다 못해 화를 내면 그는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제 방으로 달아났다. 왕룽은 더욱 놀라 아들 뒤를
쫓아가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부드럽게 말하였다.
"나는 네 아버지야. 못할 말이 어디 있니? 무슨 말이든 얘기를
해."
그러나 아들은 더욱 흐느끼며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서당에는 가지 않고 성안 거리를
여기저기 배회하다가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 둘째놈이 집에
돌아와서 심술궂게 아버지에게 일렀기 때문에 왕룽은 비로소 그
사실을 알았다.
"오늘 형은 서당에 안 갔어요."
왕룽은 화가 나서, 큰아들에게 소리쳤다.
"공연히 월사금만 버릴 셈이냐?"
그는 화가 나서 대나무 회초리로 아들을 마구 때렸다. 그때
부엌에서 오란이 이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뛰어나와 아들을
가로막아 섰다. 그래서 아들을 때리려던 매가 오란에게
떨어졌다.
장남은 조그마한 잔소리에도 곧잘 울면서 이렇게 매맞을 때는
이상하리만큼 새파랗게 질려 상을 찡그리고 결코 소리를 내지
않고 매를 맞는 것이었다. 왕룽은 밤낮 그 까닭을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도무지 그 까닭을 알 길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하고 난 후에도 왕룽은 이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날도 장남이 서당엘 안갔기 때문에 매질을
했던 것이다. 오란이 조용히 방에 들어왔으나 그는 눈앞에
다가설 때까지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그녀의 얼굴을 보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입을 열었다.
"왜,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당신은 이제 그 애를 때리기만 해서는 안돼요. 내가
황부잣집에 있을 때에 서방님들이 그렇게 되는 걸 몇 번 봤어요.
젊은 서방님들이 차츰 그 모양이면 영감님은 으레껏 종년을 붙여
줬어요. 제 힘으로 못 구할 때는...... 그렇게만 하면 아무 일
없어요."
"그런 그? 그러나 꼭 그런 것도 아닐 거야."
하고 왕룽은 반대를 했다.
"내가 젊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어. 저렇게 우울해 있거나
울거나 신경질을 부리지는 않았단 말야. 종년이라곤
없었으니까."
오란은 왕룽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말했다.
"나도 젊은 서방님들밖엔 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당신이야
들판에서 일하느라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그 애는 전날
그 서방님들처럼 어디 당신같이 거친 일을 해요?"
왕룽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았다. 그가 지금의 아들 나이일 때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서 들판에 나가면
온종일 소와 싸워야 했고 쟁기질을 하거나 괭이질을 하며 추수
때는 등벼가 부러지도록 소처럼 묵묵히 일만 했던 것이다.
지금의 자기 아들처럼 우울한 얼굴을 하여도 달래 줄 사람도
없었거니와 그의 아들이 서당에서 달아나듯 쟁기를 내던지고
집으로 돌아간댔자 당장 먹을 것이 없는 만큼 그는 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일을 회상하자 왕룽은 생각을 달리했다.
"내 자식은 나와 다르다. 나같이 몸도 튼튼하지 않다. 우리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나는 부자다. 일할 필요 없이 놀고 먹을 수
있다. 집안에는 머슴들이 몇 사람이라도 있으니 학자 같은 놈을
들판에 내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왕룽은 속으로 이런 학자
같은 아들을 가졌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글쎄, 임자 말처럼 그 애는 부잣집 젊은 서방님들 같아.
그렇지만 종년을 사줄 수야 있나. 빨리 장가를 들여야지......"
23
왕룽은 이렇게 말하고 일어나 렌화의 방으로 갔다.
렌화는 왕룽이 자기에게 와서도 멍하니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자 애교를 피우며 말했다.
"당신은 1년도 안됐는데 나를 봐도 못 본 척하네요. 차라리
찻집에 그대로 있을 걸 그랬어요......"
이렇게 말하고 렌화는 샐쭉하여 왕룽을 쳐다보았다. 왕룽은
빙그레 웃으며 렌화의 손을 자기 얼굴로 끌어다 향기를 맡으며
말했다.
"그야 품안에 매단 보석을 밤낮 생각할 수만은 없지. 그렇지만
만약에 그것을 잃기나 하면 아쉬운 거지. 난 요즈음 큰놈 때문에
애를 먹고 있어. 그 큰놈이 어떻게 장가를 조르는지 며느리를
구하는 중인데 어디 좋은 처녀가 있어야 말이지. 이 마을의
농사꾼 딸을 데려올 수도 없고 같은 성씨들 뿐이거든. 어디 같은
성씨끼리 혼사를 치룰 수 있나. 그리고 또 성안에는 우리집에
딸을 주려고 할 만한 사람도 없고, 장사꾼들에게 중매를
부탁하려 해도 그렇지. 공연히 병신이나 바보를 중매해도 딱한
노릇이니까."
렌화는 왕룽의 장남이 키가 크고 훌륭한 미남자인 것에 호감을
갖던 터였다. 그녀는 왕룽의 이야기를 듣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찻집에 있을 때 자주 오던 사람 이야기인데요. 그분은
곧잘 자기 딸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이의 딸은 아직 어린
모양이지만 나처럼 몸이 가늘고 꼭 나처럼 생겼다고 해요.
그래서 그분은 줄곧 '네가 맘에 들긴 하지만 딸년을 닮아서 맘이
내키질 않는다......' 고 하면서 늘 석류화란 색시 방에만
갔죠."
"어떤 사람이던가?" 왕룽이 물었다.
"참, 좋은 분이었어요, 돈도 많이 있는 것 같고, 우리들에게도
준다고 약속만 하면 꼭 주었어요. 흔히들 우리들이 조금만 잘못
해도 아주 속은 것같이 야단을 치는데, 그분은 '자아, 여기에
돈이 있으니 마음껏 놀라구. 사랑의 꽃이 필 때까지' 하면서
귀공자나 학자처럼 부드럽게 말했어요. 음성도 어찌나
고운지......"
렌화는 옛 추억에 잠기는 듯 했다. 왕룽은 그녀가 그렇게
지난날의 생각에 잠기게 하고 싶지 않아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부자라면 뭣하는 사람인데?"
"글쎄요. 잘 모르지만 아마 곡물 가게 주인 같아요. 저
뚜챈에게 물어봐요. 뚜챈이 그 사람의 재산에 대해서라면 더 잘
알고 있어요."
렌화가 손뼉을 치니 부엌에 있던 뚜챈에 뛰어들어왔다. 뚜챈을
불을 지피고 있었는지 뺨과 코가 불에 익어 빨갛게 달아 있었다.
렌화가 물었다.
"왜, 있잖아. 그때 그 키 크고 점잖은 양반이 누구지? 내 방에
와서 나한테 자기 딸을 닮았더면서, 좋긴 하지만 석류화 방에
가겠다고 하시던 분 말야?"
뚜챈은 대뜸 대답했다. "아, 유(劉)씨예요. 곡물 가게
주인이요. 점잖은 분이구 말구요. 날 보기만 하면 손에 꼭
은전을 쥐어 주시더니."
왕룽은 여자들 말이라 믿을 수 없었으나 그래도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 보았다.
"가게는 어딘데?"
"돌다리 거리에요.'"
뚜챈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왕룽은 손을 치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곡물을 파는 집이야. 그거 잘 됐는데,
일이 잘될 것 같군."
그는 비로소 그 곡물 가게 주인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와
곡물을 거래하는 곡물상의 딸이라면 여러 가지로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돈이 생길 일이라면 뚜챈은 고기 냄새를 맡은
쥐처럼 예민했다. 그녀는 얼른 앞치마에 손을 훔치면서 말했다.
"그럼 그 일은 내가 성사시키겠어요."
왕룽은 그녀의 그 교활한 얼굴이 의심스러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렌화는 명랑하게 말했다.
"그게 좋아요. 뚜챈은 유씨와 서로 잘 아는 사이니까 일이
쉽게 성사될 거예요. 더구나 뚜챈은 그런 일에 아주
능숙하니까요. 성사가 잘만 되면 중매료를 뚜챈에게 주기로 하면
되잖아요."
"꼭 내가 잘 해 보겠어요." 뚜챈은 아주 열심히 말했다.
사례금을 듬뿍 받을 생각을 하며 좋아서 싱글벙글했다. 그는
앞치마를 벗어 놓고 바쁜듯이 말했다.
"곧 다녀오겠어요. 고기는 조금만 손보면 되고 채소도 씻어
두었으니까요."
그러나 왕룽은 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급히
서두를 문제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어. 나는 아직 아무 결정도 안
했어. 자, 내일 생각해 보고 다시 의논하자."
뚜챈은 돈에 탐이 나고 렌화는 이 새로운 사건이 어떻게
되는가를 구경하고 싶었다.
"맏며느리를 보는 일인데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어."
이렇게 말을 내뱉은 이후로 왕룽은 며칠을 두고도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어느 날 새벽에 장남이 술에 취해서 다리를
휘청거리며 돌아왔다. 술 냄새를 풍기고 걸음을 뒤뚱거렸다.
그가 마당에서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 왕룽이 뛰어나가 보니
큰아들이었다.
장남은 왕룽의 앞에서도 도저히 술을 못이기겠는지 그만
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처럼 토해낸 자리에 축 늘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집에서 빚은 순한 술만 마셔 왔기 때문에 독한
술은 못이기는 것 같았다.
왕룽은 깜짝 놀라 황급히 아내를 불렀다. 둘이서 아들을
일으킨 다음 묻은 흙을 씻어주고 오란의 방으로 데려다 눕혔다.
오란이 뒤치다꺼리를 하는 동안 큰아들은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서 왕룽이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왕룽은 아들 형제가 같이 지내는 방으로 갔다. 둘째는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면서 서당에 갈 책을 싸고 있었다.
"어제 밤에 형은 너와 같이 안 잤니?"
"응......"
대답하는 양이 비밀을 감추려는 눈치였다. 왕룽은 그 모양을
보자 거친 소리로 말했다.
"그럼 네 형은 어딜 갔었단 말이냐?"
그러나 아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왕룽은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큰 소리를 질렀다.
"바른 대로 말 안 할 테냐? 이놈아."
이 바람에 아이는 질겁을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형이 아버지께 이르면 죽인다고 했어요. 부젓가락으로 지져
죽인다구요. 아무 말 않으면 돈을 준다고 말했어요."
이 말을 듣자 왕룽은 펄쩍 뛰며 외쳤다.
"말해! 말하지 않을 테냐? 말을 하지 않으면 죽일 테다!'
아이는 말을 하지 않다가는 정말 아버지에게 죽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는지 곧 대답했다.
"형은 오늘로 사흘째예요. 아저씨하고 같이 나갔어요. 난
그것밖에 몰라요."
왕룽은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고 대뜸 숙부 방으로 걸어갔다.
숙부의 아들도 술에 취해서 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룽의 장남보다 나이 많고 또 술에 익숙해서 말짱해 보였다.
왕룽은 사촌에게 큰 소리로 호통쳤다.
"대체, 너는 순진한 우리 애를 어디로 끌고 다녔냐?"
사촌은 왕룽의 얼굴을 비웃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누가 데려가요. 혼자서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걸요."
그러나 왕룽은 다시 한번 그 건방진 태도가 죽이고 싶을 만큼
밉고, 분해서 큰 소리로 무섭게 소리를 질렀다.
"그 애가 지금껏 어디에 있었단 말이냐?"
숙부 아들은 너무나 큰 소리에 질려 비웃던 눈길을 돌리면서
마지못해 대답했다.
"전의 황부잣집 안뜰에 살고 있는 여자 집에 갔었어요."
이 말을 듣자 왕룽은 정신이 아찔했다. 그 여자는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벌써 나이도 많이 먹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뱅이를
상대로 몇 푼 안되는 돈에도 몸을 파는 매춘부였다. 왕룽은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부리나케 대문 밖으로 나가서 밭둑길을 따라
성안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농토를 지나치는 동안 그의 밭
곡식이 어떻게 되었는지 얼마나 여물었는지조차 살펴보지
않았다. 오직 장남인 아들 일에만 온 정신이 팔렸다. 그는
성문을 지나 옛날의 황부잣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어마어마하던 문은 열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은
그 두꺼운 무쇠 빗장을 거는 사람도 없었다. 누구나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다. 뜰 안으로 들어가니 뜰에도 방에도 세들어
사는 가난뱅이들로 꽉 차 있었다. 주위는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졌고 뜰에 섰던 큰 정원수도 없어졌다. 남아있는 나무들은
말라 죽어 있었고 연못은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왕룽의 눈엔 주변 환경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뜰을 마주 보고 있는 방 앞으로 가서 물었다.
"양(揚)이란 여자는 어느 방에 있소?"
세 발 달린 걸상에 앉아서 신 바닥을 깁던 여인 고개를 들고
안뜰로 들어가는 어귀를 턱으로 가리키곤 다시 신을 깁기
시작했다. 늘 같은 물음을 받아 오기 때문에 귀찮은 모양이었다.
왕룽은 그쪽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방안에서
귀찮은 듯이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가세요. 장사는 끝났어요. 난 이제 한숨 자야겠어요."
그는 다시 또 문을 두드렸다.
"거 누구세요?"
왕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또 문을 세게 두드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 볼 작정이었다. 그제야 여인은 문을 열었다.
그리 젊은 여자는 아니었다. 몹시 피로한 듯 두툼한 입술은 축
쳐져 있었고 이마의 분은 얼룩져 있었다. 뺨이나 입술의 연지도
씻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왕룽을 보자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늘 밤에는 안돼요. 오시려면 밤에 일찍 오세요. 지금부터는
자야 하니까요."
그러나 왕룽은 거친 소리로 여자의 말을 이었다. 자기 아들이
이런 계집과 밤을 지냈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난 그따위 일로 찾아오지 않았어. 내 아들 일 때문에 온
거야."
왕룽은 아들 일 때문에 분한 생각에 목이 메일 정도였다.
계집이 되물었다.
"그래, 당신 아들이 어쨌단 말이에요?"
"어젯밤에 여길 왔었어." 왕룽의 목소리는 떨리기까지 했다.
"어젯밤엔 젊은 사람들이 여러 명 왔었어요. 누가 당신
아들인지 내가 알게 뭐에요."
"잘 생각해 보우. 후리후리하고 나이보다는 키가 크고 아직
어려. 이런 데 올 줄을 꿈에도 생각 못 했어."
왕룽은 애원조로 조용히 말했다. 여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아, 둘이서 온 젊은 양반인 모양이군요. 한 분은
거만스럽고 잘 아는 척하고 모자를 갸우뚱하게 쓰고...... 한
분은 당신이 말한 후리후리한 청년이고......"
"그놈이오, 그놈이 바로 내 자식놈이란 말이오."
"그런데 아드님이 어쨌단 말이에요?" 하고 여자가 물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이제부터 그 애가 오거들랑 내쫓아 줘요.
아이들은 안 받는다고 핑계를 대서라도 타일러 보내 줘요. 그
대신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가 갑절씩 낼 테니."
여자는 이상한 듯 빙그레 웃으며 왕룽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소리내어 깔깔 웃었다.
"좋구 말구요. 일하지 않고 돈을 준다는데 누가 싫다고
하겠어요. 사실 나도 그런 애송이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어른이
좋아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음탕한 눈으로 왕룽을 쏘아보았다.
왕룽은 그런 추한 꼴이 지극히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럼 잘 부탁하오."
그는 이렇게 간단히 대꾸하곤 그 자리를 떠나 집으로 향했다.
걸어가면서도 그 여자를 생각하면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아서 몇
번이고 침을 뱉었다.
그날 왕룽은 뚜챈에게 말했다.
"이전에 자네가 말한 대로 그 곡물상 유씨에게 말해 봐 주게.
지참금은 많을수록 좋지만 신부만 좋다면 그리 많지 않아도
좋네. 아무튼 주선해 보게."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오란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들이
누워 있는 곁에 앉아 늠름한 아들의 젊은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젊음이 넘치는 매끄러운 살결과 조용히 잠자는
얼굴을 보았다. 그 귀신같이 분칠한 갈보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 오란이 들어왔다. 선 채로 아들 몸에서 진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자 끓인 물에 초를 넣어 정성껏 닦아 주었다.
그녀는 황부잣집에 있을 적에 젊은 서방님네들이 술에 취해
떨어지면 이렇게 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 가련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왕룽은 갑자기 삼촌에 대한 노여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삼촌 방으로 갔다. 그는
삼촌이 자기 아버지의 동생이란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가
가장 애지중지하던 큰아들을 유혹해 낸 부랑자의 아비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 화가 치미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나는 배은망덕한 뱀집을 치고 있소. 그 뱀이 내게 덤벼들어
나를 물었소."
삼촌은 아침 식사 중이었다. 그는 언제나 할 일이 없는지라
한낮까지 방 안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삼촌은 왕룽을 잠깐
거들떠보고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러는 거지?"
왕룽은 숨을 헐떡여 가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삼촌은 웃어버릴 뿐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는 걸 막을 수야 있나?
암내를 맡은 수캐를 암캐로부터 떼어놓을 수는 없는 법이거든."
왕룽은 이 삼촌에게 온갖 괴로움을 당해 온 지난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흉년이 들었을 때 얼마나 그에게 땅을
팔라고 졸라 댔던가.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들 세 식구가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그의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잘 지내고 있지
않은가? 또 숙모는 매일같이 뚜챈이 렌화를 위해서 장만하는
값비싼 음식을 같이 먹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왕룽이
애지중지하는 큰아들을 유혹까지 해서 그런 갈보년에게 끌고
갔다고 생각하니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그는 혀를 깨물 듯이
격한 어조로 말했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 주시오. 지금부턴 쌀 한톨도 못 주겠소.
그따위 은혜 모르는 게으름뱅일 집안에 둬? ...... 차라리 이
방에다 불을 질러 버리지."
그러나 삼촌은 태연히 앉아서 식사를 계속했다. 왕룽은 전신의
혈관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삼촌이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쳐다보지도 않자 왕룽은 주먹을 불끈 쥐며 다가섰다.
"내쫓을 수만 있다면 내쫓아 보지 그래."
"뭣이, 뭣이 어째!" 왕룽이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모른 채
말을 더듬으며 대들자 삼촌은 조용히 저고리 안섶을 내보이며
거기에 붙어 있는 것을 슬그머니 보여 주었다. 왕룽은 말도
못하고 몸이 굳은 채 장승처럼 우뚝 섰다. 그는 그 옷 속의 붉은
수염과 붉은 천 조각을 보았기 때문이다. 왕룽은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그 칼날 같은 분기가 그만 스스로 녹아
버리고 기운이 쭉 빠지는 바람에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그 붉은 수염과 천 조각은 그때 중국 서북부 일대를 약탈하고
다니던 비적단의 표적이었다. 그 비적단은 도시를 습격하고
농촌에 불을 지르고 부녀자를 빼앗아 갔다. 그들은 흔히
농민들을 대문 앞에 결박해 놓고 가버렸다. 이튿날 사람들이 그
농민을 발견했을 때는 미쳐서 발광하는 일도 있고 죽었으면
불고기처럼 불에 타 있었다. 왕룽은 눈이 침침해질 만큼 삼촌의
옷 속을 들여다보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나왔다. 그는
삼촌이 다시 젓가락을 들면서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를 등 뒤로
들었다.
왕룽은 자기가 지금까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함정 속에 빠진
것 같았다. 삼촌은 여전히 그 긴 수염을 바람에 휘날리며
싱글싱글 웃으면서 남루한 두루마기를 걸치고 드나들었다.
왕룽은 그런 모양의 삼촌을 보기만 하면 진땀이 흘렀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공손한 태도로 응대할 수밖에 없었다. 삼촌이 어떤
앙갚음을 할지 뒷일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왕룽이 풍성한 추수를
했을 때도, 또 홍수라든가 그 밖의 다른 일로 흉년이 들어서
굶는 일이 있어도 왕룽의 집엔 비적이 들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왕룽은 언제나 비적이 겁나서 밤이면 대문을 꼭꼭
잠그고 지냈다. 렌화를 데려오던 여름까지만 해도 옷차림을
허름하게 하고 돈이 있는 티를 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서
비적의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그는 겁이 나서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그는 깜짝 놀라 귀를
치켜 세우곤 했다.
그러나 그의 집엔 비적이 들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그에게서는 차츰 비적에 대한 공포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하늘이 그의 행운을 도와 준다고 믿게끔 되었다. 그래서 사당의
지신님에 대한 믿음도 자연 없어져서 향불을 올린다거나 정성을
드리는 일도 잊어버린 채 다만 집안일과 논밭에 대한 생각에
전념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비적을 모면하고 있는 까닭을 짐작하게 된
것이다. 삼촌네 식구를 부양하기만 하면 그의 집은 안전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진땀이 흐르는 것 같았으나
그래도 삼촌의 속옷에 숨겨져 있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용기가 없었다. 이제 삼촌에게 나가라니
어쩌니 하는 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숙모에게도 은근한 말로
비위를 맞추어 주었다. "렌화한테 가서 무얼 잡수시구려. 이건
얼마 안 되지만 용돈에 보태 쓰시구요."
사촌에 대한 불쾌한 감정도 이따금 가슴을 내치쳤지만 그는 꾹
참았다.
"얼마 안 되지만 이 돈을 받아 둬. 젊을 때는 마음껏 놀고
싶은 법이지......" 하고 사촌에게 은전을 꺼내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큰아들은 엄중히 감시를 했다. 해가 지면 결코 문
밖에 내보내질 않았다. 화가 난 장남이 온갖 트집을 잡고 성을
내든, 또 제 동생에게 화풀이를 하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밖엔
내보내지 않았다.
처음 왕룽은 이러한 여러 가지 괴로운 일들을 처리해야 할
걱정거리로 심난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도 시원한 결말이
나지 않았다. 삼촌을 내쫓아 버리고 성안으로 가서 살면 밤마다
성문을 닫기 때문에 비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매일 들판에 나가서 일을 할 생각을 하면 들판에서 또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또 흉년이
닥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부자가 당했듯이 비적 떼는 그런
성문도 소용 없이 습격해 올 것이고, 이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는 성안 관청에 가서 호소할 수도 있었다.
"제 삼촌은 붉은 떼와 한패거리입니다."
그러나 밀고한들 그의 조카가 하는 말을 누가 곧이 들을
것인가? 오히려 자기는 불측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고 그의
삼촌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을 게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비적단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비적에게 무서운 복수를
당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루도 마음놓고 지낼 수 없는
일이다.
거기에다 뚜챈이 주선하는 혼사 이야기도 그를 당황하게 했다.
혼담은 잘 되었지만 그 딸이 아직 열네 살밖에 안 되었으니
3년만 더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서로 약혼만 해
두자는 것이었다. 왕룽은 3년 동안이나 견디어 나가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장남은 날마다 짜증을 내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듯 서당에도 열흘에 이틀은 빠졌다. 그날 밤 식사 때에
그는 오란에게 말했다.
"여보, 다른 애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미리 약혼해 두어야겠어.
그랬다가 철이 들면 혼사를 치릅시다. 또 이런 일을 세 번이나
당한다면 견딜 재간이 없어."
그날 밤 왕룽은 이런저런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녘이 되자 두루마기와 신을 모두 내동댕이치곤 괭이를 들고
들로 나갔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집안 일이 걱정이 되면 들로
나가 울적한 심사를 달래는 것이었다. 바깥 마당을 지나려니까
천치 딸이 여느때와 같이 헝겊 조각을 가지고 놀며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저 계집애는 다른 애들보다 제일 내 맘을 위로해 준다니까."
그 후 왕룽은 여러 날 동안 계속 들에 나가 열심히 일했다.
흙은 다시금 그의 아픈 마음을 치료해 주었다. 내리 쬐는 강한
햇볕은 그의 가슴속에 맺친 모든 울화를 한순간에 녹게 했으며
뜨거운 실바람은 그의 마음에 평화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의
괴로운 심사를 뿌리째 뽑아 줄 일이 일어났다. 그 일은 어느 날
남쪽 하늘에 구름처럼 지평선 위에 걸려 있더니 이윽고 부채같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쳐다보던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서로 수근대며
공포에 싸였다. 그들은 모두들 남쪽 하늘에서 무서운 메뚜기떼가
날아 들어 그들의 농작물을 바닥낼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고 있자니 바람에 밀리어 그들의 발밑에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한 사람이 황급히 주워 보니 그것은 죽은 메뚜기였다.
그것은 그 뒤로 밀어닥칠, 살아 있는 메뚜기 무리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이 순간 왕룽은 지금까지 자기를 괴롭혀 오던 생각들을 모조리
잊어버렸다. 렌화의 일도 아들의 일도 삼촌의 일도 순식간에 다
잊어버렸다. 그리고 놀라고 있는 마을 사람들 사이를 뛰어
다니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자아, 우리들의 밭을 위해서 이 메뚜기들과 싸웁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처음부터 절망한 듯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 뿐이었다.
"아니, 소용 없어. 피할 수 없는 일이야. 금년은 흉년이 들게
되어 있어. 어차피 굶주리게 되어 있는 것을 싸워 보았자 무얼
하겠소."
마을 아낙네들은 울며불며 성안으로 가서 향을 사다 사당
지신님께 정성스레 피워 올리며 지성을 드렸다. 어떤 사람들은
성안에 있는 큰 사당에 가서 빌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천지의 신에게 기원을 올렸다.
그러나 메뚜기떼는 온 천하에 가득 퍼지면서 삽시간에 들판을
뒤덮었다.
왕룽은 머슴들을 불러 모았다. 칭 서방은 묵묵히 그의 곁에
서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젊은 일꾼들과 함께
곡식이 거의 다 익은 밭에 불을 질러 밀을 태우고 넓게 고랑을
파고 샘의 물을 퍼넣었다. 그들은 모두 밤을 새우며 일했다.
오란을 비롯해 아낙네들은 밤참을 날랐다. 남자들은 무서운
짐승처럼 부랴부랴 밤참을 퍼먹고는 밤낮 없이 일했다.
이윽고 하늘이 캄캄해지고 대기는 메뚜기떼의 날개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리고 밭으로 소낙비처럼 떨어져 오는
것이다. 그냥 날아 지나간 밭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으나 일단
내려앉은 밭은 마치 겨울 밭처럼 잎사귀 하나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어떤 사람은 하늘이 내리는 재앙이라고 단념해 버렸으나
왕룽은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메뚜기떼를 닥치는 대로 때려
죽였다. 그의 머슴들도 도리깨를 휘둘러 수없이 많은 메뚜기떼를
때려 잡았다. 불에 떨어져 타 죽은 메뚜기도 있고 고랑물에
떨어져 죽은 놈들도 있었다. 이렇게 몇백 번이나 헤아릴 수없이
죽였으나 구름떼같이 엄청난 메뚜기떼인 만큼 거의 아무런
영향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왕룽에겐 그렇게 싸운 보람이 있었다. 상당한 피해를
모면했던 것이다. 메뚜기떼가 지나간 뒤에 겨우 한숨 쉬면서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그의 밭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고 상당히 수확할 양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못자리에는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마을 사람들은
메뚜기를 볶아서 맛있게 먹었으나 왕룽은 그렇게 몸서리치던
생각에 나서 먹지 않았다. 오란은 기름에 튀겨서 머슴들과
맛있게 먹었고, 아이들도 메뚜기의 눈알이 무서워서 날렵하게
뜯어 먹었으나 왕룽은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메뚜기떼는 왕룽의 번거롭던 마음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1주일 동안이나 밭에서 메뚜기떼와 싸우는 동안 집안의
걱정스러운 일도 마음의 공포도 모두 잊어버렸다. 그는 침착하게
자기를 타일렀다.
"사람은 누구나 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가는 거야. 나도
공연히 이것저것 근심할 게 아니라 마음 편히 지내 보자. 삼촌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먼저 죽겠지. 큰놈도 어떻게 한 3년만
지나면 장가를 들 게고. 아무튼 걱정 때문에 자살할 정도는
아니니까.'
밀을 거두어 들이자 비가 내렸다.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었다. 그리고 또 여름이 되었다.
24
왕룽이 이젠 집안이 아무 일없이 편안하리라고 생각하던 어느
날, 낮에 그가 밭에서 돌아오니 큰아들이 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아버지, 전 서당의 공부를 오늘로 마쳤어요. 성안에 있는
노선생한테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요."
왕룽은 부엌 가마솥에서 더운 물을 퍼내어 수건을 적셔 얼굴을
닦으면서 물었다.
"그렇겠군.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거니?"
큰아들은 주저하면서 말을 이었다.
"학자가 되려면 남방 도시로 가서 대학엘 들어가야 해요."
왕룽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더운 김을 올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에 지쳐 몹시 고달팠기 때문이다.
"못난 소리. 그건 안돼. 그런 곳까지 갈 필요는 없어. 이
고장에서는 너만큼 공부한 사람도 드물어."
왕룽은 다시 수건을 물에 적셔서 짰다.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왕룽은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으므로
화를 내며 아들을 야단쳤다.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똑똑히 말해."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마음에 걸려서인지 큰아들은 욱해서
말했다.
"좋아요. 그래도 난 가요. 누가 밤낮 이런 촌구석에서
어린애처럼 꾸중만 듣고 살아요. 성안에도, 이 마을도
마찬가지니 나는 먼 남방 도시로 가겠어요. 배우기도 하고
구경도 하고 오겠어요."
왕룽은 깜짝 놀라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들은 시원한 은빛
여름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코밑엔 수염이 보송보송 나기
시작했다. 살결은 매끄럽게 빛났다. 긴 소매 속에 감춰진 손은
여자 손처럼 부드럽고 나긋나긋했다. 왕룽은 눈을 돌려 자기
자신을 살펴보았다. 튼튼하고 흙투성이였다. 허리에서
무릎까지만 오는 푸른 무명 반바지만 입은데다 상반신은
벌거숭이였다. 누가 봐도 그를 이 곱상한 젊은이의 아버지로
보기보다는 하인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왕룽은
키가 후리후리 하기만 한 아들의 모습에 대해 경멸심이 일었다.
그래서 그는 화를 내며 난폭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럼 우선 밭에 가서 몸에 흙칠을 하고 오너라. 그 꼴로는
누구나 계집애인 줄 알겠다. 그리고 자기가 먹을 것쯤은 자기
손으로 벌어 봐."
왕룽은 전에 아들이 글씨를 잘 쓰던 일이라든가 서당의 성적이
좋다든가 하는 일에 자랑스러웠던 일도 잊고, 아들의 연약한
풍체에 울화가 치밀어 올라 맨발로 마루를 구르면서 침을 탁
뱉고 돌아섰다. 아들이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으나 왕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날 밤 왕룽이 렌화의 방에 들어가니 렌화는 침대에 자리를
펴고 누웠고 뚜챈은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왕룽이 그녀 곁에
걸터 앉으니 렌화는 지나가는 말같이 입을 열었다.
"당신 큰아드님은 매우 고민이 많은 모양이에요. 어디로 멀리
가고 싶어하는 모양입니다."
왕룽은 아직도 아들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격한 어조로 말했다.
"임자가 무슨 상관이야. 그 애는 여기에 못 오게 했는데
임자가 어떻게 알아?"
렌화는 당황해서 말했다.
"아니에요. 여기에 온 것이 아니에요. 뚜챈에게서 들었어요."
그러자 곁에 있던 뚜챈이 얼른 말을 받았다.
"아드님은 누가 봐도 훌륭한 서방님이 됐어요. 그런데
집안에서 놀기만 해서야 어떻게 하겠어요?"
그제야 왕룽은 조금 마음이 풀리기는 했으나 그래도 아들에
대한 노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안돼, 그놈을 멀리 보내지는 않을 테야. 그런 쓸데 없는 일에
공연한 돈을 쓰고 싶지 않아."
왕룽은 그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렌화는 그가 아직도
불쾌한 기색을 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뚜챈을 내보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 큰아들은
다시 마음을 잡은 것 같았다. 서당에는 가지 않았으나 왕룽은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장남은 벌써 열여덟 살이 되었고 제
어머니를 닮아 튼튼한 육체를 가졌다. 큰아들은 왕룽이 집안에
있을 때는 자기 방에서 온종일 책을 읽었다. 왕룽은 안심이 되어
혼자 생각해 보았다.
"남방에 가려던 것은 젊은 아이들에게 흔히 있는 탈선이었어.
아직 철이 덜 나서 제 마음도 제가 모를 거야. 앞으로 3년이라고
하지만 돈만 많이 주면 2년도 될 수 있겠고 어쩌면 1년으로
될지도 모른다. 추수를 마치고 겨울 보리 씨나 뿌리고 콩타작을
하고 유씨와 직접 교섭해 보아야 겠다."
그러나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아들에 대한 일을 잊어버렸다.
가을 추수가 워낙 바빴던 탓이었다. 메뚜기떼의 피해를 입은 몇
곳을 빼놓고는 여간 풍작이 아니었다. 렌화로 해서 써 버린 것
이상의 소출이었다. 그는 다시 돈에 대한 애착심이 강하게
생겼다. 때로는 왜 그렇게 계집에게 돈을 헤프게 썼을까 자기를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렌화에게 싫증이 난 것도 아니었다. 처음같이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숙모가 언젠가 말한 것처럼 렌화는 보기보다 나이가 들었고 또
아이를 못 낳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왕룽은 그녀를
소유하고 있는 것에 자랑을 느꼈다. 그에겐 아들이 있으니
아이를 낳지 못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를
지금처럼 호사스런 노리개감으로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렌화는 나이를 먹을수록 아름다와졌다. 전에 그녀에게 결점이
있다고 한다면 작은 새처럼 연약하고 얼굴에 살이 없어서 관골이
드러나보이는 것이었다. 뚜챈이 만들어 주는 음식을 먹기도
하거니와 한 사나이하고만 지내기 때문에 심신이 편해서 몸에
살이 오르고 얼굴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시원스런 눈맵시나
오목한 입 모습은 살찐 고양이처럼 오동통했다. 이젠 연꽃
봉오리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활짝 피어 버린
꽃도 아니었다. 그리 젊지도 않고 늙지도 않았다. 여자의
인생으로는 한창 때인 것이다.
왕룽의 생활은 다시 평온해졌다. 맏아들도 다시 마음을 잡고
있다는 생각에 그는 극히 만족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혼자서
추수한 밀과 쌀을 얼마쯤 팔까 하고 손가락으로 계산하고 있을
때 오란이 조용히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해마다 몸이 여위어
얼굴에도 광대뼈가 불거져 나왔고 두 눈은 움푹 꺼져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어쩐 일이냐고 물어도 이렇게 밖에 대답하지
않았다.
"뱃속이 타는 것 같아요."
지난 3년 동안 그녀의 배는 임신한 것처럼 불룩해 있었지만
아이는 낳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새벽부터 꾸준히 자기 일을
했다. 왕룽은 오란을 한갓 탁자나 의자, 정원의 나무를 보는
것과 같은 눈으로 보아 왔던 것이다. 머리를 숙이고 있는 소나
식욕이 없는 돼지를 보는 것보다도 더 관심이 없었다. 오란은
혼자서 죽도록 일만 해 왔다. 그녀는 숙모에게도 꼭 해야 할
말만 하고 뚜챈에겐 전혀 말을 건네지 않았다. 어쩌다 렌화가
안뜰까지 나오는 일이 있으면 오란은 그만 자기 방에 틀어박혀
누가 렌화가 돌아갔다고 알려 줄 때까지 결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부엌일을 하거나 겨울날에도 두꺼운
얼음을 깨고 못가에서 빨래를 하곤 했다. 그래도 왕룽은 '살기가
이만하니 식모를 두거나 종을 데리고 일하는 게 어떨까?' 하고
아내를 걱정하는 법이 없었다.
왕룽은 아내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 자신은 머슴을 들이면서도 소와 말을 먹이거나 여름철에
냇물이 차면 집오리와 거위를 기르기 위해서까지 일꾼을
사들였지만 아내에겐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날 밤도 왕룽은 가운뎃방의 촛대에 불을 켜 놓고 혼자
앉았는데 아내가 들어와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요."
왕룽은 깜짝 놀라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 말해 보구려."
촛불이 그녀의 얼굴 그림자를 뚜렷이 그렸다. 그녀의 얼굴엔
벌써 아름다운 구석이라곤 눈을 씻고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곁을 멀리한 지 몇 해나 되나 하고 왕룽은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오란은 윤기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아이가 자꾸 안채에 들어가요. 당신이 나가고 없으면
곧바로요."
처음 왕룽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어 상반신을 내밀며 말했다.
"뭐라고?"
오란은 묵묵히 아들의 방을 가리키면서 두껍고 마른 입술로
뒤채로 통하는 입구를 가리켰다. 그러나 왕룽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왕룽은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임자는 지금 꿈꾸고 있는 게 아니오?"
그러나 오란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매우 거북한 듯이
말했다.
"한번 불쑥 집에 들어와 보면 알 거 아녜요."
그러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방에라도 좋으니까 아무튼 멀리 보냅시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식어 버린 찻물을 쏟아 버리고
새로 뜨거운 찻물을 따르고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나가 버렸다.
왕룽은 넋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왕룽은 아내가
질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은 매일 자기 방에서 책만
읽고 있지 않은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웃었다. 그리고
여자 소견이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를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그날 밤 그는 렌화의 방으로 갔다. 렌화의 곁에 누우려고
침대에 올라가니 렌화는 투정을 부리며 그를 밀어붙였다.
"더워요. 더욱이 당신한테선 땀 냄새가 나요. 내 곁에 오실
때는 몸을 좀 씻고 와요."
렌화는 침대에서 일어나 얼굴에 감기는 머리카락을 귀찮은
듯이 쓸어 올렸다. 왕룽이 끌어안으려고 해도 어깨를 움추리며
피하는 것이었다. 왕룽은 멋없이 혼자 누워서 요 며칠 밤새
렌화가 쾌히 그의 요구를 받아 주지 않는 것을 생각했다.
지금껏 그는 렌화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거나 또는 늦더위에
몸이 괴로와서 그런 것이라고만 여겨왔으나 오늘 밤은 오란의
말이 생각나서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럼 혼자 자. 같이 자다가 목이라도 잘리면 큰일이니까."
왕룽은 렌화의 방을 뛰쳐나와 가운뎃방으로 가서 의자 두 개를
나란히 끌어다 놓고 그 위에 누웠다. 그러나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바깥으로 나가 담을 끼고는 대나무 숲을
거닐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흥분한 그의 몸을 스친다. 가을이
가까와 오는 모양이다.
그는 언젠가 렌화가 자기 아들이 남방으로 가고 싶다고 말을
했다고 하던 것을 생각해 냈다. 렌롸가 그런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또 요즘에는 아들이 남방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고 집안에 얌전히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분연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옳아, 내 눈으로 확인해야지."
달이 기울었다. 망망한 들판 지평선 위로 황금빛 태양이
번쩍였다. 그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들로 나가서 일꾼들의 일을
둘러보았다. 가을 추수 때나 봄 씨앗을 뿌릴 때는 언제나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밭을 돌아보고 집에 돌아온 그는 온 식구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해자 가의 논을 보고 오겠어. 좀 늦어질 거야."
그리고 그는 성내를 향해 걸었다. 그러나 그는 도중의 사당이
있는 곳까지 오자 길가에 있는 언덕의 풀밭에 앉아 쉬면서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었다. 사당의 지신님이 마주보였다. 그
지신님이 그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으나 무섭지는 않았다. 젊을
때는 존경하고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집안도 왕성하고 돈도
많았으므로 지신을 섬길 필요도 없고 더더구나 기도할 필요는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반복해 가며 생각에 잠겼다.
"집에 돌아가 볼까."
그때 문득 간밤에 렌화가 그를 떠밀어 내던 생각을 하니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년은 그대로 찻집에 있었더라면 신세를 망쳤을 거다.
우리집에 와서 있기 때문에 잘 먹고 잘 입고 편히 지낼 수 있는
거야......"
분노가 치밀어 오른 그는 다른 길로 집으로 돌아가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안뜰로 들어가는 휘장 뒤에 숨어서
귀를 기울였다. 중얼거리는 듯한 남자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큰아들의 목소리였다.
왕룽은 재산이 늘면서부터는 옛날처럼 가난한 촌뜨기가 아니고
성안에 가서도 뻐기고 거리낌없이 할 말을 해 버렸으나 오늘처럼
분노를 못 이겨 치를 떤 일은 없었다. 사랑하는 애인을 빼앗긴
데 대한 분노였다. 더구나 그 애인을 빼앗아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자기가 애지중지 사랑하는 큰아들이라고 생각했을
때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불쾌했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밖으로 나오자 대나무 숲속으로 가서 호리호리한 대나뭇가지
하나를 골라 잘 다듬었다. 그러고는 발소리를 죽여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느닷없이 휘장을 걷어 젖혔다. 아들은 마당에
서서 연못 곁에 놓아 둔 조그마한 걸상에 앉아 있는 렌화를 정신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렌화는 연두 빛깔의 비단옷을 잘 차려
입고 있었다. 왕룽은 아직 아침부터 이렇게 몸차림을 하고 있는
렌화를 본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은 무엇인가를 다정스레 이야기하고 있었다. 렌화는
간드러지게 웃으면서 연방 고개를 갸웃거리며 곁눈질로 청년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왕룽이 곁에 와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왕룽은 그 자리에 선 채 그 모양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얼굴은 파랗게 질리고 입술은 말려 올라가서 이빨이
드러나고 손에는 대나무 회초리를 불끈 쥐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그때 뚜챈이
나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뚜챈은 왕룽의 모양을 보자 기절하듯 비명을 올렸다. 두
사람은 그제야 왕룽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왕룽은 아들에게 달려들어 후려갈겼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키가 크지만 농사일에 단련된 탄탄하고 건강한 육체를 가진
아버지를 당해 내지는 못했다. 왕룽은 아들 얼굴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계속 마구잡이로 때려 주었다. 렌화가 비명을 올리며
팔에 매달렸지만 그는 난폭하게 밀어젖혔다. 그리고 또다시
그녀가 악을 쓰면서 달라붙자 이번에는 렌화도 사정 없이 때려서
떨어뜨려 놓고는 다시 아들을 때렸다. 마침내 아들은 피가
흘러내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왕룽은 그제야 때리던 손을 멈추었다. 입술 사이로 피리
소리가 새어 나올 만큼 숨을 헐떡였다. 진땀이 비오듯 전신에
흘러내리고 병든 사람처럼 지쳐 버린 그는 회초리를 집어 던지고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네 방에 가서, 내가 나오랄 때까지 절대로 나오지 마라.
나오면 그 즉시 죽여 버릴테다."
아들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가 버렸다.
왕룽은 렌화가 걸터앉았던 걸상에 앉아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눈을 감은 채 숨을 헐떡였다. 아무도 그에게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는 귀찮은 듯이 일어나서 렌화의 방으로 들어갔다.
렌화는 침대 위에 엎드린 채 흐느껴 울고 있었다. 왕룽은 곁으로
가서 그녀를 잡아 일으켰다. 그녀는 누운 채 더욱 소리 높여
울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맞은 자리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왕룽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아직 갈보 버릇을 못 버렸구나. 내 자식에게까지 몸을
팔려는 거냐?"
그러나 렌화를 소리 높여 울면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 아들이 심심해서 놀러온 거예요.
뚜챈에게 물어 보세요. 당신이 본 것보다 더 가까이 내 곁에 온
적이 있나를......"
그녀는 무서운 듯이 애처롭게 왕룽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잡아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대며 슬프게
말했다.
"당신이 당신의 렌화를 어떻게 했는지 좀 보세요. 이 세상에
남자라곤 오직 당신 뿐이예요. 당신 아들이 아니라구요. 그
뿐이에요...... 내가 어떻게 했단 말에요."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솟아 올랐다. 그녀는
못 견딜 지경인 모양이었다. 이 여자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다. 미워해야 할 이 마당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귀엽고 앙증맞았다.
왕룽은 더 이상 아들과 렌화를 연관지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알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모르는 편이
마음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크게 한숨을 짓고 그곳을 나왔다.
아들의 방 앞을 지날 때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네 짐을 챙겨 둬라, 내일 안으로 남방으로 가서 너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내일 다시 부를 때까지 이곳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가운뎃방에서 오란은 옷을 꿰매고 있었다. 왕룽은 그 앞을
지나가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뜰에서 그렇게 야단법석이
났었는데도 그녀는 아무런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왕룽은 그대로
밖으로 나가서 들로 갔다. 한낮의 태양이 하늘 높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온종일 들일을 한 것처럼 지쳐 있었다.
25
아들이 남방으로 떠나가자 왕룽은 집안에 있던 커다란 불안의
씨앗이 사라진 것 같아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집을 나간
젊은 아들을 위해서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다른
자식들도 잘 살펴보아야 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지금까지는 그
자신의 걱정도 있었거니와 계절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농사일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에 장남 이외의 자식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는 둘째놈은 빨리 서당을
그만두게 하고 장삿일을 배우게 해서 큰놈처럼 집안의
골칫거리가 되지 않도록 미리 단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둘째 아들은 같은 형제이면서도 형과는 매우 달랐다. 장남은
키도 크고 뼈대도 굵고 얼굴도 붉은 것이 오란의 고장인 북쪽
사람 같은 인상을 주었으나 둘째 아들은 키도 작고 몸집도
가늘고 누르스름한 얼굴빛이 그 아버지의 혈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왕룽은 자기 아버지를 닮은 것처럼 눈매가 날카롭고
민첩하면서도 어찌보면 심술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둘째놈은 훌륭한 상인을 만들어 보리라. 서당은 그만두게
하고 곡물점에나 보내서 장사를 배우게 하면 내가 거래하는 데도
편리하겠지. 저울에 속을 염려도 없고 때로는 내게 이익이 되게
저울질을 해 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뚜챈을 불러 말했다.
"우리 사돈 될 유씨에게 가서 내가 할 말이 있다고 전해 주게.
머지않아서 곧 사돈이 될 것이니 술이라도 한잔 해야지."
뚜챈은 돌아와서 말했다.
"언제라도 좋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낮에라도 당장 오셔서
한잔 하셔도 좋고 그 양반이 이리로 오셔도 좋다고요."
왕룽은 성안 사람이 집에 찾아오면 여러 가지로 접대할 일이
거북할 것 같았다. 그래서 세수를 하고 비단옷으로 갈아입고
밭둑길을 따라 나섰다. 그는 우선 돌다리 거리에 가서 유씨
문패가 붙은 집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물론 그는 글을 모르기
때문에 뚜챈이 가르쳐 준 대로 돌다리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둘째
집 문앞에서 이 집이라고 생각했으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고 난
다음에야 확실하게 알았던 것이다. 나무로 만든 당당한
대문이었다. 왕룽은 손으로 대문을 두드렸다.
곧 대문이 열리고 여종이 나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면서
누구냐고 물었다. 왕룽이 이름을 대자 그를 쳐다보던 여종은
남자들만이 거처하는 사랑방으로 그를 안내하고 의자를 갖다
권하곤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왕룽이 이 집 딸의
시아버지가 될 사람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주인을
부르러 안채로 들어갔다.
왕룽은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일어서서 휘장에 손을
대기도 하고 탁자의 재목을 면밀히 살펴보기도 했다. 그리고
풍족한 생활이긴 하지만 결코 사치스럽지 않다는 생각에 다소
안심이 되었다. 부잣집 딸은 자칫하면 건방지고 눈이 높으며
괴퍅하거나 부모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알아 왔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시끄럽고 종종 남편과 시부모 사이를 벌어지게 하기 쉬운
것이다. 왕룽은 안심하고 다시 의자에 걸터앉아 유씨를
기다렸다.
이윽고 묵중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뚱뚱하게 살이 찐 나이
지긋한 주인이 들어왔다. 왕룽이 의자에서 일어나 절을 하니
주인도 맞절을 했다. 두 사람은 모두 머리를 숙이면서도
상대편의 차림과 거동을 살펴보고는 유복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서로 호감을 가졌다. 곧 두 사람은 친숙한 기분이 되어
여종이 날라 온 더운 술을 마시면서 농사에 대해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금년에 풍년이 든다면 쌀값은 얼마가 될
것인가 하는 이야기들을 조용히 나누었다. 마침내 왕룽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혹시
댁의 가게에서 점원을 쓰실 일이 있다면 내 둘째 놈을 써
주십시오...... 내 자식이지만 아이는 제법 영리합니다. 그러나
소용 없으시다면 없었던 이야기로 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세요. 그렇지 않아도 영리한 점원을 하나 두려던
중입니다. 글자는 잘 알겠지요?"
왕룽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 집 아이는 두 놈 다 가르쳤습니다. 글자가 틀린 것도
어렵잖게 바로 잡고, 나무목 변이 옳거니 삼수 변이 옳거니 하는
것도 단번에 알 정도이지요."
"그것 참 훌륭합니다. 아무 때라도 좋으니 보내십시오. 장사를
배울 때까지 첫 해는 먹여만 주고 1년쯤 지나 일을 잘 하면 먹여
주고 매달 은전 한 닢, 3년째부터는 은전 세 닢, 4년째부터는
배울 것 다 배웠을 테니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벌 수 있습니다.
그 밖에 제 손으로 버는 것은 자기 수완에 달린 것이니 관계치
않습니다. 그리고 댁과는 사돈이 될 터이니 보증금 같은 것을
받지는 않겠습니다."
왕룽은 마음이 아주 흐뭇해져서 자리에서 일어서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들 사이가 이렇게 좋게 되고 보니 매우 기쁩니다. 혹시
저의 집 둘째 딸년과 혼사를 맺을 만한 아드님은 없으신지요?"
유씨는 껄껄 웃었다. 몸집도 뚱뚱하거니와 잘 먹어서 그런지
웃음 소리까지 복스러웠다.
"열 살 나는 놈이 있죠. 아직 정혼은 안 했습니다만, 댁의
따님은 몇 살이나 되지요?"
왕룽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다음 생일에 열 살이 됩니다. 내 딸이지만 정말 예쁘게
생겼지요."
두 사람은 소리를 합쳐 마주 웃었다. 이윽고 유씨 상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겹으로 맺어지는 셈이군요."
왕룽은 그 이상 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 이상은 이야기 할
성질의 것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직 인사를
나누고 유쾌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막내딸 혼사도 순조로이
진행될 것 같았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자 딸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어머니가 전족을 시켜 작고도 맵시 있는
걸음걸이를 하고 있었다.
왕룽이 유심히 딸아이를 들여다보니 얼굴에 눈물 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빛이 나이답지 않게 성숙해 보였다.
왕룽은 그 작은 손을 잡아 앞으로 끌며 물었다.
"왜 울었니?"
딸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다소곳이 저고리 단추를
만지작거리면서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엄마가 날마다 발의 천을 단단히 졸라매서 아파요. 밤에도
잠을 못 자겠어요."
"그래도 네가 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걸."
왕룽은 이상한 듯이 말했다.
"엄마가 아파도 소리내어 울면 안된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들으면 아버지는 마음이 약해 애처롭다고 묶지 못하게 한대요.
발을 묶지 않으면 엄마가 아버지한테 귀염 못 받듯이 나도
그렇게 된대요......"
딸 아이는 저희 또래들끼리 옛날 이야기나 하는 것처럼
순진하게 말했다. 왕룽은 자기가 아내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딸에게 말했다는 것을 들으니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 듯이
아팠다.
"그래, 그런데 오늘은 내가 아주 훌륭한 신랑감을 구했다.
이제 뚜챈을 시켜서 잘 성사되도록 해 보아야겠다."
딸은 부끄러운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처녀가 다 된 것 같았다. 그날 밤 왕룽은 렌화에게 갔을 때
뚜챈에게 말했다.
"유씨네와 일이 잘 되도록 한번 힘 써 주게."
그날 밤 그는 렌화와 나란히 누웠어도 이 일 저 일이 생각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지나간 일들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고
또 오란이 그의 처음 여자였으며 얼마나 자기에게 충실했던가
하는 일들을 생각했다.
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생각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앞길이 암담해졌다. 오란은 영리하지는 못할망정
결코 어리석은 여자는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사람인 것이다.
그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의 둘째 아들을 성안으로 보내고
막내딸의 약혼서를 주고받은 뒤 지참금도 정하고 혼수와 패물 등
혼사에 필요한 모든 의논도 마쳤다. 왕룽은 한시름 놓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젠 자식 걱정은 다 덜었다. 나머지 천치 아이는 양지쪽에
앉아 베 조각이나 가지고 놀게 하면 될 것이고 막내 놈은
농사일을 시키고 서당엔 보내지 말아야지. 위의 두 놈은
공부했으니까 그것으로 족해야지."
그는 하나는 학자, 하나는 상인, 하나는 농부, 이렇게 세
아들을 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의 인생을 더욱 빛나게
할 훌륭한 계획인 것이다. 그는 만족해서 그 이상 더 자식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 자식들을 낳은 아내에
대한 걱정은 아무래도 그의 가슴에서 떠날 수 없었다.
여러 해 동안 오란과 같이 살아온 왕룽은 그제야 처음으로
그의 아내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쏠렸다. 오란이 처음으로
시집을 오던 날도 이렇게 그녀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진
않았다. 그저 한갓 여자라는 것, 그가 처음 안 여자라는 것
뿐이었다. 그 뒤론 이것저것 그날그날 일에 마음이 팔려서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젠 자식들에 대한 일도 대강 정해졌다. 농사도 걱정 없이
제대로 돼가고 렌화의 생활에도 질서가 잡혔다. 대나무 회초리로
한번 얻어맞고부터는 조용히 순종하며 잘 지내니 만사가 아무
걱정도 없게 된 것이다. 그는 겨우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볼
시간의 여유가 생긴 것인데 그러자 오란의 일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아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한 여자로서가
아니고 못생기고 찌들고 살결이 꺼칠꺼칠하고 누렇게 떠 있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뉘우침에 가까운 감정으로 그의
아내를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아내가 여위고 살빛이
변해 있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한 것 같았다. 아내는 원래
살빛이 희지는 않았다. 들일을 할 때에는 검붉었다. 그런데
요즘음엔 들에 나가지 않았다. 두 해 전만 해도 가을 추수 때만
나갔을 뿐이다. 그는 그것조차 남들의 눈이 두려워서 못 나가게
말렸던 것이다.
그래도 왕룽은 아내가 왜 스스로 들에 나갈 생각을 않는지 또
날이 갈수록 몸이 둔해지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나 부엌에 불을 지피느라고 몸을 구부릴 때나 아내는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가 "왜 그래?" 하고 간혹
묻기라도 하면 아무렇지도 않는 듯이 대답했으므로 왕룽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는 새삼스럽게 그녀의 배가 이상하게
많이 부른 것을 보자 측은한 생각에 가슴이 저며왔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이상한 감정이었다.
"내가 오란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내 죄는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래."
그는 이렇게 혼잣말로 자기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는 오란을 때린 일도 없고 언제든지 달라면 돈도 주었다."
그래도 막내딸이 하던 말이 그의 머리에서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그 생각은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오란에 대해서 결코 나쁜 남편은 아닌 것
같았다. 미안한 생각은 갖고 있지만 좋은 남편이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회의를 느끼고 있는지 그는 그 이유를 몰랐다.
오란에 대한 죄책감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식사 때
음식을 나르거나 다른 일을 할 때도 그녀의 일거일동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식사가 끝나고 방안을 쓸던 그녀의 얼굴빛이 갑자기
잿빛으로 변했다. 입을 벌리고 헐떡이듯이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몹시 아픈 듯이 손으로 아랫배를 누르면서 그래도 비질을
계속했다. 왕룽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나 오란은 그런 남편을
외면하면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전부터 배가 자주 아팠는데 또 그런
증상이에요."
왕룽은 보다 못해 막내딸에게 말했다.
"네가 쓸어라. 어머니는 아프니까."
그리고 오란에게 몇 해 동안 하지 않았던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방에 들어가서 누워 있어. 곧 아이를 시켜서 더운 물을
가져가게 할 테니. 일어나지 말고 꼭 누워 있어."
오란은 아무 말도 않고 남편이 시키는 대로 자기 방으로 갔다.
잠깐 동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침대에 누운 모양으로
가만히 신음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왕룽은 참을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 곧장 성안으로 달려가서
의원을 찾았다.
둘째 아들이 있는 곡물점의 지배인이 추천한 의사를 찾아갔다.
의원은 한가한 듯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흰 수염을 드리운
노인으로 콧등에는 올빼미 눈알 같은 큰 놋테 안경을 걸치고
우중충한 긴 잿빛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양손이 푹 파묻히도록
소매가 길었다. 왕룽이 아내의 병세를 이야기하자 그는 입을 꼭
다물고 있다가 옆에 있는 책상 서랍에서 검은 천으로 싼 것을
꺼냈다.
"그럼 같이 갑시다."
왕룽이 의원을 데리고 돌아오니 아내는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윗입술과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솟구치고 있었다.
의원은 그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못 어렵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원숭이 손같이 노란 손을 내밀고
오란의 맥을 짚었다. 한동안 그렇게 맥을 짚고 있던 의원은
이윽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비장이 부어 있고 간장도 상태가 최악이오. 머리만한 돌이
뱃속에 들어 있소. 위장도 탈이 났고 심장도 간신히 움직이긴
하지만 벌레가 있는 모양이오."
왕룽은 의원을 말을 듣자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 마치 성난 사람처럼 말했다.
"그럼 약을 지어 주시오."
왕룽의 큰 소리에 눈을 뜬 오란은 두 사람을 쳐다보았으나
몹시 괴로워서 의식도 몽롱한 것 같았다. 왕룽이 왜
소리쳤는지도 모르고 시름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의원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참 고치기 어려운 병이오. 완쾌의 보증이 필요 없다면
은전 열 닢으로 약초와 말린 호랑이 심장과 개 이빨로 처방을 해
드리겠소만. 그걸 함께 달여 먹여 보시오. 그렇지만 완쾌의
보증이 필요하다면 은전 오백 닢을 받아야겠소."
잠든 것 같았던 오란이 이 소리를 듣자 정신이 돌아오는 듯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두세요. 내 목숨에 그만한 가치는 없어요. 그런 돈이
있다면 차라리 땅을 더 사세요."
왕룽은 그 말을 듣자 온갖 뉘우침의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난 내 아내가 죽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소. 은전 오백
닢을 드릴테니 병을 고쳐 주시오."
의원은 왕룽의 말을 듣자 욕심이 동한 듯이 눈을 빛냈지만
만약에 보증해 놓고 병자가 죽어 버릴 경우에는 법률에 의해
처벌을 받기 때문에 유감스러운 듯이 말했다.
"글쎄, 병자의 눈이 흰 것을 보니 내가 잘못 봤는지도
모르겠소. 완쾌를 보증하는 데는 은전 천 닢이 아니고는
어렵겠소."
왕룽은 아내를 구해낼 수 없다는 의원을 말뜻을 비로소
알아듣고 아무 말 없이 멍한 채 의원을 쳐다보았다. 땅을 팔지
않고 은전 천 닢을 마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의원은 오란이
죽을 것이라고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다. 설령 땅을 팔아서
약값을 마련한다고 하더라도 소용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는 의원과 함께 밖으로 나가 은전 열 닢을 의원에게 주었다.
그리고 의원이 돌아간 뒤 왕룽은 오란이 그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어둠침침한 부엌으로 돌아갔다. 아내가 세월을 보낸 이
부엌, 그는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그을은 벽을 쳐다보며 아내의
손때 묻은 어둠침침한 부엌에서 한참 동안 실컷 울었다.
26
그러나 오란은 곧 죽지는 않았다. 이제 겨우 인생의 중년을
넘어서는 그녀의 생명은 그녀의 몸에서 쉽게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몇 달이나 반사 상태로 침대에 누워 생명을
유지해 나갔다. 긴 겨울 동안 오란이 병상에 눕고 보니 왕룽과
아이들은 처음으로 그녀가 가정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느꼈다. 모두가 얼마나 그녀의 힘을 입고 살았는가를
그때까지 그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왔던 것이다.
부엌에 불을 지필 때도 어떻게 해야 마른 풀이 잘 타는지 또
고기 하나를 구워도 어떻게 해야 태우지 않고 잘 되는지, 야채
요리를 할 때도 참기름을 쓰는지 콩기름을 쓰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식탁 밑에 먼지라든가 음식 찌꺼기가 떨어져도
아무도 그것을 보고 청소하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 오래돼서
냄새가 나면 어쩔 수 없이 개를 불러 먹이거나 막내 딸을 시켜서
쓸게 했다.
막내딸은 어머니 대신에 할아버지 시중도 들었다. 늙은이는
나이가 많아서 아무 것도 분별하지 못했다. 시중을 들던
며느리가 병이 들어 누웠다고 말해도 이해하지를 못했다.
며느리가 찬물이든 더운물이든 가져오지 않고 또 일어날 때
부축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해 깊이 불평을 하며 몇 번이고
며느리를 부르다간 마침내 화가 나서 찻잔을 방바닥에
내동댕이치곤 했다. 왕룽은 보다 못해서 그의 아버지를 아내의
병상 곁으로 모시고 가서 누워 있는 모양을 보여 주었다.
늙은이는 눈이 몽롱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오란을 찬찬히
쳐다보고는 어떤 사정을 짐작한 듯 뜻도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천치 딸만은 끝내 아무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녀는 변함 없이
색동 조각을 만지작거리면서 한가로이 놀기만 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녀의 치다꺼리를 해야만 했다. 밤이 되면 재워 주고
밥을 먹일 때면 먹여 주어야 하고 낮이면 양지쪽에 앉혀 줘야
하며 비가 오면 방안까지 데리고 들어와야 했다. 이 정도의 일은
누구든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알아서 해 주어야 했는데 왕룽
자신도 가끔은 깜빡 잊는 것이다. 언젠가 하룻밤 내내 그녀를 집
밖에 내버려둔 채 잊은 일이 있었다. 이튿날 새벽녘 그녀가
추위를 못 이겨 울음을 터뜨린 후에야 비로소 그는 그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왕룽은 화를 내며 아이들에게 불쌍한 천치
누이를 챙기지 않았다고 야단쳤으나 역시 아이가 어머니의 일을
대신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룽은 그 후부터는 천치
딸의 뒷바라지를 자기 손으로 손수 하기로 했다. 비나 눈이 오는
날이나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엔 부엌 가마솥 앞에 데려다
앉히곤 했다.
온 겨울 동안 오란이 앓아 누워 왕룽은 통 밭일을 돌보지
못했다. 겨울 동안의 여러 가지 농사일이라든가 머슴을 부리는
모든 일을 칭 서방에게 모두 맡겨 버렸다. 칭 서방은 충실하게
모든 것을 잘 처리했다. 그리고 아침 저녁 두 차례씩 병세를
묻는 것이었다. 이럴 때면 왕룽은 언제나 오늘은 닭국물을 좀
마셨다든가, 오늘은 미음을 조금 먹었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런 말도 하기가 귀찮아졌다. 그래서 칭
서방에게 이제는 더 문안을 오지 않아도 좋으니 농사일이나 잘해
달라고 부탁했다. 춥고 어두운 겨울 동안 왕룽은 줄곧 병자 곁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아내가 추울 것이라고 생각되면 화로에
숯을 달게 지펴서 침상 곁에 놓고 방안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맥없이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공연히 숯을 많이 피우게 해서요."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또 이런 말을 하자 왕룽은 버럭 화를
내었다.
"그런 말 말아. 당신 병을 고칠 수 있다면 땅이든 무엇이든 다
팔아도 아깝지 않아."
오란이 이 말을 듣자 흐뭇하게 웃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작게 속삭였다.
"그건 안돼요. 나는 언제 죽어도 한 번은 죽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땅은 내가 죽어도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것 아녜요."
왕룽은 아내가 죽는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니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도 오란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성안에 있는 장의사에 들러 거기에
진열되고 있는 관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단단한 나무로 만든 검은 칠을 한 좋은 관을 골랐다. 그가 관을
고르는 것을 보던 가게 주인은 눈치 빠르게 말했다.
"두 개를 함께 사시면 3할을 감해 드리죠. 손님 것도 미리
마련해 두시면 뒤에 걱정없이 안심될 텐데요."
"내 것이야 자식들이 해 줄 일이지." 왕룽은 이렇게
대답했으나 곧 아직 그의 아버지의 관을 마련해 두지 않은 것을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 많은 아버지가 계시오. 걸음도 잘 못 걷고 귀도
먹고 눈도 어두우시니 얼마 안 가 돌아가실 게요. 그러니 두
개를 사기로 하겠소."
가게 주인은 두 개의 관에 다시 한 번 칠을 잘해서 집까지
보내 줄 것을 약속했다. 집에 돌아온 왕룽은 오란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오란은 남편의 무한한 정성에 감격하며 죽은 후의
모든 일을 안심한 듯 기뻐했다.
이렇게 왕룽은 매일같이 몇 시간이고 아내 곁에 앉아 병간호를
했다. 오란은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 갔으며 거의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몸이 성할 때도 그들 사이에는 말이 없었지만 지금은
더욱 긴 침묵에 계속되었다. 그가 이렇게 조용히 앉아 있으면
오란은 지금 자기 몸이 어디 있는지조차 잊어버릴 만큼 정신이
몽롱한 상태인 것 같았다. 이따금 지나간 어릴 때의 일을
꿈결같이 중얼거렸다. 왕룽은 처음으로 아내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은 극히
단편적인 것들이었다.
"저는 음식을 문턱까지만 가져가겠어요. 전 못나서 영감님
앞에 나갈 수 없어요."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이런 말도 했다.
"때리지 마세요. 다시는 쟁반에 있는 것을 집어먹지
않겠어요."
그리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또 이런 말도 했다.
"난 못생겨서 귀염받지 못할 걸 잘 알아요."
오란이 이런 말을 할 때면 왕룽은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죽어 버린 사람같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내의
손을 어루만졌다. 아내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는 그의 애틋한
감정을 아내에게 전하려고 진심으로 그녀의 손을 쓸어 주었으나
아무래도 렌화가 입을 비죽거릴 때보다는 애정이며 감동이
솟아오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이런 이상한 마음이
부끄러웠다. 그녀의 진실한 말이 그를 뉘우치게는 했으나 뼈만
남은 그녀의 손에선 애정이 우러날 수 없었다. 애처로운 생각이
들면서도 그것을 반발하는 그 무엇이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왕룽은 더한층 아내에게 정성을 다했다. 특별한 음식을
사오기도 하고 은어와 배추속으로 만든 맛있는 국물을 먹이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간호하는 온갖 괴로움을 잊어버리려고 렌화의
방에 갔으나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다. 아내에 대한 근심이
머리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렌화를 껴안고 있다가도 아내
생각이 되살아나면 그만 팔이 풀려지는 것이었다.
오란은 때때로 정신이 맑아져 주위의 일을 분간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한번 그녀는 뚜챈을 불렀다. 왕룽이 깜짝
놀라서 데려오니 오란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상반신을
일으키고 아주 야무진 어조로 말했다.
"이봐, 자네는 황 영감 몸종으로 있을 때 예쁘다고 세도가
대단했지. 이제 나는 남의 아내가 되고 아들을 낳았지만 자네는
지금껏 종노릇을 못 면했구먼."
뚜챈은 발끈 성을 내면서 말대꾸를 하려 했으나 왕룽은 재빨리
그녀를 가로막고 데리고 나가 타일렀다.
"정신 없이 앓는 사람의 말이니 마음에 두지 말게......"
왕룽이 다시 방에 돌아오니 오란은 아직도 그대로 앉아 있다가
말했다.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저 여자나 저 여자의 주인을 이 방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돼요. 내가 가졌던 옷이나 물건에 손을 대게
해서는 안돼요. 내 말대로 안 하시면 나는 귀신이 되어 원수를
갚겠어요."
그리고 오란은 다시 혼수 상태에 빠져 머리를 베개에
떨어뜨렸다.
설 명절이 가까워진 어느 날, 오란은 병세가 갑자기 좋아졌다.
촛불이 꺼지기 전에 잠시 환하게 밝아지듯 의식이 뚜렷해지고
침상에 일어나 앉아서 손수 머리를 빗고 차를 마시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왕룽이 들어오자, 그녀는 말했다.
"설 명절이 얼마 안 남았는데 아무 음식도 준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부엌에 뚜챈을
들여보내는 것은 내키지 않아요. 약혼해 둔 큰며느리를 불러
주세요. 아직 본 일은 없지만 만약 그 애가 와 준다면 여러 가지
일을 가르쳐 주겠어요."
왕룽은 설 명절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으나 그렇게
기운을 차린 것이 좋아서 곧 뚜챈을 유씨에게 보내 그런 사정을
전했다. 유씨댁에서는 약간 주저하긴 했으나 안사돈 될 사람이
봄까지 살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듣고, 또 딸의 나이도 열
여섯이나 되었으며, 그보다 더 어려도 시집 가는 일이 있으므로
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어머니 되는 사람이 병석에 있기 때문에
약혼한 새색시가 오는 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다.
새색시는 가마를 타고 그의 어머니와 늙은 몸종과 함께 왔다.
그의 어머니는 딸을 사돈에게 맡기고 몸종만이 남았다.
왕룽은 아이들을 다른 방으로 옮기게 하고 그 방을 새
며느리의 방으로 예쁘게 꾸며 주었다. 모든 일이 순조로왔다.
왕룽은 예절에 따라 며느리가 인사할 때만 점잖게 머리를 숙일
뿐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며느리는 자신이 해야 할
도리를 잘 알고 있었다. 집안을 거닐 때도 눈을 내리깔고 정숙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으므로 왕룽은 마음이 흡족했다. 얌전하고
예쁘면서도 교만한 티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왕룽을 더욱
기쁘게 했다. 그녀의 조심스런 모든 동작은 조금도 흠 잡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정성껏 시어머니를 간호하는 것이 왕룽을 더욱
안심시켜 주었다. 또한 오란도 며느리의 정성어린 간호에 지극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오란은 며칠 동안 만족스럽게 지냈으나 곧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침에 남편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마음놓고 죽기 전에 부탁이 한 가지 더 있어요."
왕룽은 왈칵 역정을 내며 말했다.
"제발 좀 죽는단 말은 하지 말아."
오란은 조용히 웃음을 띠었으나 곧 거두면서 침착한 아조로
말했다.
"나는 죽어요. 몸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지만 큰아이가 와서 이 며느리와 혼사를 치를 때까지는 못
죽겠어요. 정말 좋은 며느리예요. 나에게도 참 잘해 줘요. 더운
물을 담은 대야를 들 때도 힘차 보이고 내가 괴로워서 땀을
흘리면 얼굴도 깨끗하게 잘 닦아줘요...... 아무튼 나는 죽을
것이니 그 전에 큰아이를 불러 혼사를 치르게 해 주세요.
당신에게는 손자, 아버님께는 증손자를 보게 해야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몸이 건강할 때도 그녀는 이렇게 긴 말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왕룽은 그녀의 음성과 태도에 병이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자 절로 힘이 솟아났다. 그는 장남의 결혼식은 좀 뒤로
미루고 싶었다. 성대하게 혼사를 치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마음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동의하는 어조로 분명히
말했다.
"좋아,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오늘이라도 남방에
사람을 보내서 큰아이를 불러오지. 그 대신 임자도 힘을 내야
해. 그놈의 죽는다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꼭 나아야 돼. 임자가
누워 있으니까 집안 꼴이 돼지 우리 같다구."
그는 아내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오란은 만족한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흐뭇한 웃음을 띠면서 스르르
눈을 감고 자리에 누웠다. 왕룽은 곧 맏아들에게 사람을 보냈다.
"도련님한테 이렇게 전해라. 어머님의 병환이 위중하여 네
얼굴을 보고 결혼하는 것을 보기 전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으신다고. 부모님과 집을 생각하거든 곧 돌아오라고 해라.
오늘부터 사흘 후에 잔치를 열려고 여러 손님을 청해 두었으니까
그 전에 와야 한다고 단단히 전해라."
왕룽은 잔치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뚜챈을 시켜서 성대한
잔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성안 찻집에서 음식을 장만할 사람을
불러오게 했다. 그는 뚜챈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했다.
"황부잣집에서 하던 것처럼 한번 잘 치뤄 봐.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아는 대로 모두 청했다. 성안에 가서
그가 드나들던 찻집이나 곡물 거래로 알게 된 사람도 하나도
빠짐없이 청했다. 물론 숙부님에게도 말해 두었다.
"큰놈의 잔치에는 아저씨의 친구분도 사촌의 친구도 모두
청하세요."
왕룽은 삼촌의 신분을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럽게 손님처럼 대했다. 혼례식 전날 밤에 아들이
돌아왔다. 아들이 늠름하게 방안으로 들어오자 왕룽은 지난날의
불쾌한 생각은 깨끗이 잊어버렸다. 이 아들이 집을 떠난 지 벌써
두 해가 넘는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돌아 온 아들은 이미
소년이 아니었다. 키가 크고 혈색도 좋고 체격도 당당한 훌륭한
어른이었다. 머리는 짧게 깎아 기름이 번지르르하고 남방
신사들이 입는 검붉은 공단 두루마기에 짧은 우단조끼를 입고
있었다. 헌칠하고 늠름한 아들의 모습을 본 왕룽은 가슴이
부풀었다. 이것이 내 아들이란 생각 이외는 모든 것을 잊고
아내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침대 곁에 앉아 어머니의 앙상한 모양을 지켜본 아들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러나 명랑하게 이렇게
말했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람들 말보다는 갑절이나 기운이 있어 보입니다.
돌아가시다니 어림도 없어요."
그러나 오란은 힘없이 간단하게 말했다.
"네 혼사 치르는 걸 보고야 죽을테다."
신부될 사람은 혼례식 전에 신랑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이
예절이었으므로 렌화는 색시를 자기 방에 데려다 놓고 예쁘게
치장해 주었다. 렌화와 뚜챈과 숙모는 이런 일에 아주 익숙해
있었다. 이 세 사람은 혼례식을 올리는 날 아침이 되자 색시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어 주고 전족한 발에 버선까지
새 것으로 신기고 또 렌화가 아끼는 향기 좋은 편도유까지 발라
주었다. 그리고 색시 집에서 가져온 새 옷을 맵시나게 정성껏
입혔다. 제일 먼저 흰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속옷을
입히고 그 위에 부드러운 양털로 짠 치마저고리를 입혔다. 또 그
위에는 혼례식 때 입는 붉은 공단 예복을 입혔다. 이마에 물분을
바르고 풀먹인 명주실로 잔털을 뽑고 머리를 매만져 이마를
네모나고 넓게 보이도록 했다. 이것은 대갓집 부인답게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고 붓으로
눈썹을 길고도 가늘게 그렸다. 머리에는 신부의 족두리와 구슬이
드리워져 있는 베일을 씌우고 전족한 발에는 예쁜 수가 놓여진
신발을 신기고 손톱에 물을 들이고 손에는 향기로운 값비싼
향수를 뿌렸다. 이렇게 해서 신부 단장이 빠짐없이 끝났다.
신부는 다소곳하게 세 사람이 시키는 대로 몸을 맡겨 두고
있었으나 매우 수줍어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했다. 왕룽과
그의 아버지, 삼촌, 그리고 손님들은 대청에서 기다렸다. 신부는
친정에서 데려온 늙은 몸종과 숙모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발로 간신히 걸었다. 누구에게 부축을
받지 않고는 혼례식장 같은 데엔 도저히 나올 것 같지 못할
걸음걸이였다. 그것은 그녀의 정숙함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따라서 왕룽은 훌륭한 며느리감이라고 기뻐했다.
그 뒤로 신랑이 들어왔다. 그는 붉은 두루마기에 검은 조끼를
입고 들어왔다. 머리를 빗어넘기고 얼굴은 깔끔하게 면도했다.
그 뒤로 두 동생이 따라 들어왔다. 왕룽은 그들의 늠름한 자태를
보자 새삼스럽게 기쁜 마음이 가슴에 끓어올랐다. 아주 귀가
절벽이 된 아버지는 지금껏 무슨 일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인지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납득이 간 듯
쉰소리로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몇 번이고 피리소리 같은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혼례로구나. 아, 혼례라. 아이들이 또 생기고 손주들이
생기고, 하하하하......"
늙은이가 이렇게 좋아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여러 사람들도
따라서 크게 웃었다. 왕룽은 아내가 저렇게 병석에 누워 있지
않고 여기에 함께 참여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왕룽은 아들이 신부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 예리하게
살펴보았다. 아들은 단 한번 신부를 곁눈질 해 보았으나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왕룽은 마음속으로 정말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떠냐! 내가 고른 며느리가 너도 마음에 들지."
신랑과 신부는 왕룽과 조부에게 큰절을 하고 나서, 오란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오란은 고급 검은 두루마기로
갈아입고 아들과 며느리가 들어오자 일어나 앉았다. 양쪽 뺨이
타는 듯이 붉어져서 왕룽은 오란의 몸이 회복되는 줄 알고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야, 이제 병도 낫겠구려." 하고
소리칠 정도였다.
두 젊은이가 가까이 와서 절하는 것을 받은 오란은 침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자, 이리로 와서 앉아라. 여기 앉아서 혼례 술도 마시고 밥도
먹어라. 난 그 모습이 제일 보고 싶다. 나는 곧 죽을 게고 내가
죽은 뒤로는 여기가 너희들의 혼례 침상이 될 것이다."
이 말에 아무도 뭐라고 대꾸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부끄러운 듯 말없이 나란히 앉았다. 뚱뚱한 왕룽의 숙모가
점잔을 빼면서 더운 술을 두 잔 따라 신랑 신부에게 한 잔씩
나누어 주었다. 두 사람은 잔에 입만 대었다가 다시 그 술을
한잔에 섞어 나누어 마셨다. 두 사람이 한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예식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기 밥을 먹다가 다시
서로 섞어 먹었다. 두 사람의 생명이 이로써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백 년을 맹세하는 혼례식은 모두 끝난
것이다. 신랑 신부는 오란과 왕룽에게 조심스레 절을 하고
물러나와 마당에 모여 있는 여러 손님들에게 큰절로 답례를
했다.
그런 다음 피로연이 시작되었다. 방에도 뜰에도 많은 음식상이
놓였고 구수한 음식 냄새와 웃는 소리가 온 집안에 들끓었다.
초대된 손님들은 아주 많았다. 친한 사람 뿐만 아니라 낯모르는
사람들까지 모였다. 잔칫집이 부잣집이기 때문에 이런 때는
누구에게나 인색하지 않게 잘 대접할 것을 알고 부르지 않은
사람도 많이 왔다.
뚜챈이 성안에 가서 일부러 음식 만드는 사람을 불러왔기
때문에 농가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음식들도 많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또 농가의 부엌에서는 장만할 수 없는 음식을
성안에서 만들어 큰 광주리에 담아 가지고 왔다. 이미 요리가
되어 있어 데우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요리 솜씨를 자랑하려고 기름이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모든 사람들은 마음껏 먹고 마시며 기분 좋게
떠들어 댔다.
오란은 이렇게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음식 냄새도
맡을 수 있도록 창문과 휘장을 모두 젖혀 놓게 했다. 그러고는
자주 가까이 오는 남편에게 몇 번이고 물었다.
"술은 모자라지 않아요? 상 가운데에 놓인 팔보채는 더운가요?
기름과 설탕과 여덟 가지 과일이 제대로 들어 있나요? 그리고
식지는 않았나요?"
왕룽은 무엇이든 다 잘 되어 있다고 오란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오란은 지극히 만족한 웃음을 띠며 웅성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잔치가 끝나고 손님들도 모두 돌아가고 밤이 깊었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끊어지고 집안이 조용해지자 오란은
지쳐서인지 갑자기 맥박이 약해졌다.
오란은 아들과 며느리를 곁에 불러 놓고 말했다.
"이제 나는 죽어도 한이 없다. 너는 부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잘 섬기도록 해라. 그리고 며느리, 너는 네 남편과 시아버지와
시할아버지를 잘 섬겨야 한다. 또 천치 시누이도 잘 돌봐 주면
고맙겠구나. 그 밖에 네가 섬길 사람은 이 집안에 아무도 없다."
끝말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던 렌화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두 사람은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오란은 혼수
상태에 빠진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그들이 그곳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듯했다. 오란은 맥없이 눈을 감고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못생겼어. 그래도 나는 아들을 낳았어. 나...... 나는
남의 종이었어. 그러나 지금 내 집에는 훌륭한 자식이 있어."
그리고 한동안 있다가 또 중얼거렸다.
"저 계집이 나처럼 남편을 섬길 수 있을까? 예쁘다는
것만으로는 아이를 낳지는 못해."
그녀는 사람이 있는 것도 모르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한동안 중얼거렸다. 왕룽은 아들과 며느리를 밖으로 나가라고
눈짓하고 아내의 침대 곁에 앉았다. 오란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듯했다. 이따금 눈을 떴다가는 이내 다시 감곤 했다. 왕룽은
아내가 빈사 상태에 빠져 죽어 가는 순간에도 그녀의 자줏빛 큰
입술에 이빨이 나와 있는 것을 추하다고 느끼는 자신이 미웠다.
갑자기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과 슬픈 생각이 가슴에 치밀었다.
오란은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떴으나 눈앞에 이상한 안개라도
ㄷ여있는 듯이 왕룽이 누군지 분간 못하는 듯이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베개 위로 머리를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몸을
떨었다. 그것이 오란의 마지막이었다.
아내가 죽고 나니 왕룽은 아무래도 오란의 곁에 가기 싫었다.
그래서 숙모를 불러서 시체를 씻게 했으나 두 번 다시 곁에 갈
생각이 없었다. 그가 사 두었던 관 속에 옮기는 일도 숙모와
아들 내외를 시켰다. 그러면서도 언뜻 미안한 생각이 들어
성안에 가서 일꾼을 사서 관습대로 관을 밀봉하게 하고, 또
점쟁이에게 장례에 좋은 날을 물어 보기도 했다. 점쟁이가 점친
날은 석 달 후였다. 그 전에는 좋은 날이 없다는 것이었다.
왕룽은 점쟁이에게 사례금을 주고 절로 갔다. 절의 주지와 의논
끝에 장례일까지 아내의 관을 그곳에 모셔 두기로 했다. 그 관을
집안에 둔다면 매일 눈에 보이므로 왕룽은 못 견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인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은 모두 정성껏 했다.
그리고 자기도 아들도 모두 상복을 입었다. 상을 나타내는 빛인
흰 무명천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흰 각반을 두르고 여자들은
모두 흰 천으로 머리를 묶게 했다.
그 후 왕룽은 아내가 있던 방에 있기가 싫어져서 자기가 쓰던
것을 챙겨 렌화의 방으로 옮기고는 큰아들에게 말했다.
"이 방은 너희들이 쓰도록 해라. 네 어머니가 이 방에서 너를
낳았으니 너도 이 방에서 자식을 낳는 게 좋아."
아들 내외는 그 말에 순종했다.
한번 죽음이 집안에 찾아들면 쉽사리 물러가지 않는 모양이다.
왕룽의 아버지는 그의 며느리가 죽어서 입관하는 것을 보자
정신이 이상해지더니 어느 날 아침에 둘째 딸이 차를 가지고
들어가 보니 듬성듬성 난 수염을 위로 하고 침대에 반듯이 누운
채 죽어 있었다.
둘째 딸은 그것을 보자 질겁을 하고 울면서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왕룽이 놀라 쫓아가 보니 늙은이는 벌써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극도로 쇠약한 몸은 한줌밖에 안될 만큼 가볍고
울퉁불퉁한 소나무처럼 굳어 있었다. 아마 침대에 눕자마자 곧
숨을 거두었는지 시간이 꽤 오래 지난 것 같았다.
왕룽은 손수 아버지의 시체를 더운물에 씻고 미리 사다 둔
관에 고이 눕히고 밀봉을 하였다.
"오란과 같은 날에 매장하기로 하자. 묘지는 내 땅 가운데
언덕진 좋은 장소를 골라서 함께 매장하자. 나도 죽으면 그곳에
함께 묻어 달래야지."
그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고 또 그 말대로 실행했다. 그는
아버지 시체를 넣은 관을 가운뎃방에다 걸상을 두 개 나란히
놓고 그 위에 안치하고서는 정해진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돌아간 아버지의 영혼도 그곳에 있고 싶어할 것이고 왕룽 자신도
그 주검 옆에 있고 싶었다. 왕룽은 아버지의 죽음을 그리 애통해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나이가 많은 만큼 천명을 누렸고 또 요
몇 해 동안은 반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점쟁이가 정한 장삿날은 한창 좋은 봄날이었다. 왕룽은
도교(道敎)의 절에서 많은 도사를 불렀다. 그들은 긴 머리를
틀어 올리고 노란 도복을 입고 왔다. 왕룽은 절에서 중을 여러
사람 불러왔다. 중들은 회색 장삼을 입고 머리를 깎았으며 목에
염주를 드리웠다. 도사와 중들은 두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밤새도록 북을 치며 경문을 읽었다. 독경하는 소리가 꺼질
듯하면 왕룽은 그때마다 그들의 손에 은전을 쥐어 주었다.
그러면 그들은 숨을 돌리고 소리를 다시 높였으므로 독경하는
소리는 새벽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왕룽은 대추나무가 서 있는 언덕 땅을 묘지로 택했다. 칭
서방은 미리 일꾼들을 시켜 커다란 구멍을 파게 하고 그 주위에
흙으로 담까지 쌓게 했다. 그 담안은 왕룽 뿐 아니라 그의
아들들과 며느리들까지, 또 손자들까지 묻을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이 땅은 지대가 높아서 밀이 잘 되는 땅이었지만 왕룽은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다. 죽은 다음에도 자기 땅에
뿌리를 박는다는 것은 여간 기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장례식날 스님들의 밤 독경이 끝나자 왕룽은 흰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삼촌도 사촌도 아들들도 며느리에게도 상복을
입혔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이나 보통 농부들처럼 묘지까지
걷는다는 것은 체면이 걸리는 문제이므로 성안에서 가마를 여러
채 불러 모두 타기로 했다. 왕룽은 평생 처음으로 가마를 타고
오란의 상여 뒤를 따랐다. 아버지 상여 뒤에는 삼촌이 역시
가마를 타고 따랐다. 오란이 살아 있을 때는 기를 펴지 못하던
렌화도 오란이 죽은 지금엔 큰 부인에게 충실했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 가마를 타고 행렬에 끼였다. 왕룽은 숙모와
사촌에게도 가마를 내어 주고 상복을 입게 했다. 천치 딸에게도
상복을 입히고 가마에 태웠는데 그녀는 아무 분간 없이
허우적거릴 뿐만 아니라 곡을 해야 할 경우에도 높은 소리로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장례 행렬은 곡소리와 함께 장지로 향했다. 머슴들과 칭
서방은 흰 신발을 신고 걸으면서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왕룽은
두 개의 묘 옆에 섰다. 아버지의 관이 먼저 내려졌다. 절에서
운반된 오란의 관은 아버지의 관이 묻힐 때까지 땅에 놓여
있었다. 왕룽은 그 광경을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슬픔은
눈물이 마를 정도로 깊었지만 다른 사람처럼 소리를 내어 울지는
않았다. 당연히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고 누구나 그 이상은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관을 묻고 흙을 덮어
봉분을 하자 그는 가마를 먼저 돌려보내고 묵묵히 혼자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가슴이 메이는 듯한 슬픔 속에 이상하게도
뚜렷한 하나의 생각이 떠올라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것은
어느 날 오란이 못가에서 빨래를 할 때, 그녀가 가졌던 진주 두
개를 억지로 빼앗은 일이었다. 그 진주는 렌화의 귀고리가 되고
말았으나 그 귀고리를 다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런 무거운
생각에 얽매인 채 그는 홀로 걸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 무덤에 내 반평생을 묻고 오는 셈이다. 나도 절반은
그 속에 묻힌 것이다. 앞으로 내 인생도 달라질 것이다......"
갑자기 왕룽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27
그동안 왕룽은 가을 추수는 물론이고 아무 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아내의 병, 아들의 혼사, 아버지와 아내의 죽음 등에
온통 정신이 팔려 농사일을 생각할 여유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칭 서방이 와서 말했다.
"이제 좋은 일도 슬픈 일도 모두 끝났으니 밭일을
의논해야겠어요."
"음, 말해 주게. 난 요즈음 온통 다른 일에만 정신을 쓰느라고
농사일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어."
칭 서방은 왕룽의 말을 존중하면서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느님 덕택에 어떻게 요행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올해는 큰
물이 질 것 같아요. 아직 여름이 시작도 안 됐는데 여러 곳에서
벌써 물이 넘치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물이 불기엔 너무
이르거든요."
왕룽은 정신이 번쩍 들어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난 하느님의 은혜 따윈 입어 본 적이 없어. 향을 피우든 안
피우든 그는 내게 심술만 부렸거든. 좌우간 들에 나가나 보세."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칭 서방은 마음이 약하고 소심하여 어떤 흉년에도 왕룽처럼
하늘을 욕하지는 않았다.
"다 천명이지." 하고 그는 홍수든 가뭄이든 어찌할 수 없다고
단념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왕룽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논밭을 둘러본 다음 왕룽은 칭 서방의 말처럼 홍수의
위험을 느꼈다. 황 부자한테서 산 논들은 논바닥에서 새어
나오는 많은 물 때문에 질퍽거리고 보리는 노랗게 병들어
있었다.
도랑물은 벌써 호수처럼 가득 차서 넘실거렸고 봇도랑 물은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급류처럼 되어 있었다. 아직 한여름도
아니었고 장마가 진 일도 없었는데 이렇게 큰 물이 벌써부터
내려온다면 정말 무서운 홍수가 닥칠 것만 같았다. 여름이 되면
무서운 홍수가 나서 남녀노소 없이 모두 굶어 죽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둔한 자의 눈에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왕룽은
그의 논밭을 전부 둘러보았다. 칭 서방은 묵묵히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홍수가 지더라도 벼를 심을 수
있는 땅과 모를 심기 전에 물에 잠길 땅들을 살펴보았다. 벌써
물이 넘치는 봇도랑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왕룽은 하늘을
저주하는 욕설을 퍼부었다.
"이놈의 하늘은 덩실덩실 춤을 추겠지. 사람들이 급류에
휩쓸려 빠져죽고 굶어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게야. 저 욕심쟁이
하늘이 퍽이나 좋아할 일이군......"
왕룽이 이렇게 큰소리로 욕을 퍼붓자 곁에 서 있던 칭 서방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설령, 그렇기로서니 하늘을 향해 그렇게 욕하면 어떻게 해요.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요? 그런 말씀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왕룽은 부자가 되고서부터는 뱃심이 세어져서
누구에게도 마음쓰지 않고 화를 내고 싶으면 화를 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밀려오는 홍수에 그의 전답이 덮이는 것을
보면서 몇 번이고 욕설을 늘어놓았다.
마침내 왕룽이 짐작하던 대로 북쪽 강의 제방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멀리 있는 제방이 무너지자 농민들은 다급히
수축비(修築費)를 모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모든 사람들이
힘닿는 데까지 돈을 냈다. 둑을 지키는 것은 그들의 생계와 직접
관련이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돈을 지방 장관에게 가지고 가서 공사를 해 달라고
진정했다. 그러나 그 장관은 그 벼슬을 얻은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가난했던 사람이라 이렇게 큰 돈을 구경조차 못했던 터였다.
또 그가 지금의 자리를 얻게 된 것도 그의 아버지가 빚을 낼
대로 내서 그에게 현재의 지위를 사 주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이런 기회에 돈을 벌어야 했다. 따라서 그는 그 무너진 제방을
바로 수축하지 않았다. 강물이 다시 둑을 무너뜨리자 분노한
농민들은 아우성을 치면서 관청으로 달려가 제방 개축의 약속을
이행치 않은 것에 대해 따졌다. 그러나 은화 삼천닢을 착복한
장관은 몸을 숨기고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농민들은 관저로
물밀듯이 몰려들어 그를 잡아죽여야 한다고 고함을 쳤다. 장관은
자기가 더 이상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자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해 버렸다. 그것으로 농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았다.
그러나 푼푼이 모은 돈은 다시 그들의 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강물이 넘쳐서 강둑은 하나씩 차례로 무너져 마침내
모든 제방이 자취도 없이 쓸려 내려갔고 어디가 본래의 물길인지
분간도 못할 지경이었다. 바다처럼 강물이 온 논밭 위를 흘렀다.
밀과 볏모는 모두 물에 잠겼으며 마을들은 차례로 섬이 되고
사람들은 물이 부는 것을 보고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물결을 바라보다가 문간 앞 두 자쯤까지 물이 불면 탁자며
침대를 함께 묶고서 그 위에다 문짝을 올려 놓아 뗏목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침구, 의복, 가재도구 그리고 여자,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두 여기에 태우는 것이었다. 홍수는 점차
집안에까지 밀려들어 마침내 물 속에 잠기고 말았다. 그리고
지상의 물이 하늘의 물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맹렬한 기세로 비가
퍼부었다. 매일매일 그치지 않고 비가 왔다.
왕룽은 문턱에 앉아서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집은 약간
높은 언덕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 물이 차기까지는 멀었지만 그의
논밭은 모두 물에 잠기고 말았다. 그는 새로 만든 묘지가 물에
잠길까봐 그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다행히 아직은 물에 잠기지
않았지만 누런 황톳물을 그 주위를 삼킬 듯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올해에는 수확이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굶주리고
배를 곯며 또 다시 그들에게 내리닥친 재난을 저주했다. 어떤
사람은 남방으로 떠났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이곳저곳울
노략질하는 비적단에 들어갔다. 비적단의 노략질은 날로
심해져서 농촌에까지 약탈을 일삼았다. 성안 사람들은 성문을
전부 닫아 버리고 서수문(西水門)이란 조그만 문 하나만을 열어
놓았다. 그 서수문도 병사가 엄중하게 지키고 밤에는 굳게 닫아
버렸다. 전에 왕룽이 아버지와 처자들을 데리고 남방으로 떠나간
것처럼 남방으로 가는 사람들과 비적단에 들어가는 사람
이외에는 칭 서방처럼 기질이 약하거나 아들 없는 늙은이
뿐이었다. 그들은 어디로도 가지 않았고 물이 들지 않은 언덕을
찾아 다니면서 나무 껍질이나 풀뿌리를 뜯어 먹으며 연명했다.
들판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수없이 흩어져 있었다.
왕룽은 전에 없는 기근이 올 것이라고 짐작했다. 늦봄부터
시작된 홍수는 겨울이 시작되었는데도 여전히 물이 빠지지
않았다. 이래서는 내년에도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거야. 이렇게
되면 2년 동안아니 추수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살림살이에
주의를 해서 돈이며 음식물을 낭비하지 않도록 감독했다. 이런
처지에도 뚜챈은 성안으로 고기를 사러 다니기 때문에 왕룽과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으나 다행히 홍수가 성안과의 길을 끊어
버렸다. 뚜챈은 성안에 가고 싶어도 배가 없으면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왕룽은 그의 명령 없이는 결코 배를 내서는 안
된다고 칭 서방에게 단단히 일러 두었다. 칭 서방은 뚜챈이
아무리 쫑알거려도 결코 응하지 않았다.
겨울이 되자 왕룽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아무 것도 팔지
않고 사지도 않을 방침을 세웠다. 모든 물건을 아껴서 살아 갈
작정이었다. 매일 그는 하루의 식량을 손수 며느리에게 내어
주었다. 머슴들 것은 칭 서방에게 주었다. 그러나 칭 서방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들에게 줄곧 양식을 대어 주는 것이
괴로왔으므로 마침내 그들을 남방으로 보냈다. 남방으로 가서
구걸을 하거나 품팔이를 하다가 봄이 되거든 돌아오라고 일렀다.
그러나 이런 생활에 단련을 받지 않은 렌화에게만은 다른 사람
모르게 설탕이나 기름을 숨겨 두고 주었다. 설 명절에도 그들은
호수에서 낚은 고기와 사육장에서 잡은 돼지고기를 먹었을
뿐이었다.
왕룽은 이렇게 청승을 떨 만큼 가난하지는 않았다. 아들이나
며느리는 알지 못하지만 그의 침실 벽에는 많은 은전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금과 은을 가득 담은 독이 물 속에 든 밭에도 묻혀
있었고 대나무숲 밑에도 얼마만큼 묻혀 있었다. 시장에 팔고
남은 곡식만으로도 아직 2,3 년 흉년이 든대도 굶어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는 가난뱅이들 뿐이었다.
그는 지난날 황부잣집 문앞을 지날 때 들었던 굶주린 사람의
고함 소리를 생각했다.
그가 아직 가족을 먹여 살릴 만큼 양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문을 닫아 걸고 낯선 사람을 일체 집안에
못 들어오게 했다. 아무리 조심한대도 이런 기근에 비적이나
무법자를 방어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렇게 비적대에게 침입을
당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것은 삼촌의 덕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삼촌이 비적단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면 쌓아 둔 양식이나 숨겨 둔 금은 할 것 없이 젊은
부녀자들까지 모조리 빼앗으러 왔을 것이다. 그래서 왕룽은
삼촌과 숙모와 그리고 사촌을 은근한 태도로 대했다. 그래서
그들은 왕룽의 신세를 입으면서도 지나치게 세도를 부렸다.
누구보다도 먼저 차를 마시고 식사 때도 제일 좋은 음식에 먼저
수저를 대었다.
왕룽이 이렇게 자기네들을 두려워하는 눈치를 알자 그들은
점점 콧대가 세어졌다.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이 늘어 갔고
음식물에 대한 불평도 했다. 특히 숙모는 렌화의 방에서 맛있는
음식을 못 얻어 먹게 되자 삼촌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왕룽에게 트집을 잡았다.
삼촌은 벌써 나이도 많이 들고 만사 귀찮아하는 꼴이라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아무런 일도 없을 것인데 숙모와 사촌은 자꾸만
그를 들볶는 것이었다. 어느 날 문간에 서 있던 왕룽은 문득 두
사람이 삼촌을 들볶는 말을 들었다.
"돈이나 곡식이 얼마든지 있으니 돈을 달라고 해요." 사촌의
말이었다. 숙모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 때를 놓치면 다시는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없어요.
당신이 이 집 삼촌이 아니라면 이 집은 벌써 비적의 습격을
받았을 거예요. 가진 걸 송두리째 빼앗겼을 테고 집은 불타
버렸을 테지요. 조카도 당신이 붉은 수염단의 부두목인 것을
알고 있어요."
이 말을 엿들은 왕룽은 치가 떨리도록 분했다. 그러나 그는 꾹
참고 이 세 식구를 어떻게 처치할까 고민했으나 그럴 듯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튿날 삼촌이 와서, "담배도
떨어지고 네 숙모 옷감도 사야겠으니 돈을 좀 주렴." 하고
말했을 때 왕룽은 속으로는 이를 갈았지만 아무 말 없이
허리춤에서 은전 다섯 푼을 꺼내 주었다. 지난날 가난했을 때도
이렇게 불쾌한 마음으로 남에게 돈을 주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이틀도 못 되어 삼촌은 또 돈을 요구ㅎ다. 왕룽은 참다 못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돈을 마구 쓰시면 무얼 먹고 살아요?"
그러나 삼촌은 빈정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너는 운수가 좋아. 너보다 못한 부자들도 자기 집 대들보에
매달려 불타 죽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데."
이 말을 들은 왕룽은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돈을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세 식구는 그들이
먹지 못하는 고기로 포식하며 지냈다. 왕룽은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삼촌은 줄곧 담뱃대를 입에 물고 살았다.
왕룽의 장남은 신혼 재미에 빠져 집안 일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기 아내를 숙부 아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하려는
데에만 온 정신을 팔았다. 그들은 이미 친척이 아니라 바로
적이었다. 왕룽의 장남은 숙부의 아들이 외출한 뒤가 아니면
아내를 방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낮에는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게 했다. 그러나 숙부네가 그의 아버지에게 건방지게
구는 꼴을 보자 성질이 급한 그는 화가 나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아버지, 저 세 마리의 호랑이 같은 것들을 저나 아버지의
며느리보다 더 소중히 여기신다면 저희들은 다른 곳으로 나가
살겠어요."
왕룽은 하는 수 없이 혼자만 가슴속에 숨겨 두었던 삼촌의
비밀을 숨김없이 아들에게 들려 주었다.
"나도 저것들이 미워서 못 견딜 지경이다. 무슨 좋은 묘안만
떠오른다면 당장이라도 혼을 내주고 싶어. 그러나 숙부는 흉악한
비적단의 부두목이니 그저 좋게 해 주는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지 않니. 아무도 그 사람들을 건드릴 수가 없단 말이다."
맏아들은 이 말을 듣자 펄쩍 뛰며 놀랐지만 잠시 생각한
뒤에는 더욱 분개했다.
"그러면 이렇게 해요. 어두운 밤중에 그들을 물 속에 집어넣어
버려요. 숙모는 뚱뚱하지만 몸이 약하니 칭 서방이 해도 될
것이고, 그 아들 놈은 제 안사람 엉덩이만 넘겨다 보는 놈이니까
제가 처치하죠. 또 숙부는 아버지가 해치우면 되구요."
그러나 왕룽은 사람을 죽일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먹이던
소를 죽이는 것보다 더 쉽게 삼촌을 죽일 수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아무리 미워도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안 될 말이다. 비록 원수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피를
나눈 혈육인데. 그리고 비적들이 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
늙은이가 살아 있어야 도리어 걱정 없이 살 수 있지. 요즘 같은
때는 무서운 꼴을 당하기 쉬워."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아들의 말도 아버지의 말도 다같이 일리가
있었다. 죽여 버린다는 간단한 방법으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하는 것이다. 한동안
궁리하던 왕룽은 큰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그것들을 여기에 그냥 두고 우리들을 괴롭게 굴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그런 방법은 없을 거야."
이 말을 들은 아들이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좋은 수가 있어요. 아버지가 지금 하신 말씀을 들으니
생각나요. 그치들에게 아편을 먹여요. 부자들이 하는 것처럼
피우고 싶은 대로 아편을 피우게 해요. 저는 그 아들을 꾀어
내어 성안 찻집에 데리고 가서 아편을 피우게 하겠어요. 그리고
늙은 것들에게도 아편을 사다 줍시다."
그러나 왕룽은 자기가 먼저 한 생각이 아니라서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돈이 많이 들 텐데." 아들의 생각이 못마땅한 듯이 그는
천천히 말했다.
"아편은 보석 만큼이나 값이 비싸."
"그렇지만 저것들을 그대로 둔다면 보석 값보다 더 비싸게
돈이 나갈 거예요. 그리고 그 아들놈은 건방지게 또 제 안사람을
노리고 있어요. 이대로 그냥 놔둘 수는 없어요."
그러나 왕룽은 곧 승낙하지 않았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편은 여간 돈이 많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홍수가 빠질
때까지 그대로 참고 지내기로 했다. 아편을 사 준다는 것은
제대로 실행될 것 같지도 않았다. 아마도 다시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홍수가 빠질 때까지 그대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것은 삼촌의 아들이 왕룽의 귀여운 막내딸에게 눈독을
들이는 일이었다. 자기의 조카뻘에게 그런 애욕을 가지는
파렴치한 놈이었다. 왕룽의 막내딸은 매우 예뻤다. 몸집도
날씬하고 둘째 오빠를 닮았으나 살결이 복숭아 꽃처럼 희고
고왔다. 작은 코나 소담스러운 입술이나 전족한 발맵시가 몹시
귀여웠다.
어느 날 밤 그 딸애가 혼자 부엌에서 나와 마당을 지나는데
삼촌의 아들이 와락 달려들어 그녀를 껴안고 그 더러운 손을
젖가슴에 넣으려 했다. 그녀가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왕룽이 달려나와 그의 머리를 때렸으나 그는 도둑질한 고기를 문
개처럼 쉽게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왕룽이 겨우 딸을 빼내자
그는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장난이에요. 조카가 아니에요? 조카에게 못된 짓이야
하겠어요?"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눈엔 정욕이 불타고 있었다.
왕룽은 속으로만 욕을 중얼거면서서 딸을 제 방으로 조심스레
데리고 들어갔다. 그날 밤 왕룽은 이 이야기를 큰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은 정색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애를 약혼자네 집으로 보냅시다. 흉년이라서
혼사를 치르기는 어렵겠지만 사람만은 맡아 달라고 합시다. 저
미친 개에게 물릴지도 모르잖아요."
왕룽도 찬성이었다. 그는 이튿날 성안의 유씨를 찾아갔다.
"내 딸도 벌써 열세 살이나 되었으니 이젠 제법 색시티가
납니다. 그만 혼례를 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나 유씨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올해는 흉년이라서요. 이런 흉년에 어떻게 큰일을
치르겠습니까?"
왕룽은 '집안에 미친 개 같은 사촌이 있어서요.' 라고는 차마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 애는 제법 예쁘고 나이도 그만하니 내 안 사람이
죽고부터는 내가 뒤를 살펴야했는데...... 아시다시피 나는 항상
바쁘고 집안이 어수선해서 그 애 일에 미처 눈을 돌릴 새가
없군요. 어차피 댁의 식구가 될 사람이니 잘못이 없도록 하고
싶군요. 혼례의 시기는 댁의 형편 좋을 대로 하셔도
좋으니까요."
유씨는 너그럽고 친절한 사람인지라 쾌히 승낙했다.
"그렇습니까? 그런 형편이라면 보내 주십시오. 내 안사람에게
잘 이야기 해 두겠어요. 보내 주시면 안사람에게 소홀함이
없도록 잘 보살피라고 하지요. 혼례는 내년 추수 때나 지나서
하기로 합시다."
왕룽은 이렇게 해서 해결을 보자 매우 만족하여 유씨와
하직하였다. 그리고 칭 서방이 배를 띄우고 기다리는 누문까지
돌아오는 도중에 담배와 아편을 피우는 가게에 들러 담배를
샀다. 점원이 담배를 저울에 달 동안 그는 별 생각이 없으면서도
점원에게 물었다.
"아편은 얼마나 하오?"
"요즈음은 가게에서는 팔지 않고 있습니다. 사시려면 방안으로
들어가세요. 한 돈쭝에 은전 한 닢입니다."
왕룽은 그 이상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
"그러면 여섯 돈쭝만 주시오."
28
막내딸을 시집 보내고 그녀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게
된 어느 날 왕룽은 삼촌에게 말했다.
"숙부님 좋은 담배를 드릴까요?"
그는 아편 봉지를 뜯었다. 끈적끈적하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났다. 삼촌은 그것을 손에 들고 냄새를 맡더니 기쁜 듯이 웃으며
말했다.
"거 참, 좋은 것을 가져왔구나. 나도 간혹 피워 본 적은
있지만 너무 비싸서 자주 피우기 어렵구나."
"아버지가 나이 드시고서 잠을 이루지 못하시기에 산 것인데
오늘 남은 것이 눈에 띄어 삼촌 생각이 났어요. 저는 아직 피울
나이도 아니고 해서 아저씨에게 드리려고요. 두었다가 편찮으실
때나 생각나실 때 간간이 피우세요."
왕룽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왕룽의 삼촌은 반색하며 빼앗다시피 아편을 받았다. 그는 그
향기에 무한한 유혹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곧 담뱃대를 사
가지고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피웠다. 왕룽도 그 담뱃대를 여러
개 사서 여기저기 놓아 두었다. 삼촌 가족에게 보이기 위해서
피우는 체만 하고 사실은 입에도 대질 않았다. 또한 두 아들과
렌화에게는 비싼 것이라는 구실로 절대로 손을 못 대게 하면서도
숙부와 숙모, 또 그 아들에게는 권했다. 온 집안이 달콤한 연기
냄새로 가득 찼다. 그러나 왕룽은 아편 값에 쓰이는 은전을
아깝게 여기지 않았다. 아편 덕분에 집안의 평화를 다시
되찾았기 때문이다.
겨울이 가고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겨우 바닥이
드러나는 논밭을 둘러보고 다니는 왕룽에게 달려온 장남이
벙글벙글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아버지, 머지않아 식구가 하나 늘어납니다. 아버지 손자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룽은 아들을 들여다보며 얼굴 가득히 만족한
웃음을 담았다.
"그래, 정말 반가운 일이구나."
왕룽은 칭 서방을 성안으로 보내어 생선과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사오게 한 후 며느리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이렇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라. 그래야 애도
건강하느니라."
이 봄 내내 왕룽의 마음을 위로한 것은 손자가 태어난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는 다른 일에 바쁠 때도 이 일을 떠올리며
귀찮은 일이 생겼을 때도 앞으로 태어날 손자 생각을 하며
속으로 흐뭇한 웃음을 지었고 위로를 받았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홍수 때문에 말리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한 사람, 두 사람 혹은 한 떼,
두 떼로 떼를 지어 기나긴 겨울에 지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살던 집터는 물먹은 황토 뿐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기쁜 모양이었다. 그런 황토 속에서도 그들의 집은 다시
하나 둘 세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지붕을 덮울 거적 같은
것을 사야만 했다. 그런 사람들은 거의 왕룽을 찾아와서 돈을
빌려갔다. 왕룽은 그에게서 돈을 꾸려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자
고리로 빌려 주었다. 담보물은 반드시 토지라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빌린 돈으로 씨앗을 사서 물이 빠진 기름진 땅에 뿌렸다.
소나 쟁기라든가 씨앗이 더 필요하게 되면 그들은 또 왕룽에게
농사에 필요한 돈을 꾸어갔다. 어떤 사람은 농토의 일부를
팔아서 추수할 때까지의 생활 대책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
농토들을 왕룽은 헐값으로 사들였다. 그들은 돈이 급ㅎ기 때문에
그렇게 헐값으로라도 팔아야 했다.
농토를 팔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의 딸을 종으로 팔기도
했다. 그 중에는 왕룽이 부자일 뿐더러 세도도 있고 마음씨도
좋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딸을 팔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아들의 장래와 또 머지 않아서 자꾸 낳을 손자들을 생각한
왕룽은 계집종을 다섯이나 샀다. 그 중의 두 애는 열두살인 데다
몸도 건강했으므로 부엌일을 시켰고 다른 작은 두 애는 집안일을
거들도록 하고 또 한 애는 렌화의 몸종으로 쓰게 했다. 뚜챈이
늙은 데다 막내딸을 시집 보낸 뒤로는 집안 일에 일손이 많이
부족ㅎ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낯선 사람이 일곱 살 난 아주 연약한
계집애를 팔러 왔다. 왕룽은 그 애가 너무 작고 약해 보였으므로
안 사겠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렌화가 그 애를 좋다고 졸라 대는
바람에 흥정을 시작했다.
"참 예뻐요. 내가 데리고 있고 싶어요. 지금 애는 밉고 냄새가
나서 싫어요."
왕룽은 어린 계집애를 다시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곱고, 몸이
가냘픈데다 기가 죽어 가엾게 보였다. 왕룽은 렌화의 청도
들어줄 겸, 또 불쌍한 애에게 먹이나 많이 주어 살찌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사도 좋아."
왕룽은 딸을 팔러 온 사내에게 은전 스무 닢을 주었다. 그
애는 렌화가 쓰는 침상 발치에 재우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아무 걱정도 없을 것 같았다. 왕룽은 자기도 좀
편히 지내보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홍수가 빠진 여름이 되어
밭에 씨앗을 뿌리게 되자 왕룽은 그의 논밭을 돌아다니면서 칭
서방과 함께 토지를 살펴보았다. 기름진 땅과 나쁜 땅을 각기
토질에 따라서 어떤 씨앗을 뿌릴 것인가에 대해 의논했다. 그는
밭에 나갈 때는 반드시 막내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 막내
아들에게는 농사일을 가르칠 작정으로 어려서부터 견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왕룽은 막내 아들이 농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는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걷고 항상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룽은 막내 아들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왕룽은 아들이 묵묵히 자기 뒤를
따라오는 것만 알고 있는 것이다. 여름 농사 계획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만족한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젠 나도 늙었으니 평생 들에서 일만 할 게 아니라,
머슴들도 여럿이고 아이들도 있으니까 집에서 편히 지내야겠다.'
그러나 왕룽에게 그런 편한 날이 있을 수 없었다. 며느리도
보았고 집안 일을 거들게 종들도 사다 놓고, 삼촌에게 소원대로
아편을 대주고 있었지만, 그런 하루도 집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사촌과 장남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장남은 자기
오촌을 악한 사람으로만 여기고 증오심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장남은 소년 시절에 이 아저씨가 얼마나 행실이 나빴던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언제나 강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이즈음도 항상 의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찻집에를 가더라도
오촌이 먼저 나가기 전에는 결코 집을 비우지 않았다. 렌화와의
사이도 한때 의심했으나 그것은 곧 풀어졌다. 렌화는 나이가
많아져서 나날이 몸이 뚱뚱해지고 지금은 먹는 것이나 술밖엔
다른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곁에 오는 남자를
보더라도 그녀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왕룽이 늙어서 자주 곁에 안 오는 것을 오히려 그녀는
좋아하고 있을 정도였다.
왕룽이 막내아들을 데리고 들에서 돌아오니 장남이 그의
소매를 잡고 한 구석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
"전, 이 이상 그 자식과는 한집에서 같이 못 지내겠어요.
옷단추도 꿰지 않고 빙빙 돌아다니고 계집종들을 엿보는 꼴을 더
이상은 못보겠어요." 장남은 그의 오촌이 뒤채까지 기웃거린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자신이 아버지의
첩에게 마음이 쏠렸던 지난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계집종 이야기만 했다.
물이 빠지고 날씨가 좋은 데다가 막내 아들이 그의 뒤를
따라온 것이 기뻐서 유쾌한 왕룽은 몸가지 가뿐해진 기분인데
이런 소리를 듣자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
"너는 밤낮 그따위 소리만 하느냐. 너는 처에게 너무 빠졌어.
그래가지고야 어디 집안 꼴이 되겠느냐. 계집한테 반해도
이만저만 해야지. 사내 자식이 그렇게 의심이 많아서야 어디에
써 먹겠어."
장남은 이 말에 무척 기분이 상했다. 자기가 보잘것없는
무식한 인간처럼 돼먹지 않은 행동을 한다고 비난받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던 것이다.
"제 처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이런 일이 우리 집에
있어서는 체면상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룽은 더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나서
생각에 잠시 잠기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찌된 셈인지 우리 집은 밤낮 사내니, 계집이니 하고 귀찮은
일 뿐이냐. 나는 늙어서 지금부터라도 좀 편히 지낼까 했더니,
또 너희들이 못살게 구는구나."
그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언성을 높였다.
"대관절 어쩌란 말이냐?"
장남은 아버지의 성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왕룽도 또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언성을 높였던 것이다. 장남은 마침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이 집을 떠나 성안에 가서 살고 싶어요.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촌뜨기처럼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이 집엔
숙부네 식구들이나 살게 하고 우리들은 성안에 가서 사는 것이
좋을 거예요."
아들의 말을 들은 왕룽은 어이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담뱃대를 끌어당기면서 탁자 옆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아들의 말은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건 내 집이야."
왕룽은 이렇게 아들을 무시하는 듯이,
"네가 이 집에 살건 안 살건 네 자유다. 이 집은 내 집이고 내
땅이야. 이 땅이 아니라면 나는 굶어 죽었을 게고 너도 선비처럼
잘 차려 입고 한가하게 돌아다닐 수는 없었을 거야. 이 땅이
있기 때문에 너도 이만큼 잘 지낼 수 있는 거야."
왕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일부러 쿵쾅거리면서
가운뎃방으로 걸어가기도 하고 마루에 침을 뱉기도 하는 등
상스러운 농군처럼 굴었다. 그는 장남의 세련된 풍채를
자랑스러워했지만 한편으로는 유약함을 경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자기 생각을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뒤를 쫓아가면서 끈질기게 말했다.
"성안에 황부잣집이 비어 있어요. 바깥 채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안 채는 문을 닫아 놓은 채 그대로 있어요. 거기면
조용하니까 저는 그 집을 빌겠어요. 그 집을 빌려서 살아요.
그곳이라면 평화롭게 살 수 있어요. 아버지와 막내 동생은
논밭을 돌볼 수도 있어요. 저는 미친 개 같은 아저씨가 싫어서
못견디겠어요."
아들은 열심히 아버지를 설득했다.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고,
마침내 두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으나 일부러 훔치지 않았다.
"저는 결코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지 않겠어요. 노름판에도
안가고 아편도 안 피우고 아버지가 정해 주신 여자 외에는 나쁜
곳에 발을 들여 놓지 않겠어요. 제발 소원이니 이것만은
들어주세요."
왕룽은 눈물 때문에 움직였는지 어쩐지는 자기도 모르지만
아들이 말한 '황부잣집' 이란 말에는 마음이 움직였다.
왕룽은 지난날 그가 겁을 먹고 그 집에 들어갔던 일이며
문지기에까지 모욕당하던 일이 새삼스럽게 머리에 떠올랐다.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수치스런 기억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촌뜨기라고 성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멸시당해 온 것을 언제나 뼈저러게 느끼고 있었다.
그가 그것을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황부잣집 노부인 앞에
섰을 때였다. 그래서 장남이 그 저택에서 살자고 졸랐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번개처럼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 광경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그 노부인이 나를 종처럼 내려다보던 그 높은 의자에
이번에는 내가 앉아서 다른 사람을 그렇게 호령할 테다.' 그는
속으로 궁리하다가 또 이렇게 생각했다. '하려고만 하면 못할
것도 없지.'
그는 아들 말에 대꾸는 않고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담뱃대에 담배를 담아 말없이 빨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
위대함을 상징하는 크나큰 황부잣집 대문안으로 들어가 살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들이 울음으로 호소한 까닭도 아니고 삼촌이 보기
싫어서도 아닌 것이다. 오직 자기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왕룽은 다른 식구들에게 집을 성안으로 옮긴다거나 현재
상태를 바꾸어 보자는 말은 안 했으나 아들의 말을 듣고 나니
삼촌의 아들놈이 한층 더 불쾌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유심히
살펴보니 그 녀석은 여종들에게 이상한 눈치를 던지는 것이었다.
왕룽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발정한 개 같은 자식과는 같이 살지 못하겠군."
그는 삼촌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삼촌은 아편을 피우고부터는
놀랄 만큼 몸이 쇠약해지고 살빛이 누렇게 되었으며 허리가 굽은
것이 갑자기 늙은 것 같았다. 기침을 하면 가래에 피가 섞여
나왔다. 숙모는 배추둥지처럼 몸이 굵어지고 아편 물촉을 잠시도
놓지 않고 졸기만 했다. 두 사람은 이제 귀찮게 굴 기력도
없었다. 이렇게 아편은 왕룽이 원하는 대로 제구실을 해 주었다.
그러나 숙부의 아들만은 혈기 왕성하였다.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고 정욕이 끓어올라 야수 같았다. 늙은 노인처럼 아편에
지지도 않고 꿈만으로 정욕을 만족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런 사내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왕룽은 그를
결혼시키려 하지 않았다. 사촌은 아무 할 일도 없는 놈팡이였다.
일 할 필요도 없었고 또 누가 일하라고 시키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밤이면 어디론지 나다녔지만 요즈음은 멀리 떠났던
농민들이 돌아오고 지방의 질서도 회복되어 비적단이 북쪽
산속으로 숨어 버렸기 때문에 그의 밤 출입도 없어졌다. 그는
비적단에 끼여 산속에서 지내기보다는 왕룽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편하다고 생각하고 그들과 같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 집안의 두통거리로 여전히 남게 되었다.
한낮에도 옷을 바로 입지 않고 지껄이거나 하품을 하며 온
집안을 아무 데고 돌아다녔다.
왕룽은 어느 날 성안에 가서 둘째 아들과 의논을 했다.
"네 형이 황부잣집 안채를 빌려서 살겠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둘째 아들도 이제는 늠름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다른 점원들
모양으로 차림도 말끔했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제법 훌륭했다.
그러나 체격만은 그대로 작고 살빛은 누렇고 교활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요. 저도 편리하겠어요. 그렇게 되면
집이 크니까 제가 장가 들어도 같이 살 수 있고 온 집안 식구가
같이 살 수 있으니까요."
둘째 아들의 성격은 침착했다. 다른 여러 가지 일에 정신이
팔렸던 왕룽은 둘째 아들을 장가 보내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 이런 말을 듣고 보니 둘째 아들에 대해서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네 결혼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다른 일에 바빠서
여가가 없었다. 그동안 흉년이 들어 잔치할 형편도 못 됐고.
이제 곧 형편이 펴질 테니 빨리 결정하기로 하자."
왕룽은 어디 적당한 혼처가 없는가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러시다면 저도 장가 가겠습니다. 색시집에 가서 돈을
쓰기보다는 나으니까요. 또 아이도 낳을 게고. 그렇지만 저는
형수 같은 색시는 싫어요. 밤낮 친정 자랑만 하고 눈이 높아서
돈만 헤프게 쓰니까요."
이 말에 왕룽은 깜짝 놀랐다. 그는 맏며느리가 정숙하고
얌전하다고만 여기고 있었다. 이런 점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그리고 둘째 아들의 말이 일리 있는 말이고 또 돈을
아낀다는 그 마음씨가 한없이 기뻤다. 원래 이 둘째 아들은
체격이 좋은 형 밑에 가려서 자랐으므로 울고 불고 난리를 칠
때가 아니면 별로 눈에 뜨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왕룽도 이
아들에겐 깊은 관심이 없었고 더구나 성안으로 보낸 뒤부터는
거의 잊고 지냈던 것이다. 남들이 간혹 "아들이 몇이오?" 하고
물으면 "셋이오." 하고 대꾸할 때에나 비로소 둘째 아들의
존재를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는 둘째 아들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는 짧게 깎아서 기름으로 잘 다듬고 올이 가는 회색 명주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민첩한 동작이 무슨 비밀이라도 지킬 만큼
믿음직한 장부였다.
'음, 내게 이런 자식도 있었던가!'
왕룽은 속으로 대견해 하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럼 너는 어떤 색시가 좋으냐?"
아들은 미리부터 차근차근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농가에서 검소하게 자란 색시가 좋아요. 촌 지주로서
가난한 친척도 없고 지참금은 많을수록 좋구요. 얼굴은 예쁘지도
밉지도 않고 음식 솜씨가 있어 부엌 종이 많아도 능히 감독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좋아요. 쌀을 살 때 한꺼번에 쓸데 없이 많이
사지 않고 옷감을 사도 한 치도 남지 않고 꼭 맞게 사는 여자가
좋아요."
왕룽은 또 한번 놀랐다. 그의 아들이지만 이런 성격의 청년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자기가 젊었을 때도 이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고 또 장남도 그러했다. 왕룽은 똑똑한
둘째에게 탄복하고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런 색시를 구해 보자. 칭 서방을 내세워서 그런
색시를 찾아보자."
호탕하게 웃으며 둘째 아들과 작별을 나눈 왕룽은
황부잣집으로 향했다. 그는 돌 사자가 서있는 대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지난날과는 달리 문지기가 없기 때문에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앞뜰은 그가 장남 때문에 갈보를 찾아왔던
그때처럼 추잡했다. 나뭇가지엔 빨래들이 널려 있었고
여기저기에 여자들이 둘러앉아서 조잘거리며 긴 바늘로 신을
꿰매고 있었다. 흙투성이가 된 벌거숭이 아이들이 봉당에
우글우글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풍기는 불쾌한 냄새가 가득했다.
왕룽은 전에 색시가 살던 방을 보았다. 문은 열려 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을 본 왕룽은
기뻐하며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황부자가 번창하던 시절에는 왕룽도 이들과 같은 신세로
부자들을 미워하고 두려워했으나 지금의 그는 광대한 논밭을
가지고 또 수많은 돈을 가졌기 때문에 파리떼처럼 모여 있는
가난뱅이들을 경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들이 풍기는
불쾌한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리고 숨을 죽이며 그들
사이를 재빠르게 지나갔다. 그는 마치 지난날의 황부잣집
사람처럼 그들을 경멸하고 또 싫어했다.
그는 이 집을 빌리려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순한
호기심으로 들어가니 안채 대문은 잠겨 있고 그 곁에 노파 한
사람이 졸고 있었다. 눈여겨보니 노파는 이 집 문지기의 곰보
여편네였다. 왕룽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전날에는 살결이
곱고 중년 여편네였는데 지금은 수척할 대로 수척하고 쪼그라질
대로 주름살이 잡히고 머리털은 백발이 되어 누런 덧니가 빠질
듯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 모양이 된 문지기 여편네를
바라보려니 왕룽은 그 순간 그가 아직 젊은 농부로 아들을 안고
여기에 찾아왔던 그때부터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껏 느껴 보지 않았던 그 자신도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약간 맥빠진 소리로 말했다.
"이 문을 좀 열어 주게."
노파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인지 껌벅거리면서 급히
일어나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이 안채를 전부 쓸 사람이 아니면 열지 말라는 분부인데요."
왕룽은 갑자기 결심한 듯 말했다.
"암, 마음에 들면 전부 빌리지."
그는 자기가 누구라는 것도 말하지 않고 노파 뒤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고요했다. 그가 지난날 음식거리를
담은 광주리를 두었던 방은 그대로 남아 있고 황홀하게 단장한
기둥이나 기나긴 복도도 옛 모양 그대로였다. 노파가 인도하는
대로 대청으로 들어가니 그는 이 집의 여종을 아내로 데려와서
여기에 섰던 자신의 처량했던 옛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옛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데 지금 그의 눈앞에는 그때 그 지체
높은 마나님이 은빛 공단옷에 싸여서 여종들의 부축을 받고
앉았던 높은 의자가 단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야릇한 기분에 휩싸인 왕룽은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 나가서 노부인이 앉았던 의자에 걸터앉아 손을 그
앞의 탁자 위에다 얹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무얼 하는 것인가
하고 몽롱한 노안을 까뭇거리며 그를 쳐다보고 있는 노파를
내려다보았다. 오랜 세월을 두고 그리던 소원이 이루어지기라도
한 듯 그의 가슴에는 기쁨이 넘쳤다. 그는 별안간 탁자를 치며
느닷없이 말했다.
"좋아, 이 집을 내가 빌리기로 하지."
29
왕룽은 성미가 급했으므로 일을 한번 결정해 버리면 한시라도
빨리 실행하지 않고는 결딜 수 없었다.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그는 무슨 일이든 서둘러서 처리해 버리고 아무 걱정없이 밭이나
둘러보고 낮잠이나 자면서 편하게 지내고 싶어했다. 그는
맏아들에게 황부잣집으로 이사하기로 했다고 전한 다음 모든
일을 주선하라고 일렀다. 또한 성안에 있는 둘째 아들을 불러서
거들게 하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들은 성안으로 이사했다.
먼저 렌화와 뚜챈과 그의 몸종의 짐을 옮기고 맏아들 내외와
그의 종들을 옮겼다. 그러나 왕룽은 곧 이사 가지 않았다. 그는
셋째 아들과 함께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나서 자란 곳을
떠나는 것이 그가 생각한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빨리 옮기라고 권해도,
"음, 음. 내 거처할 방이나 마련해 둬라. 맘이 내키는 날
가지. 손자놈이 나기 전에 가지. 갔다가 또 생각나면 이리로
오고......" 할 뿐이었다. 아들들이 자꾸 권해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저 천치도 생각해야지. 그 애를 데려가야
할까 하고 생각하는 중이야. 아무튼 그 애는 내가 돌봐야지.
아무도 돌보아 줄 사람이 없으니까. 결국 데려가긴
해야겠지만......"
왕룽이 이렇게 말한 것은 맏며느리가 지나칠 만큼
괴팍스러워서 이 천치 시누이를 근처에도 못 오게 했기
때문이었다. 임신하고부터는,
"저런 애는 죽는 편이 나아요. 저런 애를 보면 뱃속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쳐요." 하고 그 앞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맏아들은 그의 아내가 천치 아이를 미워하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룽은 공연한 말을 했다고
생각되어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네 동생을 장가 보낼 때까지 여기에 있겠다. 칭 서방을
시켜서 혼처를 구해 보라고 했으니까 그 일이 결말 날 때까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래서 이 집에 남게 된 식구는 왕룽과 막내 아들과 천치 딸과
그리고 삼촌네와 칭 서방과 머슴들 뿐이었다. 삼촌 식구들은
마치 자기 집이나 된 것처럼 렌화가 거처하던 뒤채를
독차지했으나 왕룽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귀찮게 굴던
삼촌만 죽어 버리면 어른에 대한 왕룽의 도리는 끝나는 것이다.
그 뒤에 사촌을 쫓아내도 남에게 욕은 먹지 않을 것이다. 칭
서방과 머슴들은 바깥 채로 이사했다. 왕룽과 막내아들과 천치는
가운뎃방에 거처하기로 하고 여러 가지 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건장한 여종을 한 사람 구했다. 왕룽은 갑자기 온몸에 피로가
엄습해 옴을 느꼈다. 세상일은 다 잊어버리고 밤낮 잠만 잤다.
그는 마음이 아주 평화로왔다. 그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막내 아들은 말이 없었고 아버지 곁에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입을 다물고 있는 막내의 성질이 어떤지
왕룽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난 뒤에 왕룽은 칭 서방에게 둘째 며느리감을 구해
보라고 부탁했다. 칭 서방도 이젠 늙은이가 돼서 마른 갈대처럼
쇠약했다. 왕룽은 그에게 괭이나 쟁기 같은 것은 잡지 못하게
했다. 머슴이나 감독하고 추수 때 곡식 간수나 제대로 하라고
권했다. 그는 왕룽의 말을 듣자 세수를 하고 가장 좋은 푸른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인근 마을로 나가서 여기저기 색시감을
보고 와서 왕룽에게 보고했다.
"내가 젊기만 하다면 장가 들고 싶은 색시가 있어요. 여기서
세 마을 건너서인데요. 마음도 좋고 몸도 건장한데다 살결도
아주 고와요. 그저 흠이라면 잘 웃는 게 흠이지요. 색시
아버지는 이댁과 혼사가 되기를 바라고요. 지참금도 요즘으로
보면 좋은 편이고 아버지는 지주예요. 그렇지만 나는 주인의
말씀을 듣지 않고는 확실하게 말 못하겠다고 못박아두었어요."
왕룽은 금방 승낙했다. 빨리 결말을 맺고 싶어 사람을 보내
이쪽 뜻을 전하고 혼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젠 막내 아들만 남았구나. 며느리를 얻고 사위를 보고 하는
걱정도 거의 덜게 된 셈이다. 이제부턴 편히 지낼 수 있겠군.'
혼약서를 주고받고 잔칫날까지 정한 그는 마음이 편해져 그의
아버지처럼 양지쪽에 나가 낮잠을 즐겼다.
칭 서방도 나이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 거북해져 식사
뒤에는 졸기가 일쑤였다. 막내아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농사일을 할 수가 없으므로 왕룽은 멀리 있는 토지를 가까운
마을 사람들에게 빌려 주고 싶었다. 이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소작을 하겠다고 서로 먼저 청해 왔다. 소작의
조건으로는 수확물을 지주인 왕룽과 소작인이 반분하기로 하되
그밖에 왕룽은 참깻묵, 콩깻묵 따위 비료를 대어 주기로 했고 그
대신 소작인들은 왕룽 가족이 먹을 양식을 대어 주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왕룽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농사일이 편하게 되었다.
때때로 그는 성안에 가서 그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방에서
자기도 했다. 그러나 날만 새면 아침 해가 뜰 때 열리는 성문을
빠져 나와 다시 들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신선한 흙냄새를
맡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리고 그의 농장을 밟을 때면 무한한
희열을 느꼈다.
그러는 동안 왕룽에겐 다시 무거운 짐을 벗을 날이 왔다. 지금
이 집안에는 여종을 겸한 머슴 아낙네밖에 없기 때문에 사촌은
너무나 한적한 생활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문을 듣자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북쪽에 전쟁이 벌어졌대요. 세상 구경도 하고 싶고 무엇이든
일해 보고 싶어 군대에 나가 볼 생각이에요. 군복과 어깨에 멜
외국제 총을 사게 돈 좀 주세요."
이 말을 들은 왕룽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으나 그런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너는 아저씨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서 뒤를 이을 사람인데
전쟁터에 가면 무슨 일이 있을지 알기나 하니?"
그러나 사촌은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아요. 나는 바보가 아니니까요. 죽을 데는 안 가요.
전투가 벌어지면 끝날 때까지 어디 숨겠어요. 이젠 이렇게
지내기도 답답해서 못 견디겠고 또 더 나이 먹기 전에 낯선 곳도
좀 구경해 둬야겠어요."
왕룽은 얼른 돈을 주었다. 이때만은 아무 고통도 없이 줄 수
있었다. 그는 사촌의 손에 은전을 세어 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잘됐다. 제가 전쟁을 좋아해서 가니까 달렸던 혹이 떨어지는
셈이다. 아무튼 전쟁은 어디에선가 항상 일어나는 것이니까.'
또 이렇게도 생각했다.
'전쟁터에 가면 죽을지도 모르지. 그런 일도 흔히 발생하는
일이니까.'
왕룽은 이런 생각이 얼굴에 나타날까 봐 매우 조심했으나
마음은 매우 시원했다. 숙모는 아들이 군인으로 나간다는 말을
듣자 눈물을 글썽거렸다. 왕룽은 숙모를 위로하기 위하여 아편을
더 주고 담뱃대에 불을 붙여 주며 말했다.
"그 애는 반드시 군관으로 출세할 것입니다. 우리 가문을
틀림없이 영화롭게 할 테니 염려 놓으세요."
그 후로부터 집안은 지극히 평화로왔다. 숙부 내외는 밤낮
누워만 있고 성안의 집에선 왕룽의 손자가 태어날 날이
가까와졌다. 이날이 가까와 오자 왕룽은 성안 집에서 거처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는 뜰을 거닐면서 한 때 호세를 자랑하던
황부잣집에서 그의 처자와 며느리를 거느리게 되고 그리고
삼대째인 손자까지 낳는다고 생각하니 이상 야릇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실로 감개무량한 것이다.
마음이 이렇게 흐뭇해지자 그는 돈을 아끼지 않고 썼다.
근사한 남국의 흑단 조각이 있는 탁자를 마련하거나 멋있게
조각한 의자를 갖추거나 보통 무명옷은 이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가족들 옷을 전부 공단과 명주로 해 주었다.
종들까지도 푸른 무명이나 검은 무명으로 말끔하게 입혔다.
그리고 맏아들의 친구들이 찾아오면 집 구경을 시키는 것도 큰
기쁨으로 여겼다.
또 왕룽이 먹는 음식도 차츰 사치스러워졌다. 그는 원래
마늘과 밀떡만 있으면 만족했으나 요즈음은 아침 늦도록 자고 또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음식에는 입맛이 당기지 않았다.
겨울의 버섯이라든가 남해 어물, 북해의 조개, 비둘기 알 같은
부유한 사람들이 줄어든 식욕을 돋우기 위해서 먹는 것만 가려서
먹었다. 그의 아들들도 렌화도 다같이 이런 것을 먹었다. 이렇게
모든 생활이 변한 것을 보고 뚜챈이 웃으면서 말했다.
"옛날 내가 이 집에 살던 때와 똑같이 됐습니다. 내가 늙어서
영감님의 시중을 못 드는 것만이 다를 뿐이에요."
이렇게 말하면서 뚜챈은 힐끔 왕룽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못 본
채했다. 그러나 그녀가 자기를 황 영감과 비교하여 영감님이라고
하는 데에 매우 만족감을 느꼈다.
이렇게 하는 일 없이 사치스런 생활로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하면서 왕룽은 손자가 나오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가 맏아들 방 가까이 가니 며느리가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들이 나와서 그를 맞으며 말했다.
"이제 산기가 보입니다. 그런데 뚜챈의 말을 들으니 산모 몸이
가늘어서 난산일 거라고 해요."
그래서 왕룽은 그의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걸터앉아서
며느리의 신음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무서운 생각이 들 만큼 걱정이 되었다. 문득 부처님에게 빌어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는 부리나케 향 파는 가게로 가서
향을 사 가지고 가까운 절로 갔다. 금빛 벽장 속에 관음보살을
모셔 놓았다. 그는 몹시 한가로이 지내고 있는 중을 불러 돈을
주며 말했다.
"사내가 향을 피우긴 어색한 일이니 내 대신 향을 좀 피워
주오. 내 첫 손자를 볼 판인데 며느리가 성안 사람이고 몸이
가늘어 난산이라서...... 내 안사람은 죽고 없어 향을 피워 올릴
사람이 있어야지......"
중이 향을 꽂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왕룽은 별안간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만약 새로 낳는 애가 손자가 아니고 계집일 때는 어떻게
하나?'
그래서 그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부처님, 손자를 낳게 해주면 붉은 새 옷을 한 벌 올리죠.
그러나 만일 계집이라면 드리지 않을 테요."
그는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절간을 나왔다. 거리에 먼지가
두껍게 덮여 있는데도 그는 정신 없이 성 밖 사당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밭과 땅을 지킨다는 두 개의 찰흙 인형이 여전히 앉아
있었다. 그는 향에 불을 붙이며 중얼댔다.
"우리들은 대대로 지신님을 섬겼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나도,
내 자식도 지신님의 시중을 받들어 왔습니다. 지금 내 손자가
태어날 예정인데 만약 그것이 아들이 아니라면 다시는 지신님을
안 섬기겠습니다."
그는 부처님과 지신님께 정성껏 축원을 하고 극히 피로한
몸으로 돌아왔다. 탁자 앞에 털썩 주저앉으니 목이 말라서 차
생각이 절로 났다. 그리고 얼굴의 먼지를 훔치려니 더운
물수건이 필요해서 손뼉을 수없이 쳤으나 아무도 오질 않았다.
모두들 분주한 양 오가는데 그는 누구를 붙잡고 손자가
태어났는지를 물어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멍하니 앉아 있는 그를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
거의 해가 질 무렵에야 겨우 렌화가 뚜챈의 부축을 받으면서
뒤뚱뒤뚱 걸어왔다. 뚜챈이 웃으며 말했다.
"자, 손자가 태어났어요. 모자가 다 건강하고 아기도 참
잘생겼어요."
왕룽은 그제서야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손뼉을 치며 다시 한 번 크게 웃고 나더니,
"암, 그래, 그렇지. 내 첫아들을 낳을 때도 이렇게 앉아
있었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걱정이 돼서 말이야."
렌화가 제 방으로 들어가자 그는 다시 의자에 걸터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오란이 첫아들을 낳을 때도 이렇게까진 애간장이 녹질
않았는데.'
그의 머리 속에 지난날의 일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아내는
아무도 방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혼자 고통을 참으며 애를
몇이건 낳고 또 곧 들로 나와서 그와 함께 고된 농사일을 돌봤던
것이다. 그런데 이 며느리는 배가 아프다고 어린애처럼 울고불고
악을 쓰며 집안 종들을 정신도 못차리게 굴고 또 제 남편을 문
밖에서 꼭 기다리게 하지 않는가.
왕룽은 지나간 옛 꿈을 회상하듯, 오란이 밭에서 일하는
틈틈이 가슴을 헤치고 젖을 물리던 정경을...... 젖이 넘쳐 흘러
땅에까지 흘러내리던 일들을 생각했다. 이런 일이 사실이었을까
싶게 벌써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이때 맏아들이 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로 자랑스런 듯이
들어왔다. 그리고 큰소리로 떠들어 댔다.
"아들을 낳았어요. 아들을요. 그런데 유모를 곧 구해야겠어요.
산모의 젖을 먹이면 어머니의 몸도 약해지고 얼굴 모양도
쭈그러져요. 성안에선 행세깨나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유모의
젖을 먹이거든요."
왕룽은 슬픈 듯이 대답했다. 왜 슬픈지 자신도 그 까닭을
몰랐다.
"그래, 제가 키우지 못한다면, 꼭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지."
아이가 태어나 한 달이 되던 날 아이의 아버지 왕룽의 장남은
잔치를 베풀고 그의 장인을 비롯해서 성안에 있는 저명 인사들을
빠짐없이 청했다. 그리고 수백 개의 계란을 붉게 물들여서
초대된 손님 전부와 선물을 보내 온 여러 사람들에게 인사치레로
보냈다. 축연은 한결 즐겁고 잔치는 온 집안에 기쁨을 주었다.
잔치가 끝나자 장남이 와서 왕룽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집도 3대가 됐으니 가문을 위해서 조상의 위패를
모십시다. 우리집도 이만하면 대갓집이 되었으니 오늘 같은
경사에는 조상에게 제사라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룽이 대단히 기뻐하며 승낙했기 때문에 대청에다 사당을
모시고 위패를 몇개 세웠다. 왕룽의 조부의 것 하나, 그의
아버지의 것 하나, 그리고 왕룽 자신이랑 장남의 이름도 사후엔
그렇게 적을 수 있도록 여유를 남겨 두었다. 장남은 향로를
사다가 차려 놓고 거기에 향을 가득 피웠다.
이 일이 끝나자 절간 부처님에게 붉은 옷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것이 생각나서 그 길로 절에 찾아가서 중에게 상당한 돈을
주었다. 그 절에서 돌아오는 도중 신은 마치 은혜를 주기 싫어서
선물 속에 가시를 숨겨 두는지, 밭에서 추수를 하고 있던 사나이
하나가 달려와 별안간 칭 서방이 위독하니 빨리 와 달라고
소식을 전했다.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는 사내의 말을 듣고
왕룽은 노발대발하며 말했다.
"내가 절에 가서 부처님에게만 새 옷을 바쳤더니 그 사당 지신
따위가 샘을 한 모양이구나. 까짓 것 이 들판에서나 세도를
부리지 삼신과 무슨 상관이 있다구 그런 짓을 해."
점심 준비가 다 되어 있었지만 그는 젓가락도 대지 않고
렌화가 시원한 저녁때나 가라고 권하는 것도 뿌리친 채 집을
나섰다. 렌화는 제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종을 시켜서
양산을 들고 따라가게 했다.
왕룽의 걸음걸이가 워낙 빨라 젊은 여종이 양산을 받쳐 들고
따라가기에는 힘에 겨웠다.
왕룽은 칭 서방이 누워 있는 방으로 황급히 들어서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어찌된 일이냐?"
방은 머슴들로 꽉 차 있었다. 그들은 경황 없이 말했다.
"손수 타작을 하다가...... 늙은 사람이니 그만 두도록
해도......"
"새로 들어온 머슴이 도리깨질을 잘못해서 칭 노인이
가르친다는 게 그만...... 늙은이는 안되는 일인데......"
왕룽은 분한 말투로 소리질렀다.
"그놈은 앞으로 꿇렷!" 그들은 왕룽 앞에 그 사내를 끌어냈다.
사나이는 정강이를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몸집이 크고 낯이
붉은 촌뜨기인데 뻐드렁니가 아랫입술에 퉁겨 나와 있고 황소
눈알처럼 눈망울이 둔한 멍청이였다. 떨고 있는 그 사나이를
향해 왕룽은 사정없이 뺨을 갈겼다. 그리고 여종이 가진 양산을
빼앗아 그의 머리를 마구 후려갈겼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노인이기 때문에 잘못하다간 그 노기가 말리는 사람 혈관으로
들어갈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사나이는 울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때 침대에 누워
있던 칭 서방이 신음 소리를 냈다. 왕룽은 양산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소리쳤다.
"이따위 멍청이를 데리고 있다간 칭 서방이 죽어 버리겠다."
그는 의자에 걸터앉아서 애처롭게 칭 서방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의 손은 말라서 마른 나뭇잎처럼 가벼웠다. 이 손에도
피가 흐르고 있을까 의심이 날 정도였다.
평소 같으면 칭 서방은 청황색이었는데 지금은 검은 빛이 돌고
핏기조차 없어 보였다. 겨우 뜨고 있는 눈에는 안개가 가리운 듯
아무 것도 안보이는 표정이었고 숨소리도 매우 가빴다.
왕룽은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왔어. 관은 우리 아버지가 쓴 것보다 더 좋은 걸로 해
주겠네."
그러나 칭 서방의 귀에는 피가 흘러내리고 설사 그 말이
들렸다 해도 대답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몹시 괴로운
듯 헐떡이더니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왕룽은 그의 몸에 엎드려서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보다도 더
슬프게 통곡했다. 그리고 훌륭한 관을 사오게 하고 중을 불러
염불을 드리도록 했다. 그 자신도 상복을 입고 상여 뒤를
따랐다. 그리고 친척이 죽었을 때와 같이 장남의 신에도 흰 띠를
감게 했다.
"칭 서방은 우리집 머슴이 아니에요? 머슴이 죽었는데 흰 띠를
감아요?"
장남이 투덜댔으나 왕룽은 사흘 동안 그렇게 하도록 했다.
왕룽의 생각엔 아버지와 아내를 묻은 가족 묘지에 칭 서방을
묻고 싶었으나 장남과 차남 모두 불평스레 반대하고 나섰다.
"어머니와 할아버지를 모신 자리에 같이 묻는다니요? 안
됩니다. 저희들도 머지않아 거기에 묻힐 텐데."
왕룽은 이치로서는 그렇고 또 나이가 들고부터는 집안의
시끄러운 일에 말려 들고 싶지 않아 칭 서방을 가족 묘지 입구
가까운 곳에 묻기로 했다. 그것으로 그는 자기를 위로하며
말했다.
"이젠 됐어. 칭 서방은 늘 우리 집을 돌봐 왔으니 죽어서도
그러겠지."
그는 아들들에게 자기가 죽거든 칭 서방 곁에 묻어 달라고
일렀다.
칭 서방이 죽고 난 뒤로부터 왕룽은 성 밖 땅을 둘러보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간혹 나갔을 때라도 칭 서방이 없기 때문에
적적한 생각만 들었다. 논둑길을 혼자서 걸을라치면 관절도
아프고 몸도 마음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제는
일하는 것도 지쳤다.
그래서 그는 약간의 토지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소작을
주었다. 그의 땅은 기름졌기 때문에 곧 처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조각 땅도 팔지는 않았다. 소작도 1년 계약으로
했다. 그의 땅은 언제나 그의 소유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처자
있는 머슴을 그 집에 있게 함으로써 아편에만 팔려 있는 삼촌
내외를 돌보게 했다.
그리고는 셋째 아들의 우울한 눈치를 살피며 이렇게 말하였다.
"자아, 너도 나와 함께 성안에 있는 집으로 가자. 딸아이도
데리고 가자. 내가 거처하는 곳이라면 그 애도 함께 있을 수
있지. 칭 서방이 죽고 나니 너도 섭섭할 게다. 그가 없으니 누가
저 애를 돌봐 주겠니. 누가 때리려고 해도 말려 줄 사람도 없을
테구, 밥 때가 되더라도 누구 한 사람 거들어 주지 않을 테구,
또 칭 서방이 없으면 네게 농사일을 가르쳐 줄 사람도 없지."
그래서 왕룽은 셋째와 천치 딸애를 데리고 성안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그 후로 그 토벽 시골집에는 오랫동안 거의 가지
않았다.
30
왕룽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었다. 양지쪽에 의자나
내놓고 천치 딸을 곁에 앉혀 두고 졸거나 담배를 태우면서
편안한 세월을 보내면 그것으로 족했다. 땅은 소작을 주었으니
수고를 안 들여도 돈은 저절로 들어올 것이다. 진작부터 이렇게
살 걸 그랬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만사는 그렇질 못했다. 장남은 모든 것이 무사하면
좀이 쑤셔 못 견디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장남은 아버지 앞에서
말했다.
"이 집에는 아직도 모자라는 것이 많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대갓집이라고 할 수 없어요. 이제 반 년 안으로 동생의 결혼식도
올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손님용 의자도 모자라고
찻잔이나 탁자, 방의 세간살이도 모자랍니다. 게다가 손님을
청하는데 더럽고 시끄러운 빈민들이 우글거리는 저 대문을
거치게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동생이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저 가운데 뜰도 필요할 겁니다."
왕룽은 화려하게 차리고 서서 이야기를 하는 아들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눈을 감으면서 담배를 한번 세게 빨고 나더니
신음하듯 말했다.
"그래, 그래서 어쩌겠다는 게냐."
장남은 아버지가 귀찮아 하는 것을 알면서도 도리어 언성을
높여 말했다.
"바깥 채도 다 사 버리자는 겁니다. 돈도 땅도 많이 있으니까
우리에게 어울리는 생활을 하자는 말씀이에요."
왕룽은 담뱃대를 보며 말했다.
"그으래...... 땅은 내 땅인데...... 너는 손도 대보지 않았을
텐데......"
이 말을 듣자 장남은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저를 선비로 만든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부잣집
아들로서 남부끄럽지 않게 살려는 아들을 아버지는 기껏 머슴과
같이 대하시는군요."
그리고 큰아들은 분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는지 뜰안
소나무에다 머리를 부딪치려고 했다. 아들이 원래 신경질적인
것을 알고 있는 왕룽은 행여나 다칠까 질겁을 하고 황급히
말했다.
"알았다. 네 맘대로 해라. 다만 나를 귀찮게 하지만 말아라."
이 말을 듣자 장남은 대단히 기뻤다. 그리고 아버지의 생각이
변하기 전에 얼른 그 앞을 물러 나와서 사고 싶은 것을 재빨리
사들이기로 했다. 아름다운 조각을 한 소주(蘇州)산 의자랑
탁자랑 방 입구에 드리울 비단 희장 및 크고 작은 꽃병, 벽에 걸
미인화, 족자 등등을 부지런히 사 모았다. 그리고 정원도 전날
남방에서 보고 온 것과 똑같이 화려하게 꾸몄다. 그런 일로
장남은 한동안 바빴다.
이러한 일을 하노라면 거의 매일 바깥쪽의 가운데 뜰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나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빈민들의 냄새가 코를 찔렀으므로 그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코를 막고 그 앞을 지나가곤 했는데 빈민들은
그가 지나가고 나면 비웃는 투로 자기네끼리 말했다.
"저놈은 제 아비 살던 집 문턱에 쌓였던 거름 냄새를 잊은
모양이야."
그런데 명절이 되면 집세가 정해지게 된다. 그해 명절 즈음에
빈민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방이며 가운데 뜰의 세가 껑충
뛰어오른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왕룽의 장남이 한 짓임을
누구나 알았다. 하기야 장남은 머리가 영리해서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않고 타관에 가 있는 황씨 아들과의 편지 왕래로
그렇게 결정 지은 것이다. 그는 누구에게 빌려 주든 돈만 많이
받으면 되는 것이니까 두 말 없이 승낙했다.
이렇게 해서 바깥 채에 살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은 쫓겨나고
말았다. 그 빈민들은 부자 사람의 횡포를 저주하며 어디 두고
보자고 이를 바락바락 갈면서 뿔뿔이 그곳을 흩어져 헤어졌다.
그러나 왕룽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안방에만 틀어박혀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자고
먹고 마시기만 하면서 만사를 장남에게 맡겼다. 장남은 솜씨
좋은 목수와 석공을 불러서 그 가난뱅이들이 살던 방과 뜰, 그
사이로 통하는 반월형의 가운데 문들을 수리하고 여러 곳에
연못을 파서 금붕어를 키웠다. 그런 일들이 만족할 만큼
아름답게 끝나자 이번에는 또 못에 연꽃과 수련을 심고 또
인도산의 붉은 열매가 달리는 대나무를 심는 등 그가 남방에서
본 것을 그대로 치장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구경하러 나올라치면 함께 뜰과 방안을
구경하고 아내가 혹 미흡하다고 말하면 그는 "참, 그렇지."
하면서 곧 그녀의 맘에 들도록 고쳤다. 마침내 왕룽의 장남이
이렇게 집을 치장하는 것이 성안 사람들의 큰 화제가 되었다.
그들은 황부잣집에 새 부자가 들어가더니 다 허물어진 그 집을
옛날의 화려했던 모양으로 다시 되살렸다고 수근거렸다. 그리고
왕룽을 왕 서방이라고 부르지 않고 왕 대인이라든가 왕
영감이라고들 높여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돈이 왕룽의
손에서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게 흘러나가고 있었다. 장남은 늘
돈을 타낼 때는 이렇게 말했다.
"은전 백 닢이 필요합니다."
"저 문간에 돈을 들이면 새 문처럼 깨끗하게 단장되겠습니다."
"저쪽에는 긴 탁자를 하나 놓아야겠어요."
그러면 왕룽은 방안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두 말 없이 필요한
돈을 꺼내 주는 것이다. 추수 때면 많은 돈이 들어오기 때문에
아낄 필요가 없었다. 얼마나 많은 돈을 장남에게 내어 주었는지
모른다. 왕룽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둘째 아들이 아직 해가 뜨기도 전에 나와서
말했다.
"아버지, 이렇게 돈을 물쓰듯 마구 쓰시면 어떻게 합니까?
집을 궁궐 같이 할 필요가 어딨어요. 그만한 돈을 2할로 빌려
주면 굉장히 큰 돈이 될 텐데...... 이까짓 연못, 열매도 달리지
않는 화초나무, 아무 쓸모 없는 수련을 심어서 무엇합니까."
왕룽은 둘째 아들과 장남이 이런 문제로 싸움이라도 나면
어떻게 할까 걱정이 돼서 둘째에게 달래듯 말했다.
"좋은 일 아니냐. 다 네 혼인 잔치를 성대히 하려고 그러는
게야."
그러나 둘째 아들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며 비웃는 투로
말했다.
"잔치 비용이 신부의 열 갑절이나 든다는 건 우스운 일인데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저희들이 나누어 가질 재산이 형의
허영심으로 탕진된다는 것은 참을 수 없어요."
왕룽은 둘째의 고집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좋아, 좋아...... 더 이상 돈은 안 줄 테야. 네 말이 옳다,
옳아."
둘재는 형이 쓴 돈을 빠짐없이 적은 종이를 꺼냈다. 왕룽은
둘째가 그것을 읽으려 하자 황급히 말했다.
"나는 아직 식사 전이다. 배가 고파 기운이 없구나. 그
이야기는 다른 날 하도록 하자."
왕룽은 둘째를 그곳에 둔 채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날 저녁 그는 장남을 불러서 말했다.
"이 집 치장은 그만해 둬라. 이만해도 됐어. 아무튼 우리들은
촌사람이니까."
그러자 장남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성안에선 우리 집을 왕 영감님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체면에 어울리는 집을 만들어야 합니다. 동생이
돈밖에 모른다면 저희 내외가 이 가문을 지키겠습니다."
왕룽은 나이가 많아지면서 찻집에 드나드는 것도 뜸해지고
곡물 가게도 둘째가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안에서 자기를 어떻게 평하고 있는지 몰랐던
왕룽은 한없이 그 말이 기쁘게 들렸다.
"그러냐. 그러나 부잣집이라 해도 땅에서 나와 거기에 뿌리를
박고 있으니까 그걸 알아야 돼."
"그러나 언제까지고 흙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가지도
뻗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왕룽은 아들이 글줄이나 좀 안다고 툭하면 아는 체하는 것이
싫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땅속 깊이 뿌리를
박고 있어야 해."
해가 저물면 왕룽은 그의 방앞 뜰에서 황혼의 정적을
즐겼으므로 그만 아들이 제 방으로 돌아갔으면 했다. 그러나
아들은 나가지 않고 또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렇다치고 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왕룽은 들고 있던 담뱃대를 내던지며 화를 버럭 냈다.
"또 귀찮게 굴 테냐?"
젊은이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제 문제가 아닙니다. 동생의 문제입니다. 그 애를 공부시키지
않고 그냥 버려둘 수 없잖아요. 공부를 시켜야 해요."
왕룽은 처음 듣는 일이라 속으로 놀랐다. 그는 오래 전부터
막내를 무엇에 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는 글 많이 아는 놈 필요 없어. 둘이면 충분해.
막내놈은 내가 죽고 난 뒤에야 농사일을 맡을 테니까."
"그러시니까 그 애는 밤낮 울기만 해요. 얼굴도 창백하고
저렇게 몸이 말라 있지 않습니까."
왕룽은 세 아들 중에 하나만은 농사를 시킬 작정이었다.
막내에게 의향을 물어 보지도 않았는데 지금 이렇게 장남의 말을
듣고 보니 불의에 이마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왕룽은 땅바닥에 팽개쳤던 담뱃대를 천천히 주우면서 막내
아들에 대해 생각했다. 과연 그 아이는 다른 아들과 달랐다. 제
어미를 닮아서 언제나 말이 없고 표정도 없어 도무지 속에
무엇을 품고 사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 그 애가 공부하겠다고 하더냐?"
왕룽은 맥 없이 물었다.
"직접 물어 보십시오."
"그것도 그렇지만 한 녀석만은 농사를 지어야 해."
"그건 왜 그렇지요? 농사를 안 지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잖아요. 체면상도 좋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욕해요.
자신은 임금 같은 생활을 하면서 자식은 농사꾼을
만든다고......"
장남은 아버지가 세상 평판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말꼬투리를 이렇게 잡았다.
"가정 교사를 들여서 글을 가르치세요. 그리고 남방 학교에
보내서 훌륭히 공부 시킵시다. 집안 일은 제가 하고 장사는
둘째가 하고 있으니까 그 애는 제 생각대로 하게 합시다."
왕룽은 겨우 입을 열더니 그 애를 불러오도록 했다.
잠시 후 셋째 아들이 아버지 앞에 섰다. 지금껏 무관심했던
왕룽은 막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꼭 다문
입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닮지 않았다. 묵묵히 말이 없고 정직해
보이는 얼굴만이 자기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았다. 그러나 잘난
것으로 말하자면 시집 보낸 막내딸을 빼놓고는 그의 아들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이다. 구태여 흠을 잡는다면 창백한 이마에 숱이
많은 눈썹이 앳된 얼굴에 비해 너무 굵은 것이 탈이었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리면 검은 두 개의 눈썹이 한데 달라붙어서 일직선이
되는 것이다.
왕룽은 물끄러미 막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글을 배워야 한다고 네 형이 말하는데......"
막내 아들은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왕룽은 담뱃대의 재를 털고 새 담배를 재우며 천천히 슬픈
어조를 띠며 말했다.
"음, 그래. 농사일이 싫단 말이지. 지식인은 많아도 농사할
사람이 없단 말이다."
막내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름 두루마기를 입은
막내 아들은 잠자코 서 있기만 했다. 너무나 오래 말이 없자
왕룽은 신경질이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말을 못해? 농사일이 싫단 말이냐?"
아들은 단 한마디로 "네." 하고 대답했다. 왕룽은 여러 가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해도 자식들이 내 맘대로 안 되는군. 아이들이 늙은
아버지를 걱정만 시킨다. 이런 무거운 짐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무튼 왕룽은 자식들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다시 그는 화를 버럭 내어 소리 질렀다.
"네가 어떻게 되든 나는 모르겠다. 보기도 싫으니 나가 버려."
아들은 얼른 아버지 앞을 떠났다. 혼자 남게 된 왕룽은 두
딸이 아들보다 낫다고 생각되었다. 두 딸 중에 하나는 천치라서
먹을 것과 헝겊 조각만 주면 언제나 만족하고, 하나는 시집
보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이윽고 황혼이 짙어 가고 어둠이 그의 몸을 에워쌌다. 왕룽의
노여움도 어느덧 사라지고 결국 아들들이 생각한 대로 해 주기로
마음이 돌아앉았다.
그는 장남을 불러 이렇게 일렀다.
"그 애에게 가정 교사를 불러 줘라. 제 마음대로 하게 해.
나에게 귀찮게만 하지 말아다오."
그리고 왕룽은 다시 둘째를 불렀다.
"들일을 할 자식이 없어졌으니 소작료나 추수 때 논밭에서
들어오는 돈은 네가 관리하도록 해라. 너는 저울도 볼 줄 알고
말질도 잘 알테니 집의 관리인이 돼 다오."
둘째 아들은 몹시 기뻤다. 지금부터 모든 금전은 그의 손을
거쳐야만 유통이 가능한 것이다. 어느 정도의 수입이
들어오는가도 알 수 있고 또 집안에 쓰이는 돈이 필요 이상으로
나가게 된다면 아버지에게 보고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왕룽이 어느 아들보다도 이상히 여긴 것은 이 둘째 아들의
성격이다. 그 자신의 잔칫날이 가까와 오자 자기 자신의
일인데도 결혼 비용을 지극히 아꼈다. 음식까지 구별해서 성안
사람들에게는 좋은 음식을 내고 소작인이라든가 성 밖 사람에겐
따로 식탁을 차려 맛 없는 음식만 내놓게 했다. 성 밖 사람들은
늘 못 먹고 못 살기 때문에 조금 나은 음식이기만 해도 대단한
음식인 줄 생각한다는 것이다. 또 축하 선물 같은 것도 면밀한
계획을 세워 머슴과 종들에게는 선물을 아주 약소한 것으로
했다. 그는 뚜챈에게도 겨우 은전 두 닢을 주었을 뿐이다.
그녀는 비웃으며 많은 사람이 있는 앞에서 들으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진짜 대갓집은 돈을 가지고 인색하지 않는 법이죠. 이
댁에서, 이 저택에서 살 만한 자격이 있다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군요."
형은 이 말을 듣자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 그 소문이 퍼질까
두려워 그녀에게 슬그머니 돈을 집어 주고 대신 동생의 처사에
분개했다. 이렇게 하여 신부가 가마 타고 문안에 들어오고
손님들이 모여드는 잔칫날도 장남과 둘째는 보이지 않게 서로
다투게 됐다.
또 장남은 동생이 인색한 것이 창피하기도 하고 또 제수가 촌
여자라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이날 잔치에 신분 있는 성안
친구들은 청하지도 않았다. 그를 경멸하며 방관만 하였다.
'아버지의 지체로 생각한다면 구슬잔이 손에 들어올 것인데
동생은 기왓장을 골랐으니......'
동생 내외가 손위에 대한 예의로 그들 부부에게 큰절을 했을
때에도 그는 무뚝뚝하게 약간 머리만 끄덕였을 뿐이다. 장남의
아내도 새침맞고 건방지게 이런 경우에 형식적으로 꼭 필요한
답례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왕룽의 손자 말고는
아주 평화롭고 아무 부족이 없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왕룽 자신까지도 렌화의 방과 뜰이 잇달아 있는 자기의 큰
조각이 있는 침대에서 눈을 뜨면 때로는 그 소박하고 어둠침침한
흙벽집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거기에서는 식은 차를 어디에
버려도 조각이 있는 세간을 더럽힐 염려가 없었고 한 발자국만
밖으로 나가면 자기의 밭인 것이다. 왕룽의 아들들은 한 사람도
마음 편한 사람이 없었다. 장남은 돈 쓰는데 인색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욕이나 먹지 않을까 봐 늘 걱정이었고 또 성안에
귀한 손님이 와 있을 때는 마을 사람이 대문을 들어서다가
창피나 당하지 않을까 마음을 졸였다. 둘째는 이와 반대로 돈을
헤프게 쓰지 않나 근심이었다. 셋째는 농가의 자식으로 허송
세월을 보냈던 시간을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다만 아무 걱정 없이 아장거리고 집안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왕룽의 손자 뿐이다. 이 어린것은 이 집 말고는 문밖을 모른다.
그놈은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자기만을 귀엽게
여긴다는 것을 알 뿐이다.
왕룽도 손자와 놀고 있을 때는 마음이 평화롭다. 손자를
바라보거나 웃거나 넘어지는 것을 붙들어 일으키고 있을라치면
세월 가는 줄 모른다. 그리고 왕룽은 그의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긴 띠로 손자를 묶어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도 했다. 손자는 연못
속에 물고기를 아주 신기한 듯이 흥미롭게 가리키기도 하며 뜰의
꽃들을 함부로 꺾기도 하고 무엇이든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했다.
이렇게 왕룽은 그의 손자에게만 위안을 얻었다.
손자는 이 아이 하나 뿐이 아니었다. 맏며느리는 꼬박꼬박
규칙적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아이를 낳을 때마다 유모를
구해 들였다. 해마다 손자와 유모가 늘어갔다. 누가 "큰아드님
방에 또 하나 태어났다." 하고 말하면 왕룽은 그저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응, 얼마든지 낳아라. 먹고 살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둘째 며느리가 아이를 낳았을 때도 왕룽은 기뻤다. 처음은
딸이었는데 그것은 마치 맏동서에 대한 체면을 세운 것처럼
되었다. 이렇게 하여 왕룽은 5년 동안에 사내애 넷에 계집애
셋을 가지게 되었다. 뜰에는 아이들의 웃는 소리와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시끄러웠다.
5년이란 세월은 어린애나 노인 아닌 사람들에게는 잠깐이었다.
왕룽은 이 사이에 손자 일곱을 얻고 늙은 몽상가인 삼촌
내외에게는 먹이고 입히고 아편을 달라는 대로 주기는 했지만
실은 삼촌의 일은 거의 잊고 지냈다.
왕룽의 가족이 성안으로 이사온 지 5년째 되던 겨울은 30년
이래 처음 찾아온 강추위였다. 성벽 주위의 해자가 얼어붙어서
그 위를 사람들이 걸어서 왕래할 수 있다는 것은 왕룽의
기억으론 처음이었다. 얼음과도 같은 한풍이 북동쪽에서 쉴 새
없이 휘몰아쳐 양털이며 모피 옷을 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다. 집안의 모든 방에 숯불을 피웠지만 그래도 입김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방안은 냉기가 돌았다.
삼촌 내외는 오래 전부터 아편으로 몸이 마를대로 말라
있었다. 마치 마른 나무토막처럼 밤낮 침대 위에 누워만 있었다.
몸뚱이에 온기라곤 조금도 없었다. 왕룽은 삼촌이 두 번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며 몸을 움직이면 피를
토한다는 말을 듣고 문병을 갔다. 삼촌은 몇 시간밖에 숨이 남아
있지 않았다. 왕룽은 그리 좋지 않은, 그러나 쓸 만한 관을 두
개 사다 삼촌 내외가 누워 있는 방안에 들여다 놓았다. 사후의
염려일랑 말고 안심하라는 표적이었다. 삼촌은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고, 맙, 구, 나. 네가 진정 내 자식이로구나. 어디를
돌아다니는지 모르는 내 친자식보다 훨씬 나아."
그러자 숙모가 말했다. 숙모는 아직도 생기가 있어 보였다.
"우리가 죽은 뒤라도 그 애가 돌아오거든 장가를 들여 다오.
그렇게 해야 우리 집의 손이 끊어지지 않아."
왕룽은 그렇게 하겠다고 삼촌 내외에개 약속했다.
그는 삼촌이 어느 시각에 운명했는지 몰랐다. 어느 날 저녁 때
하녀가 마실 것을 들고 방에 들어가 보니 이미 삼촌이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바람이 온누리에 눈을 구름처럼 흩날리게 하던 몹시도 추운 날
왕룽은 삼촌의 관을 묻었다. 가족 묘지 중에서 옆의 아버지
묘보다는 좀 낮게 자기 것으로 예정하고 있는 곳보다는 위에
묻었다.
그리고 왕룽은 그의 온 가족에게 1년 동안 상복을 입도록
명했다. 그것은 그들을 괴롭게 하던 늙은이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이 아니고 체면상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촌이 죽고 난 뒤 왕룽은 숙모를 그대로 혼자 둘 수
없었으므로 성안의 집으로 옮기게 했다. 그는 뜰에서 멀리
떨어진 단칸 방에 숙모를 누워 있게 하고 뚜챈을 시켜 시종 한
사람이 붙어 있도록 하였다. 숙모는 극히 만족하고 밤낮 아편을
빨며 누워만 있었다. 침대 곁 그녀의 눈앞에 관이 놓여 있는
것은 그녀에게는 무한한 위안을 주었다. 왕룽은 그렇게 비대한
몸집과 혈색 좋은 살빛을 하고 큰 소리만 지르던 숙모가
무섭게만 생각되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지금 그 여위고 깡마른
북어처럼 고요히 누워 있는 것을 이상스러워 했다. 마치 몰락해
버린 황부잣집 마나님의 운명같이 여겨졌다.
31
왕룽은 지금것 긴 생애를 살아오며 이곳저곳의 전쟁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젊었을 때 남쪽 도시에서 겨울을 보냈던 때
말고는 직접 전쟁을 겪어 본 일이 없었다. 아이 때부터 올해는
서쪽에 전쟁이 있다든가 전쟁이 동쪽이다, 북동쪽이라든가 하는
소문은 늘 듣고 있었지만 그때보다 더 몸 가까이 겪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게 있어 전젱이라는 것은 하늘이나 땅 혹은 물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왜 그런 것이 발생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무튼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세상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자고
하는 말도 흔히 들었다. 그런 말은 먹고 살길이 없어서 빌어
먹는 일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그의 사촌처럼
집안에서 살 재미가 없으니까 병정에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원인이야 어떻게 됐든 전쟁은 항상 알 수 없는
먼곳에서만 일어났다. 그런 전쟁이 하늘에서 부는 때 없는
바람처럼 갑자기 그의 가까이에서 일어났다. 왕룽이 전쟁
이야기를 들은 것은 상점에서 점심을 먹으로 돌아온
둘째로부터였다.
"곡가가 갑자기 뛰었어요. 남쪽의 전쟁이 차츰 이리로 가까이
올라오는 모양이에요. 군대가 가까이 올수록 곡가가 올라가니까
당분간은 곡물을 팔지 말아야겠어요. 조금만 있으면 많이 오를
테니까요......"
왕룽은 밥을 먹으면서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음, 그래. 괴이한 일이로구나. 난 평생에 말만 들었지 한
번도 전쟁 구경을 해 본 적이 없다."
왕룽은 지난날 남방에서 전쟁에 붙들려 갈 뻔했던 일을
회상했다. 지금의 그는 늙어서 붙들려 갈 염려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또 그는 부자이기도 하다. 부자는 무슨 일에도 겁낼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전쟁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 관심 없이 도리어
호기심이 일어날 뿐이다.
"곡식 처리는 네 마음대로 하렴. 네게 맡겨 둔 거니......"
그 후 왕룽은 마음 내키는 대로 손자와 놀고만 지냈다. 눕다가
먹다가 담배를 피우는 등 때로는 뜰의 양지쪽에서 놀고 있는
천치를 보기도 하며 평화롭게 하루 해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둠도 걷힌 어느 맑은 아침, 서북방에서
갑자기 벌떼처럼 수많은 군대가 몰려왔다. 왕룽의 손자가 머슴과
함께 문 앞에 나서서 거리 구경을 하다가 회색 군복을 입은 긴
군대 행렬이 들이닥치자 황급히 달려와서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할아버지 저것 봐."
그는 손자와 함께 문밖으로 나갔다. 군대는 거리가 비좁을
만큼 들끓었다.
우렁찬 군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왕룽은 한동안
얼떨떨했다. 자세히 보니 모두가 묘한 무기 끝에 칼을 달아
가지고 메고 있었다. 병정들은 하나같이 야수처럼 무서운
표정들이었다. 어떤 군인은 아직 어린애 같으면서도 역시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룽은 황급히 손자를 끌어 안으며 말했다.
"얼른 들어가서 문을 걸자. 저 사람들을 보면 못써, 아가야."
왕룽이 채 돌아서기도 전에 그 많은 군대 가운데서 그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저 사람은 사촌 형님이 아닌가."
이 소리를 듣고 있던 왕룽이 그쪽을 보니 그것은 삼촌의
아들이었다. 그도 똑같은 먼지투성이의 때묻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다른 누구보다도 야만스럽고 흉측해 보였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동료들에게 말했다.
"자, 전우들 여기서 묵게. 이 집은 부자고 내 친척이야."
왕룽은 그만 질겁을 하고 한동안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수많은
군인들이 물밀 듯이 그의 집안으로 쏟아졌다. 그는 그들 속에
휩싸여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군인들이 넘치는 봇물처럼 앞 뜰의
어느 구석 할 것 없이 밀려 들었다. 어떤 자는 마루에 벌렁
드러눕기도 하고 어떤 자는 연못의 물을 손으로 움켜 마시기도
했다. 그리고 화려하게 조각된 탁자 위에다 함부로 총을
내던지기도 하고 아무 곳에나 침을 칵칵 내뱉고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이 모습에 기가 질려 정신이 나간 왕룽은 손자를
끌고 장남의 방으로 들어갔다. 장남은 책을 읽다가 그의
아버지가 들어오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남도
허겁지겁하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어쩔 줄 몰랐다. 그저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뒤에 있는 아버지에게 신음하듯이 말했다.
"다들 총을 가졌군."
그는 은근한 태도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오셨습니다."
오촌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웃었다.
"병사들을 데리고 왔지."
"아저씨 친구분이시라면 반가운 일이지요. 곧 식사 준비를
하지요. 앞길이 바쁘실 텐데......"
오촌은 여전히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음, 그렇게 바삐 서두를 건 없어. 우리들은 전투가 시작될
때까지 여기서 머무르게 되니까 대엿새가 될지 한 달이 될지, 혹
2년이 될지 모르지만 한동안 신세를 져야겠구먼."
이 말에 왕룽 부자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총칼이 번쩍이는 것이다. 싫은 얼굴을 보여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장남은 억지로 웃음을 띠어 가며 간신히
야릇한 표정을 지어서 말했다.
"좋습니다. 편하실 대로 하세요."
장남은 접대 준비를 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처럼 살며시
아버지의 손을 잡아 끌며 부리나케 안채로 들어와 빗장을 굳게
닫았다. 그들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어쩔 줄을 몰라 한동안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 둘째가 쫓아와서 문을 두들겼다.
문을 열자 넘어질 듯 황급히 들어선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집집마다 가난뱅이 집까지도 군인이 꽉 차 있어요.
거절했다가는 큰일나겠어요. 저는 그 말을 하러 돌아왔어요.
왜냐하면 오늘 우리 상점 점원으로 나도 잘 아는 사람이 ---
매일 책상을 맞대고 있는 그 사람이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가
보니 아내가 병으로 누워 있는 그 방에까지 군인이 들이 닥쳐서
몇 마디 퍼부었더니 그놈들은 마치 산적꽂이를 꿰듯 그 사람을
칼로 찔러 버렸대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쿡 찔러 죽였대요.
등까지 꿰뚫렸다는군요. 놈들이 달라는 것은 뭐든지 주는 것이
좋겠어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전쟁이 딴 곳으로 옮겨지기를
빌 수밖에 없어요."
세 사람은 침통한 얼굴로 서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 사람은
이 혈기 왕성하고 굶주린 사나운 병정들로부터 어떻게 여자들을
보호할 것이냐가 근심스러웠다. 장남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
예쁘고 현숙한 아내를 염려했다.
"여자들은 제일 뒷방으로 옮겨 있도록 해서 밤낮 지키기로
하고 앞 문은 꼭 닫아 두고 뒷문으로 언제나 달아날 수 있도록
해야겠어."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지금까지 렌화가 뚜챈과 하녀만
데리고 살고 있던 안채에 하녀와 아이들을 전부 몰아넣고
불편이나 혼잡을 참게 했다. 그리고 장남은 낮이나 밤이나
이들을 지켰다. 둘째도 형편 대로 집에 돌아와서 아녀자들을
지켰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왕룽의 사촌 동생은 친척이기
때문에 출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당당히 두들겨 열게 하곤
번쩍거리는 칼을 뽑아 들고는 아무 데나 휘젓고 다니는 것이다.
그럴 때면 장남은 조심스레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울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번쩍거리는 칼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내장부터 끓어오르는 화를 꾹 참았다. 오촌은 여자들을 하나하나
둘러 보고 비평을 했다.
장남의 아내를 보곤 야비하게 웃으며 말했다.
"새침하고 기품 있는 여자로구나. 성안의 여자로군. 연꽃
봉오리같이 작은 발을 갖고 있군."
그리고 둘째의 아내에게 하는 말은 이러했다.
"이 색시는 시골 태생의 소담한 홍당무로군. 억센 붉은
고기야."
둘째 아들의 아내는 뼈대가 굵고 몸이 비둔했다. 그러나
혈색이 좋은 얼굴이어서 결코 밉상은 아니었다. 장남의 아내는
얼굴이 마주치기만 하면 질겁을 하고 소매로 얼굴을 감추지만
둘째의 아내는 그렇지 않고 활발하게 웃으면서 말대꾸를 한다.
"뜨거운 홍당무나 붉은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걸요."
오촌은 냉큼 그 말을 받았다.
"음, 나도 좋아하지."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는 시늉을 했다. 장남은 말을
건네서는 안되는 남녀간의 이 도리에 어긋난 수작을 보는 것이
수치스러워 못 견딜 지경이었다. 자기보다 훨씬 지체 있게
자라온 아내 앞에서 오촌과 제수의 추태를 보이는 것이 역겨워
아내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오촌은 그런 눈치를 알자 심술궂게
말했다.
"그렇지. 나는 저런 쌀쌀맞고 멋도 없는 생선보다는 언제나
붉은 고기가 먹고 싶어."
이 말을 듣자 장남의 아내는 새침하게 일어나 구석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촌은 조심성 없이 웃어 젖히며 이번에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렌화에게 말을 걸었다.
"성안에서 자란 여자는 참 융통성이 없어요. 그렇잖습니까,
마님?"
그는 물끄러미 렌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진짜로 마님이십니다. 이렇게 고깃덩이가 된 부인을 보니
종형이 부자라는 것이 실감나는 군요. 얼마나 먹었으면 이렇게
커다란 고깃덩이가 될까. 부잣집 마님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당당한 풍채를 지닐 수 없을 테니까요."
렌화는 마님이라고 불린 것이 매우 기뻤다. 이 호칭은 큰
부잣집의 큰마누라에게만 쓰는 존칭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살찐
목구멍을 울리면서 웃었다. 담뱃대의 재를 털어서 종에게 새로이
담배를 재우게 하곤 뚜챈에게 말했다.
"이 실없는 친구가 농담을 하는군."
그리고 사촌 동생에게 은근한 추파를 던졌다. 그러나 렌화는
그 옛날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매혹할
아무런 힘도 없었으나 그래도 오촌은 그 모습을 보고 큰 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나이 많아도 여전한데요."
그는 또 한번 소리내어 웃었다. 그동안 왕룽의 장남은
시무룩한 얼굴로 묵묵히 서 있었다. 이윽고 왕룽의 사촌은 자기
어머니를 보러 가겠다고 했다. 왕룽은 그를 숙모의 방으로
안내했다. 숙모는 아들이 들어와도 눈을 뜨지 않을 정도로 침대
위에서 잠만 자고 있었다. 아들은 그의 어머니 침대 머리를
총부리로 쿵쿵 울렸다. 겨우 눈을 뜬 그의 어머니는 꿈결인 양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들은 참을 수 없는 듯이 소리를
높여가며 말했다.
"제가 왔는데 언제까지 잠만 잡니까?"
그녀는 겨우 몸을 일으켜 다시 한 번 아들을 보고는 이상한
듯이 말했다.
"아들이라니...... 이것이 아들......"
그녀는 한동안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양 아편대를 아들에게 권하는 것이었다. 그밖엔 아들을
반길 방법이 없는 것으로 생각함인지 몸종에게 천천히 말했다.
"아편을 넣어 드려라."
그러나 아들은 그녀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더니 맥없이
말했다.
"아니, 난 싫소."
왕룽은 침대 곁에 서 있다가 사촌이 "왜 우리 어머니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나무라지나 않을까 해서 겁먹은 목소리로,
"너무 아편이 심하신데...... 날마다 은전이 한 움큼씩이나
들지. 그러나 나이 많으신 분에게 거역할 수도 없고, 자꾸만
청하시니......"
왕룽은 일부러 탄식을 하곤 힐끗 사촌의 눈치를 살폈다.
사촌은 아무 대꾸도 없이 너무나 달라진 처참한 어머니의 모습만
바라보고 있다가 그의 어머니가 다시 눕고 잠이 들어 버리자
일어서서 총을 지팡이처럼 흔들면서 나와 버렸다.
왕룽의 가족들이 집안에 아무렇게나 진을 치고 있는 그 많은
병정들보다도 가장 미워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은 이 사촌
동생이었다. 물론 다른 병정들도 난폭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정원수의 가지들을 함부로 자르기도 하고 화초를 마음대로
꺾으며 그 흉한 신발로 곱게 조각한 의자에 흠을 내기도 하고
금붕어를 기르는 곳에 더러운 것을 자꾸만 넣어서 죽은 붕어가
물에 떠다녀 썩곤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약과였다. 왕룽의
사촌 동생이 가장 큰 골칫덩어리였다.
그는 마음대로 안채를 드나들면서 계집종들을 못살게 굴었다.
왕룽 부자는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어 눈이 멍하게 되었으며
서로 어이가 없듯이 바라보기만 했다.
보다 못한 뚜챈이 의견을 말했다.
"별 도리 없어요. 그 사람이 여기에 머무르는 동안 그 사람
마음에 드는 종을 한 사람 안겨 주는 것이 좋겠어요. 그렇지
않고는 엉뚱한 사람이 피해를 입을지 모르니......"
이제 이 이상은 귀찮은 일을 감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아
왕룽은 뚜챈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게 좋겠군."
그는 뚜챈을 사촌 동생에게 보내서 그가 본 계집종 중에서
누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가를 물어 오게 했다. 뚜챈이 돌아와서
대답했다.
"마님 침대 곁에서 시중드는 얼굴이 희고 조그만 계집애가
좋대요."
사촌이 선택한 종은 리화(梨花)라고 하는, 흉년이 들던 해에
작고 가련한 모습으로 거의 죽어가는 것을 렌화의 간절한 청으로
왕룽이 산 아이였다. 가족들이 모두 불쌍하다고 가엾게 여기고
뚜챈의 하는 일을 거들게 하고 렌화의 담배 심부름이나 차
심부름 등 힘이 안 드는 일만 시켜왔던 것이다. 뚜챈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마침 온 가족이 안채에 모여 있을 때였다.
리화는 렌화의 차를 따르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자 그만
주전자를 떨어뜨리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온 방바닥에
찻물이 흥건했으나 리화는 정신 없이 렌화 앞에 엎드려
울부짖으면서 애원했다.
"마님, 살려 주세요, 저는 그 사람이 무서워요. 나는
죽어도......"
렌화는 못마땅한 듯이 성을 발끈 내며 소리질렀다.
"그도 남자다. 남자는 다 마찬가진데 뭘 그래."
그리고 뚜챈을 돌아다보고 말했다.
"이 애를 그 사람에게 데려다 줘라."
리화는 양손을 꽉 쥐고 죽을 듯이, 갈대처럼 호리호리한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울다가는 여러 사람들에게 호소하듯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아내 되는 렌화에게 거역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내들도 남편들이 아무 말도
없었으므로 따지고 들어서 이러니 저러니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셋째도 팔짱을 끼고 그 검은 눈썹을 한일자로
찡그리곤 역시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이들 가족이나 종들은
모두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방안에는 리화의 떨리는 울음
소리만이 가득했다. 왕룽은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계집애를 바라보았다.
렌화의 마음을 거슬르게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계집애도 불쌍했다. 그는 본래 마음씨가 여린지라 이 사실을 안
리화는 그만 왕룽의 앞에 엎드려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우는 가엾은 모습을 보자니 그
사촌 동생의 그 억센 몸집이라든가 벌써 중년이 된 그의 나이가
떠올랐다.
그는 뚜챈을 보며 인자하게 말했다.
"글쎄, 이 어린 것을 억지로 보낼 필요는 없는데......"
왕룽의 말은 지극히 부드러웠지만 렌화는 팩 쏘았다.
"시키는 대로 해라. 여자란 누구나 한 번씩 있는 일을 가지고
왜 그래. 왜 울고불고 이 야단이냐, 야단이......"
그러나 왕룽은 인정이 많고 인자했다. 그는 렌화에게 다시
말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다른 종을
사 줘도 좋고 뭐든지 원하는 것을 사 주겠어. 다만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하지."
전부터 괘종 시계와 루비 반지가 갖고 싶었던 렌화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왕룽은 뚜챈에게 말했다.
"그 녀석한테 가서 그 애는 나쁜 병을 갖고 있다고 해라.
그래도 좋다면 보내겠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무서우면
튼튼한 계집을 주겠다고 말해 보아라."
왕룽은 곁에 있는 계집종들을 둘러보았다. 누구나 부끄러운
듯이 외면을 하면서도 킥킥 웃는다. 그중에 나이 스물이 넘은
듯한 계집 하나가 얼굴을 붉히고 웃으면서 말했다.
"저라도 좋다면...... 그 사람보다 훨씬 우락부락한 사람도
있으니까......"
왕룽은 안심이 되었다.
"그래 네가 가 줘."
뚜챈은 재빨리 그 계집에게 일러 주었다.
"내 뒤에 꼭 붙어 오너라. 어쨌든 그 사람은 여자면 우선
해치우고 보니까."
그리고 두 사람은 방을 나갔다. 그러나 울음을 그친 리화는
아직도 왕룽의 발목에 붙어 앉아서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왕룽은 조용히 리화를 끌어 일으켰다. 리화는 부스스 일어나
고개를 숙인 채 인자한 주인 앞에 섰다. 왕룽은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이 타원형으로 예쁘고 불그스레한 입술을 가진 귀여운
얼굴인 것을 발견했다. 그는 친절하게 말했다.
"마님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2,3 일 동안 곁에 가지 말아라.
그리고 그 녀석의 눈에 안뜨이도록 숨어 있어. 언제 그 녀석이
들어와 너를 달라고 할지 모르니까......"
리화는 정열이 가득 찬 눈으로 왕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림자처럼 고요히 물러갔다. 사촌 동생은 달반 가량 이곳에서
지내며 생각이 날 때마다 시골 여종과 함께 지냈다. 그녀는 그의
아이를 배고 그 말을 온 집안에 퍼뜨리며 다녔다. 그 때 별안간
전쟁이 시작되어 병사들은 겨가 바람에 흩날리듯 갑자기 떠났다.
뒤에 남은 것은 오물과 그들이 저지른 파괴의 흔적 뿐이었다.
사촌 동생은 허리에 칼을 차고 총을 어깨에 메고 집안 사람들
앞에 서서 빈정대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두번 다시 돌아 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대신 나의
후손을, 어머니의 손자를 남기고 간다. 한 달이나 두 달 묵은
곳에다 아이를 남기고 간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그것이 군인 생활의 장점이지. 뿌린 씨가 뒤에서 싹이
트면 남이 길러 주는 거야!"
그리고 모두에게 코웃음을 안겨 주고 동료들과 함께 떠나
버렸다.
32
병사가 떠나간 후 왕릉과 그의 장남, 둘재 세 사람은 오랜만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것은 쑥밭이 되다시피한 집안을
깨끗하게 수리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목수와 미장이들을
불렀다. 머슴들을 시켜 뜰을 말끔히 청소하도록 시키고
목수에게는 깨진 의자랑 탁자를 잘 수리하도록 했다. 연못 물을
갈아 넣고 새로 사 온 금붕어를 넣었다. 그리고 정원수도 새로
심고 살아 있는 나무들의 가지도 모양 좋게 전정(剪定)을 해서
1년쯤 되자 집안은 예전과 같이 화려한 모습을 되찾았다. 꽃도
아름답게 피어나고 식구들도 예전과 같이 모두 자기 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왕룽은 사촌 동생과 지내던 계집종에게 숙모의
뒷바라지를 하게 했다. 그녀의 목숨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죽고 난 뒤의 처리는 그 계집애에게 시킬 작정이었다.
더욱 안심인 것은 그 계집종이 낳은 애가 다행히도 계집애였다.
만약 그 애가 사내였더라면 그 계집종의 콧대가 좀 세어졌을지도
모를 일인데 계집애라서 한갓 종년이 낳은 것밖에 되지 않아
지금까지의 그녀 신분에는 변함이 없었다. 왕룽은 누구에
대해서도 정당하게 처리하는 것처럼 그녀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숙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녀가 원한다면
숙모의 방과 침대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60개나 되는 방이니까
한 개쯤 주어도 섭섭할 것이 없었다. 왕룽은 또 약간의 돈도
그녀에게 주었다. 계집종은 오직 한 가지만 제외하면 충분히
만족했다. 왕룽은 돈을 주었을 때 계집종은 그 한 가지를
말했다.
"그 돈은 저의 결혼 지참금으로 줄 수 있도록 맡아 주십시오.
그리고 만일 귀찮지만 않으시다면 농군이나 마음씨 좋은 가난한
사람에게라도 시집을 보내 주세요. 부탁입니다. 사내를 알고
나니 혼자서는 도저히 허전해서 못 살겠습니다."
왕룽은 가볍게 승낙했다. 그리고 그것을 승낙했을 때 이런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이 계집애를 가난한 사람에게 시집
보낼 약속을 했다. 그러한 나도 전에는 가난한 사내로서
여편네를 얻으려고 이 집에 들어온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
반생 동안 그는 오란의 일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 생각을 하자 비통하다기보다 마음이 무거운 아련한 애수를
느꼈다. 어느덧 오란과의 일은 먼 옛날 일로써 지금은 너무나도
그녀와 떨어져 버렸다. 그는 우울하게 말했다.
"저 아편을 빨고 있는 늙은이가 돌아가시면 서방을 구해 주지.
이젠 오래 살 목숨도 아니니까."
그리고 왕룽은 약속한 대로 실행했다. 어느 날 아침 계집이
와서 말했다.
"이젠 약속한 대로 해 주세요. 할머니는 오늘 새벽에
돌아가셔서 관에 잘 모셨습니다."
왕룽은 자기 논밭에서 일하고 있는 사내 중에서 누구 적당한
사람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칭 서방을 죽게 만든 그 젊은이를
생각해 냈다. 뼈드렁니의 그 녀석 말이다. 그는 말했다.
"그렇지, 그 사람이 좋겠군. 그때 일만 해도 녀석이 그러자고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선량한
사람이지. 나는 지금 그 녀석밖에 생각나지 않는구나."
왕룽은 곧 그 젊은 사람을 부르러 보냈다. 왕룽 앞에 선 그는
훌륭한 어른이 다 돼 있었지만 여전히 뻐드렁니였다. 왕룽은
야릇한 기분으로 대청 마루의 큰 의자에 앉아서 두 사람을 앞에
불렀다. 이 이상한 돌고 도는 세상의 쾌감을 마음껏 누리면서
말했다.
"자, 들어 봐라. 이 여자 말인데 네가 좋다면 아내로 맞아도
좋다. 내 사촌 동생 말고는 아무도 이 여자를 모른다."
뻐드렁니가 좋아했다. 그녀는 튼튼한 시골 태생에다 마음씨
곱고 더구나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이런 여자가 아니고서는
결혼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두 사람이 그의 앞을 물러간 뒤 의자에서 내려온 왕룽은
이것으로써 그의 생애가 한바퀴 돈 듯했다. 그는 평생에 해
보고야 말겠다는 일은 모두 성취한 셈이었다. 그리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도 무난하게 이룩해 놓았다.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르게 된 것이다. 이젠 모든 근심이 덜어졌고
편안히 양지쪽에서 낮잠이나 자고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만한 시기도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나이가 벌써
예순 다섯이나 된다. 손자들은 콩나물처럼 자랐다. 장남에겐 열
살 나는 손자를 맏이로 셋이고 둘째에게도 손자가 둘이나 된다.
머지않아 셋째도 장가를 들여야 할 것이고 그것만 끝나면 그는
아무 걱정 없이 한가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란 그렇게 생각한 대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병정들이 지나간 것이 큰 벌떼가 지나간 것처럼 곳곳에
그 독한 침을 남겨 두었다. 맏며느리와 둘째 며느리가 지금껏
따로 살아왔기 때문에 사이 좋게 지냈으나 병정들이 몰려와 있는
동안에 한곳에 모여 살면서 몹시 미워하기 시작했다. 같이
어울려 놀아야 할 꼬마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말썽을 일으켜
싸우게 되면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그대로 뛰어나가 아이의 편을
들었다. 상대방 아이의 따귀를 갈겨 주고 자기 아이는 야단도
치지 않는 식이었다. 자기 아이는 어떤 싸움에서도 늘 옳은
것이다. 두 여자는 이렇게 반목을 굳혀 갔다.
게다가 그 사촌 동생이 시골 태생의 아내를 추켜올리고 성안
태생의 아내를 비웃은 것이 잊지 못할 사건으로 마음에 걸려
있었다. 장남의 아내는 손아래 동서 앞을 지나갈 때면 거만하게
몸을 젖혔다. 어느 날 서로 지나치면서 맏며느리는 큰 소리로
남편에게 말했다.
"뻔뻔스럽고 상스럽게 자란 계집이 식구 중에 있으니 견딜 수
없군요. 놈팡이한테 ㅂ은 고기라는 말을 듣고도 웃어 넘기다니
말예요."
그러자 둘재 아내도 질세라 큰 소리로 되받아 넘겼다.
"형님은 사내한테 찬 생선 소리를 들었다고 나를
경멸하시는데......"
두 여자는 눈을 흘겼다. 그러나 첫째는 예절을 지키는 것을
자부하고 살았으므로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상대방을 경멸하고 언제나 손아래 동서를 무시했다. 그러나
자기의 아들이 방에서 밖으로 나가려 하자 큰 소리로 불렀다.
"상스럽게 자란 애들과 놀면 못써."
그러자 상대인 동서도 지지 않고 자기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뱀 새끼들과 놀지 마라. 물린다."
두 동서 사이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만 갔다. 장남과 둘째
사이도 원만치 않았기 때문에 이 갈등은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장남은 성안에서 자라난, 자신들보다도 신분이 좋은 자기
아내에게 경멸을 당하는 것을 극히 두려워했다. 둘째는 형의
씀씀이가 너무나 헤프기 때문에 분가하기 전에 재산을 마구
축내지 않을까 하는 것이 늘 걱정이었다. 또 형의 편으로 보면
자신이 상속받을 재산을 동생이 맡아서 관리하는 데에 불만이
가득했다. 모든 돈이 아버지의 손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손에서
나가는 것인데 그 액수를 동생은 알고 있지만 장남인 자신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돈 쓸 일이 생기면 마치 아이들처럼
아버지에게 타 쓰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서 안사람들끼리의 싸움도 곧 형제간의 싸움으로 발전하는
것이 일쑤였고 왕룽은 이런 가정 불화에 기진해 있었다. 또
왕룽도 렌화와의 사이가 옛날같이 좋지 않았다. 사촌
동생으로부터 리화를 구해 준 이후 렌화와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리화는 그 때부터 렌화의 눈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전날과 다름없이 충실하게 하루 종일 렌화의 곁에서
담배 심부름이랑 온갖 잔일을 하고 밤에도 렌화가 잠이 오질
않는다고 하면 렌화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었지만 그래도 렌화는
탐탁히 여기질 않았다. 렌화는 리화를 질투하고 있는 것이다.
왕룽이 그녀 방에 돌어올라 치면 곧 리화를 바깥으로 내보내곤
왕룽에게 그 계집애에게 맘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투정부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룽으로선 불쌍한 애를 구해 준 것 뿐이고 자기 딸인
천치애를 불쌍히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일 뿐 그 이상의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렌화가 우겨 대는 바람에
관심을 가지고 보니 과연 리화는 아름다운 계집이었다. 그
이름대로 배꽃처럼 청초했다.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노라면 이
10여 년 동안 고요히 늙어가던 피가 새삼스럽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뭐라고? 내게 아직도 기운이 남아 있단 말이냐. 일 년에 세
번도 당신 방에 올까말까 한데......"
웃으면서 렌화에게 이렇게 대꾸하는 왕룽은 속셈으론 젊은
리화에게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다만 다른 일에 있어 렌화는
무식하지만 남녀 관계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늙어지면
인간이란 짧은 한 기간만 청춘의 정열이 재생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리화에게 질투하는 것이고 리화를 찻집에
팔겠다는 말까지 꺼냈다.
그러나 한편 렌화는 늙어 버린 뚜챈만으론 편히 지낼 수 없을
뿐더러 영리한 리화를 그냥 데리고 있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다.
리화는 언제나 주인된 렌화의 마음을 짐작해서 모든 것을 척척
알아서 처리해 주었으므로 일상 생활에 조금도 불편함이 없었다.
그래서 팔아 버리고 싶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기도
싫었던 것이다.
렌화가 이런 걱정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마침내 그녀는
이 일로 해서 신경질이 늘었고 그녀가 이렇게 신경질을 부리자
왕룽은 한동안 렌화의 방에 가지 않았다. '날이 지나면
괜찮겠지.' 하고 왕룽은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리화에게 자꾸 마음이 쏠렸다.
그때 모조리 마음을 뒤틀린 집안 여자들의 골칫거리만으로는
아직 모자란다는 듯이 왕룽의 셋째가 문제를 또 일으켰다.
언제나 말이 없는 청년이었고 공부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으므로 가족들은 모두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항상 책만
들고 있었고 늙은 가정 교사가 충실한 개처럼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만이 가족들 눈에 뜨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병정들이
집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들 속에 싸여진 전쟁 이야기라든가
강탈 이야기 등에 귀를 팔았다. 그후 그는 늙은 가정 교사에게
부탁해 '삼국지', '수호지' 만 구해다 읽고 그리고 그의 머리는
그런 소설 같은 모험적인 꿈에만 쏠렸다.
마침내 그는 아버지 앞에 나서서 말했다.
"저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군인이 되겠어요."
왕룽은 놀랐다. 그가 지금껏 받은 충격 중에 이보다 더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큰 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무슨 미친 소리냐? 너는 밤낮 내 속만 썩일 셈이냐."
그러나 다음 순간 아들의 굵고 검은 눈썹이 한일자로 확
모아지는 것을 보자 곧 다정한 어조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속담에 좋은 쇠는 못을 만들지 않고 좋은 사람은 병정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너는 소중한 내 자식이다. 네가 군대에 나가서
여기저기 전쟁을 하고 다닌다면 내 어찌 잠을 이루겠느냐?"
그러나 청년을 결심이 굳어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한일자의 검은 눈썹을 약간 부드럽게 해 보였을 뿐
다시 굳은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군인이 되겠어요."
왕룽은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의 결심을 돌려보려고 더욱
부드러운 말씨로 타일렀다.
"네가 공부를 한다면 남방의 학교건 외국 학교이건 네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 주마. 네가 군인만 되지 않는다면 네
소원대로 해 줄 테야. 나 같이 돈도 있고 큰 농장을 가지고
행세한단 사람이 자식을 병정에 보낸다면 그런 남부끄러운 일이
어디 또 있니?"
아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왕룽은 타이르듯이 다시 말을
계속했다.
"무엇 때문에 병정이 되겠다는 건지 그 이유나 좀 알자."
아들은 눈을 갑자기 번쩍이며 대답했다.
"지금껏 들어 보지 못한 큰 전쟁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전쟁이 지나간 뒤 우리 나라는 진정 자유로운
해방이 올 것입니다."
왕룽은 놀랐다. 아직껏 셋째로부터 들어 본 적이 없는 놀라운
말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난 못 알아 듣겠구나! 우리 나라가 해방되지
못한 것이 뭐가 있다는 말이냐.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또 돈도
맘대로 벌 수 있고 농사도 맘대로 지을 수 있는데, 그래서
너희들도 마음대로 입고 먹고 하질 않느냐. 그 이상의 자유가 또
있다는 게냐."
아들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모르실 겁니다. 나이가 많아서 아무 것도
모르십니다."
왕룽은 생각다 못해 아들의 얼굴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젊은 얼굴은 고민에 열중하는 표정이었다. 왕룽은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아들에게 무엇이든 해 주었다. 농사일을
그만두겠다는 것도 허락해 주었고 그리고 공부도 시키지
않았는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왕룽은 아들의 얼굴을 또 한번 쳐다보았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 자식이 가진 모든 것은 나로부터 받아간 것이 아니냐.'
그는 아들을 유심히 보았다. 아직 청년이긴 하나 몸은 힘차고
늠름하다. 그래도 욕정 같은 것이 아직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그는 망설이며 작은 소리를 내어 중얼댔다.
"음, 그렇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겠다. 그래 장가를
보내주마."
그러나 아들은 갑자기 찡그린 눈썹 밑으로 불타는 듯 번쩍이는
눈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러시면 저는 정말 도망가 버리겠어요. 형님들처럼 여자로
만사가 해결되진 않습니다."
왕룽은 셋째를 잘못 보았다는 짐작이 가자 변명하듯이 재빨리
말했다,
"아니, 아니...... 너를 장가 보낸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한 것은 네가 좋아하는 계집종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저는 다른 형들과는 다릅니다. 저는 이상이 있어요. 남다른
영광을 꿈꾸고 있습니다. 계집이란 어디에나 있어요."
여기까지 말한 아들은 잊었던 것을 갑자기 깨친 듯이 그
교만스럽던 태도를 고쳐 양손을 축 드리곤 평범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
"종년들이랬자 모두 추한 것들 뿐이니까 별로 탐탁스럽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쁜 것이 있다면 안방에 있는 계집
정도가......"
이 말을 듣자 왕룽은 그 말이 리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이상한 질투를 느꼈다. 그는 갑작스레 노인이 되어 버린 듯했다.
늙었고 백발이고 몸이 지나치게 비둔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셋째가 떳떳한 장부인 것을 새삼 발견했다. 이 순간 그들은
부자가 아니로 한갓 두 사람의 남자인 것이다. 청년과 늙은이인
것이다. 왕룽은 성이 났다.
"종년들에게 눈을 팔면 못써. 집안에서의 방탕한 행동은 절대
용서 못한다. 우리는 착실한 촌사람이니까 예의를 지켜야 해.
그따위 짓은 절대 용서 못해."
아들은 눈을 휘둥그래 뜨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깨를 치키고
말했다.
"아버지가 처음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왕룽은 혼자 자기 방에 앉아서
하염없는 슬픔과 고독을 느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온 집안에 평화가 없구나.'
마음속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뒤숭숭하고 가지가지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왜 그런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가장 분한
생각이 치받치는 일은 그의 셋째가 리화에게 눈독을 들인다는
점이다.
33
왕룽은 셋째가 리화에 대해 한 말이 언제까지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그는 리화가 드나들 때마다 잠시라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리화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다. 모든 마음이 거기에만 쏠리게 되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해 첫여름의 어느 날 밤이었다. 따뜻한 실바람이 신록과
꽃향기에 묻혀 살랑대던 밤이었다. 뜨락의 계수나무 꽃향기가
코를 찌르는 듯했다. 그의 혈관에서는 청춘 시절의 그것과 같이
온몸에 피가 뛰는 것을 느꼈다. 그날은 아침부터 그러했던
것이다. 그는 들판에 나가서 발을 벗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농군이 아닌 성안에서 존경받는 대지주인
것이다. 맨발로 걷는 것이 남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체면이
깎이는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온종일 뜰에서 서성거렸다. 다만 렌화가 담뱃대를
물고 앉아 있는 나무 그늘 밑으로는 가지 않았다. 렌화는 남자의
마음을 잘 꿰뚫어 보기 때문에 만약 가까이 갔다가 그 들뜬
마음을 눈치 챌 것이 두려웠다. 그는 혼자서 어슬렁어슬렁
마당을 거닐었다. 언제나 아웅다웅 싸우기만 하는 며느리들도
보기 싫고 평상시라면 좋아서 상대하던 손자들도 이날만은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이 하루가 왕룽에겐 무척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허전한 생각이 들고 뜨거운 피가 혈관 속에서
꿈틀거렸다. 셋째가 잊혀지질 않았다. 딱 벌어진 체격에 씩씩한
얼굴, 검은 눈썹이 한일자로 붙은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리화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혼자 생각해 보았다.
'두 사람이 다 좋은 사춘기다. 셋째는 이제 열 여덟이지만
리화는 아직 열 여덟이 못 되었을 게다.'
그는 자신의 나이가 벌써 일흔에 이른 것을 생각하고 문득
지금의 정열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리화를 셋째에게 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몇 번이고 그렇게 되풀이했다. 저리고 아픈 가슴에 칼을
들이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전적으로 옳았다.
이날 하루는 그에게 한없이 지루하고 쓸쓸한 날이었다. 해가
벌써 저물었어도 그는 그대로 뜰에 앉아 있었다. 이 집안에선 한
사람도 털어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는 것이다. 밤 공기는
계수나무 향기를 듬뿍 품었다. 그 계수나무는 바로 중문 가까이
있었다. 그가 그 밑에 앉아 있으려니 어둠침침한 속을 스치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리화였다.
"리화냐?"
왕룽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황급히 발을
멈축고 그 말소리가 이상한 듯 고개를 숙인 채 귀를 기울였다.
왕룽이 자신의 목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것 같은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이리 온......"
리화는 주저주저하다가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늙은 눈인지라
희미하기도 했거니와 어둠 속에 섰는 리화의 모습은 똑똑히
보이질 않았다. 다만 그의 앞에 있다는 감촉을 느끼자 그는 곧
손을 뻗쳐 옷자락을 잡곤 거의 숨이 막힐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
그의 말은 여기서 멈췄다. 그는 자신이 늙었고 손녀뻘 같은
생각을 하니 그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리화의
옷자락에 손을 댈 뿐이었다. 왕룽의 말을 기다리는 리화가 그가
흥분한 것을 알아채자 꽃송이가 시들어 버리듯 왕룽의 발목에
슬그머니 매달리면서 땅에 주저앉았다.
"얘야, 나는 노인이다. 너무 늙었어."
"저는 노인이 좋아요...... 모두 친절하시니까."
리화의 음성은 계수나무 꽃향기처럼 어둠 속에서 하늘거렸다.
왕룽은 몸을 약간 굽히고 부드럽게 말했다.
"너같이 예쁜 애는 키가 크고 씩씩한 젊은 청년에게 시집을
가야 해...... 너같이 얌전한 애는......"
이렇게 말하면서 마음속에서는 '셋째 같은 청년에게 말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은 것은
리화가 그런 생각을 가진다는 것이 지극히 불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말했다.
"젊은이는 친절하지 않고 무섭기만 해요."
어린아이같이 청순하고 앳된 목소리가 목에서 울려 나오자
왕룽의 가슴에 사랑의 파도가 이어나는 것 같았다.
그는 고요히 리화를 안아 일으켜 방안으로 데리고 갔다.
왕룽은 젊었을 때의 정열보다 이 노경에 들어서자 색다른 애욕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리화를 사랑하면서도 그는
지금까지의 다른 여자들에 대한 것처럼 열렬한 충동은 받지
않았다. 그는 고요히 리화를 품고 누워서 그녀의 청춘을 느끼는
것만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낮이면 리화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그녀의 옷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그리고
밤이면 그녀의 몸뚱이가 그의 곁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그토록 깊이 사랑하면서도 다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그의 애욕에 왕룽 자신도 이상한 것을 느꼈다.
리화는 정열이라곤 없는 계집애였다. 그녀는 왕룽에게
어버이처럼 매달릴 뿐이었다. 왕룽도 리화로부터 특별한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고 딸 자식같이 측은함이 앞섰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집안에 곧 알려지지 않았다. 왕룽은
누구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재빨리 이 사실을 발견한 것은 뚜챈의
날카로운 눈이었다. 뚜챈은 어느 날 새벽 리화가 왕룽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자 의미있는 웃음을 지으면서 솔개 같은 늙은
눈을 홉뜨고 말했다.
"어쩌면 황 영감님과 똑같은 일이 생겼군."
방안에서 이 소리를 들은 왕룽은 곧 밖으로 나와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일변 자랑스런 듯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난 젊은 사람한데로 시집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는데도
어린게 자꾸 늙은 사람이 좋다고 해."
"마님에게 말하면 우스운 일이 생길걸요."
뚜챈은 심술궂은 눈을 번뜩였다.
"나도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된 것인지 모르겠군.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가 그만 일이 이렇게 됐구먼......"
"마님에겐 알려야지요."
렌화가 질투할 것이 두려웠던 왕룽은 뚜챈에게 통사정을 했다.
"렌화가 화내지 않도록 잘만 해 주면 은전을 톡톡히 주마."
웃으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던 뚜챈은 곧 승낙했다.
방으로 들어와서 잠시 기다리는데 뚜챈이 돌아왔다.
"그 얘기를 했더니 처음엔 펄펄 뛰셨어요. 그래서 영감님이
말만 하시고 마님께 아직 사 주지 않은 외국제 외투와 보석 반지
얘기를 했더니 그렇다면 좋대요. 그리고 리화는 보기도 싫으니
마님 방으로는 절대 보내지 말고 영감님도 한동안 싫으니까
오시지 말래요."
왕룽은 좋아서 곧 그러겠다고 했다. 그는 렌화가 원하는 대로
값비싼 것을 사 주었다. 그녀의 속이 풀릴 때까지 가까이 못
간다는 것도 고마웠다. 그러나 아직 셋째가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 걱정거리였다. 아들들이 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부끄러운
노릇이다. 그는 몇 번이고 자기 자신에게 일러 두었다.
'나는 이 집 주인이 아니냐. 내 돈으로 산 종을 어떻게 하든
누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지. 그러나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쓸모 없는 노인 대접을 받던 그가 이만한 원기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는 아들들이 그의 방으로
찾아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은 한 사람씩 왔다. 처음엔
둘째가 왔다. 그는 농장이 어떻다는 둥 추수가 어떻다는 둥
여름이 가물어서 추수가 3분의 1밖에 안 될 것이라는 둥 농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지금의 왕룽에겐 날이 가물건 비가 오건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설령 올해 추수가 적다 해도 지금껏 많이 저축해 놓은
것이 있고 곡물 시장에 빌려 준 돈도 적지 않으며 둘째가 돈놀이
하는 거액의 돈도 있으니까 지난날처럼 날씨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둘째는 그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이따금 눈을 사방으로 돌려 과연 그가 들은 것과 같이 새 첩이
있는 것인가 살피려는 눈치가 있자 왕룽은 침실에 있는 리화를
불렀다.
"얘야, 차 좀 가져오너라. 아들이 왔다."
그러자 리화는 갸름한 얼굴을 복숭아꽃처럼 붉히며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나타났다. 아들은 지금까지의 소문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리화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아들은 리화로 해서 중단했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역시
농사일에 대한 이야기 뿐인 것이다. 그리고 어느 소작인들은
아편만 빨고 게을러서 추수를 제대로 못하니 내년에는
갈아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왕룽이 손주 녀석에 대해 묻자
백일해에 걸려 있지만 지금부터 날씨가 따뜻할 것이니 염려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둘째는 지금껏의
소문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것에 만족해서 돌아갔다. 비로소
왕룽은 안심을 했다.
그날 오후 장남이 들어왔다. 이제 보니 그는 상당히 나이도
들었고 몸도 나서 제법 중년 티가 완연했다. 왕룽은 그 당당한
장남의 모습이 좀 두렵기도 해서 리화를 불러내지 않고 담배를
피우면서 기다렸다. 장남은 의젓하고 정중한 태도로 아버지의
건강이라든가 이것저것에 대해 물었다. 왕룽은 조용히 그저 "음,
그래......" 하고 말할 뿐이었고 장남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자, 아들이 또 한 명 왔으니 차를 가져오지 그래."
이번엔 지극히 침착한 태도로 리화가 나타났다. 오이씨 같은
얼굴은 그녀의 이름인 배꽃처럼 밝게 개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뜬 채 고요히 시키는 일만 하고 다시 침실로
들어가버렸다.
리화가 찻물을 따르는 동안 부자 사이에는 아무 말이 없었으나
그녀가 침실로 사라지자 그들은 차를 들기 시작했다.
묵묵히 차를 마시고 있던 장남이 몹시 거북한 듯 말을 꺼냈다.
"전 사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만......"
"뭘?"
"돈이 넉넉하니까 그러시겠지만, 남자란 누구나 다 그런지 한
여자로는 만족을 못하는 모양입지요. 누구나 다 그렇지요."
장남의 얼굴에 걷잡을 수 없는 선망의 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자 왕룽은 속으로 웃었다. 그는 장남이 애욕에 강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가 성안에서 자란 현숙한 아내에게 쥐여
살고 있지만 머지않아 본성을 나타내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우스웠다. 묵묵히 앉아 있는 장남은 무슨 생각이 난 듯
훌쩍 나가 버렸다. 담배를 태우면서 왕룽은 이렇게 늙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이 흡족하게 느껴졌다.
셋째가 왔을 때는 벌써 밤이었다. 그는 혼자서 왔다. 왕룽은
뜰 안으로 합해 있는 중간방에서 탁자 위에 촛불을 켜 놓고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리화가 양손을 무릎에
얹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이처럼 교태를 나타내지
않고 가끔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를 바라볼수록 왕룽은 그녀를
손에 넣은 것이 만족스러웠다.
이때 갑자기 셋째가 나타났다. 어두운 뜰에서 갑자기
뛰어들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전혀 어떤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들도 생각없이 뛰어든 모양이었다. 왕룽은 이 이상한
태도를 보고 일순 지난날 마을 사람들이 산에서 산 채로 잡은
표범을 연상했다. 그 표범은 묶여 있었으나 사람에게 달려들
기세로 눈알을 번뜩였다. 이 셋째의 눈이 그렇게 번쩍인 것이다.
그리고 그 눈으로 왕룽을 쏘아본다. 그 굵고 검은 눈썹이
한일자로 무섭게 치켜올랐다. 그는 잠시 그대로 묵묵히 서
있더니 이윽고 힘차게 말했다.
"이번에는 정말 군인이 되겠습니다."
아들은 리화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버지의 얼굴만 쳐다보고
말했다. 장남이나 둘째는 조금도 두렵지 않던 왕룽도 이
셋째에겐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왕룽은 담뱃대를 문 채
무엇인지 중얼거렸으나 막상 말을 할래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무섭게 쏘아보는 아들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전 갑니다. 군인이 되렵니다."
아들은 갑자기 리화를 돌아봤다. 얼굴이 마주친 리화는 얼른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잠시 후 아들은 돌개바람처럼 밖으로 나가 버렸다. 왕룽은
네모난 창으로 어둠컴컴한 바깥을 보았다. 아들은 보이질 않았고
사방은 정적에 싸여 어둡기만 했다.
왕룽은 갑자기 애수에 젖어 들었다. 이윽고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리화야, 나는 너무 늙었다. 그건 나도 잘 알지. 난 굉장히
나이를 먹었어."
리화는 가렸던 손을 내리고 왕룽이 이제껏 들은 적이 없는
듯한 열정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젊은 사람은 야속해요. 저는 노인이 더 좋아요."
이튿날 아침 왕룽의 셋째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것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34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기 전 여름 낮처럼 따뜻한 날이 잠깐
있었다. 리화에 대한 왕룽의 정열도 그러한 것이었다. 그 짧은
동안의 불꽃은 가라앉고 애욕은 그로부터 사라졌다. 그는 리화를
좋아하면서도 정열이 없었다. 그런 정열이 식자 갑자기 노쇠한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면서도 리화가 곁에 있는 것이 유쾌했다.
리화는 나이답지 않게 충실하고 끈기 있게 왕룽의 시종을
들었다. 왕룽도 또한 그녀에게 언제나 친절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차차 아버지와 딸 같은 사이로 변해 갔다.
그녀는 왕룽을 위해서 불쌍한 천치 딸에게도 친절히 했다.
이런 행동은 그를 대단히 기쁘게 했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자기의 마음 속에만 간직하여 왔던 비밀을 리화에게 말했다.
오랫동안 왕룽은 이 천치 딸의 장래에 대해서 고민해 왔었다.
그가 죽은 뒤에는 이 천치 딸이 죽거나 말거나 아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약방에서 흰 독약을 한 봉지 사
가지고 와서 자기가 죽을 때가 다가오면 천치 딸에게 먼저
먹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죽는 일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지금 리화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는 매우
기뻤다.
어느 날 그는 리화를 불렀다.
"내가 죽은 뒤에 저 천치를 맡을 사람은 너 뿐이다. 그 애는
아무 생각도 없으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오래 살 게다.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죽어 버리면 그 애에게 밥을 먹여 줄 사람도
비오는 날이나 추운 날에 집안으로 데려오고 햇볕이 나면
양지쪽에 데려다 줄 사람도 없어. 그 애는 줄곧 내가 돌봐
왔으니까 내가 없으면 거리에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는
부탁이니 이걸 맡아 두었다가 내가 죽거든 이 봉지의 약을 밥에
섞어서 그 애에게 먹여 다오. 그러면 그 애도 나를 따라오게 될
테니까."
리화는 왕룽이 가진 약봉지를 보자 몸을 움찔하며 온화한 말로
말했다.
"전 벌레도 못 죽여요. 그런데 어찌 사람을...... 그러시지
말고 제가 대신해서 언제까지나 돌보겠습니다. 영감님께서도
저한테 아주 다정히 해 주셨는데......"
이 말을 들은 왕룽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울고 싶은 생각이
났다. 이런 위로의 말은 누구에게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고마왔다.
"아무튼 이 약봉지를 받아 두렴.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으니까. 할 말은 아니지만 너도 죽을 날이 있을지
모르니까...... 너마저 죽으면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다.
며느리라는 것들은 저희 애들로 싸우기 바쁘고 자식들은 제 살
길이 바쁠 테니까......"
리화는 그 약봉지를 받아 넣었으나 그 후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왕룽은 리화를 믿고 있기 때문에
천치의 장래에 대해서 그녀에게 부탁한 뒤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 후 왕룽은 더욱 늙어 버려 리화와 천치 외엔 아무도 없는
그의 방에서 도무지 바깥이라곤 나가질 않았다. 때때로 생각난
듯 리화를 바라보고 미안스런 듯이 말했다.
"이렇게 지내는 것이 젊은 네겐 답답하질 않느냐?"
"저는 이렇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걸요."
"네게 비해 내 나이가 너무 많아,,,,,,"
"그래도 영감님이 좋아요, 제일 좋아요."
"왜 젊은 남자가 싫으냐?"
"영감님을 빼놓고는 다 싫어요. 누구든 미워요. 저를 팔아
버린 아버지도 밉고, 전 남자들의 나쁜 얘기만 듣고 자랐기
때문에 다 싫어요."
왕룽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너는 내 집에서 아무 일 없이 편히 자라는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아요. 정말 싫증 나는 것 뿐이었어요. 다 미워요.
젊은 사람이란 모두 싫어요."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룽은 생각해
보았다.
'렌화가 그 자신이 경험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 줘서
남자를 무서워하는 것인가, 뚜챈의 음탕한 이야기에 몸서리를
치는 것인가, 아니면 드러내서 이야기할 수 없는 거북한 사실이
있는가?'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다.
왕룽은 한숨을 지었다. 지금 왕릉에게는 마음의 평화가
필요했다. 리화와 자신의 딸인 천치를 곁에 두고 그는 뜰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그는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뀌는
동안, 지난날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그 역시 양지 쪽애서
졸고만 있었다. 벌써 이 인생도 끝이라고 생각하니 만족스럽기도
했다.
드문 일이었으나 그는 간혹 다른 방엘 나가 보기도 했다.
렌화의 방엘 가기도 했다. 리화에 관한 이야기를 렌화는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으나 왕룽이 찾아오면 상당히 친절히 대했다.
그녀도 이젠 늙었다. 그래서 좋은 음식이나 술, 그로부터 받는
돈만으로 충분히 만족해 하며 지냈다. 그녀와 뚜챈은 오랜
세월을 같이 지냈기 때문에 주종이란 관계보다는 친한 동무처럼
밤이나 낮이나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거의가 남자들에 대한 지나간 옛 이야기로서 큰
소리로 말하기가 거북스러우면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먹고 마시고 자고 또 눈을 뜨면 지껄이는 것이다.
그리고 또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했다. 또 왕룽은 장남이나
둘째에게도 간혹 갔다. 그들은 그를 은근히 맞이하고 부리나케
차를 내왔다. 왕룽은 이즈음에 난 손자를 보자고도 했다. 벌써
그는 정신이 몽롱해서 무엇이든 잘 잊어버리고 같은 일을 몇
번이고 묻는 것이었다.
"내 손자가 몇이나 되지?"
"사내애가 열 하나 계집애가 여덟."
"한 해에 둘씩 불어나는구나. 내가 잘 알지. 그렇지?"
그가 의자에 걸터 앉으면 손자들이 이상한 듯 그에게 몰려와서
그를 에워쌌다. 손자들도 모두 다 큰 소년들이다. 그는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물끄러미 바라보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놈은 할아버지를 닮았어. 저건 사돈 모습 그대로구, 이놈은
내 어릴 때 모양 같구."
그리고 그는 손자들에게 말했다.
"모두들 학교에 가니?"
"가요, 할아버지."
그들은 여러 가지 말로 각각 대답했다.
"그러면 사서(四書)를 배웠겠구나."
그러자 손자들은 이 완고한 옛 늙은이를 경멸하듯 깔깔대며
웃고 나서 말했다.
"할아버진 옛날 같은 얘길 하시네. 혁명이 일어나곤 그따위
예전 글은 안 배워요."
왕룽은 한동안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야, 그래 혁명. 나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바빠서 그런 걸
몰랐다. 농사를 짓느라고 말이야."
아이들은 킥킥 웃었다. 왕룽은 아들 방에 와서도 어쩐지
어색함을 느꼈다. 나그네와 같은 생각이 들어 곧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장남이나 둘째에게는 자주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따금 뚜챈에게 물었다.
"이젠 세월이 꽤 흘렀으니 며느리들이 싸우지 않겠지."
뚜챈은 바닥에 침을 탁 뱉고 말했다.
"그 사람들 말씀이죠? 서로 앙앙거리는 고양이 같아요. 그리고
맏이는 친정 자랑만 하고 잔소리를 하니까 어떤 남자가 좋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런지 큰 서방님은 첩을 들인다는 소문이
있어요. 이즈음 곧잘 찻집엘 나가시는 모양이에요."
"음......"
왕룽은 이렇게 대답하고 장남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는
듯하더니 곧 사라져 버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 생각이
저절로 났다. 또 어떤 날은 뚜챈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래 전에 집을 나간 셋째 놈 소식은 없는가?"
이 집안에서 뚜챈이 모르고 있는 일은 없는 것이다.
"글쎄, 그 서방님은 편지도, 아무 소식도 없지만 요즘
남쪽에서 온 사람이 전하는 말론 혁명인가 뭔가에 대단한 장교가
됐대요. 혁명이 무엇인지 난 몰라요. 무슨 장사겠지요."
왕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셋째를 생각해 보려고 했으나 해가 저물자 차가운 공기에
뼈가 시려 전신이 아프기 시작했다. 노쇠한 탓인지 마음이 항상
이리저리 흔들렸으므로 한 가지 일을 오래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노쇠한 몸뚱이가 가장 요구하는 것은 식사와 따뜻한 찻물
뿐이었다. 그리고 밤이 돼 추워지면 따뜻한 젊은 리화가 곁에
붙어 있어 좋았다. 아무리 늙어도 그의 잠자리만은 따뜻했다.
봄은 몇 번이고 지나갔다. 해마다 왕룽은 정신이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아무리 노쇠해도 그에게 남아 있는 오직 한 가지는
땅에 대한 애정이었다. 그는 그런 농토를 떠나 성안으로 옮겨와
부호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꿈은 땅속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며칠이고 몇 달이고 대지를 잊고 있다가 봄만 되면 으레 농장을
돌아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그는 괭이를 들 힘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이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볼 뿐이었으나 그래도 한갓 희망을 가지고
나가 보는 것이었다. 때로는 몸종을 시켜서 침대를 가지고 옛날
살던 성 밖까지 가서 누워 있다 오기도 했다. 그의 아들을
낳았고 아내가 죽은 바로 그 침실에서 말이다. 날이 새면 떨리는
손으로 잎이 피어 오르는 버들가지나 복숭아꽃을 꺾어 쥐곤
온종일 가지고 놀기도 했다. 봄도 가고 여름이 가까운 어느 날
밭둑길을 거닐던 그는 그의 가족 묘지까지 왔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버티고 서서 묘들을 바라보니 죽은
사람들의 얼굴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죽은 사람들은 그의
성안에 있는 집안에 살고 있는 아낙네들보다 --- 천치와 리화를
제외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다.
그의 생각은 몇십 년의 옛날로 돌아가고 지나간 날의 일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유생원 댁에 시집간 막내딸은
오래도록 아무런 소식도 못 들었으나 명주 홍실 같은 입술을
가졌던 그 애의 그 예뻤던 모습도 여기에 잠들어 있는 죽은
사람의 한 사람같이 추억으로 떠올랐다. 한동안 추억에 잠겼던
왕룽은 갑자기 생각났다.
"그렇지, 다음은 내 차례지."
그는 묘지 안으로 들어서서 그의 아버지보다는 밑에, 칭
서방보다는 위에, 아내의 묘와는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자신이
묻혀질 것을 생각하니 흙 속에서 자라나서 다시 그 흙 속으로
영원히 돌아갈 자기 자신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중얼거렸다.
"관을 마련해야겠구나."
잊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단단히 명심하고는 집으로 돌아와
장남을 불렀다.
"말해 둘 것이 있다."
"말씀하시지요. 듣겠습니다."
그러자 왕룽은 자기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그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단단히 마음먹었는데도 어느새 그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는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나왔다.
그래서 리화를 불렀다.
"어딜 가셨다 오셨어요?"
"들에."
그는 리화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대답을 기다리는데
리화는 다정하게 물었다.
"어디요?"
문득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는 눈물어린 눈으로 웃으면서
소리쳤다.
"그렇지. 생각이 났다. 내가 묻힐 터를 보고 왔지. 아버지와
숙부의 묘 아래, 칭 서방 묘보다는 위에, 네 어머니의 곁이다.
그리고 내가 죽기 전에 내 관을 봐 둬야겠다."
장남은 효자로서의 적당한 말을 얼른 생각해 냈다.
"돌아가신다는 말씀은 마십시오. 분부대로는 하겠습니다만."
장남은 거대한 향목을 골라서 조각을 한 제일 좋은 관을
사들였다. 이 향목은 쇠처럼 썩지 않으며 관 이외에는 다른 데에
쓰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뼈보다는 먼저 썩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룽은 안심이 되었다. 관을 그의 침실에 옮겨 놓고는 매일
그것을 들여다봤다.
어느 날 그는 느닷없이 말했다.
"그렇지. 이 관을 그 옛날 토담집으로 갖다 놓게 하자.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거기서 보내다가 죽어야겠어."
아들들은 아버지의 결심이 굳은 것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소원대로 실행했다. 그는 천치인 딸과 리화와 몇 사람의 몸종을
데리고 그의 옛집인 토옥으로 돌아온 것이다.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 추수 때가 되어 다시 겨울이
오기 전에 잠시 따뜻한 날씨가 되자 왕룽은 옛날 그의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양지쪽 흙담에 기대어 앉았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먹을 것과 땅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땅에 대한
것도 다만 땅 그 자체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따금 그는
한줌의 흙을 손바닥에 올려 놓고 온종일 양지쪽에 앉아 지내기만
했다. 아들네들은 정성껏 그의 아버지를 섬겼다. 그들은 매일
혹은 하루 건너서 반드시 늙은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리고
노인이 즐길 만한 음식을 가져왔다.
그러나 왕룽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지난 날 아버지가 즐겨
먹던 뜨거운 밀가루 죽이었다. 아들들이 오지 않는 날은 몹시
섭섭했다. 그는 곁에 있는 리화에게 묻곤 했다.
"그 애들은 무엇이 그리 바쁠까?"
"다들 한창 일하실 나이가 아니에요. 일이 바쁘신가 봐요. 큰
서방님은 성안에 있는 부자 양반들에게 뽑혀 큰 책임을 맡으셨고
또 새 부인도 맞이했대요. 둘째 분은 새로 곡물 상점을
차렸대요."
왕룽은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듣고 있는 듯했으나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순간이었으나 그의 의식이 분명해졌다.
장남과 둘째가 찾아왔을 때였다. 그들은 늙은 아버지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서 문 밖으로 나서서 부근의 땅을 둘러보았다.
왕룽은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발을 멈추고 섰을
때 왕룽은 천천히 다가섰다. 형제는 부드러운 흙을 밟는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나 지팡이 소리를 듣지 못했다.
왕룽은 둘째가 조심스러운 투로 말하는 소리를 엿들었다.
"이 땅을 팔아서 둘이 공평하게 가릅시다. 형님 몫은 제가
고리로 빌리지요. 철도가 개통되면 쌀을 해안 지방으로 보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왕룽의 귀에 들린 말은 땅을 판다는 말 뿐이었다. 그는 너무나
분해서 떨리는 소리를 억누르지 못하고 두서없이 소리쳤다.
"이 자식들아! 땅을 팔아? 나쁜 놈들 같으니라구."
목이 메어 왕룽은 울기 시작했다. 아들 형제가 양편에서
아버지를 겨우 부축했다. 왕룽은 울기 시작했다. 형제는
아버지를 달래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땅은 팔지 않겠습니다."
"집안이 망하는 징조야...... 땅을 팔기 시작하면......"
그의 말은 토막토막 끊어지곤 했다.
"우리들은 땅을 파 먹고 살아왔어. 그리고 또다시 땅속으로
돌아가야 돼. 너희들도 땅만 가지면 살 수 있어...... 누구라도
땅만은 빼앗을 수 없어......"
눈물 자국이 노인의 늙고 메마른 얼굴에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그럼에도 노인은 닦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는 몸을 굽혀 흙을 한줌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쥔 채 중얼거렸다
"만일 땅을 파는 날에는 그것이 마지막이다."
형제는 양편에서 아버지를 부축했고 노인은 한줌의 부드러운
흙은 손으로 힘껏 쥐었다. 형제는 몇 번이고 아버지를 위로했다.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 절대로 땅은 안 팝니다."
그리고 그들은 노인의 머리 너머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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