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펄벅
1
왕룽(王龍)이 결혼하는 날이었다.
그는 칙칙한 휘장으로 둘러싸인 침대 위에서 문득 잠을 깼을
때, 기분이 왜 다른 날과 다른가에 대해 얼핏 생각이 나지
않았다.
건넌방에서 늙은 아버지의 목쉰 기침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것을 빼고는 대체적으로, 집안은 고요했다. 평소와
같이 왕룽은 그 늙은 아버지의 목쉰 기침 소리를 가장 먼저
들었다.
그렇다고 그는 침대에서 재빨리 내려오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 기침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져서 마침내
건넌방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왕룽은 침대에 누운 자세
그대로 손하나 까닥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날 아침은 그렇게 오래도록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금방 일어나 침댓가에 둘러쳐진 휘장을 밀어젖혔다.
아직 어둠침침한 새벽이었다. 네모난 봉창의 떨어진 종이 사이로
청동빛 하늘이 내다보였다. 그는 그 떨어진 종이를 뜯어버리면서
중얼거렸다.
"이젠, 봄이니까 이런 건 소용 없어."
이 집이 오늘만은 좀 깨끗하게 보였으면, 그렇지만 이렇게 입
밖에 내기에는 어쩐지 부끄러운 노릇이다. 봉창 구멍은 간신히
주먹이 드나들 수 있으므로 그는 손을 내밀어서 창 밖의 공기를
가늠해 보았다. 샛바람이 동쪽에서 부드럽게 살갗을 스쳤다.
비를 품은 샛바람이다. 좋은 징조였다. 농작물이 비를 기다린
지는 꽤 여러 날 되었다. 이 샛바람이 2,3 일만 계속되면 비가
내릴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극히 고마운 일이다. 놋빛 같은
해가 이대로 계속 내리 쬔다면 밀 이삭이 잘 익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에게 걱정스레 말했던 것이 바로 어제였다. 그런데
하느님이 오늘은 특히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 같다. 이제 풍년이
들 것이다.
그는 푸른 바지를 주섬주섬 입으면서 가운뎃방으로 건너가서
같은 빛깔로 된 무명 허리끈을 매었다. 그는 항상 세수를 할
때까지 웃옷을 입지 않았다. 몸채에 달아 지은 부엌에
들어가려고 할 때 마주보고 서 있는 어두침침한 외양간에서 소가
머리를 내밀고 그 둔중한 목청을 돋우어 울었다. 부엌은 몸채와
같이 밭의 흙으로 만든 벽돌로 쌓아 올리고 밀짚으로 이은
것이었다. 그 부엌 안에는 그의 조부가 젊었을 때에 만든
부뚜막이 오랫동안의 불 기운으로 까맣게 그을러 있고 그 위에는
깊숙하고 둥그런 가마솥이 박혀 있었다.
그는 옆에 있는 항아리의 물을 바가지로 퍼서 가마솥에 반쯤
부었다. 물이 매우 귀하므로 헤프게 쓸 수 없어서 그는 몇 번
주저하다가 마침내 결심이라도 한 듯 항아리를 들어서 물을 전부
가마솥에 부었다. 오늘만은 목욕을 하자. 어머니 무릎에 안겨
있던 그때 이후론 그의 알몸을 본 사람이 없었는데, 이날 만은
그 알몸뚱이를 보이는 것이니 깨끗이 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부뚜막 뒤로 돌아가서 마른 나뭇잎을 한 줌 쥐고
한쪽편에 세워 둔 나뭇가지와 함께 이파리 하나도 헤프지 않게
조심하여 아궁이에 쌓아 넣고 오래 묵은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불은 짚에 옮고 다시 나무에 옮아 타시 시작했다. 이렇게 불을
지피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6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매일 아침 그가 이렇게 불을 지폈다. 그리고 끓인 물을
찻잔에 따라서 늙은 아버지 방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아버지는
침대에서 일어나 기침을 하면서 봉당에 있는 신을 찾고 있다. 이
6년 동안 매일 아침 이 늙은이는 아침의 기침을 가라앉히기 위해
따뜻한 물을 가져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제 여자가
왕룽의 집에 들어오는 것이다. 왕룽은 내일부터는 여름이나
겨울에도 늦잠을 잘 수 있다. 이제는 그도 침대에 누워서
아버지처럼 따뜻한 물을 가져오게 할 수 있다. 풍년이라면 그
따뜻한 물에 차 잎사귀도 띄울 수 있을 것이다. 5,6 년 동안에
그런 행복한 일이 한두 번이나 있었는지......
오늘 맞이하는 아내가 늙게 되면 또 아들이 불을 지피겠지.
아내는 왕룽을 위하여 많은 자식을 낳을 것이다. 세 개의 방과
이 집안을 아이들이 온통 부산하게 뛰어다닐 것을 상상하니
왕룽은 저절로 마음이 황홀해져서 정신 잃은 사람마냥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어머니가 죽은 뒤부터는 집안이 텅 빈 것
같고 세간도 너무 많은 것 같이 느꼈었다.
집은 비좁고 식구는 많아 간혹 친척이라도 오면 거절하기가
곤란했던 것이 생각났다. 특히 많은 아이를 낳은 삼촌 같은
사람은 항상 왕룽의 집으로 들어올 틈을 벼르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단 두 사람이 단출하게 살면서 이렇게 큰 방을 쓰는 사람은
없는데...... 왜 부자끼리 함께 못 잔대? 젊은 사람의 온기로
늙은이 기침도 낫는 법인데......"
그러나 늙은 아버지는 늘 이렇게 대답했다.
"내 침실은 내 손자들을 위해서 잡아 두었다. 이제 곧
손자들이 이 늙은 뼈를 따뜻하게 해 주겠지."
마침내 손자가 태어날 때가 온 것이다. 얼마든지 낳을 것이다!
온 집안의 침대가 가득 차도록......
왕룽이 이렇게 황홀한 공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을 때 아궁이
불이 사그라져서 물이 차츰 식기 시작했다. 늙은이 그림자가
부엌문 앞에 나타났다. 늙은이는 단추를 잠그지 않은 윗 옷섶을
한손으로 잡아 누르면서 쿨룩쿨룩 기침을 하고 가래를 탁 뱉고는
숨찬 듯이 헐떡거렸다.
"어찌된 셈이냐? 내 속을 데울 물이 아직도 안 끓었니?"
물끄러미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던 왕룽은 겨우 정신을
차렸으나 왠지 부끄러워서 얼른 핑계를 대며 얼버무렸다.
"나무가 젖어서요......"
그는 솥 뒷머리에서 중얼거렸다.
"날씨가 눅진해서......"
늙은이는 물이 끓을 때까지 수없이 쿨룩거렸다. 왕룽은 끓인
물을 차 그릇에 뜬 다음 솥 뒷머리 위에 있는 선반에서 잘 마른
차 잎사귀 두세 장을 차 그릇에 넣었다. 늙은이는 갑자기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저런 변이 있나? 차를 마신다는 건 돈을 먹는 게 아니냐?'"
하고 말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하고 왕룽은 씩 웃어보였다"
"아무 염려 마시고 잡수세요."
늙은이는 못마땅한 듯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앙상한 손으로
찻잔을 잡은 채 찻잎이 풀려 흩어지는 것을 언제까지나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만 하고 마시려 하지 않았다. 왕룽은 언성을 높여,
'차 다 식겠어요.' 하고 말했다.
"응-----참."
늙은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뜨거운 찻물을 후루룩 마시기
시작했다. 마치 어랜이가 먹을 것을 잡은 듯이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는 왕룽이 솥의 물을 아낌없이
들통에다 퍼담아 내는 것을 보더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물이 그만큼 있다면 밭에 주는 것이 좋을 텐데."
늙은이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왕룽은 대답도 하지
않고 물을 다 퍼냈다.
"어쩔 작정이냐?"
늙은이의 음성이 거칠어졌다.
"설 쇤 뒤에 어디 한번이나 목욕을 했어야죠."
왕룽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장가를 가는 날이므로 목욕을
해야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하기는 거북살스러웠다. 그는 황급히
물통을 들어서 제 방으로 옮겼다. 문짝은 문틈에 잘 맞지 않아서
벌쭉 드러났다. 늙은이는 뒤뚱거리면서 가운뎃방까지 따라가
문틈에다 입을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새사람에게 그따위 본을 보이면 살림을 어떻게 하니?
아침부터 차를 마시고, 물을 마구 쓰고......'"
"오늘 하루 뿐이잖아요!"
왕룽은 지지 않겠다는 듯이 대꾸를 하고 다시,
"쓰고 난 다음에는 밭에다 줄 거예요. 버리는 게 아니잖아요."
늙은이는 잠잠해졌다. 왕룽은 허리띠를 풀고 옷을 벗은 다음
네모진 밝은 봉창 밑에서 수건을 물에 적시어 여위고 때가 낀
몸을 부지런히 문질렀다. 봉창으로 새어드는 햇살이 따뜻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물에 젖으니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그는
더욱 빨리 몸을 문질렀다. 그러는 동안에 온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가 쓰던 상자 속에서
푸른 무명으로 지은 새옷을 꺼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솜옷이
아니면 추울 것 같았지만 몸을 깨끗이 씻고 보니 헌옷을 입기가
싫어진 것이었다. 지금까지 입고 있던 옷은 때도 묻고 또
군데군데 헤어져서 솜이 비죽비죽 새어 나와 있었다. 그는 처음
대하는 아내에게 그런 추한 몰골을 보이기가 싫었다. 나중엔
아내가 그런 옷을 빨아 주기도 하고 꿰매어 주기도 하겠지만
첫날밤엔 그런 옷을 입고 아내를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푸른 무명 바지저고리 위에 같은 바탕의 긴 두루마기를
입었다. 일년 중 열흘밖에 없는 명절날만 입는 두루마기였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머리를 풀고 헌 궤짝처럼 생긴 조그마한 책상
서랍에서 나무빗을 꺼내 빗질을 하기 시작했다. 늙은이는 다시
다가와서 문틈에 입을 대고 걱정스레 말했다.
"오늘은 먹을 것을 아무 것도 안 줄테냐? 늙은이란 아침에
무얼 안먹으면 창자가 쓰려서 못 견디는데......'"
"곧 가져갈께요."
왕룽은 더욱 빨리 머리를 검은 명주 실타래같이 땋아 올렸다.
그리고 얼른 두루마기를 벗고 변발을 뭉쳐 올리고는 들통을 들고
문 밖으로 나왔다. 실은 마음이 들떠 있어서 아침 준비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에겐 옥수수 가루 죽을 끓여 드리면
될 일이지만 자신은 아무 것도 먹기 싫었다.
그는 물통을 들고 비틀비틀 마당으로 나가 땅바닥에 물을 쏟아
버리고서야 비로소 솥의 물을 다 써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불을 지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아버지에 대한 울화가 왈칵
치밀었다.
"저 늙은이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밖에 생각을 않거든."
그는 솥머리에서 혼잣말로 투덜거렸으나 노인은 듣지 않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의 식사 준비도 이것이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그는 끓기 시작한 물에 옥수수 가루를
넣고 휘휘 저어서 아버지에게 가져갔다.
"오늘 밤엔 밥을 자실 테니까 아침은 이걸로 요기하세요."
"쌀이 얼마 없을텐데......"
늙은이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가운뎃방 탁자 앞에 앉아서 긴
젓가락으로 누르스름한 죽을 저었다.
"그럼 봄 명절에 조금만 쓰면 되잖아요."
늙은이는 못 들은 척하고 입맛을 쩝쩝 다시며 죽만 들이켰다.
왕룽은 제 방으로 들어가서 다시 두루마기를 잘 차려 입고
변발을 길게 드리웠다.
그리고 머리와 뺨을 한번 만져보곤 이발을 할까말까 망설였다.
아직도 해는 뜨지 않았다. 돈만 있다면 색시 집에 가기 전에
넉넉히 이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허리끈에 맨 때묻은
조그마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세어 보았다. 은전 여섯 닢과
동전 두어 줌 가량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오늘 밤에 친한
이웃 사람을 청했다는 말은 안했지만 삼촌과 그의 아들인 사촌과
또 세 사람의 마을 사람을 청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대접할 수 있도록 돼지고기와 생선과 과일을 오는 길에 조금씩
사올 셈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방에서 온 죽순과 쇠고기도
사다 그가 심은 배추를 넣고 국을 끓일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름과 간장을 사고도 돈이 남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발을 하게 되면 아마 쇠고기는 못 살 것 같았다. 그러나
이발은 꼭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이른
아침이라 하늘은 흐려 있었지만 금새 날씨가 좋아져서 태양이
멀리 하늘가의 구름을 뚫고 나타나 보리와 밀짚 위에 맺힌
이슬이 반짝였다. 농부인 왕룽은 그 순간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잊고 이삭을 살펴보았다. 아직 알은 차지 않았다. 비가 와야만
했다. 그는 공기의 감촉을 느끼며 근심스러운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도 바람도 비를 품고 있다. 그는 향을 사서
사당에 모신 지신(地神)님 앞에 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는 이런 날엔 그렇게 지신에게 빌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는
밭 가운데에 난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회색
성벽이 보였다. 그 성벽 옆을 지나면 황씨라는 부자가 살고 있는
집이 서 있다. 거기에는 그가 아내로 맞이할 색시가 어릴 때부터
종으로 팔려와 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부잣집의 종에게
장가들 바엔 차라리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들 말했다. 그러나
왕룽은 그의 아버지에게 '저는 언제까지 장가 못 가나요?' 하고
물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참 세상 살기 어렵구나. 장가를 가자면 큰 돈이 든다. 어느
계집이나 금반지라든가 비단옷을 해 달라고 난리들이니 가난한
사람은 종을 데려올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게야."
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래서 늙은이는 몸소 황부잣집에
찾아갔다. 시집 보낼 만한 나이로 이댁 종 가운데 필요없는
계집애가 있거든 달라고 간청했다. 그리고 늙은이가 원한 것은
아주 젊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계집이었다.
그런데 왕룽은 예쁘지 않아도 좋다는 조건에는 불만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예쁜 아내라면 제 자신도 남들 앞에서
그럴싸하게 보일 것임에 틀림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불평을 눈치로 알자 화를 버럭 내며 이렇게
말했다.
"예쁜 아내를 얻어 어쩌겠다는 거냐? 집안 살림도 하고 자식도
낳고 농사도 지을 수 있는 계집이라야지. 예쁘장하게 생겨 먹은
계집년이 그런 것을 할 줄 아느냐? 몸차림만 그럴싸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 우리 같은 가난한 살림에는 그 따위 예쁜 계집은
밥만 축낼 뿐이야. 너나 나나 농사꾼이 아니냐? 그리고 또
부잣집의 예쁜 종년으로 성한 게 있는 줄 아니? 전부 도련님이니
뭐니 하고 젊은 것들이 건드렸던 거지. 실제로는 못난 계집이
좋다. 너의 갈고리 같은 손을 부잣집 도령들 손과 비교해 보고는
좋다고 하겠니? 아무리 못난 계집이라도 음탕한 계집보단 나을
게다."
왕룽도 이와 같은 아버지의 말에는 깊이 동감했지만 그래도
약간의 미련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지만 곰보나 언청이는 싫어요."
"잔말 말고 얻어 놓고 보자."
늙은이는 이렇게 고집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 여자는 곰보도
아니고 언청이도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다. 이들 부자는 도금한 은반지와 귀고리를 사서 황부잣집에
약혼 표시로 보냈다. 왕룽은 이 밖에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고, 겨우 오늘에서야 그 황부잣집에 가서 그 색시를
데려오는 것 뿐이었다.
그는 어둠침침한 성문 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장수가
손수레에 물통을 싣고 다니다가 흘린 물의 냉기로 여름에도
시원했다. 언제나 이곳에는 참외 장수가 모여들어서 가게를
벌이고 참외를 쪽으로 갈라 팔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철이
일러서 참외 장수는 나와 있지 않았으며 설익은 복숭아 상자가
벽을 따라서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복숭아 장수가 목청을 돋워
가며 외쳤다.
"자아, 복숭아 사려. 햇복숭아 사려. 뱃속의 겨울 독기를 몰아
내는 햇복숭아 사려."
왕룽은 생각했다.
"혹시 색시가 복숭아를 좋아하면 돌아가는 길에 사 주어야지."
그러나 그는 다시 성문을 나올 때 색시가 그의 뒤를 따라
오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성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면 이발사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거리였다. 이른 아침이었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새벽녘에 채소를 팔기 위하여 밤부터 나와서 있다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는 농부들이 몇 사람 있을 뿐이다. 그들은 몸을 웅크린
채 빈 지게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왕룽은 그들과 얼굴이
마주치면 놀림을 받을 것 같아 겁이 나서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눈길을 피해 가며 걸었다. 이 거리에는 앞에 걸상을 놓은
이발사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다. 왕룽은 맨 끝에 놓여 있는
걸상에 앉아서 이발사를 불렀다. 곁에 있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이발사가 재빨리 달려와서 화로 위에 얹어 놓은
주전자의 물을 유기 그릇에 따르고 친절한 말씨로 물었다.
"전부 깎겠습니까?"
"머리를 깎고 면도를 해 주오."
"귀와 코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러면 얼마나 더 받나요?"
왕룽은 조심스레 물었다.
"네 푼 받습니다."
이발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뜨거운 물에 때묻은 수건을 적셔서
짰다.
"두 푼으로 합시다."
"그러시면 한쪽 귀와 한쪽 코만 합니다. 어느 쪽을 해
드릴까요?"
이발사는 곁에 있는 동업자에게 얼굴을 찡긋해 보였다.
그러고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고약한 장난꾼을 만났다고 왕룽은
속으로 생각했으나 어쩐지 성안 사람들에겐 기가 죽었다.
이발사란 제일 하층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하면서도 대항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당신 맘대로 하시오."
그는 이발사가 하는 대로 가만히 몸을 내맡겼다. 이 이발사는
농담은 할지언정 그래도 호인이었기 때문에 요금을 더 받지 않고
어깨부터 등까지 기분 좋게 안마도 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앞이마를 깎으면서 왕룽에게 말했다.
"전부 깎아 버리면 훨씬 더 근사해 보이겠는데요. 요즘은
변발을 자르는 것이 유행입지요."
이발사의 면도날이 머리 위의 변발 있는 곳을 스치자 왕룽은
놀란 듯이 황급히 말했다.
"안되오. 집에 가서 물어 봐야 하오."
이발사는 웃으면서 변발 있는 곳만 동그랗게 남겼다. 이발이
끝나자 이발사의 물 묻은 손에 돈을 치르는 순간 왕룽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돈이 아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없다는 듯이 일어나 걸으면서 새로 깎은 머리에 시원한 바람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이번 뿐이니 괜찮아."
그리고 그는 장거리로 갔다. 돼지고기 두 근을 샀다. 고기
장수가 그것을 마른 연 이파리로 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잠시 주저하면서 쇠고기 반 근을 더 샀다. 그 다음 우무같이
묽은 두부를 약간 사고 향촉 파는 집에 가서 향을 샀다.
그러고는 왠지 자꾸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황부잣집으로 걸어갔다.
황부잣집 대문 앞에 도착한 그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왜 혼자 왔을까. 아버지든 삼촌이든 이웃 칭(陳)
서방이든 누구하고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 큰 대문을 드나든 적이 없었다.
잔칫거리를 담은 광주리를 끼고 '색시 데리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기는 아무래도 그에겐 어색한 노릇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얼빠진 사람처럼 굳게 닫혀 있는 대문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검고 육중한 널빤지로 만든 대문 곁에
돌사자가 호위를 하는 것처럼 앉아 있을 뿐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돌아서서 다시 걸어나왔다. 아무래도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갑자기 눈이 핑 돌면서 현기증이 났다. 우선 어디 가서
무얼 좀 먹어야 했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좁은 골목에 음식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동전 두 푼을 탁자 위에 내어 놓고 기름때가 자르르한
행주치마를 걸친 아이에게 국수 두 그릇을 청했다. 이윽고
국수가 나오자 두 그릇을 단숨에 먹어 치웠다. 아이는 때가 묻은
손으로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시원치 않게 물었다.
"더 가져올까요?"
왕룽은 고개를 흔들며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탁자가
수두룩하니 놓여 있었다. 이 어두침침한 방안에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두세 사람이 국수를 사먹거나 차를 마시고 있을
뿐이다. 여기선 그의 차림이 약간 깨끗했기 때문에 제법
돈푼이나 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거지가 다가서서 흥얼댔다.
"점잖으신 선생님, 한푼 적선합쇼. 굶어 죽겠습니다."
왕룽은 이제껏 거지에게 적선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이란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흡족해져서 닷푼짜리 동전 두 닢을 던져 주었다. 거지는 손톱이
새까맣게 자란 손으로 재빨리 돈을 주워 누더기 속에
집어넣었다. 왕룽은 할 일 없이 앉아 있었다. 해는 점점 높이 떠
올랐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그의 곁을 몇 번이나 오가더니
마침내 못 참겠다는 듯 불평스런 목소리로,
"무얼 더 잡수시지 않으면 자리값을 내셔야 합니다."
하고 퉁명스레 말했다.
왕룽은 이 말을 듣자 당장 일어서고 싶었으나 저 크나큰
황부잣집에 가서 색시를 데려올 생각을 하니 밭에서 일할 때처럼
온몸에 땀이 흘렀다.
"차를 가져오너라."
기가 꺾인 그는 마지못해 이렇게 아이에게 말했다. 그러나
아이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차를 날라와서 재촉했다.
"돈은요?"
왕룽은 어쩔 수 없는 듯이 허리춤을 뒤져서 동전 한 닢을
내놓았다.
'도둑 같은 놈.' 하고 그는 분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때 오늘
저녁때 초대하려던 이웃에 사는 농부가 가게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는 서둘러 차를 꿀꺽 마시고 옆문으로 나갔다. 한길로
나간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그 어마어마한 대문을 향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벌써 한낮이 지났으므로 대문은 반쯤
열려 있고 식사를 끝낸 문지기가 대로 깎은 이쑤시개로 이빨을
쑤시면서 무료하게 서 있었다. 문지기는 키가 큰 사나이로,
왼뺨에 커다란 사마귀가 있고 그 사마귀엔 검고 긴 털이 세 개
삐져나와 있었다. 그는 광주리를 끼고 있는 왕룽을 보고 무얼
팔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 무슨 볼 일이오?"
"저어, 저는 농사짓는 왕룽입니다."
그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래 농사짓는 왕룽이 여기엔 왜 왔소?"
문지기는 매우 거만했다. 그의 주인과 같은 부자 손님에게만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제가 온 것은...... 저, 제가 온 것은......"
왕룽은 머뭇거리며 간신히 이렇게 더듬었다.
"그래 무슨 볼 일로 왔어?" 문지기는 사뭇 사마귀 털을
만지작거리면서 빨리 용건만 말하라고 재촉했다.
"저어, 이 댁의 색시를......"
이렇게 말하는 왕룽은 갑자기 목이 쉰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엔
식은땀이 솟아나 햇빛에 반짝였다. 문지기는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큰 소리로,
"아아, 그런가, 자넨가!" 하고 말했다.
"오늘 신랑이 올 것이라고 말은 들었지만, 원 이렇게 광주리를
끼고 올 줄이야 누가 알 았나."
"고기를 좀 사려고요."
왕룽은 변명삼아 말했다. 그리고 문지기가 안으로 데려다
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문지기는 태연스럽기만 했다.
문지기가 전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으므로 왕룽은 초조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혼자 들어가도......?"
그러자 문지기는 깜짝 놀란 듯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그리 해 보게, 자넨 영감님에게 맞아 죽을 거야." 하고
말했다. 그래도 왕룽이 아무런 눈치도 못 채는 것을 보자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돈만 쓰면 되는 도리가 있지."
왕룽은 그제서야 돈을 달라는 눈치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가난한 농군이어서......" 하고 그는 간신히 말했다.
"허리춤에 무엇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 좀 보세."
문지기가 말했다.
순진한 왕룽은 광주리를 돌 위에 올려 놓고 두루마기 자락을
쳐들고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꺼낸 다음 장을 보고 남은 돈을
전부 손바닥에 털어 놓았다. 문지기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은전 한 닢과 동전 열네 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은전 이리 내." 문지기는 서슴지 않고 왕룽의 말도 듣기
전에 은전을 소매 속에 집어넣고 "신랑이오, 새신랑 왔소." 하고
외치면서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왕룽은 돈을 빼앗긴 것도 분했지만 또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는 것도 부끄럽고 싫었다. 그래도 그 문지기를 따라갈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는 광주리를 든 채 옆도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문지기 뒤만 졸졸 따라갔다.
부잣집 문안에 이렇게 발을 들여 놓아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왕룽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을 푹 숙인 채 중간 뜰을 몇 개 돌아
들어갔다.
"새 신랑, 새 신랑!'"
하고 문지기가 외치는 소리는 연달아 집안을 들썩거렸다. 그
때문에 집안 여기 저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는 그 웃음 소리를 들으면서 중간뜰을 백 개나 지나온
듯 생각되었을 무렵에야 비로소 문지기도 잠잠해지고 그를
조그마한 방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혼자서 기다리고 서
있으니까 안으로 들어갔던 문지기가 돌아나와서 말했다.
"노부인께서 자네를 보자 하시네."
왕룽은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지기는 그를 가로막고
어림없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자네는 그 광주리를 낀 채로 큰 마나님 앞에 나갈 건가. 그건
돼지고기 하고 두부가 든 게 아닌가! 자네 그래 가지고 어떻게
절을 하려나?"
"참...... 그렇군요."
왕룽은 당황했다. 그러나 광주리를 아무 곳에나 두었다간
도둑맞을게 뻔한 일이었다. 돼지고기가 두 근, 쇠고기가 반 근,
생선이 몇 마리이다. 이런 반찬에 욕심내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문지기는 왕룽의 걱정하는
눈치를 알아차리고 업신여기는 투로 말했다.
"야, 이 사람아, 그따위 고기쯤은 이런 부잣집에서 개나 줄
뿐이야."
하고 말하며 왕룽은 손에서 광주리를 빼앗아 방안으로 던져
버리고 어서 가자는 듯이 앞장을 섰다.
길고 좁은 복도를 두 사람은 걸었다. 찬란하게 조각을 한
기둥이 총총히 서 있는 복도를 가자니 왕룽이 평생 처음 보는 큰
대청이 있었다. 그의 집이 스무 개나 들어갈 만큼 넓고 천장도
높았다. 아름답게 조각한 대들보 단청에 정신을 팔고 걸어가던
왕룽은 높은 문지방에 걸려서 문지기가 부축해 주지 않았더라면
엎어질 뻔했다.
"노부인을 대할 땐 지금같이 공손히 엎드려 인사해야 해."
그는 무척이나 부끄러웠으나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앞을
바라보았다. 방에는 또 하나의 지붕이 있는 높은 단이 있고 아주
나이가 많은 노부인이 앉아 있었다. 부인은 말끔하고도 가냘픈
몸에 진주 빛깔로 짜진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옆의 낮은 탁자
위에는 아편을 태우는 담뱃대가 놓여 있었다. 노부인의 얼굴은
수없이 많은 주름이 잡혀 있었고 눈두덩이는 원숭이같이 움푹
파였는데 그녀는 그 까만 눈으로 왕룽을 내려다 보았다.
담뱃대를 잡고 있는 한쪽 손등은 마치 금박을 한 부처의 손
같았다. 왕룽은 무릎을 꿇고 방바닥에 엎드렸다.
"일으켜 세워라.'"
노부인은 사뭇 위엄 있게 문지기에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공손할 필요는 없어. 자네가 계집아이를 데리러
왔나?"
"네에, 그렇습니다.'"
라고 문지기가 대신 말했다.
"왜 저 사람은 자기가 말하지 않나?'"
하고 노부인은 말했다.
"멍청이입니다.'"
문지기는 이렇게 말하고는 사마귀의 털을 만지작거렸다.
왕룽은 이말을 듣자 왈칵 화가 나서 문지기를 노려보았다.
"저는 미천한 농사꾼입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지체 높으신 마님 앞에서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노부인은 위엄 있는 얼굴로 왕룽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다. 그때 옆에서 시중드는 여종이 아편
담뱃대를 바치자 그것을 잡고 허리를 굽히면서 반색하여 빨았다.
다음 순간 노부인의 눈은 몽롱해 진 것 같았고 세상 일을 다
잊은 듯했다. 왕룽은 그대로 노부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 사람은 왜 여기에 이렇게 서 있는가?'"
노부인의 음성은 갑자기 노기를 띠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문지기는 아무 표정도 없이
잠자코 있었다.
"마님, 저는 색시를 데리러 왔습니다.'"
왕룽은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색시라니? 무슨 색시?'"
하고 노부인은 의아한 듯이 말했다. 노부인은 아직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여종이 몸을 굽혀 노부인
귀에다 무어라고 소곤거렸다.
"아아, 그래, 깜박 잊었구나. 뭐, 그리 큰일은 아니니까.
자네, 오란(阿籃)을 데리러 왔군 그래. 그 애를 오늘 어떤
농가에 시집 보내기로 했지. 자네가 그 농부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오란을 불러오너라.'"
하고 노부인이 여종에게 분부했다. 이런 하찮은 문제는 얼른
처리해 버리고 고요한 이 넓은 방에서 홀로 마음껏 아편을 즐겨
보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윽고 여종은 얼굴이 넓적하고 키도 약간 크며 깨끗한 무명
저고리 치마를 입은 여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왕룽은 여인을 얼핏 보고 재빠르게 눈을 돌렸다. 가슴이
설레었다. 이 여인이 내 아내가 될 사람이구나!
"이리 오너라.'"
하고 노부인은 아무렇게나 말했다.
"이 사람이 너를 데리러 왔단다."
여인은 조용히 노부인 앞으로 나가 허리를 굽혔다.
"그래, 갈 준비는 됐니?'"
하고 노부인은 물었다.
"네, 됐습니다.'"
여인은 매우 공손하게 대답했다.
왕룽은 여인의 음성을 처음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음성이 그리 크지도 않고 또 거칠지도 않고 그저
평범하였으나 듣기에 그리 나쁘지 않았고 순박하게 들렸다.
머리도 매끈하게 빗었고 옷도 말끔해 보였다. 그러나 왕룽은
그녀의 발이 전족(纏足)이 아니라는 사실에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 그는 노부인의 말소리에 이러한 생각들을 멈추었다.
노부인은 문지기에게 이렇게 분부했다.
"이 애의 짐을 문간까지 들어다 주고, 이 두 사람을 돌아가게
해라.'"
그리고 노부인은 왕룽에게 말했다.
"오란 곁에 서서 내 말을 좀 듣게.'"
왕룽이 오란과 나란히 서자 노부인은 입을 열었다.
"이 오란은 열 살 때 우리 집에 와서 지금까지 지냈으니까
아마 지금 나이는 스물일 걸 세. 이 애의 양친이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서 떠돌아 다닐 때 내가 사들인 애야. 나는 그
외에는 이 아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지만 아무튼 자네가
보다시피 이렇게 몸 이 튼튼하니 무슨 일이라도 잘 할 걸세.
예쁘지는 않지만 그런 건 살아가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어. 그런
계집이란 일 없는 사람들이 탐내는 노리개에 불과해. 그리고 이
아이는 영리하지는 않지만 무슨 일이나 하라는 대로 잘하고
부지런하네. 내가 알기에는 우리 집에서 제일 부지런한 애지. 또
이 애는 언제나 부엌에만 있었으니 내 아들이나 손자들도
추근거리지 않았어. 만일 불미한 일이 있었다 해도 다른
계집종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런 일도 없었겠고, 또 의좋게
살라구. 손이 약간 느리지만 그래도 쓸모는 있어. 내가 부처님만
안 믿는다면 언제까지나 데리고 부엌일을 시키고 싶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야. 집안 사람들이 꼭 필요로 하지 않는
종이라면 남김없이 다들 시집 보내고 싶어."
그리고 노부인은 오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 사람의 말에 순종하고 아들을 많이 낳아 주도록 해라.
그리고 첫 아들을 낳거든 꼭 내게 보여야 한다."
"네, 마님."
오란은 공손히 대답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 왕룽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그럼 가 보아라."
노부인은 조급한 모양이었다.
왕룽은 얼른 절을 하고 돌아 나왔다. 오란은 그 뒤를 따라
나섰다. 문지기는 오란의 전재산이 되는 상자를 걸머지고 그들의
뒤를 따랐으나 왕룽의 광주리를 던져 둔 방앞까지 오자 걸머진
상자를 내려 놓고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때 왕룽은 비로소 오란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네모난
얼굴은 정직해 보였고 나지막한 검은 코는 사자코 같았다. 입은
커다란 게 메기입 같았고 실눈같이 가느다란 눈은 몽롱한 게
시골 아낙네의 알 수 없는 슬픔이 깃든 것 같았다. 말을 하고
싶어도 묵묵히 참는 표정이다. 왕룽이 쳐다보아도 민망스러운
얼굴을 짓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아양부리는 얼굴도 아닌
순진한 모습이었다. 왕룽은 그 거무스레하고 평범한, 참을성
있어 보이는 얼굴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거무스레한 얼굴은 곰보도 아니었고 언청이도 아니며 귀에는
그가 보낸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또 손에는 그가 보낸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야 그는 자기가 아내가 있다는 생각에
만족감을 느꼈다.
"여기에 상자와 광주리가 있어......"
하고 왕룽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란은 아무 대꾸도 없이 그 상자를 어깨에 얹고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왕룽은 그것을 보고 황급히 말했다.
"상자는 내가 질 테니 임자는 광주리를 들어."
그는 한 벌 뿐인 두루마기를 입었다는 것도 잊고 상자를
짊어졌다. 오란은 아무 말도 않고 광주리를 들었다. 왕룽은
이렇게 기묘한 차림으로 방금 전에 지나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간뜰을 다시 지나갈 것을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뒷문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란은 그의 말뜻을
짐작하지 못한 듯이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그제서야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는 평상시엔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뜰로
그를 인도하였다. 그곳은 잡초가 무성하고 연못에도 풀 덤불이
엉켜있고 오래 묵은 노송 밑에 둥근 대문이 있었다. 오란은 그
빗장을 벗기고 문을 열었다. 그들은 그 문으로 빠져 나와 큰길로
나섰다.
왕룽은 걸으면서 한두 번 오란을 들여다보았다. 오란은 그
넓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언제나 이런 길을 다닌
것처럼 그의 뒤를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다. 성문에 다다르자
왕룽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한손으로는 어깨의
상자를 받치고 한손으로는 허리춤 안에 남아 있는 동전 두 닢을
꺼내어 설익은 복숭아 여섯 개를 샀다.
"자아, 이것 먹어."
하고 왕룽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녀는 어린애가 무얼 받을
때처럼 아무 말도 없이 얼른 받았다. 보리밭을 따라 걸으면서
왕룽이 돌아보니 오란은 매우 소중한 물건처럼 복숭아를
베어먹고 있었다. 그러나 왕룽이 돌아다 보자 주춤하면서
우물거리던 입을 다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복숭아를
손으로 가리었다.
그들은 사당이 있는 서쪽 밭길까지 이렇게 쭉 걸었다. 사당
높이는 사람들 키보다 낮았고 기와로 이어져 있었다. 지금
왕룽이 갈고 있는 밭은 그의 할아버지도 갈았으며, 사당도 그의
할아버지가 손수 성안에 가서 기와를 사서 손수레로 날라다가
지은 것이다. 바깥 벽에 회칠을 하고 풍년이 든 어느 해엔
마을에서 화공을 청하여 그 벽엔 산과 대숲을 그렸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랜 비바람으로 대숲만이 새털같이 희미하게 남아 있고
산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당에는 조그마한 그러나 엄숙한, 흙으로 만든 한쌍의 인형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그 근처의 흙으로 만든 것으로
지신(地神)과 그 아내의 상(像)이었다.
지신은 붉은 종이와 금종이로 만든 두루마기를 입었고, 남신은
듬성듬성 수염까지 붙이고 있었다. 왕룽은 아버지의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그런 색종이를 사서 정성껏 옷을 지어서 입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눈보라와 비바람이 들이치고
햇볕이 쬐어 들면 어느새 그 고운 옷은 모양도 없이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러나 이 때는 마침 새옷을 갈아입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했다. 왕룽은 그 붉고 노란빛이 찬란한 옷을 보자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그는 색시가 가지고 있는 광주리를 받아서
돼지고기 밑에 넣어 두었던 향을 조심스럽게 찾았다. 만일 그
향이 부러졌다면 불길한 징조인 것이다. 그래서 매우 맘을
죄었으나 다행히 부러지지 않은 것을 보자 적이 마음이 놓였다.
그는 지신 앞에 쌓여 있는 잿더미에다 나란히 향을 꽂고
부싯돌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들은 지신 앞에 나란히 서서 향 끝이 점점 타내려 재가 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란은 그 재가 길어지자 약간
허리를 굽히고 손가락으로 재를 털고는 왕룽이 나무랄까 겁을
내는 듯 힐끗 왕룽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왕룽은 그녀의 이런
동작이 마음에 들었다. 오란도 이 향불로 두 사람이 겪어야 할
앞으로의 운명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니 그것은 두 사람의
결혼이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향이 다 타도록 두 사람은 이렇게
나란히 서 있었다. 어느 겨를에 해는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왕룽은 다시 상자를 걸머졌고 두 사람은 집으로 향했다.
대문간에는 그의 아버지가 기울어지는 햇빛을 받으면서 서
있었다. 그는 아들이 며느리를 데리고 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로서 여자에 대한 체면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하늘에 뜬 구름에 정신이 팔린 체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구름이 초승달 왼편에 걸리면 꼭 비가 내린다. 내일 밤
안으로는 비가 오겠어."
늙은이는 왕룽이 색시 손에서 광주리를 받아드는 것을 보자 또
소리를 질렀다.
"너 또 돈을 썼구나."
왕룽은 광주리를 탁자 위에 올려 놓으며, "오늘 저녁에 손님을
청했어요." 하고 간단히 대꾸했다. 그러고는 상자를 그의
방안으로 옮겨서 자기 옷상자 곁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는
이상야릇한 느낌으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늙은이가 방문 앞까지 따라와서 큰 소리로 말했다.
"돈을 그렇게 함부로 마구 쓰다니 집안 꼴이 잘도 되겠구나."
그러나 늙은이도 속으로는 이웃 사람을 청한 것이 좋았던
모양이다. 다만 새 며느리에게 처음부터 낭비를 하는 버릇이
들지 않게 하려면 당분간은 이렇게 잔소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왕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광주리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오란도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는 광주리에서 반찬거리를 한 가지씩 꺼내어
부뚜막에 늘어 놓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돼지고기와 쇠고기, 그리고 생선을 사왔는데 이걸로 일곱
사람이 먹을 거야. 요리할 줄 아나?"
그는 아내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점잖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저는 황부잣집에 있을 때 계속 부엌에서만 일했기 때문에
끼니 때마다 고기 반찬을 준비해 봤어요."
왕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사를 맡긴다는 듯이 밖으로
나와서는 손님들이 올 때까지 한 번도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윽고 쾌활하고 능청맞으며 언제나 허기져 있는 듯한 삼촌과
열다섯 살 나는 장난꾸러기인 사촌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웃
농부 세 사람이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들어왔다. 그중 두 사람은
씨앗 뿌릴 때나 추수할 때에 품팔이를 하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이웃의 칭(陳) 서방이란 사람인데,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조그맣게 생긴 얌전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서로 자리를
사양하다가 겨우 자리를 다 잡자 왕룽은 부엌으로 가서 음식을
들여 오라고 했다.
"음식을 쟁반에 차려 낼 테니 당신이 상에다 옮겨 가세요.
저는 남자분들 앞에 나가기가 싫어요."
여자가 이렇게 말하자 왕룽은 여간 기쁘지 않았다. 자기의
아내라서 자기에게는 거리낌 없이 대하지만 그 밖의 다른
남자에겐 얼굴을 안보이겠다는 것이 대견하기만 했다. 그는
아내가 차려 놓은 음식을 손수 손님 앞에 날라 놓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자아, 어서들 드십시오."
농담을 잘 하는 삼촌이 한마디 했다.
"그래, 새색시를 우리에게 안 보이나?"
하고 말했다. 왕룽은 서슴지 않고 잘라 말했다.
"금방 데려왔는데 뭘 그래요. 어디 행례나 치렀나요. 다음에
보시지요."
왕룽은 정성껏 그들을 대접했고 그들은 정신 없이 맛있게 먹어
댔다. 먹느라고 이야기할 틈도 없었다. 다만 한 사람이 생선에
바른 간장을 칭찬하자 한 사람은 돼지 고기를 맛있게 구웠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왕룽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어디 음식 솜씨가 있어야죠."
그러나 속으로는 새색시가 매우 자랑스러웠다. 오란은 그가
사온 고기에다 설탕과 초와 약간의 술과 간장을 섞어서 양념하여
고기맛이 충분히 나게 한 것이다. 왕룽 자신도 이렇게 맛있는
요리는 남의 집에 가서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밤이 되어 음식을 다 먹은 손님들은 차를 마시면서 한가롭게
농담을 주고 받으며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란은 언제까지나 부엌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왕룽이 마지막 손님을 전송해 보내고 부엌으로 가 보니 오란은
외양간에 쌓아 둔 짚단 위에 웅크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머리에는 지푸라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왕룽이 깨워 일으키자
그녀는 잠결에서도 마치 자기를 때리려는 것을 막으려는 듯이
양손으로 낯을 가리었다. 그러고는 멍하니 왕룽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왕룽은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 그녀의 손목을 잡고
오늘 아침에 그가 목욕을 하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붉은 초에 불을 붙였다. 그는 이렇게 불을 켜자 한 여자와
단둘이서 한방에 앉아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부끄러웠다.
그래서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해 두었다.
"이 여자는 내 색시다. 이제 일을 치러야지."
그는 묵묵히 옷을 벗었다. 그녀는 조용히 침대 곁으로 가서
잠자리를 살펴보았다. 왕룽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불은 당신이 눕기 전에 꺼."
그리고 그는 자리에 누워 두터운 이불을 어깨 위까지
끌어올리고 잠든 척했다. 그러나 전신이 떨렸다. 그의 모든
신경이 살아 있는 것이다. 이윽고 방이 어두워지고 여자의 몸이
점점 그의 몸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더욱 흥분에 잠겼다. 어둠
속에서 소곤대며 웃는 소리가 나자 그는 힘껏 여자의 몸을
껴안았다.
2
왕룽의 생활에도 행복을 맛볼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이튿날
아침 왕룽은 잠자리에 누워서 그의 아내가 된 사랑스런 오란을
쳐다보았다. 오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흩어져 있는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헝겊 신을 신고 뒤꿈치에 달린 끈을 졸라 매었다.
아침 햇살이 봉창 구멍으로 실같이 흘러 들어와 오란의 얼굴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것이 왕룽에겐 놀랄 만큼 이상했다. 그는 지난 밤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란은 평상시처럼
그의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마치 여러 해 동안 그렇게
한자리에서 자기라도 한 것 같았다. 늙은이의 기침 소리는
불평스러운 듯 한결 높았다.
"아버지는 속이 안 좋으시니까 얼른 물을 데워 가져가야 해.
속을 뜨겁게 해야 하니까."
오란은 어제처럼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차를 끓일까요?"
이 말에 왕룽은 매우 당황했다. 그는 대뜸 '물을 끓여야지.
거지라고 생각하나!' 하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는 아내에게
차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알려 주고 싶었다. 물론
황부잣집에서는 종들까지도 언제나 진한 차를 마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코 맹물은 마시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는 며느리가 첫날 아침부터 차를 넣어 가져간다면
살림살이가 헤프다고 야단할 게 뻔한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사실 그들은 그렇게 차를 끓여 마실 만큼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차? 차는 그만 둬. 폐에 나쁘니까."
그리고 아내가 부엌에서 불을 지피고 물을 끓이는 동안
포근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젠 늦도록 잘 수 있는 팔자니까
좀더 자고 싶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아침 일찍 일어나는
버릇이 되어 있어서인지 그는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반듯하게 누운 채 몸과 마음으로 오랜만에 게으름의
즐거움을 느꼈다.
그는 자기의 아내가 된 오란을 생각하니 아직도 어딘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동안 밭에 심어 둔
밀이 비가 내리기만 하면 풍년이 들 것이라는 것과 곡식 값만
그럴 듯하면 칭 서방한테 사려고 했던 배추씨 같은 것을
생각했다. 그는 매일같이 생각하던 일이나 이런저런 생각을
되풀이하다가 문득 아내가 정말로 자기를 좋아할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에겐 새로운 의문이었다. 이제까지는 자기가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느냐, 또 그녀가 내 집같이 구차한
살림살이에 만족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 뿐이었고, 그녀의
생각이 어떻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보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이
펑퍼짐하고 손도 매우 거칠었지만 뚱뚱한 몸집의 부드러운
처녀였다.
그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지난 밤에 캄캄한 이불 속에서
웃었던 것처럼 키득거렸다. 황부잣집 젊은 서방님들은 부엌에서
일하는 그 못난 얼굴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아름다웠다. 뼈대는 세고 굵지만 그 살결은 포근하고
부드럽다. 그는 아무튼 그녀가 자기를 남편으로서 사랑해 주기만
하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또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아내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시기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는 일어나서 그것을 받았다. 더운 물
위에 차 이파리가 떠 있는 것을 본 그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겁이 나는 듯이 멈칫거리며 말했다.
"아버님에겐 찻잎을 넣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당신에겐."
왕룽은 아내가 자기를 겁내는 것을 보자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아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 나는 차가 좋아. 차를 무척 즐기니까."
하고 말하고 흡족한 듯이 후룩후룩 마셨다. 그녀는 나를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다. 왕룽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새로운
기쁨에 흥분했다.
몇 달 동안 왕룽은 아내의 동정에만 마음이 쏠렸다. 자기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전과 똑같이 많은 일을 해 왔다. 호미를
들고 밀밭에 나가 김을 매기도 하고, 소에 쟁기를 채워서 밭을
갈고 마늘과 파를 심기도 했다. 한낮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정성이 깃든 점심이 준비되어 있다. 밥상은 말끔하게 닦여 있고
밥그릇과 수저도 보기 좋게 놓여 있다. 지금까지는 일에
시달려서 매우 지쳤어도 자기 손으로 식사 준비를 했던 것이다.
때로는 늙은 아버지가 시장기를 참지 못해 부엌에 나와서 손수
죽을 끓이거나 밀가루를 반죽해서 빵을 구워 마늘 줄거리를 감아
놓기도 했으나 대부분 그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것들이 오직 그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그저
밥상 앞에 앉아서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었다. 부엌 바닥도
언제나 깨끗이 치워져 있고, 구석에는 땔나무가 언제나 가득
쌓여 있는 것이다. 그가 들에 나간 뒤면 아내는 갈퀴와 새끼를
들고 마을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나뭇가지나 낙엽 따위를 긁어
모아서 점심을 짓는 데 쓰고도 남을 만큼 나무를 해 오는
것이다. 왕룽은 나무를 살 걱정이 없어진 것에 대해 아내에게
여간 고맙지 않았다.
오후가 되면 오란은 호미와 소쿠리를 들고 큰 길로 나갔다.
수없이 지나가는 마소의 똥을 긁어 모아다가 집 앞에 쌓아
올렸다. 밭에 거름으로 쓰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묵묵히 일을 잘 했다. 그리고 해가 지고 하루의 일이
끝나도 소에 여물을 주고 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길어다 놓기
전에는 결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떨어진 헌 옷들을 꺼내어 손수 물레로 뽑은 실로
정성껏 꿰매기도 하고 침대를 밖에 내다 볕에 쬐고 이불깃을
뜯어 빨기도 했다. 여러 해나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그을고
굳어진 솜을 새로 타고 그 속에 틀어 박혀 있는 빈대를 잡기도
했다. 이렇게 매일 쉬지 않고 집안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세 개의 방이 놀랄 만큼 깨끗해져서 제법 풍족한
살림같이 보였다. 늙은 아버지도 기침이 점점 나아졌으며 집안
일이 마음에 흡족하게 느껴져서인지 이젠 아무 걱정도 없다는
듯이 양지쪽에 나와 앉아 햇볕을 쬐면서 낮잠을 자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오란은 말이 없었다. 꼭 해야 할 말 이외에는 말이
없었다. 왕룽은 그 큼직한 발로 집안을 걸어다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아도, 또 네모진 얼굴을 보아도 약간 겁을 내는
듯하면서 아무 표정도 찾아볼 수 없는 아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밤이면 그 탱탱하고 부드러운 육체의 촉감을 느낄 수
있었으나 날이 밝으면 언제나 그 푸른 무명 옷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버리니 그저 말이 없는 하나의 종처럼 되고 만다. 그녀는 종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묵묵히 일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왜 그렇게 말을 안해.' 하고 꾸짖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내로서 일만 충실히 잘 해 나가면 될 테니까.
왕룽은 때로 밭에서 일하다가도 그녀에 대한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 수없이 많은 뜰을 가진 황부잣집에서 그녀는 무엇을
보아 왔을까? 그가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생활을 했었을까?
그에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호기심을
갖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요컨대 아내는
그저 평범한 한 여자일 뿐이다.
세 개의 방을 치우고 세 끼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만으론
대갓집의 종으로 새벽부터 밤 늦도록 고되게 일하던 오란에겐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날 왕룽이 익어가는 밀밭에서 고된
일에 허리가 아픈 것도 참으면서 고랑을 갈고 있노라니 밭둑
위에 여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오란이 삽을 어깨에 매고 나온
것이다.
"해가 질 때까지 집에 할 일이 없어요."
오란은 이렇게 한마디하고 왕룽과 나란히 서서 이랑을 갈기
시작했다. 이른 여름이라 그녀의 머리에선 곧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했다. 왕룽은 옷을 훌훌 벗어 버리고 일했으나 오란은 엷은
적삼을 입은 채 땀을 흘려가며 일을 했다. 마침내 그녀의 적삼이
땀에 젖어서 몸에 착 달라붙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 장단에
맞추어 삽을 움직일 뿐이었다. 몇 시간 동안 묵묵히 일하면서도
고된 줄을 몰랐다. 그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그들의 집이 되고 그들의 양식이 되고 또 그들의 신을 받드는 이
흙을 일구어서 햇볕에 쬘 뿐이었다. 기름진 검은 흙덩이는 삽이
내려 찍힐 때마다 가볍게 갈라졌다. 때로는 기와 조각이나 나무
조각이 나왔다. 그런 것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옛날에는
사람의 시체를 묻었을 것이고 집을 짓기도 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게 이젠 모두 흙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흙에서 나서
다시 흙으로 변하는 법이니까. 그들도 지금 나란히 서서
부지런히 일하여 이 대지의 열매를 얻으려고 하지만 마침내는
다시 대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해가 지자 왕룽은 가만히 허리를 펴고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흙먼지가 얼룩져 흙처럼
검었다. 땅에 흠뻑 젖은 거무스름한 옷이 펑퍼짐한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삽질하던 것을 천천히 끝내고는 보통
때와 같이 평범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고요한 저녁 공기
속에서 아무 꾸밈 없는 음성은 어느 때보다도 평범하게 들렸다.
"애를 가졌어요."
왕룽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나 좋았는지 할 말을
잃었을 정도였다. 오란은 발 밑에 있는 기와 조각을 주워서 이랑
밖으로 던졌다. '차를 가져왔어요.' 라든가 혹은 '잡수세요.' 와
같은 말을 한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녀에겐 보통 일과
같은 평범한 일로만 생각되는 듯했다. 그러나 왕룽에겐 큰
사건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리고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렇다. 지금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도 이제 아이를
낳을 차례가 온 것이다.
왕룽은 아내의 손에서 급히 삽을 빼앗으며 목이 메인 듯한
소리로 말했다.
"이제 일은 그만해. 해가 졌으니.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도
이야기해야지."
그들은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내답게 남편보다 여섯 걸음쯤
떨어져서 따라왔다. 늙은 아버지는 시장기를 참으며 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며느리가 들어온 이후로는 아무리
시장해도 손수 음식을 장만하지 않았다. 늙은이는 왕룽을 보자
몹시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저녁이 이렇게 늦어서 어떡하느냐. 늙은이가 어디 시장기를
참을 수 있니."
그러나 왕룽은 그 말은 못 들은 체하며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애를 가졌대요."
그는 '오늘은 건너 밭에 씨를 뿌렸어요.' 라고나 말하듯이
이야기하려 했으나 자신도 모르게 흥분된 소리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늙은이는 한동안 눈을 껌벅거릴 뿐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으나 갑자기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그래, 하하하......"
그는 좀처럼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윽고 며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곧 손자를 보겠구나."
어두워져서 며느리의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평범한 오란의
음성만이 들렸다.
"곧 저녁 준비를 하겠어요."
"오냐, 오냐. 저녁도 빨리 지어야지."
늙은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철부지 아이들처럼 며느리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손자를 본다는 바람에 저녁 생각을 잊고
저녁이란 바람에 손자 생각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왕룽은 어둠침침한 방안으로 조용히 들어가서 팔짱을
끼고 탁자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몸에서, 내 자신의 몸에서 새 생명이 창조되는 것이다.
3
아내의 해산달이 가까워지자 왕룽은 아내에게 말했다.
"해산할 때 도와 줄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러나 오란은 고개를 흔들고는 저녁 먹은 그릇을 씻을
뿐이었다. 늙은이는 이미 잠이 들었고 두 사람만이 마주 앉아
있을 뿐이었다. 희미한 호롱불이 너울거리며 그들을 비춰 주고
있었다.
"아니 도와 줄 필요가 없단 말이오?"
왕룽은 놀란 듯이 물었다. 그는 자기 혼자 지껄이는 것이
예사였다. 그는 고갯짓이나 손짓만 할 뿐 대꾸를 했댔자 커다란
입으로 마지못해 짤막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왕룽은 이제 이런
방식의 대화에도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집안에 사람이라곤 남자밖에 없지 않소?"
왕룽은 아내에게 의아한 듯이 재차 물었다.
"우리 어머니 때는 동네 여자를 불러왔는데 나는 아무 것도
모르니 저 황부잣집 늙은이들이나 당신이 친했던 사람이 없소?"
오란이 팔려 갔던 황부잣집 말을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란이 남편을 흘겨보았다. 왕룽이 이제껏 보지
못하던 얼굴이었다. 분함을 이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 집엔 아무도 친한 사람이 없어요."
아내가 쌀쌀맞게 쏘아붙이는 바람에 왕룽은 담배를 재우던
대를 떨어뜨리고 깜짝 놀라면서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내는 곧 아무 말도 안했다는 듯이 설거지 그릇에서 젓가락을
건져내어 간추릴 뿐이었다.
"왜 그래?"
하고 왕룽은 놀라서 물었으나 오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룽은 다시 물었다.
"우리 집엔 남자들 뿐이니 해산하는 데 무슨 소용이 있소.
아버지는 당신 방에 들어갈 수가 없고 나는 소위 송아지 낳는
것도 본 일이 없으니 만약에 한 치의 불상사라도 생겨 아이가
다치면 어떻게 한단 말이오. 황부잣집 같으면 사람들이 해마다
많은 아이를 낳을 테니 해산 일을 도맡아 잘 하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니오. 그런 사람에게 부탁하자는 거지......"
오란은 씻은 젓가락을 간추려 상에 놓고 남편을 응시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입을 열었다.
"내가 다시 그 집에 갈 때는 아들을 안고 가겠어요.
아이에게는 붉은 저고리와 붉은 꽃무늬를 놓은 바지를 입히고
머리에는 금부처를 수놓은 모자를 씌우고 발에는 호랑이를 그린
신을 신기고 나도 새 공단 옷을 입고 가겠어요. 내가 일하던
부엌에도 가 보고 큰 마나님이 아편을 피우시는 대청에도 가서
우리 모자의 자랑스런 모습을 여러 사람들에게 뽐내
보이겠어요."
왕룽은 이제껏 아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비록 말이 느리기는 하지만 거침없이 입에서 술술
굴러 나오는 말이었다. 아내가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기와 함께 밭에서 삽질을
하고 있을 때도 아내는 내내 그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아이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밤낮으로 일만
부지런히 하는 줄 알았더니 실상은 아이를 낳아서 어떤 옷을
입히고 또 자기도 아이 어머니로서 새옷을 입는 모습까지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때만은 오히려 왕룽의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었다. 그는 다시 담배를 말아서 담뱃대의
대통에 다져 넣었다.
"그럼 돈이 있어야겠군."
왕룽은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했다.
"은전 세 닢만 주시면......"
하고 오란은 주저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다시 조심그럽게 말을 이었다.
"큰 돈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로 셈해 봤어요. 그렇지만 동전
한 닢도 헤프게 쓰지 않고 포목점에서도 속지 않겠어요."
왕룽은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는 그저께 서쪽 밭에 있는
못에서 갈대를 한 차 반이나 베어 팔았기 때문에 아내가 청하는
돈보다 조금 더 많이 주머니에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은전 세
닢을 상 위에 내어 놓았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은전 한
닢도 마저 내어 놓았다. 그것을 찻집에 가서 도박을 하고 싶을
때 쓸 생각이었다. 대개 그는 잃는 것이 아까워 구경만 했다.
거리에 나가서도 시간이 있으면 야담이나 듣고 주발이 돌아오면
동전 한 닢만 집어놓곤 했었다.
"그 돈도 받아 넣우."
왕룽은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종이 조각으로 호롱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이왕이면 비단 옷을 해 줘. 돈도 귀하지만 첫 아이니까."
오란은 얼른 돈을 집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다가,
'은전을 가져 보긴 평생 처음이에요.' 하고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얼른 손을 내밀어 은전은 움켜쥐고 침실로
들어갔다.
왕룽은 그대로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마치 아직도 탁자 위에
은전이 그대로 놓여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흙에서 나온 땀의
대가였다. 그 은전은 그가 땅을 파고 씨앗을 뿌리고 열심히 일한
땅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흙으로부터
얻었던 것이다. 땀을 흘려 일해서 흙에서 먹을 것이 얻어지고 그
먹을 것이 또 은전으로 되는 것이다. 지금까진 은전을 남에게 줄
때 마치 자신의 살을 에이는 듯 괴로웠다. 그러나 오늘만은
이렇게 많이 주면서도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처음 느껴
보는 기쁨이었다. 성안에 있는 장사치 손에 건너가는 돈과는
성격이 아주 다른 것이다. 진정 가치 있는 돈이 된 것이다.
귀여운 아들에게 입힐 옷값이다. 왕룽은 또 아내의 태도가
이상스럽기도 했다. 아내는 언제나 묵묵히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이 꾸준히 일만 하는 것 같으면서도 자식에게 그런 옷을 입힐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란은 해산할 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마침내 해산날이 가까왔다. 어느 날 저녁 해가 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 시간까지 오란은 남편과 같이
들에서 벼를 거두어 들였다. 밀을 거둔 밭을 논으로 만들고 벼를
심었던 것이다. 여름 동안 비도 알맞게 내리고 날씨도 좋아서
벼이삭도 탐스럽게 익었다. 그들은 하루 종일 허리가 굽도록
자루가 짧은 낫으로 벼를 베었다. 오란은 산달이라 배가
불룩해져서 몸을 놀리기가 여간 거북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일손이 더뎌서 왕룽이 베는 고랑에서 점점 멀어졌다. 해가 질
무렵엔 더욱 힘이 없어지고 잘 베지도 못했다. 그러더니 허리를
펴고 일어서서 안타깝게 남편을 돌아보며 낫을 놓았다. 얼굴에는
진땀이 좌르르 흘렀다. 매우 괴로운 모양이었다.
"애를 낳으려나 봐요."
하고 그녀는 나직하게 말했다.
"집에 들어가겠어요. 내가 부를 때까지 방에 들어오지 마세요.
그리고 탯줄을 끊게 갈대를 벗겨 날카롭게 잘라 가지고 오세요."
오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논을 건너 집으로 향했다.
뒤뚱거리며 걷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왕룽은 좀
떨어진 못으로 가서 싱싱한 갈대를 잘라 정성껏 껍질을 벗기고
낫으로 날카롭게 베었다. 가을 해는 이미 저물었다. 그는 낫을
허리에 차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저녁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아버지는 벌써 먹는 중이었다. 아내는 배에 진통을 그렇게
아프게 느껴지면서도 그들을 위해 따뜻한 저녁을 지어 둔
것이다. 이렇게 자상한 아내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라고
왕룽은 생각했다. 왕룽은 방문 앞에 가서 큰 소리로 말했다.
"갈대 가져왔어."
왕룽은 아내가 그것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내는 문틈으로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먼 길을 달려온 짐승처럼 숨을
헐떡이기만 했다.
늙은이는 차를 마시다가 아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식어 버리기 전에 빨리 먹어라. 낳으려면 아직 멀었어. 네
어미도 첫 아이를 낳을 때 지금쯤 시작해서 아침에서야 낳았다.
아마 네 어미는 애를 스물은 낳았을 게야. 그런데 지금 살아
있는 건 너 뿐이야. 그러니까 여자는 자꾸 애를 낳아야 해."
그리고 늙은이는 새삼스럽게 생각난 듯이 다음 말을 이었다.
"내일 이맘 때면 나도 할아버지가 되는구나."
하고 말하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늙은이는 밥 숟가락을
놓고 어둠침침한 방안에 혼자 앉아서 오랫동안 웃었다.
그러나 왕룽은 문앞에 서서 아내의 신음 소리를 안타까운 듯이
듣고 있었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피비린내가 풍겼다. 점점 더
피비린내가 심해져 코를 자극했다. 헐떡이는 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다. 그러나 아내는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왕룽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에 가느다란
아기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왕룽은 모든 것을 잊었다.
"아들인가?"
하고 왕룽은 아내 생각도 잊고 큰 소리로 물었다. 가느다란
아기의 울음 소리가 또 들렸다.
"아들이야?"
하고 그는 연거푸 물었다.
"말해 봐, 아들이야?'"
오란의 대답 소리는 메아리처럼 간신히 들렸다.
"아들이에요."
왕룽은 그제사 밥상 앞에 앉았다. 저녁밥은 이미 다 식어
버렸고 늙은이는 걸상에 기댄 채 자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아들이래요."
왕룽은 자랑스러운 듯이 흥분해서 이렇게 말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고 저는 아비가 됐어요."
잠을 깬 늙은이는 잠들기 전처럼 또 한바탕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암 그러면 그렇지."
늙은이는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내가 할아버지가 됐다, 할아버지가."
하고 그는 계속 웃으면서 침실로 들어갔다.
왕룽은 식은 밥그릇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갑자기 시장기를
느끼고 정신 없이 허겁지겁 먹어 댔다. 아내가 무엇을 치우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기의 우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
왔다.
왕룽은 밥을 마음껏 먹은 다음 다시 문앞으로 갔다. 이번엔
그녀가 불렀으므로 곧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방안에는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었으나 깨끗이 청소해 놓아서 피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무통에는 붉은 촛불이 켜 있고
아기는 말끔히 치운 침대 위에 그 지방의 풍습대로 왕룽의
헌바지로 싸서 반듯하게 눕혀져 있었다.
핏덩이인 자신의 아기를 보니 왕룽은 잠시 동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둥글고 주름진 거무스레한
얼굴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고 울음을 그친 채 눈을
꼭 감고 잠들어 있었다. 그는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의
머리카락은 아직도 땀에 젖어 있고 눈시울이 푹 꺼져 있었으나
그 밖에는 평상시와 똑같았다. 그러나 누워 있는 모습에는 그의
가슴을 때리는 안타까운 것이 있었다. 아들에게 애정이 쏠렸다.
그러나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내일 장에 가서 누런 설탕을 한 근 사 올테니 끓는 물에 타
먹어."
그리고 다시 아기를 들여다 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달걀을 한 바구니 사다가 빨갛게 물을 들여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지. 사람들에게 아들 낳은 것을 알려야
할 테니까."
4
해산한 다음 오란은 평상시와 같이 일어나서 아침 준비는
했으나 들에는 나가지 않았다. 왕룽은 촌자서 점심때까지 나락을
베고 나서 두루마기를 입고 시장에 나가서 달걀 50개를 샀다.
그것은 금방 낳은 싱싱한 것은 아니지만 상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한 개에 한푼씩 주었다. 그리고 달걀에
물을 들이기 위해 빨간 종이도 샀다. 종이와 함께 달걀을 삶으면
물이 드는 것이다. 또 과잣집에도 갔다. 누런 설탕을 한 근 남짓
샀다. 점원이 설탕을 지푸라기로 모양 있게 싸고는 그위에 붉은
종이 조각을 끼워 주면서 빙그레 웃었다.
"부인이 해산하신 모양이군요!"
"첫 아들이라서......"
왕룽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축하합니다."
그때 옷을 잘 입은 손님이 가게로 들어왔기 때문에 점원은 그
사람에게 눈을 팔면서 건성으로 말했다.
점원은 매일같이 이런 인사말을 하는 것이지만 왕룽은
자기에게만 이렇게 인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척 흐뭇해
했다. 그래서 가게를 나오면서 머리를 숙여가며 인사를 했다.
먼지투성이의 햇볕이 따갑게 내리 쬐는 거리로 나서니 자기만큼
행복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매우 기뻤으나 곧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사는 데는 너무 운이 좋아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복할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특히
가난한 사람에겐 행복을 방해하는 귀신이 많은 것이다. 그는
갑자기 발을 돌려 향을 파는 가게로 가서 향을 네 개 샀다.
그것은 식구 한 사람에게 하나 꼴인 셈이다. 그는 곧장 사당으로
가서 결혼하던 날 아내와 함께 향을 피우던 것처럼 그 잿더미
위에 향을 꽂아 놓고 그것이 다 타는 것을 지켜본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 작은 사당에 모신 두 지신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오란은 산후 조리도 않고 남편과 함께 들로 나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들에 있는 곡식을 다 거두어들인 그들은 타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리깨질을 하고 그 일이 끝나자 키에 넣어서
부치기 위하여 대나무로 얽은 큰 광주리에 담았다. 키질을 하는
바람에 껍질과 먼지가 구름같이 날리었다.
이 일이 끝나자 그들은 또 밭에 나가서 밭을 갈았다. 왕룽이
소를 몰면서 갈아 나가면 오란은 그 뒤를 따라 가면서 삽으로
커다란 흙덩이를 부스러뜨렸다. 그녀가 이렇게 온종일 일할 때는
아기를 헌 이불에 싸서 땅바닥에 눕혀 두었다. 아기가 울면
그녀는 잠시 일을 멈추고 아기 곁으로 가서 젖가슴을 헤치고
젖을 먹였다. 늦가을 햇볕이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얼굴에 내리
쬐었다. 그녀의 머리와 어린 아이의 머리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다.
그러나 흙빛처럼 검은 오란의 젖가슴에선 눈같이 흰 젖이
흘렀다. 아기가 한쪽 젖을 빨면 또 한쪽의 젖도 줄줄
흘러내렸다. 오란은 흐르는 젖을 그대로 두었다. 아무리 먹여도
또 몇 아이라도 먹일 수 있을 만큼 젖이 넉넉하다는 것을 잘
아는 오란은 그렇게 젖이 흘러내려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언제나 계속해서 젖이 흘러내렸다. 이따금 너무 흐르면 옷을
버릴까 봐 일부러 젖을 잡아 쥐고 쭉 짜 버린다. 그러면 젖이
땅으로 떨어지고 흙 속에 스며들어 푹신한 흙 위에 얼룩이 진다.
아기는 순하고 건강한 어머니가 주는 무진장한 생명수를
꼴깍꼴깍 잘도 삼킨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그들은 월동 준비에 바빴다. 이
해는 전에 없는 풍년이어서 조그마한 세 방이 꽉 찼다. 천장엔
파와 마늘 단이 주렁주렁 매달렸고 갈대로 엮은 섬엔 나락, 밀
등을 가득 넣은 것이 가운뎃 방, 아버지방, 그들의 방 할 것
없이 가득 쌓여 있었다. 물론 이 곡식은 팔 것이고, 검소한
왕룽은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노름을 하거나 헛된 음식에
낭비하는 법이 없이 곡식값이 낮은 추수 후에는 당분간 팔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삼촌은 곡식이 채 익기도 전에 팔곤 했다.
추수하는 일이나 타작하는 수고를 덜고 싶었고, 또 현금을 갖기
위해서 헐값이라도 밭에 둔 채로 팔아 버렸다. 그의 숙모는
뚱뚱하고 게으르고 어리석은 여자였다. 밤낮 맛있는 음식만 찾고
시장에서 새 신을 사고 싶다거나 무얼 하고 싶다고
안달복달이었다. 그러나 왕룽의 아내는 남편의 신이건
시아버지의 신이건, 또 아이의 신이건 모두 자기 손으로 집에서
만들었다. 만약 오란이 신을 사겠다고 하면 왕룽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을 정도였다.
삼촌이 살고 있는 쓰러져 가는 묵은 집 천장엔 아무 것도 달아
맨 것이 없었다. 그러나 왕룽의 집 천장엔 돼지다리까지 매달려
있었다. 이웃 칭 서방집에서 먹이던 돼지가 병이 든 것 같아서
잡았을 때 사둔 것이었다. 살이 빠지기 전에 잡은 것이라 살점도
많았다. 오란은 그것을 소금에 절여 잘 말리기 위해 매달아
두었다. 그 밖에도 창자를 빼내고 소금을 넣어서 말린 닭도 털을
덜 뽑은 채로 두 마리나 매달려 있었다.
그러므로 겨울에 동북쪽 사막에서 찬바람이 살을 에일 듯이
불어와도 왕룽의 가족은 풍성한 가운데 단란하게 지냈다. 어린
아이도 무럭무럭 건강하게 잘 자랐다. 아이의 백일에는 많은
음식을 해서 아이의 명이 길도록 축복해 주었다. 왕룽은 흔히
잔치에 왔단 사람을 다시 청해 붉게 물들인 달걀을 열 개씩
나누어 주었다. 모두들 허우대 좋고 투실투실한 어머니처럼 둥근
얼굴에 튼튼하고 토실토실한 아들을 가진 왕룽을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겨울이라 아이를 밖에 데리고 나갈 수는 없었다. 그들은
방안 양지쪽에 이불을 펴고 남쪽 창문을 열어 햇볕이 잘
들어오게 했다. 거센 북풍이 불었으나 북쪽의 흙담이 두터워
춥지 않았다.
뜰 앞에 있는 대추나무나 밭가에 있는 버드나무와 배나무의
잎은 남김없이 모두 바람에 떨어졌다. 다만 집 동편에 있는 성긴
대숲의 잎만이 달라붙어 있었다. 거센 바람에 줄기가 부러질 것
같아도 대잎만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거센 바람이 계속해서 분다면 밭에 뿌린 밀의 싹이
나지 않을 건 뻔한 일이었으므로 왕룽은 걱정을 하면서 비가
내리기만 기다렸다. 어느 날 바람이 고요해지고 하늘이
흐려지더니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마음이
흐뭇해지면서 방안에 앉아 쏟아지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빗물은 마을 앞에 있는 밭에 스며들었고,
처마에서도 마구 떨어졌다. 아이는 그 빗줄기가 이상한 듯이
빗줄기를 잡으려고 두 손을 밖으로 내밀고 웃었다. 어른들과
같이 웃었다. 늙은이도 손자 곁에 앉아 있다가 손자의 하는 양을
보고 좋아했다.
"이렇게 영리한 놈은 없을 거야. 작은집 아이들은 걸음을 배울
때까진 아무 것도 알지 못했어."
축축한 밭에서 푸릇푸릇한 밀싹이 땅 위로 움터 올랐다.
이럴 때면 농군들은 서로 찾아다니며 놀았다. 하느님이 그들
대신 말라가는 곡식에 비를 내려 주기 때문에 그들은 뼈가
아프도록 물통을 짊어지고 밭으로 물을 나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산을 쓰고 맨발로 좁은 밭둑길을 따라
이집저집 찾아다니면서 차를 마시기도 했다. 아낙네들은
바지런히 집에서 버선을 만들거나 옷도 꿰매고 설 준비를 했다.
그러나 왕룽과 오란은 그다지 나다니지 않았다. 이 마을엔
조그마한 집이 여섯 채나 있었으나 왕룽의 집처럼 풍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 친근해지면 돈을 빌려 달라고 할까봐
왕룽은 은근히 두려워했다. 설도 가까워 오니 음식도 장만해야
하고 새 옷도 지어야 하기 때문에 모두들 돈을 빌려 쓰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왕룽은 될 수 있으면 그들을 피하기로
하고 밖에 나가려 하지 않았다. 오란은 옷을 꿰매고 그는
대갈퀴를 내어다가 부러진 곳을 새로 갈거나 삼노끈으로 잡아
매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농구를 손질하면 아내는 그릇을 손질했다. 설사
옹기 그릇 같은 것이 금이 가도 다른 아낙네들처럼 내버리고 새
것을 사지 않고 진흙으로 그 틈을 메우고 숯불에 구워 새 것
같이 만들었다.
그들은 집안에만 눌러 앉아 두 사람만의 즐거움을 나누는
것으로 만족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언제나
간단했다.
'저 호박씨를 받아 두었는가?' 라든지, '보리짚은 팔기로 하고
콩대를 때지.' 따위의 사소한 이야기였다.
간혹 왕룽이 '이 국수는 맛있는데......' 하고 음식을
칭찬하면 오란은, '올해는 잘 익어서 그렇죠.' 하고 쑥스럽게
대답하곤 했다.
풍년이었끼 때문에 왕룽은 추수한 것을 팔아 그들이 쓰고도
남을 만한 상당한 은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돈을 허리에
차고 다니는 것이 위험하고 아내 이외의 사람이 알게 되면
곤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은전을 어디에
숨겨둘 것인가를 의논했다. 그 결과 오란의 생각에 따라 침대
뒤에 있는 벽에 구멍을 파고 은전을 집어넣은 다음 진흙으로
발라 버리기로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감쪽같은 일이었다.
왕룽은 부자처럼 마음이 느긋했다. 다 쓸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한 마을 사람들을 대해도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 같았다.
5
설날이 가까워지자 어느 집에서나 설 준비에 바빴다. 왕룽도
성안에 있는 가게에서 네모난 붉은 종이를 몇 장 샀다. 종이에는
복을 청하는 뜻깊은 글자가 금박으로 써 있엇다. 그 부적을
농기구에 붙여 놓으면 새해에는 복을 많이 받는다는 풍습이
있었다. 왕룽은 그 붉은 종이를 소 멍에에도 붙이고 거름이나
물을 나르는 통과 가래에도 오려 붙였다. 그리고 대문에는 복이
찾아온다는 글귀를 쓴 긴 종이를 붙이고 대문 위에는 꽃
모양으로 오린 붉은 종이를 붙였다. 사당의 지신을 위해서도
붉은 종이를 사 왔는데 늙은이가 그 떨리는 손으로도 모양 있게
종이 옷을 만들었다. 왕룽은 그것을 사당으로 가져가서 두
지신에게 정성들여 입힌 다음 향을 피워 새해의 복을 빌었다.
그리고 섣달 그믐날 밤에 가운뎃방 벽에 붙인 화상에게 정성을
드리기 위하여 붉은 초를 두 자루 샀다. 음식을 차리는 상이
바로 그 밑에 놓이기 때문에 상 위에 촛불을 켜는 것이다.
왕룽은 다시 성안에 있는 장터에 갔을 때, 돼지 기름과
백설탕을 마저 사 왔다. 오란은 그 돼지 기름을 쌀가루에
섞었다. 그 쌀가루는 그들의 논에서 거둔 쌀로 방아를 찧어 만든
열매였다. 오란은 쌀가루에 설탕을 넣고 개어 설떡을 만들었다.
그것은 황부자 같은 집에서나 만들어 먹는 월병(月餠)이었다.
그런 귀한 떡을 만들어서 탁자 위에 늘어 놓는 것을 본 왕룽은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다. 부잣집에서만 먹는 그런 떡을 만들 수
있는 여자는 이 마을에서는 오직 자기 아내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란은 그 떡에다 다시 여러 가지 꽃 모양을
놓았다.
"이건 먹기가 아까운데......"
하고 왕룽은 중얼거렸다.
곁에 앉았던 늙은이도 그 훌륭한 모양에 정신이 팔려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네 삼촌과 사촌을 불러서 구경시키는 것도 좋을 거야."
그러나 왕룽은 생활에 여유라곤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귀한
것을 보여주면 안될 것만 같았다.
"설이 되기 전에 그런 귀한 음식을 남에게 보이면 재수가
달아나요." 하고 왕룽은 아버지의 말을 가로막았다. 오란은 손에
가루를 묻힌 채 "이건 우리들이 먹을 음식이 아녜요. 꽃 무늬가
없는 걸로 손님에게 조금 대접하지요. 우리들은 백설탕이나 돼지
기름을 먹을 처지가 아니에요. 이건 황부자 댁 큰 마님께
드리려고 만든 거예요. 초이튿날 그댁에 아이를 업고 갈 때
가져갈 거예요.'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떡이 더한층 귀하게 여겨졌다.
왕룽은 지난 날 초라한 모습으로 찾아갔던 그 높은 대청에
이번엔 고운 옷을 입힌 아들을 데리고 또 이렇게 귀중한 떡을
선물로 가지고 간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흐뭇해졌다.
이와 같이 완벽한 모습으로 정초에 황부잣집을 방문할 일을
생각하니 설날을 위해 준비해야 할 다른 여러가지 일들은 모두
대수롭지 않게 생각됐다. 아내가 새로 만든 검은 무명옷을 입어
보았을 때에도 '황부잣집에 갈 땐 이 옷을 입고 가야지.' 하는
생각 뿐이었다.
초하룻날 삼촌과 이웃 사람들이 놀러와서 마음껏 먹고 마시고
난 뒤 아버지나 자신에게 온갖 축하의 말을 했으나 왕룽의
귀에는 그런 이야기 따위는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꽃무늬를 정성스레 놓은 떡을 그들에게 내놓으면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그 떡을 미리 다른 광주리에다 잘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꽃무늬를 놓지 않은 떡을 맛보고도 맛이
굉장하다고 떠들어 댔다.
"그것보다 훨씬 좋은 떡도 있는데 구경이라도 시켜줄까."
왕룽은 그렇게 소리치며 자랑하고 싶은 것을 참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황부잣집의 큰 대문
안으로 활개를 치며 들어갈 일만이 기뻤다.
초하룻날은 남자들이 서로 세배하고 마시며 논다. 이튿날은
여자들이 세배를 다니는 날이다.
이날 아침 오란은 새벽 일찍 일어났다. 오란은 어린 아들에게
그녀가 손수 지은 붉은 옷을 입히고 범을 수놓은 신을 신게
했다. 머리에는 왕룽이 그믐날 깎아 준 금부처를 수놓은 모자를
씌워서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왕룽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아내는 검고 긴 머리를 빗겨 내려 낭자를 틀어 올리고 왕룽이
사다 준 은도금이 된 비녀를 꽂고 새 옷을 갈아입었다. 그것은
왕룽이 자기 옷감과 함께 마련한 것으로, 스물넉 자를 포목
가게에서 샀던 것이다. 포목 가게에서는 한꺼번에 그처럼 많이
사면 두 자를 더 붙여 주는 것이 상례였다. 차림을 마치자
왕룽은 아들을 안고 아내는 광주리를 들고 성문으로 향했다.
그들은 황량한 겨울 들판을 걸어 갔다.
이윽고 왕룽은 황부잣집 대문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가
상상했던 대로 기쁜 일이 일어났다. 오란이 부르는 소리에
황급히 뛰어 나온 문지기는 그들의 차림새에 눈이 휘둥그래지며
언제나 하는 버릇으로 사마귀에 난 긴 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왕 서방 아니오. 이번엔 세 사람이 오셨군."
그는 그들이 모두 새 옷을 차려입고 어린 아이까지 안고 있는
것을 보자 다시 말을 이었다.
"지난해는 운수가 좋았는가 보구려. 새해에도 많은 복을
받으시오."
왕룽은 손아래 사람에게 대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농사가
제법 잘 돼서 그래. 풍작이라서......" 하고 말하고는
의기양양하게 문안으로 들어섰다.
문지기는 그만 기가 꺾인 듯이 말했다.
"누추하지만 잠시 제 방에서 기다려 주시오. 아주머니를
안으로 인도하고 오리다."
왕룽은 굉장히 큰 집의 안방 마님에게 선물을 가지고 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멀리 사라질 때까지 만족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아내가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보이지 않자 비로소 문지기 집으로 들어가서 그 곰보
마누라가 인도하는 대로 가운데의 탁자 왼편인 윗자리에 당연한
것처럼 당당한 태도로 앉았다. 그리고 곰보 마누라가 조심스럽게
날라온 찻잔을 보고서도 이따위 차는 먹지 않는다는 듯이 입도
대지 않았다.
문지기가 오란 모자를 안으로 인도하여 다시 돌아나올
때까지의 시간이 왕룽에겐 무척 지루하게 느껴졌다. 왕룽은
아내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아내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그것이
제일 먼저 궁금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의 표정만으로도 곧 알
수 있었다. 그는 요즈음에야 좀처럼 표정이 없는 아내의
얼굴에서도 쉽게 그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내는
지극히 만족한 모양이었다. 명절이라 아무 일도 없는
아낙네들만이 모여 있는 뒷방에서의 일이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왕룽은 문지기와 곰보 마누라에게는 눈인사만 하고
아내를 재촉해서 대문 밖으로 나와 아이를 받았다. 아이는
푹신한 새 옷에 싸여서 살포시 잠자고 있었다.
"그래, 어땠소?"
그는 뒤따라 오는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왕룽은 얼른 아내의
대답을 듣고 싶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아내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와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댁이 금년엔 좀 궁색한 모양이에요."
아내는 마치 신(神)이 굶주리고 있더라는 말을 하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왕룽은 그녀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아내는 아무리 재촉해도 곧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 한마디씩 띄엄띄엄 힘들여 말하는 답답한 버릇이 있었다.
"큰 마님은 헌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어요. 이런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는데 종들도 새 옷 입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러고는 약간 사이를 두고 말했다.
"우리 애처럼 고운 옷을 입은 애는 주인댁 안방에도
없었어요."
아내의 얼굴에는 매우 조용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왕룽은
소리를 내서 유쾌한 듯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아들을 다시
한 번 힘차게 껴안았다. 만사가 잘 되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한
가닥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탐스러운 아들을 안고 넓은
하늘 밑을 뽐내며 걷다가 우연히 지나가는 잡귀를 만나면 어떻게
하지. 그는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나서 황급히 앞섶을 벌려
아들의 머리를 품안으로 집어넣고 큰 소리로 외쳤다.
"못난 계집 같으니. 게다가 곰보가 되었으니 누가 너를 달라고
하겠니. 차라리 죽어 버리기나 해라."
아내도 어렴풋이 그 뜻을 짐작이나 한 듯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그래."
이렇게 하고서야 두 사람은 안심을 했다. 왕룽은 다시 먼저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래 그 댁이 왜 궁색해졌는지 물었소?"
"이전에 음식을 맡아 보던 내 윗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했는데요."
하고 오란은 대답했다.
"그이의 말을 들으니까 그 댁의 젊은 서방님들이 돈을 헤프게
써서 그 큰 집도 오래가지 않을 거래요. 젊은 서방님이 다섯
분이나 계시는데 모두들 먼 외국에 가서 돈을 물쓰듯 하고
계집을 자꾸 사가지곤 싫어지면 본집으로 보낸대요. 그리고
영감님도 해마다 한두 명은 꼭 첩을 얻는대요. 또 큰 마님이
피우시는 아편 값만 해도 돈으로 친다면 금화로 두 신짝에 가득
찰 만큼 많대요."
"그러니까 그렇지!"
하고 왕룽은 중얼거렸다.
오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또 올 봄에 셋째 아가씨 혼사가 있대요. 그 혼수감에
든 돈이 자그마치 공주님 몸값만큼이나 많이 들었대요. 그만한
돈이라면 큰 벼슬을 사고도 남는대요. 아가씨의 옷은
소주(蘇州)나 항주(杭州)에서 특별히 짜 맞추어 짠 것 뿐이고 그
옷을 짓는 데도 상해(上海)에서 일류 재봉사를 불러서 했대요.
아가씨는 절대로 다른 나라 여자들의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쓴대요."
"대체 누구한테 시집 가길래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일까?"
왕룽은 그 막대한 비용에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상해의 어느 대관(大官)집 둘째 아들이래요."
하고 오란은 잠깐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댁엔 돈이 대단히 궁색한 모양이에요. 영감님이 땅을
팔겠다고 말씀하세요. 그 댁의 남쪽 바로 성 밖에 있는 땅인데
위치도 좋지만 언제나 해자(垓字)에서 물을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나락만 심었던 땅이래요."
"땅을 팔아?"
왕룽은 황부잣집에서 정말로 돈이 궁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정말 어려운 모양이군. 땅은 농사짓는 사람들에겐
살이나 피와 같은 것인데."
그는 잠시 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이 걷다가 어떤
생각이라도 난 듯 손바닥으로 자기 아미를 탁 쳤다.
"진작 그 생각을 못하다니."
하고 그는 아내를 돌아 보았다.
"그 땅을 우리가 사자."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왕룽은 매우 기뻐했으나
오란은 너무나 뜻밖이라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땅을...... 그 땅은......"
오란은 말을 더듬었다.
"나는 꼭 사고 말아."
하고 왕룽은 소리를 더욱 높여 가며 말했다.
"저 그 황부잣집의 땅을 꼭 내가 사고야 말겠어."
"너무 멀잖아요?"
하고 오란은 놀라서 말했다.
"거기까지 걸어가서 농사 짓자면 반나절은 그냥 보낼 거예요."
"아무튼 나는 사고야 말겠어."
왕룽은 마치 어머니에게 자기 욕심대로 조르는 아이처럼
고집을 부렸다.
"땅을 사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돈을 벽 속에 묻어 두는
것보다는 몇천 배나 좋은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왜... 작은집
땅은 어때요? 우리 서편 밭에 잇달아 있는 땅을 판다는데."
하고 오란은 조용히 말했다.
"아저씨 땅 말이오?"
왕룽은 다시 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 따위 땅을 누가 사. 아저씨는 20년 동안이나 거름 한 줌
안 주고 콩깻묵 한 덩이도 넣지 않고 지어 먹었기 때문에 흙이
마치 석회 같아 그 땅은 못써. 나는 기름 진 황부잣집 옥토를
살테야."
그는 '황부잣집' 이란 말을 마치 이웃집 칭 서방네 땅이란
말처럼 쉽사리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였다. 그는 거만하고
호사스런 그 황부잣집에 가서 흥정을 해 볼 생각이었다.
"돈을 가지고 왔소. 땅값이 얼마요?"
하면서 영감이나 관리인에게,
"나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해 주시오. 시세대로
말씀하시오. 돈은 있으니까."
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그 부잣집에서 종 노릇을 하던 그의 아내가 지금까지
몇 대를 내려오면서 그 집의 큰 밑천이었던 그 땅의 일부분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오란도 왕룽의 생각을 알아챈 듯 자기
고집을 굽혔다.
"그러시다면 사도록 해요. 아무튼 논은 기름지고 좋을
테니까요. 또 해자가 가까워서 가물어 벼를 못 심는 일도
없으니까요."
다시 만족스런 미소가 오란의 얼굴에 살짝 피어 올랐다.
그러나 그녀의 실낱같이 검은 눈의 우울한 빛까지는 번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한동안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작년 이맘 때 나는 그 댁의 종이었는데......"
그들은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서 묵묵히 걸었다.
6
왕룽이 새로 산 땅은 그들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
그가 벽에 숨겨 두었던 돈을 꺼내 가지고 황부잣집으로 가서
주인 영감과 대등한 입장으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명예로운
일이었으나 그는 곧 후회를 했다. 당장에 쓸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돈을 넣어 두었던 벽 구멍이 텅 비어 있는 것을 생각하니
땅을 도로 무르고 싶었다. 결국 땅을 더 가지면 힘도 훨씬 많이
든다. 또 아내의 말처럼 십 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그
땅을 사는 데 있어서도 그가 생각한 것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가 황부잣집에 찾아간 것은 정오가 지났을 때였다. 그는
뽐내는 어조로,
"영감님에게 내가 중요한 일로 찾아왔다고 전하게. 돈에 대한
의논이라고 말하게."
하고 말했으나 문지기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온 세상의 금덩이를 다 내준대도 나는 저 호랑이 같은
영감님이 주무실 때는 깨울 수 없소. 영감님은 사흘 전에
도화(桃花)란 새 첩을 얻었는데 지금 주무시고 있소. 만약 지금
깨우면 내 모가지가 위태롭소."
이렇게 말하고 그는 사마귀 위에 있는 세 가닥 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익살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돈 얘기쯤으로 영감님이 깬다고 생각한다면 말이
안돼요. 영감님은 돈에 파묻혀 살아왔으니 말이오."
그래서 결국 땅 흥정은 대리인과 하게 됐는데 그 사내는
개기름이 번질번질한 것이 꽤 능글맞은 사내였다. 또한 반드시
이런 거래에 있어서는 한몫 떼어먹는 것이 그의 고약한
인정이었다. 그래서 흥정이 끝난 뒤에도 가끔 왕룽은 역시 돈이
땅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주어 버린 빛나는 은전이
아깝게 여겨졌던 것이다.
하여튼 땅은 왕룽의 소유가 됐다. 2월 어느 흐린 날 그는 땅을
보러 갔다. 아직 아무도 그 토지가 그의 땅이 된 줄은 알지
못했다. 그는 혼자서 긴 네모꼴로 성벽을 둘러싼 해지를 따라
검은 땅을 살펴보니 길이가 삼백 보, 넓이가 백이십 보였다. 네
귀퉁이에는 황씨의 소유라는 큼직한 표석이 아직도 늠름하게 서
있었다.
이 표석 대신에 그의 이름을 새긴 표석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곧 세워서는 안된다. 그가 황부자 같은 부잣집 땅을 살만한
넉넉한 사람이란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언제든 더 큰 부자가 되어 무엇을 해도 상관없을 때에
자랑한다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둑에 서서
한동안 생각에 잠기었다.
"이 손바닥만한 땅은 황부잣집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내겐 소중한 피와 땀인 것이다."
다음 순간 그는 또 기분이 바뀌었다. 이 한 뙈기 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신이 가엾게 느껴졌다. 그것은 그가
뽐내면서 영감의 대리인에게 돈을 건넬 때에 대리인의 태도가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대리인은 아무렇게나 돈을 끌어
넣으면서, '아무튼 이것으로 큰 마님이 며칠 동안 쓰실 아편
값은 되겠지.' 하고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와 황부자 사이에 있는 거리는 그의 눈앞에
넘치는 강물처럼 건널 수 없는 것이고 또 그의 눈앞에 그대로
높이 솟아 있는 옛 성벽처럼 넘어갈 수 없는 것임을 새삼
느꼈다. 그러다 다음 순간 다시 그의 마음에는 분노에 넘칠 듯한
결심이 용솟음쳤다. 그는 저 침실 벽에다 몇 번이라도 은전을
메우고 지금의 이 한 뙈기 땅은 문제도 안될 만큼 많이 황부잣집
땅을 사고야 말리라!
이렇게 이 한 뙈기의 땅은 왕룽을 분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비를 실은 구름덩이를 모는 따뜻한 바람과 함께 다시 봄이
찾아왔다. 겨울 동안 집안에만 틀어 박혔던 왕룽은 들에 나가
부지런히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늙은 아버지가 손자를 돌봐
주기 때문에 아내는 그와 함께 첫 새벽부터 어두울 때까지 하루
온종일 일에 매달릴 수 있었다. 어느 날 왕룽은 아내가 둘째
아이를 임신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가을 추수 때에
아내가 또 일을 못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그는
일에 지치고 신경이 날카로와져서 못마땅한 듯이 그녀에게
소리쳤다.
"또 애를 배었어. 꼭 바쁠 때만 아이를 낳다니."
"이번엔 아무렇지 않을 거예요. 처음이나 고생스럽지."
오란은 걱정 말라는 듯이 못을 박았다. 이때부터는 두 번째의
아이기 때문에 그들은 별다른 말도 안 했다. 마침내 어느 가을날
아침 오란은 손에 들었던 낫을 땅에 떨어뜨리고 기어가듯이
간신히 집으로 돌아갔다. 왕룽은 그날 점심 때도 집에 가지
않았다. 하늘에 비를 실은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데 들에는 익은
나락이 그대로 있어서 일초가 아까왔던 때였다. 해가 거의 질
무렵에 아내가 다시 그의 곁에 나타났다. 그녀는 배가 홀쭉
들어갔고, 기진맥진해 있었으나 겉으로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만두고 들어가 몸조리나 잘해."
왕룽은 이 말이 곧 입밖으로 나올 것 같았지만 아내가 아이
낳기에 고생한 것만큼 자신도 일에 지쳐서 못 견딜
지경이었으므로 낫을 움직거리며 한마디로 묻기만 했다.
"아들이야, 딸이야."
오란이 나직이 대답했다.
"또 아들이에요."
그 이상 그들은 아무 말도 없었으나 왕룽은 기뻤다. 잠시도 쉴
새 없이 엎드려서 나락을 베는 것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멀리
지평선 위의 자줏빛 구름 위로 달이 떠오를 때 비로소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왕룽은 늦은 저녁을 끝내고 햇볕에 탄 몸을 찬물에 씻고 나서
찬물로 입을 가신 다음에야 갓난 아이를 보러 침실로 들어갔다.
저녁 준비를 마치고 들어가 누웠던 아내 곁에 갓난 아이가 누워
있는데 첫아이보다는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토실토실한 게
얌전했다. 왕룽은 만족스러운 듯이 가운뎃방으로 돌아갔다.
해마다 아들을 낳는다. 그럴 때마다 붉게 물들인 달걀을 여러
집에 돌린다는 것은 할 수 없는 노릇이니 이제부터는 그만두기로
했다. 그건 첫아이 때만 하면 되는 거니까. 아내가 시집 온 후론
모든 일이 잘 풀렸다. 그는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또 손자가 태어났어요. 큰놈은 아버지가 데리고
주무시지요."
늙은이도 매우 기뻤다. 늙은이는 따뜻한 손자의 몸뚱이로 늙은
몸을 덥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아이가 어미 곁을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뒤뚱거리는 다리로 버티고
서서 어미 곁에 누워 있는 동생을 시무룩하게 들여다보다간
제자리가 없어진 것을 알았는지 고분고분 할아버지 방으로 가서
자게 되었다.
그해도 풍년이었다. 왕룽은 곡식을 팔아서 다시 벽 구멍에다
은전을 간직해 둘 수 있었다. 황부잣집에서 산 땅에서는 그가
이제까지 짓던 땅보다 두 배나 추수할 수 있었다. 토질도
좋거니와 물길이 좋아서 마치 잡초가 우거지듯이 모를 심지 않은
곳에도 나락이 잘 되었다. 이제는 그 땅이 왕룽의 소유란 것을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알게 되었다. 마을에서는 그를
이장(里長)으로 떠받들자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7
왕룽의 삼촌은 왕룽이 처음부터 염려하던 것처럼 이 무렵부터
두통거리가 되었다. 그의 무능력한 삼촌은 늙은 왕룽의 아버지의
동생이기 때문에 만약 살기가 곤란하게 되면 왕룽의 부양을 받을
권리가 당연히 있다고 생각했다. 왕룽의 집이 가난해서
그날그날의 끼니가 궁색했을 적에는 그의 삼촌은 그의 전답에서
나온 곡식으로 일곱 아이와 처자를 부양했었다. 그러나 삼촌
식구들은 먹기만 하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숙모는 집안
청소조차 하지 않고 아이들 역시 얼굴에 붙은 밥티까지 씻어내지
않았다. 딸 아이들은 시집 갈 나이가 돼도 머리에 빗질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거리로 나다니면서 예사로 남자들과 얼굴을
맞대고 말을 건네기까지 했다. 이것은 집안 친지들에게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날 왕룽은 사촌 맏누이의 그런 추한
꼴을 보자 집안 수치로 생각하고 삼촌집으로 찾아갔다.
"저렇게 마구 나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말을
함부로 건네면 누가 장가들려고 하겠소. 이제 시집 갈 나인데
오늘도 거리의 놈팡이가 어깨에 손을 대도 예사로 웃기만
합디다."
그러나 숙모는 도리어 왕룽에게 악을 썼다.
"아니, 시집 보내려 해도 시집 보낼 돈이나 중매쟁이 신발값
줄 놈이 있다더냐? 그야 그렇겠지. 누구처럼 처치 못할 만큼
돈이 남아서 부잣집 땅을 사들이는 사람의 말이야 다 옳지.
그렇지만 너의 삼촌은 재수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영감이야.
처음부터 운수가 나쁘니까. 그것이 너의 삼촌 죄인지 천명인지,
다른 사람들의 곡식들은 잘 되는데 왜 하필 우리집 곡식은
나기도 전에 땅속에서 말라 비틀어지고 몹쓸 잡풀만 무성한지.
네 삼촌은 등골이 부러지라고 일해도 고작 그 뿐이니 하는 수
없지."
그녀는 까닭없이 눈물을 짜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야 남들은 아무도 모르지. 팔자 소관이니까. 다른 집들
밭에는 나락이나 밀들이 잘 되는데 우리 밭에는 풀만 나고 집도
다른 사람 집은 몇 백 년이 돼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우리 집은
축대가 무너지고 벽이 뚫어지니 말이야. 다른 여자들은 아들만
잘 낳는데 이년은 아들을 배도 낳을 때는 계집이란 말이야.
아이고, 이 망할 년의 팔자를 어떻게 할꼬......'"
너무나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바람에 이웃 아낙네들이 무슨
변고가 생겼나 하고 문 밖까지 뛰어나와서 구경했다. 그러나
왕룽은 숙모의 발악을 꾹 참고 듣다가 할 말만을 했다.
"그야 그렇겠죠. 제가 숙부님께 충고한다는 건 말도 안될
일이죠. 그렇지만 이 말만은 해야겠어요. 누구나 딸자식이란 다
소문이 나기 전에 치워야 해요. 암캐를 아무렇게나 거리에
내놓으면 새끼를 내지르기 쉽단 말예요."
그는 이렇게 입바른 말을 하고는 악다구니를 하며 덤비는
숙모를 그대로 남겨둔 채 집으로 돌아왔다. 올해에도 그
황부자의 땅을 살 작정이고 여유만 있다면 해마다 살
생각이었다. 그리고 집을 새로 지을 것도 계획했다. 그는 이렇게
큰 지주로서 성공할 꿈을 꾸고 있는데 게을러 빠진 삼촌이
근방에 돌아다니면서 귀찮게 굴 것을 생각하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튿날 삼촌이 왕룽이 일하는 밭으로 찾아왔다. 오란은 둘째
아이를 낳은 지 벌써 열 달이 지나 세번째 해산이 가까웠다.
이번에는 몸이 무거워 며칠간 누워 있고 밭에 나오질 않았다.
왕룽은 혼자서 일하고 있었다. 삼촌은 이랑을 따라 터덜거리며
밭둑길을 걸어왔다. 언제나 삼촌은 웃옷 단추를 끼지 않았다.
그리고 허리끈을 아무렇게나 둘러매었기 때문에 갑자기
바람이라도 불면 옷이 벗겨질 것 같았다. 그는 왕룽의 곁으로
와서 왕룽이 콩밭 고랑에 괭이질 하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침내 왕룽은 고개를 들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숙부님 오셨는데 안됐지만 손은 뗄 사이도 없으니
용서하세요. 이 콩을 잘 되게 하자면 아시다시피 두세 번 이렇게
갈아줘야 하니까요. 숙부님 밭은 다 갈았겠죠. 전 워낙 손이
느려서 아무리 해도 쉴 새라곤 없군요."
삼촌은 왕룽이 빈정대는 눈치를 알았으나 그래도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팔자가 더럽게 사나운 모양이다. 금년에 심은 콩 스무
알에 한 알밖에 싹이 나오질 않았어. 그런데 그것조차 제대로
자라질 않으니 아무리 애써도 소용이 없어. 금년엔 콩을 사다
먹을 판국이니."
삼촌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왕룽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삼촌이 어떤 청을 하러 온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모른 척하고 부지런히 밭고랑을
갈기만 했다. 작은 흙덩이를 더 곱게 부수었다. 무럭무럭 자란
콩은 줄도 곧게 나란히 서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땅 위에
뚜렷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침내 삼촌은 참다 못해서 입을
열었다.
"네 숙모 말을 들으니 어제 네 누이의 걱정을 많이 했다면서.
정말로 네 말처럼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이미 너무 성숙했어.
그애가 벌써 열다섯 살이나 되었으니 그대로 나다니게 두었다가
개 모양으로 애나 배면 집안 꼴이 어떻게 되겠니. 생각해 봐라.
우리 집안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네 꼴인들 어떻게
되겠나를......"
왕룽은 힘껏 괭이를 내리 찍었다. 그는 가슴속에 있는 말을
쏘아 주고 싶었다. '그러면 왜 집에 있게 못해요? 바느질을
시키거나 부엌일을 시키거나 집안 청소를 시키지 않고요?'
그러나 이런 말을 어른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콩이 자란 주위에 있는 흙덩이를 괭이로 곱게 부수면서
못마땅한 얼굴로 잠자코 삼촌의 말을 경청만 했다. 삼촌은 슬픈
어조로 말을 계속 이었다.
"네 아버지처럼 너같이 부지런한 자식을 두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네 숙모는 계집애만 낳고 하나 있는 아들이란 건 게을러
빠져 도대체 일이라곤 할 생각을 안하니 차라리 없는 것이 낫지.
그렇지 않다면야 나도 너처럼 부자가 됐을 테지. 그리고 내가
부자가 됐더라면 너와도 나눠 쓰지. 그야 틀림없이 나눠
쓰고말고. 그 뿐일까, 네 딸이 있다면 상당한 곳에 시집도 보내
주지. 또 네 아들이 있다면 내가 보증금을 대서라도 큰 상점에
점원으로도 보내줬을 거야. 네 집도 돈 아끼지 않고 고쳐 주고,
네 먹고 싶은 대로 먹게도 하고 네 아버지와 조카까지도 소중히
생각하고 잘 먹일 거야. 같은 피를 나눈 형제이니만큼......"
왕룽은 간단히 대꾸했다.
"제가 부자가 아닌 것은 숙부님도 잘 아시죠. 그런데 식구가
다섯이나 되고 아버지는 늙으셔서 일을 못하시고 잡수시긴 해야
되고 거기다가 이번에 또 아이를 낳으니 말이에요."
이 말을 듣고 있던 삼촌의 음성이 갑자기 날카로와졌다.
"거 무슨 말이냐. 너는 부자야, 부자. 아무튼 너는 황부잣집의
땅을 샀으니까. 이 마을에 너만한 사람이 어디 있니."
이런 말을 듣고 보니 왕룽은 왈칵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괭이를 땅에 내리꽂고 삼촌을 흘려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제게 몇 푼의 돈이 있다면 그것은 저와 제 아내가 뼈아프게
일한 덕분이에요. 누구 모양으로 밭에 김을 안 매서 잡초가 나게
하고 아이들을 굶기면서 노름판이나 드나들거나 또 쓸지도 않은
지저분한 문간에서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으면서 세월을 보내지는
않았어요."
삼촌의 얼굴빛이 푸르락붉으락하더니 와락 조카에게 달려들어
두 뺨을 때리면서 소리질렀다.
"이 불측한 놈아. 그게 네 삼촌에게 하는 말버릇이냐. 너는
천륜도 모르고 도덕도 모른단 말이냐. 어른의 흠을 말하지
말라는 성현의 말을 들은 적도 없단 말이냐?"
왕룽은 어른에게 지나친 말을 한 것이 잘못이라고는
생각되었으나 마음 속으로는 분통이 가라앉지를 않아 그저
시무룩하니 서 있었다.
"이놈 네가 한 말을 그대로 동네 사라들에게 말할 테다."
삼촌은 미친 사람 모양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놈, 어제는 내 집에 와서 동네 사람들이 다 듣게끔 내 딸이
성하지 않다구 떠들어 대더니 오늘은 내게 이렇게 고약하게
하고, 이놈아 네 아비가 죽으면 내가 네 아비 노릇을 할 것
아니냐. 내 딸년이 화냥년인지는 몰라. 그렇지만 너밖에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없어 이놈아."
삼촌은 몇 번이나 되풀이해 가며 말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해. 네놈의 행실을."
마침내 왕룽은 마음에 없는 말이지만,
"그럼 저더러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행실이 나쁘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소문을
퍼뜨리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쨌든 한
피를 나눈 친척이 아닌가?
삼촌의 태도는 돌변했다. 화가 났던 얼굴은 곧 풀어졌고
웃음까지 띠더니 다정스럽게 조카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네 착한 마음씨를 나는 잘 알지. 이
늙은 삼촌도 너를 아들같이 여긴다. 그래서 너를 믿고 말하지만
이 늙은이 손에 은전 열 닢만 아니, 아홉 닢도 좋으니 조금만
다오. 딸 아이의 중매를 부탁해야겠다. 네 말대로 시집 보낼
때가 되었잖니. 어디 혼처를 알아봐서 시집을 보내야지."
삼촌은 한숨을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왕룽은 집어 들었던 괭이를 다시 땅에
내던지며 말했다.
"집으로 오세요. 전 부자들처럼 언제나 돈을 허리춤에 가지고
다니진 않으니까요."
땅을 사려던 은전이 삼촌의 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돈은
해가 지기 전에 노름판 탁자 위에서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니
왕룽은 목이 콱 막힐 만큼 분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냥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니 두 아이가 옷을 벗은 채로 사립문 앞에서
놀고 있었으나 왕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삼촌은 매우 다정스럽게 아이들을 불러 남루한 허리춤에서
동전을 꺼내어 한 닢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 토실토실한
아이들을 얼싸안으며 귀여워 못견디겠다는 듯이 볼을 비벼 대며
햇볕에 그을은 살 냄새를 맡았다.
"이놈들, 잘도 생겼다."
그러나 왕룽은 그런 광경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내와 함께 쓰는
침실로 들어갔다. 갑자기 밖에서 들어온 그에게는 창구멍에서
새어 드는 한 줄기 햇볕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전날 기억에 있던
비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얼른 아내에게 물었다.
"아니 벌써 해산했어? 무얼 낳았어?"
그러나 아내는 맥없이 가느다란 소리로 대답했다.
"낳긴 낳았어요. 이번엔 계집애예요."
왕룽은 주춤했다. 계집애라니. 삼촌 집이 재수가 없는 것도
계집애만 낳았기 대문이 아니던가! 그런 계집애가 자기 집에서도
태어나다니.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벽을 더듬었다. 그곳에 은전을
보관해 둔 것이다. 덮개를 열고 은전 아홉 닢을 꺼내 들었다.
"돈을 왜 꺼내요?"
오란은 어둠침침한 속에서 물었다.
"숙부님에게 빌려 주는 거요."
오란은 처음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잠시 사이를 둔
다음에야 그 묵중한 태도로 말했다.
"빌려 준다는 말은 마세요. 거저 주는 거지. 그 집에서 어디
빌려 쓰는 일이 있나요."
"나도 잘 알아. 일가라고 해도 돈을 주는 것만은 살을 베어
주는 것과 같아."
왕룽은 불쾌한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는 사립문 밖으로 나가서 던지다시피 삼촌에게 돈을 주곤
다시 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축을 뚫을 듯이 힘차게 흙을
뒤지면서도 한동안 그는 아홉 닢의 은전만 생각했다. 그가 내어
준 은전이 노름판 탁자 위에서 놈팡이들 손에 사라져 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가 천신만고 끝에 피땀을 흘려 가며 땅을
파서 모은 그 피땀어린 돈이 하루 아침에 그렇게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는 일에 지쳤을 무렵에야 비로소 분노도 가라 앉았고 다시
집안 생각을 머리에 떠올렸다. 허리를 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난 것은 집안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는 사실과 자신도 계집애를 낳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딸
자식이란 애써 길러도 남의 집으로 가 버린다는 것을 생각하니
맥이 풀려 버렸다. 아까 집에 갔을 때에는 삼촌에 대한 노여움
때문에 아이의 얼굴조차 잘 보지 않았다. 지친 몸을 괭이로
받치고 섰노라니 점점 슬픈 생각을 이길 수 없었다. 가까이 있는
밭을 사려고 했으나 그런 모든 계획은 다음 추수까지 미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집안에는 날이 갈수록 식구만 늘어가는
것이다.
황혼이 짙어가는 하늘에 새까만 까마귀 떼가 그의 머리 위를
날아갔다. 그리곤 요란스럽게 울어 대며 그의 집 가까이 있는
나무숲에 내렸다. 왕룽은 그 뒤를 달려 가며 소리를 지르고
괭이를 내저었다. 까마귀 떼는 하늘로 날아 올라 그의 머리 위를
두 번이나 빙빙 돌면서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까욱거리다가
어두워지는 하늘로 멀리 사라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하였다. 불길한 징조인 것이다.
8
하느님은 한번 사람과 등을 지게 되면 다시는 그 사람이
어떻게 하든 살려 주지 않는 모양이다. 이른 여름에 내려야 할
비가 내리지 않고 날이면 날마다 무심하게 햇볕만 내리 쬐었다.
땅 위의 모든 것이 마르거나 사람이 굶거나 하느님은 언제까지나
무관심했다. 하늘에는 한 점의 구름도 찾아볼 수 없고 밤이면
아름다운 별만 무정하게 반짝였다.
왕룽은 죽을 힘을 다해 애썼으나 전답은 모두 메마르고 쩍쩍
갈라졌다. 봄과 함께 힘차게 돋아났던 밀이 이삭을 맺으려
했으나 하늘과 땅에서 조금도 양분을 받지 못한 채 따가운
햇볕을 받고 있는 동안에 이삭은 점점 타들어 가기만 했다. 논
못자리에는 왕룽이 매일 무거운 물통을 어깨에 메고 날라 주었기
때문에 빨간 들판에 한 점의 푸른 점같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깨가 움푹해지고 커다란 못이 박혔건만 비는 아직도
내리지 않았다.
마침내 못물까지 말라서 바닥이 드러났고 우물물도
말라버렸다. 오란은 참다못해 왕룽에게 말했다.
"아이들이 물을 마시고 아버님이 뜨거운 물을 찾으면 곡식은
타버려요."
왕룽은 화를 냈으나 그도 역시 목멘 음성이었다.
"그렇지, 모판마저 마른다면 우리들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어."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의 생활은 전부 땅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추수를 할 수 있는 곳은 해자 곁의 논
뿐이었다. 왕룽은 다른 밭을 전부 단념하고 오직 이 해자 곁의
논에만 달라붙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자에서 물을 퍼올렸다.
그래서 간신히 이 논만은 추수할 것이 조금 남아 있었다. 이
해에 왕룽도 처음에는 추수한 쌀을 곧장 팔았다. 손에 은전을
받았을 때 이 돈을 어디다 쓸 것인가 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굳게 움켜쥐었다. 하느님이 어떻게 하든지 흉년이 얼마나
심하든간에 그는 처음의 결심을 그래도 밀고 나갈 생각이었다.
이 한줌의 은전을 얻기 위하여 그는 뼈가 부서지도록 피땀을
흘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돈으로 소원을 이루어 보고 싶었다.
그는 곧장 황부자의 논을 사기 위하여 그 집 대리인을 찾아가
인사 치레도 잊고 말을 꺼냈다.
"해자 곁의 내 논에 붙은 이 댁 논을 사려고 돈을 가지고
왔소."
그는 이 한 해 동안 황부잣집 형편이 말이 아니게 궁해졌다는
소문을 종종 들어서 알고 있었다. 큰 마님의 아편조차 못 사는
때가 며칠씩 계속 되었고 그럴 때면 큰 마님은 마치 늙은
호랑이처럼 미친 듯이 대리인을 불러서 욕을 퍼붓고 부채로
얼굴을 때리며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그래 팔 땅이 없단 말이냐?"
하고 대리인이 정신도 못차리게 소리를 질러 댔다.
그래서 대리인은 남몰래 떼어먹던 구전까지 큰 마님 아편을
사기 위하여 바쳤건만 그래도 역시 그것 가지고는 부족했다.
그리고 영감님도 이런 낭비가 오히려 부족한지 또 새로 첩을
얻어들였다. 이 새로 들인 첩은 젊은 시절에 그가 사랑하던 종의
딸이었다. 그 종을 첩으로 들어 앉힐 수는 없어서 남종과 혼인을
시켰는데 열여섯 된 그들의 딸을 보자 새로운 정욕이 불타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대체 영감님은 몸도 부자연스럽고
비둔해졌으나 정욕만은 줄어들지 않고 날이 갈수록 섬약하고도
젊은 계집을 갖고 싶어했다. 큰 마님이 아편에 팔려 있는 것처럼
영감님은 정욕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그의 애첩을
위하여 옥귀고리나 금팔찌를 살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부잣집에서 자란 까닭에 손만
내밀면 돈은 얼마든지 있다고 늘 생각했다. '돈이 없습니다.'
라는 말은 그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또 자식들도 궁핍한 집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자신들이 일생을 호화롭게 지낼 만큼의 재산을 아직도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흥청거리고 편하게 지냈기 때문에 그
비대하던 대리인의 몸도 요즈음에 와서는 뼈가 드러나도록
수척해졌다.
하느님은 황부자의 전답에도 비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추수할 것이 없엇다. 그래서 왕룽이 대리인을 불러 '돈을 가지고
왔소.' 하는 말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가져왔소.' 하는
말과 같았다.
대리인은 두말 없이 왕룽에게 달려가 흥정을 시작했다. 전날
같으면 차를 마셔 가며 흥정했을 텐데 이번에는 얼마나
다급했던지 눈이 번쩍 뜨이는 양 곧 나지막한 음성으로 열심히
수군대곤 간단하게 흥정해 버렸다. 그래서 돈은 대리인의 손으로
넘어가고 증서에 서명 날인이 끝나니 땅은 왕룽의 것이 되었다.
왕룽은 그의 살과 피처럼 귀중한 은전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그 돈으로 그가 가장 소원하던
땅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새 땅은 처음에 산 것보다 배나
넓었다. 이렇게 그의 땅은 점점 늘어만 갔다. 그는 그것이 토질
좋은 땅이라는 것보다 몇 대나 두고 부귀를 자랑하던 황부잣집의
소유였다는 점에 더 한층 무한한 만족을 느꼈다. 그는 새 땅을
샀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오란에게까지도 말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가을이 가까워지자
하늘에는 마지못한 듯이 구름덩이가 나타나기도 했다. 마을
거리에는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걱정스러운 듯이 하늘을
쳐다보며 저 구름이 비를 싣고 있느니 없느니 하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비를 가져올 만한 구름이 보이기도 전에 먼
사막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이 구름을 빗자루로 쓸어 버리듯이
몰아갔다. 맑게 개인 하늘엔 아침마다 불같은 태양이 솟아 올라
저녁이면 쓸쓸히 져 버렸다. 그리고 밤이 오면 밝은 달이
태양처럼 빛났다.
왕룽은 밭에서 타다 남은 약간의 콩을 거두었다. 또 모를 옮겨
심기도 전에 누렇게 마른 못자리에 심었던 옷수수도 조금은
추수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한 알의 콩도 허술하게 놔둘 수
없었다. 그는 아내와 콩단을 헤쳐놓고 도리깨질을 한 다음에 두
아이를 시켜 여기저기에 흩어진 콩알을 낱낱이 줍게 했다.
옥수수를 거두어 들일 때도 한 알도 흘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옥수수대를 땔감으로 간수해 두려고 하자 오란은 말했다.
"그건 때지 않는 게 좋아요. 내가 어려서 산동(山東)에 있을
무렵에 흉년이 들자 옥수수대를 갈아 먹은 적이 있어요. 다른
풀을 먹는 것보다 나아요."
그 말에 그들은 모두 아이들까지도 넋잃은 사람 모양으로
멍하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렇게 무섭게 가물어서 흉년이 들
때는 누구나 불안한 생각이 자리잡는 것이다. 어떤 두려움도
모르는 것은 어린 젖먹이 계집아이 뿐일 것이다. 그 아이는
어미의 불룩한 두 젖이 항상 있어 배불리 젖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란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서 중얼거렸다.
"실컷 빨아라, 이 불쌍한 것아. 지금 많이 먹어 두어라.
머잖아 못 먹게 될 테니."
그런데 하느님은 아직도 그들의 고생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인지 오란은 또 아이를 배었다. 임신한 탓인지 젖이 나오지
않았다. 집안 식구들은 배가 고파서 무섭게 보채는 젖먹이의
울음 소리에 몸을 떨었다.
만약에 누가 왕룽에게, '그 어려운 가을을 어떻게 살아왔소?'
하고 묻는다면 그는, '나도 모르겠소, 그럭저럭 살아왔지.' 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묻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가오.' 하고
남의 사정을 걱정해 줄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은 이 지방에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뭘 먹고 지낼까?' 모두 그렇게
자신에게만 물어 볼 따름이었다. 또 '우리는 뭘 먹고 아이들에겐
뭘 먹이나?' 하는 걱정들 뿐이었다.
왕룽은 정성껏 소를 돌보았다. 처음엔 짚도 먹이고 콩깍지나
콩대도 조금씩 주었다. 그것이 없어지자 나뭇잎을 뜯어다가
주기도 했으나 겨울이 되고는 그것조차 구할 수 없었다. 이젠 갈
밭도 없었다. 씨앗을 뿌려 보았자 말라 버릴 뿐이다.
그 뿐 아니라 그 씨앗조차 먹어 버렸기 때문에 소를 그냥
들판에 내놓아 풀을 마음대로 찾아 먹게 했다. 그러나 소도둑
맞을 염려가 있어서 맏아들을 소 등에 타고 있게 했다. 이제는
그것조차 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아이가 타고
있는 것쯤은 빼앗아서 잡아먹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소를 문간에 매어 두었더니 날이 갈수록 뼈와 가죽만 남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쌀도 다 떨어지고 밀도 떨어져 약간의 콩과
옥수수만이 남았다. 소는 배가 고파서 웅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늙은이가 말했다.
"이제는 소를 잡아먹는 수밖에 없다."
왕룽은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에겐 그 말이 '다음엔 사람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다.' 는 말과 똑같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
소는 송아지 때 사들인 이후 왕룽과 같이 자라다시피 했다.
언제나 함께 일하면서 기분에 따라 나무라기도 하고 칭찬도 해
오던, 사랑하는 친구같이 정든 소였다.
"소를 잡아먹으면 어떻게 해요. 나중 일도 생각해야죠."
그러나 늙은이는 예사롭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사람 목숨과 바꿀 수 있니. 내 목숨과 소 목숨과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단 말이냐? 그리고 또 네 아이들 목숨보다
소 목숨이 더 소중하단 말이냐? 아무리 해도 사람의 목숨은 다시
살 수 없지만 소는 다시 사올 수 있는 일이 아니냐!"
그러나 왕룽은 그날 곧바로 소를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그대로 지냈다. 아이들은 배가 고파서
칭얼댔지만 먹을 것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란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그의 눈치만 살폈다. 마침내 왕룽도 소를
잡기로 결심했지만 간장이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잡으려면 잡아. 그렇지만 내 손으로는 못 잡겠어."
그는 방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소의 비명을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오란은 가만히 밖으로 나가 큰 부엌칼로 소의 경동맥을
끊었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피를 그릇에 받아 모으고, 다시
가죽을 벗겨 살 한 점이라도 버리지 않도록 처리했다. 왕룽은 그
일이 끝나고 음식이 장만될 때까지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고기를 요리해 들여와도 목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억지처럼
국물만 조금 마시었다. 그러자 오란이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이미 죽은 소를 생각하면 무엇해요. 그 소는 이미
늙은 소였어요. 나중에 훨씬 더 좋은 소를 사면 되잖아요. 얼른
드세요."
왕룽이 겨우 힘을 얻어서 고기를 한 점 두 점 먹기 시작했다.
다른 식구들도 먹었다. 그들은 그 고기를 아껴 먹었다. 마침내는
뼈까지 갉아 먹었다. 남은 것은 가죽 뿐이었다. 그것은 오란이
대나무테에 펴서 말려 두었기 때문에 벌써 굳어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왕룽이 반드시 돈도 숨겨 두었고 곡식도 숨겨
두었다고 생각했으므로 처음에는 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제일 먼저 양식이 떨어진 삼촌이 찾아왔다. 삼촌의 아홉 식구는
벌써부터 굶주리고 있었다. 왕룽은 하는 수 없이 삼촌의
두루마기 자락에 약간의 콩과 금쪽같이 간직해 두었던 옥수수 한
줌을 넣어 주면서 말했다.
"이것 뿐입니다.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저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으까요."
그 다음날 또 삼촌이 찾아왔을 때 그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일가 생각을 하다간 우리가 굶어 죽겠소."
그날부터 삼촌은 발길에 채인 개 모양으로 왕룽에게서
돌아섰다. 그리고 마을에 돌아다니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조카놈은 돈도 있고 곡식도 숨겨 두고선 우리들에게 조금도
안나누어 주니 도시 그놈은 인륜도 모르는 놈이야. 삼촌이 굶어
죽게 되도 모른 척하는 놈이야. 죽일 놈 같으니."
이 조그마한 마을의 모든 집엔 양식이 다 떨어지고 남은 몇
푼의 동전까지도 장에 가서 모조리 다 써 버렸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차디찬 겨울 바람은 살을 에이는 듯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굶주림과 앙상하게 뼈만 남은 아내와 배가
고파 보채는 아이들의 신음 소리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 무렵에
왕룽의 삼촌은 초상집 개처럼 길거리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그
주린 입술로 소곤거렸다.
"저놈의 집엔 먹을 것이 있어. 저놈의 집 아이들은 모두
피둥피둥 살이 쪘단 말이야."
어느 날 밤 마을 사람들은 몽둥이를 들고 왕룽의 집으로
몰려가서 대문을 두드렸다. 마을 사람들의 고함 소리를 들은
왕룽이 대문을 열자 그들은 왕룽을 문밖으로 떠밀어 내고 또
벌벌 떠는 아이들을 문밖으로 몰아 낸 다음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낸 것은 약간의 콩과
옥수수 뿐이었다. 그들은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자포자기하여
고함을 치면서 탁자, 의자 등 얼마 안되는 살림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
그때 오란은 그들을 가로막고 서서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란은 솔직하고도 차근차근하게 말했다.
"그건 안돼요. 아직은 안돼요. 아직 탁자나 의자, 침대를 다
빼앗을 때는 아녜요. 당신네들은 우리들의 먹을 것을 한 알도 안
남기고 빼앗았지만 당신네들이 갖고 있는 탁자나 의자는 팔지
않았으니 우리 것도 가져 가서는 안돼요. 우리들은 다같이
불쌍한 처지예요. 이젠 우리들도 당신네보다 더 가진 것이
없잖아요. 당신네들이 우리 것을 빼앗았으니 그것만큼 우리보다
더 많이 가졌잖아요. 더 많이 가진 사람은 벼락을 맞을 거예요.
이러지 말고 우리 다같이 풀뿌리도 캐고 나무껍질도 벗겨서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할 것 아녜요? 당신들도 똑같이 자식을
기르고 있지 않아요. 나도 이 세 자식과 또 배 안에 든 자식이
있으니......"
오란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의 아픈 배를 눌렀다. 마을
사람들은 천성이 악한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듣자
도리어 부끄러운 듯이 슬금슬금 한 사람씩 빠져 나왔다.
그러나 이웃의 칭 서방만은 나가지 않았다. 본래 키도 작고
말이 없는 원숭이 얼굴 같은 모습의 그였다. 지금은 더 한층
여위어서 얼굴에는 벼만 앙상하게 남아 더욱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는 사과할 생각이었다. 그는 원래 착한 사나이였는데
배가 고파서 보채는 아이들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한 것 뿐이다.
그러나 이제 사과를 하려면 아까 한줌 빼앗아 쥐고 있는
옥수수를 도로 내놓아야 할 것이므로 그것이 고통스러웠다. 움푹
패인 눈으로 왕룽을 쳐다보기만 하다가 그도 슬그머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왕룽은 마당에 멍하니 서 있었다. 가을 추수 때면 언제나
타작을 하던 그 마당이다. 그러나 벌써 여러 달 동안 이 마당은
그냥 버려져 있다. 이제 집안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옥수수
한 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임신한 아내를 먹일 것도 없다.
아내는 자기 뿐만 아니라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새로운 생명도
길러야 한다. 그 새 생명은 사정 없이 어미의 피와 살을 빨아
먹으며 자라날 것이다. 그 순간 왕룽은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곧 그는 마치 혈관에 술 기운이 돌 듯이 어떤 생각이
떠올라 얼마쯤 위안이 되었다. 아, 다행이다. 저들은 내 땅을
빼앗아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다행히 곡식을 팔아서 땅과
바꾸어 두었던 것이다. 만약에 돈을 가졌더라면 오늘 저들에게
모조리 다 빼았겻을 것이다. 그 돈으로 곡식을 장만해
두었더라도 오늘 남김 없이 저들이 가져갔을 것이다. 땅을 사
두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다. 아무튼 땅은 내 것이다!
9
멍하니 문간에 앉아 있던 왕룽은 이렇게 앉아 있어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집안에서 그대로 앉아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날로 말라만 들어서
허리끈을 졸라 매야 하는 몸에도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마음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제 겨우 인생의 봄을 맞이한 청춘을
그대로 무정한 운명에게 내맡기기는 정말 싫었다. 그는 요즈음
형용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이따금 미친 사람
모양으로 마당에 뛰어 나와서 한결같이 푸르고 맑은 구름 한
덩이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하고 무정한 하늘을 향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이 빌어먹을 하늘아!"
하고 아무렇게나 되라는 듯 무엄하게 욕을 퍼부었으나 다음
순간 천벌이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화가 치밀어
원망스러운 듯이 소리를 질렀다. '네 마음대로 해라. 천벌을
받기로니 이보다 더하겠어!'
어느 날 그는 굶주려서 후들거리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사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태연하게 여신령과 나란히 앉아 있는
자신의 얼굴에 마음껏 침을 뱉었다. 두 지신 앞에 향을 피워 본
지도 이미 오랜 일이다. 이 몇 달 동안 어느 한 사람도 향을
피워 올리지 않았다. 붉은 종이로 만든 옷이 낡아져서 흙살이
보이건만 어디 바람이 부느냐는 격으로 그대로 앉아만 있다.
왕룽은 이를 부득부득 갈고 지신을 저주하면서 집으로 돌아가
무거운 몸을 그대로 침대에 던졌다.
모두 누워만 있었다. 일어난들 별도리가 없었다. 누워 있으면
간혹 잠이 오기도 해서 그 동안만이라도 배고픔을 잊을 수 있다.
그들은 말린 옥수수대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먹었다. 또
나무껍질을 벗겨 먹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말라 버린 겨울
들판을 헤매면서 풀뿌리까지 캐어 먹었다. 동물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소나 당나귀는 커녕 새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들의 배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불룩했다.
마을 거리에서는 나와서 뛰어 노는 아이들을 하나도 구경할 수
없었다. 왕룽의 두 아이도 겨우 문턱까지 기어 나와 햇볕을 쬘
뿐이었다. 무정한 태양은 한결같이 내리 쬐었다. 토실토실하던
그들의 몸뚱이는 여윌 대로 여위어서 닭 갈비처럼 뼈들이
앙상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계집애는 앉을 때가 됐는데됴
제대로 앉지 못하고 낡은 포대기에 싸여서 몇 시간이고 잠만
잤다. 처음엔 온 집안이 떠나가게 울어 대더니 이젠 힘없이
드러누워 무얼 입에 대어 주면 간신히 빨아 먹을 뿐 울지도
않았다. 얼굴엔 뼈만 남았다. 입은 마치 늙은이 모양으로
언저리가 오므라들고 입술도 파랬다. 움푹 패인 힘 없는 눈으로
사람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렇게 되어도 죽지 않는 생명은 부모의 심금을 울렸다.
만약에 다른 아이들이 자랄 때처럼 토실토실하고 생기가
있었더라면 왕룽은 딸 아이인만큼 이렇게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기막히는 일을 생각해서 때때로 왕룽은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불쌍한 것 같으니, 불쌍한 아기야."
한 번은 이 딸이 이빨도 없는 잇몸을 보이면서 방긋 웃는 것을
본 왕룽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왕룽은 앙상해진 그의
손으로 아기의 가느다란 발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의 웃옷을
헤치고 아이를 품안에 안고 몸을 덥혀 주면서 문턱에 걸터
앉아서 메마른 들판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늙은이는 누구보다도 잘 지냈다. 무엇이든 먹을 것이 있으면
아이들에게는 안 주더라도 늙은이에겐 주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왕룽을 효자라고 생각했다. 왕룽 자신도 그렇게 자부했다. 그는
살을 떼어서라도 아버지를 봉양하고 싶었다. 늙은이는 밤이나
낮이나 누워 있었다. 무엇이든 주는 대로 받아 먹었다. 그래서
햇볕이 따뜻한 날이면 문턱까지 기어나올 기력이 아직은 남아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마음이 너그러웠다. 어느 날 노인은
마치 깨진 대통에서 간신히 불려 나오는 바람 소리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다 더 심한 해가 있었느니라. 그 때는 얼마나 혹심했던지
아이를 잡아먹는 것을 보았다."
"우리 집에선 그런 일은 없어요."
하고 왕룽은 이 말이 무서워 이렇게 대답했다.
하루는 사람의 그림자 같지도 않은 앙상한 이웃 칭 서방이
왕룽을 찾아왔다. 흙같이 검게 마른 입술로 이렇게 말했다.
"성 안에선 개까지 모조리 다 잡아 먹었대. 말이거나 새나
동물은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다 잡아 먹었대. 우리도 농사
지을 소든, 풀이든, 나무껍질이든, 이젠 다 먹어 버렸으니
앞으로 무얼 먹고 살지."
왕룽은 할 말을 잃어 머리만 흔들었다. 가슴엔 앙상하게 뼈만
남은 딸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는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는
아이를 애처로운 듯이 내려다 보았다. 두 눈이 마주칠 때면 아이
얼굴에는 방긋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칭 서방이 해골 같은 얼굴로 다가서며 속삭였다.
"마을에선 벌써 사람 고기를 먹고 있어. 자네 삼촌도 숙모도
먹었대. 그 댁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온 마을이 다 아는 터인데
그래도 살아서 나다니는 힘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알 일이지."
왕룽은 갑자기 주춤했다. 칭 서방의 눈에 어려 있는 살기를
보자 왕룽은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마치 앞으로
닥쳐올 어떤 위험을 피하려는 듯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우리 이 마을을 떠나세."
그는 일부러 소리를 높여 말했다.
"남방으로 가세. 여기선 다 굶어 죽을 테니. 설마 아무리
하늘이 무심하다 해도 이 한(漢)족을 다 죽이진 못할 테니까."
칭 서방은 서글픈 어조로 왕룽에게 힘없이 말했다.
"아, 자네는 젊으니까. 난 자네보다 나이도 많고 마누라도
늙었네. 자식이라곤 쓸모 없는 계집애 뿐이니 나는 죽어도 한이
없으니까 여기서 죽겠네."
"그런 말 말게. 자네는 나보다 팔자가 좋으이. 나는 늙으신
노부가 계시고 아이가 셋이나 된단 말이야, 그 뿐인가? 또
뱃속에도 하나 더 들어 있으니. 아무튼 남방으로 안 가고 여기
있다가는 미친 개 모양으로 서로 잡아먹고 먹히게 될 것 같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왕룽은 자기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아내 오란을 불렀다. 오란은
음식거리도 없고 부엌에 불을 지필 나무조차 없기 때문에 언제나
침대에 누워 지냈다.
"여보, 여보, 우리 남방으로 가야겠소."
이렇게 말하는 그의 음성은 이 몇 달 동안에 누구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강하고 힘찬 목소리였다. 아이들이 그의 얼굴을
이상한 듯이 쳐다보았다. 늙은이도 침실에서 비실거리면서
나오고 오란도 간신히 일어나서 문설주를 잡으며 말했다.
"그럽시다. 죽더라도 걷다가 죽게."
임신한 아내의 배는 마치 허리에 혹이 달린 것 같았다. 살이
빠져서 광대뼈가 바위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내일까지만 기다려 보아요. 그때까진 애를 낳을 것 같아요.
배가 꿈틀거리는 모양이......"
"그럼 내일 떠나기로 하지." 하고 왕룽은 대답했다. 왕룽은
아내의 얼굴을 보니 지금까지 자신에 대해서 느낀 것보다 한층
더 심한 쓰라림을 느꼈다. 저렇게까지 굶주린 아내가 홀몸이
아님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했다. '가엾은 여편네...... 그래서
어떻게 걸을 셈이야.' 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때까지 문턱에 기대어 서 있는 칭 서방에게 미안한
듯 말했다. "자네 집에 무엇이든 있거든 한 줌이라도 좋으니
불쌍한 두 목숨을 살리는 셈치고 나누어 주게. 그러면 저번날
일도 잊어 버리겠네.'
칭 서방은 무안한 얼굴로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때부터 나는 자네에게 항상 미안스러워 맘이 편할 날이
없었네. 자네 삼촌이 공연히 자네 집에 곡식이 많이 있다고 해서
그런 짓을 했어. 내 진정 하느님에게 맹세하지만 우리 집 문앞
돌 밑에 팥을 조금 묻어 둔 것밖엔 없네. 그건 나와 내 아내가
숨겨둔 것인데 우리들이 마지막 죽을 때 그래도 뱃속에 무얼
넣고 죽겠다는 생각으로 남겨둔 것이지만 한줌 나눠 줌세.
그리고 내일 남방으로 떠날테면 떠나게. 우리 식구들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여기에 남아 있겠네. 나는 나이도 먹었고 아들도
없으니 죽든 살든 상관없네.'"
칭 서방은 집에 돌아갔다 오더니 이윽고 팥 두 줌을 보자기에
싸 가지고 왔다. 흙에 묻어 두었던 탓인지 곰팡이 냄새가
풍겼다. 먹을 것을 보자 아이들은 왕룽에게 달려 들었고
늙은이도 눈을 번뜩였다. 그러나 왕룽은 이때만은 그들을
뿌리치고 누워 있는 아내에게 갖다 주었다. 오란은 아무 것도
먹질 않으면 해산하다가 죽고 말 것 같아서 미안하게 여기면서도
한 알씩 먹었다. 왕룽은 몇 알의 팥을 손아귀에 숨겨 두곤 입에
넣어서 부드럽게 씹어 어린 딸아이 입에 옮겨 주었다. 조그마한
입술이 오물오물하는 것을 보니 자기가 먹는 것같이 흡족했다.
그날 밤 왕룽은 가운뎃방에서 밤을 새웠다. 두 아이는
늙은이와 같이 자고 또 한방에선 아내가 해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맏아들을 낳을 때처럼 귀를 기울이고 앉아 있었다.
이렇게까지 굶어서 쇠약해져도 오란은 해산하는데 남편을 못
오게 했다. 오란은 헌 대야를 방안에 들여다 놓고
기어다니면서라도 손수 뒤치다꺼리를 다 하는 것이다.
왕룽은 몇 번이나 들어서 익숙해진 아이 우는 소리만 나기를
기다리며 마음을 졸였다. 사내건 게집애건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또 한 식구가 늘어나는 일만이 문제인 것이다.
"차라리 죽어서 나왔으면 태어나서 굶어 죽기보다 불쌍하지나
않지.'
하고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가느다란 아이의
울음소리가 집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이런 때에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 그는 쓴 입맛을
다시며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울음 소리는 다시 나지
않았다. 온 집안은 또 무거운 정적에 잠기었다. 요즈음엔 어느
집이나 이렇게 조용한 것이다. 모두들 죽기만 기다리면서 누워
있기 때문이다. 왕룽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왕룽은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엄습했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오란이 있는 방
앞으로 가서 문틈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자기 소리에 약간
기운을 얻었다.
"여보, 괜찮우?" 하고 말하고 나서 그는 다시금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렇게 앉아 있는 동안에 아내가 죽지나 않았나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대답은 없으나 약간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내가 뒤치다꺼리를 하는 모양이다. 이윽고 아내의 한숨 섞인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그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침대 위에
초라하게 누워 있었다. 얼마나 여위었는지 덮고 있는 이불조차
거의 평평했다. 아내는 어쩐 일인지 혼자 누워 있었다.
"아이는 어떻게 했어?" 하고 왕룽은 물었다.
오란은 이불 위로 간신히 손을 뻗어 가리켰다. 마룻바닥에
죽은 갓난 아이가 누워 있었다.
"죽었나?"
그는 문득 소리를 놓여 물었다.
"죽었어요."
아내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왕룽은 몸을 굽혀 한 줌밖에 안되는 갓난애의 시체를
쳐다보았다. 말라서 한 줌의 뼈와 가죽뿐인 계집애였다.
"방금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살았는 줄 알았더니......"
하고 말하려다가 왕룽은 문득 아내를 쳐다보았다. 오란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잿빛 같았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보였다. 극도의 고통을 참아낸 그녀의 애처로운 얼굴을 보니
그는 말문이 막혔다. 아무튼 이 몇 달 동안 왕룽의 고통이라야
자기 한 몸 뿐이었지만 아내는 뱃속에서 굶주리고 있는 자식을
살려 보려고 얼마나 죽을 애를 썼을 것인가! 가슴을 치는 것처럼
아팠다.
왕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 시체를 봉당으로 옮긴 다음
거적을 찾아서 쌌다. 동그란 머리가 이리저리 달랑거리고 목에는
두 곳에나 검은 상처가 있었다. 시체를 거적에 싼 그는 걸을 수
있는 한 집에서 멀리 걸어가서 오래된 무덤이 있는 데까지
아기와 시체를 옮겼다. 그곳은 왕룽의 서편 밭을 따라 있는
언덕의 중턱으로 임자 없는 무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곳이다.
그가 시체를 땅에 내려놓자마자 난데 없이 늑대 같은 개 한
마리가 등 뒤에서 나타났다. 왕룽이 돌멩이를 집어 던져 그 여윈
옆구리를 맞혔으나 그 개는 몇 발자국 물러섰을 뿐이었다. 한
동안 서있던 왕룽은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해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그곳을 떠나 버렸다.
"이대로 두는 수밖에 없구나."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왕룽은 이때처럼 절망스런 적이
없었다.
이튿날 아침, 한결같이 변함없는 푸른 창공에 태양이 떠오르자
왕룽은 어린 자식과 쇠잔한 아내와 늙은 아버지를 이끌고 집을
떠날 결심을 했던 어제가 꿈만 같았다. 아무리 풍요한 좋은 땅이
남방에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나 처자가 어떻게 몇백 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는가? 또 과연 남방으로 간다면 우리 가족이 먹을
것이 있을까? 이 구릿빛 나는 가문 하늘이 끝없이 남방까지
이어져 있을 것만 같았다. 이미 힘껏 걷기는 걸어도 여기보다 더
흉년이 심한 구경을 할 뿐이고 마침내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죽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낯익은
고향에서 죽는 것이 나을 성싶었다. 이렇게 용기를 잃어버린
그는 대문 앞에 앉아서 지금까지 먹을 양식이며 땔나무며 열심히
일만 하면 무엇이나 얻을 수 있었던 그의 전답을 바라보았다.
그에겐 벌써 동전 한 닢도 남은 게 없었다. 설령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곡식을 가진 사람은 부자들에게만 판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지금의 그에겐 아무 흥미도 없는
일이었다. 성안에만 간다면 먹을 것을 거저 준대도 성안까지
걸어갈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그는 극도로 절망에 잠겨
이젠 배고픈 것조차 모르게 되었다.
배고픈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처음 뿐이었다. 그때가 지난
지 이미 오래다. 이제 뱃속에서는 그렇게 절박한 요구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는 밭의 흙을 파다가 아이들에게 먹였으나
자기는 먹지 않았다. 이 흙을 물에 풀어서 그들은 며칠간의
요기를 했다. '관음보살님의 흙' 이란 이름을 가진 그 흙에는
약간의 영양분이 있다고 들었다. 이 흙으로 언제까지나 생명을
이어갈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얼마 동안은 배고픔을 잊고
지낼 수 있었다. 헛배 부른 배를 메울 수가 있었다. 왕룽은
그동안 누가 뭐라든 먹지 않고 오란이 소중하게 간직해 둔 팥에
손대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이따금 한 알씩 깨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그 후 또 며칠이 지났다. 문턱에 앉아 있던 왕룽은 만사를
단념하고 침대에 누워 죽음의 즐거움을 꿈같이 생각하고 있을 때
밭길을 건너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랜만이다." 하고 삼촌은 큰소리로 다정스럽게 불렀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서면서 같은 어조로 말했다. "그래, 잘
지내는구나. 네 아버지는...... 우리 형님도 잘 계시냐?"
왕룽은 삼촌을 쳐다보았다. 여위기는 했으나 자기처럼 굶주린
것 같지는 않았다. 왕룽의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생명력은
눈앞에 선 삼촌에 대한 분노로 불같이 타올랐다.
"숙부님은 어떻게 지내왔어요. 어떻게 먹고 살아요?" 하고
그는 무거운 혀를 간신히 움직여 가며 이렇게 물었다. 그는 옆에
함께 서 있는 낯선 사람들에 대한 체면도 잊었다. 다만 그는
아직도 뼈에 살이 붙어 있는 그의 삼촌만을 노려보았다. 눈이
휘둥그래진 삼촌은 손을 들어 자기 집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어떻게 먹느냐고? 내 집에 와 봐라. 네가 잘 알다시피
그렇게 살 쪘던 숙모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서 마치 빨래를
대나무에 널어 놓은 것 같다. 아이놈도 넷밖에 안 남았다.
작은놈 셋은 죽었다, 죽었어. 이 삼촌도 네가 보는 대로 이꼴 이
모양이 아니냐!'
삼촌은 가만히 소매 끝으로 두 눈을 닦았다.
"그렇지만 숙부님은 무엇이든 자셨지요?' 왕룽은 바보처럼
거듭 중얼거렸다.
"나는 언제나 큰집 일만 걱정했다. 너나 네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말야." 하고 그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 증거를 보이러 왔다. 그건 다름 아니고 여기
함께 온 양반들이 성안에서 사시는데 마을의 땅을 사신단다.
그래서 나는 우선 네 땅을 사시게 하여 네 목숨을 연명하게 해
보려고 왔단 말이다. 나는 다른 집보다 큰집 것을 먼저 사게 해
보려고 이렇게 온 거란 말야. 뭐니뭐니 해도 목숨이 제일
소중하잖니." 이렇게 말을 하고는 한 걸음 물러서며 누더기 같은
두루마기를 펄렁거리고 팔짱을 꼈다.
그러나 왕룽은 눈하나 꿈쩍 하지 않았다. 그는 일어서지도
않았고 손님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그들이 성안에서 온 것은
틀림없었다. 때묻은 비단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손은 부드러웠고
손톱을 길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얼마든지 남아 있는 것 같았고
기운도 나는 모양이었다. 왕룽은 갑자기 그들에 대해 알 수 없는
증오를 느꼈다. 자기의 자식들은 흙까지 파먹는데 그들은 저렇게
배불리 먹고 마시며 이제는 이 궁지에 몰린 그에게서 땅을
헐값에 빼앗으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해골같이 뼈만 남은 얼굴에 분기를 돋우며 그들을
쏘아보았다.
"난 땅을 안 팔겠소." 그는 한마디로 쏘아붙였다. 삼촌은 또
앞으로 나섰다. 이 때 왕룽의 두 어린 자식이 기어나왔다.
아이들은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져 마치 어린애 모양으로
기어다녔다.
"이 애가 네 아이냐?"
삼촌은 놀란 듯이 물었다.
"지난 여름에 내가 동전을 준 그 토실토실하던 놈이란
말이냐?"
그들의 눈은 모두 아이에게로 쏠렸다. 이 몇 달 동안에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는 왕룽은 갑자기 흐느껴 울었다. 목이
메이는 듯 눈물이 볼을 따라 좌르르 흘러내렸다.
"값은 얼마나 주겠소?"
마침내 왕룽은 물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세 아이만은 먹여
살려야 한다. 자신과 아내는 굴을 파고 그 속에 누웠다가 죽을
수 있으나 아버지와 아이들만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안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 한쪽 눈이 푹 꺼진 사내가
다가서면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아이들이 불쌍하니까, 기왕이면 누구보다 좋은 값을 쳐
드리죠." 하고 잠시 사이를 두더니 곧 칼로 끊듯이 잘라 말했다.
"1정보에 동전 백 닢 드리죠." 왕룽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무어요? 그건 거저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오. 나는 그
스무 곱이나 주고 샀소."
"그렇지만 당신은 굶어 죽어 가는 사람에게서 산 것은
아니겠죠." 하고 또 다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는 키가
작달막하고 여위었으며 콧날만 우뚝했으나 체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소리가 크고 야비했다.
왕룽은 새삼스럽게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왕룽을
얕보는 태도였다. 굶주린 아이들과 늙은 아버지를 가졌으니
그들의 말대로 땅을 팔고야 말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자 왕룽은 땅을 팔려던 약해졌던 마음이 갑자기 무서운
분노로 일변했다. 그는 마치 사나운 개가 도둑에게 달려들 듯
벌떡 일어섰다.
"죽어도 땅은 안 팔겠소. 난 이 땅의 흙을 파서 자식을 먹여
살리겠소. 그러다가 아이들이 죽으면 이 땅에 묻겠소. 차라리
나와 내 아내 그리고 아버지나 우리 가족 모두를 먹여 살려 주던
이 땅에서 죽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곤 악을 쓰며 울었다. 전신에 용솟음치던
분노가 사라지는 것 같았으나 그래도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다. 성안에서 온 사람들은 빙그레 웃으면서 바라보았고
삼촌도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들은 왕룽의 말을 마치
미친 사람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처럼 여기고 화가 가라앉기만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이때 오란이 문간으로 나왔다. 오란은 언제나 다름없는 그
묵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땅은 안 팔아요. 팔아 버리면 남방에서 돌아왔을 때 농사
지을 땅이 없어지니까요. 그러나 탁자하고 침대 두 개, 이불,
의자 두 개, 부엌에 있는 솥을 팔겠어요. 그렇지만 쇠스랑과
괭이나 호미 같은 농기구는 안 팔아요. 아무튼 땅은 안
팔겠어요."
오란의 침착한 이 말은 왕룽이 고함을 친 것보다 더한층 굳은
결심을 보여 주었다. 삼촌은 의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정말 남방에 가려구?'
잠시 후 애꾸눈이 그들에게 눈짓을 하더니 한동안 수군댔다.
이윽고 그는 오란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따위 물건이야 땔 나무밖에 더 되겠소. 전부 합해서 은전
두 푼에 판다면 사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두겠소."
그는 경멸하는 태도로 이렇게 말했으나 오란은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그런 값이라면 침대 한 개 값밖에 안됩니다만 돈을
가지셨거든 곧 주십시오. 물건은 지금 가져가면 되니까."
그 사람은 허리춤에서 은전을 꺼내 오란이 내민 손 위에
놓았다. 세 사람은 집안으로 들어 가서 탁자, 의자, 침대, 이불
등을 꺼내고 부엌에선 솥을 들어 냈다. 늙은이 방에서 물건을
들어 낼 때 삼촌은 밖으로 나가서 기다렸다. 형과 얼굴을 대하기
싫었고 늙은이를 마룻바닥에 눕히고 침대를 꺼내는 꼴은 그래도
차마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전부를 들어 내고 두개의 쇠스랑과
두 자루의 괭이와 호미만이 가운뎃방 모서리에 남게 되었을 때
오란은 남편에게 말했다.
"이 은전이 남아 있을 때 빨리 남방으로 갑시다. 이대로
있다간 대들보까지 팔아먹게 돼요. 나중엔 들어갈 움막조차
없어지겠어요.'
"그래, 떠나세, 떠나......" 왕룽은 허공에 뜬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밭을 건너서 멀리 사라지는 성안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직 땅은 있어------ 그래도 우리 땅만은 아직
가지고 있단 말이야."
10
남방으로 떠날 준비를 한댔자 사립문에 자물쇠를 채웠다는
것밖에 없었다. 옷은 있는 대로 모조리 껴입었다. 오란은 아이들
손에다 밥그릇과 젓가락을 쥐어 주었다. 아이들은 언제 먹게
될지 모르는 그릇을 밥이나 든 것처럼 꼬옥 안아들었다. 초라한
왕룽 가족은 밭을 건너서 걷기 시작했다. 걸음이 너무
느렸으므로 언제 성안에 닿을는지 까마득했다.
왕룽은 어린 계집아이를 안았다가 아버지가 걷지 못해서
넘어지는 것을 보자 아이를 아내에게 맡기고 아버지를 업었다.
늙은이는 바람개비처럼 쇠약했으나 왕룽은 그래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들은 묵묵히 사당 앞을 지나갔으나 두 지신은
어떤 것이 지나가던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태연했다. 쇠약한
왕룽은 살을 에이는 듯한 찬바람인데도 땀을 흘렸다. 차디 찬
바람이 계속해서 그들의 굶주린 어깨를 강타했다. 아이들은
추위에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왕룽은 아이들을 달래며
말했다.
"울지 마라. 너희들은 다 크지 않았니. 남방으로 가면 날씨도
따뜻하고 날마다 먹을 것도 있어. 모두 쌀밥을 먹게 될 거야.
이제는 너희들도 잘 먹을 수 있어." 조금 걷고 쉬고 또 쉬곤
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럭저럭 성문 앞까지 당도했다. 이곳은
언제나 시원해서 왕룽이 땀을 말리곤 하던 곳인데 오늘은 너무
추워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벼랑에서 얼음물이 흘러 내리는
것처럼 호되게 찬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발밑의 진흙바닥엔
칼날같이 얼음이 끝을 내밀어 아이들은 더이상 걸을 수 없었다.
딸 아이를 업은 오란도 발을 옮겨 놓기 어려워했다. 왕룽은 하는
수 없이 아버지를 업어다 놓고 다시 돌아와서 두 아이를 하나씩
들어다 옮겼다. 겨우 그 일이 끝나자 땀이 비오듯 흘렀다. 그는
기진맥진해서 성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숨을 헐떡였다. 가족들은
추위에 부들부들 떨면서 왕룽을 에워싸고 그가 움직이기만
기다렸다.
이윽고 황부잣집까지 다다랐다. 큰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양쪽에 있는 돌사자는 모진 바람에 시달려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문앞에는 초라한 모습의 남녀들이 웅크리고 앉아 닫혀
있는 대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비참한 왕룽 일행이 지나가자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부자놈들은 금년 하늘같이 무정하군. 이놈들은 쌀을 먹고도
남아서 술까지 빚어 처먹는대."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중얼거렸다.
"내가 조그만 힘이 있다면 그놈의 대문짝에다 불을
지르겠는데. 이놈의 안채까지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타 죽어도
한이 없겠어. 이런 황가놈 집에는 벼락도 안 내리나."
그러나 왕룽의 가족은 묵묵히 남쪽을 향했 걸었다.
그들이 성내를 지나서 남문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해가 저물고
어둡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남방으로 몰려가는 군중이 떼지어
있었다. 왕룽이 가족과 함께 하룻밤을 지낼 만한 자리를
찾으려고 성벽 밑을 둘러보는 동안에 그의 가족도 어느 결에 그
군중 속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는 곁에서 비비적거리는 사람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은 어딜 가는 거요."
"여기선 먹고 살 수 없어서 남방으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가는
길이오. 저 큰 집에 기차가 나온대요. 몇 푼만 내면 탈 수
있대요."
기차! 기차라는 이름은 누구든지 들은 일이 있다. 왕룽도
언젠가 찻집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여러 개의
찻간을 쇠사슬로 이어서 사람도 짐승도 아닌 용대가리 같은
기계가 불과 물을 토하면서 달린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언제 쉬는 날에 한번 구경가겠다고 몇 번이나
별렀던 것이다. 그는 성내 북쪽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관계로
농사일에 시달려 그런 틈을 전혀 얻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항상 믿지 않았다.
사람이란 매일 생활에 필요한 것만 알면 될 것이고 그 이상의
것을 알면 오히려 해롭다고 그는 믿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만은 그도 약간 망설이는 눈치로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들도 기차를 타고 갈까?"
그들은 늙은이와 아이들을 이끌고 군중과 약간 떨어진 곳으로
비켜서서 근심그러운 듯이 마주 보았다. 늙은이는 금방 땅에
주저앉아 버리고 아이들은 사람들 발길에 밟히는 것도 생각지
않고 길바닥에 누워 버렸다. 딸 아이는 아직도 아내가 안고
있었지만 목을 축 늘어뜨린 채 죽은 아이처럼 눈을 감고 뜨지
않았다. 왕룽은 놀라서 큰 소리로 물었다.
"아니, 아이가 죽지 않았어."
오란은 머리를 내저었다.
"아직은 살았어요. 이대로 놔두면 아마 오늘 밤 안으로 죽을
거예요. 우리도 다 죽겠어요.'
오란은 더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이 앙상한 얼굴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왕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 역시 이대로
하루만 더 걷는다면 내일 밤쯤은 꼭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있는 기운을 다 내어 말했다.
"자아, 애들아 일어나거라. 할아버지도 일으켜 드려라.
지금부턴 걷지 않고 기차를 타고 앉아서 간다."
그때 마침 캄캄한 어둠 속에서 벽력 같은 소리를 내며 두 눈에
불을 토하는 괴물인 기차가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움직일
기력조차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왕룽 일행은 혼잡 속에서도 서로 떨어지지 않게 손을
잡고 이리저리 밀리며 북새통에도 정신을 잃지 않고 큰 상자
같은 기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그들을 태운 기차라는 괴물은
어둠 속으로 킁킁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11
왕룽은 은전 두 닢을 꺼내어 사백리 길의 차비를 치뤘는데
그것을 받은 차장은 거스름 돈으로 동전 한줌을 쥐어 주었다.
다음 정거장에 기차가 정거하니 여러 가지 장사치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빵 네 개와 딸 아이를 먹일 죽 한 그릇을
샀다. 이 몇 달 동안 그들은 한 번도 이런 맛난 것을 먹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입에 넣고 보니 식욕이 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해서 간신히 먹였다.
그러나 늙은이만은 이도 없는 잇몸으로 끈기 있게 우물거렸다.
"아무래도 사람은 그저 먹어야 해."
늙은이는 옆의 사람들에게 다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기차가
흔들릴 때마다 여러 사람의 어깨가 서로 마주 부딪쳤다.
"오랫동안 먹질 않았더니 내 밥통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
아무튼 이 밥통을 움직이게 해야지. 그렇다고 죽을 수야 있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빙그레 웃는 늙인이에게 눈길을
모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왕룽은 돈을 아껴 썼다. 남방에 도착하여 움막을 지을
거적이라도 사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살 만큼 남기고
먹을 것을 사 먹기로 했다. 찻간에는 남방에 처음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해마다 남방 도시에 가서 노동을 하고
구걸하여 먹기도 했다고 말했다. 기차란 괴물과 창 밖으로 휙휙
달아나는 풍경에 눈이 익숙해진 왕룽이 비로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을이기 시작했다. 남방 사정에 밝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낯선 고장의 이야기를 자랑삼아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우선 거적을 여섯 장 사야 되죠." 하고 한 사나이가 말했다.
입이 낙타 주둥이같이 생긴 험상궂은 사내였다. "거적 한 장에
동전 두 닢씩이에요. 그렇지만 그것도 영리해야 돼요. 시골뜨기
같이 보이면 세 닢을 줘야 하니까요. 그런 것을 잘 알아서 사야
된단 말예요. 나는 잘 알아요. 나는 이래뵈도 그곳 사람들이
얕보지는 못해요. 부자들도요....." 이렇게 말하고 그는 여러
사람들을 한바퀴 휘둘러보았다.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왕룽은 얼른 다음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그 다음은 어떻게 하오?" 하고 재촉해서 물었다. 이
찻간은 나무 궤짝 같았다. 의자도 없는 마룻바닥에서 바람과
먼지가 쉴새 없이 날아들었다. 왕룽은 맨바닥에 앉아서 여심히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고는......" 사나이는 더욱 언성을 높여 가며 말했다.
그들이 앉아 있는 바닥 밑에서 울리는 진동이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 거적으로 움막을 짓고는 거지가 되는 거요.
얼굴에다 진흙이다 검정을 발라 될 수 있는 대로 불쌍하게끔
보이도록 하고 구걸하는 거지요."
왕룽은 아직 구걸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도회의 낯 모르는
사람에게 구걸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싫었다.
"꼭 구걸을 해야 하나요?" 그는 몇 번이나 재차 물었다.
"그럼요." 입이 낙타 주둥이 같은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설명했다.
"그렇지만 구걸도 배가 부른 다음에 하는 거요. 남방 도회엔
쌀이 흔해서 아침마다 공설 식당에 가서 동전 한 닢만 주면 쌀
죽을 배불리 먹을 수 있소. 그리고 나서 구걸을 해 가지고
두부나 배추나물 등을 사면 살아갈 수 있죠."
왕룽은 그들에게서 뒤편으로 약간 물러나 돌아앉아서 허리춤에
넣어둔 동전을 세어 보았다. 거적을 여섯 장 사고 온 식구가 쌀
죽 한 끼씩을 사 먹어도 동전 세 닢이 남는 셈이었다. 이만하면
새 살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흐뭇해졌다. 그러나 그릇을
들고 이집 저집으로 돌아다니면서 구걸질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싫었다. 늙은 아버지나 아이들이나 그의 아내 같으면
혹시 모르겠지만 그는 그래도 성한 사지가 있지 않은가.
"무엇이든 일거리는 없나요?" 하고 왕룽은 돌아앉아 그
남자에게 물었다.
"뭐? 일거리요?" 하고 그 사내는 왕룽을 멸시하듯 말하고는
찻간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그야 당신이 하고 싶다면 인력거라도 끌 수 있지요.
번지르르한 부자 사람들을 태워 가지고 한참 달리면 땀이 나고,
또 손님을 기다리노라면 그 땀이 얼어서 얼음 옷을 입은 것같이
돼요. 나 같으면 차라리 비럭질을 하겠소." 그는 말을 마치고
다시 못마땅한 듯이 중얼거렸기 때문에 왕룽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말을 들어 둔 것이 왕룽에겐 도움이 되었다. 기차가
도착하자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남방 땅애 내린 왕룽은 이미 모든
계획이 서 있었다. 정거장을 나서니 웅장한 집들을 둘러싼
석벽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왕룽은 아버지와 두 아들을 석벽
밑에 앉혀 놓고 아내더러 지키라고 하고는 거적을 사러 나섰다.
그러나 어디서 파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지나가는 행인에게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방 사람들의 말씨가 어찌나 빠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거듭 물으니 그들은
짜증을 내었다. 남방 사람들은 성미가 급했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친절해 보이는 사람을 골라서 묻기로 했다.
마침내 그는 시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찾아내었다. 왕룽은
거적 값을 잘 아는 사람처럼 동전을 척 내주곤 거적 여섯 장을
사서 걸머졌다. 가족을 남겨 둔 곳으로 돌아오니 그들은 그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늙은이는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이상한
듯이 구경을 하다가 아들이 돌아오자 입을 열었다.
"너도 알았겠지만 남방 사람들은 모두 살이 토실토실 쪄
있구나. 살결이 희고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것이, 매일같이
돼지고기로 포식을 하나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무도 왕룽의 가족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거리를 분주하게 오갈 뿐이었다. 거지 곁에 발을
멈추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따금 나귀 떼가 그 작은
발로 자갈을 밟으며 자박자박 지나갔다. 나귀들은 벽돌이나 곡식
포대들을 등에 얹고 있었다. 그런 나귀들마다 맨 뒤의 한 필에는
마부가 타고 큰 채찍을 내두르며 소리를 쳤다. 휙휙하고 채찍을
내두르는 소리가 났다. 마부들은 왕룽의 곁을 지날 때마다
거만스럽고도 모욕을 주는 느낌이었다. 길바닥에 멍하니 서 있는
왕룽 가족에게 초라한 작업복을 입은 마부들은 어떤 귀공자나
신사 못지않게 거드름을 피우며 지나갔다.
그들은 왕룽이나 그 식구들의 차림새로 멀리서 온 시골뜨기란
것을 짐작하고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일부러 익살스럽게 왕룽
가족의 머리 위로 말 채찍을 휘둘러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마부들은 그 일이 재미있는 듯이 낄낄 웃었다. 왕룽은 이런 일을
두서너 번 당하자 그만 화가 나서 움막 장소를 다른 데로
옮기려고 생각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기대 서 있던 기다란 잿빛 석벽을 따라 거지
움막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담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잿빛 돌로 쌓인 높은 담이 끝없이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 밑에 마치 개 등에 붙은 벼룩처럼 움막들이
붙어 있었다. 왕룽은 다른 움막을 자세히 살펴보곤 그대로
본뜨려 했으나 좀처럼 그대로 되지 않았다. 거적은 갈대를
베어서 만든 것이라 다루기가 무척 거북살스러웠다. 아무리 해도
되지 않아서 맥없이 서 있으려니까 오란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내가 하죠. 어릴 때 만들어 본 적이 있어요."
오란은 아이를 땅에 내려놓고 거적을 이리저리 다루더니
동그란 움막을 지었다. 한복판은 앉아도 머리가 닿지 않을
만하고 땅바닥에 드리워진 거적 끝은 벽돌을 주워다가 날리지
않게 눌러 놓았다. 움막이 완성되자 오란은 안으로 들어가서
남은 거적을 바닥에 깔았다. 이 안에 들어 앉아 있으면 비바람은
넉넉히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앉아 서로 얼굴을 쳐다보니 멀리 수백 리 떨어져 있는
고향일이 꿈만 같았다. 이렇게 먼 길을 걸어서 왔더라면 몇
주일은 걸렸을 것이고 또 도중에 누군가가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굶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볼 수 없는 도회의 광경에 그들의
마음은 안정되었다.
"자 공설 식당을 찾아가자." 하는 왕룽의 말에 모두 신이 나는
듯이 기운차게 일어나 움막을 나섰다. 아이들은 이제 곧 먹게
된다는 기쁨에 젓가락으로 그릇을 두들기면서 우쭐거렸다. 이
높고 긴 돌담에 움막이 많은 이유를 그들도 알아차렸다. 그것은
공설 식당이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 긴 돌담 북쪽 끝을 지나서
조금만 가면 다른 큰 길이 나왔다. 그 길에는 많은 빈민들이
사발, 바가지 따위들의 빈 그릇을 들고 웅성거렸다, 모두 공설
식당으로 몰려가는 빈민들이었다. 왕룽 일행도 그 행렬에
들어서서 밀려가니 거적으로 얽은 큰 집이 있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그 집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 집 속엔 왕룽이 처음 보는 굉장히 큰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작은 연못처럼 큰 솥이었다. 그런 솥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커다란 나무 뚜껑을 열어젖히니 흰 죽이 부글부글 끓고
구수한 냄새와 구름 같은 김이 솟아올랐다. 이 구수한 쌀죽
냄새는 그들이 살아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했다. 그들은
앞을 다투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고함을 치고 여자들은
아이들이 밟힐까 봐 악을 쓰고 어린애들은 큰 소리로 울어 댔다.
큰 나무 뚜껑을 열던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죽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차례대로 들어오시오."
그러나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배고픈 사람들에겐 소 귀에 경
읽기였다. 그들은 먹을 것을 받을 때까지 짐승같이 사나웠다. 그
속에 휩쓸린 왕룽은 아버지와 아이들을 놓치지 않게 붙잡고 있는
것만도 힘이 들었다. 그러는 동안에 가마솥 앞까지 밀려왔다.
왕룽은 커다란 그릇을 불쑥 내밀고 죽을 받곤 동전 한 닢을 내어
주었으나 그동안 죽을 흘리지 않으려고 몸을 가누기도 지극히
힘이 들었다. 그들을 거리로 빠져 나와 길가에 선 채로 먹었다.
모두 배불리 먹고도 조금 남았다.
"남은 것은 집에 갖다 두었다가 저녁에 먹자." 하고 왕룽은
그릇에 조금 남은 것을 보고 말했다.
그러나 푸르고 붉은 제복을 입은 경비원인 듯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그건 안돼. 뱃속에 넣은 것 이외에는 가져갈 수 없어."
"뭐라구요? 내가 돈 주고 산 건데 먹고 가건 가져가건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그 사람은 설명했다.
"이곳의 규칙을 모르는 모양이군. 동전 한 닢에 그렇게 많이
주는 곳이 어디 있어! 이 죽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나누어
주는 건데...... 이 죽을 사 가지구 가서 돼지를 먹인단 말이야.
그래서 절대로 가져가진 못해.'
왕룽은 이 말을 듣자 어안이벙벙했다.
"아니, 그런 놈이 다 있어요?"
그리고 또 계속해서 물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이렇게 나누어 주는 거요?"
"이건 이 도시의 부자 양반들이 하는 건데, 그분들은 이렇게
해서 죽은 뒤에 극락에 가려는 이도 있고 또 세상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송받기 위해서 하는 이도 있지."
"아무튼 훌륭한 일이오. 그 중엔 부처님 같이 어진 맘으로
도와주는 분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사나이는 왕룽 따위는 더 상대하기가 귀찮다는 듯이
돌아서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아이들이 빨리
돌아가고자 왕룽의 옷깃을 잡아당겼기 때문에 모두 이끌고
움막으로 돌아왔다. 올 여름 이후론 처음으로 온 가족이 배불리
먹었다. 배가 부르니 온몸이 노곤해지고 잠이 쏟아졌다.
가족들은 움막에 들어가 눕기가 무섭게 이튿날 아침까지 잠을
잤다.
이튿날 아침에 마지막 남은 동전 한 닢으로 공설 식당에서
끼니를 이었다. 지금부터는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야 한다고
결심한 왕룽은 아내의 의견을 묻기 위해 오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황폐한 들판에서 오란을 바라볼 때처럼
절망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이 도시에는 굶주리는 사람은 더이상
없는 것이다. 시장에는 고기도 있고 채소도 있다. 생선 시장엔
살아 있는 고기가 물에 담겨 있지 않은가! 아무튼 굶어 죽진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돈이 있어도 먹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오란은 이런 도시 생활에 익숙한 듯이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나와 아이들은 구걸을 할 수 있어요. 아버님도 할 수 있어요.
내겐 주지 않더라도 저런 백발 노인에겐 마음이 움직일 거예요."
말을 마치자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은 배불리 먹고 난
다음인지라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오가는
사람들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기만 했다.
"자아, 이리들 오너라. 둘 다 밥그릇으로 이렇게 드는 거야."
오란은 빈 그릇을 손에 들고 앞으로 나서면서 처량한 음성으로
흉내내 보였다.
"서방님, 마님, 적선합시오. 이 배고픈 어린 것들에게
적선합시오."
아이들은 기가 막히는 듯 어머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왕룽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디서 저런 시늉을 배웠을까?
아내의 지난날은 자기도 모르는 처참한 시절이 있었던가! 왕룽은
가슴이 쓰리도록 아팠다. 오란은 왕룽의 말없는 질문에
대답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렇게 살아 본 일이 있어요. 이런 흉년에
내가 남의 종으로 팔려가던 그때 말예요."
이때 누워 있던 늙은이도 일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늙은이에게도 빈 밥그릇을 들려 주었다. 네 식구는 거리로
나서서 구걸을 시작했다. 오란은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길 가는
사람에게 밥그릇을 내밀었다. 그는 딸 아이의 머리를 늘어지게
안았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잠든 아이의 머리가 흔들렸다.
오란은 이렇게 여러 사람들에게 아이를 보이면서 슬픈 음성으로
구걸을 하는 것이었다.
"거룩하신 마님! 이 애가 굶어 죽어 갑니다. 제발 적선합쇼."
실상 아이의 머리가 굶어 죽어 가는 모양으로 축 늘어져 있기
때문에 마음에 썩 내키지 않으면서도 몇 개의 동전을 던지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은 구걸하는 것이 곧 장난처럼 생각된 모양이었다. 큰
놈은 부끄러워서 애걸하다가 웃기까지 했다. 이것을 오란은
움막으로 불러들여 뺨을 호되게 때리며 윽박질렀다.
"너희들이 굶어 죽겠다고 하면서 웃는단 말이냐."
오란은 손이 아프도록 아이들을 때렸다. 아이들 눈에선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란은 우는 아이들을 밖으로 내쫓으며
말했다.
"그 우는 꼴을 하고 구걸을 해야 돼. 또 웃기만 해 봐라. 아주
혼낼 테니......"
왕룽은 거리로 나가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간신히 인력거를
세놓는 집을 찾았다. 하루치 세로 은전 반 냥을 저녁에 치르기로
약속하고 인력거 한 대를 끌고 거리로 나왔다.
다 낡은 바퀴가 달린 인력거를 끌고 거리로 나서니 지나가는
사람마다 자기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처음으로 쟁기를
멘 소처럼 인력거 채를 잡았다. 그는 손이 매우 어색했으므로
거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인력거꾼들은 사람을 태워
가지고 잘도 달렸다. 그도 먹고 살기 위해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그는 가게가 없는 뒷골목으로 들어가서
달리는 연습을 해 보았다. 힘이 들었다. 구걸질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어떤 집 현관에서 노인이 나와서 그를 불렀다.
안경을 썼는데 차림으로 봐서 학자 같았다.
처음에 왕룽은 인력거를 끄는 것이 처음이라서 달릴 수가
없다고 변명했으나, 노인은 귀가 먹어서 듣지를 못했다. 그는
태연히 다가서며 앞채를 내리게 하고 그냥 올라 앉았다. 왕룽은
손님이 귀머거린 줄 알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차림이 훌륭한 나이 많은 학자인지라 그이 말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노인은 점잖게 앉아 말했다.
"향교로 가세."
노인은 태연하고 침착했다. 그 점잖은 태도는 왕룽에게 더
이상 입을 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다른 인력거꾼처럼 앞으로 달렸다. 그러나 그는 향교가
어느 편에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는 달리면서 몇 번이나 길을
물었다. 길이 어떻게나 복잡한지 광주리를 이고 물건 팔러
다니는 장사치, 장거리에 가는 여인네, 말을 몰고 가는 마부들
그리고 왕룽과 같이 인력거 끄는 사람들이 수없이 오갔다. 그는
그들와 부딪칠까 봐 조심스러워 마음놓고 달리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솜씨가 없어 차체도 덜커덩거려 여간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걸었다. 그는 무거운
짐은 질 수 있게 단련되었으나 이렇게 차를 끌기는 힘이 들었다.
향교가 보일 즈음에는 벌써 양팔이 빠질 듯이 아프고 손에
물집이 생겼다. 괭이를 잡던 손자리는 인력거채를 잡는
손자리와는 달랐던 것이다.
향교 문앞에서 인력거를 멈추니, 천천히 인력거에서 내린
노인은 풍속에서 작은 은전 한닢을 꺼내 주며 말했다.
"난 이보다 더 준 일이 없으니 아무 말 말고 받아."
노인은 몸을 돌려 향교 안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왕룽은 이런 은전을 본 일이 없었다. 동전으로 셈하면 얼마나
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 옆의 쌀집에 가서 동전으로 바꾸니
스물여섯 닢이었다. 이 남방 도시에선 얼마나 돈벌기가 쉬운
것이냐고 그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그때 가까이 있던 다른
인력거꾼이 돈 세는 것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겨우 스물여섯 푼이오? 그 손님을 어디서 태웠기에?"
왕룽의 대답을 들을 그 인력거꾼은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참 인색한 늙은이로군! 반 값도 안 주었어. 처음에 얼마
받기로 하고 태웠소?"
"정하지 않았소. 그저 부르기에 태웠죠." 그 사나이는 가엾은
듯이 왕룽을 쳐다보면서 옆의 사람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이런 바보 좀 봐. 돼지 꼬리가 그냥 달린 시골뜨기야!"
그는 한바탕 웃곤 다시 지껄여 댔다.
"부른답시고 값도 정하지 않고 태우는 바보가 어디 있어. 이
바보야, 정하지 않고 태울수 있는 건 서양 사람들 뿐이야.
놈들은 성질이 급하지만 그래도 돈을 깎진 않아 돈을 물 쓰듯이
쓰니까."
듣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소리를 내어 큰 소리로 웃었다.
왕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런 도회지에선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기가 죽었다. 그는 아무 말도 않고 인력거를 끌고
나섰다.
"그렇지만 이 돈만 있어도 내일 하루쯤은 아이들 밥거리는
될테니까."
그는 속으로 어깨를 으쓱했으나 문득 인력거 세를 줘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저녁이면 줘야 할 텐데 이것으로는 절반도 안
되었다.
그는 아침 나절에 또 한 사람을 태웠다. 이번엔 값을 정하고
태웠다. 오후에는 두 사람을 태웠으나 저녁때 차세를 치르고
나니 그의 손에는 동전 한 닢밖에 남지 않았다. 고향에서 가을
추수를 하는 것보다 고되게 일하고 동전 한 닢밖에 얻지 못한
것을 생각하니 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느 가족이 기다리는
움막으로 돌아가며 고향 생각을 했다. 하루 동안 고향에 땅이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그는 오늘 이렇게 신기롭게
쓰라린 경험을 하고 보니 멀기는 하지만 그의 고향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란은 그날 하루에 엽전 마흔 닢을 벌었다.
동전으로 셈하면 다섯 닢도 못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큰
놈이 쇠전 여덟 닢, 작은 놈이 열세 닢을 벌었다. 전부 합하면
내일 아침 죽 값은 넉넉했다. 그것을 한데 합치려고 하니 작은
놈이 악을 쓰며 울었다. 잘 때도 손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에 죽 값을 치를 때에는 비로소 자기 몫으로
내놓았다.
늙은이는 한 푼도 벌지 못했다. 온종일 하라는 대로 길바닥에
앉아 있었으나 애걸하지는 않았다. 그는 졸기만 하다가는 눈을
떴을 때엔 거리에 오고 가는 사람들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조차 싫증이 나면 또 졸았다. 늙은이라고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는 빈 자기 밥그릇을 내어 놓으며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난 밭을 갈고 씨앗도 뿌리고 추수도 힘껏 했다. 그리고
아들도 키우고 손자도 있지."
그는 아들이 있고 손자도 있으니 그들이 당연히 먹여 줄
것이라고 어린 아이처럼 믿고 있는 것이었다.
12
이제 왕룽은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았다. 아이들도 매일 먹을
것이 있었고 아침마다 죽을 사 먹을 수 있었다. 그들은 노동과
오란의 동냥으로 생계를 유지시켜 나갈 수 있었다. 낯설었던
것도 차차 익숙해졌다. 그래서 이 도회지 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매일같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인력거를 달리고 있기 때문에 이 도회지의 여러 가지
사정도 알게 되었다. 뒷골목의 내막을 아는 곳도 몇 군데
있었다. 그가 인력거에 태우는 사람들은 아침이면 대개 시장에
가는 아낙네들이고 남자는 학교에 가거나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실어서 내려 주는 학교란 곳이 대체
무얼 하는 곳인지는 그는 잘 알 수 없었다. 태서대학 (泰西大學)
이라든가 중국대학 (中國大學) 이란 이름만 알았을 뿐이고 그
문안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간혹 들어가려면 무슨 일이냐고
따져 물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또 회사가 많이 자리한 곳에서도
그러했다. 그렇게 큰 집안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대체 하루 종일
무엇을 하는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런 집 앞까지
손님을 실어다 내려 놓고 돈이나 받을 뿐이었다.
밤에 탄 손님들이 가는 곳은 대개 호화로운 여관이나
오락장이었다. 거기선 음악 소리가 거리까지 흘러나왔고 상아와
대나무로 만든 마작패를 던지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더 깊숙한 방에서는 은밀한 환락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어떤 환락인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집안
속까지 들어간 곳은 자기 움막 뿐이고 다른 장소에선 한 걸음도
문안에 들어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왕룽은 이렇게 번화한
도시에 살아도 부잣집에 살고 있는 쥐와 마찬가지였다. 부자들이
떨어뜨리는 것을 주워 먹고 구멍 속에만 숨어 있는 것이다.
그에게 화려한 도회 생활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천 리도 못 되는 길이 그리 먼 것도 아니며 더구나
수로(水路)도 아닌 육로이건만 왕룽의 일가족에게는 이 남방
도시가 먼 외국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 도시 사람들도
왕룽 가족이나 그의 고향 사람처럼 머리털이나 눈이 다 같은
검은색이고 말들도 좀 빨랐기 때문에 알아듣기 어렵다는 것 뿐
별다른 말이 아닌데 어쩐지 그들은 외국인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안휘성 (安徽省)은 강소성 (江蘇省)과 판이하게
달랐다. 왕룽이 태어난 안휘의 말은 느리고 묵중하며 목구멍에서
우러나오는 것인데 강소란 이 도회는 입술로, 혀끝으로 말을
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고향에서는 1년에 두 번, 즉 밀과
나락이 경작될 뿐이고 다음은 옥수수와 마늘을 조금 지을 뿐이라
농한기가 있는데 여기선 나락과 그밖에 여러 가지 채소를 짓기
때문에 언제나 거름 내기에 바쁜 모양이었다. 음식에 있어서도
그들 고향에선 밀가루와 마늘만 있으면 그만이었으나, 여기선
돼지고기, 죽순, 닭고기, 거위고기 등등 여러 가지 채소를
곁들여 먹는 것이었다.
괴팍스런 사람들은 마늘 냄새가 나는 사람을 대하기만 하면,
"야아, 돼지고기 꼬리 북쪽 놈이 왔군." 하고 코를 씰룩거리며
조롱하기도 했다.
마늘 냄새를 풍기기만 하면 포목 가게에서도 외국 사람이나
대하는 것처럼 값을 올려 부르곤 했다.
그러나 이 부잣집 담에 늘어 붙어 있는 움막은 이 남방 도시의
일부분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해서 그곳부터 시작하는 농촌도
아니었다. 언젠가 왕룽은 향교 모서리에 모인 군중들에게 청년
한 사람이 연설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거기서는 용기만
있으면 누구나 맘대로 연설할 수 있었다. 그때 그 청년은 '우리
중국은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모든 외국 놈을 몰아내야
한다.' 고 일변을 토했다. 왕룽은 이 청년이 그렇게 열렬히
배척하는 외국 놈이란 바로 자기처럼 북쪽에서 온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그만 겁을 집어 먹고 슬슬 그 자리를 피해
버렸다. 그 다음 또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의 연설을 들었는데
---- 이 도시에는 연설하는 청년이 많았다 ---- 그 변사는,
"우리 국민들은 단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교육해야 한다." 하고 외쳤다. 그러나 왕룽은 자기도 중국
국민의 한 사람이라든가, 자기에게 하는 말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가 외국 사람이란 뜻을 안 것은 어느 날 비단 파는 시장으로
가는 거리에서 손님을 찾고 있던 중 자기보다 더 색다른
코쟁이가 이 도시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였다. 비단
가게에서 나오는 아낙네들은 흔히 찻삯을 후하게 주기 때문에
그는 그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가게에서 불쑥 나온 사람이
있었다. 키가 매우 크고 올이 굵은 천으로 지은 검은 빛깔의 긴
옷을 입고 목에는 죽은 짐승 껍질을 둘렀다. 왕룽이 앞을
지나려니까 그 이상한 사람은 날카로운 소리로 인력거채를
내리라고 손짓했다. 그는 하라는 대로 했다. 그는 어떻게 할지
몰라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으니 그 이상한 사람은 서투른
중국말로 다리(橋) 거리까지 가자고 했다. 그는 정신없이 거리를
달리다가 도중에서 낯익은 차부를 만나자 물어 보았다.
"이것 좀 보게. 내 차에 탄 게 뭐요?"
"외국 사람이야. 미국 여자일세. 자네 땡잡았네." 하고 그
인력거꾼은 소리쳐 대답했다.
그러나 왕룽은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정신없이 달렸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옷에 땀이 비오는 듯했다.
그 여자는 차에서 내리자 서투른 중국말로, "그처럼 죽도록
달릴 필요는 없소." 하고 말하며 은전 두 닢을 내주었다. 보통
요금의 갑절이나 되는 돈이었다.
왕룽은 그제서야 이 사람이 자기보다 훨씬 이상한 외국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그날 밤 그 은전을 고스란히 가지고
움막에 돌아온 왕룽은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오란도
그런 외국 사람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나도 보았어요. 동전이 아닌 은화를 주는 사람은 그 사람들
뿐이에요. 난 그들을 보기만 하면 꼭 달라고 애걸해요."
그러나 왕룽도 오란도 외국 사람이 그렇게 돈을 많이 주는
것은 친절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물건 값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지에게 은전을 주는 것도 쇠전으로 주어도
좋은 것을 단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다고 여겼다.
아무튼 이 일로 왕룽은 저 연설하던 청년이 가르쳐 주지 않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자기가 검은 머리털과 검은 눈을
가진 한족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왕룽은 이 번화한 큰 도시의 한 구석에 붙어만 있으면 어떻게
하든 먹는 것만은 궁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고향에선 흉년이 들기만 하면 전혀 별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해도 물건을 살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도시에선 먹을 것이 얼마든지 남아 도는 것이다.
생선 시장엘 가면 자갈을 펴 놓은 길 양쪽으로 강물에 밤 그물을
놓아서 잡은 은어가 큰 광주리에 담겨 있고 못물에서 잡은
물고기들이 있었다. 기묘하게 생긴 누런 게가 불편한 듯이
꿈틀거리며 쌓여 있기도 하고 사치스러운 사람들의 진미로
유명한 뱀장어가 우글거리기도 했다. 곡물 시장에 가면 사람이
그 속에 숨어도 모를 만큼 큰 쌀통이 있고 눈같이 흰 쌀, 검붉은
빛깔이나 누런 빛깔의 밀, 누런 콩이나 팥, 푸른 땅콩, 회색
참깨 등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고기전에는 큰 돼지를 길게
배를 갈라서 붉은 살과 먹음직한 비계와 연하고 두툼한 껍질이
보이게 목덜미를 매달아 두었고, 오리 고기 파는 가게에는 문
앞에서 천장까지 빈틈 없이 불에 구운 거무스름한 고기와 소금에
절인 흰 살코기와 내장 등이 걸려 있다. 그 밖에도 거위고기며
꿩고기 등 온갖 날짐승 고기들도 팔고 있다.
채소 시장에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있다. 붉은 무, 흰 연뿌리, 감자, 푸른 배추, 미나리, 콩나물,
생밤, 향기로운 해초 등 사람의 구미를 돋우는 온갖 야채가
얼마든지 가게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행상인들이 과자,
과실, 기름에 튀긴 감자 찜이며 돼지고기의 밀가루 찜이라든가
쌀로 만든 떡 등을 팔러 다녔다. 그러면 쇠전을 가진 아이들이
뛰어나와서 그것을 사서 얼굴에 기름이 번지르르 하도록 실컷
먹었다.
이런 도시의 흥청한 모양을 보고 그 누가 굶주린 사람이
있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아침마다 해가 뜨면 왕룽의 가족이 밥그릇과 젓가락을
들고 움막에서 나오면 그 옆에 있는 움막에서도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강에서 아침
안개를 몰아 가지고 오는 냉랭한 찬 바람을 막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얇은 옷을 걸치고 등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동전
한 닢으로 쌀죽을 사 먹으러 공설 식당으로 걸어 가는 것이다.
왕룽이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해서 인력거를 끌고, 오란이
애처로운 소리로 구걸을 해도 도저히 움막 안에서 밥을 지을만큼
넉넉한 돈은 되지 않았다.
공설 식당에서 죽값을 치르고 동전 한 닢이라도 남으면 그들은
배추를 샀다. 그러나 배추는 값이 무척 비쌌다. 오란이 주워 온
벽돌을 모아 만든 아궁이에다 냄비를 걸어 놓고 음식을 만들려고
해도 땔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두 아이가 땔나무를 구했다.
그들은 나무를 끌고 가는 농부들의 뒤를 따르면서 볏짚이나 마른
풀을 조금씩 훔치는 것이었다. 이따금 아이들은 농부들에게
들켜서 혼이 나기도 했다. 어느 날 밤에는 큰 놈이 매를 맞아서
눈을 뜨지 못할 만큼 퉁퉁 부어오르기도 했다. 이 큰 놈은
훔치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 솜씨가 서툴렀다.
그러나 작은 놈은 점점 익숙해져서 구걸하기보다 훔치기를 훨씬
더 잘했다.
오란은 아이들이 웃건 장난을 하던간에 구걸을 못한다면
도둑질이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룽은
아내가 그렇게 말할 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튼
자식에게 도둑질을 시킨다는 것만은 매우 싫었다. 그래서 큰놈이
도둑질에 서툴러도 결코 나무라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남의
담밑에 움막을 짓고 산다는 것도 왕룽에게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고향에 두고 온 땅 생각만 했다.
어느 날 밤 그가 늦게 돌아오니 오란은 배추와 돼지고기를
넣어서 국을 끓이고 있었다.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그가 고향에
있을 때 소를 잡아먹은 이후론 처음이어서 왕룽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자네, 오늘 외국 사람에게 은전이라도 얻었는가?" 하고 그는
오란에게 물었다. 아내는 늘 하는 버릇대로 묵묵히 있었다.
그러자 아직 철이 나지 않은 작은놈이 제 자랑을 하고 싶어 입을
떼었다.
"그건 우리들이 훔친 거예요. 푸줏간에 고기 사러 온 늙은이
소매 밑에 숨었다가 고기 장수가 그걸 잘라 놓고 한눈 파는
사이에 내가 얼른 집어 가지고 옆 골목으로 도망쳐서 빈 물통에
숨어 형이 오기까지 기다렸지."
"훔친 고기라면 나는 안 먹겠다." 작은놈의 말을 들은 왕룽은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샀거나 얻은 것이라면 먹지만 훔친
것이라면 안 먹겠다. 우린 구걸을 할지언정 도둑놈은 아니야!"
화가 난 그는 작은놈이 발악을 하건 말건 그 고기를 건져 내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그러나 오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고기를 주워서 물에 씻어 다시 넣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무튼 고기는 고긴데 왜 그래요?"
왕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노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살면 자식들이 모두 도둑놈이 되어 버릴 것이다.
장래가 갑자기 두려워졌다. 오란은 젓가락으로 익은 고기를
잘라서 가장 큰 점을 아버지에게 드리고 아이들에게도 나눠 주고
자기도 먹었다. 그러나 왕룽은 고기에 손도 대지 않고 배추로
만족해 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난 뒤 작은놈을 이끌고 아내에게
들리지 않을 만한 뒷골목으로 가서 머리를 팔로 휘감아 안고
주먹으로 마구 두들겼다.
"이놈! 도둑질을 하면 이런거다......"
아이는 죽는다고 고함을 쳤으나 그는 두들기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가 사뭇 흐느껴 울면서 움막으로 돌아간
다음에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서 고향으로 가서 땅을 파고 살아야지."
13
이렇게 번화한 도시에 살고 있는 빈민가의 한 사람으로서
왕룽은 그날 그날의 생활을 어렵게 연명해 나갔다. 시장에는
온갖 음식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비단 가게 거리에는
그런 상품을 선전하기 위한 붉은 빛깔, 검은 빛깔 등 가지
각색의 찬란한 비단천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돈 있는
사람들은 공단이나 비로드 같이 값비싼 천을 맘대로 골라서 그
부드러운 몸을 감쌌다. 그들의 손은 분결같이 곱고 향수를
뿌려서인지 꽃같이 아름다운 향이 났다. 집들도 마치 대궐같이
크고 웅장했으며 매우 아름다왔다. 그러나 왕룽이 움막을 짓고
사는 이곳엔 참혹한 굶주림이 꿈틀거리고 있고 몸뚱아리를
제대로 가릴 옷도 변변하게 없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밤낮 부자들의 향연을 위하여 빵이랑 과자를
만들어야만 했다. 어린 아이들조차 밤 늦도록 일해야만 겨우
먹고 살 수 있었다. 온갖 기름때 묻은 옷을 입은 채 고달픈 몸을
침대도 없는 마룻바닥에서 짚을 깔고 자야만 했다. 그리고
새벽이면 또 남보다 먼저 눈을 비비고 일어나 비틀거리면서라도
그날 일을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고된 노동으로 받는 대가는
그들이 부자들을 위해서 만드는 빵 한 조각을 사는데도 부족할
정도로 아주 적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산해진미에 파묻힌 그들을 위해 여러 남녀
직공들이 겨울이면 두터운 모피를 봄이면 가벼운 비단옷을 지어
내기에 바빴다. 그러나 정작 생산자들인 그들 자신은 뻣뻣한
푸른 무명 옷조차 간신히 얻어 입는 것이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산해진미로 잘 먹게 하고 화려한 옷을 입히기 위해
꾸준히 노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왕룽은 그가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을 듣기도 했지만 별로 귀담아 듣지는 않았다.
백발이 성성해도 인력거를 끌거나 석탄이나 무거운 나무를
손수레에 싣고 이집 저집 나르는 늙은이들은 자갈을 깐 큰길은
걷기가 힘들어 등골이 휘고 힘줄이 험한 밧줄처럼 앙상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들은 보잘것 없는 음식 만큼이나 잠잘 시간도
부족했다. 그래도 묵묵히 아무 불평없이 살았다. 그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뚝뚝한 오란의 표정 같았다. 벙어리처럼
마음 속에 무얼 생각하는지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간혹 말을
하더라도 음식 이야기나 돈 이야기 뿐이었다. 은전이란 말도
좀처럼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생활은 은전과
아무 인연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쉬고 있을 때, 그들의 얼굴은 성난 것같이 굳어 있었다.
그러나 성난 것은 아니었다. 몇해를 두고 무거운 짐을 다루어
오는 동안 윗입술이 자연히 말려 올라가고 이가 드러나 험상궂은
표정이 된 것 뿐이었다. 그리고 눈자위나 입가에는 어려운
살림에 대한 걱정으로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얼굴이 어떤 모양으로 생겨먹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
중의 어떤 한 사람이 한 번은 수레로 살림짐을 끌고 가면서
수레에 실은 가구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괴팍하게 생긴
늙은이로군." 하고 자기의 모습이라곤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본 옆에 섰던 사람들이 소리를 높여
가며 웃었으나 그는 왜 그렇게 사람들이 웃는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약간 멋적은 듯이 덩달아 웃으면서 혹시
누굴 성나게 하지나 않았나 하고 두리번거렸다.
왕룽의 움막 근처에는 그렇게 비참하게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사는 움막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여인네들은
수없이 아이를 낳아 누더기를 주워 모아서 꿰매 입히곤 남의
밭에 가서 배추를 훔쳐 오기도 하고 곡물 가게에 가서 쌀을 한
줌씩 훔쳐 오기도 했다. 때로는 부근에 있는 산에 가서
나무뿌리나 나무껍질을 구해 오기도 하며 그날그날 겨우 살아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또 추수 때가 되면 밭에 나가서 곡식을
베는 농부들의 뒤를 줄줄 따라다니며 마치 모이를 찾는 닭처럼
이삭을 주워 모았다. 그런데도 움막에선 아이들이 계속 자랐다.
연이어 죽고 또 낳고 해서 얼마나 낳고 죽었는지 그 부모조차 잘
모를 지경이었다. 지금 자라고 있는 자신의 아이가 몇
명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아이를 낳으면 식구가 또
하나 늘었다고 걱정만 할 뿐이었다.
그들은 온종일 시장으로, 가게로, 들로 헤매었다. 남자들은 몇
푼의 동전을 벌려고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다. 여자와
아이들은 구걸질이나 도둑질, 소매치기 등 아무것이나 가리지
않고 했다. 왕룽과 오란과 그의 자식들은 이런 사람들 틈에
섞여서 헤매는 것이었다.
늙은이들은 그들 생활의 모든 것을 단념해 버려 별다른 불평이
없었다. 그러나 사내아이들은 나이 들어 청년기가 되면 가슴속에
불만과 불평이 넘쳤다. 그들의 운명을 저주하는 젊은이들은
간혹씩 울분에 섞인 말들을 툭툭 내뱉곤 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점차 가족이 불어감에 따라서
그날의 생활에 지치고 지쳐서 젊었을 때의 막연하던 불평은 깊은
절망으로 변하고 만다. 이렇게 일생 동안 소나 말같이 노동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간신히 남들이 떨어뜨린 찌꺼기로 연명을 해
나가는 것이었다. 입 밖에 내지 못한 반항 의식은 그대로
가슴속에 파묻혀만 있다. 어느 날 밤 왕룽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처음으로 움막을 의지하고 있는 높은
담 안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이때는 기나긴 겨울도 거의
지나 이만하면 다가올 봄까지는 견디어 나갈 희망이 보일
때였다. 움막 앞 길바닥은 눈이 녹아서 진탕이 되고 흙물이 움막
안까지 흘러들었다. 모두들 벽돌 조각을 주워다 깔고 그 위에서
자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눅눅하고 퀴퀴한 습기 속에서도
아늑한 봄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왕룽은 어쩐지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여느때 같으면 저녁 식사가 끝나면 곧 바로 자리에 누워
버렸겠지만 그날 밤은 거리에 나가 멍하니 서 있었다.
거기는 늙은 아버지가 온종일 담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는
자리였다. 아이들은 움막이 떠나갈 만큼 시끄럽게 장난을 쳤다.
저녁 식사를 마친 늙은이는 며느리가 허리띠를 찢어 만들어 준
줄로 손녀를 묶고 그 한 끝을 쥐고 있었다. 계집애는 끈 길이의
범위 안에서 비틀거리면서 좀처럼 넘어지지 않고 걸었다. 이젠
계집애도 제법 커서 어미 품안에만 조용히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걸하는데 주체스러워 늙은이가 이렇게 맡아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란은 또 아이를 배어서 계집애를 안기가
고통스러웠다.
왕룽은 줄에 매달려서 아장아장 걷고 있는 아이를 지켜 보고
있었다. 아이는 넘어졌다간 곧 일어나 다시 걷곤 했다. 이렇게
봄기운을 담은 산들바람이 그의 볼을 스치자 그의 마음은 갑자기
고향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이런 날은 밭을 갈기가 알맞겠군요."
그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음...... 네 말을 짐작하겠다. 나도 내 평생에 몇 번이나
이런 고비를 당해서 고향을 떠난 일이 있었다. 나중에 돌아가
뿌릴 씨앗도 구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지.'
아버지의 말소리는 침착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고향으로 되돌아가셨어요."
"그거야, 땅이 있으니까......" 하고 늙은이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나도 돌아갈 땅이 있다! 금년에 못가면 내년에
가자." 하고 왕룽은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땅이 있는 한은
반드시 돌아가리라! 고향에 있는 그의 땅이 봄비에 촉촉이 젖어
씨앗을 넣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더욱 초조해졌다.
그는 움막 안으로 들어가며 아내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무엇이든 팔 게 있다면 난 그걸 팔아서 고향으로 가겠어.
늙은 아버지만 아니면 가다가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걸어갈
수 있는데 노인과 어린 아이들은 수백 리 길에 배겨날 수
있을까. 더구나 임자도 홀몸이 아니구......'"
오란은 밥그릇을 씻어서 움막 한구석에 엎어 놓고 자리에 앉아
남편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아, 계집이나 팔면 몰라도 어디 팔 것이 있나요?"
왕룽은 기가 막혔다.
"나는 죽어도 자식은 안 팔아!" 그의 음성은 높았다.
"나는 팔렸던 걸요...... 부모님들이 고향에 갈 노비를
마련하려고 나를 황부잣집에 팔았어요." 오란의 말은 한결같이
침착했다.
"그렇다면 임자는 저 애를 팔겠단 말이오?"
"난들 그런 맘이야 있겠어요. 차라리 죽이면 죽였지......
나도 남의 종노릇을 했었는데요......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죽인들 소용 있겠어요. 뼈아픈 노릇이지만 당신이 고향이
돌아가려면 팔 수 밖에요."
"난 안 팔겠어. 설사 이곳에서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왕룽은 다시 움막 밖으로 나갔다. 그로선 아직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 생각이 자꾸만 그를 유혹했다. 그는 어린 딸
아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늙은이가 잡고 있는 줄에 매여서
아장아장 걷다간 넘어지고 또 일어나서 걷곤 했다. 비록
이렇게나마 굶지 않고 먹기 때문에 제법 토실토실하게 자랐다.
그러나 아직 말은 못했다. 고향에서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늙은
노파 모양으로 홀쭉했으나 지금은 완전히 원기를 회복했다.
왕룽과 눈이 마주친 계집애가 방긋 웃었다. '내가 안아 보지도
않았고 또 저렇게 방긋방긋 웃지 않는다면 팔 생각도 날
일이지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곧 다시 고향 생각이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이만큼 일하고 구걸질을
해도 겨우 그날그날 입에 풀칠밖에 못 하니!"
이때 어둠 속에서 그에게 대꾸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굵직한
힘 없는 음성이었다.
"당신 뿐인 줄 아시우. 당신 같은 사람이 거리에 몇만 명이 더
있소."
이렇게 말하면서 곰방대를 물고 나타난 사람은 두 집 건너에
위치한 움막집 주인이었다. 이 사나이는 낮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낮 동안은 잠을 자는 것이었다. 그가 하는 일이란
거리가 번잡한 낮에는 운반을 허락치 않는 큰 짐마차를 부리는
일이었다. 때때로 왕룽은 그가 새벽에 돌아오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어개를 축 늘어 뜨리고 매우 피곤한 듯이 숨을
헐떡이면서 기어오듯이 움막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왕룽이
새벽녘에 일하러 나갈 무렵에 마주치기도 하고 그가 밤일을
나가기 전에 밖으로 나와 이웃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가끔씩 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왕룽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그런가요? 언제까지나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한단
말이오."
그 사나이는 곰방대를 서너 모금 더 빨고 재를 땅에 털면서
천천히 말했다.
"그럴 리야 있겠소. 부자가 너무 부자가 되면 무슨 변동이
생기듯 가난한 사람이 너무 가난해지면 또 무슨 방법이 생기는
법이오. 지난 겨울에 난 딸 자식 둘을 팔아서 살아 났소. 올해
겨울에도 지금 뱃속에 있는 계집애라도 또 팔아서 목숨을
부지할텐데, 이제 남은 애는 맏아이 하나 뿐이오. 세상엔 아이를
낳자 곧 죽여 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죽이는 것보다는 파는 것이
나을 게요. 이것이 가난한 사람이 더욱 가난할 때 살아나는 한
가지 비결이지. 또 부자가 자꾸 부자만 돼도 반드시 이변이
생기는 법이오." 그는 이렇게 말을 맺고 곰방대로 그들의 등
뒤에 우뚝 솟아 있는 높은 벽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소?"
왕룽은 고개를 저었다.
"난 딸 자식을 팔러 갔을 때 본 일이 있소. 얼마나 돈이
많은지 아마 내가 말해도 당신은 곧이 듣지 않을 거요. 그렇지만
내 말을 들어 보시오! 저 집에서는 종놈들까지 은을 입힌 상아
젓가락으로 밥을 먹어요. 종년들도 옥이나 진주 귀고리를 하고
신발까지 진주 박은 것을 신고 다니고 어쩌다 흙이 묻거나, 우리
같으면 흠이라고 할 것도 없는 작은 흠이라도 생기면 진주가
달린 그 신을 미련도 없이 내버린단 말이오."
그 사람은 곰방대를 깊이 빨았다. 왕룽은 입을 벌리고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이 담 안에서는 정말 그렇게 호사스런 생활을
하고 있단 말인가!"
"사람이란 부자가 되면 다 그렇게 되는 거요." 사나이는
그렇게 말하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혼잣말같이 말했다.
"그만 일하러 가 봐야지."
그는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왕룽은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이불도
없이 언제나 옷을 입은 채 벽돌 위에서 거적을 덮고 자는
것이다. 움막의 한쪽 벽이 되어 있는 저편 담 안에 흔하다는
금은 보화가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딸 아이를 팔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일어났다. '저 애가 예쁘게 자라서 이런
부잣집 젊은 서방님 눈에라도 들면 잘 먹고 잘 입을 수도 있을
거야. 그렇다면 파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그러나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저 계집애를 판들 금은보화를 주지는 않을 게고,
노자를 얻어서 고향에 간들 농사 지을 소도 없고, 탁자나 침대
같은 살림 또한 살 수 없을 것이니 여기서 굶어 죽을 것을
고향에 가서 굶어 죽는 것밖엔 아무 것도 아니야. 첫째 밭을 갈
씨앗도 없지 않은가.'
왕룽은 '부자가 너무 부자가 되면 무슨 이변이 있다' 던 그
사나이의 말을 되풀이해 생각했으나, 어떤 변동이 있을지 그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14
봄은 움막 촌에도 찾아들었다. 이제까지 구걸해 먹던 사람들도
떼를 지어 가까운 들판으로 나가서 들나물을 캐기 시작했다.
이제는 남의 채소밭에 가서 야채를 훔쳐 올 필요도 없었다.
매일같이 낡아 빠진 옷들을 입은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함석
조각이나 날카로운 돌이나 부러진 칼끝 따위를 가지고 대나무
광주리나 갈대 광주리를 들고 들판으로, 길가로 헤매었다.
그것은 돈도 들지 않고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치사하게
구걸하지 않아도 구할 수 있는 양식인 것이다. 오란과 두 아이도
매일같이 이 무리에 어울렸다.
그러나 남자들은 전과 같은 일을 계속했다. 날씨는 점점
따뜻해져 갔다. 해도 길어졌다. 햇볕은 더욱 따뜻해졌고 때때로
소나기도 내렸다. 사람들 마음에는 욕망과 불만이 더 깊이
용솟음쳤다. 겨울 동안 그들은 묵묵히 일만 했다. 맨발에 짚신을
신고 얼음과 눈을 밟으면서도 추운 것을 참고, 해가 저물어서
움막에 돌아오면 그날의 품삯과 구걸로 얻은 끼니를 아무 불평
없이 먹곤 그 음식에서 부족한 영양은 잠으로 메웠다. 어른이나
여자, 아이들 할 것 없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아무 말 없이
자버리는 것이 예사였다. 왕룽의 움막도 그러했다. 다른
움막들도 그러했다.
그러나 봄이 되니 그들의 가슴에 쌓이고 쌓였던 여러 가지
생각들이 입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기나긴 해의 저녁
무렵이 되면 그들은 움막 앞에 모여서 불평하는 것이었다.
왕룽이 겨울 동안에 보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만약 그의
아내가 보통 아낙네들처럼 재잘거리기라도 잘 했다면 이웃의
아무개는 툭하면 계집을 두들긴다거나 또 아무개는 문둥병자고,
아무개는 비적 두목이니 하는 이야기들을 본 대로 들은 대로
남편에게 옮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이었으므로 왕룽은 그런 것은 전혀 모르고 그들 사이에
끼여 앉아서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이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가 그날그날 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왕룽은 늘 자기는 그들과 같은 처지의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전답을 가졌고 그의 농토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내일은 고기를 먹어 봤으면 혹은
좀 쉬어 봤으면 또는 동전 몇 닢이나 가지고 내기 노름이나 해
봤으면 하는 생각 뿐이었다. 이렇게 그들은 언제나 변함없는
가난과 고생에 싸여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절망
속에 있더라도 때로는 약간의 장난이라도 쳐 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왕룽은 고향에 있는 농토에만 생각이 쏠렸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는 이 부잣집 높은 담 밑에 빌붙어 사는 그들 속에
계속해서 끼여 살아가는 가치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담 안에 사는 부자도 아닌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농토에
속해 있는 농사꾼인 것이다. 만일 흙을 밟으며 봄이면 소를 몰아
밭을 갈고, 가을이면 낫을 들고 곡식을 거두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에겐 인생의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엔 그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밭과
황부잣집에서 산 기름진 옥토가 있을 뿐이다. 땅을 가졌다는
생각이 언제나 그의 의식 속에 잠겨 있었다.
모여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의 의식 속에 잠겨
있었다. 옷감 한 자를 사는데 동전 몇 닢을 주었다느니,
손가락만한 고기를 얼마에 샀다느니, 또 하루에 얼마나 돈을
벌었다느니 하는 쓸모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
끝에는 으레껏 그 높은 담에 둘러 싸인 부잣집 창고의 금은
보화를 준다면 무엇에 쓰겠느냐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 것이었다.
"만약에 저 집 양반이 갖고 다니는 금덩이가 내 것이 되고,
허리춤에 든 은전이라든가, 그 많은 첩들이 가진 진주라든가, 그
큰 마누라가 가진 보석이 내 것이 된다면......'
이러한 금은 보화를 얻었을 때,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왕룽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래야 고작 좋은 음식이라든가
노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던 산해진미를 먹어 보자든가, 어느 골목의 찻집에
가서 한바탕 큰 노름을 해 보고 싶다든다, 혹은 예쁘장한 계집을
사보겠다는 들으나마나한 뻔한 얘기 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누구나 그 부자 양반이 일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는 것처럼
그들도 편하게 지내 보겠다는 말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불쑥 왕룽이 한마디했다.
"만일 나에게 그런 금은보화가 있다면 땅을 사겠소. 기름진
땅에서 해마다 좋은 곡식이 날 것 아니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왕룽을 비웃고
꾸짖었다.
"야, 돼지 꼬리를 늘은 촌뜨기 보게. 이런 촌뜨기가 어디
있어. 이런 도시에서 돈 쓰는 재미가 어떤 즐거움을 주는지 전혀
모르는군. 평생 소나 당나귀 꽁무니만 따라다니면서 일할 줄밖에
모르는 딱한 위인이야.'
그들은 모두 왕룽보다 돈 쓸 줄 알기 때문에 부자가 될 자격도
더 있다고 우월감을 갖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혼자 조롱을
받고서도 왕룽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처럼 큰
소리로 떠드는 대신에 속으로 이렇게 다짐할 뿐이었다.
"아무튼 나에게 그런 금은 보화가 생긴다면 기어코 땅을
사겠어."
언제나 왕룽은 이렇게만 생각했다. 그리고 밤이나 낮이나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었고 그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그의 머리에는 고향에 두고 온 땅 생각 뿐이었기 때문에 이
도회에서 매일같이 보는 모든 것이 다만 꿈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리 신기한 것을 보아도 그저 오늘도 그런 일이
있었느니라고만 생각했다. 예를 들면 거리에서 어떤 종이 조각을
받아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왕룽은 어려서부터 글을 배우지 않았다. 그로선 이 도시의
성문이나 벽에 붙은 벽보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종이에 어떤 말이 씌어 있는지 전혀 몰랐다. 왕룽은 그런 종이
조각을 두 번이나 받은 일이 있었다.
처음에 받은 것은 어느 날 마지못해 태워 준 어떤 외국
사람에게서 한 조각 받은 것이다. 이 외국 사람은 굉장히 키가
크고 마른 나무처럼 후리후리한 사내였다. 눈은 깊은 물빛처럼
파랗고 얼굴엔 유달리 털이 많았다. 왕룽에게 그 종이 조각을
주는 손에도 역시 털이 보송보송 나 있었고 살빛은 붉었다.
더욱이 오똑한 코가 마치 고물처럼 두드러지게 컸다. 왕룽은
그런 사나이에게 무얼 받는다는 것이 무서웠지만 그런 기묘한
눈이라든가 무서운 코가 더 한층 무서워서 거절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주는 대로 고분고분 받았다. 그리고 그 사내가 가
버린 다음에 그 종이 조각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살빛이 흰
사내가 십자가에 달려 있는 그림이 있었다. 허리에 베 조각을
둘렀을 뿐 발가숭이였다. 수염이 난 턱을 어깨 위에 축 늘어
뜨리고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분명히 죽은 사람 같았다. 그
그림을 본 왕룽은 무서운 생각이 뇌를 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궁금한 생각도 들었다. 그림 밑에 글이 쓰여 있었으나 그는 읽을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왕룽은 그림을 움막으로 가지고 와서 아버지에게
보였으나 늙은이 역시 일자 무식이어서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두 아이 놈까지 무슨 그림인지 알려고 끼여들었다. 아이들은
무서워하면서도 흥미 있는 듯이 말했다.
"옆구리에서도 피가 나네."
늙은이도 이렇게 말했다.
"이런 형벌을 받는 걸 보니 큰 죄를 지은 사람인가 보다."
왕룽은 그 그림이 무섭기만 했다. 왜 그 외국 사람이 그에게
이런 그림을 주는 것일까? 혹은 그 외국 사람의 형제가 이런
악형을 받았기 때문에 그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 아닌가? ---
다음날부터 그는 그 외국 사람을 만났던 거리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여러 날이 지나자 그는 그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오란은 신을 고칠 때 다른 종이와 함께 그 그림도
신발 밑바닥 감으로 써 버렸다.
그 다음에 왕룽에게 종이 조각을 준 사람은 아주 옷을 잘 입은
훌륭한 도회지 청년이었다. 이 청년은 모인 사람들에게 종이
조각을 뿌리면서 외쳤다. 이 종이 조각에도 피를 흘리면서 죽은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먼저 그림처럼 살빛이 희고 털이
많이 난 사람이 아니고 왕룽처럼 눈도 검고 머리털도 검은 푸른
무명옷을 입은 누런 가난뱅이였다. 그 죽은 사람 위에는
디룩디룩 살찐 사내가 버티고 서서 긴 칼로 죽은 사람을 마구
찌르는 그림이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왕룽이 물끄러미 그
그림을 들여다보니 그 밑에 씌어 있는 글귀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대체 이 무서운 그림이 뭐요? 글을 아시거든 좀 가르쳐
주시오."
"조용하시오. 저 젊은 양반의 이야기나 들어 보슈. 다
얘기하고 있으니."
그래서 왕룽은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여러분, 그 피를 흘리면서 죽은 사람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청년을 계속 부르짖었다.
"여러분들을 죽이고도 마음이 차지 않아서 이렇게 칼로 찌르는
사람들은 바로 부자들이오! 자본가들입니다. 가난한 여러분들이
죽은 뒤에도 이렇게 찌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난합니다. 이
더러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없이 부자들에게 피를 빨리고
짓밟히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가들이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왕룽은 자신이 가난한 줄을 잘 안다. 그러나 가난한 원인은
다만 하늘이 때 맞추어 비를 내려 주지 않거나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몇 달이나 줄곧 내려서 홍수가 지기 때문이니 나쁜
것은 하늘이라고 믿어 왔던 것이다. 햇볕이 알맞게 내리 쬐고
비만 적당히 내려 준다면 밭에 뿌린 씨앗이 싹트고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에 그는 결코 가난한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어째서 부자들이 맘대로 비를 좌우한단
말인가. 그는 궁금증이 나서 그 청년에게 물어 보려고 생각했다.
청년은 구변 좋게 연설을 계속하였으나 그가 궁금하게 여기는
대목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참다
못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선생님, 그럼 우리들을 압박한다는 부자들은 농사 지을 수
있도록 비도 맘대로 내릴 수 있나요?"
청년은 이 말을 듣자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왕룽을 내려다보며
경멸하는 투로 대답했다.
"참, 기막힌 친구로군. 저 친구는 아직까지 돼지 꼬리를 늘인
촌뜨기를 못 면했구려. 사실상 비를 맘대로 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그런 것과 내 말과 무슨 관계가 있소. 만일 부자들이나
자본가들이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여러 사람에게 고루 나눠
주면 우리들은 고루 잘 먹고 잘 살 수 있단 말이오. 비가 오든
안 오든 관계 없단 말이오.'
듣고 있던 여러 사람들 속에서는 환성이 올랐다. 왕룽은 그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왔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땅은 역시 중요하다. 돈이나 음식은 쓰면 없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햇볕과 비가 알맞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되는
것이다. 왕룽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아내가 신을 고칠 때 종이를
쓰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 종이 조각을 얼른 받았다. 그는
움막에 돌아와 그 종이 조각을 오란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것 신바닥 고칠 때 쓰구려." 그러고는 전날과 변함없이
열심히 일에 열중했다. 그가 저녁 무렵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움막 사람들 중에도 그 청년의 연설을 열심히 듣는 이가 있었다.
그들은 담 한 겹 사이에 둔 저편에 끔찍이 큰 부자가 살고 있고
그 담은 대수롭지 않은 벽돌담이라 자기들이 매일 짐 나를 때
어깨에 걸치는 막대기로 몇 번만 건드리면 금방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열심이었다.
봄과 더불어 품었던 새로운 불만이 움막촌에 사는 사람들
마음속에 번져 나갔다. 그것은 그 연설하는 사람들이 움막에
사는 사람들이 불편을 느낀 것처럼 그들이 가지지 못한 부를
소수의 몇 사람만이 가졌다는 것은 정당치 못하다는 사상을
굉장히 많이 선전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그런 연설을 들은
이 움막 사람들은 더욱 그 말이 옳다고 생각되었다. 저녁때만
되면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아무리 고되게 노동을 해도 조금도 생활이
나아지질 않으므로 힘깨나 쓴다는 젊은이들 가슴엔 겨울 동안에
내린 눈이 녹아서 물이 넘쳐 흐르는 강물처럼 거세고 난폭한
욕망을 안은 불평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왕룽은 이런 것을 보고 또 그들이 지껄이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불평과 분노를 느끼며 한낱 형용할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으나 그의 가슴은 고향에 가고 싶은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항상 끊이지 않고 신기한 일이 일어나는 이 복잡한 도회에서
왕룽이 또 그가 이해 못할 새로운 사실에 부딪히게 되었다. 어느
날 그가 빈 인력거를 끌고 손님을 찾고 있을 때 이 근처에 있던
어떤 사람이 한떼의 군인들에게 붙들렸다. 붙잡힌 사람이
무어라고 반항을 하니 무장한 군인이 그의 턱밑으로 총칼을
내밀고 위협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왕룽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바라보고 있는데 또 한 사람이 붙들렸다. 그들은 그렇게 자꾸만
여러 사람들을 붙들었다. 이렇게 붙들린 사람들은 모두 자기처럼
품팔이로 그날그날 겨우 입에 풀칠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더욱 놀라서 보고 있는데 또 한 사람이 붙들렸다.
그는 왕룽과 같이 담 밑에서 움막살이하는 이웃 사람이었다.
정신 없이 바라보고 있던 왕룽도 그제야 덮어놓고 억지로
사람들을 붙들어 가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도 그렇게
끌려갈지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엄습해 오자 허둥지둥
인력거를 옆 골목에 끌어다 놓고 옆에 있는 더운 물 파는 가게로
들어가 군대들이 지나갈 때까지 큰 가마솥 뒤에 숨었다. 얼마
후에 군인들이 다 지나간 뒤에야 그는 마음놓고 일어서서 가게
주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늙은 가게 주인은 솥에서
올라오는 더운 김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며 예사롭게 대답했다.
"또 어디서 전쟁이 일어난 게지. 왜 자꾸 전쟁을 하는지
모르겠어.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전쟁판이니 아마 내가 죽은
뒤에도 그럴 거야.'
"그런데 왜 사람들을 끌고 가요? 방금 끌려간 한 사람은 내
이웃집 사람인데 그 사람은 전쟁을 알지도 못하는데?"
왕룽이 놀라서 반문했다. 늙은이는 가마솥 뚜껑을
밀어젖히면서 답답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 군인들이 어디로 전쟁을 나가니까 침구라든가 총과 탄약을
운반할 일꾼들이 필요해서 자네 같은 사람들을 끌고 가는 걸게.
그런데 자네는 어디서 왔길래 이런 일을 모르나? 여기선 조금도
신기한 일이 아닐세."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왕룽은 숨을 몰아쉬며 계속해서
물었다.
"품삯은 얼마나 주나요? 나중에 돌아올 수는 있나요?"
늙은이는 나이도 많거니와 물 끓이는 가마솥 이외의 일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고 세상 일에 희망을 잃었기 때문인지 되는
대로 대꾸했다.
"품삯은 주지 않지만 매일 굳은 빵 두어 조각은 주지. 물은
못물을 파 마셔야 하고,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도 두 다리가
성하면 돌아올 수도 있겠지."
"그럼, 그 사람의 식구들은 어떻게 되게요?" 왕룽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노인에게 물었다.
"흥, 식구가 어떻게 되든, 군대가 그런 걸 알 턱이 있나? 설사
안다고 해도 모른 척할걸." 늙은이는 왕룽을 경멸하듯이 이렇게
말하곤 물이 끓는 가마솥 뚜껑을 열었다. 김이 구름같이 피어
올라서 그 속을 들여다보는 늙은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늙은이는 친절했다. 길거리에 다시 군인들이 나타나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는 것을 창 너머로 내다 본 늙은이는 다시
왕룽에게 일러 주었다.
"군인들이 또 왔군. 조금 더 숨어 있구려."
왕룽은 한동안 더 가마솥 뒤에 숨어 있다가 군인들의 구두
소리가 저쪽으로 멀리 사라지자 곧 거기서 뛰어나와 부리나케
인력거를 끌고 움막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오란은 길거리서 주워 모아 온 푸성귀로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왕룽은 숨을 헐떡이며 오란에게 밖에서 벌어졌던 무서운
일과 자신도 거의 붙들릴 뻔했던 이야기를 했다. 왕룽은 이
새로운 공포로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자기가 전쟁터에
끌려갔더라면 아버지와 남아 있는 식구들은 굶어 죽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전쟁터의 주검이 될 것이고 고향의 그리운
농토를 다시 밟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잠시라도 안정이
되지 않았다.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오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이렇게 되면 저 계집애를 팔아서라도 고향으로 갈
테야."
그러나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오란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무감각한 어조로 말했다.
"며칠만 더 기다려 봐요. 이상한 얘기를 들었으니까요."
왕룽은 그날부터 낮에는 결코 밖에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
날도 그는 빌려온 인력거를 큰아들을 시켜 돌려주었다. 그는
밤에만 일하기로 했다. 그 일이란 장사꾼들의 짐을 실은 수레를
끄는 일이라 품삯이 낮일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많은 궤짝을
실은 손수레를 열두세 사람이나 붙어서 간신히 끄는 것이었다.
그런 궤짝 안에는 비단이나 무명, 향기 좋은 담배로 가득찼다.
궤짝 사이로 그런 좋은 냄새가 새어 나오는 것이다. 그중엔 좋은
기름이라든가 술통도 간혹 있었다.
밤이 새도록 그는 캄캄한 거리에서 진땀을 흘리며 무거운
수레를 끌었다. 밤 이슬에 흠뻑 젖은 자갈에 그의 맨발이 몇
번이고 미끄러졌다. 그들의 선두에는 아이가 횃불을 들고 길을
비춰 주는 것이었다. 그 불에 비치는 그들의 얼굴이나 몸뚱이는
길바닥의 자갈처럼 번들거렸다. 동쪽에 해가 뜰 무렵에야
돌아오는 그는 고된 몸을 못 이겨 한숨 자지 않고서는 아침밥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다. 그런 대신에
군인들이 인부를 징발하기 위해 거리로 찾아다니는 낮에는 움막
뒤에 쌓아 둔 짚더미 뒤에 숨어서 실컷 잠을 잤다.
그는 전쟁이 어디서 벌어지고 또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봄이 짙어감에 따라서 시내 전체는 알 수 없는
무서운 불안감이 점점 깊게 감돌 뿐이었다. 부자들이 매일같이
마차에 의복, 침구, 그리고 예쁜 애첩이라든가, 그 여인네들이
가졌던 보석 등을 싣고 강변으로 가서 다시 배로 어디론지
운반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차로 이 도시를
떠나간다고 진종일 집에서 숨어 있는 그에게 밖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지껄였다.
"난 이런 사람들을 봤어요. 굉장히 뚱뚱한 사람이 비단옷을
입고 누워 있는데, 손가락에 새파란 보석이 번쩍번쩍하는
금가락지를 꼈어요. 얼마나 잘 먹었는지 살이 터질 듯이 쪄서
번질번질해요."
큰아이도 이런 소리를 했다.
"이상한 상자를 많이 싣고 가는데 그 속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금은이 가득 들어 있대요. 그렇지만 부자들은
가져가지 못한대요. 그래서 남은 건 곧 우리 것이 될 거래요.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인지 난 모르겠어요. 아버지 그게 무슨
말예요?"
아이들은 매우 궁금한 듯이 왕룽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할 일 없는 놈팡이들이 지껄이는 말을 내가 알 게 뭐야."
하고 왕룽이 무뚝뚝하게 대꾸하자 아이들은 못마땅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참말, 그게 우리 것이라면 지금 당장에 가져오겠는데. 맛있는
과자가 먹고 싶어. 저 참깨 박은 과자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으니까."
이 말을 들은 늙은이는 꿈에서 깬 것처럼 혼잣말로 중얼댔다.
"풍년이 든 해엔 우리도 가을 제사 때 그런 과자를
먹었느니라. 참깨를 털어서 조금 남겨두었다가 그런 참깨 박은
과자를 해 먹었느니라."
왕룽도 설날에 아내가 만들었던 쌀가루와 돼지기름과 설탕으로
된 과자를 생각하고 가슴이 미어지는 듯 지난 날을 회상했다.
"아아, 고향에만 갈 수 있다면......" 그는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나자 갑자기 그 답답한 움막 속에서 하루도 더
지내기가 싫었다. 짚더미 뒤에 숨어서 발도 마음놓고 펼 수 없는
것이다. 밤이면 살을 파고드는 듯한 수레의 밧줄을 끌고 무거운
짐을 자갈길로 끄는 것도 이젠 진저리가 났다. 그 길에 깔린
자갈들 하나하나가 원수같이 생각되었고 한 걸음이라도 그
자갈을 피하여 나갈 때면 그는 생명의 한 토막이라도 얻는
것처럼 기뻤다. 어두운 밤에 어쩌다 거리에 비가 내려서
길바닥이 다른 때보다 더 미끄러워지면 그는 전신에 분노를
느꼈고 그것이 발밑에 밟히는 자갈로 집중되었다. 그 미끄러운
자갈들이 무자비하게 무거운 수레의 바퀴를 물고 늘어지는 것
같았다.
"아, 그 좋은 땅을 두고......" 그는 이렇게 소리치고 엉엉
울었다. 아이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고, 그의
아버지도 아들의 하는 양을 마치 어머니가 우는 어린애를 멍하니
바라보듯이 흰 수염이 듬성듬성 난 얼굴을 찡그리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란은 보통 때와 다름없는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무슨 일이 곧 날 것 같아요.
이상한 소문이 장안에 떠돌아요."
왕룽은 움막 속에 누워서 몇 시간이나 군사들이 전쟁터를 향해
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는 이따금 거적을 조금 쳐들고 그
사이에 눈을 대고 군인들이 지나가는 광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가죽 구두를 신고 각반을 찬 수백 수천의 발이 열을 지어서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밤에 수레를 끌다가도 앞을 비추는
횃불 빛으로 어둠 속을 행진하는 군인들을 보았으나 그 군인들이
어디를 향해서 가는 것인가는 누구에게도 물어 보지 않았다.
그저 정신 없이 짐수레만 끌곤 부리나케 밥을 먹고는 짚더미
위에서 새우잠을 잘 뿐이었다. 온 거리가 전쟁의 공포에
휩싸여서 누구나 자신의 볼 일만 바쁘게 보고는 부리나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대문을 잠가 버리곤 했다.
왕룽이 살고 있는 움막촌 사람들도 그러했다. 시장 거리에 가
보아도 곡식전은 텅 비어 있고 비단과 포목전 거리에도 그렇게
찬란하게 휘날리던 깃발을 걷어 버리고 큰 가게들은 모두 가게
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큰 거리는 한낮에도 밤중처럼 고요했다.
적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조금이라도 자기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왕룽은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움막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그러했다. 첫째 그들은
누가 적인지 알 수도 없었고 또 재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는 것도 그리 무섭게 여겨지지 않았다. 적군이 쳐들어 올 테면
오라지, 적군이 온들 지금보다 더 험한 팔자는 안되겠지, 하는
배짱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뿐 그들끼리도 별로 농담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여러 상점 주인들은 밤에 짐을 운반하는
노동자들에게 이젠 나올 필요가 없으니 오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상품 거래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직업을 잃은
왕룽은 낮이나 밤이나 답답한 움막에서 빈둥빈둥 놀면서 지겨운
날을 보냈다. 그는 거의 죽은 사람처럼 누워만 있었다. 처음에는
일이 없어서 편하긴 했으나 날이 갈수록 남았던 돈이 줄어만
가니 다시 앞 일이 캄캄해졌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액운이 그래도 미진했는지 빈민 구제 사업을 하던 자선가들도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가난한
사람들은 일거리도 잃게 되고 먹을 것도 없어지게 되었다.
거리에 나다니는 사람조차 없으니 구걸을 해야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왕룽은 움막 속에 앉아 어린 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넌, 저 부잣집에 안 가겠니? 그 집에 가면 먹을 것도 많고
입을 옷도 많단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어린 계집애는 방긋이 웃기만
했다. 그저 아버지의 눈을 만지려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왕룽은
비참한 마음을 더 참을 수 없어 오란에게 큰 소리로 믈었다.
"여보, 임자는 황부잣집에서 매를 맞은 적이 있소?"
오란은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매일같이 맞았는걸요."
"뭘로 때리던가? 가죽끈으로 때리던가. 아니면 대나무나
동아줄로 때리던가?"
"나는 가죽끈으로 맞았어요. 말 채찍인데 부엌 벽에 걸어 두곤
늘 그걸로 때렸어요."
왕룽은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오란이 짐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 이렇게 물었다.
"이년은 지금도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예쁜 종도 매일
때릴까?"
그러나 오란은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냉담하게 말했다.
"그럼요, 맞거나 서방님들 방에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거죠.
그것도 한 사내 같으면 모르지만 누구든 원하는 대로 이 서방 저
서방에게로 끌려 다녀요. 그리고 서방님들이 싫증낸 종은
청지기들이 물려받아 서로 돌려 가면서 자는 거예요. 얼굴이
조금만 예쁘면 어릴 때부터 누구나 그 꼴을 당해야 돼요."
왕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는 더 생각하기
싫다는 듯 어린 딸을 껴안으며 '할 수 없지, 불쌍하지만.'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그는 둑이 무너져 거센 홍수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울부짓듯이 소리를 질렀다.
"별수 없어, 그래도 별수 없어."
그리고 그가 멍하니 앉아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얼떨결에 땅에 엎드렸다.
그 폭음은 그들을 눌러 죽일 것만 같았다. 왕룽은 어린 계집애의
얼굴을 감싸 주었다. 늙은이는 귀에 입을 대고 말했다.
"평생에 처음 듣는 소리다."
아이들은 놀라서 소리내어 울었다.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러자 오란은 머리를 들고 입을 열었다.
"내가 들은 소문 대로 일이 벌어지나 봐요. 적군이 성문을
깨고 쳐들어 오는 모양이에요."
이 말에 대답할 사이도 없이 거리에서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멀리서 부는 바람 소리같이 들려
오더니 차차 크게 변져 마침내는 거리가 뒤흔들릴 듯한 무서운
함성으로 변했다.
움막 속에 앉아 있던 왕룽은 머리끝이 쭈뼛쭈뼛했다. 그들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별일은 일어나지
않고 사람들이 지르는 함성 소리만 높아질 뿐이었다.
이윽고 왕룽의 움막에서 멀지 않은 담장 저쪽에서 큰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억지로 대문을 밀어젖히는지 삐걱거리는
소리가 매우 요란스럽게 들렸다. 그때, 언젠가 저녁때 왕룽과
이야기를 나눴던 곰방대를 피던 사내가 움막 안을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아직도 그렇게 앉아 있는 거요? 마침내 때가 왔소. 우리들을
위해서 부잣집 대문이 열렸단 말이오."
그러자 오란은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이렇게 소리치는 사람의
겨드랑이 밑을 번개처럼 빠져 나갔다.
왕룽도 얼떨결에 일어섰으나 미처 정신을 못차렸으므로
재빠르지는 못했다. 어린 딸을 방 바닥에 내려 놓고 밖으로
뛰어나오니 벌써 부잣집 철문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와글거리고 있었다. 그가 움막 속에서 들은 함성이 온 거리를
가득 메웠다. 지금껏 굶주리고 학대 받아오던 수많은 남녀들이
때가 왔다는 듯이 부잣집 대문 앞마다 몰려 들고 있었다. 그렇게
높은 담으로 둘러 싸였던 부잣집의 철문이 열리자 군중들은 물밀
듯이 밟고 밟히면서 한덩어리가 되어 몰려들어갔다. 왕룽도 등을
한번 밀리자 벌써 그 속에 휩싸여 버렸다. 그도 좋든 싫든 밀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뜻밖의 일에 놀라서 자신도 자기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대문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군중들 틈에
끼여 발이 땅에 닿지도 않았다. 그리고 성난 야수처럼 부르짖는
군중들의 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뜰에서 또 다음 뜰로 밀려
왕룽은 안채에까지 떠밀려 들어갔다.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뜰에 피었던
백합꽃이라든가 아직도 잎이 채 돋지 않은 나뭇가지에 이른 봄에
피는 금빛 꽃이 피어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볼 수
없었다.
식탁엔 음식 쟁반들이 그대로 놓여 있고 부엌엔 불이 타고
있었다. 군중들은 이런 부잣집의 구조를 잘 알기 때문인지
종이나 청지기들이 들어있던 방은 돌아다보지도 않고 안채로만
들어갔다. 거기엔 호사스런 침대가 여러 개 놓여 있고 검은
빛이나 붉은 빛, 혹은 금빛 등 찬란한 칠들을 한 상자들이 있고
또 비단이 꽉 차 있는 의장도 있었다. 온갖 아름다운 조각으로
치장된 의자가 수없이 놓여 있고 벽엔 귀중한 그림 족자들이
걸려 있었다. 폭도들은 아무 것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끌어냈다.
의장이나 상자를 열어 젖히곤 무엇이든 있기만 하면 움켜쥐었고
또 서로 빼앗고 빼앗기고 하였다. 자기가 가진 것을 들여다 볼
여유도 없었다. 이렇게 하여 침구, 의복, 휘장, 그릇 등이 서로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어가곤 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왕룽
뿐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남의 것이란 밥그릇 하나 훔쳐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좀처럼 그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처음은 그도
얼이 빠져 군중들에게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했으나 이러는
동안에 겨우 정신을 차려서 끈기 있게 버둥거려 간신히 군중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물결이 급히 소용돌이치면 그
가장자리에도 작은 소용돌이가 치듯이 왕룽이 간신히 빠져 나와
서 있는 곳에도 약간의 혼잡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분별할 만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아낙네들만이 거처하는 안방의 뒤쪽에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뒷문이 열려 있었다. 이 뒷문은 이런 때에 이용하기
위하여 부자들이 옛날부터 마련해 둔 비상 탈출구였다. 이번에도
그들이 이 뒷문으로 달아나서 시내의 여기저기에 숨어 폭도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을 졸일 것이다. 그런데 아직
달아나지 못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몸이 지나치게 비대해서
몸을 주체하지 못한 탓인지 혹은 술에 취해서인지 한 곳에 숨어
있다가 폭도들이 다 지나간 줄 알고 기어 나왔다가 왕룽과
마주쳤던 것이다. 왕룽은 혼자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그
사나이와 마주친 것이다.
그는 매우 비대한 사나이였다. 늙지는 않았으나 젊지도
않았다. 아마 조금 전까지 계집과 누워 있었던 듯이 몸에 걸친
것은 남빛 비단 두루마기 뿐이었다. 두루마기 밑으로 군살이
드러나 보였고 얼굴은 살이 져서 돼지처럼 가느다란 눈이 겨우
열려 있었다. 그는 왕룽을 보자 깜짝 놀라서 금방 칼에라도 찔린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와들와들 떨었다. 아무 무기도 갖지 않은
왕룽은 그 꼴이 우스꽝스러워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마룻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애걸했다.
"제발 목숨만 살려 줍쇼...... 목숨만...... 그 대신 돈을
드리지요. 돈은 얼마든지 드리지요......"
돈이란 말에 왕룽은 귀가 번쩍했다. 갑자기 가슴이 마구
뛰었다. '돈이다 돈! 그렇다, 돈이 필요하다. 돈만 있으면
아이들도 살릴 수 있고 고향에도 돌아갈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자기도 놀랄 만한 큰 소리로 우악스럽게
호령했다.
"그럼, 어서 돈을 내놓아라."
뚱보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울음 섞인 소리로 중얼대며
주머니를 뒤져 그 누런 손바닥에 은전을 꺼내 들었다. 왕룽은
저고리 옷섶을 내밀어 그것을 받고는 다시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같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더 내놔!"
사나이는 또 한번 은전을 꺼내 놓으며 울상을 지었다.
"이젠, 더 없습니다. 남은 건 하찮은 목숨밖에 없습니다."
그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기름방울처럼 축 늘어진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양을 보자 왕룽은 갑자기 이제껏 느끼지 못한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나가, 빨리 안 나가면 죽인다. 이 돼지 같은 놈아."
소 한 마리도 자기 손으로 잡지 못하는 마음이 약한 왕릉도
이때만은 이렇게 호통을 쳐댔다. 그는 미친 개처럼 어디론가로
달아났다. 은전을 가진 왕룽만이 혼자 남았다. 그는 그 돈을
세어 보지도 않고 열려 있는 뒷문으로 뛰어나와서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그의 움막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뚱보놈의 체온이
아직도 남아 있는 은전을 가슴에 끌어안으면서 몇 번이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고향으로 갈 수 있다. 내일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15
고향에 돌아온 지 며칠도 안 되어 왕룽은 벌써 고향을 떠났던
일이 거짓말처럼 생각되었다. 고향을 떠나 있었다는 것은 꿈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그의 몸은 고향을
떠나 있었을망정 마음은 언제나 고향에서 헤매었던 것이다. 그는
돌아오면서 은전 여섯 닢으로 벼와 밀과 옥수수 등의 좋은
씨앗을 사왔다. 또한 돈 있는 김에 미나리와 연뿌리라든가 또
맛난 음식을 장만할 때 돼지고기와 함께 삶을 붉은 무라든가,
잘고 붉으면서도 향기 좋은 팥의 씨도 사왔다.
그리고 또 은전 열 닢을 주고 밭을 갈 황소도 샀다. 그것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였다. 정거장에서 내린 그는 밭을 갈고
있는 농부를 발견하자 걸음을 멈추었다. 늙은 아버지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은 모두 걸음을 재촉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왕룽은 그 농부가 부리고 있는 황소에 눈이
팔렸다. 바탕이 큼직하고 멍에를 걸어 멘 어깨가 떡 벌어진 것이
왕룽의 마음에 꼭 들었다. 그는 농부에게 흥정을 했다.
"그 소가 그리 시원치는 않으나 나는 그런 소라도 필요하니 그
소를 안파시겠소?"
그러나 그 농부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여편네를 팔았으면 팔았지 이 소는 팔지 않소. 이제 세 살
나서 한창 부리기 좋을 땐데." 농부는 왕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밭만 갈았다.
왕룽은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소를 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와 아버지에게도 물어 보았다.
"저 소 어떨까요?"
늙은이는 유심히 바라보더니, "훌륭한 소다!" 하고 맞장구를
쳤다. 오란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이 말보다 한 살 더 먹었나 봐요."
그러나 왕룽은 그 소가 힘이 세 보이고 또 미끈한 누런
털빛이나 검고 어글어글한 눈에 마음이 끌려서 사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아무 대꾸도 없었다. 이 소만 있다면 밭갈이도 할 수
있고 연자방아를 매어 곡식도 찧을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농부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을 붙였다.
"값은 잘 해 줄 테니 내게 파시구려."
마치 싸우다시피 오랫동안 흥정한 나머지 마침내 이 지방의
시세보다 절반이나 더 비싼 값에 소를 사게 되었다. 왕룽은
농부가 달라는 대로 값을 치르자 멍에를 풀기가 바쁘게 고삐를
끌며, 이것이 자기 소가 된 것을 기뻐하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문짝은 떨어져 나가고 지붕의 이엉은 간
곳도 없었다. 집안에 남겨 두고 간 괭이도 쇠스랑도 누가 훔쳐
갔고 엉성한 대들보와 무너져 가는 흙벽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크게 놀랐으나 그에게는 돈이 있으니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는 곧 성안으로 들어가 아주 단단한 쟁기와 괭이,
쇠스랑을 두 자루씩 사왔다.
지붕은 가을에 추수한 다음에 다시 하기로 하고 우선 거적을
사다가 ㄷ었다.
그날 해질 무렵에 그는 문간에 서서 그의 밭을 바라보았다.
겨울 동안에 얼었던 땅이 녹아 푹신해져서 파종하기에 알맞았다.
못에서는 개구리들이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고요한 봄바람을
타고 담 밑엔 죽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황혼 빛 속에
가까운 밭둑길에 서 있는 한줄기의 나무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복숭아 나무는 예쁜 봉오리를 맺고 있었고 버드나무는 연초록
새싹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고요한 대지 위에 달빛같이
은은한 안개가 피어 올라 나뭇가지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것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왕룽은 한동안 다른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혼자 밭에만 나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간혹 지난 겨울에 죽지 않고 살아난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도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가 내 사립문을 부수었소? 쇠스랑과 괭이를 훔쳐간 놈이
어떤 놈이오? 또 내 집 지붕을 벗겨다 땐 놈은 누구요?"
그러나 그들은 모두 점잖은 군자처럼 머리만 저었다. 어떤
사람은 '자네 삼촌이 그랬네.' 하고 말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런 흉년에 전쟁이 났으니 어딘들 비적이 없겠나. 그런
세상에 누가 무얼 훔쳐 갔느니 어떠니 할 나위 있나? 배 고프면
누구나 도적질 하는 게지.' 하고 말했다.
이웃집의 칭 서방이 기다시피 왕룽을 찾아왔다.
"이 겨우내, 비적들이 자네 집에 틀어 박혀서 이 부근 마을을
노략질했지. 자네 삼촌이 비적들과 가까이 지냈다고들 하지만
이런 시절에 그런 풍설을 믿을 수 있나. 누구도 탓할 수 없는
노릇이야."
칭 서방은 뼈만 앙상하게 남아 몰골이 아니었다. 아직
마흔다섯 살도 안 되었는데 머리가 백발이었다. 그를 바라보던
왕룽은 갑자기 측은한 생각에 가슴이 저며왔다.
"자네는 우리보다 지내기가 더 어려웠던 모양이네. 뭐라도
먹고 살았는가?"
칭 서방은 또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무엇인가 안 먹었겠나? 성안에 가서 구걸하러 다닐 땐 개처럼
길바닥에 내버린 썩은 창자 같은 것도 주워 먹었지. 무슨
고기인지 알아보지도 못할 지경이었지...... 그저 여편네는
짐승을 자기 손으로 잡을 사람이 못되니까 어디서 주웠거니만
생각하고 먹었지. 그리고 여편네는 나보다도 기운이 약해서 먼저
죽어 버리고 딸년도 잇따라 죽을 것 같아 군인에게
주었지......"
말을 끊은 칭 서방은 울먹이며 서 있더니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종자나 있다면 뿌려라도 보겠는데, 그것도 없으니......"
이 말을 들은 왕룽은 칭 서방의 손을 잡고 "이리 오게" 하고
방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는 칭 서방의 옷자락을 벌리고
남방에서 사 가지고 온 씨앗을 나누어 주었다. 벼, 밀, 배추
등의 씨앗을 주면서 왕룽은 칭 서방에게 말했다. "내일 자네
밭에 우리 소를 끌고 가서 갈아 주지."
칭 서방은 갑자기 훌쩍거렸다. 왕룽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참으며 성난 사자처럼 말했다. "자네가 내게 팥 한줌
나누어 주던 것을 내가 잊은 줄 아나."
그러나 칭 서방은 눈물을 계속해서 뚝뚝 떨어뜨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왕룽은 그의 골칫거리인 삼촌이 마을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이
기뻤다. 어디로 갔는지 자세한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성안으로 갔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아무튼 마을에는 없는 것이
분명했다. 계집애들은 모조리 팔아 먹었다는 것이다. 값이
비싸기 때문에 예쁜 딸은 제 값에 팔았지만 나중엔 그 흉한
곰보딸마저 전쟁터로 가는 군인에게 동전 몇 푼 받고 팔았다고
했다.
왕룽은 흙투성이가 되어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밥먹는
시간조차 아까웠으므로 점심을 먹기 위해 집까지 돌아가야 하는
시간에 빵 조각과 마늘만으로 점심을 싸 가지고 가서 밭둑에서
선 채로 먹었다. 그렇게 서서 밥먹는 동안에도 '저쪽 밭이랑에는
울콩을 심고 이 논에는 못자리를 만들고' 하는 생각들로
분주했다. 한낮이 되어 너무 고단하면 그대로 밭이랑에 누워
포근한 흙 기운을 느끼며 한잠 달게 잤다.
집에 있는 오란도 결코 쉬지 않았다. 그는 손수 거적으로
지붕을 고치기도 하고 흙을 파다가 구멍난 벽을 바르기도 했다.
또 바로 뚫어진 방바닥도 고쳤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같이 성안에 들어가서 침대와 탁자와
의자 여섯 개와 가마솥을 사고 그 밖에도 필요치는 않았으나
검은 꽃 모양이 그려진 붉은 찻병과 모양 예쁜 찻잔을 여섯 개
샀다. 다음엔 향 파는 가게에 가서 대청 탁자 위에 모셔 놓은
복신상(福神像)과 그 앞에 불을 밝힐 양초와 향로 등도 샀다. 그
양초는 암소 기름으로 만든 것인데 갈대 잎을 쪼개어 만든
것으로 가느다란 심지가 박힌 굵은 초였다.
살 것을 다 사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왕룽은 사당의 지신님이
문득 생각 나 그곳을 한번 들여다보았다. 지신님의 모양은
민망스러울 정도로 비참했다. 흙으로 만든 몸체는 비에 씻겨
눈도 코도 분간할 수 없었고 종이옷은 다 낡아서 살이 다 드러나
보였다. 그러게 무서운 흉년인지라 아무도 거들떠본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왕룽은 고소한 듯이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일을 저지른 아이를 꾸짖는 것처럼 언성을 높였다.
"사람을 못 살게 하면 그렇게 되는 거야."
왕룽의 집은 다시 새로와졌다. 대청 탁자 위에 향로가 놓이고
향불과 함께 큼직한 촛불이 춤을 추었다. 그리고 예쁜 찻병과
찻잔도 놓여 있었고 침대도 있고 가구들도 모두 제 모양을
갖추었다. 그의 침대 봉창엔 새로운 종이를 바르고 문짝도 새로
달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왕룽은 지나친 행복이 새삼
두려워졌다. 오란은 임신하여 배가 불룩했다. 아이들은
강아지처럼 집 안팎으로 뛰어다니고 늙은이는 양지쪽에 기대어서
졸기만 하는 것이 무한히 만족한 모양이었다. 그는 졸면서도
빙긋이 웃는 것 같았다. 그의 논에선 벼가 무럭무럭 자라고 심어
둔 콩은 껍질을 쓴 채 땅에서 고개를 뾰족뾰족 내밀었다. 돈을
아껴만 쓴다면 가을까지는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다. 왕룽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 구름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흘러가는 것
같았다. 곡식이 자라는 들판과 왕룽은 모두 햇볕과 비가 알맞게
조화를 이룬 기쁨에 느긋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는 마지못한
듯이 중얼거렸다.
"사당에 모신 지신님에게도 향을 피워야겠다. 아무래도 지신님
덕분이니까."
16
어느 날 밤 왕룽은 곁에 누워 있는 오란의 젓가슴 사이에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뭔데 몸에 감춰 두고 있어?"
그것은 헝겊으로 단단히 싸여 있었다. 만져 보니 딱딱한 게
자갈 같았다. 오란은 처음엔 안 보여 주려고 했으나 남편이 굳이
보려고 하자 하는 수 없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고 싶거든 보세요." 하고 오란은 목에 걸린 끈을
풀어 남편에게 내주었다.
헝겊에 싼 것을 왕룽이 아무렇게나 헤치자 갑자기 그의
손바닥에 숱한 보석이 쏟아졌다. 왕룽은 망연실색했다. 이만한
보석이 한곳에 모여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수박
속같이 붉은 것, 밀빛 같이 누런 것, 봄에 움트는 새싹 같은
연한 녹색인 것, 땅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맑은 것 등등
왕룽으로서는 보석의 여러 가지 이름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보석들은 자기와 아무 인연도 없는 것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에 이
보석들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갈고리
같은 손바닥에 놓인 보석들이 어둠침침한 방안에서도 찬란히
광채를 내는 것을 보자 굉장한 보물이 생겼다고 느꼈다. 그는 그
빛깔과 모양에 취해서 한동안 꿈쩍도 않았다. 오란은 묵묵히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보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왕룽은 말을 더듬었다.
"어디서...... 어디서...... "
오란은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때 그 남방 부잣집에서요. 그건 아마 첩이 가졌던 보물인가
봐요. 그때 사람들 틈에 끼여서 어떤 방에 들어가니까 벽돌 한
개가 비뚤어진게 이상하게 보이길래 가만 있다가 혼자 빼
보았더니 번쩍이길래 소매 속에 넣어 왔지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
왕룽은 감탄하면서 낮은 음성으로 오란에게 다시 물었다.
오란은 입가에 만연의 웃음을 띄웠다. 그녀가 눈으로 웃은 일은
처음이었다.
"내가 부잣집에서 자란 것을 알잖아요. 부자 양반들이란
언제나 불안해 하지요. 어느 해인가 흉년 때 황부잣집에 비적이
들어온 적이 있는데 그때 우리 종이랑 첩이랑 그리고 큰
마님까지 정신 없이 도망가는데 가만히 보니까 지니고 있던
보물들을 그렇게 벽돌 속에 감춰 두더군요."
다시 두 사람은 묵묵히 그 많은 보석에 정신 없이 눈을 팔고
있었다. 이윽고 왕룽은 숨 죽인 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다가는 우리 가족 모두 화를
당할 거야. 팔아서 땅을 사 두어야 마음이 놓이지. 소문이 나면
당장 비적이 몰려들어 우리들을 죽이고 뺏아갈 거야. 빨리
팔아서 토지로 바꾸어 두어야 마음놓고 잘 수 있지."
이렇게 말한 왕룽은 부리나케 보석을 헝겊으로 싸서 끈으로
단단히 묶어 허리춤에 넣으면서 무심코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내는 침대 곁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 있었다.
언제나 아무 표정이 없던 오란의 얼굴에 어떤 욕망의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왜, 그러는가?" 하고 왕룽은 의아스러운 듯이 오란에게
물었다.
"그걸 다 팔 거예요?" 오란의 음성은 분명 떨리고 있었다.
"팔지 않고 어떻게 해? 이런 보석을 농사꾼이 가지고 있으면
뭘 하나?"
"두 개만 갖고 싶어요." 오란의 음성은 단념한 듯 가라앉아
있었다. 안타깝고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왕룽은 아이들이
장난감이나 과자를 조르는 것 같은 오란의 목소리에 그만 기가
죽고 말았다.
"두 개만 줘요." 오란은 구걸하는 사람처럼 어렵게 말했다.
"조그마한 것 두 개만, 조그마한 진주 두 개만 줘요."
"진주?" 진주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왕룽은 숨만 들이쉬었다.
"그저 가지고 싶어요...... 차고 다니려는 건 아녜요. 그냥
갖고만 있을래요." 오란은 다소곳이 눈을 내리뜨고 떨어진
이불섶만 만지작거리며 거의 단념한 듯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때 왕룽은 이 둔중하고 충실한 아내의 마음을, 아무 보수도
없이 꾸준히 부잣집의 종 노릇을 하면서 다른 여자들이 보석을
끼고 있는 것을 보기만 하고 그 손엔 한 번도 만져 보지도 못한
그녀의 심정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오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따금 생각날 때마다 만져
보기라도 하고 싶어서 그래요."
왕룽은 자신도 모르게 무엇인가에 감동되어 허리춤에 넣었던
보석을 꺼내 묵묵히 아내 앞에 내놓았다. 오란의 갈고리 같은
손이 황홀한 보석 가운데서 움직이더니 두 개의 흰 진주를 가려
냈다. 오란은 그 두 개를 내어 놓고 나머지는 다시 헝겊에 싸서
젖가슴에 넣었다. 그녀는 매우 만족한 표정이었다.
왕룽은 아내가 하는 짓을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 후에도 아내를 대할
때마다 혼자 생각해 보았다.
"마누라는 지금도 그 진주를 품속에 지니고 있을 테지......"
그러나 왕룽은 아내가 그 진주를 꺼내어 들여다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또 그들은 그 진주에 대해서 한 번도 서로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왕룽은 그가 가지고 있는 보석을 어떻게
할까 하고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황부잣집에 가서 아직도 팔
땅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최종 결정을 짓기로 작정했다.
황부잣집을 찾아가니 그 사마귀의 털을 만지작거리며 거만을
부리던 문지기는 없었다. 그 큰 대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왕룽은 그 문짝을 두 주먹으로 쾅쾅 쳤으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대문 앞을 지나가던 사람이 왕룽을 이상스럽게 흘겨보며
아는 체를 했다.
"자꾸 두들겨 보우. 영감님이 일어나 있으면 나오리다. 그렇지
않으면 그 미친 개 같은 종년이 마음 내키면 열어 줄 게요."
그는 끈기 있게 두들겼다. 마침내 문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발자국 소리는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면서 고르지 못했다. 이윽고 쇠빗장을 빼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삐걱거리며 대문이 겨우 움직이자, "거
누구요?" 하고 침통한 음성이 들렸다.
왕룽은 깜짝 놀라 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나요, 성 밖의 왕룽이오."
"왕룽이 누구야?"
문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노한 것 같았다.
왕룽은 그 노기 있는 음성으로 미루어 이 집 주인 영감이라고
짐작되었다. 그 말투가 청지기나 종년을 부리던 입버릇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룽은 아까보다 겸손하게 말했다.
"노대인, 조금 볼 일이 있어서 왔는데요. 뭐, 영감님에게
아뢰지 않아도 대리인을 만나서 말씀드릴까 합니다만."
"그놈? 그 개 같은 놈은 벌써 몇 달 전에 달아나고 없네."
영감은 대문을 삐끔 열고 열린 틈 사이로 입을 내밀며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왕룽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중간에 다른 사람을 넣지 않고 영감과 직접 흥정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품안에 들어있는 보석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한시 바삐 그것을 주어 버리고 보석보다 가치 있는 땅을 얻고
싶었다.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씨앗만 해도 지금 소유한 토지가
두 배로 된다 해도 풍족히 심고 남을 만큼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비옥한 황부자의 토지에 강렬한 매력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
"돈 문제로 잠깐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만." 하고 왕룽은
주저하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영감은,
"내 집에는 돈 한 푼 없어." 영감은 더욱 음성을 높였다.
"비적 같은 놈, 도적 같은 그 대리인 놈이 몽땅 가져가
버렸어. 그놈, 대대로 망해 버릴 놈...... 내 빚은 하나도 못
갚게 하고......"
"아, 아니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왕룽은 황급히 변명을
했다. "저는 돈을 드리러 왔습니다. 빚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문 안에서 왕룽이 이제껏 들어 본 적이 없는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한 여인의 얼굴이 문 사이에 나타났다.
"그거 참 오래간만에 듣는 소리구려."
왕룽이 본 그녀는 예쁘장하고도 영리해 보였다. 왕룽을 보자
그녀는, "어서 들어오세요." 하고 아양 섞인 목소리로 말하면서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큼 대문을 열어 주고는, 문안으로
들어선 왕룽이 어쩔 줄 몰라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그의 뒤로
돌아가 다시 빗장을 걸었다.
영감은 저만큼 서서 쿨룩거리며 왕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때
묻은 장옷을 입었는데 털 비단을 댄 안이 들여다보았다.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긴 하나, 아무튼 좋은 공단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모양 없이
구겨져 있는 것은 아마 잠자리에서도 입은 탓이리라. 왕룽도
그를 마주 보았다. 호기심도 나지만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아직도 왕룽은 부자들을 대하면 까닭 없이 두려움이 엄습해 옴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런데 소문에 듣던 그렇게 무서운 영감이
늙은이라곤 믿어지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보다 별로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늙은이보다도 말끔하고 또
너그러워 보이는 것이다. 전날 그렇게 영화를 누리던 영감이
지금은 모양 없이 여위고 피골이 상접했다. 오랫동안 얼굴도 안
씻은 모양이었다. 누런 손으로 실룩거리는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따금 입술을 문지르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꽤 아름다왔다. 오똑한 콧날, 날카로와 보이는
검은 눈매, 단단하고 맑게 탄력진 살결, 볼과 입술은 연지를
찍은 듯 했다. 새까만 머리털은 검은 거울처럼 매끄럽게 빛났다.
말투로 보아 이 집 가족은 아니고 종임을 알 수 있었다. 음성도
날카로운데 아무렇게나 혀를 재잘거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한 여인과 영감 이외에는 그렇게도 많은
노비들이 분주하게 일하던 이 앞 뜰에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무슨 볼일이요? 돈 이야기라구요?"
여인은 뾰족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나 왕룽은 머뭇거렸다.
그는 황 노인 앞에서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영리한
여인은 왕룽의 기분을 눈치채고 영감을 돌아다 보며 소리를
질렀다.
"영감은 저리 좀 비켜줘요."
영감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비틀거리면서 물러갔다. 기침을
하면서 우단 신을 덜거덕거리며 비실비실 걸어갔다. 여인과
단둘이 남게 되자 왕룽은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좋을지 몰랐다.
그는 사방이 갑자기 고요해 진 것이 지극히 어색했다. 그는 안뜰
안을 힐끗 들여다봤으나 거기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지푸라기, 대나무 가지, 마른
솔잎, 시든 꽃나무들이 난잡하게 널려 있는 모양이 오랫동안
비질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참 답답한 양반도 있네." 여인의 날카로운 음성에 왕룽이
깜짝 놀라 제정신이 들었다. "도대체 당신의 볼일이란 게
뭐예요? 돈이 있거든 이리 내놔요."
"아니오." 왕룽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돈이 있다는 것이 아니오. 볼일이 있다는 것이오."
"볼일이란 돈 얘기가 아녜요? 이 집에선 나갈 돈이라곤 조금도
없어요."
"그렇지만 아낙네와는 얘기할 수 없소." 하고 왕룽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이 집까지 찾아오긴 했으나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거북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동정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니, 왜 말 못해요?" 여인은 뾰로통해서 되물었다.
"이 바보 같은 양반아, 이 집엔 아무도 없단 말을 듣지도
못했어요?"
왕룽은 그 말이 도통 믿어지질 않았다. 얼빠진 얼굴로 한참
동안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더욱 언성을 높여 가며 고함을
쳤다.
"이 집엔 나하고 영감님 뿐이에요. 아무도 없어요."
"그럼, 다들 어디로 갔소?" 하고 왕룽은 너무나 뜻밖이라는 듯
겨우 이렇게 물었다.
"큰 마님은 돌아가셨죠. 당신은 비적들이 와서 종들과
살림살이를 모두 다 가져갔단 얘기를 거리에서 못 들었어요? 그
비적놈들이 영감님의 두 팔을 묶어 달아 매고 또 마님은
걸상에다 묶어 놓고 소리를 못 지르게 입에다 재갈을 물렸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달아났지만 나는 물이 반쯤 담긴 물통 속에
들어가 뚜껑을 덮고 숨었다가 나왔어요. 나중에 나와 보니
비적들은 다 가고 없었지만 큰 마님은 걸상에 묶인 채
돌아가셨잖아요. 비적놈들이 죽인 게 아니라 놀라서 죽은 거죠.
오랫동안 아편을 피웠기 때문에 몸이 썩은 갈대처럼 돼 있어
제대로 몸을 지탱하지 못했던 거예요."
"청지기들과 종들은요, 문지기는 어떻게 됐나요?"
왕룽은 내친 김에 연달아 물었다. 그 여인은 귀찮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은 벌써 달아나 버렸어요. 한 겨울에 먹을 것도
없고 돈도 떨어졌기 때문에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달아났죠."
그 여인은 음성을 낮추었다. "비적 중엔 먼저 달아났던
청지기들이 몇 사람 있었죠. 그 문지기란 놈이 앞장 서서
서두르는 것을 직접 봤어요. 그놈의 자식이 영감님 앞에선
외면을 했지만, 사마귀 털이야 어디 숨길 수 있나요. 그놈 뿐
아니에요. 그렇지 않으면야 보석이랑 보물들을 숨긴 곳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리고 그 대리인도 한 패거리였음이 분명해요. 이
집하고 먼 일가가 되니까 비적들처럼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여인은 다시 잠잠해졌다. 그러자 뜰안은 모두 생명을 뿌리째
뽑아간 것처럼 무거운 정적에 잠겨 버렸다. 이윽고 여인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이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니에요. 이 황
부잣집은 아버지 윗대부터 망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 때부터
주인은, 집안 일은 전혀 돌보지 않고 모든 일을 대리인에게
맡기곤 들어오는 돈을 물쓰듯 헤프게 썼으니 결국 영감님 대에
와서는 땅을 팔기 시작한 것이지요."
"젊은 양반들은 어디로 갔나요?" 왕룽은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나 뜻밖이라 여인의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조금도 흥미 없다는 듯 냉담하게 말했다.
"모두들 여기저기로 흩어졌지요. 이 꼴이 되기 전에 딸들을
치워 버린 게 다행한 일이었죠. 맏아들이 영감님 걱정을 하고
모시러 사람을 보내 왔지만 내가 여기에 그대로 계시라고
권했지요. 이 큰 집을 나 혼자서 지킬 수 없다고 말이죠."
그 여인은 붉은 입술을 오므리고 제법 중대한 일이나 맡은
것처럼 뽐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2,3 년 동안 영감님은 나만 의지하면서 살았죠.
나도 달리 갈 곳도 없고......"
왕룽은 그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돌렸다.
그도 대강 짐작이 갔다. 이 여인은 마지막까지 영감의 돈을 빨아
먹을 양으로 다 죽어 가는 영감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경멸하는 투로 핀잔을 주었다.
"당신은 종인데 어떻게 내 볼일을 말한단 말이오?"
그러자 여인은 또 음성을 높여 가며 말했다.
"영감님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해요."
왕룽은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땅은 팔 것이다. 내가
안 사면 다른 사람이 이 계집에게 살 것이다.
"남은 땅은 얼마나 되오?" 왕룽은 하는 수 없이 물었다.
여인은 곧 그의 볼일이란 게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재빨리 말을
받았다.
"팔 땅은 있죠. 서쪽 백날 갈이, 남쪽에 이백날 갈이가 남아
있어요. 한덩어리는 아니지만 아주 큰 전답들이지요. 그건 모두
팔 거예요."
이 말을 듣자 이 여인은 영감님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한
뙈기의 땅까지 모조리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여인을 믿고 땅 흥정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영감님의 아들과 상의 없이 선조 때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모두 팔겠소?"
"걱정 마세요. 젊은 양반들도 팔 수 있으면 팔라고 영감님에게
말하더군요. 그 양반들은 이런 곳엔 살기 싫대요. 흉년만 들면
비적들이 달려들곤 하니까. 모두들 그렇게 말해요. 누가 이런
위험한 곳에 살고 싶어 하겠어요? 땅을 팔아서 돈을 나누려고만
하지요."
"그러면 누구에게 땅 값을 주어야 하나요?"
왕룽은 아직도 못 미더운 듯이 말했다.
"영감님에게 드려야죠. 여기에서 다른 누가 돈을 받을 사람이
있나요?" 하고 여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나 왕룽은
돈이 영감의 손에서 계집의 손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왕룽은 이 여인과는 더 이상 흥정할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다음날 다시 오지요. 다음날." 하고 대문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여인은 왕룽의 뒤를 따라 나오면서 거듭 말했다.
"내일 이맘 때 꼭 오세요. 이맘 때나 저녁때 언제라도
좋으니까요."
왕룽은 대답도 하지 않고 거리로 걸어 나왔다. 이제까지 들은
이야기가 마치 꿈속의 이야기처럼 생각되었다. 좀더 생각해 봐야
할 일이었다. 그는 조그마한 찻집에 들어가 차를 청했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솜씨 있게 차를 갖다 놓고 왕룽이 찻값으로
내놓은 동전을 까불거리며 던져 올렸다 받았다 했다. 왕룽은
그런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어려서부터 아니 그의 아버지, 조부 때부터 성 안에서 가장
이름난 황부자가 이렇게 망해 버렸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괴이한
일이었다.
"농토를 허술히 해서 그렇게 된 거야."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의 생각은 다시 자기의 두 아들에게 미치었다.
아이들은 봄의 죽순처럼 무럭무럭 자라지만 오늘부터라도
아이들을 놀리지 말고 밭으로 나가서 일을 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일을 몸에 익히게 하고 언제나 흙
냄새에 정이 붙게 해야 된다고 결심했다. 왕룽은 품안에 들어
있는 보석이 무겁고 뜨겁게 자기를 짓누르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무거운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지금이라도 누가 그의 누더기 속에서 찬란히
번쩍이는 빛을 보고 소리칠 것만 같았다. '이 봐라! 너 같은
놈이 임금이나 가지고 다니는 귀한 보석을 지니고 다니다니!'
하고 고함을 칠 것만 같았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보석을 땅으로 바꾸어야만 안심할 수 있을
듯했다.
그는 가게 안이 조용해지는 것을 보자 주인에게 말을 건넸다.
"미안하지만 성 안의 얘기를 좀 들려 주시오. 나는 지난 겨울
동안 남방에 가 있어서......"
찻집의 주인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잘알고 있는 법이다. 더구나
자기가 마시는 찻값을 손님이 치러 주면 그것을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부리나케 왕룽 앞에 마주
앉았다. 생쥐처럼 생긴 얼굴에 한쪽 눈은 찌그러지고
사팔눈이었다. 까맣게 기름때가 묻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차를 팔기도 하지만 자기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는 '일류 요리사는 깨끗한 옷을 입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지요.' 라는 말을 지껄이기를 좋아하며 자기의 누추한
옷차림은 당연하고 또 필요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곧 입을 열기 시작했다.
"글쎄요. 흉년으로 사람들이 모두 굶주렸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얘기고 다른 얘기라곤 황부잣집에 굉장한 비적이 들었다는
얘기가 있지요."
왕룽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었다. 주인 사내는
모르는 일이 없다는 듯이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 집의 종년들이
발악을 하면서 끌려갔다는 둥 뒷방의 첩들이 모두 강간을
당했다는 둥 어떤 사람은 쫓겨 나가고 어떤 사람은 끌려갔다는
둥 많은 이야기를 소상하게 들려 주고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그 집엔 아무도 없죠. 남은 사람이라야 영감하고
영감님을 섬기는 척하는 뚜챈(杜鵑) 이란 종년 뿐이죠. 그
계집은 벌써 오랫동안 영감방에 살았어요. 다른 계집들은 노상
갈렸지만 그 계집만은 그대로 남아 있지요. 영리한 계집이라 황
영감은 그 계집에게 노상 바보처럼 쥐여 살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젠 아무거나 그 계집 맘대로 되겠구먼요." 하고
왕룽은 주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겠죠. 당분간은 제 멋대로 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동네에서 긁어모을 수 있는 건 모두 긁어모으고 집어삼킬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집어삼켜 보자는 속셈이죠. 아무튼 그집
아들들이 자기들 일이 끝나면 돌아올 것이니까 그렇게 되면 제
아무리 충성스런 체 했댔자 별수 없이 쫓겨 날 게 뻔하니까요.
벌써 한평생 먹고 살 만큼은 장만했을걸요. 설사 백 년을 산대도
넉넉할 거예요."
"그럼 아직도 땅이 남았을까요?" 왕룽은 몸이 달아서 물었다.
"땅이요?" 주인은 영문 모를 일이라는 듯이 되물었다.
땅이라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황부잣집의 토지를 판다고 하지 않느냔 말이오?" 왕룽은 더욱
몸이 달아서 말소리조차 떨면서 중얼거렸다.
"아, 그 집 땅 말이로군요." 하고 주인은 심상한 듯이
대꾸했다. 그때 마침 손님이 들어와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을 이었다. "판대요. 그렇지만 묘지는 안 판대요. 몇 대나
조상이 묻혀 있다나요."
들어야 할 것은 다 들었기 때문에 왕룽은 가게를 나와 다시
황부잣집으로 향했다. 아까 만났던 여인이 대문을 열어 주었다.
왕룽은 들어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말을 걸었다.
"영감님이 땅 문서에 자기 도장을 찍을 거요?"
여인은 왕룽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찍고말고---- 찍고말고요---- 내 모가지를 걸어 놓고
맹세하죠."
이쯤 되고 보니 왕룽은 모든 사정을 털어놓고 말했다.
"당신은 땅 값으로 돈을 받겠소? 보석을 받겠소?"
"보석으로 받겠어요."
17
왕룽은 넓은 땅을 갖게 되었다. 이젠 자기와 한 필의 소만으론
그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없었다. 추수를 하는 데도 손이
모자라 새로 말을 한 필 더 사들이고 또 집도 한칸 더 늘려 짓고
왕룽은 이 모든 것을 이웃 칭 서방과 의논했다.
"자네 농토를 내게 팔아 버리고 혼자 외롭게 사는 것보다 우리
집에 와서 일이나 거들어 주며 같이 살지 않겠나?"
칭 서방은 이 말을 듣자 매우 기뻐했다.
하늘은 계절에 맞추어 비를 내렸다. 모판의 모는 점점 자랐다.
보리를 거둔 뒤에 물을 끌어들이고 두 사람은 힘을 다해 모를
심었다. 왕릉은 올해만큼 큰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었다. 비가
넉넉히 내려서 물이 풍족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모를 심지
못했던 밭도 훌륭한 논이 되었다. 마침내 가을이 되어 추수할
때가 되니 풍성한 곡식은 왕룽과 칭 서방 두 사람 손으로는
모자라서 다시 마을 일꾼을 두 사람 사서 추수를 끝내야 했다.
황부잣집에서 산 땅에서 일을 할 땐 왕룽의 머리에는 몰락해
버린 귀공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자식들은
건실하게 단련을 시키리라고 다짐했다. 아침마다 두 아이를
밭까지 데리고 나가서 소나 말의 고삐를 잡는 작은 일이라도
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일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햇볕에 몸을 쬔다거나 밭 이랑 사이를 오고 가고 하는 그 고된
것이라도 몸에 익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밭에서 일을 시켰으나 오란은 들에
내보내지 않았다. 이제 그의 아내는 가난한 집의 아내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풍년이 들었으므로 왕룽 자신도 손수
일하지 않아도 될 처지였다. 추수한 곡식이 많아서 곡식을
간수할 장소도 부족했다. 그는 부득이 곳간을 한칸 더 늘렸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집안이 좁아 몸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또 그는 돼지 세 마리와 닭 몇 마리를 사서 흩어진
곡식을 먹게 했다.
오란은 집안에서 식구들의 새 옷도 짓고 새 신도 만들고
침대에 덮는 이불 위에 꽃수도 놓았다. 여지껏 집안에 없던 세
옷들과 침구들이 풍성해졌다. 그리고 오란은 이번에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아이를 낳았다. 산파를 부를 수 있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역시 혼자서 낳겠다고 고집했다.
이번 해산은 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저녁 때 왕룽이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늙은이가 문간에서 벙글벙글 웃음을
띠면서 서 있었다.
"이번 알엔 노른자가 두 개야."
방안에 들어선 왕룽은 아내 침대에 두 아이가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사내애와 계집애가 똑같이 생긴 쌍둥이였다. 벼톨처럼
꼭 같은 모양이었다. 왕룽은 얼마나 기쁜지 큰 소리로 한 바탕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무 농담이라도 하고 싶었다.
"옳지, 그래서 보석 두 개를 갖고 싶어했구먼."
그리고는 자기가 한 재치 있는 말이 유쾌해서 또 웃었다.
오란은 기뻐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음을 띠었다.
왕룽에겐 아무 근심도 없었다. 구태여 마음 쓰이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처음 난 계집애 걱정 뿐이었다. 그 계집애는 말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말을 할 줄도 몰랐으며 또 바보처럼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도 어린애처럼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
애를 낳던 해의 비린내 나는 흉년 때문에 몹시 굶주려 그런지
혹은 다른 까닭인지 모르나 왕룽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으나 다른 아이들처럼 '아빠', '엄마' 하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다만 방긋이 무의미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왕룽은 그
애를 바라보며 얼마나 한숨을 지었는지 모른다.
"조그만 것이...... 불쌍한 것......"
그리고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계집애를 그때 팔았더라면 산 사람은 죽여 버렸을 게다."
왕룽은 이 계집애를 팔려고 했던 일을 생각하고 더욱 딸을
측은해 했다. 때로는 들에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계집애는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왕룽이 자기의 얼굴을 바라보거나
무슨 말을 하면 방글방글 웃기만 했다.
왕룽과 그의 아버지가, 또 아버지의 아버지가 이렇게 대대로
살아온 이 지방은 5년에 한 번씩 흉년이 들었다. 하느님의
자비로 7년, 8년 때로는 10년에 한 번씩 흉년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런 일은 극히 드물었다. 흉년의 원인은 장마가 지거나
가물거나 혹은 북쪽에 있는 강이 터지거나 하는 것이 원인인데,
먼 산에 큰 비가 내리거나 겨울에 쌓였던 눈이 갑자기 녹아
버려서 몇 세기 전의 사람들이 고생하여 쌓은 제방을 무너뜨리고
전답을 쓸어 버리는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흉년을 당할 때마다 멀리 떠나갔거나 이듬해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룽은 흉년이 들어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지난 해에 쌓아둔 곡식으로 다음해까지 먹을 수
있도록 열심히 생활의 터전을 닦았다. 이러한 그의 결심을
하느님도 도왔는지 10년 동안이나 풍년이 계속되었다. 해마다
1년 동안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은 곡식을 거두었다. 머슴도
이제는 일곱 사람으로 불어났기 때문에 그의 집 뒤에 새로 집을
짓기로 했다. 뜰을 내다볼 수 있는 큰 방과 그 양쪽에 두 개의
작은 방을 달았다. 지붕은 기와를 이고 벽은 밭에서 떠온 흙을
이겨서 쌓아 올리고 겉에 회를 발라 깨끗하게 보였다. 그의
가족은 이 새집으로 옮기고 앞에 있는 헌집에는 칭 서방과
머슴들을 들게 했다.
이즈음에 와서 왕룽은 칭 서방을 여러 가지로 다루어 본 결과
그가 정직하고 충실하다는 것을 알고 그로 하여금 머슴에 대한
감독을 하게 하고 그 대우도 후하게 했다. 따라서 먹는 것
외에도 매달 은전을 두 닢씩 손에 쥐어 주었다. 왕룽은 항상
그에게 많이 먹기를 권했으나 칭 서방은 언제나 살이 오르지
않았다. 한결같이 말라 있어서 생기가 없어 보였으나 일에는
지극히 열심이었다. 새벽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그는 쉬지 않고
부지런히 묵묵히 일만 했다. 할 말이 있으면 나지막이 말할 뿐
묵묵히 일만 할 때가 그는 가장 행복하게 보였다. 그는 몇
시간이라도 가래를 움직이면서도 쉬지 않았다. 그리고 새벽과
해질녘엔 물이나 거름통을 져다가 밭에 뿌렸다. 칭 서방은 아무
말 없이 일하면서도 일꾼들에 대한 감독을 잘 한다는 것을
왕룽도 알고 있었다. 머슴들 중에 누가 매일 대추나무 밑에서
너무 낮잠만 잔다거나 여럿이 같이 먹는 밥상에서 두부를 보통
사람의 두 몫이나 먹는다거나, 타작하는 날 자기 여편네나
자식들을 오게 해서 도리깨질 하는 밑에 떨어진 곡식을 슬쩍
집어 가게 하는 것을 보면 잘 기억해 두었다. 그리고 추수가
끝나 왕룽과 일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잔치를 하는 자리에서
왕룽에게 귀띔해 주었다.
"저 사람과 저 사람은 내년에 쓰지 맙시다." 하고 칭 서방은
충고했다.
두 사람 사이의 정은 이제 형제 이상이었다. 보통 형제와 다른
것은 나이 적은 왕룽이 형이 되고, 또 칭 서방은 그가 남에게
고용되어 남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5년이 지난 무렵부터 왕룽은 직접 밭에 나가서 일할 틈이
없었다. 토지가 너무 많아져서 농사 관리라든가 생산물의
판매라든가 일꾼들을 지휘하는 일만 해도 눈코 뜰새 없이 바빴던
탓이다. 이즈음에 그가 가장 불편을 느끼는 것은 글을 모르는
일이었다. 종이에 붓과 먹으로 씌어진 글자를 읽을 수 없는 것이
매우 부끄러웠다. 특히 그가 곡물을 매매하는 상점에서 쌀이나
밀을 파는 계산을 할 때는 그렇지 않아도 코가 높은
장사치들에게 허리를 굽신굽신 하면서,
"미안하지만 이것 좀 읽어 주시오. 난 일자무식이라 글을
모릅니다."
하고 부탁해야 할 때는 그 어느 때보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계약서에 서명할 때 이름을 대신 써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그러했다. 하찮은 점원들까지도 그런 대필을 할 때면 그를
아주 경멸하듯이 마구 내갈기었다. 더구나 대필하는 사람이
짓궂게 농담을 걸면 더욱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왕룽, 룽자가 용 룽(龍)자인가, 귀머거리 룽(聾)자인가?"
그럴 때면 왕룽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렇게나
쓰시죠. 난 무식해서 제 이름조차 모릅니다."
어느 해 가을에 곡물 가게에 간 왕룽은 거기에서도 이와 같은
조롱을 받았다. 마침 한낮이라 거래도 끊어져 점원들은 시간을
보내기가 무료한 판이므로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모두들 웃어
대는 것이었다. 왕룽의 아들 같은 놈들까지도 웃어 대는 것을 본
그는 매우 불쾌해져서 집에 돌아왔다. 그는 밭을 지나면서
중얼거렸다.
"성안 놈들은 한치 땅도 못 가진 주제에 내가 종이에 쓴
그놈의 글자를 못 알아본다고 거위 같은 소리로 비웃었지......
어디 두고 보자." 그러나 분노가 가라앉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무튼 내가 못 읽고 못 쓰니 부끄러운 노릇이다. 이제부터
큰 놈은 농사일을 시키지 말고 성안 서당에 보내자. 그래서 내가
곡물 가게에 갈 때면 데리고 가서 내 대신 쓰게 하고 읽게 하자.
그러면 나 같은 부자를 보고 비웃지는 않을 게다."
아주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그는 그 날 곧 큰아들을 불렀다.
큰아들은 올해에 열두 살인데도 키가 퍽 컸다. 광대뼈도 크고
손발이 큰 것은 자기 어머니를 닮았지만 눈은 아버지를 닮아서
날카로워 보였다.
"넌 오늘부터 들에 가지 말고 서당에 가서 글을 배우도록
해라. 글을 배워야 계약서도 쓰고 내 이름도 대신 쓰게 되니까."
소년을 햇볕에 그을은 얼굴을 붉히면서 눈을 반짝였다.
"아버지, 저도 2년 전부터 서당에 가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어요."
그러자 이 말을 엿들은 작은 아들이 뛰어들어와 자기도 서당에
보내달라고 울면서 떼를 썼다. 작은 놈은 말을 배우고부터 아주
고집에 세고 무엇이든 형과 동등하게 대우해 주지 않으면 절대로
터뜨린 울음을 그치는 법이 없었다. 이 날도 아버지에게 억지를
부리었다.
"그러면 나도 들에 안 나갈테야. 형은 서당에 가만 앉아서
글을 배우는데 나만 머슴처럼 일하란 말이야? 난 아들이 아닌가
뭐."
왕룽은 이 둘째놈의 고집엔 언제나 백기를 들곤 했다. 그래서
얼른 승낙해 주고 말았다.
"응, 그래, 그래. 같이 가거라. 어느 때 어떤 놈이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그땐 어떤 놈이든 쓰일 테니......"
왕룽은 아내를 성 안에 보내 두 아들의 두루마기 감을 떠 오게
하는 한편 자기는 문방구점에 가서 종이와 붓, 먹, 벼루 등을
마련했다. 사실 그는 이런 것들을 갖추어 주고 또 서당에 찾아가
입학에 대한 절차까지도 끝냈다. 서당은 서문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선생은 옛날에 과거에서 떨어진 어떤 늙은
노인이었다. 그 훈장은 그의 집 가운데 방과 책상 몇 개와
걸상을 갖다 놓고 명절 때마다 약간의 곡식을 받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들이 공부에 게으름을 피우거나 배운 글을
잘못 읽을 때면 언제나 커다란 접는 부채로 사정 없이 때리기
때문에 아이들은 아침부터 늦도록 공자왈 맹자왈 하고 정신 없이
읽었다.
그러나 따뜻한 봄날이나 여름날에는 아이들도 좀 쉴 수
있었다. 점심 때쯤 되면 나이 많은 훈장은 꼬박꼬박 졸고 마침내
그 조그마한 방이 떠나가도록 코를 고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때를 만나 것처럼 소곤거리고 가만가만 장난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떤 놈은 제멋대로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그려서 서로 보여주곤 하였다. 어떤 놈은 늙은 훈장이 코를
골면서 아무렇게나 벌리고 있는 입 속으로 파리가 날아드느니 안
드느니 하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늙은 훈장은 이렇게
졸다가도 갑자기 눈을 뜨는 버릇이 있었다. 마치 졸지 않았다는
듯 슬그머니 눈을 뜨고 아이들이 눈치 채기 전에 곁에 두었던
부채로 때리는 소리와 맞은 놈의 우는 소리가 이웃까지 들렸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은 이렇게 칭찬했다.
"거참, 열심히 가르치는 훈장이야."
왕룽이 그의 두 아들을 이 훈장 밑으로 보낸 것도 그런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처음 서당에 데리고 가는 날 왕룽은 아이들보다
앞서서 걸었다. 부자(父子)가 나란히 걷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그는 푸른 보자기에 달걀을 싸 가지고
가서 훈장에게 내놓았다. 왕룽은 그 훈장의 큰 놋테 안경과 품
넓은 검은 두루마기와 겨울에도 커다란 부채를 들고 있는 위엄에
기가 질려서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넙죽 절을 했다.
"훈장님, 여기 제 자식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제 자식놈은
머리가 둔해서 먹물을 넣자면 자주 때려야 하실 겁니다.
아무쪼록 많이 때려서 잘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두 아이는 한쪽에 서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이 신입생들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열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두 아들을 서당에 남겨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왕룽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갔다. 그 서당에 있는 여러 아이들 중에 그의
아들들처럼 키가 크고 건장한 얼굴을 한 아이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성문을 지나올 때 마을 사람을 만났다. 어디 갔다
오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자식놈들을 서당에 보내고 오는 길이오." 하고 자랑하였다.
마을 사람이 깜짝 놀라는 눈치를 보이자 왕룽은 더욱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덧붙여 말했다.
"이젠 자식놈에게 농사일을 시키지 않아도 되니까 글이나 많이
가르쳐 볼 작정이오."
그러나 그 마을 사람과 지나친 뒤에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큰놈이 공부를 잘 해서 높은 벼슬을 할 지도 모르지."
오늘날까지 두 아이는 다만 '큰애', '작은애' 라고만 불려왔다.
훈장은 그들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훈장은 아이들의
아버지의 직업을 물은 뒤에 형을 눙언(農恩), 작은 놈은
눙운(農溫)이라고 했다. 돌림자인 눙(農)자는 땅을 갈아서
부자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18
이렇게 해서 왕룽이 막대한 재산을 쌓은 지 7년이 되던 해에
북방에 강물이 넘쳐 흘렀다. 그것은 상류 지방인 서북쪽에
폭설과 장마가 심하게 내렸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제방이
무너지고 강물은 둑을 넘어 그 근방 일대의 들판을 삽시간에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왕룽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농토의 5분의 2이상이 그 물에 잠긴대도 그에겐 무서울 것이
없었다.
늦봄부터 초여름에 이르기까지 계속 불기만 한 물은 마침내
마을 전체를 바다처럼 만들어 버렸다. 하늘의 달과 흰 구름들이
오락가락하는 모습과 반쯤 물속에 잠긴 버드나무와 대숲의
그림자가 거울같은 물에 비친 모양은 그림처럼 아름답고도
처참한 장면이었다. 여기저기 피난간 빈 집들의 흙벽이 보였다.
그런 집들은 며칠이 못가서 무너져 본래의 평지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왕룽의 집처럼 언덕 위에 위치하지 않은 집들은
어느 집이나 다 같은 처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런 바다
같은 물속에 그런 언덕들이 섬처럼 솟아 있었다. 사람들은 작은
배나 뗏목을 타고 성안을 내왕했다. 그리고 다시 예전과 같이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러나 왕룽은 걱정이 없었다. 곡물 시장에 돈을 빌려 준 것도
있거니와 곳간에는 지난 2년 동안 추수한 곡식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집도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아직
물에 휩쓸려 갈 염려는 없었다.
대부분의 농토가 물에 잠겨 경작할 수 없게 되고 보니 왕룽은
지금껏 없던 한가한 날을 갖게 되었다. 몸도 한가하거니와
양식도 충분히 있는 까닭에 그는 자고 싶은 대로 자고 놀고 싶은
대로 놀고도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곤란할
지경이었다. 여러 머슴들도 1년 계약인지라 물이 빠질 때까지
놀리고 먹이기는 양식이 아까왔으므로 그는 머슴들에게 헌
지붕을 잇게 하기도 하고 새 집의 기와들을 고치게 했다. 그리고
쇠스랑, 괭이, 쟁기 같은 농구도 손질하게 했다. 가축에게
모이를 주게 하고 오리를 사다가 물에 놓아서 기르고 또 삼으로
노끈도 꼬게 했다. 원래 이런 일들은 그가 자기 땅에 혼자
경작할 때 같으면 전부 손수 했던 일들이었지만 이젠 남아도는
일꾼이 있는지라 그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게 되었다. 그는 할
일이 없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서 물에 잠긴 논밭을 바라보고만
있기에는 너무나 답답했다. 그리고 배가 터지도록 실컷 먹고
나면 그 이상 더 먹을 수도 없을 만큼 뱃속은 포화 상태였다. 또
잠을 자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밀려오는
무기력감을 어찌할 수 없어서 집안을 빙빙 돌아다녔지만 혈기
왕성한 그에겐 웅성거리는 집안도 너무나 조용하기만 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젠 너무 늙었으므로 쇠약할 대로 쇠약했다. 귀가
거의 들리지 않았고 눈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춥지
않은가, 배 고프지 않은가, 차를 드릴까 하는 따위를 묻는
이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 아들이 그렇게
부자가 된 것을 알아 주지 않는 것도 왕룽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 노인이 더운 물을 달라고 할 때 찻물을 드리면
옛날처럼 "웬 값비싼 찻물을 주느냐? 차를 먹는다는 건 돈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하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말을 해도 노인은 곧 잊어버렸다. 아무리
알아듣게 말해도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언제나 지난날의 꿈
속에만 잠겨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주위의 어떤 일이 일어나도
통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말을 못하는 맏딸은 할아버지 곁에 앉아서 헝겊 조각을
폈다 접었다 하며 혼자서 웃기만 했다. 이렇게 맏딸과 아버지는
기운이 넘쳐서 못 견디는 왕룽에 대해서도 변함이 없는
것이었다. 왕룽이 아버지에게 찻물을 드리고 벙어리 딸의 볼을
쓰다듬어 주면 불쌍한 계집아이는 의미 없는 웃음을 짓거나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돌아갔다. 그는 항상 맏딸을 바라볼 때마다
슬픈 생각이 가슴에 치밀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지만 그 다음은 곧 작은 아이를 찾곤 하였다. 오란이 낳은
쌍둥이는 벌써 온 집안을 떠들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어른이란
언제까지나 아이들을 상대로 해서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한동안 웃고 지껄이고 하다가는 곧 저희끼리 노는 것이
좋아서 달아나 버리고 왕룽만 외롭게 남아 버리곤 했다. 이렇게
되면 왕룽은 할 일 없이 아내에게로 눈을 돌리는 것이지만
오랫동안 같이 살아 온 아내로부터 아주 새로운 맛을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왕룽은 그의 아내를 이렇게 심각하게 바라보는 것이 처음인 것
같았다. 누가 보아도 우둔하고 평범한 여자로서 누가 자기를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는 여자였다. 그저 묵묵히 자기에게
부여된 인생 항로를 걸어가는 여인이라고 왕룽은 새삼 느꼈다.
머리카락은 거칠고도 퇴색해 버린 갈색으로 윤기 없고, 또
기름을 전혀 바르지 않아 푸석푸석한 것이 볏짚 같았다. 얼굴은
넓적하고 살결은 거칠고 눈이나 코조차 조금도 아름답거나 밝은
구석이라곤 없었다. 거기에다 눈썹은 희미하고 입이 크고 손발도
모양 없이 크기만 하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아내를
바라본 그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허 참, 임자 모양은 왜 그러우? 가난뱅이 농사꾼의 여편네
같지 어디 부잣집 아낙네라고 하겠소."
아내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입 밖에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란은 천천히 영문 모를 시선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긴 바늘로 신을 꿰매던 손을 멈추고 그 큰 입을 열어 검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는 왕룽이 자기를 하나의 여자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는지 광대뼈가 불쑥 나온 얼굴을
붉히면서 중얼거렸다.
"쌍둥이를 낳은 뒤론 항상 몸이 불편해요. 아랫배가 터질 듯이
아파요."
단순한 오란은 7년 동안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을 남편이 탓하는
줄로만 여긴 모양이다. 왕룽은 오란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알자 자기도 모르게 거친 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라, 머리에 기름도 좀 바르고
의복도 좀 깨끗하게 입으란 말이오. 임자가 지금 꿰매고 있는
신도 어디 부잣집 여편네가 신을 신인가?"
그러나 오란은 아무 대꾸도 않고 애원하듯이 남편을
쳐다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두 발을 포개어 기대어 앉은 걸상
밑으로 넣었다. 왕룽은 오랫동안 이 여인이 충실한 개처럼 그를
따른 것을 생각하고, 또 그가 가난할 때는 언제나 들 일을 같이
해 주고 더구나 아이를 낳은 후에도 곧 들에 나와서 추수하는
것을 거들어 주던 일을 생각하자 더 이상 나무랄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답답한 마음을 이길 수 없어서 본심은
아니면서도 계속해서 무자비하게 내뱉었다.
"난 내가 벌어서 재산도 이만큼 모았으니 내 여편네를 농군의
여편네 꼴로 만들고 싶지는 않아. 대체 그 발 모양이......"
왕룽은 거기서 말을 끊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보기 싫었지만,
그중에서도 그 무명신을 신은 커다란 발 모양은 더욱 보기
싫었다. 오란은 남편이 그 발을 노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걸상
밑으로 더 깊이 발을 숨겼다.
이윽고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어려서 팔려 갔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발을 묶어 주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은, 작은 년은 꼭 묶어
주겠어요."
왕룽은 아내에게 성낸 것을 속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면서도
아내가 맞서 성을 내지 않고 오히려 겁만 내는 것이 도리어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는 새 두루마기를 꺼내 입고 나가면서
오란에게 한번 더 화를 냈다.
"에이, 속상해. 찻집에나 가서 무슨 재미있는 얘기나
들어야겠다. 집안에 사람이라곤 저런 바보와 늙은이와 애들
뿐이니 어디 재미나는 구석이 있어야 살지."
성안을 향해서 걷는 왕룽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의 넓은
논밭은 아내가 남방 부잣집에 들어가서 그 보석을 가져오지
않았던들, 또 그 보석을 그가 요구하는 대로 내어 주지 않았던들
한평생을 두고 노력해도 도저히 그렇게 많은 토지를 살 수는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났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는 더욱 스스로에게 불쾌해져서 자기 자신에게
반항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뭐, 그까짓 거, 그 계집은 제가 한 일의 값어치도 모르는
천치인데, 그저 아이들이 붉은 과자나 푸른 과자를 보고 손을
내미는 것처럼 그 보석도 그냥 신기하니까 집은 게지. 내가
내놓으라고 안 했더라면 평생 젖통 사이에 감추어 두었을 거야."
이어서 그는 아직까지도 아내가 그 보석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예전 같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고 또 흥미 있는 일이기도 했으나 오늘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어디까지나 아내를 업신여기는 마음만이 앞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는 아이를 몇이나 낳아 젖통이
쭈글쭈글하고 축 늘어져 있는 것이 보기 흉했으며 그 따위
가슴에 보석을 간직했다는 것을 어리석기도 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룽이 옛날처럼 가난한 농사꾼이거나 이번 홍수로
그의 논밭이 물에 잠기지 않았더라면 이런 쓸데 없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겐 돈이 얼마든지
남아돌고 있는 것이다. 새로 지은 벽 속에 감추어 두었고, 방석
속에도 넣어 두었고 허리춤 전대에도 가득 들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돈에는 아무 부자유도 없는 것이다. 이전 같으면 돈을
쓴다는 것이 살을 베어 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지금은
손이 허리춤에 닿을 때마다 곧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그는 돈을 쓰고 싶어서 몸부림이 날 지경이다. 돈이야
얼마가 들든지 간에 혈기 왕성할 동안에 인생의 쾌락을 맛보고
싶은 생각이 가슴 속에서 솟구쳤다.
지금의 그에겐 아무 것도 전처럼 탐탁해 보이는 것이 없었다.
이전에는 보잘 것 없는 시골뜨기라는 생각으로 조심조심
들어가던 찻집도 지금은 그곳이 우중충하고 천박해 보였다. 그
시절엔 그를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았고 심부름하는 아이까지도
고분고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서로들 팔꿈치로 쿡쿡 찌르면서 수군대는 것이었다.
"저 사람이 왕 부자야. 저이가 지난 번 흉년 황부자 영감이
죽던 해 겨울에 그 집 땅을 모조리 산 사람이야. 지금은 아주 큰
부자야."
왕룽은 이런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자리에 앉으면서도 속으로는
여간 만족하질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이건 어디 꼴이 됐나. 이런 집에 와 차를 마시다니. 더구나
이 집 주인이란 작자는 생쥐처럼 곁눈질을 하는 꼴에 내 집 머슴
수입만도 못한 장사치인 이 집에 내가 오다니. 도저히 내 격에
맞질 않아. 남들이 부자라고 하고 자식들을 서당에까지 보내는
내가......"
왕룽은 갑자기 일어서서 찻값을 탁자 위에 던지고 누가 뭐라고
할 겨를도 없이 가게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좋을지 그도 몰랐다. 그저 방향도 없이 거리를 걸었다. 그는
이야기꾼이 지껄이는 움막 앞에 발을 멈추고 여러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걸상 끝에 걸터 앉았다. 이야기꾼은 굉장히
용감하다는 둥 무서운 지략을 가졌다는 둥 많은 영웅들이
활약하는 삼국지 이야기를 했지만 마음이 들떠 있는 왕룽은 다른
사람처럼 그 이야기에 정신이 팔리지 않았다. 더구나 이야기꾼이
두들기는 징소리는 너무 시끄러웠으므로 듣기 싫어서 곧 바로
일어섰다.
이즈음에 새로 생긴 큰 찻집이 있었다. 멀리 남방에서 온
경험이 많은 사람이 경영한다는 곳이었다. 왕룽은 그 앞을 지날
때까지는 이 집안에서 얼마나 많은 돈이 도박으로, 유흥으로,
계집으로 해서 소비되는가 생각만 해도 무서웠으나 오늘은
아내에게 너무했다는 가책과 무료한 생각으로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산란해서 그 집으로 발을 옮겼다. 무엇이든
신기로운 것을 보거나 듣거나 해야만 속이 시원할 것만 같았다.
거리를 향해서 황홀하게 꾸며진 다실에는 탁자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제법 뽐내는 태도를 지녔으나 천성이 거만치
못한데다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은전 한두 닢밖에 못 가졌던
가난뱅이였고 또 인력거를 끌던 인력거꾼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그만 기가 죽었다. 그래서 그는 그런 티를 감추기 위해서 더욱
배를 내밀며 찻집으로 들어갔다.
평생 처음으로 이런 훌륭한 찻집에 들어간 그는 묵묵히 차를
마시면서 신기한 듯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크나큰 홀의 천장은
금빛이 찬란하고 벽에는 미인을 그린 비단 족자들이 걸려
있었다. 왕룽은 그 그림 속에 있는 여인처럼 아름다운 미인은
난생 처음이었다. 도저히 이 세상 사람은 아닐 것만 같았다.
왕룽은 첫날은 조용히 차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부터 왕룽은 농토가 홍수에 잠겨 있는 동안 매일같이
이 찻집에 가서 혼자 차를 마시면서 미인 그림들을
들여다보았다. 농사일이나 집안일에는 더 이상 그의 손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찻집에 이렇게 앉아 있는 시간은 날로
길어만 갔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앉아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의 허리춤에는 얼마든지
돈이 들어 있었지만 아직도 그의 옷 차림새는 시골뜨기였다.
언제나 유행을 좇는 찻집의 손님 중에 무명옷을 입은 사람은
오직 왕룽 하나 뿐이었다. 또 변발을 등에 늘이고 있는 사람도
성안 사람들 중엔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찻집의 뒤편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노라니 한편 구석에 있는 이층으로
통하는 층층대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 성안에서 이층집이라곤 이 찻집 뿐이었다. 또 있다면 서편
성문 밖에 서탑(西塔)이라는 오층탑이 있을 따름이다. 탑은
올라갈수록 좁아지지만 이 집 이층은 아래층과 똑같다. 밤이
되면 그 높은 창에서 여자의 노랫소리와 명랑한 웃음 소리라든가
소녀들의 섬세한 손으로 타는 비파 소리가 간드러지게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밤이 으슥해질수록 소리는 더욱 요란스러웠다.
차를 마시며 마작패를 던지는 소리와 갖가지의 유흥하는 소리가
간단 없이 이층 창 너머로 흘러나왔다.
그래서 왕룽은 이층에서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왕룽은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이런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깜짝 놀라며
쳐다보았다. 쳐다보니 아름다운 여인의 웃는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뚜챈이었다. 그가 황부잣집 토지를
살 때 보석을 건네주고 토지 매도 증서에 서명하는 영감님의
부들부들 떠는 손을 잡고 도장을 찍게 하던 뚜챈이었다. 그녀는
왕룽을 보자 미묘한 웃음을 띠었다. 그 웃음 소리는 날카로운
속삭임이었다.
"아니, 왕서방 아니오?" 하고 뚜챈은 비웃는 뜻으로 서방이란
말을 길게 뽑았다. "아니, 여기서 뵈올 줄은 정말 몰랐군요."
이렇게 되고 보니 왕룽은 현재의 자기는 한갖 촌뜨기가 아니라는
것을 이 여인에게 보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일부러
껄껄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왜 내 돈은 돈이 아니랍니까? 나도 이젠 남부럽지 않을 만큼
부자요."
뚜챈의 표정은 금방 달라졌다. 그녀의 눈이 가느다랗게
뱀눈처럼 반짝거렸다. 목소리가 병 속에서 기름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부드러워졌다.
"부자 양반들은 다들 여기가 좋다고들 해요. 높은 양반들이랑
언제나 와서 놀지요. 술맛도 성안에서는 여기가 제일 유명해요.
아직 맛보시지 않으셨죠?"
"난 아직 차밖엔 맛보지 않았소." 왕룽은 약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술에도 마작에도 난 손대지 않았소."
"차만? 좋은 술이 있는데요. 호골주(虎骨酒)니, 소주(燒酒)니,
향미주(香味酒)니 얼마든지 있는데 차만 마시다니."
뚜챈은 아양을 부리다가 왕룽의 무안스런 눈치를 알아채자 곧
어색하게 말끝을 달리했다.
"그러시다면 다른 것은 아무 구경도 안 하셨군요? 예쁜
아가씨들의 얼굴도......"
왕룽은 더욱 고개를 떨구고 얼굴을 붉혔다. 그는 여러 사람이
자기를 조롱하면서 이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단단히 용기를 내어 고개를 숙인 채 옆을 살펴보니
아무도 자기를 거들떠 보는 사람이 없었다. 마작은 던지는
소리만 시끄럽게 들려 왔다. 그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 아니. 난 아무 것도 안 보았소. 차만 마시고......"
그러자 뚜챈은 다시 한바탕 큰 소리로 웃더니 벽에 걸린
미인의 그림을 가리켰다.
"저게 그 여자들의 그림이에요. 어느 것이나 마음대로
고르세요. 마음에 드시는 그림을요. 제게 은전을 주시면 당장
데려다 드리죠."
"정말." 왕룽은 깜짝 놀랐다.
"난 저 그림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줄 알았는데. 옛날 얘기의
곤륜산(崑崙山) 선녀의 그림인 줄만 알았지......"
"그럼요. 선녀구말구요. 그렇지만 돈만 조금 주면 당신 것이
될 수 있는 선녀들이에요."
뚜챈은 재미있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나면서 심부름꾼에게 눈짓을 했다. "저 사람은 촌에서 온
호박이야."
뚜챈은 한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아무 눈치도 모르는 왕룽은 새로운 흥미를 가지고 그림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상상해 보는 것이었다. 저 층층대로
올라가면 그의 머리 위에 있는 여러 개 방에 이런 천사처럼
아름다운 미인이 실제 살아 있고 그 방에 들어가면 아무 남자나
마음대로 노는 모양이었다. 만약 자기도 충실한 아내를 가진
순진하고 건실한 남자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처럼 이층으로
올라가 어떤 그림의 여자를 맞이할 것이다. 그는 여자 그림을
실물처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느 것이나 모두가
아름답기만 하던 그림이 막상 자기가 고르려고 하니 역시 차이가
있었다. 그는 20장이 넘는 그림 중에서 먼저 셋을 가리고 다시
그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조그마하고 예쁜 여자였다. 대처럼
허리가 날씬하고 가냘픈 여자였다. 새끼 고양이처럼 깜찍한
얼굴이었다. 꽃봉오리가 달린 연꽃 줄기를 들고 있는 손은 쭉
뻗은 고사리처럼 나긋나긋하였다.
이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는 혈관에 술기운이
퍼지는 것처럼 온몸이 달아올랐다.
"꼭 돌배나무 꽃처럼 예쁘구나." 그는 문득 부지중에 소리내어
말했다. 그러고는 자기의 흥분된 목소리에 쑥스러운 느낌이 들어
황급히 일어나 찻값을 탁자 위에 꺼내 놓고 밖으로 나섰다. 밖은
이미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온 들판에 가득한 물 위에 달빛이 은빛 안개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몸 속에는 뜨거운 피가 남모르게 약동하였다.
카테고리 없음